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작년의 일이지만, 돼지고기 가격(돈가) 하락이 심각하다. 원래 돈가는 일정한 패턴을 보인다. 구제역 등이 없다면 조금씩 올랐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계절도 탄다. 이상하게 작년 여름, 돈가가 안 올랐다. 휴가철 특수가 있는데도 삼겹살이 남아돌았다. 어느 신문에서는 “황금돼지해, 돼지값 싸져서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기사를 실었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돈가를 안정시킨다고, 여기에다가 주요 무역국과의 교역 문제 때문에 수입돈이 늘어난 게 가장 큰 요인이다. 돼지고기가 많이 수입되면 가격이 내려가서 소비자(국민)도 좋은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위의 신문 기사가 그런 논조다. 그렇다면 축산가는 국민이 아닌가. 그동안 축산 농가는 이런저런 당국의 불편한 처사에도 입을 꾹 막고 살았다. 수입 물량을 늘려도 국산돈의 품질로 돌파하자고 허리띠를 졸라매거나, 손님은 좋은 국산 돼지고기를 알아준다는 심리적 방패가 있었다. 수입돈 품질이 그다지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천만의 말씀이다. 판도라의 상자 같은 이야기지만, 수입돈의 품질이 국산돈을 능가하는 부분도 많다. 스페인산 고급육은 어지간한 고깃집 광고판에서 발견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베리코 돼지 삼겹살, 목살구이 팝니다.”


선호 부위의 차이 때문에 외국의 삼겹살과 목살 등의 국제가격이 워낙 싸서, 수입 물량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유럽산은 거의 냉동이 유통되지만, 미주 지역은 특별 수송체계를 갖추고 냉장육도 대량으로 들여오고 있다. 몇몇 마케팅 업체에서는 테스트를 통해서 수입육이 국산육과 구별하기 어렵다는 공세를 펼치고 있다. 품종이 비슷한 데다, 사료도 거기서 거기이니 맛이 크게 다를 리 없을 수도 있다. 


최근 돼지 동결육이 늘고 있다는 시장의 소식이 들려온다. 미처 팔지 못해서 시급히 냉동하는 것을 애초에 냉동하는 것과 구별하여 동결이라고 한다. 최고가여야 할 괜찮은 국산 목살이 동결되어 돼지 뒷다리만도 못한 처참한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삼겹살도 마트 등에서 파격가로 팔린다. 킬로그램당 소비자가격이 1만원대에 풀리고 있다. 생산농가는 심각한 손해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돼지고기는 1970년대 이후 생산량이 크게 늘면서 국내 육식 수요의 상당수를 충족하고 있다. 순댓국이나 족발 같은 서민 음식의 재료가 되는 부산물도 많이 생산한다. 어떤 재료가 지나치게 싸게 팔린다는 건 곧 그 산업이 위기에 처했다는 강력한 신호다. 듣기로는, 미·중 관계가 악화되면서 판로가 막힌 북미산 돼지고기를 밀어내는 시장으로 한국이 선택됐다고 한다. 삼겹살 불판을 갈자고 했던 분이 노회찬 의원이다. 이제는 다른 의미에서 돼지고기 판을 갈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적정 가격이란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이고, 이는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다. 급격한 폭락은 산업구조의 뿌리를 흔든다. 싸다고 무작정 이익이 아닌 시스템 아래에 우리는 살고 있다. 축산가와 고기유통에 종사하는 국민은 국민이 아닌가. 격변하는 시장이 어떻게 움직일지 불안한 요즘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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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비극과 원했던 바를 결국 갖게 되는 비극 말이다. ‘비극’을 떠올리면 참담한 결말과 파국이 떠오른다. 처참하게 망가진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도 그려진다. 햄릿, 맥베스, 오셀로, 오이디푸스. 대개 비극의 주인공들은 무엇인가를 강렬히 원했던 사람이다. 맥베스는 권력을 원했고, 오셀로는 의심의 종결을 원했으며, 오이디푸스는 정의를 추구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이 원했던 것을 얻었다. 문제는 그토록 원했던 그것이 파국의 주범이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쪽보다는 원했던 것을 갖는 쪽이 더 비극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원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욕망이라고 부른다. 소설, 영화, 드라마와 같은 서사의 주인공들은 욕망하는 이들일 때가 많다. 욕망하는 인물들은 돈, 사랑, 명예, 권력. 거의 이 네 가지 중 하나를 원한다. 그런데 인생은 꽤 공평해서 하나를 좇으며 나머지 셋까지 갖기는 어렵다. 주인공들도 이를 잘 알고 있는데, 그래서 돈을 따르는 자는 사랑, 권력, 명예를 버리기도 하고, 사랑을 선택한 인물들은 나머지를 외면하기도 한다.

 

영화 <로마>의 한 장면.

 

적어도 어린 시절, 우리는 욕망하는 하나를 위해 나머지를 포기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하곤 했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원작인 영화 <갈매기>의 여성 인물 ‘나나(시얼샤 로넌)’도 그렇다. 그녀는 ‘명예’를 위해서는 뭐든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 나나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게 되고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명예와 가장 먼, 불명예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콘스탄틴(빌리 하울)은 ‘사랑’을 추구한다. 그는 마침내 유명작가로의 ‘명예’를 얻지만 그것이 사랑을 가져오지는 못하자 자살하고 만다. <갈매기> 속의 인물들은 서로에게서 결코 받을 수 없는 것들을 갈망한다. 욕망은 결핍 속에서 무너지고 인생은 엇갈림 가운데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뤄진 바람은 단 하나이다. “순진한 시골처녀를 심심풀이로 파멸”하고자 했던 작가 트리고린의 욕망 말이다.

 

원하는 삶이 비극이라면 비극의 반대는 어떤 삶일까? 알폰소 쿠아론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로마>에 해답의 단서가 있다. <로마>가 2018년 최고의 작품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로마>는 클레오와 소피아라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소피아 집안의 가정부이자 육아도우미인 클레오가 주인공에 더 가깝다.

 

영화가 시작되면 차고로 쓰는 대문 앞 공간을 물청소하는 클레오의 모습이 비친다. 클레오는 물청소를 하고, 아침 식사를 챙기고, 설거지를 하며,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와 다시 저녁 식사를 챙기고, 다림질을 마무리 짓고는 잠이 든다. 대문 앞을 아무리 물청소해도 애완견 보라스는 또 똥을 싸놓고, 꺼내 놓았던 접시는 다시 씻어 넣어야 하며 그 접시는 내일 아침 또 꺼내 쓴 후 다시 닦고 정리해야 한다. 영화는 ‘일상’이라는 반복되고 지루한 삶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 일상의 공간은 우리가 ‘서사’를 통해 만나왔던 욕망이나 결핍의 공간과 완전히 다르다. 무엇인가를 강렬히 원하는 그런 시공간이 아니라 오늘이나 내일이나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반복의 세계이다. 말하자면, 클레오나 소피아는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원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얼핏 지루해 보이고, 무료해 보인다.

 

클레오와 소피아가 원하는 게 있다면 단 하나, 지루한 일상의 패턴이 고스란히 지켜지는 것이다. 하지만 삶은 그녀들의 이 작고 소박한 바람도 지켜주지 않는다. 클레오는 원치 않은 아이를 갖는다. 그러다 원하지 않았던 그 아이를 잃고 만다. 소피아는 지금의 삶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바람이 난 남편은 돌아오지 않는다. 클레오는 아이를 잃고, 소피아는 이혼을 한다. 두 사람 다,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결과들을 떠안게 된다.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두 사람은 힘들어하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고통스럽지만 결국 현실을 껴안는다. 두 사람은 원치 않는 일과 마주치고 만다. 그건 욕망의 결과라기보다 삶의 부산물에 가깝다. 욕망을 갖고 선택을 한 것은 두 여인의 남자들이다. 클레오의 애인 페르민은 임신한 여자 친구를 버리고, 학살자의 편에 선다. 소피아의 남편은 다른 여자를 선택하고, 가족을 떠난다. 어쩌면 소피아와 클레오는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당한 사람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피아와 클레오야말로 인생의 고수이다. 우리는 늘 원하는 것을 따르는 강렬한 사람들을 영화에서 보아 왔지만 삶이 그런 역동성으로만 지탱되는 것은 아니다. 지루한 일상의 반복에서 행복을 찾았던 여자들의 바람이야말로 우리가 돈, 명예, 권력, 사랑과 같은 거창한 욕망 뒤로 미뤄 놓았던 삶의 진리일지도 모른다. 삶은 돈과 명예, 권력과 사랑을 탐하는 역동성이 아니라 원하지 않았던 것들을 길들이는 평범함 가운데서 견고해진다. 하루하루의 일상을 살아가는 것, 지루한 반복에서 삶의 박동을 느끼는 것,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진리를 깨달아가는 삶. 이 가운데서 삶은 비극이 아닌 무엇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비극의 반대말이 희극이 아니라 일상인 이유이다.

 

<강유정 |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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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계 최고의 화제작은 단연 JTBC 금토드라마 <SKY캐슬>이다. “대한민국 상위 0.1%”가 모여 사는 최고급 주택가 SKY캐슬 사람들의 계층 대물림 욕망을 사실적으로 그린 드라마는 그 욕망이 치열하게 드러나는 자녀들의 입시 문제를 주요 소재로 한다. 자식이 ‘7살 때부터 아파도 다쳐도 쓰러져도 1년 365일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공부시키는 부모, 학업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14살 아이가 편의점에서 과자를 훔쳐 밟아버리는 기행을 저지르자 돈으로 무마시켜서라도 공부를 계속하게 하는 부모,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할 한 줄 스펙 때문에 비열한 방법으로 경쟁자를 사퇴시켜 자식을 전교회장에 당선시키는 부모 등 자식의 일류대 입학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살벌한 이야기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SKY캐슬>이 입시 스릴러로 불리는 이유다.

 

JTBC 드라마 의 한 장면.

 

그런데 이 드라마의 공포를 촉발하는 진짜 요인은 그 뒤에 숨어 있다. 바로 가부장제다. <SKY캐슬> 초반 입소문의 동력이 된 1회 엔딩을 떠올려보자. 입시제도를 비판하는 작품들이 흔히 청소년들의 자살로 끝을 맺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캐슬 귀부인들 사이에서 여왕보다 더 부러운 워너비맘”이었던 이명주(김정난)의 충격적인 자살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명주는 외아들 영재(송건희)를 서울의대에 합격시켜 “3대째 의사 가문의 위업”을 달성했지만, 입시를 위해 “사육”과 다름없는 환경에서 자란 아들로부터 절연을 통보받았다. 절망한 이명주는 평소 폭력 남편 박수창(유성주)이 그녀와 아들을 위협하는 도구로 사용한 사냥총으로 목숨을 끊는다. 이명주의 죽음은, 아무리 최상류층이어도 기혼 여성의 가치가 철저히 남편의 지위와 그것을 이어받을 자녀의 성패에 의해 결정되는 가부장제가 낳은 비극이다.

 

이 같은 비극은 기혼 여성들이 가족 관리 전문가로서 점점 더 많은 역할과 의무를 요구받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무한경쟁 사회에서 한층 심화된다.

 

특히 그 경쟁 구도가 고도로 압축된 자녀교육은 여성들의 부조리한 현실을 제일 첨예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다. 가부장제의 부조리를 풍자한 이 작품이 입시제도를 주요 소재로 삼은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래서 <SKY캐슬>은 입시 스릴러이자 가부장제 스릴러다. 이명주의 파국으로 시작한 이 드라마는 그녀와 함께 캐슬의 양대 ‘워너비맘’으로 불린 한서진(염정아)의 이야기로 중심을 옮겨간다.

 

한서진은 이명주보다 더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피해자다. 그녀는 “여자가 무슨 공부냐”고 구박하면서 매일같이 폭력을 휘두르는 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성인이 된 뒤에는 신분을 속이고 명문가 자제 강준상(정준호)과 결혼해 SKY캐슬에 입성하는 신분 상승을 이루지만, 시어머니로부터는 ‘아들을 못 낳은 죄’ 때문에 며느리로 인정받지 못한다.

 

한서진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 완벽한 ‘아내·엄마’의 모습에 충실하고자 애쓴다. 드라마 공식 인물 소개를 보면 한서진은 “삼시세끼 유기농 식단을 손수 차려내는 데다 한식, 양식 조리사 자격증은 기본, 푸드코디네이터 뺨치는 테이블 세팅에 푸드 스타일링까지 소화하며 두 딸의 완벽한 학습 매니저인 프로 주부”로 설명된다. 이러한 한서진의 모습은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강조된 ‘주부 CEO’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가부장제 위에 쌓아올린 모래성에 불과하다. 서진이 딸 예서(김혜윤)의 서울의대 합격을 위해 이명주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지도 모를 위험조차 감수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그 길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서다.

 

여러 면에서 <SKY캐슬>은 2012년 정성주 작가가 발표한 JTBC 드라마 <아내의 자격>의 적통 후계자처럼 보인다. <아내의 자격>은 이 작품보다 한발 앞서서 자녀교육 문제를 통해 ‘아내, 엄마, 며느리’의 자격을 강조하며 기혼 여성들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민낯을 고발한 드라마다. 시댁과 남편의 강요로 인해 대치동으로 이주한 주인공 서나래(김희애)는 아들이 입시학원에서 꼴찌를 하자 엄마의 자격을 의심당한다. 드라마는 결국 집에서 쫓겨난 서나래의 빈자리가 가사도우미와 튜터맘으로 신속하게 대체가 되는 모습을 통해 그림자 같은 기혼 여성의 조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아내의 자격>에서 대치동 사교육의 1인자 홍마녀로 등장했던 이태란이 <SKY캐슬>에서 입시교육에 희생된 아이들을 보호하고 엄마들을 자극하는 이수임으로 출연하는 것도 이 작품에 대한 오마주처럼 다가온다.

 

더 흥미로운 공통점은 가부장제의 억압과 공포를 그리면서도 여성들을 마냥 피해자로만 그리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아내의 자격> 서나래가 결국 외도를 계기로 자아를 찾으며 가부장제를 탈주했듯이, <SKY캐슬>의 한서진 역시 ‘가부장제의 입맛에 맞게’ 완벽한 기혼 여성의 역할을 탁월하게 연기하는 흥미로운 전략가다. 그녀를 무시하는 시어머니 뒤에서 “당신 아들보다 백배 천배 잘난 딸로 키워낼” 것이라며 싸늘한 얼굴을 드러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런 점에서 극중 이수임이 원래 쓰려던 소설의 첫 제목인 ‘누가 그 여자를 죽였나’가 <SKY캐슬>의 본질을 더 잘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SKY캐슬의 여성들은 누구보다 그 답을 잘 알고 있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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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사인지는 몰라도,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장래희망 직업에 요리사가 모두 10위 안에 들었다. 초등학생은 심지어 4위였다. 응답자들이 직업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결정한 후에 답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요리사가 요즘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지 살펴볼 수 있는 힌트였다. 옛날에 의사의 세계를 다룬 드라마가 있었다. 당시엔 인터넷이 없었고, 아마도 PC통신을 통해 의사들의 감상평이 돌았다. 하나같이 사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었다. 레지던트들이 언제 저렇게 연애하고(드라마에 연애가 빠질 수 없으니까) 얼굴이 반들반들하냐는 것이었다. 두어 시간밖에 못 자서 푸석푸석하고 머리는 까치집이며, 연애는 고사하고 외박도 거의 나가기 힘든 저연차 레지던트들의 악성 근로환경에 대한 고발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청자들은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의사들의 일상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외국의 한국드라마 시청자들이 한국인들은 모두 멋지고 옷 잘 입고 폼나는 사람들만 있다고 깊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처럼.

 

 

요리사들이 TV에 등장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제는 이른바 스타셰프, 셀럽 셰프라는 말도 생겼다. 매니저를 대동하고 다니는 경우도 있어, 일로 통화하려면 매니저를 통해야 한다고도 한다. 하얀 제복, 멋진 칼솜씨, 여기에 입담까지 갖춘 연예인급 요리사가 대중스타가 되었다. 대중과 미디어는 늘 새로운 사람을 원한다. 요리사는 그 수요에 부응하는 멋진 직업인이었다. 이미 외국에서 검증된 일이기도 하다. 외국에서는 요리쇼를 한번 하는데 초청비가 1억원이 넘는다. 1등석 비행기표를 제공해야 하는 요리사도 있다. 우리가 아는 ‘주방장 아저씨’와 그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산다. 한국도 미디어를 통해서 요리사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가치가 올라갔다. 그러나 극소수의 얘기다. 요리사들은 여전히 찬물에 손 담그고 있느라 가벼운 동상에 걸린 것처럼 붉게 부어 있기 일쑤고, 온갖 산업재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결정적으로 박봉이다. 식당업이 영세한 탓에 여전히 많은 요리사들은 최저임금을 받는다. 장시간 노동이 흔하며, 작업장 환경도 좋지 않다. 건강에 안 좋은 기름 연기와 연료에 노출되어 있고 좁은 곳에서 일하다 보니 스트레스도 많다. 더구나 오픈된 주방이거나 까다로운 손님을 맞을 땐 3차 스트레스도 받는다. 1차가 고용주, 2차가 동료, 3차는 손님인 셈이다. 언제든 그들은 식당과 음식평을 개인 미디어에 올린다. 그것이 신선한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해명할 수 없는 일방적인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대다수 요리사는 우리 주변 평범한 직업인이다. 요리사를 꿈꾸던 많은 이들이 초기 단계에서 포기한다. 요리사 지망생은 많은데, 식당은 늘 구인에 어려움을 겪는다. 전국의 수많은 요리학과 졸업생 중 요리사로 직업을 이어가는 비율은 아주 낮다. 요리사의 현실을 보여준다. 요리사가 멋있어 보이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현실 속 요리사는 그다지 행복하지만은 않다.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직업이 어디 요리사뿐이겠냐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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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11일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불탔다. 슬로베니아의 정신분석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이를 두고 실재(The Real)의 침투라고 말한 바 있다. 의식에서 가장 먼 곳, 상징계로부터 가장 깊은 곳 너머에 묻어 둔 바로 그것, 실재계의 공포가 도래했노라고 말이다. 어려운 말이다. 쉽게 나름의 곡해를 해보자면, 설마 현실이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환상의 도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로 실컷 즐길 수 있었던 것. 결코 현실이 될 리 없으니 쾌락원칙에 따라 즐길 수 있었던 가상. 스크린에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파괴의 순간들 말이다. 외계인이 침공해 백악관을 무너뜨리고, 테러리스트가 월드트레이드센터를 점령할 수 있었던 건 그게 다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2001년 9월11일 전에는 말이다.

 

영화 <도어락>의 한 장면.

 

그런데 요즘 우리는 실재계의 침범과 정반대의 일들을 영화관에서 경험하고 있다. 설마 현실이 될까 싶은 상상을 만나는 게 아니라 너무나 현실적이라서 함부로 영화로 다룰 수 없었던 일들을 스크린에서 확인하는 중이다. 이는 바로 현실의 침투이다. 너무나도 사실적이기 때문에 마주하기 싫었던 공포, 그런 공포가 최근 영화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1998년 IMF 외환위기 사태를 재현하는 작품 <국가부도의 날>과 독거 여성의 공포를 다룬 영화 <도어락>이 그렇다.

 

고백하자면, <국가부도의 날>을 보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했다. 적어도 1994년에 대학에 들어갔고, 1998년에 졸업한 X세대인 나에게 IMF는 덜 아문 상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1998년을 맞았던 그래서 과소비라는 사회적 질타 앞에 묵묵히 입을 다물어야 했던 순진했던 국민들이 영화에 소환되는 순간을 목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일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그래서 그날의 국가부도 사태를 날벼락처럼 당해야 했던 <국가부도의 날>은 공포영화에 가깝다. 돌이켜보면 그건 분명 재난이었다.

 

2018년에 돌아보는 1997년 12월 ‘국가부도의 날’은 어떤 의미에서 부검 과정과도 닮아 있다. 사체를 해부해 원인을 밝혀가는 과정, 이미 회생불능을 받았던 그날을 해부학적으로 더듬어 다시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이 영화의 줄거리이니 말이다. <국가부도의 날>의 이야기는 어쩌면 시네마 포렌식(cinema forensic)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알고 보니 그건 일종의 범죄였으니 말이다.

 

<도어락>의 공포는 훨씬 더 사실적이다. <국가부도의 날>이 과거였다면 <도어락>은 현재이기 때문이다. 20여년 전 윤대녕의 소설과 트렌디 드라마에서 낭만적으로 제시되었던 원룸, 오피스텔에서의 삶은 2018년 현재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려진다.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사들고 돌아와,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던 20여년 전 세련된 라이프 스타일의 상징이었던 원룸과 현재의 원룸은 상당히 달라져 있다.

 

영화 속에는 도시괴담처럼 떠도는 이야기들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누군가 방의 도어락 터치 패드를 건드리고 심지어 손잡이를 흔들더라, 택배 기사나 배달원을 사칭해 여성 혼자 사는 방을 침범했더라와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촬영된 나의 이미지, 업무용으로 주고받은 이메일과 명함이 결국 나의 노출이 되고 마는 아이러니. 우리의 일상 속에 만연한 폭력과 위협들이 <도어락>에서 개연성 있는 사례로 지나쳐 간다. 문제적인 것은 이런 사례들이 과장이나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의 중심 갈등은 납치, 신체훼손과 같은 사이코패스 범죄이다. 하지만 정말 관객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허구적인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이미지가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법한 일상이다.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자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남자의 모습도 그렇고, 신고는 사후에 하는 거지 사전에 하는 게 아니라고 짜증을 내는 경찰의 모습도 그렇다. 분명, 스토킹 피해자임에도 회사를 어지럽게 한 원흉으로 지목되어 재계약이 거절되는 모습도 낯설지는 않다. 계속해서 위험을 호소할 때 그런 사람들이 일종의 히스테리나 신경쇠약 환자로 치부되는 과정도 새롭지는 않다. 모두 다 낯익은 것, 이미 우리 주변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인 셈이다.

 

<악마를 보았다>나 <V.I.P> 같은 영화 속에서 살인이 무서웠던 것은 그런 인물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런 인물들은 현실에서 만난다기에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며 비사실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도어락>은 가해자에 대한 공분보다 먼저 잠재적 피해자로서의 공감을 건드린다. 그런 사람 만날까봐 무서운 게 아니라 우리도 피해자의 형편과 크게 다르진 않다는 사실에 무력해지는 것이다. 알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고 지내는 것, 확률의 문제라고는 하지만 내가 걸리면 100%인 불운의 세계, 누구나 잠재적 피해자군에 속해 살아가고 있다는, 우리가 가까스로 외면했던 현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상상이 아니라 바로 현실이다. 너무 사실적이라 억누르고 살아가는 공포, 생존하기 위해 외면하는 도처의 위험들 말이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위기의 사인을 모르는 척했던 1998년, 내가 잠재적 피해자일 수 있지만 애써 나만은 아니라고 외면하며 하루하루 생존해가는 많은 여성들. 우리는 어쩌면 이토록 만연한 공포를 모르는 척하고 현실을 속여 가며 지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두려운 것은 바로 현실이다.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영화적 환상은 사실 현실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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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이 5년 전의 추억을 상기시켰다. 머리엔 머플러를 친친 동여매고 입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걸치고 시장 바닥에서 떨며 밥을 먹는 여인들의 사진이었다. 나는 아마도 이 사진을 자갈치시장에서 찍었던 것 같다. 나는 짧게 사진의 제목을 달았다. “이런 장면에 ‘삶의 현장’ 따위의 설명을 붙이지 말자.” ‘삶은 이어진다’ 같은 것도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고통스럽지만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고. 그것이 일상이라고. 그것을 운명이라든가 국외자의 시선을 실어서 감상적인 말로 수식해서는 곤란하다고.

 

 

언젠가 한 요리사 친구가 실직했다. 그야말로 쌀독에 쌀이 떨어졌다. 라면도 떨어졌다. 어느 날 밤에 귀가하는데, 집이 컴컴하더란다. 요금 체납으로 전기도 끊긴 것이다. 인터넷이 거의 없던 시절, 어디선가 정보를 듣고 북창동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봤다고 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골목에 불어닥쳤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겨울날이었다. 그는 그날 일을 얻지 못했다. 인력사무소 사장이 “칼판 두 명, 불판 두 명!”을 외쳤다. 중식당 전문 인력시장이었다. 그는 양식 전문이었으니 빈손으로 아침 전철을 타고 귀가했다. 마침 출근시간이었다. 전철 안은 송곳 꽂을 틈도 없이 승객으로 꽉 차 있었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만원 전철 안의 승객조차도 그는 부러웠노라고 했다. 그래도 그들은 밥을 벌러 어디론가 가고 있었으니까. ‘벼룩시장’을 보고 결혼식장 뷔페에 주말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소갈비 상자를 옮기다가 다쳤다. 허리 근육이 쥐어짠 빨래처럼 뒤틀리더라는 것이었다. 주방장의 선처로 일당을 받아들고 조퇴했다. 그는 동네에서 두부며 반찬거리를 사다가 막걸리집에 주저앉았다. 대낮에 한 잔 마시는데 밖에 마침 눈이 펑펑 내렸다고 한다. 술잔에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이 얘기를 그 친구와 막걸리를 마시면서 들었다. 함민복은 <눈물은 왜 짠가>라는 수필을 썼다. 친구의 막걸리잔도 짰을 것이다. 울고났더니 거의 맹목적이라고 할 정도로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더라, 새끼들 입에 밥은 넣어야 하겠다, 뭐라도 하겠다는 투쟁심 같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예전에 회사 다닐 때 아주 깐깐하고 팍팍한 선배가 있었다. 말을 직설적으로 해서 좀 불편한 사이였다. 그가 점심시간이 되자 내게 말했다.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먹고 하자. 어디 가서 뜨거운 국물이라도 마시자.”

 

이상하게도 그 선배에 대한 평소의 서운함이 싹 사라지는 말투였다.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이 말.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이고, 삶의 대부분은 먹자고 일하다가 보낸다. 그 먹는 일의 일상이 소중한지 잘 모른다. 하루에 두 끼, 세 끼 이어지는 일이니까.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저 칼바람 속에서 머플러 쓴 시장 여인들의 숟가락질, 친구의 짠 막걸리잔, 그리고 선배의 한마디. 눈 오는 날, 마음이 더 추운 사람들이 오늘도 한 끼 밥을 잘 먹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져 밥다운 밥을 먹을 수 있기를. 그렇게 되기를.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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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천진한 목소리가 초등학교를 가득 채운다. 가을 체육대회가 한창인 운동장에서 한 남자아이가 열심히 달리고 있다. 그런데 릴레이 경주를 마친 남자아이 앞에 이상한 환각이 나타난다. 어린 여자아이가 고무줄놀이를 하며 웃고 있는 모습이다. 어딘지 불안해 보이던 남자아이가 건물 계단 위로 올라간다. 제일 높은 계단에 서 있던 아이는 갑자기 아래로 몸을 던진다. 

 

올해 드라마 중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막을 연 MBC 미스터리 스릴러 <붉은 달 푸른 해>는 아이들의 숨겨진 상처에 주목하는 작품이다. 아동상담사인 주인공 차우경(김선아)은 계단 아래로 투신한 10살 남자아이 한시완(김강훈)을 상담하게 된다. 시완의 이상행동은 여동생을 교통사고로 잃은 이후부터 생긴 증세였다. 하지만 시완은 상담 사실이 밖으로 퍼져나갈 것을 우려한 부모의 반대로 곧 상담을 중단한다.

 

MBC <붉은 달 푸른 해>의 한 장면.

 

상담이 계속 필요하다는 우경에게 “내 자식은 내가 더 잘 알아요”라고 응수한 시완 어머니의 말은 현실에서 수많은 부모가 되뇌는 말이다. 부모들은 정말 아이들에 대해 잘 알고, 보호하고 있을까? 드라마는 이 물음에서부터 출발한다.

 

질문은 곧바로 이어진 사건에서 한 단계 더 나간다. 상담센터로 향하던 차 안에서 시완 어머니의 상담 중단 통보 전화를 받은 우경은 근심에 휩싸인 채 집으로 차를 돌린다. 바로 그때 누군가 우경의 차로 뛰어든다. 시완 또래의 남자아이였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충격과 죄책감에 빠진 우경은 자동차 전용도로라서 운전자 과실을 묻기 어렵다는 변호사의 말에도 아이의 가족을 수소문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보호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절망한 우경이 묻는다. “길바닥에서 어린애가 죽었어. 근데 그 앨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부모조차도. 어떻게 아이가 무연고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시완의 사연이 부모의 방임을 지적했다면, 도로에서 사망한 아이의 이야기가 겨냥하는 질문은 우리 사회의 방임 문제로 확대된다. 우경의 의문에 “아이들이라고 모두 보호자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라고 답하는 경찰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부모라고 해서 다 보호자인 것은 아니다. 첫 회에서 등장한 김한솔 어린이 학대 치사 사건처럼 아동학대 가해자의 절대다수가 부모다. 그렇다면 그런 부모 아래 방치된 아이들, 그리고 그런 부모조차 없는 아이들은 누가 보호할 것인가.

 

이는 아동학대를 소재로 한 최근 드라마들의 공통된 질문이다. 이전까지의 드라마들이 대부분 가시적 폭력 위주의 아동학대 문제를 그렸다면, 같은 주제를 다루는 요즘의 드라마들은 더 폭넓은 사회적 방임의 문제를 제기한다. <붉은 달 푸른 해> 이전에 올해 초 방영된 tvN <마더>가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 혜나(허율)는 가난한 싱글맘과 그의 난폭한 동거인 아래서 학대당한다. 아이를 눈여겨본 교사들이 수차례 아동학대를 의심하고 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학대는 점점 심해진다. 보다 못한 담임선생님 수진(이보영)이 혜나를 데려가 보호자를 자처한다. 부모가 버리고 사회가 방임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

 

지난 9월 방영된 KBS 미스터리 호러 <오늘의 탐정>은 첫 번째 사건으로 어린이집 교사에 의한 아동 납치 사건을 다뤘다. 드라마는 이 범죄를 개인적 문제로 몰아가기보다는 어린이집 교사들의 열악한 근무조건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함께 환기한다. 점점 늘어나고 있는 어린이집 학대 사건의 근본적 문제가 거기에 있다.

 

드라마 속 모든 범죄의 배후에 있는 생령 선우혜(이지아)의 사연 또한 같은 맥락 안에 위치한다. 어린 우혜는 신변을 비관해 가족 동반 자살을 시도한 아빠의 손에서 홀로 살아남는다. 어린 자녀들과의 동반 자살은 정확히는 자녀 살해 후 자살이다. 이는 아동을 향한 가장 극단적인 폭력 행위일 뿐이다. 더구나 우혜는 가족들 시체 옆에서 수일간이나 방치된 채로 있었다. <오늘의 탐정>은 그렇게 부모와 사회가 유기하고 방임한 아이가 원귀로 돌아와 세상을 상대로 복수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최근 아동학대 소재 드라마의 새로운 경향은 아동 문제 인식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최근 3년간의 아동학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빅데이터로 분석한 결과, 제일 두드러진 변화는 아동학대를 가족 간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로 바라보는 인식의 증가다. 신체학대를 넘어 정서학대와 방임 등도 문제로 인식하는 등 아동학대에 대한 인식의 범위가 확대됐다는 것이었다. 아동학대 신고 건수가 늘고 피해 아동의 심리치료도 늘어났다.

 

물론 뒤집어보면 아동학대 범죄가 그만큼 증가하고 그 심각성이 커지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런 상황에서 아동학대를 사회문제로 가시화하고 문제의식을 확대하는 작품들이 꾸준히 나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최근작인 <붉은 달 푸른 해>처럼 기존의 아동학대 소재 드라마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은 아동 우울증, 아동 자해 등의 문제까지 다루는 작품이 등장한 것은 더 주목할 만하다. <마더>와 함께 2018년 드라마의 가장 큰 성취 중 하나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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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자리 어른이 술을 권한다. 외지 사람이 잔을 받는다. 드르륵, 낡아서 삐걱거리는 알루미늄 문이 열리고 노인 손님이 몇 패 들어온다. 찌개를 끓여서 막걸리를 돌린다. 미지근한 막걸리다. 여그는 차게 안 마셔. 

 

최근 광주에 다녀왔다. 부도심 곳곳의 전통시장이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시장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남광주시장, 양동시장, 대인시장. 토요일마다 야시장이 열리는 곳도 많다. 청년과 예술가가 결합해서 시장의 분위기를 바꿔 놓기도 한다. 시장의 힘이 아직은 느껴지는 도시다. 이 시장에는 대폿집이 전설처럼 남아 있다. 한 바퀴 돌면서 대폿집들의 면모를 쓱 살펴본다. 어떤 집은 “시장에서 파는 무엇이든 가지고 오면 요리해 드린다”고 써 놓았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 무렵, 전라도 해안에서 잡은 맛있는 생선과 해물이 광주에 많이 올라온다. 그 귀하다는 노랑가오리도 별거 아니라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누워 있고, 표면이 푸르게 빛나는 제철 삼치며, 굵직한 낙지(대낙지라 부른다)도 억센 힘을 자랑하며 함지에서 용을 쓴다. 가을에 태어난 어린 낙지도 있어, 세발낙지 맛을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세발낙지는 품종이 아니라 어린 놈을 그리 부른다. 어물전에서 낙지를 구경하고 있으면, ‘아짐’(아주머니)이 세발낙지 먹는 법을 알려준다. 이놈을 다리 쫙 훑어서 한입에 넣어야 한다고.

 

 

장을 봐서 대폿집에 들어선다. 안줏거리를 건네면, 솜씨 있게 쓱쓱 만들어낸다. 낙지를 탕탕, 도마에 쳐서 참기름과 통깨(이 양념은 전라도 음식의 주인공 격이다)를 술술 뿌려서 낸다. 가오리를 쓱쓱 저미고, 병어는 탕을 끓인다. 새꼬막이 수줍게 나와 있어서 연하게 삶아 백숙을 한다. 꼬막은 까먹는 맛이제. 안주를 함께 나누는 대폿집 손님들이 한마디씩 한다. 어디서 오셨느냐, 무슨 일을 하셨느냐 서로 인사를 나눈다. ‘하셨느냐’는 은퇴한 어른에게만 묻는 과거형 질문이다. 그들도, 다 한세상을 힘차게 살아온 양반들. 개인사를 들으며, 사라져버린 시장과 광주라는 도시의 기억을 떠올린다. 대포는 원래 커다란 잔을 의미한다. 막걸리 같은 술을 딱 한 잔 마실 수 있게 큰 사발에 따라서 냈다. 얼른 마시고 일하러 가야 하거나, 가진 돈이 적어서 한 잔밖에 마실 수 없는 사람에게 최적의 소용이었다. 이제는, 다들 술을 천천히 마신다. 안주도 시켜야 한다. 이제 대폿집에서 대폿잔을 볼 수 없게 됐지만 인심은 그대로다. 무슨 술이든 한 병 시키면 안주를 한상 깐다. 싸고 흔한 음식이지만 이쪽 말로 ‘개미진’(맛있는) 것들이다. 김치며 번데기, 어묵탕 같은. 술에 딸려 나오는 기본 안주는 무료다. 이 전통은 오랜 것이다. 조선말의 선술집이나 주막에서도 그랬다는 기록이 있다. 전주의 그 유명한 막걸리골목의 인심이나 통영의 ‘다찌집’의 문화도 전통의 소산이다. 이제는 월세 싸고 직원 안 쓰는, 이런 광주의 대폿집에서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저나 다 사라져갈 대폿집을 기억하고 쓰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데, 참 장한 일이 아닌가 싶다. 대포 한 잔 마시러 광주에 가고 싶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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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는 것이다.” 파티에 다녀온 남편이 어떤 아가씨를 데려다주는 길에 함께 자고 왔다고 말한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용서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덧보탠다. 용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는 것이라고, 진짜 이해했다면 용서라는 말이 필요 없다고 말이다. 아이 넷을 키우고 있는 아내 수전은 가정을 유지하는 일이 ‘지성적’인 판단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남편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용서한다. 눈치챘다시피, 용서로 지탱이 되는 이 가정은 이미 균열되어 있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의 가정 말이다.

 

20대 후반에 결혼한 수전은 꽤나 합리적인 판단으로 결혼을 하고, 전원주택으로 이사해 네 명의 아이를 낳았다. 모두 계획한 대로였다. 단조로운 생활을 하게 될 것도 알았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두렵거나 힘들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전은 자신의 삶이 “자기 꼬리를 문 뱀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유지하는 게 원하던 일이었지만 그것을 유지하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영화 <툴리>의 한 장면.

 

막내가 제법 큰 이후엔 자기만의 방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집 안에 엄마의 방을 만들었지만, 수전은 그 방에서 하루 종일 아이들이 내일 입을 옷, 먹을거리, 일과를 설계하느라 생각이 쉴 틈이 없다. 혼자 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호텔 19호실을 빌린다. 그리고 드디어 그곳에서 혼자가 된다. 누구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친구가 아닌 익명의 존재가 된 것이다.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다보면 나 자신을 잃고 산다고들 말한다. 영화 <툴리>에서 만나게 되는 여자 마를로(샤를리즈 테론)도 그런 인물 중 하나이다. 1남1녀의 어머니인 그녀는 현재 만삭이다. 지금은 막내이지만 곧 둘째가 되어야 할 아들은 좀 특별하다. 지나치게 예민한 아들은 일종의 정서적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와중에 셋째가 태어나고, 마를로는 말 그대로 독박육아에 시달린다. 시도 때도 없이 깨는 아이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고, 그 와중에 두 아이의 식사와 등교, 준비물도 챙겨야 한다. 남편은 집에 돌아오면 이어폰을 낀 채 게임에 열중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나쁜 남편도 아니다. 아니, 그냥 평범한 남편의 모습이라는 게 문제다. 내가 젖이 나온다면 야간 수유라도 대신할 텐데라는 식의, 나름의 위로를 던지는 모습 말이다.

 

그때 밤에만 아이를 돌봐주는 도우미 툴리가 나타난다. 자신의 아이처럼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툴리 덕분에 마를로는 정말이지 너무나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잔다. 쉬는 것처럼 쉬니 기운이 나서 아이들 간식도 챙겨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넬 여유도 생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챙기고 돌아보게 된다. 야간 보모 툴리는 마를로를 찾아 온 첫째 밤, 나는 아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을 돌보기 위해서 왔어요, 라고 말한다. 그렇다. 보모는 사실 아이가 아닌 엄마에게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엄마 마를로에게 아이들은 금세 크니 잠시만 견디세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전을 보노라면,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만은 아닌 듯싶다. 미친 듯 체력을 불태우며 수유기를 지나 학교에 갈 정도로 아이를 키우고 나면 과연 ‘나’가 돌아올까? 아이들로 북적이던 시간이 아이가 빠져나가면 고스란히 나의 것이 되어 줄까? 도리스 레싱이나 오정희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 대답은 아니라는 것처럼 다가온다.

 

오정희의 소설 <옛우물>에도 사는 집에서 좀 떨어진 방에서 자기만의 짬을 가지는 한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 45살 생일을 맞게 된 여성은 그 떨어진 예성 아파트에 가서 곧 허물어진 연당집을 내려다본다. 바보 아홉 명, 당상관 다섯 명이 태어났다는 연당집은 바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의 내면, 젊음과 욕망의 결과물일 테다. 젊음과 욕망은 바보 같은 짓 아홉 개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당상관처럼 자랑스러운 결과도 다섯쯤은 만들어 낸다. 그렇게 깊은 자기의 내면은 나만 혼자 있을 수 있는, 예성 아파트에 가서야 보인다. 19호실에 가서야 볼 수 있는 자기 자신이 있는 것이다.

 

영화 <툴리>의 결말에는 반전이 숨어 있다. 그 반전을 보고 있노라면, 결국 출산과 육아, 결혼과 가정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가장 상처 입는 것은 엄마, 아내가 아니라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 툴리는 힘들어하는 마를로에게 지금 당신의 모습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미래의 모습이 아니냐고 묻는다. 둔감하지만 착한 남편, 귀여운 세 남매. 브루클린의 옥탑방에 세들어 살 땐, 그토록 간절히 꿈꾸었던 미래의 모습이 바로 지금 아니냐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아내에게도 19호실과 예성 아파트는 필요하다. 그 무엇이라는 수식어를 다 뗀, 익명의 존재가 되어 나를 완전히 놓고 그래서 나만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 이 공간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트르슈카 인형처럼 나를 벗기고 벗겨 마침내 드러나는 작은 나, 50대에서 40대, 30대, 20대, 10대의 나.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나와 만나는 과정. 마를로나 수전과 같은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이나 무관심, 용서가 아니라 이해이다. 그녀에게는 다만 이해가 필요할 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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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뜨거운 국물 힘으로 버틴다고 한다. ‘밥심’ 다음으로 많이 쓰는 상징이다. 뜨거운 국에 밥 한 그릇 훌훌 뚝딱 말아먹고, 식의 표현이 흔하다. 노동하는 음식, 간편식의 골자를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 식생활에서는 국과 국밥의 역사가 그랬다. 국밥의 대표격인 설렁탕이나 곰탕은 싸지 않았지만, 속이 든든하고 오래 허기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고깃국이었기 때문이다. 국밥이 노동 음식이었다는 근거는 토렴을 든다. 밥을 말아내어 들이마시듯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토렴은 밥알의 온도를 적당하게 해주는 기술이면서 동시에 식사 속도를 높여주어서 환영받았다는 뜻이다. 전기보온밥솥이 없던 시대에 토렴은 인간이 짜낼 수 있는 지혜였다. 특히 한국처럼 대륙성의 건조하고 추운 기후에서는 더욱 필요한 기술이었을 것이다. 토렴한 국밥을 먹으면서 우리 선조가 버텨온 세월이 얼마나 길었을까.

 

 

고기에 대한 열망은 기록이 존재하는 역사시대부터 수없이 등장한다. 수천년 동안 기근이 이어지다가 불과 30여년 전부터 고기 풍요의 대혁명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간혹 값이 뛰는 채소보다 못한 고기 신세라는 말이 나온 것은 근자의 일이다. 미국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충분한 양의 사료, 사육 기술의 고급화, 수입육의 대량 공급으로 이제는 고기 자체에 대한 기근은 더 이상 없다. 설렁탕과 곰탕의 주재료인 소고기의 대체품인 닭과 돼지고기의 공급량이 넘치는 것도 그 영향이다.

 

고기를 구워 먹지 못하고 탕으로 내어 먹는 것을 자조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었다. 국밥을 서구의 스테이크에 비교해서 생기는 일이다. 소고기 1㎏을 국밥으로 끓이면 10명이 먹고, 스테이크로는 셋이서 먹는다는 수학적 계산을 해보면 선명해진다. 근대 도입기에 이 땅에 들어온 유럽인들이 스테이크 같은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보며 시작된 충격이다.

하지만 유럽도 오랜 기간 우리와 같은 국물 문화를 거쳤다. 유럽도 한때 고기 공급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절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던 까닭이다. 산업혁명과 사육 기술의 발달이 고기를 국물로 먹던 시대에서 ‘덩어리’의 시대로 진전시켰다. 위생과 동물 예방의학이 발전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여기에다 식민지 경영으로 부를 쌓으면서 고기 공급을 늘릴 수 있었다.

 

유럽인들이 먹는 수프라는 음식은 국밥처럼 적은 고기와 재료를 나눠 먹으려는 열망에서 시작된 음식이다.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수프는 고급 음식이라고 생각했던 일본과 한국의 기록은 그런 면에서 살짝 코믹한 구석이 있다. 경양식집에서 팔던 밀가루로 만든 싸구려 수프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우리의 추억에는 그런 흥미로운 역사가 숨어 있는 셈이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시내 국밥집이 바글바글해진다. 거칠어진 속을 위로하는 데에는 뜨거운 국물이 최고겠지. 어쩌면 추운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도 같다. 세상 일이 뭐랄까, ‘속 시원히’ 풀리지 않는 게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헛헛한 일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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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방영된 tvN 드라마 <화유기>는 고대소설 서유기를 모티브로 요괴 손오공(이승기)과 삼장법사의 소명을 타고난 진선미(오연서)의 사랑을 담은 판타지 드라마였다. 현재 방영 중인 tvN 월화드라마 <계룡선녀전>은 선녀와 나무꾼 설화를 재해석, 날개옷을 잃어 천계로 돌아가지 못한 채 남편의 환생을 기다리는 선녀 선옥남(고두심·문채원)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처럼 이계의 존재와 인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가 최근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2010년대 이후 로맨스 드라마 장르의 최고 흥행작들이라 할 수 있는 SBS <별에서 온 그대>와 tvN <도깨비>도 이 계열에 속한다. 전자는 400년 전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김수현)과 한류 스타 천송이(전지현)의, 후자는 도깨비(공유)와 도깨비 신부의 운명을 지닌 지은탁(김고은)의 사랑을 그렸다. 개성적인 캐릭터와 색다른 볼거리를 내세운 장르물의 인기와 컴퓨터그래픽 기술의 진화 등이 이 같은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 유행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선녀와 나무꾼 설화를 재해석한 tvN 드라마 <계룡선녀전>.

 

눈에 띄는 것은 이들 드라마 안에서 남녀 주인공을 묘사하는 대조적 방식이다. 주인공 유형만 봐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남자 주인공이 인간보다 진화한 문명의 외계인(<별에서 온 그대>), 악귀와 맞서 조선을 구하는 뱀파이어(<밤을 걷는 선비>), 불멸의 반신 도깨비(<도깨비>), 악귀를 때려잡는 최강 요괴(<화유기>) 등으로 그려질 때, 여자 주인공은 인간이 되고 싶은 구미호(<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기억을 잃은 원귀(<아랑사또전>), 인간이 된 천사(<하이스쿨 러브온>), 육지에서 만난 첫 남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다를 떠난 인어(<푸른 바다의 전설>), 699년 동안이나 남편을 기다리는 선녀(<계룡선녀전>) 등으로 등장한다.

 

같은 이계의 존재인데도, 남녀의 캐릭터 묘사는 이렇게나 다르다. 남자 주인공은 대부분 악에 맞서 연인과 타인들을 구하는 슈퍼히어로적 능력이 강조되는 반면, 여자 주인공은 특별한 능력보다는 신비로운 외모와 순수함, 그리고 남주인공을 위한 자기희생적 성격이 부각된다. 트렌디한 판타지 장르를 표방하면서도, 강한 구원자로서의 남성과 그의 보호를 받는 수동적인 여성을 내세우는 전통적인 로맨스 관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제일 두드러지는 문제는 남자 주인공이 인간 문명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그것을 초월하기까지 하는 존재일 때, 여자 주인공은 인간 문명조차 따라잡지 못하는 퇴행적 존재로 그려진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2010년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에서 오랜 봉인으로부터 풀려나 남주인공 대웅(이승기)의 집에 살게 된 구미호(신민아)의 행동은 5세 아이 수준에 머문다. 미호는 청소 솔로 머리를 빗고 치약과 비누 거품을 맛있게 먹는 황당한 행동을 잇달아 하고, 대웅은 그녀에게 인간 세상에 적응하는 법을 가르친다. 같은 작가가 쓴 <화유기>에서 요괴 오공이 구미호처럼 오랜 봉인에서 풀려났으나 그녀와 반대로 인간 세상에 천연덕스럽게 적응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5년 뒤에 방영된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은 더욱 심각하다. 어우야담 속 인어 설화를 각색한 이 드라마에서 원래 도도하고 똑똑한 인어였다는 심청(전지현)은 인간 세상에 나오자 스파게티를 손으로 집어 먹고 휴지를 뽑아 날리며 즐거워하는 등 새끼 고양이처럼 행동한다. 남주인공 준재(이민호)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길거리에 쭈그려 앉아 기다리는 모습도 영락없는 유기견이다. 같은 작가의 전작 <별에서 온 그대>에서 외계인 도민준이 400년간 신분을 계속해서 바꿔가며 완벽하게 인간 사회에 섞여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현재 방영 중인 <계룡선녀전>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견된다. 북두칠성 제1성 탐랑성을 관장하는 선녀였던 주인공 선옥남은 날개옷을 잃고 나무꾼의 아내로 살다가 그가 죽은 뒤에는 남편의 환생을 기다리며 선녀다방 바리스타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나마 웹툰 원작에서는 신성한 존재로서 선녀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로맨스 드라마로 옮겨지면서 그러한 의미는 희미해지고 남편을 찾아 계룡산 깊은 산속에서 나와 21세기 서울과 처음 마주한 선옥남의 엉뚱하고 천진한 모습이 더 두드러진다. 남주인공 정이현(윤현민)과의 약속을 앞두고 미용실에 가서 청포물로 머리를 감겨달라는 모습이나, 극장에서 영화 <킹콩>을 보면서 스크린 속 인물들을 향해 진지하게 말 거는 모습 등이 대표적이다.

 

요컨대 서양은 문명, 동양은 비문명으로 타자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작동방식이 남녀 구도에 가장 뚜렷하게 적용되는 장르가 이계 주인공 판타지 멜로드라마다. 똑같이 초월적 존재임에도 남주인공의 능력은 몇 배로 과장되고, 여주인공의 능력은 훨씬 축소되기 때문이다.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이 조선시대부터 400년 동안 쌓아온 지식을 활용하고 현재에는 대학교수로서 인간들을 가르치는 것과 달리, 고려시대부터 살아온 <계룡선녀전>의 선옥남은 ‘머리에 꽃 단’ 할머니(이용녀)가 옥남을 보고 되레 정신 나갔다고 여길 만큼 문명과 동떨어진 존재로 묘사되는 걸 보면 문제가 한층 뚜렷하게 드러난다. 다른 세계를 상상하면서도, 여성의 존재만큼은 현실의 중력에 발 묶여 있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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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는 늘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다. 영화계뿐만은 아닐 것이다. 문학도, TV 예능도 심지어 정치계도 새로운 것을 찾는다. 새로운 시도의 출현에 대해 우리는 기꺼이 반길 준비도 되어 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상엔 새로운 출현이라는 게 얼마나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몇 편의 영화들만 해도 그렇다.

 

미국에서 흥행을 한 뒤 아시아권에 뒤늦게 개봉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Crazy rich Asians)>을 보자. 영화의 할리우드 흥행에 아시아가 흥분했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아시아계라는 점에서 말이다. 수선스럽다고만 하기도 어려운 게 주·조연 모두 아시아계 배우로 캐스팅되어 미국 주류 영화로 개봉한 작품이 1995년 <조이 럭 클럽> 이후 무려 23년 만이다. 그동안 아시아계 배우란 미국 영화에서 감초 혹은 인종적 편견을 강화하는 역할 정도에 그쳤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한 장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남자 친구의 고향인 싱가포르에 가게 된 연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평범한 중국인인 줄 알았던 남자 친구는 싱가포르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미치도록 부자인 집안의 아들이었고 그런 집안임을 티라도 내듯이 엄격한 가풍과 유교적 질서를 지키고 살아간다. 겉은 중국인이지만 완전히 미국식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29세 여성 레이첼은 이래저래 싱가포르에서는 부적격 신부로 외면당한다. 특히 장래 시어머니감이 심각하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 변호사였던 그녀는 ‘영’가문의 안주인이 되기 위해 자신의 경력을 단숨에 던지고 집안일에 매진했다고 말하니 말이다.

 

대략의 줄거리를 놓고 보자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줄거리는 우리네 안방에서 몇십 년째 방영 중인 가족드라마의 꼴과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의 흥행과 달리 한국에서는 이런 영화가 왜 그렇게 흥행했지라며 주저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서 멀지 않다. 이런 이야기, 이런 주인공은 우리에겐 물리도록 익숙한 진부한 것이니 말이다.

 

영화적으로 따져보자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할리우드의 스크루볼 코미디의 원형을 복원하고 있다. 상대적 격차가 큰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사회경제적 갈등은 두 사람의 정서적 교감과 인간적 이해력으로 해결된다. 처음엔 둘 사이를 방해자였던 사람이 마지막에 가서 적극적 조력자로 바뀌는 것도 스크루볼 코미디의 전형을 따라간다. 말하자면 미국, 할리우드의 관객들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통해 1934년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에서 보았던 단순하고도 명쾌했던 로맨틱 코미디의 비전을 다시 보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백인 미국인에서 동양인 미국인으로 바뀌었을 뿐, 줄거리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달라진 게 없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2018년 넷플릭스 최고의 오리지널 영화로도 불리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에서도 발견된다. 짝사랑했던 남자들에게 썼던 비밀 편지가 어느 날 갑자기 당사자들에게 발송된다. 이 발송된 편지로 계약 연애가 시작되고, 그렇게 연인인 척하다 보더니 진짜 감정이 생기고 연인이 된다. 오해, 계약, 갈등, 사랑의 재발견으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정말이지 비슷한 이야기를 찾자면 도서관 하나도 모자랄 정도로 흔하다.

 

하지만 이 두 이야기는 모두 오히려 익숙하기 때문에 더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도 바꿔 말할 수 있다. 올해 네 번째 리메이크작이 선보인 <스타 이즈 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재능을 지녔으나 아직 세상이 발견하지 못했던 원석이 사랑을 알고 스타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반세기 넘어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그려진다. 세상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다양한 이야기가 있지만 뜯어보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고 고만고만하다. 고민의 양상도 그렇고 행복의 순간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사는 넓고 다양하다지만 바닥까지 들여다보면 그렇게 다를 것도 없다. 우리가 장르라고 부른 이야기가 틀이 정해져 있고, 공식이 뻔한데도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인류는 어떤 서사적 유전자, DNA를 공유하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16세기에 썼던 <로미오와 줄리엣>은 여전히 사랑 이야기의 고전으로 사랑받고, 재창조된다. 극복하지 못하는 장애물 앞에서 목숨을 잃는 두 연인은 죽음으로 봉인된 영원한 사랑의 신화로 변주된다. 죽음이 지켜낸 사랑의 불멸성은 500년이 지나도 여전히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45세에 세상을 떠난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를 담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여전히 청중을 움직이고, 아바의 음악이 <맘마미아>를 통해 재창조될 수 있는 것도 이 유전자 덕분이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세월을 건너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감정의 근원이 우리에게 있는 셈이다.

 

오래되었다고 나쁜 것은 아니다. 새롭다고 늘 옳은 것도 아니다. 그 익숙함 가운데서 약간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새로움일 테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오래된 것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결실이기도 하다. 오래된 것을 공부하지 않다보면, 아주 오래된 것을 새것이라 내놓는 해프닝도 생긴다. 인류가 공유한 서사적 유전자를 공부하는 것, 그 지도 아래 놓인 인간의 깊은 속내를 탐구하는 길, 그게 바로 오래된 것을 공부하는 보람이 아닐까?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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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외식업을 지탱하는 조미료 중 하나는 공장에서 생산한 산분해 간장이다. 공장에서 만들었다고 달리 큰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더 나은 간장을 찾으려는 이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업소용 재료를 파는 대형 시장에 가보면, 조선간장이나 양조간장은 찬밥이다. 값이 비싸다는 이유에서다. 재료비가 올라 힘들 식당 사정은 모르지 않되, 간장에 대한 이해가 애초부터 부족하거나 전무하다. 오래된 ‘노포’ 식당의 다수도 다르지 않다. 양조간장이 소량 들어간 이른바 ‘산분해 간장’을 거의 100% 쓴다. 오래된 노포의 맛, 고향의 맛이라는 근저가 실은 산분해 간장이라면 얼마나 씁쓸한 일인가. 원가 분석을 해봐도, 양조간장(우리가 전통적으로 만들어 쓰는 조선간장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공장에서 양조한 간장)을 쓴다고 해서 주름이 갈 정도는 아니다. 요는, 상대적으로 좋은 간장을 쓰려는 보편적 접근이 적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는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한식요리사 자격증 시험에는 양념 배합 공식이 있는데, 진간장이 기본이다. 당대의 입맛이 대량생산한 공장 간장에 길들여 있기는 하지만, 이른바 진간장이 볶음이나 조림 등에 표준 간장이다. 학원에서도 그리 가르친다. 조선간장을 요리에 쓰는 자격증 학원은 애초에 없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진간장이란 원래 고급간장인데, 양조간장에 산분해 간장을 섞은 걸 상품화하면서 이름을 가져다 썼다. 악화가 양화를 밀어냈다고나 할까.

 

조선간장을 마치 오래되고 박제된 간장 정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간편하고 싼, 대량생산형 공장 간장이 있는데 굳이 맛이 짜고 용도가 제한된 조선간장을 뭐하러 먹느냐는 것이다. 최근에는 조선간장을 중심으로 해서 볶음이나 무침, 조림 등에도 다채롭게 쓸 수 있는 물건이 많이 나오고 있다. 염도도 낮아지고 있다. 염도를 낮춰서 냉장 발효하는 간장도 나온다. 시장의 편견과 유통 구조의 벽에 부딪혀서 좌절할 뿐이다.

 

현재의 한국 간장 문화는 일제강점기에 큰 변화가 있었다. 일본이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수 물자의 보급이 절실했고, 산분해 간장은 그 대안이 됐다. 일본 문화가 한국에 이식되면서 전통 간장의 입지가 줄어든 것도 한 이유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우리 콩을 온전히 쓸 수 있게 되자 조선간장은 개별 가정에서 부활한다. 물론 이때 시중에서는 적산 기술로 만든 일본식 간장도 여전히 팔렸고, 6·25전쟁 후에 본격적으로 시장을 넓혀 간다. 흥미로운 건 화교들도 간장·된장 시장에서 활약했다는 사실. 지금 우리가 먹는 짜장면은 된장이 기원이고, 이런 장을 만드는 화교 공장이 된장과 간장을 한국식 식당에도 많이 공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전쟁은 장의 부족을 불러왔고, 대량생산되는 공장의 간장이 크게 퍼졌다. 이후에도 개량형 된장과 간장을 정부 차원에서 적극 밀면서 조선간장은 더욱 위축되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조선간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리고 있다. 한식의 ‘진짜 맛’은 어쩌면 핵심 조미료인 간장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조선간장은 아직 안 죽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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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TV 수목드라마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MBC <내 뒤에 테리우스>는 은둔 중인 전직 국가정보원 요원 이야기로 시작한다. 코드네임 테리우스(소지섭)는 과거 남북이 비밀리에 합의한 망명 작전을 수행하던 중 정체 모를 저격수에 의해 정보원을 잃고 자신 또한 내부 첩자 혐의로 쫓기게 된다. 3년 뒤, 김본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남자로 위장해 홀로 저격 사건을 조사하던 그는 자신이 추적 중인 킬러가 무슨 이유에선지 앞집 여자 고애린(정인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김본은 킬러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베이비시터를 자원해 고애린에게 접근한다.

 

전설의 블랙 요원이 여섯 살 쌍둥이 남매의 베이비시터에 도전한다는 설정은 단순한 코미디를 넘어 국정원의 위상이 바닥으로 추락한 현실에 대한 풍자적 성격을 띠고 있어 꽤 흥미롭다. 과거 드라마 속에서 미화된 국정원 묘사와 비교해보면 더 온도차가 뚜렷하다. 공포의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 시절을 거쳐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개명한 국정원은 정치적 중립화라는 시대적 요구가 거세지면서 이미지 변신을 위해 대중문화를 적극 공략했다.

 

MBC <내 뒤에 테리우스>의 한 장면.

 

2005년 영화 <태풍>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매체에 문호를 개방했고, 2007년에는 드라마 최초로 MBC <에어시티>에 촬영을 지원했다. <에어시티>에서 인천공항 담당 요원으로 등장한 이정재와 같은 해 방영한 MBC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언더커버 요원으로 출연한 이준기의 멋진 모습은 국정원에 미국드라마 속 CIA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첩보 조직 이미지를 심는 데 한몫했다.

 

국정원 판타지는 2009년 KBS가 방영한 <아이리스>에서 극에 달한다. 국정원을 모델로 한 국가안전국 소속 요원들이 한반도 핵 테러를 막기 위해 활약하는 이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35%를 넘어서며 화제를 일으켰고, 국정원은 이병헌, 김태희 등 주연배우 5인에게 명예요원증을 선사하기까지 했다. 같은 해 국정원 요원들을 주인공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7급 공무원>이 4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했고, 2010년 정우성, 수애가 국정원 특수요원으로 출연한 SBS 드라마 <아테나: 전쟁의 여신>이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이 같은 판타지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드라마 속 국정원에 대한 판타지가 절정을 향해 가던 시기에 정작 현실 속의 국정원은 다시 과거로 퇴행했다는 단서들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10년 프랭크 라뤼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 미행 탄로 사건, 2011년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 잠입 발각 사건,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댓글 여론조작과 국정원 직원 감금 사건, 2013년 진보 성향 시민단체 간부를 미행하다 발각된 사건 등 허술한 작전 수행력과 불법 정치 개입이 들통난 굵직한 사례가 줄을 이었다.

 

자연스럽게 드라마 속 국정원 판타지도 힘을 잃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전작의 영광을 이어가려던 2013년 KBS <아이리스2>와 리메이크 드라마인 MBC <7급 공무원>은 동시간대에 경쟁을 펼쳤으나 국정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SBS <그 겨울, 바람이 분다>가 시청률 1위를 가져갔다. 이후 한동안 TV 드라마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국정원 캐릭터는 2017년 미국드라마를 리메이크한 tvN <크리미널 마인드>에 다시 등장했으나 그 결과는 더욱 처참했다. 2016년 말 국정농단 사건 이후 대표적인 ‘적폐 집단’으로 꼽힌 국정원을 액션 영웅물의 무대로 소비하려는 시청자는 거의 없었다.

 

<내 뒤에 테리우스>는 이 같은 시대착오적 전철을 밟지 않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오히려 시대적 맥락을 영리하게 이용해 그동안의 국정원 판타지를 코미디로 비튼다. 드라마 속에서 국정원은 대놓고 “온 국민으로부터 매일 욕먹는 게 일인” 집단으로 묘사된다. 주인공 김본은 멋지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전설이고 그의 특수한 능력은 고된 육아에는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여섯 살 쌍둥이 남매의 체력을 따라잡지 못하고, 갑자기 초저녁만 되면 왜 잠이 쏟아지는지 어리둥절해하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국정원의 무능함이 그들보다 뛰어난 정보력을 지닌 킹캐슬 아파트 아줌마 정보국, 일명 KSI의 비교를 통해 두드러질 때다. 3회에서 국정원의 김본 추격전과 KSI의 쌍둥이 남매 유괴 저지 작전을 병행편집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국정원은 화려한 장비와 기술과 대대적 인력을 동원하고도 김본을 잡는 데 실패하지만, KSI는 주부들의 단체 메신저방을 활용해 결국 유괴범을 찾아낸다. 국정원 요원들이 결정적 고비마다 현장에 나타나 활약하는 KSI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국정원이 그들만의 게임을 벌이는 동안 민생과 얼마나 멀어졌는지에 관한 풍자이기도 하다.

 

국정원 소재 작품은 내년에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장르물로는 첩보가 여전히 매력적인 소재인 데다 급변하는 남북관계로 인해 그 중요성도 한층 커졌기 때문이다.

 

현재 이승기, 수지 주연의 <배가본드>, 제작비 250억원대 대작으로 알려진 <프로메테우스> 등이 제작 중이다. <내 뒤에 테리우스>가 국정원 판타지를 역으로 이용해 성공했다면,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는 다른 첩보물들은 어떤 전략을 선택할지 궁금해진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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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잡식동물이다. 그러니 무엇이든 먹는다. 먹는 행위에 대해 논란도 많다. 개고기며, 고래고기 섭취 같은 것들이다. 개별적인 집단의 오랜 문화와 새롭게 동물을 보는 시선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동물 윤리에 대한 논의도 요즘 크게 확장되고 있다. 유럽의 몇 나라는 랍스터를 산 채로 삶는 조리법을 금지했다고 한다. 랍스터보다 훨씬 더 지능이 높은 문어는 어쩌나 싶다. 문어 연구는 많이 진행되어 이 종이 아주 영특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수산시장에 가면 문어들이 답답한 망에 갇혀 수족관에 들어 있다. 그들의 지능이라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문어를 삶을 때 대개는 산 채로 넣는다. 그것이 표준 요리법이다. 아마 문어와 비슷한 낙지도 지능이 높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산낙지 투하’라는 검색어를 넣어보면, 방송 화면과 개인 블로그를 수도 없이 발견할 수 있다. 몸부림치는 산낙지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무엇이 선이고 옳은 일인지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더라도,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투하’라니. 이런 말은 군사용어 같다. 원자폭탄에 뒤따르는 말이 바로 이 단어가 아닌가.

 

 

꽃게를 삶는 방법도 그렇다. 뒤집어서 내장이 흐르지 않게 산 채로 넣으라고 한다. 가장 맛있게 삶는 법이라고 한다. 꽃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미리 죽여서 넣으면 맛이 없어지는지 실험이나 연구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그저 무의식중에, 아니 애초에 의식하지 않고 그런 요리법을 믿어왔다. 한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차제에 동물을 요리할 때 어떤 가이드라인이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도 많다. 현장에서 수많은 재료를 다루고 요리하는 요리사들에겐 이런 원칙이 필요하다. 재료를 죽이는 것이 요리사의 숙명인데, 경우에 따라 심리적 부담을 안는다.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그런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될 듯하다. 확장하면, 가축 도살에도 미친다. 요리사는 대개 고작(?) 해산물을 죽이지만, 그들이 쓰는 재료 중 하나인 고기는 도살장에서 도축된다. 그 일에 종사하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고,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을 그들이 대신해주고 있는 셈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가축 도살에 동물 윤리의 세세한 감정이 개입되어 있지는 않다. 건조한 룰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아직 논의하려고 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외면하고 있다. 효율이 우선되고 있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동물 윤리와 복지에 대한 촘촘한 규정이 만들어질수록 비용이 늘어난다. 그 비용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지에만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 있다. 한마디로 고기값이 오를 텐데 그래도 괜찮은가 하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윤리에도 돈이 드는 격인데, 다양한 논의가 있어야 이런 부담은 낮추면서 잡는 이나 먹는 이나 심리적으로 부담을 줄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풀어놓고 본격적인 얘기도 하기 전에 경제논리만 들이대서야 언제 인간의 일이 나아지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잡식동물이고, 먹을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건, 먹는 재료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선택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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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보백보’라는 말이 있다. 오십 보나 백 보나 별반 차이 없다는 의미다. 도토리 키재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큰 차이가 없으니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더 보란 뜻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비아냥으로 쓰인다. 뭐 대단한 차이가 있다고 호들갑이냐, 오십보백보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문화에 있어서 오십 보 차이는 엄청나다. 오십 보가 뭐냐, 단 열 걸음 차도 크다. 그 약간의 차이를 위해 다들 노력하고, 그렇게 한 오십 보쯤 먼저 나가는 사람을 천재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렇게 오십 보 내딛은 사람들이 문화의 코드를 만들어 낸다. 뒤샹이 처음으로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았을 때, 앤디 워홀이 수프 깡통을 그려내기 시작했을 때, 그게 바로 오십 걸음의 차이가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오십 보와 백 보의 차이에 민감해야 한다. 차이를 발견하면 그 점을 주목해 주는 게 소비자의 의무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너의 결혼식>과 <암수살인>은 약간 다른 발걸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영화 <암수살인>의 한 장면.

 

 

<너의 결혼식>은 멜로드라마이다. 두 남녀가 만나 호감을 느끼며 우여곡절을 겪다가 사랑하고 헤어진다. 만약 우여곡절을 겪다가 사랑을 이루는 데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아주 평범한 로맨스 영화로 남을 뻔했다. 하지만, <너의 결혼식>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헤어짐의 과정까지 보여준다. 이 헤어짐의 과정 속에서 영화는 로맨스에서는 멀어지지만 좀 더 현실적인 세계와 만난다. 성사가 아니라 이별이니 굳이 장르적으로 따지자면 로맨스가 아니라 멜로드라마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너의 결혼식>이 장애물을 두고 본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헤어질 수밖에 없는 뻔한 멜로드라마도 아니란 사실이다. <너의 결혼식>은 로맨스의 관습에서도 오십 보 더 나아가고 멜로드라마의 공식에서도 오십 보 나아간다. 그러므로 새로운 로맨스, 다른 멜로드라마로 차별화되는 것이다.

 

그 차별화는 바로 현실성에 있다. <너의 결혼식>은 전형적인 첫사랑 서사라고 말할 수 있다. <클래식> <건축학개론>과 같은 첫사랑 서사 말이다. 고등학생 황우연(김영광)은 전학 온 여학생 환승희(박보영)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우정과 사랑 사이 어디에서 감정을 쌓아가던 두 사람은 승희의 갑작스러운 이사와 그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복잡한 가정환경으로 멀어진다. 대학을 가고, 재회하게 되는 과정들은 코믹한 톤으로 시종일관 가볍게 흘러간다. 무거워지는 것은 대학 졸업 이후이다.

 

대개의 첫사랑 영화는 첫사랑의 순간과 현실을 점프 컷하듯 비약해서 그 차이와 변화를 강조한다. 순결했던 아이의 타락, 순진했던 아이의 환멸 과정에서 아이는 어른이 된다. 여기서 타락은 여자의 몫이고 성장은 대개 남자의 몫이다. <말죽거리잔혹사>에서 권상우가 어른이 되는 순간, 한가인은 어느새 삶에 찌들어 빛을 잃었고, <건축학개론>의 서연 역시 말똥말똥한 눈의 수지가 만취에 욕을 내뱉는 한가인으로 바뀐다.

 

하지만 <너의 결혼식>에서 바뀐 것은 오히려 남자 쪽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였지만, 그녀만 있으면 다 해결될 것 같은 세상에 다치고 패배하자 비겁하게 첫사랑과 결별하는 것이다. 그건 그녀, 환승희와의 결별이라기보다는 그녀를 사랑했던 자기 자신과의 이별에 더 가깝다.

 

여자가 변해서 남자가 성장한다는 식이 아니라 남자가 변해서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이 약간의 변화는 첫사랑의 오래된 관습을 무너뜨린다. 세상이 아니라 내가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오십 보의 차이에서 영화 <너의 결혼식>은 꽤나 어른스러운 멜로드라마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변화는 <암수살인>에서도 발견된다. <암수살인>은 드러나지 않다보니 집계되지 않는 범죄에 대한 이야기다.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는 범죄, 말하자면 영화 <버닝>의 해미(전종서)가 사라졌지만 종수(유아인) 외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상황과 비슷하다. <암수살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오십 보 차이는 바로 형사의 변화다. 대개 한국형 범죄영화에서 형사는 생활고에 찌들어 있거나 비리에 무감해져 있기 일쑤였다. 아니면 정반대로 통제 불능의 정의감으로 사고뭉치 취급을 받는 인물들이 많았다. <공공의 적>의 설경구나 <끝까지 간다>의 이선균, <VIP>의 김명민 캐릭터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암수살인>의 주인공 형사는 일단 가난하지 않다. 운 좋게 부자 아버지와 형을 둔 덕에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편이다. 고급 세단을 소유하고, 취미로 골프를 친다.

 

무엇보다 다 자비로 충당한다. 어딘가에서 돈을 뜯는다거나 횡령하는 게 아니라 당당히 자기 돈으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이 윤택함이 사건 수사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온다. 고과나 승진이 아니라 순전히 범죄에 대한 알 권리와 형사로서의 도덕적 의무, 인간으로서의 윤리적 책임에 의해 움직이는 유형의 인물이 태어난 것이다. 지금껏,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희한한 인물이 탄생한 것이다.

 

이 오십 보 차이로 인해 <암수살인>의 수사극은 완전히 달라진다.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형 주인공이나 그것을 추적해 가는 과정은 사실 기존의 수사극과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주인공의 약간의 차이로 인해 영화는 달라진다. 이 오십 보 차이가 변화하기 어려운 범죄영화의 관습에 또 어떤 차별성을 유발할지 기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십 보 백 보는 차이가 없는 게 아니라 오십 보만큼 차이난다. 오십 보가 아니라 십 보의 차이도 중요하다. 그 약간의 차이가 삶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이건 비단 영화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오십 보 나은 사람의 그 오십 보를 인정해줘야 한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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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어느 정부 때 환경부 장관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가 고른 장소는 놀랍게도 한 햄버거 체인점이었다. 그와 점심을 먹고 나니 쟁반 위에 온갖 일회용품이 가득했다. 그를 만나 나눈 얘기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쟁반 위에 쌓여 있던 알록달록한 쓰레기는 이미지로 또렷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일회용품을 거침없이 쓴다. 심리적으로 찜찜함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래도 되는 거야? 며칠 전에 한 행사에 갔더니 도시락을 나눠줬다. 먹고 나니 역시 한 보따리의 일회용품들이 남았다. 일회용 수저, 그 포장지, 국물을 담는 그릇, 반찬도 각기 다른 일회용 그릇에 담겨져 최종적으로 역시 일회용품인 ‘틀’ 안에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을 모두 담는 별도의 비닐포장지까지. 거기에다 페트병에 담긴 ‘생수’도 더해지고 말이다. 두 사람이 다 먹고 제공된 비닐에 담아보니, 쌀 한말들이 정도의 부피가 생겼다. 우리 마음에도 그만큼의 부담감이 쌓여버렸다.

 

 

일회용품은 번다한 일상을 간편하게 해주지만, 반드시 두 가지 후유증을 남긴다. 물론 하나는 환경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죄책감이다. 민감한 사람들은 이런 문제로 심리적 통증까지 겪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래도 되는 거야?’

 

지난 여러 정부에서 일회용품 금지 법률을 ‘규제 완화’라는 명분으로 풀어버렸다. 일상적으로 들르는 커피숍에서 일회용품에 음료를 담아 소비했다. 그렇게 10여 년간 버린 쓰레기가 얼마이며, 일회용품을 생산하기 위해 쓴 에너지는 또 어느 정도이겠으며, 다시 재활용하기 위해 쓰는 비용과 환경오염 문제는 얼마나 심각했을지 가늠키조차 어렵다. 일회용품 문제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수거와 재활용을 잘해도 후유증이 남는다는 사실이다. 재활용을 100% 할 수도 없고, 하더라도 열처리를 해야 하므로 환경오염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요즘 미래 세대에 주는 부담으로 꼽는 지구 기상 대이변의 주범인 ‘온실가스’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런 우려로 다시 일회용품 규제가 시작됐다. 환영하는 이들도,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작 일선의 커피숍에서 머그잔과 유리잔을 써보니 반대하는 이들의 우려와는 달리 ‘아무 문제 없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더운 커피는 환경호르몬이 녹아 나오니 어쩌니 염려를 벗어나서 더 맛있게 느껴졌다. 아이스커피는 투명한 유리잔이 주는 촉감까지 상쾌해졌다. 혹시 스스로에게 묻게 되지 않던가. 아니, 그동안 왜 그렇게 일회용품을 써야 했지? 아무 문제 없잖아?

 

사실 지구상에서 가장 일회용품을 많이 쓰는 나라는 미국이다. 게다가 재활용률은 형편없이 낮다. 우리는 이른바 경제발전국 중에서 일회용품 사용률은 낮고, 재활용률은 높다. 우리가 아무리 일회용품 사용을 줄여도 거대 에너지 사용국인 미국이 시큰둥하면 지구 환경 악화를 막는 데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것이 우리의 진짜 고민이다.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어쨌든 머그잔에 담긴 커피는 더 맛있으니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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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스릴러 드라마 속 악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 한국드라마에서 범죄스릴러는 우리 시대의 악을 꾸준히 탐구하면서 대세로 떠오른 장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배경으로 사회 곳곳의 의문의 죽음과 그 원인을 해부한 김은희 작가의 <싸인>(SBS, 2011), 2012년 거대권력이 은폐한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박경수 작가의 <추적자>(SBS, 2012)의 성공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 이전까지 주로 기이한 연쇄살인범과 대결을 벌이던 범죄스릴러는 <싸인>과 <추적자> 이후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극적 성격이 강화됐다. “세상이 미쳐 날뛰는데 내가 어떻게 진정을 합니까”라는 <추적자>의 유명한 대사처럼, 검은 커넥션을 통해 지배력을 점점 더 공고히 하는 기득권층을 향한 분노가 사회파 범죄스릴러 붐을 불러왔다.

 

영매와 구마 사제가 주인공인 OCN 드라마 <손 the guest>.

 

 

그런데 최근 범죄스릴러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초월적 악의 등장이다. 악귀, 빙의, 주술 등과 같은 오컬트나 사이비 종교가 자주 소재로 다뤄지고 있다. 귀신 보는 형사의 수사극 <처용>(OCN, 2014~2015), 생령과 퇴마사의 악귀 퇴치극 <싸우자 귀신아>(OCN, 2016), 사이비 종교 집단의 만행을 고발하는 <구해줘>(OCN, 2017), 신기 있는 형사가 과거의 집단학살 사건을 추적하는 <작은 신의 아이들>(OCN, 2018), 영매와 구마 사제가 주인공인 <손 the guest>(OCN, 2018), 유령 탐정과 무당 출신 부검의가 등장하는 <오늘의 탐정>(KBS, 2018) 등이 몇 년 사이에 쏟아져 나온 오컬트, 사이비 소재 드라마다. 원래대로라면 호러, 판타지적 소재를 범죄스릴러처럼 풀어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악령은 주로 가정폭력, 아동학대, 집단 따돌림, 성폭력 등과 같은 사회문제로부터 출몰하고, 초자연적 존재를 이용해 악행을 벌이는 권력 집단도 등장한다.

 

범죄스릴러에 초월적 악의 존재가 기승을 부리게 된 배경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앞서 나열한 대부분의 작품이 장르 전문 채널 OCN 드라마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장르물 진화의 한 결과다. 근래 들어 여러 장르적 요소를 한꺼번에 녹인 복합장르드라마가 유행하는 가운데 극적 소재를 넓히는 과정에서 호러, 오컬트처럼 기존에 별로 다뤄지지 않았던 매니악한 장르들까지 점점 다채롭게 뒤섞이고 있다. 올해 방영된 <작은 신의 아이들>은 과학 수사물에 샤머니즘을, <손 the guest>(이하 <손>)는 형사 수사물에 샤머니즘과 엑소시즘을, <오늘의 탐정>은 탐정 추리물에 샤머니즘, 언데드 소재까지 결합했다.

 

스릴러의 범죄 묘사가 갈수록 자극적으로 변하는 경향도 악령의 유행에 영향을 미쳤다. 다중인격 살인마,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넘어 악령의 등장은 초자연적 성격을 빌미로 더 잔혹한 범죄 묘사를 가능하게 했다. <손>과 <오늘의 탐정>의 첫 살인 장면이 공통적으로 으슥한 심야의 뒷골목이나 외떨어진 공간이 아니라 대낮에 많은 사람이 여가를 즐기는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벌어졌다는 점을 주목해보자. <오늘의 탐정>에서는 생령의 조종을 받은 레스토랑 직원이 생일 축하 행사가 벌어지는 테이블에서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목을 찌르는 장면이 그려졌다. <손>에서는 휴양지에서 가게 홍보 전단을 돌리다 악령에 빙의된 중년 여성이 전단지를 차갑게 내친 젊은 여성을 친구들과 함께 노는 해변에서 잔혹하게 살해했다.

 

더 주목할 만한 배경은 시대와의 연관성이다. 범죄스릴러 드라마의 악은 늘 동시대의 그늘을 대변했다.

 

사회파 범죄스릴러 유행의 배경에 부패한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면, 요즘의 오컬트 스릴러 붐 현상은 이른바 ‘탈진실의 시대’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옥스퍼드사전이 2016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면서 전지구적 화두로 급부상한 ‘탈진실 시대’는 개인의 감정과 신념이 객관적 사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상황을 말한다.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가 하는 문제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가가 중요해졌다. 이미 정부 기관이 나서서 가짜 뉴스를 유포하며 여론을 조작하고 주술 정치를 적극 실천한 정권을 경험한 우리나라에선 더 깊이 와닿는 화두다.

 

시대의 산물인 범죄를 탐구하는 스릴러가,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려진 시대에 보이지 않는 힘에 주목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범죄와 맞서 싸워야 하는 주인공들도 모두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손>의 주인공 윤화평(김동욱)은 종종 악령과 감응하고, 또 다른 주인공 최윤(김재욱) 역시 구마 사제의 특성상 “나쁜 것들을 접하니까 몸도 영혼도 점점 아파진다”는 경고를 받는다. 형사 강길영(정은채)은 범죄 피해자 가족이라는 아픔 때문에 범인에게 과도한 폭력을 행사한다. 그런가하면 <오늘의 탐정>의 주인공 이다일(최다니엘)은 귀신이 되어 점점 어둠의 힘에 가까워지고, 정여울(박은빈)은 생령을 없애기 위해 살인을 결심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주인공들의 이 같은 성격은 오히려 ‘탈진실 시대’의 악에 맞서는 효과적인 대처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보는 것이 쉽게 진실이라 믿는 태도가 ‘탈진실 시대’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오늘의 탐정>에서 악령 선우혜의 위험함을 경고하는 이들이 하나같이 ‘나쁜 말을 믿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끊임없이 진실이 무엇인지 의심하는 태도야말로 가장 객관적 진실에 근접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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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추석이면 추석영화들이 마련된다. 극장에는 한국의 전통적 성수기를 노린 작품들이 걸리고, 집에서도 각 방송사가 준비한 추석특집 영화들이 방영된다. 일순간 너무 많은 영화들이 쏟아져 어떤 것을 보아야 하나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다양한 선택이 기쁘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다양한 선택이 다양한 음식으로 채워진 뷔페처럼 만족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는 어마어마하게 식욕을 자극하지만 막상 한 바퀴 돌고 나면 헛배가 부른 듯한 기분. 차라리, 정성껏 마련된 단품 요리를 먹을 걸 그랬나, 하고 후회가 드는 그런 기분 말이다.

 

영화 <체실 비치에서>의 한 장면.

 

영화 보기는 먹기와 같은 본능적 행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수기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여러모로 욕구와 충동을 자극한다. 대형 광고판에 선명한 해상도를 가진 사진들이 걸려있고, 소위 대형 배우들의 얼굴이 나란히 포진해 있다. 예고편이나 기사, 평론들도 있지만 일단 그렇게 걸려 있는 얼굴들을 보며, 어떤 영화가 재미있을까 고민하기 마련이다. 최종 선택은 대부분 직관적이다. 어떤 게 더 재미있을까, 어떤 게 볼만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직관대로 결정하는 것이다.

올해 추석영화관이 특히 그러했을 것이다.

 

올 추석에는 세 편의 사극과 두 편의 장르물이 개봉됐다. <물괴>는 추석 한 주전, <협상> <안시성> <명당>은 추석연휴 직전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더풀 고스트>가 연휴 마지막에 개봉됐다. 김명민, 손예진, 현빈, 조인성, 조승우, 마동석, 김영광에 이르는 화려한 라인업은 말 그대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배우들은 나름의 홍보전에 뛰어들었고, 연일 보도자료로 각 영화들의 흥행성과가 전달되었다. 시장의 규모만 보자면 추석 극장가 관객은 1300만명으로 추정되었다. 영화 모두가 손익분기점을 넘기려면 적어도 1700만 관객 정도가 필요하니, 이는 이미 레드오션이고 과열경쟁이 예고된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영화들이 개봉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기억에 남는 단 하나의 작품은 없다. 제작비나 제작사 및 배급사의 규모, 배우들의 면모를 봐서 평균작 이상이 분명 나올 만한데, 다섯 작품 모두 도토리 키 재기 하듯 고만고만하니 주목을 끄는 작품이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의 캐릭터가 거의 비슷하다. 인간이 가진 복잡성이나 예민함을 모두 깎아내버린, 밋밋한 사람들이 전부인 셈이다. 주인공들은 모두 정의롭고 정직하며, 그 반대에 있는 사람들은 세속적 야망을 불태운다. 이런 이분법 안에서 인간은 순수하고 정의로운 인간 아니면 악하고 이기적인 인간, 둘로 나뉜다.

 

어떤 관객이라도 스스로를 이기적인 악당 편에 두고 몰입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선하고 올바른 쪽이 나의 그림자일 것이라 여기며 그것에 동일시한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정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는 것일까? 인간의 내면이라는 게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평면적인 것일까?

 

영화 <체실 비치에서>를 보며 오랜만에 신선한 당혹감을 느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신혼여행 첫날 밤 급격하게 서로에게 환멸을 느끼고 멀어지는 두 연인을 보여준다. 카메라의 앵글로 치장되거나 꾸며진 정사 장면들과 달리 이 신혼부부의 첫날밤, 첫 정사는 보는 이들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외설적이거나 선정적이어서가 아니다. 마치 무방비 상태의 맨 얼굴처럼 카메라는 우리가 그다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순간을 침범해 들어간다. 거기엔 우리가 돌이키고 싶어하지 않는, 상처와 부끄러움과 미숙함이 있다. 매끈하게 세련되고, 다듬어진 가상의 인간이 아니라 투박하게 벼려진 날것 그대로의 인간이 있는 것이다.

 

이언 매큐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속 두 사람은 우리가 여느 영화에서 보아왔던 연애와 결혼의 주인공들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당혹스럽지만 그렇기 때문에 반갑다. 오히려 너무나 완벽하게 정의로 꾸며진,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부끄럽거나 민망한 순간이 없는 듯한 추석영화 속 주인공들보다 더 위안이 되기도 한다. 추석영화 속 주인공들이 우리가 되어야 할 가상의 인간형을 추구한다면, <체실 비치에서>의 두 연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견지해야만 하는 우리와 닮아 있다. 인간은 위대하지만 대체로 엉망진창이며, 때로는 너무 부조리하다. 그들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그렇고, 나도 그렇다.

 

<체실 비치에서> 남자 주인공 에드워드 역을 맡은 빌리 하울은 “내가 가장 관심 있는 것은 빛, 심지어 경박함을 때로는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나는 불합리에 매료되었고, 부적절한 반응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종에 속해 있음을 알고 그 인간의 속성에 대해 어지간히 고민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완벽한 외모와 보편적 정의로 조형된 주인공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런 인물들은 정작 온기와 위로를 주지 못한다.

 

물론 모든 영화들이 이렇게 예민하게 인간의 복잡성을 파고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섯 편, 여섯 편 아무리 많은 작품들이 개봉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복잡함과 모순을 보여주는 작품이 단 하나도 없다면, 그건 다양한 영화관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진다고 해도 그건 다양하지 않다. 올해 추석 개봉 대작들이 고만고만하니, 기억에 남지 않는 이유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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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에 명절에는 만두를 빚는다 하였는데, 어디까지나 한수 이북의 일이다. 남쪽의 만두는 중국인들의 몫이었다. 동네에 화교가 좀 살았는데, 명절에 푸짐하게 만두를 빚었다. 엄밀히 말하면 파오츠(包子)였다. 만두(만터우)는 화교들에게는 속을 채우지 않는 일상의 밀가루 음식이었다. 발효시켜 부풀린 후 쪄서 밥으로들 먹었다. 그걸 얻어먹어본 적도 있다. 짭짤한 나물과 채소 볶은 것을 그 밀가루 만두, 실은 빵이라고 할 음식에 얹어 먹었다. 소 없는 만두란 참 심심했지만, 부풀린 반죽이 씹히는 결이 인상 깊었다. 그 만두를 잊지 못해서 대림동 상가에 종종 가기도 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진짜 ‘만두’를 판다. 거대하게 부풀려서 왕만두라고 해야 할 밀가루 빵을 팔고 있는 것이다. 민족이 정주지는 바꾸어도 음식은 쉬이 바꾸지 않는다.

 

 

내가 집에서 만두를 먹게 된 것은 호기심 많은 어머니 덕이었다. 집에서 만두를 빚지 않는 남쪽 고향 출신의 어머니는 서울에서 이북식 만두를 배웠다. 어른 손바닥만 한 만두를 빚었다. 세 개만 먹어도 어른이 배부를 크기였다. 비계 섞인 돼지고기를 넉넉히 넣고 부추를 엄청나게 많이 넣는 것이 바로 이북식이라고 했다. 두부는 거의 쓰지 않았고, 겨울엔 김치로 만들었다. 역시 부추를 넣은 여름식 만두가 맛있었다. 소가 아무리 좋은들 만두피가 더 중요한 몫이란 걸 만두를 직접 빚으면서 알았다. 반찬이 좋은들 밥이 나쁘면 별무소용인 것처럼.

 

미련한 짓이었지만, 학창 시절에 많이 먹기 겨루기의 대상은 만두였다. 스테인리스나 양은 찜통에 9개씩 담긴 찐만두를 몇 개나 먹나 다퉜다. 하필 찐만두가 선택된 것은 아마도 차곡차곡 높이 쌓이는 찜통이 보기에도 그럴싸했을 것이고, 만두의 개수로 자랑 삼기 쉬웠기 때문일 것 같다. 찜통이 탁자 위로 끝없이 솟았다고 허풍을 쳤으며, 찐만두를 모두 세어보니 100개를 먹었네, 200개를 먹었네 했다.

 

마침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다. 그쪽의 만두 사정은 어떨지 궁금하기만 하다. 황해도는 만두를 예쁘게 빚고 평안도로 가면 커지고 투박하다고 했다. 신의주까지 북상하면 왕만두가 있다고 했다. 중국 국경으로 갈수록 만두가 커지고 터프해졌다고 한다. 먹어볼 수 없으니 이 또한 막막한 일이다. 전에, 단둥까지 가서 거리 만둣집에서 요기했다. 엄청나게 큰 만두를 두 개 담아 1인분으로 팔았다. 기름이 줄줄 흐르는 맛있는 만두였다. 그 가게에서 이북으로 건너가는 압록강 철교는 보이지 않았지만, 북한 만두도 비슷하겠거니 하고 먹었다. 언젠가 강헌 선생이 얘기한, 황해도 만두의 전설도 보고 싶다.

 

겨울이면 돼지를 잡고, 만두를 빚은 후 무명실에 꿰어 차가운 바람이 들이치는 처마에 매달아 얼렸다는 전설의 만두를. 대통령이 가고, 문화예술인이 가니 우리 또한 갈 기회가 없겠는가. 대동강가에서 철갑상어 요리도, 숭어국도 좋지만 나는 만두가 먹고 싶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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