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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치러지기 전에는 학력고사란 게 있었다. 아마도 교육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과목일 텐데, 실업도 고사 과목 중 하나였다. 그게 쓸모가 있든 없든 3년을 열심히 배우고 가르쳤다. 필답고사 320점 만점에 무려 15점이 배점되어 있었다. 속칭 암기과목이니 이른바 무조건 고득점을 노리고 봐야 하는 전략과목이기도 했다. 실업이란 게 워낙 다양해서 상업, 공업, 가사에 농업, 수산업, 광업도 있었다. 고등학교가 속한 지역 사정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업, 공업이 많았다. ‘밥’이 되는 과목이라는 뜻이었다. 농업이니 수산업이니(심지어 광업까지) 하는 과목은 사양산업 같았고, 1980년대에 바라보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실업 과목에 속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인문계를 다녔으니 상업을 배웠다. 문제는 이 과목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었다. 대변 차변이 나오는 부기 부분에 가면, 머리가 다 멍해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부채도 자산이다’라는 원리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남의 돈을 빌려 쓰는데 그게 어찌 ‘내 돈 같은 자산’이 되느냐고. 원서 쓸 날은 가까워 오고, 부채와 자산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그때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하는 재수생 형의 제안은 놀라웠다. 농업을 선택하라는 거였다. 쌀 나무나 겨우 아는 수준에 농업을 어찌 배우냐고, 이제 곧 원서 쓰고 시험이라고. 그 형이 지긋이 웃으며 말했다.

 

“농업은 쉽게 나와. 네가 매일 먹는 게 시험에 나온다고.”

 

과연! 기출문제를 보니 소, 돼지에 쌀에 고구마, 사과와 귤이 시험에 나오는 게 아닌가.

 

나는 그렇게 농업을 순전히 책으로 배웠고, 학력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다. 뚱딴지같은 생각에서 시작된 우연이었지만 농업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무엇보다 도시에서 산 내게도 흥분될 정도로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병아리를 까는 법, 알을 많이 낳게 하는 법, 소와 말의 임신 기간이 사람보다 길다는 거(이 녀석들이 임신한다는 사실을 도시 아이들은 아는가 모르겠다), 사과를 많이 열리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지, 돼지에게는 진흙목욕이 최고라든지…. 농(축산)업이 기본적으로 인간 중심의 이기적인 생산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 입에 들어가는 생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투명한 랩으로 곱게 부위별로 포장된 고기를 고르면서도 그 붉은 살코기가 어떤 존재의 누적된 삶의 부분인지 우리는 이제 알지 못한다. 아니,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산다.

 

 볍씨가 어떻게 모종이 되어 무논에 심어지고 나락이 되는지, 그걸 털어서 어떻게 깎아야 맛있게 먹는지 아는 사람이 도리어 별종이 되는 세상이다. 농축림수산업은 인류를 지탱하는 기초 산업이다. 누구 말마따나 스마트폰을 먹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먹는 것을 이해하는 일, 아마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제일 큰 힘이 될지도 모른다. 단위학교에서 농업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것이 앞이 안 보이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줄 것이다. 별에 버려진 우주인이 인분으로 감자농사를 짓는다는 영화 속의 이야기는 그 의미심장함의 비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이테크 시대에도 우리는 뭔가를 먹어야 하고,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암시하는.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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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토요일 밤 9시 무렵, 예고도 없이 진만과 정용이 세 들어 사는 건물 전체에 전기가 나가버렸다. 무언가 퍽, 터지는 소리가 복도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형광등도, 컴퓨터도, 보일러도, 서로 합을 맞춘 노련한 배우들처럼 일순 정지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정적. 그 정적 때문에 정용은 평상시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소음을 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옆방 남자가 끙, 하면서 돌아눕는 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길게 어둠 속에서 울렸다.

 

 

 

정용과 진만은 휴대폰 손전등 기능을 이용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 출입구 앞에는 이미 서너 명의 건물 입주민들이 나와 환하게 불을 밝힌 바로 앞 아파트와, 그와는 반대로 오래된 축대처럼 칙칙하게 변해버린 자신들의 거주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원래 칠층짜리 모텔을 원룸으로 개조한 건물은 창턱마다 장미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장미꽃 문양만은 기괴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거, 한전에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입주민 중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정용과 진만은 입주민들과 몇 발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추리닝 차림 그대로 나온지라 몸이 떨렸다. 불 꺼진 건물을 올려볼 때마다 목과 어깨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한전이 아니고 건물주한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밖으로 나온 입주민들이 더 많이 늘어났다. 그들 대부분은 슬리퍼에 맨발 차림이었고, 수면바지에 담요를 어깨에 친친 감고 나온 여자의 모습도 보였다.

 

“월세만 받고 관리를 너무 안 해주잖아요.”

 

또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자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건물주가 관리를 제대로 안 해주는 것은 맞지만, 정용은 그렇다고 딱히 불만을 품거나 원망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하기엔 월세가 지나치게 쌌다. 보증금도 없이 월세만 내는 처지라 무엇을 더 바라거나 원해선 안 된다고 이삿짐을 들여올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 건물이 근저당이 좀 많이 잡혀 있어요. 아아, 그래도 걱정할 건 하나 없어요. 그래서 보증금도 없는 건데, 뭘…. 처음 정용과 진만에게 방을 소개해준 부동산 중개인은 그런 말을 보태기도 했다. 근저당이 많이 설정되어 있는 건물, 그 건물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정전 때문에 한자리에 모여 서 있는 밤이었다.

 

“한전에서 30분 안에 기사 보내준대요.” 검은색 롱 패딩을 입은 젊은 남자가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 그제야 몇몇 사람이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더 많은 사람이 건물 앞에 남아 있었다. 일부는 출입문 옆 벽에 기대 서 있었고, 또 일부는 층계에 앉아 있었다. 건물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슨 구경거리처럼 입주민들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사층에 사는 누군지는 몰라도 거 밤에 세탁기 좀 돌리지 맙시다.”

 

중년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밤에 세탁기를 안 돌리면 언제 돌려요? 낮엔 일하는데.”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되받았다.

 

“아니, 주말도 있고 정 안 되면 초저녁에 돌리면 되잖아요?”

 

“주말도 일하고 퇴근하면 밤 열 시인데, 뭘 어쩌라는 거야, 젠장.”

 

“젠장? 너 근데 몇 살이니? 몇 살인데 반말 찍찍 갈기는 건데!”

 

층계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서 한 사내 앞쪽으로 다가갔다. 사내도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허리를 더 꼿꼿하게 세웠다. 정용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다. 모두 혼자 사는 사람들이었다. 연차나 반가, 월차 같은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코인 세탁소를 이용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었다. 오직 가전제품이 내는 소리만 듣고 사는 사람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잠드는 사람들.

 

서로 멱살을 잡을 듯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은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졌다. 더 이상 반말도, 비아냥도 없었다.

 

“정전되니까… 괜히 호빵 같은 거 먹고 싶지 않니?”

 

진만이 정용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정용은 그런 진만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얘랑 너무 오래 살아서 이렇게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신고 전화를 한 지 채 이십 분도 지나지 않아 붉은색 한전 마크를 단 사다리차가 건물 앞에 도착했다.

 

“퓨즈가 나갔을 겁니다. 교체하면 바로 괜찮아질 거예요.”

 

헬멧을 쓴 기사가 모여 있는 입주민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입주민들은 바스켓이 달린 사다리가 서서히 펼쳐지는 모습을 마치 어미를 기다리는 어린 참새 떼처럼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건물 안에 있던 입주민들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바스켓에 타고 있는 한전 기사를 바라보았다. 토요일 밤이었지만,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따뜻한 잠자리를 위해 아찔한 허공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직업이었겠지만,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겐 어떤 위로가 되는 모양이었다. 입주민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어, 눈 오네.”

 

누군가가 그렇게 말을 하자 정말로 하늘에서 벚꽃 같은 작은 눈송이가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떨어지는 눈과 그 눈을 배경으로 하늘에 떠 있는 한전 기사를 계속 쳐다보았다. 올해 첫눈이었지만, 기사는 그런 것쯤 상관도 하지 않고 변압기 여는 작업에만 열중했다. 첫눈이 기사를 더 기사답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건물주도, 근저당도, 세탁기 소음도 첫눈이 온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겠지만, 지금 저 하늘에 떠 있는 기사만큼은 더 선명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야, 진짜 눈 보니까 호빵 먹고 싶지 않니? 올해 첫 호빵.”

진만이 다시 정용의 귀에 속삭였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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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0) 2017.12.08
Posted by mx2.0
TAG 첫눈, 픽션

동네에 새로 생긴 작은 책방에서 독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동네 작은 책방들이 많아지면 그중에 내 단골 책방도 생길 텐데, 그러면 책 고르는 일이 훨씬 즐겁고 편해질 것 같다고. 말하자면, 내 취향의 옷들을 파는 작은 옷가게처럼. 언제 들러도 내가 좋아하는 옷이 한두 벌쯤은 있어서 지갑 형편상 사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구경만으로도 행복한. 동네 책방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책방에 들르면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중에 무얼 골라도 크게 실망할 것 같지 않은. 그러니까 책방에 대한 믿음, 주인에 대한 믿음, 선택에 대한 믿음, 그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그러나 거창하지 않게 놓여있는. 대형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의 수많은 책들 중에서 무얼 골라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을 때,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고르긴 골랐으나 읽어보니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나만의 그런 작은 서점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집에 티브이를 두지 않게 된 이후로 모든 방송을 스트리밍 서비스로 보게 되었다. 영화든, 드라마든, 뉴스든. 그냥 틀어놓으면 수동적으로 보게 되는 티브이 시청과는 달리 이건 매우 적극적인 행동이 전제된다. 무얼 볼지 결정해야 하고, 그 선택에 대한 후회도 온전히 내 몫이 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는 그래서 고객의 선호도를 분석해준다. 넷플릭스는 그 분석을 바탕으로 콘텐츠를 자체 제작하기도 한다. 고객은 접속과 동시에 자신에게 추천되는 프로그램의 목록을 볼 수 있다. 얼마나 좋아할지, 그 확률을 숫자로까지 표시해준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 드라마, 99프로 일치. 내가 전에 보았던 것과 유사한 다큐멘터리, 90프로 일치. 전체고객의 상위 5프로가 최근에 가장 좋아한 영화. 뭐, 이런 식이다. 숫자의 유혹이 놀랍다. 내가 99프로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 드라마라니, 이건 반드시 봐야 한다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왕이면 89프로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 것보다는 이걸 먼저 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나서, 시청 후에 드는 생각. 내가 정말 이걸 좋아하나? 나의 99프로가 이걸 좋아하나? 그러나, 때때로, 아니 실은 아주 자주 나의 1프로는 말한다. 이런, 나는 이걸 안 좋아하는 걸.

 

집에 티브이가 없고, 게다가 종이 신문을 정기 구독하지 않는다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아는 것 역시 매우 적극적인 행위가 된다. 알려고들면 그렇다는 얘기다. 자신이 좋아하는 뉴스매체를 인터넷에서 선택해서 그중에 관심이 가는 뉴스를 다시 선택해야 하고, 그와 관련된 다른 매체의 뉴스들을 비교해서 봐야 한다. 수고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포털에 기대게 된다. 포털은 넷플릭스처럼 ‘당신이 좋아할 만한’, 혹은 ‘당신에게 중요한’ 몇 프로의 가능성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간판에 걸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100프로 중요한 것이 된다. 99프로도 아니고 100프로다. 지나치게 사소해서 티브이 뉴스를 틀어놓았다면 귓전으로 그냥 흘려들었을 뉴스까지도 그날의 가장 중요한 뉴스가 된다. 책이 소개되면 가장 핫한 책이 되고, 옷이 소개되면 그즈음의 패션이 된다. 그 중요한 뉴스가 어떤 매체의 것으로 소개되었는지에 따라 느닷없이 보수적인 의견을 따라가게 되기도 하고, 전혀 반대로 진보적인 입장에 서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문득 하게 되는 생각. 이런, 나는 아무 생각도 없는 걸? 더 나아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러니까 내가 아는 건 세상이 아니라 네이버뿐이라는. 최근에 1994년의 신문을 볼 일이 있었다. 그해 1월1일의 어느 신문 특집 기사는 향후 IT산업의 발전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모시키게 될지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내용이 재밌다. 앞으로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선택해서 볼 수 있는 날이 올 거라든가, 누구나 ‘휴대용화면전화기’를 소유하게 되어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든가. 농담처럼 이런 우려도 덧붙여 있다. 회사원들은 근무시간에 주식시세를 검색하다가 상사에게 들키는 불상사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그 모든 예측들은 다 사실이 되었다. 신년에 보는 토정비결도 아니고, 자료를 통한 과학적 예측이니 그게 사실이 되었다고 해서 놀라울 것은 없다. 미래는 늘 현재가 품고 있는 씨앗을 통해 발아하는 법이니. 좋은 미래든, 나쁜 미래든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불행히도 앞으로의 미래는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나라고 예측되어지는 어떤 조건치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포털 뉴스의 불공정한 배치가 문제가 되면서 앞으로는 뉴스 배치를 알고리즘화하는 쪽으로 개선한다고 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개인의 취향,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뉴스를 자동으로 배치한다는 뜻인 모양이다. 내가 좋아하는 뉴스와 당신이 좋아하는 뉴스가 다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게 중요한 뉴스와 당신에게 중요한 뉴스도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넷플릭스에서는 이런 과정을 ‘큐레이션’ ‘레시피’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고객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숨어 있는 취향을 찾아주는 서비스라고까지 했다. 놀랍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좋아하는 것을 찾아주는 서비스라니. 마찬가지로 내가 중요한지도 모르는 중요한 뉴스가 스스로 알아서 찾아오기도 한다는 뜻일 텐데, 그 반대를 생각하면 또 놀랍다. 이런,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걸.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 분명히 올 터이고, 뉴스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는 순간도 올 것이다. 길이 복잡해지고, 그 길이 엉망이 되기 전 단단한 지표를 먼저 세우는 게 필요할 터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거나 판단하지 않거나, 단 한 건의 뉴스가 세상을 바꾸기도 하는 법이니.

 

동네 작은 책방 얘기를 했었다. 단골을 분석하는 게 아니라 공감하는. 통계적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대화하는. 차 한잔, 혹은 맥주 한잔과 책 한 권, 그 책의 어느 한 페이지에 손을 얹어놓고 문득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 그곳에는 나라고 추정되어지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분명히 나 자신인 내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세상은 결코 이렇게 단순하지 않고 단순해지지도 않겠지만, 그럴수록 더욱 확실한 지표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단순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단순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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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범죄는 즐겁다. 다만 그것이 해결될 때 말이다. 범인이 누구였느냐를 밝혀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파악하고, 분석하고, 규정할 때 마침내 범죄는 정복된다. 왜가 밝혀진다는 것은 범죄의 인과관계가 해부되었음을 뜻한다. 해부된 범죄는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원인을 알면 범죄는 예방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할까? 여기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해 낸 탐정, 에르큘 포와로 말이다.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에서 에르큘 포와르 역을 맡은 케네스 브래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스틸 이미지.

 

에르큘 포와로는 해결사의 대명사다. 포와로가 있는 곳에 해결되지 못할 범죄는 없고, 잡히지 않는 범인은 없으며, 원인 모를 범죄도 없다. 포와로가 주목하는 순간 우연은 사라진다. 모든 우연은 철저히 계산된 필연이며 그래서 회색 뇌세포를 가진 그가 풀어내지 못할 난제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즐거운 범죄의 면면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이미 1974년에 영화화된 바 있다. 원작을 읽었다면 잘 알고 있듯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반전이 독특한 작품이다. 이 반전은 범죄서사에 대해 소비자가 으레 요구하는 관습적 모범답안을 뒤집는 것과 연관된다. 대개의 독자, 관객들이 범인이 누구인가에 집중하는 동안 이야기는 누구가 아닌 왜를 생각하라고 떠민다. 누구냐보다 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너무도 유명한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결론을 모른다면, 더 이상 읽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어떤 점에서 범인을 가려내는 게 불가능한 사건에 가깝다. 범인이 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이며, 게다가 서로가 알리바이가 되어 서로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즉,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은 다수의 사람들이 의기투합해 정의를 실현한 일종의 단죄이다.

 

중요한 것은, 이 기차에 바로 에르큘 포와로가 탑승했다는 사실이다. 기획이 완벽할수록 포와로의 재능은 빛나고 그의 역할은 중요해진다. 역시나 그는 천재이기 때문에 이 완벽한 기획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즐거운 범죄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얽히고설킨 열세 개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포와로는 그 숨겨진 이면과 거짓을 읽어낸다. 좀 과하게 이야기하자면 마치 포와로에게 읽히기 위해 열세 명이 복잡한 암호를 출제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단지 어려운 문제일 뿐 결국 풀릴 수 없는 퍼즐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 문제적인 것은 공동범죄라는 바로 그 부분이다. 열세 명의 사람들이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의 복수를 위해 모의한다. 케네스 브래나 감독 역시 이 부분이 꺼림칙했는지, “영혼의 균열”이라는 말을 거듭 강조한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을 위해 범죄를 모의한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돈”이었다면 훨씬 더 그럴 듯해 보이진 않았을까? 2017년 현재의 관객들에게, 열세 명이나 함께할 수 있는 공공의 신의라는 게 납득이 될 수 있을까?

 

다정한 친구, 은인, 존경했던 이의 복수를 위해 현재의 자신을 걸고 범죄에 가담한다는 것, 그건 너무나도 아름다운 인간적 연대이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며, 이상적이다. 2017년엔 불가능해 보이는 연대, 적어도 1930년대에는 이런 식의 정의와 신뢰, 우애가 가능하리라 여겨졌던 모양이다. 2017년, 완벽한 천재 포와로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남을 위해 스스로를 헌신하는 열세 명의 인물들이다.

 

어쩌면 지금의 시점에서는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 같은 범죄자가 더 그럴 듯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무 이유도, 맥락도, 감정이나 불만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범죄자 말이다. 만약, 그에게 “왜”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냥”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의 범죄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그런 범죄자를 쫓는 보안관에게 그의 행적은 암호나 퍼즐이 아니라 해독 불가능한 난수표에 불과하다. 애당초 인과관계 따위가 없으니 포와로가 살아 돌아온다고 할지언정 안톤 시거의 범죄를 명명백백히 밝혀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즐거운 범죄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1974년의 고전 영화를 2017년 새롭게 단장해 다시 보는 마음도 여기서 멀지 않을 것이다. 어느덧 세상엔 회색 두뇌로도 이해할 수 없는 범죄들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아내를 성매매에 이용할 뿐 아니라 딸 친구까지 유인해 폭행 살해하는 남자도 그렇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초등학생을 유인해 산산이 부순 소녀도 그렇다. 유능한 탐정만 있으면 모든 범죄는 해결 가능하다고 믿었던 그 시절이야말로 어쩌면 인류의 좋은 시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젠 그런 환상조차 설득력을 잃은, 황무지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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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고백부부>에서 마진주(장나라)가 육아에 지친 모습으로 전화받는 장면. <고백부부> 스틸 이미지

하루에도 신조어가 수십개씩 쏟아지는 시대에 최근 ‘영포티(Young Forty)’만큼이나 집중 조명받은 말이 또 있을까. 트렌드분석가 김용섭이 저서 <라이프 트렌드 2016>에서 과거의 X세대를 겨냥해 처음 명명한 이 단어는 당시만 해도 그리 새롭거나 주목받는 용어는 아니었다. X세대가 40대에 들어서기 시작한 2010년대 초반부터 이들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회고열풍이 불면서, 이미 그들을 지칭해 생겨난 여러 호칭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회고열풍을 주도한 영화 <건축학개론>과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각각 유래한 ‘건축학개론 세대’와 ‘응팔 세대’ 등이 있다.

 

그 후로는 패션업계에서나 종종 언급되던 ‘영포티’가 갑작스럽게 ‘대부흥’을 일으키게 된 데에는 올해 4월 통계청 공식블로그에 올라온 글 하나가 계기가 됐다. “지금은 아재시대, 대세는 영포티!”라는 글이 SNS를 통해 뒤늦게 ‘발굴’되면서 집중포화를 맞은 것이다. 비판의 핵심 중 하나는 제목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영포티’라는 단어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성을 소외시킨다는 데 있다. ‘영포티’의 유사어로 ‘아재슈머(아재+컨슈머)’를 들고, 월평균 소득과 지출이 꾸준하게 증가하는 40대의 소비력을 찬양하는 이 글은, 한국 노동시장에서 남성과의 임금 격차가 가장 크게 벌어지는 시기인 40대 여성들의 현실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영포티’ 논란은 그 허황된 신화의 기원을 마련한 1990년대 회고열풍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이었는가를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건축학개론>이 젠더의식 부재에 대한 여성들의 꾸준한 비판이 있었음에도, 놀라운 흥행기록과 함께 한국 멜로 영화의 신기원이자 1990년대 대중문화 신드롬의 주역으로 예찬받는 것처럼. 1990년대 신세대 문화의 가장 중요한 한 축이 여성주의문화였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드라마만 보더라도, 당시 신세대의 새로운 재현양식으로 급부상한 트렌디물은 그야말로 신여성들이 주도하는 서사였다. 그 이전까지 가정멜로드라마 안에서 가족에 얽매여있던 여성들은 트렌디드라마 속에서 비로소 사회적 경력을 쌓으며 일과 사랑을 쟁취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한편에서는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여자의 방> <아들과 딸> 같은 진지한 여성주의 드라마도 계속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1990년대 회고열풍에서 이러한 여성 주도 서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례로 <응답하라 1994>에서 대중문화 황금기를 재현하는 역할은 남주인공 ‘쓰레기(정우)’가 담당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같은 당대의 베스트셀러를 비롯해 <슬램덩크> <영챔프> 등의 만화와 <모래시계> <마지막 승부> 같은 히트 드라마까지, 그가 읽고 보는 모든 것들이 당시 대중문화 아이콘의 집합이었다. 방영 당시 ‘쓰레기의 책장’을 분석하는 기사들이 등장했을 정도다. 여주인공 성나정(고아라)이 전작 <응답하라 1997>의 여주인공에 이어 한 분야의 ‘빠순이’로 묘사되는 것과는 대조적인 풍경이다. 시대상을 강박적이리만치 대표적인 기호들로 구현하면서, 연대생인 성나정(고아라)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는 장면이라도 나올 법한데 거기엔 도통 관심이 없다.

 

‘영포티’의 결정적 모델을 제공한 2012년 드라마 <신사의 품격>은 더 노골적이다. 91학번으로 등장하는 네 주인공은 1990년대 문화의 풍요로운 자산 안에서 획득한 세련된 감각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41세인 현재에도 당당한 매력을 유지한다. 반면 1990년대 회상 신의 같은 세대 여성들은 미팅의 ‘폭탄녀’나 모두의 사랑을 받다가 급작스럽게 사라진 애증의 첫사랑으로만 묘사될 뿐이다. 2012년의 현재에는 그나마도 찾아볼 수 없다. ‘영포티’ 남성들의 옆에는 그들에게 순정을 바치는 젊은 여성들만 존재한다.

 

한때 같은 신인류로서 황금기를 누리던 여성들은 현재 어디로 사라졌을까. 1990년대 회고열풍의 남성 중심 서사들 속에서는 그들의 흔적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가령 <신사의 품격>에서 만인의 첫사랑이었던 김은희(박주미)는 20년 만에 나타나 옛 연인 도진(장동건)에게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고 혼자서 다 키운 아들 하나를 남겨두고 다시 사라진다. 심지어 도진의 젊은 새 연인에게 “이렇게 곱게 나이들 만큼 행복한 누군가의 와이프”가 됐으니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까지 해준다. 어린 나이에 홀로 아들을 낳아 키웠을 그녀의 오랜 고통이 작품 속에서 고작 몇 줄 대사로 처리되는 것은 ‘영포티’ 서사에서 소외된 여성들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성 소외 서사는 최근 방송된 KBS 드라마 <고백부부>에서도 나타난다. 40대를 앞둔 부부가 18년 전 대학 시절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말하자면 ‘응답하라 1999’다. 2017년 현재에서, 마진주(장나라)와 최반도(손호준)의 고통은 같은 무게로 그려진다. 전업주부 진주가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동안 영업직인 반도 역시 고객의 ‘갑질’에 지쳐간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 이 균형은 깨진다. 반도는 못 이룬 첫사랑을 찾으며 연애를 즐기는 데 반해 진주는 여전히 2017년에 두고 온 아들 생각에 밤마다 운다. 결말 역시 진주가 현재에는 사망하고 없는 엄마의 부재를 채우며 더 강한 엄마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반도가 과거의 투자로 재력을 얻어낸 성과에 비하면 진주의 여정은 결국 제자리로 다시 돌아온 것에 그친다. 이마저도, 유명한 페미니스트 투사였던 진주 친구 보름(한보름)이 불임 때문에 남자를 보내준 순정녀가 된 결말에 비하면 무난할 지경이다. 남성들이 ‘아재파탈’ ‘영포티’ 등으로 부지런히 호명되는 동안, 여성은 존재 증명조차 이토록 버겁다.

 

<김선영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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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김장들 준비하시는지 모르겠다. 배추농사는 나쁘지 않았는데 고추가 영 좋지 않다고 한다. 고추는 기르기 어려운 작물이다. 원래 원산지인 아메리카 대륙과 우리 기후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대충 답이 보인다. 고온 건조한 기후에 어울리는 작물이다. 한국은 비도 많고 탄저병 같은 치명적인 감염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올해 탄저가 고추를 놔두지 않았다. 옛날 김치에는 고추를 많이 안 쓰고 시원했다는 추억을 말하는 분들이 있다. 특히 서울과 경기, 충청, 강원도 김치가 그랬나 보다. 지방마다 고유한 맛은 본디 환경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그때는 농사기술도 부족하고 효과 좋은 농약도 없어서 고추 기르기가 어려웠으니 김치도 담박한 편이었을 거다. 유기농 하는 농민들이 과일만큼 어려운 게 고추라고도 하신다. 한국 고추는 세계에서 매운 편에 속하지 않는다. 달고 부드러운 맛이라고나 할까.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량되어 온 셈이다. 그래서 고춧가루 사용량도 많다. 만약 이탈리아나 멕시코, 동남아 고추처럼 매웠다면 지금처럼 많이 쓸 수 없다.

 

고추는 매운맛도 중요하지만, 일종의 살균작용을 노리고 음식에 넣는다. 고춧가루를 안 쓰는 백김치나 동치미에는 고추 삭힌 게 필수다. 고추의 힘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는 셈이다. 고추를 안 넣은 동치미는 발효과정에서 쉬이 물러진다. 짱짱하고 시원한 동치미 맛은 절반쯤은 고추의 힘이다.

 

 

1970년대 후반에 고추 파동이 났다. 아마 그해 비가 많아서 고추에 탄저가 크게 번졌을 것이다. 수확량이 절반도 안 됐다. 요즘이라면 기후조건과 품종이 비슷한 중국에서 수입해서 얼추 맞췄을 텐데, 당시는 중공(中共)이라고 부르는 적국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김장이 가지는 비중이 지금과는 달랐다. 김장을 해야 겨울 준비가 제대로 되는 것이었고, 김장 솜씨로 집안의 색깔을 표현했다. 배추 몇 포기를 했느냐 하는 것이 가계의 빈부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그러니, 시중에 고추가 없다니 폭동이라도 날 판이었다. 박정희 시절이었다. 안 그래도 뒤숭숭한 유신 독재 말기, 고춧가루 때문에 정권이 타격을 입어서야 되었겠는가. 결국 인도, 멕시코 등에서 고추를 수입했다. 그것도 양이 모자라 배급권을 나눠주었을 정도였다. 이게 사달이 났다. 맵고 쓰기만 했다. 김장을 했더니 먹을 수 없었다. 그 맛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김치가 시커멓고 맛도 써서 젓가락을 댈 수 없었다. 집집마다 버린 김장이 쓰레기통 옆에 대량으로 쌓였다. 그 해, 부자 김장이라는 말이 돌았다. 수입 배급 고추를 안 쓰고 국산 고추로만 한 김장을 뜻했다. 김장은 계급이었고 권력이었달까.

 

올해 김장이 슬슬 시작되었다. 고추 파동이 났어도 가격이 엄청나게 뛰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나마 돈 되는 고추를 힘겹게 지어도 농민들의 이익이 없다는 뜻이고, 한편으로 소비자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이상한 현상이다. 하기야 김장 작파했다고 난리가 날 시절도 아니다만은.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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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영화 <범죄도시>에서 경찰들이 조선족 범죄자들을 제압하는 장면. <범죄도시> 스틸 이미지


영화 <범죄도시>의 누적 관객이 650만명을 넘었다. 이런 기세라면 700만명도 훌쩍 넘지 않을까 싶다. 2017년 가을 추석, 성수기 영화로 개봉할 때만 해도 <범죄도시>의 흥행을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유는 몇 가지로 추려지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바로 기시감이다. 어떤 형사가 범죄조직을 소탕하는 이야기 자체가 한국 영화에서 너무 많이 다뤄지고, 너무 흔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의 이유를 더 보탠다면, 영화가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사실이다. <범죄도시>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조선족 조직폭력배를 악의 축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의 폭력행위가 심상치 않다. 도끼, 망치 등 가리지 않고 휘둘러댈 뿐만 아니라 신체 훼손의 정도도 무척 심하다.

 

한국 영화계에서 ‘청불 영화’, 그러니까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청불 영화’ 하면 언뜻 선정적인 장면들, 즉 야한 영화가 떠오르지만 실상 한국 개봉 영화 중 청불 영화는 성적 표현 수위 보다는 폭력성으로 규정되는 바가 크다. 그러니까 대개의 한국 청불 영화는 미성년자가 보면 위험할 정도로 매우 폭력적이라는 의미다. 짐작은 사실과 다르지 않다. <신세계> 이후 한국 청불 영화사상 가장 흥행이 잘 된 영화라는 <범죄도시>에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자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비중 있는 여성 캐릭터는 없다. 술과 도박처럼 범죄의 배경으로 러시아 여성, 한국 여성들이 등장한다. <범죄도시>에서는 그나마 마동석의 캐릭터를 부각하는 도우미로서 등장하는, 일종의 소도구에 가깝다.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극도로 잔인해진 한국 대중 영화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영화에서 범죄 세계의 잔혹한 묘사는 어느새 특별한 게 아닌 평범한 클리셰이자 주류 영화의 상식적 문법이 되어 버렸다. 회칼이 난무하고, 신체 주요 부위를 훼손하거나 아예 없애는 장면이 등장하기 일쑤며, 심지어 개를 살상용으로 사육하고 사람을 개 먹이로 주는 장면도 등장한다. 특정한 작품 하나가 아니라 여러 영화에서 일종의 관습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더 킹>의 맹견 살상 장면은 <미옥>에도 등장하고, <신세계>의 시신 유기 방식은 <내부자들>에서 조금 변주된 방식으로 활용된다. 가만 보자면, 범죄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죽을 사람과 곧 죽을 사람으로 구분될 수 있을 정도이다.

 

사실 범죄 영화는 그 사회의 엄혹함과 폭력성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경제의 성장과 함께 미국의 조직범죄 영화가 성장했듯이 어쩌면 만연한 범죄 영화는 우리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그 이면이 조직폭력배의 구조와 다르지 않게 그려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검사나 정치인이 등장하는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조직범죄 영화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특별시민> <더 킹> <검사외전>에 묘사된 공인들의 모습은 <부당거래>나 <짝패>에 그려진 조직폭력배 출신 사업가들 모습과 구별하기 힘들다.

 

결국 한국에서 ‘되는 영화’는 모두 범죄 영화의 꼴을 하고 있다. 공무원을 그리든, 지하경제를 그리든, 인생의 허무와 모성애를 그리든 이 모든 주제들이 다 되는 영화, 범죄라는 스펙트럼을 거쳐 재조명되고, 해석되고, 그려진다. 하지만 이러한 쏠림 현상과 함께 관객들의 피로도가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최근 정치판을 조직범죄로 그리거나 조직범죄 잔혹성을 폭력적으로 재현하는 영화들의 흥행 성적이 낮아지기도 했다. 잔인한 조직범죄 영화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은 아닐까 기대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마동석이라는 배우, 캐릭터의 매력에 기댄 <범죄도시>의 성공은 결국 잔인하고, 폭력적인 영화는 여전히 잘된다는 확신으로 증폭되지 않을까 싶다.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의 의도는 다를 수 있겠지만 결국 투자자들은 일종의 선후관계를 인과관계로 해석해, 폭력성을 되는 영화의 주요 성분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잘된 영화가 폭력적이었다가 아니라 폭력적인 영화여야 잘된다고 오해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의미다.

 

자르고, 찌르고, 부수고, 훼손하는 이 폭력적 장면들이 범죄의 박진감을 높이는 필연적 장치일까? 역설적이게도 한국 영화의 등급 기준을 보자면 노출에는 무척이나 엄격하다. 하지만 폭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한 부분이 없지 않다. 무릇 선정성이란 비단 성적 욕망의 자극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이야말로 사람의 감정을 흔들지 않던가? 폭력에 대한 감도를 낮추고, 폭력에 익숙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외설은 아닐지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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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잠에 헤매고 있을 시간에 매운 냄새에 깰 때가 있었다. 아직 일고여덟 살 때의 기억이다. 찧은 마늘과 생강 향이 코를 찔렀다. 쿵쿵 하고 절구에 찧어내니 향이 집안에 가득 찼다. 아, 김장하는 날이구나. 마당에서는 멸치젓 달이는 냄새가 났다. 그다지 향기롭지 않았던. 우리 집은 경상도와 서울식을 절충한 김장이라 새우젓은 조금만 넣으셨던 것 같다.

 

 

김장철 전에는 늘 새우젓 장수가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새우젓이요, 새우젓” 하고 외쳤다. 지면이라 그 소리를 들려드릴 수 없는 게 유감이다. 마포 새우젓 장수는 특이하게도 콧소리를 심하게 내는 발음으로 호객했다. 멀리서도 콧소리가 들리면 ‘아하, 새우젓 장수구나’ 하고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새우젓 장수는 흥정을 하고, 리어카에 실린 새우젓을 듬뿍 퍼서 줬다. 그때는 김장도 손이 컸다. 겨울에 달리 먹을 게 없었던지라 김장은 한 집 살림의 팔할이었다. 어지간한 집은 팔십포기, 백포기가 흔했고 어떤 집은 이백포기도 했다.

 

올해 아내는 망설이다가 결국 겨우 스무포기를 하기로 결정하면서 “너무 많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 한 집에 식구가 예닐곱씩은 되던 그 당시 김장은 정말 대단했다. 동네마다 김장 시장이 섰다. 산처럼 배추와 무가 쌓였다. 아득하게 높은 배추 ‘산’ 정상에 일꾼이 서 있어서 아래로 던져댔다. 그걸 리어카에 싣고 집집마다 배달을 했던 것이다. 시장의 고춧가루 가게도 마른 고추를 높게 쌓아놓고 팔았다. 고추를 고르면 즉석에서 빻아줬다. 그 근처를 지날 때면 매운 향에 연신 기침을 해야 했다.

 

김장 날은 품앗이가 기본이었다. 동네 아낙들이 우물가나 펌프 수돗가에 모여들었다. 밤새 절인 배추를 찬물에 씻고, 양념을 만들었다. 그 마법 같던 엄마들의 손놀림. 절인 배춧잎 사이사이에 번개처럼 쓱쓱 양념을 비벼 넣으며 무슨 얘기에 그리도 웃음보가 터지시던지. 그날 저녁에는 하얀 쌀밥을 짓고, 절인 배추에 매운 양념을 듬뿍 넣어 먹었다. 뜨거운 밥과 양념이 매워 혀가 얼얼하던 기억. 돼지고기를 삶아서 같이 냈던 건 더 나중의 일이었다. 고기가 흔해지고 난 뒤였으리라. 생굴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굴이 꽤 비쌌을 테니까.

 

요즘은 배추 절이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아파트에 김장처럼 큰일을 벌일 공간이 있겠나. 아예 김장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 우리 집은 식구가 적은데도 김장을 잇고 있다. 절인 배추를 사서 하는 일이다. 매년 좋은 절인 배추 구하기도 쉽지 않다. 배추가 질기거나 간이 맞지 않아서 김장을 망친 경우도 많다. 직접 절일 수 없으니 감수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올해는 멀리 지리산에서 기른 배추를 절여 받기로 했다. 일교차가 커서 배추가 달고 씩씩하다고 했다. 김장이 시시해졌지만, 김치냉장고가 보급되어 한 해 내내 보관해두고 먹는 셈이라 더 없이 중요한 행사일 수도 있겠다. 아직은 사 먹을 때가 아니야 하고 어떻게든 김장을 하고 있는 여러분들 모두 힘내시라. 하는 김에 조금 더 해서 다른 이들과 나누려는 집들은 두 배로 힘내시라. 올해 김장은 모두 최고로 맛있기를.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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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온라인 취업포털에서 5포 세대들이 성별에 따라 어떤 순위로 포기하는가를 조사한 적 있다. 남자들은 결혼을 가장 많이 포기했고, 여자들은 출산을 가장 많이 포기했다. 남자 2위는 연애, 여자 2위는 결혼. 이후 내 집 마련, 연애, 인간관계 등이 이어졌는데, 가만 보면 다섯 가지 중 무려 네 가지가 ‘사랑’과 관련이 있다. 연애가 가장 기본적이라면 사실 그 연애의 사회적 결실 중 하나가 결혼이고, 출산 역시 필수는 아니지만 결혼의 결실 중 하나이니 말이다. 내 집 마련이 결혼의 조건 중 하나라는 것을 돌이켜 보자면, 결국 5포 세대가 포기한 것은 바로 로맨스라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N포 세대라니, 이제 연애는 무리이고 결혼은 사치인 시대가 되어 버린 셈이다.

 

영화 <소공녀>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이솜(오른쪽)과 안재홍, 영화 <소공녀> 포스터.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비전 부문에는 모두 열 한 개의 한국 영화가 상영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중 많은 작품들이 20대 젊은이들의 거주 문제, ‘집’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중 <소공녀>라는 작품에는 웃기고도 슬픈 장면 하나가 등장하는데, 그래도 방 한 칸이라도 가지고 살던 여자 주인공이 애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사랑을 나눈 지 너무 오래되었음을 깨닫는다. 허겁지겁 입고 있던 옷을 벗는 연인들, 그런데, 방 안인 것 치고 너무 많은 옷을 껴입고 있다. 대략 열 겹에 가까운 옷을 하나 둘씩 벗다 보니 둘의 몸에는 오소소 닭살이 돋고, 덜덜 떠는 지경이 되고 만다. 그들은 다시 한 두 겹씩 옷을 껴입으며, “우리 그냥 봄 되면 하자”라고 사랑을 미룬다. 방이 있다 해도, 난방할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셈이다. 결국, 주인공은 그나마의 방도 포기하고 만다. 그녀는 가방 하나에 삶을 정리하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기로 결심한다. 그래도 젊으니까 말이다. <소공녀>의 영어 제목은 <Microhabitat>이다. 아주 작은, 최소한의 방, 그 방도 허락되지 않은 젊음의 형편을 좀 더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같은 부문의 영화 <이월(February)>의 형편은 좀 더 가혹하다. 밀린 월세에 보증금까지 모두 써 버린 민경은 공사장 주변의 컨테이너 박스에서 겨우 삶을 연명해 간다. 이월, 남은 추위가 뼛속까지 시려 오는 그 겨울에 민경은 다만 먹고, 잘 곳을 찾기 위해 매춘도 마다하지 않는다. 매춘과 로맨스 사이 그 얼마나 먼 것이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경은 그 간극에서라도 잠깐의 여유와 쉼을 얻는다. 그나마라는 부사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최근 한국에서 가장 보기 힘든 장르가 바로 로맨스이다. 로맨스 영화의 황금기가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초기였음을 생각해보자면 경제적 호황과 로맨스의 부흥이 전혀 무관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프리티 우먼>과 같은 조금은 비현실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부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같은 일상적 로맨스까지, <결혼이야기>에서 시작된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 열풍이 <광식이 동생 광태>와 같은 다층적 로맨스로 이어지기까지 만남과 연애, 사랑과 결혼은 영화의 매우 중요한 소재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최근 영화의 제작 환경으로 따져보자면 <광식이 동생 광태>와 같은 영화들이 과연 제작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관객들은 이런 소소한 마음의 풍경이나 연애의 뒷모습보다는 <신세계>나 <범죄도시>처럼 잔혹한 세상에서 더 동질감을 느끼는 듯하다. 연애가 사치인 세상, 영화 속 연애나 결혼을 보고 대리만족할 수준을 넘어서 삶이 더 팍팍해졌기 때문이다. 잔혹한 칼부림 영화에 싫증을 내면서도 사지가 썰리고, 칼이 난자하는 폭력적인 영화에 꾸준히 관객이 드는 것은, 차라리 비체험적 공간을 구매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실제 삶보다 훨씬 더 잔혹한 그러나 결국 해결의 카타르시스가 달콤하게 보상되는, 그런 세계를 사고 싶은 것은 아닐까?

 

로맨스 영화의 품귀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로맨틱 코미디나 로맨스 영화를 강의할 때면 최근 영화들의 예시가 빈곤해짐을 느낀다. 워킹 타이틀사가 시도했던 조금 다른 로맨스 영화의 계보들도 2010년 이후엔 주춤하다. 어쩌면 <라라랜드>처럼 결국엔 새드 앤딩이 되는 사랑이야기나 <건축학개론>처럼 마침내 마음에 묻어 둬야 하는 첫사랑 이야기가 지금, 2010년대의 청춘에게는 훨씬 더 사실적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한 상황에 로맨스라니.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이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고 썼다. 바람이 새는 풍선처럼 그렇게 허약한 우리에게 사랑은 격려이고, 무시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연애와 사랑만큼 ‘나’라는 사람의 가치 있음과 필요함을 주관적으로 확신으로 굳게 하는 체험이 또 있을까? 나를 사랑하고 믿어주는 단 한 사람만으로, 얼마나 우리는 큰 격려와 힘을 얻게 되던가? 결국 우리가 포기하고 사는 것은 이런 사랑과 그로 인한 따스한 체온들이다. 혐오와 분노라는 단어가 더 익숙해진 데에는 사랑의 부재와 결핍의 영향이 크다. 사랑 없이 스스로의 가치를 확신하기엔 우린 너무 허약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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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8월, 대기업 해성그룹 부회장 부부의 세 살배기 외동딸 최은석이 실종된다. 경찰은 공개수사를 통해 행방 추적에 전력을 다하지만 끝내 찾는 데는 실패한다. 25년 뒤, 해성그룹에 실종된 딸에 관한 익명의 제보가 들어온다. 한 60대 일용직 노동자 가정의 쌍둥이 자매 중 하나가 해성가의 잃어버린 딸이라는 제보였다. 현재 KBS에서 방영 중인 주말극 <황금빛 내 인생>의 도입부다. 보통 중장년층 시청자들이 즐겨보는 주말극은 시청률은 안정적인 반면 화제성은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요즘 젊은층 사이에서도 큰 화제다. 소위 막장드라마의 필수 흥행 공식이라 불리는 출생의 비밀을 다루면서도 고유의 변주를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드라마라면 수십 회를 끌 법한 비밀을 초반부터 밝히는 신속한 전개와 흔히 ‘친딸’을 질투하는 악녀로 묘사되는 ‘가짜 딸’이 치열한 윤리적 고민에 빠지는 인물로 그려지는 점 등이 확실히 색다르다.

 

KBS 주말극 <황금빛 내 인생> 포스터

 

하지만 더 핵심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 <황금빛 내 인생>의 화제성이 급속도로 높아진 계기는 그 유명한 ‘삼천만원 숙제’ 에피소드였다. 해성그룹 총수의 장녀 노명희(나영희) 대표는 서민 가정에서 자라난 딸 서지안(신혜선)에게 재벌가의 ‘애티튜드’를 가르치기 위해 현금 삼천만원을 하루에 다 쓰고 오라는 과제를 준다. 이 장면은 사회관계망서비스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빠른 속도로 확산되며 드라마의 인지도가 급상승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의 가장 큰 인기 요인은 출생의 비밀 코드 이면에 내재된 인생역전 판타지를 그 어떤 드라마보다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데 있다.

 

이는 드라마의 주요 러브라인에도 나타난다. 표면적으로는 일찌감치 출생의 비밀을 깨달은 지안이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며 신분상승 판타지의 아이러니를 그리는 듯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판타지를 굳건하게 할 또 다른 보험장치를 두고 있다. 바로 해성그룹 후계자 최도경(박시후)과 지안의 로맨스다. 지안은 해성가의 가짜 딸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훗날 도경의 연인으로 해성가에 귀환할 운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단적인 사례로, 지안이 ‘상류층 사모님들’ 앞에서 풍부한 예술 지식을 드러내며 ‘친딸 테스트’를 통과하는 장면은 다른 드라마에서 재벌 시어머니가 서민 출신 며느리를 무시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마련한 ‘교양 테스트’ 클리셰와 꼭 닮아 있다. 결국 이 드라마는 출생의 비밀과 신데렐라 로맨스라는 이중의 장치를 통해 신분상승 판타지를 공고히 한다.

 

사실 이 분야의 원조는 소위 막장드라마의 대모로 불리는 임성한 드라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전까지 출생의 비밀이 단순한 인기 소재였다면, 임성한은 그것이 한국드라마를 지배하는 데 가장 지대한 공을 세웠다. 2005년 SBS에서 방영된 주말드라마 <하늘이시여>가 대표적이다. 임성한은 여기서 부자 엄마가 젊은 시절 잃어버린 가난한 딸을 의붓아들과 결혼시켜 며느리로 맞아들인다는 가공할 발상을 선보인다. 유사근친애 코드로 말초신경을 자극함과 동시에 출생의 비밀과 신데렐라 로맨스를 겹쳐 특유의 속물주의를 극대화한 전개였다. <하늘이시여>의 대성공 이후 부자 부모의 핏줄 찾기는 연속극 장르의 필수 흥행 공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2010년대 들어 이를 잘 계승한 작가는 새로운 막장 퀸으로 떠오른 김순옥 작가였다. <하늘이시여>급의 신드롬을 몰고 온 2014년 MBC 드라마 <왔다! 장보리>에서 김순옥은 신분상승 판타지의 규모를 몇 배로 키운다. 어린 시절 부모와 헤어진 주인공 장보리(오연서)가 잃어버린 신분을 회복하는 것은 단순히 부잣집 딸이 되는 것을 넘어서 가업의 후계자로 성공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동시에 재벌 후계자인 연인 재화(김지훈)와의 신분 격차를 해소하는 길이기도 하다. 출생의 비밀 하나로 삶의 모든 난관이 해결되고, 본래의 금수저 집안 이상의 다이아몬드 계급 진입에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황금빛 내 인생>은 이처럼 임성한, 김순옥의 뒤를 이어 출생의 비밀 코드의 성공적 계보를 따르는 작품이다.

 

문제는 이 계보 속 주인공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에 있다. 출생의 비밀을 통해 신분상승에 성공하는 것은 모두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순종하는 딸들이다. 가령 <하늘이시여>의 자경(윤정희)은 임성한 드라마에서 가장 유순하고 수동적인 여주인공이었다. 모친 지영선(한혜숙)이 그녀를 며느리로 들이려 한 이유에는 아들 왕모(이태곤)의 짝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소위 ‘여성스러운’ 성품도 한몫을 했다. <왔다! 장보리>도 마찬가지다. 장보리는 혈연관계도 아닌 엄마와 딸을 돌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가족적 가치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이다. 반면, 노골적인 속물주의를 드러내며 그녀와 경쟁했던 연민정(이유리)은 친모를 부정하는 패륜적 인물이었다. 결말에서 물리적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히 전자다.

 

이러한 특징은 <황금빛 내 인생>에서도 반복된다. 지안은 해성가의 친딸인 서지수(서은수)의 대사를 통해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착한 딸이자 언니로 선한 성품을 입증받는다. 실제로 지안은 생계의 한계에 부딪혀 재벌가에 입성한 뒤에도 기존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늘 품고 지낸다. 엄마가 자신을 위해 엄청난 사기극을 벌인 것을 알게 된 뒤에도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비밀을 말하지 못한다. 물론 지안은 희생한 만큼 기존 가족극의 관습을 따라 신분상승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현실에서는 탈가부장제를 선언하는 여성들의 비혼율이 날로 높아가는 가운데 드라마는 ‘착한 딸’들이 가족제도에 순종하며 보상받는 판타지를 오히려 더 공고히 하고 있다. <황금빛 내 인생>을 쓴 소현경 작가의 전작이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굴레를 벗어나려 한 여성의 자립을 그린 <내 딸 서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퇴보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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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품종이 뭐가 있냐고 주변에 물었다. ‘한돈’(?)이라고 대꾸한다. 한돈은 국내 양돈업자가 만든 브랜드이지 품종은 아니다. 그렇다. 사실 우리는 돼지 품종을 잘 모른다. 오죽하면 백돼지와 흑돼지로 나뉜다고 할까. 연간 8만여 마리 이상 출하되어 대표적인 제주 흑돼지조차 정확한 품종명이 아니다. 외래종 흑돼지의 대표격인 버크셔의 혈통이 섞여 있거나, 더러 재래종 흔적이 남아 있는 정도다. 물론 우리가 아는 ‘백돼지’의 혈통도 포함되어 있다. 흑돼지는 털 빛깔을 말할 뿐, 혈통 안에는 여러 돼지의 유전자가 뒤섞여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재래종을 고집하기도 그렇다. 고유 흑돼지는 사실상 씨가 말랐다. 빨리 자라지 않고 무게도 적게 나간다는 이유로 수입종에 밀려버린 것이다. 그저 무게로 따지는 게 아니라 고유종의 맛을 찾는 이들이 늘어났지만, 혈통을 찾아 보급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유럽의 돼지 축산 강국인 스페인산 흑돼지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 시중에 ‘이베리코 돼지’라고 써 놓은 고깃집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다. 이 돼지는 통째로 들어오지 않고 일부 부위만 수입된다. 품질이 뛰어나고 관리가 잘 된 돼지고기라 맛이 좋다. 스페인과 유럽에서는 인기가 적어서 싸게 팔리는 부위인 삼겹살과 목살이 들어오고 있다. 우리가 혈통 관리나 흑돼지 종에 대한 난맥을 겪고 있을 때 슬금슬금 외래의 명품이 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일반 돼지를 흑돼지와 대별해서 ‘백돼지’라고 부른다. 실은 하얗지 않다. 갈색이 섞인 분홍색 돼지에 가깝다. YLD 돼지가 그것이다. 요크셔(Y), 랜드레이스(L), 듀록(D)을 삼원교배하여 길렀다는 뜻이다. 각 돼지의 장점을 합쳐 놓은 방식이다. 병에 강하고 번식력이 좋으며, 성장이 빠른 데다가 고기 맛도 좋은 품종을 뒤섞어 놓았다. 그러나 이런 장점을 쏙쏙 뽑았을 뿐 최고의 고기 맛은 아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 세 품종 중에서 고기 맛이 제일 좋기로 유명한 듀록 종을 단독 혈통으로 생산하는 경우도 있다. 듀록은 돼지의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고급 종으로 꼽힌다. 갈색을 띤 황금색으로 고기가 찰지고 맛있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삼원교배종의 대세에는 한참 못 미쳐서 시중에서 구하기는 아주 어렵다. 역시 가격과 생산성이 문제인 것이다. 또 외래종이지만 고기 맛이 좋고 까만색의 털빛을 지니고 있어 친숙한 국내 흑돼지로 오해받기도 하는 버크셔도 있다. 이 종은 사실상 국내에서 생산되는 흑돼지 혈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반 돼지에 버크셔 피가 섞여 있는 셈이다. 순종 버크셔를 길러내는 곳도 있다. 그러나 대세에 밀리고, 특히 가격이 비싸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우리는 삼겹살만 지나치게 선호하는 것뿐 아니라 돼지 품종이 단순한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다채로운 품종이 시중에 깔려서 골라 먹을 수 있으면 좋을 일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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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도 만들어진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에는 이름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나온다. 주인공 소년의 이름은 피신인데, 영어권인 인도에서 그 이름은 오줌싸개(피싱)와 거의 똑같이 발음된다. 프랑스에서 가장 맑은 수영장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이 이름으로 살다가 피신은 평생 놀림거리가 될 듯싶다. 그래서 소년은 마음먹는다. ‘내 이름을 파이(π)로 바꾸자’라고 말이다. 1교시 수업이 시작되자, 소년은 “내 이름은 파이야”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잘했어, 오줌싸개”라며 비아냥거린다. 2교시가 시작될 때도 소년은 “내 이름은 파이야”라고 다시 소개한다. 다만, 무한대 숫자인 파이를 한 열 자리 정도 외워서 소개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의 마지막 수업 시간에는 칠판 가득 파이의 무한대 숫자를 외워 쓰고는, 자신의 이름을 파이라고 소개한다. 그날 이후 아무도 소년을 피싱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렇게 오줌싸개는 무한대로 이름을 바꾸는 데 성공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K’ 역을 맡은 라이언 고슬링(왼쪽)과 ‘릭 데커드’ 역을 맡은 해리슨 포드.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 이미지.

 

이름을 바꾼다는 건 무엇일까?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정하는 사람은 없다. 개명이나 예명, 필명을 말하는 게 아니라 태어나서 세상에 처음 새겨지는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은 곧 운명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원해서, 자기 이름을 선택할 수 없다. 그건 부모도, 국적도, 성별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나자마자 자의와 무관하게 갖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이름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운명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이름, 운명을 바꾸려면 적어도 파이의 무한대 숫자 정도는 외워 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정도는 해야, 운명과 맞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5년 만에 다시 만들어진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이름과 운명의 이야기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세대 리플리컨트(복제인간) 넥서스8을 쫓는 블레이드 러너의 이름은 ‘K’이다. 말이 이름이지 이니셜도 아니고 물품에 붙어 있는 바코드의 일련번호와 다르지 않다. 폭동과 반란을 거듭하던 구세대 리플리컨트들과 달리 새로운 복제인간들은 제조자의 말에 순종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그러니까, K는 K라고 불리는 데 별 저항감이 없다.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껍데기라고 불러도 별 반응이 없다. 그에겐 애당초 자존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한 번 반대로 생각해 보고 싶다. 우리는 왜 제대로 이름이 불리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할까? 즉 누군가 나를 낮잡아 부르거나 아예 나라는 존재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면 왜 기분이 상하고, 마음이 아픈 걸까?

 

가만 보면, 자존감과 인격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바로 이름이다. 우리에게 이름을 붙여 준 부모들은 벌거벗고 태어난 우리를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해준 거의 유일한 사람들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만큼은 바라지도 않지만 결국 우리는 이름의 값을 정당히 대접받기 위해 세상에서 투쟁을 벌이며 살아간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세상의 요구에 순응하면서 말이다.

 

사랑이라면 그것도 사랑일 것이다. 내 이름에 걸맞은 대접을 받는 것 말이다. 반대로, 이름이 없어서 즉 무명의 존재라서 세상으로부터 괄시받는 느낌 역시 무척이나 아프다. 그 아픔은 결국 차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에 더 따갑고 아플 것이다. 토마스 하디의 문제작인 <무명의 주드>의 제목이 무명의 주드 곧 이름 없는 존재, 주드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소설 속에서 주드는 끊임없이 세상이 알아봐 주는, 유명의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드는 익명의 존재로 세상을 떠난다. 아내도, 아들도, 사랑했던 연인도 외면한 상태에서, 그러니까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서 죽는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죽음의 순간, 가장 비참한 신의 자식 욥의 이야기를 외우며 눈을 감는다는 사실이다. 주드는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겨진 그 순간, 비참의 형태로 사랑을 확인했던 신의 이야기를 읊조린다.

 

과연 K는 마지막 순간 하늘을 쳐다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주인공 K는 창조주의 그림자에 기대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른 채 스스로 너무나 인간적인 선택을 한다. 누군가의 ‘사랑’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K의 자아 정체감을 느끼게 했다면, 사랑받는다는 그 불확실한 착각도 무명의 존재를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사랑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만으로 복제인간의 마음이 움직이고 자존감이 만들어진다. 결국, 사랑이 인간다움의 열쇠라는 것일까?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허약하지만 분명한 증표가 아닐까? 마음이라는 수수께끼, 인간의 존엄과 마음의 실체를 돌이켜 보게 하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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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처럼 냉면이 화제가 된 적이 드물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오던 ‘노포’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냉면집들이 속속 등장했다. 냉면에 대한 새로운 시장층이 생겼다. 젊은이들이다. ‘밍밍하기만 한’ 평양냉면 육수의 맛을 음미하고 이해하려는 세대가 생겨난 것이다.

 

인터넷이나 방송을 통해서 ‘냉부심’(평양냉면의 맛을 안다는 자부심)이라는 말도 유행했다.

 

냉부심(?)의 기준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앞서 말한 특유의 육수 맛을 감지하는 것이다. 매콤 새콤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알 듯 모를 듯한 풍미를 사랑하는 능력이다. 시쳇말로 ‘행주 빤 물’ 같다는 혹평의 그 육수가 맛있어지는 단계다. 다른 하나는 메밀 함량이 높은 면에 대한 애호다. 그동안 메밀 값이 비싸고 구하기 어려워서인지 평양냉면이라고 이름붙이고 실은 전분과 밀가루로 만든 면에 메밀은 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메밀 함량은 1920년대 한 신문에도 “평양냉면은 오직 메밀로만 만든다”는 탐방 기사가 실릴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배합법이다. 메밀은 실은 전국 어디서나 심어 먹던 작물이었다. 특히 비나 가뭄으로 농사를 망쳤을 때 좋은 대안이었다.

 

여름에 심어서 가을께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농사가 제일 중요했던 당시, 여름에 벼 포기가 픽픽 쓰러지고 메밀이라도 심을 수 없었다면 어떻게 가을과 겨울을 넘겼을까 끔찍한 일이다. 또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에게 메밀은 아주 좋은 작물이었다. 쌀농사는 안되고, 거친 토질에도 ‘가루’나 ‘쌀’(메밀껍질을 벗긴 상태를 녹쌀이라고 하여 쌀의 대용임을 의미했다)을 주는 메밀의 효용은 상상 이상이다. 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메밀은 녹화사업 등의 목적으로 화전이 금지된 후 생산량이 줄어들고, 쌀과 밀가루가 풍부해지면서 더욱 하락세를 보였다. 시내 냉면집에서 전분에 보릿가루 태운 것을 섞어 가짜가 나왔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다. 메밀이 비싸서 생긴 일이다. 요즘은 비교적 싼 수입 메밀이 많아서 함량 자체는 많이 올라갔다. 그래도 메밀은 밀가루나 전분에 비해 고가의 곡물이어서 풍족하게 쓰기 어렵다.

 

올해 메밀 농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 메밀은 이제 구하기 어려운 작물이 아니다. 잡곡으로서 매우 가치 있게 팔린다. 메밀을 많이 넣은 평양식 냉면의 인기 확산도 한몫한 듯하다. 메밀 산지는 세간에 알려진 강원도를 넘어서 전국에 분포하는데, 제주 메밀이 양도 질도 충족시키고 있다. 다만 경관작물이라고 하여 메밀꽃 피는 환상적인 광경을 보기 위해 연작을 장려하다보니 알곡이 작아지는 등 메밀 자체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한겨울에는 꼭 평양 같은 관서지방이 아니어도 메밀로 전병 부치고 수제비를 뜨던 음식문화가 있었다. 메밀이 가장 맛있을 때가 수확 지나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꼭 냉면이 아니어도 시식(時食)으로 메밀을 다채롭게 먹을 수 있다. 우리 민족 음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메밀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면 좋겠다. 아아, 한겨울 메밀묵 장수가 팔던 걸 사서 신김치 얹어 먹고도 싶다. “메밀무욱! 찹싸알떡!”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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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광석>의 포스터


그리스인들에게 친구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었다. 우정 어린 대화 속에서 이뤄지는 인간적인 것을 필란트로피아(philanthropia)라고 불렀는데, 이는 인간애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곧 친구이고 그렇게 대화를 할 수 있는 마음가짐 자체가 인간애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매우 사적인 비밀과 생활을 나누는 친구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그런 사이를 지칭하는 우정이란 루소가 정립한 것이라고 한다. 루소가 아니라 그리스식으로 생각해보자면 친구는 훨씬 더 갖기 어렵고, 우정은 나누기 어렵다. 왜 행복의 절대적 조건으로 친구와 우정이 필요했는지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를 만들고, 보고, 평가하는 과정은 대화적이다. 그저 사적인 비밀을 나눈다기보다는 대화가 될 만한 소재들을 영화로 만들어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는 점에서 말이다. 좋은 영화라고 하면 충분한 해석의 여지가 많은 영화라고 생각되는데, 이 해석의 여지야말로 대화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대화할 수 있는 부분 어쩌면 많은 의견이 유통될 수 있는 영화일수록 좋은 영화라고 믿기 때문이다.

 

최근 두 편의 영화가 화제이다. 하나는 김광석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쫓아가는 다큐멘터리 영화 <김광석>이고 다른 하나는 위안부 문제를 색다른 방식으로 재현한 <아이 캔 스피크>이다. <김광석>은 영화가 가진 대화적 힘의 또 다른 증례가 될 듯싶다. 이미 공소시효까지 만료된 과거의 ‘사건’은 서술됨으로써 다시 대화의 주제가 되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김광석>은 이미 만료된 그러니까 과거가 된 사건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인데, 이 극복은 다름 아닌 반복되는 서술과 진술을 통해 마련된다. 사실을 영화의 영역에 가져옴으로 인해 독백이 대화를 작동시키게 된 셈이다. 영화 <김광석>의 과거 사용법이 여러 가지 점에서 의미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광석>은 미학적이거나 영화공학적인 면에서 따지기는 좀 어려운 작품인데, 사실이 어떻게 진술과 만나 새로운 교호작용을 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이 캔 스피크>의 대화술은 좀 더 세련됐다. 과거를 미학의 범주 안으로 들여와 이야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는 견고한 과거라는 벽을 유연하고, 현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일 테다. 이야기로, 영화로 구체화됨으로써 오히려 역사는 항구성과 지속성, 현재성과 반복성을 얻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세계 속에 다른 위치를 새겨 주며, 그것은 같지만 다른 이야기로 진척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시대를 넘어선 무엇으로 살아남게 되고, 그 대화는 단지 지금 영화와 관객 사이를 넘어 미래의 관객과의 대화로도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 연민이라면 그런 맥락에서 우정은 훨씬 더 선택적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두 인물, 민재와 옥분의 관계가 우정으로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다가 연민과 동정이 좀 더 시혜적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면 우정은 훨씬 더 동등한 관계를 전제한다. 할리우드 영화 <인턴>에서 나이 많은 할아버지 인턴과 젊은 여성 CEO의 관계처럼, 그렇게 다르지만 동등한 관계에서 우정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취향의 세련이나 의미 있는 여가 선용이라기보다는 유용한 오락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영화와 대화를 나누고 우정을 나누는 건 여간 어렵지 않다. 마치 재미만이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재미있으면 되지라는 식의 논리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신체가 난자되어도 무감각하게 바라보고, 지나치게 잔혹한 폭력들도 영화적 클리쉐로 여겨진다. 사실도 아닌데, 허구인데, 영화인데 정색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효용론이 너무도 강렬해서 의미나 윤리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척이나 고답적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하지만 그렇게 영화의 용도를 한정하는 것이야말로 현실로부터의 후퇴이고 내적인 망명일지도 모르겠다. 한나 아렌트는 공포를 현실에 대한 정신의 후퇴라고 말한 바 있다. 반대로 희망은 현실의 초월이다. 즉, 현실을 너무 무섭게 재현하는 것도 도망가는 것이고 거꾸로 현실을 너무 아름답게 그리는 것 역시도 거짓이다. 현실의 압력이나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영화를 본다는 핑계가 언제나 통할 수 없는 이유이고 영화는 단지 오락일 뿐이라는 폄훼와 다르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놀이에도 치유의 효과가 있듯이 오락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허용될 수는 없다. 결국 영화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치명적 질병이 만연했던 시대엔 병이란 사람과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완치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 치유와 치료가 더 중요시된 맥락에는 이러한 겸손함이 자리 잡고 있다. 완벽히 없앨 수 없으니, 병을 다스리고, 고통을 줄여 주는 것, 치료와 치유는 그런 개념이었던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영화란 세상에 대단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지시의 개념어를 주는 완치의 예술이 아니다. 치유하고 치료하는 것, 그러니까 불완전한 역사를 다시 이야기하고, 하나의 치료법(therapy)을 제안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힐링하는 것, 그게 바로 영화의 존재이유인 셈이다. 연민이 아니라 우정을 나누는 영화가 좋은 영화인 이유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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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내게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법을 묻곤 한다. 그곳에서 살아봤으니 특이한 여행법을 추천해달라는 거다. 내 답은 거의 비슷하다. 로마, 피렌체, 밀라노와 베네치아 말고 작은 도시를 가보라고 권한다. 소박한 이탈리아의 삶을 볼 수 있으니까.      

   

또 하나는 사그라(sagra)에 참여해보라고 한다. 사그라는 작은 축제를 의미하는데, 대개 음식을 주제로 연다. 우리로 치면 면 단위 정도의 작은 마을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행사를 치른다. 이탈리아도 지방의 노령화, 젊은 인구 부족 현상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런 작은 축제를 열면서 여전히 마을의 과거와 미래를 이으려는 노력을 한다.   

 

 

개구리(물론 식용이다) 축제나 통돼지구이처럼 흥미로운 주제도 있지만 남들이 보기에 별거 아닌 것도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양파나 파, 고추, 가지 같은 것이 주제가 된다. 축제라고 해서 큰 기대를 하고 갔다가는 실망할 수도 있다. 그저 밤을 까서 케이크를 굽거나, 콩으로 수프를 만들고, 거친 옥수수로 죽을 끓이고 동네에서 나온 와인이나 두어 잔씩 돌린다. 그래도 행사는 흥겹고, 신난다. 번듯하고 멋진 축제는 아니지만 각자 마을에서 잘하는 것, 많이 생산되는 것, 맛난 것을 내놓고 같이 즐기기 때문이다. 소박한 축제인데도 은근히 관광객이 많이 온다.      

 

치즈 축제가 많은데, 치즈란 우리의 장과 같아서 손맛, 지역의 조건에 의해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굳이 이걸 맛보겠다고 멀리서 사람들이 모인다.     

 

사그라를 하는 건, 사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고된 노동과 평범한 일상을 사는 동네 사람들이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이다. 화려하고 잘사는 동네뿐 아니라 변방의 소읍에서도 떳떳하게 자신의 존재를 말하는 무대다. 그참에 지역을 떠난 사람들도 돌아와 반가운 만남의 장이 되기도 한다.        

 

우연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양동면 양평부추축제’라는 작은 포스터를 봤다. 양동면이라는 지명도 초문이고 축제 주제도 그랬다. 하나 오히려 번듯하고 폼 나는 유명 축제가 아니어서 눈길이 갔다. 큰 예산이 투입되고, 어마어마한 홍보를 하는, 지자체 수장의 선거운동 비슷한 관제 축제가 좀 많은가. 외부 기획사에 큰돈 주고 행사를 맡기고, 정작 주민들은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그런 축제 말이다. 축제의 주체는 관도, 관광객도 아니다. 자발적인 주민이 주인이다. ‘겨우’ 부추 축제라니. 이런 소박함에 절로 흐뭇했다. 양동면은 알고 보니 양평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다. 인구가 고작 4500여명에 그나마 대부분 ‘초’노인들이다. 그런데도 작년에 부추 농가가 똘똘 뭉쳐 첫 번째 축제를 치러냈다. 그 흔한 부추로 말이다.      

 

마치 옛날 추수 뒤 잔치처럼, 깃발 들고 노래 부르면서 흥겨웠다. 농촌은 언젠가부터 대책 없는 ‘미래’로 치부됐다. 노인들만 남아서 그들 이후의 사정은 서로 책임을 미루거나 공허한 슬로건만 떠들고 있다. 노인들이, 부추 심는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다시 축제를 연다. 마음 한구석이 싸해진다. 내일 아침 10시에 양동역 앞에서 개막해서 일요일 저녁까지 축제가 이어진다. 부추전도 부쳐 먹고, 올 때 싱싱한 부추 한 상자 사서 돌아오면 좋을 여정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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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을 어느덧 3개월여 남겨둔 시점에서 미리 올해 콘텐츠 최고의 키워드 하나를 꼽는다면 ‘언론’이 아닐까. 지난 10여년간 보수정권에 의해 자행된 언론 탄압의 한풀이라도 하듯 연초부터 언론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왔다.

 

드라마 <아르곤>의 한 장면.

극장가에선 연초 개봉된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을 시작으로, 현재 <공범자들> <저수지 게임> <김광석> 등 세 저널리즘 다큐멘터리가 동시에 상영 중이다. 방송가에서도 몇 년에 한 편 나올까 말까 한 기자 소재 드라마가 두 편이나 방영됐다. 바로 이달 초 종영된 SBS <조작>과 현재 방영 중인 tvN 월화드라마 <아르곤>이다.

 

언론 소재 콘텐츠의 유행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작용한다. 하나는 지난 국정농단 사태로 부쩍 높아진, 숨겨진 진실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고, 또 하나는 대안 언론의 성장이다.

전자의 관심은 은폐된 진실을 폭로하고 추적하는 콘텐츠의 스토리텔링에 반영되어 있다. 가령 <공범자들>은 지난 보수정권 아래서 권력자들이 어떻게 방송을 장악하고 언론을 입맛에 맞게 길들였는가를 고발하고, <저수지 게임>은 전직 대통령의 숨겨둔 거대 비자금을 추적하며, <김광석>은 1996년 사망한 가수 김광석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파헤친다.

 

픽션인 드라마의 경우 더 극적인 스토리텔링을 보여준다. <조작>은 국정농단 사태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며 언론과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숨은 권력자들의 실체를 뒤좇는다. <아르곤>은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키는 건물 붕괴 사건을 소재로 참사의 원인과 정경유착 비리를 추적하는 내용이다.

 

두 번째로, 대안 언론의 성장은 제작진이나 등장인물의 특징에서 엿볼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해직언론인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한다.

 

대안 언론의 성장 뒤에 정권의 언론 탄압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과다. 예컨대 영화 <공범자들>의 감독 겸 대안 언론 ‘뉴스타파’ 앵커 최승호 PD, <김광석>의 감독 겸 대안 언론 ‘고발뉴스’ 기자인 이상호는 모두 MBC 해직언론인 출신이다.

 

<저수지 게임>의 두 주역 김어준, 주진우는 이명박 정부의 시사 프로그램 폐지 및 축소의 틈을 파고들며 대안 매체로 급부상한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로 새로운 시사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드라마에서도 같은 특징이 발견된다. 본격 언론 드라마는 아니지만 올해 초 방영된 SBS <귓속말>은 언론노조 파업 당시 해직된 언론인의 끈질긴 권력형 비리 취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가 하면 <조작>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인터넷 매체 언론인들과 신념을 지키려다 한직으로 밀려난 기자들이 주인공이고, <아르곤>은 해고된 기자들의 결원을 메우려고 채용된 계약직 기자들의 딜레마를 소재로 한다.

 

언론 소재 영화와 드라마는 정치사회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실제 현실에서는 KBS와 MBC 언론노동자들이 잃어버린 공영방송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동시 파업을 벌이고 있다. 현실과 콘텐츠가 이렇게까지 역동적으로 상호교차하는 사례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지금 언론 소재 작품들이 가장 흥미로운 콘텐츠로 떠오른 이유다.

이 가운데 조금 더 눈길이 가는 작품은 <아르곤>이다.

 

이 드라마는 변화한 언론 환경의 현재를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언론이 이렇게까지 망가지기 이전의 근원적 역할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극중에서 HBC 방송사의 유일한 탐사보도 프로그램 ‘아르곤’을 이끄는 팀장 김백진(김주혁)이 언론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신념을 고수하는 인물이라면, 계약직 기자 이연화(천우희)는 권력의 검열과 불안한 생존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요즘 언론의 현실을 반영하는 인물이다. 고참 팀장과 까마득한 막내 기자로 만난 두 사람은 경력과 나이차를 초월해 기자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 고민을 주고받는다.

 

그런 측면에서 <아르곤>이 재난보도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백진은 속보에 목매다는 다른 방송사들과 재난에 대한 접근 방식을 차별화한다. 그는 현장에 있던 150여명의 사연에 주목한다.

 

백진이 “하루아침에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사연, 하루 종일 뉴스에서 자막으로 휙 지나가는 이름들이 우리랑 똑같은 사람들이란 걸 알려주자”고 말하는 장면은 언론 드라마로서 이 작품이 지향하는 메시지를 대변한다.

 

비록 탐사보도 프로그램으로서는 지나치게 나이브할지라도, ‘아르곤’팀의 태도는 국내 언론 보도가 갈수록 놓치고 있는 인간적 가치를 환기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백진은 신입 기자 시절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담당한 경력이 있다. 당시 국내 언론은 구조자에 대해 스포츠 신기록을 중계하듯 다루며 재난보도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극중 백진의 보도방침은 그러한 경험 뒤에 나온 고민의 결과다. 이는 동시에 세월호 참사에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던 언론 현실을 환기시킨다.

 

당시 언론은 이준석, 유병언 등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 추궁에만 집중하며 정부의 재난 대처에 대한 비난 여론을 전환하고, 정권의 말을 받아쓰기 하느라 최악의 오보를 내보냈다. 언론이 인간을 수단으로 여긴다면 존재할 이유가 사라진다. 언론 보도의 최종 종착지는 결국 인간을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르곤>은 언론이 ‘기레기’로 전락한 역대 최악의 언론 참사,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금 인간의 공감에 도달하고자 하는 언론의 이야기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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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1일 개봉하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제공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보다 이야기의 힘이 더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더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과 이입을 선사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그렇다고 해서 역사보다 소설이나 영화가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소재보다는 소재를 다루는 태도에 대한 격언인데, 말하자면 있었던 일을 다룰 때 고증보다는 그 일을 가운데 둔 전체의 얼개, 플롯에 더 유념해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이 지면에서, 울고 고통스러워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웃기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 피해자를 그려낼 수 없는 우리 이야기의 가난함에 대해 토로한 적이 있다. 아직 우리의 피해는 사죄받지 못한 것이기에, 여전히 현재적인 문제이기에 거리나 여유를 둘 수 없다고 말이다. 영화 <귀향>이나 <택시운전사>가 역사의 문제를 다루면서 고발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영화 문법이 그저 촌스러워서가 아니라 아직은 지나치게 현재 진행형의 문제라는 뜻에서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는 매우 놀랍다. <아이 캔 스피크>는 여러 미덕을 가진 영화이다. 그중 최고의 미덕은 바로 상처와 피해를 다루는 태도와 방식이다. 피해라는 말이 주는 핏빛 이미지처럼 피해자는 언제나 숭고하게 그려야만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좋은 독일군도 있고, 나쁜 카포(Kapo: 수용소 중간 관리자)도 있곤 하다. 선량하지만 무능한 피해자도 있고, 잔혹하지만 필연적 악을 행하는 가해자도 그려지기도 한다.

 

참혹한 일들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의 경험이 역사가들의 일거리가 되리라고 여기지 않는다.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마치 사건 외부로 튕겨 나온 듯한, 염결한 죄책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경험했던 것들은 사실이다. 그처럼 생생했던 사실들은 어떤 기록보다 더 사실적일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증언들을 들어보자면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경험적 사실이 진실에 닿기에 여러 번의 자맥질이 이어진다. 쇼샤나 펠만이 말했듯이 이렇듯 진실과 사실이 불일치하는 상황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증언의 안과 밖 모두에 자리 잡는 것일 테다. 사실과 진실을 연결하는 것, 그게 바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이야기의 힘일 테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일제강점기의 역사와 그 역사 뒤편의 상처들은 이런 인간학적 다양성으로 일반화하기엔 너무도 첨예한 잘잘못과 닿아 있다. 아직 법률적 판결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와 그 상처를 다룰 때면 인간학과 심리적 다양성보다는 윤리적 보편성과 도덕적 선과 악, 법률적 판결 문제를 강조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점에선 미학적 쾌감보다는 도덕적 심미안으로, 즉 재미보다는 의미로 보아야 하는 영화들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야기를 다룰 때 재미나 미적 완성도를 따지는 게 어쩐지 무척 불경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 캔 스피크>는 증언할 수 없는 그 어떤 것까지 증언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작품이다. 일단 재미있다. 주인공인 나옥분 할머니(나문희)는 괴팍한 동네의 말썽쟁이로 등장한다. “도깨비”라는 별명처럼, 동네 슈퍼 주인 말고는 그 누구도 상대하지 않는 독불장군으로 처음 나타나는 것이다. 누구나 다 미워할 것 같은 이 할머니를 마지막 순간 모두가 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할머니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게 바로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몫이고 성과이다. 영화는 그럴듯한 사연을 가진 할머니 나옥분을 통해 이 과정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이 과정 가운데서 함부로 다룰 수 없었던 역사적 상처와 사건이 묵직한 무게감과 감동으로 깊어진다. 웃기고 이상했던 할머니를 존경스럽고, 안아주고 싶은 할머니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영화의 힘이다.

 

또 한 가지 <아이 캔 스피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여성을 배우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배우 나문희가 “이 나이에 주연을 하는 기쁨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그건 단순히 여배우 주연 캐스팅 이상의 의의를 지닌다. 시나리오가 여성을 요구했고, 이야기가 할머니를 필요로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조금만 눈길을 돌리고, 관심사를 넓혀본다면 세상엔 꼭 이야기가 되어야 할 ‘역사’가 숱하게 많다. 어쩌면 너무도 익숙한 ‘역사’라서, 다룰 필요도 없는, 보편적이면서도 진부한 이야기라고 여겼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한 사실이 너무 많다.

 

<아이 캔 스피크>의 여성 인물은 굳이 나누자면 피해자에 속한다. 영화는 피해자들을 늘어놓고 전시하는 게 아니라 나옥분이라는 이름과 ‘발언권’을 주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다. 피해자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어쩌면 영화가 피해자를 영화에 모시는 방법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말할 수 없는 죽음의 세계와 말할 수 있는 생존의 공간이 있다면 영화는 건널 수 없는 두 공백을 이야기로 메우는 작업이다. 영화는 할 수 있다. 진실을 초월하는 어떤 사실들에 목소리를 주는 것, 그런 일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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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취재하느라 오징어잡이 배를 탄 적이 있다. 하룻밤을 먼바다에서 보냈는데 정작 취재는 하지도 못했다. 뱃멀미에 속이 뒤집혀 자그마한 선실에서 끙끙 앓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파도가 밀어닥쳐서 뱃전을 때릴 때마다 배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했고, 내 내장까지 울림이 전해졌다.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당장이라도 출어를 중단하고 귀항해야 할 것 같은데도 작업 선원들은 오징어가 걸려오는 주낙만 바라봤다. 생과 사 같은 건 그들에게 호사스러운 용어였다. 잡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다는 단순한 현실에서 파도 따위야, 이런 태도였달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선은 어지간하면 출어한다. 해경에서 출어금지령이 내리기 전에는 태풍이 온다고 해도 하늘을 본다. 혹시나 나갈 수 있을까 출어를 가늠한다. 선장은 빚내서 얻은 배 값 상환이 걱정이고, 선원은 출어를 못하면 벌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한때 만선이 흔하던 시절에는 목돈도 만졌다고 한다. 선원들 얘기는 하나같이 “옛날에는 말이야”로 시작한다. 고기가 너무 많아서 실을 곳이 없어 바다에 일부 버리고 갔다고도 한다. 이제 어지간한 연근해에는 고기가 드물고, 잡는 일도 만만치 않다. 잘 잡히면 경락가가 떨어지고, 안 잡히면 그건 그대로 빈손이 된다.

 

선장들은 “배 팔아치우겠다”고 하고, 선원들 다수는 “이번이 마지막 출어”라고 한다.

‘만선의 기쁨’ 같은 말은 언론에서나 쓰는 사어(死語)다. 시장에서 장을 보는 요리사들도 다 안다. 고기가 점점 볼품없다는 것을. 고기 몇 마리쯤은 덤으로 주던 인심도 사라졌다. 수산시장 경매장에 가보라. 냉동 수입 수산물을 쌓아놓고 파는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고 있는지. 아프리카, 인도양의 여러 나라들, 심지어 수산업 같은 건 할 것 같지도 않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의 이름도 보인다.

 

펄떡펄떡 뛰는 생선은 거의 양식이고, 고깃배가 잡은 생선을 넣은 나무상자는 왜 그리도 초라하게 보이는지. 농사는 뼈 빠지게 지어도 자재값 안 나온다고 한 지 오래고, 수산업도 몇몇 양식업이나 모를까 영세한 소형 어선으로 그물이나 낚시를 당겨봐야 출어비도 안 나온다는 푸념이 가득하다. 국민소득 3만달러짜리 나라의 돼지 축사에서 똥 치우다가 질식사하는 어이없는 사고가 벌어지듯, 바다에서도 먹고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일들이 늘 벌어진다. 며칠 전 포항 앞바다에서 붉은 대게잡이 어선이 사고를 당했다. 사고 조사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한 푼이라고 건져야 하는 처지에 어지간한 파도는 뚫고 가는 게 그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다른 배들이 오늘도 삼면의 바다와 저 먼바다로 나간다. 생명보험도 잘 안 받아준다는, 이른바 ‘극한직업’을 가진 이들이.

 

다시 우리 밥상에 올라온 생선과 여러 재료들을 생각하게 된다. 밥상은 목숨 건 노동의 결과물이 분명할 텐데, 그 내력을 외면하는 까닭은 우리의 이기심이 너무 깊은 때문인가. 아니면 무심해진 것일까. 그들의 고통에 호응하고 대면할 수 있는 용기는 없는 것일까. 얼마 전, 붉은 대게잡이로 사고를 당한 배의 이름은 광제호다. 27t짜리 소형 어선이었다. 유명을 달리한 선원의 명복을 빌고, 아직도 마치지 못한 실종자 수색이 성공하기를 빌 뿐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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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이아이피>의 한 장면.


여성을 혐오하는 남자들은 여자를 좋아한다. 우에노 치즈코의 책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는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여성 혐오자들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건 언뜻 모순으로 보이지만 사실 여성 혐오의 핵심이다. 여기서 ‘여자’는 성적 대상이자 기호로서의 여성이다. 우에노 치즈코의 말처럼 심지어 여장 남자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어도 무조건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처럼. 여자라는 기호에 반응하는 여성 혐오적 호색한이 많은 것이다.

 

최근 한국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여자라는 기호는 있지만 여성이나 여인은 거의 볼 수 없다. 말장난이 아니다. 존엄성과 비중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물리적 숫자로 따진다 해도, 한국 영화 속 여자는 무척 적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등장하는 여성의 역할이다. 여자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건 여자가 아니라 단지 기호일 뿐이다.

 

고백하자면, 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의 일부 에피소드는 끝까지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일명 VIP가 북한에서 저질렀던 만행을 ‘추억’하는 장면 말이다. 코스모스 길을 걷던 여학생이 처참한 사체로 발견된다. 여학생이 사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영화는 친절하게 재현의 무대에 올린다. 눈물이 가득 고인 여학생의 눈에서 빠져나온 카메라는 여학생의 채 영글지 못한 유두를 비추고, 마침내 VIP의 시선에 고정된 채 와이어에 목이 감겨 고통에 신음하는 여학생의 얼굴을 스크린 가득 담아낸다. 이미 소녀는 죽었다. 소녀가 사체로 변하는 과정을 담아낸 건 감독 박훈정의 선택이다. 그러니까 그 장면은 필연적 정보가 아니라 과잉의 수식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굳이 목베인 얼굴 사체를 등장시키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카메라는 여학생의 풀려 가는 동공을 클로즈업한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 장면이 추구하는 감정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분노라는 대답은 이미 지나치게 마초적이다. 많은 여성 관객들은, 적어도 나는 그 장면에서 분노보다 먼저 공포를 느낀다. 남성 관객들 중에 그 장면을 보면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대개의 여성 대상 범죄가 필연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서 즉 내 잘못이 아니라 운이 없어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점 때문에 공포는 더욱 커진다. 영화 <브이아이피> 속의 소녀가 우연히 피해자가 되었듯이 선택과는 무관하게,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여자라는 이유로. 과연 박훈정 감독은 그 장면에서 많은 여성 관객들이 공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계산했는지 묻고 싶다. 그랬다면, 왜 공포를 주고 싶었는지도 말이다. 공포가 본능적 위협이라면 분노는 학습된 감정이다.

 

영화 <브이아이피>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은 사실 500만 관객을 동원한 <청년경찰>에서도 있었다. <브이아이피>에 잔혹하게 난자당한 여성 피해자들이 등장한다면, <청년경찰>에는 난자를 착취당하는 10대 여성들이 등장한다. <청년경찰> 역시도 여성을 도구화했다거나 여성 혐오적 측면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논쟁이 비롯되면 언제나 따르는 비판이 있다. 너무 민감하다, 너무 엄격하다와 같은 시선들 말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도 뒤따른다. 현실의 범죄는 더 끔찍하다. 맞다. 하지만 실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많다는 사실과 그것을 영화적 소재로 쓰는 문제는 다르다.

 

무엇보다 문제적인 것은 이렇듯 학대받거나 고통받는 여성이 영화적으로 남자 주인공들의 자아 정체성 확립이나 남성성 확보를 위해 쓰인다는 사실이다. 과거 10여년간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은 남성영화들은 사실 남자와 남자의 대결인 경우가 많았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나 <신세계>, <내부자들> 같은 경우가 그랬다. 서열 정리와 권력 다툼을 위해 남자들은 서로를 난자하거나 베었고 폭력을 휘두르고 권력으로 짓밟는다. 그런데, <브이아이피>나 <청년경찰>에서는 여성 피해자를 알리바이로 ‘정의’를 구현하고 진짜 ‘남자’가 되고자 한다. <청년경찰>의 어리바리한 청년들은 여성 피해자를 구출함으로써 진짜 경찰로 성장하고, 박훈정 감독의 말마따나 벼랑에 매달려 있는 영화 <브이아이피> 속 남자들은 여성 피해자들을 빌미로 정의로운 남자로 거듭난다. 권력의 먹이사슬에서 눈치만 보던 남자가 마지막 순간 최후의 재판관으로 등장하는 것도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심지어 성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설정된 악의 주체는 어떤가? 그러니까, 진짜 남자가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가짜 남자를 벌하는 것, 철저한 남성성의 환상 속에 영화 <브이아이피>가 놓여 있는 셈이다.

 

한국 영화는 그동안 놀랄 만큼의 외적 성장을 이룩했다. 연간 관객 동원수가 2억명을 넘었고, 천만 관객 이상 보는 대형 흥행 영화가 매년, 꼬박꼬박 등장한다. 이런 한국 영화계의 성장세는 매우 놀라운 성과이긴 하지만 한편 급속한 경제 성장이 남긴 우리 과거처럼 그 성과가 너무 숫자에 치우쳐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영화 <도가니>에 굳이 아동 성폭행 장면을 연출해야 했는지, <브이아이피>에서 살해 사실이 아니라 살해 과정을 고스란히 재현해야 했는지 분명히 물어 마땅하다. 이건 단순히 페미니스트들의 과민반응이 아니다. 옷을 벗고, 체모가 나와야 외설이 아니다. 진짜 외설은 오히려 폭력을 수반한다. 조르주 바타이유의 말처럼 폭력이야말로 최후의 외설이다. 참혹한 여성 피해자에게 의존해서야 겨우 남자가 되는 남자, 그 남자는 가짜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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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영화 <공범자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SBS TV 월화드라마 ‘조작’ 포스터.

 

보수정권에 의한 언론 장악 10년사를 고발한 영화 <공범자들> 초반부는 2008년 2월25일 KBS 뉴스의 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새 정부 내각 후보자들의 부정부패 의혹을 제기한 이 보도는 곧바로 후보자들의 사퇴를 이끌어냈다. 주목할 부분은 이 뉴스가 방송된 날이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 날이었다는 점이다. 새 정부와의 ‘허니문’ 기간이라는 관례도 개의치 않은 채 언론이 직언직설을 서슴지 않았던 이 시기를 두고, 영화 속 한 기자는 “저널리즘의 황금기”였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 찾아온 것은, 영화 속에서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시피 정권 탄압에 의한 언론의 가파른 몰락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10년간의 언론인 소재 드라마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가령 2008년 MBC에서 방영된 국내 최초의 전문 보도 드라마 <스포트라이트>는 ‘저널리즘 황금기’의 감수성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다. 특히 ‘신문·방송 포함 언론매체 신뢰도 1위’ 언론사였던 시절 MBC의 자부심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당시 MBC에서는 <PD수첩>을 비롯한 시사 프로그램들의 위상이 굳건했고, 손석희, 엄기영, 김주하 같은 간판 언론인들이 팝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정작 드라마 자체는 실제 언론의 인기를 따라잡지 못했지만, 손예진, 지진희 등 스타배우들이 연기한 세련된 기자들의 모습에는 대중들이 신뢰하고 동경하던 언론인에 대한 판타지가 투영되어 있다. 2009년 방영작 MBC <히어로>에도 이 같은 판타지는 생생했다. 소시민을 대변하는 군소신문사와 족벌언론 간의 대결을 다룬 이 작품은 <스포트라이트>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여전히 시대의 ‘히어로’로서 기자들을 그려낸다. 극 종반부, 거대 언론사의 범죄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거리로 나간 기자들의 1인 시위와 그를 향한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은 아직 언론과 대중의 신뢰관계가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언론 장악이 본격화되면서부터 공교롭게도 언론인 소재 드라마 역시 TV에서 보기 힘들어진다. 그사이 권력에 주눅 든 언론은 빠르게 추락하다가 끝내 ‘히어로’에서 ‘기레기’로 전락했다. 기자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아니지만 2012년 방영된 SBS <추적자>에서는 ‘히어로’와 ‘기레기’ 사이, 그 과도기에 위치한 언론이 비쳐져 있다. 한 소녀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진실을 추적하는 이 드라마는 정치, 자본과 결탁해 권력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언론의 타락을 묘사한다. 소녀의 아버지인 홍석(손현주)이 권력의 감시를 피해 도주하는 곳곳마다 CCTV처럼 접하게 되는 뉴스 속보와 기자들의 카메라는 권력의 언어만을 “받아쓰기”하며 약자의 말을 무력화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드라마는 이 시기 폭로된 국무총리실의 불법사찰이 언론에 미친 영향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홍석의 편에 선 단 한 명의 기자만이 과거의 이상적 시절의 흔적을 드러내지만 그에게는 진실을 밝힐 힘이 없다.

 

두 편의 기자 드라마, KBS <힐러>와 SBS <피노키오>가 등장한 2014년은 이미 ‘기레기’라는 용어가 일상화된 시대였다. 두 작품은 이 같은 언론 후퇴에 관한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극화한다. 송지나 작가의 <힐러>는 언론통폐합을 앞세워 언론을 장악했던 5공 군사정권 시절과 현재를 병치시킨다.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과 정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보수신문사 회장 김문식(박상원)은 ‘기레기’의 표상 그 자체다. 이는 2015년 영화 <내부자들>의 유명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와 함께 언론을 더 이상 권력의 시녀가 아니라 ‘공범’으로 인식하는 대중의 시선을 반영한 대표적인 캐릭터다. 그런가 하면 <피노키오>는 “시청자에게 먹히는 것은 팩트보다 임팩트”라며 선정적 보도를 서슴지 않는 기자, 진실 보도와 저조한 시청률 사이에서 고민하는 기자의 두 얼굴을 통해 권력뿐 아니라 상업주의에 굴복한 ‘기레기’의 현실도 고발한다.

 

현재 방영 중인 SBS 드라마 <조작>은 이전의 작품들과는 또 다른 시사점을 던진다. 이 드라마는 탄핵정국 이후 언론개혁의 열망을 담아낸 영화 <공범자들>과 더불어 ‘기레기’ 시대의 종언을 고하려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공범자들>이 영화 속 부제로 ‘기레기’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며 언론의 자기반성을 이야기한 것처럼 <조작>도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여기에 ‘히어로’는 없다. 이것은 스스로를 ‘기레기’ ‘식물기자’라 부르는 언론인들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되돌리려 하는 이야기다. 주인공 한무영(남궁민)은 얼핏 보면 <히어로>의 진도혁(이준기) 계열의 열혈기자 캐릭터에 가깝지만 결코 이상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의 과격한 보도 방식은 보다 이성적인 기자 석민(유준상)이나 검사 소라(엄지원)와 같은 인물들을 통해 자주 수정되고 타협점을 찾아간다.  

 

자기반성과 함께 자부심의 회복도 중요한 주제다. 예컨대 영화 <공범자들>에서 김민식 PD는 언론 탄압 시절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패배감, 무력감을 꼽았다. 생계로서의 직업인인 동시에 시대를 향한 사명의식이 큰 언론인들에게 정권의 부역자들은 하나같이 ‘너 아니어도 돼’라는 말로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조작>의 최종권력자 구태원(문성근) 또한 기자들에게 이 패배감을 주입시킨다. 그를 향해 자신은 ‘투사가 아니라 기자이며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뿐’이라고 답하는 <조작>은 ‘기자 히어로’와 ‘기레기’ 시대 이후의 새로운 기자정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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