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복지란 말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다. 법률 이름에도 쓴다. 특히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개에 관한 논의가 많다. 사람 눈에 잘 띄고, 오랜 애호 역사가 있는 까닭이다. 심지어 기르던 개를 잡던 시절에도 차마 제 손을 쓸 수 없어서 먼 곳의 개와 바꾸기도 했다. 개 식용 논란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게 하나 있다. 대부분의 식용 개는 음식이 될 목적으로 처음부터 사육된다는 점이다. 하나 축산 관련법에는 빠져 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와중에 이들 사육견의 고통은 말도 못한다. 개고기 식용을 금지하느냐 아니냐를 떠나 대부분 최소한의 사육 환경을 지키지 않는 게 보통이다. ‘지킨다’는 말에도 어폐가 있다. 이것은 법률이 아니라, 그저 인간의 양심의 한계를 의미한다. 생명을 가진 것들에 대한 인간의 연민 같은 걸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육장마다 제각각이고, 개들에 대한 연민도 결국 돈으로 바꿀 인간의 욕망 앞에서, 또 효율 앞에서 무너지게 마련이다. 개는 법의 사각지대에서 돼지와 닭보다 훨씬 나쁜 환경에서 지낸다. 개고기 식용 금지냐 아니냐 이전의 현실적 문제다. 어쨌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많이 먹는 ‘공식’ 육종은 어떤가. 며칠 전 뉴스에서 베트남의 돼지 도살 문제가 떠올랐다. 마을의 오랜 축제에서 돼지를 노상 도살하는 문제가 언급된 것이다. 인권, 환경단체에서는 이것이 축제에 참가한 아이들의 정신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우려를 표했고, 마을 어른들은 전통의 문제이니 참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 것이다. 세상의 많은 일은 늘 다른 시각의 충돌을 일으킨다. 제주도에서도 전통적으로 돝추렴이 있었다.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돈을 모아 돼지를 잡아 나눠가지는 행사를 말한다. 이 역시 동물복지 논란에 의해 중지되었다. 이것은 법률에 의해서도 불법이니 큰 반발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저변에는 도대체 해준 것도 없는 ‘뭍’의 권력이 왜 제주사람이 전통적으로 돼지 잡는 것에까지 관여하느냐는 불만이 있었다.

 

돼지와 닭, 소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지 일일이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농장’의 모습은 사실상 찾아보기 힘들다고 보면 된다. 그곳에는 상상할 수 없는 괴로운 노동이 존재한다. 사료비가 곧 이익이 되기 때문에 생기는 악성 효율, 그 효율에 맞추기 위한 학대, 다시 거기서 발생하는 인권 문제도 있다. 동물을 다루는 데 웬 인권이냐고. 노동 환경 자체가 동물을 학대하기 쉬운 조건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은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건 돼지 잡는 ‘축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를 시작하자 해도, 당장 입에 넣을 치킨과 삼겹살 값도 없는데 동물복지 운운이 무슨 사치냐는 말도 나온다. 실은, 이런 모든 문제는 자본에서 비롯한다. 돼지와 닭까지도 세계화와 자본의 ‘수직계열화’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치킨집 사장의 눈물, 배달앱의 개입, 실업과 청년문제까지 단 하나도 허투루 볼 수 없는 우리 사회 문제가 나선형으로 꼬여 있다. 장차 이 일을 어찌 할 것인지 막막하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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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