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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날이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다행히도 대개 분별 있는 관찰자이기 때문에 꽤나 합리적으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판단한다. 보이지 않는 손을 주창한 애덤 스미스는 먼저 분별 있는 관찰자로서의 인간을 믿었다. 법이 아니라도 가해자와 피해자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상식이라는 분별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도덕감정을 기반으로 해서 인류는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을 마련한다. 타인들과 특별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을 때, 그 분별력은 더욱 공정해진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피해자들에게 공감을 하고, 위로를 건네고, 격려를 보탠다. 최근에 벌어진 한 사립 초등학교의 폭력 사태만 해도 그렇다. 네 명의 아이가 해를 가했고, 한 명의 아이가 해를 입었다. 그런데,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가 없다. 여론이 들끓었다. 분별 있는 관찰자로서 사람들은 공평한 처사를 요구했다. 그 누구도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나와 관계없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일에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참여하곤 한다.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엘르>의 한 장면.

그런데, 놀랍게도, 누군가는 그 특정한 가해자의 편에 서기도 한다. 이때 활용되는 논리 중 하나는 그 가해자도 ‘어린이’이며, 이런 논란으로 인해 사건과 관계없는, 같은 초등학교의 선량한 다수가 피해를 입고 있다는 식이다. 심지어, 피해자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까지 들린다. 그런데, 이런 논리들은 이미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피해자의 경험을 나와 무관한 ‘일회적 사고’로 만들고 가해자의 폭력을 인간적 실수로 환원하는 것, 우리는 지금껏 수많은 사건들이 이런 식으로 희석되는 순간들을 목격해왔다. 그래서 엉뚱한 생각이 든 것이다. 가해자임이 분명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누가 더 억울한지 서로에게 고변하도록 해보면 어떨까? 가해자들끼리 모여서, 네가 더 나쁘다 넌 좀 억울하겠다와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게 하면 어떨까? 아마 서로 자기만 억울하고, 다른 가해자들은 뻔뻔하다며 더 호되게 비난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 말이다.

 

폴 버호벤 감독의 <엘르>는 그런 점에서 피해자와 그들에게 쏟아지는 다양한 시선의 폭력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 미쉘(이자벨 위페르)은 어느 날 갑자기 복면을 쓴 괴한에게 폭행을 당한다. 그런데, 이 여성의 다음 행동이 놀랍다. 미쉘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스스로 폭행범과 맞서고자 한다. 무섭지도 않을까 싶지만, 사실 이미 그녀는 세상이 피해자를 어떤 방식으로 한 번 더 가해하는지 경험한 바 있다. 열한 살 소녀였던 시절, 미쉘은 아버지의 엽기적인 살인으로 세상에 무차별적으로 두드려 맞은 경험이 있다. 그녀 역시 피해자였지만 아무도 그녀를 피해자로 보아주지 않았다. 살인자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감독이 미쉘이라는 인물을 그려나가는 방식이다. 미쉘은 여러 면에서 그렇게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이지 않다. 게임 회사 대표인 그녀는 더 잔인하고 선정적인 게임을 만들어내라고 조직원들을 닦달한다. 남자 직원들을 다루는 모습을 보자면 마초적인 남성 상사 그 이상이다. 심지어 미쉘은 오랜 친구를 속이고 그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그거로도 모자라,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이웃집 부부를 초대해놓고는 식탁 아래로 발을 뻗어 그 이웃을 유혹하기도 한다. 심지어, 이웃집을 훔쳐보며 음란한 상상을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미쉘이 그렇다고 해도, 대낮에 복면을 쓰고 침입한 괴한에게 맞고 유린당해도 되는 것인가? 불륜을 저지르니 독실한 가톨릭 신자에게 성폭행을 당해 마땅한가? 다시 말해, 그녀가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삶과 다르게 산다고 해서 미쉘이 폭력의 희생자라는 사실이 바뀌는가 말이다. 당연히 그렇지 않다. 미쉘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그녀는 대낮에 자신의 응접실에 있다가 괴한에게 폭행을 당한 희생자가 맞다. 개인의 도덕과 윤리의 영역에서의 염결성 문제와 피해, 가해의 문제는 엄격히 분리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피해 여부와 관련 없는 문제들을 동원해 사실을 흐리고, 피해자들을 엉뚱한 방식으로 괴롭히곤 한다. 만일, 미쉘이 공공의 권력에 기대, 말하자면 경찰에 신고하고 그래서 다수의 언론에 보도되었더라면, 선정적인 게임을 만드는 사업자이자 불륜을 저지르는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피해 여부와 무관하게 다뤄질 수 있었을까? 혹시나 피해 사실은 어느새 잊혀지고 피해자의 과거사와 도덕성에 대한 여론만 들끓지는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피해자들을 이미 보아왔다. 가령, 어떤 사람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울분에 대해 더 많은 합의금을 원한다는 모욕적 발언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세월호 유족들을 향해 개인적 사고에 불과하며 그 사고를 통해 사적 이익을 얻으려 한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혼을 하고, 어떤 사람은 실직자라는 식의 매우 사적인 삶의 영역을 끌고 와 피해 사실과 섞어 그 경계를 흐리게 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분별력 있는 관찰자로서의 자리를 포기하고 진실과 무관한 편견들을 폭력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평소 행실이 올바르지 않은 피해자가 있듯 평소에 선량했던 가해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피해 사실과 분리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선, 소수의 그리고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만약, 인간에게 다른 사람이 느끼는 불안, 공포, 분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 대해 허락된 공감의 능력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더더욱 사태에 대해 스스로 분별 있는 관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사법적 정의를 실현하는 인간으로서의 최소 요건일 수 있을 테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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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이십여년 전 회사 다닐 때 여름이 오기를 늘 기다렸다. 딱 이맘때다. 해지면 호프집 앞에 깔리는 임시 탁자에서 마시는 한 잔의 생맥주 때문이었다. 7월이 무르익으면 해가 져도 무덥다. 그래서 딱 이즈음이다. 날씨는 선선하지도 덥지도 않지, 목은 마르지, 생맥주 마시기에 그만큼 좋은 조건도 없다. 안주야 북어나 치킨 몇 조각이면 그만이었다. 시내 곳곳, 아니 전국이 요즘 야외 생맥주 대목이다. ‘야장’이라고도 부른다. 업계에서는 전문(?) 용어로 ‘야장 깐다’고 한다. 밤에 탁자 깔고 장을 벌인다는 뜻이겠다. 생맥주 가게는 요즘이 대목이다. 한 해 벌이의 상당 부분을 이때 벌어들인다고도 한다. 문제는 불법 논란이다. 도로는 시나 나라 것이니 무단점유가 되고, 식품위생법에도 저촉된다. 영업허가 조건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영업장의 허가된 장소란 합법적인 공간에 지은 물리적 실체만을 뜻한다. 영업하면서도 늘 불안하다. 차라리 적당한 액수의 도로 점유비를 내고 허가를 받아 장사하고 싶어한다. 법적인 해석과 뒷받침이 필요하고 다른 업종 가게와의 이해관계도 조절해야 한다. 생각보다 상당히 복잡하다. 그래서 매년 어정쩡하고 찜찜하게 야장을 까는 업주들의 속은 불안에 떤다. 벌어먹어야 하는 업주 사정에 보면, 안타깝다. 법의 엄정함에 비추면 또 이게 불법인 경우가 많으니 참 답답하다.

 

서양은 어떤가. 본디 광장 문화가 있는 유럽은 카페가 발달했다. 카페란 대개 음식도 같이 판다. 우리 시각에서 보면 그냥 레스토랑이다. 광장 옆이나 골목의 카페와 레스토랑이 도로를 점유하고 영업할 수 있도록 잘 설계되어 있다. 도로 점유비를 받고 합법적으로 영업한다. 카페는 단순히 영업장이 아니라 일종의 공공성을 띤다는 개념이 들어 있다. 목을 축이고, 고픈 배를 채울 수 있는 공간으로 시민에게 기능하기 때문이다. 타이베이에 가면 주랑(柱廊)이 도시 곳곳에서 보인다. 도로와 건물 사이에 기둥을 세우고 비와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구조물이다. 주랑 건축 비용은 건물주가 낸다고 한다. 대신 그 주랑으로 인해서 생긴 공간을 활용한다. 이곳에 탁자를 깔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실 수 있다.

 

도시 설계의 개념이 달랐던 우리는 이 지점에서 차이가 생긴다. 주랑을 깔 공간도 없고, 인도는 좁다. 그래도 생각을 달리하면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다. 나는 서울의 몇몇 ‘야장’은 명물로 밀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을지로의 생맥주 골목이나 종묘 옆 고기골목을 처음 구경한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입을 떡 벌렸다. 현실세계 같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외국인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열광한다. 고급스러운 공간을 외국인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보면 오산이다. 그들은 오히려 이런 서울만의 그림에 미친다. 여행을 마치고 제일 좋았던 경험을 꼽으라면 대개는 그 야장의 기억이다. 원컨대, 이런 공간을 키우겠다고 나설 일도 아니다. 법적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골목 앞에 커다랗게 아치문을 세우고 ‘○○문화의 거리’라고 명명하는 것만 안 하면 된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이런 골목들을 살릴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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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1893, 1918, 1928.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1893년은 역사상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해이다. 신대륙이었던 뉴질랜드였다. 1918년은 영국 여성들이 투쟁 끝에 30세 이상 참정권을 얻어낸 해이고, 1928년은 그 나이를 20세로 끌어내린 해이다. 정치 선진국이자 우리보다는 훨씬 더 진보적인 성평등을 경험한 국가로 여겨지는 영국에서, 여성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게 아직 채 100년이 안된 것이다. 영국 여성 참정권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서프러제트>에 감동적인 이야기로 그려져 있다. 만약, 현재 개봉 중인 영화 <원더우먼>을 보기 전에 <서프러제트>를 본다면,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농담에서 그 이상의 맥락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DC가 새롭게 부활시킨 <원더우먼>은 사위어 가던 불길을 살려 줄 불씨로 대접받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원더우먼>은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그럴듯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중이다. <원더우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여성’이다. 주인공이 여성 영웅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아마존 데미스키라 여성 전사의 모습도 무척 강렬하다. 전쟁의 신 아레스와 대적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마하고 훈련하는 전사들에게서 여성은 유연성과 아름다움을 보태는 긍정어가 되어 준다.

 

영화 <원더우먼>의 주인공 다이애나 프린스(가운데)가 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어 활약하는 장면.

 

원더우먼의 여성 전사로서의 가치는 오히려 그녀가 영국에 왔을 때 더욱 두드러진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무렵, 런던이라는 대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영국식 여성’에 순화되기를 요구받는다. 분량으로 따지자면 몇 장면 되지는 않지만, 아마존다운 모습을 지우기 위해 다이애나는 백화점에서 2000벌이 넘는 옷을 입어보고, 그녀에게는 수족과도 같은 칼을 압수당하게 된다. 여성 비서는 칼을 뺏으며, 이렇게 말한다. “여성 참정권 과격운동에 참여하실라고요?”

 

<원더우먼>이 여성 영웅을 다루는 방식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다이애나가 가진 공감과 연민의 힘을 여성 영웅의 동력으로 이해한다는 점 때문이다. 다이애나는 정의를 위해 그리고 전사로서 악을 물리쳐야 한다는 당위성을 마음에 담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주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다. 대개, 여성적 약점으로 여겨지곤 했던 감정을 다이애나는 힘의 원동력으로 쓴다. 그리고 이 순수한 열정과 사랑이 주변 사람들까지 움직이게 한다.

 

사실, 엄밀히 말해, 여성 영웅이 대중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영화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20세기 초, 시리얼 퀸 멜로드라마가 미국 대중 영화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활기차고 독립적인 여성들은 직접 모험에 나서고, 액션을 감행했다. 소위 새로운 시대에 나타난 신여성들이 모험 활극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여성 영웅들은 대개 결혼을 기점으로 모험을 끝내거나 악당들에게 잡혀 거의 사디즘적인 고통을 받곤 했다. 기차에 줄로 묶여 있는 여성이나 입에 재갈이 물린 주인공이 얼른 떠오르는 것도 이런 영화적 관습의 결과일 것이다.

 

많은 영화학자들은 독립적인 여성의 급성장이 환호와 공포를 불러왔고, 그 결과가 바로 시리얼 퀸 멜로드라마였다고 평가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한동안 여성 영웅이 주인공인 영화가 거의 없었던 것은 그만큼 여성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위협적일 만큼 성장하지 않으면 다루지 않는다. 반대로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 여혐(여성혐오) 논란도 어쩌면 여성의 상대적 성장에 대한 왜곡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영화들 중 가장 인상적인 여성 영웅의 모습이라면 바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 등장하는 여성들일 것이다. 퓨리오사가 믿는 것은 권력이나 지배의 힘이 아니라 생명의 힘이다. ‘물’에 압축된 생명의 힘은, 만삭이 된 몸으로도 동료를 지키고자 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할머니가 되어서도 딸들을 지키고자 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주된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영원한 안식이라는 허망한 꿈에 스스로를 희생하라는 아버지의 명령과 달리 퓨리오사를 비롯한 여성이 꿈꾸는 세계는 강인하지만 따뜻하다. 엔진과 배기가스가 작열하는 액션 영화에서 여성이 돋보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원더우먼>을 연출한 페티 젠킨스는 제작비 1억달러가 넘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첫 여성 감독이라고 한다. 사실, 여전히 수많은 영화들에서 여성들은 남자 주인공의 이름만 부르거나 그나마도 그 주인공을 위기에 몰아넣는 민폐 요소인 경우가 많다.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아 새롭게 리부트한 영화 <미이라>의 여주인공 제니가 얼마나 남자 주인공 ‘닉’을 부르는지, 어떤 점에서,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닉’을 부르는 것 외엔 없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차가 전복해도 닉, 좀비가 따라와도 닉, 비행기가 추락해도 닉, 물에 빠져도 닉. 어쩌면 여전히 많은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 주인공의 이름을 각인하는 호명-기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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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since 1900년.’

요새 식당가 간판의 한 풍경이다. 오래된 식당이 좋다는 믿음을 이용한 마케팅이다. 보통 노포(老鋪)라는 한자어를 많이 쓴다. 노(老)자는 안정감을 주고 신뢰를 드러낸다. 중국어와 한자어에서도 이 글자는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존경의 의미를 담는다. 오랫동안 살아남은 것 자체가 믿음이 된다. 생각해보라. 우리나라에서 100년 넘은 식당은 한 개 정도가 겨우 명맥을 잇고 있으니까 말이다. 해방 전에 생겨서 지금껏 운영하는 집도 대여섯 개나 될까 모르겠다. 1970년대에 식당이 많이 생겼지만, 지금껏 하고 있는 집이 드물다. 그래서 1970년대생 식당들은 나이로는 장년에 불과하지만 모두 노포 축에 든다. 왜 그럴까. 이 동네에서는 이렇게 추측한다. 첫째, 힘든 일을 자식 대에 넘기고 싶지 않아서 폐업했다. 그렇다. 식당은 험한 직업이다. 자식이 같은 일을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도울라치면 “너, 가서 공부해!” 하고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노포를 이어받아 하는 2세들은 기억한다. 식당 집 자식. 별로 ‘있어 보이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대를 물리지 않았다. 그렇게 스러진 노포가 많다. 1960~70년대에 생긴 노포가 많았던 피맛골에서 장사했고, 나중에 포클레인에 쓸려갈 때 피맛골 지키기 모임에 활동했던 한 식당주와 통화했다. 그는 “이제 그만하련다. 자식에게도 시키지 않겠다”고 하고는 정말 문을 닫아버렸다. 50년이 넘는 피맛골의 터줏대감이었는데.

 

 

한때 식당을 두고 말하던 농담이 있다. 장사가 잘되면 주방장 겸 사장이 요리를 놓고 카운터에 나가서 계산을 맡는다. 그것도 잠시, 잘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자가용 타고 땅 보러 다닌다는 얘기였다. 고되고 거친 식당보다 땅을 사두는 게 이익이었던 시절의 우화다. 실제 그런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 하루 종일 허리를 학대해가며 주방에서 서 있는 걸 원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최근 서울시에서 노포를 보존하고 앙양하는 사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식당뿐 아니라 오래된 모든 가게가 대상이 된다. 비로소 세월을 안고 살아온 노포를 인정해주는 분위기다. 하나 인증제도에 어려움도 있다. 상당수 가게가 입증 자료가 부실하다. 당연하게도 노포가 이렇게 각광받을 줄 몰랐으니 사진 자료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의심스러운 노포’도 있다. 아무 근거 없이 ‘3대를 내려왔다’느니, ‘60년이 되었다’느니 주장한다. 어찌 되었든 변하는 시절을 드러내는 일화다. 오래된 것은 골동이 된다는 사실이 ‘대물림 가게’라는 정신적 의미까지 확장될 줄이야.

 

노포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가게도 많다. 무한경쟁에서 버텨낼 수 없는 다수의 식당들이다. 자료를 보니, 서울 시민은 1000만명이고 식당 숫자는 11만개가 넘는다. 식당 이용 가능 인구를 1000만의 3분의 1로 잡으면, 식당 하나당 서른 몇 명꼴이다. 살아남는 게 버거운 세상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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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최근 걸그룹 씨스타가 마지막 곡을 발표하고 그룹 활동 종료를 선언했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 ‘걸그룹 전성기’를 열었던 원더걸스, 카라, 투애니원, 포미닛 등이 이미 줄줄이 해체한 뒤다. 아직 소녀시대가 있긴 하지만, 핵심 멤버 제시카가 탈퇴 이후 개인활동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2세대 걸그룹’ 시대가 저문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의 해체는 예의 아이돌의 ‘7년차 징크스’를 또 한번 확인시켜준다. ‘7년차 징크스’란 공정거래위원회가 기획사의 아이돌 착취를 막기 위해 마련한 표준계약서의 최대 계약 기간에서 비롯된 말이다. 대부분의 아이돌그룹이 이 기간 종료 뒤 재계약 장벽을 넘지 못하고 완전체 활동을 종료하게 된다. 특히 이 장벽은 걸그룹에게 유독 더 높게 다가온다. 외모, 나이, 인성 등 모든 면에서 보이그룹보다 엄격한 잣대를 요구받는 걸그룹은 그만큼 수명도 짧을 수밖에 없다.

 

KBS가 제작한 웹예능 <아이돌드라마 공작단>의 출연 인물들.

2세대 걸그룹의 퇴장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뒤를 이을 3세대 걸그룹 콘텐츠의 상대적 협소함 때문이다. S.E.S와 핑클 등 소위 ‘국민요정’으로 소비된 1세대 걸그룹에 뒤이어 등장한 2세대 그룹들은 전보다 다양한 개성과 무대로 이른바 ‘걸그룹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다. 옆집 소녀 같은 친근한 이미지로 세대 초월 신드롬을 일으킨 원더걸스, 완벽한 군무와 보컬을 선보인 ‘걸그룹의 정석’ 소녀시대, 당당하고 파워풀한 퍼포먼스의 투애니원, ‘큐트섹시’ 카라 등 다채로운 끼와 매력으로 무장한 2세대 걸그룹은 제2의 한류를 이끌어내며 K팝의 위상을 높인 주역이다.

 

이에 비해 트와이스, 여자친구, 러블리즈, 오마이걸, 우주소녀 등 ‘3세대 걸그룹’은 주로 귀엽고 미성숙한 소녀 이미지에 갇혀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들의 무대나 뮤직비디오에는 일본식의 짧은 교복 치마와 핫팬츠인 부르마 체육복, 테니스 스커트 등 롤리타콤플렉스 혐의를 받는 의상이 단골 출연하고, 애교 섞인 몸짓이 포인트 안무로 강조된다. 이러한 경향은 얼마 전 아기 턱받이 의상을 착용하고 ‘어른이 된다면’이라는 곡을 부른 신인 걸그룹 보너스베이비의 무대에서 절정을 이뤘다. 점점 수동적이고 유아적으로 뒷걸음질하는 걸그룹 무대의 다른 한편에서는 Mnet <프로듀스 101>, JTBC <잘 먹는 소녀들>, KBS <본분 올림픽> 등 가학성을 극대화한 걸그룹 예능 프로그램들이 속속 방영되었다. 

 

이처럼 걸그룹 콘텐츠의 퇴행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얼마 전 주목할 만한 두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SBSfunE 채널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아이돌마스터.KR- 꿈을 드림>(이하 <꿈을 드림>)과 KBS에서 제작한 웹예능 <아이돌드라마 공작단>이다. 일본의 유명 아이돌 육성 게임을 원작으로 한 전자에서는 실제 오디션으로 선발된 걸그룹 ‘리얼걸 프로젝트’가 직접 성장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후자에서는 여러 걸그룹의 멤버들이 모여 직접 대본을 쓰고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을 그려나간다. 이 프로그램들은 공통적으로 드라마에서 새로운 콘텐츠의 가능성을 찾았다. 단편적인 이미지로 소비되는 무대나 예능 프로그램보다 좀 더 길고 안정적인 서사 안에서 걸그룹의 자의식적 목소리가 진지하게 드러난다.

 

먼저 <꿈을 드림>은 제목처럼 소녀들의 꿈과 성장을 강조한 ‘청춘 힐링 드라마’를 표방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걸그룹 멤버였으나 교통사고로 비운의 죽음을 맞은 쌍둥이 동생을 대신해 숨겨왔던 꿈과 재능을 자각하는 수지(이수지), 어린 시절부터 연예인을 꿈꿨지만 번번이 오디션에서 좌절하는 최장수 연습생 영주(허영주), 계층 이동 사다리가 끊어진 시대에 유일한 신분상승 수단이 된 아이돌에 목숨 거는 흙수저 출신 지슬(차지슬) 등 걸그룹 이전에 평범한 청춘으로서의 고민이 성장드라마에 함께 녹아든다. 비록 전체적으로는 순정만화 같은 분위기와 아이돌 육성 게임 원작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자기 고민이 담긴 소녀들의 담담한 내레이션을 듣는 것은 그 자체로 희귀하고 유의미한 경험이다.

 

‘본격 아이돌 자서전 드라마’를 목표로 한 <아이돌드라마 공작단>은 더 인상적이다. <프로듀스 101>에서 선발된 IOI 출신 전소민, 역시 <프로듀스 101>에 출연한 김소희, 마마무의 은별, 레드벨벳의 슬기, 러블리즈의 수정, 오마이걸의 유아, 소나무의 디애나 등 여러 걸그룹에서 모인 7명이 주인공이다. 첫 회에서 이들은 한 드라마 오디션 현장에서 평가받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남성 심사위원들이 요구하는 그대로 연기와 개인기를 선보여야 하는 오디션 장면은 걸그룹의 현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제작진 눈에 들지 못하고 모두 탈락한 멤버들은 “오디션에 붙을 수 없다면 우리가 직접 드라마를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2회는 한자리에 모인 이들이 걸그룹 생활의 고충을 털어놓는 내용이다. 휴대폰 금지, 다이어트 강요, CCTV 감시 등 인권 착취 상황의 고발을 통해 소녀들은 자연스럽게 연대의 공동체를 구축한다. 그리하여 프로그램은 금기와 억압의 세계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된 소녀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사회적 발언권을 축소당한 여성 전통 안에서 자전적 서사가 지니는 의미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시도만으로도 분명 인상적이다.

 

앞으로 남은 이야기에서 과연 두 프로그램이 단순히 시도를 넘어 걸그룹 콘텐츠의 새로운 가능성까지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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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롯일까, 스펙터클일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다를 바 없이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도 플롯 우선주의자와 스펙터클 우선주의자가 있다. 볼거리를 의미하는 스펙터클이 없다면 과연 영화가 소설이나 연극과 어떤 차이가 있겠냐고 물을 수 있겠고,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플롯 없는 볼거리만 이어진다면 그것 또한 행위예술이나 시각미술과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에 대답이 궁색하긴 하다.

 

대중과 영화의 만남을 다루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영화는 근대의 산물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발터 베냐민은 보들레르의 글을 빌려, 영화를 근대인의 지각체계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미적 수단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영화의 형식적 원리가 충격과 혼잡함을 바탕으로 하는 도시적 감각과 어울린다고 본 셈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인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의 한 장면.

 

발터 베냐민의 말처럼 영화가 탄생한 이후, 대중은 이 현란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영화사의 굵직한 기록들이 시각적 혁명에 닿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듯싶다. 스펙터클 역사 서사극 <벤허>도 그렇고, 가깝게는 <타이타닉>이나 <아바타>도 그렇다.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각적 자극, 그 앞에서 많은 대중들은 환호했고 그 기술력에 감탄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과연 이런 영화들에 대한 환호가 그저 기술적인 것에 그쳤을까 싶기도 하다. <벤허>의 중심엔 복수가 있고, <타이타닉>과 <아바타>의 가운데에는 불멸의 사랑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런 중심의 이야기를 우리는 서사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그 서사가 새로운 게 참 드물다는 점이다. 불멸의 사랑이나 복수, 그 얼마나 오래된 이야기란 말인가? 그 오래된 이야기를 이렇게도 놓고, 저렇게도 놓아서 낯익지만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것, 어쩌면 그게 바로 이야기꾼들의 오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21세기 들어 가장 성공한 해양 블록버스터 중 하나인 <캐리비안의 해적>의 다섯 번째 이야기가 대중에게 선을 보였다. 영화의 중심축은 여전히 잭 스패로우 선장이다. <캐리비안의 해적>은 2003년 첫선을 보인 이후 거의 실패한 적이 없는 성공적인 프랜차이즈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세월이다. 잭 스패로우야 워낙 강렬한 아이 메이크업과 과도한 복장으로 생물학적 나이를 숨길 수 있겠지만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대개의 배우들이 이제 제법 나이도 먹고, 중견 배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비슷한 문제를 경험한 <배트맨>은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노쇠해진 배트맨을 다룬 바 있지만, 이는 영화적 환상의 외피를 찢고 현실의 개연성에 부딪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주인공이 늙고, 흔들리고, 비루해지는 것, 사실이야 그렇지만 영화란 어느 정도 물리적 세계와 동떨어진 환상의 공간 아니던가?

 

그러다보니 <캐리비안의 해적>은 여러모로 마치 <스타워즈>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세대로의 캐릭터 이주를 계획한 듯싶다. 새로운 개체에 <캐리비안의 해적>이 가진 이야기 DNA를 심어놓겠다는, 말하자면 서사적 번식을 선택한 셈이다. 자, 그렇다면 문제는 다시 이야기다.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14년의 세월만큼 훨씬 세련된 스펙터클을 선사하고 있다. 아쉬운 건 볼거리, 스펙터클의 사실성이나 박진감이 아니라 이야기다.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의 부주제는 “나는 너의 아버지이다(I’m your father)”로 요약된다. 아주 오래전부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써왔던 오래되고 익숙한 주제인 가족주의의 끈을 부여잡은 셈이다.

 

가족을 소재로 한 코미디 애니메이션 <보스 베이비>의 한 장면.

특수한 구심점 없이 다양한 인종으로 결합된 미국에서 가족은 종교이며 이념이며 신념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떤 시기를 막론하고 미국 영화는 늘 경건하게 가족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때로는 만병통치의 치유법처럼 어떤 이야기라도 가족으로 귀결된다면 그럴듯하게 여겨지도록 권유되는 작품들도 있곤 했다. 하지만 때로 그 가족이라는 게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처럼 쓰일 때, 가족은 궁색한 변명거리가 되고 만다.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가족이 먼저야, 혈육이 최고야와 같은 말을 내세우는 건 어쩐지 허약한 자기기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가족 이야기이긴 하지만 <보스 베이비>가 다루는 그 방식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것도 이런 맥락과 닿아 있다. <보스 베이비>는 가족의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심리적 곤란을 영화의 밑바닥에 깔고 있다. 동생을 맞이해야 하는 형의 고통, 그건 모든 가족의 아름다움 아래 놓인 격렬한 감정의 파고이니 말이다.

 

만일 대중 영화가 가족을 추구한다거나 파편화된 이미지를 추구한다거나 그 어떤 징후들을 보인다 해도 그 속엔 나름의 현실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 현실성은 결국 볼거리가 아닌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개별성을 찾아내는 노력의 산물일 것이다. 뻔한 게 문제가 아니라 그런 뻔한 문제를 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기술보다 이야기의 힘을 찾아야 하는 우리 영화도 잊지 말아야 할 문제일 듯싶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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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5·18이었다. 이걸 그냥 날짜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대통령까지 행사에 참석해서 젖은 눈으로 노래를 불렀다. 지난 두 정권에서 이른바 합창이냐 제창이냐며 말도 안되는 논란이 벌어졌던 그 노래 말이다. 노래는 정서적이며 정치적이며 선언적이다. 그래서 두 정권의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들이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은 건 당연하다. 5·18의 핵심 당사자 전두환과 두 대통령은 사실상 한몸이기 때문일 테다. 민족미술 진영에서는 이 피어린 항쟁과 관련해서 많은 예술품을 남겼다. 이른바 최근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의 직접 피해자 홍성담 화백이 주도했던 민족해방운동사라는 걸개그림도 그중 하나다. 이 거대한 그림 중에 ‘광주항쟁’이라는 부분이 있다. 계엄군과 맞서 싸우는 청년들 뒤로 ‘아짐’들이 불을 때서 밥을 하고 있는 장면이 한복판에 그려져 있다.

 

모든 투쟁은 연료와 동력이 필요하다. 먹어야 싸운다. 누가 그 밥을 만드느냐도 중요하다. 아마도 저 화가들은 민중의 지지를 상징하는 의미로 밥솥과 하얀 이밥을 정중앙에 배치했으리라. 사건 당시 광주 사는 고등학생이었던 친구가 있다. 5·18 자료 사진이나 화면을 보면 교련복을 입은 까까머리 고교생이 꽤 많이 보인다. 내 친구도 그 현장에 가기 위해 시민군의 트럭에 올라탔다. 길가에 ‘아짐’들이 밥을 지어서 즉석 주먹밥이나 김밥을 만들어 올려주었다. 비장하고 눈물겨운 장면이었다. 내 친구는 김밥을 먹으며 금남로로 가는 도중 그만 트럭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팔을 크게 다쳤고, 시민군을 치료해주던 광주기독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았다. 어쩌면 그는 그 추락 때문에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금남로에서는 계엄군의 총탄이 날아올 무렵이었으니까.

 

김밥은 시민군의 식량이었고, 광주 시민들의 마음이었다. ‘내 새끼들 싸우는데 밥이라도 해다 나르자’는 아짐들의 가슴이었다. 김밥은 일제강점기에 소풍과 행사의 휴대음식으로 각광받은 식민의 음식이었다. 그것이 광주에서 하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맞닥뜨린 1997년의 금융위기는 다시 김밥의 시대를 열었다. 직장에서 잘리거나 하루아침에 직장이 없어진 사람들이 몇 푼의 돈으로 김밥집을 열었다. 프랜차이즈점이었다.

 

한 줄 1000원의 김밥은 편의점이 번성하기 전에 가장 싸고 간단한 식사로 세상에 파고들었다. 즐거운 소풍의 상징에서 광주의 아픔으로, 다시 낮은 노동계급과 그 자식들의 간편식으로 변해갔다. 비정규직과 취업준비생이 시켜 먹는 한 줄의 점심이 되었다.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만든 음식 중에서 가장 싼 음식이 바로 김밥인 세상이다. 한 줄 1000원에서 1500원으로 올랐지만, 여전히 놀라운 가격일 뿐이다. 한 줄 달랑 시켜놓으면 손님을 미안하게 만드는 음식이다. 쉼없이 김밥을 마는 ‘아짐’들의 임금은 얼마일까, 저 값에도 남을까, 2000원 넘는 치즈김밥이나 김치김밥을 시킬 것 그랬나, 별 생각이 다 들게 한다. 어제 행사를 보며 김밥의 기구한 운명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참, 그때 다친 내 친구야, 조만간 김밥 한 줄 나눠먹자. 옛 얘기를 다시 듣고 싶구나.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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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출장은 드문 기회이다. 일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전혀 모르는 낯선 타인들과 섞여 좁은 공간에 열 시간 이상 머무르는 게, 어디 일상적일 수 있을까? 답답함이 숨통을 조여 오기도 하지만 막상 이륙 후엔 오랜만의 혼자라는, 즐거운 고독감이 찾아온다. 특히 의외의 영화들을 ‘다시’ 발견할 때 그렇다.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상 대개의 기내 영화들은 이미 본 것들인 경우가 많다. 몇 편 보지 않은 작품들이 있는데, 그건 못 본 영화라기보다는 보고 싶지 않아서 미루거나 배제한 작품들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도 오지 않는 긴 비행 중, 기내의 모든 조명까지 꺼진 이후라면, 그렇게 평소라면 보지 않았을 영화들을 건드려 보게 된다. 이번 비행의 수확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줄리에타>였다.

 

지금이야 가장 대중적인 장거리 운송수단이 비행기가 되었지만 사실 그 자리에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기차와 함선이었다. 특히 기차는 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 작품들에 등장하곤 하는데, 이는 비단 과거에 해당하는 일만은 아닌 듯싶다. 로맨스 영화의 고전이 된 <비포 선 라이즈>에서의 결정적 장소도 기차 안이고,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도 기차가 없다면 서사의 전개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오리엔탈 특급 살인 사건>이나 <낯선 승객>과 같은 1960년대, 1970년대 고전 스릴러에서도 기차는 매우 중요한 밀폐공간이었다.

 

스페인 출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2016년에 만든 영화 <줄리에타> 속 한 장면.

그런데, 기차라는 운송수단 혹은 여행수단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책을 읽기 가장 좋은 탈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기차 안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문학이나 영화 혹은 미술 작품 안에서 보고는 한다. 에드워드 호퍼의 ‘293호 열차 C칸’이라는 그림을 보면 한 여성이 고개를 숙인 채 무엇인가를 골똘히 읽고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도 기차 안에서 책을 읽고자 하고, <생활의 발견>의 여주인공도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 그리고, <줄리에타>의 주인공 줄리에타도 그녀의 전공인 고전문학 책을 꺼내서, 막 마에나디즘(maenadism·광란주의)에 관한 부분을 읽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줄리에타의 눈길을 뺏는 게 등장한다. 바로 멋진 뿔을 가진 수사슴이 느린 동작으로, 촬영된 이미지처럼, 기차와 나란히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줄리에타는 책에서 눈을 떼 창밖의 사슴을 바라본다. 그렇게 아름답고도 우아한 장면은 일상의 어느 한 순간에 편입되기 어렵다.

 

우리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보는 것들은 뻔한 의미에 정박하는 기계적 순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우리 머릿속에 어떤 자동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삶을 벗어난 자극과 새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일상에서라면 결코 떠오르지 않을 ‘생각’을 건드린다. 그러니까 기차가 ‘생각’을 낳는 것이다.

 

그렇게 낯선 생각에 빠진 줄리에타에게 한 남자가 말을 건다. 누가 봐도 남루하고, 음울해 보이는 남자는 줄리에타에게 다가와 ‘말동무’가 되어 달라고 말한다. 말동무, 그러니까 남자는 책을 읽고, 창밖에 시선을 둘 정도라면 어떤 ‘생각’을 하는 여자라 여기고 말을 건 것이다. 그러나 줄리에타는 그 생각의 무게가 버거워, 대화를 거절하고 자리를 뜬다. 안타깝게도 그는 젊은 여성과의 대화를 끌어낼 만큼 매력적이지도 섹시하지도 않았던 셈이다.

 

그런데, 잠시 후 기차가 정차하고 만다. 뭔가 물컹한 물체가 기차의 바퀴에 감촉된다. 사람들은 창밖을 지나던 수사슴이 혹시나 기차에 치인 것은 아닐지 염려한다. 하지만 줄리에타의 예감은 좀 다르다. 그리고 그 나쁜 예감은 어긋나지 않는다. 줄리에타는 남자가 제안했던 대화를 거절했다는 사실에 큰 죄책감을 느낀다. 문제는 그 죄책감이 살아 있는 그녀의 감각적 고민을 넘어서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영화 <줄리에타>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이 살아 있는 자의 미미한 고민은 원작에 더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녀는 생리혈이 혹시나 치마에 묻지 않았을까 걱정하고, 식당 칸에서 만난 남자의 성적 매력이 주는 불안한 긴장감에 더 집중한다. 죄책감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지만 한편 살아 있기에 죄책감보다는 에로스의 당김과 감각적 불편함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영화 <줄리에타>와 소설집 <떠남(런어웨이)>의 단편들은 작고, 미묘한 삶의 부분 부분들, 일상과 비일상의 아주 작은 틈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이런 작은 틈들은 정치나 경제와 같은 큰 문제들이 제법 안정되었을 때, 비로소 그 발견이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주제들이기도 하다.

 

지난 몇 년간을 돌아보자면, 특히 영화계에서는 이런 작고, 소소한 문제를 다루기 어려웠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기내에서 <줄리에타>를 보며 느꼈던 각성과 감동도 사실 그 희유함과 낯섦에서 기인했다. 그동안 우리는 늘 과감하고 과격한 선과 악의 대결에 더 집중해야 했고 또 그러기를 요구받았던 것이다.

 

세상이 좀 달라졌다. 달라진 세상이란 이렇듯 소소하고 작은 일상에 다시 관심을 갖고, 마치 기차를 탄 여행객처럼 책을 읽고, 영화를 보다가, 마침내 ‘생각’에 빠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그런 세상이 아닐까? 우리가 너무 큰일들에 치이느라 미처 돌보지 못했던 삶의 균열들, 그런 균열들에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시절이 왔으면 좋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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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5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게이트가 불거졌을 때 모두가 아주 자연스럽게 이 사건을 막장드라마에 비유했다. 사이비, 비아그라, 호스트바, 치정, 약물중독 등 사건 관련 단어의 저급함만 봐도 기존의 게이트와는 차원이 달랐으니 그럴 만하다. 오죽하면 한국식 막장드라마에 익숙한 일본에서도 이 사건을 인물관계도까지 그려 소개하며 ‘막장 한류드라마’라는 조롱을 서슴지 않았다. 국정농단 사건과 막장드라마가 닮은꼴인 건 단지 자극적인 키워드 때문만이 아니다. 그 이면에 깔린 핵심 속성, 즉 사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골적 탐욕이야말로 더 본질적인 공통점이다. 그런 면에서 두 막장드라마는 물질적 가치에 다른 모든 가치가 종속된 괴물 같은 이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SBS가 방영 중인 김순옥 작가의 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의 포스터(왼쪽 사진)와 김 작가의 전작 <내 딸, 금사월>의 한 장면.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핵심 인물들에 대한 심판이 진행 중인 국정농단 게이트처럼, TV 시청률의 제왕인 막장드라마 또한 쇠퇴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단적인 사례 하나를 막장드라마의 새로운 대모로 불리는 김순옥 작가의 최신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SBS에서 방영 중인 토요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는 제작발표회 때부터 ‘김순옥 작가의 종합선물세트’로 떠들썩하게 홍보됐다. 김순옥은 막장드라마 흥행의 핵심인 자극적 갈등의 동시다발적 진행을 가장 역동적이고 속도감 있게 그려내는 작가다. 이번 신작에서는 출생의 비밀, 신데렐라 스토리, 불륜, 재벌가의 암투, 복수 등 막장드라마의 필수 요소들을 겹겹이 쌓아올려 극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가령 김순옥표 복수극은 여주인공 세 명의 삼중 복수극으로 확대됐고, 갈등을 견인할 김순옥표 악녀도 투톱으로 배치됐다. 오프닝만 봐도 얼마나 ‘센’ 드라마인지 확연히 드러난다.

 

시작은 결혼식 장면이다. 신부 강하리(김주현)가 직접 축가를 부르며 파격적으로 등장한 예식이 끝나고 신혼부부는 친구에게서 빌린 웨딩카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갑자기 차의 브레이크가 고장나고 순식간에 교통사고가 일어난다. 장면이 바뀌자 이번엔 화재 현장이다. 화마에 휩싸인 건물 안에서 어린아이가 엄마를 찾고, 밖에선 엄마 김은형(오윤아)이 딸의 이름을 부르며 몸부림치고 있다. 장면은 또다시 바뀐다. 한 건물 옥상이다. 왕년의 스타배우 민들레(장서희)가 스토커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채 비명을 지른다. 각각의 사건 현장으로 구급차, 소방차, 경찰차가 출동한다. 그리고 그 구조차들이 한 고속도로에 모였을 때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여자 양달희(다솜)가 나타난다. 미친 듯이 폭주하던 그녀는 순식간에 4중 추돌사고를 일으키고 구조차들은 모조리 전복되고 만다. 구조를 기다리던 이들은 결국 동시에 사망한다. 이 모든 사건이 드라마 시작 3분 만에 벌어진 일이다. ‘종합선물세트’라던 제작진 말대로 자극성과 속도감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유불급이다. 수많은 막장드라마를 통해 올라갈 대로 올라간 자극의 역치에 둔감해진 탓에 웬만한 설정은 더 이상 흥미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시청자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미적지근하다. 온갖 자극적 설정을 고밀도로 채워 넣은 것으로도 모자라 김순옥 흥행신화의 시작인 <아내의 유혹> 주역이자 ‘막장드라마의 치트키’라 찬양받는 장서희를 주연배우 중 한 명으로 소환했음에도 그렇다. 고장난 브레이크와 질주하는 자동차, 4중 추돌사고가 낳은 참혹한 현장은 이제 극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 한계를 모르고 폭주하던 막장드라마 자체가 맞이한 재난 상황의 은유처럼 보인다.

 

이러한 징후는 이미 김순옥의 전작인 MBC <내 딸 금사월>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희대의 악녀 연민정 신드롬으로 화제를 모았던 MBC <왔다 장보리> 이후 내놓은 차기작이다. 여기에서 김순옥은 모녀 2대에 걸친 이중 복수극으로 자극의 역치를 한껏 높여 안정된 시청률은 확보했으나 전작만큼의 흥행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몇 회 걸러 폭발사고가 발생하고 인물들이 동반추락하며 충격효과를 노렸음에도 돌아온 건 사상 초유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세 차례 제재라는 불명예뿐이었다. 그리고 김순옥의 전작을 모두 합친 듯한 <언니는 살아있다>는 말하자면 최후의 ‘올인’ 승부수지만 역시 기대 이하의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이다.

 

막장드라마 쇠퇴의 징후는 이 밖에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김순옥에 앞서 막장드라마의 원조 대모 중 한 명이었던 임성한이 ‘임성한월드의 종합선물세트’임을 선언했던 MBC <압구정 백야>의 신통찮은 반응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것은 이미 상징적인 사례다. 또 다른 막장드라마의 원조 대모 문영남 작가의 최근작 <우리 갑순이> 역시 방송 사상 최초로 데이트 폭력 문제로 방송통신심의 대상에 오른 작품이라는 불명예 기록만 남긴 채 저조한 반응 속에 종영됐다. 문영남 작가의 드라마를 방영한 SBS는 시청률 침체가 계속되자 결국 주말극을 폐지하고 토요드라마로 편성전략을 바꿨으며 또 하나의 막장드라마 시간대인 저녁일일극 폐지를 결정했다. 이 가운데 막장드라마의 근본적 원인인 시청률 지상주의와 수익 극대화의 제작 풍토가 만들어낸 고 이한빛 PD의 비극은 가장 확실한 비상 사이렌 소리다. 막장드라마의 폐해는 임계점에 이르렀다. 그 경고음마저 멈추기 전에 막장드라마는 탄핵당해야 한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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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5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1987년 대선 즈음이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 후보 등이 나왔다. 군 부재자투표를 했다. 나는 앞길이 캄캄한 일병이었다. 부대에서는 선거 한 달 전부터 연일 정신교육을 했다. 퀴퀴한 냄새 나는 막사에 중대 병력을 때려 넣고 중대장이며 장교들이 훈시를 했다. 겁도 주고 달래기도 했다. “나 죽는 거 보려면 맘대로 찍어!” 읍소에 가까운 협박도 했다. 그들도 불쌍했다. 노태우 안 찍을 사람 손 들라고 했다. 중대원 중에 딱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김영삼 찍을 깁니다.” 부산 출신 상병이었다. 그는 그대로 ‘격리’되었다. 간부들이 돌아가며 회유하며 얼렀다. 너 때문에 다른 애들 다 죽어도 좋다는 거냐? 사단장님 특별 관심사항인 거 몰라? 그도 결국 굴복했다. 투표날이 왔다. 중대장실에 한 명씩 병사들을 불러올렸다. 인사계가 투표용지를 내밀었다. 1번 노태우 후보 찍는 난만 접은 상태였다. 기가 막히게 머리가 돌아갔다. 혹시라도 돌발적으로 2, 3번 후보를 찍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공개투표에 완전 엉터리 투표였다. 그렇게 1번을 꾹 누르고 수치심에 떠는 병사들에게 인사계는 ‘요구르트’ 한 병씩을 돌렸다. 돈 100원 하는 그 싼 음료가 표를 팔아치운 대가였다. 그것도 아마 병사들 후생에 쓰라고 나온 운영비로 산 것이겠지. 나는 그 후로 죄 없는 유산균 발효유가 보기 싫어졌다. 알토란 같은 군대 60만표가 노태우 후보 쪽에 갔다. 빵 한 쪼가리 제 손으로 사주지도 않고 말이다. 소문도 돌았다. 어떤 부대에서는 다른 후보를 찍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자 사전검열로 걸러내어 아예 버렸다고 한다. 사단장의 “100프로 1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수많은 청년들의 표를 더럽고 추악한 결과로 만들어버렸다. 결과는 아시는 바대로 노태우의 당선이었다. 그날 대대장은 개표방송을 보면서 ‘위대한 보통사람’의 당선을 밤새 축하하느라 폭음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투표에 양심을 팔아먹은 적이 한번 더 있었다. 1987년 4·13 호헌 조치 때인가 그랬다. 전두환은 민주세력의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려는 의도로 이 성명을 발표했다. 이 호헌 조치에 잇따라 국민투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호헌이냐 아니냐. 모든 장병의 가슴에 ‘호헌 찬성’ 리본을 달게 했다. 군인인지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의 사병(私兵)인지 모를 시대였다. 역시 엄청난 정신교육을 퍼부었다. 총 쏘고 야전훈련할 병사들을 올스톱시키고 막사에서 치러진 강요였다. 그때 빵이 나왔다. 봉황 두 마리와 ‘대통령 각하 하사품’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봉건시대도 아니고, 제 주머니 털어 사는 것도 아닌데 무슨 하사(下賜)인가 하고 기분 나빠했던 기억도 있다. 하긴 그는 29만원밖에 없는 인간인데, 그때도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세금 헐어서 사줬겠지.

 

대선이 코앞이다. 이제 그런 강요는 군대에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군시절의 선거는 참혹한 양심의 위배였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문신으로 마음에 남아 있다. 누굴 찍든 사람은 한 표의 민주적 권리를 자유의지로 행사할 권리가 있다. 이 단순한 권리가 짓밟혔던 역사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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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 하면 정치와 사업이 떠오른다. 아무나 정치를 할 수는 없다. 또 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누구나 사업을 하긴 어렵다. 시작이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패할 확률이 더 높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말도 간혹 듣는다. 정말 정치를 하면 좋을 사람들은 대개 엄두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를 해서는 안될 사람들이 정치판 근처에 얼씬거린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정치적이라는 말은 칭찬이라기보다는 비판이 되고, 수완이 좋다는 말도 그 사람이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계산을 따지는지에 대한 다른 표현이 된다. 여기 두 명의 성공한 남자가 있다. 한 사람은 정치적으로 성공한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이다(아래엔 영화의 내용이 암시되어 있다).

 

영화 <특별시민>은 3선을 노리는 서울시장 변종구(최민식)에 대한 이야기다. 이미 재선인 변종구의 최종 목표는 사실 시장에 거듭 재선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시장실 창문 너머 보이는 청와대를 보며 그 푸른 기와가 오늘따라 더 아름다워 보인다며 욕심을 갖는다.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 공공연한 공식으로 여겨지는 서울시장, 대선 입문이라는 절차를 그 역시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3선 서울시장을 발판으로 대권을 노리기 위해 선거에 뛰어든 정치인 ‘변종구’를 그린 영화 <특별시민>(위)과 사업가 ‘레이 크록’의 햄버거 프랜차이즈 맥도널드 성공신화와 이면을 다룬 영화 <파운더>의 한 장면.

 

그런데, 서울시장 선거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악재가 자꾸 발생한다. 자연재해도 있고, 스스로 자초한 인재도 있고, 또 해서는 안될 심각한 실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이다. 서울시장 변종구는 이러한 악재들을 해결하기 위해 매우 정치적인 선택들을 해 나간다. 그런데, 영화 속에 그려진 그 정치적 선택들은 비인간적 선택, 비윤리적 행동, 비도덕적 판단으로 실행된다. 그는 재선을 위해 가족을 버리고, 친구를 버리고, 동료를 버리고 마침내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도 버린다. 시장에 재선되기 위해서 그에게는 해선 안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변종구가 보여주는 행위들은 지금 우리가 합의하고 있는 정치인에 대한 짐작과 유추 그대로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유권자들에게 정치인은 썩은 입냄새가 나는 거짓말쟁이다. 아니 그보다도 못하다. 정치인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범죄라도 저지를 수 있는 파렴치한이며 몰염치배이다.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인간적으로 스스로 믿는 사람이라면 정치는 해서는 안되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특별시민>에 그려진 정치판은 흥미롭게도 영화 <파운더>에 그려진 사업의 세계와 닮아 보인다. <파운더>는 누구나 한번쯤 맛봤을 법한,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기업 ‘맥도널드’에 대한 이야기다. 햄버거 맥도널드는 진짜 맥 도널드에 의해 발명되고 개발되었다. 하지만 기업 맥도널드의 사장은 맥 도널드가 아니라 레이 크록(마이클 키튼)이다. 나이 오십줄에 방문판매원으로 살아가던 레이 크록은 어느 시골 궁벽진 곳에 문을 연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를 보고 단박에 그 가치를 알아본다. 그는 거의 사정하다시피 애원해 맥도널드 프랜차이즈화를 시작하고, 이내 미국 내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키게 된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파운더>는 레이 크록이라는 인물의 아름다운 아메리칸드림 성공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치 않다. 레이 크록은 말하자면 맥 도널드 가족에게서 맥도널드를 뺏은 인물이다. 일례로, 지금 맥 도널드 가문은 맥도널드 프랜차이즈로부터 단 1%의 이익도 받지 못하고 있다. 구두계약으로 지불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짐작하다시피 서류로 남지 않은 계약은 아무 효력이 없다. 믿음, 신의, 고집으로 시작된 맥도널드는 이제 전 세계적 부동산 기업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레이 크록은 성공하자마자 맥 도널드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조강지처와 이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배은망덕이 그의 성공의 지름길이다.

 

<특별시민>의 변종구와 <파운더>의 레이 크록은, 이를테면 성공한 악당이다. 성공이라는 게 정치적 승리, 이익의 창출에 있다면 그들은 분명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성공이라는 게 무척이나 씁쓸하다. 영화 속에 그려진 성공한 사람, 출세한 사람들은 남을 믿지 않고, 남의 선한 구석을 파고들어 그 안에 자기 승리의 씨앗을 심는 자들로 그려진다. 모든 것이 다 연기이고 계산이다. 갱스터 영화나 누아르 영화에서 보았던 조직폭력배의 세계보다 훨씬 정교하고, 세심하며 그래서 더 공포스럽다.

 

모든 정치인이나 사업가가 영화 속 악당처럼 비열하고,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문장의 속내처럼 그것은 바람이지 판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5월 장미 대선을 앞두고 선거전이 한창이다. 각 캠프의 속사정이 정말 영화와 같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적어도 중요한 핵심, 정치를 하는 이유와 명분에는 사람과 유권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순진한 바람이라고 할지언정 그런 게 없다면, 정치와 사업이라는 게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을 터이다. 지난 대선의 문구였지만, 모든 일엔 사람이 먼저다. 그걸 잊지 않는 선거이고, 그래서 사람이 우선이 되는 정치였으면 한다.

 

강유정 |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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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이 힘든 건 육체보다 감정이 상할 때다. 특히 주로 감정을 ‘팔아서’ 일하는 이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식당 업주도 감정노동을 한다. 늘 웃어야 하고, ‘고객님’의 요청을 최대한 받들어 모셔야 한다. 이 무한경쟁의 식당 세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물건과 서비스를 팔고 돈을 받는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적당한 ‘교환’인지 헷갈린다. 고객님이 ‘갑질’을 심하게 해도 당하고 산다. 입길에 오르기 두려워서다. 한 후배는 강남에서 양식당을 한다. 처음 온 손님이 “나를 몰라보느냐”며 집기를 던지고 옮겨 적을 수도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지금도 부들부들 떨린다고 한다. 밤에 잠을 잘 못 자는 증세도 생겼다. 손님의 폭언은 이 동네에서 그다지 듣기 어려운 말이 아니다. 식당 노동자들은 그렇게 조금씩 무너진다. 사소한(?) 일들도 참 많다. 식당마다 찻숟가락이나 작은 포크 같은 기물이 없어지는 건 다반사다. 손님이 자리를 뜨면 없어진다. 그렇다고 가방을 뒤질 수가 있겠는가. 뷔페식당에 ‘락앤락’ 통을 가지고 와서 음식을 넣어가는 사람도 있다. 보온병에 커피도 담아간다고 한다. 뷔페는 ‘배’ 말고 어떤 용기도 지참할 수 없는 게 불문율 아닌가. 물론 극히 일부의 일이다. 그래도 한 건이라도 벌어지면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카페가 많아졌다. 이 동네도 스트레스가 심하다. 커피를 한 잔만 주문한 후 리필해서 친구와 나눠 먹는 손님도 있다. 카페도 먹고살아야 한다. 1인 1주문은 기본이다. 하루종일 자리 차지하는 이들도 있다. 물건 놔두고 점심 먹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밖에서 음식 가져오면 안된다고 해도, 케이크며 김밥과 순대까지 꺼낸다. 케이크는 그 카페에서도 파는데 말이다. 홀 서버로 몇 년을 일한 후배는 아예 이 직업을 접었다. 하도 성희롱을 당해서다. 국립대학 학장이라는 자가 스무 살짜리 여자 서버의 엉덩이를 만지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아주 유명한 가수의 아비란 자가 한 와인바에서 서버를 더듬었다. 나도 현장에서 그것을 목격했다. 아무 말도 못한 내가 부끄러워서, 나는 지금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왕년의 포스코 왕 상무 사건이나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태 같은 갑질은 유명한 항공사니까 그나마 널리 알려졌다. 작고 힘없는 식당과 카페에서는 더 한 일이 벌어져도 공론화되기 힘들다. 사고가 난 후, 손님의 일방적 주장을 담은 인터넷 게시판이나 트위터, 페이스북 글에 대해 방어권도 거의 없다. 섣불리 변명했다가는 익명의 누리꾼들의 십자포화를 맞기 십상이다. “그럴 만했으니까 그런 거 아니요?” 이런 시각이 있다. 게다가 이쪽에서 일하는 이들은 각종 인권 문제와 관련해서 교육받지 못하고 있다.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라 끙끙 앓는다. 노조도 없고, 업종 단체는 유명무실하다. 국내 업종별 노동자 숫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게 요리사와 서버다. 숫자에 걸맞은 어떤 연대도 교육도 없다. 이번 대선에서 어느 후보도 관련 공약을 내지 않았다. 암담하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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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4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2015년 6월 일본, 책 한 권이 전 사회에 논란을 불러왔다. <절가(絶歌)>라는 책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1997년 6월 엽기적인 살인 행각으로 체포된 연쇄살인범이었다. 3명의 초등학생에게 치명적 상해를 입히고 심지어 생명을 앗고 신체를 훼손하기도 했던 살인범이 고작 8년간 복역하고 세상과 만났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범죄자가 14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소년이기 때문에 범죄자는 소년 A로 보호되었다. 범죄 행각을 과시할 정도로 도취되었던 소년은 출소 후,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의 추억을 담은 책을 펴냈다. 그게 바로 <절가>이다. 피해자들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시점에, 소년범이라 짧은 형을 살고 나온 범인이 그 상처를 판매했던 셈이다.

 

영화화되기도 했던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고백>은 그런 점에서 미성년 범죄자를 보호하는 일본의 소년법에 대해 전면적으로 질문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질문은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악하게 태어나 도덕으로 교화되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과도 통한다.

 

살인 사건으로 14년간 복역하고 ‘잭’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청년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지만 감춰졌던 과거가 드러나면서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며 갈등을 겪는 내용의 영화 <보이 A>(왼쪽 사진)와 200만달러가 든 가방을 찾는 살인마와 그를 쫓는 보안관이 등장하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영화로도 제작된 이 소설을 보자면 아이들은 대부분 선하게 태어나지만 몇몇은 절대적 악의에 의해 지배되는 듯싶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를 물에 빠뜨리고 죽어가는 과정을 즐겁게 바라보고 웃는, 소설 속 소년처럼 말이다.

 

인천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살해 사건은 여러모로 일본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지나치게 잔혹한 수법도 그렇지만 거의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후의 행태들을 봐도 그렇다. 인터넷으로 엽기나 살인을 검색해봤다거나 신체 일부를 가지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보자면 놀라움을 넘어서 마음 어딘가가 날카롭게 아파진다. 어쩐지 대화를 나눔으로써 공감과 연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엽기적인 범죄는 언제나 있었다. 비단, 지금, 여기에서만 발생하는 사건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소년범이라는 점에서 즉, 미성년 범죄자라는 점에서는 이 엽기적 범죄의 사회적 충격은 만만치 않다. 많은 영화들에서 살인을 다룰 때, 그 목적은 분명하다. 영화에서 만큼은 범죄의 원인이 꽤나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프로파일링이라 불리는 작업도 유사하다. 이러이러한 성장 배경을 가진 사람, 이러이러한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 이러이러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사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즉 범죄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인과관계의 위안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프로파일링은 인과관계라기보다는 선후관계의 규명에 가깝다. 인과관계라고 여기면 마음이 더 평온해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유사한 성장 환경이나 트라우마를 가졌다고 해서 꼭 범죄자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범죄가 많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단일한 논리로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는 늘 용의자보다 한 발짝 늦게 도착하는 나이든 보안관(토미 리 존스)이 등장한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보안관이던 시절엔, 이해하지 못할 범죄는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쫓는 범죄자들 가령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와 같은 인물은 도무지 왜 살인을 저지르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늙은 보안관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다만 한 발 늦게 현장에 도착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도 가능하다. 역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보이 A>에는 초등학교 시절 미취학 아동을 살해한 혐의로 복역한 후 훌쩍 성인이 되어 세상과 만난 소년 A가 등장한다. 그런 엽기적인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기엔 소년 A는 너무나 맑고,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다.

무균실에서 갑자기 풀려난 소년처럼 세상에 다치는 그를 보고 있자면 끔찍했던 살인이 어쩌면 아이의 실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핵소 고지>, <사일런스>와 같은 영화에서 순결하고도 진중한 눈빛을 보여주었던 앤드루 가필드는 그 눈빛으로 소년의 순진성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10대를 고스란히 감옥에서 보낸 소년에게 세상은 독하고 위험하다.

 

결국, 다시 질문은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 것인가 악하게 태어난 것인가. 아니 어쩌면 질문이 좀 바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내면 속 깊이 남아 있는 선의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러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 말이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점점 더 이해불가능해지고 잔혹해지고 있는 듯싶다.

 

인간의 공감 능력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엽기적 사태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까. 아마도 그건 제도와 행정을 통한 합리적 해결에 기댄 마음의 자세여야 할 것이다. 불안이 더 익숙한 세상, 부모의 자리에서 미안한 일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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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가운데서 아버지가 등장하는 건 무척 드물다. 이솝 우화, 안데르센 동화, 샤를 페로의 동화들을 뒤져본다고 한들 아버지는 새 아내 그러니까 계모를 집 안에 들이는 계기로 활용되거나 혹은 부재중일 때가 대부분이다. 옛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계모든 친모든 엄마이지 아버지는 아닌 셈이다. 프로이트도 이를 간파해서 엄마와의 애착 관계에서 비롯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다룰 때도 아버지는 매개이지 애정의 대상이거나 최종 지점은 아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옛이야기 중에 아버지가 전면에 등장하는 게 있다. 바로 얼마 전 실사 영화로 변신한 <미녀와 야수>이다.

 

영화 <미녀와 야수>(2017)의 주인공 벨과 아버지.

 

<미녀와 야수>는 아버지와 딸이 등장하는 매우 희유한 동화이다. 아버지가 재혼을 하지 않았고 게다가 딸과 아버지 사이가 유독 좋다. 브루노 베텔하임이라는 아동심리학자는 이를 주목했다. 베텔하임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바탕으로 아버지와의 애착 관계가 지나친 여아의 성장드라마로 <미녀와 야수>를 읽어 냈다. 즉, 아버지와의 불필요한 애착을 끊어 내지 않는 이상 그 어떤 남자도 왕자가 될 수 없다. 남자는 털이 북슬북슬하고, 난폭하고 야만적인 야수에 불과하다. 야수가 교만해서 저주가 걸린 게 아니라 모든 소녀에게 남자는 우선 야수에 불과하다. 벨이 야수를 사랑할 때, 야수가 왕자로 되돌아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여자가 마음을 바꿔 사랑할 때, 남자는 야수가 아닌 왕자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유독 아버지와 딸이 등장하는 옛이야기에선 아버지가 종종 딸의 앞길을 가로막곤 한다. 우리 옛이야기인 <심청전>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심청의 아버지 심봉사는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무턱대고, 아무 대책 없이 공양미 삼백석을 약속한다. 그 때문에 심청은 몸을 팔아 인당수에 빠지고 만다. 말이 효녀이지 아버지 때문에 결국 인신매매에 희생된 딸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심장도, 눈도 바칠 수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어째 심봉사는 자기 눈을 위해 자식을 희생한다.

 

농담처럼 과장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국의 근대 문학을 살펴보다 보면 이렇듯 자식을 키워 송아지 팔 듯 노름빚 대신 혹은 미두로 인한 손해 대신으로 넘기는 경우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 보면 명님이라는 한 소녀가 등장한다. 가난한 부모는 명님이가 얼른 자라 이차성징을 겪고 여자다운 태를 갖기만 기다린다. 소위 명님이가 키워준 값을 해야 그나마 먹고살 돈이 생기기 때문이다. 명님이도 그런 스스로의 운명을 그저 팔자려니 여긴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초봉이의 형편도 다르지 않다. 초봉의 아버지 정주사는 미두로 손해를 보자, 부잣집 외아들로 소문 난 태수가 호색한인 것도 모르는 척 시집을 보낸다. 딸, 초봉의 앞길은 아버지의 이 실수로 인해 영영 얽히고 만다.

 

영화 <사이코>(1998)의 모텔 주인 노먼 베이츠.

딸에 대한 애착을 가진 아버지를 일컬어 딸바보라고들 한다. 물론 요즘에야 딸을 한밑천 재산으로 보고 키우는 아버지는 거의 없을 터이다. 그래서인지 어쩌면 요즘에는 <탁류>나 <심청전> 같은 이야기보다는 <미녀와 야수>가 훨씬 그럴듯하게 들린다. 딸의 앞길을 막는다는 의미가 딸을 물건 취급한다기보다 너무 사랑하다 보니 망치는 쪽이 더 많아졌다는 의미이다. 사랑이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일은 비단 아버지와 딸 사이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숱한 영화와 이야기 가운데서 어머니와의 애착을 끊지 못해 끝내 세상과 불화한 인물들을 여럿 만난 적 있다. 영화 <사이코>의 주인공 노먼 베이츠가 아마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부모와 자식은 어쩌면 애정을 붙이는 것만큼이나 떼는 게 중요한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딸이라고 해도 아버지 대신 감옥에 갇힌다거나 아버지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벨이 아버지 대신 스스로 감옥에 갇히고 죽음을 불사하는 것은 효가 아니라 미성숙한 어린아이의 실수에 가깝다. 그렇게 어리기 때문에 야수를 사랑하면서도 아버지를 구하러 되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동안 사랑하는 야수가 위험에 처하게 한다. 물론 이런 방식의 동화 해석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비판받고 부정되고는 했다. 브루노 베텔하임이 분석한 모든 동화는 이를테면 성적인 성장의 격동을 표현한 메타포가 된다. 프로이트가 성장의 모든 단계를 성적인 것과 연관시켰듯이 말이다. 흥미롭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동화가 성적인 성장을 은유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분명한 건 모든 어른에게는 라이오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부정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지난 5년을 뒤덮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탈을 쓰는 건 <사이코>와 같은 공포영화적 상황과 다르지 않다. 아버지를 따르는 것보다는 부정할 때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 사랑과 애착을 구분하는 것, 딸을 둔 모든 바보들이 알아야 할 문제이자 여전히 아버지의 그늘에 머무는 덜 큰 딸도 알아야 할 점이다. 상징적인 아버지들, 과거, 역사, 적폐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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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은 세계에 전례가 드문 이 땅의 음식이다. 한국 음식의 이미지에도 늘 등장한다. 시장과 국밥은 일종의 정서적 공동체다. 지방 5일장의 히트작은 여전히 국밥이다. 그 내용은 대개 동물의 뼈와 고기를 푹 고아서 쌀밥과 김치를 곁들여 내는 방식이다. 수많은 다른 요리법이 있지만 이 ‘원형’의 변주일 뿐이다. 국밥은 설렁탕과 해장국과 순댓국과 장국밥과 육개장을 모두 아우른다. 역사적으로 국에 밥을 말아 내는 방식이라 하여 국밥이었다. 이제는 ‘따로국밥’도 많아졌다. 토렴도 어렵고, 전자기기로 갓 지은 쌀밥을 낼 수 있으니 굳이 말지 않는 것도 한 이유다. 옛 해장국 골목의 증언을 종합하면 토렴의 이유가 명확해진다. 당시 전기밥솥이 없었기 때문이다. 쌀이 귀해서 밥 자체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다. 각자 먹을 밥을 집에서 들고 와서 국만 사서 밥을 넣어 먹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공장 된장 대신 집집마다 남는 된장을 사들여 해장국을 끓여 팔았다고 한다.

 

 

국밥은 공동체의 음식이다. 모든 노동과 두레의 현장에는 흔히 솥이 걸렸고, 그것은 국밥을 의미했다. 옛날 다니던 학교 겨울 운동장에서는 야구부 훈련이 있었다. 이때도 국밥솥이 걸려서 선수 자모들이 교대로 나와 국밥을 끓였다. 고기, 우거지, 고춧가루, 두부 등속을 넣고 푹 끓였다. 나도 그것을 늘 얻어먹었는데, 한겨울 삭풍 부는 운동장에서 텅 빈 속을 데우는 놀라운 음식이었다. 심지어 군대에서도 국밥을 먹었다. 야전훈련을 나가서 기름때 전 야전취사복을 입은 병사들이 국밥솥을 걸었다. ‘똥국’이라고 부르던 맛없는 된장에 김치를 섞어 밥을 말아 냈다. 반합에 받은 그 ‘유사 국밥’을 먹으며 대책 없는 추위를 견뎠던 것이다. 대학생 때 농촌활동에서도 얻어먹은 것이 국밥이었다. 짧은 준비와 설비로도 많은 이들이 함께 만족할 수 있는 음식, 그것은 국밥 말고 달리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음식사에서 이처럼 오래되고 질긴 생명력을 지닌 외식은 없다. 국수도 1950년대 미국의 공여로부터 대중화되었고, 냉면도 100년 이상의 역사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오롯이 국밥만이 100년 이상의 역사를 품고 있다.

 

조선후기 화가 김홍도의 그림에조차 주막 장국밥을 먹는 사내가 등장하니까 말이다. 상공업이 그나마 발달해가던 조선 후기에 주막이 성업하기 시작했고, 그 밥상의 총아가 국밥이었을 것이다. 유럽의 레스토랑 역사를 다룬 여러 책들을 보면서 나는 우리 음식사가 허전함을 늘 아쉬워하고 있다. 사농공상이라, 돈 버는 일을 경시했던 조선의 정책적 숙명이 외식업의 얇은 역사를 예고한 셈이었다. 식당의 발달은 오롯이 돈 버는 일의 당당함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돈이 돌고 사람이 돌아야 외식업이 흥하기 마련인 것이다.

 

드디어 저 거친 바다에서 배가 떠올랐다. 그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다시 국밥솥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한 맺힌 국밥이 되리라. 아아, 밥은 다시 생명이고 사라진 이들의 상에 올리는 마지막 제물이 되리라. 그대, 돌아오라.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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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최근 극장에서 ‘사람의 본질’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들었다. 사람의 본질이라, 그 얼마나 무겁고도 귀한 말이던가? 첫 번째는 할리우드 슈퍼 히어로 블록버스터 <로건>이다. 놀라운 능력을 가진 소녀를 쫓던 악당들은 소녀와 로건(휴 잭맨)의 행적을 알기 위해 로건의 동료 칼리반을 괴롭힌다. 칼리반은 타고날 때부터 멜라닌 색소를 갖지 못한, 그래서 태양을 견딜 수 없는 엑스 맨이다. 영화 <로건>은 202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사실 칼리반은 과거에 울버린 로건을 괴롭히는 적이었다. 칼리반에게 햇빛을 쪼이며 악당들은 제안한다.

 

“사람의 본질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잖아? 그렇지?”라고 말이다. 악당은 칼리반에게 로건에 대한 적의가 남아 있고, 그를 추적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지금은 선의를 가진 척하지만 결국 칼리반의 깊은 내면 속 본성에는 악당의 기질이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적들은 칼리반의 그 악당 본성을 꺼내기 위해 그를 괴롭힌다.

또 다른 목격은 <사일런스>이다. 17세기 천주교의 불모지 일본에 두 명의 신부가 파견된다. 선교를 위해 먼저 파견되었으나 배교했다는 소문만 남긴 채 사라진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를 찾기 위해서이다. 페레이라 신부는 파견을 자원하는 두 신부에게 신을 소개해 준 은인이기도 하다. 스승이자 동료, 멘토인 페레이라를 구하기 위해 두 사람은 만류와 저지를 넘어 일본으로 향한다.

 

영화 <로건>(왼쪽 사진)과 <사일런스>. 두 영화에는 ‘사람의 본질’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일본행이 위험한 도박인 이유는 너무도 선명하다. 17세기 일본은 천주교의 무덤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아주 오랫동안 다신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번주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색출해 고문과 참형으로 금지를 알린다. 그런데, 그 고문이나 형벌이라는 게 참으로 끈질기고 집요해서 더욱 끔찍하다. 가령, 작은 구멍이 뚫린 바가지에 100도에 육박하는 온천물을 담아 아주 천천히, 여러 번 맨몸에 뿌린다던가,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구멍에 얼굴만 처박는데 그것도 빨리 죽어서는 안되니 피가 통할 수 있는 작은 상처를 만들어 숨통만 트여 주는 방식이다. 이러한 고문은 형벌이 아니라 처벌의 전시에 가깝다.

 

번주들은 신부들에게 이르길, 네가 배교하면 너를 따르던 수많은 일반 백성들을 살려주겠노라고 거래를 제안한다. 사실 페레이라 신부는 이런 제안을 수긍한 후 이미 일본인 이름을 받아 일본인 아내와 일본인처럼 살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젊은 신부들은 쉽게 제안에 응할 수 없다. 그런데, 그를 설득하던 페레이라가 이런 말을 한다. “산과 강은 움직일 수 있지만 사람의 본질은 움직일 수 없다.” 과연 배교를 설득하던 신부가 내뱉은 사람의 본질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에밀>을 쓴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사람의 본질이 선하고 어질다고 믿었다. 심지어 <에밀>의 첫 구절에 “조물주는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했으나, 인간의 손길이 닿으면서 모든 것은 타락하게 된다”고 쓸 정도였다. 그는 올바른 교육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아름답게 가꿔 나가는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 중 하나는 루소가 ‘자연인’이라고 부른 개념이다. ‘자연인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를 높이 샀지만 자연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싶다. 오히려 자연인은 제 멋대로인 이기주의자의 모습에 가까운데,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동료하고만 관계를 맺고 있는 독립적인 실체”를 자연인이라고 지칭한다.

 

최근 청와대에서 삼성동으로 거처를 옮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부르는 호칭 중 하나가 바로 ‘자연인’이다. 나는 처음엔 왜 박근혜를 전 대통령이나 시민으로 부르지 않고 자연인으로 호명할까 의아했다. 하지만 루소의 <에밀> 가운데 하나의 실마리가 있다. 자연인의 반대편에 놓인 말은 사회인이다. 사회인이란 훌륭한 사회제도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최대한 변형시키고, 상대적인 존재가 되어 자아를 사회 속에 융합시킬 수 있는 인간을 뜻한다. 말하자면 자연인은 사회화가 덜 된 그리고 사회제도를 통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아무렇게나 쑥쑥 자란 자연물과 다르지 않다. 제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런 인간 유형,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동료하고만 관계를 맺는 그런 인간 유형, 그런 유형을 이미 루소가 ‘자연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왜 박근혜가 타인의 고통에도 무감하고, 자신의 잘못에도 무관심한지 ‘자연인’이라는 용어는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는 듯싶다. 애초에 자연인에게는 남이 없다. 사회도 없고 더더군다나 법이나 제도도 없다. 훌륭한 자아는 훌륭한 사회제도 안에서 태어난다. 즉 우리가 힘겹게 동의한 제도 가운데서 본성을 최대한 변형시키고, 상대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훌륭한 자아와 만나고 사회인이 될 수 있다. 오늘도 늘 그렇듯이 머리를 다듬던 미용사가 오전 9시면 삼성동으로 출근한다. 그게 본성이든 습관이든 사람은 그렇게 바뀌기 힘든가 보다. 그러나, 바뀌기 힘들다고 바뀌지 않는다면 그게 우리가 말하는 가치 있는 인간이며 삶일 수 있을까? ‘인간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기보다 정말 바꾸기 힘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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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식들이 돌아가며 먹고 싶은 걸 말하는데, 한 녀석이 이런다. “고깃국에 이밥이나 실컷 말아먹었으면.” 피자나 치킨, 짜장면이 없던 시절이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없는 이에게 고깃국은 대단한 음식이었을 테다.

 

돈 받고 파는 요식(料食) 중에 고깃국, 즉 국밥처럼 실감나는 음식은 드물었다. 김치나 된장은 사먹는다는 느낌이 적다. 밖에서 돈 내고 먹는다고 하면 짜장면 말고는 국밥이 오랫동안 주인공이었다.

 

국밥은 누구나 한 술 뜰 수 있는 음식이기도 했다. 국밥에는 찬이 적다. 국에 밥을 말아내고 찬 없이 빨리 싸게 먹는 형식으로 발전했다. 조선후기에 김홍도가 그린 주막 풍경에도 뚝배기를 기울여가며 국밥을 퍼넣는 장정의 모습이 나온다. 상업이 발달하지 않아 유럽에 비해 레스토랑의 역사가 짧은 조선에서 주막은 그나마 ‘돈 주고 사먹는 외식’의 한 역사를 이루어 왔던 것이다.

 

 

그 주막의 메인 메뉴는 역시 국밥이었다. 국밥은 어지간한 장시가 있는 곳에서는 다 성행했다. 사람이 모이면 허기가 지고, 싸게 한 그릇 먹기에 국밥만 한 게 없었다. 나중에 미국 밀가루가 값싸게 풀리기 전에는 역시 국밥이 즉석 음식의 왕이었다. 장꾼들이 먹는 음식이 국밥이요, 한번에 많이 끓여서 빨리 낼 수 있는 음식도 국밥이었다.

 

토렴도 그렇게 발달했다. 미리 썰어둔 밥과 고기를 따뜻하게 데우는 기술, 건더기가 든 뚝배기에 펄펄 끓는 국물을 부었다 내렸다 하면서 딱 먹기 좋은 온도에 맞추어내는 기술이다. 토렴은 전기보온밥솥이 없던 때, 밥을 데우는 데 최적의 방법이었다.

 

밥풀에서 전분이 풀려서 국물이 탁해지는 걸 막아주는 것도 토렴이었다. 그렇게 상에 내면 차갑던 밥이 입에서 부드럽게 풀리면서 적당한 온도에서 씹혔다. 질이 좋지 않은 밥도 먹어낼 수 있는 마술이기도 했다.

 

국밥은 이렇게 본디 토렴과 한 뚝배기를 이루면서 ‘패스트푸드’로 민중에 자리 잡았다. 토렴한 밥과 국은 딱 먹기 좋은 온도였고, 일에 바쁘고 허기진 민중들이 빨리 먹어낼 수 있었다. 이제 토렴하는 집을 찾는 건, 어지간히 헤아리지 않으면 어렵다. 펄펄 끓는 뚝배기가 주력이다. 언제나 따끈한 밥이 있는데, 굳이 밥을 식혀 토렴할 일이 없기도 하지만, 토렴이 결국 그놈의 ‘인건비’가 되기 때문이다. 식당 기술자들이 없어서 토렴을 하라고도 못한다. 국만 뜨고, 퍼 둔 밥 꺼내주면 될 일을 누가 펄펄 끓는 국솥에 뚝배기 기울여 손에 화상 입어가며 토렴하겠는가.

 

토렴 잘하기로 유명했던 여러 오래된 국밥집들이 점차 토렴을 버리고 있다. 손님들도 뜨거운 밥을 따로 내주는 걸 좋아하는 이가 많다고 한다.

 

토렴에는 본디 기대하지 않았던 효과도 있다. 음식의 온도가 적당(섭씨 80도 미만)해서 입이나 식도의 화상을 예방할 수 있다. 암 예방수칙에 뜨거운 음식을 조심하라는 건 의사들의 공식적인 의견이기도 하다. 토렴하는 국밥집을 응원하고 싶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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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시험에 부치지 않는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앎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스스로를 시험에 처하게 하는 것이었을 테다. 이는 그 유명한 델포이 신전의 전언, “네 자신을 알라”의 구체적 지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를 시험에 처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루소의 말처럼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그렇게 따르기 쉬운 격언이 아니다. 루소는 <고백>을 쓰면서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러 번 토로한다. 사실 안다고 믿는 자기 자신은 연출되거나 위장된 자기 자신일 확률이 높다. 우리는 우리이길 원하는 나를 나라고 믿는다. 매일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 속에서는 자신을 돌아보기 힘들다. 그러니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어쩌면 스스로 시험을 자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무릇 사람이란 일상의 반복을 행복이라 여기며 지내지 않던가? 과연 누가 굳이 닥치지 않은 위험을 연상하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불편을 상상해서 자신을 고민하려 할까?

 

영화 속의 많은 주인공들이 삶의 위기에서 출발하는 이유도 아마 여기 있을 것이다. <비긴 어게인>의 남자 주인공 댄(마크 러팔로)도, <러덜리스>의 주인공 샘(빌리 크루덥)도 그렇다. 그들은 삶이라는 항해에서 처참한 난파선이 된 채 관객들과 만난다. 댄은 음악계에서 거의 추방된 상태이고, 샘은 예상치 못했던 아들의 사고로 삶의 중심을 잃어 버렸다. 최근에 개봉한 한국 영화 <싱글라이더>의 주인공 강재훈(이병헌)도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남편 그리고 꽤나 성공적인 직장인으로 살았던 그는 그동안 쌓아왔던 삶 전부가 거절되는 시점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영화 <싱글라이더>의 한 장면.

 

세 주인공의 공통점 중 하나는 바로 그들이 성공한 사회인이기 이전에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새인가 아버지가 가족 내 구성원이 아니라 일종의 직업이 된 것은 아닌가 싶다. 결혼도 선택, 출산도 선택이 된 게 특별한 일이라기보다 보편적 상황이 되었음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어느새, 아버지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남성에 대한 일반적 호칭이 아니라 특수한 처지를 가리킬 수 있는 언어가 되었다. 어쩌면, 한 이십년 후쯤이면 길에서 만난 중후한 장년을 무턱대고, “아버님”이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싱글라이더>는 아버지라는 직업을 가졌으나 미처 그것을 감지하지 못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증권 회사 지점장으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돈과 숫자였다. 얼마나 많은 투자자를 모으고, 얼마나 큰 이익을 얻는지, 숫자로 확인되지 않는 것들은 그에게 무의미하거나 쓸모없는 것에 불과했다. 당연히 가족은 숫자로 환산될 수 없다.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내가 얼마나 필요한지의 문제는 결코 증명 가능한 숫자나 교환 가능한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다.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가치이기에 그에게 가족은 점점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고 따라서 그다지 생각나지도, 그렇다고 마음이 쓰이지도 않는 대상이 되고 만다. 그는 아버지이긴 했으나 아버지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삶의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고 나서야 그는 겨우 가족을 둘러본다. 아니 엄밀히 말해 그제서야 겨우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자신의 가치와 의미, 위치를 가족 가운데서 찾아보게 된다. 자아는 발견되어야 소유될 수 있다. 그리고 참 역설적이게도 자아를 갖게 되면 그 순간부터 자아는 요령부득의 못 믿을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의 안락을 위해 최대한 의심의 순간을 미룬다. 그러니 우리는 대개 너무 늦게 자신을 돌아본다.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이십년이 넘게 매달 월경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 정확한 날짜를 몰라 허둥지둥하기 일쑤다. 예고된 변화이고 반복된 신체적 반응이지만 아직 그조차도 미지수에 가깝다. 이러다 덜컥 폐경이 온다고 해도 아마도 그때도 나 자신에게 속았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신체도 그런데 영혼과 정신이야 어떨까? 반복도, 패턴도 그렇다고 예고나 지표도 없는 영혼으로서의 나란 얼마나 미지수이던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알 수 없는 게 더 많고, 가장 알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과연, 나란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

 

나 자신을 알고 싶지만 그것이야말로 늘 만시지탄일 듯싶다. 사람은 살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야만 하지만 결국 너무 늦게 자신을 알려 하거나 알고 나면 대개 너무 늦다. 아니 너무 늦은 순간에도 여전히 스스로를 모르는 건 아닐까 싶다. 문학과 영화, 철학이 삶에 어떤 힘을 준다면 그건 다름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위험에 처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편안한 이 삶 속에서 닥쳐서야 느끼게 되는 그런 수동적 위험이 아니라 상상으로 미리 닿아 볼 수 있는 개연적인 위험. 닥치지 않은 위험을 상상해 그 가운데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만이 지닌 능력이 아닐까? 너무 편안하다면 오히려 불안해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무엇인가 괄호에 넣은 채 잊고 산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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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다닐 때 이른바 건설일용노동자를 잠시 했다. 새참으로 빵이 나오면 선배들-김씨니 박씨니 하는 오직 ‘씨’로만 불리던 늙수그레한 막노동자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어렸고, 빵이 좋았다. 왜 빵을 싫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빵은 지긋지긋한 집 음식과 다른 세계였다. 우선 달았다. 단팥이나 크림이 들어 있어서 좋았다.

 

초등학교 때는 나중에 빵 공장에 다니고 싶었다. 빵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학교 앞에서는 빵을 팔았다. 제일 좋아하는 건 찐빵집 빵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화교를 통해서 전파되었을, 팥이 들어간 그 찐빵은 구수하고 비릿한 효모 냄새로 이미 반쯤 넋을 빼앗는 존재였다. 구멍가게에서는 보름달이니 삼립크림빵이니 하는 공장 빵을 팔았다. 노을이라는 이름의 기다란 빵은 양이 많아서 인기였다. 제과점에서 탁자를 차지하고 식빵을 시켜도 되던 때였다. 설탕을 달라고 해서 찍어 먹었다. 음료수 한 잔 없이도 그 빵이 꿀떡 넘어갔다.

 

 

빵은 호화로운 간식이었다. 그 빵값을 아끼려고 집집마다 어머니들이 ‘제빵기’를 월부로 사들였다. 반죽 레시피대로 만들면, 질척하고 달콤한 이상한 ‘케이크’가 탄생했다. 그걸 얻어먹으러 친구네 가기도 했다. 우리 엄마에게 그런 기계를 사달라고 하는 건 턱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 가정용 제빵기계도 알고 보니 일본에서 들여온 기술이었다. 정식 라이선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똑같은 기계가 지금도 일본에서 팔리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우리는 일본 빵의 세례 속에서 살았다. 유명한 빵집의 대다수는 일본인들이 패전과 함께 철수하면서 넘기고 간 일종의 적산자원이었다. 기술자로 일하던 조선인들이 그곳에서 다시 빵을 구웠다. 아직도 일본풍의 빵이 우리 제과점에 많은 것도 그런 이유다. 일본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빵을 배웠다. 군국주의 국가가 되면서 해군 중심의 군사문화가 널리 퍼졌다. 해군은 영국을 모델로 하는 서양식 식생활을 퍼뜨리는 매개체였다. 빵과 고기를 일본인의 식탁에 올리는 숙주였다. 화혼양재(和魂洋才)랄까, 유럽의 빵이 일본화되기 시작했다. 딱딱한 하드롤을 일본인들이 좋아하도록 부드럽게 만들었다. 이스트 냄새 대신 누룩으로 발효시켰다. 술빵이었다. 여기에다 결정적으로 단맛이 없는 ‘식사용 빵’ 대신 단팥을 넣어 맛을 바꿨다. 달지 않다는 뜻의 ‘식빵’이라는 말도 바로 일본이 만들어낸 용어다.

 

그 빵 문화가 조선에 그대로 이식되었다. 부족한 장비와 시설로 기술자들이 빵을 구워냈다. 그렇게 우리 빵의 역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어려운 환경에서 과자를 굽고 제빵하던 기술자들의 맥이 아슬아슬하다. 프랜차이즈 빵이 대세가 되면서 우리가 거리에서 만나는 빵의 다수는 공장에서 납품받아 진열된다. 어린 제빵 기술자 지망생이 그 프랜차이즈빵집의 좁은 부엌에서 몇 가지 빵을 굽기는 하지만, 마이스터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주요 도시의 터줏대감 빵집들도 거개 사라지면서 우리 빵 역사도 묻혀간다. 아쉽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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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말을 외국어처럼 들어라.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타인의 언어를 외국어처럼 듣게 되면 소통의 장애는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통의 장애와 만난다. 가령,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 “미워”라고 말한다면 바로 화가 나겠지만 만일 외국인이 같은 말을 했다면 혹시나 단어를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닐까 먼저 헤아려 본다는 것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소통에 어려움을 가져온다. 만약, 비트겐슈타인이 살아 있었다면 영화 <컨택트>를 보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까? 타인의 언어를 외계인의 언어처럼 들어라, 라고 말이다.

 

영화 <컨텍트>의 한 장면.

영화 <컨택트>는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ies of your life)>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간혹 영화가 수입되면서 아쉬운 번역이나 각색이 발생하곤 하는데, 컨택트라는 제목도 그렇다. <컨택트>는 한국에서 개봉하기 위해 만들어 낸 제목이고 사실 원제는 <어라이벌(Arrival)>이다. 아쉬운 이유는 이 ‘어라이벌’이라는 제목이 영화의 의도를 좀 더 풍부하고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원작이긴 하지만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차별성 역시도 이 원제, 어라이벌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도착을 의미하는 어라이벌은 영화 속에서 여러 중의적 표현으로 확장된다. 첫 번째 의미는 ‘낯선 존재의 도착’이다. 그동안 낯선 존재, 외계인들은 그저 조우(encounter)하거나 침공(attack)하는 존재로 그려지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도착이다. 도착이란 출발과 쌍을 이루는 개념어이다. 어딘가 목적지를 두고 떠났을 때 마침내 가서 닿는 곳이 바로 도착지이다. 그런 맥락에서, <컨택트> 속 외계인 ‘헵타포드’의 도착은 우연한 불시착이 아니라 의도를 가진 도착으로 보아야 한다.

 

어라이벌의 두 번째 의미는 번역 과정에서 발생한다. 번역에는 도착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언어로 쓰인 작품이 출발어라면 그것이 번역된 언어는 도착어이다. 가령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데버러 스미스의 <The Vegeterian>으로 도착하는 것이다. 주인공 루이스(에이미 아담스)가 언어학자로 설정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듯싶다.

 

마지막 어라이벌, 도착의 의미는 아마 삶의 마지막 종착점일 테다. 우리 삶의 종착점은 무엇인가? 바로 죽음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 종착점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시간을 선적인(linear)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출발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태어나면 죽는다.

우리는 이렇듯 결국 죽음에 도착하는 선적인 세계 안에서 직선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간다. 인류의 언어와 숫자가 선적으로 구성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인류가 현재 쓰고 있는 언어 체계는 어떤 언어를 막론하고 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한 방향에서 시작해 반대 방향으로 이어져 마침표를 향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거꾸로 읽어서는 의미가 형성되지 않는다. 삶이 일방향적이듯 언어가 일방향적이며 이는 곧 우리의 사고체계 자체가 일방향적이며 직선적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과 닮아 있다. 운명이 운명일 수 있는 것은 되돌리거나 번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운명관에 기초한 예술미학이 바로 고전 서사로서의 비극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나 <안티고네> 같은 비극을 움직이는 동력은 바로 정해진 운명의 방향이나 결을 바꿀 수 없다는 확정적 운명론이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시간의 일방향성에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는 무게를 덧보탠 게 바로 비극의 운명론이다.

 

하지만, 만약, 언어가 달라지면 어떨까? 영화 <컨택트> 속 외계인 ‘헵타포드’의 언어는 순환적이고 원형적이며, 시제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의 형상 안에 완성된 의미를 담는 진화된 표의어이다. 루이스는 다른 언어가 다른 사고의 반영임을 알고 있다.

 

지구인이 헵타포드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다. 만약, 우리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운명을 따를 것인가 배반할 것인가? 그리스 비극은 따라야 한다는 엄중함을 위해 예언이라는 방식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게 남에게 주어진 예언이 아니라 내 안의 직관을 통한 예측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가 나의 직관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미래 가운데서 고통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과연 미래를 가만히 기다릴 것인가? <컨택트>의 감독 드니 빌뇌브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의지가 가진 기적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듯싶다. 불행을 알면서도 걸어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의지의 핵심, 선적 세계에 살아가면서도 그 세계의 규칙을 단숨에 넘어갈 수 있는 초월적 힘이다. 가령, 죽을 줄 알면서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사람들, 가난하고 아픈 연인의 곁을 결국 지키는 다른 연인, 불치병에 걸린 자식을 결국 포기하지 않는 부모. 그 모두는 그 선택이 사람들이 말하는 보편적 행복,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른다.

 

키르케고르는 “내 삶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고,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나는 주저 없이 내 삶을 건다”고 말했다. 그런 것이다. 우리는 삶의 고뇌 안에서도 황홀경을 찾고, 그것이 몸의 고통을 가지고 온다고 할지언정 그 가운데서 기쁨을 얻는다. 영화 속 루이스 딸의 이름은 한나(Hannah)이다. 앞으로 읽어도 한나, 뒤로 읽어도 한나. 결국, 의지만이 일회적인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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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