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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처럼 냉면이 화제가 된 적이 드물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오던 ‘노포’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냉면집들이 속속 등장했다. 냉면에 대한 새로운 시장층이 생겼다. 젊은이들이다. ‘밍밍하기만 한’ 평양냉면 육수의 맛을 음미하고 이해하려는 세대가 생겨난 것이다.

 

인터넷이나 방송을 통해서 ‘냉부심’(평양냉면의 맛을 안다는 자부심)이라는 말도 유행했다.

 

냉부심(?)의 기준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앞서 말한 특유의 육수 맛을 감지하는 것이다. 매콤 새콤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알 듯 모를 듯한 풍미를 사랑하는 능력이다. 시쳇말로 ‘행주 빤 물’ 같다는 혹평의 그 육수가 맛있어지는 단계다. 다른 하나는 메밀 함량이 높은 면에 대한 애호다. 그동안 메밀 값이 비싸고 구하기 어려워서인지 평양냉면이라고 이름붙이고 실은 전분과 밀가루로 만든 면에 메밀은 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메밀 함량은 1920년대 한 신문에도 “평양냉면은 오직 메밀로만 만든다”는 탐방 기사가 실릴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배합법이다. 메밀은 실은 전국 어디서나 심어 먹던 작물이었다. 특히 비나 가뭄으로 농사를 망쳤을 때 좋은 대안이었다.

 

여름에 심어서 가을께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농사가 제일 중요했던 당시, 여름에 벼 포기가 픽픽 쓰러지고 메밀이라도 심을 수 없었다면 어떻게 가을과 겨울을 넘겼을까 끔찍한 일이다. 또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에게 메밀은 아주 좋은 작물이었다. 쌀농사는 안되고, 거친 토질에도 ‘가루’나 ‘쌀’(메밀껍질을 벗긴 상태를 녹쌀이라고 하여 쌀의 대용임을 의미했다)을 주는 메밀의 효용은 상상 이상이다. 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메밀은 녹화사업 등의 목적으로 화전이 금지된 후 생산량이 줄어들고, 쌀과 밀가루가 풍부해지면서 더욱 하락세를 보였다. 시내 냉면집에서 전분에 보릿가루 태운 것을 섞어 가짜가 나왔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다. 메밀이 비싸서 생긴 일이다. 요즘은 비교적 싼 수입 메밀이 많아서 함량 자체는 많이 올라갔다. 그래도 메밀은 밀가루나 전분에 비해 고가의 곡물이어서 풍족하게 쓰기 어렵다.

 

올해 메밀 농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 메밀은 이제 구하기 어려운 작물이 아니다. 잡곡으로서 매우 가치 있게 팔린다. 메밀을 많이 넣은 평양식 냉면의 인기 확산도 한몫한 듯하다. 메밀 산지는 세간에 알려진 강원도를 넘어서 전국에 분포하는데, 제주 메밀이 양도 질도 충족시키고 있다. 다만 경관작물이라고 하여 메밀꽃 피는 환상적인 광경을 보기 위해 연작을 장려하다보니 알곡이 작아지는 등 메밀 자체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한겨울에는 꼭 평양 같은 관서지방이 아니어도 메밀로 전병 부치고 수제비를 뜨던 음식문화가 있었다. 메밀이 가장 맛있을 때가 수확 지나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꼭 냉면이 아니어도 시식(時食)으로 메밀을 다채롭게 먹을 수 있다. 우리 민족 음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메밀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면 좋겠다. 아아, 한겨울 메밀묵 장수가 팔던 걸 사서 신김치 얹어 먹고도 싶다. “메밀무욱! 찹싸알떡!”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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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영화 <김광석>의 포스터


그리스인들에게 친구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었다. 우정 어린 대화 속에서 이뤄지는 인간적인 것을 필란트로피아(philanthropia)라고 불렀는데, 이는 인간애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곧 친구이고 그렇게 대화를 할 수 있는 마음가짐 자체가 인간애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매우 사적인 비밀과 생활을 나누는 친구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그런 사이를 지칭하는 우정이란 루소가 정립한 것이라고 한다. 루소가 아니라 그리스식으로 생각해보자면 친구는 훨씬 더 갖기 어렵고, 우정은 나누기 어렵다. 왜 행복의 절대적 조건으로 친구와 우정이 필요했는지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를 만들고, 보고, 평가하는 과정은 대화적이다. 그저 사적인 비밀을 나눈다기보다는 대화가 될 만한 소재들을 영화로 만들어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는 점에서 말이다. 좋은 영화라고 하면 충분한 해석의 여지가 많은 영화라고 생각되는데, 이 해석의 여지야말로 대화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대화할 수 있는 부분 어쩌면 많은 의견이 유통될 수 있는 영화일수록 좋은 영화라고 믿기 때문이다.

 

최근 두 편의 영화가 화제이다. 하나는 김광석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쫓아가는 다큐멘터리 영화 <김광석>이고 다른 하나는 위안부 문제를 색다른 방식으로 재현한 <아이 캔 스피크>이다. <김광석>은 영화가 가진 대화적 힘의 또 다른 증례가 될 듯싶다. 이미 공소시효까지 만료된 과거의 ‘사건’은 서술됨으로써 다시 대화의 주제가 되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김광석>은 이미 만료된 그러니까 과거가 된 사건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인데, 이 극복은 다름 아닌 반복되는 서술과 진술을 통해 마련된다. 사실을 영화의 영역에 가져옴으로 인해 독백이 대화를 작동시키게 된 셈이다. 영화 <김광석>의 과거 사용법이 여러 가지 점에서 의미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광석>은 미학적이거나 영화공학적인 면에서 따지기는 좀 어려운 작품인데, 사실이 어떻게 진술과 만나 새로운 교호작용을 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이 캔 스피크>의 대화술은 좀 더 세련됐다. 과거를 미학의 범주 안으로 들여와 이야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는 견고한 과거라는 벽을 유연하고, 현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일 테다. 이야기로, 영화로 구체화됨으로써 오히려 역사는 항구성과 지속성, 현재성과 반복성을 얻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세계 속에 다른 위치를 새겨 주며, 그것은 같지만 다른 이야기로 진척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시대를 넘어선 무엇으로 살아남게 되고, 그 대화는 단지 지금 영화와 관객 사이를 넘어 미래의 관객과의 대화로도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 연민이라면 그런 맥락에서 우정은 훨씬 더 선택적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두 인물, 민재와 옥분의 관계가 우정으로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다가 연민과 동정이 좀 더 시혜적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면 우정은 훨씬 더 동등한 관계를 전제한다. 할리우드 영화 <인턴>에서 나이 많은 할아버지 인턴과 젊은 여성 CEO의 관계처럼, 그렇게 다르지만 동등한 관계에서 우정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취향의 세련이나 의미 있는 여가 선용이라기보다는 유용한 오락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영화와 대화를 나누고 우정을 나누는 건 여간 어렵지 않다. 마치 재미만이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재미있으면 되지라는 식의 논리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신체가 난자되어도 무감각하게 바라보고, 지나치게 잔혹한 폭력들도 영화적 클리쉐로 여겨진다. 사실도 아닌데, 허구인데, 영화인데 정색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효용론이 너무도 강렬해서 의미나 윤리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척이나 고답적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하지만 그렇게 영화의 용도를 한정하는 것이야말로 현실로부터의 후퇴이고 내적인 망명일지도 모르겠다. 한나 아렌트는 공포를 현실에 대한 정신의 후퇴라고 말한 바 있다. 반대로 희망은 현실의 초월이다. 즉, 현실을 너무 무섭게 재현하는 것도 도망가는 것이고 거꾸로 현실을 너무 아름답게 그리는 것 역시도 거짓이다. 현실의 압력이나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영화를 본다는 핑계가 언제나 통할 수 없는 이유이고 영화는 단지 오락일 뿐이라는 폄훼와 다르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놀이에도 치유의 효과가 있듯이 오락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허용될 수는 없다. 결국 영화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치명적 질병이 만연했던 시대엔 병이란 사람과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완치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 치유와 치료가 더 중요시된 맥락에는 이러한 겸손함이 자리 잡고 있다. 완벽히 없앨 수 없으니, 병을 다스리고, 고통을 줄여 주는 것, 치료와 치유는 그런 개념이었던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영화란 세상에 대단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지시의 개념어를 주는 완치의 예술이 아니다. 치유하고 치료하는 것, 그러니까 불완전한 역사를 다시 이야기하고, 하나의 치료법(therapy)을 제안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힐링하는 것, 그게 바로 영화의 존재이유인 셈이다. 연민이 아니라 우정을 나누는 영화가 좋은 영화인 이유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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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게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법을 묻곤 한다. 그곳에서 살아봤으니 특이한 여행법을 추천해달라는 거다. 내 답은 거의 비슷하다. 로마, 피렌체, 밀라노와 베네치아 말고 작은 도시를 가보라고 권한다. 소박한 이탈리아의 삶을 볼 수 있으니까.      

   

또 하나는 사그라(sagra)에 참여해보라고 한다. 사그라는 작은 축제를 의미하는데, 대개 음식을 주제로 연다. 우리로 치면 면 단위 정도의 작은 마을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행사를 치른다. 이탈리아도 지방의 노령화, 젊은 인구 부족 현상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런 작은 축제를 열면서 여전히 마을의 과거와 미래를 이으려는 노력을 한다.   

 

 

개구리(물론 식용이다) 축제나 통돼지구이처럼 흥미로운 주제도 있지만 남들이 보기에 별거 아닌 것도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양파나 파, 고추, 가지 같은 것이 주제가 된다. 축제라고 해서 큰 기대를 하고 갔다가는 실망할 수도 있다. 그저 밤을 까서 케이크를 굽거나, 콩으로 수프를 만들고, 거친 옥수수로 죽을 끓이고 동네에서 나온 와인이나 두어 잔씩 돌린다. 그래도 행사는 흥겹고, 신난다. 번듯하고 멋진 축제는 아니지만 각자 마을에서 잘하는 것, 많이 생산되는 것, 맛난 것을 내놓고 같이 즐기기 때문이다. 소박한 축제인데도 은근히 관광객이 많이 온다.      

 

치즈 축제가 많은데, 치즈란 우리의 장과 같아서 손맛, 지역의 조건에 의해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굳이 이걸 맛보겠다고 멀리서 사람들이 모인다.     

 

사그라를 하는 건, 사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고된 노동과 평범한 일상을 사는 동네 사람들이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이다. 화려하고 잘사는 동네뿐 아니라 변방의 소읍에서도 떳떳하게 자신의 존재를 말하는 무대다. 그참에 지역을 떠난 사람들도 돌아와 반가운 만남의 장이 되기도 한다.        

 

우연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양동면 양평부추축제’라는 작은 포스터를 봤다. 양동면이라는 지명도 초문이고 축제 주제도 그랬다. 하나 오히려 번듯하고 폼 나는 유명 축제가 아니어서 눈길이 갔다. 큰 예산이 투입되고, 어마어마한 홍보를 하는, 지자체 수장의 선거운동 비슷한 관제 축제가 좀 많은가. 외부 기획사에 큰돈 주고 행사를 맡기고, 정작 주민들은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그런 축제 말이다. 축제의 주체는 관도, 관광객도 아니다. 자발적인 주민이 주인이다. ‘겨우’ 부추 축제라니. 이런 소박함에 절로 흐뭇했다. 양동면은 알고 보니 양평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다. 인구가 고작 4500여명에 그나마 대부분 ‘초’노인들이다. 그런데도 작년에 부추 농가가 똘똘 뭉쳐 첫 번째 축제를 치러냈다. 그 흔한 부추로 말이다.      

 

마치 옛날 추수 뒤 잔치처럼, 깃발 들고 노래 부르면서 흥겨웠다. 농촌은 언젠가부터 대책 없는 ‘미래’로 치부됐다. 노인들만 남아서 그들 이후의 사정은 서로 책임을 미루거나 공허한 슬로건만 떠들고 있다. 노인들이, 부추 심는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다시 축제를 연다. 마음 한구석이 싸해진다. 내일 아침 10시에 양동역 앞에서 개막해서 일요일 저녁까지 축제가 이어진다. 부추전도 부쳐 먹고, 올 때 싱싱한 부추 한 상자 사서 돌아오면 좋을 여정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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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2017년을 어느덧 3개월여 남겨둔 시점에서 미리 올해 콘텐츠 최고의 키워드 하나를 꼽는다면 ‘언론’이 아닐까. 지난 10여년간 보수정권에 의해 자행된 언론 탄압의 한풀이라도 하듯 연초부터 언론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왔다.

 

드라마 <아르곤>의 한 장면.

극장가에선 연초 개봉된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을 시작으로, 현재 <공범자들> <저수지 게임> <김광석> 등 세 저널리즘 다큐멘터리가 동시에 상영 중이다. 방송가에서도 몇 년에 한 편 나올까 말까 한 기자 소재 드라마가 두 편이나 방영됐다. 바로 이달 초 종영된 SBS <조작>과 현재 방영 중인 tvN 월화드라마 <아르곤>이다.

 

언론 소재 콘텐츠의 유행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작용한다. 하나는 지난 국정농단 사태로 부쩍 높아진, 숨겨진 진실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고, 또 하나는 대안 언론의 성장이다.

전자의 관심은 은폐된 진실을 폭로하고 추적하는 콘텐츠의 스토리텔링에 반영되어 있다. 가령 <공범자들>은 지난 보수정권 아래서 권력자들이 어떻게 방송을 장악하고 언론을 입맛에 맞게 길들였는가를 고발하고, <저수지 게임>은 전직 대통령의 숨겨둔 거대 비자금을 추적하며, <김광석>은 1996년 사망한 가수 김광석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파헤친다.

 

픽션인 드라마의 경우 더 극적인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 <조작>은 국정농단 사태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며 언론과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숨은 권력자들의 실체를 뒤좇는다. <아르곤>은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키는 건물 붕괴 사건을 소재로 참사의 원인과 정경유착 비리를 추적하는 내용이다.

 

두 번째로, 대안 언론의 성장은 제작진이나 등장인물의 특징에서 엿볼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해직언론인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한다.

 

대안 언론의 성장 뒤에 정권의 언론 탄압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과다. 예컨대 영화 <공범자들>의 감독 겸 대안 언론 ‘뉴스타파’ 앵커 최승호 PD, <김광석>의 감독 겸 대안 언론 ‘고발뉴스’ 기자인 이상호는 모두 MBC 해직언론인 출신이다.

 

<저수지 게임>의 두 주역 김어준, 주진우는 이명박 정부의 시사 프로그램 폐지 및 축소의 틈을 파고들며 대안 매체로 급부상한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로 새로운 시사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드라마에서도 같은 특징이 발견된다. 본격 언론 드라마는 아니지만 올해 초 방영된 SBS <귓속말>은 언론노조 파업 당시 해직된 언론인의 끈질긴 권력형 비리 취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가 하면 <조작>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인터넷 매체 언론인들과 신념을 지키려다 한직으로 밀려난 기자들이 주인공이고, <아르곤>은 해고된 기자들의 결원을 메우려고 채용된 계약직 기자들의 딜레마를 소재로 한다.

 

언론 소재 영화와 드라마는 정치사회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실제 현실에서는 KBS와 MBC 언론노동자들이 잃어버린 공영방송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동시 파업을 벌이고 있다. 현실과 콘텐츠가 이렇게까지 역동적으로 상호교차하는 사례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지금 언론 소재 작품들이 가장 흥미로운 콘텐츠로 떠오른 이유다.

이 가운데 조금 더 눈길이 가는 작품은 <아르곤>이다.

 

이 드라마는 변화한 언론 환경의 현재를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언론이 이렇게까지 망가지기 이전의 근원적 역할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극중에서 HBC 방송사의 유일한 탐사보도 프로그램 ‘아르곤’을 이끄는 팀장 김백진(김주혁)이 언론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신념을 고수하는 인물이라면, 계약직 기자 이연화(천우희)는 권력의 검열과 불안한 생존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요즘 언론의 현실을 반영하는 인물이다. 고참 팀장과 까마득한 막내 기자로 만난 두 사람은 경력과 나이차를 초월해 기자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주고받는다.

 

그런 측면에서 <아르곤>이 재난보도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백진은 속보에 목매다는 다른 방송사들과 재난에 대한 접근 방식을 차별화한다. 그는 현장에 있던 150여명의 사연에 주목한다.

 

백진이 “하루아침에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사연, 하루 종일 뉴스에서 자막으로 휙 지나가는 이름들이 우리랑 똑같은 사람들이란 걸 알려주자”고 말하는 장면은 언론 드라마로서 이 작품이 지향하는 메시지를 대변한다.

 

비록 탐사보도 프로그램으로서는 지나치게 나이브할지라도, ‘아르곤’팀의 태도는 국내 언론 보도가 갈수록 놓치고 있는 인간적 가치를 환기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백진은 신입 기자 시절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담당한 경력이 있다. 당시 국내 언론은 구조자에 대해 스포츠 신기록을 중계하듯 다루며 재난보도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극중 백진의 보도방침은 그러한 경험 뒤에 나온 고민의 결과다. 이는 동시에 세월호 참사에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던 언론 현실을 환기시킨다.

 

당시 언론은 이준석, 유병언 등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 추궁에만 집중하며 정부의 재난 대처에 대한 비난 여론을 전환하고, 정권의 말을 받아쓰기 하느라 최악의 오보를 내보냈다. 언론이 인간을 수단으로 여긴다면 존재할 이유가 사라진다. 언론 보도의 최종 종착지는 결국 인간을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르곤>은 언론이 ‘기레기’로 전락한 역대 최악의 언론 참사,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금 인간의 공감에 도달하고자 하는 언론의 이야기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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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1일 개봉하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제공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보다 이야기의 힘이 더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더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과 이입을 선사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그렇다고 해서 역사보다 소설이나 영화가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소재보다는 소재를 다루는 태도에 대한 격언인데, 말하자면 있었던 일을 다룰 때 고증보다는 그 일을 가운데 둔 전체의 얼개, 플롯에 더 유념해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이 지면에서, 울고 고통스러워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웃기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 피해자를 그려낼 수 없는 우리 이야기의 가난함에 대해 토로한 적이 있다. 아직 우리의 피해는 사죄받지 못한 것이기에, 여전히 현재적인 문제이기에 거리나 여유를 둘 수 없다고 말이다. 영화 <귀향>이나 <택시운전사>가 역사의 문제를 다루면서 고발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영화 문법이 그저 촌스러워서가 아니라 아직은 지나치게 현재 진행형의 문제라는 뜻에서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는 매우 놀랍다. <아이 캔 스피크>는 여러 미덕을 가진 영화이다. 그중 최고의 미덕은 바로 상처와 피해를 다루는 태도와 방식이다. 피해라는 말이 주는 핏빛 이미지처럼 피해자는 언제나 숭고하게 그려야만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좋은 독일군도 있고, 나쁜 카포(Kapo: 수용소 중간 관리자)도 있곤 하다. 선량하지만 무능한 피해자도 있고, 잔혹하지만 필연적 악을 행하는 가해자도 그려지기도 한다.

 

참혹한 일들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의 경험이 역사가들의 일거리가 되리라고 여기지 않는다.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마치 사건 외부로 튕겨 나온 듯한, 염결한 죄책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경험했던 것들은 사실이다. 그처럼 생생했던 사실들은 어떤 기록보다 더 사실적일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증언들을 들어보자면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경험적 사실이 진실에 닿기에 여러 번의 자맥질이 이어진다. 쇼샤나 펠만이 말했듯이 이렇듯 진실과 사실이 불일치하는 상황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증언의 안과 밖 모두에 자리 잡는 것일 테다. 사실과 진실을 연결하는 것, 그게 바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이야기의 힘일 테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일제강점기의 역사와 그 역사 뒤편의 상처들은 이런 인간학적 다양성으로 일반화하기엔 너무도 첨예한 잘잘못과 닿아 있다. 아직 법률적 판결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와 그 상처를 다룰 때면 인간학과 심리적 다양성보다는 윤리적 보편성과 도덕적 선과 악, 법률적 판결 문제를 강조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점에선 미학적 쾌감보다는 도덕적 심미안으로, 즉 재미보다는 의미로 보아야 하는 영화들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야기를 다룰 때 재미나 미적 완성도를 따지는 게 어쩐지 무척 불경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 캔 스피크>는 증언할 수 없는 그 어떤 것까지 증언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작품이다. 일단 재미있다. 주인공인 나옥분 할머니(나문희)는 괴팍한 동네의 말썽쟁이로 등장한다. “도깨비”라는 별명처럼, 동네 슈퍼 주인 말고는 그 누구도 상대하지 않는 독불장군으로 처음 나타나는 것이다. 누구나 다 미워할 것 같은 이 할머니를 마지막 순간 모두가 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할머니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게 바로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몫이고 성과이다. 영화는 그럴듯한 사연을 가진 할머니 나옥분을 통해 이 과정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이 과정 가운데서 함부로 다룰 수 없었던 역사적 상처와 사건이 묵직한 무게감과 감동으로 깊어진다. 웃기고 이상했던 할머니를 존경스럽고, 안아주고 싶은 할머니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영화의 힘이다.

 

또 한 가지 <아이 캔 스피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여성을 배우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배우 나문희가 “이 나이에 주연을 하는 기쁨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그건 단순히 여배우 주연 캐스팅 이상의 의의를 지닌다. 시나리오가 여성을 요구했고, 이야기가 할머니를 필요로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조금만 눈길을 돌리고, 관심사를 넓혀본다면 세상엔 꼭 이야기가 되어야 할 ‘역사’가 숱하게 많다. 어쩌면 너무도 익숙한 ‘역사’라서, 다룰 필요도 없는, 보편적이면서도 진부한 이야기라고 여겼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한 사실이 너무 많다.

 

<아이 캔 스피크>의 여성 인물은 굳이 나누자면 피해자에 속한다. 영화는 피해자들을 늘어놓고 전시하는 게 아니라 나옥분이라는 이름과 ‘발언권’을 주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다. 피해자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어쩌면 영화가 피해자를 영화에 모시는 방법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말할 수 없는 죽음의 세계와 말할 수 있는 생존의 공간이 있다면 영화는 건널 수 없는 두 공백을 이야기로 메우는 작업이다. 영화는 할 수 있다. 진실을 초월하는 어떤 사실들에 목소리를 주는 것, 그런 일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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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취재하느라 오징어잡이 배를 탄 적이 있다. 하룻밤을 먼바다에서 보냈는데 정작 취재는 하지도 못했다. 뱃멀미에 속이 뒤집혀 자그마한 선실에서 끙끙 앓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파도가 밀어닥쳐서 뱃전을 때릴 때마다 배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했고, 내 내장까지 울림이 전해졌다.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당장이라도 출어를 중단하고 귀항해야 할 것 같은데도 작업 선원들은 오징어가 걸려오는 주낙만 바라봤다. 생과 사 같은 건 그들에게 호사스러운 용어였다. 잡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다는 단순한 현실에서 파도 따위야, 이런 태도였달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선은 어지간하면 출어한다. 해경에서 출어금지령이 내리기 전에는 태풍이 온다고 해도 하늘을 본다. 혹시나 나갈 수 있을까 출어를 가늠한다. 선장은 빚내서 얻은 배 값 상환이 걱정이고, 선원은 출어를 못하면 벌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한때 만선이 흔하던 시절에는 목돈도 만졌다고 한다. 선원들 얘기는 하나같이 “옛날에는 말이야”로 시작한다. 고기가 너무 많아서 실을 곳이 없어 바다에 일부 버리고 갔다고도 한다. 이제 어지간한 연근해에는 고기가 드물고, 잡는 일도 만만치 않다. 잘 잡히면 경락가가 떨어지고, 안 잡히면 그건 그대로 빈손이 된다.

 

선장들은 “배 팔아치우겠다”고 하고, 선원들 다수는 “이번이 마지막 출어”라고 한다.

‘만선의 기쁨’ 같은 말은 언론에서나 쓰는 사어(死語)다. 시장에서 장을 보는 요리사들도 다 안다. 고기가 점점 볼품없다는 것을. 고기 몇 마리쯤은 덤으로 주던 인심도 사라졌다. 수산시장 경매장에 가보라. 냉동 수입 수산물을 쌓아놓고 파는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고 있는지. 아프리카, 인도양의 여러 나라들, 심지어 수산업 같은 건 할 것 같지도 않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의 이름도 보인다.

 

펄떡펄떡 뛰는 생선은 거의 양식이고, 고깃배가 잡은 생선을 넣은 나무상자는 왜 그리도 초라하게 보이는지. 농사는 뼈 빠지게 지어도 자재값 안 나온다고 한 지 오래고, 수산업도 몇몇 양식업이나 모를까 영세한 소형 어선으로 그물이나 낚시를 당겨봐야 출어비도 안 나온다는 푸념이 가득하다. 국민소득 3만달러짜리 나라의 돼지 축사에서 똥 치우다가 질식사하는 어이없는 사고가 벌어지듯, 바다에서도 먹고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일들이 늘 벌어진다. 며칠 전 포항 앞바다에서 붉은 대게잡이 어선이 사고를 당했다. 사고 조사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한 푼이라고 건져야 하는 처지에 어지간한 파도는 뚫고 가는 게 그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다른 배들이 오늘도 삼면의 바다와 저 먼바다로 나간다. 생명보험도 잘 안 받아준다는, 이른바 ‘극한직업’을 가진 이들이.

 

다시 우리 밥상에 올라온 생선과 여러 재료들을 생각하게 된다. 밥상은 목숨 건 노동의 결과물이 분명할 텐데, 그 내력을 외면하는 까닭은 우리의 이기심이 너무 깊은 때문인가. 아니면 무심해진 것일까. 그들의 고통에 호응하고 대면할 수 있는 용기는 없는 것일까. 얼마 전, 붉은 대게잡이로 사고를 당한 배의 이름은 광제호다. 27t짜리 소형 어선이었다. 유명을 달리한 선원의 명복을 빌고, 아직도 마치지 못한 실종자 수색이 성공하기를 빌 뿐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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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이아이피>의 한 장면.


여성을 혐오하는 남자들은 여자를 좋아한다. 우에노 치즈코의 책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는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여성 혐오자들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건 언뜻 모순으로 보이지만 사실 여성 혐오의 핵심이다. 여기서 ‘여자’는 성적 대상이자 기호로서의 여성이다. 우에노 치즈코의 말처럼 심지어 여장 남자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어도 무조건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처럼. 여자라는 기호에 반응하는 여성 혐오적 호색한이 많은 것이다.

 

최근 한국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여자라는 기호는 있지만 여성이나 여인은 거의 볼 수 없다. 말장난이 아니다. 존엄성과 비중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물리적 숫자로 따진다 해도, 한국 영화 속 여자는 무척 적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등장하는 여성의 역할이다. 여자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건 여자가 아니라 단지 기호일 뿐이다.

 

고백하자면, 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의 일부 에피소드는 끝까지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일명 VIP가 북한에서 저질렀던 만행을 ‘추억’하는 장면 말이다. 코스모스 길을 걷던 여학생이 처참한 사체로 발견된다. 여학생이 사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영화는 친절하게 재현의 무대에 올린다. 눈물이 가득 고인 여학생의 눈에서 빠져나온 카메라는 여학생의 채 영글지 못한 유두를 비추고, 마침내 VIP의 시선에 고정된 채 와이어에 목이 감겨 고통에 신음하는 여학생의 얼굴을 스크린 가득 담아낸다. 이미 소녀는 죽었다. 소녀가 사체로 변하는 과정을 담아낸 건 감독 박훈정의 선택이다. 그러니까 그 장면은 필연적 정보가 아니라 과잉의 수식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굳이 목베인 얼굴 사체를 등장시키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카메라는 여학생의 풀려 가는 동공을 클로즈업한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 장면이 추구하는 감정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분노라는 대답은 이미 지나치게 마초적이다. 많은 여성 관객들은, 적어도 나는 그 장면에서 분노보다 먼저 공포를 느낀다. 남성 관객들 중에 그 장면을 보면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대개의 여성 대상 범죄가 필연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서 즉 내 잘못이 아니라 운이 없어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점 때문에 공포는 더욱 커진다. 영화 <브이아이피> 속의 소녀가 우연히 피해자가 되었듯이 선택과는 무관하게,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여자라는 이유로. 과연 박훈정 감독은 그 장면에서 많은 여성 관객들이 공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계산했는지 묻고 싶다. 그랬다면, 왜 공포를 주고 싶었는지도 말이다. 공포가 본능적 위협이라면 분노는 학습된 감정이다.

 

영화 <브이아이피>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은 사실 500만 관객을 동원한 <청년경찰>에서도 있었다. <브이아이피>에 잔혹하게 난자당한 여성 피해자들이 등장한다면, <청년경찰>에는 난자를 착취당하는 10대 여성들이 등장한다. <청년경찰> 역시도 여성을 도구화했다거나 여성 혐오적 측면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논쟁이 비롯되면 언제나 따르는 비판이 있다. 너무 민감하다, 너무 엄격하다와 같은 시선들 말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도 뒤따른다. 현실의 범죄는 더 끔찍하다. 맞다. 하지만 실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많다는 사실과 그것을 영화적 소재로 쓰는 문제는 다르다.

 

무엇보다 문제적인 것은 이렇듯 학대받거나 고통받는 여성이 영화적으로 남자 주인공들의 자아 정체성 확립이나 남성성 확보를 위해 쓰인다는 사실이다. 과거 10여년간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은 남성영화들은 사실 남자와 남자의 대결인 경우가 많았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나 <신세계>, <내부자들> 같은 경우가 그랬다. 서열 정리와 권력 다툼을 위해 남자들은 서로를 난자하거나 베었고 폭력을 휘두르고 권력으로 짓밟는다. 그런데, <브이아이피>나 <청년경찰>에서는 여성 피해자를 알리바이로 ‘정의’를 구현하고 진짜 ‘남자’가 되고자 한다. <청년경찰>의 어리바리한 청년들은 여성 피해자를 구출함으로써 진짜 경찰로 성장하고, 박훈정 감독의 말마따나 벼랑에 매달려 있는 영화 <브이아이피> 속 남자들은 여성 피해자들을 빌미로 정의로운 남자로 거듭난다. 권력의 먹이사슬에서 눈치만 보던 남자가 마지막 순간 최후의 재판관으로 등장하는 것도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심지어 성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설정된 악의 주체는 어떤가? 그러니까, 진짜 남자가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가짜 남자를 벌하는 것, 철저한 남성성의 환상 속에 영화 <브이아이피>가 놓여 있는 셈이다.

 

한국 영화는 그동안 놀랄 만큼의 외적 성장을 이룩했다. 연간 관객 동원수가 2억명을 넘었고, 천만 관객 이상 보는 대형 흥행 영화가 매년, 꼬박꼬박 등장한다. 이런 한국 영화계의 성장세는 매우 놀라운 성과이긴 하지만 한편 급속한 경제 성장이 남긴 우리 과거처럼 그 성과가 너무 숫자에 치우쳐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영화 <도가니>에 굳이 아동 성폭행 장면을 연출해야 했는지, <브이아이피>에서 살해 사실이 아니라 살해 과정을 고스란히 재현해야 했는지 분명히 물어 마땅하다. 이건 단순히 페미니스트들의 과민반응이 아니다. 옷을 벗고, 체모가 나와야 외설이 아니다. 진짜 외설은 오히려 폭력을 수반한다. 조르주 바타이유의 말처럼 폭력이야말로 최후의 외설이다. 참혹한 여성 피해자에게 의존해서야 겨우 남자가 되는 남자, 그 남자는 가짜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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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범자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SBS TV 월화드라마 ‘조작’ 포스터.

 

보수정권에 의한 언론 장악 10년사를 고발한 영화 <공범자들> 초반부는 2008년 2월25일 KBS 뉴스의 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새 정부 내각 후보자들의 부정부패 의혹을 제기한 이 보도는 곧바로 후보자들의 사퇴를 이끌어냈다. 주목할 부분은 이 뉴스가 방송된 날이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 날이었다는 점이다. 새 정부와의 ‘허니문’ 기간이라는 관례도 개의치 않은 채 언론이 직언직설을 서슴지 않았던 이 시기를 두고, 영화 속 한 기자는 “저널리즘의 황금기”였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 찾아온 것은, 영화 속에서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시피 정권 탄압에 의한 언론의 가파른 몰락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10년간의 언론인 소재 드라마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가령 2008년 MBC에서 방영된 국내 최초의 전문 보도 드라마 <스포트라이트>는 ‘저널리즘 황금기’의 감수성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다. 특히 ‘신문·방송 포함 언론매체 신뢰도 1위’ 언론사였던 시절 MBC의 자부심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당시 MBC에서는 <PD수첩>을 비롯한 시사 프로그램들의 위상이 굳건했고, 손석희, 엄기영, 김주하 같은 간판 언론인들이 팝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정작 드라마 자체는 실제 언론의 인기를 따라잡지 못했지만, 손예진, 지진희 등 스타배우들이 연기한 세련된 기자들의 모습에는 대중들이 신뢰하고 동경하던 언론인에 대한 판타지가 투영되어 있다. 2009년 방영작 MBC <히어로>에도 이 같은 판타지는 생생했다. 소시민을 대변하는 군소신문사와 족벌언론 간의 대결을 다룬 이 작품은 <스포트라이트>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여전히 시대의 ‘히어로’로서 기자들을 그려낸다. 극 종반부, 거대 언론사의 범죄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거리로 나간 기자들의 1인 시위와 그를 향한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은 아직 언론과 대중의 신뢰관계가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언론 장악이 본격화되면서부터 공교롭게도 언론인 소재 드라마 역시 TV에서 보기 힘들어진다. 그사이 권력에 주눅 든 언론은 빠르게 추락하다가 끝내 ‘히어로’에서 ‘기레기’로 전락했다. 기자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아니지만 2012년 방영된 SBS <추적자>에서는 ‘히어로’와 ‘기레기’ 사이, 그 과도기에 위치한 언론이 비쳐져 있다. 한 소녀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진실을 추적하는 이 드라마는 정치, 자본과 결탁해 권력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언론의 타락을 묘사한다. 소녀의 아버지인 홍석(손현주)이 권력의 감시를 피해 도주하는 곳곳마다 CCTV처럼 접하게 되는 뉴스 속보와 기자들의 카메라는 권력의 언어만을 “받아쓰기”하며 약자의 말을 무력화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드라마는 이 시기 폭로된 국무총리실의 불법사찰이 언론에 미친 영향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홍석의 편에 선 단 한 명의 기자만이 과거의 이상적 시절의 흔적을 드러내지만 그에게는 진실을 밝힐 힘이 없다.

 

두 편의 기자 드라마, KBS <힐러>와 SBS <피노키오>가 등장한 2014년은 이미 ‘기레기’라는 용어가 일상화된 시대였다. 두 작품은 이 같은 언론 후퇴에 관한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극화한다. 송지나 작가의 <힐러>는 언론통폐합을 앞세워 언론을 장악했던 5공 군사정권 시절과 현재를 병치시킨다.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과 정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보수신문사 회장 김문식(박상원)은 ‘기레기’의 표상 그 자체다. 이는 2015년 영화 <내부자들>의 유명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와 함께 언론을 더 이상 권력의 시녀가 아니라 ‘공범’으로 인식하는 대중의 시선을 반영한 대표적인 캐릭터다. 그런가 하면 <피노키오>는 “시청자에게 먹히는 것은 팩트보다 임팩트”라며 선정적 보도를 서슴지 않는 기자, 진실 보도와 저조한 시청률 사이에서 고민하는 기자의 두 얼굴을 통해 권력뿐 아니라 상업주의에 굴복한 ‘기레기’의 현실도 고발한다.

 

현재 방영 중인 SBS 드라마 <조작>은 이전의 작품들과는 또 다른 시사점을 던진다. 이 드라마는 탄핵정국 이후 언론개혁의 열망을 담아낸 영화 <공범자들>과 더불어 ‘기레기’ 시대의 종언을 고하려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공범자들>이 영화 속 부제로 ‘기레기’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며 언론의 자기반성을 이야기한 것처럼 <조작>도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여기에 ‘히어로’는 없다. 이것은 스스로를 ‘기레기’ ‘식물기자’라 부르는 언론인들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되돌리려 하는 이야기다. 주인공 한무영(남궁민)은 얼핏 보면 <히어로>의 진도혁(이준기) 계열의 열혈기자 캐릭터에 가깝지만 결코 이상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의 과격한 보도 방식은 보다 이성적인 기자 석민(유준상)이나 검사 소라(엄지원)와 같은 인물들을 통해 자주 수정되고 타협점을 찾아간다.  

 

자기반성과 함께 자부심의 회복도 중요한 주제다. 예컨대 영화 <공범자들>에서 김민식 PD는 언론 탄압 시절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패배감, 무력감을 꼽았다. 생계로서의 직업인인 동시에 시대를 향한 사명의식이 큰 언론인들에게 정권의 부역자들은 하나같이 ‘너 아니어도 돼’라는 말로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조작>의 최종권력자 구태원(문성근) 또한 기자들에게 이 패배감을 주입시킨다. 그를 향해 자신은 ‘투사가 아니라 기자이며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뿐’이라고 답하는 <조작>은 ‘기자 히어로’와 ‘기레기’ 시대 이후의 새로운 기자정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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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칼럼에서 달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완벽한 한 생명(우리는 이것을 완벽한 영양으로만 표현한다)의 값치고, 우리가 달걀을 너무 싸게 먹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달걀값은 한 판에 4000원대에도 거래됐다. 한 알에 130.40원짜리였다는 말이다. 지나치게 싼 것은 의심해보라는 건 진리다. 우리는 전자제품이나 다른 상품을 살 때 이런 원칙을 잘 적용한다. 반품이나 진열했던 것은 아닌지, 심지어 핵심기능을 빼고 출시한 저가제품은 아닌지도 꼼꼼히 따진다. 전자제품이나 기타 상품은 ‘먹을 수도 없는 것’인데 그토록 치밀한 분석을 한다. 영화 칼럼에도 심지어 ‘적정 관람료’라는 게 나온다. 영화가 돈값을 하는지 분석해주는 내용이다. 적정 달걀값은 우리에게 없었다. 더 싸게 무한정 공급되는 달걀의 속사정을 챙겨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두 번의 폭탄을 맞았다. 이미 우리 기억에도 희미한, 조류인플루엔자(AI)로 인한 살처분으로 산란계가 대폭 줄면서 달걀 공급에 비상이 걸렸다. 달걀값이 오르고 ‘더 이상 달걀은 싼값에 펑펑 쓸 수 없는 재료가 되었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때 우리는 이미 강력한 옐로카드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얼른 어린 산란계가 커서 달걀을 쑥쑥 낳아 가격이 안정되기만을 기다렸다. 환부가 곪고 있는데 수술은커녕 팔다리만 주무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 가혹한 시련은 예비되어 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직면한 식품의 위기다. 달걀의 위기는 어떤 경고의 상징이다. 달걀만의 사정이 절대 아니란 뜻이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서 여전히 논란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돈과 사람의 선순환을 믿고, 최저임금에 인간의 이름을 붙이고자 애썼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다수의 지지가 생겼다. 달걀값도 ‘최저 가격’이 있을 것이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런 환경은 보장해야 닭이 건강한 알을 낳는다”는 기준이다. 그 원칙을 준수하려 하는 곳이 바로 여러 생협이다. 불행하게도 어떤 생협이 미처 대비할 수 없었던 문제로 실수가 있었지만, 그것을 빌미로 생협의 노력을 절대 폄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닭과 달걀의 건강에 대해, 동물복지에 대해 말하지 않을 때 거의 유일하게 고민하고 노력해온 집단이 바로 생협이기 때문이다. 이번 문제를 빌미로 달걀 시장을 노려온 대기업들에 기회를 주고 있건 아닌지 우려된다. 좋은 달걀을 위해 애써온 그들의 노력을 일거에 폄하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의 먹거리 문제를 진실로 접근해온 집단이 여러 생협 말고 어디 있었는가 다시 상기할 시점이다. 생협에 대해서는 각자 한발 더 가까이 가서 공부해야 할 것이겠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하고 싶다. 생협이란 생활협동조합의 준말이고,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으며, 그 조합원이 주인인 조직을 말한다. 달걀 파동의 참담한 현실에서 다시 생협을 생각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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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 인류를 의미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생각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호모를 꾸미는 말, 사피엔스의 뜻이 바로 슬기, 지혜이기 때문이다. 슬기,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로 생각해 내는 정신의 능력”이다. 그러니까,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달아야 하고, 그것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하는 게 슬기로운 인간이 하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종으로서의 인류의 ‘능력’인 셈이다.

 

 

영화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서 전쟁을 치르고 괴멸에 이르는 종은 바로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 호모 사피엔스이다. 말하고, 사고하고, 상상하는 인류가 사라지는 거지 지금 우리처럼 생긴 인간이 사라지는 게 아닌 것이다. 영화의 출발점이었던 1968년작 <혹성탈출> 오리지널을 돌이켜보자면, 그 작품에서 인류는 호모 에렉투스 정도의 원시 인류들로 묘사되어 있다. 서 있다뿐이지 말하거나 생각하고,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인류의 입장에서는 묵시록이고 생각하는 유인원의 입장에서는 창세기에 해당한다는 이야기이다. 말 그대로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이니 말이다.

 

영화 <혹성탈출: 종의 전쟁>을 보자면 지혜로운 쪽은 군인으로 상징되는 대령이 아니라 유인원 시저에 가깝다. 시저는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조직적이며, 공감 능력도 뛰어나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어쩌면 공감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의 뛰어난 지혜이다. 우리에게 강인한 생존력을 주는 것은 기술이었지만 정보와 교감이라는 매개가 없었더라면 이처럼 정교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에게 있어서는 사회성이야말로 진화의 혜택이다. 공감 능력이 발달할수록 타인과의 소통에 유리하고 더 친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 그려지는 여러 장면들은 성경 속의 창세기와 상당 부분 닮아 있다. 시저는 모세처럼 유인원 무리를 이끌고 약속의 땅을 찾아간다. 유인원들이 감금된 수용소 모습은 거의 명백하게 아우슈비츠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종적소멸을 부르짖는 스킨 헤드의 대령이 극우주의를 정치적 출구로 선택하는 여러 지도자들을 연상케 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인류는 지금껏 수많은 생존의 고비를 넘어왔다. 유발 하라리가 정리했듯이 기아, 역병, 전쟁, 이 세 가지가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진정 슬기로운 사람은 그러한 고비를 넘을 수 있는 진보된 기술의 주인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그런 역사를 통해 배우는 사람, 즉 학습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특히 전쟁이 그렇다. 기아와 역병이 과학과 기술의 영역이라면 전쟁은 거의 전적으로 사람의 선택이며 판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지나간 일을 역사적 허구로 재창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체험을 여러 권의 논픽션, 픽션을 통해 남겼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기록이 절대적인 증거라기보다 매우 개인적인 체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자신은 그때의 감정을 기억할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절절한 감정이야말로 기록이나 서류로 남은 그 어떤 정보보다 더 강력한 공감의 힘을 발휘했다. 전쟁의 잔혹성은 보고된 숫자나 남겨진 기록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지만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반성은 한 개인의 주관적 체험으로 더 절실히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가 실패한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아우슈비츠에도 같은 수용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수용자들을 못살게 굴었던 카포(kapo)들이 있었다. 또 다른 아우슈비츠 생존자 빅터 프랭클은 그런 카포를 일컬어, 태생부터 다른 사람들로 묘사한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선과 악, 자애심이라는 것은 그가 감시병이었느냐, 수감자였느냐에 의해 나눠지는 게 아니었고 그 경계가 너무 애매했다고 토로했다. 생각보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악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이 없었던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선과 악이 혼합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오히려 극한의 상황은 인간성의 바닥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곤 했다. 인간 이하의 삶의 형편에 자살을 다짐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누구도 자살을 생각조차 못했던 상황의 역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관점에서 <혹성탈출: 종의 전쟁>을 보자면 인간적인 존재는 대령이 아니라 유인원 지도자 시저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불쾌하지만 영화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호모 사피엔스로서 생각하고, 교감할 만한 여러 주제들을 제시한다. 인간이니까 지혜로운 게 아니라 지혜로워야 인간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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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제도의 변천사까지는 아니어도, 대학 입시가 얼추 어떻게 변해왔는지는 안다. 본고사에서 예비고사,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이름만 바꿨지 그다지 쓸모 있는 학생 고르는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억하건대 가장 웃기는 건 체력장이었다. 고입 연합고사 200점 만점에 20점, 대입 학력고사 340점 중에 20점이 이른바 체력검정 점수였다. 체력으로 점수를 매기고, 그것이 당락에 영향을 준다는 건 상당히 불공정한 게임이다. 그래서 감독 선생님들은 어지간하면 20점 만점을 주기 위해서 ‘적당히’ 채점을 하곤 했다. 문제는 신체장애인 친구들이었다. 장애 때문에 검정을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선심 쓰듯 15점이라는 기본점수를 주는 게 고작이었다. 참말 어른들이 저지르는 개 같은 경우의 제일 윗길에 오를 처사였다. 얼렁뚱땅 뛰어도 대개는 20점을 받는 상대들에게 5점을 까고 들어가는 경쟁이 얼마나 불리했겠는가. 요즘 같으면 당장 인권위원회에 고발당할 사안이 아닐까.

 

그때 학력고사는 실업 과목이 필수였다. 여러 산업 중에서 선택했다. 대개는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상업, 공업을 골랐다. 전국적인 대세였다. 돈 계산하는 상업과 제품 생산하는 공업이 제일 유망한 실업이었으니까. 바닷가 도시나 농업 지역에서 간혹 수산업과 농업을 선택하는 학교가 있는 정도였다. 광업은 사양산업이어서 극소수의 학교에서나 골랐을 뿐이었다.

 

내가 다니던 서울의 학교는 당연히 상업, 공업이었으나 나는 농업을 골랐다.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는 재수생 형이 농업을 공부하는 걸 보고 자유 선택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던 것이었다. 교과서도 없어서 종로서적에서 간신히 참고서를 구했다. 그날 밤, 나는 그 책을 펴들고 밤을 새웠다.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였다. 내가 먹는 닭과 돼지, 쌀과 보리와 감자, 호박과 사과와 포도의 ‘이력’이 빼곡하게 들어 있는 엄청나게 재미있는 책이었다. 닭의 산란을 촉진하기 위해 밤새워 불을 켜두거나, 돼지를 겨우 1년만 길러서 잡는다는 기술을 읽으며 마음이 아팠다. 소나 말이 새끼를 사람보다 더 오래 품는다는 걸 알고 그 어미들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다.

 

달콤한 포도 한 송이를 잘 기르자면 일년 내내 가지 치고 비료 주고 솎아내는 고단한 노동의 연속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내 입에 들어오는 모든 것의 역사를, 말하자면, 농업 교과서가 일러주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시험 당일, 다음과 같은 손쉬운 문제를 틀려버렸지만.

 

문)다음 중 자두나무를 고르시오. 그러고선, 지문으로 비슷비슷한 나무의 실루엣이 그림으로 나와 있었다. 자두나무를 실제로 본 적이 없는 내게는 너무도 어려운 문제였다. 나는 참고서 한 권으로 농업을 배웠지만, 평생 그 여운이 남아 있다. 쌀 한 톨이나 고기 한 점의 이면을 보는 시선을 갖추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 그 시절, 농업 교과서를 쓰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컴퓨터와 인터넷, 인공지능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학교 실업 교육에서 절대 빠뜨릴 수 없는 것일 테다. 그렇지만 도시에 살든, 농촌 학생이든 농·축·수산업을 배우는 일은 무효한 것이 절대 아닐 것이다. 먹어야 사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훌륭한 ‘무엇’이지만 먹을 수는 없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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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서정주 ‘마쓰이 오장 송가(松井 伍長 頌歌)’ 중)

 

류승완 감독의 영화 <군함도>의 한 장면.

잘 썼다. 서정주답게, 20세기 한국의 절창 시인답게 참 잘 썼다. 마쓰이 히데오, 그는 자살특공대원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박근형 연출가의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도 마쓰이 히데오가 등장한다. 서정주가 시 속에서 출정을 독려했던 그 젊은이, 오장 마쓰이 히데오 말이다. 시인이 비행기 관에 태워 보낸 그 젊은이를 박근형 연출가가 지상 위, 무대 위로 데리고 왔다. 그는 “제가 죽으면 저와 우리 가족은 영원히 일본인이 되고 아무도 우리 가족을 손가락질하지 못할 것”이라는 가슴 아픈 희망을 안고 죽어 간다. 조센징이라는 멸칭이 너무나도 듣기 싫었던 재일 한국인 마쓰이 히데오 말이다.

 

서정주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그의 빼어난 작품들과 함께 갑론을박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런데, 참 역설적이게도 박근형 연출가는 지난 정권 내내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으로 금지 아닌 금지, 억압 아닌 억압을 당했다. 70년 전 명백하게 친일 절창을 써내려갔던 서정주는 지금도 작품의 이름으로 옹호받는다. 사실을 별것 아닌 일로, 그러니까 작품과 개인의 행적은 별개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고, 살아 있는 그리고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박근형 연출가를 블랙리스트로 분류하고 이 사실의 중심에 있었던 장관은 책임도 없이 무죄로 풀려났다.

 

영화 <군함도>가 예상치 못한 논란의 중심에 섰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대결로 흐를 줄 알았던 영화의 주요 서사가 반전의 이름으로 피수탈자 한국인과 그들을 이중으로 수탈했던 친일파 민족 지도자의 대결을 매복해 두었기 때문이다.

 

명령을 내리는 일본인보다 오히려 채찍을 휘두르고, 쥐꼬리보다 못한 임금을 갈취하는 조선인 지도자가 더욱 잔혹하고 지독해 보인다. 영화의 초입부, 주인공이기도 한 강옥(황정민)이 공연을 하고 있는 경성 반도호텔에서 한 여성이 참전을 독려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도 그녀는 당시 경성을 주름잡는 권력이나 명성을 가진 인물로 보인다. 서정주처럼, 최정희처럼, 노천명처럼. 아마 그렇게 그녀도 자신의 실력으로 조선인들을 독려하고 있으리라.

 

지하련의 소설 <도정>에는 “덴노우 헤이까가 고-상을 했어요”라며 우는 소년이 등장한다. 덴노우 헤이까는 천황이다. 그러니까 한국어로 번역하면 “천황폐하가 항복을 했어요” 정도가 된다. 그런데, 소년은 왜 울고 있을까? 그토록 기다리던 일본의 패망인데, 소년은 “징 와가 신민 또 도모니(짐이 우리 신민과 함께)”라는 천황의 목소리가 너무 슬퍼서 “덴노 헤이까가 참 불쌍해요”라며 운다. 기뻐서가 아니라 슬퍼서 우는 것이다. 35년의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소년, 한 번도 일제 강점이 아닌 곳에서 살아보지 못한 열 몇 살의 소년에게는 광복이나 해방보다는 일본의 패망이 더 자기 일처럼 느껴진다. 순간, 소설의 주인공이자 지식인인 석재는 당혹감을 느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해방의 기쁨을 실감하지 못하자 혹시 자신이 타락한 것은 아닌가 자책한다.

 

우리에게는 1945년 8월15일이 준비되어 있던 해방으로 느껴지지만 당시를 살았을 사람들에게는 갑작스러운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소설 <도정>에는 대개의 평범한 시민들이 어리둥절해할 동안 재빠르게 몸을 바꾸고 변신한 기회주의자들이 그려져 있다. 친일을 했던 사람들이 재빨리 시류를 읽고 가장 먼저 처세를 바꾼다. 그리고 지도층 인사로 금세 올라선다. 주인공 석재는 당원 가입서에 스스로를 “소부르주아”라고 쓴다. 차마, 자기 스스로를 미화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설을 썼던 지하련, 임화의 아내는 남편과 함께 월북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었다. 정확한 사인이나 사망 시기가 밝혀지지도 않았다. 우리 문학사에서 월북 문학인이라는 이름으로 1988년 해금조치가 되기 전까지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던 이름이다. 지하련이 읽힌 지는 고작 20년 안팎이다. 참으로 복잡하고 가슴 아픈 현대사가 아닐 수 없다.

 

광복 72주년이다. 하지만 우리는 35년의 시기를 그리고 이후 70여년을 충분히 돌아보지 못했다. 엄밀히 말해, <군함도>는 감독 류승완의 작품 중 가장 완성도가 떨어진다. 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낙제점을 줄 만하다. 하지만 그가 던진 논란은 분명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쟁점이다. 작품을 이유로 친일파를 감싸기만 하는 게 잘못이라면 작품을 이유로 논쟁까지 파묻는 것도 잘못일 테다. 어쩌면 우리는 더 많이, 더 자주 이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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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전 유럽에서 겪은 일이다. 가을에 포도 수확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모인 노동자들이 대부분 타국에서 왔다. 포도는 제때 수확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는 일이라 일시적으로 손이 많이 필요하다. 자국의 손이 부족하니, ‘차떼기’로 외국 노동자들을 실어날랐다. 이미 노쇠해가고 있던 서부 유럽 노동시장의 한 단면이었다. 지금 한국도 다르지 않다. 농축수산업 모두 외국인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바닥 일을 맡고 있다.

 

 

최근의 에피소드 한 대목. 봄에 남도의 어느 항구에는 멸치잡이 배가 들어온다. 엄청난 숫자의 미디어가 취재경쟁을 벌인다. 아마추어 사진가들까지 몰려 북새통이다. 멸치를 잡아오면 배를 붙이고 그물에서 털어내는 장면이 인기가 높다. 현장 촬영은 늘 애를 먹지만 더 큰 어려움이 있다. 그물 터는 어부들을 생생하게 잡아야 하는데 이들이 거의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한국 어항을 묘사하는데, 카메라 앵글 속에 한국인이 드물어서 ‘그림이 안된다’는 뜻이다. 그물 터는 노동이 워낙 힘들기 때문에 원래 노동요를 부르면서 고통을 잊곤 했다. 요즘은 이런 노래도 듣기 어렵다.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이 ‘그물 후리는 소리’ 같은 전통 민요를 알 리 없기 때문이다. 이미 수산업도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세상이 됐다.

 

봄에 남도 어느 바다에서 정치망어업을 취재했다. 놀랍게도 고용된 노동자 전원이 외국인이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출신 어부들이 우리 손을 대신하고 있었다. 오직 배를 모는 선장만 한국인이었다. 매일 두세 번 물때 맞춰 고기를 잡아오는 단조로운 노동을 할 한국인이 없다고 했다. 원양어업이든, 연근해어업이든 양식장까지 대개 외국인 노동자가 고기를 잡고 기른다. 농업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충청도의 옥수수 수확 현장에 갔더니 역시 노동자 전원이 몽골과 태국 출신이었다. 땡볕에서 옥수수를 꺾고, 손질해서 자루에 담아내는 과정을 모두 외국인이 치러냈다. 우리가 상상하는 목가적인 전원이나 농장의 풍경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며, 그 현장의 손도 외국인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우리 입에 들어가는 온갖 작물들, 과일이 이미 외국인 노동자의 공력으로 길러진다. 돼지와 닭, 소도 마찬가지다. 특히 축산업은 내국인들에게 기피 일터다. 노동 강도가 엄청 세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 있는 곳에 불법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농축수산업도 마찬가지다. 장시간 노동과 임금 체불, 불법 고용 같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한때 우리의 아픈 상처였던 “사장님 나빠요”는 음식물을 만들어내는 기초 시장에서도 어른거린다. 농업의 경우 최저임금 미만이 허다하다. 아마도 이들이 없다면 농작물 가격은 급격히 오를 것이다. 이런 사정을 핑계 삼아 열악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힘들기로 유명한 어업과 축산 쪽이 임금이 나은 편이지만 그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노동 강도가 존재한다. 

 

우리는 쌀을 제외하면 5% 안팎의 식량 자급률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다. 그나마 그 적은 수치의 ‘국내산’조차 외국인 노동자가 지탱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즐기는 밥상을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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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드라마의 전설로 불리는 KBS ‘학교’ 시리즈가 다시 돌아왔다. 현재 월화드라마로 방영 중인 <학교 2017>은 그 일곱 번째 작품이다. 가장 큰 차별점은 기존 시리즈에 비해 현저히 가볍고 유쾌해진 분위기다. 웹툰 작가를 꿈꾸는 평범한 고교생 라은호(김세정)가 학교의 권위적 질서를 발칵 뒤집어놓는 의문의 히어로 ‘학생X’와 엮이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열여덟 살 청춘들의 유쾌 찬란 생기발랄 성장드라마”를 표방하고 있다. 시리즈가 방영된 지 올해로 약 20년, 드디어 십대들의 어두운 현실이 확 개선되기라도 한 것일까.

 

<학교 2017> 출연 배우들이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속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시리즈를 되돌아보면 오히려 점점 악화되고 있는 현실만 선명하게 드러날 뿐이다. <학교> 시리즈의 등장부터가 이미 비극적 시대의 산물이었다. 1987년 이후 정치민주화와 경제성장의 토대 위에서 대중문화의 붐과 함께 찾아온 청소년드라마 전성기가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소멸되어가던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KBS <신세대보고 어른들은 몰라요>, MBC <나>, SBS <성장느낌 18세>, EBS <감성시대> 등 이전의 청소년물이 희망의 성장드라마를 써내려갔다면, <학교>는 외환위기의 그늘이 드리워진 한국 사회 축소판으로서 학교 내부의 모순을 파헤친 현실고발극에 가까웠다. 무한경쟁의 불안이 지배하는 학교는 폭력, 집단따돌림, 체벌, 자살시도, 정신분열증 등으로 얼룩진 공간으로 그려졌다. ‘학교’의 이러한 리얼리즘 화법은 2000년대 들어 네 작품 만에 긴 휴방기를 맞이하게 된다. 더욱 심화된 입시경쟁 시스템의 우울한 현실이 십대들로 하여금 귀여니신드롬으로 대변되는 하이틴로맨스의 판타지로 도피케 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학교’ 시리즈가 다시 부활한 것은 그로부터 십년 뒤였다. <학교1>의 이민홍 PD가 복귀한 <학교 2013>은 판타지가 지배했던 10년 동안 학교에 일어난 변화에 주목했다. 사회 전반으로 확대강화된 무한경쟁 구도가 학교를 어떻게 그 체제의 재생산 기지로 만들어놓았는가를 생생하게 그린 것이다. 드라마는 교사와 교사,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 학생과 학부모, 학생과 학생 등 모든 관계가 도구적으로 재편된 현실을 묘사한다. 교장은 교육의 수장이 아닌 고용 CEO 마인드로 학부모와 교사를 대하고, 성적 향상을 위해 초빙된 사교육학원 출신 교사는 학생들을 학원 고객과 다를 바 없이 대하는 세계의 섬뜩함이 가감 없이 펼쳐진다.

 

<학교 2013>에 쏟아진 호평은 그 후의 학원드라마 화법이 다시금 현실고발로 돌아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최근의 학원물 안에서 학교는 단지 과도한 입시경쟁으로 얼룩진 폭력의 공간을 넘어 우리 사회의 온갖 부조리를 압축한 지옥도로 재현된다. 가령 <학교 2013>의 후속 시리즈인 <후아유-학교 2015>는 훨씬 어둡고 잔혹해진 학교폭력의 풍경을 그렸다. 폭행, 성추행 등의 노골적인 물리적 폭력이 이어지는 통영이나, 은밀한 심리적 따돌림이 행해지는 서울 강남의 학교는 이미 어디에나 폭력이 편재된 ‘헬조선’의 축소판이다.

 

이러한 맥락 안에서 ‘역대 시리즈 중 가장 밝은 작품’을 표방하는 <학교 2017>의 경쾌한 화법은 실은 제일 어두운 현실을 가리는 장치와도 같다. 그 안의 세계는 기존의 ‘학교’ 시리즈가 꾸준하게 비판해온 경쟁과 서열사회의 폭력이 극단에 이른 ‘성적계급사회’다. 급식 순서마저 성적에 의해 줄 세워지는 첫 회의 에피소드부터가 노골적이다. 과장된 연출로 비판을 받기도 한 이 장면은 실제로 2014년 한 지역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을 반영한 것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서열이 단지 시험성적만이 아니라 경제적 서열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에 있다. <학교 2017>의 학생들 가운데 사실상의 서열 1위는 전교 1등인 송대휘(장동윤)가 아니라 이사장 아들인 현태운(김정현)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한 EBS 다큐프라임 3부작 <공부의 배신>에서 몇 개의 장면을 빌려왔다. 지난해 방영돼 화제를 모은 <공부의 배신>은 실은 부모의 소득으로 얻은 정보력에 의해 좌우되는 입시 전형 현실을 폭로하며 공고화된 서열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 기울어진 운동장 안에서 노력밖에는 방법이 없어서 물집 잡힌 손가락과 손목의 통증을 고무 밴드와 손목지지대로 달래며 공부해가는 한 입시생의 모습은 <학교 2017>의 가난한 1등 송대휘의 피로한 얼굴에 옮겨져 있다.

 

그러나 <학교 2017>은 이러한 현실의 폭력을 단순히 전시하는 데에 그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학교의 차별을 ‘돈 없고 공부 못하는’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서열사회의 질서가 이미 내면화된 풍경을 드러낸다. 은호와 사랑(박세원)이 자꾸만 망상에 빠져드는 것도 서열사회의 맨 밑바닥에 위치한 그들의 무력한 현실을 증명한다. 이런 점에서 <학교 2017>의 자매 프로그램은 사실 Mnet에서 방영 중인 극한 서바이벌 프로그램 <아이돌학교>인지도 모른다. 출연자들을 A등급에서 F등급으로 구분하고 피라미드 모양 세트로 그 서열을 적나라하게 전시해 비판받았던 <프로듀스101>에서 한발 더 나간 <아이돌학교>는 실시간 순위 공개를 통해 출연자들의 공포를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학교 2017>에서 목격하는 것은 바로 그 무한서바이벌의 ‘최종 막장형’이 불러온 황폐한 판타지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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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먼저, 초대받아 보고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조금 죄송하지만, 영화 <덩케르크>는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봐야 제격이다. 죄송하다고 말한 이유는, 아이맥스 상영관이란 필름 영화 최고의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상영 시스템이지만 사실, 보편화되어 있거나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 <덩케르크>가 아이맥스와 65㎜ 필름 카메라로 촬영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이미 관객들 사이에서는 아이맥스 영화관 예매 열풍이 불고 있다. 적어도 <덩케르크>만큼은 극장에서 그리고 아이맥스 전용 상영관에서 봐야 한다는 공감이 형성된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는 한국 영화계에 ‘플랫폼’이라는 낯선 용어를 일상어로 전달하는 데 한몫을 했다. 봉준호 감독과 영화 <옥자> 입장에서야 이런 현상이 반가울지 당혹스러울지 모르겠으나, 영화 상영 시스템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이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옥자> 때문에 격렬해졌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말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옥자>는 상영관이 아니라 집에서 보는 콘텐츠이다. 그럼 이런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TV에서 볼 수 있는 드라마나 혹은 VOD와 도대체 영화관 영화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와 같은 질문 말이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사실주의 및 아날로그 영화의 장인으로 불린다. 이 호명엔 몇 가지 맥락과 의미가 숨어 있는데, 여기서 말한 사실주의란 소재만 두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그가 연출한 <인터스텔라>나 <인셉션>은 현실에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아예 현실적 감각으로는 체험하기 어려운 허구적 세계를 다루고 있다. 배트맨과 조커가 등장하는 <다크 나이트>는 또 어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실주의의 장인으로 불리는 까닭은 최대한 눈속임으로써의 영상기술의 사용을 자제하기 때문이다. <인셉션>에서 거리가 폭파하는 장면은 직접 폭발물로 연출했고, <인터스텔라>의 대규모 화재나 먼지 폭풍도 사람의 손으로 재현해냈다. 영상물을 적당히 컴퓨터 그래픽으로 손봐 복사하기, 붙여넣기를 하지 않고, 찍고 싶은 장면을 사실적으로 구성한 뒤 그것을 촬영했던 것이다. 말 그대로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는 재현(representation)과 모방(mimesis)의 가치를 신봉한다.

 

봉준호 감독 역시 필름 카메라와 사실적 재현을 사랑하는 연출자로 잘 알려져 있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이 암시하듯 봉준호 감독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시각적 재현의 사실성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쉽게도 봉준호 감독에게는 <설국열차>가 마지막 필름 영화였다고 한다. 기술의 발전과 편리성의 확장으로 이제는 아날로그 필름으로 작업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 것이다. 마치 필름 카메라가 취향으로 남고 실용성에선 거의 모두 디지털 카메라로 대체되었듯이 말이다.

 

그런데 <덩케르크>를 보자면 역시 영화는 소재, 이야기, 구성, 배우 모든 요소들을 다 차치하고 우선 아름다운 볼거리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아이맥스 스크린에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는 순간 그 어떤 것과도 비교 불가능한 압도적 숭고함을 체험하게 된다. 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필름과 아이맥스 카메라를, 그리고 왜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되었던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고집했는지 저절로 공감하게 된다. 최대한 실재에 가깝게, 그건 우리가 스크린 위에 담겼던 첫 번째 영상물, 첫 번째 영화를 보고 느꼈던 그 감동의 실체이기도 하다.

 

물론 필름 카메라나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다고 해서 아무나 이런 리얼리즘의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다. <덩케르크>의 가장 의미 있는 지점은 바로 이 뛰어난 영화 촬영술을 전쟁의 스펙터클 즉 화려하고, 사실적인 전투 장면의 노출에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점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후 우리에게 전쟁영화는 사실감 넘치는 전장의 스펙터클화에 치중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옆에서 총격을 받아 눈이나 머리가 관통당하고, 장기가 훼손된 채 울부짖거나 잃어버린 다리를 붙들고 울고 있는, 전장의 초근접 촬영술과 그것의 재현이 바로 전쟁영화의 문법처럼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헥소고지>든 <연평해전>이든 최근의 전쟁영화들은 이렇듯 관객들에게 당시의 처참한 상처들을 스펙터클로 활용해왔다.

 

하지만 <덩케르크>는 그 카메라를 공포로 옮겼다. 스펙터클을 구경하는 관객의 공포가 아니라 전장에 있었을 그들, 그들의 개연적인 공포 말이다. 이 시점 이동을 통해 덩케르크의 생존자들은 대단한 생존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어쩌면 그저 운이 좋아서 생존한 사람들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덩케르크 해안에서 사망한 병사들이 나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운이 나빠서 죽은 것과도 같다. 사람의 생과 사를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막막함. 그 처절한 무력감이야말로 전쟁의 공포이다. 전장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나 지혜만으로 삶을 지속할 수 없다. 생과 사가 우연에 맡겨지는 것, 사실 그게 부조리가 아니고 무엇일까?

 

우리가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 것들은 이런 것일 테다. 단순히 화려한 스펙터클이나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노출적 볼거리가 아니라 너무 똑같아서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일상을 한 번쯤 멈추게 하는 자극, 그래서 그 자극이 삶을 한 번쯤 돌아보게 하는 신선한 정서적 환기. 만약 이런 것들이 여전하다면 사람들은 영화관으로 가는 수고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강유정 |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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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요즘처럼 냉면이 화제가 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냉면에 대해 따따부따한다고 해서 ‘면스플레인(면+explain)’이라는 부정적 뉘앙스의 신조어도 유행한다. 평양(식)냉면이 진짜 냉면이라는 경도된 생각이 이른바 미식가나 ‘좀 먹어주는’ 애호가들 사이에서 퍼질 정도다. 평양냉면이 냉면의 시대를 연 것은 맞다. 동시에 세계에 퍼져 있는 우리 민족은 제각기 냉면을 먹고 있다. 다른 조리법과 다른 맛을 가진 상태로 말이다.

 

저 멀리 일본 북쪽, 모리오카라는 지방도시에서도 그렇다. 인구가 13만명이라는 이 작은 도시에서는 자그마치 450여군데의 식당에서 냉면을 판다. 한국식(조선식) 또는 평양식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그중에서 우리 동포가 문을 열어 수십년의 역사를 가진 집만도 여럿이다. 삼천리, 명월관, 식도원, 뿅뿅사, 성루각….

 

모리오카에는 3대 명물 면이 있다. 완코소바, 자자멘, 그리고 냉면이다. 단연 냉면이 가장 일상적인 음식으로 유명하다. 한국식 불고기집(야키니쿠)에서는 어디든 냉면을 팔기 때문이다. 1954년, 함흥 출신 재일동포가 우연히 이 도시에 이주하여 먹고살기 위해 ‘식도원’이라는 불고기집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그의 차남 아오키(靑木)에 의해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후발주자인 여러 동포들의 식당에서 냉면을 다루면서 널리 퍼졌다.

 

우리 혈통에 의해 냉면의 씨앗이 움튼 것이다. 이 지역민들은 이 냉면을 ‘헤이조 레이멘’이라고 부른다. 헤이조는 평양(平壤)의 일본식 발음이다. 물론 모리오카 시민의 입맛에 맞게 개량되면서 평양식과는 사뭇 다른 맛으로 현지화되었다. 그러나 냉면 면발과 육수에 깃든 혈연적 유전자는 여전히 살아 있다. 육수라는 한국어를 쓰고 있으며 깍두기 같은 것을 담가서 면에 올려 먹는다. 분틀을 써서 압출하는 식의 제면법도 우리와 똑같다.

 

모리오카 냉면 맛을 처음 본 한국인은 평가가 엇갈리기도 한다. 한국의 평양냉면과 달리 면발이 쫄깃하기 때문이다. 메밀 대신 전분과 밀가루로 면을 뽑는 까닭이다. 기실 서울의 평양냉면도 이미 서울화된 것이니 제각기 뿌리내린 곳에서 다르게 변화해 왔다고 해야 맞다.

 

당대의 북한식 평양냉면은 면발이 상당히 쫄깃하다. 식초와 겨자도 듬뿍 친 육수의 맛은 자극적이다. 서울에서 유행하는 냉면과는 다른 맛이다. 그러니 서울사람들에게 표준화되다시피한 ‘슴슴한 육수와 툭툭 끊기는 메밀면’이라는 공식은 오히려 ‘오리지널’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많은 남한 사람들이 평양과 금강산, 개성에서 냉면을 맛볼 수 있었다. 남북관계가 유연했을 때의 이야기다. 옥류관과 평남면옥, 유경호텔과 고려호텔의 냉면 맛이 회자되었다. 어쩌면 남북관계는 냉면을 통해서 다시 복원될지도 모른다. 냉면세계대회 같은 건 어떨까. 모리오카와 미국과 중국, 남북한의 냉면이 다 모이는 일은 대단히 재미있을 것 같다. 모리오카 냉면을 먹으면서 든 생각이다. 도대체 우리에게 냉면이란 무엇인가 하는 쩌릿한 감동 같은 것이었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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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축학개론>의 서연(수지)과 승민(이제훈)은 빈집에서 첫 데이트를 한다. 데이트인 줄 모르고 하는 데이트이다. 자신이 사는 동네를 탐색하라는 과제를 하다가 같은 동네 정릉에 사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났고, 정릉 토박이인 승민이 제주도가 고향인 서연에게 이곳저곳 안내를 해주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서연의 마음을 단번에 끈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빈집, 버려진 집이다. 승민은 주인이 없는 곳이라 들어가기 망설이지만 서연은 “뭐 어때?”라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두 사람의 성격과 닮아 있다. 서연은 그렇게 빈집의 문을 요란한 소리로 열고 들어가, 죽어 있는 시계태엽을 감아 살려 준다. 승민은 주인 없는 물건에 손을 댔다고 겁내지만, 서연은 또 한 번, 뭐 어때 죽은 거 살려준 건데, 라고 말한다. 그때, 승민의 마음속 첫사랑의 시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흐르기 시작한다. 마치 죽어 있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처럼.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한 장면.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둘이 그렇게 쓸모없는 공간, 말하자면 등기도 되지 않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곳만 골라가며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이다. 다음 만남에서 두 사람은 개포동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서울을 내려다보며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나눠 듣는다. 풍광이 너무나 아름답지만, 옥상은 추억을 쌓되 살 수는 없는 곳이다. 그리고 오래되고 버려진 역사에 가서 철길을 걷고 미래를 이야기하고, 마침내 첫 키스를 나눈다. 그나마도 서연이 잠들었는지, 잠든 척했는지 모를 그런 순간에 벌어진 첫 입맞춤이다. 두 사람의 기억은 불균형하다. 두 사람이 나눈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누군가에겐 너무 소중하지만 누군가에겐 그저 이야깃거리에 불과하다.

 

두 사람이 데이트를 나누는 공간들은 그렇게 쓸모가 없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공간이다. 어쩌면 추억의 아름다움은 쓸모와 반비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는 이처럼 은밀한 기억을 나누는 장소는 대개 무쓸모하다. 경제적으로 봐서도 가치가 없고 등기하거나 서류로 만들 수 없는 빈 곳이 많은 것이다. 가령, 강동원 주연의 <가려진 시간>에 주요 테마로 등장하는 공간도 그렇다. 두 아이들이 서로의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고, 비밀을 공유하던 집 역시 이곳저곳이 부서진, 버려진 집이다. 그렇게, 소중한 것들은 등기되지 않는,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니, 어쩌면 정말 귀중한 기억들은 그렇게 버려진 곳에 가만히 보관되고, 쌓이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기형도의 시 ‘빈집’의 한 구절처럼 가엾은 내 사랑은 빈집에 갇히는 것이다.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보고 난 첫 느낌은 바로, 그렇게 잊혀져 있던 첫사랑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첫사랑은 어쩌면 실패하게 될 운명일지도 모른다. 성큼성큼 발소리를 내며 걸어 들어온 서연의 다가옴이 사랑의 시작인 줄 모르고 하루를 보낸 승민처럼, 어쩌면 노무현 시대를 지났던 우리들도 그렇게 그게 사랑인 줄 모르고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노무현입니다>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하지만 상당히 편파적이고, 주관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큐멘터리의 편파성과 주관성은 모순이며 역설이다. 그러나, <노무현입니다>에서만큼은 그 편파성이 꽤나 설득력이 있다. 말했다시피, 이 영화는 사랑인 줄 모르고 지나쳐 버린 누군가가 시간이 흘러 뒤늦게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사후적 고백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고백은 사적이면서, 주관적이다. 그리고 기억은 어떤 의미에서건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마치 버려진 역사에서의 입맞춤에 대한 기억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듯이.

 

말하자면 <노무현입니다>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정치적 공과나 사법적 진위를 가리는 작품이 아니라 노무현이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의 재구성이다. 아니 회고를 넘어서 어쩌면 살아남았기에 매일 조금씩 달라지고, 변할 수밖에 없는 남아 있는 자들의 회상이자 뒤늦은 고백이다. 노무현을 회상하는 이들의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진 장면들에서, 누구 하나 눈빛이 촉촉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걸 두고 과장이나 연출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정면을 마주하는 그 정직한 촬영방식은 직접적으로 그 감정을 전달해 준다. 좌절과 기쁨의 순간을 기록해둔 장면들은 노무현 개인에 대한 고증이라기보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던 기억의 편린을 다시 꺼내준 것에 가깝다. 관객들이 마주하는 것은 과거의 어떤 사실이 아니라 잊고 있던 어떤 감정이다. 노무현을 통해 뜨거웠던 나, 그런 나와 다시 마주하는 것이다.

 

첫사랑부터 완숙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첫사랑엔 서툴고, 또 실수투성이이다. 그렇게 해도 될 줄 알고, 첫사랑엔 쓸데없는 고집도 피우고, 해서는 안될 말도 내뱉곤 한다. 시간이 흘러, 삶을 알고 난 후 그 첫사랑의 회복불가능을 체험하고 나서야 우리는 그것이 첫사랑이었음을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여기 이렇게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7월5일 개봉한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주인공 피터 파커도 목하 첫사랑 중이다. 학교에서 가장 아름답고, 상냥하고 열성적이며 똑똑하기까지 한 그녀는 누가 봐도 첫사랑의 주인공이 될 만하다. 과연 그 첫사랑은 어떻게 될까.

 

돌이킬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은 아마도 새 희망의 정수리에 부어야 마땅할 것이다. 한용운의 시처럼 말이다. 너무 쉽게 믿음을 버리지 않고, 너무 아프게 사람을 흔들지 않고, 한 사람에 대한 열정을 너무 냉정하게 미움으로 바꾸지 않고, 그렇게 조금은 시간을 두고 바라보는 것, 그게 바로 두 번째 사랑의 태도가 아닐까? 문득, <스파이더맨>을 보며, 엉뚱하게도,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의 실패가 생각나고 말았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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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을 보면 흥미로운 광고가 많다. 계절에 따라 주력 물건도 바뀌었다. 1960년대는 전후의 혼란을 딛고 안락한 가정에 대한 욕망이 극대화되던 시기였다. 겨울에 난로 선전(예전에는 상업적인 광고물도 주로 선전이라고 불렀다), 여름에는 아이스박스였다. 냉장고는 1965년도에 금성사에서 눈표라는 이름으로 첫 제품을 출시했는데, 한동안 아이스박스와 같이 팔렸다. 냉장고는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아이스박스는 1980년대까지도 가난한 집 부엌과 포장마차의 냉장고 노릇을 했다. 동네마다 얼음장수가 까만색 짐자전거에 얼음을 잔뜩 싣고 배달하던 장면도 생각난다. 재미있는 건 그들이 겨울에는 석유, 여름엔 얼음을 팔았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될 일이다. 이런 ‘양수겸장’업은 일본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우리에게 근대를 강제 이식한 일제의 영향력은 그처럼 오래갔다.

 

 

우리 집은 1980년대 초에 냉장고를 샀다. 그 전까지 부엌에는 찬장과 아이스박스가 여름을 지켰다. 얼음 50~100원어치면 하루를 버텼다. 스티로폼으로 형을 짜고, 겉에 시원한 느낌의 푸른색 비닐을 입힌 저가의 아이스박스였다. 고급형은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제품이 있었다. 어쨌든 아이스박스의 냉기를 오래 보존하려고 묘안을 짜내는 게 엄마의 일이었다. 국이나 찌개, 뜨거운 반찬을 만들면 차가운 펌프 물에 식혀서 넣는 건 기본이었다. 여름을 나면, 대개 아이스박스는 집 안 구석으로 밀려났다.

 

우리나라만 아이스박스를 쓴 건 물론 아니었다. 1960년대까지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의 더운 지역에서는 아이스박스가 고정식 부엌 가구로 사용되었다. 부엌에서 길 밖으로 문을 달아 장사꾼이 부엌 안으로 얼음을 쏟아넣고 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나중에 나온 고급형 아이스박스는 냉장고처럼 생긴 모양이었다. 냉기의 특징, 그러니까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효과를 이용하기 위해 나무와 철로 짠 틀 위에 얼음을 넣도록 고안했다.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사가 가정용 전기냉장고를 양산할 때, 그 모양은 사실 얼음 넣는 아이스박스와 암모니아 가스를 이용한 구식 냉장고를 모방했다고 한다.

 

냉장고의 보급은 우리 삶의 그림도 다시 그리게 만들었다. 집집마다 냉장고를 갓 사들이던 1970년대의 여름은 가루주스가 대유행했다. 미제장수가 파는 오렌지맛 가루를 찬물에 타서 얼음을 띄워내는 게 중요한 접대였다. 나중에 국산이 나와서 수요를 크게 늘렸는데, 남대문 도깨비시장이나 미제장수가 취급하는 물건만 못했다. 이미 설탕이 꽤 들어 있는 제품인데도, 백설탕을 듬뿍 넣고 냉동고에서 ‘직접’ 얼린 얼음을 넣어 만든 그 주스는 한 시대를 풍미했다. 아이들 간식으로 ‘아이스바’를 만드는 것도 유행을 탔다. “이제 사지 말고 집에서 직접 만들어 드세요”라는 선전 문구에 다들 아이스바를 만드는 틀과 속을 채울 가루를 샀다. 그 인기는 물론 오래가지 않고 시들해졌다. 아빠가 퇴근길에 사오는 유지방이 듬뿍 든 ‘정통’ 아이스크림 맛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냉장고는 점점 더 커졌고,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이든 무엇이든 그 공간을 꽉꽉 채우는 재미로 여름을 났다. 요즘은 전문 요리사에게 냉장고를 ‘부탁’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엄마가 지성을 들여 관리하던 옛 아이스박스가 새삼 생각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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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시대를 반영하고 수사는 시대를 해부한다.’ <특수사건 전담반 TEN> <실종느와르M>의 이승영 PD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한 이 문장은 한국형 범죄수사극의 진화라 불리는 작품들을 관통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바로 ‘동시대성’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미국드라마 열풍과 함께 시작된 국내 장르물 유행이 ‘미드’ 흉내내기에 그쳤다면, 2010년대부터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접목한 웰메이드 수사물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비로소 한국형 장르드라마 수작 계보가 만들어진다. 그 신호탄 같은 작품이 2011년 방영된 김은희 작가의 메디컬수사극 <싸인>이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부검 조작사건으로 시작한 드라마는 우리 시대의 모순을 해부하는 예리한 비판의식으로 한국형 범죄수사극의 모범을 제시했다.

 

그런가 하면 2012년 방영된 이승영 PD의 <특수사건 전담반 TEN>은 범인 추적 못지않게 희생자의 상처에 집중하며 갈수록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시대의 그늘을 포착한 수작이었다. 같은 해 방영된 박경수 작가의 범죄스릴러 <추적자>는 정치, 자본, 언론이 거대한 커넥션을 구축해 한 소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은폐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 시대 지배권력의 어두운 속성을 고발했다.

 

검찰 스폰서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줄거리의 드라마 <비밀의 숲>의 포스터.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공권력의 폭력이 일그러뜨린 한 가족의 비극을 그린 김지우 작가의 범죄스릴러 <상어>(2013), 연평도 포격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김은희 작가의 정치범죄스릴러 <쓰리데이즈>(2014)처럼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으로까지 문제의식을 확장한 작품들도 나타났다.

 

꾸준히 진화해오던 한국형 범죄수사물은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변화된 주제의식을 선보이게 된다. 동시대성에 민감한 장르로서 필연적으로 참사의 후유증이 깊숙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로 2016년작 <시그널>은 세월호 참사처럼 진실이 채 밝혀지지 않은 미제사건을 통해 ‘사랑하는 가족이, 연인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니까 잊을 수도 없는 지옥’을 그렸다. 아이의 의문의 죽음 이후 매일같이 경찰서 앞을 지켜온 유족의 애타는 절규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명백하게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범인의 단죄 목적보다 억울한 희생자와 피해자를 위한 진실 찾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세월호 이후 범죄수사극의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올해 초 방영된 <보이스>도 여기에 속한다. 112 신고센터 대원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 작품은 독특하게 피해자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수사극이다. 남다른 청력을 지닌 신고센터장 강권주(이하나)와 피해자들이 나누는 대화는 세월호 희생자들이 남긴 음성 기록들을 떠올리게 하는 한편 약자일수록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는 현실의 부조리를 환기시킨다.

 

이러한 특징은 <터널>에서도 선명하다. 30년 전의 장기미제사건을 추적하는 이 작품은 범인을 잡는 순간 이야기가 종결되는 수사극과 달리, 유가족 한 명 한 명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세월호 이후의 범죄수사극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특징은 악의 속성이다. 기존 수사물들은 시대의 질병을 그대로 반영한 괴물에 가까운 악역들을 범인으로 내세우곤 했다. 제일 흔하게 등장하는 재벌, 정치인 소시오패스는 약자를 잔혹하게 짓밟는 부패한 권력의 속성에 대한 은유였다. 하지만 최근 범죄수사극에서 악은 평범한 일상성을 띤다. 예컨대 <터널>의 진범은 “평범한 이웃의 얼굴”을 하고 있어 더욱 소름 끼쳤다. “살인범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고 살인 또한 하루아침에 이유 없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범죄심리학 교수 신재이(이유영)의 말은 특별한 괴물이 아니라 누구라도 전염될 수 있는 우리 시대 악의 속성에 대해 경고한다. 박경수 작가의 최근작 <귓속말> 또한 ‘아무도 모를 한 번의 비윤리적 타협’이 거대한 범죄로 발전하는 악의 연쇄를 통해 같은 문제의식을 드러낸 바 있다.

 

현재 방영 중인 <비밀의 숲>도 마찬가지다. 검찰 스폰서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이 드라마는 악의 모호성을 이야기한다. 흔히 전형적인 ‘악의 최종 보스’처럼 보이는 재벌그룹 회장(이경영), 부패 검사들이 등장하지만, 정작 드라마는 모든 인물을 예외 없이 범죄 용의자 선상에 올려놓는다. 문제적 개인이 아니라 검찰 조직 시스템 자체의 부패를 비판하기 위해서다. “우린 검사야. 뇌물을 받기도 하고 접대가 문제가 되기도 하지. 전관예우도 바라고. 죽도록 책만 파다 갑자기 권력을 얻고 물불 못 가리기도 하지만 우린 검사야. 법을 수호하기 위해 여기 왔어. 정의를 지키기 위해. 나에겐 믿음이 있어. 이 건물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는 믿음. 수호자와 범죄자. 법복과 수인복. 우린 그 어떤 경우에도 단죄 내려야 할 부류와는 다르다는 믿음.” 스폰서 검사 이창준(유재명)이 당당하게 내뱉는 대사는 부패를 인지조차 못할 정도로 뿌리 깊은 적폐를 나타낸다.

 

이 같은 악의 묘사는 세월호 참사의 비극적 속성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은폐하고 유족들을 억압한 것은 분명 부패한 권력이었지만, 유족들의 절규를 지겹다고 외면하며 경제적 논리를 내세워 세월호 인양을 반대한 목소리가 평범한 시민들 가운데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최근의 범죄수사극은 바로 이러한 시대의 비극을 해부하며 상처 치유를 시도하는 동시에 마비된 윤리의식에도 경종을 울린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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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날이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다행히도 대개 분별 있는 관찰자이기 때문에 꽤나 합리적으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판단한다. 보이지 않는 손을 주창한 애덤 스미스는 먼저 분별 있는 관찰자로서의 인간을 믿었다. 법이 아니라도 가해자와 피해자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상식이라는 분별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도덕감정을 기반으로 해서 인류는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을 마련한다. 타인들과 특별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을 때, 그 분별력은 더욱 공정해진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피해자들에게 공감을 하고, 위로를 건네고, 격려를 보탠다. 최근에 벌어진 한 사립 초등학교의 폭력 사태만 해도 그렇다. 네 명의 아이가 해를 가했고, 한 명의 아이가 해를 입었다. 그런데,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가 없다. 여론이 들끓었다. 분별 있는 관찰자로서 사람들은 공평한 처사를 요구했다. 그 누구도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나와 관계없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일에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참여하곤 한다.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엘르>의 한 장면.

그런데, 놀랍게도, 누군가는 그 특정한 가해자의 편에 서기도 한다. 이때 활용되는 논리 중 하나는 그 가해자도 ‘어린이’이며, 이런 논란으로 인해 사건과 관계없는, 같은 초등학교의 선량한 다수가 피해를 입고 있다는 식이다. 심지어, 피해자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까지 들린다. 그런데, 이런 논리들은 이미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피해자의 경험을 나와 무관한 ‘일회적 사고’로 만들고 가해자의 폭력을 인간적 실수로 환원하는 것, 우리는 지금껏 수많은 사건들이 이런 식으로 희석되는 순간들을 목격해왔다. 그래서 엉뚱한 생각이 든 것이다. 가해자임이 분명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누가 더 억울한지 서로에게 고변하도록 해보면 어떨까? 가해자들끼리 모여서, 네가 더 나쁘다 넌 좀 억울하겠다와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게 하면 어떨까? 아마 서로 자기만 억울하고, 다른 가해자들은 뻔뻔하다며 더 호되게 비난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 말이다.

 

폴 버호벤 감독의 <엘르>는 그런 점에서 피해자와 그들에게 쏟아지는 다양한 시선의 폭력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 미쉘(이자벨 위페르)은 어느 날 갑자기 복면을 쓴 괴한에게 폭행을 당한다. 그런데, 이 여성의 다음 행동이 놀랍다. 미쉘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스스로 폭행범과 맞서고자 한다. 무섭지도 않을까 싶지만, 사실 이미 그녀는 세상이 피해자를 어떤 방식으로 한 번 더 가해하는지 경험한 바 있다. 열한 살 소녀였던 시절, 미쉘은 아버지의 엽기적인 살인으로 세상에 무차별적으로 두드려 맞은 경험이 있다. 그녀 역시 피해자였지만 아무도 그녀를 피해자로 보아주지 않았다. 살인자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감독이 미쉘이라는 인물을 그려나가는 방식이다. 미쉘은 여러 면에서 그렇게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이지 않다. 게임 회사 대표인 그녀는 더 잔인하고 선정적인 게임을 만들어내라고 조직원들을 닦달한다. 남자 직원들을 다루는 모습을 보자면 마초적인 남성 상사 그 이상이다. 심지어 미쉘은 오랜 친구를 속이고 그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그거로도 모자라,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이웃집 부부를 초대해놓고는 식탁 아래로 발을 뻗어 그 이웃을 유혹하기도 한다. 심지어, 이웃집을 훔쳐보며 음란한 상상을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미쉘이 그렇다고 해도, 대낮에 복면을 쓰고 침입한 괴한에게 맞고 유린당해도 되는 것인가? 불륜을 저지르니 독실한 가톨릭 신자에게 성폭행을 당해 마땅한가? 다시 말해, 그녀가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삶과 다르게 산다고 해서 미쉘이 폭력의 희생자라는 사실이 바뀌는가 말이다. 당연히 그렇지 않다. 미쉘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그녀는 대낮에 자신의 응접실에 있다가 괴한에게 폭행을 당한 희생자가 맞다. 개인의 도덕과 윤리의 영역에서의 염결성 문제와 피해, 가해의 문제는 엄격히 분리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피해 여부와 관련 없는 문제들을 동원해 사실을 흐리고, 피해자들을 엉뚱한 방식으로 괴롭히곤 한다. 만일, 미쉘이 공공의 권력에 기대, 말하자면 경찰에 신고하고 그래서 다수의 언론에 보도되었더라면, 선정적인 게임을 만드는 사업자이자 불륜을 저지르는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피해 여부와 무관하게 다뤄질 수 있었을까? 혹시나 피해 사실은 어느새 잊혀지고 피해자의 과거사와 도덕성에 대한 여론만 들끓지는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피해자들을 이미 보아왔다. 가령, 어떤 사람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울분에 대해 더 많은 합의금을 원한다는 모욕적 발언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세월호 유족들을 향해 개인적 사고에 불과하며 그 사고를 통해 사적 이익을 얻으려 한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혼을 하고, 어떤 사람은 실직자라는 식의 매우 사적인 삶의 영역을 끌고 와 피해 사실과 섞어 그 경계를 흐리게 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분별력 있는 관찰자로서의 자리를 포기하고 진실과 무관한 편견들을 폭력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평소 행실이 올바르지 않은 피해자가 있듯 평소에 선량했던 가해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피해 사실과 분리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선, 소수의 그리고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만약, 인간에게 다른 사람이 느끼는 불안, 공포, 분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 대해 허락된 공감의 능력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더더욱 사태에 대해 스스로 분별 있는 관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사법적 정의를 실현하는 인간으로서의 최소 요건일 수 있을 테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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