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먹고 다니냐?” 유력한 용의자를 앞에 두고서도 놓아주어야만 하는 시골 경찰이 그에게 묻는다. 살인도 일이랍시고, 그렇게 열심히 하고 다니는데, 그래 밥은 먹고 다니냐, 라고 말이다. “라면 먹고 갈래요?” 좀 더 시간을 나누고 싶은 여자가 데이트 상대인 남자에게 들어오라는 말 대신, 라면 먹고 가라고 제안한다. 여기서 밥과 라면은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그 의미가 아닐 것이다. 여기엔 사전에 없는 다양한 맥락과 행간의 함의가 담겨 있다.

 

영화 <공작>의 한 장면.

 

유독 한국 영화와 소설에는 밥을 먹자고 제안하거나 식사를 함께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때로는 꽤나 진지하게 다뤄지는데, 하재영 소설 <같이 밥 먹을래요>, 윤고은 소설 <일인용 식탁>은 혼자 밥먹기의 곤란함과 어려움을 주제로 삼고 있다.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 역시 그런 측면에서 밥먹기를 주제로 한 이야기다. 먹방 예능, 인터넷 1인 방송까지 따지자면 정말이지 먹는 것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최근 한국 영화에서 밥 먹는 장면은 삶과 정치 사이 애매한 경계의 긴장을 보여줄 때가 많다. 영화 <독전> <공작>만 해도 그렇다. <독전>의 그 유명한 장면, 마약상으로 위장한 경찰이 아시아 마약시장의 거물 진하림(김주혁)을 만나는 장면을 보자. 거래 성사를 위해 원호(조진웅)는 상대방이 먹는 것들을 따라 먹으며 호감과 신뢰를 얻고자 한다. 상대방은 독주에 곁들여 사람 눈알까지 씹어 먹으며 위세를 부린다. 여기서 신뢰는 상대가 먹는 것을 나도 먹는 식의 원시적 방법으로 확보된다. 이들의 식탁은 음식이 놓여 있을 뿐 목숨을 건 전장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우리가 “같이 식사 할래요?”라고 묻는 것은 단순히 밥을 나눠 먹는 게 아니다. ‘밥’은 사회생활의 일부다. 회사 점심시간도 업무의 일부이며 회식 자리는 말할 것도 없다. 누군가와 관계를 새롭게 맺거나 거래를 트고 싶을 때, 밥을 먹자는 제안으로 뻔히 보이는 속내를 포장하곤 한다. 제안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게 단순히 밥먹자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영화 <공작>에서 공작원 흑금성이 첫 거래를 성사시키는 곳 역시 중국의 어느 호텔의 조용한 식당이다. 술을 주고받으며 한끼 식사를 나누는 것 같지만 그 식사는 핵, 돈, 목숨이 복잡하게 뒤얽힌 정치적 거래이다. 흑금성은 혹시라도 정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유언까지 대동해 술을 거절하고, 작전용 녹음기를 발목에 숨긴 채 목숨을 건 연기를 한다. 말이 식사 자리이지 뭐 하나라도 먹었다가는 곧바로 체하고 말 듯한 위기 상황과 다르지 않다.

 

눈길을 끄는 것은, 북한 고위 간부와 남한 사업가로 위장한 첫 만남이 브로맨스로 녹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도 똑같이 ‘밥’을 먹는데, 이번엔 북한 간부 이차장의 집에서, 이차장의 아내가 만든 밥을 나눠 먹는다. 녹음도, 계산도, 작전도 없는 이 자리에서 그들은 드디어 밥다운 밥을 먹는다. 이러한 장면은 영화 <강철비>에서도 연출되는데, 청와대 비서관과 북한 군인이 잔치국수를 나눠 먹는 장면이 그렇다. 적과의 동침보다 어려운 게 적과의 한끼라도 되는 듯, 그렇게 한끼를 나눠 먹고 난 이후 그들은 적이 아닌 동지로 서로를 믿게 된다. 거래를 트는 게 아니라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러한 식사의 행간은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어느 가족>에 명백히 그려져 있다. <어느 가족>의 원제목은 <만비키 가족>인데, 만비키는 일종의 좀도둑질 내지는 좀도둑을 의미한다. 이 가족은 애초에 범죄로 형성되었다. 할머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가족으로 삼고, 부모 역할의 두 남녀는 길거리에 유기된 아이들을 데려온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 아이들과 할머니를 유괴하고 납치한 혐의로 수사를 받는 젊은 여성은 “남이 버린 것을 주워 온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 가족 자체도 남의 것을 주워서 이뤄진 셈이다. 법의 관점에서 보자면 범죄지만 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법이 놓치는 사람의 할 일을 그녀가 해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줍지 않았다면 노인은 고독사했을 테고, 아이들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게 뻔하다.

 

이 다른 관점이 설득되는 지점이 바로 영화 내내 반복되는 밥 먹는 장면들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가족들은 추운 길거리를 헤매던 다섯 살 소녀와 뜨거운 고로케를 나눠 먹는다. 가족들이 모여 있는 장면 내내 그들은 무엇인가를 먹고 있다. 특별히 ‘우리 밥 먹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먹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걸 자연스럽게 나눠 먹는다. 여름엔 소면을, 겨울엔 고로케를 먹는 게 다를 뿐, 그렇게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밥을 나눠 먹는 것이다.

 

문제는 정을 나누는 식사 장면이 한국 사회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매우 드물어졌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밥 먹는 장면은 정보다는 이익을 도모하고, 거래와 협잡을 공유하는 기회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내부자들>의 그 유명한, 나체 식사 장면도 그럴 것이다. 서로를 믿지 못해 발가벗어야만 술과 음식을 나눌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인간’의 식사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과거 향수 속에서, 이방의 식탁에서 따뜻한 밥 한끼를 목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만큼 각박한 현실을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정말이지, 따뜻한 밥 한끼만을 위한, 목적 없이 안부를 전하기 위한 그런 식사의 온도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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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컬 드라마와 법조인 드라마는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르물 양대 산맥이다. 그런데 메디컬 드라마는 최근 몇 년간 인기가 다소 주춤한 상황이다. 2016년 방영된 SBS <낭만닥터 김사부>를 마지막으로, 시청률과 작품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화제작은 찾아보기 어렵다. 침체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과거의 로맨스나 판타지로 회귀한 것이 결정적 원인이라 본다. 실제로 근래 방영된 메디컬 드라마는 독특한 소재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 이야기로 대중과의 공감대 형성에 실패했다. MBC가 메디컬 드라마 명가의 부활을 선언하며 야심차게 내놓은 <병원선>(2017)은 배라는 색다른 의료 공간을 찾았으나 결국 로맨스로 표류했고, 역시 교도소라는 특이한 공간을 내세우고 장기밀매를 소재로 다룬 tvN <크로스>(2017)는 막장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자극적인 이야기로 빠지고 말았다.

 

JTBC 드라마 <라이프>의 한 장면.

 

이런 가운데 지난달부터 방영을 시작한 JTBC 월화드라마 <라이프>가 메디컬 드라마 장르의 혁신작으로 떠오르고 있다. <라이프>는 거대재벌이 인수한 국내 톱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신임 총괄사장 구승효(조승우)와 그에 반발하는 의사들의 갈등을 그린다. 얼핏 보면 병원 내 권력 다툼이라는, 기존 메디컬 드라마의 진부한 공식을 따라가는 것 같지만 속내는 전혀 다르다. 이 드라마의 진정한 정체성은 2010년대 초반 MBC <골든 타임>(2012)이 구축한 메디컬 드라마의 새 트렌드 안에 있다. 응급의학과를 중심으로 한 <골든 타임>은 국가 의료복지시스템의 근본적 모순을 겨냥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 드라마 이후 메디컬 드라마는 내부 갈등 위주의 이야기를 넘어 병원 바깥의 의료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극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다. 소아외과를 배경으로 저소득층 아동에 대한 의료서비스의 열악한 실태와 영리병원 문제를 다룬 KBS <굿닥터>(2013), ‘대한민국 최상위 0.1%의 고객’을 대상으로 한 VIP 병동을 통해 계급 갈등을 담아낸 SBS <용팔이>(2015), 메르스 사태와 백남기 농민 사인 조작 사건 등 더 적극적인 동시대 의료 이슈를 반영한 <낭만닥터 김사부> 등이 이 같은 트렌드를 이어갔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후 등장한 메디컬 드라마들이 하나같이 과거로 퇴행하며 이러한 트렌드는 어느새 사라지고 인기도 시들해졌다.

 

<라이프>가 큰 호응을 얻는 것은 작품 자체의 높은 완성도에 더해 오랜만에 재등장한 사회파 메디컬 드라마라는 공감대 때문이다. 내용도 한층 급진적이다. <골든 타임>이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의료민영화에 대한 사회적 불안과 문제의식을 에피소드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면, <라이프>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에서 사법 비리 못지않게 큰 비중을 차지한 ‘의료농단’을 직접적인 대사를 통해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이 시기에 강행된 진주의료원 폐원, 병원 영리자회사 허용, 재벌의 병원 부대사업 독점, 국립대병원 경영평가 등 노골적인 공공의료 파괴행위와 그로 인한 폐해가 드라마 곳곳에 언급되고 있다. 메디컬 드라마로서는 처음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등장하는 것도 단순히 이색적 소재 차원이 아니라 의료농단의 범위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신임 사장 구승효가 화정그룹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흘러가듯 언급한 “개인 건강정보 영리목적 사용불가 조항 2016년 8월 삭제”라는 대사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개인 건강정보 대량 판매 사건을 겨냥하고 있다.

 

드라마의 비판은 더 나아가 의료계 내부의 오랜 적폐로도 향한다. 의료농단의 책임이 당시 정부뿐 아니라 의료계의 도덕 불감증에도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상국대병원 의료진은 총괄사장 구승효의 시장주의 논리에 저항하고 환자만을 생각하는 정의로운 집단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이익 논리에 물든 이기적인 집단이거나 그들만의 폐쇄적 문화에 갇혀 있는 ‘고인 물’로 그려진다. 투약사고를 둘러싼 암센터장 이상엽(엄효섭)과 구승효의 논쟁 장면이 대표적 사례다. 이상엽은 경영진의 인건비 삭감 때문에 주 100시간 넘게 근무하는 레지던트들의 과잉 노동 실태를 비판하고 이 사태가 그로 인한 실수였음을 주장한다. 이에 맞서 구승효는 그럼 ‘왜 센터장급 의사들이 진작 나서서 전공의법을 지키도록 일을 나누지 않았느냐’고 반박하고, 이 문제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범죄의 은폐와 방조에 있음을 정확히 지적한다. 구승효의 구조조정 강행에 맞서 의료진이 파업을 선언하는 장면도 연출된다. 부원장 태상(문성근)이 의료진을 대표해 이것이 ‘환자의 생명과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임을 강조할 때,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늘 타 대학 출신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흉부외과장 주경문(유재명)의 피로한 얼굴이 화면을 채운다.

 

지금까지의 메디컬 드라마는 사회고발극의 성격이 아무리 강해도 어디까지나 시청자들이 감정을 이입할 정의로운 ‘굿닥터’가 존재했다. 그러나 <라이프>는 어쩌면 이 ‘굿닥터’였을, 존경받는 원장의 죽음과 그의 비리 암시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드라마의 화자인 응급의료센터 전문의 예진우(이동욱)가 원장을 떠올리며 하는 고민이야말로 이 작품이 하고픈 말이 아닐까. “제가 아는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어떤 분이셨습니까” 하고 따지는 예진우처럼 <라이프>는 묻는다. 대한민국 의료계는 대체 어떤 곳이냐고,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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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언제 파스타가 들어왔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조선말과 대한제국 시기 열강의 공사들이 궁에 들어오고, 그들을 접대하느라 파스타가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서양 음식물을 수입한 해관(세관) 자료가 있다. 와인과 샴페인, 과자류와 국수의 수입이 있었다. 서양음식을 먹을 수 있는 근대식 호텔이 서울에 세워진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에서 구할 수 없는 물자는 주로 일본과 중국을 통해서 수입했다. 파스타는 서양인에게 중요한 음식이었다. 장기 보존이 가능하고 요리도 간편했다. 당시 어떤 조리법을 썼을지 궁금하다. 100년 넘게 흐른 지금, ‘모든 재료’가 파스타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 된장이나 간장 파스타가 있었을까. 아마도, 서양인에게 대접하는 음식이니 서양 재료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을 것이다. 토마토소스와 고기볶음, 치즈 같은 것이 올라가지 않았을까.

 

 

지금은 우리 식재료와 파스타의 융합이 흔하다. 묵은지 파스타도 있다. 곱창을 볶아 올리기도 하고, 국물 넉넉한 떡볶이 스파게티도 팔린다. 서양재료여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파스타집이 ‘이태리면집’이니 ‘이태리백반집’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은, 이런 인식의 반영이다. 외래 것을 우리 문화에 동화시켜 독자적으로 즐기는 건 이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한때 시중의 말로 유명했던 “남이사!(남이 뭘 하건 말건!)”다.

 

파스타는 우리 음식문화에 생각보다 더 깊게 들어와 있다. 굳이 그걸 이탈리아 음식이라고 전제하는 것조차 혼란스러울 정도다. 파스타집에 가면, 국수를 먹듯 후룩 후룩 하는 ‘흡입 소음’이 자연스럽다. 이탈리아에선 없는 소리다. 여기는 한국이니까, 뭐 이런 거다. 이 소음을 일본에서는 ‘누하라’라고 해서 약간의 공론이 있다. 누들 + 허래스먼트, 즉 스파게티 먹는 소리가 남에게 괴롭힘을 준다는 뜻이다. 원래 일본 국수는 소리 내서 먹는 것이 결례가 아닌데, 파스타를 먹을 때 소리를 내는 건 교양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나온 논의다. 아직 한국에서는 이런 거 없다.

 

학교 급식에 파스타가 나온 지 오래다. 아이들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더러는 밥에 딸려나오는 반찬처럼 제공된다. 무엇이든 밥반찬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일본인이 원조다. 포크커틀릿도, 햄버그스테이크도 쌀밥의 반찬으로 팔린다. 다만 “빵으로 할까요, 밥으로 할까요”는 남아 있다. 서양식인 빵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요리의 뿌리는 지켜주고 싶었던 것일까. 단체급식이 학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의 급식에도 파스타가 등장한다. 가장 흔한 건 마요네즈에 버무린 마카로니다. 마카로니 샐러드라고도 한다. 왕년에 이른바 ‘한정식’에도 나왔던 음식이다. 파스타는 밥까지 만나서 완벽하게 동양화 내지는 한국화되었다. 남은 소스에 밥을 볶아주면 좋겠다. 김가루도 넣고, 김치 다진 것도 섞어서 말이다. 한 문화는 다른 문화권으로 옮겨가면서 변형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직장인들에게 동네 파스타집의 인기 메뉴를 알려드린다. 얼큰한 속풀이 해장 파스타다. 부장님도, 이사님도 젊은 직원들 따라가서 입에 안 맞는 크림파스타 안 드셔도 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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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은 영화 <인랑>에 대한 인터뷰 중 이런 말을 했다. “어쩌면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대접을 못 받는 시대”라고 말이다. 김지운 감독은 SNS와 같은 개인 미디어에 ‘개인’의 말보다는 당위의 말들, 해야 할 말들이 더 많은 사태를 두고 이런 말을 했다. “그런 말을 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다”라며 조금 얼버무렸지만 여기에 함축된 “그런”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영화<인랑>의 한 장면.

 

지난 몇 년의 영화계를 보면 김지운 감독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택시 운전사> <1987> <강철비> <밀정> 등등의 작품을 보자면, 대개 이념과 역사 같은 큰 주제를 다룬 작품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여기엔 ‘자유주의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조국의 해방을 논하고, 민주주의를 갈급하는 상황에서 개인, 자유라니. 이건 너무 소아적이며 이기적인 단어로 간추려지고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지난 몇 년이 그랬다. 개인을 내세우기엔 지나치게 세상이 엄혹했고, 자유라는 말은 엉터리 보수에 의해 더럽게 오염되었다. 그래서, ‘나’보다는 ‘우리’에 주장을 실었고, 일탈보다는 노선을 택했다. 1990년대 이후 문학과 영화에 르네상스를 가져왔던 수많은 개인들이 모습을 바꾸고 목소리를 달리했다. 모더니스트, 염세주의자, 탐미주의자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자신을 감추거나 스스로 달라졌다. 어쨌거나 수많은 개인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이 숨거나 사라졌던 것이다.

 

김지운 감독이 자유주의자들의 대접을 논했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들, 이를테면 <컴잉아웃>이나 <달콤한 인생>과 같은 영화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라면 탄생하지 못했을 이야기들이니까. 여고생의 성적 정체성 찾기를 에로틱하게 녹여 낸 <컴잉아웃>의 정념도, <달콤한 인생>의 모욕감이나 마음이라는 모호한 감성도, 집단이나 단체의 이념으로는 결코 설명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개인의 비밀 지대다. 공개적으로 드러내긴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인간의 모순, 그런 게 문제를 일으키는 공간이 바로 개인이니 말이다.

 

2018년 여름 성수기를 두고 개봉하는 영화들을 보면, 어쩌면 이 이념의 시대가 이제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김지운 감독의 <인랑>과 윤종빈 감독의 <공작>은 모두 남북관계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다.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인랑>이 가까운 미래, 남북관계가 호전된 통일 직전을 다루고 있다면 <공작>은 역사상 처음으로 야당 출신 대통령을 갖게 된 그래서 실제로 남북관계가 호전되기 직전인 1997년 무렵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영화들의 공통점이라면 말했다시피 남북관계가 좋아지는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관계 호전이 영화적 갈등의 씨앗으로 제시된다. 남북관계 호전, 통일과 같은 역사적 변화를 대개의 사람들은 반기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누군가는 남과 북의 갈등과 분단 상태가 영원하기를 바란다. <인랑>에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이 그렇고, <강철비>에서는 북한의 강경파들이 그러하며 <공작>에서는 이권에 눈이 먼 정치 모리배들이 갈등의 지속을 원한다. 통일과 화해 분위기를 거절하는 이러한 자들은 영화적 악의 축이 되어 그것을 갈망하는 주인공과 대결한다. 영화적 허구로나 가능한 화해무드, 이 가설 아래서 영화적 이야기가 설계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이미 지난 4월 남과 북의 정상이 손을 맞잡고 군사 분계선을 넘나드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사실이다. <인랑>을 보면서, 남북 화해 무드가 우리, 남한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다는 설정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판문점에서의 정상회담과 선언이 있은 후, 심지어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이 만난 이후 마주치는 영화적 설정이라는 게 어쩐지 영 실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들, 간절히 바라는 일들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재현된 이미지들이 우리의 판타지를 실현하고, 욕망을 해소해주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점을 영화로 엿보는 것이다. 적어도 영화는 완전한 시각적 착각을 불러일으켜 주니 말이다.

 

물론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는 사이, 급속도로 전개된 회담이었고, 화해무드였기는 했지만, 우리는 TV를 통해 상상과 허구를 앞지르는 현실을 이미 목격했다. 설마 싶어 영화로 상상했던 일이 사실이 되고, 배우가 연기했던 장면을 실제 남북 정상이 TV 카메라 앞에서 실연했다. 성큼 역사가 큰 걸음을 내디디고, 환상보다 먼저 현실이 다가왔다. 늘 외계인이 공격했던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실제 비행기가 공격하는 것을 본 체험과 정반대의 의미로 놀랍고,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상상만 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말이다. 

 

한동안 긴장된 남북관계나 악의 축 김정은, 북한 핵 등은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로 환영받았다. 이 갈등을 소재로 한 수많은 시나리오가 영화계에 흡수된 것도 이러한 긴장의 여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허구보다 세다.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이념과 정치, 올바름과 정의와 같은 큰 단어들에 집중하고 있다. 세상엔 여전히 실현되어야 할 정의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김지운 감독의 말처럼 이제 다시 자유주의자들의 꿈을 들여다볼 때가 아닌가 싶다. 큰 단어들이 놓칠 수밖에 없는 미묘하고도 섬세한 개인의 감정, 이야기, 분노, 고통, 행복, 기쁨, 그런 것들 말이다. 작은 감정의 그물망으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작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들, 자유주의자들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런 이야기들을 다시 돌려줘야 할 것이다. 대열에서 낙오된 혹은 이탈한 영혼에 대한 이야기들 말이다. 다시, 자유주의자들의 섬세한 감성이 조심히 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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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후배가 귀국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재미있는 대목. “그쪽 사람들이 농 반 진 반으로 한국을 안 좋아한다고 하더라. 유럽 베이컨(삼겹살이 재료다) 값을 올렸다는 거다.”

 

한국은 세계 삼겹살의 20% 정도를 소비한다. 인구 대비 엄청난 양이다. 세계 17개국 내외에서 수입한다는 것도 이제 비밀이 아니다. 돼지를 대량으로 기르는 나라는 웬만하면 한국에 수출한다. 삼겹살뿐만 아니라 비교우위에 있는 모든 부위가 해당한다. 족발, 목살, 갈비, 등뼈 등이다. 한국에선 비싼데 외국에선 헐값인 부위다. 한때 수입 삼겹살 구분법으로 ‘오돌뼈가 붙어 있느냐’를 보라고 했다. 이젠 의미없다. 한국 기호에 맞춰 뼈를 함께 잘라 정형해서 수입한다. 수입은 냉동이라고? 아니다. 냉장도 꽤 된다. 이베리코 돼지는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스페인 명품이다. 물론 여러 등급이 있기는 하다.

 

 

어쨌든 한국의 수수한 길거리 고깃집에서 이베리코를 파는 걸 보고 유럽인 관광객이 놀란다고 한다. 대개 돼지를 세세하게 잘라 정형하지 않는 유럽에서는 한국의 특정한 기호에 맞춰 이익을 낸다. 이른바 항정살, 가브리살 등이다. 일본만 해도 흔한 등심 돈가스가 약간 다르다. 한국은 등심만 튀기는 반면, 일본은 붉은 살이 섞여 있다. 바로 가브리살, 즉 등심 덧살이라는 부위다. 그래서 일본과 돈가스 맛이 다르다고들 한다.

 

황학동이라고도 하고, 청계천이기도 한 중앙시장은 원래 양곡시장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그릇과 주방설비 가게가 많다. 이곳에는 ‘불판’만 전문적으로 파는 집이 있다. 우리가 얼마나 고기 굽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주인도 총 몇 종이나 있는지 모른다. 대략 세어보면 100종이 넘는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솥뚜껑형, 사각철판형 등 모양으로 구분할 수 있고 돌, 합금, 무쇠, 스테인리스, 강철 등 소재로도 나눌 수 있다. 석쇠처럼 불꽃이 직접 닿는 형은 적은 편이다. 삼겹살은 불에 잘 타고 기름이 일어 석쇠 같은 형태는 굽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속은 안 익었는데 겉만 탄다. 야외에서 숯불 피워 삼겹살을 굽다가 낭패를 보는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석쇠는 대개 소고기용이다. 삼겹살은 사실 그리 오래된 구이 형태의 외식이 아니었다. 먹더라도 주로 찌개나 보쌈용으로 쓰였다. 한식요리를 다룬 오래된 책 어디에도 삼겹살 구이는 나오지 않는다. 1970년대 전까지만 해도 돼지고기는 잘 상해서 유통이 어렵고, 잘 익혀 먹어야 하기 때문에 구이용으로 각광받지 못했다. 가격도 싸지 않았다. 1950~60년대 신문에는 ‘공설시장 가격’이라는 일종의 물가 안내 기사가 나오는데, 부위 불문하고 소와 돼지 고기 가격이 비슷했다. 미국에서 다량의 사료가 수입되고 식용유 산업이 발달하면서 콩깻묵 같은 부산물이 흔해졌다. 돼지고기 양산시대가 열렸다. 1970년대의 일이다. 이때부터 삼겹살집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불판을 가는 문화가 없었다. 점차 위생과 건강을 따지는 손님의 요구에 맞춰 불판이 가벼워지고, 갈아주는 문화가 생겼다. 삼겹살 불판 교체를 비유로 들면서 정치개혁을 온몸으로 실천하던 분이 비통한 죽음을 맞았다. 그가 꿈꾸던 새 불판 교체는 아직도 요원하다. 시민들과 함께 삼가 명복을 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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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간 2018년 7월16일 월요일, 전 세계 최초로 개봉하는 <미션 임파서블> 여섯 번째 이야기의 시사회가 있었다. 재미있었다. 톰 크루즈는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탄력성으로 스크린을 종횡무진했고, 불가능한 액션을 보란 듯이 펼쳤다. 다 거짓말이지만 잠시 현실을 잊게 해주었다. 하지만, 환상적 볼거리가 현실을 지워주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그렇다면 그건 마취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두 시간 정도면 완전히 각성되는, 그런 마취 말이다.

 

그런데 간혹 어떤 영화들은 사람을 완전히 흔들어 놓는 경우가 있다. <킬링 디어>가 딱 그런 작품이다. <랍스터>를 연출했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인데,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상영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킬링 디어>에도 <미션 임파서블>처럼 말도 안되는 일이 나온다. 소년이 저주를 내리자 그 저주가 실제로 일어나니 말이다. 마틴이라는 소년의 아버지는 심장 수술을 받다가 죽었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16세 마틴은 수술을 집도했던 심장외과 전문의 주변을 맴돈다. 의사 스티븐은 선량한 미국 시민으로서, 다정한 아버지로서, 친절한 이웃으로서 소년을 환대한다. 밥도 사주고, 고가의 시계도 선물하며 언제든 연락하라고 이야기한다.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문제는 이 소년이 정말 언제든 전화를 하고, 가족 모임에 들어와 아들과 딸에게까지 너무 가까이 접근했을 때 시작된다. 스티븐은 이제 아무 때나 전화하지 말라며, 형편없는 음식이나 주는 마틴네 저녁식사를 거절한다. 그 날 이후부터, 마틴의 불편함은 불길함으로 바뀐다. 마틴이 지독한 저주를 뿜어내고 거짓말처럼 딸과 아들의 사지가 마비되며 음식도 거부한다. 이대로라면, 마틴의 저주처럼 아이들이 눈에서 피를 쏟으며 죽을 것만 같다.

 

영화의 이야기는 마틴이 스티븐을 계속 찾아온 지 6개월 이후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렇다. 자신의 수술대 위에서 죽은 남자의 어린 아들을 친절히 대한 지 6개월 만에, 집도의 스티븐은 죄책감을 덜고 자신이 마치 뭔가 대단한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라도 된 양 착각한다. 자신의 명백한 실수가 마틴 아버지의 죽음을 가져왔을지도 모르는데, 어느새 자신이 베푸는 사람 역할을 하고 마틴은 그 동정을 구걸하는 사람처럼 바뀌어 있다. 위치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마틴은 당신은 내게 속죄를 하고 사죄를 해야 할 사람이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아님을 가르쳐주려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이며 마술적인 일들은,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 깊은 두려움과 공포를 일깨운다. <미션 임파서블>처럼 신나는 게 아니라 너무 불편하고 두려운 공포 말이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도 스티븐처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의 ‘심장’을 건드리는 의사라는 뜻이 아니다. 영화 속 대사처럼 ‘심장’은 메타포, 비유다. 우리는 남의 마음을 의도치 않게 건드리곤 한다. 삶의 중심에 함부로 침범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린 조금씩 누군가의 삶에 대한 가해자로 살아간다.

 

스티븐은 속죄하기 위해 6개월간 죽은 환자의 아들 마틴에게 거의 최선을 다했다. 6개월, 마틴이 스티븐이 가진 것, 그러니까 직장, 가정, 집에 더 깊숙이 들어오려 하자 그는 6개월이면 충분했다는 식으로 마틴을 밀어내려 한다. 스티븐에게 죄책감의 유통기한은 6개월이었고, 그것마저도 자신의 삶을 침범하지 않는 조건이 가능할 때였다. 그는 아버지를 잃었는데, 6개월간의 친절로 균형이 맞춰질까? 게다가 하고 싶은 대로, 주고 싶은 만큼 동정을 베푸는 게 그게 속죄이며 환대일까? 아니다. 그건 마틴이 원했던 ‘정의’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큰일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는 가해자의 일부로서 참회하고, 부끄러워한다. 세월호 참사 순간 무력하게 그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때도 그랬고, 19살 청년이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목숨을 잃었을 때도 그랬고, 2년 전 네살배기 아이가 뜨거운 어린이집 통학버스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도 그랬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다들 가해자나 다를 바 없다며 미안해했다. 처음처럼 그렇게 미안해하고 모두가 다 가해자로서 진짜 반성했다면, 세상은 달라졌어야 옳다. 하지만 과연 세상이 달라지고 있는가?

 

6개월, 뜨끔하지만, 정말 우린 사건 발생 6개월이 지나서도 사회적 책임감과 죄책감을 공유하며 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스티븐처럼, 내 가족이 먼저고, 내 일이 먼저라면서 어느새 가해자의 위치에서 슬쩍 내려오지는 않았을까? 죄책감의 유통기한은 얼마가 적당할 것인가? 아니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죄책감에 유효기간이라는 게 있어도 될까?

 

<미션 임파서블>은 보고나자마자 영화의 주요 장면들이 뇌리에서 사라졌는데, <킬링 디어>의 이야기들은 머릿속에 심어둔 씨앗처럼 자꾸만 자라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더운 여름 밤, 서늘한 공포로 잠 못 들게 하는 영화, 그게 바로 작은 영화, 아니 훌륭한 영화의 힘이다. 좋은 영화는 마취로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는 게 아니라 깊이 잠들어 있는 본질적 감정을 흔들어 깨운다. 잊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환기하는 영화, 그런 영화들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

 

<김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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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방송가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는 대하사극의 퇴조다. 2010년대 들어 점점 쇠락의 길을 걷더니 2016년 이후 명맥이 끊겼다. MBC <옥중화>와 SBS <육룡이 나르샤>가 마지막 50부작 이상 사극이다. ‘대하정통사극’으로는 2015년 방영된 KBS <징비록>이 마지막이었다. 현재는 상대적으로 제작비 부담이 적은 미니시리즈형 사극만 간간이 방영되고 있다. 과거 대하사극은 영화에 대중문화의 주류 자리를 내준 드라마가 영화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안방 블록버스터 장르로 사랑받았다. 철학, 정치 등의 거대서사와 멜로, 성장담 등의 일상적 이야기가 조화를 이루며 한국드라마 고유의 강점인 극성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장르인 데다, 대규모 전투신, 세트, 의복 등 볼거리도 풍부해서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이 역으로 방송 광고 시장 축소와 제작비 상승의 이중고를 버티지 못하고 쇠락하는 원인이 됐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

 

이런 가운데 지난주 방영을 시작한 tvN <미스터 션샤인>은 안방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24부작인 <미스터 션샤인>은 사극으로선 미니시리즈에 가깝지만, 이 장르를 통해 드라마적 재미의 최대치에 도전하고 있다. 김은숙 작가는 전작인 KBS <태양의 후예>, tvN <도깨비>에서 기존의 멜로 중심 이야기를 뛰어넘어 액션, 판타지 등 다양한 서사를 결합해 종합엔터테인먼트로서 드라마의 진화를 실험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실험을 위한 최적의 무대를 사극에서 찾았다. 사실 사극은 그 제작비를 감당할 수 있는 영화계에서는 이미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자리 잡았다. 역대 한국영화 흥행 순위로 알 수 있듯, 사극은 거대한 스케일로 극장가를 초토화하는 할리우드산 대작 영화에 맞설 만한 가장 경쟁력 있는 장르다.

 

현재 <미스터 션샤인>이 TV에서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드라마 최대 제작비의 부담은 글로벌 플랫폼의 투자로 상당 부분 해결했고, 이 풍족한 지원은 고스란히 드라마의 완성도로 연결됐다. 무엇보다 글로벌 포맷에 맞춘 스토리텔링의 변화가 눈에 띈다. 먼저 캐릭터를 보자. 남주인공 유진 초이(이병헌)는 김은숙 드라마 하면 흔히 떠오르는 재벌 후계자가 아니다. 노비 출신의 그는 주인에게 살해당하는 부모의 죽음을 목격하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에서도 홀로 가난과 인종차별을 버티며 성장했고, 결국엔 군대에서 공을 세우며 계급 상승을 이뤄냈다. 유진의 서사는 글로벌 성장담의 표준이 된 아메리칸 드림을 구현하고 있다.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남주인공 캐릭터의 변화다. 여주인공 애신(김태리)의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낮에는 사대부집 규수로, 밤에는 저격수로 살아가는 그녀는 가면 히어로의 이중생활을 그대로 따른다. 강인하고 역동적인 여성 캐릭터를 선호하는 대중문화 트렌드를 반영한 설정이다. 남녀 주연배우의 나이차에 따른 논란에도 불구하고, 애신의 매력적인 캐릭터는 여성 시청자들의 눈길을 붙든다.

 

이에 더해 정의, 평등과 같은 대의명분과 이에 걸맞은 선 굵은 서사가 있다. 구한말 격변기를 배경으로, 제국주의적 탐욕에 저항하는 영웅들의 활약, 차별 없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 등 글로벌 시청자들도 공감할 만한 세계관의 확장을 보여준다. 여기에 김은숙 특유의 로맨스가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간다. 여주인공을 둘러싸고 세 명의 남자가 순정을 바칠 정도로 러브라인이 복잡해졌지만, 모두가 치열한 시대적 고민을 지닌 캐릭터로서 설득력을 얻는다.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시간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조선을 지나는 중이었다”라는 애신의 내레이션 위로 주요 인물들이 교차 편집되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로맨스가 역사와 유리되지 않는 이야기가 될 것을 예고한다.

 

볼거리 면에서도 구한말 격변기를 무대로 한 전략이 제대로 통했다. 전통과 근대가 충돌하고, 세계 열강들의 알력 다툼이 벌어지는 한성의 풍경은 글로벌 서사의 무대로 제격이다. 대표적 사례가 정보 매매자 로건 테일러 테러신이다. 유진과 애신은 각각의 이유로 그를 암살하려 하고, 테일러와 거래하기로 한 일본 낭인들이 둘을 뒤쫓는다. 마침 거리에는 가로등 점등식이라는 신묘한 불구경을 위해 나온 사람들로 가득한 가운데, 복면을 벗고 제 모습을 드러낸 유진과 애신은 서로를 마주본다. 검을 든 낭인들과 장총을 든 저격수, 서양 신사 복식의 유진과 사대부집 규수 차림의 애신, 이들이 교차하는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에 켜지는 가로등의 불빛은 다양한 서사와 볼거리의 결합으로 극대화된 재미를 추구하는 이 작품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

 

<미스터 션샤인>이 선보인 안방 블록버스터로서 사극의 가능성은 앞으로의 대작 라인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로 화제를 모으는 김은희 작가의 신작 <킹덤>, 그리고 <대장금>, <뿌리 깊은 나무>의 김영현 작가가 대본을 쓰고 송중기가 주연 물망에 올라있는 <아스달 연대기>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 같은 흐름에 우려할 점이 없는 건 아니다. 과거에도 한번 일본발 한류 열풍에 편승한 ‘무늬만 대작’ 열풍이 불었다가 자기 복제 스토리로 실패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글로벌 트렌드에 발맞춘 변화가 필수적이다.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 <미스터 션샤인>의 뒷심 유지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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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인구 1000만명에 식당 숫자는 12만 개가 넘는다. 식당 한 개에 80여명의 인구가 물려 있다. 서울시에 그토록 식당이 많은 건 대부분 생계형 영세업의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떡볶이집, 김밥집, 분식집, 삼겹살집, 호프집, 치킨집이 다수를 차지한다. 알다시피 이런 집들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 레드오션의 절정이고, 이른바 ‘인테리어가게 돈 벌어주는’ 조기 폐업이 다수다. 흔히 도시 노동자들의 이동 순서가 회사-삼겹살집이나 치킨집-말단 노동이라고 한다.

 

 

회사의 고용에서 밀려나면 더 가혹한 개인 경쟁상태로 내몰리고, 그마저 폐업하면 일당 노동자로 떨어진다는 얘기다. 월급생활자가 아닌 자영업자들이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던 전통적 업종들이 폐업하는 것도 이런 계층 하락의 주요 요인이다. 지물포, 페인트가게, 전기상, 세탁소, 슈퍼마켓, 문방구, 이발소 등은 이제 동네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어엿한 세탁소 사장님들은 대형 세탁체인의 말단으로 떨어지고, 슈퍼마켓 주인도 본사의 ‘현장 영업대행자’에 불과한 편의점 주인이 된다. 이마저도 이익이 안 나면 최저임금 수준의 경비원, 청소용역업의 파견직 노동자로 살아나간다. 버스나 지하철의 새벽 첫차가 얼마나 만원인지 안 본 사람은 모른다. 시내로 출근하는 말단 노동자들이 지하철을 가득 메운다. 이런 와중에 청년들 문제는 더 심각하다.

 

고용이 안되니 자영업으로 진출해야 하는데, 그 목표가 대개 카페와 술집, 식당이다(벤처는 아무나 하나). 망원동이니 연남동이니 하는 신흥 유흥지구의 가게를 가보라. 상당수가 생애의 첫 본격 직업으로 요식업을 택한 친구들이다. 소비 인구는 줄고, 시장에 진출하는 청년들까지 넘치면서 요식업 시장은 일대 격전지가 되었다. 어딘가 뜬다 싶으면 빚을 내서라도 가게를 얻고, 그렇게 영업을 열심히 하다보면 가겟세가 오른다. 가겟세, 즉 임대료는 곧 부동산(건물) 가치의 바로비터다. 그렇게 건물 가치를 올려주는 건 집안 돈 끌어대어 영업한 어린 친구들인데, 이익은 건물주가 획득하게 된다. 영업 실패로 종잣돈을 까먹고 물러나도 이미 올라간 임대료는 절대 내려가지 않는다. 건물 가치 하락을 바라지 않는 건물주가 임대료를 내려줄 리 만무하고, 법망을 피해 무리한 임대료 상승이나 요구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청년 창업에 애를 쓸 수밖에 없다. 고용이 늘지 않으니, 창업해서라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그 시장이 불행히도 가장 망하기 쉽다는 요식업이라는 건 그야말로 나라의 불행이 되고 만다. 아버지는 회사 다니다가 쫓겨나서 고깃집 하다가 폐업하면 경비원이 된다치고, 그 아버지의 종잣돈을 얻어서 호프집과 카페 열어서 문 닫은 청년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허망한 말 말고, 그들이 시민으로서 존엄성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장사가 안되는 건 그저 “너희들이 운이 나빴어”라고 하고 끝날 일인가.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청년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 아이들을 정말 어찌할 것인가(칼럼 제목은 이오덕 선생의 산문집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에서 차용).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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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이면 할리우드에서 출발한 프랜차이즈 영화들이 한두 편씩 연착륙을 시작한다.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시작된 성공은 <데드풀 2>로 연속되고 흥행은 <앤트맨 앤 와스프>로도 이어질 기세다. ‘손가락 하나 튕기는’ 서사행위의 의미는 <어벤져스>를 봐야만 알 수 있는데, 이 행위소는 <데드풀>이나 <앤트맨>에서도 유효하다. 얼핏 보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어벤져스’ 시리즈 세 번째 이야기, <데드풀 2>는 ‘데드풀’ 두 번째 이야기, <앤트맨 앤 와스프>는 ‘앤트맨’ 두 번째 이야기로 서로 독립되어 있는 듯하지만 교묘하고도 섬세한 짜임새로 이 세 작품은 모두 연결된 것이다. 좋게 말하자면 하나를 보고 다른 하나를 보면 재미가 배가되고 나쁘게 말하자면 죄다 파생상품이라 하나를 보고 나면 둘 셋, 더 보도록 유인된다. 마치, 같은 회사 제품으로 골라 담아야 할인이 되는 행사처럼 이야기들이 닮아 있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영화 <앤트맨 앤 와스프>의 한 장면.

 

어느새, 시리즈 영화, 프랜차이즈 영화는 우리 영화 문법과는 무관한, 할리우드에서나 가능한 영화 제작 관습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반지의 제왕> <헝거 게임>과 같은 판타지도 그렇고, <매트릭스>나 <스타워즈> 같은 SF물 등 성공한 시리즈물은 전부 할리우드산이었다. 할리우드 시리즈물은 단순히 이어지는 연속성만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프리퀄이 되기도 하고, 아예 이야기를 뽑아 스핀 오프를 만들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최근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중 단일 작품으로 독립성을 가진 작품이 거의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특히 상업적인 대중영화 안에서는 프랜차이즈와 시리즈가 매우 잘 어울리는 서사기법처럼 여겨질 정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2018년 한국 영화계에 중요한 변화가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다. 6월에 개봉해서 3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영화 <탐정: 리턴즈>는 2015년 개봉했던 영화 <탐정: 더 비기닝>의 후속작이다. 주인공의 캐릭터나 그가 맺고 있는 관계도가 고스란히 유지되는 가운데 사건과 몇몇의 인물들이 첨가되는 방식이다. 영화는 공공연하게 시리즈물로 거듭날 것임을 표방하고 있다.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뒀으니 ‘탐정’ 3편도 만들어질 듯싶다. 굳이 안 만들 이유가 없어 보인다.

 

‘탐정’의 프랜차이즈화는 어떤 점에서 한국의 시리즈 영화 제작의 오래된 관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시리즈가 될 만한 영화 한 편을 초계기처럼 일단 띄워 보고, 잘된 경우엔 그 캐릭터와 특성을 살려 2편, 3편으로 이어가는 방식 말이다. <조선명탐정>이 그랬고, 이에 앞서 <가문의 영광> <두사부일체>류의 조폭 코미디 영화들이 그랬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프랜차이즈 제작 방식은 안정과 위험을 둘 다 가지고 있는데, 안정이 성공을 기반으로 그러한 면을 부각시키는 것이라면 위험은 그것이 오히려 관객들의 피로와 싫증을 가져오기 십상이라는 사실과 연관된다. 시작이 훌륭했지만 결말이 시시했던 것은 대표적 공포 시리즈였던 <여고괴담>의 성장과 실패 과정에서도 여전히 반복되는 현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마녀>와 <신과 함께>가 시도하고 있는 시리즈 제작 방식은 사뭇 독특하다. 두 영화는 기획 단계부터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마녀>의 영어 제목은 <Part 1: The subversion>으로, 시리즈물의 첫 번째라는 사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이번에 개봉한 1편이 3편 중 첫 번째에 해당한다는 것을 아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금껏 성공한 영화의 플롯 공식을 재활용해 2편과 3편을 만드는 방식과는 시작부터 다르다. 이를 입증하듯 올해 개봉한 <마녀>는 주인공 소녀의 등장과 그녀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에만 집중한다. 아직 본론은 시작도 하지 않았음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이다.

 

지난해 겨울 <죄와 벌>을 개봉한 이후 올해 여름 <인과 연>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신과 함께> 역시 애초에 2부작으로 나누어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가만 보면, 올여름에 개봉하는 한국 영화 중 세 편이 프랜차이즈 및 시리즈 영화다. 2000년대 초 조폭 코미디 시리즈물들이 급속히 사라져간 이후 매우 오랜만에 선보이는 시리즈 영화의 선전이라고 볼 수 있다.

 

시리즈, 프랜차이즈 영화의 제작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영화 소비 시장이 안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영화를 소비하는 관객들에 대한 신뢰도가 그만큼 높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매년 100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가 등장하고, 1년에 영화를 보는 관객 인구가 2억명을 넘는 시장이 바로 우리나라다. 세계 어느 곳을 살펴본다고 해도, 이렇게 영화를 많이 보는 나라가 드물고, 자국 영화를 이처럼 많이 보는 관객도 드물다. 대개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한 해 텐트폴 영화의 자리를 노리던 한국 상업영화의 스펙트럼이 이제 할리우드 영화 제작 흐름을 벤치마킹해 한국형 프랜차이즈 영화로 거듭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미리 기획된 시리즈 영화들이 과연 어떤 성과를 거둘지 그 결과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짐작하다시피, 점차 한국 영화의 관객 동원율이 떨어지고, 마블을 비롯한 웰메이드 할리우드 시리즈 영화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지고 있다. 마블의 영화들이 인기를 끌긴 했지만 마블의 모든 영화가 올해처럼 사랑을 받은 적도 없다. 한국의 상업영화들이 고전적 방식으로는 기술과 자본의 우위를 앞세운 할리우드 영화의 공세를 버티기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형 프랜차이즈 영화는 한국 대중영화의 패러다임에 대한 새로운 시도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할리우드를 닮아 가되 좀 다른 방식으로 가는 것, 이론적으로 그럴 듯해 보이는 이러한 시도가 과연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 관심 있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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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에 잠시 다녀왔다. 제주의 변화는 국토 중에서 아마도 가장 극적일 것이다. 고립, 격리 같은 낱말이 떠올랐던 세기를 지나 일종의 거대한 카오스 상태다. 십 몇 년 전만 해도 다수의 제주 사람들이 도시 이주를 고려했다고 한다. 감귤 값이 폭락하면서 희망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젠 도 전체의 땅값이 폭등했다. 중국인 관광객이 안 와도 경기는 여전히 좋다. 저비용항공사들을 포함해서 엄청난 비행편이 국내 여행객을 열심히 실어나르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공항이 포화상태여서 공항 건물에 브리지를 대기 힘들다는 뜻이다. 제주도 남쪽 서귀포를 들렀다. 전국에서 가장 깨끗한 시장으로 유명한 매일올레시장이 있다. 올레 걷기 운동의 영향으로 시장 이름까지 바꾼 곳이다. 활력이 넘친다. 시장 구경이 흥미롭다. 후지와라 신야는 1970년대 한국의 시장을 보고 “시장이 있으면 국가가 필요없다”고 했다. 그런 에너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곳은 제주의 시장 정도가 아닐까.

 

 

이 시장의 명물은 많지만 내 눈에는 이 시장 사람들, 넓게는 서귀포 사람들의 매무시를 꼽게 된다. 먼저 소개할 것은 시장 ‘원보마트’ 앞 세 분의 할머니다. 딱 일정한 거리로 세 분의 자리가 정해져 있다. 처음 봐서는 무얼 파는지 도통 알 수 없다. 종이로 잘 갈무리하고 포장한 ‘무엇’을 놓고 좌판을 벌여놓았다. 대단히 비싸고 귀한 물건처럼 보인다. 누군가 주문하면 그때서야 그 무엇이 드러난다. 바로 동태다. 과거 제주에는 동태가 귀했다고 한다. 동해에서 여기까지 오자면 돈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루는 것도 아주 조심스럽다. 동태포를 주문하자, 지느러미를 자르고 내장의 검은 막을 벗겨내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섬세한 손길로 손질에 들어간다. 막칼로 대가리며 몸통을 서너 번 툭툭 잘라서 주는 게 고작인 ‘뭍’에 비하면 보물을 다루듯 한다. 경탄이 나온다. 그렇게 동태포를 떠서 팔고는 이내 다시 좌판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다음 손님을 기다린다. 지켜보는 동안 단 한 번도 소리내어 손님을 부르지 않았다. 하기야, 동네 손님들이 빤한데 불러 외친들 무슨 소용일까만.

 

다른 좌판에 내놓은 채소와 미역, 다시마도 어찌나 예쁘게 진열해 놓았는지 감탄을 자아낸다. 민속공예(?)를 보는 것 같다. 그 좌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장 손님이 미감의 충족을 받을 듯한. 마침 자리돔 철이라 손질해서 파는 할머니들이 많다. 역시 채반에 가지런히 놓은 모양이 예술 수준이다. 건어물 가게 앞 말린 참돔은 또 얼마나 참하고 예쁘던지. 내장을 발라내고 하나하나 이쑤시개를 꽂아 내장 안이 잘 마르도록 해서 진열해놓았다. 시장 구경을 하다가 배가 고파 한 식당에 들어갔다. 두 할머니가 낮에만 장사하는 금복식당이라는 비빔밥집이다. 단돈 3000원. 입에 착착 붙는 비빔밥을 그득하게 먹었다. 행복한 시간이 흘렀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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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말석’이라는 오래된 관용어구가 있다. 문단이 품계석처럼 지위 고하에 따라 자리를 나누는 마당은 아니지만 말석이란 갓 등단한 신인이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말로 통용되었다. 그런데, 그러고 보면 겸양일 수밖에 없는 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문단에 한 ‘자리’를 얻었다는 말이니, 어쨌든 한자리를 차지하기는 했다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겸손하게 작은 자리 하나 얻었다는 의미로 말석으로 스스로를 낮춘 것이다. 등단은 시작에 불과하니 말이다.

 

흥미롭게도 서양에서도 사람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두고 지위(status)라고 부른다. 이 지위도 어떤 표지판 앞에 서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다(stare)’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 어딘가에 서는 것, 그게 바로 지위이고, 지위란 자신의 자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갖는 게 또 전부는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은 높은 지위, 낮은 지위라며 지위의 고하를 나누기 좋아한다. 사회의 세세한 면에 따라 그 조건은 달라질 수 있지만 지위에 높고 낮은 게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속된 말로, 다 같은 ‘자리’에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의 한 장면.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그런 의미에서, 자리로 인해 존엄성에 위협을 받고, 자괴감에 빠지거나 질투로 고통받는 상황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혹시나 우리가 사다리의 너무 낮은 단을 차지하고 있거나 현재보다 더 낮은 단으로 떨어질까봐 두려워한단다.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그는 이런 걱정이 매우 독성이 강하다고 말했는데, 내 생각도 다르지 않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건 무척 상대적인 것이라서 스스로의 지위에 불안해하기 십상이다. 타인과의 비교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작게 느끼고 불편해한다. 그게 바로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불안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은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한 그래서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기도, 그렇다고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기도 애매한 청춘을 보여준다. 청춘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학수’(박정민)는 래퍼 오디션에 6번째 참가 중인 래퍼 지망생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미 홍대 언더그라운드에서 자신의 팬까지 거느린 래퍼이지만 그 정도 자리는 아직 부족하다고 여긴다. 더 어렸을 땐, 홍대 무대에 서기만 해도 자신의 불안이 해소될 것 같았겠지만 어느 순간 이후로는 홍대 무대가 오히려 현실의 거울 이미지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무대에선 강력한 래퍼이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변산만 떠나면 훨씬 덜 불안하고 나아질 것 같았지만, 서울에 사니 이번엔 또 강남에 사냐 강북에 사냐 고향 친구들이 따져 묻는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 같다.

 

<변산>을 보면서 무척 흥미로웠던 것은 랩을 대하는 청춘의 자세이다. 최근 강의실에서는 노트를 펼쳐 뭔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는 학생들이 종종 발견되는데, 그런 학생들 중 많은 수가 직접 랩 가사를 쓰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이 왜 시를 안 쓰고, 랩 가사를 쓰지라며 조금은 의아해했는데,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영화 <변산>이 보여준 셈이다. 요즘 20대에게는 랩이 시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들에게 랩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심장 박동에 맞춰 훨씬 더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의사수단이라는 것을 말이다.

 

시골 출신 학수는 금의환향에 대한 꿈을 고백한다. 금의환향이란 우리가 앞서 말했던 불안의 증상 중 하나이다. 적어도 고향에 돌아갈 땐, 떠날 때보다는 더 성공해서, 출세해서, 부자가 되어서, 멋지게 돌아가고 싶은 것, 그게 바로 금의환향이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금의환향의 세부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은 소위 세속적인 성공이 전부이다. 돈, 명예, 권력이 성공의 열쇠이며 그것이 곧 존재의 불안을 다스려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에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의 명함이 곧 평가 기준이 되는 속물의 세상에서,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자리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결국 훨씬 더 많이 가진 상태에서 누군가의 삶을 지배하려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은 유아적 바람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외할머니집에 오랜만에 놀러갔을 때, 우리 외손주 왔냐면서 가장 편한 자리를 내주고, 가장 귀한 음식을 먹여주며, 뭐든 해도 된다고 허락받을 때 느끼는 그런 존재감처럼, 세상에서 나의 존재감을 느끼고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세상이 이런 허약하고, 연약한 사람의 내면을 이용해, VIP, VVIP의 스티커를 붙여 가치 있는 사람의 속성을 더욱 속물화하고 있다는 것일 테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존중받을 만하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의 수위를 얕게 함으로써 그럴듯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중요한 사람이 되는 역설을 만들어낸다. 말 그대로 뭣이 중헌지를 모르는 채로,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구분된다.

 

세상이 주는 세속적 지위에 연연하던 학수는 결국 고향 땅에서 다른 성공을 거둔다. 알고 보니 금의환향은 꼭 돈을 벌고, 시험에 합격하고, 일등을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 사람 사는 가치라는 게 결코 자리만으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고향의 품에 안긴다. 사람의 한 가지 면모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으로 평가하려는 사람, 알랭 드 보통은 그런 사람을 가리켜 속물이라고 부른다. 적어도 스스로 지위를 높이고자 애를 써도, 남을 지위로 평가하는 속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남을 무턱대고 동경하거나 경멸한다고 해서, 불안이 해소될 리는 없다. 불안은 결국 다양한 나의 모습을 스스로 사랑할 때, 서서히 사라질 불편이 아닐까 싶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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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 애호가들 사이에 몇 가지 불문율이 있다. 우선은 가위로 자르지 않는다. 냉면은 냉면일 뿐 ‘물냉면’이란 없다. 냉면은 당연히 육수가 시원하게 들어가는 것이므로 굳이 ‘물’이란 접두어는 사족이라는 뜻이다. 함흥냉면은 냉면 아니냐고 하면 슬쩍 이런 말을 흘린다.

 

“원래 함경도에서 비빔국수로 먹던 것을 전후 평안도 실향민의 평양냉면에 맞서 함흥냉면이라고 작명했다.”

 

 

아마도 이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냉면이 아닌 것도 아니다. 얼음처럼 이가 시린 냉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더운 면도 아니기 때문이다. 남한의 함흥냉면과 비슷한 것이 북한에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명태회국수다. 함경도에서 많이 먹는 음식이다.

 

이것과 유사한 음식이 강원도 속초에서 명태 고명을 얹은 함흥냉면으로 남아 있어서 그 연관성을 짚어볼 수 있다. 알다시피 속초는 함경도 실향민이 대거 월남하여 성장한 도시다. 북한의 요리책에는 명태회국수가 실려 있다. 실제로 북한에서 많이 먹는다. 흥미로운 건, 서울의 함흥냉면도 명태회국수와 아주 닮아 있다는 점이다. 함경도에서는 명태나 조개 등 해산물을 국수에 얹어 먹는 것을 즐겼다. 그런데 이런 해산물 국수에도 육수를 쓴다. 면 1인분이 200g이면 육수 반 컵을 곁들인다. 국수에 부어서도 먹지만 따로 육수만 그릇에 내기도 한다. 남한의 함흥냉면 먹는 법과 아주 비슷하다. 보통 함흥냉면집에 가면 뜨거운 육수를 컵에 부어서 내어주지 않는가.

 

북한에 함흥농마(전분)국수도 있다. 이것이 서울에서 파는 함흥냉면을 영락없이 닮았다. 고구마 전분을 주로 쓰는 남한과 달리 감자 전분이 주재료다. 면을 뽑고 여기에 참깨와 고춧가루를 뿌리고,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삶아 얹는다. 뜨겁게 먹는 음식이 아니어서 여름에 먹기 좋다. 남한의 함흥냉면이 차갑고 달고 맵게 만들어지지만, 북한에서는 구수한 비빔국수처럼 즐긴다. 사족이지만, 함경도에도 아예 얼음 같은 육수를 쓰는 함경도 냉면이 따로 있다. 평양냉면과 비슷한데, 면이 전분이라는 점이 다르다.

 

함흥냉면은 비교적 조리법이 쉽게 전파되어 일찍이 서울 곳곳은 물론 전국적으로 잘하는 집이 꽤 널리 퍼졌다. 그래도 역시 서울 중구 오장동 일대와 종로구 예지동 시계골목 쪽을 원조로 꼽는다. 오장동의 한 유명 가게는 한여름이면 평양냉면집 못지않게 줄을 선다. 워낙 올여름 평양냉면의 위세(?)에 눌려 여론의 눈길을 못 받고 있을 뿐이다.

 

예지동에 있는 가게들은 양이 많기로 유명했다. 친구들과 그걸 먹으러 가서 얘기를 나누다가 면이 불면 많은 양의 퍽퍽한 국수를 넘기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이때 육수를 조금 부어서 굳은 면을 풀어 먹기도 했다. 그러고보면, 약간의 육수를 면에 넣어 먹기도 하는 함경도식의 명태회국수나 함흥농마국수와 먹는 법이 비슷하다. 평양의 냉면을 먹고 온 사람들은 많은데, 함경도의 이런 국수들을 먹어봤다는 인사들은 못 봤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먹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곳에서도 평양냉면이 인기였다고 하니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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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 드라마 전성시대다. TV를 틀면 일주일 내내 법조인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만날 수 있다. 법조인은 늘 한국 드라마의 인기 직종 중 하나였지만 국정농단 사태 이후 최고로 사랑받는 주인공이 됐다. 국정농단 주역 대다수가 ‘법꾸라지’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부패 법조인 출신이었던 만큼, 이상적 법조인을 통해 속시원한 정의 실현 드라마를 기대하는 심리가 반영된 현상이다. 최근 국정농단에 버금가는 국기문란 사태라 일컬어지는 사법농단 의혹이 정점에 달한 것도 정의로운 법조인 주인공 드라마 열풍을 부채질하고 있다. 실제로 요즘의 법조인 드라마에서는 새로운 경향이 눈에 띈다.

 

기존에는 부패한 정치권력이나 자본가 등 외부의 거악과 싸우는 법조인 드라마가 다수였다면, 최근에는 법조계의 오랜 적폐를 비판하고 법조개혁의 열망을 담아낸 작품들이 많다. 특히 법조계 최후의 성역처럼 남아있던 사법부 배경 드라마가 부쩍 증가했다. 이러한 새 경향을 본격적으로 보여준 작품이 지난해 방영된 SBS 드라마 <귓속말>이다. 전작 &lt;펀치&gt;를 통해 검찰조직 내의 부패 세력과 고발 세력의 갈등을 그렸던 박경수 작가는 &lt;귓속말&gt;에서는 법을 악용해 도적질하는 무리인 ‘법비’와의 전쟁을 내세우며 법조계의 총체적 적폐를 극화했다.

 

SBS 드라마 <귓속말>의 한 장면.

 

그 가운데서도 부패한 대법원장 장현국(전국환)의 악행은 사법농단 사태를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현실감이 넘친다. 사법적폐의 상징 그 자체인 장현국은 스스로를 “대한민국 재판의 상식을 만드는 사람”이라 칭할 정도로 제왕적 권력을 휘두른다. 신념 있는 소장판사 이동준(이상윤)이 청탁 재판을 거절하자 자신의 뜻에 맞는 법관인사위원회를 구성해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시키는 등 재판 거래와 인사 개입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드라마는 장현국을 비롯해 전직 검찰총장, 전 법무부 장관, 최대 로펌 대표 등이 모두 교도소에 모이는 결말을 통해 대중의 적폐청산 판타지를 시원하게 실현했다.

 

‘본격 판사 장려 드라마’를 표방한 SBS <이판사판> 역시 사법혁신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 작품이다. 드라마에서 제일 시선을 끄는 것은 ‘오판 연구회’라는 조직이다. 로스쿨의 아웃사이더들이 모여 잘못된 판결을 연구하며 은폐된 진실을 파헤치는 이 조직은 존재만으로 사법부의 낡은 관행에 대한 도전을 보여준다. 이들과 합력해 정의를 구현하는 신세대 판사 주인공들은 사법부의 개혁적 미래를 상징한다. 비록 허술한 구성과 로맨스에 치우친 이야기로 비판받기는 했으나 드라마의 문제의식만큼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올해 초 방영된 SBS <리턴>에서도 비슷한 주제의식이 발견된다. 주인공 최자혜는 판사 출신 변호사다. 그는 판사로 임용된 뒤 담당한 첫 재판에서 법의 사각지대를 악용해 처벌을 피하는 권력자들을 목격하고 회의를 느낀 끝에 스스로 법복을 벗었다.

 

훗날 그는 TV 법정쇼 ‘리턴’을 통해 잘못된 재판 사례를 분석하고 법제도의 허점을 고발한다. 드라마는 지나친 선정성, 폭력성 등의 문제를 드러내기는 했으나, “못 배우고 가진 게 없는 자들에게는 장벽이 한없이 높고, 법을 알고 돈 있는 자들에게만 관대한 법”의 모순을 비판하는 메시지는 분명 요즘 시대의 국민 정서를 건드리는 지점이 있다.

 

현재 방영 중인 tvN <무법 변호사>도 사법부에 대한 불신과 개혁의 요구를 담아낸다. 드라마의 최대 악역인 차문숙(이혜영)은 대법관 후보 1순위로 거론될 정도로 존경받는 판사지만 그의 진짜 정체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법비’다. 드라마는, 마찬가지로 위엄 있는 판사의 가면을 썼던 아버지에 이어 부패의 계보를 만들어가는 차문숙의 모습과 이에 맞서 싸우는 법조계 이단아 봉상필(이준기)의 활약 안에 적폐청산의 시대적 화두를 녹여내고 있다.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

 

JTBC 월화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또한 신세대 판사들의 시선을 통해 사법부 내부의 문제점을 들춰낸다. 조직 내 성차별, 학연과 지연으로 이뤄진 파벌 구도, 권위의식 등과 같은, 어찌 보면 대형비리보다 더 뿌리 깊은 적폐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상주의자 신임 판사 박차오름(고아라)과 원칙주의 판사 임바른(김명수)의 논쟁을 통해 진정한 판사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처럼 최근 법조인 드라마는 사법적폐에 대한 청산과 혁신의 열망이라는 시대정신을 투영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드라마는 아니지만 같은 정서를 재현하는 프로그램 하나도 주목할 만하다. MBC에서 다음주부터 방영 예정인 시사 프로그램 <판결의 온도>다. 그동안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던 사법부의 문제적 판결을 테이블 위로 불러와 논쟁하는 토크쇼다. 지난 3월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방영될 당시 국민 감정과 동떨어진 사법부의 권위주의, 법제도의 모순 등을 비판하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지난해에는 언론개혁이 사회적 화두였다. 언론 검열 시대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언론인 소재 드라마와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며, 공정방송을 위한 언론노조 파업의 현실과 조응하며 개혁에의 바람을 담아냈다. 그리고 사법농단 시대의 법조인 프로그램 열풍 현상은 이제 ‘정의 실현 최후의 보루’인 사법개혁에 대해 이야기한다. ‘법비’들을 응징하고 공정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드라마만의 이야기로 끝나서는 안될 일이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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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는 창밖을 보며 읊조린다. “아름답고, 예쁜 바보로 컸으면 좋겠어. 딸아이 말이야.”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여자, 개츠비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팜므 파탈의 말치고는 어딘가 처연하고 게다가 정곡을 찌르는 데가 있다. 여자는, 딸아이는 성찰적이며 똑똑한 여성으로 크는 것보다 아름답고 예쁜 바보로 크는 게 낫다고 말하는 건, 직설법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데이지의 남편 톰 뷰캐넌은 결혼한 첫날 밤부터 다른 여성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고 있다. 지금, 데이지가 독백을 한 그 순간은 경박한 여자 머틀로부터 걸려온 전화로 저녁 식사를 망치고 난 이후이다.

 

이 비슷한 말을 영화 <밤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젊은 여성도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다. 가만히 서서 바보처럼 보이기만 하면 된다”라는. ‘밤쉘’은 폭탄 같은 성적 매력을 지닌 여성을 지칭한다. 이 말을 한 여배우 헤디 라마는 1940년대 미국의 밤쉘로 통했다. 첫 작품 <엑스터시>는 여성의 오르가슴을 처음으로 영화적으로 재현한 작품이었다. 나체로 오르가슴을 연기하는 배우, 그녀는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으로 나뉘어진 할리우드 영화 시장에서 너무나 쉽게 창녀의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그리고, 그 이후 그 분류함에서 거의 빠져나오지 못했다.

 

영화 <아이 필 프리티>의 한 장면.

 

영화 <밤쉘>은 예쁘고 멍청하고 섹시하기만 한 줄 알았던 여배우가 현재 와이파이와 블루투스의 근간이 되는 주파수 도약을 발명했음을 알려준다. 세상은 그녀의 진짜 재능은 숨기고, 그녀의 일부였던 아름다움만을 착취했다. 영화는 그녀가 얼마나 똑똑했는지가 아니라 아름답고 똑똑한 여성이 왜 지워져야 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유는 단 하나이다. 세상은 아름다운 여자가 똑똑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니까. 아니, 여성에게 요구했던 건 그저 아름다움이지 지성이나 내면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헤디 라마의 일생은 여러 면에서 곱씹을 만하다. 따뜻했지만 지나치게 엄격했던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출 연기를 감행했고, 각성제와 수면제에 취해 3류 영화를 찍어야 했던 불공정 계약에 항의하며 자신이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U보트의 만행에 주파수 도약을 발명했지만, 전시이므로 특허에 관한 모든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매우 독립적이며 주도적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그녀를 통제 불가능하고, 제멋대로인 여자로 규정한다. 이건, 70여년이 지난 요즘, 지금의 형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이 여자에게 아름다움만 요구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아이 필 프리티>는 2018년의 여성이 어떤 판옵티콘, 시선의 감옥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주인공 르네 베넷은 꽤 통통한 여성이다.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을 갖지 못해 온라인 담당 부서에서만 일을 할 정도이다. 스피닝, 요가, 다이어트 등 날씬하고 예뻐지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피닝을 하던 르네는 자전거에서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친 후, 자신이 너무 예뻐 보이는 착시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실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녀 눈에만 자신이 예뻐 보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당당하게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원래의 자신을 당당하게 보여주자 세상이 그녀를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다정하고 섬세하게 사람들을 챙기고, 솔직하고 사려 깊은 성격은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얻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르네가 그 모든 관심과 배려를 달라진 외모 때문이라고 착각한다는 데에 있다.

 

맨스플레인으로 유명한 레베카 솔닛은 자신의 책 <걷기의 인문학>에서 하이힐로 인해 여성의 보행권이 얼마나 침범받고 있는지 고발한 바 있다. 까짓것 하이힐을 벗어버리면 그만이지 보행권 침범이라고 왜 엄살이냐고 여길 사람들도 있을 테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하이힐을 신고 싶어서가 아니라 신어야만 해서 착용한다. 화장도 마찬가지이다.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아니라 출근할 때, 회의할 때, 출장 갈 때, 해야만 해서 바쁜 시간을 쪼개 힘겹게 해내는 경우가 더 많다. 예뻐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뻐 보여야만 하기 때문에 하이힐과 화장에 속박된다. 세상이 그게 여자의 준비된 모습이라고 가르치고, 강요하고,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어느새 여성들은 좋아서 시작했던 자기 관리를 억지로, 세상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쩔쩔매며 해내고 있는 셈이다.

 

영화 <아이 필 프리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누가 봐도 100명 중의 한 명꼴에 속할 미녀조차도 자괴감에 시달린다는 고백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도 거울을 보며 자신의 단점을 발견하고, 또 세상이 자신을 한심하게 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작아진다. 르네 베넷이 경험한 마법의 실체는 옛날 동화처럼 진짜 예뻐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완전히 만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뻐야 좋다는 강박을 어린 시절부터 주입받고 자란, 이 시대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필요한 교육일지도 모르겠다. 예쁜 여자란 세상이 강요했던 속박과 상품의 하나라는 것, 그래서 그 요구는 맞출수록 자신이 더 작아만 지는 폭력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버려둘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남을 위해 굳이 예뻐질 필요는 없다.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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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관련 책의 출간이 아주 많아졌다. 관련 책만 내는 전문 출판사가 있을 정도다. 새로운 개념의 판매술과 별난 디스플레이로 유명한 일본의 한 서점에는 제일 좋은 자리에 음식 책을 배치한다. 음식 책도 카테고리가 세분되고 있다. 주로 조리법을 담은 책이 많았던 과거와 달리, 인문과 사회과학으로 음식을 다룬 책의 비중이 커졌다. 역사에서도 음식사, 음식사회사와 문화사 책도 많다. 음식을 통해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관련 학과에서 이 분야의 전공자가 거의 없었다. 최근에 몇몇 박사급들이 배출되고, 외국 유학 가서 전공하는 이가 생겨날 만큼 음식은 이제 전방위적으로 사회적 화두가 되었다.

 

 

먹는 일은 즐겁지만, 그 이면의 불편한 진상(眞相)을 다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를테면, 도축장을 취재하거나 에너지 과소비 산업인 축산업과 우리가 늘 불안해하는 GMO 산업의 진실 같은 것 말이다. 이제 그런 책을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대개는 번역서다. 그동안은 출판시장이 어마어마한 영어권의 일이었다. 가까운 일본도 “이게 책으로 나와서 팔릴까” 싶은 책도 내는 나라다. 몇 년 전인가, <이베리코를 사러>라는 일본 책을 본 적이 있다. 이베리코 돼지는 정말 도토리만 먹여 키우는지 궁금해서 스페인 현지를 들락날락한 ‘오타쿠’ 필자의 작품이다. 한국에선 소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한 이런 집요한 음식 책은 언감생심이었다. 이제는 시장이 달라지는 것 같다. 치킨 시장만을 깊게 판 책이 국내 저자에 의해 출간되어 상당한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축산업의 바탕을 떠받치는 노동 체험을 기록한 역작도 나왔다. <고기로 태어나서>라는 책이다.

 

처음 장부터 충격으로 시작한다. 산란계들-그러니까 우리가 먹는 달걀의 생산자들-을 돌보는(?) 농장에 취직한 필자의 묘사는 상상을 넘어선다. 케이지에 갇힌 닭들은 심하게 말하면 도화지만 한 크기에 네 마리가 ‘때려넣어진’ 상태다. 너무 좁아서 닭이 닭을 깔고 앉아 있는 형국이다. 일년에 300개씩 알을 낳느라 닭의 뼈가 너무도 약해서 닭 날개를 잡아들기만 해도 뼈가 부러진다. 악취와 닭의 비명으로 가득 찬 현장음이 활자의 갈피로 생생하게 들려온다. 닭에 생기는 이, 그것을 죽이려는 살충제 살포 같은 최근의 이슈들도 이 책에서는 생생한 현장으로 묘사된다. 결국 그는 2주 만에 농장을 탈출한다. 그의 표현을 요약하면 ‘미칠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동물복지는 선언이 아니라 실천이 필요하다는 또렷한 증거다. ‘식품=가격’의 프레임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 다시금 상기시킨다. 모름지기 지금 우리 식품과 요식 산업의 저변은 저런 설명하기 불편한 세상을 ‘깔고 앉아’서 유지되는 듯하다. 너무 힘들고 고단한 이런 노동을 한국인이 환영할 리 만무하다. 그러니 외국 노동력에 기댄다. 양계장은 물론이고 축산, 어업, 농업 전반의 일이다. 한국인은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돼지 분뇨를 치우다가 질식사한 것도 결국 외국인 노동자였다. 먹거리의 비명이다.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의 침묵하는 아우성이다. 이제 우리가 먹는 일을 다시 들여다볼 시기다. 이미 늦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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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는 아버지가 두렵다. 싫다. 답답하다. 밉다. 부끄럽다. 창피하다. 곤란하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집에서만 대장이다. 사티를 때리고, 어머니를 밀어붙이고, 함부로 대한다. 그런데 집을 벗어나면 가난한 소작농에 상습 방화범이다. 아버지는 수가 틀리면 불을 지른다. 우리가 없는 아버지의 돼지는 걸핏하면 남의 집 농장을 침범한다. 이웃은 그렇게 침범한 돼지를 잡아두곤, 돈을 내야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장작이랑 건초는 불에 타는 물건이다’라는 전갈을 보낸다. 그리고 그 집 헛간이 불탄다. 치안판사는 아버지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마을을 당장 떠나라고 말한다. 그렇게 떠나온 아버지는 사티에게 거짓말을 요구한다. 사티는 정말 싫다. 정직하게 살고 싶고, 좀 더 우아하게 살고 싶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아버지가 남의 집 헛간에 불을 지르려 할 때, 이번엔 정직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의 한 장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불을 지른다. 억울한 일은 이웃의 집에 들어간 내 돼지를 찾는 데 돈을 내거나, 밟으라고 깔아놓은 양탄자를 밟았다고 지나친 소작료를 걷어가는 일이다. 그렇게 징벌적 소작료를 내고 나면 식구들이 먹을 것도 남지 않는다. 법에 기대도 소용없다. 치안판사는 언제나 있는 사람들 편이다. 아버지는 헛간을 태우는 것으로 화를 삭이고자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영원히 그렇게 분을 삭이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분명히 크레디트에 그렇게 써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일어나고 있는 서사적 사건이나 대사들은 하루키의 것이 맞지만 그 정서나 주제는 오히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헛간 타오르다(Barn Burning)>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손가락 골절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는, 아들 종수(유아인)가 일컫기를 일종의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그 아버지의 모습과 <헛간 타오르다>의 아버지 모습이 훨씬 더 닮아 있기 때문이다. 종수는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 등장하는 ‘나’보다, 가난한 방화꾼 아버지의 아들 ‘사티’에 가깝다. 그렇다. 이 글의 맨 앞부분에 서술된 이야기는 바로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헛간 타오르다>의 일부분이다.

 

하루키의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크게 달라진 부분은 단 하나이다. 바로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 차이로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 원작 <헛간을 태우다>의 ‘나’는 30대 중반의, 카망베르 치즈를 좋아하고, 마일즈 데이비스의 ‘에어진’과 사티르 명인 라비 상카의 음악을 즐겨듣는, 세련된 여피족이다. ‘나’는 재즈와 와인, 가볍지만 섹시한 관계, 추상적이지만 본질적인 의문을 사랑하는, 그래서 타인의 삶에 무심하고 적당히 거리를 둔다. 그게 사는 데 더 유리하다고 믿는 인물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창동 <버닝>의 주인공 종수는 20대 중반이며, 가진 게 없고, 가지려면 건강한 육체밖에 쓸 게 없는 인물이다. 종수는 망해버린 축사 곁에서 대남방송과 뉴스를 들으며 잠이 든다. 소설에서는 아내가 자리를 비운 주인공의 집에 두 남녀가 찾아온다. 아내가 없는 집에 여자 친구 커플이 찾아오는 건 의외의 사건이었지만 소 한 마리 겨우 남은, 무너져 가는 축사 옆 종수의 집에 두 남녀가 찾아오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다. 같은 사건이지만 그 정서는 너무 다르다.

 

무엇보다 종수와 ‘나’는 계층과 연령이 다르다. 원작의 ‘나’는, 번쩍이는 은색 외제차를 가진 남자만큼 잘살지는 않지만, 그런 부에 무관심하다. 아니, 작가인 ‘나’는 그 사람과 사교모임에서 우연히 만날 만큼 비슷한 처지다. 노는 물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종수는 벤(스티븐 연)과 우연히 만날 일이 거의 없다. 벤을 만나려면 종수는 잠복하고, 추격해야 한다. 사는 곳, 노는 물이 다르니까. 그들의 세계에 교집합이 없으니 말이다.

 

이는 마치, 보르헤스가 똑같은 <돈키호테>를 몇 백 년이 지나 고스란히 필사한다고 할지라도 전혀 다른 소설이라고 말한 상황과 닮아 있다. 세르반테스가 소설을 썼던 당시엔 동시대적인 문체였을지 모르지만 2018년에 그대로 써내면 그건 의고체가 된다. 인물의 연령, 계층, 경제적 수준이 달라지면서 헛간을 태우는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헛간이 비닐하우스로 바뀌었다는 그런 사소한 변화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건 비닐하우스건 헛간이건 별 상관이 없다. 다만, 벤에게는 무의미하고, 쓸모없고, 태워지기 기다리는 것이 비닐하우스일 뿐이다. 문제는 이렇듯 허무를 태우는 존재론적 체위와 메타포가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벤에게는 없어도 되고, 십오분 만에 예쁘게 타서 없어져도 될 것이 종수에게는 단 하나의 것, 유일한 것일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아버지가 당신네 헛간에 불을 지르러 간다고, 정의롭게 주인에게 알려주러 간 윌리엄 포크너의 소년 사티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티는 성공한다. 방화 직전에 집 주인에게 ‘헛간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화가 난 헛간 주인은 잘생긴 말을 타고 나와 총성을 두 발 울린다.

 

그 총성은 아버지와 함께 기름통을 들고 가던 형 근처쯤에서 울린다. 소년 사티는 총성이 울린 곳으로도, 집으로도 돌아가지 못한다. 소설은 그렇게 끝을 맺는다. 그 총성은 누구의 가슴을 관통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아버지가 헛간을 태워 벌을 받았듯이 그 땅주인도 벌을 받게 될까? 살인은 훨씬 더 큰 죄이니 말이다. 벌거벗은 채 공포에 떠는 종수를 보며 세련된 소설가 ‘나’가 아니라 포크너의 소년 사티가 떠오르는 이유이다.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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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집도 변화를 탄다. 임오군란 이후에 화교들이 들어오고, 호떡집으로 시작한 중국집 역사는 이제 100년을 훌쩍 넘는다. 부침도 심했다. 한때 최고급 요릿집, 정치인들이 밀담을 나누는 요정 같은 중국집도 있었다. 이제 그런 고급 중국식당은 호텔에서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화교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늘 여러 가지 제한으로 영업에 부담을 줬다. 중국집에서만 쌀밥을 팔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취한 적도 1960년대에 있었다. 한국인에겐 어떤 식으로든 중국집에 대한 추억이 있다. 요즘 세대는 배달로 상징되는 패스트푸드 같은 식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짙지만. 우선 사라진 메뉴가 많다. 먼저 우동. 달걀을 살짝 풀고 파와 양파, 갑오징어를 넣은 맑은 국물의 우동은 이제 전설이 되었다. 우동이라는 메뉴 자체를 안 파는 중국집이 많고 팔더라도 옛날과 달라졌다. 갑오징어값이 너무 비싸 5000, 6000원 하는 우동값에는 불가능한 재료가 되어버렸다.

 

 

기스면도 보기 힘들다. 맑은 닭 국물에 가늘게 찢은 닭고기와 고운 면이 들어간 국수였다. 짜장면과 짬뽕처럼 볶아서 만드는 요리와 달리 뭐랄까 얌전하고 기품 있는 요리로 기억한다. 언제부터인가 이 면을 중국집에서 사먹을 수 없다. 더러 파는 집이 있어서 시켜보았는데 옛날 맛이 아니고 성의도 없다. ‘기스’란 계사(鷄絲)를 화교들이 부르는 말로 가느다랗게 닭고기를 찢어서 만든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중국요리가 한국에선 거의 튀기고 볶는 자극적인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실제로는 찌고 삶는 요리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요리이기도 하다.

 

울면도 이젠 전설이다. 걸쭉한 전분을 풀어 뜨겁게 먹는 이 면은 겨울의 특미였다. 특히 이것을 먹는다는 건 뭔가 좀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해서 만만하지 않았다. 간이 되어 있을 뿐, 특별히 자극적인 맛이 없는, 그래서 어른의 맛이라고 생각했던 국수. 맵고 달고 시고 짠 면과 싸우면서 장렬히 사라지다시피 한 역사적인 음식이다. ‘뎀푸라’라고 부르는 요리도 이젠 거의 없어졌다. 탕수육과 같은 음식이되, 소스를 붓거나 곁들여 내지 않는 고기 튀김을 이르는 말이다. 이것도 어른들이 좋아했다. 달고 신 소스가 없으므로. 게다가 소스가 안 나오니까 값이 조금 싸고 양도 더 많았다. 그 고기 튀김을 간장과 식초, 고춧가루 푼 작은 소스접시에 찍어먹으며 고량주를 마시는 것이 중국집 멋을 아는 어른들의 풍류였다. 불과 기름에 탄 맛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고소함의 극치였던 고기 튀김, 아니 뎀푸라. 그리고 또 사라진 것은 홀에다 대고 외치는 중국어 주문이었다. 한국인이 하는 중국집에서도 주문만큼은 중국어(대개 좀 제멋대로이긴 했다)로 하곤 했다. 그것이 ‘정통’이라는 느낌을 주었으니까. 이제 우리는 어디에서 만드는지도 모르는 배달 짜장면과 짬뽕, 맛없는 서비스 군만두로 중국집을 기억하게 된다. 심지어 배달원도 외주회사의 마크를 달고 있으니. 시절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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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주 제물로 삼던 스릴러 장르에 최근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 눈길을 끈다. 역대 JTBC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김희선, 김선아 주연의 <품위 있는 그녀>를 비롯해, 올해 김남주에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안겨준 JTBC 드라마 <미스티>, 한가인의 6년 만의 드라마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OCN <미스트리스>, 송윤아와 김소연의 ‘워맨스’를 내세운 SBS <시크릿 마더> 등 여성 중심 스릴러가 연이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작품은 특히 기혼 여성들의 억압과 불안을 극의 중심 재료로 삼는다. 하나같이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서사인 미국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을 연상시킨다는 평을 듣는다는 점에서도 그 공통된 정서를 알 수 있다. 미국 중산층 주부들의 비밀스러운 일상을 그린 <위기의 주부들>은 기혼 여성의 솔직한 욕망을 통해 가족제도의 모순을 신랄하게 파헤쳐 방영 당시 미국가족협회로부터 ‘주부들의 일탈’을 부추기는 문제작으로 비난받기도 한 작품이다.

 

OCN 드라마 <미스트리스>의 한 장면.

 

 

최근 국내에서 유행하는 ‘한국판 <위기의 주부들>’은 여성의 불안한 내면과 가족제도의 균열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먼저 지난해 방영된 <품위 있는 그녀>는 준재벌가의 ‘우아한 사모님’으로 살아가던 우아진(김희선)이, 그녀와 같은 삶을 욕망하는 여성 박복자(김선아)와 만나면서 혼란을 겪는 이야기다. ‘완벽한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삶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우아진은 신분상승을 위해 모든 것을 거짓으로 꾸몄던 박복자와의 만남을 통해 결국 자신의 삶 또한 허상임을 깨닫고 가족제도 바깥으로 탈주한다.

 

그런가 하면 올해 초 방영된 <미스티>는 대한민국 최고의 앵커 고혜란(김남주)이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미스터리 스릴러 안에 기혼 여성의 사회적 성공을 향한 욕망과 주부로서의 억압이 충돌하는 이야기를 담아냈다. 혜란을 둘러싼 가장 큰 위협은 커리어 경쟁자나 살인 혐의보다 그녀의 사생활에 대한 끝없는 의심에서 비롯된다. 혜란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언론인으로서 능력 외에도 주부로서의 완벽한 모습을 요구받고 이 불가능한 양립은 비극적 결말로 돌아온다.

 

지난주 방영을 시작한 <시크릿 마더>는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바치는 강남 엄마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네 명의 중심인물은 모두 어두운 비밀을 감추고 있다. 딸을 잃어버린 아픔을 숨기고 있는 윤진(송윤아), 외도한 남편과 쇼윈도 부부로 살아가며 자신도 불륜을 저지르는 혜경(서영희), 자식을 영재고등학교에 보내기 위해 위장이혼을 감행하는 화숙(김재화), 우아한 가면 뒤에 전직 호스티스라는 과거를 감춘 지애(오연아)가 그들이다.

 

이들의 비밀은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는 기혼 여성들의 분열된 내면을 상징한다. 특히 정신과의사에서 아들 교육을 위해 전업주부로 변신한 주인공 김윤진은 ‘슈퍼맘’이기를 요구받는 기혼 여성의 스트레스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녀의 불안은 아들의 뒤처진 성적뿐 아니라 딸을 지키지 못한 ‘실패한 엄마’라는 죄책감에서 비롯된다. 살인사건의 진범이 누구인가 하는 미스터리보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윤진의 위태로운 내면이 <시크릿 마더>의 가장 큰 스릴을 담당한다.

 

OCN 드라마 <미스트리스>도 마찬가지다. 네 명의 주인공 가운데 기혼 여성인 세연(한가인)과 정원(최희서)의 이야기가 가장 공포스럽게 묘사된다. 2년 전 남편의 실종으로 어린 딸을 홀로 키우는 세연의 이야기에는 한부모 가정 워킹맘의 불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딸을 맡기기 위해 고용한 보모가 등장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거의 아동 실종 스릴러인 <미씽: 사라진 여자>의 공포를 연상시킨다. 또 다른 기혼 여성 정원(최희서)의 불안 역시 소위 ‘정상가족’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완벽한 가정을 꿈꾸는 남편은 아이에 집착하고, 계속해서 임신에 실패하는 정원의 스트레스는 감정조절장애로까지 나타난다.

 

최근 이 같은 여성 중심 스릴러의 부상은 기혼 여성들의 부담이 갈수록 가중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초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정부 차원에서 가족 예능 프로그램의 제작 지원 등을 통해 이상적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했고, 이로 인해 기혼 여성들에 대한 억압은 더욱 심화됐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 이후 핵심 정책 과제로 삼았던 일·가정 양립정책 또한 기혼 여성들의 과로와 부담을 가중시킨 주요인이었다. 이 시기 맘충, 앵그리맘, 맘고리즘 등 기혼 여성 관련 신조어들이 계속해서 증가한 것도 이러한 억압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에도 기혼 여성들의 일탈을 다룬 드라마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가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아내들의 반격과 복수’를 다룬 소위 막장드라마들이 유행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 드라마 속 여성들이 결말에 이르러 새로운 결혼과 임신을 통해 기존 가족제도로 다시 편입되는 것과 달리, 가족제도의 균열을 좀 더 진지하게 다루는 요즘의 여성 스릴러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시효가 이제 만료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선영 |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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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가정의 달이라더니, 영화관에도 가족이 많다. 관객도 많지만, 가족에 대한 영화들이 많다는 뜻이다. 미국으로 입양된 후 팔씨름 챔피언이 된 마크의 이야기인 <챔피언>, 아내와 사별한 후 아들 하나 보고 살아온 아버지 귀보의 이야기 <레슬러>를 비롯해 때마침 소개된 인도 영화 <당갈>도 넓은 의미에서는 가족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가족 이야기가 대부분 부모와 자식 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레슬러>와 <당갈>은 공교롭게도 모두 레슬링을 소재로 삼고 있다.

 

<레슬러>는 레슬러로서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아버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레슬러 아버지 귀보는 유해진이 맡아 특유의 너털웃음과 사람 좋은 말투로 그려진다. 어쩌면, <레슬러>라는 영화가 유해진의 개성과 이미지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레슬러>는 한국형 가족 영화의 문법을 거의 고스란히 따라간다. 아버지와 아들이 티격태격하면서 살아가고,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루기에 벅찬 아들은 결국 아버지에게 반항한다. 사랑하고, 아끼고, 싸우지만 결국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포옹으로 서로를 이해한다. 가족이니까 말이다.

 

영화 <레슬러>의 한 장면.

 

 

반면, <당갈>은 코미디처럼 시작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진지해지는 작품이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레슬링의 길을 열어 주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아이들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점이다. 퇴역 레슬러가 자식에게 레슬링 기술을 전파하고, 의지를 북돋운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지만 아들과 딸의 차이로 영화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전개된다. <레슬러>가 결국 아버지와 화해하는 아들의 성장담으로 끝난다면 <당갈>은 세계적 수준으로 우뚝 선 여성 레슬러 이야기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의미 있는 것은 여자에게 레슬링이란 그다지 권유되지 않는 스포츠라는 사실이다. 마치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가 보수적인 영국 탄광촌에서 발레를 시작했을 때, 가족뿐만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의 반대와 마주쳤던 것과 유사하다. 아니, 사실 더 심각하다. <당갈>의 배경은 인도이고, 인도는 최근에도 몇몇 끔찍한 여성 학대 사건사고로 뉴스에 등장하는 나라이니 말이다. 분명, 여성 레슬링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슬링은 남자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서로 비비는 전형적 남성 스포츠로 여겨진다. 하지만, <당갈>의 소녀들은 결국 그 남성 스포츠의 세계에 당당히 진출해 나름의 성과를 얻는다.

 

성차의 편견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영화의 문법에도 존재한다. 가령,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그리고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로 짝지어지는 서사의 관행도 그렇다. 엄밀히 말해 <레슬러>에 묘사된 아버지는 아버지라기보다는 어머니 역할에 더 가깝다. 아들에게 밥을 해 먹이고, 창가에 둔 식은 밥을 처리하고, 홀로 청소하는 모습의 묘사를 보노라면 귀보씨는 아들에게 엄마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약간의 묘사에 멈추고 결국 영화 <레슬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어야 할 진부하고 관습적인 갈등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리틀 포레스트>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눈길을 끈다. <리틀 포레스트>에는 아버지의 고향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로도 15년 넘게 살아온 어머니와 딸이 등장한다. 이 어머니는 딸 아이가 수능을 보고 온 다음 날, 편지 한 장만 남기고 훌쩍 집을 떠난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언제 온다는 말도 없이. 딸 역시 그런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하지만 그렇다고 분노하거나 엄마의 부재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마음을 담아내는 것은 바로 음식이다. <리틀 포레스트>에서 엄마와 딸은 음식을 통해 대화한다. 엄마에게 배운 음식을 딸이 하면서 엄마의 마음을 추측하고, 딸이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며 언젠가 어머니에게 전달할 것을 바란다.

 

사실, 가족은 언제나 직설법으로 말하는 사이다. 친구나 직장 동료, 상사, 스승에게 절대로 하지 않는 날것의 말을 내뱉고, 돌려받는 관계가 바로 가족인 것이다. 그래서, 후련하고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가족만큼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도 드물다. 어쩌면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야말로 제2의 언어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리틀 포레스트>의 어머니와 딸이 레시피로 서로 대화하듯이 조금은 은유적이며 간접적인 언어의 창고가 필요한 것이다. 어떤 말에도 상처받지 않는 강철 심장을 가진 가족은 아니 인간은 없으니 말이다.

 

<당갈>의 레슬링 역시 가족의 제2 언어 구실을 한다. 아버지는 딸이 대회에 우승하고 나서 마침내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직설법으로 말한다. 하지만 사실, 이 자랑스러운 마음은 레슬링을 가르치고 도와주고 코치하는 과정 내내 육성이 아닌 레슬링의 몸의 언어로 전달되었던 바이기도 하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가족의 언어야말로 온도와 열기를 식힐 중간의 번역 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가족이니까 다 이해해야 하고, 완전히 솔직할 필요는 없다. 가족 사이에도 거리와 짐작이 있어야 한다. 가족의 마음이 경유할 수 있는 언어의 섬, 그런 중간지대를 마련해 볼 필요도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Posted by mx2.0

다시 냉면이다. 작년 여름, 냉면에 관한 여러 논쟁이 있었다. 진짜 평양냉면이 무엇이냐, 평양냉면에 식초와 겨자 치면 ‘맛치(痴)’인가 하는 자문과 엉성한 자답이 있었다. 엉성하다고 표현한 것은, 냉면은 결국 대한민국(남한)의 것이 아니라는 전제를 뜻한다. 속칭 면스플레인(면+익스플레인[explain])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냉면 먹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행위에 대한 힐난이었다. 그러던 중에 올봄 남북 예단 교류를 통해 이른바 붉은 다대기(양념장)까지 넣어서 나오는 북한 냉면을 보고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 겨자와 식초조차 치지 말아야 한다는 냉면 순수파(!)의 코가 납작해져버릴 일이었다.

 

나는 왕년에 1960년대에 나온 북한 요리책을 좀 보았다. 중국에서 입수한 책을 공항으로 가져오다가 이적표현물이라고 압수당한 일도 있다. 요리책이 이적표현물이 된 건 무리도 아니었다. 이렇게 떡하니 적힌 말이 요리책에 수없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대강 이런 식이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평양랭면은 민족의 자랑입니다. 인민이 랭면을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우리 모두 랭면을 애호하여 민족의 기개를 드높입시다.”

 

어쨌거나 당시 북한의 냉면 조리법도 다 달랐다. 책마다, 시기마다 다른 조리법이 실렸다. 고기로 닭과 꿩을 쓰거나, 돼지와 소를 쓰거나, 아니면 고기란 고기는 다 들어가는 조리법도 있었다. 면의 배합도 달랐는데, 요즘처럼 메밀이 적지는 않았다. 색깔도 지금보다 희었다. 왜 그런 변화가 생겼는지 모를 일이다. 평양의 냉면도 현지에서 들려오는 말을 옮기자면 옥류관은 대외용이고, 인민은 다른 집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그런 판국에 평양냉면에 식초와 겨자는 치지 말라는 둥, 붉은 양념을 넣는 건 바보짓이라는 둥 하는 남한 인사들의 말이 얼마나 허망한가.

 

 

나는 냉면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전국을 도는 것도 모자라 일본, 중국의 냉면집을 섭렵했다. 그러면서 얻은 결론은 하나였다. 다 각기 사정에 따라 냉면을 말아먹을 뿐, 우열은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오사카와 모리오카 일대에는 평양식 냉면집이 꽤 많다. 그러나 이들의 면은 거의 밀가루와 전분의 배합이고, 메밀은 아예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소바라는 전통의 메밀집이 있는 일본에서는 어설프게 메밀국수를 내는 게 현지 손님의 기호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각기 알아서 면을 뽑고 육수를 내고 만들어내지만 어느 것도 ‘평양냉면이 아니야’ 하는 비난을 할 이유가 없다. 시대와 장소, 사람의 변화에 따라 음식은 변한다. 유럽의 한식당에서 맛이 묘한 김치찌개를 먹고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현지의 배추와 양념 사정에 따라 달라지는 맛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맛의 소인배요, 옹졸한 국수주의다.

 

참, 북한에서 출판한 요리책에서 여러 가지 냉면 조리법은 다 달랐지만 공통점은 하나 있었다. ‘맛내기 조금’이 꼭 들어간다는 사실. 맛내기는 MSG, 즉 우리의 미원에 해당하는 북한 말이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이 부분만큼은 일찌감치 통일이 되었던 것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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