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잡식동물이다. 그러니 무엇이든 먹는다. 먹는 행위에 대해 논란도 많다. 개고기며, 고래고기 섭취 같은 것들이다. 개별적인 집단의 오랜 문화와 새롭게 동물을 보는 시선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동물 윤리에 대한 논의도 요즘 크게 확장되고 있다. 유럽의 몇 나라는 랍스터를 산 채로 삶는 조리법을 금지했다고 한다. 랍스터보다 훨씬 더 지능이 높은 문어는 어쩌나 싶다. 문어 연구는 많이 진행되어 이 종이 아주 영특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수산시장에 가면 문어들이 답답한 망에 갇혀 수족관에 들어 있다. 그들의 지능이라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문어를 삶을 때 대개는 산 채로 넣는다. 그것이 표준 요리법이다. 아마 문어와 비슷한 낙지도 지능이 높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산낙지 투하’라는 검색어를 넣어보면, 방송 화면과 개인 블로그를 수도 없이 발견할 수 있다. 몸부림치는 산낙지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무엇이 선이고 옳은 일인지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더라도,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투하’라니. 이런 말은 군사용어 같다. 원자폭탄에 뒤따르는 말이 바로 이 단어가 아닌가.

 

 

꽃게를 삶는 방법도 그렇다. 뒤집어서 내장이 흐르지 않게 산 채로 넣으라고 한다. 가장 맛있게 삶는 법이라고 한다. 꽃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미리 죽여서 넣으면 맛이 없어지는지 실험이나 연구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그저 무의식중에, 아니 애초에 의식하지 않고 그런 요리법을 믿어왔다. 한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차제에 동물을 요리할 때 어떤 가이드라인이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도 많다. 현장에서 수많은 재료를 다루고 요리하는 요리사들에겐 이런 원칙이 필요하다. 재료를 죽이는 것이 요리사의 숙명인데, 경우에 따라 심리적 부담을 안는다.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그런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될 듯하다. 확장하면, 가축 도살에도 미친다. 요리사는 대개 고작(?) 해산물을 죽이지만, 그들이 쓰는 재료 중 하나인 고기는 도살장에서 도축된다. 그 일에 종사하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고,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을 그들이 대신해주고 있는 셈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가축 도살에 동물 윤리의 세세한 감정이 개입되어 있지는 않다. 건조한 룰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아직 논의하려고 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외면하고 있다. 효율이 우선되고 있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동물 윤리와 복지에 대한 촘촘한 규정이 만들어질수록 비용이 늘어난다. 그 비용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지에만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 있다. 한마디로 고기값이 오를 텐데 그래도 괜찮은가 하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윤리에도 돈이 드는 격인데, 다양한 논의가 있어야 이런 부담은 낮추면서 잡는 이나 먹는 이나 심리적으로 부담을 줄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풀어놓고 본격적인 얘기도 하기 전에 경제논리만 들이대서야 언제 인간의 일이 나아지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잡식동물이고, 먹을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건, 먹는 재료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선택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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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보백보’라는 말이 있다. 오십 보나 백 보나 별반 차이 없다는 의미다. 도토리 키재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큰 차이가 없으니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더 보란 뜻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비아냥으로 쓰인다. 뭐 대단한 차이가 있다고 호들갑이냐, 오십보백보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문화에 있어서 오십 보 차이는 엄청나다. 오십 보가 뭐냐, 단 열 걸음 차도 크다. 그 약간의 차이를 위해 다들 노력하고, 그렇게 한 오십 보쯤 먼저 나가는 사람을 천재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렇게 오십 보 내딛은 사람들이 문화의 코드를 만들어 낸다. 뒤샹이 처음으로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았을 때, 앤디 워홀이 수프 깡통을 그려내기 시작했을 때, 그게 바로 오십 걸음의 차이가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오십 보와 백 보의 차이에 민감해야 한다. 차이를 발견하면 그 점을 주목해 주는 게 소비자의 의무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너의 결혼식>과 <암수살인>은 약간 다른 발걸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영화 <암수살인>의 한 장면.

 

 

<너의 결혼식>은 멜로드라마이다. 두 남녀가 만나 호감을 느끼며 우여곡절을 겪다가 사랑하고 헤어진다. 만약 우여곡절을 겪다가 사랑을 이루는 데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아주 평범한 로맨스 영화로 남을 뻔했다. 하지만, <너의 결혼식>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헤어짐의 과정까지 보여준다. 이 헤어짐의 과정 속에서 영화는 로맨스에서는 멀어지지만 좀 더 현실적인 세계와 만난다. 성사가 아니라 이별이니 굳이 장르적으로 따지자면 로맨스가 아니라 멜로드라마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너의 결혼식>이 장애물을 두고 본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헤어질 수밖에 없는 뻔한 멜로드라마도 아니란 사실이다. <너의 결혼식>은 로맨스의 관습에서도 오십 보 더 나아가고 멜로드라마의 공식에서도 오십 보 나아간다. 그러므로 새로운 로맨스, 다른 멜로드라마로 차별화되는 것이다.

 

그 차별화는 바로 현실성에 있다. <너의 결혼식>은 전형적인 첫사랑 서사라고 말할 수 있다. <클래식> <건축학개론>과 같은 첫사랑 서사 말이다. 고등학생 황우연(김영광)은 전학 온 여학생 환승희(박보영)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우정과 사랑 사이 어디에서 감정을 쌓아가던 두 사람은 승희의 갑작스러운 이사와 그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복잡한 가정환경으로 멀어진다. 대학을 가고, 재회하게 되는 과정들은 코믹한 톤으로 시종일관 가볍게 흘러간다. 무거워지는 것은 대학 졸업 이후이다.

 

대개의 첫사랑 영화는 첫사랑의 순간과 현실을 점프 컷하듯 비약해서 그 차이와 변화를 강조한다. 순결했던 아이의 타락, 순진했던 아이의 환멸 과정에서 아이는 어른이 된다. 여기서 타락은 여자의 몫이고 성장은 대개 남자의 몫이다. <말죽거리잔혹사>에서 권상우가 어른이 되는 순간, 한가인은 어느새 삶에 찌들어 빛을 잃었고, <건축학개론>의 서연 역시 말똥말똥한 눈의 수지가 만취에 욕을 내뱉는 한가인으로 바뀐다.

 

하지만 <너의 결혼식>에서 바뀐 것은 오히려 남자 쪽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였지만, 그녀만 있으면 다 해결될 것 같은 세상에 다치고 패배하자 비겁하게 첫사랑과 결별하는 것이다. 그건 그녀, 환승희와의 결별이라기보다는 그녀를 사랑했던 자기 자신과의 이별에 더 가깝다.

 

여자가 변해서 남자가 성장한다는 식이 아니라 남자가 변해서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이 약간의 변화는 첫사랑의 오래된 관습을 무너뜨린다. 세상이 아니라 내가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오십 보의 차이에서 영화 <너의 결혼식>은 꽤나 어른스러운 멜로드라마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변화는 <암수살인>에서도 발견된다. <암수살인>은 드러나지 않다보니 집계되지 않는 범죄에 대한 이야기다.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는 범죄, 말하자면 영화 <버닝>의 해미(전종서)가 사라졌지만 종수(유아인) 외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상황과 비슷하다. <암수살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오십 보 차이는 바로 형사의 변화다. 대개 한국형 범죄영화에서 형사는 생활고에 찌들어 있거나 비리에 무감해져 있기 일쑤였다. 아니면 정반대로 통제 불능의 정의감으로 사고뭉치 취급을 받는 인물들이 많았다. <공공의 적>의 설경구나 <끝까지 간다>의 이선균, <VIP>의 김명민 캐릭터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암수살인>의 주인공 형사는 일단 가난하지 않다. 운 좋게 부자 아버지와 형을 둔 덕에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편이다. 고급 세단을 소유하고, 취미로 골프를 친다.

 

무엇보다 다 자비로 충당한다. 어딘가에서 돈을 뜯는다거나 횡령하는 게 아니라 당당히 자기 돈으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이 윤택함이 사건 수사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온다. 고과나 승진이 아니라 순전히 범죄에 대한 알 권리와 형사로서의 도덕적 의무, 인간으로서의 윤리적 책임에 의해 움직이는 유형의 인물이 태어난 것이다. 지금껏,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희한한 인물이 탄생한 것이다.

 

이 오십 보 차이로 인해 <암수살인>의 수사극은 완전히 달라진다.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형 주인공이나 그것을 추적해 가는 과정은 사실 기존의 수사극과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주인공의 약간의 차이로 인해 영화는 달라진다. 이 오십 보 차이가 변화하기 어려운 범죄영화의 관습에 또 어떤 차별성을 유발할지 기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십 보 백 보는 차이가 없는 게 아니라 오십 보만큼 차이난다. 오십 보가 아니라 십 보의 차이도 중요하다. 그 약간의 차이가 삶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이건 비단 영화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오십 보 나은 사람의 그 오십 보를 인정해줘야 한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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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어느 정부 때 환경부 장관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고른 장소는 놀랍게도 한 햄버거 체인점이었다. 그와 점심을 먹고 나니 쟁반 위에 온갖 일회용품이 가득했다. 그를 만나 나눈 얘기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쟁반 위에 쌓여 있던 알록달록한 쓰레기는 이미지로 또렷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일회용품을 거침없이 쓴다. 심리적으로 찜찜함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래도 되는 거야? 며칠 전에 한 행사에 갔더니 도시락을 나눠줬다. 먹고 나니 역시 한 보따리의 일회용품들이 남았다. 일회용 수저, 그 포장지, 국물을 담는 그릇, 반찬도 각기 다른 일회용 그릇에 담겨져 최종적으로 역시 일회용품인 ‘틀’ 안에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을 모두 담는 별도의 비닐포장지까지. 거기에다 페트병에 담긴 ‘생수’도 더해지고 말이다. 두 사람이 다 먹고 제공된 비닐에 담아보니, 쌀 한말들이 정도의 부피가 생겼다. 우리 마음에도 그만큼의 부담감이 쌓여버렸다.

 

 

일회용품은 번다한 일상을 간편하게 해주지만, 반드시 두 가지 후유증을 남긴다. 물론 하나는 환경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죄책감이다. 민감한 사람들은 이런 문제로 심리적 통증까지 겪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래도 되는 거야?’

 

지난 여러 정부에서 일회용품 금지 법률을 ‘규제 완화’라는 명분으로 풀어버렸다. 일상적으로 들르는 커피숍에서 일회용품에 음료를 담아 소비했다. 그렇게 10여 년간 버린 쓰레기가 얼마이며, 일회용품을 생산하기 위해 쓴 에너지는 또 어느 정도이겠으며, 다시 재활용하기 위해 쓰는 비용과 환경오염 문제는 얼마나 심각했을지 가늠키조차 어렵다. 일회용품 문제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수거와 재활용을 잘해도 후유증이 남는다는 사실이다. 재활용을 100% 할 수도 없고, 하더라도 열처리를 해야 하므로 환경오염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요즘 미래 세대에 주는 부담으로 꼽는 지구 기상 대이변의 주범인 ‘온실가스’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런 우려로 다시 일회용품 규제가 시작됐다. 환영하는 이들도,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작 일선의 커피숍에서 머그잔과 유리잔을 써보니 반대하는 이들의 우려와는 달리 ‘아무 문제 없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더운 커피는 환경호르몬이 녹아 나오니 어쩌니 염려를 벗어나서 더 맛있게 느껴졌다. 아이스커피는 투명한 유리잔이 주는 촉감까지 상쾌해졌다. 혹시 스스로에게 묻게 되지 않던가. 아니, 그동안 왜 그렇게 일회용품을 써야 했지? 아무 문제 없잖아?

 

사실 지구상에서 가장 일회용품을 많이 쓰는 나라는 미국이다. 게다가 재활용률은 형편없이 낮다. 우리는 이른바 경제발전국 중에서 일회용품 사용률은 낮고, 재활용률은 높다. 우리가 아무리 일회용품 사용을 줄여도 거대 에너지 사용국인 미국이 시큰둥하면 지구 환경 악화를 막는 데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것이 우리의 진짜 고민이다.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어쨌든 머그잔에 담긴 커피는 더 맛있으니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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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스릴러 드라마 속 악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 한국드라마에서 범죄스릴러는 우리 시대의 악을 꾸준히 탐구하면서 대세로 떠오른 장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배경으로 사회 곳곳의 의문의 죽음과 그 원인을 해부한 김은희 작가의 <싸인>(SBS, 2011), 2012년 거대권력이 은폐한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박경수 작가의 <추적자>(SBS, 2012)의 성공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 이전까지 주로 기이한 연쇄살인범과 대결을 벌이던 범죄스릴러는 <싸인>과 <추적자> 이후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극적 성격이 강화됐다. “세상이 미쳐 날뛰는데 내가 어떻게 진정을 합니까”라는 <추적자>의 유명한 대사처럼, 검은 커넥션을 통해 지배력을 점점 더 공고히 하는 기득권층을 향한 분노가 사회파 범죄스릴러 붐을 불러왔다.

 

영매와 구마 사제가 주인공인 OCN 드라마 <손 the guest>.

 

 

그런데 최근 범죄스릴러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초월적 악의 등장이다. 악귀, 빙의, 주술 등과 같은 오컬트나 사이비 종교가 자주 소재로 다뤄지고 있다. 귀신 보는 형사의 수사극 <처용>(OCN, 2014~2015), 생령과 퇴마사의 악귀 퇴치극 <싸우자 귀신아>(OCN, 2016), 사이비 종교 집단의 만행을 고발하는 <구해줘>(OCN, 2017), 신기 있는 형사가 과거의 집단학살 사건을 추적하는 <작은 신의 아이들>(OCN, 2018), 영매와 구마 사제가 주인공인 <손 the guest>(OCN, 2018), 유령 탐정과 무당 출신 부검의가 등장하는 <오늘의 탐정>(KBS, 2018) 등이 몇 년 사이에 쏟아져 나온 오컬트, 사이비 소재 드라마다. 원래대로라면 호러, 판타지적 소재를 범죄스릴러처럼 풀어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악령은 주로 가정폭력, 아동학대, 집단 따돌림, 성폭력 등과 같은 사회문제로부터 출몰하고, 초자연적 존재를 이용해 악행을 벌이는 권력 집단도 등장한다.

 

범죄스릴러에 초월적 악의 존재가 기승을 부리게 된 배경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앞서 나열한 대부분의 작품이 장르 전문 채널 OCN 드라마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장르물 진화의 한 결과다. 근래 들어 여러 장르적 요소를 한꺼번에 녹인 복합장르드라마가 유행하는 가운데 극적 소재를 넓히는 과정에서 호러, 오컬트처럼 기존에 별로 다뤄지지 않았던 매니악한 장르들까지 점점 다채롭게 뒤섞이고 있다. 올해 방영된 <작은 신의 아이들>은 과학 수사물에 샤머니즘을, <손 the guest>(이하 <손>)는 형사 수사물에 샤머니즘과 엑소시즘을, <오늘의 탐정>은 탐정 추리물에 샤머니즘, 언데드 소재까지 결합했다.

 

스릴러의 범죄 묘사가 갈수록 자극적으로 변하는 경향도 악령의 유행에 영향을 미쳤다. 다중인격 살인마,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넘어 악령의 등장은 초자연적 성격을 빌미로 더 잔혹한 범죄 묘사를 가능하게 했다. <손>과 <오늘의 탐정>의 첫 살인 장면이 공통적으로 으슥한 심야의 뒷골목이나 외떨어진 공간이 아니라 대낮에 많은 사람이 여가를 즐기는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벌어졌다는 점을 주목해보자. <오늘의 탐정>에서는 생령의 조종을 받은 레스토랑 직원이 생일 축하 행사가 벌어지는 테이블에서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목을 찌르는 장면이 그려졌다. <손>에서는 휴양지에서 가게 홍보 전단을 돌리다 악령에 빙의된 중년 여성이 전단지를 차갑게 내친 젊은 여성을 친구들과 함께 노는 해변에서 잔혹하게 살해했다.

 

더 주목할 만한 배경은 시대와의 연관성이다. 범죄스릴러 드라마의 악은 늘 동시대의 그늘을 대변했다.

 

사회파 범죄스릴러 유행의 배경에 부패한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면, 요즘의 오컬트 스릴러 붐 현상은 이른바 ‘탈진실의 시대’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옥스퍼드사전이 2016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면서 전지구적 화두로 급부상한 ‘탈진실 시대’는 개인의 감정과 신념이 객관적 사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상황을 말한다.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가 하는 문제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가가 중요해졌다. 이미 정부 기관이 나서서 가짜 뉴스를 유포하며 여론을 조작하고 주술 정치를 적극 실천한 정권을 경험한 우리나라에선 더 깊이 와닿는 화두다.

 

시대의 산물인 범죄를 탐구하는 스릴러가,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려진 시대에 보이지 않는 힘에 주목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범죄와 맞서 싸워야 하는 주인공들도 모두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손>의 주인공 윤화평(김동욱)은 종종 악령과 감응하고, 또 다른 주인공 최윤(김재욱) 역시 구마 사제의 특성상 “나쁜 것들을 접하니까 몸도 영혼도 점점 아파진다”는 경고를 받는다. 형사 강길영(정은채)은 범죄 피해자 가족이라는 아픔 때문에 범인에게 과도한 폭력을 행사한다. 그런가하면 <오늘의 탐정>의 주인공 이다일(최다니엘)은 귀신이 되어 점점 어둠의 힘에 가까워지고, 정여울(박은빈)은 생령을 없애기 위해 살인을 결심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주인공들의 이 같은 성격은 오히려 ‘탈진실 시대’의 악에 맞서는 효과적인 대처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보는 것이 쉽게 진실이라 믿는 태도가 ‘탈진실 시대’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오늘의 탐정>에서 악령 선우혜의 위험함을 경고하는 이들이 하나같이 ‘나쁜 말을 믿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끊임없이 진실이 무엇인지 의심하는 태도야말로 가장 객관적 진실에 근접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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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추석이면 추석영화들이 마련된다. 극장에는 한국의 전통적 성수기를 노린 작품들이 걸리고, 집에서도 각 방송사가 준비한 추석특집 영화들이 방영된다. 일순간 너무 많은 영화들이 쏟아져 어떤 것을 보아야 하나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다양한 선택이 기쁘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다양한 선택이 다양한 음식으로 채워진 뷔페처럼 만족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는 어마어마하게 식욕을 자극하지만 막상 한 바퀴 돌고 나면 헛배가 부른 듯한 기분. 차라리, 정성껏 마련된 단품 요리를 먹을 걸 그랬나, 하고 후회가 드는 그런 기분 말이다.

 

영화 <체실 비치에서>의 한 장면.

 

영화 보기는 먹기와 같은 본능적 행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수기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여러모로 욕구와 충동을 자극한다. 대형 광고판에 선명한 해상도를 가진 사진들이 걸려있고, 소위 대형 배우들의 얼굴이 나란히 포진해 있다. 예고편이나 기사, 평론들도 있지만 일단 그렇게 걸려 있는 얼굴들을 보며, 어떤 영화가 재미있을까 고민하기 마련이다. 최종 선택은 대부분 직관적이다. 어떤 게 더 재미있을까, 어떤 게 볼만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직관대로 결정하는 것이다.

올해 추석영화관이 특히 그러했을 것이다.

 

올 추석에는 세 편의 사극과 두 편의 장르물이 개봉됐다. <물괴>는 추석 한 주전, <협상> <안시성> <명당>은 추석연휴 직전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더풀 고스트>가 연휴 마지막에 개봉됐다. 김명민, 손예진, 현빈, 조인성, 조승우, 마동석, 김영광에 이르는 화려한 라인업은 말 그대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배우들은 나름의 홍보전에 뛰어들었고, 연일 보도자료로 각 영화들의 흥행성과가 전달되었다. 시장의 규모만 보자면 추석 극장가 관객은 1300만명으로 추정되었다. 영화 모두가 손익분기점을 넘기려면 적어도 1700만 관객 정도가 필요하니, 이는 이미 레드오션이고 과열경쟁이 예고된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영화들이 개봉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기억에 남는 단 하나의 작품은 없다. 제작비나 제작사 및 배급사의 규모, 배우들의 면모를 봐서 평균작 이상이 분명 나올 만한데, 다섯 작품 모두 도토리 키 재기 하듯 고만고만하니 주목을 끄는 작품이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의 캐릭터가 거의 비슷하다. 인간이 가진 복잡성이나 예민함을 모두 깎아내버린, 밋밋한 사람들이 전부인 셈이다. 주인공들은 모두 정의롭고 정직하며, 그 반대에 있는 사람들은 세속적 야망을 불태운다. 이런 이분법 안에서 인간은 순수하고 정의로운 인간 아니면 악하고 이기적인 인간, 둘로 나뉜다.

 

어떤 관객이라도 스스로를 이기적인 악당 편에 두고 몰입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선하고 올바른 쪽이 나의 그림자일 것이라 여기며 그것에 동일시한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정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는 것일까? 인간의 내면이라는 게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평면적인 것일까?

 

영화 <체실 비치에서>를 보며 오랜만에 신선한 당혹감을 느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신혼여행 첫날 밤 급격하게 서로에게 환멸을 느끼고 멀어지는 두 연인을 보여준다. 카메라의 앵글로 치장되거나 꾸며진 정사 장면들과 달리 이 신혼부부의 첫날밤, 첫 정사는 보는 이들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외설적이거나 선정적이어서가 아니다. 마치 무방비 상태의 맨 얼굴처럼 카메라는 우리가 그다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순간을 침범해 들어간다. 거기엔 우리가 돌이키고 싶어하지 않는, 상처와 부끄러움과 미숙함이 있다. 매끈하게 세련되고, 다듬어진 가상의 인간이 아니라 투박하게 벼려진 날것 그대로의 인간이 있는 것이다.

 

이언 매큐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속 두 사람은 우리가 여느 영화에서 보아왔던 연애와 결혼의 주인공들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당혹스럽지만 그렇기 때문에 반갑다. 오히려 너무나 완벽하게 정의로 꾸며진,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부끄럽거나 민망한 순간이 없는 듯한 추석영화 속 주인공들보다 더 위안이 되기도 한다. 추석영화 속 주인공들이 우리가 되어야 할 가상의 인간형을 추구한다면, <체실 비치에서>의 두 연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견지해야만 하는 우리와 닮아 있다. 인간은 위대하지만 대체로 엉망진창이며, 때로는 너무 부조리하다. 그들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그렇고, 나도 그렇다.

 

<체실 비치에서> 남자 주인공 에드워드 역을 맡은 빌리 하울은 “내가 가장 관심 있는 것은 빛, 심지어 경박함을 때로는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나는 불합리에 매료되었고, 부적절한 반응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종에 속해 있음을 알고 그 인간의 속성에 대해 어지간히 고민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완벽한 외모와 보편적 정의로 조형된 주인공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런 인물들은 정작 온기와 위로를 주지 못한다.

 

물론 모든 영화들이 이렇게 예민하게 인간의 복잡성을 파고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섯 편, 여섯 편 아무리 많은 작품들이 개봉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복잡함과 모순을 보여주는 작품이 단 하나도 없다면, 그건 다양한 영화관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진다고 해도 그건 다양하지 않다. 올해 추석 개봉 대작들이 고만고만하니, 기억에 남지 않는 이유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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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에 명절에는 만두를 빚는다 하였는데, 어디까지나 한수 이북의 일이다. 남쪽의 만두는 중국인들의 몫이었다. 동네에 화교가 좀 살았는데, 명절에 푸짐하게 만두를 빚었다. 엄밀히 말하면 파오츠(包子)였다. 만두(만터우)는 화교들에게는 속을 채우지 않는 일상의 밀가루 음식이었다. 발효시켜 부풀린 후 쪄서 밥으로들 먹었다. 그걸 얻어먹어본 적도 있다. 짭짤한 나물과 채소 볶은 것을 그 밀가루 만두, 실은 빵이라고 할 음식에 얹어 먹었다. 소 없는 만두란 참 심심했지만, 부풀린 반죽이 씹히는 결이 인상 깊었다. 그 만두를 잊지 못해서 대림동 상가에 종종 가기도 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진짜 ‘만두’를 판다. 거대하게 부풀려서 왕만두라고 해야 할 밀가루 빵을 팔고 있는 것이다. 민족이 정주지는 바꾸어도 음식은 쉬이 바꾸지 않는다.

 

 

내가 집에서 만두를 먹게 된 것은 호기심 많은 어머니 덕이었다. 집에서 만두를 빚지 않는 남쪽 고향 출신의 어머니는 서울에서 이북식 만두를 배웠다. 어른 손바닥만 한 만두를 빚었다. 세 개만 먹어도 어른이 배부를 크기였다. 비계 섞인 돼지고기를 넉넉히 넣고 부추를 엄청나게 많이 넣는 것이 바로 이북식이라고 했다. 두부는 거의 쓰지 않았고, 겨울엔 김치로 만들었다. 역시 부추를 넣은 여름식 만두가 맛있었다. 소가 아무리 좋은들 만두피가 더 중요한 몫이란 걸 만두를 직접 빚으면서 알았다. 반찬이 좋은들 밥이 나쁘면 별무소용인 것처럼.

 

미련한 짓이었지만, 학창 시절에 많이 먹기 겨루기의 대상은 만두였다. 스테인리스나 양은 찜통에 9개씩 담긴 찐만두를 몇 개나 먹나 다퉜다. 하필 찐만두가 선택된 것은 아마도 차곡차곡 높이 쌓이는 찜통이 보기에도 그럴싸했을 것이고, 만두의 개수로 자랑 삼기 쉬웠기 때문일 것 같다. 찜통이 탁자 위로 끝없이 솟았다고 허풍을 쳤으며, 찐만두를 모두 세어보니 100개를 먹었네, 200개를 먹었네 했다.

 

마침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다. 그쪽의 만두 사정은 어떨지 궁금하기만 하다. 황해도는 만두를 예쁘게 빚고 평안도로 가면 커지고 투박하다고 했다. 신의주까지 북상하면 왕만두가 있다고 했다. 중국 국경으로 갈수록 만두가 커지고 터프해졌다고 한다. 먹어볼 수 없으니 이 또한 막막한 일이다. 전에, 단둥까지 가서 거리 만둣집에서 요기했다. 엄청나게 큰 만두를 두 개 담아 1인분으로 팔았다. 기름이 줄줄 흐르는 맛있는 만두였다. 그 가게에서 이북으로 건너가는 압록강 철교는 보이지 않았지만, 북한 만두도 비슷하겠거니 하고 먹었다. 언젠가 강헌 선생이 얘기한, 황해도 만두의 전설도 보고 싶다.

 

겨울이면 돼지를 잡고, 만두를 빚은 후 무명실에 꿰어 차가운 바람이 들이치는 처마에 매달아 얼렸다는 전설의 만두를. 대통령이 가고, 문화예술인이 가니 우리 또한 갈 기회가 없겠는가. 대동강가에서 철갑상어 요리도, 숭어국도 좋지만 나는 만두가 먹고 싶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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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전시회 첫 번째 순서에는 그가 지금껏 만들었던 영화 음악과 영화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 재해석을 담아 놓은 영상물이 자리잡고 있다. 익숙한 선율에 어우러진 영상들은 대개 외국의 영화들이다. 그중 낯익은 한국 영화가 한 편 있는데, 바로 <남한산성>이다. 2017년, 작년 이맘때쯤 선보였던 영화 <남한산성>은 드물게 패배의 이야기이다. 그것도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전시를 위해 편집된 짧은 화면 속에서도 인물들은 모두 좌절과 패배감에 젖어 있다. 그 표정은 가히 굴욕에서 빚어져 나오는 슬픔과 회한이라 할 만하다. 여기엔 허구적 과장이나 영화적 복수 같은 게 있을 틈이 없다.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흥행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패배한 치욕의 순간을 재연해 확인하고, 다시 한번 굴욕감을 경험하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니 진짜 어른이라야 그런 패배감을 감당할 수 있다.

 

영화 <협상>의 한 장면.

 

2018년 추석 영화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승리의 결말을 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중 영화는 우리가 실제 경험하기 어려운 통쾌한 성공을 자주 보여준다. <암살>에서 김구 선생의 지령을 수행할 수 있는 것도, <내부자들>에서 내부 고발자가 안전할 수 있는 것도 사실보다는 허구적 정의에 더 가깝다. 옳다고 현실에서 이뤄지리라는 법은 없다. 음모나 술수, 협잡의 달인들이 오히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 권력을 잡곤 한다. 힘에 혈안이 된 낭인들이기에 뭔가 손에 잡히면 휘두르기 마련이다.

 

덕으로 보나, 의로 보나 그 몫에 값하지 못하는 자들이 가당치 않은 권력과 재력을 갖고 남용하고, 탕진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만큼은 그들은 혼쭐이 난다. 벌을 받고, 망신을 당하고, 법의 심판을 받는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더욱 영화적 정의라도 갈급하는지 모르겠다. 홍길동이 조선에서 찾을 수 없었던 정의와 법을 율도국에 세우는 것처럼 우리는 영화 속에서 나름의 율도국을 찾고자 한다.

 

<협상> <물괴> <명당>과 같은 추석 영화들은 모두 하나같이 정통 장르 영화임을 강조한다. <물괴>는 사극과 크리처물의 결합이 처음임을 강조하고 <명당>은 역사와 액션, 스릴러, 민속학의 결합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협상> 역시 한국 영화 사상 거의 볼 수 없었던, 협상가를 등장시켜, 새로운 범죄 스릴러의 지평을 열겠노라고 선언했다.

 

세 작품 모두 겉모습을 보자면 스스로 천명한 장르에 부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괴>에는 정성껏 컴퓨터 그래픽으로 손본 괴물이 등장하니 크리처물이 맞고, <명당>은 실존했던 흥선군과 풍수지리를 연결시켰으니 새로운 역사극이라 볼 수 있다. <협상> 역시 지금껏 협상가를 내세워 그 과정을 전면화한 작품이 없었으니 새로운 게 맞긴 하다.

 

문제는 그 겉모습, 장르적 관습이나 에피소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들 즉 메시지에 있다. 이를테면, 장르로 즐기는 대중 영화라면 사필귀정, 일벌백계의 결말로 꼭 가야 하는 것일까? 눈에 보이는 범죄 뒤에 권력의 구조적 부패가 있다는 식의 전개나 그러므로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와 같은 결말로 수렴되어야 하느냐란 말이다.

 

<물괴>에는 왕을 흔들려는 대신들이 등장하고, <명당>에는 자신들의 권세로 왕권을 더욱 짓밟는 장동 김씨 집안이 등장한다. <협상>에도 온갖 협잡을 일삼는 정부 고위 관료들이 잔뜩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물괴>는 괴물과 싸우고, <명당>은 집안의 원수와 싸우며 <협상>은 인질범과 대립하지만 이 작품 모두 마지막에 가서는 구조적으로 깊이 뿌리박혀 있는 적폐와 싸운다. 하나같이 적폐청산을 시원한 카타르시스적 결말로 제시하고자 한다.

 

영웅이 우주를 구하는 게 할리우드 대중 영화의 문법이라면 소시민이 적폐를 청산하는 게 바로 한국 영화의 판타지이다. 좋다. 하지만 언제까지 영화적 판타지로만 적폐는 청산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직 적폐를 청산하기는커녕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있는데, 영화는 그런 것은 영화가 해 줄 테니 우선 우리 시원하게 허구적 청산을 즐기자고 권유한다. 아예 불가능할 때엔 그러니까 정권 교체가 있어야만 가능할 때엔 그런 허구적 판타지가 갈증을 달래주는 서사적 정의가 되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때 판타지는 대중의 갈망이었고, 다가올 정의의 촉진제였다. 역사 속에서 찾아낸 작고도 놀라운 승리의 기록들이 대중에게 주었던 감동도 그런 것이었고, <베테랑>의 마지막 장면이 허황되지만 통쾌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젠, 영화적 승리로 만족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는 안되는 시점에 왔다. 사회적 정의 구현을 현실이 아닌 만화적 판타지로 활용해 싸구려 카타르시스로 제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니 이미, 관객들은 만드는 사람보다 훨씬 더 똑똑해서, 청산을 가장한 저속한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 <상류사회>의 변태적 계몽주의가 관객에게 외면받았던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영화적 허구는 대중이 느끼고는 있지만 아직 인식하지 않은 문제를 풀어낼 때 판타지로서 효력을 가질 수 있다. 이젠 허구가 아닌 현실에서 정의를 구현해야 할 시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구적 해결에 만족하자는 제안은 안일한 상업주의에 불과하다. 가짜 승리의 거짓 환희보다는 진짜 패배의 모욕감을 돌아보는 게 훨씬 더 성숙한 일이다. 패배의 오욕을 견딜 수 있어야 승리도 지킬 수 있다. 가짜 성취를 판매하는, 한국형 대중 영화의 판타지가 어느 새 한국 영화의 적폐가 되어가고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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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성가족부 장관에 내정된 진선미 의원은 “‘가부장제 이후’의 새로운 문화와 제도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올해 초부터 우리 사회를 뒤흔든 미투 운동이 가부장적 지배구조의 오랜 적폐를 향해 준엄한 심판을 촉구한 데 이어, 지금 이 시대의 시급한 화두가 성평등에 있음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발언이다.

 

이 같은 시대정신은 요즘 드라마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동안 K-드라마는 열성적인 한류 팬들마저도 성역할 고정관념 강화, 데이트폭력 미화 등을 비판할 정도로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 문화를 공고히 하는 주범으로 지적당해 왔다. 그런데 요 몇 년 사이에 이러한 관습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지난해 여가부의 제작 지원을 받아 여성 아동 성범죄를 집중 조명한 KBS <마녀의 법정>을 비롯해, 직장 내 미투 운동을 그려낸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법조계의 남성중심적 질서를 비판한 JTBC <미스 함무라비> 등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성차별 문화와 그 부작용을 정면으로 폭로하는 드라마들이 연이어 나오는 중이다. 비록 문제제기가 모두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극적 갈등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문제로 가시화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SBS 드라마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의 한 장면.

 

현재 방영 중인 SBS 토요드라마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이하 <그녀로>)도 이러한 경향 안에 위치한 작품이다. 기억상실, 복수, 불륜, 재벌, 고부갈등 등 통속극의 클리셰로 뒤범벅된 스토리를 따라가면서도, 가정폭력을 비롯한 가부장제의 심각한 폐해를 정면으로 다뤄 눈길을 끈다. 드라마의 시작은 누군가로부터 살해 위협에 시달리던 여성이 생존을 위해 성형수술을 감행한 뒤 마취에서 깨어나는 장면이다. 눈을 뜬 그녀는 수술의 후유증으로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린다. 스스로 탐정이 되어 미스터리를 풀어가던 여자는 돌아온 기억과 함께 충격적인 진실을 깨닫게 된다.

 

성형수술 뒤에 딴 사람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복수한다는 설정은 외국 드라마 <에덴으로 돌아오다>와의 유사성이 지적되기도 하나, <그녀로>가 직접적인 영향을 밝힌 작품은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1991년 개봉 영화 <적과의 동침>과 고전 동화 <푸른 수염>이다. 공통점은 가부장제의 금기와 폭력 그리고 여성들의 탈출에 있다. <그녀로>는 여기에 기억을 잃은 여성의 정체성 찾기 플롯으로 흥미를 더했다. 이 기억상실 모티브는 통속극의 흔한 클리셰가 아니라 가부장제 안 여성들의 실존을 은유한다. 기억을 잃고 가사도우미가 된 지은한(남상미)은 그저 아내, 며느리, 엄마의 역할에만 충실하던 과거의 자아상실 상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녀가 기억상실 상태에서도 본능적으로 시어머니와 남편의 까다로운 취향을 읊어대는 장면은 가부장제의 억압이 얼마나 뿌리 깊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단적인 사례다.

 

지은한이 기억을 찾는 것 역시 억압받는 여성이 자신의 현실을 인식하고 각성하는 과정처럼 전개된다. 그녀는 관찰자로서 집안의 이상한 규칙과 금기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다. 재벌가의 며느리이자 유명 앵커의 아내로서 순종할 것을 강조하는 강찬기(조현재)에게 “기억나지도 않는 나를 연기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반박하는 장면이나, 집안을 “새장”이라 표현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특히 집안 곳곳에 감시용 폐쇄회로 카메라를 설치한 강찬기의 모니터실을 발견하고 카메라에 비친 남편을 노려보는 장면은 시선의 역전을 통해 각성의 극적 효과를 배가시킨다.

 

진실을 깨달은 지은한의 복수가 기존의 여성 중심 복수극에서 한 발 더 나간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동안의 여성 중심 복수극 장르는 버림받고 추방당한 아내들의 서사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가장 성공한 여성 복수 드라마로 꼽히는 김수현 작가의 <청춘의 덫>이나 김순옥 작가의 <아내의 유혹>만 봐도 가족제도 안에 안착하지 못하고 배신당한 채 밀려난 여성들의 이야기다. 이러한 복수극은 남편과 시부모의 학대로 억울하게 죽은 아내들의 원혼이 한풀이하는 여귀 복수 서사의 오랜 전통을 따른다. 그 안에 녹아든 것은 가부장제로 인한 기혼 여성들의 억압된 욕망과 분노다.

 

그런데 근래에는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더 적극적으로 균열을 내고 응징하는 이야기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추세다. <아내의 자격> <굿 와이프> <품위있는 그녀> <미스트리스> <시크릿 마더> 등 최근 기혼 여성 중심 서사들이 이 같은 경향을 보여준다. 여기에 가세한 <그녀로>는 가부장제의 가장 추악하고 어두운 밑바닥을 체험한 여성이 그 폭력적 실체를 폭로하고 탈주하는 이야기다. 강찬기가 ‘이 시대의 참 언론인’이자 ‘대한민국 주부들의 워너비 남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라는 점도 공적 고발과 응징에 맞춤한 설정이다.

 

물론 이 작품 역시 통속극 특유의 한계가 적지 않다. 가령 지은한의 얼굴을 수술한 성형외과 의사 한강우(김재원)가 강찬기와 대립하며 주요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은 가부장제의 폭력을 심판하는 것도 여전히 남성 권력이라는 씁쓸한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지은한을 죽이려 하는 ‘악녀’ 정수진(한은정)의 행동이 결국 강찬기의 아내 자리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됐다는 설정이나 한강우를 배신한 전 애인 송채영(양진성)이 모성보다 커리어를 중시해서 비난받는 대목 등도 여성혐오적이다.

 

이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녀로> 또한 미투 시대에 여성 폭력 문제를 적극적으로 가시화하고 가부장제의 적폐를 고발한 작품이라는 의의를 남긴다. 이러한 한계를 딛고 ‘가부장제 이후’를 상상하는 드라마들이 나올 때가 됐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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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복지란 말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다. 법률 이름에도 쓴다. 특히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개에 관한 논의가 많다. 사람 눈에 잘 띄고, 오랜 애호 역사가 있는 까닭이다. 심지어 기르던 개를 잡던 시절에도 차마 제 손을 쓸 수 없어서 먼 곳의 개와 바꾸기도 했다. 개 식용 논란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게 하나 있다. 대부분의 식용 개는 음식이 될 목적으로 처음부터 사육된다는 점이다. 하나 축산 관련법에는 빠져 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와중에 이들 사육견의 고통은 말도 못한다. 개고기 식용을 금지하느냐 아니냐를 떠나 대부분 최소한의 사육 환경을 지키지 않는 게 보통이다. ‘지킨다’는 말에도 어폐가 있다. 이것은 법률이 아니라, 그저 인간의 양심의 한계를 의미한다. 생명을 가진 것들에 대한 인간의 연민 같은 걸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육장마다 제각각이고, 개들에 대한 연민도 결국 돈으로 바꿀 인간의 욕망 앞에서, 또 효율 앞에서 무너지게 마련이다. 개는 법의 사각지대에서 돼지와 닭보다 훨씬 나쁜 환경에서 지낸다. 개고기 식용 금지냐 아니냐 이전의 현실적 문제다. 어쨌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많이 먹는 ‘공식’ 육종은 어떤가. 며칠 전 뉴스에서 베트남의 돼지 도살 문제가 떠올랐다. 마을의 오랜 축제에서 돼지를 노상 도살하는 문제가 언급된 것이다. 인권, 환경단체에서는 이것이 축제에 참가한 아이들의 정신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 우려를 표했고, 마을 어른들은 전통의 문제이니 참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 것이다. 세상의 많은 일은 늘 다른 시각의 충돌을 일으킨다. 제주도에서도 전통적으로 돝추렴이 있었다.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돈을 모아 돼지를 잡아 나눠가지는 행사를 말한다. 이 역시 동물복지 논란에 의해 중지되었다. 이것은 법률에 의해서도 불법이니 큰 반발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저변에는 도대체 해준 것도 없는 ‘뭍’의 권력이 왜 제주사람이 전통적으로 돼지 잡는 것에까지 관여하느냐는 불만이 있었다.

 

돼지와 닭, 소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지 일일이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농장’의 모습은 사실상 찾아보기 힘들다고 보면 된다. 그곳에는 상상할 수 없는 괴로운 노동이 존재한다. 사료비가 곧 이익이 되기 때문에 생기는 악성 효율, 그 효율에 맞추기 위한 학대, 다시 거기서 발생하는 인권 문제도 있다. 동물을 다루는 데 웬 인권이냐고. 노동 환경 자체가 동물을 학대하기 쉬운 조건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은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건 돼지 잡는 ‘축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를 시작하자 해도, 당장 입에 넣을 치킨과 삼겹살 값도 없는데 동물복지 운운이 무슨 사치냐는 말도 나온다. 실은, 이런 모든 문제는 자본에서 비롯한다. 돼지와 닭까지도 세계화와 자본의 ‘수직계열화’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치킨집 사장의 눈물, 배달앱의 개입, 실업과 청년문제까지 단 하나도 허투루 볼 수 없는 우리 사회 문제가 나선형으로 꼬여 있다. 장차 이 일을 어찌 할 것인지 막막하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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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사회: 사회적 지위나 생활수준이 높은 사람들의 사회. 상류사회는 매우 모호한 말이다. 크다, 예쁘다와 같은 말들이 대표적인데, 도대체 얼마만큼 커야 큰 것이고 어떻게 생겨야 예쁜 것인지 명확한 기준이 없다. 대체로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합의로 통용되는데, 상류사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류는 무엇을, 어디까지를 가리키는 것일까?

 

상류라는 말에는 이미 위계가 자리 잡고 있다. 상류가 있으면 하류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상류사회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표준적 위계이기에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가령, 최근 방영되고 있는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여주인공인 고애신은 명망 높은 사대부 가문의 딸로 저잣거리의 누구든 알아보는 상류계층 ‘애기씨’로 살아간다. 반면 그녀의 약혼자인 김희성은 한성 최고의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명망 높은 가문의 반열엔 끼지 못한다. 심지어 포수인 승구는 고애신의 스승이지만 하대하는 것은 당시로선 강상죄에 준하는 불법이다. 2018년 영화 <상류사회>에서 ‘상류사회’는 철저하게 ‘돈’으로 나뉜다. <상류사회> 속 상류사회는 재벌기업과 국회의원의 세계로 압축된다. 돈과 권력, 이 두 가지가 바로 변혁 감독이 생각하는 현재적 위계질서의 근간으로 보인다.

 

영화 <상류사회> 메인 포스터

 

사대부 가문, 공작, 백작처럼 타고난 사회적 지위들은 이름 앞에 붙여둠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데 쓰이곤 했다. 작위가 있으면 상류, 없으면 하류, 이런 식으로 나누기 간편했던 것이다. 문제는 소위 상류계층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적 표준이나 관습이 지속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격차를 각인시키고자 한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노비됨이나 백정됨을 강조하는 양반들이 그렇고 <상류사회>에서 “우리는 너희와 달라”라면서 갑질을 하는 재벌가 내외가 그렇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란, 아니 적어도 이야기는 이런 상류사회를 전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전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전복은 돈과 권력으로 결코 가질 수 없는 덕과 선을 제시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 세상을 관찰할 줄 아는 균형 잡힌 시선과 태도가 바로 예술가의 이야기인 셈이다. 예술가가 성자나 도덕군자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남다른 관찰력으로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면모들을 밝히고, 삐딱한 거리감으로 통념을 흔드는 것에 더 가깝다.

 

영화 <상류사회>의 실패는 바로 여기서 빚어진다. 영화는 상류사회의 민낯을 보여준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기괴함을 전시하는 데만 열중한다. 여기엔 감독의 관점이 없다. 영화는 급조한 설교로 관객들을 도덕적으로 계몽하고자 한다. 심지어 상류를 꿈꾸는 사람이든 상류에 머무는 최고 권력층이든 모두 성욕의 노예라는 식의 일반화도 감행한다. 상류든 중류든 하류든 성욕에 시달리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식의 위험한 동일시를 시도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도덕과 선을 가르칠 수는 없다. 가르쳐서도 안된다. 하지만 우리가 세속적 기준으로 무시하는 인물들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덕을 보여줄 필요는 있다. 세상이 부와 권력, 명성의 렌즈만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면 예술가는 다른 렌즈로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영화에 요구하는 것은 훔쳐보기가 아니라 그 다른 관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시기보다 계층이나 계급, 사회적 지위에 민감한 시대를 살고 있다. 고애신이 살던 조선말기 무려 500여년 지켜져 왔던 위계질서가 고통의 근대사 속에서 한꺼번에 무너졌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는 유례없던 능력주의의 시대를 경험했다. 지성과 체력, 용기와 운을 갖춘 창의적 인물들이 새로운 상류계층을 형성할 수 있었던 시기를 누렸던 것이다. 적어도 그때엔 공부만 잘해서 판사, 검사, 의사가 되고 그러면 집안도 나아지고, 살림살이도 나아질 것이라 믿었다. 대학만 졸업하면 살아갈 만한 직장을 구할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자기계발과 능력이 통하기도 했던 시절인 셈이다.

 

물론, 능력주의 시대는 만만치 않은 멀미와 현기증을 선사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이나,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같은 훌륭한 대작들은 이러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다. 더 나은 계층에 오르고자 하는 역류의 고통과 세속적 세상의 갈등을 그려냄으로써 이 작품들은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해 주었다. 서정인, 최인훈, 김승옥이 그려냈던 세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제 능력주의의 시대는 끝났다. 한때 우린 계층의 역류를 꿈꾸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노라며 다짐하기도 했지만, 어느새 역류는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상류사회>에서처럼 이젠 변호사도 대기업 사모님의 발을 주물러야 하며, 의사도 <라이프>처럼 대기업 상속자의 구미를 맞춘다. 적어도 더 나은 삶이라고 믿었던 약간의 성장이 달라진 돈과 권력의 위계질서 안에서 별것 아닌 게 된 셈이다. 지위, 재산, 권리, 상속받을 수 있는 재산에 따라 상류사회가 나뉜다면 이건 아예 접근이 불가능한 것이다. 3대를 넘어 세습되고 축적된 부는 견고한 울타리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예술가라면 더욱 이 조악한 세상의 위계를 의심해야 하고 다른 제안들을 해야만 한다. 제인 오스틴이 당시의 갑들을 감싸는 듯하지만 결국 그들의 위선이나 불안을 뛰어넘는 비천하지만 도덕적 인물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듯이, 우리는 이 시대의 새로운 기준을 발견해야만 한다. 탐욕이나 욕망보다 더 소중한 가치. 정말이지 그런 가치를 질문하는 문제적 인물이 필요한 시대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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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농사법이 발달해 제철 개념이 많이 사라졌다. 찬 바람 불면 농익은 포도가 맛있는 때인지라, 아는 농민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미 7월에 출하를 마쳤단다. 시설 재배로 바꾸면서 출하시기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철을 앞당기면 작물값이 좋을 확률이 높다. 게다가 여러 이점도 더 있다. 유기농 재배하기도 편하고(인근 밭에서 벌레가 넘어오기 어렵다), 재배와 수확에 편리하게 환경을 조절할 수도 있다. 그래도 바람이 싸늘해지고, 대낮에도 긴팔을 입어야 할 때 먹는, 잘 익은 과일의 맛을 생각하면 전통적인 제철이 그립기는 하다.

 

 

복숭아도 제철이 당겨진 듯하다. 포도야 넝쿨처럼 자라고, 키 작게 기르기 좋아서 일찌감치 하우스 안에 들어갔다 치지만 복숭아도 그럴 줄 몰랐다. 복숭아도 이젠 시설 속에서 키우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덕에 더 빨리 다디단 복숭아 맛을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시장에 이미 좋은 복숭아가 많이 나오고 있다. 물 많고 달아서 즙이 줄줄 흐르는 백도와 황도의 맛! 예전에 늦여름 시장에 가면 복숭아 냄새가 시장이 가득 찰 지경이었다. 어떤 향기로움도 대체할 수 없는 복숭아만의 녹진한 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차가운 우물물을 퍼서 복숭아를 함지에 담가두면, 마당에 복숭아 향이 퍼졌다. 복숭아 독이 오른다고 어린애들은 만지지 못하게 했지만, 함지에 손을 담그고 복숭아를 빠득빠득 씻던 재미는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 어머니는 늘 어딘가 상처 입고 한 곳이 갈색으로 짓무른 것을 즐겨 사들였는데, 달리 이유가 있었다. “어디 이운 데가 있어야 달고 진해. 한 곳이 물러진 복숭아는 빨리 상하는데, 우리가 사주면 장사꾼도 좋지.” 과연 어머니의 말씀은 옳았다. 복숭아는 설탕에 재어둔 것처럼 달았다. 씨에 붙은 과육까지 빨아먹었다. 바삐 먹어치운 후 입술 주변에 남던 옅은 통증도 기억나지 않는가.

 

함께 일했던 요리사 후배가 있었다. 추석 휴가를 받을 때면, 그이에게 직원들이 부탁을 하곤 했는데 다름 아닌 복숭아였다. 집안에 복숭아 농장을 하는 이가 있어서 그 무렵이면 우리에게 보낼 복숭아를 챙겼던 것이다. 복숭아가 얼마나 실하고 좋은지, 상자를 받으면 넘쳐나던 향으로 어질어질해질 정도였다. 나는 늘 ‘파지’라고 부르는 걸 주문했다. 시장에 낼 때 아무리 맛이 좋아도 모양이 찌그러지거나 상처가 있으면 받아주지 않거나 제값을 못 얻는다. 그런 건 이렇게 ‘직거래’로 팔곤 하는데, 오히려 나 같은 이에겐 각별하게 맛있는 놈이었다. 어머니에게 배운 교훈이랄까. 더 달고 향 좋은 놈이 상처 입는 법. 껍질을 살살 벗기면 뭉클한 속살이 가득한, 맛 좋은 복숭아였다.

 

올해부턴 이것도 어렵게 됐다. 그 후배가 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 복숭아밭에 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제일 먼저 복숭아를 생각했다. 이제 곧 수확철인데 나무에 온전히 매달려 있을지. 그건 복숭아만의 일이 아니겠다. 올해 유난한 더위에 농사짓느라 고생한 농민들의 수확물을 태풍이 다 떨궈버리지는 않을지. 다들 기도해 주시길 바랄 뿐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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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고 다니냐?” 유력한 용의자를 앞에 두고서도 놓아주어야만 하는 시골 경찰이 그에게 묻는다. 살인도 일이랍시고, 그렇게 열심히 하고 다니는데, 그래 밥은 먹고 다니냐, 라고 말이다. “라면 먹고 갈래요?” 좀 더 시간을 나누고 싶은 여자가 데이트 상대인 남자에게 들어오라는 말 대신, 라면 먹고 가라고 제안한다. 여기서 밥과 라면은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그 의미가 아닐 것이다. 여기엔 사전에 없는 다양한 맥락과 행간의 함의가 담겨 있다.

 

영화 <공작>의 한 장면.

 

유독 한국 영화와 소설에는 밥을 먹자고 제안하거나 식사를 함께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때로는 꽤나 진지하게 다뤄지는데, 하재영 소설 <같이 밥 먹을래요>, 윤고은 소설 <일인용 식탁>은 혼자 밥먹기의 곤란함과 어려움을 주제로 삼고 있다.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 역시 그런 측면에서 밥먹기를 주제로 한 이야기다. 먹방 예능, 인터넷 1인 방송까지 따지자면 정말이지 먹는 것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최근 한국 영화에서 밥 먹는 장면은 삶과 정치 사이 애매한 경계의 긴장을 보여줄 때가 많다. 영화 <독전> <공작>만 해도 그렇다. <독전>의 그 유명한 장면, 마약상으로 위장한 경찰이 아시아 마약시장의 거물 진하림(김주혁)을 만나는 장면을 보자. 거래 성사를 위해 원호(조진웅)는 상대방이 먹는 것들을 따라 먹으며 호감과 신뢰를 얻고자 한다. 상대방은 독주에 곁들여 사람 눈알까지 씹어 먹으며 위세를 부린다. 여기서 신뢰는 상대가 먹는 것을 나도 먹는 식의 원시적 방법으로 확보된다. 이들의 식탁은 음식이 놓여 있을 뿐 목숨을 건 전장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우리가 “같이 식사 할래요?”라고 묻는 것은 단순히 밥을 나눠 먹는 게 아니다. ‘밥’은 사회생활의 일부다. 회사 점심시간도 업무의 일부이며 회식 자리는 말할 것도 없다. 누군가와 관계를 새롭게 맺거나 거래를 트고 싶을 때, 밥을 먹자는 제안으로 뻔히 보이는 속내를 포장하곤 한다. 제안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게 단순히 밥먹자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영화 <공작>에서 공작원 흑금성이 첫 거래를 성사시키는 곳 역시 중국의 어느 호텔의 조용한 식당이다. 술을 주고받으며 한끼 식사를 나누는 것 같지만 그 식사는 핵, 돈, 목숨이 복잡하게 뒤얽힌 정치적 거래이다. 흑금성은 혹시라도 정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유언까지 대동해 술을 거절하고, 작전용 녹음기를 발목에 숨긴 채 목숨을 건 연기를 한다. 말이 식사 자리이지 뭐 하나라도 먹었다가는 곧바로 체하고 말 듯한 위기 상황과 다르지 않다.

 

눈길을 끄는 것은, 북한 고위 간부와 남한 사업가로 위장한 첫 만남이 브로맨스로 녹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도 똑같이 ‘밥’을 먹는데, 이번엔 북한 간부 이차장의 집에서, 이차장의 아내가 만든 밥을 나눠 먹는다. 녹음도, 계산도, 작전도 없는 이 자리에서 그들은 드디어 밥다운 밥을 먹는다. 이러한 장면은 영화 <강철비>에서도 연출되는데, 청와대 비서관과 북한 군인이 잔치국수를 나눠 먹는 장면이 그렇다. 적과의 동침보다 어려운 게 적과의 한끼라도 되는 듯, 그렇게 한끼를 나눠 먹고 난 이후 그들은 적이 아닌 동지로 서로를 믿게 된다. 거래를 트는 게 아니라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러한 식사의 행간은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어느 가족>에 명백히 그려져 있다. <어느 가족>의 원제목은 <만비키 가족>인데, 만비키는 일종의 좀도둑질 내지는 좀도둑을 의미한다. 이 가족은 애초에 범죄로 형성되었다. 할머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가족으로 삼고, 부모 역할의 두 남녀는 길거리에 유기된 아이들을 데려온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 아이들과 할머니를 유괴하고 납치한 혐의로 수사를 받는 젊은 여성은 “남이 버린 것을 주워 온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 가족 자체도 남의 것을 주워서 이뤄진 셈이다. 법의 관점에서 보자면 범죄지만 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법이 놓치는 사람의 할 일을 그녀가 해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줍지 않았다면 노인은 고독사했을 테고, 아이들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게 뻔하다.

 

이 다른 관점이 설득되는 지점이 바로 영화 내내 반복되는 밥 먹는 장면들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가족들은 추운 길거리를 헤매던 다섯 살 소녀와 뜨거운 고로케를 나눠 먹는다. 가족들이 모여 있는 장면 내내 그들은 무엇인가를 먹고 있다. 특별히 ‘우리 밥 먹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먹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걸 자연스럽게 나눠 먹는다. 여름엔 소면을, 겨울엔 고로케를 먹는 게 다를 뿐, 그렇게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밥을 나눠 먹는 것이다.

 

문제는 정을 나누는 식사 장면이 한국 사회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매우 드물어졌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밥 먹는 장면은 정보다는 이익을 도모하고, 거래와 협잡을 공유하는 기회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내부자들>의 그 유명한, 나체 식사 장면도 그럴 것이다. 서로를 믿지 못해 발가벗어야만 술과 음식을 나눌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인간’의 식사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과거 향수 속에서, 이방의 식탁에서 따뜻한 밥 한끼를 목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만큼 각박한 현실을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정말이지, 따뜻한 밥 한끼만을 위한, 목적 없이 안부를 전하기 위한 그런 식사의 온도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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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컬 드라마와 법조인 드라마는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르물 양대 산맥이다. 그런데 메디컬 드라마는 최근 몇 년간 인기가 다소 주춤한 상황이다. 2016년 방영된 SBS <낭만닥터 김사부>를 마지막으로, 시청률과 작품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화제작은 찾아보기 어렵다. 침체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과거의 로맨스나 판타지로 회귀한 것이 결정적 원인이라 본다. 실제로 근래 방영된 메디컬 드라마는 독특한 소재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 이야기로 대중과의 공감대 형성에 실패했다. MBC가 메디컬 드라마 명가의 부활을 선언하며 야심차게 내놓은 <병원선>(2017)은 배라는 색다른 의료 공간을 찾았으나 결국 로맨스로 표류했고, 역시 교도소라는 특이한 공간을 내세우고 장기밀매를 소재로 다룬 tvN <크로스>(2017)는 막장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자극적인 이야기로 빠지고 말았다.

 

JTBC 드라마 <라이프>의 한 장면.

 

이런 가운데 지난달부터 방영을 시작한 JTBC 월화드라마 <라이프>가 메디컬 드라마 장르의 혁신작으로 떠오르고 있다. <라이프>는 거대재벌이 인수한 국내 톱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신임 총괄사장 구승효(조승우)와 그에 반발하는 의사들의 갈등을 그린다. 얼핏 보면 병원 내 권력 다툼이라는, 기존 메디컬 드라마의 진부한 공식을 따라가는 것 같지만 속내는 전혀 다르다. 이 드라마의 진정한 정체성은 2010년대 초반 MBC <골든 타임>(2012)이 구축한 메디컬 드라마의 새 트렌드 안에 있다. 응급의학과를 중심으로 한 <골든 타임>은 국가 의료복지시스템의 근본적 모순을 겨냥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 드라마 이후 메디컬 드라마는 내부 갈등 위주의 이야기를 넘어 병원 바깥의 의료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극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다. 소아외과를 배경으로 저소득층 아동에 대한 의료서비스의 열악한 실태와 영리병원 문제를 다룬 KBS <굿닥터>(2013), ‘대한민국 최상위 0.1%의 고객’을 대상으로 한 VIP 병동을 통해 계급 갈등을 담아낸 SBS <용팔이>(2015), 메르스 사태와 백남기 농민 사인 조작 사건 등 더 적극적인 동시대 의료 이슈를 반영한 <낭만닥터 김사부> 등이 이 같은 트렌드를 이어갔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후 등장한 메디컬 드라마들이 하나같이 과거로 퇴행하며 이러한 트렌드는 어느새 사라지고 인기도 시들해졌다.

 

<라이프>가 큰 호응을 얻는 것은 작품 자체의 높은 완성도에 더해 오랜만에 재등장한 사회파 메디컬 드라마라는 공감대 때문이다. 내용도 한층 급진적이다. <골든 타임>이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의료민영화에 대한 사회적 불안과 문제의식을 에피소드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면, <라이프>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에서 사법 비리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한 ‘의료농단’을 직접적인 대사를 통해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이 시기에 강행된 진주의료원 폐원, 병원 영리자회사 허용, 재벌의 병원 부대사업 독점, 국립대병원 경영평가 등 노골적인 공공의료 파괴행위와 그로 인한 폐해가 드라마 곳곳에 언급되고 있다. 메디컬 드라마로서는 처음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등장하는 것도 단순히 이색적 소재 차원이 아니라 의료농단의 범위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신임 사장 구승효가 화정그룹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흘러가듯 언급한 “개인 건강정보 영리목적 사용불가 조항 2016년 8월 삭제”라는 대사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개인 건강정보 대량 판매 사건을 겨냥하고 있다.

 

드라마의 비판은 더 나아가 의료계 내부의 오랜 적폐로도 향한다. 의료농단의 책임이 당시 정부뿐 아니라 의료계의 도덕 불감증에도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상국대병원 의료진은 총괄사장 구승효의 시장주의 논리에 저항하고 환자만을 생각하는 정의로운 집단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이익 논리에 물든 이기적인 집단이거나 그들만의 폐쇄적 문화에 갇혀 있는 ‘고인 물’로 그려진다. 투약사고를 둘러싼 암센터장 이상엽(엄효섭)과 구승효의 논쟁 장면이 대표적 사례다. 이상엽은 경영진의 인건비 삭감 때문에 주 100시간 넘게 근무하는 레지던트들의 과잉 노동 실태를 비판하고 이 사태가 그로 인한 실수였음을 주장한다. 이에 맞서 구승효는 그럼 ‘왜 센터장급 의사들이 진작 나서서 전공의법을 지키도록 일을 나누지 않았느냐’고 반박하고, 이 문제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범죄의 은폐와 방조에 있음을 정확히 지적한다. 구승효의 구조조정 강행에 맞서 의료진이 파업을 선언하는 장면도 연출된다. 부원장 태상(문성근)이 의료진을 대표해 이것이 ‘환자의 생명과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임을 강조할 때,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늘 타 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흉부외과장 주경문(유재명)의 피로한 얼굴이 화면을 채운다.

 

지금까지의 메디컬 드라마는 사회고발극의 성격이 아무리 강해도 어디까지나 시청자들이 감정을 이입할 정의로운 ‘굿닥터’가 존재했다. 그러나 <라이프>는 어쩌면 이 ‘굿닥터’였을, 존경받는 원장의 죽음과 그의 비리 암시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드라마의 화자인 응급의료센터 전문의 예진우(이동욱)가 원장을 떠올리며 하는 고민이야말로 이 작품이 하고픈 말이 아닐까. “제가 아는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어떤 분이셨습니까” 하고 따지는 예진우처럼 <라이프>는 묻는다. 대한민국 의료계는 대체 어떤 곳이냐고,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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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언제 파스타가 들어왔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조선말과 대한제국 시기 열강의 공사들이 궁에 들어오고, 그들을 접대하느라 파스타가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서양 음식물을 수입한 해관(세관) 자료가 있다. 와인과 샴페인, 과자류와 국수의 수입이 있었다. 서양음식을 먹을 수 있는 근대식 호텔이 서울에 세워진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에서 구할 수 없는 물자는 주로 일본과 중국을 통해서 수입했다. 파스타는 서양인에게 중요한 음식이었다. 장기 보존이 가능하고 요리도 간편했다. 당시 어떤 조리법을 썼을지 궁금하다. 100년 넘게 흐른 지금, ‘모든 재료’가 파스타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 된장이나 간장 파스타가 있었을까. 아마도, 서양인에게 대접하는 음식이니 서양 재료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을 것이다. 토마토소스와 고기볶음, 치즈 같은 것이 올라가지 않았을까.

 

 

지금은 우리 식재료와 파스타의 융합이 흔하다. 묵은지 파스타도 있다. 곱창을 볶아 올리기도 하고, 국물 넉넉한 떡볶이 스파게티도 팔린다. 서양재료여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파스타집이 ‘이태리면집’이니 ‘이태리백반집’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은, 이런 인식의 반영이다. 외래 것을 우리 문화에 동화시켜 독자적으로 즐기는 건 이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한때 시중의 말로 유명했던 “남이사!(남이 뭘 하건 말건!)”다.

 

파스타는 우리 음식문화에 생각보다 더 깊게 들어와 있다. 굳이 그걸 이탈리아 음식이라고 전제하는 것조차 혼란스러울 정도다. 파스타집에 가면, 국수를 먹듯 후룩 후룩 하는 ‘흡입 소음’이 자연스럽다. 이탈리아에선 없는 소리다. 여기는 한국이니까, 뭐 이런 거다. 이 소음을 일본에서는 ‘누하라’라고 해서 약간의 공론이 있다. 누들 + 허래스먼트, 즉 스파게티 먹는 소리가 남에게 괴롭힘을 준다는 뜻이다. 원래 일본 국수는 소리 내서 먹는 것이 결례가 아닌데, 파스타를 먹을 때 소리를 내는 건 교양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나온 논의다. 아직 한국에서는 이런 거 없다.

 

학교 급식에 파스타가 나온 지 오래다. 아이들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더러는 밥에 딸려나오는 반찬처럼 제공된다. 무엇이든 밥반찬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일본인이 원조다. 포크커틀릿도, 햄버그스테이크도 쌀밥의 반찬으로 팔린다. 다만 “빵으로 할까요, 밥으로 할까요”는 남아 있다. 서양식인 빵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요리의 뿌리는 지켜주고 싶었던 것일까. 단체급식이 학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의 급식에도 파스타가 등장한다. 가장 흔한 건 마요네즈에 버무린 마카로니다. 마카로니 샐러드라고도 한다. 왕년에 이른바 ‘한정식’에도 나왔던 음식이다. 파스타는 밥까지 만나서 완벽하게 동양화 내지는 한국화되었다. 남은 소스에 밥을 볶아주면 좋겠다. 김가루도 넣고, 김치 다진 것도 섞어서 말이다. 한 문화는 다른 문화권으로 옮겨가면서 변형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직장인들에게 동네 파스타집의 인기 메뉴를 알려드린다. 얼큰한 속풀이 해장 파스타다. 부장님도, 이사님도 젊은 직원들 따라가서 입에 안 맞는 크림파스타 안 드셔도 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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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은 영화 <인랑>에 대한 인터뷰 중 이런 말을 했다. “어쩌면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대접을 못 받는 시대”라고 말이다. 김지운 감독은 SNS와 같은 개인 미디어에 ‘개인’의 말보다는 당위의 말들, 해야 할 말들이 더 많은 사태를 두고 이런 말을 했다. “그런 말을 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다”라며 조금 얼버무렸지만 여기에 함축된 “그런”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영화<인랑>의 한 장면.

 

지난 몇 년의 영화계를 보면 김지운 감독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택시 운전사> <1987> <강철비> <밀정> 등등의 작품을 보자면, 대개 이념과 역사 같은 큰 주제를 다룬 작품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여기엔 ‘자유주의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조국의 해방을 논하고, 민주주의를 갈급하는 상황에서 개인, 자유라니. 이건 너무 소아적이며 이기적인 단어로 간추려지고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지난 몇 년이 그랬다. 개인을 내세우기엔 지나치게 세상이 엄혹했고, 자유라는 말은 엉터리 보수에 의해 더럽게 오염되었다. 그래서, ‘나’보다는 ‘우리’에 주장을 실었고, 일탈보다는 노선을 택했다. 1990년대 이후 문학과 영화에 르네상스를 가져왔던 수많은 개인들이 모습을 바꾸고 목소리를 달리했다. 모더니스트, 염세주의자, 탐미주의자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자신을 감추거나 스스로 달라졌다. 어쨌거나 수많은 개인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이 숨거나 사라졌던 것이다.

 

김지운 감독이 자유주의자들의 대접을 논했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들, 이를테면 <컴잉아웃>이나 <달콤한 인생>과 같은 영화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라면 탄생하지 못했을 이야기들이니까. 여고생의 성적 정체성 찾기를 에로틱하게 녹여 낸 <컴잉아웃>의 정념도, <달콤한 인생>의 모욕감이나 마음이라는 모호한 감성도, 집단이나 단체의 이념으로는 결코 설명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개인의 비밀 지대다. 공개적으로 드러내긴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인간의 모순, 그런 게 문제를 일으키는 공간이 바로 개인이니 말이다.

 

2018년 여름 성수기를 두고 개봉하는 영화들을 보면, 어쩌면 이 이념의 시대가 이제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김지운 감독의 <인랑>과 윤종빈 감독의 <공작>은 모두 남북관계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다.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인랑>이 가까운 미래, 남북관계가 호전된 통일 직전을 다루고 있다면 <공작>은 역사상 처음으로 야당 출신 대통령을 갖게 된 그래서 실제로 남북관계가 호전되기 직전인 1997년 무렵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영화들의 공통점이라면 말했다시피 남북관계가 좋아지는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관계 호전이 영화적 갈등의 씨앗으로 제시된다. 남북관계 호전, 통일과 같은 역사적 변화를 대개의 사람들은 반기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누군가는 남과 북의 갈등과 분단 상태가 영원하기를 바란다. <인랑>에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이 그렇고, <강철비>에서는 북한의 강경파들이 그러하며 <공작>에서는 이권에 눈이 먼 정치 모리배들이 갈등의 지속을 원한다. 통일과 화해 분위기를 거절하는 이러한 자들은 영화적 악의 축이 되어 그것을 갈망하는 주인공과 대결한다. 영화적 허구로나 가능한 화해무드, 이 가설 아래서 영화적 이야기가 설계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이미 지난 4월 남과 북의 정상이 손을 맞잡고 군사 분계선을 넘나드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사실이다. <인랑>을 보면서, 남북 화해 무드가 우리, 남한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다는 설정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판문점에서의 정상회담과 선언이 있은 후, 심지어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이 만난 이후 마주치는 영화적 설정이라는 게 어쩐지 영 실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들, 간절히 바라는 일들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재현된 이미지들이 우리의 판타지를 실현하고, 욕망을 해소해주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점을 영화로 엿보는 것이다. 적어도 영화는 완전한 시각적 착각을 불러일으켜 주니 말이다.

 

물론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는 사이, 급속도로 전개된 회담이었고, 화해무드였기는 했지만, 우리는 TV를 통해 상상과 허구를 앞지르는 현실을 이미 목격했다. 설마 싶어 영화로 상상했던 일이 사실이 되고, 배우가 연기했던 장면을 실제 남북 정상이 TV 카메라 앞에서 실연했다. 성큼 역사가 큰 걸음을 내디디고, 환상보다 먼저 현실이 다가왔다. 늘 외계인이 공격했던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실제 비행기가 공격하는 것을 본 체험과 정반대의 의미로 놀랍고,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상상만 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말이다. 

 

한동안 긴장된 남북관계나 악의 축 김정은, 북한 핵 등은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로 환영받았다. 이 갈등을 소재로 한 수많은 시나리오가 영화계에 흡수된 것도 이러한 긴장의 여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허구보다 세다.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이념과 정치, 올바름과 정의와 같은 큰 단어들에 집중하고 있다. 세상엔 여전히 실현되어야 할 정의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김지운 감독의 말처럼 이제 다시 자유주의자들의 꿈을 들여다볼 때가 아닌가 싶다. 큰 단어들이 놓칠 수밖에 없는 미묘하고도 섬세한 개인의 감정, 이야기, 분노, 고통, 행복, 기쁨, 그런 것들 말이다. 작은 감정의 그물망으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작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들, 자유주의자들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런 이야기들을 다시 돌려줘야 할 것이다. 대열에서 낙오된 혹은 이탈한 영혼에 대한 이야기들 말이다. 다시, 자유주의자들의 섬세한 감성이 조심히 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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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후배가 귀국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재미있는 대목. “그쪽 사람들이 농 반 진 반으로 한국을 안 좋아한다고 하더라. 유럽 베이컨(삼겹살이 재료다) 값을 올렸다는 거다.”

 

한국은 세계 삼겹살의 20% 정도를 소비한다. 인구 대비 엄청난 양이다. 세계 17개국 내외에서 수입한다는 것도 이제 비밀이 아니다. 돼지를 대량으로 기르는 나라는 웬만하면 한국에 수출한다. 삼겹살뿐만 아니라 비교우위에 있는 모든 부위가 해당한다. 족발, 목살, 갈비, 등뼈 등이다. 한국에선 비싼데 외국에선 헐값인 부위다. 한때 수입 삼겹살 구분법으로 ‘오돌뼈가 붙어 있느냐’를 보라고 했다. 이젠 의미없다. 한국 기호에 맞춰 뼈를 함께 잘라 정형해서 수입한다. 수입은 냉동이라고? 아니다. 냉장도 꽤 된다. 이베리코 돼지는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스페인 명품이다. 물론 여러 등급이 있기는 하다.

 

 

어쨌든 한국의 수수한 길거리 고깃집에서 이베리코를 파는 걸 보고 유럽인 관광객이 놀란다고 한다. 대개 돼지를 세세하게 잘라 정형하지 않는 유럽에서는 한국의 특정한 기호에 맞춰 이익을 낸다. 이른바 항정살, 가브리살 등이다. 일본만 해도 흔한 등심 돈가스가 약간 다르다. 한국은 등심만 튀기는 반면, 일본은 붉은 살이 섞여 있다. 바로 가브리살, 즉 등심 덧살이라는 부위다. 그래서 일본과 돈가스 맛이 다르다고들 한다.

 

황학동이라고도 하고, 청계천이기도 한 중앙시장은 원래 양곡시장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그릇과 주방설비 가게가 많다. 이곳에는 ‘불판’만 전문적으로 파는 집이 있다. 우리가 얼마나 고기 굽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주인도 총 몇 종이나 있는지 모른다. 대략 세어보면 100종이 넘는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솥뚜껑형, 사각철판형 등 모양으로 구분할 수 있고 돌, 합금, 무쇠, 스테인리스, 강철 등 소재로도 나눌 수 있다. 석쇠처럼 불꽃이 직접 닿는 형은 적은 편이다. 삼겹살은 불에 잘 타고 기름이 일어 석쇠 같은 형태는 굽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속은 안 익었는데 겉만 탄다. 야외에서 숯불 피워 삼겹살을 굽다가 낭패를 보는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석쇠는 대개 소고기용이다. 삼겹살은 사실 그리 오래된 구이 형태의 외식이 아니었다. 먹더라도 주로 찌개나 보쌈용으로 쓰였다. 한식요리를 다룬 오래된 책 어디에도 삼겹살 구이는 나오지 않는다. 1970년대 전까지만 해도 돼지고기는 잘 상해서 유통이 어렵고, 잘 익혀 먹어야 하기 때문에 구이용으로 각광받지 못했다. 가격도 싸지 않았다. 1950~60년대 신문에는 ‘공설시장 가격’이라는 일종의 물가 안내 기사가 나오는데, 부위 불문하고 소와 돼지 고기 가격이 비슷했다. 미국에서 다량의 사료가 수입되고 식용유 산업이 발달하면서 콩깻묵 같은 부산물이 흔해졌다. 돼지고기 양산시대가 열렸다. 1970년대의 일이다. 이때부터 삼겹살집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불판을 가는 문화가 없었다. 점차 위생과 건강을 따지는 손님의 요구에 맞춰 불판이 가벼워지고, 갈아주는 문화가 생겼다. 삼겹살 불판 교체를 비유로 들면서 정치개혁을 온몸으로 실천하던 분이 비통한 죽음을 맞았다. 그가 꿈꾸던 새 불판 교체는 아직도 요원하다. 시민들과 함께 삼가 명복을 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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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간 2018년 7월16일 월요일, 전 세계 최초로 개봉하는 <미션 임파서블> 여섯 번째 이야기의 시사회가 있었다. 재미있었다. 톰 크루즈는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탄력성으로 스크린을 종횡무진했고, 불가능한 액션을 보란 듯이 펼쳤다. 다 거짓말이지만 잠시 현실을 잊게 해주었다. 하지만, 환상적 볼거리가 현실을 지워주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그렇다면 그건 마취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두 시간 정도면 완전히 각성되는, 그런 마취 말이다.

 

그런데 간혹 어떤 영화들은 사람을 완전히 흔들어 놓는 경우가 있다. <킬링 디어>가 딱 그런 작품이다. <랍스터>를 연출했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인데,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상영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킬링 디어>에도 <미션 임파서블>처럼 말도 안되는 일이 나온다. 소년이 저주를 내리자 그 저주가 실제로 일어나니 말이다. 마틴이라는 소년의 아버지는 심장 수술을 받다가 죽었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16세 마틴은 수술을 집도했던 심장외과 전문의 주변을 맴돈다. 의사 스티븐은 선량한 미국 시민으로서, 다정한 아버지로서, 친절한 이웃으로서 소년을 환대한다. 밥도 사주고, 고가의 시계도 선물하며 언제든 연락하라고 이야기한다.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문제는 이 소년이 정말 언제든 전화를 하고, 가족 모임에 들어와 아들과 딸에게까지 너무 가까이 접근했을 때 시작된다. 스티븐은 이제 아무 때나 전화하지 말라며, 형편없는 음식이나 주는 마틴네 저녁식사를 거절한다. 그 날 이후부터, 마틴의 불편함은 불길함으로 바뀐다. 마틴이 지독한 저주를 뿜어내고 거짓말처럼 딸과 아들의 사지가 마비되며 음식도 거부한다. 이대로라면, 마틴의 저주처럼 아이들이 눈에서 피를 쏟으며 죽을 것만 같다.

 

영화의 이야기는 마틴이 스티븐을 계속 찾아온 지 6개월 이후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렇다. 자신의 수술대 위에서 죽은 남자의 어린 아들을 친절히 대한 지 6개월 만에, 집도의 스티븐은 죄책감을 덜고 자신이 마치 뭔가 대단한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라도 된 양 착각한다. 자신의 명백한 실수가 마틴 아버지의 죽음을 가져왔을지도 모르는데, 어느새 자신이 베푸는 사람 역할을 하고 마틴은 그 동정을 구걸하는 사람처럼 바뀌어 있다. 위치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마틴은 당신은 내게 속죄를 하고 사죄를 해야 할 사람이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아님을 가르쳐주려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이며 마술적인 일들은,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 깊은 두려움과 공포를 일깨운다. <미션 임파서블>처럼 신나는 게 아니라 너무 불편하고 두려운 공포 말이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도 스티븐처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의 ‘심장’을 건드리는 의사라는 뜻이 아니다. 영화 속 대사처럼 ‘심장’은 메타포, 비유다. 우리는 남의 마음을 의도치 않게 건드리곤 한다. 삶의 중심에 함부로 침범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린 조금씩 누군가의 삶에 대한 가해자로 살아간다.

 

스티븐은 속죄하기 위해 6개월간 죽은 환자의 아들 마틴에게 거의 최선을 다했다. 6개월, 마틴이 스티븐이 가진 것, 그러니까 직장, 가정, 집에 더 깊숙이 들어오려 하자 그는 6개월이면 충분했다는 식으로 마틴을 밀어내려 한다. 스티븐에게 죄책감의 유통기한은 6개월이었고, 그것마저도 자신의 삶을 침범하지 않는 조건이 가능할 때였다. 그는 아버지를 잃었는데, 6개월간의 친절로 균형이 맞춰질까? 게다가 하고 싶은 대로, 주고 싶은 만큼 동정을 베푸는 게 그게 속죄이며 환대일까? 아니다. 그건 마틴이 원했던 ‘정의’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큰일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는 가해자의 일부로서 참회하고, 부끄러워한다. 세월호 참사 순간 무력하게 그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때도 그랬고, 19살 청년이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목숨을 잃었을 때도 그랬고, 2년 전 네살배기 아이가 뜨거운 어린이집 통학버스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도 그랬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다들 가해자나 다를 바 없다며 미안해했다. 처음처럼 그렇게 미안해하고 모두가 다 가해자로서 진짜 반성했다면, 세상은 달라졌어야 옳다. 하지만 과연 세상이 달라지고 있는가?

 

6개월, 뜨끔하지만, 정말 우린 사건 발생 6개월이 지나서도 사회적 책임감과 죄책감을 공유하며 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스티븐처럼, 내 가족이 먼저고, 내 일이 먼저라면서 어느새 가해자의 위치에서 슬쩍 내려오지는 않았을까? 죄책감의 유통기한은 얼마가 적당할 것인가? 아니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죄책감에 유효기간이라는 게 있어도 될까?

 

<미션 임파서블>은 보고나자마자 영화의 주요 장면들이 뇌리에서 사라졌는데, <킬링 디어>의 이야기들은 머릿속에 심어둔 씨앗처럼 자꾸만 자라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더운 여름 밤, 서늘한 공포로 잠 못 들게 하는 영화, 그게 바로 작은 영화, 아니 훌륭한 영화의 힘이다. 좋은 영화는 마취로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는 게 아니라 깊이 잠들어 있는 본질적 감정을 흔들어 깨운다. 잊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환기하는 영화, 그런 영화들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

 

<김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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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방송가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는 대하사극의 퇴조다. 2010년대 들어 점점 쇠락의 길을 걷더니 2016년 이후 명맥이 끊겼다. MBC <옥중화>와 SBS <육룡이 나르샤>가 마지막 50부작 이상 사극이다. ‘대하정통사극’으로는 2015년 방영된 KBS <징비록>이 마지막이었다. 현재는 상대적으로 제작비 부담이 적은 미니시리즈형 사극만 간간이 방영되고 있다. 과거 대하사극은 영화에 대중문화의 주류 자리를 내준 드라마가 영화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안방 블록버스터 장르로 사랑받았다. 철학, 정치 등의 거대서사와 멜로, 성장담 등의 일상적 이야기가 조화를 이루며 한국드라마 고유의 강점인 극성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장르인 데다, 대규모 전투신, 세트, 의복 등 볼거리도 풍부해서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이 역으로 방송 광고 시장 축소와 제작비 상승의 이중고를 버티지 못하고 쇠락하는 원인이 됐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

 

이런 가운데 지난주 방영을 시작한 tvN <미스터 션샤인>은 안방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4부작인 <미스터 션샤인>은 사극으로선 미니시리즈에 가깝지만, 이 장르를 통해 드라마적 재미의 최대치에 도전하고 있다. 김은숙 작가는 전작인 KBS <태양의 후예>, tvN <도깨비>에서 기존의 멜로 중심 이야기를 뛰어넘어 액션, 판타지 등 다양한 서사를 결합해 종합엔터테인먼트로서 드라마의 진화를 실험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실험을 위한 최적의 무대를 사극에서 찾았다. 사실 사극은 그 제작비를 감당할 수 있는 영화계에서는 이미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자리 잡았다. 역대 한국영화 흥행 순위로 알 수 있듯, 사극은 거대한 스케일로 극장가를 초토화하는 할리우드산 대작 영화에 맞설 만한 가장 경쟁력 있는 장르다.

 

현재 <미스터 션샤인>이 TV에서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드라마 최대 제작비의 부담은 글로벌 플랫폼의 투자로 상당 부분 해결했고, 이 풍족한 지원은 고스란히 드라마의 완성도로 연결됐다. 무엇보다 글로벌 포맷에 맞춘 스토리텔링의 변화가 눈에 띈다. 먼저 캐릭터를 보자. 남주인공 유진 초이(이병헌)는 김은숙 드라마 하면 흔히 떠오르는 재벌 후계자가 아니다. 노비 출신의 그는 주인에게 살해당하는 부모의 죽음을 목격하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에서도 홀로 가난과 인종차별을 버티며 성장했고, 결국엔 군대에서 공을 세우며 계급 상승을 이뤄냈다. 유진의 서사는 글로벌 성장담의 표준이 된 아메리칸 드림을 구현하고 있다.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남주인공 캐릭터의 변화다. 여주인공 애신(김태리)의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낮에는 사대부집 규수로, 밤에는 저격수로 살아가는 그녀는 가면 히어로의 이중생활을 그대로 따른다. 강인하고 역동적인 여성 캐릭터를 선호하는 대중문화 트렌드를 반영한 설정이다. 남녀 주연배우의 나이차에 따른 논란에도 불구하고, 애신의 매력적인 캐릭터는 여성 시청자들의 눈길을 붙든다.

 

이에 더해 정의, 평등과 같은 대의명분과 이에 걸맞은 선 굵은 서사가 있다. 구한말 격변기를 배경으로, 제국주의적 탐욕에 저항하는 영웅들의 활약, 차별 없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 등 글로벌 시청자들도 공감할 만한 세계관의 확장을 보여준다. 여기에 김은숙 특유의 로맨스가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간다. 여주인공을 둘러싸고 세 명의 남자가 순정을 바칠 정도로 러브라인이 복잡해졌지만, 모두가 치열한 시대적 고민을 지닌 캐릭터로서 설득력을 얻는다.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시간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조선을 지나는 중이었다”라는 애신의 내레이션 위로 주요 인물들이 교차 편집되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로맨스가 역사와 유리되지 않는 이야기가 될 것을 예고한다.

 

볼거리 면에서도 구한말 격변기를 무대로 한 전략이 제대로 통했다. 전통과 근대가 충돌하고, 세계 열강들의 알력 다툼이 벌어지는 한성의 풍경은 글로벌 서사의 무대로 제격이다. 대표적 사례가 정보 매매자 로건 테일러 테러신이다. 유진과 애신은 각각의 이유로 그를 암살하려 하고, 테일러와 거래하기로 한 일본 낭인들이 둘을 뒤쫓는다. 마침 거리에는 가로등 점등식이라는 신묘한 불구경을 위해 나온 사람들로 가득한 가운데, 복면을 벗고 제 모습을 드러낸 유진과 애신은 서로를 마주본다. 검을 든 낭인들과 장총을 든 저격수, 서양 신사 복식의 유진과 사대부집 규수 차림의 애신, 이들이 교차하는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에 켜지는 가로등의 불빛은 다양한 서사와 볼거리의 결합으로 극대화된 재미를 추구하는 이 작품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

 

<미스터 션샤인>이 선보인 안방 블록버스터로서 사극의 가능성은 앞으로의 대작 라인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로 화제를 모으는 김은희 작가의 신작 <킹덤>, 그리고 <대장금>, <뿌리 깊은 나무>의 김영현 작가가 대본을 쓰고 송중기가 주연 물망에 올라있는 <아스달 연대기>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 같은 흐름에 우려할 점이 없는 건 아니다. 과거에도 한번 일본발 한류 열풍에 편승한 ‘무늬만 대작’ 열풍이 불었다가 자기 복제 스토리로 실패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글로벌 트렌드에 발맞춘 변화가 필수적이다.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 <미스터 션샤인>의 뒷심 유지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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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인구 1000만명에 식당 숫자는 12만 개가 넘는다. 식당 한 개에 80여명의 인구가 물려 있다. 서울시에 그토록 식당이 많은 건 대부분 생계형 영세업의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떡볶이집, 김밥집, 분식집, 삼겹살집, 호프집, 치킨집이 다수를 차지한다. 알다시피 이런 집들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 레드오션의 절정이고, 이른바 ‘인테리어가게 돈 벌어주는’ 조기 폐업이 다수다. 흔히 도시 노동자들의 이동 순서가 회사-삼겹살집이나 치킨집-말단 노동이라고 한다.

 

 

회사의 고용에서 밀려나면 더 가혹한 개인 경쟁상태로 내몰리고, 그마저 폐업하면 일당 노동자로 떨어진다는 얘기다. 월급생활자가 아닌 자영업자들이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던 전통적 업종들이 폐업하는 것도 이런 계층 하락의 주요 요인이다. 지물포, 페인트가게, 전기상, 세탁소, 슈퍼마켓, 문방구, 이발소 등은 이제 동네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어엿한 세탁소 사장님들은 대형 세탁체인의 말단으로 떨어지고, 슈퍼마켓 주인도 본사의 ‘현장 영업대행자’에 불과한 편의점 주인이 된다. 이마저도 이익이 안 나면 최저임금 수준의 경비원, 청소용역업의 파견직 노동자로 살아나간다. 버스나 지하철의 새벽 첫차가 얼마나 만원인지 안 본 사람은 모른다. 시내로 출근하는 말단 노동자들이 지하철을 가득 메운다. 이런 와중에 청년들 문제는 더 심각하다.

 

고용이 안되니 자영업으로 진출해야 하는데, 그 목표가 대개 카페와 술집, 식당이다(벤처는 아무나 하나). 망원동이니 연남동이니 하는 신흥 유흥지구의 가게를 가보라. 상당수가 생애의 첫 본격 직업으로 요식업을 택한 친구들이다. 소비 인구는 줄고, 시장에 진출하는 청년들까지 넘치면서 요식업 시장은 일대 격전지가 되었다. 어딘가 뜬다 싶으면 빚을 내서라도 가게를 얻고, 그렇게 영업을 열심히 하다보면 가겟세가 오른다. 가겟세, 즉 임대료는 곧 부동산(건물) 가치의 바로비터다. 그렇게 건물 가치를 올려주는 건 집안 돈 끌어대어 영업한 어린 친구들인데, 이익은 건물주가 획득하게 된다. 영업 실패로 종잣돈을 까먹고 물러나도 이미 올라간 임대료는 절대 내려가지 않는다. 건물 가치 하락을 바라지 않는 건물주가 임대료를 내려줄 리 만무하고, 법망을 피해 무리한 임대료 상승이나 요구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청년 창업에 애를 쓸 수밖에 없다. 고용이 늘지 않으니, 창업해서라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그 시장이 불행히도 가장 망하기 쉽다는 요식업이라는 건 그야말로 나라의 불행이 되고 만다. 아버지는 회사 다니다가 쫓겨나서 고깃집 하다가 폐업하면 경비원이 된다치고, 그 아버지의 종잣돈을 얻어서 호프집과 카페 열어서 문 닫은 청년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허망한 말 말고, 그들이 시민으로서 존엄성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장사가 안되는 건 그저 “너희들이 운이 나빴어”라고 하고 끝날 일인가.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청년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 아이들을 정말 어찌할 것인가(칼럼 제목은 이오덕 선생의 산문집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에서 차용).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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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매년 5월이면 할리우드에서 출발한 프랜차이즈 영화들이 한두 편씩 연착륙을 시작한다.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시작된 성공은 <데드풀 2>로 연속되고 흥행은 <앤트맨 앤 와스프>로도 이어질 기세다. ‘손가락 하나 튕기는’ 서사행위의 의미는 <어벤져스>를 봐야만 알 수 있는데, 이 행위소는 <데드풀>이나 <앤트맨>에서도 유효하다. 얼핏 보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어벤져스’ 시리즈 세 번째 이야기, <데드풀 2>는 ‘데드풀’ 두 번째 이야기, <앤트맨 앤 와스프>는 ‘앤트맨’ 두 번째 이야기로 서로 독립되어 있는 듯하지만 교묘하고도 섬세한 짜임새로 이 세 작품은 모두 연결된 것이다. 좋게 말하자면 하나를 보고 다른 하나를 보면 재미가 배가되고 나쁘게 말하자면 죄다 파생상품이라 하나를 보고 나면 둘 셋, 더 보도록 유인된다. 마치, 같은 회사 제품으로 골라 담아야 할인이 되는 행사처럼 이야기들이 닮아 있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영화 <앤트맨 앤 와스프>의 한 장면.

 

어느새, 시리즈 영화, 프랜차이즈 영화는 우리 영화 문법과는 무관한, 할리우드에서나 가능한 영화 제작 관습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반지의 제왕> <헝거 게임>과 같은 판타지도 그렇고, <매트릭스>나 <스타워즈> 같은 SF물 등 성공한 시리즈물은 전부 할리우드산이었다. 할리우드 시리즈물은 단순히 이어지는 연속성만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프리퀄이 되기도 하고, 아예 이야기를 뽑아 스핀 오프를 만들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최근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중 단일 작품으로 독립성을 가진 작품이 거의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특히 상업적인 대중영화 안에서는 프랜차이즈와 시리즈가 매우 잘 어울리는 서사기법처럼 여겨질 정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2018년 한국 영화계에 중요한 변화가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다. 6월에 개봉해서 3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영화 <탐정: 리턴즈>는 2015년 개봉했던 영화 <탐정: 더 비기닝>의 후속작이다. 주인공의 캐릭터나 그가 맺고 있는 관계도가 고스란히 유지되는 가운데 사건과 몇몇의 인물들이 첨가되는 방식이다. 영화는 공공연하게 시리즈물로 거듭날 것임을 표방하고 있다.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뒀으니 ‘탐정’ 3편도 만들어질 듯싶다. 굳이 안 만들 이유가 없어 보인다.

 

‘탐정’의 프랜차이즈화는 어떤 점에서 한국의 시리즈 영화 제작의 오래된 관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시리즈가 될 만한 영화 한 편을 초계기처럼 일단 띄워 보고, 잘된 경우엔 그 캐릭터와 특성을 살려 2편, 3편으로 이어가는 방식 말이다. <조선명탐정>이 그랬고, 이에 앞서 <가문의 영광> <두사부일체>류의 조폭 코미디 영화들이 그랬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프랜차이즈 제작 방식은 안정과 위험을 둘 다 가지고 있는데, 안정이 성공을 기반으로 그러한 면을 부각시키는 것이라면 위험은 그것이 오히려 관객들의 피로와 싫증을 가져오기 십상이라는 사실과 연관된다. 시작이 훌륭했지만 결말이 시시했던 것은 대표적 공포 시리즈였던 <여고괴담>의 성장과 실패 과정에서도 여전히 반복되는 현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마녀>와 <신과 함께>가 시도하고 있는 시리즈 제작 방식은 사뭇 독특하다. 두 영화는 기획 단계부터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마녀>의 영어 제목은 <Part 1: The subversion>으로, 시리즈물의 첫 번째라는 사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이번에 개봉한 1편이 3편 중 첫 번째에 해당한다는 것을 아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금껏 성공한 영화의 플롯 공식을 재활용해 2편과 3편을 만드는 방식과는 시작부터 다르다. 이를 입증하듯 올해 개봉한 <마녀>는 주인공 소녀의 등장과 그녀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에만 집중한다. 아직 본론은 시작도 하지 않았음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이다.

 

지난해 겨울 <죄와 벌>을 개봉한 이후 올해 여름 <인과 연>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신과 함께> 역시 애초에 2부작으로 나누어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가만 보면, 올여름에 개봉하는 한국 영화 중 세 편이 프랜차이즈 및 시리즈 영화다. 2000년대 초 조폭 코미디 시리즈물들이 급속히 사라져간 이후 매우 오랜만에 선보이는 시리즈 영화의 선전이라고 볼 수 있다.

 

시리즈, 프랜차이즈 영화의 제작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영화 소비 시장이 안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영화를 소비하는 관객들에 대한 신뢰도가 그만큼 높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매년 100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가 등장하고, 1년에 영화를 보는 관객 인구가 2억명을 넘는 시장이 바로 우리나라다. 세계 어느 곳을 살펴본다고 해도, 이렇게 영화를 많이 보는 나라가 드물고, 자국 영화를 이처럼 많이 보는 관객도 드물다. 대개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한 해 텐트폴 영화의 자리를 노리던 한국 상업영화의 스펙트럼이 이제 할리우드 영화 제작 흐름을 벤치마킹해 한국형 프랜차이즈 영화로 거듭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미리 기획된 시리즈 영화들이 과연 어떤 성과를 거둘지 그 결과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짐작하다시피, 점차 한국 영화의 관객 동원율이 떨어지고, 마블을 비롯한 웰메이드 할리우드 시리즈 영화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지고 있다. 마블의 영화들이 인기를 끌긴 했지만 마블의 모든 영화가 올해처럼 사랑을 받은 적도 없다. 한국의 상업영화들이 고전적 방식으로는 기술과 자본의 우위를 앞세운 할리우드 영화의 공세를 버티기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형 프랜차이즈 영화는 한국 대중영화의 패러다임에 대한 새로운 시도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할리우드를 닮아 가되 좀 다른 방식으로 가는 것, 이론적으로 그럴 듯해 보이는 이러한 시도가 과연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 관심 있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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