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추석이면 추석영화들이 마련된다. 극장에는 한국의 전통적 성수기를 노린 작품들이 걸리고, 집에서도 각 방송사가 준비한 추석특집 영화들이 방영된다. 일순간 너무 많은 영화들이 쏟아져 어떤 것을 보아야 하나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다양한 선택이 기쁘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다양한 선택이 다양한 음식으로 채워진 뷔페처럼 만족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는 어마어마하게 식욕을 자극하지만 막상 한 바퀴 돌고 나면 헛배가 부른 듯한 기분. 차라리, 정성껏 마련된 단품 요리를 먹을 걸 그랬나, 하고 후회가 드는 그런 기분 말이다.

 

영화 <체실 비치에서>의 한 장면.

 

영화 보기는 먹기와 같은 본능적 행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수기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여러모로 욕구와 충동을 자극한다. 대형 광고판에 선명한 해상도를 가진 사진들이 걸려있고, 소위 대형 배우들의 얼굴이 나란히 포진해 있다. 예고편이나 기사, 평론들도 있지만 일단 그렇게 걸려 있는 얼굴들을 보며, 어떤 영화가 재미있을까 고민하기 마련이다. 최종 선택은 대부분 직관적이다. 어떤 게 더 재미있을까, 어떤 게 볼만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직관대로 결정하는 것이다.

올해 추석영화관이 특히 그러했을 것이다.

 

올 추석에는 세 편의 사극과 두 편의 장르물이 개봉됐다. <물괴>는 추석 한 주전, <협상> <안시성> <명당>은 추석연휴 직전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더풀 고스트>가 연휴 마지막에 개봉됐다. 김명민, 손예진, 현빈, 조인성, 조승우, 마동석, 김영광에 이르는 화려한 라인업은 말 그대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배우들은 나름의 홍보전에 뛰어들었고, 연일 보도자료로 각 영화들의 흥행성과가 전달되었다. 시장의 규모만 보자면 추석 극장가 관객은 1300만명으로 추정되었다. 영화 모두가 손익분기점을 넘기려면 적어도 1700만 관객 정도가 필요하니, 이는 이미 레드오션이고 과열경쟁이 예고된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영화들이 개봉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기억에 남는 단 하나의 작품은 없다. 제작비나 제작사 및 배급사의 규모, 배우들의 면모를 봐서 평균작 이상이 분명 나올 만한데, 다섯 작품 모두 도토리 키 재기 하듯 고만고만하니 주목을 끄는 작품이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의 캐릭터가 거의 비슷하다. 인간이 가진 복잡성이나 예민함을 모두 깎아내버린, 밋밋한 사람들이 전부인 셈이다. 주인공들은 모두 정의롭고 정직하며, 그 반대에 있는 사람들은 세속적 야망을 불태운다. 이런 이분법 안에서 인간은 순수하고 정의로운 인간 아니면 악하고 이기적인 인간, 둘로 나뉜다.

 

어떤 관객이라도 스스로를 이기적인 악당 편에 두고 몰입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선하고 올바른 쪽이 나의 그림자일 것이라 여기며 그것에 동일시한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정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는 것일까? 인간의 내면이라는 게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평면적인 것일까?

 

영화 <체실 비치에서>를 보며 오랜만에 신선한 당혹감을 느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신혼여행 첫날 밤 급격하게 서로에게 환멸을 느끼고 멀어지는 두 연인을 보여준다. 카메라의 앵글로 치장되거나 꾸며진 정사 장면들과 달리 이 신혼부부의 첫날밤, 첫 정사는 보는 이들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외설적이거나 선정적이어서가 아니다. 마치 무방비 상태의 맨 얼굴처럼 카메라는 우리가 그다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순간을 침범해 들어간다. 거기엔 우리가 돌이키고 싶어하지 않는, 상처와 부끄러움과 미숙함이 있다. 매끈하게 세련되고, 다듬어진 가상의 인간이 아니라 투박하게 벼려진 날것 그대로의 인간이 있는 것이다.

 

이언 매큐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속 두 사람은 우리가 여느 영화에서 보아왔던 연애와 결혼의 주인공들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당혹스럽지만 그렇기 때문에 반갑다. 오히려 너무나 완벽하게 정의로 꾸며진,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부끄럽거나 민망한 순간이 없는 듯한 추석영화 속 주인공들보다 더 위안이 되기도 한다. 추석영화 속 주인공들이 우리가 되어야 할 가상의 인간형을 추구한다면, <체실 비치에서>의 두 연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견지해야만 하는 우리와 닮아 있다. 인간은 위대하지만 대체로 엉망진창이며, 때로는 너무 부조리하다. 그들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그렇고, 나도 그렇다.

 

<체실 비치에서> 남자 주인공 에드워드 역을 맡은 빌리 하울은 “내가 가장 관심 있는 것은 빛, 심지어 경박함을 때로는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나는 불합리에 매료되었고, 부적절한 반응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종에 속해 있음을 알고 그 인간의 속성에 대해 어지간히 고민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완벽한 외모와 보편적 정의로 조형된 주인공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런 인물들은 정작 온기와 위로를 주지 못한다.

 

물론 모든 영화들이 이렇게 예민하게 인간의 복잡성을 파고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섯 편, 여섯 편 아무리 많은 작품들이 개봉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복잡함과 모순을 보여주는 작품이 단 하나도 없다면, 그건 다양한 영화관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진다고 해도 그건 다양하지 않다. 올해 추석 개봉 대작들이 고만고만하니, 기억에 남지 않는 이유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