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천진한 목소리가 초등학교를 가득 채운다. 가을 체육대회가 한창인 운동장에서 한 남자아이가 열심히 달리고 있다. 그런데 릴레이 경주를 마친 남자아이 앞에 이상한 환각이 나타난다. 어린 여자아이가 고무줄놀이를 하며 웃고 있는 모습이다. 어딘지 불안해 보이던 남자아이가 건물 계단 위로 올라간다. 제일 높은 계단에 서 있던 아이는 갑자기 아래로 몸을 던진다. 

 

올해 드라마 중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막을 연 MBC 미스터리 스릴러 <붉은 달 푸른 해&gt;는 아이들의 숨겨진 상처에 주목하는 작품이다. 아동상담사인 주인공 차우경(김선아)은 계단 아래로 투신한 10살 남자아이 한시완(김강훈)을 상담하게 된다. 시완의 이상행동은 여동생을 교통사고로 잃은 이후부터 생긴 증세였다. 하지만 시완은 상담 사실이 밖으로 퍼져나갈 것을 우려한 부모의 반대로 곧 상담을 중단한다.

 

MBC <붉은 달 푸른 해>의 한 장면.

상담이 계속 필요하다는 우경에게 “내 자식은 내가 더 잘 알아요”라고 응수한 시완 어머니의 말은 현실에서 수많은 부모가 되뇌는 말이다. 부모들은 정말 아이들에 대해 잘 알고, 보호하고 있을까? 드라마는 이 물음에서부터 출발한다.

 

질문은 곧바로 이어진 사건에서 한 단계 더 나간다. 상담센터로 향하던 차 안에서 시완 어머니의 상담 중단 통보 전화를 받은 우경은 근심에 휩싸인 채 집으로 차를 돌린다. 바로 그때 누군가 우경의 차로 뛰어든다. 시완 또래의 남자아이였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충격과 죄책감에 빠진 우경은 자동차 전용도로라서 운전자 과실을 묻기 어렵다는 변호사의 말에도 아이의 가족을 수소문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보호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절망한 우경이 묻는다. “길바닥에서 어린애가 죽었어. 근데 그 앨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부모조차도. 어떻게 아이가 무연고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시완의 사연이 부모의 방임을 지적했다면, 도로에서 사망한 아이의 이야기가 겨냥하는 질문은 우리 사회의 방임 문제로 확대된다. 우경의 의문에 “아이들이라고 모두 보호자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라고 답하는 경찰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부모라고 해서 다 보호자인 것은 아니다. 첫 회에서 등장한 김한솔 어린이 학대 치사 사건처럼 아동학대 가해자의 절대다수가 부모다. 그렇다면 그런 부모 아래 방치된 아이들, 그리고 그런 부모조차 없는 아이들은 누가 보호할 것인가.

 

이는 아동학대를 소재로 한 최근 드라마들의 공통된 질문이다. 이전까지의 드라마들이 대부분 가시적 폭력 위주의 아동학대 문제를 그렸다면, 같은 주제를 다루는 요즘의 드라마들은 더 폭넓은 사회적 방임의 문제를 제기한다. <붉은 달 푸른 해> 이전에 올해 초 방영된 tvN <마더>가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 혜나(허율)는 가난한 싱글맘과 그의 난폭한 동거인 아래서 학대당한다. 아이를 눈여겨본 교사들이 수차례 아동학대를 의심하고 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학대는 점점 심해진다. 보다 못한 담임선생님 수진(이보영)이 혜나를 데려가 보호자를 자처한다. 부모가 버리고 사회가 방임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

 

지난 9월 방영된 KBS 미스터리 호러 <오늘의 탐정>은 첫 번째 사건으로 어린이집 교사에 의한 아동 납치 사건을 다뤘다. 드라마는 이 범죄를 개인적 문제로 몰아가기보다는 어린이집 교사들의 열악한 근무조건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함께 환기한다. 점점 늘어나고 있는 어린이집 학대 사건의 근본적 문제가 거기에 있다.

 

드라마 속 모든 범죄의 배후에 있는 생령 선우혜(이지아)의 사연 또한 같은 맥락 안에 위치한다. 어린 우혜는 신변을 비관해 가족 동반 자살을 시도한 아빠의 손에서 홀로 살아남는다. 어린 자녀들과의 동반 자살은 정확히는 자녀 살해 후 자살이다. 이는 아동을 향한 가장 극단적인 폭력 행위일 뿐이다. 더구나 우혜는 가족들 시체 옆에서 수일간이나 방치된 채로 있었다. <오늘의 탐정>은 그렇게 부모와 사회가 유기하고 방임한 아이가 원귀로 돌아와 세상을 상대로 복수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최근 아동학대 소재 드라마의 새로운 경향은 아동 문제 인식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최근 3년간의 아동학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빅데이터로 분석한 결과, 제일 두드러진 변화는 아동학대를 가족 간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로 바라보는 인식의 증가다. 신체학대를 넘어 정서학대와 방임 등도 문제로 인식하는 등 아동학대에 대한 인식의 범위가 확대됐다는 것이었다. 아동학대 신고 건수가 늘고 피해 아동의 심리치료도 늘어났다.

 

물론 뒤집어보면 아동학대 범죄가 그만큼 증가하고 그 심각성이 커지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런 상황에서 아동학대를 사회문제로 가시화하고 문제의식을 확대하는 작품들이 꾸준히 나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최근작인 <붉은 달 푸른 해>처럼 기존의 아동학대 소재 드라마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은 아동 우울증, 아동 자해 등의 문제까지 다루는 작품이 등장한 것은 더 주목할 만하다. <마더>와 함께 2018년 드라마의 가장 큰 성취 중 하나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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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자리 어른이 술을 권한다. 외지 사람이 잔을 받는다. 드르륵, 낡아서 삐걱거리는 알루미늄 문이 열리고 노인 손님이 몇 패 들어온다. 찌개를 끓여서 막걸리를 돌린다. 미지근한 막걸리다. 여그는 차게 안 마셔. 

 

최근 광주에 다녀왔다. 부도심 곳곳의 전통시장이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시장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남광주시장, 양동시장, 대인시장. 토요일마다 야시장이 열리는 곳도 많다. 청년과 예술가가 결합해서 시장의 분위기를 바꿔 놓기도 한다. 시장의 힘이 아직은 느껴지는 도시다. 이 시장에는 대폿집이 전설처럼 남아 있다. 한 바퀴 돌면서 대폿집들의 면모를 쓱 살펴본다. 어떤 집은 “시장에서 파는 무엇이든 가지고 오면 요리해 드린다”고 써 놓았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 무렵, 전라도 해안에서 잡은 맛있는 생선과 해물이 광주에 많이 올라온다. 그 귀하다는 노랑가오리도 별거 아니라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누워 있고, 표면이 푸르게 빛나는 제철 삼치며, 굵직한 낙지(대낙지라 부른다)도 억센 힘을 자랑하며 함지에서 용을 쓴다. 가을에 태어난 어린 낙지도 있어, 세발낙지 맛을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세발낙지는 품종이 아니라 어린 놈을 그리 부른다. 어물전에서 낙지를 구경하고 있으면, ‘아짐’(아주머니)이 세발낙지 먹는 법을 알려준다. 이놈을 다리 쫙 훑어서 한입에 넣어야 한다고.

 

 

장을 봐서 대폿집에 들어선다. 안줏거리를 건네면, 솜씨 있게 쓱쓱 만들어낸다. 낙지를 탕탕, 도마에 쳐서 참기름과 통깨(이 양념은 전라도 음식의 주인공 격이다)를 술술 뿌려서 낸다. 가오리를 쓱쓱 저미고, 병어는 탕을 끓인다. 새꼬막이 수줍게 나와 있어서 연하게 삶아 백숙을 한다. 꼬막은 까먹는 맛이제. 안주를 함께 나누는 대폿집 손님들이 한마디씩 한다. 어디서 오셨느냐, 무슨 일을 하셨느냐 서로 인사를 나눈다. ‘하셨느냐’는 은퇴한 어른에게만 묻는 과거형 질문이다. 그들도, 다 한세상을 힘차게 살아온 양반들. 개인사를 들으며, 사라져버린 시장과 광주라는 도시의 기억을 떠올린다. 대포는 원래 커다란 잔을 의미한다. 막걸리 같은 술을 딱 한 잔 마실 수 있게 큰 사발에 따라서 냈다. 얼른 마시고 일하러 가야 하거나, 가진 돈이 적어서 한 잔밖에 마실 수 없는 사람에게 최적의 소용이었다. 이제는, 다들 술을 천천히 마신다. 안주도 시켜야 한다. 이제 대폿집에서 대폿잔을 볼 수 없게 됐지만 인심은 그대로다. 무슨 술이든 한 병 시키면 안주를 한상 깐다. 싸고 흔한 음식이지만 이쪽 말로 ‘개미진’(맛있는) 것들이다. 김치며 번데기, 어묵탕 같은. 술에 딸려 나오는 기본 안주는 무료다. 이 전통은 오랜 것이다. 조선말의 선술집이나 주막에서도 그랬다는 기록이 있다. 전주의 그 유명한 막걸리골목의 인심이나 통영의 ‘다찌집’의 문화도 전통의 소산이다. 이제는 월세 싸고 직원 안 쓰는, 이런 광주의 대폿집에서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저나 다 사라져갈 대폿집을 기억하고 쓰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데, 참 장한 일이 아닌가 싶다. 대포 한 잔 마시러 광주에 가고 싶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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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는 것이다.” 파티에 다녀온 남편이 어떤 아가씨를 데려다주는 길에 함께 자고 왔다고 말한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용서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덧보탠다. 용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는 것이라고, 진짜 이해했다면 용서라는 말이 필요 없다고 말이다. 아이 넷을 키우고 있는 아내 수전은 가정을 유지하는 일이 ‘지성적’인 판단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남편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용서한다. 눈치챘다시피, 용서로 지탱이 되는 이 가정은 이미 균열되어 있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의 가정 말이다.

 

20대 후반에 결혼한 수전은 꽤나 합리적인 판단으로 결혼을 하고, 전원주택으로 이사해 네 명의 아이를 낳았다. 모두 계획한 대로였다. 단조로운 생활을 하게 될 것도 알았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두렵거나 힘들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전은 자신의 삶이 “자기 꼬리를 문 뱀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유지하는 게 원하던 일이었지만 그것을 유지하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영화 <툴리>의 한 장면.

 

막내가 제법 큰 이후엔 자기만의 방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집 안에 엄마의 방을 만들었지만, 수전은 그 방에서 하루 종일 아이들이 내일 입을 옷, 먹을거리, 일과를 설계하느라 생각이 쉴 틈이 없다. 혼자 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호텔 19호실을 빌린다. 그리고 드디어 그곳에서 혼자가 된다. 누구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친구가 아닌 익명의 존재가 된 것이다.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다보면 나 자신을 잃고 산다고들 말한다. 영화 <툴리>에서 만나게 되는 여자 마를로(샤를리즈 테론)도 그런 인물 중 하나이다. 1남1녀의 어머니인 그녀는 현재 만삭이다. 지금은 막내이지만 곧 둘째가 되어야 할 아들은 좀 특별하다. 지나치게 예민한 아들은 일종의 정서적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와중에 셋째가 태어나고, 마를로는 말 그대로 독박육아에 시달린다. 시도 때도 없이 깨는 아이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고, 그 와중에 두 아이의 식사와 등교, 준비물도 챙겨야 한다. 남편은 집에 돌아오면 이어폰을 낀 채 게임에 열중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나쁜 남편도 아니다. 아니, 그냥 평범한 남편의 모습이라는 게 문제다. 내가 젖이 나온다면 야간 수유라도 대신할 텐데라는 식의, 나름의 위로를 던지는 모습 말이다.

 

그때 밤에만 아이를 돌봐주는 도우미 툴리가 나타난다. 자신의 아이처럼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툴리 덕분에 마를로는 정말이지 너무나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잔다. 쉬는 것처럼 쉬니 기운이 나서 아이들 간식도 챙겨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넬 여유도 생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챙기고 돌아보게 된다. 야간 보모 툴리는 마를로를 찾아 온 첫째 밤, 나는 아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을 돌보기 위해서 왔어요, 라고 말한다. 그렇다. 보모는 사실 아이가 아닌 엄마에게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엄마 마를로에게 아이들은 금세 크니 잠시만 견디세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전을 보노라면,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만은 아닌 듯싶다. 미친 듯 체력을 불태우며 수유기를 지나 학교에 갈 정도로 아이를 키우고 나면 과연 ‘나’가 돌아올까? 아이들로 북적이던 시간이 아이가 빠져나가면 고스란히 나의 것이 되어 줄까? 도리스 레싱이나 오정희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 대답은 아니라는 것처럼 다가온다.

 

오정희의 소설 <옛우물>에도 사는 집에서 좀 떨어진 방에서 자기만의 짬을 가지는 한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 45살 생일을 맞게 된 여성은 그 떨어진 예성 아파트에 가서 곧 허물어진 연당집을 내려다본다. 바보 아홉 명, 당상관 다섯 명이 태어났다는 연당집은 바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의 내면, 젊음과 욕망의 결과물일 테다. 젊음과 욕망은 바보 같은 짓 아홉 개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당상관처럼 자랑스러운 결과도 다섯쯤은 만들어 낸다. 그렇게 깊은 자기의 내면은 나만 혼자 있을 수 있는, 예성 아파트에 가서야 보인다. 19호실에 가서야 볼 수 있는 자기 자신이 있는 것이다.

 

영화 <툴리>의 결말에는 반전이 숨어 있다. 그 반전을 보고 있노라면, 결국 출산과 육아, 결혼과 가정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가장 상처 입는 것은 엄마, 아내가 아니라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 툴리는 힘들어하는 마를로에게 지금 당신의 모습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미래의 모습이 아니냐고 묻는다. 둔감하지만 착한 남편, 귀여운 세 남매. 브루클린의 옥탑방에 세들어 살 땐, 그토록 간절히 꿈꾸었던 미래의 모습이 바로 지금 아니냐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아내에게도 19호실과 예성 아파트는 필요하다. 그 무엇이라는 수식어를 다 뗀, 익명의 존재가 되어 나를 완전히 놓고 그래서 나만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 이 공간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트르슈카 인형처럼 나를 벗기고 벗겨 마침내 드러나는 작은 나, 50대에서 40대, 30대, 20대, 10대의 나.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나와 만나는 과정. 마를로나 수전과 같은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이나 무관심, 용서가 아니라 이해이다. 그녀에게는 다만 이해가 필요할 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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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뜨거운 국물 힘으로 버틴다고 한다. ‘밥심’ 다음으로 많이 쓰는 상징이다. 뜨거운 국에 밥 한 그릇 훌훌 뚝딱 말아먹고, 식의 표현이 흔하다. 노동하는 음식, 간편식의 골자를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 식생활에서는 국과 국밥의 역사가 그랬다. 국밥의 대표격인 설렁탕이나 곰탕은 싸지 않았지만, 속이 든든하고 오래 허기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고깃국이었기 때문이다. 국밥이 노동 음식이었다는 근거는 토렴을 든다. 밥을 말아내어 들이마시듯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토렴은 밥알의 온도를 적당하게 해주는 기술이면서 동시에 식사 속도를 높여주어서 환영받았다는 뜻이다. 전기보온밥솥이 없던 시대에 토렴은 인간이 짜낼 수 있는 지혜였다. 특히 한국처럼 대륙성의 건조하고 추운 기후에서는 더욱 필요한 기술이었을 것이다. 토렴한 국밥을 먹으면서 우리 선조가 버텨온 세월이 얼마나 길었을까.

 

 

고기에 대한 열망은 기록이 존재하는 역사시대부터 수없이 등장한다. 수천년 동안 기근이 이어지다가 불과 30여년 전부터 고기 풍요의 대혁명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간혹 값이 뛰는 채소보다 못한 고기 신세라는 말이 나온 것은 근자의 일이다. 미국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충분한 양의 사료, 사육 기술의 고급화, 수입육의 대량 공급으로 이제는 고기 자체에 대한 기근은 더 이상 없다. 설렁탕과 곰탕의 주재료인 소고기의 대체품인 닭과 돼지고기의 공급량이 넘치는 것도 그 영향이다.

 

고기를 구워 먹지 못하고 탕으로 내어 먹는 것을 자조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었다. 국밥을 서구의 스테이크에 비교해서 생기는 일이다. 소고기 1㎏을 국밥으로 끓이면 10명이 먹고, 스테이크로는 셋이서 먹는다는 수학적 계산을 해보면 선명해진다. 근대 도입기에 이 땅에 들어온 유럽인들이 스테이크 같은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보며 시작된 충격이다.

하지만 유럽도 오랜 기간 우리와 같은 국물 문화를 거쳤다. 유럽도 한때 고기 공급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절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던 까닭이다. 산업혁명과 사육 기술의 발달이 고기를 국물로 먹던 시대에서 ‘덩어리’의 시대로 진전시켰다. 위생과 동물 예방의학이 발전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여기에다 식민지 경영으로 부를 쌓으면서 고기 공급을 늘릴 수 있었다.

 

유럽인들이 먹는 수프라는 음식은 국밥처럼 적은 고기와 재료를 나눠 먹으려는 열망에서 시작된 음식이다.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수프는 고급 음식이라고 생각했던 일본과 한국의 기록은 그런 면에서 살짝 코믹한 구석이 있다. 경양식집에서 팔던 밀가루로 만든 싸구려 수프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우리의 추억에는 그런 흥미로운 역사가 숨어 있는 셈이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시내 국밥집이 바글바글해진다. 거칠어진 속을 위로하는 데에는 뜨거운 국물이 최고겠지. 어쩌면 추운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도 같다. 세상 일이 뭐랄까, ‘속 시원히’ 풀리지 않는 게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헛헛한 일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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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방영된 tvN 드라마 <화유기>는 고대소설 서유기를 모티브로 요괴 손오공(이승기)과 삼장법사의 소명을 타고난 진선미(오연서)의 사랑을 담은 판타지 드라마였다. 현재 방영 중인 tvN 월화드라마 <계룡선녀전>은 선녀와 나무꾼 설화를 재해석, 날개옷을 잃어 천계로 돌아가지 못한 채 남편의 환생을 기다리는 선녀 선옥남(고두심·문채원)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처럼 이계의 존재와 인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가 최근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2010년대 이후 로맨스 드라마 장르의 최고 흥행작들이라 할 수 있는 SBS <별에서 온 그대>와 tvN <도깨비>도 이 계열에 속한다. 전자는 400년 전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김수현)과 한류 스타 천송이(전지현)의, 후자는 도깨비(공유)와 도깨비 신부의 운명을 지닌 지은탁(김고은)의 사랑을 그렸다. 개성적인 캐릭터와 색다른 볼거리를 내세운 장르물의 인기와 컴퓨터그래픽 기술의 진화 등이 이 같은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 유행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선녀와 나무꾼 설화를 재해석한 tvN 드라마 <계룡선녀전>.

 

눈에 띄는 것은 이들 드라마 안에서 남녀 주인공을 묘사하는 대조적 방식이다. 주인공 유형만 봐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남자 주인공이 인간보다 진화한 문명의 외계인(<별에서 온 그대>), 악귀와 맞서 조선을 구하는 뱀파이어(<밤을 걷는 선비>), 불멸의 반신 도깨비(<도깨비>), 악귀를 때려잡는 최강 요괴(<화유기>) 등으로 그려질 때, 여자 주인공은 인간이 되고 싶은 구미호(<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기억을 잃은 원귀(<아랑사또전>), 인간이 된 천사(<하이스쿨 러브온>), 육지에서 만난 첫 남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다를 떠난 인어(<푸른 바다의 전설>), 699년 동안이나 남편을 기다리는 선녀(<계룡선녀전>) 등으로 등장한다.

 

같은 이계의 존재인데도, 남녀의 캐릭터 묘사는 이렇게나 다르다. 남자 주인공은 대부분 악에 맞서 연인과 타인들을 구하는 슈퍼히어로적 능력이 강조되는 반면, 여자 주인공은 특별한 능력보다는 신비로운 외모와 순수함, 그리고 남주인공을 위한 자기희생적 성격이 부각된다. 트렌디한 판타지 장르를 표방하면서도, 강한 구원자로서의 남성과 그의 보호를 받는 수동적인 여성을 내세우는 전통적인 로맨스 관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제일 두드러지는 문제는 남자 주인공이 인간 문명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그것을 초월하기까지 하는 존재일 때, 여자 주인공은 인간 문명조차 따라잡지 못하는 퇴행적 존재로 그려진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2010년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에서 오랜 봉인으로부터 풀려나 남주인공 대웅(이승기)의 집에 살게 된 구미호(신민아)의 행동은 5세 아이 수준에 머문다. 미호는 청소 솔로 머리를 빗고 치약과 비누 거품을 맛있게 먹는 황당한 행동을 잇달아 하고, 대웅은 그녀에게 인간 세상에 적응하는 법을 가르친다. 같은 작가가 쓴 <화유기>에서 요괴 오공이 구미호처럼 오랜 봉인에서 풀려났으나 그녀와 반대로 인간 세상에 천연덕스럽게 적응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5년 뒤에 방영된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은 더욱 심각하다. 어우야담 속 인어 설화를 각색한 이 드라마에서 원래 도도하고 똑똑한 인어였다는 심청(전지현)은 인간 세상에 나오자 스파게티를 손으로 집어 먹고 휴지를 뽑아 날리며 즐거워하는 등 새끼 고양이처럼 행동한다. 남주인공 준재(이민호)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길거리에 쭈그려 앉아 기다리는 모습도 영락없는 유기견이다. 같은 작가의 전작 <별에서 온 그대>에서 외계인 도민준이 400년간 신분을 계속해서 바꿔가며 완벽하게 인간 사회에 섞여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현재 방영 중인 <계룡선녀전>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견된다. 북두칠성 제1성 탐랑성을 관장하는 선녀였던 주인공 선옥남은 날개옷을 잃고 나무꾼의 아내로 살다가 그가 죽은 뒤에는 남편의 환생을 기다리며 선녀다방 바리스타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나마 웹툰 원작에서는 신성한 존재로서 선녀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로맨스 드라마로 옮겨지면서 그러한 의미는 희미해지고 남편을 찾아 계룡산 깊은 산속에서 나와 21세기 서울과 처음 마주한 선옥남의 엉뚱하고 천진한 모습이 더 두드러진다. 남주인공 정이현(윤현민)과의 약속을 앞두고 미용실에 가서 청포물로 머리를 감겨달라는 모습이나, 극장에서 영화 <킹콩>을 보면서 스크린 속 인물들을 향해 진지하게 말 거는 모습 등이 대표적이다.

 

요컨대 서양은 문명, 동양은 비문명으로 타자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작동방식이 남녀 구도에 가장 뚜렷하게 적용되는 장르가 이계 주인공 판타지 멜로드라마다. 똑같이 초월적 존재임에도 남주인공의 능력은 몇 배로 과장되고, 여주인공의 능력은 훨씬 축소되기 때문이다.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이 조선시대부터 400년 동안 쌓아온 지식을 활용하고 현재에는 대학교수로서 인간들을 가르치는 것과 달리, 고려시대부터 살아온 <계룡선녀전>의 선옥남은 ‘머리에 꽃 단’ 할머니(이용녀)가 옥남을 보고 되레 정신 나갔다고 여길 만큼 문명과 동떨어진 존재로 묘사되는 걸 보면 문제가 한층 뚜렷하게 드러난다. 다른 세계를 상상하면서도, 여성의 존재만큼은 현실의 중력에 발 묶여 있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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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는 늘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다. 영화계뿐만은 아닐 것이다. 문학도, TV 예능도 심지어 정치계도 새로운 것을 찾는다. 새로운 시도의 출현에 대해 우리는 기꺼이 반길 준비도 되어 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상엔 새로운 출현이라는 게 얼마나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몇 편의 영화들만 해도 그렇다.

 

미국에서 흥행을 한 뒤 아시아권에 뒤늦게 개봉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Crazy rich Asians)>을 보자. 영화의 할리우드 흥행에 아시아가 흥분했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아시아계라는 점에서 말이다. 수선스럽다고만 하기도 어려운 게 주·조연 모두 아시아계 배우로 캐스팅되어 미국 주류 영화로 개봉한 작품이 1995년 <조이 럭 클럽> 이후 무려 23년 만이다. 그동안 아시아계 배우란 미국 영화에서 감초 혹은 인종적 편견을 강화하는 역할 정도에 그쳤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한 장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남자 친구의 고향인 싱가포르에 가게 된 연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평범한 중국인인 줄 알았던 남자 친구는 싱가포르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미치도록 부자인 집안의 아들이었고 그런 집안임을 티라도 내듯이 엄격한 가풍과 유교적 질서를 지키고 살아간다. 겉은 중국인이지만 완전히 미국식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29세 여성 레이첼은 이래저래 싱가포르에서는 부적격 신부로 외면당한다. 특히 장래 시어머니감이 심각하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 변호사였던 그녀는 ‘영’가문의 안주인이 되기 위해 자신의 경력을 단숨에 던지고 집안일에 매진했다고 말하니 말이다.

 

대략의 줄거리를 놓고 보자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줄거리는 우리네 안방에서 몇십 년째 방영 중인 가족드라마의 꼴과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의 흥행과 달리 한국에서는 이런 영화가 왜 그렇게 흥행했지라며 주저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서 멀지 않다. 이런 이야기, 이런 주인공은 우리에겐 물리도록 익숙한 진부한 것이니 말이다.

 

영화적으로 따져보자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할리우드의 스크루볼 코미디의 원형을 복원하고 있다. 상대적 격차가 큰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사회경제적 갈등은 두 사람의 정서적 교감과 인간적 이해력으로 해결된다. 처음엔 둘 사이를 방해자였던 사람이 마지막에 가서 적극적 조력자로 바뀌는 것도 스크루볼 코미디의 전형을 따라간다. 말하자면 미국, 할리우드의 관객들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통해 1934년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에서 보았던 단순하고도 명쾌했던 로맨틱 코미디의 비전을 다시 보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백인 미국인에서 동양인 미국인으로 바뀌었을 뿐, 줄거리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달라진 게 없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2018년 넷플릭스 최고의 오리지널 영화로도 불리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에서도 발견된다. 짝사랑했던 남자들에게 썼던 비밀 편지가 어느 날 갑자기 당사자들에게 발송된다. 이 발송된 편지로 계약 연애가 시작되고, 그렇게 연인인 척하다 보더니 진짜 감정이 생기고 연인이 된다. 오해, 계약, 갈등, 사랑의 재발견으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정말이지 비슷한 이야기를 찾자면 도서관 하나도 모자랄 정도로 흔하다.

 

하지만 이 두 이야기는 모두 오히려 익숙하기 때문에 더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도 바꿔 말할 수 있다. 올해 네 번째 리메이크작이 선보인 <스타 이즈 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재능을 지녔으나 아직 세상이 발견하지 못했던 원석이 사랑을 알고 스타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반세기 넘어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그려진다. 세상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다양한 이야기가 있지만 뜯어보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고 고만고만하다. 고민의 양상도 그렇고 행복의 순간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사는 넓고 다양하다지만 바닥까지 들여다보면 그렇게 다를 것도 없다. 우리가 장르라고 부른 이야기가 틀이 정해져 있고, 공식이 뻔한데도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인류는 어떤 서사적 유전자, DNA를 공유하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16세기에 썼던 <로미오와 줄리엣>은 여전히 사랑 이야기의 고전으로 사랑받고, 재창조된다. 극복하지 못하는 장애물 앞에서 목숨을 잃는 두 연인은 죽음으로 봉인된 영원한 사랑의 신화로 변주된다. 죽음이 지켜낸 사랑의 불멸성은 500년이 지나도 여전히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45세에 세상을 떠난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를 담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여전히 청중을 움직이고, 아바의 음악이 <맘마미아>를 통해 재창조될 수 있는 것도 이 유전자 덕분이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세월을 건너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감정의 근원이 우리에게 있는 셈이다.

 

오래되었다고 나쁜 것은 아니다. 새롭다고 늘 옳은 것도 아니다. 그 익숙함 가운데서 약간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새로움일 테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오래된 것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결실이기도 하다. 오래된 것을 공부하지 않다보면, 아주 오래된 것을 새것이라 내놓는 해프닝도 생긴다. 인류가 공유한 서사적 유전자를 공부하는 것, 그 지도 아래 놓인 인간의 깊은 속내를 탐구하는 길, 그게 바로 오래된 것을 공부하는 보람이 아닐까?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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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외식업을 지탱하는 조미료 중 하나는 공장에서 생산한 산분해 간장이다. 공장에서 만들었다고 달리 큰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더 나은 간장을 찾으려는 이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업소용 재료를 파는 대형 시장에 가보면, 조선간장이나 양조간장은 찬밥이다. 값이 비싸다는 이유에서다. 재료비가 올라 힘들 식당 사정은 모르지 않되, 간장에 대한 이해가 애초부터 부족하거나 전무하다. 오래된 ‘노포’ 식당의 다수도 다르지 않다. 양조간장이 소량 들어간 이른바 ‘산분해 간장’을 거의 100% 쓴다. 오래된 노포의 맛, 고향의 맛이라는 근저가 실은 산분해 간장이라면 얼마나 씁쓸한 일인가. 원가 분석을 해봐도, 양조간장(우리가 전통적으로 만들어 쓰는 조선간장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공장에서 양조한 간장)을 쓴다고 해서 주름이 갈 정도는 아니다. 요는, 상대적으로 좋은 간장을 쓰려는 보편적 접근이 적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는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한식요리사 자격증 시험에는 양념 배합 공식이 있는데, 진간장이 기본이다. 당대의 입맛이 대량생산한 공장 간장에 길들여 있기는 하지만, 이른바 진간장이 볶음이나 조림 등에 표준 간장이다. 학원에서도 그리 가르친다. 조선간장을 요리에 쓰는 자격증 학원은 애초에 없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진간장이란 원래 고급간장인데, 양조간장에 산분해 간장을 섞은 걸 상품화하면서 이름을 가져다 썼다. 악화가 양화를 밀어냈다고나 할까.

 

조선간장을 마치 오래되고 박제된 간장 정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간편하고 싼, 대량생산형 공장 간장이 있는데 굳이 맛이 짜고 용도가 제한된 조선간장을 뭐하러 먹느냐는 것이다. 최근에는 조선간장을 중심으로 해서 볶음이나 무침, 조림 등에도 다채롭게 쓸 수 있는 물건이 많이 나오고 있다. 염도도 낮아지고 있다. 염도를 낮춰서 냉장 발효하는 간장도 나온다. 시장의 편견과 유통 구조의 벽에 부딪혀서 좌절할 뿐이다.

 

현재의 한국 간장 문화는 일제강점기에 큰 변화가 있었다. 일본이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수 물자의 보급이 절실했고, 산분해 간장은 그 대안이 됐다. 일본 문화가 한국에 이식되면서 전통 간장의 입지가 줄어든 것도 한 이유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우리 콩을 온전히 쓸 수 있게 되자 조선간장은 개별 가정에서 부활한다. 물론 이때 시중에서는 적산 기술로 만든 일본식 간장도 여전히 팔렸고, 6·25전쟁 후에 본격적으로 시장을 넓혀 간다. 흥미로운 건 화교들도 간장·된장 시장에서 활약했다는 사실. 지금 우리가 먹는 짜장면은 된장이 기원이고, 이런 장을 만드는 화교 공장이 된장과 간장을 한국식 식당에도 많이 공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전쟁은 장의 부족을 불러왔고, 대량생산되는 공장의 간장이 크게 퍼졌다. 이후에도 개량형 된장과 간장을 정부 차원에서 적극 밀면서 조선간장은 더욱 위축되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조선간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리고 있다. 한식의 ‘진짜 맛’은 어쩌면 핵심 조미료인 간장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조선간장은 아직 안 죽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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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TV 수목드라마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MBC <내 뒤에 테리우스>는 은둔 중인 전직 국가정보원 요원 이야기로 시작한다. 코드네임 테리우스(소지섭)는 과거 남북이 비밀리에 합의한 망명 작전을 수행하던 중 정체 모를 저격수에 의해 정보원을 잃고 자신 또한 내부 첩자 혐의로 쫓기게 된다. 3년 뒤, 김본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남자로 위장해 홀로 저격 사건을 조사하던 그는 자신이 추적 중인 킬러가 무슨 이유에선지 앞집 여자 고애린(정인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김본은 킬러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베이비시터를 자원해 고애린에게 접근한다.

 

전설의 블랙 요원이 여섯 살 쌍둥이 남매의 베이비시터에 도전한다는 설정은 단순한 코미디를 넘어 국정원의 위상이 바닥으로 추락한 현실에 대한 풍자적 성격을 띠고 있어 꽤 흥미롭다. 과거 드라마 속에서 미화된 국정원 묘사와 비교해보면 더 온도차가 뚜렷하다. 공포의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 시절을 거쳐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개명한 국정원은 정치적 중립화라는 시대적 요구가 거세지면서 이미지 변신을 위해 대중문화를 적극 공략했다.

 

MBC <내 뒤에 테리우스>의 한 장면.

 

2005년 영화 <태풍>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매체에 문호를 개방했고, 2007년에는 드라마 최초로 MBC <에어시티>에 촬영을 지원했다. <에어시티>에서 인천공항 담당 요원으로 등장한 이정재와 같은 해 방영한 MBC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언더커버 요원으로 출연한 이준기의 멋진 모습은 국정원에 미국드라마 속 CIA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첩보 조직 이미지를 심는 데 한몫했다.

 

국정원 판타지는 2009년 KBS가 방영한 <아이리스>에서 극에 달한다. 국정원을 모델로 한 국가안전국 소속 요원들이 한반도 핵 테러를 막기 위해 활약하는 이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35%를 넘어서며 화제를 일으켰고, 국정원은 이병헌, 김태희 등 주연배우 5인에게 명예요원증을 선사하기까지 했다. 같은 해 국정원 요원들을 주인공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7급 공무원>이 4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했고, 2010년 정우성, 수애가 국정원 특수요원으로 출연한 SBS 드라마 <아테나: 전쟁의 여신>이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이 같은 판타지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드라마 속 국정원에 대한 판타지가 절정을 향해 가던 시기에 정작 현실 속의 국정원은 다시 과거로 퇴행했다는 단서들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10년 프랭크 라뤼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 미행 탄로 사건, 2011년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 잠입 발각 사건,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댓글 여론조작과 국정원 직원 감금 사건, 2013년 진보 성향 시민단체 간부를 미행하다 발각된 사건 등 허술한 작전 수행력과 불법 정치 개입이 들통난 굵직한 사례가 줄을 이었다.

 

자연스럽게 드라마 속 국정원 판타지도 힘을 잃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전작의 영광을 이어가려던 2013년 KBS <아이리스2>와 리메이크 드라마인 MBC <7급 공무원>은 동시간대에 경쟁을 펼쳤으나 국정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SBS <그 겨울, 바람이 분다>가 시청률 1위를 가져갔다. 이후 한동안 TV 드라마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국정원 캐릭터는 2017년 미국드라마를 리메이크한 tvN <크리미널 마인드>에 다시 등장했으나 그 결과는 더욱 처참했다. 2016년 말 국정농단 사건 이후 대표적인 ‘적폐 집단’으로 꼽힌 국정원을 액션 영웅물의 무대로 소비하려는 시청자는 거의 없었다.

 

<내 뒤에 테리우스>는 이 같은 시대착오적 전철을 밟지 않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오히려 시대적 맥락을 영리하게 이용해 그동안의 국정원 판타지를 코미디로 비튼다. 드라마 속에서 국정원은 대놓고 “온 국민으로부터 매일 욕먹는 게 일인” 집단으로 묘사된다. 주인공 김본은 멋지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전설이고 그의 특수한 능력은 고된 육아에는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여섯 살 쌍둥이 남매의 체력을 따라잡지 못하고, 갑자기 초저녁만 되면 왜 잠이 쏟아지는지 어리둥절해하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국정원의 무능함이 그들보다 뛰어난 정보력을 지닌 킹캐슬 아파트 아줌마 정보국, 일명 KSI의 비교를 통해 두드러질 때다. 3회에서 국정원의 김본 추격전과 KSI의 쌍둥이 남매 유괴 저지 작전을 병행편집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국정원은 화려한 장비와 기술과 대대적 인력을 동원하고도 김본을 잡는 데 실패하지만, KSI는 주부들의 단체 메신저방을 활용해 결국 유괴범을 찾아낸다. 국정원 요원들이 결정적 고비마다 현장에 나타나 활약하는 KSI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국정원이 그들만의 게임을 벌이는 동안 민생과 얼마나 멀어졌는지에 관한 풍자이기도 하다.

 

국정원 소재 작품은 내년에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장르물로는 첩보가 여전히 매력적인 소재인 데다 급변하는 남북관계로 인해 그 중요성도 한층 커졌기 때문이다.

 

현재 이승기, 수지 주연의 <배가본드>, 제작비 250억원대 대작으로 알려진 <프로메테우스> 등이 제작 중이다. <내 뒤에 테리우스>가 국정원 판타지를 역으로 이용해 성공했다면,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는 다른 첩보물들은 어떤 전략을 선택할지 궁금해진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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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잡식동물이다. 그러니 무엇이든 먹는다. 먹는 행위에 대해 논란도 많다. 개고기며, 고래고기 섭취 같은 것들이다. 개별적인 집단의 오랜 문화와 새롭게 동물을 보는 시선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동물 윤리에 대한 논의도 요즘 크게 확장되고 있다. 유럽의 몇 나라는 랍스터를 산 채로 삶는 조리법을 금지했다고 한다. 랍스터보다 훨씬 더 지능이 높은 문어는 어쩌나 싶다. 문어 연구는 많이 진행되어 이 종이 아주 영특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수산시장에 가면 문어들이 답답한 망에 갇혀 수족관에 들어 있다. 그들의 지능이라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문어를 삶을 때 대개는 산 채로 넣는다. 그것이 표준 요리법이다. 아마 문어와 비슷한 낙지도 지능이 높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산낙지 투하’라는 검색어를 넣어보면, 방송 화면과 개인 블로그를 수도 없이 발견할 수 있다. 몸부림치는 산낙지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무엇이 선이고 옳은 일인지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더라도,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투하’라니. 이런 말은 군사용어 같다. 원자폭탄에 뒤따르는 말이 바로 이 단어가 아닌가.

 

 

꽃게를 삶는 방법도 그렇다. 뒤집어서 내장이 흐르지 않게 산 채로 넣으라고 한다. 가장 맛있게 삶는 법이라고 한다. 꽃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미리 죽여서 넣으면 맛이 없어지는지 실험이나 연구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그저 무의식중에, 아니 애초에 의식하지 않고 그런 요리법을 믿어왔다. 한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차제에 동물을 요리할 때 어떤 가이드라인이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도 많다. 현장에서 수많은 재료를 다루고 요리하는 요리사들에겐 이런 원칙이 필요하다. 재료를 죽이는 것이 요리사의 숙명인데, 경우에 따라 심리적 부담을 안는다.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그런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될 듯하다. 확장하면, 가축 도살에도 미친다. 요리사는 대개 고작(?) 해산물을 죽이지만, 그들이 쓰는 재료 중 하나인 고기는 도살장에서 도축된다. 그 일에 종사하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고,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을 그들이 대신해주고 있는 셈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가축 도살에 동물 윤리의 세세한 감정이 개입되어 있지는 않다. 건조한 룰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아직 논의하려고 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외면하고 있다. 효율이 우선되고 있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동물 윤리와 복지에 대한 촘촘한 규정이 만들어질수록 비용이 늘어난다. 그 비용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지에만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 있다. 한마디로 고기값이 오를 텐데 그래도 괜찮은가 하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윤리에도 돈이 드는 격인데, 다양한 논의가 있어야 이런 부담은 낮추면서 잡는 이나 먹는 이나 심리적으로 부담을 줄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풀어놓고 본격적인 얘기도 하기 전에 경제논리만 들이대서야 언제 인간의 일이 나아지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잡식동물이고, 먹을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건, 먹는 재료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선택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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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보백보’라는 말이 있다. 오십 보나 백 보나 별반 차이 없다는 의미다. 도토리 키재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큰 차이가 없으니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더 보란 뜻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비아냥으로 쓰인다. 뭐 대단한 차이가 있다고 호들갑이냐, 오십보백보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문화에 있어서 오십 보 차이는 엄청나다. 오십 보가 뭐냐, 단 열 걸음 차도 크다. 그 약간의 차이를 위해 다들 노력하고, 그렇게 한 오십 보쯤 먼저 나가는 사람을 천재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렇게 오십 보 내딛은 사람들이 문화의 코드를 만들어 낸다. 뒤샹이 처음으로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았을 때, 앤디 워홀이 수프 깡통을 그려내기 시작했을 때, 그게 바로 오십 걸음의 차이가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오십 보와 백 보의 차이에 민감해야 한다. 차이를 발견하면 그 점을 주목해 주는 게 소비자의 의무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너의 결혼식>과 <암수살인>은 약간 다른 발걸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영화 <암수살인>의 한 장면.

 

 

<너의 결혼식>은 멜로드라마이다. 두 남녀가 만나 호감을 느끼며 우여곡절을 겪다가 사랑하고 헤어진다. 만약 우여곡절을 겪다가 사랑을 이루는 데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아주 평범한 로맨스 영화로 남을 뻔했다. 하지만, <너의 결혼식>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헤어짐의 과정까지 보여준다. 이 헤어짐의 과정 속에서 영화는 로맨스에서는 멀어지지만 좀 더 현실적인 세계와 만난다. 성사가 아니라 이별이니 굳이 장르적으로 따지자면 로맨스가 아니라 멜로드라마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너의 결혼식>이 장애물을 두고 본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헤어질 수밖에 없는 뻔한 멜로드라마도 아니란 사실이다. <너의 결혼식>은 로맨스의 관습에서도 오십 보 더 나아가고 멜로드라마의 공식에서도 오십 보 나아간다. 그러므로 새로운 로맨스, 다른 멜로드라마로 차별화되는 것이다.

 

그 차별화는 바로 현실성에 있다. <너의 결혼식>은 전형적인 첫사랑 서사라고 말할 수 있다. <클래식> <건축학개론>과 같은 첫사랑 서사 말이다. 고등학생 황우연(김영광)은 전학 온 여학생 환승희(박보영)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우정과 사랑 사이 어디에서 감정을 쌓아가던 두 사람은 승희의 갑작스러운 이사와 그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복잡한 가정환경으로 멀어진다. 대학을 가고, 재회하게 되는 과정들은 코믹한 톤으로 시종일관 가볍게 흘러간다. 무거워지는 것은 대학 졸업 이후이다.

 

대개의 첫사랑 영화는 첫사랑의 순간과 현실을 점프 컷하듯 비약해서 그 차이와 변화를 강조한다. 순결했던 아이의 타락, 순진했던 아이의 환멸 과정에서 아이는 어른이 된다. 여기서 타락은 여자의 몫이고 성장은 대개 남자의 몫이다. <말죽거리잔혹사>에서 권상우가 어른이 되는 순간, 한가인은 어느새 삶에 찌들어 빛을 잃었고, <건축학개론>의 서연 역시 말똥말똥한 눈의 수지가 만취에 욕을 내뱉는 한가인으로 바뀐다.

 

하지만 <너의 결혼식>에서 바뀐 것은 오히려 남자 쪽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였지만, 그녀만 있으면 다 해결될 것 같은 세상에 다치고 패배하자 비겁하게 첫사랑과 결별하는 것이다. 그건 그녀, 환승희와의 결별이라기보다는 그녀를 사랑했던 자기 자신과의 이별에 더 가깝다.

 

여자가 변해서 남자가 성장한다는 식이 아니라 남자가 변해서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이 약간의 변화는 첫사랑의 오래된 관습을 무너뜨린다. 세상이 아니라 내가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오십 보의 차이에서 영화 <너의 결혼식>은 꽤나 어른스러운 멜로드라마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변화는 <암수살인>에서도 발견된다. <암수살인>은 드러나지 않다보니 집계되지 않는 범죄에 대한 이야기다.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는 범죄, 말하자면 영화 <버닝>의 해미(전종서)가 사라졌지만 종수(유아인) 외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상황과 비슷하다. <암수살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오십 보 차이는 바로 형사의 변화다. 대개 한국형 범죄영화에서 형사는 생활고에 찌들어 있거나 비리에 무감해져 있기 일쑤였다. 아니면 정반대로 통제 불능의 정의감으로 사고뭉치 취급을 받는 인물들이 많았다. <공공의 적>의 설경구나 <끝까지 간다>의 이선균, <VIP>의 김명민 캐릭터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암수살인>의 주인공 형사는 일단 가난하지 않다. 운 좋게 부자 아버지와 형을 둔 덕에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편이다. 고급 세단을 소유하고, 취미로 골프를 친다.

 

무엇보다 다 자비로 충당한다. 어딘가에서 돈을 뜯는다거나 횡령하는 게 아니라 당당히 자기 돈으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이 윤택함이 사건 수사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온다. 고과나 승진이 아니라 순전히 범죄에 대한 알 권리와 형사로서의 도덕적 의무, 인간으로서의 윤리적 책임에 의해 움직이는 유형의 인물이 태어난 것이다. 지금껏,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희한한 인물이 탄생한 것이다.

 

이 오십 보 차이로 인해 <암수살인>의 수사극은 완전히 달라진다.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형 주인공이나 그것을 추적해 가는 과정은 사실 기존의 수사극과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주인공의 약간의 차이로 인해 영화는 달라진다. 이 오십 보 차이가 변화하기 어려운 범죄영화의 관습에 또 어떤 차별성을 유발할지 기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십 보 백 보는 차이가 없는 게 아니라 오십 보만큼 차이난다. 오십 보가 아니라 십 보의 차이도 중요하다. 그 약간의 차이가 삶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이건 비단 영화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오십 보 나은 사람의 그 오십 보를 인정해줘야 한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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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어느 정부 때 환경부 장관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고른 장소는 놀랍게도 한 햄버거 체인점이었다. 그와 점심을 먹고 나니 쟁반 위에 온갖 일회용품이 가득했다. 그를 만나 나눈 얘기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쟁반 위에 쌓여 있던 알록달록한 쓰레기는 이미지로 또렷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일회용품을 거침없이 쓴다. 심리적으로 찜찜함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래도 되는 거야? 며칠 전에 한 행사에 갔더니 도시락을 나눠줬다. 먹고 나니 역시 한 보따리의 일회용품들이 남았다. 일회용 수저, 그 포장지, 국물을 담는 그릇, 반찬도 각기 다른 일회용 그릇에 담겨져 최종적으로 역시 일회용품인 ‘틀’ 안에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을 모두 담는 별도의 비닐포장지까지. 거기에다 페트병에 담긴 ‘생수’도 더해지고 말이다. 두 사람이 다 먹고 제공된 비닐에 담아보니, 쌀 한말들이 정도의 부피가 생겼다. 우리 마음에도 그만큼의 부담감이 쌓여버렸다.

 

 

일회용품은 번다한 일상을 간편하게 해주지만, 반드시 두 가지 후유증을 남긴다. 물론 하나는 환경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죄책감이다. 민감한 사람들은 이런 문제로 심리적 통증까지 겪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래도 되는 거야?’

 

지난 여러 정부에서 일회용품 금지 법률을 ‘규제 완화’라는 명분으로 풀어버렸다. 일상적으로 들르는 커피숍에서 일회용품에 음료를 담아 소비했다. 그렇게 10여 년간 버린 쓰레기가 얼마이며, 일회용품을 생산하기 위해 쓴 에너지는 또 어느 정도이겠으며, 다시 재활용하기 위해 쓰는 비용과 환경오염 문제는 얼마나 심각했을지 가늠키조차 어렵다. 일회용품 문제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수거와 재활용을 잘해도 후유증이 남는다는 사실이다. 재활용을 100% 할 수도 없고, 하더라도 열처리를 해야 하므로 환경오염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요즘 미래 세대에 주는 부담으로 꼽는 지구 기상 대이변의 주범인 ‘온실가스’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런 우려로 다시 일회용품 규제가 시작됐다. 환영하는 이들도,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작 일선의 커피숍에서 머그잔과 유리잔을 써보니 반대하는 이들의 우려와는 달리 ‘아무 문제 없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더운 커피는 환경호르몬이 녹아 나오니 어쩌니 염려를 벗어나서 더 맛있게 느껴졌다. 아이스커피는 투명한 유리잔이 주는 촉감까지 상쾌해졌다. 혹시 스스로에게 묻게 되지 않던가. 아니, 그동안 왜 그렇게 일회용품을 써야 했지? 아무 문제 없잖아?

 

사실 지구상에서 가장 일회용품을 많이 쓰는 나라는 미국이다. 게다가 재활용률은 형편없이 낮다. 우리는 이른바 경제발전국 중에서 일회용품 사용률은 낮고, 재활용률은 높다. 우리가 아무리 일회용품 사용을 줄여도 거대 에너지 사용국인 미국이 시큰둥하면 지구 환경 악화를 막는 데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것이 우리의 진짜 고민이다.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어쨌든 머그잔에 담긴 커피는 더 맛있으니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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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스릴러 드라마 속 악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 한국드라마에서 범죄스릴러는 우리 시대의 악을 꾸준히 탐구하면서 대세로 떠오른 장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배경으로 사회 곳곳의 의문의 죽음과 그 원인을 해부한 김은희 작가의 <싸인>(SBS, 2011), 2012년 거대권력이 은폐한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박경수 작가의 <추적자>(SBS, 2012)의 성공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 이전까지 주로 기이한 연쇄살인범과 대결을 벌이던 범죄스릴러는 <싸인>과 <추적자> 이후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극적 성격이 강화됐다. “세상이 미쳐 날뛰는데 내가 어떻게 진정을 합니까”라는 <추적자>의 유명한 대사처럼, 검은 커넥션을 통해 지배력을 점점 더 공고히 하는 기득권층을 향한 분노가 사회파 범죄스릴러 붐을 불러왔다.

 

영매와 구마 사제가 주인공인 OCN 드라마 <손 the guest>.

 

 

그런데 최근 범죄스릴러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초월적 악의 등장이다. 악귀, 빙의, 주술 등과 같은 오컬트나 사이비 종교가 자주 소재로 다뤄지고 있다. 귀신 보는 형사의 수사극 <처용>(OCN, 2014~2015), 생령과 퇴마사의 악귀 퇴치극 <싸우자 귀신아>(OCN, 2016), 사이비 종교 집단의 만행을 고발하는 <구해줘>(OCN, 2017), 신기 있는 형사가 과거의 집단학살 사건을 추적하는 <작은 신의 아이들>(OCN, 2018), 영매와 구마 사제가 주인공인 <손 the guest>(OCN, 2018), 유령 탐정과 무당 출신 부검의가 등장하는 <오늘의 탐정>(KBS, 2018) 등이 몇 년 사이에 쏟아져 나온 오컬트, 사이비 소재 드라마다. 원래대로라면 호러, 판타지적 소재를 범죄스릴러처럼 풀어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악령은 주로 가정폭력, 아동학대, 집단 따돌림, 성폭력 등과 같은 사회문제로부터 출몰하고, 초자연적 존재를 이용해 악행을 벌이는 권력 집단도 등장한다.

 

범죄스릴러에 초월적 악의 존재가 기승을 부리게 된 배경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앞서 나열한 대부분의 작품이 장르 전문 채널 OCN 드라마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장르물 진화의 한 결과다. 근래 들어 여러 장르적 요소를 한꺼번에 녹인 복합장르드라마가 유행하는 가운데 극적 소재를 넓히는 과정에서 호러, 오컬트처럼 기존에 별로 다뤄지지 않았던 매니악한 장르들까지 점점 다채롭게 뒤섞이고 있다. 올해 방영된 <작은 신의 아이들>은 과학 수사물에 샤머니즘을, <손 the guest>(이하 <손>)는 형사 수사물에 샤머니즘과 엑소시즘을, <오늘의 탐정>은 탐정 추리물에 샤머니즘, 언데드 소재까지 결합했다.

 

스릴러의 범죄 묘사가 갈수록 자극적으로 변하는 경향도 악령의 유행에 영향을 미쳤다. 다중인격 살인마,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넘어 악령의 등장은 초자연적 성격을 빌미로 더 잔혹한 범죄 묘사를 가능하게 했다. <손>과 <오늘의 탐정>의 첫 살인 장면이 공통적으로 으슥한 심야의 뒷골목이나 외떨어진 공간이 아니라 대낮에 많은 사람이 여가를 즐기는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벌어졌다는 점을 주목해보자. <오늘의 탐정>에서는 생령의 조종을 받은 레스토랑 직원이 생일 축하 행사가 벌어지는 테이블에서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목을 찌르는 장면이 그려졌다. <손>에서는 휴양지에서 가게 홍보 전단을 돌리다 악령에 빙의된 중년 여성이 전단지를 차갑게 내친 젊은 여성을 친구들과 함께 노는 해변에서 잔혹하게 살해했다.

 

더 주목할 만한 배경은 시대와의 연관성이다. 범죄스릴러 드라마의 악은 늘 동시대의 그늘을 대변했다.

 

사회파 범죄스릴러 유행의 배경에 부패한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면, 요즘의 오컬트 스릴러 붐 현상은 이른바 ‘탈진실의 시대’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옥스퍼드사전이 2016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면서 전지구적 화두로 급부상한 ‘탈진실 시대’는 개인의 감정과 신념이 객관적 사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상황을 말한다.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가 하는 문제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가가 중요해졌다. 이미 정부 기관이 나서서 가짜 뉴스를 유포하며 여론을 조작하고 주술 정치를 적극 실천한 정권을 경험한 우리나라에선 더 깊이 와닿는 화두다.

 

시대의 산물인 범죄를 탐구하는 스릴러가,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려진 시대에 보이지 않는 힘에 주목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범죄와 맞서 싸워야 하는 주인공들도 모두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손>의 주인공 윤화평(김동욱)은 종종 악령과 감응하고, 또 다른 주인공 최윤(김재욱) 역시 구마 사제의 특성상 “나쁜 것들을 접하니까 몸도 영혼도 점점 아파진다”는 경고를 받는다. 형사 강길영(정은채)은 범죄 피해자 가족이라는 아픔 때문에 범인에게 과도한 폭력을 행사한다. 그런가하면 <오늘의 탐정>의 주인공 이다일(최다니엘)은 귀신이 되어 점점 어둠의 힘에 가까워지고, 정여울(박은빈)은 생령을 없애기 위해 살인을 결심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주인공들의 이 같은 성격은 오히려 ‘탈진실 시대’의 악에 맞서는 효과적인 대처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보는 것이 쉽게 진실이라 믿는 태도가 ‘탈진실 시대’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오늘의 탐정>에서 악령 선우혜의 위험함을 경고하는 이들이 하나같이 ‘나쁜 말을 믿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끊임없이 진실이 무엇인지 의심하는 태도야말로 가장 객관적 진실에 근접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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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추석이면 추석영화들이 마련된다. 극장에는 한국의 전통적 성수기를 노린 작품들이 걸리고, 집에서도 각 방송사가 준비한 추석특집 영화들이 방영된다. 일순간 너무 많은 영화들이 쏟아져 어떤 것을 보아야 하나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다양한 선택이 기쁘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다양한 선택이 다양한 음식으로 채워진 뷔페처럼 만족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는 어마어마하게 식욕을 자극하지만 막상 한 바퀴 돌고 나면 헛배가 부른 듯한 기분. 차라리, 정성껏 마련된 단품 요리를 먹을 걸 그랬나, 하고 후회가 드는 그런 기분 말이다.

 

영화 <체실 비치에서>의 한 장면.

 

영화 보기는 먹기와 같은 본능적 행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수기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여러모로 욕구와 충동을 자극한다. 대형 광고판에 선명한 해상도를 가진 사진들이 걸려있고, 소위 대형 배우들의 얼굴이 나란히 포진해 있다. 예고편이나 기사, 평론들도 있지만 일단 그렇게 걸려 있는 얼굴들을 보며, 어떤 영화가 재미있을까 고민하기 마련이다. 최종 선택은 대부분 직관적이다. 어떤 게 더 재미있을까, 어떤 게 볼만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직관대로 결정하는 것이다.

올해 추석영화관이 특히 그러했을 것이다.

 

올 추석에는 세 편의 사극과 두 편의 장르물이 개봉됐다. <물괴>는 추석 한 주전, <협상> <안시성> <명당>은 추석연휴 직전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더풀 고스트>가 연휴 마지막에 개봉됐다. 김명민, 손예진, 현빈, 조인성, 조승우, 마동석, 김영광에 이르는 화려한 라인업은 말 그대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배우들은 나름의 홍보전에 뛰어들었고, 연일 보도자료로 각 영화들의 흥행성과가 전달되었다. 시장의 규모만 보자면 추석 극장가 관객은 1300만명으로 추정되었다. 영화 모두가 손익분기점을 넘기려면 적어도 1700만 관객 정도가 필요하니, 이는 이미 레드오션이고 과열경쟁이 예고된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영화들이 개봉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기억에 남는 단 하나의 작품은 없다. 제작비나 제작사 및 배급사의 규모, 배우들의 면모를 봐서 평균작 이상이 분명 나올 만한데, 다섯 작품 모두 도토리 키 재기 하듯 고만고만하니 주목을 끄는 작품이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의 캐릭터가 거의 비슷하다. 인간이 가진 복잡성이나 예민함을 모두 깎아내버린, 밋밋한 사람들이 전부인 셈이다. 주인공들은 모두 정의롭고 정직하며, 그 반대에 있는 사람들은 세속적 야망을 불태운다. 이런 이분법 안에서 인간은 순수하고 정의로운 인간 아니면 악하고 이기적인 인간, 둘로 나뉜다.

 

어떤 관객이라도 스스로를 이기적인 악당 편에 두고 몰입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선하고 올바른 쪽이 나의 그림자일 것이라 여기며 그것에 동일시한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정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는 것일까? 인간의 내면이라는 게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평면적인 것일까?

 

영화 <체실 비치에서>를 보며 오랜만에 신선한 당혹감을 느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신혼여행 첫날 밤 급격하게 서로에게 환멸을 느끼고 멀어지는 두 연인을 보여준다. 카메라의 앵글로 치장되거나 꾸며진 정사 장면들과 달리 이 신혼부부의 첫날밤, 첫 정사는 보는 이들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외설적이거나 선정적이어서가 아니다. 마치 무방비 상태의 맨 얼굴처럼 카메라는 우리가 그다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순간을 침범해 들어간다. 거기엔 우리가 돌이키고 싶어하지 않는, 상처와 부끄러움과 미숙함이 있다. 매끈하게 세련되고, 다듬어진 가상의 인간이 아니라 투박하게 벼려진 날것 그대로의 인간이 있는 것이다.

 

이언 매큐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속 두 사람은 우리가 여느 영화에서 보아왔던 연애와 결혼의 주인공들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당혹스럽지만 그렇기 때문에 반갑다. 오히려 너무나 완벽하게 정의로 꾸며진,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부끄럽거나 민망한 순간이 없는 듯한 추석영화 속 주인공들보다 더 위안이 되기도 한다. 추석영화 속 주인공들이 우리가 되어야 할 가상의 인간형을 추구한다면, <체실 비치에서>의 두 연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견지해야만 하는 우리와 닮아 있다. 인간은 위대하지만 대체로 엉망진창이며, 때로는 너무 부조리하다. 그들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그렇고, 나도 그렇다.

 

<체실 비치에서> 남자 주인공 에드워드 역을 맡은 빌리 하울은 “내가 가장 관심 있는 것은 빛, 심지어 경박함을 때로는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나는 불합리에 매료되었고, 부적절한 반응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종에 속해 있음을 알고 그 인간의 속성에 대해 어지간히 고민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완벽한 외모와 보편적 정의로 조형된 주인공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런 인물들은 정작 온기와 위로를 주지 못한다.

 

물론 모든 영화들이 이렇게 예민하게 인간의 복잡성을 파고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섯 편, 여섯 편 아무리 많은 작품들이 개봉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복잡함과 모순을 보여주는 작품이 단 하나도 없다면, 그건 다양한 영화관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진다고 해도 그건 다양하지 않다. 올해 추석 개봉 대작들이 고만고만하니, 기억에 남지 않는 이유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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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에 명절에는 만두를 빚는다 하였는데, 어디까지나 한수 이북의 일이다. 남쪽의 만두는 중국인들의 몫이었다. 동네에 화교가 좀 살았는데, 명절에 푸짐하게 만두를 빚었다. 엄밀히 말하면 파오츠(包子)였다. 만두(만터우)는 화교들에게는 속을 채우지 않는 일상의 밀가루 음식이었다. 발효시켜 부풀린 후 쪄서 밥으로들 먹었다. 그걸 얻어먹어본 적도 있다. 짭짤한 나물과 채소 볶은 것을 그 밀가루 만두, 실은 빵이라고 할 음식에 얹어 먹었다. 소 없는 만두란 참 심심했지만, 부풀린 반죽이 씹히는 결이 인상 깊었다. 그 만두를 잊지 못해서 대림동 상가에 종종 가기도 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진짜 ‘만두’를 판다. 거대하게 부풀려서 왕만두라고 해야 할 밀가루 빵을 팔고 있는 것이다. 민족이 정주지는 바꾸어도 음식은 쉬이 바꾸지 않는다.

 

 

내가 집에서 만두를 먹게 된 것은 호기심 많은 어머니 덕이었다. 집에서 만두를 빚지 않는 남쪽 고향 출신의 어머니는 서울에서 이북식 만두를 배웠다. 어른 손바닥만 한 만두를 빚었다. 세 개만 먹어도 어른이 배부를 크기였다. 비계 섞인 돼지고기를 넉넉히 넣고 부추를 엄청나게 많이 넣는 것이 바로 이북식이라고 했다. 두부는 거의 쓰지 않았고, 겨울엔 김치로 만들었다. 역시 부추를 넣은 여름식 만두가 맛있었다. 소가 아무리 좋은들 만두피가 더 중요한 몫이란 걸 만두를 직접 빚으면서 알았다. 반찬이 좋은들 밥이 나쁘면 별무소용인 것처럼.

 

미련한 짓이었지만, 학창 시절에 많이 먹기 겨루기의 대상은 만두였다. 스테인리스나 양은 찜통에 9개씩 담긴 찐만두를 몇 개나 먹나 다퉜다. 하필 찐만두가 선택된 것은 아마도 차곡차곡 높이 쌓이는 찜통이 보기에도 그럴싸했을 것이고, 만두의 개수로 자랑 삼기 쉬웠기 때문일 것 같다. 찜통이 탁자 위로 끝없이 솟았다고 허풍을 쳤으며, 찐만두를 모두 세어보니 100개를 먹었네, 200개를 먹었네 했다.

 

마침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다. 그쪽의 만두 사정은 어떨지 궁금하기만 하다. 황해도는 만두를 예쁘게 빚고 평안도로 가면 커지고 투박하다고 했다. 신의주까지 북상하면 왕만두가 있다고 했다. 중국 국경으로 갈수록 만두가 커지고 터프해졌다고 한다. 먹어볼 수 없으니 이 또한 막막한 일이다. 전에, 단둥까지 가서 거리 만둣집에서 요기했다. 엄청나게 큰 만두를 두 개 담아 1인분으로 팔았다. 기름이 줄줄 흐르는 맛있는 만두였다. 그 가게에서 이북으로 건너가는 압록강 철교는 보이지 않았지만, 북한 만두도 비슷하겠거니 하고 먹었다. 언젠가 강헌 선생이 얘기한, 황해도 만두의 전설도 보고 싶다.

 

겨울이면 돼지를 잡고, 만두를 빚은 후 무명실에 꿰어 차가운 바람이 들이치는 처마에 매달아 얼렸다는 전설의 만두를. 대통령이 가고, 문화예술인이 가니 우리 또한 갈 기회가 없겠는가. 대동강가에서 철갑상어 요리도, 숭어국도 좋지만 나는 만두가 먹고 싶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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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전시회 첫 번째 순서에는 그가 지금껏 만들었던 영화 음악과 영화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 재해석을 담아 놓은 영상물이 자리잡고 있다. 익숙한 선율에 어우러진 영상들은 대개 외국의 영화들이다. 그중 낯익은 한국 영화가 한 편 있는데, 바로 <남한산성>이다. 2017년, 작년 이맘때쯤 선보였던 영화 <남한산성>은 드물게 패배의 이야기이다. 그것도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전시를 위해 편집된 짧은 화면 속에서도 인물들은 모두 좌절과 패배감에 젖어 있다. 그 표정은 가히 굴욕에서 빚어져 나오는 슬픔과 회한이라 할 만하다. 여기엔 허구적 과장이나 영화적 복수 같은 게 있을 틈이 없다.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흥행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패배한 치욕의 순간을 재연해 확인하고, 다시 한번 굴욕감을 경험하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니 진짜 어른이라야 그런 패배감을 감당할 수 있다.

 

영화 <협상>의 한 장면.

 

2018년 추석 영화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승리의 결말을 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중 영화는 우리가 실제 경험하기 어려운 통쾌한 성공을 자주 보여준다. <암살>에서 김구 선생의 지령을 수행할 수 있는 것도, <내부자들>에서 내부 고발자가 안전할 수 있는 것도 사실보다는 허구적 정의에 더 가깝다. 옳다고 현실에서 이뤄지리라는 법은 없다. 음모나 술수, 협잡의 달인들이 오히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 권력을 잡곤 한다. 힘에 혈안이 된 낭인들이기에 뭔가 손에 잡히면 휘두르기 마련이다.

 

덕으로 보나, 의로 보나 그 몫에 값하지 못하는 자들이 가당치 않은 권력과 재력을 갖고 남용하고, 탕진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만큼은 그들은 혼쭐이 난다. 벌을 받고, 망신을 당하고, 법의 심판을 받는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더욱 영화적 정의라도 갈급하는지 모르겠다. 홍길동이 조선에서 찾을 수 없었던 정의와 법을 율도국에 세우는 것처럼 우리는 영화 속에서 나름의 율도국을 찾고자 한다.

 

<협상> <물괴> <명당>과 같은 추석 영화들은 모두 하나같이 정통 장르 영화임을 강조한다. <물괴>는 사극과 크리처물의 결합이 처음임을 강조하고 <명당>은 역사와 액션, 스릴러, 민속학의 결합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협상> 역시 한국 영화 사상 거의 볼 수 없었던, 협상가를 등장시켜, 새로운 범죄 스릴러의 지평을 열겠노라고 선언했다.

 

세 작품 모두 겉모습을 보자면 스스로 천명한 장르에 부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괴>에는 정성껏 컴퓨터 그래픽으로 손본 괴물이 등장하니 크리처물이 맞고, <명당>은 실존했던 흥선군과 풍수지리를 연결시켰으니 새로운 역사극이라 볼 수 있다. <협상> 역시 지금껏 협상가를 내세워 그 과정을 전면화한 작품이 없었으니 새로운 게 맞긴 하다.

 

문제는 그 겉모습, 장르적 관습이나 에피소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들 즉 메시지에 있다. 이를테면, 장르로 즐기는 대중 영화라면 사필귀정, 일벌백계의 결말로 꼭 가야 하는 것일까? 눈에 보이는 범죄 뒤에 권력의 구조적 부패가 있다는 식의 전개나 그러므로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와 같은 결말로 수렴되어야 하느냐란 말이다.

 

<물괴>에는 왕을 흔들려는 대신들이 등장하고, <명당>에는 자신들의 권세로 왕권을 더욱 짓밟는 장동 김씨 집안이 등장한다. <협상>에도 온갖 협잡을 일삼는 정부 고위 관료들이 잔뜩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물괴>는 괴물과 싸우고, <명당>은 집안의 원수와 싸우며 <협상>은 인질범과 대립하지만 이 작품 모두 마지막에 가서는 구조적으로 깊이 뿌리박혀 있는 적폐와 싸운다. 하나같이 적폐청산을 시원한 카타르시스적 결말로 제시하고자 한다.

 

영웅이 우주를 구하는 게 할리우드 대중 영화의 문법이라면 소시민이 적폐를 청산하는 게 바로 한국 영화의 판타지이다. 좋다. 하지만 언제까지 영화적 판타지로만 적폐는 청산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직 적폐를 청산하기는커녕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있는데, 영화는 그런 것은 영화가 해 줄 테니 우선 우리 시원하게 허구적 청산을 즐기자고 권유한다. 아예 불가능할 때엔 그러니까 정권 교체가 있어야만 가능할 때엔 그런 허구적 판타지가 갈증을 달래주는 서사적 정의가 되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때 판타지는 대중의 갈망이었고, 다가올 정의의 촉진제였다. 역사 속에서 찾아낸 작고도 놀라운 승리의 기록들이 대중에게 주었던 감동도 그런 것이었고, <베테랑>의 마지막 장면이 허황되지만 통쾌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젠, 영화적 승리로 만족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는 안되는 시점에 왔다. 사회적 정의 구현을 현실이 아닌 만화적 판타지로 활용해 싸구려 카타르시스로 제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니 이미, 관객들은 만드는 사람보다 훨씬 더 똑똑해서, 청산을 가장한 저속한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 <상류사회>의 변태적 계몽주의가 관객에게 외면받았던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영화적 허구는 대중이 느끼고는 있지만 아직 인식하지 않은 문제를 풀어낼 때 판타지로서 효력을 가질 수 있다. 이젠 허구가 아닌 현실에서 정의를 구현해야 할 시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구적 해결에 만족하자는 제안은 안일한 상업주의에 불과하다. 가짜 승리의 거짓 환희보다는 진짜 패배의 모욕감을 돌아보는 게 훨씬 더 성숙한 일이다. 패배의 오욕을 견딜 수 있어야 승리도 지킬 수 있다. 가짜 성취를 판매하는, 한국형 대중 영화의 판타지가 어느 새 한국 영화의 적폐가 되어가고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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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성가족부 장관에 내정된 진선미 의원은 “‘가부장제 이후’의 새로운 문화와 제도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올해 초부터 우리 사회를 뒤흔든 미투 운동이 가부장적 지배구조의 오랜 적폐를 향해 준엄한 심판을 촉구한 데 이어, 지금 이 시대의 시급한 화두가 성평등에 있음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발언이다.

 

이 같은 시대정신은 요즘 드라마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동안 K-드라마는 열성적인 한류 팬들마저도 성역할 고정관념 강화, 데이트폭력 미화 등을 비판할 정도로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 문화를 공고히 하는 주범으로 지적당해 왔다. 그런데 요 몇 년 사이에 이러한 관습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해 여가부의 제작 지원을 받아 여성 아동 성범죄를 집중 조명한 KBS <마녀의 법정>을 비롯해, 직장 내 미투 운동을 그려낸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법조계의 남성중심적 질서를 비판한 JTBC <미스 함무라비> 등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성차별 문화와 그 부작용을 정면으로 폭로하는 드라마들이 연이어 나오는 중이다. 비록 문제제기가 모두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극적 갈등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문제로 가시화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SBS 드라마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의 한 장면.

 

현재 방영 중인 SBS 토요드라마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이하 <그녀로>)도 이러한 경향 안에 위치한 작품이다. 기억상실, 복수, 불륜, 재벌, 고부갈등 등 통속극의 클리셰로 뒤범벅된 스토리를 따라가면서도, 가정폭력을 비롯한 가부장제의 심각한 폐해를 정면으로 다뤄 눈길을 끈다. 드라마의 시작은 누군가로부터 살해 위협에 시달리던 여성이 생존을 위해 성형수술을 감행한 뒤 마취에서 깨어나는 장면이다. 눈을 뜬 그녀는 수술의 후유증으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린다. 스스로 탐정이 되어 미스터리를 풀어가던 여자는 돌아온 기억과 함께 충격적인 진실을 깨닫게 된다.

 

성형수술 뒤에 딴 사람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복수한다는 설정은 외국 드라마 <에덴으로 돌아오다>와의 유사성이 지적되기도 하나, <그녀로>가 직접적인 영향을 밝힌 작품은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1991년 개봉 영화 <적과의 동침>과 고전 동화 <푸른 수염>이다. 공통점은 가부장제의 금기와 폭력 그리고 여성들의 탈출에 있다. <그녀로>는 여기에 기억을 잃은 여성의 정체성 찾기 플롯으로 흥미를 더했다. 이 기억상실 모티브는 통속극의 흔한 클리셰가 아니라 가부장제 안 여성들의 실존을 은유한다. 기억을 잃고 가사도우미가 된 지은한(남상미)은 그저 아내, 며느리, 엄마의 역할에만 충실하던 과거의 자아상실 상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녀가 기억상실 상태에서도 본능적으로 시어머니와 남편의 까다로운 취향을 읊어대는 장면은 가부장제의 억압이 얼마나 뿌리 깊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단적인 사례다.

 

지은한이 기억을 찾는 것 역시 억압받는 여성이 자신의 현실을 인식하고 각성하는 과정처럼 전개된다. 그녀는 관찰자로서 집안의 이상한 규칙과 금기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다. 재벌가의 며느리이자 유명 앵커의 아내로서 순종할 것을 강조하는 강찬기(조현재)에게 “기억나지도 않는 나를 연기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반박하는 장면이나, 집안을 “새장”이라 표현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특히 집안 곳곳에 감시용 폐쇄회로 카메라를 설치한 강찬기의 모니터실을 발견하고 카메라에 비친 남편을 노려보는 장면은 시선의 역전을 통해 각성의 극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진실을 깨달은 지은한의 복수가 기존의 여성 중심 복수극에서 한 발 더 나간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동안의 여성 중심 복수극 장르는 버림받고 추방당한 아내들의 서사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가장 성공한 여성 복수 드라마로 꼽히는 김수현 작가의 <청춘의 덫>이나 김순옥 작가의 <아내의 유혹>만 봐도 가족제도 안에 안착하지 못하고 배신당한 채 밀려난 여성들의 이야기다. 이러한 복수극은 남편과 시부모의 학대로 억울하게 죽은 아내들의 원혼이 한풀이하는 여귀 복수 서사의 오랜 전통을 따른다. 그 안에 녹아든 것은 가부장제로 인한 기혼 여성들의 억압된 욕망과 분노다.

 

그런데 근래에는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더 적극적으로 균열을 내고 응징하는 이야기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추세다. <아내의 자격> <굿 와이프> <품위있는 그녀> <미스트리스> <시크릿 마더> 등 최근 기혼 여성 중심 서사들이 이 같은 경향을 보여준다. 여기에 가세한 <그녀로>는 가부장제의 가장 추악하고 어두운 밑바닥을 체험한 여성이 그 폭력적 실체를 폭로하고 탈주하는 이야기다. 강찬기가 ‘이 시대의 참 언론인’이자 ‘대한민국 주부들의 워너비 남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라는 점도 공적 고발과 응징에 맞춤한 설정이다.

 

물론 이 작품 역시 통속극 특유의 한계가 적지 않다. 가령 지은한의 얼굴을 수술한 성형외과 의사 한강우(김재원)가 강찬기와 대립하며 주요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은 가부장제의 폭력을 심판하는 것도 여전히 남성 권력이라는 씁쓸한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지은한을 죽이려 하는 ‘악녀’ 정수진(한은정)의 행동이 결국 강찬기의 아내 자리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됐다는 설정이나 한강우를 배신한 전 애인 송채영(양진성)이 모성보다 커리어를 중시해서 비난받는 대목 등도 여성혐오적이다.

 

이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녀로> 또한 미투 시대에 여성 폭력 문제를 적극적으로 가시화하고 가부장제의 적폐를 고발한 작품이라는 의의를 남긴다. 이러한 한계를 딛고 ‘가부장제 이후’를 상상하는 드라마들이 나올 때가 됐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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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복지란 말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다. 법률 이름에도 쓴다. 특히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개에 관한 논의가 많다. 사람 눈에 잘 띄고, 오랜 애호 역사가 있는 까닭이다. 심지어 기르던 개를 잡던 시절에도 차마 제 손을 쓸 수 없어서 먼 곳의 개와 바꾸기도 했다. 개 식용 논란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게 하나 있다. 대부분의 식용 개는 음식이 될 목적으로 처음부터 사육된다는 점이다. 하나 축산 관련법에는 빠져 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와중에 이들 사육견의 고통은 말도 못한다. 개고기 식용을 금지하느냐 아니냐를 떠나 대부분 최소한의 사육 환경을 지키지 않는 게 보통이다. ‘지킨다’는 말에도 어폐가 있다. 이것은 법률이 아니라, 그저 인간의 양심의 한계를 의미한다. 생명을 가진 것들에 대한 인간의 연민 같은 걸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육장마다 제각각이고, 개들에 대한 연민도 결국 돈으로 바꿀 인간의 욕망 앞에서, 또 효율 앞에서 무너지게 마련이다. 개는 법의 사각지대에서 돼지와 닭보다 훨씬 나쁜 환경에서 지낸다. 개고기 식용 금지냐 아니냐 이전의 현실적 문제다. 어쨌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많이 먹는 ‘공식’ 육종은 어떤가. 며칠 전 뉴스에서 베트남의 돼지 도살 문제가 떠올랐다. 마을의 오랜 축제에서 돼지를 노상 도살하는 문제가 언급된 것이다. 인권, 환경단체에서는 이것이 축제에 참가한 아이들의 정신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우려를 표했고, 마을 어른들은 전통의 문제이니 참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 것이다. 세상의 많은 일은 늘 다른 시각의 충돌을 일으킨다. 제주도에서도 전통적으로 돝추렴이 있었다.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돈을 모아 돼지를 잡아 나눠가지는 행사를 말한다. 이 역시 동물복지 논란에 의해 중지되었다. 이것은 법률에 의해서도 불법이니 큰 반발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저변에는 도대체 해준 것도 없는 ‘뭍’의 권력이 왜 제주사람이 전통적으로 돼지 잡는 것에까지 관여하느냐는 불만이 있었다.

 

돼지와 닭, 소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지 일일이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농장’의 모습은 사실상 찾아보기 힘들다고 보면 된다. 그곳에는 상상할 수 없는 괴로운 노동이 존재한다. 사료비가 곧 이익이 되기 때문에 생기는 악성 효율, 그 효율에 맞추기 위한 학대, 다시 거기서 발생하는 인권 문제도 있다. 동물을 다루는 데 웬 인권이냐고. 노동 환경 자체가 동물을 학대하기 쉬운 조건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은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건 돼지 잡는 ‘축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를 시작하자 해도, 당장 입에 넣을 치킨과 삼겹살 값도 없는데 동물복지 운운이 무슨 사치냐는 말도 나온다. 실은, 이런 모든 문제는 자본에서 비롯한다. 돼지와 닭까지도 세계화와 자본의 ‘수직계열화’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치킨집 사장의 눈물, 배달앱의 개입, 실업과 청년문제까지 단 하나도 허투루 볼 수 없는 우리 사회 문제가 나선형으로 꼬여 있다. 장차 이 일을 어찌 할 것인지 막막하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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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사회: 사회적 지위나 생활수준이 높은 사람들의 사회. 상류사회는 매우 모호한 말이다. 크다, 예쁘다와 같은 말들이 대표적인데, 도대체 얼마만큼 커야 큰 것이고 어떻게 생겨야 예쁜 것인지 명확한 기준이 없다. 대체로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합의로 통용되는데, 상류사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류는 무엇을, 어디까지를 가리키는 것일까?

 

상류라는 말에는 이미 위계가 자리 잡고 있다. 상류가 있으면 하류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상류사회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표준적 위계이기에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가령, 최근 방영되고 있는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여주인공인 고애신은 명망 높은 사대부 가문의 딸로 저잣거리의 누구든 알아보는 상류계층 ‘애기씨’로 살아간다. 반면 그녀의 약혼자인 김희성은 한성 최고의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명망 높은 가문의 반열엔 끼지 못한다. 심지어 포수인 승구는 고애신의 스승이지만 하대하는 것은 당시로선 강상죄에 준하는 불법이다. 2018년 영화 <상류사회>에서 ‘상류사회’는 철저하게 ‘돈’으로 나뉜다. <상류사회> 속 상류사회는 재벌기업과 국회의원의 세계로 압축된다. 돈과 권력, 이 두 가지가 바로 변혁 감독이 생각하는 현재적 위계질서의 근간으로 보인다.

 

영화 <상류사회> 메인 포스터

 

사대부 가문, 공작, 백작처럼 타고난 사회적 지위들은 이름 앞에 붙여둠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데 쓰이곤 했다. 작위가 있으면 상류, 없으면 하류, 이런 식으로 나누기 간편했던 것이다. 문제는 소위 상류계층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적 표준이나 관습이 지속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격차를 각인시키고자 한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노비됨이나 백정됨을 강조하는 양반들이 그렇고 <상류사회>에서 “우리는 너희와 달라”라면서 갑질을 하는 재벌가 내외가 그렇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란, 아니 적어도 이야기는 이런 상류사회를 전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전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전복은 돈과 권력으로 결코 가질 수 없는 덕과 선을 제시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 세상을 관찰할 줄 아는 균형 잡힌 시선과 태도가 바로 예술가의 이야기인 셈이다. 예술가가 성자나 도덕군자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남다른 관찰력으로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면모들을 밝히고, 삐딱한 거리감으로 통념을 흔드는 것에 더 가깝다.

 

영화 <상류사회>의 실패는 바로 여기서 빚어진다. 영화는 상류사회의 민낯을 보여준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기괴함을 전시하는 데만 열중한다. 여기엔 감독의 관점이 없다. 영화는 급조한 설교로 관객들을 도덕적으로 계몽하고자 한다. 심지어 상류를 꿈꾸는 사람이든 상류에 머무는 최고 권력층이든 모두 성욕의 노예라는 식의 일반화도 감행한다. 상류든 중류든 하류든 성욕에 시달리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식의 위험한 동일시를 시도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도덕과 선을 가르칠 수는 없다. 가르쳐서도 안된다. 하지만 우리가 세속적 기준으로 무시하는 인물들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덕을 보여줄 필요는 있다. 세상이 부와 권력, 명성의 렌즈만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면 예술가는 다른 렌즈로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영화에 요구하는 것은 훔쳐보기가 아니라 그 다른 관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시기보다 계층이나 계급, 사회적 지위에 민감한 시대를 살고 있다. 고애신이 살던 조선말기 무려 500여년 지켜져 왔던 위계질서가 고통의 근대사 속에서 한꺼번에 무너졌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는 유례없던 능력주의의 시대를 경험했다. 지성과 체력, 용기와 운을 갖춘 창의적 인물들이 새로운 상류계층을 형성할 수 있었던 시기를 누렸던 것이다. 적어도 그때엔 공부만 잘해서 판사, 검사, 의사가 되고 그러면 집안도 나아지고, 살림살이도 나아질 것이라 믿었다. 대학만 졸업하면 살아갈 만한 직장을 구할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자기계발과 능력이 통하기도 했던 시절인 셈이다.

 

물론, 능력주의 시대는 만만치 않은 멀미와 현기증을 선사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이나,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같은 훌륭한 대작들은 이러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다. 더 나은 계층에 오르고자 하는 역류의 고통과 세속적 세상의 갈등을 그려냄으로써 이 작품들은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해 주었다. 서정인, 최인훈, 김승옥이 그려냈던 세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제 능력주의의 시대는 끝났다. 한때 우린 계층의 역류를 꿈꾸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노라며 다짐하기도 했지만, 어느새 역류는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상류사회>에서처럼 이젠 변호사도 대기업 사모님의 발을 주물러야 하며, 의사도 <라이프>처럼 대기업 상속자의 구미를 맞춘다. 적어도 더 나은 삶이라고 믿었던 약간의 성장이 달라진 돈과 권력의 위계질서 안에서 별것 아닌 게 된 셈이다. 지위, 재산, 권리, 상속받을 수 있는 재산에 따라 상류사회가 나뉜다면 이건 아예 접근이 불가능한 것이다. 3대를 넘어 세습되고 축적된 부는 견고한 울타리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예술가라면 더욱 이 조악한 세상의 위계를 의심해야 하고 다른 제안들을 해야만 한다. 제인 오스틴이 당시의 갑들을 감싸는 듯하지만 결국 그들의 위선이나 불안을 뛰어넘는 비천하지만 도덕적 인물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듯이, 우리는 이 시대의 새로운 기준을 발견해야만 한다. 탐욕이나 욕망보다 더 소중한 가치. 정말이지 그런 가치를 질문하는 문제적 인물이 필요한 시대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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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농사법이 발달해 제철 개념이 많이 사라졌다. 찬 바람 불면 농익은 포도가 맛있는 때인지라, 아는 농민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미 7월에 출하를 마쳤단다. 시설 재배로 바꾸면서 출하시기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철을 앞당기면 작물값이 좋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여러 이점도 더 있다. 유기농 재배하기도 편하고(인근 밭에서 벌레가 넘어오기 어렵다), 재배와 수확에 편리하게 환경을 조절할 수도 있다. 그래도 바람이 싸늘해지고, 대낮에도 긴팔을 입어야 할 때 먹는, 잘 익은 과일의 맛을 생각하면 전통적인 제철이 그립기는 하다.

 

 

복숭아도 제철이 당겨진 듯하다. 포도야 넝쿨처럼 자라고, 키 작게 기르기 좋아서 일찌감치 하우스 안에 들어갔다 치지만 복숭아도 그럴 줄 몰랐다. 복숭아도 이젠 시설 속에서 키우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덕에 더 빨리 다디단 복숭아 맛을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시장에 이미 좋은 복숭아가 많이 나오고 있다. 물 많고 달아서 즙이 줄줄 흐르는 백도와 황도의 맛! 예전에 늦여름 시장에 가면 복숭아 냄새가 시장이 가득 찰 지경이었다. 어떤 향기로움도 대체할 수 없는 복숭아만의 녹진한 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차가운 우물물을 퍼서 복숭아를 함지에 담가두면, 마당에 복숭아 향이 퍼졌다. 복숭아 독이 오른다고 어린애들은 만지지 못하게 했지만, 함지에 손을 담그고 복숭아를 빠득빠득 씻던 재미는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 어머니는 늘 어딘가 상처 입고 한 곳이 갈색으로 짓무른 것을 즐겨 사들였는데, 달리 이유가 있었다. “어디 이운 데가 있어야 달고 진해. 한 곳이 물러진 복숭아는 빨리 상하는데, 우리가 사주면 장사꾼도 좋지.” 과연 어머니의 말씀은 옳았다. 복숭아는 설탕에 재어둔 것처럼 달았다. 씨에 붙은 과육까지 빨아먹었다. 바삐 먹어치운 후 입술 주변에 남던 옅은 통증도 기억나지 않는가.

 

함께 일했던 요리사 후배가 있었다. 추석 휴가를 받을 때면, 그이에게 직원들이 부탁을 하곤 했는데 다름 아닌 복숭아였다. 집안에 복숭아 농장을 하는 이가 있어서 그 무렵이면 우리에게 보낼 복숭아를 챙겼던 것이다. 복숭아가 얼마나 실하고 좋은지, 상자를 받으면 넘쳐나던 향으로 어질어질해질 정도였다. 나는 늘 ‘파지’라고 부르는 걸 주문했다. 시장에 낼 때 아무리 맛이 좋아도 모양이 찌그러지거나 상처가 있으면 받아주지 않거나 제값을 못 얻는다. 그런 건 이렇게 ‘직거래’로 팔곤 하는데, 오히려 나 같은 이에겐 각별하게 맛있는 놈이었다. 어머니에게 배운 교훈이랄까. 더 달고 향 좋은 놈이 상처 입는 법. 껍질을 살살 벗기면 뭉클한 속살이 가득한, 맛 좋은 복숭아였다.

 

올해부턴 이것도 어렵게 됐다. 그 후배가 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 복숭아밭에 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제일 먼저 복숭아를 생각했다. 이제 곧 수확철인데 나무에 온전히 매달려 있을지. 그건 복숭아만의 일이 아니겠다. 올해 유난한 더위에 농사짓느라 고생한 농민들의 수확물을 태풍이 다 떨궈버리지는 않을지. 다들 기도해 주시길 바랄 뿐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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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고 다니냐?” 유력한 용의자를 앞에 두고서도 놓아주어야만 하는 시골 경찰이 그에게 묻는다. 살인도 일이랍시고, 그렇게 열심히 하고 다니는데, 그래 밥은 먹고 다니냐, 라고 말이다. “라면 먹고 갈래요?” 좀 더 시간을 나누고 싶은 여자가 데이트 상대인 남자에게 들어오라는 말 대신, 라면 먹고 가라고 제안한다. 여기서 밥과 라면은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그 의미가 아닐 것이다. 여기엔 사전에 없는 다양한 맥락과 행간의 함의가 담겨 있다.

 

영화 <공작>의 한 장면.

 

유독 한국 영화와 소설에는 밥을 먹자고 제안하거나 식사를 함께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때로는 꽤나 진지하게 다뤄지는데, 하재영 소설 <같이 밥 먹을래요>, 윤고은 소설 <일인용 식탁>은 혼자 밥먹기의 곤란함과 어려움을 주제로 삼고 있다.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 역시 그런 측면에서 밥먹기를 주제로 한 이야기다. 먹방 예능, 인터넷 1인 방송까지 따지자면 정말이지 먹는 것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최근 한국 영화에서 밥 먹는 장면은 삶과 정치 사이 애매한 경계의 긴장을 보여줄 때가 많다. 영화 <독전> <공작>만 해도 그렇다. <독전>의 그 유명한 장면, 마약상으로 위장한 경찰이 아시아 마약시장의 거물 진하림(김주혁)을 만나는 장면을 보자. 거래 성사를 위해 원호(조진웅)는 상대방이 먹는 것들을 따라 먹으며 호감과 신뢰를 얻고자 한다. 상대방은 독주에 곁들여 사람 눈알까지 씹어 먹으며 위세를 부린다. 여기서 신뢰는 상대가 먹는 것을 나도 먹는 식의 원시적 방법으로 확보된다. 이들의 식탁은 음식이 놓여 있을 뿐 목숨을 건 전장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우리가 “같이 식사 할래요?”라고 묻는 것은 단순히 밥을 나눠 먹는 게 아니다. ‘밥’은 사회생활의 일부다. 회사 점심시간도 업무의 일부이며 회식 자리는 말할 것도 없다. 누군가와 관계를 새롭게 맺거나 거래를 트고 싶을 때, 밥을 먹자는 제안으로 뻔히 보이는 속내를 포장하곤 한다. 제안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게 단순히 밥먹자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영화 <공작>에서 공작원 흑금성이 첫 거래를 성사시키는 곳 역시 중국의 어느 호텔의 조용한 식당이다. 술을 주고받으며 한끼 식사를 나누는 것 같지만 그 식사는 핵, 돈, 목숨이 복잡하게 뒤얽힌 정치적 거래이다. 흑금성은 혹시라도 정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유언까지 대동해 술을 거절하고, 작전용 녹음기를 발목에 숨긴 채 목숨을 건 연기를 한다. 말이 식사 자리이지 뭐 하나라도 먹었다가는 곧바로 체하고 말 듯한 위기 상황과 다르지 않다.

 

눈길을 끄는 것은, 북한 고위 간부와 남한 사업가로 위장한 첫 만남이 브로맨스로 녹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도 똑같이 ‘밥’을 먹는데, 이번엔 북한 간부 이차장의 집에서, 이차장의 아내가 만든 밥을 나눠 먹는다. 녹음도, 계산도, 작전도 없는 이 자리에서 그들은 드디어 밥다운 밥을 먹는다. 이러한 장면은 영화 <강철비>에서도 연출되는데, 청와대 비서관과 북한 군인이 잔치국수를 나눠 먹는 장면이 그렇다. 적과의 동침보다 어려운 게 적과의 한끼라도 되는 듯, 그렇게 한끼를 나눠 먹고 난 이후 그들은 적이 아닌 동지로 서로를 믿게 된다. 거래를 트는 게 아니라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러한 식사의 행간은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어느 가족>에 명백히 그려져 있다. <어느 가족>의 원제목은 <만비키 가족>인데, 만비키는 일종의 좀도둑질 내지는 좀도둑을 의미한다. 이 가족은 애초에 범죄로 형성되었다. 할머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가족으로 삼고, 부모 역할의 두 남녀는 길거리에 유기된 아이들을 데려온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 아이들과 할머니를 유괴하고 납치한 혐의로 수사를 받는 젊은 여성은 “남이 버린 것을 주워 온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 가족 자체도 남의 것을 주워서 이뤄진 셈이다. 법의 관점에서 보자면 범죄지만 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법이 놓치는 사람의 할 일을 그녀가 해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줍지 않았다면 노인은 고독사했을 테고, 아이들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게 뻔하다.

 

이 다른 관점이 설득되는 지점이 바로 영화 내내 반복되는 밥 먹는 장면들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가족들은 추운 길거리를 헤매던 다섯 살 소녀와 뜨거운 고로케를 나눠 먹는다. 가족들이 모여 있는 장면 내내 그들은 무엇인가를 먹고 있다. 특별히 ‘우리 밥 먹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먹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걸 자연스럽게 나눠 먹는다. 여름엔 소면을, 겨울엔 고로케를 먹는 게 다를 뿐, 그렇게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밥을 나눠 먹는 것이다.

 

문제는 정을 나누는 식사 장면이 한국 사회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매우 드물어졌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밥 먹는 장면은 정보다는 이익을 도모하고, 거래와 협잡을 공유하는 기회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내부자들>의 그 유명한, 나체 식사 장면도 그럴 것이다. 서로를 믿지 못해 발가벗어야만 술과 음식을 나눌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인간’의 식사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과거 향수 속에서, 이방의 식탁에서 따뜻한 밥 한끼를 목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만큼 각박한 현실을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정말이지, 따뜻한 밥 한끼만을 위한, 목적 없이 안부를 전하기 위한 그런 식사의 온도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