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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내 인생 마지막 편지'에 해당되는 글 52건

  1. 2012.09.09 (52) 탁현민 - 재수 좋은 날… 신영복 선생님께
  2. 2012.08.28 [내 인생 마지막 편지](51) 전상국 - 천국에 계신 유재용 형께
  3. 2012.08.27 [내 인생 마지막 편지](50) 전경린 - 내 상상 속의 K씨께
  4. 2012.08.23 [내 인생 마지막 편지](49) 문정희 - 나의 잠옷 친구에게
  5. 2012.08.22 [내 인생 마지막 편지](48) 윤효 - 지구의 주인, 나무에게
  6. 2012.08.20 [내 인생 마지막 편지](47) 이병률 - 나의 시에게, 허수경 시인에게
  7. 2012.08.16 [내 인생 마지막 편지](46) 김형경 - 상원사 전나무숲님께
  8. 2012.08.12 [내 인생 마지막 편지](45) 김홍신 - 하늘이 그대를 탐낸 것이라오
  9. 2012.08.08 [내 인생 마지막 편지](44) 김선재 - 처음이라는 마지막에게
  10. 2012.08.07 [내 인생 마지막 편지](43) 김주영 - 티베트 라마가 돼 있을 나에게
  11. 2012.08.05 [내 인생 마지막 편지](42) 김성중 - 막걸리 리어카를 끄는 아저씨
  12. 2012.08.02 [내 인생 마지막 편지](41-1) 마광수 - 그리운 H에게
  13. 2012.08.02 [내 인생 마지막 편지](41) 마광수 - 너를 사랑해, 미치도록
  14. 2012.08.01 [내 인생 마지막 편지](40) 김미화 - 웃으며 보내다오
  15. 2012.07.30 [내 인생 마지막 편지](39) 신춘수 - 나의 벗 라만차의 기사에게
  16. 2012.07.29 [내 인생 마지막 편지](38) 손숙 - 나의 대통령님께!
  17. 2012.07.26 [내 인생 마지막 편지](37) 서하진 - J에게
  18. 2012.07.25 [내 인생 마지막 편지](36) 백가흠 - ‘조 대리의 트렁크’ 조 대리
  19. 2012.07.24 [내 인생 마지막 편지](35) 유정아 - 내가 살던 동네 화곡동
  20. 2012.07.23 [내 인생 마지막 편지](34) 이문재 - 김자, 정자, 임자, 선생님

탁현민 | 공연연출가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날이 떠오릅니다.


공인 문제아였던 제가, 담배를 피우다 하루에 세 번 걸린 날이었었죠. 저는 교무실 한쪽에서 모눈종이에 반성문을 쓰며 머리를 쥐어박히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아! 세상엔 이렇게 재수 없는 날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었습니다. 


 

신영복 교수와 문재인 이사장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출처: 경향DB)



그날, 오가는 선생님들의 눈총을 받으며 그렇게 있다가 문득 국어선생님 책상에 꽂혀 있는 한 권의 책에 눈길이 닿았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바로 선생님의 책이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을 보며 감옥이나 학교나 비슷하겠거니 하는 생각과 그 안에서의 사색이라면 내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저는 그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생각해보니, 그날은 제 생에 가장 재수 좋은 날이었습니다.


책에는 자신을 가둔 곳에 대한 분노나 갇혀 있는 마음의 불편함이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책에는 감옥이라는 그 살벌한 공간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참선수도의 도량으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선생님은 오히려 감옥 밖에 사람들보다 자유롭게 혹은 더 넓게 세상을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모습은 학교가 감옥이고 그 안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던 18살짜리 문제아에게 무척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몸의 구속이 마음의 구속과 무관하다는 사실. 나를 가두는 것은 학교나 감옥이 아니라 스스로를 가두는 ‘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감옥 밖에 사람들이 때로는 더욱 갇혀 살고 있다는 말씀에서 그제야 내 삶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과의 인연이 다만 책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을 직접 뵙겠다는 열망으로 저는 선생님이 교수로 재직하고 계시는 성공회대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선생님과의 인연은 제가 사회에 나와서도 계속 이어졌다는 사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를 부러워하는지 모릅니다.


졸업을 하고 무대를 연출하고 행사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하면서 때로는 어설픈, 때로는 부담스러운 자리에도 제자의 부탁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생님은 나와주셨습니다. 다만 나와주신 것뿐 아니라 잊고 있었던 것들을 알려주시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선생님 앞에서는 많이 듣고 적게 깨우치는 미련한 학생이 됩니다.


세월이 흘러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 즈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스승은 당대에는 없어요. 옛사람의 가치와 정서가 모범이 된다는 것이 옳은 것만은 아니에요. 부단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무한한 상상력과 창조적인 가능성을 열기 위해서는 (스승은) 그저 참고할 만할 뿐이에요.


선생님의 말씀은, 사표가 되기를 부담스러워 하시는 마음, 어쩌면 가히 멘토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한 이 불안의 시대에, 결국 그 불안을 이겨내는 방법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선생님.


제 삶에 마지막 편지를 꼭 선생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무엇인가 깨닫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게 된 것은 저의 노력과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것이겠지만, 그 안에 뭔가 쓸 만한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있었다면, 그것은 선생님께 배웠거나, 혹은 배우려 노력했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끊임없이 공부해요, 공부란 생명이 존재하는 형식이에요.”


삶 속에서 무엇이든 깨달으려 노력하는 것. 그래야만 새로운 세계를 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어쩌면 그 순간이 제 삶의 새로운 시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 인생의 마지막 편지를 선생님께 쓸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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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전상국 | 소설가


 

2522. 형이 없는 형네 집으로 전화를 겁니다. 돌아가신 뒤 처음 듣는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형이 그토록 애틋이 사랑하던 정현과 국현의 소식을 듣습니다. 결혼 전부터 선교활동을 함께한 국현이 부부가 미국에서 자신들의 꿈을 펼치는 가운데 며느님이 둘째 애기를 가졌다는군요. 정현이 역시 어렵게 얻은 딸을 키우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정현이 국현이 두 남매를 두신 것처럼 형은 <꼬리달린 사람> <성하> <관계> <누님의 초상> <화신제> <아버지의 강> <한여름 밤의 꿈> 등 일곱 권의 중·단편집과 <성역> <비바람 속으로 떠나가다> <야성의 숲> <성자여 어디 계십니까> <그들만이 꿈꾸는 세상> <사로잡힌 영혼> 등 여섯 권의 장편소설을 이 세상에 남기셨습니다.


 



형은 이 시대의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 큰 작가였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 능청과 시치미가 작품의 깊이, 그 철학의 형상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짐으로써 그 이야기를 넘어서는 어떤 높은 경지를 독자에게 안겨주는, 형 특유의 맛깔스러운 작품을 쓰셨지요.


형은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작가로서의 긍지와 위엄을 끝까지 흐트러뜨리지 않고 일관되게 자기 길을 걸어온 우리 시대의 존경 받아 마땅한 전업 작가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제가 형을 처음 만난 것은 1974년 가을이었습니다. 등단하여 만 10년 동안 단 한 편의 글도 쓰지 못하다가 새로이 글쓰기를 시작해 처음으로 쓴 ‘전야’라는 작품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발표하고 난 뒤였습니다. 그때 형은 제가 사는 상봉동과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둔 면목동에서 코흘리개 아이들 상대의 문방구를 하고 있었고 그때부터 형과 저는 승패를 초월한 바둑 두기를 즐기는 가운데 깊은 우의를 쌓기 시작했지요.


형과 저는 문학동네의 각종 모임이며 그렇고 그런 자리의 그 허다한 술자리까지 남들 표현대로, 바늘과 실처럼 늘 함께 붙어 다녔지요.


사람들은 그 어떤 위엄이나 허세를 보이지 않는 형의 그 진솔함을 좋아했지요. 형은 상대가 누구이든 만나기만 하면 그 특유의 어눌한 말씨로 남의 얘기가 아니라 자신의 얘기를 누구보다 적나라하게 객관화할 줄 아는, 진정 자신을 낮출 줄 아는 큰 그릇이었습니다.


형의 그 우스갯소리를 딱 한 번만이라도 다시 듣고 싶습니다. 필요 이상 엄숙한 장소에서 느닷없이 던져지는 형의 농담 한마디가 그 분위기를 바꿔놓곤 했지요. 지금도 저는 그때 형한테 들은 이른바, 와이담 몇 개를 형이 늘 그러했듯 그 이야기의 출전까지 밝혀가며 써먹곤 하지만 결코 형처럼 사람들을 웃기지는 못합니다.


1980년대 초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형과 제가 경향신문에서 장편소설 연재를 제의 받은 뒤 두 사람이 앞뒤로 이어 소설을 연재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 생활이 어려웠던 형으로서는 고정적으로 나오는 원고료가 큰 도움이 된다면서, 대중성이 별로 없는 작품을 연재해준 신문사가 참 고맙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지요.


그때의 그 신문에서 <내 인생 마지막 편지>란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형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편지의 대상을 천국에 계신 형께 전할 소식 하나도 생각났습니다.


형이 2008년 김유정탄생100주년 때 마지막 다녀가신 춘천 실레마을 소식입니다. 경춘선 폐철도를 이용한 강촌과 김유정역을 오가는 레일바이크가 오늘(8월10) 개통되면서 김유정역 광장에 북스테이션 조형물이 세워졌습니다. 책꽂이 형태의 대형 조형물은 김유정 등 29명의 강원도 저명 작가들의 소설책이 세워져 있는데 바로 그곳에 형의 소설 <관계> <비바람 속으로 떠나가다> <사로잡힌 영혼> 등 세 권의 소설책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숱한 절망과 싸울 때 무너지지 않도록 버텨준 것이 바로 소설이었다’는 형의 말씀처럼 형이 쓴 소설이 지금 당신의 고향 강원도 산골 북스테이션 구조물 한가운데 단연 돋보인다는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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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 소설가


 

K씨, 당신이 나에게 첫 편지를 쓴 것은 30여년 전이었어요. 


그보다 먼저, 내게 음악을 보냈고요.


그것은 당신이 직접 만든 일곱 개의 시디였어요. 그 울림을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풀려나오는 일곱 타래의 음악, 흘러내리는 일곱 강물의 음악, 눈과 비와 안개와 꽃잎이 쏟아지는 일곱 계절의 음악, 반짝이는 광휘 속에서 운행하는 일곱 행성의 음악…. 


 



그때 나는 음악 없는 기간을 지나고 있었어요. 가구를 모두 치운 것 같은 빈방에서 오직 문장들을 생각하고 문장을 쓰고 문장을 읽었지요. 바스라질듯 메마르고 팍팍하고 지독히 고요한 침묵 속에서 잔인하게 나를 정화하듯이요. 


별 기대도 없이 첫 시디를 오디오에 걸고 소파에 앉았을 때, 오랫동안 폐쇄시킨 방문 앞으로 음악이 범람하듯 밀어닥쳤어요. 은어 떼가 돌아올 때 강물이 그런 느낌일까요. 떼 지어 회귀하는 것들의 냄새가 났어요. 포기하고 체념했던 것들이 꿈틀거리며 깨어나는 잔인한 4월의 후각, 그건 생명의 냄새지요. 그 순간 이후로 오늘까지 나는 매일매일 음악 속에서 숨을 쉬어왔어요. 


그 전에는 어떻게 그런 적막 속에서 살았을까요. 뜨거운 자갈길에 바퀴가 푹푹 빠지는 쇠수레를 홀로 끌고 온 사람처럼, 어떻게 자신에게 그렇게도 가혹했을까요. 


그 뒤 당신의 편지가 왔을 때 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답장을 썼어요. 우린 아직 만난 적이 없고 나는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어요. 나는 음악을 담보로 당신을 신뢰하기로 했지요. 한동안 홀린 사람처럼 매일 편지를 기다리고 매일 편지를 썼어요.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어요. 그것은 타자와의 교감을 통해서 나를 건지는 일이었으니까요. 기나긴 표류를 끝내고 내가 천천히 나의 방안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폐쇄된 방의 열쇠를 오래전에 강물에 던졌는데, 어떻게 내 손에 다시 돌아왔을까요. 나는 그게 내내 신비로웠어요.


30년이란, 실은 말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지요.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그 세월 동안 당신은 내게 음악 시디를 만들어서 주었고, 우린 아직도 편지를 주고받고 있어요. 몇 번인가 위기도 있었지요. 그때마다 당신은 양보했어요. 무어라고도 규정할 수 없는 관계를 끝까지 규정하지 않은 채 우리는 새로운 단어들을 찾으며 여기까지 왔어요. 당신은, 사랑이 아니어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무수한 단어가 있다고 말했지요. 단어의 가능성이 무한히 있는 한 관계의 가능성도 무한하다고요. 사랑은 우리 사이에서 흔들리는 무수한 나뭇잎 중 한 장일 뿐이지요.


당신도 알다시피 요즘 나는 새벽마다 계곡을 오르는데, 오늘은 계곡 중간에 있는 절 대웅전에 들어갔어요. 부처님께 절을 하고 아침의 어둑한 그늘에 앉아서 시간을 좀 보냈지요. 당신 생각이 났어요. 봉인이라는 단어와 함께요. 우리 사이의 일은 순간순간 모두 봉인될 거라고 당신은 말했지요. 


당신은 지금 내 위층에 살고 있어요. 우리는 당신이 사회에서 완전히 은퇴한 10년 전부터 한집에서 생활해 왔지요. 당신은 내 이웃이고 운전수이고 정원사이고 나보다 부엌일을 더 좋아하는 요리사이고 간호사이고 때로는 내가 보살펴야 할 머리카락이 새하얀 아이지요. 무엇보다 당신은 나의 음악이에요. 오늘 내가 계곡에서 돌아왔을 때 당신은 키스 재럿이 말년에 연주한 즉흥 연주곡을 틀어놓고 낡은 앞치마를 두르고 내 주방에서 아침밥을 차리고 있었어요. 자비의 음률 속으로 연주자의 신음소리가 어렴풋이 섞여들고 창가에는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나팔꽃이 보랏빛 눈을 열고 안을 엿보고 있더군요. 그때 충동적으로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이렇게 편지에 쓰고 싶어서요. 내 편지를 당신이 자랑스러워하고 몇 번이나 되읽는다는 것을 알거든요. 


“K씨, 계획한 적은 없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해주어서 감사해요. 우리가 어떤 사이든 상관없이 오직 단둘만이 도달한 이 절대 지점을 나는 믿어요. 영원히 봉인한다 해도 사람은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거죠. 누구하고든, 어떤 관계로든, 어떤 단어로든.”


2042년 칠월 마지막 날, J가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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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 시인



햇살 속에 벌써 가을이 들어있네요. 비애가 문득 스쳐갑니다. 아니, 비애가 아니라 그리움입니다. 


원숙씨네 인디애나 집 넓은 마당에는 지금 어떤 꽃들이 피어있는지요. 햇빛 알레르기가 심한 내가 빨간 우산을 쓰고 토마스씨가 모는 지붕 없는 달구지 차에 실려 포도농장으로 와인을 사러 갔던 저녁이 떠오릅니다. 그 차 이름이 ‘모든 지형에서 가는 차(all terrane vehicle)’라고 했지요. 정원 한쪽에 서있던 작고 투박한 차가 골짜기이든 바위 절벽이든 막힘없이 다니는 차라니요. 마치 원숙씨가 세계 구석구석을 막힘없이 다니듯이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지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유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함께 만든 재미있는 사건과 경험들이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오늘 이 편지는 시칠리아의 추억으로 갑니다. 


 

베네치아의 대운하에 이 도시를 상징하는 명물인 곤돌라가 모여 있다. (출처: 경향DB)



지난 가을 내가 베네치아에 머물 때 뉴욕 슈퍼마켓에서 돌산 갓김치를 사들고 뛰어온 원숙씨의 우정을 누가 감히 흉내나 낼 수 있겠어요. 내가 북부 뉴욕 작가촌에 있을 땐 죄수복 빛깔의 잠옷을 보내주더니 이번에는 특별 면회를 와준 거지요. 글 감옥에서 글 많이 쓰라는 격려, 정말 감동입니다. 


누군가는 경제적인 구애가 없기 때문일 거라고 하겠지만 사실 그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원숙씨만이 가능한 어떤 특별함입니다. 그 축복을 받는 사람이 나이고요. 


탈영병처럼 베네치아를 빠져 나와 원숙씨를 따라 시칠리아로 갔었지요. 팔레르모 공항에 내려 겁도 없이 마피아로 유명한 그 섬을 우리는 렌터카로 휘젓고 다녔습니다. 드디어 아글리젠토 빌라 아테나에 도착해서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큰 환호를 토했지요. 세상에서 본 풍경 중에 단연 최고의 풍경이었습니다. 야자수 숲 건너 언덕에 환영처럼 떠있는 고대 그리스의 신전은 정말이지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마침 달이 떠오르는 시간, 올리브나무 사이에 누워 밤하늘과 신전을 한없이 바라보았지요. 세상을 이렇게도 살 수 있는 것을…. 바쁘게 쫓기며 분노하고 상처입고 살았던 시간들이 덧없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어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원숙씨가 살며시 내 머리에 꽂아 놓은 하얀 레몬꽃의 향기…. 그것을 꽂은 채로 정원을 걸어 식당으로 갔네요. 식당 바닥 한쪽이 유리로 덮여 있었는데 고대 우물터여서 그렇게 보존하고 있다고요. 기원전의 항아리와 파편들이 몸을 반쯤 지상에 드러낸 채 수천년을 증언하고 있었지요. 시칠리아에 살았다는 여성시인 사포가 이 항아리로 물을 길렀을 것 같아 문득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런데 식당 창가 자리에는 보석으로 치장한 노부부가 사자만큼 큰 개를 데리고 와서 식사를 하고 있었지요. 은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개에게 떠먹이는 그 부인을 속으로 마구 미워하고 있는데 원숙씨가 거침없이 지배인을 불렀어요. 


“저분들이 내일 아침에는 몇 시에 아침 식사를 할 것인지 물어봐 주실래요?” 순간 머뭇거리는 지배인에게 원숙씨는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그 시간을 피해 아침을 먹고 싶어요.”


소피아 로렌의 딸같이 생긴 젊은 처녀가 일하는 바닷가 식당, 디오니소스의 귀가 있는 시라쿠사에서 화가인 김원숙씨가 특별히 발을 멈춘 곳은 부랑자 같은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이 있는 성당이었습니다. 나는 유리가 없는 이상한 안경 하나를 골동품가게에서 사서 쓰고 골목을 돌아다녔고요. 


다시 베네치아 공항에서 원숙씨는 인디애나로 가고 나는 리도로 돌아갈 때 원숙씨가 내 가방에 넣어준 잠옷은 물론 지금도 글 쓸 때 입곤 해요. 원숙씨 말처럼 시인의 글 감옥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죄수복이니까요. 


써놓고 보니 화려하기만한 편지네요. 하지만 원숙씨가 길러낸 두 입양 자녀들, 고독과 상처와 슬픔의 이야기는 다음에 다음에 하기로 해요.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몸으로 보여준 보석 같은 친구 김원숙씨, 마지막이 아니라 마지막처럼 이런 편지를 우리 몇 번이고 쓰고 또 쓰고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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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 | 시인



이른 아침부터 붉은 울음을 가쁘게 토해내고 있는 저 매미들의 속내는 무엇일까 헤아리며 네게 이 편지를 쓴다. 여러 해 동안의 땅밑 세월을 견디고 얻은 이 지상에서의 시간이 겨우 한 달뿐이라는데, 그래서 저리 울어대는 것일까? 아니면, 땅밑이 훨씬 아늑하고 평화로웠다고 사무치게 그리며 울어대는 것일까? 


나무야, 며칠 전에 이 편지의 청탁을 받았어. 인생의 마지막 순간, 그 순간에 떠오르는 가장 그리운 이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달라는 거야. 좋다 했지. 그런데 문제는 거기 붙은 단서였어. 수신인에서 가족은 제외해 달라는 거야.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 사람을 떠올리되 살붙이는 빼라니, 피붙이는 배제하라니. 세상에 이리 가혹한 청탁이 또 있을까? 





나무야, 그렇다면 누구일까, 누구여야 할까? 내게 그 사람은 바로 너였어. 사실은 이 물음을 화두 삼아 며칠을 서성였어. 이 사람 저 사람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더군. 내 아무리 누추한 생이었지만, 선연선과(善緣善果)의 고마운 인연들이 어찌 한둘뿐이었겠어. 먼저 나를 키워준 어릴 적 고향의 벗들과 여러 은사님이 떠올랐지. 그리고 내 생업의 현장에서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따라준 어린 벗들, 들꽃모임 ‘화사들’과 나무모임 ‘생명의숲’과 문단의 여러 인연들이 떠올랐어. 그 한 사람 한 사람과 나누었던 향그러운 눈빛을 어찌 내가 잊을 수 있겠어. 


나무야, 그런데 왜 너를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불러 세웠느냐고? 알면서도 너는 짐짓 다시 묻는구나. 그래, 나무야, 바로 너였어. 내가 가장 오랫동안 우러르며 따랐던,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기대고 있는 존재가 바로 너니 그럴 수밖에. 오죽하면 내가 첫 아이의 이름자에 ‘나무 수(樹)’를 넣었겠어. 그리고 우리 네 식구 인터넷 아이디의 돌림자로 ‘tree’를 쓰겠어. 


나무야, 사실 너는 나만의 주인이 아니라 이 초록별 지구의 주인이야. 네가 지구의 주인이라는 근거를 나는 여럿 가지고 있어. 이 지구에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도록 일궈낸 주역이 바로 너였잖아. 먼 옛날, 그러니까 태초에 네가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와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너의 날숨으로 지구의 공기를 채워주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생태계가 꾸려졌겠어. 또 이 지구가 ‘초록별’로 불리는 것도 누구 때문이겠어. 요일 이름에도 다 나와 있어. 네가 지구의 주인이라고. 일요일은 해, 월요일은 달, 화요일은 불, 수요일은 물, 목요일은 나무, 금요일은 쇠, 토요일은 흙이잖아. 이 일곱 가지 가운데 생명을 지닌 존재는 너뿐이야. 바로 너를 지구 생명체의 대표로 내세우고 있는 거지. 요일 이름의 유래가 본래 이런 것이 아니라고 남들은 우기겠지만 나는 이렇게 믿고 있어. 


나무야, 그러고 보니 내가 시인의 꿈을 처음 마음에 새긴 것도 너 때문이었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나. 충남 논산시 부적면 부황리 164번지, 여기가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잖아. 초등학교를 마치고 읍내 중학교로 기차통학을 할 때, 역에서 내려 신작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야 했지. 그 길 따라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고. 중학교 2학년 가을 어느 해질녘이었지. 그날따라 그 미루나무의 행렬을 내내 따라 걷고 싶었어. 하염없이 걷고 걸어서 아스라이 먼 그 어떤 곳에 닿고 싶었어. 그리곤 불현듯 나는 장차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어. 일순에, 밑도 끝도 없이 불쑥 솟아나온 생각이었지만, 내 생의 닻이요 덫인 시가 철커덕 내려지는 순간이었어. 그 순간부터 나는 너와 함께하게 되었던 거야.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너의 이름을 뜨겁게 부를 수밖에. 


나무야, 그런데 이를 어쩌지? 줄곧 너를 우러르며 살았으면서도 정작은 너처럼 살지 못했어. 자연스럽게, 보다 더 자연스럽게 살았어야 했는데…. 


나무야, 그동안 나의 들숨이 너의 날숨이었고, 너의 들숨이 나의 날숨이었음을 기억하자구나. 너와 나, 우리는 달디단 숨결을 서로 나눠 마셔온 사이였음을 말이야. 그리고 내가 너의 품에 안겨 저 매미처럼 목 놓아 우는 날, 이 남루를 보듬어다오. 


나무야,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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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 시인



나는 지금 막 시에게 편지를 쓰려던 참이었습니다. 시는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마음 한쪽 편이 가득 채워지는 건 먼 곳에 있는 한 시인의 존재 덕분입니다. 이 편지는 그리하여 독일에 있는 당신에게 도착할 것입니다. 나는 나의 시에게 당부할 것이 있었고, 야단칠 것이 있어서 같이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 다음 같이, 다시, 태어나자는 편지를 쓸 참이었습니다.


선배 생각이 달려들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시를 생각하면 그리 되었습니다. 불편하게 당신을 시로 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가장 많은 시 이야기를 물어봐준 사람이 당신이고, 내 시를 고백한 사람이 당신뿐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여 나의 모든 안부는 당신의 안부이기도 하겠습니다. 



시인 겸 작가 이병률 (출처: 경향DB)



선배는 긴 집 공사를 다 마쳤는지요. 나 역시도 공사 중입니다. 불안을 공사 중이라고 해야 할까요. 시인은 시를 쓰지 않아도 영원히 시인이라는 말을 어느 좋아하는 선배 시인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데 언젠가부터 그 말이 제일 불편한 말이 되었습니다. 시인에게 그 말처럼 ‘없어 보이는’ 말은, 빈곤해 보이는 말은 없기 때문입니다. 시를 써도 시인이 될 수 없는 세상에 사는 것만 같아 나의 그 불안은 여전합니다. 나의 이 공사에도 참여하시지요. 


우리는 사람으로 만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시로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으로 만났다고 생각하기로 합니다. 이 말에 선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릴 거라 생각하니 저의 생각이 더 맞을 것도 같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너무도 어두운 길 위에서 만난 것입니다. 게다가 멀리서 도착하는 바닷바람에 추웠고 서로의 체온 따위는 아무 쓸모없는 그런 겨울 길 위에서였습니다. 잔가지가 잔바람에 몇 번 출렁하던 그 밤. 나에게 시를 버리고 멀리까지 가라는 말. 그리고 사력을 다해 다시 시에게 돌아오라는 말. 그로부터 그 말은 지금까지 내 동맥을 따라 흐릅니다. 겨울이면 얼어 붙었다 봄이 되면 흐르고 여름이 되어 꽃을 피우고 가을에 익습니다. 나에게 힘이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드랬습니다. 나를, 시인으로서 증명할 증거는 바로 그 말에 있었습니다. 


선배는 요즘 무슨 힘으로 지내고 있습니까. 어떤 불티가 몸에 붙었습니까. 


나는 최근 우연히 마주친 미술을 전공하는 어느 대학생의 모습에서 꼭 그맘때 제가 지녔던 미열 같은 것을 대면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꼭 그맘때처럼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얼른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차마 돌아갈 수 없어서 돌이킬 수 없어서겠지요. 또 얼마 전 먼 여행 중에 만났던 캐나다 퀘벡 시티의 어느 골목의 그 자상함도 당분간은 저를 오래 붙들겠지요. 마치 그 골목은 저 스스로가 사람처럼 자신의 온기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따뜻한 골목이던지 마음의 병을 옮아왔습니다. 당신의 생에서 어느 한번 길을 잃는다면 이곳에서 길을 잃어 달라, 나지막이 내게 당부해오던 골목이었습니다. 그쯤이라면 언제 돌아갈 수 있겠지요. 


낯선 것과 익숙한 것. 저 역시도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가 그렇기에 나의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낯선 것을 밀어올리고 익숙한 것을 튕기는 것. 익숙한 것을 껴안고 낯선 것을 털어내는 것. 그렇게 뒹구는 것이 결국은 내 시의 얼굴이 육체에 몸 비비는 방식일 겁니다. 그러니 당분간만이라도 내 시를 당신의 시로 씻어주십시오.


이곳은 열망조차도 촘촘히 시드는 계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구름은 마음대로 일었다 가라앉고 마음도 구름처럼 향방을 잃은 계절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잠시 나침반과 슬리핑백을 내려놓고 폭포를 만나고 싶어집니다. 그 폭포의 힘을 맞아 내가 잘 가라앉기를 바랍니다. 그 폭포는 당신과 함께 맞겠습니다. 선배, 그 폭포 아래서 조금 울어요. 시를 지키는 삶을 살자고 소리치며 엄살하는 내 입을 틀어막아 주세요. 그러다 서로의 따귀를 어루만져야겠습니다. 


우리는 비록 멀리 있지만 우리는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닿아 있습니다. 지금 당장 만날 수 없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될 거라는 믿음으로 우리가 살아지는 것처럼, 당신은 멀리에 있으므로 당신은 나에게 시(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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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 소설가




‘생의 마지막에 쓰는 단 한 장의 편지’라는 주제의 글을 요청받았을 때 저는 즉각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면 반드시 그 숲을 디디고 올라, 숲 속으로 스며들어, 가뭇없이 허공으로 흩어지리라 꿈꾸어둔 그 숲이지요. 


 

강원도 평창 월정사 북쪽 오대산 자락에 자리한 상원사의 전경 (출처: 경향DB)



처음에 그 숲은 죽음 충동과 관련 있었습니다. 20대 시절, 생에 대한 지식과 지혜도 없고,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생을 던져 헌신할 대상도 찾지 못했던 그 시기에 저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 잘못 온 것 같았습니다. 너무 늦게 태어났거나 좀 빨리 온 게 틀림없다 여겼지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마음 가득했지만 어디로, 어떤 방법으로 돌아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서둘러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방법들은 아무래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방법들에 내재된 폭력성, 가학성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기에 숲을 만났을 것입니다. 오대산 상원사 도량에 서서 눈 아래 펼쳐진 숲을 내려다보았을 때 그것은 미묘한 농담을 적절하게 섞어 직조한 거대한 양탄자 같아 보였습니다. 그 숲이라면 나를 받아 안아 만리 허공 속으로 가뭇없이 던져 한 점 티끌로 사라지게 할 수 있을 듯했습니다, 몸을 날려 무한해 보이는 숲의 양탄자 위로 뛰어오르지 않은 것은 그래도 제게 현실 감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헛된 환상으로부터 돌아서듯 천천히 몸을 돌려 상원사 법당을 마주보고 섰을 때, 현기증처럼 머리를 치는 더 큰 환상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법당 뒤, 수직에 가깝게 선 뒷산 산비탈에 빼곡이 자리잡은 전나무들이 그것이었습니다. 수직 산비탈에 서 있느라 법당 지붕 쪽으로 수굿하게 몸을 기울인 전나무 숲은 마치 병풍처럼 법당과 도량 전체를 감싼 형국이었습니다. 팔을 벌려 세상을 감싸안는 자세로 너울너울 몸을 흔들며 군무를 추고 있었습니다. 귀 기울이면 숲을 움직이게 하는 천상의 코러스가 나지막이 들릴 듯했습니다. 


숲은 또한 나를 덮어줄 것 같았습니다. 눈 아래 보이는 초록 양탄자 위로 몸을 날리면 숲은 몸을 기울여 내 몸뚱이를 덮어줄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 나를 안아올려 더 높은 허공으로 던져줄 듯했습니다. 


나뭇가지의 반동에 힘입어 허공으로 튕겨지면 그대로 가뭇없이 사라질 수 있을 듯했습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묘한 충만감과 안정감이 느껴졌습니다. 언젠가 생을 마칠 때는 반드시 이 숲으로 스며들리라 다짐해두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철없던 시절의 몽상입니다. 


아주 나중에야 철없던 시절 제가 본 것이 신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스 고대 도시 델피에 갔을 때, 아폴론 신전을 감싸고 있는 수직 암벽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즉각 상원사 전나무 숲을 연상시켰습니다. 인간의 땅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점, 신전 터를 감싸 안은 듯한 병풍 모양이 닮아 보였습니다. 수직 암벽은 상원사 숲보다 열두 배쯤 넓은 면적으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몸을 돌려가며 암벽을 한 차례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권위에 승복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그것이 신성의 한 측면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는 못했습니다. 그 후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룩소르에 있는 핫셉수트 신전을 마주하고서야 그 점을 인지하였을 것입니다. 나일강을 바라보며 선 핫셉수트 신전 뒤편에는 아폴론 신전 수직 암벽과 흡사한 산이 신전을 감싸안듯 서 있었습니다. 황톳빛 사막 색깔이라는 점만 다를 뿐, 형태나 크기가 틀림없이 비슷했지요. 신전 앞마당에 서서 황톳빛 병풍을 따라 서서히 몸을 돌릴 때, 비로소 머릿속에서 세 가지 이미지가 겹쳐졌습니다. 그것이 신성의 표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뒤따랐습니다. 물론 저의 미욱한 생각일 뿐입니다. 


상원사 전나무 숲님. 생을 마치는 지금, 저는 평소 다짐대로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평생 당신을 생각하며 충만함과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 대해 감사합니다. 제가 상원사 도량에서 몸을 날리면 마지막으로 긴 팔을 뻗어 저를 건져올려, 가뭇없는 허공으로 던져주시기 기대합니다. 제가 안개처럼 작은 입자로 흩어져 허공으로 무사히 스며들 때까지 지켜봐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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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신 | 소설가·건국대 석좌교수




삶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리오. 인생은 신묘하게도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때론 행복을 느끼고 그러면서도 지독하게 매혹적인 것은 죽음 때문이라오.


좀 더 나와 함께 살았으면 오히려 오욕칠정을 다 삭히지 못해 심사가 곤궁했을 텐데, 멀쩡한 날보다 아픈 세월이 너무 길었던 당신의 힘겨운 모습을 차마 더 볼 수 없어 하늘에서 얼른 데려간 것이라 생각하오.


 

강연하고 있는 소설가 김홍신 씨 (출처: 경향DB)



사람은 하루에 2만2000번쯤 숨을 쉬고 10만번쯤 심장이 뛰는데 그대는 병약한 탓에 숨도 가쁘게 쉬고 심장도 가쁘게 뛰었으니 그 얼마나 많은 순간 힘겹게 살았는지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오.


‘인생은 잘 놀다가지 않으면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내가 그대와 잘 놀지 못한 잘못이 어찌 작으리오만, 그대는 조금 일찍 떠났을 뿐이고 하늘 어딘가에 별이 되어 우리를 바라보고 있겠지요. 나도 언젠가는 흙이 되고 먼지가 되어 그대처럼 별이 될 것이오. 우리 서로에게 별이 되어주기 위해 살았을 적에 아팠던 건 죄다 잊고 기뻤던 것만 추억하며 웃어주오. 


이렇게라도 그대의 길지 않은 삶을 함께하지 못한 것을 변명하는 건 위로하고 다독거릴 말이 세상에 달리 없기 때문이오. 사람이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는 데는 적어도 60년이 걸린다고 했소. 할 말 다 못하는 까닭은 바로 그 침묵임을 그대는 알리라.


인간사에 최고의 진통제는 사랑이라 했거늘, 뭐가 그리도 아까워 그대에게 사랑조차 야박하고 겉치레로 했는지 모르겠소. 참으로 하기 쉬운 변명, 세상에서 가장 믿는 사람이니까 믿거라 하고 그랬다는 말조차 이젠 할 수가 없구려.


너무 오래 병마와 씨름하느라 살림이며 애들과 남편 뒷바라지를 못하는 걸 자탄하다가 내 친구들에게 “예쁜 여자 있으면 애 아빠와 재미있게 놀게 해 달라”고 했겠는가.


“내가 죽으면 제발 건강하고 바라지 잘하는 여자를 만나서 재미나게 살라”고 했던 그대의 말은 함축된 간절함과 애틋함이었소.


어렸을 때 천식을 앓은 뒤 병약한데다 하필이면 나를 만나 병마가 더욱 기승을 부린 거라 생각하오. 장편소설 <인간시장>이 한국 역사상 최초의 밀리언셀러가 되어 1980년대의 전설이라는 영광을 누렸지만 바른 소리 쓴소리 많이 한 탓에 우여곡절이 따르고 영욕이 교차했기에 온갖 협박, 공갈, 위협에 그대도 고스란히 노출되어 심장발작에 시달렸소. 여자가 차마 들을 수 없는 괴이쩍은 협박까지는 잘도 견뎠지만 우리 아이들을 유괴하여 죽이겠다는 협박은 그대의 심장이 터지도록 몰아붙였소. 아이들 데리고 도망치기 몇 번이며 통곡하고 애걸하듯, 차라리 이혼하여 아이들만이라도 살리자고 애절하게 울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오.


후생이 있어 다시 태어난다면 딸아이가 그대의 시신을 끌어안고 마지막으로 한 말을 나도 그대로 하고 싶소.


“그대여, 이다음 생에는 절대 아프지 마시오.”


붓다께서도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하셨소. 그렇거니 사람으로 태어나면 반드시 한 번은 가는 길이오. 10년을 사나 100년을 사나 시차가 있을 뿐 사람은 이 세상의 나그네가 아니겠소. 그러니 서러워하지 마오. 죽음은 참 서러운 것이지만 늙는 것도 몹시 서러운 것이오. 그대는 늙기 전에 고운 나이로 오롯이 조금 먼저 갔을 뿐이오.


온 우주가 사라졌다가 지금과 똑같이 다시 생기는 걸 대겁이라 하오. 설마 대겁의 세월 동안 우리 어찌 단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지 않으리오.


살아생전 그대가 그리도 부러워하던, 우리 집 마당 소나무에서 마음 놓고 날아다니던 새들은 여전히, 모이 주던 그대를 부르는지 지저귀고 있소.


이제 애들 걱정은 내려놓구려. 아들 녀석은 군복무를 마치고 참하고 예쁜 아이 만나 결혼하고 좋은 직장에 씩씩하게 잘 다니고 있소. 딸아이는 원하던 대로 뉴욕의 패션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맨해튼에서 구두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소. 꿈길에 한 번쯤 아이들을 꼬옥 안아주고 가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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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재 | 시인



아무도 몰래 떠난 여행이었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지만 내 안으로 온전히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빨랫줄에 누군가 널어놓은 홑청 사이로 몸을 숨기듯, 장롱 안의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두듯, 나는 잠시라도 숨죽일 곳이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불현듯 어떤 지명을 떠올렸다. 선명한 기억이라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어떤 곳. 내가 태어난 곳이었다.


원고들이 책으로 묶이는 동안 나는 알고 있던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는데, 그것은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약력의 첫 줄에 관한 것이었다. 의미 없는 기록이었지만 결코 바뀔 수 없는 기록이기도 했다. 태어난 곳, 그러나 오래 잊고 지내던 곳, 고향이라고 불리는 곳. 그 고향이라는 단어는 이 대지에서 인간이 첫 숨을 들이마시기도 전에 부여받게 되는 굴레이자 운명일지도 몰랐다.



시인 김선재 (출처: 경향DB)



고백하자면, 일말의 감상적인 기운에 작정한 여행이었다. ‘첫’이라는 단어가 가진 판타지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첫 시집이 출간된 즈음이었고 첫 귀향이었다.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행선 도로 위에서 만난 구름들이 갈수록 낮고 두꺼워지는 걸 보면서 이유도 없이 마음도 따라 무거워졌다. 딱히 뭔가를 보거나 하기 위해 작정한 여행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에게 왜? 라는 질문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마치 알을 낳기 위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물고기처럼, 알을 낳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는 물고기처럼 나는 또 뭔가를 잃어버리고 돌아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건 하던 일을 작파하고 뒤늦게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이후로 늘 시달렸지만 애써 외면하던 불안이기도 했다.


내 약력을 알게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너에게서는 바다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유년의 한 부분을 그곳에 묻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어느 날 가까운 누군가가 바다로 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공포를. 그것은 오랫동안 입에 올릴 수 없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바닷물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바다 가까이 갈수록 시퍼런 물빛의 유혹이 강해진다는 것을. 가족은 어떤 이름을 잃고 나서 고향을 떠났고 그 사실은 내 가계의 암묵적인 비밀이었다. 나는 그것을 재차 확인하기 위해 그토록 먼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섬으로 통하는 배는 모두 묶였고 작은 도시는 밤새 소란스러웠다. 먼바다에서 끊임없이 바람이 불어왔고 거친 물결이 해안을 흔들었다. 상황은 다음날이 되어서도 나아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외지인들이 모르는 산복도로를 찾아보거나 해풍에 빛이 바랜 골목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곳은 이끼처럼 축축했고 바다에서 밀려온 안개로 자욱했다. 걷는 동안 나는 오랫동안 입 밖에 꺼낸 적 없는 가계를 차례로 더듬어 보았다. 바다 때문에 잃어버린 혈육들의 이름이었다. 그로 인해 운명이 결정되고 흩어져 남처럼 살아야 했던 시간들이 안개 속에서 섬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내게 고향이란 잊어버렸던 이름들에 관한 잃어버린 기억을 확인하는 곳인 것도 같았다. 무엇으로도 그 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나를 불편하게 하던 사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담벼락처럼 나를 지탱하던 어떤 시원(始原)이기도 했다. 그것이 내 실감의 세계였고 내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잃어버리지 않고는 그리워할 수도 없다는 걸, 나는 그곳에 가서야 알았다. 다시는 고향이라는 이름으로는 되돌아가지 못할 곳이었다.


어느 여름 나는 태풍이 지나간 그 담벼락에 흔적을 남기고 다시 돌아간다. 2012. 8. 다녀감.


추신: 인생에서, 처음은 언제나 처음이라는 마지막임을 이제는 안다. 동행해준 내 그림자에게 인사를 전한다.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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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 소설가



그를 만난 것은 벌써 12년 전의 일이었다. 하필이면 우기인 6월 하순에 히말라야 산록 아래의 티베트 여행을 떠나다니…, 여행 도중 필경 궂은 날씨 때문에 곤욕을 치르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했으면서도 일자를 6월 하순으로 잡은 것은 일곱명을 헤아리는 동반자 중에 두 사람의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티벳 승려들 (출처 :경향DB)



그날 우리 일행은 세계의 오지로 일컫는 티베트의 오지를 가로질러 중국 국경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티베트의 시가체에서 장체로 가는 길이었다. 18인승의 작고 낡은 버스는 비포장도로를 허둥지둥 기어가고 있었다. 척박한 농경지를 가로지른 도로에는 진눈깨비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버스가 돌출해 있는 돌부리에 걸려 갸우뚱거릴 때마다 차체의 쇳조각들이 긁히는 소리와 가만두어도 사시나무 떨 듯한 차창들은 요란하게 흔들리며 찢어지듯 울부짖었다. 허술하게 조립한 차체의 크고 작은 틈바구니마다 뼛속을 호비칼로 도려내는 듯한 한기와 진흙 먼지가 새어들었다.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운전기사 한 사람뿐이었다. 우리 일행 일곱명은 한결같이 눈을 감은 채 쇠골 깊숙이 턱을 묻고 이 고단하고 짜증스러운 버스의 행로가 끝나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버스는 좀처럼 덜컹거림을 멈추지 않았고, 출발 당시부터 내리던 진눈깨비도 멈출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문명의 이기라는 것을 이용하고 있으면서도 원시적인 고통을 이를 악물다시피 겪고 어느 순간 우리들의 덜컹거림이 멈추었다. 버스가 정차한 것이었다. 그리고 속으로 줄곧 조마조마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뒤쪽 타이어 하나에 펑크가 난 것이었다. 진눈깨비가 몰아치는 무인지경 한가운데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오지이기 때문에 지나가는 차량조차 만날 수 없는 곳에 펑크 난 고물 버스가 멈추어 선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내려서 참고 참았던 배설을 할 수 있고, 몸을 추슬러 어긋난 뼈대들을 제자리에 박아 넣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역시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인기척이라곤 없는 메마르고 스산하기 짝이 없는 들판에 시야가 흐려지도록 눈비가 쏟아졌다. 


‘이건 미친 짓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뒤통수를 쳤다. 미련하게도 그 많은 여행경비를 들여 하필이면, 헐벗은 산등성이와 야크 똥밖에 보이지 않는 이런 오지 한가운데서 똥개 떨 듯하고 있단 말인가. 남들이 우리 일행을 보면 얼마나 혀를 차겠으며 측은해서 비웃을까. 다시 버스에 올라 웅크리고 앉아 그런 비애를 씹고 있는 사이에 놀랍게도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눈발 사이로 버스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은 차창에 매달려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은 손으로 무언가를 손에 쥐여 주기를 간곡하게 애원하는 것이었다. 


차창에 매달리는 그 아이들 중에서 나는 적어도 50년 전에 헤어졌던 그를 만났다. 


너무나 오래 입어서 너덜너덜 해진 옷소매, 뒤축이 닳아 없어진 검은 고무신, 까치가 둥지를 틀어도 될 것 같은 더부룩한 머리는 필경 이발소 구경한 지가 까마득한 옛날일 것이었다. 얼굴은 씻은 지 오래, 두 눈만 빠끔하고 웃을 때 이빨만 하얗게 드러날 뿐 몸뚱이 어디에도 도무지 깨끗하게 세척된 곳이라곤 없는 아이, 분명 50년 전에 내가 만난 것이 틀림없는 이 아이의 이름이 뭐였더라? 


머릿속에 가물가물 떠오르는 그 이름이 금방 혀에 감길 것 같으면서도 가물가물 사라진다. 이 아이는 하필이면 왜 나 혼자만을 향해 집중 공략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가방을 뒤져 노트 두 권을 꺼내 흔들어 보이며 멀리 개울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 순간 아이는 얼굴 가득하게 웃으며 개울로 달려갔다. 유독 그 아이만 맨발이었다는 것을 그때야 발견했다. 물을 끼얹는 시늉만 하고 쏜살같이 되돌아온 아이의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가슴이 뜨끔하도록 놀랐다. 그 아이는 바로 50년 전의 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나에게서 볼펜과 노트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눈비에 젖을세라, 윗도리 속에 넣었다. 우리와 동행했던 안내자가 말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사원에 있는 라마 스님에게 갖다 드리려고 젖지 않도록 간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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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단 한 장의 종이가 남아 있고, 마지막으로 편지를 쓸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흰 종이가 수많은 수신자를, 벗들과 적들을 넘어 거의 전 인류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적기로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파는 막걸리 한 잔이 간절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홍대앞,금지곡 콘서트 (출처: 경향DB)



나는 당신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세 번쯤 당신이 파는 술을 마셔 보았고 서른 번쯤 막걸리통으로 그득한 당신의 리어카를 목격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연의 전부입니다. 당신은 놀이터에서, 공원에서, 길가에서, 도처에서 막걸리를 팔았습니다. 당신의 옷차림만큼이나 낡고 닳은 리어카 바퀴가 멈추는 순간이면 어디서나 당신의 상점이 되곤 했습니다. 까맣게 탄 얼굴, 크고 우렁우렁한 목소리, 아무에게나 서슴없이 다가가 막걸리를 권하는 모습. 홍대를 이루는 풍경 중에 당신 또한 중요한 모자이크 조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내게 ‘풍경’ 중의 하나입니다.


인디 밴드의 거리공연을 보고 난 후 친구와 나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갑자기 공기 한쪽이 소란스럽게 무너지더니 당신이 다가와 막걸리를 권했습니다. 비싸지 않은 술인 데다 출출했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의 막걸리를 사기로 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세’에 눌려 천원짜리를 꺼냈습니다. 강권하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뭐랄까, 박력이 지나치게 넘친다고 할까요. 우리가 막걸리를 사자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지갑을 열었습니다.


두번째로 당신의 막걸리를 마신 것은 한낮입니다. 역시 배경은 놀이터입니다. 어쩐 일인지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외국 배우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구경할 새도 없이 무대가 막을 내리자(무대도 막도 없지만 공연이 끝나자) 당신이 나타나 배우들에게 막걸리를 한 잔씩 따라주기 시작했습니다. 외국 배우에게는 ‘코리안 와인’이라며 콸콸 따라주었고 적지 않은 수의 관객에게도 공짜로 술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냥, 기분이 좋아서인 듯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나는 도처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항상 서둘러 어디를 가는 사람처럼 걸음이 빨랐고, 무거워 보이는 리어카에는 빈 술병과 찬 술병이 그득했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의 모습은 광인의 그것처럼 약간 이상해보였습니다. 목소리, 눈빛, 행동거지 모두 일반인보다 한 옥타브 높은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늘 도취된 모습이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당신이 성실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주 열심히, 하얀 막걸리통으로 이루어진 당신의 배를 저어 거리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노잡이처럼 보였습니다. 출렁거리는 걸음걸이 때문에 당신의 리어카는 언제나 바퀴가 달린 배처럼 보입니다.


막걸리를 나누어 마신 내 친구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misfit’ 저 사람은 묘하게 세상과 맞지 않다고.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말을 ‘부적응자’로 번역하는 것에 우리는 결단코 반대합니다. ‘꼭 들어맞지 않는 사람’이 정확한 말이지요. 우리 눈에 당신은 거리의 막걸리상 정도가 아니라 한 부족을 이끌 족장에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요. 


당신이 가진 에너지의 종류가 이 시대와 맞지 않아서, 그렇다고 다른 이들처럼 적당히 마모된 채 끼어들어갈 수 없어서, 그래서 살아가는 나름의 방식을 터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이 발동한 것입니다. 추측이 낭만적이었던 것은 조금 취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화는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둘 다 <모비딕>을 읽었고, 기세 좋은 사람들이 전력으로 무언가를 뒤쫓던 시대가 지나가버렸다는 슬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모비딕>에 나오는 에이해브나 스타벅은 없어, 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리어카가 거리 끝에서 불쑥 출몰한 것입니다. 펼쳐진 책장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글자처럼. 우리가 미처 못 읽은 등장인물처럼요.


에이해브가 이 시대에 살고 있다면 피쿼드호의 선장이 될 수 있었을까? 스타벅은 일등항해사가 아니라 스타벅스의 알바생이 되어 있지 않을까? 우리는 사라지는 피쿼드호를 바라보듯 당신의 리어카를 배웅했습니다.


이제 커다란 시간 한 장이 넘어간다고 합니다. 다음 시대, 다음 페이지에서는 부디 더 큰 술통과 배를 누리시길. 그 풍경 어딘가에서 당신의 술 한 모금을 마실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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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 연세대 교수



이렇게 너에게 편지로나마 용서와 재회를 간청해본다. 나이를 먹다보니 시간이 하도 빨리 흘러가서, 너와 만났던 것이 몇 년전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 3,4년 전쯤 되는 듯 싶다.


너를 알게 된 것은 네가 독자로서 나에게 이 메일을 보내서였다. 내가 맨날 글에다가 칭얼거리며 보채대는 나의 페티시(Fetish·성적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물)인 ‘긴 손톱’을 네가 한번 네일아트 숍에 가서 가장 긴 걸로 붙인 다음 내게 보여주고 싶다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이게 웬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그래줬으면 고맙겠다고 대답하고, 모조손톱 붙이는 비용을 내가 치러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너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날, 나는 네가 붙이고 온 모조손톱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나 길어 그만 홀라당 감격해버리고 말았다. 손톱의 길이가 대략 12센티미터나 되었으니 내 어찌 감격 안 할 수가 있으랴.


 

마광수 _ 연세대 교수(출처: 경향DB)



그래서 나는 너와 별 군말 없이 당장 모텔로 직행했고, 내 평생 가장 잊을 수 없는 강렬한 페팅의 시간을 가졌다. 네가 말수가 적은 여자라서 나는 그게 썩 마음에 들었고, 남녀간의 사랑에는 역시 ‘썰’이 전혀 필요없다는 것과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육체 언어’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너와 나는 나이 차이가 엄청 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너와의 나이차이를 별로 실감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이나 네가 나의 과격한 육체언어를 존중해주고, 요즘 시건방진 젊은 여자애들처럼 나를 늙었다고 깔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모텔방에서 우리는 정해진 시간을 돈 주고 연장해가며 별의별 헤비 페팅을 즐겼다. 나는 원래 사디스트 취향이었는데 네가 아주 세련된 마조히스트 취향으로 대응해줘서, 오랫동안 성적(性的) 기아증(症)에 시달렸던 내 육체는 오랫만에 실컷 맛있는 포식을 할 수가 있었다. 


나는 너를 만나기 이전에 수많은 여자들과 연애를 해보았다. 그런데 ‘S·M 취향의 궁합’에서 너처럼 나와 죽이 잘 맞는 여자를 만나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마치 보물을 건진 듯한 기분이었다. 


모텔 방 안에서 더 뭉그적거리며 놀고 싶었지만, 첫 만남에서부터 너무 기력을 소진해버리면 안 될 것 같고, 또 배도 출출해오는 지라 우리는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듯 모텔방을 나왔다. 그리고 근처의 번화가로 가서 스파게티를 시켜 먹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너의 길디긴 손톱을 보고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것이 나는 보기에 썩 유쾌하였다. 


그렇게 헤어진 다음부터 우리는 거의 하루 걸러 만났다. 처음에 커피숍 같은데서 만났다가 모텔로 가는 것도 귀찮아져서, 처음에 갔던 모텔을 단골로 정해놓고 아무나 먼저 도착한 사람이 전화로 룸의 넘버를 알려주는 식이었다. 만날 수록 우리의 페팅은 강도를 더해가서, 한국에서 파는 조악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섹스 토이를 각자 구해가지고 와서 만나기도 하였다. 


내가 너에게 무엇보다도 고마웠던 것은, 네가 나의 ‘정력’을 밝히지 않고 ‘정열’만을 밝혀주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실 나이로 보아도 그렇고, 오랫동안 우울증 치료제를 먹은 관계로 정력이 세지 못했다. 그래서 은근히 열등감을 갖고 있었는데, 너는 내게 행여 ‘비아그라’라도 복용하고 올 필요가 없다면서, 늙어빠진 나를 따사롭게 포용해줬던 것이다. 


그런 행복한 시간들이 6개월 가량 지나갔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내쪽에서 그만 이별을 통고하게 되는 해프닝이 뜬금없이 닥쳐왔다. 절대로 네게 싫증을 느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 집안문제 때문이었다. 창피하게도 나는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평생을 지내온 전형적인 ‘마마 보이’였는데, 낌새를 챈 모친이 우리의 만남을 극구 반대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H, 부디 나를 너그럽게 용서해다오. 그리고 제발 나와 한번만 다시 만나다오. 그러면 나는 정말 주체성 있게 너와의 긴 사랑의 만남을 이끌어나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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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 연세대 교수



오늘은 수요일.


어제 예기치 않게 술을 많이 마시게 되어 꾸물꾸물하다 보니 학교에 안 가고 그냥 집에 있게 되었다. 한여름의 수요일이라 에어컨을 틀어놓고 있는데도 덥기만 하고, 왠지 마음이 답답하고 외로워진다. 요즘이 한창 휴가철이라서 손에 손을 맞잡고 산으로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젊은 연인들 쌍쌍이 그저 부럽기만 하다. 그러다 보니 집에 틀어박혀 책만 읽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 하긴 학교 연구실에 나가 있어봤자 고독감이 덜해질 리 없겠지. 학생들이 국내외로 여행을 떠나 캠퍼스 안이 텅 비어 있을 테니까. 


 

LK:사진 속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마광수 교수 (출처: 경향DB)



지금은 저녁 8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화면 속에 나타나는 것은 온통 너의 얼굴뿐이다. 왜 이리 우리는 마음껏 뭉칠 수 없는 걸까?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그래도 너를 만나게라도 된 것이 다시 한번 기적같이 여겨지고 새롭게 정열이 용솟음쳐 온다.


오늘 하루 종일 이 책 저 책 닥치는 대로 조금씩 읽어보다가, 옛날에 읽어서 다 잊어버린 전혜린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일기 및 서한집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두 권을 찬찬히 정독했다. 고독에 찌들고 가정생활의 부조화에 찌들고 삭막한 시대상황에 찌들어 괴로워했던, 그래서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여자의 시름이 내 시름처럼 가슴에 와닿았다.


나도 1992년 말에 일어난 <즐거운 사라> 필화사건 때 감옥에서 풀려나와 학교에서도 잘리고 항소심과 상고심을 힘겹게 해나가면서, 문화적으로 척박하기 그지없는 한국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에 절망해 두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해본 적이 있다.


또 2000년 가까스로 연세대 교수로 복직한 지 2년 만에 국문학과 동료교수들의 집단따돌림에 의해 ‘교수 재임용 탈락’의 위기를 겪게 되자 심한 외상성 우울증에 걸려 자살 시도를 두 번이나 해본 적이 있다.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자살 시도 모두 다 미수에 그쳐, 지금껏 구차한 목숨을 지탱해오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전혜린의 고독한 자살이 내겐 남의 일같이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시대는 달라도 그녀나 나나 ‘한국에 태어난 죄’로 인해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업보라면 업보가, 너무나 무거운 멍에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이거 내 푸념과 팔자타령이 너무나 길었구나. 미안해. 전혜린 때문에 그렇게 됐어.


너는 나를 지금 보고 싶어 하고 있을까? 모르겠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언제나 이쪽만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니까. 


너를 사랑해. 아주아주 미치도록. 지금 난 너 때문에 살아가는 것 같아. 하지만 헤어질 때마다 굳어 있는 네 표정을 보면 죽고 싶어져. 실컷 키스라도 하고 나서 (그 다음엔 물론 짙은 페팅도 왕창 하고) 헤어지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되더구나. 너무 뜸하게 만나니까 기다리다가 진이 다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다. 


너는 어떠니? 너무 남자가 많아서 나를 만나는 게 피곤하기만 하니? 네가 도와주면 나도 꽤 멋지고 로맨틱한 글을 많이 쓸 수 있을 것 같다. 정말이야. 나를 더 깊이 사랑해줘.


문득 달력을 보니 얼마 안 있어 입추로구나.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더 섹시하고 소프트해진 네가 내 곁에서 미소짓고 있는 것 같다. 가을은 고독과 조락(凋落)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네가 있는 한 나에게 가을은 그런 계절이 아니야. 가을은 쿨한 사랑의 계절이야. 부디 나를 사랑해보려고 노력해줘. 나이 차이 같은 거 따지지 말고. 


너의 운명과 나의 운명, 그리고 우리의 기이한 만남을 축복하고 싶다. -광마(狂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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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화 | 방송인




애들아, ‘그날’이 오거든 엄마가 살던 공간에 들어와 엄마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즐겁게 웃었으면 좋겠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나오는 로버트와 프란체스카의 사흘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먼 훗날 엄마가 떠난 후 아이들이 발견했고 매우 아름다워 소설로 다시 탄생했듯이, 애들아 너희도 그렇게 엄마의 부재를 슬퍼하지만 말고 지난날 엄마의 삶을 아름답고 흐뭇하게 바라봐줬음 좋겠다.



엄마는 누가 흉볼까봐 방을 깨끗하게 치우고 미리 준비할 생각은 없단다.


내가 정한 내 묘비명 ‘웃기고 자빠졌네’처럼, 물론 좁은 땅에 무덤을 만들 생각은 없지만, 그저 어느 한 구석에 내가 살았던 흔적을 추억하며 작은 비석에 이 글귀를 새겨줬음 좋겠다.


코미디언으로서 무대에서 열정을 다해 웃기다가 자빠지고 싶은 내 바람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엄마가 즐거운 사람이고 즐겁게 살아갔듯이 너희들이 재밌는 보물찾기 하듯 내 방 구석구석을 웃고 떠들며 추억했으면 좋겠다. 


방송인 김미화, 윤승호 성균관대 교수 부부 (출처 :경향DB)


“푸하하하. 엄마가 아빠에게 보낸 간지러운 이 e메일들을 봐봐.”


“히히. 이 사진좀 봐. 중국옷 입고 노래 부르며 찍힌 엄마의 촌스러움은 누구도 못따라올 거야. 킥킥. 예술로 승화시킬 게 따로 있지. 술먹고 술병 뚜껑을 망치로 두드려서 물고기를 만들어 놨네.”


이렇게 즐겁게, 이제 엄마가 같은 공간에 없어도 엄마의 재미있는 흔적들로 슬픔을 충분히 상쇄했으면 좋겠다.


엄마의 부재에도 즐거워하라고 자꾸 말하는 것은, 아직 내 어머니 김영자 여사가 살아계시기에 문득문득 엄마가 없는 이 세상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코끝이 찡해지며 슬퍼지기 때문이란다.


엄마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기에 웃으며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기 위해 건강을 좀 더 챙겨야겠다고 생각 중이다.


언제든 죽을 때 건강한 정신으로 너희들에게 웃으며 “안녕!” 했으면 하는 게 나의 소망이다. 


엄마는 코미디언으로서 국민들에게 참 많은 사랑을 받았고 엄마를 끔찍하게 사랑해주는 너희들 때문에 늘 행복했노라고 웃으며 감사인사를 했으면 좋겠다.


더불어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내 남편, 당신과 함께한 모든 순간이 감사하고 행복했다고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싶다.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게 목표인 우리 부부의 희망대로 우린 잘살아왔다고 등을 토닥토닥 다독여주고도 싶다.


장례식장에서 화투를 치고 술을 나누며 웃고 떠들고 즐겁게 축제처럼 며칠을 보내는 것도 다 그렇게 떠난 자를 즐겁게 그리워하기 위한 산 자들의 위로이리라.


나의 우상 서영춘 선생께서 돌아가셨을 때 누군가 선생님을 추모하는 글을 써서 읽었는데 난 그만 웃음을 주체할 수 없어 빵빵 터졌다.


“고 서영춘 선생께서는 살아생전 유행어를 많이 남기셨습니다. 요걸 몰랐지. 가갈갈갈갈.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곱뿌없이는 못 먹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유행어도 그걸로 내 후배들이 조사를 준비한다면 그렇게 웃을 수밖에 없는 말들 아닌가! “고 김미화 선생께서는 살아생전 유행어를 많이 남기셨습니다…. 일자 눈썹에 야구 방망이를 들고 음메 기살어, 음메 기죽어.”


엄숙한 죽음 앞이라고 혀를 깨물어 가며 웃음을 참진 말기를 바란다.


이왕이면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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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수 | 오디뮤지컬컴퍼니 대표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작가는 상상력으로 글을 쓰지 않고 단지 기억으로 글을 쓴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난 기억의 파편을 모아야 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과 감성을 모아 당신에게 글을 써야 합니다. 우리는 시공간을 넘어 만났기 때문이지요.


우선 우리가 어떻게 만났을까 생각해 봅니다. 중학교 1학년 겨울에 당신을 만납니다. 순식간에 당신에게 빠져 함께 여행을 떠났지요. 어린 나는 당신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풍차를 향해 돌진하고, 모험에 뛰어들고 꿈을 향해 가는 모습이 너무나 멋졌지요.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주 가끔 당신을 생각하곤 했지만, 나의 청춘은 온갖 세상 관심사로 향해 갔고, 정신 없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 빠져 허우적거렸기 때문이죠. 이런 젊은 시절의 방황을 끝내고, 뮤지컬 프로듀서로서 일할 때 어느 날 난 당신과 해후합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운명이었을 것입니다. 2005년 당신을 만나기 전에 엄청난 서곡이 있었지요. 


 


2004년 여름, 어느 연습실에서 젊은 프로듀서와 배우, 스태프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엄청난 집중과 에너지로 작품을 만들어갑니다.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온 순간, 한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이 공연장에서 펼쳐졌지요. 관객은 열광하였고, 그들이 보내준 사랑은 엄청난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하나의 신드롬을 만들었지요. 이 작품이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였습니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고, 새로운 물결이 만들어졌었지요. 이 작품으로 나는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젊은 뮤지컬 프로듀서로서 인정받았지요. 이후 자신감을 갖고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빨리 달리고 싶었고, 세상을 빨리 갖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욕심에 몸이 망가져 병원에 가게 됩니다. 이미 일하면서 오랜 지병과 투병하며 견디고 있었는데, 결국 수술대에 올라 심장판막증 수술을 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요양을 못하고 일을 하여 그해 겨울 건강을 회복 못하고 쓰러집니다. 죽음이 눈앞까지 찾아왔었지요. 병석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앞만 보고 폭주기관차처럼 달려 온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내가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행복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나? 역시 뮤지컬이었고, 뮤지컬작업을 통해 관객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 이상이 없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작품을 하자고 결심합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은 당신이 주인공인 <맨 오브 라만차>였습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출처: 경향DB)


10대 때 처음 당신을 만났으니 우리 사이에도 제법 세월이 흘렀네요. 2003년에 다시 볼 수 있었는데 당신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죠. 이유는 진실의 적인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2005년 다시 당신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당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요. 깊어가는 당신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 작품을 할수록 사람들은 날 돈키호테라고 부릅니다. 하고 싶은 작품을 거침없이 제작하고, 뮤지컬 시장보다 앞서가는 행보 탓에 기사소설에 심취해 스스로 편력의 길을 나선 무모한 당신과 닮았다고 합니다. 진정 내가 당신을 닮았을까요? 아니면 당신을 닮고 싶은 흉내쟁이일까요? 잘 모르겠어요. 분명한 것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순간 당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습니다. 빗소리와 함께 묻어 오는 바람이 더욱 나를 부추깁니다. 스페인의 라만차(La Mancha)는 지금 어떤가요? 비가 오나요? 빛나는 오후인가요? 당신이 기사가 되어 잘못 돌아가는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돈키호테가 되어 로시난테를 타고 산초 판사와 편력의 길을 나선 라만차라는 곳에 가보고 싶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고 마을 언덕 위에 우뚝 솟은 풍차가 있겠죠. 


이베리아 반도의 독특한 풍광을 이고 있는 라만차의 캄포 데 크리프타나는 낯선 이방인들이 시간이 멈춘 듯이 당신을 찾아 여행을 오고 있지요. 아마도 그 작은 도시에서 푸른 하늘과 드넓은 대지를 보면서 당신의 꿈과 이상을 노래하며 키호티즘을 발견하겠죠.


나도 낯선 이방인 중에 한 명이고 싶습니다. 당신이 풍차와 마법사를 무찌르는 용감한 모습을 보고, 당신의 연인 둘시네아 공주가 살던 흰 벽의 거리 엘 토보소(El Toboso)도 함께 거닐고 싶습니다. 물론 당신이 얘기해주는 온갖 무용담을 들으면서요.


당신의 이야기는 항상 나를 매료시킵니다. 


당신의 노래가 들립니다. “내가 영광의 이 길을 진실로 따라가면 죽음이 나를 덮쳐와도 평화롭게 되리… 마지막 힘이 다할 때까지 가네 저 별을 향하여.”


벗이여. 언제나 내 곁에서 힘이 되어 주세요.


P.S 오늘따라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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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숙 | 연극배우




그 무덥던 8월의 어느날 대통령님은 떠나셨습니다. 병원에 계시던 내내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때 공연이 임박해서 정신없이 연습 중이었는데 무대에 있던 제게 방금 대통령님이 서거하셨다고 누군가가 알려주었고 저는 팔다리 힘이 풀려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은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그냥 머릿속이 하얗기만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온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린 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존경하던 노 대통령님을 보내는 것 하고는 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두 분의 아버님이 계십니다.


제 친아버님은 워낙 오랜 세월 떨어져 살아서 그냥 절 낳아주신 분 정도일 뿐, 육친의 정이라든가 이런 걸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평생 절 한번 안아주신 적도 없고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적도 없고 제 인생 안에 단 한번도 들어오신 적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제 마음속 첫번째 아버님은 벌써 오래 전에 돌아가신 이해랑 선생님이십니다. 저를 배우로 만들어 주셨고 배우로 인정해 주셨으며 제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제 의지간이 돼 주신 분이셨습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고 세상물정에 어둡기만 했던 저는 우왕좌왕 어쩔줄을 몰라했습니다. 연습장에서도 안정을 못하고 늘 불안에 떨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증오심에 가득차 있던 저를 늘 거두어 주셨습니다. 연습을 끝낸 저녁이면 후배들과 만나시는 자리건 친구들과 만나시는 자리건 늘 저를 불러 옆에 앉혀 놓으셨습니다. 제가 마음이 안 놓이셨던 거죠. 저는 선생님 옆자리에 앉아 선생님이 겪어오셨던 파란만장한 선생님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그 힘든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그냥 든든하고 편안한 아버님 같은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마음 붙일 곳 없을 때 저는 대통령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세상은 온통 삼엄했고 늘 대통령님은 감옥 아니면 집에서도 감시가 엄청나서 그 근처에 가는 것조차도 무서웠던 시절 어느 용감한 연극 선배 한분이 문안인사를 갔었는데 제 안부를 물으셨다고 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듣고 저는 너무 죄송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제 공연 때 조심스럽게 초대장을 보내드렸고 대통령님이 제 공연을 보러 오셨습니다. 의자도 불편한 작은 소극장에도 오셨고 선거철 엄청 바쁜 와중에라도 꼭 공연장에 오셔서 박수를 쳐주셨고 전문가 못지 않은 연극평도 해주셨고 우리 배우들에게 저녁도 사 주셨습니다. 


그러나 겁 많고 소심했던 저는 대통령님의 작은 부탁도 들어드리지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대통령 후보가 되시고 라디오 지지 연설을 부탁하셨을 때도 저는 그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빚을 갚아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일을 할 수밖에 없는데 지지 연설을 하고 나면 일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 부탁을 들어드릴 수가 없다고 제가 말씀드리니까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줄 전혀 몰랐다고 하시면서.


그리고 얼마 후 제 공연을 보러 오셨고 그날 연극이 끝난 후 저를 자동차에 태우셨어요. 댁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고 안방으로 들어가셨고 곧 사모님이 봉투 하나를 들고 나오셨지요.


“얼굴이 너무 못 쓰게 됐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이거 가지고 가서 꼭 보약 한첩 지어 먹고 몸 추스르라고 하시네요.”


고 김대중 전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연극 <가을소나타>의 배우 손숙씨와 환담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그날 저녁 저는 동교동 대통령댁 대문을 나서면서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제 마음 속에 아버님으로 모셨습니다. 대통령이 되시고 온갖 일을 다 겪으시고 자주 뵐 수는 없었지만 저는 힘들고 기운이 빠질 때마다 ‘대통령님이 계시니까’ 하고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제가 환경부 장관이 되고 러시아에 가서 공연을 하고 무대에서 금일봉을 받은 게 엄청난 문제가 되고 장관을 그만두던 날, 제게 전화하셨죠. “연극 잘하고 있는 사람 데려다가 날벼락 맞게 해서 미안해요”라고. 


저는 마음 속으로 ‘아닙니다. 그 말씀으로 됐습니다’라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 임기가 끝나시고 동교동에 인사하러 갔는데 집안은 너무 적막하고 두 내외분이 불도 제대로 안켠 어둑한 거실에 앉아 계신 것을 보고 가슴이 무너져 내려 앉았습니다. 


이제 좀 마음 편하게 맛있는 것 잡수러도 다니시고 제 공연에도 다시 꼭 모시고 싶었는데 당신 운명은 끝까지 편안하신 운명은 아니셨던가 봅니다. 


그곳에서는 편안하신지요?


이제 8월이 옵니다. 대통령님 떠나시던 날 그 무덥던 8월을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영원한 제 마음속의 대통령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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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진 소설가



내인생 마지막 편지, 라는 꼭지의 청탁을 받았을 때 선뜻 내키지 않았어. 생을 마감하는 마당에 남기는 편지라니, 그간 써 젖힌 글 나부랭이로도 차고 넘치지 않는가 말이야. 마지막이라는데 누굴 원망하는 건 좀 그렇고 감사를 할라치면 열 손가락으로는 모자랄 터이니 말이지. 


너를 떠올린 건 나로서도 뜻밖이야. 우리의 인연은 고작 이년 남짓, 친구, 연인, 동료… 그 어떤 이름으로도 부르기 마땅찮은 사이였으니. 그럼에도 나는 결국 네게 편지를 쓰고 있어. 오래전 어느 날. 그날 너는 잿빛 셔츠를 입고 있었어. 셔츠의 빛과 닮은 너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지. 잘 지냈지, 잘 있었어, 그런 안부가 오가고 너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끝내 아무런 말없이 떠났어. 여름날이었어. 벤치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던 너의 등에 사정없이 쏟아지던 햇살이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 


 너를 생각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건 강렬한 카레냄새야. 안양 교도소 가는 길, 버스 안에서 졸다 깨다 반복하며 길이 다할 즈음 거대한 카레공장이 있었거든. 그 길을 지나 면회신청을 하고 나는 철창을 사이에 두고 너와 마주 앉았지. 푸른 수의를 입은 너는 옷처럼 푸르스름한 안색으로도 내게 웃어 보였어. 필요한 것은 없나, 내가 물으면 너는 몇 권인가 책 제목을 내게 일러주었지. 한 달에 한번, 고작 반나절에 지나지 않은 그 일이 한 달의 나머지를 온통 지배했다면 너는 믿을까. 


소설가 서하진(출처: 경향DB)


그 이전 봄, 너와 나, 그리고 다른 두 명의 학우들이 책을 읽고 토론하고자 모임을 꾸렸지만, 뭐, 우리들 사이에 엄청난 향학열이 있다거나 그랬던 것 같지는 않아. 당시 유행이었잖아, 스터디 그룹이라는 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하는 체질이니 아마도 나는 꼬박꼬박 책을 읽고 요약을 하고 무어라 잘난 척하며 발제를 하고… 그랬을 테지. 너 역시 별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어. 너는 좀 껄렁한 타입이었잖아. 치밀하거나 추진력 있거나 어느 쪽도 아니었다, 고 나는 믿고 있었지. 때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조직에 대해 네가 얘기해도 나는 진심으로 그런 이야기를 믿지는 않았어. 우리들 사이에 떠돌던 열패감, 그건 80년대의 모든 청년들에게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었어. 다만 나는 그랬던 것 같아. 네가 좀 들떠있구나, 무언가 이 친구를 휘두르고 있구나, 어떤 것에 사로잡혀 있구나…. 그리고 어느 날 너는 사라졌지. 갑자기, 거짓말처럼.


네가 위반했던 긴급조치, 그 위반을 위해 네가 어떤 일을 했는지 사실 나는 지금도 자세히 알지 못해. 이랬다더라, 아니, 저랬다더라, 풍문으로 들은 것뿐. 너를 면회하고 원하는 책을 운반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선배의 부탁을 수락했던 건 부채감이었어. 누구는 감옥엘 갔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 학교엘 다니는 그 일상이 무섭고 두려웠지. 스스로 파렴치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운 날들이었으니. 


삼년형을 받았던 너는 일년 반을 복역하고 풀려났지. 광복절 특사. 영화제목이잖아. 웃기는 영화. 그 소식을 나는 서울로 오는 기차 안에서 들었어. 휴대전화가 있던 시절이 아닌데, 네가 뉴스에 나올 정도의 거물급 수형자도 아니었는데 어째서 그랬을까. 모모한 인사들이 특별 사면되었다, 는 뉴스를 듣고 서울에 와서야 확인했을 거라 여겨지지만 기억은 집요하게 기차 안을 고집하는 거야. 철로 위를 구르는 바퀴소리, 차창을 스치는 여름 오후의 나른한 풍경, 오싹하던 느낌…. 그런 것들이 자연스레 떠올라. 이상한 일이야.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야. 너는 어찌 홀로 그 길을 갔을까. 어쩌면 그토록 용감했을까. 너를 버려두고 우리는 어떻게 그 많은 날들을 태연히 살아냈을까. 나는 왜 그 여름 오후 너에게 묻지 못했을까. 왜 나를 찾아왔는지, 철창을 벗어난 네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책이 아니고, 사식이 아닌 그 무엇이 필요했던 것인지….


할 말을 감추고, 그처럼 외로운 얼굴로 어디로 갔을까, 너는. 그리고 지금 너는 어디에 있을까…. 내 많은 날들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온 날들이 실은 J, 너에게 빚진 거라고 말하면 너에게 위안이 될까. 어쩌면 오히려 미안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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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흠 | 소설가




당신, 잘 지내시오? 실제로는 한번도 본 적 없지만, 내 머릿속에는 지금도 그대의 모습이 선명하다오. 당신도 나를 본 적 없을 테지만 당신 안에 내 모습 있을 테니, 그리 낯설지 않겠거니 짐작해보오. 이렇게 불쑥 편지를 전하게 되어 내 마음 민망함으로 그지없소. 허나 그대를 잊은 적 한번도 없으니 그간의 무심함 용서 바라오. 이해심 많은 사람이니 잘 이해해 줄 것으로 믿으오.





나는 그간 그저 그런 시간을 보내었소. 여전히 바쁘고, 정신없고, 불안정한 나날이 몇 년간 계속되었소. 여러 일을 하느라 일상이라는 것이 사라진 시간이었다오. 무엇을 좇아가는지조차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이었소.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갖고자 욕망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소. 그저 나는 흘러가는 것들에 거의 모든 시간을 던진 셈이었는데, 지금도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다오. 이유 없고 정체 없는 불안함으로 채워진 순간들이었소. 돌아보면 지난 시간이라는 것이 그간 쓴 몇몇 소설로밖에는 남지 않으니, 내 개인사는 그저 불연속적인 연대기에 지나지 않는 것 같소. 강의를 했었던 시간도, 여러 번의 여행도 모두 흘러가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뭔가 손해를 본 느낌마저 든다오. 나는 사라지고 간혹 소설이나 당신 같은 인물로나 남았으니, 일상생활의 시간과 맞바꾼 가치를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 말이오. 개인사로만 보면 작가라는 직업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소. 요즘은 숙명으로 생각하고 잘 받아들이고 있다오.


마흔을 기다리고 있는데 쉽지만은 않은 것 같으오. 당신과 처음 대면했었던 30대 초반과는 내 모습도, 마음도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고백하고 싶소. 인간의 불행을 목격하고 직시하던 자신감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오. 냉정하고 냉소적이었던 시선도 서서히 거두어들이고 있소.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워지고 있는 것이라 치부하고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불안함이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이러다가 소설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제나 머릿속 한 구석에 자리하고 나를 지켜보고 있다오. 나는, 그놈의 눈치를 보고 뭔가를 쓸지 말지 고민하오. 또 모두 다 그 나이, 기다리고 있는 마흔 때문인 것도 같기도 하오.


언젠가 한 독자가 인물을 이렇게 불행과 고통에 던져놓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진 적이 있었는데 요즘엔 자꾸 그 질문을 되새기곤 한다오. 물론 그때마다 당신을 떠올리곤 했소. 당신을 비롯해서 창조된 인물의 인생에 대해 골똘해지곤 하는데, 당신들이 처한 불행과 고통과 숙명을 정말로 내가 모른 척하고 나만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해지곤 한다오.


굳이 대답하자면 나만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소. 나는 때때로 당신들로 인해 고통스럽소. 당신들의 생을 바라보는 것이 버겁고,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있소. 당신들로 인해, 내 개인사는 불연속적인 시간을 쓰고 있소. 나는 당신을 만들어냈지만, 창조주는 아니라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주관하고 관장하는 사람이 아니라오. 나는 그저, 당신을 바라보는 사람에 불과하오. 당신의 생과 고통과 숙명을 바라보는 관찰자에 불과하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혹, 소설 속 인물이 날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오. 불행과 고통, 위선과 허위의 중심에 서게 한 나를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오. 허나, 당신의 삶이 소설을 읽는 사람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위안을 준다는 것, 나는 믿고 있소. 당신과 내가 운명으로 묶일 수밖에 없는 가장 확실한 이유이자, 우리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나는 믿으오. 우리의 숙명인 것을 어쩌겠소.


언젠가는 해야만 했던 고백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하게 되어 어떨지 모르겠소. 다만, 여전히 보고 싶고 때때로 술도 한 잔 하고 싶으오.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는 바로 그것이었소. 한잔 합시다그려. 허나, 언제나 당신을 비롯해서, 여러 인물들이 여전히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뒷모습만 나는 보오. 나는 진심으로, 당신과 당신들이 잘 살길 바라오. 곧, 정말이지 머지않아 나에겐 마흔이 오면, 당신에겐 생의 굴곡이 가라앉고 편안해지면, 마주 앉아 술 한잔하고 싶소. 보고 싶소, 마주앉은 당신의 모습 기다리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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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나의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화곡동이다. 담이 없던 화곡동 마당에 혼자 앉아 털바지 안에 인형 다리를 넣어 아이처럼 업고 벽돌을 빻으며 소꿉놀이를 했다. 진짜 엄마가 되었을 땐 정작 아이를 업고 그렇게 밥하고 빨래하고 “여보, 밥 드세요” 같은 짓을 많이 하지 않았건만, 어릴 때 나는 앙큼하게도 그러고 놀았다. 담이 생기고 옆집에 정수라는 아이가 살게 되었을 때 그 아이와 난 인생의 첫 친구가 되었다. 큼지막한 미끄럼틀이 있는 길 건너의 놀이터에도 함께 다녔고 우리집 안방 장롱의 거울 앞에 서서 사진도 같이 찍었다. 어느 해 비가 많이 와서 개천이 넘쳤던 날엔 흐르는 물에 조리 한 짝을 잃어버려 울며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엄마가 시집 가 처음 살다가 나를 낳았던 집은 갈현동이라고 했다. 시부모 돌아가신 시댁 형제들, 게다가 장가 안 든 아주버님까지 함께 사는 집이었는데, 심통이 좀 있었던 큰아버지는 내가 통통거리며 다니는 게 시끄럽다며 발끝으로 걸어다니라고 했다고 한다(다행이다, 그 서러운 장면이 기억에 없어서). 그러다가 처음 세 식구 단출하게 나가 살게 되었으니 엄마는 오죽이나 좋았을까. 사진 속 세 식구의 얼굴은 저마다 행복하다. 자고 일어나 뻗친 머리를 다스리기 위해 비니 같은 모자를 쓴 젊은 아빠는 인형을 등에 업은 첫딸의 볼에 입을 맞추며 ‘어꾸, 그랬쪄?’라는 표정이다. 집안일을 도와주던 할머니가 봉숭아물을 들여준다며 어르고 꾀어 억지로 할머니 방에서 몇 차례 자고 나니 동생이 생겼다. 주인공이 된 동생 옆 한 귀퉁이에 불쌍하게 앉아 사진을 찍은 것도 화곡동 안방이며, 릿츠 크래커를 상 한쪽에 얹은 동생의 돌상을 차린 곳도 화곡동 마루였다. 동생이 태어나던 해 여름에 산 선풍기는 아직도 여름이면 친정에서 돌고 있다. 


동생이 태어나 부산스러워지기 전, 담도 없던 넓은 세상에 나 혼자였을 때였던 것 같다. 실제의 기억과 사진 속 기억의 혼재일 수도 있는데, 두 돌이 지나던 즈음 겨울 마당에서 벽돌을 빻다가 올려다본 하늘. 공항과 가까워 비행기가 자주 다녀서였을까. 인형아기를 업은 꼬맹이 주부가 가사일을 하느라 쪼그리고 앉았다가 일어날 때는 등을 두드리며 하늘을 보아서였을까. 그 하늘의 농도와 높이와 이유를 알 수 없던 슬픔이 기억나는 건 참 묘한 일이다. 낮잠을 자다가 깨었을 때 느끼는 슬픔은 뭉근하고 질펀한 것이었다면, 그 하늘에서 느껴진 슬픔은 아찔하고 탱탱했다. 


이후 서울의 동서남북으로 이사를 많이 다녔다. 홍익동, 역촌동, 한강을 건너 반포, 방배동. 그리고 결혼 후 한강을 다시 건너 청운동, 부암동, 평창동. 그러다가 또 사정이 생겨 신반포를 찍고 바로 강 건너 강변의 이촌동을 거쳐, 부암동. 그리고는 지금 효자동에 살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강남에 가서는, “이런 데는 사람이 어디 살아요?”라고 묻는, ‘강북사람’이 다 되었다. 그 사이사이, 아이였을 때, 사춘기였을 때, 어른이 되고 나서도, 그 계절 겨울과 상관없이 하늘을 보면 어린 시절 화곡동에서 본 하늘이 생각날 때가 있다. 쨍한 여름 아이들의 함성과 물소리 가득한 수영장 탈의실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 여고 시절 가을운동회를 가느라 가뿐한 기분으로 집을 나섰을 때, 평창동 살던 때 집 아래 카페에 앉아서 창공을 올려다 보았을 때, 그리고 추석을 앞둔 즈음의 알싸한 공기 속에서도, 나는 기시감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그 어린 날의 슬픔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것은 흑인영가 ‘Sometimes I feel like a motherless child’의 가사처럼 ‘엄마 없는 아이’가 되어버린 듯한 적막감과 비슷한 감정이다. 가끔 다리가 휘청거리기까지 하는 그럴 때 난 거의 ‘아, 그날의 하늘이야’라며, 하늘에 도장을 찍어버린다. 소아과에서 예방주사 맞듯 인생의 어쩔 도리 없는 비애를 하늘의 기억으로 치유하려는 걸까. 삶은 그런 거야, 다 누구든 어느 정도 아프고 힘든 거야, 혼자 견뎌내야 하는 거야, 라고 자위할 수 있도록 말이다. 두 돌이면 한창 예방주사 맞을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예방주사를 맞아도 앓을 것은 앓고 지나가듯이 많은 아픈 경험들을 지났다. 나도 그만큼 남들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삶은 그저 안온한 소꿉장난이 아니란 것을 엄중하게 내려다보던 하늘은 내게 말해 주었다. 산다는 건 하나씩 이뤄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 발에 신은 신발을 잃고, 엄마를 잃듯이 하나씩 잃어가는 것이기도 하다고, 어릴 적 나의 동네여, 당신은 그걸 내게 말해 준 것이리라. 


사람 사는 마을이여, 우리를 품고 있는 동네여. 누구나 엄마를 잃는 우리를, 내 아이들을 어여삐 여기시고, 당신들 품에 깊이 뿌리 내려 살 수 있게 좀 도와주시오. 꼭 새 길을 내는 것만이, 새 길을 걷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겠나이다. 가끔 고개 들어 하늘을 보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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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 시인



미국 동부 폭염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며칠 전 전화하셨을 때 제대로 받지 못해 죄송합니다. 보이스피싱 탓입니다. 앞자리 전화번호가 낯설었습니다. 이튿날 같은 번호로 또 전화가 오길래 한참 뜸을 들이다가 받았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음성인데도 0.1초 사이에 선생님인 줄 알았습니다. 저한테 전화를 걸어 “문재니?”라고 운을 떼는 사람은 지구상에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인천 주안역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사실 많이 놀랐습니다. 길거리에서 마주쳤다면 못 알아 뵈었을 겁니다. 그 사이에 30년이 흘렀다는 사실을 저는 놓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40대 초반으로 접어든 것만 생각했지, 선생님께서 50대 중반으로 진입했다는 ‘현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키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는 것도 약간 충격이었습니다. 


 

이문재 시인 (출처: 경향DB)



비 오는 날이면 노란색 분필을 쓰셨습니다. 물끄러미 창 밖을 내다보시던 뒷모습이 얼마나 단정했는지 모릅니다. 가끔 영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칠판 한 가운데 <사랑의 스잔나>라고 영화 제목을 쓰는 날이면 아이들 눈동자가 빛났습니다. 필체까지 눈에 선합니다. 궁서체 달필이었지요. 개교한 지 3년째 접어드는 시골 중학교. 남녀공학이었습니다. 2학년 때, 젊은 여선생님 세 분이 한꺼번에 부임하셨습니다. 영어, 음악, 국어. 영어와 음악선생님에 견주어 국어 선생님은 시쳇말로 까칠했습니다. 눈매가 차가웠습니다. 목소리도 그랬지만,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조차 빈틈이 없었습니다. 


여름방학 숙제가 생각난 것은 제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였습니다. 황순원 교수님 강의를 들을 때 문득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선생님께서 내주신 방학 숙제가 저를 문학의 길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해 여름, 선생님께서 “<소나기>를 다 외워와라”라고 하셨을 때, 아이들은 모두 한숨을 쉬었습니다. 저 혼자 그 숙제를 해갔습니다. 30년 만에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제가 “그때 왜 그런 무지막지한 숙제를 내주셨습니까?”라고 물었는데, 그때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기억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내가 그런 숙제를 냈었니?” 


그 다음 학기에도 사건이 있었습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을 각색해 연극 공연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침 그 소설에 결혼식 장면이 나왔습니다. 짓궂은 친구들이 저를 신랑으로 정하고, 신부를 물색했는데, 그때 제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짐짓 그 여학생과 결혼식을 기대했지만, 그 아이는 연습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공부만 잘하는 다른 여학생과 결혼식을 올려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학교에 들어가서 문학 못지 않게 연극에 심취했던 것도 다 선생님 덕분이었습니다. 


워낙 숫기가 없던 저는 연극부에서 겨우 숨통을 틔울 수 있었습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도 문과대 강의실보다는 연극부 연습실에서 죽쳤습니다. 연극이나 영화 쪽으로 진로를 정할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대학로나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아마 저는 진작에 무너졌을 겁니다.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능력이 저에게는 전무했습니다. 대학 때 정기공연 연출을 맡았다가 절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다녀가시고 난 뒤, 동창한테서 전해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가 시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신다구요. 저로서는 고맙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동창이 그러던데, 선생님께서 그 사이 시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해오셨다구요. 깜짝 놀랐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 쓰는 사람보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크고 높아 보입니다. 저는 아직도 시와 불화합니다. 시에 견주면 제 삶이 너무 작습니다. 지난 번 통화에서 그러셨지요. “얼마 전에 김용택 시인이 다녀가셨는데, 너는 언제 오는 거니?” 글쎄요. “누가 초청을 해줘야 말이지요”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가을에 제 다섯 번째 시집이 나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사이 시와 조금 더 친해져 있겠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선생님 성함을 적어봅니다. 김자, 정자, 임자. 내내 평화로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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