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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한잔 더 하실래요?” “조개를 참 좋아하나 봐요. 난 다른 조개 먹고 싶은데.” “저기 가서 키스만 하고 갈래요?” 만약, 처음 만난 남자가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그건 어떤 상황일까? 게다가, 그 남자와 여자가 직무상 상하관계에 놓인 입장이라면 말이다. 남자는 교사이고, 여자는 그에게서 평가를 받아야 하는 교생이다. 영화 <연애의 목적>(2005)의 유명한 장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연애의 목적>에서 영어교사 이유림(박해일 분·왼쪽)이 술자리에서 미술교생 최홍(강혜정 분)에게 치근덕거리고 있다.

 

한재림 감독의 &lt;연애의 목적&gt;의 앞부분을 보자면, 모든 게 교과서적이고 또 뻔하다. 다른 여자 교생들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교생이 있다. 게다가 예쁘다. 그녀를 담당하게 된 교사는 우선 술 한잔하자고 권한다. 거절당한다. 하지만 어떤 조직이든 우리나라엔 ‘회식’이라는 문화가 있다. 드디어 첫 번째 회식이다. 회식자리에서 일찍 그 교생이 뜨자, 늦더라도 다시 돌아와 달라고 부탁한다. 교생이 돌아왔을 때, 마침 사람들은 없었고, 그래서 남자 선생님이 다시 권한다. “저랑 한잔 더 하실래요?”

 

남자 선생님의 집요하고도 이상한 부탁에, 최홍(강혜정 분) 교생은 “여자 친구 사랑하세요?”, “이 선생님, 앞으로 제 얼굴 어떻게 보려고 이러세요?”라며 얼굴을 찌푸린다. 그래도, 최홍은 대개의 여교생들보다 한두 살 많은 언니답게 당당하게 거절한다. 여성의 사회생활 중 중요한 항목 중 하나가 회식자리에서 방어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유림(박해일 분) 선생은 집요하다. 끊임없이 요구하고, 따라붙고, 집을 찾아가고, 심지어 방으로 들어간다.

 

2005년 &lt;연애의 목적&gt;이 개봉했을 때, 이 영화는 꽤나 당혹스러운 작품이었다. 제목이 &lt;연애의 목적&gt;이지만 마치 성추행의 추억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2018년, 13년이 지나 다시 이 영화를 보니 정말이지 성추행의 알고리즘을 거의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첫 번째 회식자리, 게다가 거절할 의사는 있지만 거절할 권리가 없는 사회 초년병 여성을 겨냥한 무례하고도 폭력적인 언어들까지 말이다.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을 두고 또 한 번 이 사회가 요동쳤다. 2016년 이미 한 차례 ‘#문단 내 성폭력’이 지나갔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당시 사건들이 구체적인 성폭행 사태를 동반한 형사적인 문제에 국한되었다면 이번엔 추행과 희롱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 비단 문단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이건 문단이라는 그래도 가장 독립적이고, 용기 있는 집단에서 터져 나온 하나의 실증사례일 뿐이다.

 

적어도 최영미 시인은 스스로 문단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있고, 또 문단 밖에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여성이었기에 고백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 그러니까, 여전히 말하지도, 고백하지도 못하는 여성들이 수없이 많다. 이건 어떤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초년병 여성과 권력을 가진 기득권의 문제이다. 법조계, 의료계, 학계 심지어 교육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저랑 한잔 더 하실래요”로 시작되는, 첫 번째 회식의 공포가 우리 사회 곳곳에 가득 차 있다. 아니라고 부인할 수가 없다. 그게 더 심각한 문제이다.

 

‘천조국’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꽤나 자유롭고, 여성 인권이 높다고 여겨지는 미국에서도 이제 겨우 미투(Me Too)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 대한 여성 연기자들의 고백은 고통스러운 항거였다.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2005년 &lt;연애의 목적&gt;을 두고, 당혹스럽다는 반응은 있었지만 이를 두고 사회적 권력 관계와 성적 폭력성의 상관관계로 읽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건, 둔감했기 때문이다. 고통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 자체가 더 문제이다. 리베카 솔닛이 &lt;멀고도 가까운&gt;에서 말했듯이 무감각은 자아를 수축하고, 우리가 그런 사회의 일부라는 것을 잊게 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신체 부위는 죽은 신체밖에 없다.

 

최영미 시인이 성추행을 고발하면서, 거듭 ‘부드러운 거절’을 강조한 것이 너무도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영미가 김소월의 시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의 한 부분을 암송하며,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모르고 살았으면!”이라고 할 때, 이 목소리에는 후회와 절규, 고통과 회한이 뒤섞여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무례한 요구와 폭력적 언어의 부당함이 아니라 그것을 거절하는 또 다른 에티켓을 여성에게 요구해온 셈이다. 거절의 예의라니 그것도 폭력적 언어를 예의를 갖춰 거절해야 하다니.

 

홍상수의 초기작 &lt;오! 수정&gt;이나 &lt;강원도의 힘&gt;을 보면, 여성과 하룻밤을 갈구하는 철부지 지식인들이 잔뜩 등장한다. 임신중절 후 채 아물지 않은 여제자의 몸을 파고드는 &lt;강원도의 힘&gt; 속 대학 강사나 ‘그만 뚝’ 호통을 듣고 나서야 멀찍이 떨어지는 &lt;극장전&gt;의 남자 주인공을 보면, 왜 그렇게 많은 지식인 남성들이 홍상수 영화를 보며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을 했는지 새삼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아마도 많은 남성 권력자, 지식인들이 &lt;연애의 목적&gt; 속 이유림처럼 억울하고, 답답할 것이다. 여성의 피해에는 전혀 공감되지 않고, 남성의 입장에 전폭적으로 이입이 될 테니 말이다.

 

타인의 고통을 같이 앓는 것은 재능이다. 호의였고, 격려였는데, 오해가 생겼고 운이 나빴다고들 말한다. 구차한 변명이다. 그들은 상습범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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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들어오면 문화도 등에 업고 온다. 가장 큰 게 음식이다. 임오군란을 수습하는 와중에 군대를 파견한 청나라와 불평등한 무역협정을 맺은 게 1882년의 일이다. 당연히 중국음식도 들어왔다. 짜장면 전래설도 여기서 출발한다. 아마도 처음에는 달지 않은 호떡이었을 것이다. 밀가루떡을 굽고 파와 춘장을 넣어서 먹었던. 이윽고 짜장면과 따루면(중국식 우동) 같은 게 들어왔다. 이후 수많은 외국 문화가 한국에 건너오면서 음식문화를 퍼뜨리는데, 흥미롭게도 다수가 국수다. 우리 민족이 국수를 정말 좋아하긴 했던 것 같다. 돈 많은 양반들이 ‘낮것상’이라고 하여 점심에 국수를 차려먹는 일이 동경의 대상이었으니까. 국수는 맛도 좋고 별식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늘 선호도 일등이었다. 메밀로 내린 국수를 기억하는 관서지방 사람들이 남으로 이주하면서 남한 전체에 냉면 유행을 만들어 놓았다. 미군이 퍼뜨린 건 스파게티였다. 커다란 미트볼을 넣는다거나 하는 전형적인 미국화된 스파게티였다. 여기에 일본 경양식집에서 파는 스파게티(나폴레탄)를 모방했다. 나폴레탄은 미국 군대가 일본 열도에 진주하고 군정을 실시하면서 생겨난 형식이다. 케첩을 쓴 새콤달콤한 스파게티다. 그 밖에도 오븐에 구운 치즈 스파게티니 하는 것들에 침을 흘렸다. 1960~1970년대에 경양식집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도대체 이 시큼하고 질긴 이상한 국수를 왜 먹나 싶었다. 지금 국내에서는 급식용의 유사(?) 스파게티 말고는 거의 외국 수입 제품을 쓰는데, 자료를 보면 1960~1970년대에 국내에서 스파게티 생산이 꽤 활발해서 광고도 하고 그랬다. 역시 국수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우리들이었다.

 

짜장면이 배달음식이 되고, 스파게티가 고급화의 길을 달릴 때 등장한 게 월남국수였다. 호주와 미국 서부 지역에서 유행하던 소고기 국물의 쌀국수가 강남을 중심으로 번져나갔다. 초기에 이런 가게를 연 집들은 돈도 많이 벌었다. 마치 짜장면을 처음 판 화교들과 스파게티를 보급한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쌀국수는 가볍게 싼값에 먹는 국수라는 본디 의미와 달리 강남에서 고급음식처럼 팔렸다. 세련된 인테리어에 젊은 서버들이 경쾌하게 서비스하는 집이었다. 쌀국수 문화는 지금 이른바 ‘투 트랙’으로 달리고 있다. 프랜차이즈를 통한 기본 공급 루트에 베트남 본토 사람들이 가세했다. 주로 결혼 이주한 베트남 여성들이 본토의 손맛으로 작은 가게를 곳곳에 열고 있다. 한때 이런 국수를 먹으러(진짜 베트남 국수라고 불렀다) 경기 안산시까지 갔는데, 요즘은 서울 시내에서도 종종 보인다. 동남아 특유의 향에 호오가 엇갈리는데, 점차 ‘호’가 늘고 있다. 원래 이상한 풍취도 익숙해지면 더 강렬한 애착을 받게 마련이다. 박항서 축구의 성공으로 베트남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크게 늘었다. 이 매력적인 쌀국수도 더 퍼져나갈 것 같다. 어쩌면 다른 외래 국수가 그랬듯이, 군대와 학교 급식에도 등장할 것이다. “와, 오늘 점심은 베트남 국수래!” 국수만 맛있다 하지 말고, 한국에 와 있는 베트남 친구들도 좋은 감정으로 잘 사귀었으면 좋겠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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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리들리 스콧의 영화 <올 더 머니>는 유괴사건을 다루고 있다. 유괴하면, 왠지 어린아이와 연루된 사건만 떠오르지만 한자의 뜻답게, 유괴(誘拐)는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잡아 억류하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올 더 머니>가 미국 최고의 부자였던 폴 게티의 손자 유괴사건을 다루는데, 그 손자가 18살의 남자아이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개 유괴사건은 돈 때문에 발생한다. 게티 3세가 유괴당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고 부호의 손자이니, 몸값 1700만달러 정도는 얻을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돈을 요구한 이탈리아 시골의 갱단보다 그 돈을 주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게티 할아버지가 더 잔혹하게 여겨진다. 손주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돈보다는 덜 사랑하는 게 계속 입증되니 말이다.

 

1991년 이형호군 유괴 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 <그놈 목소리>(2007)의 한 장면으로 아이 엄마 오지선(김남주 분·오른쪽)이 형사들과 함께 유괴범의 전화를 받고 있다.

 

영화사에는 유괴사건을 다룬 많은 영화들이 있다.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전도연의 <밀양>은 아이의 유괴에서 시작하는 이야기고, 한국의 작가주의 감독의 맨 앞에 놓을 수 있을 박찬욱은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에서 두 번이나 아동 유괴사건을 다뤘다. 이창동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모두 허구이지만, 공교롭게도 많은 아동 유괴 영화들은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박진표 감독의 <그놈 목소리>는 1991년 이형호군 유괴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고, 곽경택 감독의 <극비수사> 역시 1978년 발생했던 정효주 유괴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실종 사건까지 범주를 넓히면, <아이들>이나 <체인질링>처럼 많은 작품들이 잃어버린 아이들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유괴’나 ‘실종’은 어린 시절 앵커의 다급한 목소리로 환기되는 단어이다. 아직 세상을 채 이해하지 못했던 유년기에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들었던 소년·소녀들의 이름, 텔레비전 화면 한쪽에 자리 잡았던 그 아이들의 얼굴 사진은 어쩌면 나에게도 닥칠 위험과도 같은 두려움을 전달해 주었다. 유괴, 실종, 어쩌면 세상의 전부일 수도 있는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눈물, 그런 이미지들이 파편처럼 흩어진 채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유괴와 관련된 뉴스를 거의 볼 수 없다. 공개 수배로 전환하면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래서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냈던 유괴사건 뉴스가 거의 사라진 것이다. 다행이다. 하지만 다행으로 여겨도 될 만큼, 과연 세상이 정말 더 안전해진 것일까? 유괴라는 말은 어쩐지 고색창연한 단어가 되어 버렸지만 사실 요즘 뉴스에는 아동과 관련되어 더 끔찍한 단어들이 등장했다. 학대, 폭력, 폭행과 같은 그런 단어들 말이다.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뉴스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사건들, 이웃집 고교생 언니가 아이를 데려가 목숨을 앗는다거나 의붓어머니가 아이들을 굶기고, 때로는 친부모가 아이를 폭행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사건들이 사회면 뉴스로 등장한 것이다.

 

돈 때문에 다른 가족의 소중한 보물인 아이를 훔치는 유괴범은 공분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제 그 공분은 이웃집 소녀를 아무 이유 없이 살해하고, 자기 자식을 학대하고 폭력을 가한 사람들에게로 옮겨 왔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사라진 게 아니라 그 모습이 달라졌을 뿐인 셈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훨씬 더 나빠진 것일까? 세상이 훨씬 안전해져서 아동 납치 및 유괴 뉴스가 사라진 게 아니듯이 어쩌면 부모들이 훨씬 더 이기적이며 폭력적으로 변해서 아동 학대 뉴스가 많아진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 산재해 있는 성폭력 문제가 이제야 조금씩 뉴스가 되고, 사회적 담론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없어서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았던 상처임에 분명하다.

 

많은 민담과 동화에는 많은 계모와 그들이 저지른 학대가 등장한다. 할머니댁에 가는 소녀를 잡아먹기 위해 기다리는 늑대는 지금, 여기에도 있다. <장화, 홍련>에서 두 자매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계모 역시 지금, 여기에 있다. 많은 동화 속 늑대는 진짜 늑대가 아니라 아이를 노리는 범죄자이며 의붓딸을 괴롭히는 어머니는 일종의 기호이자 상징이다. 그 이야기들 속 어머니는 힘없고, 연약할 뿐 아니라 어딘가 호소하거나 의지할 방법도 힘도 없었던 어린아이들을 괴롭혔던, 그런 폭력의 대명사인 셈이다.
 
인천 여아 유괴 살해 사건이나 고준희양 학대 치사 사건을 보면, 아동 유괴사건은 오히려 고전적인 범죄 사건처럼 보인다. 적어도, 영화에서 다루는 아동 유괴사건의 범죄자들은 ‘돈’이라는 매우 정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작 돈 때문에 아이들이 희생되기도 했지만, 겨우 돈을 노렸기에 아이들은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1920년대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이 처음 등장했을 때, 돈을 노리고 남편이나 애인을 배신하는 여자는 경악의 대상이었다. 팜므 파탈이라고 불렸던 그녀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패륜아의 상징이었다. 돈만 숭배하는 인간은 그렇게 타락한 세상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더러운 돈으로도 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세상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차라리 돈 때문이었다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유괴와 몸값이라는 뉴스 대신에 그 자리를 차지한 학대와 폭력 때문에, 유괴도 추억이 된 지금, 아이로 살아가기에 세상은 언제나 지독하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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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간절함이 나를 울렸군요. 그대는 햅~격!” tvN의 퇴마판타지 드라마 <화유기>에서 배우 차승원이 연기하는 요괴 우마왕은 인간계에서 국내 최대 엔터테인먼트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대형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의 심사위원으로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내를 넘어 아시아 대중문화시장을 주무르는 거물로 묘사된다. 무대 위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오디션 참가자에게 그가 화려한 쇼맨십과 함께 “햅~격!”을 외치는 순간은 매번 <슈퍼스타> 프로그램 최고의 분당 시청률을 기록할 만큼 인기도 뜨겁다.

 

추락사고가 발생한 <화유기> 세트장. 무너졌던 천장이 보수된 흔적이 흰색 선으로 보인다. 언론노조 제공

 

흥미로운 것은 첫 장면에서 그에게 간절함의 눈물을 체험케 한 참가자의 사연이다. 사실 그녀의 정체는 오디션을 위해 체중을 무리하게 감량하다가 사망한 가수지망생의 원혼이었다. 한을 풀기 위해 다른 참가자에게 잠시 들러붙었던 원혼은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던 합격 판정을 듣고 비로소 이승을 떠난다.

 

<화유기>는 고대소설 서유기를 모티브로, 특별한 소명을 타고난 삼장(오연서)과 그를 수호하는 악동 요괴 손오공(이승기), 그리고 신선이 되고자 수행하는 요괴 우마왕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유독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떠도는 원혼이나 악귀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첫 회 오디션 참가자 원혼의 사연은 비록 사소하게 스쳐지나갔지만 그 후로도 계속해서 비슷한 에피소드로 변주되고 있다. 가령 루시퍼기획사의 대표 스타 중 한 명인 톱모델 앨리스(윤보라)는 날씬한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다가 ‘식충 요괴’의 먹잇감이 된다. 어느 순간부터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기뻐하지만 서서히 요괴에게 에너지를 흡수당하며 거식증으로 말라간다. 요괴는 모든 것이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라 주장하지만 애초에 그러한 욕망을 배태한 것은 조금의 체지방도 허용하지 않는 연예산업구조다.

 

좀비 소녀 진부자(이세영)의 이야기도 의미심장하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가 좀비로 되살아난 진부자의 진짜 정체는 유명 걸그룹 육성프로젝트에서 아깝게 탈락한 연습생이다. 기억을 모두 잃고 홈쇼핑 중독 좀비가 된 소녀의 모습 위로는 생전에 욕망을 억압한 채 연습에만 매달렸던 스트레스가 겹쳐진다. 앨리스가 진부자를 연습생으로 알고 함부로 대하는 장면에서도 그녀가 생전에 겪었던 처우가 암시된다. 루시퍼기획의 메인 춤연습실은 ‘아티스트’가 아닌 연습생들에게는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 그 너무도 뚜렷한 간극 사이에서 진부자처럼 수많은 ‘절박한’ 스타 지망생들이 아무도 모르게 눈물과 땀을 흘리다가 곧 잊혀진다. 걸그룹 연습생 실종 사건이 뉴스로까지 보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진부자의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듯이.

 

엔터업계의 원혼 이야기가 메인 플롯의 곁가지인데도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드라마 바깥의 현실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돌 서바이벌 오디션에서 탈락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걸그룹 연습생, 혹독한 경쟁을 뚫고 데뷔에 성공한 뒤에도 거식증에 시달리다가 활동을 중단한 걸그룹 멤버들,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반짝하고 사라진 참가자들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화유기>가 이러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tvN의 모회사인 CJ E&M의 대표적 콘텐츠인 <슈퍼스타K>와 <프로듀스101>을 코믹하게 패러디하는 데서도 나타나듯이 엔터업계 원혼 에피소드는 대부분 흥미 위주 묘사에 그친다.

 

이처럼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곳곳에 원혼들의 비극적 사연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것은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부조리한 시스템이 이미 일상화되었음을 말해준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화유기>야말로 그 부조리한 엔터업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데 있다. <화유기>는 최근 열악한 제작 시스템 문제로 큰 논란을 빚었다. 촉박한 제작 일정을 소화하지 못해 대형 방송사고를 내는가 하면, 부실한 세트장에서 새벽까지 작업하던 스태프가 천장 일부가 허물어지는 바람에 중상을 입는 사고도 발생했다. 이 사태를 두고 쏟아진 논평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은 것은 고 이한빛 PD의 동생 이한솔씨와 본인 SNS에 드라마 제작 실태를 고발한 배우 허정도의 말이다. 이한솔씨는 tvN 드라마 <혼술남녀> 조연출로 일하다가 죽음을 택한 이 PD가 생전에 괴로워하던 반인권적 제작 환경이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친다고 비판했다. 허정도 역시 3년 전 한 드라마 세트장에서 스태프가 화재로 사망한 사건을 언급하며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국내 엔터업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피와 땀과 눈물 위에 외벽만 화려한 부실 건물을 세우고 있었다. <화유기> 사태가 충격적인 것은 단지 과거에 비해 개선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때문이다. 제작 지원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노동조건은 한층 혹독해졌다. 드라마 트렌드가 복합장르로 이동하면서 다양한 화면을 필요로 하고, 고화질 영상기술 발전으로 디테일에 신경 써야 하는 내적 조건, 소위 ‘쪼개기 발주’로 불리는 다단계 하도급 문제의 외적 현실 등이 대표적이다. <화유기> 사태는 이제 엔터업계가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해선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경고의 마지노선과 같다. 천장이 무너졌다. 다음엔 무엇이 무너질 것인가.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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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좋아하는 술안주가 있을 텐데, 나는 동치미 한 사발이다. 그 맑은 순수의 짠맛 한 그릇이면 술이 외롭지 않다.

 

문제는 이걸 제대로 얻어먹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밥집이나 고깃집에서 주는 건 대다수가 ‘가짜’다. 동치미=冬沈이라는 문자 그대로 겨울에 푹 잠겨 익은 동치미가 아닌 것이다. 그 제조 비법(?)이야 뻔하게 예상이 가능하다. 간간한 소금물에 잘 삭은 게 아니라 급조한 ‘이미테이션’이다. 동치미라고 부르는 게 무색하다. 익힌 것이 아니니 사카린과 빙초산과 설탕과 사이다에 또 ‘무엇무엇’을 넣어 맛을 낸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동치미를 잘 만들어서 익히자면, 공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보통 식당에서 그런 환경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김치라도 겨우 담가서 파는 집도 희귀해진 판에 동치미는 언감생심이다. 게다가 이 동치미라는 녀석은 변덕이 심하다. 물이 많이 잡히고 고춧가루가 안 들어가니 발효 조절이 힘들다. 동치미는 일종의 물김치이니 익히자면 공간도 건더기 중심의 김치보다 많이 든다. 김치냉장고며, 그것을 놓을 공간이 충분할 리 없다(요즘의 임대료는 공간에 돈을 깔고 앉아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동치미 엑기스’라는 것도 판다. 동치미 맛을 내는 조제품이란다. 여기에 무를 썰어서 대충 소금 친 후 이 엑기스와 물을 섞어 그럴듯하게 동치미를 만들어낸다.

 

동치미의 악전고투는 다 이유가 있다. 만들고 저장하는 데 돈이 드는데, 정작 손님에게 돈을 청구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고기 구워 파는 식당에서 동치미(라고 부르는 어떤 존재)는 공짜로 몇 번이고 ‘리필’되는 싸구려 음식이다. 이 복잡한 속내의 동치미가 식당 주인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알려면 식당 창업 교육을 가보면 된다. 이런 교육 현장에는 관련 상품을 선전하는 상인들이 많이 나온다. 첨단의 포스 시스템부터 사채업자들까지 다양하다. 이 자리에 동치미를 판다는 상인이 나오곤 하는 것이다. 엄두가 안 나는 동치미를 사철 공급해주는 업자다. 이런 제품이라도 사서 쓰면 나쁘지 않을 텐데, 이것도 돈이 들어가니 그다지 인기가 없다. 한 그릇에 50~100원이면 뚝딱 ‘조제’를 해낼 수 있는데 굳이 진짜 동치미를 사서 쓸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오래된 신문을 뒤적이는데, 평안도식 동치미 만드는 법이 실려 있어서 눈길이 갔다. 이름도 특이하다. 와싹 동치미, 쪼개 동치미. 와싹은 아마도 입에서 씹히는 질감을 말하는 것 같고, 쪼개 동치미는 숟갈로 무를 쪼개듯 파내어 담그는 것이라고 한다. 칼로 정연하게 썰지 않은 무의 부정형의 질감이 입맛을 더 돋울 듯하다. 대동강도 얼어버릴 한겨울, 평안도 사람들은 뜨뜻한 아랫목에 앉아 동치미에 메밀국수 말아 먹으며 지냈다지. 고깃국물이 있으면 섞어 넣고 없으면 순전히 동치미 맛으로 먹는 국수.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냉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익은 동치미 한 그릇, 침이 고인다. 어디 동치미 잘하는 집이 없을까. 돈을 받아도 좋다. 그래야 부담 없이 한 그릇 더 청할 수 있을 테니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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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삶을 무척 사랑하나 보다. 죽음 이후에도 이곳과 닮은, 어떤 시공간을 상상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49재나 천국, 저승과 같은 단어들 속에는 죽고 난 이후에도 존재하는 어떤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다. 이 믿음들이 영화나 소설, 그림이나 음악과 같은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한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 <신과 함께>가 그렇고, 골든글로브 애니메이션 부문을 수상한 <코코>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작가 위화 역시 <제7일>에서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을 그려내고, 아주 오래된 문학작품인 단테의 <신곡>에도 삶과 죽음 사이의 경유지가 등장한다.

 

영화 <신과 함께>의 한 장면으로 자홍(차태현 분)이 저승차사들과 재판을 받기 위해 강을 건너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거의 첫 번째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 <원더풀 라이프>는 죽은 다음날부터 시작된다. 이곳에는 우리로 치자면 저승차사와 비슷한 관리자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이제 막 죽어서 삶을 떠난 이들을 완전한 죽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주목을 끄는 것은 그 완전한 죽음의 세계에 대한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제안이다. 관리자들은 살아생전 경험했던 일 중 가장 소중한 기억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망자들이 소중한 기억을 선택하면, 관리자들은 그 일들을 재현해 영상으로 상영해준다. 그러면 망자들은 그 추억만 남기고 모든 기억들은 잊게 된다. 행복한 장면만 편집된 영화의 클립처럼, 그렇게 기억을 즐기고 나면 그들은 진정 ‘저세상’으로 가게 된다.

 

영화 <신과 함께>에서 그리고 있는 시간 역시, 죽음 이후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기 전,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 있는 세계이다. 49일의 시간 동안 삶과 죽음 사이에 망자가 걸려 있는 것이다. 죽은 자는 이 시간 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평생을 돌아보고, 저승의 법으로 재판을 받는다. 그 재판 결과에 따라 형벌을 받기도 하고 환생하기도 한다.

 

단테의 <신곡>은 한 남자가 연옥과 지옥을 다녀오는 이야기다. 특히 연옥이 흥미로운데, 연옥에 빠진 자들은 살아생전 저질렀던 일들을 순례함으로써 고통받는다. 부활제가 있는 금요일부터 부활절인 일요일을 넘는 시간까지 남자는 사후 세계를 접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렇듯 죽음 이후의 시공간이 삶의 시공간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학기말이 되어 성적표를 받듯 죽음 이후 며칠 동안 삶을 평가받는 것이다.

 

영화 <코코>는 뮤지션을 꿈꾸는 소년 미구엘(사진 중앙)이 전설적인 가수 에르네스토의 기타에 손을 댔다가 ‘죽은 자들의 세상’에 들어가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위화의 <제7일>에 등장하는 사후 공간은 더 심하다. 그곳은 삶의 이면이 아니라 이승의 복사판이다. 살았던 동안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여력이 저승에서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수의도 못 입고, 화장 순서도 귀빈에게 밀린다. 7일이 지나 완전히 죽고 나서야 진정한 평등이 온다. 죽음은 위화에게 평등이다.

 

이 작품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후 세계는 삶의 공간만큼이나 역동적이다. 그런데, 그 역동성의 핵심에는 삶의 연장선상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상상력이 자리 잡고 있다. 육체적인 활동이 모두 끝나고 정지한 일차적 죽음을 영혼이 떠나는 이차적 죽음과 분리해둔 것이다. 엄밀히 말해, 떼어내지 못하는 쪽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이다. 사람들은 영혼을 쉽게 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우리가 죽음 이후를 모르기에 그 두려움을 상상으로 옮긴다. 이는 죽음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거울단계에 대해 우리가 여전히 모르는 것도, 두려운 것도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죽음의 경유지를 상상하는 걸까? 왜 삶과 죽음을 단절하지 않고, 중간지대에 이야기와 그림, 영화를 남기며 들여다보는 걸까? 삶과 죽음 사이에 머물던 이들도 결국 떠날 수밖에 없다. 떠나지 못하고 중간에 영원히 걸리는 건 오히려 저주로 그려진다. 그러니 우리는 삶을 정리하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삶과 죽음 사이의 경유지에 머무는 것이다.

 

부표를 맴도는 꽃잎들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살았던 삶을 여행하며, 정리하고, 기억하고, 반성한다. 회개가 삶을 순례한 대가라면 환생은 삶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윤회가 업보라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은 축복임에 분명하다. 결국, 완전한 죽음 전에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검토이며 그를 위한 영혼의 여행이다.

 

발로 떠나는 여행과 달리 영혼의 여행은 쉽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익숙한 이 땅과 언어를 떠나는 여행을 통해 진정한 ‘나’를 돌아보듯이 어쩌면 사후 세계를 나들이함으로써 우리는 이번 생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 이후의 시공간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육체를 이탈한 영혼의 망명을 꿈꾸는 작업과 닮아 있다. ‘나’를 돌아보는 꽤나 성숙한 영혼의 순례라는 점에서 말이다.

 

공교롭게도 대개의 작품 속에서 삶을 돌아보는 데 허락된 시간은 7일이다. 그 7일, 죽기 전에 살아생전에, 한 번쯤 마음먹고 시간을 내서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어떨까? <원더풀 라이프>의 그들처럼 가장 소중한 추억을 꼽아보고, <코코>처럼 기억하고, 그러면서 말이다. 딱 일주일이면 되는데, 영혼의 순례는 쉽지 않다. 죽고 나서야 가능한 영혼의 여행, 그 여행을 미리 한 번쯤 해보라는 권고, 그런 속 깊은 충고가 사후 세계의 상상력 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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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른바 패밀리 레스토랑을 취재한 적이 있다. 한 후배의 얘기에서 출발한 취재였다. 그는 한 패밀리 레스토랑의 주방일을 맡고 있었는데, 50여명에 달하는 일꾼 중 정규직이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그 후배가 이런 충격적인 말을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저녁 준비 시간 전까지 모두 가게 밖으로 나가야 해요. PC방이나 공원에 가서 시간을 때우다 오곤 했죠.”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제 돈 주고 시간을 쓰고 들어왔다. 물론 무급으로. 가게 안에 머물면 시급을 줘야 한다. 그러니 밖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지금도 나는 들르는 식당이나 카페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알바생’ 등을 볼 때마다 그 사건이 생각난다.

 

 

시급 1만원 시대를 열겠다는 게 이 정부의 공언이었다. 어찌어찌 일단 7530원이 되었다. 법대로 주휴수당 등을 다 챙긴다고 가정할 때 하루 10~12시간을 일하고(요식업소의 일반적인 근로시간) 월 21일 근무하면 대략 170만~200만원을 손에 쥐게 된다. 많은가. 좋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알바’에게 일을 시키는 요식업소는 드물다. 제일 바쁜 시간에 서너 시간, 아니면 네댓 시간 일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시급 올린다고 했을 때 반대쪽에서 주장한 ‘월급쟁이보다 많이 받는 알바’는 사실상 성립하기 힘들다. 게다가 알바 퇴직금 챙겨주는 경우도 보기 드물다. 법망이 허술하고, 알바가 퇴직금을 받을 만큼 1년 이상 근무하는(근무시키는) 경우도 적기 때문이다.

 

문제는 알바의 시급이 아니다. 정규직이든 계약직이든 풀타임으로 취직하고 싶어도 받아주는 데가 없다. 제발 지방 중소기업 현장에는 자리 많다, 도리어 구인난이다, 하며 혀를 쯧쯧 차는 엉터리 신문 기사는 믿지 말라. 그 일이란 게 실은 외국인 노동자가 하는 직무인 경우가 많다(제주의 이민호군이 했던 일이 바로 허울 좋은 ‘지방 중소기업 일자리’의 상징이다). 또 당신 같으면 자식과 형제더러 알바보다 월급도 별로 많지 않은 지방에 가서 기숙사 생활 하며 일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현장 중소기업에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것이 우리 현실인 걸 어쩌겠는가.

 

대기업은 돈을 쌓아두고 있다고 한다. 사내 유보금이니 뭐니 하는 용어를 쓰는데, 한마디로 돈은 있는데 투자도 채용도 안 한다는 소리다. 문제는 시급 인상이 아니다. 취직할 의향이 있으면 사람을 받아줄 노동구조가 먼저다. 제발 시급 1만원이 되면 웬만한 월급보다 많다는 말은 하지 말자. 알바의 평균 근속기간은 고작 5개월이다. 그러니 다시 일자리를 찾아서 무급으로 헤매야 하며, 그 시간 동안 무얼 먹고 방세는 뭘로 내는가. 앞이 캄캄하다. 최근 재미있고도 가슴 아픈 만화 한 권을 읽었다. <내 방구 같은 만화>(기묘나 지음·호랑이출판사)다. 알바를 구하면서 만화를 그리는 이 시대 청춘의 한 모습이다. 기성세대인 내가 너무도 미안해서 책장을 덮지 못했다. 일하고 싶어도 일이 없는 세상. 호부호형은 못해도 좋으니 일을 시켜달라는 세상이라니.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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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과 함께>에서 진급에 눈이 먼 박 중위(이준혁 분)는 원작보다 평면적인 악역으로 각색됐다. <신과 함께>의 한 장면.

여름에 잠잠했던 영화관이 겨울에 들썩인다. <강철비>로 시작해 <신과 함께>를 거쳐 <1987>까지 매주 새롭게 개봉하는 한국 영화마다 화제다. 설과 추석으로 양분되었던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개봉 시기가 이제는 여름, 겨울이라는 일종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졌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는 일종의 서사적 관습이 있다. 장르적으로 따지자면 거의 다 판타지인데, 대개 극명한 선과 악의 대립을 그린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에도 서사적 관습이 있다. 선과 악의 뚜렷한 구분과 신파가 그것이다.

 

영화 <신과 함께>에서 진급에 눈이 먼 박 중위(이준혁 분)는 원작보다 평면적인 악역으로 각색됐다. <신과 함께>의 한 장면.

 

그런데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선과 악은 할리우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가상의 판타지 공간이 아니라 현실과 역사 위에 세운 사실적 허구이기 때문이다.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 장준환 감독의 <1987> 등이 그렇다. 실화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대개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매우 민감했던 사안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매우 가까운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할 경우엔 더욱 그렇다. 심지어 아직까지 명확한 인과관계나 진상조차 파악되지 못한 일들이기에 그것을 다루는 것 자체가 일종의 사회적 메시지가 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규명되지 못한 사건일수록 인과응보를 추구한다는 사실이다. 인과응보를 위해 선과 악은 더욱 단단하게 분리되고 견고하게 대립한다. <택시운전사>의 사복조장(최귀화)은 악이고 광주 택시운전사 황태술(유해진)은 선이다. 주인공 김사복(송강호)은 두말할 것 없이 선이다. <택시운전사>는 이렇듯 선한 집단과 악한 집단으로 양분되어 있다. 선하면서 악하거나, 악하면서도 선한 구석을 가진 그런 인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선과 악이 완강히 나뉘고 이면을 가진 인물이나 복합적인 인물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1987>의 세계도 유사하다. 박처장(김윤석) 무리는 악이고 당직 검사, 신문사 기자 등은 선의 집단에 속해있다. 그래도 어떤 점에서 <1987>은 <택시운전사>의 세계보다는 훨씬 더 성숙한데, 왜냐면 특정한 영웅 하나의 활약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택시운전사>는 김사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기적을 다루지만 <1987>은 여러 사람들의 선의가 모여 드디어 만들어진 변화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이런 식의 선악의 이분법은 사실 매우 유아적인 소망 충족에 가깝다. 말하자면 콩쥐가 상을 받고, 팥쥐가 벌을 받듯이 한국적 신파의 중심에 인과응보로 고착된 선악의 이분법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기대와 달리 악은 평범하다. 좀 더 인간학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쉽게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악한 면과 선한 면이 있다. 악하기만 한 악당이나 선하기만 한 영웅은 안타깝게도 현실엔 없다. 다만 이야기, 영화에서만 등장할 뿐이다. 인간이 가진 입체성을 보는 데에는 여러 면에서 거리가 필요하다. 심리적 거리와 판단의 거리, 두 개 모두가 필요한데, 가령 영화 <밀정>에서 반간(이중스파이) 주인공을 다룰 수 있었던 것도 이 거리 덕분이다. 그래도 적어도 일제강점기 친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거리로 판단을 유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한편 1980년대의 일들이 여전히 현재 진행 중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직 차갑고, 냉정하게 말하기에는 너무 가깝고 객관적으로 말하기엔 객관이 될 명징한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규명조차 되지 않은 일이기에 영화는 허구를 통해서라도 정의를 요구한다. 지금 우리는 그 30년 전의 역사를 일종의 한국적 판타지의 방식으로 풀어 나가고 있다. 광주, 6월항쟁 등을 통해 인간의 다양성과 모순을 말하기엔 그래서 세상살이의 복잡함을 담아내기엔 아직 제대로 역사적 호명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부정한 권력은 악이고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힘들은 선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식의 단순한 선악 이분법이 한국 대중 영화 전반에 퍼져있는 일종의 흥행코드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범죄도시>에서 장첸(윤계상)·위성락(진선규)은 악, 마석도(마동석)는 선이고, <청년경찰>에서 두 경찰대생은 선이고 대림동의 조선족들은 모두 악이다. 범죄자는 모두 악이다. 물론 범죄는 그르다. 하지만 범죄와 선악의 개념은 구분되어야 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오래된 격언은 이 구분 위에서 성립된다.

 

문제적인 것은 지금 거의 모든 한국 영화들이 선명한 선악 대립 구도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처럼 강력한 선악의 이분법 위에서 신파가 만개한다. <신과 함께> 원작은 선과 악의 대립이 좀 희미한데, 그래서 군 생활 중 억울하게 죽게 된 병사이야기를 자홍의 동생 수홍(김동욱) 이야기로 삽입했다. 이 과정에서 박중위(이준혁)는 진급에 눈이 먼 평면적인 악의 자리에 선다.

 

이 선악의 대립은 마침내 바다와 같이 넓고 깊은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용서의 이름으로 용해된다.

 

세상은 모순덩어리다. 그래서 영화는 복잡다단하게 얽힌 모순을 단순명쾌한 선과 악의 구도로 잘라 낸다. 우리는 모순투성이 세상을 너무 잘 알기에 선명한 권선징악의 세계를 구매한다. 하지만 모순이 생각의 힘을 기른다. 영화처럼 보기엔, 세상은 너무나도 불완전하다. 신파가 사소한 해결감은 주지만 진정한 감동을 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복잡다단한 세상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것, 블록버스터 외에 다양한 영화들이 꼭 해내야 하는 일들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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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 제법 큰 ‘슈퍼’-옛날엔 구멍가게보다 새롭고 큰 가게를 슈퍼라고 불렀다- 앞에는 짐자전거가 놓여 있었다. 시커멓고 커다란 짐받이가 있으며, 더러 짐받이를 키워서 배추 스무 포기쯤은 너끈히 배달할 수 있는 그런 자전거였다. 육중한 무게감, 그건 소년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저 자전거를 탄다는 건 어른으로 인증받는 방법이었다. 슈퍼집 아들에게 아부해서 몇몇 녀석들은 그 자전거를 몰았다. 안장에 앉으면 발이 닿지 않으니 옆에 붙어 서서 페달을 돌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면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짐자전거는 중국집의 필수품이기도 했다. 대개 소년이 그걸 몰았다. 고등학교 같은 건 가지 않고, 중국집에서 먹고 자며 일찍이 사회에 발을 들인 형들. 그 형들이 담배 한 대를 멋지게 피우고는 배달통을 뒤에 싣고 힘차게 페달을 밟는 모습은 진짜 탄성을 자아냈다. 그들도 아직 키가 여물지 않아 겨우겨우 페달에 발을 얹은 처지라 아슬아슬하기는 했지만. 게다가 ‘핸들’에는 우동이나 짬뽕 국물을 담은 노란 양은주전자를 몇 개나 걸고 가고 있었으니. 그때부터 전화로 중국집에 독촉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동네 중국집 홀에 앉아 짜장면을 먹노라면, 전화를 받는 주인의 대답은 늘 이랬다.

 

“벌써 떠났어요.” 그 화교 아주머니가 전화를 끊고는 중국어로 주방에 소리를 치곤 했다. 얼른 음식 내란 말이었을 테다. 그제서야 배달 짜장면이 출발했고, 나는 중국집 주인의 “벌써 떠났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3대 거짓말이라는 걸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의 배달 문화는 이제 짙은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옛 소년 배달부는 여전하되, 인권의 시각으로 다시 보게 된다. 빙판길, 막히는 길을 달려 고객님의 불만을 사지 않기 위해 가슴이 타들어가는 질주가 이어진다. 신호 걸린 사거리에는 맨 앞에 오토바이 부대가 진을 친다. 퀵서비스와 음식 배달이다. 시간이 돈이고, 고객이 왕이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총알 같이 튀어나간다. 문제는 맞은편 차선에는 같은 ‘동료들’이 신호의 마지막을 붙들고 달려들고 있다는 점이다. 오토바이 사고는 늘 일어나고, 사고가 났다 하면 대형이다. 먹는 시장이 사실상 완전 경쟁을 넘어 출혈 경쟁을 하고 있고, 배달은 그나마 그 틈새에서 먹고사는 외식업의 바닥을 이룬다. 주문하는 이나 음식 만드는 이, 배달하는 이가 저가 외식시장에 발을 넣고 몸부림을 친다. 어쩌면 이 구도는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최악의 생존 구조의 압축된 아수라 같은 것이다. 다 ‘쏠리고 몰려서’ 먹고사느라고 인권이나 목숨 같은 건 돌볼 여지도 없이 하루의 안녕을 빌어볼 뿐이다. 그 와중에 정작 돈 잔치는 거대 프랜차이즈 기업들과 배달을 중개한다는 신종 업종 회사들이 벌인다. 세상에! 우리가 사람이라면, 하루에 몇 명씩 죽어가고 장애인이 된다는 배달 ‘소년’들, 배달 노동자의 인권과 안전에 이토록 무심할 수 없다. 이 또한 진정한 적폐가 아닌가. 정부 당국은, 어른들은 당장 이 문제 해결에 나서라. 우리 소년들을 보호하라.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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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tvN에서 노희경 작가의 전설적인 초기작을 21년 만에 리메이크했다. 1996년 겨울, MBC 창사 35주년 특집극으로 방영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가족을 위해 평생 헌신해 온 중년의 기혼 여성이 말기 암 진단을 받고 가족과 이별을 준비하는 내용을 그린 드라마다. 4부작의 짧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다음해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과 작품상을 석권할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당시 신인이던 노희경은 이 드라마를 통해 차세대 거장으로 주목받았고, 주연을 맡은 나문희도 명배우로서 진가를 입증했다.

 

드라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한 장면. ‘할머니’역을 맡은 배우 김영옥씨(왼쪽)와 ‘인희’역의 배우 원미경씨가 함께 앉아 있다.

 

보통 원작이 뛰어날수록 리메이크에 부담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2017년판 드라마는 원작자 노희경이 다시 한 번 극본을 맡음으로써 오히려 기대감을 드높였다. 방영 중에도 준수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완성도에 호평이 잇따랐다. 성공의 핵심 원인으로 먼저 손꼽히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의 힘이다. 애초에 드라마 원작자가 직접 리메이크하는 일도 드문데, 더 나아가 두 작품 모두 성공을 거둔 희소한 사례에 노희경의 뛰어난 필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라는 말에는 또 다른 그늘도 존재한다. 이 작품은 21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어머니들의 현실에 바탕하고 있다. 실제로 리메이크작에서 엄마를 제외한 다른 가족의 삶은 시대적 변화를 반영해 원작의 설정에서 조금씩 수정되었다. 아버지 정철은 과거에 비해 ‘의사가 넘치는’ 현실로 인해 한층 악화된 고용 불안을 경험하고, 막내아들 정수는 의대를 원하는 아버지의 압력에 삼수를 하는 설정으로 학벌주의 심화를 드러냈다. 결혼보다 직업적 성취에 더 열정적인 유학파 출신 커리어우먼이자, 권위적 가부장인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뚜렷한 큰딸 연수 역시 요즘의 달라진 여성상을 보여준다. 오직 주인공만 원작과 별 차이가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대의 변화를 반영할 만한 사회적 삶에서 격리된 전업주부 겸 기혼 여성이기 때문이다.

 

원작 극본에는 ‘엄마’라고만 표기되어 있고 죽음을 맞는 마지막 장면에서야 이름이 밝혀지는 주인공 김인희는 1996년에도 “우리 시대 대표 어머니”로, 2017년판에서도 “이 시대의 평범한 엄마”로 설명된다. 1942년생 김인희든, 1962년생 김인희든, 한국 사회에서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보통명사로서의 삶에 불과하다.

 

사실 이러한 비극적 삶의 실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원작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끝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할머니’다. 극중에서 중증 치매를 앓는 그녀는 며느리인 인희에게 고통과 연민을 동시에 안겨준다. 젊은 시절 홀로 아들을 의사로 키우느라 모든 것을 헌신한 채 자신을 잃어버린 할머니는 만약 인희가 끝까지 살았다면 맞이했을 미래의 모습이나 다름없다.

 

공교롭게도 원작과 리메이크작의 ‘할머니’ 모두 같은 배우 김영옥이 연기했다는 사실이 이러한 현실을 의미심장하게 보여주고 있다.

 

극 이면에 깔린 잔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 따스하고 감동적인 가족극으로 소비되는 것은 엄마의 병을 알게 된 뒤부터 이기적인 가족들이 보이는 참회의 서사 때문이다. 가령 젊은 시절 인희가 아이를 낳을 때조차 옆을 지키지 않았던 무심한 워커홀릭 남편은 아내의 병을 알고 나서야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꾼이 되어 아내가 최후를 맞이할 새집을 단장한다. 엄마 손으로 토사물까지 치우게 했던 사고뭉치 아들은 마지막으로 엄마를 기쁘게 해줄 기회를 달라고 사정하고, 누나를 착취하기에 바빴던 남동생은 진실을 알게 되자 후회하고 성실한 인물로 거듭난다. 여성 암환자의 이혼율이 남성 암환자의 그것에 비해 3배나 높고, 가사일로 이중고를 겪는다는 현실을 생각하면 모두와 ‘아름답게’ 이별하는 이 드라마의 결말은 더 없이 판타지적으로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이야기는 올해 뜻밖의 화제작으로 불린 KBS <고백부부>와도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 결혼을 후회하는 30대 후반 부부가 18년 전으로 되돌아가 인생의 소중한 시절을 다시 경험하는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당초 ‘응답하라’ 시리즈의 아류작이라는 선입견을 극복하고 절절한 가족애로 호평을 얻어냈다. 특히 주인공 마진주의 애절한 사모곡이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10년 전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한을 품고 살아가던 2017년의 마진주가 1999년의 과거로 돌아가 가장 먼저 마주친 건 살아있는 젊은 엄마였다. 스무 살 시절에는 철없는 막내딸이었던 진주는 결혼 뒤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전업주부의 삶을 경험하고 나서야 엄마의 소중함을 깨닫고 뒤늦은 사랑을 표현한다. 모녀의 18년 시차를 극복한 공감의 힘은 결국 ‘엄마’의 삶이라는 보편적 현실이었던 것이다.

 

노희경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방영 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리메이크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1년 전 이 작품이 방송된 이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자체가 어머니인, 어머니만을 위한 드라마가 별로 없지 않은가. 언젠가부터 어머니에 대한 관심을 외면해버린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정확한 진단임에도 불구하고, 21년 만에 돌아온 엄마의 이야기가 변하지 않는 현실의 재확인에 불과하다는 것은 몹시도 씁쓸한 일이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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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쟁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쓴 노벨 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말이다. 나 역시 전쟁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영화평론을 하다보면 너무 많은 전쟁 그리고 전쟁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마블과 디시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만 해도 그렇다. <원더우먼>은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최근 개봉했던 <저스티스 리그>의 배경도 인류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된 권력 쟁탈전이다. <스타워즈>는 말 그대로 ‘별들의 전쟁’이고, <어벤져스>에서도 비록 가상의 전쟁이라 하더라도 매번 전쟁을 치른다. 세계 어느 영화관에서든 전쟁이 현재 진행 중인 것이다.

 

영화 <강철비>의 한 장면으로 엄철우(정우성 분·왼쪽)와 곽철우(곽도원 분)가 식사하며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양우석 감독의 <강철비>는 전쟁에 대한 영화이지만 결코 전쟁영화는 아니다. 그런데 <강철비>는 그 어떤 전쟁영화보다 무섭고 두렵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머리를 비우고, 팝콘을 먹으며 그렇게 의자에 기대 볼 수 없는 전쟁을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바로 여기 한반도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이기에 영화적 허구를 넘어 우리의 무의식 너머 뇌관을 건드린다. 한반도와 전쟁, 아닌 척해도 올 한 해 내내 우리를 시달리게 했던 문제 아니었던가?

 

제목인 <강철비>는 스틸레인이라 불리는 클러스터형 탄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영화의 두 주인공의 이름을 은유하기도 한다. 남한의 안보수석(곽도원)과 북한의 정예요원(정우성) 두 사람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모두 철우이다. 음차 해서 풀어보자면 그들이 바로 철로 된 비, 철비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말장난 같은 이름의 동일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 우연이 한국전쟁이나 민족 분단과 같은 여러 가지 한반도 상황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두 사람은 정치의 논리를 벗어나 전쟁의 두려움을 직시하고, 체감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전쟁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두려워한다. <강철비>를 보는 내내 무릎을 덜덜 떨었던 이유도, 그것이 잔혹하거나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다. 꾸며진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강철비>에 그려진 상황은 너무나 그럴듯하고 사실적이다. 양우석 감독이 그려낸 한반도의 정세가 과장이나 오판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적확하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한국인들이 꽁꽁 숨겨 두었던 공포의 개연성을 풀어낸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는 실제 있었던 전쟁의 한 장면을 IMAX 스크린 위에 담아냈지만, 그건 이미 과거이고 역사의 한 장면이다. 이미 가능성이 유산된 지나간 전쟁의 흔적인 셈이다. <강철비>는 지금 여기, 한반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 위에 허구를 직조한다. 한국에서 전쟁이란 어쩌면 가능한 미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 속 남한 철우의 입을 통해 말해지듯이 분단의 진정한 고통은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에 의해 증폭된다. 미래의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혹시나 하는 위협에 대비를 하는 것 자체가 평화의 약속을 위태롭게 하고 혼란의 위험을 높인다. 스티븐 밀러의 말처럼, 전쟁은 전쟁에 대한 준비과정 때문에 일어나곤 했기 때문이다. 준비된 상태 자체가 상대에게 위협을 불러온다. 칸트도 했던 이 말은 지금 한반도 정세에 많은 암시를 준다.

 

철우와 철우는 이념, 민족, 이윤과 같은 큰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그늘 아래 살아가고 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막고자 한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그런 일일 것이다. 전쟁은 정치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실패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미래의 전쟁에 대한 가능성 자체를 아예 없애는 방향으로서의 평화를 일궈 내야 할 것이다. 전쟁의 위협이 아예 사라질 때, 바로 진정한 평화가 오기 때문이다.

 

영화의 두 인물은 남한과 북한이 핵전쟁을 치를지도 모를 상황에서도 각자 나름의 ‘전쟁’을 치른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지키는 것, 그 자체도 전쟁과 다를 바 없다. 자기 전부를 걸고 그 순간만큼은 진지하게 싸움에 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적 예술사에서 전쟁은 곧 고단한 삶에 대한 은유가 되어 주곤 했다. 지금껏 우리의 영화들에서 전쟁이란 이렇듯 낭만적인 과거이거나 개인의 고투였던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라고는 했지만 진짜 전쟁은 아니었던 셈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어느새 완전히 허구로 유희할 수만은 없는 ‘전쟁영화’의 시대에 돌입해 버린 듯싶다. 먼 곳에서 보기엔 그저 영화적 문법에 충실한 장르 영화일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에게 ‘북’의 문제는 구체적 실감을 가진 문제이다. 그러니 전쟁을 정치적 수사학으로 남용하는 이들에게 혐오와 불신이 생길 수밖에. 이럼에 눈감아 생각해 볼 때, 결국 강철로 된 무지개처럼 단단히 벼린 평화를 기대하고 또 기대할 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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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치러지기 전에는 학력고사란 게 있었다. 아마도 교육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과목일 텐데, 실업도 고사 과목 중 하나였다. 그게 쓸모가 있든 없든 3년을 열심히 배우고 가르쳤다. 필답고사 320점 만점에 무려 15점이 배점되어 있었다. 속칭 암기과목이니 이른바 무조건 고득점을 노리고 봐야 하는 전략과목이기도 했다. 실업이란 게 워낙 다양해서 상업, 공업, 가사에 농업, 수산업, 광업도 있었다. 고등학교가 속한 지역 사정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업, 공업이 많았다. ‘밥’이 되는 과목이라는 뜻이었다. 농업이니 수산업이니(심지어 광업까지) 하는 과목은 사양산업 같았고, 1980년대에 바라보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실업 과목에 속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인문계를 다녔으니 상업을 배웠다. 문제는 이 과목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었다. 대변 차변이 나오는 부기 부분에 가면, 머리가 다 멍해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부채도 자산이다’라는 원리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남의 돈을 빌려 쓰는데 그게 어찌 ‘내 돈 같은 자산’이 되느냐고. 원서 쓸 날은 가까워 오고, 부채와 자산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그때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하는 재수생 형의 제안은 놀라웠다. 농업을 선택하라는 거였다. 쌀 나무나 겨우 아는 수준에 농업을 어찌 배우냐고, 이제 곧 원서 쓰고 시험이라고. 그 형이 지긋이 웃으며 말했다.

 

“농업은 쉽게 나와. 네가 매일 먹는 게 시험에 나온다고.”

 

과연! 기출문제를 보니 소, 돼지에 쌀에 고구마, 사과와 귤이 시험에 나오는 게 아닌가.

 

나는 그렇게 농업을 순전히 책으로 배웠고, 학력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다. 뚱딴지같은 생각에서 시작된 우연이었지만 농업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무엇보다 도시에서 산 내게도 흥분될 정도로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병아리를 까는 법, 알을 많이 낳게 하는 법, 소와 말의 임신 기간이 사람보다 길다는 거(이 녀석들이 임신한다는 사실을 도시 아이들은 아는가 모르겠다), 사과를 많이 열리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지, 돼지에게는 진흙목욕이 최고라든지…. 농(축산)업이 기본적으로 인간 중심의 이기적인 생산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 입에 들어가는 생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투명한 랩으로 곱게 부위별로 포장된 고기를 고르면서도 그 붉은 살코기가 어떤 존재의 누적된 삶의 부분인지 우리는 이제 알지 못한다. 아니,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산다.

 

 볍씨가 어떻게 모종이 되어 무논에 심어지고 나락이 되는지, 그걸 털어서 어떻게 깎아야 맛있게 먹는지 아는 사람이 도리어 별종이 되는 세상이다. 농축림수산업은 인류를 지탱하는 기초 산업이다. 누구 말마따나 스마트폰을 먹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먹는 것을 이해하는 일, 아마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제일 큰 힘이 될지도 모른다. 단위학교에서 농업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것이 앞이 안 보이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줄 것이다. 별에 버려진 우주인이 인분으로 감자농사를 짓는다는 영화 속의 이야기는 그 의미심장함의 비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이테크 시대에도 우리는 뭔가를 먹어야 하고,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암시하는.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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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밤 9시 무렵, 예고도 없이 진만과 정용이 세 들어 사는 건물 전체에 전기가 나가버렸다. 무언가 퍽, 터지는 소리가 복도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형광등도, 컴퓨터도, 보일러도, 서로 합을 맞춘 노련한 배우들처럼 일순 정지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정적. 그 정적 때문에 정용은 평상시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소음을 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옆방 남자가 끙, 하면서 돌아눕는 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길게 어둠 속에서 울렸다.

 

 

 

정용과 진만은 휴대폰 손전등 기능을 이용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 출입구 앞에는 이미 서너 명의 건물 입주민들이 나와 환하게 불을 밝힌 바로 앞 아파트와, 그와는 반대로 오래된 축대처럼 칙칙하게 변해버린 자신들의 거주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원래 칠층짜리 모텔을 원룸으로 개조한 건물은 창턱마다 장미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장미꽃 문양만은 기괴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거, 한전에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입주민 중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정용과 진만은 입주민들과 몇 발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추리닝 차림 그대로 나온지라 몸이 떨렸다. 불 꺼진 건물을 올려볼 때마다 목과 어깨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한전이 아니고 건물주한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밖으로 나온 입주민들이 더 많이 늘어났다. 그들 대부분은 슬리퍼에 맨발 차림이었고, 수면바지에 담요를 어깨에 친친 감고 나온 여자의 모습도 보였다.

 

“월세만 받고 관리를 너무 안 해주잖아요.”

 

또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자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건물주가 관리를 제대로 안 해주는 것은 맞지만, 정용은 그렇다고 딱히 불만을 품거나 원망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하기엔 월세가 지나치게 쌌다. 보증금도 없이 월세만 내는 처지라 무엇을 더 바라거나 원해선 안 된다고 이삿짐을 들여올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 건물이 근저당이 좀 많이 잡혀 있어요. 아아, 그래도 걱정할 건 하나 없어요. 그래서 보증금도 없는 건데, 뭘…. 처음 정용과 진만에게 방을 소개해준 부동산 중개인은 그런 말을 보태기도 했다. 근저당이 많이 설정되어 있는 건물, 그 건물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정전 때문에 한자리에 모여 서 있는 밤이었다.

 

“한전에서 30분 안에 기사 보내준대요.” 검은색 롱 패딩을 입은 젊은 남자가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 그제야 몇몇 사람이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더 많은 사람이 건물 앞에 남아 있었다. 일부는 출입문 옆 벽에 기대 서 있었고, 또 일부는 층계에 앉아 있었다. 건물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슨 구경거리처럼 입주민들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사층에 사는 누군지는 몰라도 거 밤에 세탁기 좀 돌리지 맙시다.”

 

중년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밤에 세탁기를 안 돌리면 언제 돌려요? 낮엔 일하는데.”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되받았다.

 

“아니, 주말도 있고 정 안 되면 초저녁에 돌리면 되잖아요?”

 

“주말도 일하고 퇴근하면 밤 열 시인데, 뭘 어쩌라는 거야, 젠장.”

 

“젠장? 너 근데 몇 살이니? 몇 살인데 반말 찍찍 갈기는 건데!”

 

층계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서 한 사내 앞쪽으로 다가갔다. 사내도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허리를 더 꼿꼿하게 세웠다. 정용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다. 모두 혼자 사는 사람들이었다. 연차나 반가, 월차 같은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코인 세탁소를 이용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었다. 오직 가전제품이 내는 소리만 듣고 사는 사람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잠드는 사람들.

 

서로 멱살을 잡을 듯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은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졌다. 더 이상 반말도, 비아냥도 없었다.

 

“정전되니까… 괜히 호빵 같은 거 먹고 싶지 않니?”

 

진만이 정용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정용은 그런 진만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얘랑 너무 오래 살아서 이렇게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신고 전화를 한 지 채 이십 분도 지나지 않아 붉은색 한전 마크를 단 사다리차가 건물 앞에 도착했다.

 

“퓨즈가 나갔을 겁니다. 교체하면 바로 괜찮아질 거예요.”

 

헬멧을 쓴 기사가 모여 있는 입주민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입주민들은 바스켓이 달린 사다리가 서서히 펼쳐지는 모습을 마치 어미를 기다리는 어린 참새 떼처럼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건물 안에 있던 입주민들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바스켓에 타고 있는 한전 기사를 바라보았다. 토요일 밤이었지만,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따뜻한 잠자리를 위해 아찔한 허공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직업이었겠지만,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겐 어떤 위로가 되는 모양이었다. 입주민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어, 눈 오네.”

 

누군가가 그렇게 말을 하자 정말로 하늘에서 벚꽃 같은 작은 눈송이가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떨어지는 눈과 그 눈을 배경으로 하늘에 떠 있는 한전 기사를 계속 쳐다보았다. 올해 첫눈이었지만, 기사는 그런 것쯤 상관도 하지 않고 변압기 여는 작업에만 열중했다. 첫눈이 기사를 더 기사답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건물주도, 근저당도, 세탁기 소음도 첫눈이 온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겠지만, 지금 저 하늘에 떠 있는 기사만큼은 더 선명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야, 진짜 눈 보니까 호빵 먹고 싶지 않니? 올해 첫 호빵.”

진만이 다시 정용의 귀에 속삭였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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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0) 2017.12.08
Posted by mx2.0
TAG 첫눈, 픽션

동네에 새로 생긴 작은 책방에서 독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동네 작은 책방들이 많아지면 그중에 내 단골 책방도 생길 텐데, 그러면 책 고르는 일이 훨씬 즐겁고 편해질 것 같다고. 말하자면, 내 취향의 옷들을 파는 작은 옷가게처럼. 언제 들러도 내가 좋아하는 옷이 한두 벌쯤은 있어서 지갑 형편상 사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구경만으로도 행복한. 동네 책방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책방에 들르면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중에 무얼 골라도 크게 실망할 것 같지 않은. 그러니까 책방에 대한 믿음, 주인에 대한 믿음, 선택에 대한 믿음, 그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그러나 거창하지 않게 놓여있는. 대형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의 수많은 책들 중에서 무얼 골라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을 때,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고르긴 골랐으나 읽어보니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나만의 그런 작은 서점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집에 티브이를 두지 않게 된 이후로 모든 방송을 스트리밍 서비스로 보게 되었다. 영화든, 드라마든, 뉴스든. 그냥 틀어놓으면 수동적으로 보게 되는 티브이 시청과는 달리 이건 매우 적극적인 행동이 전제된다. 무얼 볼지 결정해야 하고, 그 선택에 대한 후회도 온전히 내 몫이 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는 그래서 고객의 선호도를 분석해준다. 넷플릭스는 그 분석을 바탕으로 콘텐츠를 자체 제작하기도 한다. 고객은 접속과 동시에 자신에게 추천되는 프로그램의 목록을 볼 수 있다. 얼마나 좋아할지, 그 확률을 숫자로까지 표시해준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 드라마, 99프로 일치. 내가 전에 보았던 것과 유사한 다큐멘터리, 90프로 일치. 전체고객의 상위 5프로가 최근에 가장 좋아한 영화. 뭐, 이런 식이다. 숫자의 유혹이 놀랍다. 내가 99프로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 드라마라니, 이건 반드시 봐야 한다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왕이면 89프로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 것보다는 이걸 먼저 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나서, 시청 후에 드는 생각. 내가 정말 이걸 좋아하나? 나의 99프로가 이걸 좋아하나? 그러나, 때때로, 아니 실은 아주 자주 나의 1프로는 말한다. 이런, 나는 이걸 안 좋아하는 걸.

 

집에 티브이가 없고, 게다가 종이 신문을 정기 구독하지 않는다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아는 것 역시 매우 적극적인 행위가 된다. 알려고들면 그렇다는 얘기다. 자신이 좋아하는 뉴스매체를 인터넷에서 선택해서 그중에 관심이 가는 뉴스를 다시 선택해야 하고, 그와 관련된 다른 매체의 뉴스들을 비교해서 봐야 한다. 수고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포털에 기대게 된다. 포털은 넷플릭스처럼 ‘당신이 좋아할 만한’, 혹은 ‘당신에게 중요한’ 몇 프로의 가능성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간판에 걸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100프로 중요한 것이 된다. 99프로도 아니고 100프로다. 지나치게 사소해서 티브이 뉴스를 틀어놓았다면 귓전으로 그냥 흘려들었을 뉴스까지도 그날의 가장 중요한 뉴스가 된다. 책이 소개되면 가장 핫한 책이 되고, 옷이 소개되면 그즈음의 패션이 된다. 그 중요한 뉴스가 어떤 매체의 것으로 소개되었는지에 따라 느닷없이 보수적인 의견을 따라가게 되기도 하고, 전혀 반대로 진보적인 입장에 서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문득 하게 되는 생각. 이런, 나는 아무 생각도 없는 걸? 더 나아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러니까 내가 아는 건 세상이 아니라 네이버뿐이라는. 최근에 1994년의 신문을 볼 일이 있었다. 그해 1월1일의 어느 신문 특집 기사는 향후 IT산업의 발전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모시키게 될지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내용이 재밌다. 앞으로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선택해서 볼 수 있는 날이 올 거라든가, 누구나 ‘휴대용화면전화기’를 소유하게 되어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든가. 농담처럼 이런 우려도 덧붙여 있다. 회사원들은 근무시간에 주식시세를 검색하다가 상사에게 들키는 불상사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그 모든 예측들은 다 사실이 되었다. 신년에 보는 토정비결도 아니고, 자료를 통한 과학적 예측이니 그게 사실이 되었다고 해서 놀라울 것은 없다. 미래는 늘 현재가 품고 있는 씨앗을 통해 발아하는 법이니. 좋은 미래든, 나쁜 미래든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불행히도 앞으로의 미래는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나라고 예측되어지는 어떤 조건치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포털 뉴스의 불공정한 배치가 문제가 되면서 앞으로는 뉴스 배치를 알고리즘화하는 쪽으로 개선한다고 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개인의 취향,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뉴스를 자동으로 배치한다는 뜻인 모양이다. 내가 좋아하는 뉴스와 당신이 좋아하는 뉴스가 다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게 중요한 뉴스와 당신에게 중요한 뉴스도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넷플릭스에서는 이런 과정을 ‘큐레이션’ ‘레시피’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고객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숨어 있는 취향을 찾아주는 서비스라고까지 했다. 놀랍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좋아하는 것을 찾아주는 서비스라니. 마찬가지로 내가 중요한지도 모르는 중요한 뉴스가 스스로 알아서 찾아오기도 한다는 뜻일 텐데, 그 반대를 생각하면 또 놀랍다. 이런,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걸.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 분명히 올 터이고, 뉴스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는 순간도 올 것이다. 길이 복잡해지고, 그 길이 엉망이 되기 전 단단한 지표를 먼저 세우는 게 필요할 터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거나 판단하지 않거나, 단 한 건의 뉴스가 세상을 바꾸기도 하는 법이니.

 

동네 작은 책방 얘기를 했었다. 단골을 분석하는 게 아니라 공감하는. 통계적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대화하는. 차 한잔, 혹은 맥주 한잔과 책 한 권, 그 책의 어느 한 페이지에 손을 얹어놓고 문득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 그곳에는 나라고 추정되어지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분명히 나 자신인 내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세상은 결코 이렇게 단순하지 않고 단순해지지도 않겠지만, 그럴수록 더욱 확실한 지표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단순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단순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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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는 즐겁다. 다만 그것이 해결될 때 말이다. 범인이 누구였느냐를 밝혀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파악하고, 분석하고, 규정할 때 마침내 범죄는 정복된다. 왜가 밝혀진다는 것은 범죄의 인과관계가 해부되었음을 뜻한다. 해부된 범죄는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원인을 알면 범죄는 예방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할까? 여기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해 낸 탐정, 에르큘 포와로 말이다.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에서 에르큘 포와르 역을 맡은 케네스 브래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스틸 이미지.

 

에르큘 포와로는 해결사의 대명사다. 포와로가 있는 곳에 해결되지 못할 범죄는 없고, 잡히지 않는 범인은 없으며, 원인 모를 범죄도 없다. 포와로가 주목하는 순간 우연은 사라진다. 모든 우연은 철저히 계산된 필연이며 그래서 회색 뇌세포를 가진 그가 풀어내지 못할 난제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즐거운 범죄의 면면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이미 1974년에 영화화된 바 있다. 원작을 읽었다면 잘 알고 있듯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반전이 독특한 작품이다. 이 반전은 범죄서사에 대해 소비자가 으레 요구하는 관습적 모범답안을 뒤집는 것과 연관된다. 대개의 독자, 관객들이 범인이 누구인가에 집중하는 동안 이야기는 누구가 아닌 왜를 생각하라고 떠민다. 누구냐보다 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너무도 유명한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결론을 모른다면, 더 이상 읽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어떤 점에서 범인을 가려내는 게 불가능한 사건에 가깝다. 범인이 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이며, 게다가 서로가 알리바이가 되어 서로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즉,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은 다수의 사람들이 의기투합해 정의를 실현한 일종의 단죄이다.

 

중요한 것은, 이 기차에 바로 에르큘 포와로가 탑승했다는 사실이다. 기획이 완벽할수록 포와로의 재능은 빛나고 그의 역할은 중요해진다. 역시나 그는 천재이기 때문에 이 완벽한 기획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즐거운 범죄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얽히고설킨 열세 개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포와로는 그 숨겨진 이면과 거짓을 읽어낸다. 좀 과하게 이야기하자면 마치 포와로에게 읽히기 위해 열세 명이 복잡한 암호를 출제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단지 어려운 문제일 뿐 결국 풀릴 수 없는 퍼즐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 문제적인 것은 공동범죄라는 바로 그 부분이다. 열세 명의 사람들이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의 복수를 위해 모의한다. 케네스 브래나 감독 역시 이 부분이 꺼림칙했는지, “영혼의 균열”이라는 말을 거듭 강조한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을 위해 범죄를 모의한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돈”이었다면 훨씬 더 그럴 듯해 보이진 않았을까? 2017년 현재의 관객들에게, 열세 명이나 함께할 수 있는 공공의 신의라는 게 납득이 될 수 있을까?

 

다정한 친구, 은인, 존경했던 이의 복수를 위해 현재의 자신을 걸고 범죄에 가담한다는 것, 그건 너무나도 아름다운 인간적 연대이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며, 이상적이다. 2017년엔 불가능해 보이는 연대, 적어도 1930년대에는 이런 식의 정의와 신뢰, 우애가 가능하리라 여겨졌던 모양이다. 2017년, 완벽한 천재 포와로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남을 위해 스스로를 헌신하는 열세 명의 인물들이다.

 

어쩌면 지금의 시점에서는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 같은 범죄자가 더 그럴 듯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무 이유도, 맥락도, 감정이나 불만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범죄자 말이다. 만약, 그에게 “왜”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냥”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의 범죄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그런 범죄자를 쫓는 보안관에게 그의 행적은 암호나 퍼즐이 아니라 해독 불가능한 난수표에 불과하다. 애당초 인과관계 따위가 없으니 포와로가 살아 돌아온다고 할지언정 안톤 시거의 범죄를 명명백백히 밝혀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즐거운 범죄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1974년의 고전 영화를 2017년 새롭게 단장해 다시 보는 마음도 여기서 멀지 않을 것이다. 어느덧 세상엔 회색 두뇌로도 이해할 수 없는 범죄들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아내를 성매매에 이용할 뿐 아니라 딸 친구까지 유인해 폭행 살해하는 남자도 그렇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초등학생을 유인해 산산이 부순 소녀도 그렇다. 유능한 탐정만 있으면 모든 범죄는 해결 가능하다고 믿었던 그 시절이야말로 어쩌면 인류의 좋은 시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젠 그런 환상조차 설득력을 잃은, 황무지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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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부부>에서 마진주(장나라)가 육아에 지친 모습으로 전화받는 장면. <고백부부> 스틸 이미지

하루에도 신조어가 수십개씩 쏟아지는 시대에 최근 ‘영포티(Young Forty)’만큼이나 집중 조명받은 말이 또 있을까. 트렌드분석가 김용섭이 저서 <라이프 트렌드 2016>에서 과거의 X세대를 겨냥해 처음 명명한 이 단어는 당시만 해도 그리 새롭거나 주목받는 용어는 아니었다. X세대가 40대에 들어서기 시작한 2010년대 초반부터 이들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회고열풍이 불면서, 이미 그들을 지칭해 생겨난 여러 호칭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회고열풍을 주도한 영화 <건축학개론>과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각각 유래한 ‘건축학개론 세대’와 ‘응팔 세대’ 등이 있다.

 

그 후로는 패션업계에서나 종종 언급되던 ‘영포티’가 갑작스럽게 ‘대부흥’을 일으키게 된 데에는 올해 4월 통계청 공식블로그에 올라온 글 하나가 계기가 됐다. “지금은 아재시대, 대세는 영포티!”라는 글이 SNS를 통해 뒤늦게 ‘발굴’되면서 집중포화를 맞은 것이다. 비판의 핵심 중 하나는 제목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영포티’라는 단어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성을 소외시킨다는 데 있다. ‘영포티’의 유사어로 ‘아재슈머(아재+컨슈머)’를 들고, 월평균 소득과 지출이 꾸준하게 증가하는 40대의 소비력을 찬양하는 이 글은, 한국 노동시장에서 남성과의 임금 격차가 가장 크게 벌어지는 시기인 40대 여성들의 현실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영포티’ 논란은 그 허황된 신화의 기원을 마련한 1990년대 회고열풍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이었는가를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건축학개론>이 젠더의식 부재에 대한 여성들의 꾸준한 비판이 있었음에도, 놀라운 흥행기록과 함께 한국 멜로 영화의 신기원이자 1990년대 대중문화 신드롬의 주역으로 예찬받는 것처럼. 1990년대 신세대 문화의 가장 중요한 한 축이 여성주의문화였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드라마만 보더라도, 당시 신세대의 새로운 재현양식으로 급부상한 트렌디물은 그야말로 신여성들이 주도하는 서사였다. 그 이전까지 가정멜로드라마 안에서 가족에 얽매여있던 여성들은 트렌디드라마 속에서 비로소 사회적 경력을 쌓으며 일과 사랑을 쟁취하는 존재로 그려졌다. 한편에서는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여자의 방> <아들과 딸> 같은 진지한 여성주의 드라마도 계속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1990년대 회고열풍에서 이러한 여성 주도 서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례로 <응답하라 1994>에서 대중문화 황금기를 재현하는 역할은 남주인공 ‘쓰레기(정우)’가 담당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같은 당대의 베스트셀러를 비롯해 <슬램덩크> <영챔프> 등의 만화와 <모래시계> <마지막 승부> 같은 히트 드라마까지, 그가 읽고 보는 모든 것들이 당시 대중문화 아이콘의 집합이었다. 방영 당시 ‘쓰레기의 책장’을 분석하는 기사들이 등장했을 정도다. 여주인공 성나정(고아라)이 전작 <응답하라 1997>의 여주인공에 이어 한 분야의 ‘빠순이’로 묘사되는 것과는 대조적인 풍경이다. 시대상을 강박적이리만치 대표적인 기호들로 구현하면서, 연대생인 성나정(고아라)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는 장면이라도 나올 법한데 거기엔 도통 관심이 없다.

 

‘영포티’의 결정적 모델을 제공한 2012년 드라마 <신사의 품격>은 더 노골적이다. 91학번으로 등장하는 네 주인공은 1990년대 문화의 풍요로운 자산 안에서 획득한 세련된 감각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41세인 현재에도 당당한 매력을 유지한다. 반면 1990년대 회상 신의 같은 세대 여성들은 미팅의 ‘폭탄녀’나 모두의 사랑을 받다가 급작스럽게 사라진 애증의 첫사랑으로만 묘사될 뿐이다. 2012년의 현재에는 그나마도 찾아볼 수 없다. ‘영포티’ 남성들의 옆에는 그들에게 순정을 바치는 젊은 여성들만 존재한다.

 

한때 같은 신인류로서 황금기를 누리던 여성들은 현재 어디로 사라졌을까. 1990년대 회고열풍의 남성 중심 서사들 속에서는 그들의 흔적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가령 <신사의 품격>에서 만인의 첫사랑이었던 김은희(박주미)는 20년 만에 나타나 옛 연인 도진(장동건)에게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고 혼자서 다 키운 아들 하나를 남겨두고 다시 사라진다. 심지어 도진의 젊은 새 연인에게 “이렇게 곱게 나이들 만큼 행복한 누군가의 와이프”가 됐으니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까지 해준다. 어린 나이에 홀로 아들을 낳아 키웠을 그녀의 오랜 고통이 작품 속에서 고작 몇 줄 대사로 처리되는 것은 ‘영포티’ 서사에서 소외된 여성들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성 소외 서사는 최근 방송된 KBS 드라마 <고백부부>에서도 나타난다. 40대를 앞둔 부부가 18년 전 대학 시절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말하자면 ‘응답하라 1999’다. 2017년 현재에서, 마진주(장나라)와 최반도(손호준)의 고통은 같은 무게로 그려진다. 전업주부 진주가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동안 영업직인 반도 역시 고객의 ‘갑질’에 지쳐간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 이 균형은 깨진다. 반도는 못 이룬 첫사랑을 찾으며 연애를 즐기는 데 반해 진주는 여전히 2017년에 두고 온 아들 생각에 밤마다 운다. 결말 역시 진주가 현재에는 사망하고 없는 엄마의 부재를 채우며 더 강한 엄마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반도가 과거의 투자로 재력을 얻어낸 성과에 비하면 진주의 여정은 결국 제자리로 다시 돌아온 것에 그친다. 이마저도, 유명한 페미니스트 투사였던 진주 친구 보름(한보름)이 불임 때문에 남자를 보내준 순정녀가 된 결말에 비하면 무난할 지경이다. 남성들이 ‘아재파탈’ ‘영포티’ 등으로 부지런히 호명되는 동안, 여성은 존재 증명조차 이토록 버겁다.

 

<김선영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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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김장들 준비하시는지 모르겠다. 배추농사는 나쁘지 않았는데 고추가 영 좋지 않다고 한다. 고추는 기르기 어려운 작물이다. 원래 원산지인 아메리카 대륙과 우리 기후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대충 답이 보인다. 고온 건조한 기후에 어울리는 작물이다. 한국은 비도 많고 탄저병 같은 치명적인 감염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올해 탄저가 고추를 놔두지 않았다. 옛날 김치에는 고추를 많이 안 쓰고 시원했다는 추억을 말하는 분들이 있다. 특히 서울과 경기, 충청, 강원도 김치가 그랬나 보다. 지방마다 고유한 맛은 본디 환경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그때는 농사기술도 부족하고 효과 좋은 농약도 없어서 고추 기르기가 어려웠으니 김치도 담박한 편이었을 거다. 유기농 하는 농민들이 과일만큼 어려운 게 고추라고도 하신다. 한국 고추는 세계에서 매운 편에 속하지 않는다. 달고 부드러운 맛이라고나 할까.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량되어 온 셈이다. 그래서 고춧가루 사용량도 많다. 만약 이탈리아나 멕시코, 동남아 고추처럼 매웠다면 지금처럼 많이 쓸 수 없다.

 

고추는 매운맛도 중요하지만, 일종의 살균작용을 노리고 음식에 넣는다. 고춧가루를 안 쓰는 백김치나 동치미에는 고추 삭힌 게 필수다. 고추의 힘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는 셈이다. 고추를 안 넣은 동치미는 발효과정에서 쉬이 물러진다. 짱짱하고 시원한 동치미 맛은 절반쯤은 고추의 힘이다.

 

 

1970년대 후반에 고추 파동이 났다. 아마 그해 비가 많아서 고추에 탄저가 크게 번졌을 것이다. 수확량이 절반도 안 됐다. 요즘이라면 기후조건과 품종이 비슷한 중국에서 수입해서 얼추 맞췄을 텐데, 당시는 중공(中共)이라고 부르는 적국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김장이 가지는 비중이 지금과는 달랐다. 김장을 해야 겨울 준비가 제대로 되는 것이었고, 김장 솜씨로 집안의 색깔을 표현했다. 배추 몇 포기를 했느냐 하는 것이 가계의 빈부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그러니, 시중에 고추가 없다니 폭동이라도 날 판이었다. 박정희 시절이었다. 안 그래도 뒤숭숭한 유신 독재 말기, 고춧가루 때문에 정권이 타격을 입어서야 되었겠는가. 결국 인도, 멕시코 등에서 고추를 수입했다. 그것도 양이 모자라 배급권을 나눠주었을 정도였다. 이게 사달이 났다. 맵고 쓰기만 했다. 김장을 했더니 먹을 수 없었다. 그 맛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김치가 시커멓고 맛도 써서 젓가락을 댈 수 없었다. 집집마다 버린 김장이 쓰레기통 옆에 대량으로 쌓였다. 그 해, 부자 김장이라는 말이 돌았다. 수입 배급 고추를 안 쓰고 국산 고추로만 한 김장을 뜻했다. 김장은 계급이었고 권력이었달까.

 

올해 김장이 슬슬 시작되었다. 고추 파동이 났어도 가격이 엄청나게 뛰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나마 돈 되는 고추를 힘겹게 지어도 농민들의 이익이 없다는 뜻이고, 한편으로 소비자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이상한 현상이다. 하기야 김장 작파했다고 난리가 날 시절도 아니다만은.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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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영화 <범죄도시>에서 경찰들이 조선족 범죄자들을 제압하는 장면. <범죄도시> 스틸 이미지


영화 <범죄도시>의 누적 관객이 650만명을 넘었다. 이런 기세라면 700만명도 훌쩍 넘지 않을까 싶다. 2017년 가을 추석, 성수기 영화로 개봉할 때만 해도 <범죄도시>의 흥행을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유는 몇 가지로 추려지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바로 기시감이다. 어떤 형사가 범죄조직을 소탕하는 이야기 자체가 한국 영화에서 너무 많이 다뤄지고, 너무 흔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의 이유를 더 보탠다면, 영화가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사실이다. <범죄도시>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조선족 조직폭력배를 악의 축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의 폭력행위가 심상치 않다. 도끼, 망치 등 가리지 않고 휘둘러댈 뿐만 아니라 신체 훼손의 정도도 무척 심하다.

 

한국 영화계에서 ‘청불 영화’, 그러니까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청불 영화’ 하면 언뜻 선정적인 장면들, 즉 야한 영화가 떠오르지만 실상 한국 개봉 영화 중 청불 영화는 성적 표현 수위 보다는 폭력성으로 규정되는 바가 크다. 그러니까 대개의 한국 청불 영화는 미성년자가 보면 위험할 정도로 매우 폭력적이라는 의미다. 짐작은 사실과 다르지 않다. <신세계> 이후 한국 청불 영화사상 가장 흥행이 잘 된 영화라는 <범죄도시>에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자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비중 있는 여성 캐릭터는 없다. 술과 도박처럼 범죄의 배경으로 러시아 여성, 한국 여성들이 등장한다. <범죄도시>에서는 그나마 마동석의 캐릭터를 부각하는 도우미로서 등장하는, 일종의 소도구에 가깝다.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극도로 잔인해진 한국 대중 영화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영화에서 범죄 세계의 잔혹한 묘사는 어느새 특별한 게 아닌 평범한 클리셰이자 주류 영화의 상식적 문법이 되어 버렸다. 회칼이 난무하고, 신체 주요 부위를 훼손하거나 아예 없애는 장면이 등장하기 일쑤며, 심지어 개를 살상용으로 사육하고 사람을 개 먹이로 주는 장면도 등장한다. 특정한 작품 하나가 아니라 여러 영화에서 일종의 관습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더 킹>의 맹견 살상 장면은 <미옥>에도 등장하고, <신세계>의 시신 유기 방식은 <내부자들>에서 조금 변주된 방식으로 활용된다. 가만 보자면, 범죄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죽을 사람과 곧 죽을 사람으로 구분될 수 있을 정도이다.

 

사실 범죄 영화는 그 사회의 엄혹함과 폭력성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경제의 성장과 함께 미국의 조직범죄 영화가 성장했듯이 어쩌면 만연한 범죄 영화는 우리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그 이면이 조직폭력배의 구조와 다르지 않게 그려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검사나 정치인이 등장하는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조직범죄 영화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특별시민> <더 킹> <검사외전>에 묘사된 공인들의 모습은 <부당거래>나 <짝패>에 그려진 조직폭력배 출신 사업가들 모습과 구별하기 힘들다.

 

결국 한국에서 ‘되는 영화’는 모두 범죄 영화의 꼴을 하고 있다. 공무원을 그리든, 지하경제를 그리든, 인생의 허무와 모성애를 그리든 이 모든 주제들이 다 되는 영화, 범죄라는 스펙트럼을 거쳐 재조명되고, 해석되고, 그려진다. 하지만 이러한 쏠림 현상과 함께 관객들의 피로도가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최근 정치판을 조직범죄로 그리거나 조직범죄 잔혹성을 폭력적으로 재현하는 영화들의 흥행 성적이 낮아지기도 했다. 잔인한 조직범죄 영화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은 아닐까 기대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마동석이라는 배우, 캐릭터의 매력에 기댄 <범죄도시>의 성공은 결국 잔인하고, 폭력적인 영화는 여전히 잘된다는 확신으로 증폭되지 않을까 싶다.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의 의도는 다를 수 있겠지만 결국 투자자들은 일종의 선후관계를 인과관계로 해석해, 폭력성을 되는 영화의 주요 성분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잘된 영화가 폭력적이었다가 아니라 폭력적인 영화여야 잘된다고 오해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의미다.

 

자르고, 찌르고, 부수고, 훼손하는 이 폭력적 장면들이 범죄의 박진감을 높이는 필연적 장치일까? 역설적이게도 한국 영화의 등급 기준을 보자면 노출에는 무척이나 엄격하다. 하지만 폭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한 부분이 없지 않다. 무릇 선정성이란 비단 성적 욕망의 자극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이야말로 사람의 감정을 흔들지 않던가? 폭력에 대한 감도를 낮추고, 폭력에 익숙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외설은 아닐지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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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잠에 헤매고 있을 시간에 매운 냄새에 깰 때가 있었다. 아직 일고여덟 살 때의 기억이다. 찧은 마늘과 생강 향이 코를 찔렀다. 쿵쿵 하고 절구에 찧어내니 향이 집안에 가득 찼다. 아, 김장하는 날이구나. 마당에서는 멸치젓 달이는 냄새가 났다. 그다지 향기롭지 않았던. 우리 집은 경상도와 서울식을 절충한 김장이라 새우젓은 조금만 넣으셨던 것 같다.

 

 

김장철 전에는 늘 새우젓 장수가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새우젓이요, 새우젓” 하고 외쳤다. 지면이라 그 소리를 들려드릴 수 없는 게 유감이다. 마포 새우젓 장수는 특이하게도 콧소리를 심하게 내는 발음으로 호객했다. 멀리서도 콧소리가 들리면 ‘아하, 새우젓 장수구나’ 하고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새우젓 장수는 흥정을 하고, 리어카에 실린 새우젓을 듬뿍 퍼서 줬다. 그때는 김장도 손이 컸다. 겨울에 달리 먹을 게 없었던지라 김장은 한 집 살림의 팔할이었다. 어지간한 집은 팔십포기, 백포기가 흔했고 어떤 집은 이백포기도 했다.

 

올해 아내는 망설이다가 결국 겨우 스무포기를 하기로 결정하면서 “너무 많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 한 집에 식구가 예닐곱씩은 되던 그 당시 김장은 정말 대단했다. 동네마다 김장 시장이 섰다. 산처럼 배추와 무가 쌓였다. 아득하게 높은 배추 ‘산’ 정상에 일꾼이 서 있어서 아래로 던져댔다. 그걸 리어카에 싣고 집집마다 배달을 했던 것이다. 시장의 고춧가루 가게도 마른 고추를 높게 쌓아놓고 팔았다. 고추를 고르면 즉석에서 빻아줬다. 그 근처를 지날 때면 매운 향에 연신 기침을 해야 했다.

 

김장 날은 품앗이가 기본이었다. 동네 아낙들이 우물가나 펌프 수돗가에 모여들었다. 밤새 절인 배추를 찬물에 씻고, 양념을 만들었다. 그 마법 같던 엄마들의 손놀림. 절인 배춧잎 사이사이에 번개처럼 쓱쓱 양념을 비벼 넣으며 무슨 얘기에 그리도 웃음보가 터지시던지. 그날 저녁에는 하얀 쌀밥을 짓고, 절인 배추에 매운 양념을 듬뿍 넣어 먹었다. 뜨거운 밥과 양념이 매워 혀가 얼얼하던 기억. 돼지고기를 삶아서 같이 냈던 건 더 나중의 일이었다. 고기가 흔해지고 난 뒤였으리라. 생굴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굴이 꽤 비쌌을 테니까.

 

요즘은 배추 절이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아파트에 김장처럼 큰일을 벌일 공간이 있겠나. 아예 김장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 우리 집은 식구가 적은데도 김장을 잇고 있다. 절인 배추를 사서 하는 일이다. 매년 좋은 절인 배추 구하기도 쉽지 않다. 배추가 질기거나 간이 맞지 않아서 김장을 망친 경우도 많다. 직접 절일 수 없으니 감수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올해는 멀리 지리산에서 기른 배추를 절여 받기로 했다. 일교차가 커서 배추가 달고 씩씩하다고 했다. 김장이 시시해졌지만, 김치냉장고가 보급되어 한 해 내내 보관해두고 먹는 셈이라 더 없이 중요한 행사일 수도 있겠다. 아직은 사 먹을 때가 아니야 하고 어떻게든 김장을 하고 있는 여러분들 모두 힘내시라. 하는 김에 조금 더 해서 다른 이들과 나누려는 집들은 두 배로 힘내시라. 올해 김장은 모두 최고로 맛있기를.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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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온라인 취업포털에서 5포 세대들이 성별에 따라 어떤 순위로 포기하는가를 조사한 적 있다. 남자들은 결혼을 가장 많이 포기했고, 여자들은 출산을 가장 많이 포기했다. 남자 2위는 연애, 여자 2위는 결혼. 이후 내 집 마련, 연애, 인간관계 등이 이어졌는데, 가만 보면 다섯 가지 중 무려 네 가지가 ‘사랑’과 관련이 있다. 연애가 가장 기본적이라면 사실 그 연애의 사회적 결실 중 하나가 결혼이고, 출산 역시 필수는 아니지만 결혼의 결실 중 하나이니 말이다. 내 집 마련이 결혼의 조건 중 하나라는 것을 돌이켜 보자면, 결국 5포 세대가 포기한 것은 바로 로맨스라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N포 세대라니, 이제 연애는 무리이고 결혼은 사치인 시대가 되어 버린 셈이다.

 

영화 <소공녀>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이솜(오른쪽)과 안재홍, 영화 <소공녀> 포스터.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비전 부문에는 모두 열 한 개의 한국 영화가 상영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중 많은 작품들이 20대 젊은이들의 거주 문제, ‘집’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중 <소공녀>라는 작품에는 웃기고도 슬픈 장면 하나가 등장하는데, 그래도 방 한 칸이라도 가지고 살던 여자 주인공이 애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사랑을 나눈 지 너무 오래되었음을 깨닫는다. 허겁지겁 입고 있던 옷을 벗는 연인들, 그런데, 방 안인 것 치고 너무 많은 옷을 껴입고 있다. 대략 열 겹에 가까운 옷을 하나 둘씩 벗다 보니 둘의 몸에는 오소소 닭살이 돋고, 덜덜 떠는 지경이 되고 만다. 그들은 다시 한 두 겹씩 옷을 껴입으며, “우리 그냥 봄 되면 하자”라고 사랑을 미룬다. 방이 있다 해도, 난방할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셈이다. 결국, 주인공은 그나마의 방도 포기하고 만다. 그녀는 가방 하나에 삶을 정리하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기로 결심한다. 그래도 젊으니까 말이다. <소공녀>의 영어 제목은 <Microhabitat>이다. 아주 작은, 최소한의 방, 그 방도 허락되지 않은 젊음의 형편을 좀 더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같은 부문의 영화 <이월(February)>의 형편은 좀 더 가혹하다. 밀린 월세에 보증금까지 모두 써 버린 민경은 공사장 주변의 컨테이너 박스에서 겨우 삶을 연명해 간다. 이월, 남은 추위가 뼛속까지 시려 오는 그 겨울에 민경은 다만 먹고, 잘 곳을 찾기 위해 매춘도 마다하지 않는다. 매춘과 로맨스 사이 그 얼마나 먼 것이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경은 그 간극에서라도 잠깐의 여유와 쉼을 얻는다. 그나마라는 부사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최근 한국에서 가장 보기 힘든 장르가 바로 로맨스이다. 로맨스 영화의 황금기가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초기였음을 생각해보자면 경제적 호황과 로맨스의 부흥이 전혀 무관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프리티 우먼>과 같은 조금은 비현실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부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같은 일상적 로맨스까지, <결혼이야기>에서 시작된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 열풍이 <광식이 동생 광태>와 같은 다층적 로맨스로 이어지기까지 만남과 연애, 사랑과 결혼은 영화의 매우 중요한 소재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최근 영화의 제작 환경으로 따져보자면 <광식이 동생 광태>와 같은 영화들이 과연 제작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관객들은 이런 소소한 마음의 풍경이나 연애의 뒷모습보다는 <신세계>나 <범죄도시>처럼 잔혹한 세상에서 더 동질감을 느끼는 듯하다. 연애가 사치인 세상, 영화 속 연애나 결혼을 보고 대리만족할 수준을 넘어서 삶이 더 팍팍해졌기 때문이다. 잔혹한 칼부림 영화에 싫증을 내면서도 사지가 썰리고, 칼이 난자하는 폭력적인 영화에 꾸준히 관객이 드는 것은, 차라리 비체험적 공간을 구매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실제 삶보다 훨씬 더 잔혹한 그러나 결국 해결의 카타르시스가 달콤하게 보상되는, 그런 세계를 사고 싶은 것은 아닐까?

 

로맨스 영화의 품귀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로맨틱 코미디나 로맨스 영화를 강의할 때면 최근 영화들의 예시가 빈곤해짐을 느낀다. 워킹 타이틀사가 시도했던 조금 다른 로맨스 영화의 계보들도 2010년 이후엔 주춤하다. 어쩌면 <라라랜드>처럼 결국엔 새드 앤딩이 되는 사랑이야기나 <건축학개론>처럼 마침내 마음에 묻어 둬야 하는 첫사랑 이야기가 지금, 2010년대의 청춘에게는 훨씬 더 사실적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한 상황에 로맨스라니.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이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고 썼다. 바람이 새는 풍선처럼 그렇게 허약한 우리에게 사랑은 격려이고, 무시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연애와 사랑만큼 ‘나’라는 사람의 가치 있음과 필요함을 주관적으로 확신으로 굳게 하는 체험이 또 있을까? 나를 사랑하고 믿어주는 단 한 사람만으로, 얼마나 우리는 큰 격려와 힘을 얻게 되던가? 결국 우리가 포기하고 사는 것은 이런 사랑과 그로 인한 따스한 체온들이다. 혐오와 분노라는 단어가 더 익숙해진 데에는 사랑의 부재와 결핍의 영향이 크다. 사랑 없이 스스로의 가치를 확신하기엔 우린 너무 허약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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