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성가족부 장관에 내정된 진선미 의원은 “‘가부장제 이후’의 새로운 문화와 제도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올해 초부터 우리 사회를 뒤흔든 미투 운동이 가부장적 지배구조의 오랜 적폐를 향해 준엄한 심판을 촉구한 데 이어, 지금 이 시대의 시급한 화두가 성평등에 있음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발언이다.

 

이 같은 시대정신은 요즘 드라마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동안 K-드라마는 열성적인 한류 팬들마저도 성역할 고정관념 강화, 데이트폭력 미화 등을 비판할 정도로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 문화를 공고히 하는 주범으로 지적당해 왔다. 그런데 요 몇 년 사이에 이러한 관습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해 여가부의 제작 지원을 받아 여성 아동 성범죄를 집중 조명한 KBS <마녀의 법정>을 비롯해, 직장 내 미투 운동을 그려낸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법조계의 남성중심적 질서를 비판한 JTBC <미스 함무라비> 등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성차별 문화와 그 부작용을 정면으로 폭로하는 드라마들이 연이어 나오는 중이다. 비록 문제제기가 모두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극적 갈등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문제로 가시화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SBS 드라마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의 한 장면.

 

현재 방영 중인 SBS 토요드라마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이하 <그녀로>)도 이러한 경향 안에 위치한 작품이다. 기억상실, 복수, 불륜, 재벌, 고부갈등 등 통속극의 클리셰로 뒤범벅된 스토리를 따라가면서도, 가정폭력을 비롯한 가부장제의 심각한 폐해를 정면으로 다뤄 눈길을 끈다. 드라마의 시작은 누군가로부터 살해 위협에 시달리던 여성이 생존을 위해 성형수술을 감행한 뒤 마취에서 깨어나는 장면이다. 눈을 뜬 그녀는 수술의 후유증으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린다. 스스로 탐정이 되어 미스터리를 풀어가던 여자는 돌아온 기억과 함께 충격적인 진실을 깨닫게 된다.

 

성형수술 뒤에 딴 사람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복수한다는 설정은 외국 드라마 <에덴으로 돌아오다>와의 유사성이 지적되기도 하나, <그녀로>가 직접적인 영향을 밝힌 작품은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1991년 개봉 영화 <적과의 동침>과 고전 동화 <푸른 수염>이다. 공통점은 가부장제의 금기와 폭력 그리고 여성들의 탈출에 있다. <그녀로>는 여기에 기억을 잃은 여성의 정체성 찾기 플롯으로 흥미를 더했다. 이 기억상실 모티브는 통속극의 흔한 클리셰가 아니라 가부장제 안 여성들의 실존을 은유한다. 기억을 잃고 가사도우미가 된 지은한(남상미)은 그저 아내, 며느리, 엄마의 역할에만 충실하던 과거의 자아상실 상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녀가 기억상실 상태에서도 본능적으로 시어머니와 남편의 까다로운 취향을 읊어대는 장면은 가부장제의 억압이 얼마나 뿌리 깊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단적인 사례다.

 

지은한이 기억을 찾는 것 역시 억압받는 여성이 자신의 현실을 인식하고 각성하는 과정처럼 전개된다. 그녀는 관찰자로서 집안의 이상한 규칙과 금기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다. 재벌가의 며느리이자 유명 앵커의 아내로서 순종할 것을 강조하는 강찬기(조현재)에게 “기억나지도 않는 나를 연기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반박하는 장면이나, 집안을 “새장”이라 표현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특히 집안 곳곳에 감시용 폐쇄회로 카메라를 설치한 강찬기의 모니터실을 발견하고 카메라에 비친 남편을 노려보는 장면은 시선의 역전을 통해 각성의 극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진실을 깨달은 지은한의 복수가 기존의 여성 중심 복수극에서 한 발 더 나간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동안의 여성 중심 복수극 장르는 버림받고 추방당한 아내들의 서사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가장 성공한 여성 복수 드라마로 꼽히는 김수현 작가의 <청춘의 덫>이나 김순옥 작가의 <아내의 유혹>만 봐도 가족제도 안에 안착하지 못하고 배신당한 채 밀려난 여성들의 이야기다. 이러한 복수극은 남편과 시부모의 학대로 억울하게 죽은 아내들의 원혼이 한풀이하는 여귀 복수 서사의 오랜 전통을 따른다. 그 안에 녹아든 것은 가부장제로 인한 기혼 여성들의 억압된 욕망과 분노다.

 

그런데 근래에는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더 적극적으로 균열을 내고 응징하는 이야기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추세다. <아내의 자격> <굿 와이프> <품위있는 그녀> <미스트리스> <시크릿 마더> 등 최근 기혼 여성 중심 서사들이 이 같은 경향을 보여준다. 여기에 가세한 <그녀로>는 가부장제의 가장 추악하고 어두운 밑바닥을 체험한 여성이 그 폭력적 실체를 폭로하고 탈주하는 이야기다. 강찬기가 ‘이 시대의 참 언론인’이자 ‘대한민국 주부들의 워너비 남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라는 점도 공적 고발과 응징에 맞춤한 설정이다.

 

물론 이 작품 역시 통속극 특유의 한계가 적지 않다. 가령 지은한의 얼굴을 수술한 성형외과 의사 한강우(김재원)가 강찬기와 대립하며 주요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은 가부장제의 폭력을 심판하는 것도 여전히 남성 권력이라는 씁쓸한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지은한을 죽이려 하는 ‘악녀’ 정수진(한은정)의 행동이 결국 강찬기의 아내 자리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됐다는 설정이나 한강우를 배신한 전 애인 송채영(양진성)이 모성보다 커리어를 중시해서 비난받는 대목 등도 여성혐오적이다.

 

이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녀로> 또한 미투 시대에 여성 폭력 문제를 적극적으로 가시화하고 가부장제의 적폐를 고발한 작품이라는 의의를 남긴다. 이러한 한계를 딛고 ‘가부장제 이후’를 상상하는 드라마들이 나올 때가 됐다.

 

<김선영 TV평론가>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