메디컬 드라마와 법조인 드라마는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르물 양대 산맥이다. 그런데 메디컬 드라마는 최근 몇 년간 인기가 다소 주춤한 상황이다. 2016년 방영된 SBS <낭만닥터 김사부>를 마지막으로, 시청률과 작품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화제작은 찾아보기 어렵다. 침체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과거의 로맨스나 판타지로 회귀한 것이 결정적 원인이라 본다. 실제로 근래 방영된 메디컬 드라마는 독특한 소재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 이야기로 대중과의 공감대 형성에 실패했다. MBC가 메디컬 드라마 명가의 부활을 선언하며 야심차게 내놓은 <병원선>(2017)은 배라는 색다른 의료 공간을 찾았으나 결국 로맨스로 표류했고, 역시 교도소라는 특이한 공간을 내세우고 장기밀매를 소재로 다룬 tvN <크로스>(2017)는 막장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자극적인 이야기로 빠지고 말았다.

 

JTBC 드라마 <라이프>의 한 장면.

 

이런 가운데 지난달부터 방영을 시작한 JTBC 월화드라마 <라이프>가 메디컬 드라마 장르의 혁신작으로 떠오르고 있다. <라이프>는 거대재벌이 인수한 국내 톱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신임 총괄사장 구승효(조승우)와 그에 반발하는 의사들의 갈등을 그린다. 얼핏 보면 병원 내 권력 다툼이라는, 기존 메디컬 드라마의 진부한 공식을 따라가는 것 같지만 속내는 전혀 다르다. 이 드라마의 진정한 정체성은 2010년대 초반 MBC <골든 타임>(2012)이 구축한 메디컬 드라마의 새 트렌드 안에 있다. 응급의학과를 중심으로 한 <골든 타임>은 국가 의료복지시스템의 근본적 모순을 겨냥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 드라마 이후 메디컬 드라마는 내부 갈등 위주의 이야기를 넘어 병원 바깥의 의료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극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다. 소아외과를 배경으로 저소득층 아동에 대한 의료서비스의 열악한 실태와 영리병원 문제를 다룬 KBS <굿닥터>(2013), ‘대한민국 최상위 0.1%의 고객’을 대상으로 한 VIP 병동을 통해 계급 갈등을 담아낸 SBS <용팔이>(2015), 메르스 사태와 백남기 농민 사인 조작 사건 등 더 적극적인 동시대 의료 이슈를 반영한 <낭만닥터 김사부> 등이 이 같은 트렌드를 이어갔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후 등장한 메디컬 드라마들이 하나같이 과거로 퇴행하며 이러한 트렌드는 어느새 사라지고 인기도 시들해졌다.

 

<라이프>가 큰 호응을 얻는 것은 작품 자체의 높은 완성도에 더해 오랜만에 재등장한 사회파 메디컬 드라마라는 공감대 때문이다. 내용도 한층 급진적이다. <골든 타임>이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의료민영화에 대한 사회적 불안과 문제의식을 에피소드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면, <라이프>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에서 사법 비리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한 ‘의료농단’을 직접적인 대사를 통해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이 시기에 강행된 진주의료원 폐원, 병원 영리자회사 허용, 재벌의 병원 부대사업 독점, 국립대병원 경영평가 등 노골적인 공공의료 파괴행위와 그로 인한 폐해가 드라마 곳곳에 언급되고 있다. 메디컬 드라마로서는 처음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등장하는 것도 단순히 이색적 소재 차원이 아니라 의료농단의 범위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신임 사장 구승효가 화정그룹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흘러가듯 언급한 “개인 건강정보 영리목적 사용불가 조항 2016년 8월 삭제”라는 대사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개인 건강정보 대량 판매 사건을 겨냥하고 있다.

 

드라마의 비판은 더 나아가 의료계 내부의 오랜 적폐로도 향한다. 의료농단의 책임이 당시 정부뿐 아니라 의료계의 도덕 불감증에도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상국대병원 의료진은 총괄사장 구승효의 시장주의 논리에 저항하고 환자만을 생각하는 정의로운 집단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이익 논리에 물든 이기적인 집단이거나 그들만의 폐쇄적 문화에 갇혀 있는 ‘고인 물’로 그려진다. 투약사고를 둘러싼 암센터장 이상엽(엄효섭)과 구승효의 논쟁 장면이 대표적 사례다. 이상엽은 경영진의 인건비 삭감 때문에 주 100시간 넘게 근무하는 레지던트들의 과잉 노동 실태를 비판하고 이 사태가 그로 인한 실수였음을 주장한다. 이에 맞서 구승효는 그럼 ‘왜 센터장급 의사들이 진작 나서서 전공의법을 지키도록 일을 나누지 않았느냐’고 반박하고, 이 문제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범죄의 은폐와 방조에 있음을 정확히 지적한다. 구승효의 구조조정 강행에 맞서 의료진이 파업을 선언하는 장면도 연출된다. 부원장 태상(문성근)이 의료진을 대표해 이것이 ‘환자의 생명과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임을 강조할 때,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늘 타 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흉부외과장 주경문(유재명)의 피로한 얼굴이 화면을 채운다.

 

지금까지의 메디컬 드라마는 사회고발극의 성격이 아무리 강해도 어디까지나 시청자들이 감정을 이입할 정의로운 ‘굿닥터’가 존재했다. 그러나 <라이프>는 어쩌면 이 ‘굿닥터’였을, 존경받는 원장의 죽음과 그의 비리 암시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드라마의 화자인 응급의료센터 전문의 예진우(이동욱)가 원장을 떠올리며 하는 고민이야말로 이 작품이 하고픈 말이 아닐까. “제가 아는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어떤 분이셨습니까” 하고 따지는 예진우처럼 <라이프>는 묻는다. 대한민국 의료계는 대체 어떤 곳이냐고,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김선영 TV평론가>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