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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에 해당되는 글 69건

  1. 2012.05.29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9) 김홍신 - 내가 숨 쉬는 한 그대는 ‘사사’
  2. 2012.05.28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8) 최정임 - 일 중독 딸
  3. 2012.05.27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7) 승효상 - 폭음과 바꾼 신혼 첫날밤
  4. 2012.05.24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6) 윤호진 - 원망스러웠던 한국
  5. 2012.05.23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5) 구효서 - 단풍 든 암자의 그 모시잎떡
  6. 2012.05.22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4) 문훈숙 - 공연증후군
  7. 2012.05.20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3) 이순원 - 등굣길 어머니의 이슬털이
  8. 2012.05.17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2) 김형경 - 단체 해외여행
  9. 2012.05.15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1) 남경읍 - 자만의 대가
  10. 2012.05.14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60) 심재명 - 지키지 못한 엄마의 마지막
  11. 2012.05.13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9) 배한성 - 대학 1학년 수료
  12. 2012.05.09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8) 안석환 - 나는 한때 똥파리였다
  13. 2012.05.07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7) 마광수 - 결혼 그리고 결혼식
  14. 2012.05.06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6) 이윤택 - 그녀에게 말 걸지 못한 것
  15. 2012.05.03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5) 백기완 - 아, 그 어떤 사랑 이야기
  16. 2012.05.01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4) 이호재 - 영어를 좀 알았다면
  17. 2012.04.30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3) 김대진 - 시간의 여유
  18. 2012.04.29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2) 김홍탁 - 낯선 자극을 놓친 20대
  19. 2012.04.24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1) 이상용 - 남을 돕고 쓴 누명 (1)
  20. 2012.04.22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50) 전무송 - 보신탕 한 그릇

김홍신 | 소설가·건국대 석좌교수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향기는 후회인지 모른다. 부끄러운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은 영혼의 눈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게 다가오는 후회는 태풍이 휩쓸고 간 폐허 같아서 드러내기 싫었다.

 

사람이 스스로 움직이는 동력을 잃으면 낙엽이 된다. 아내가 그랬다. 오랜 세월 병상에서 현대의학의 도움으로 겨우 숨을 쉬었다. 어려서 얻은 천식이 기관지 확장으로 이어지며 평생 병치레를 했고 체중은 39kg을 넘어 본 적이 없으며 마지막 2년 동안은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낙엽 같았다.

 

에어컨 실외기만큼 큰 산소발생기, 코에 줄을 연결하는 실내기에 의지해 숨을 쉬고 병원에 갈 때는 이동용 산소통을 들고 돕는 이가 따라가야만 했다.

 

아내가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그 지경에 나는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내가 주동이 되어 한나라당의 개혁을 위해 ‘국민속으로’를 결성하여 이우재, 이부영,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의원이 탈당했고 나도 약속대로 2003년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12월10일 탈당과 동시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김홍신 전 국회의원 ㅣ 출처:경향DB

 

아내의 병상을 지키던 나는 당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과 김한길 위원장의 간곡한 청으로 정치1번지라는 종로에 공천을 받았다. 투표일 40일 전에 아무 연고도 없는 종로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다.

 

중환자실로 들어가 미동도 하지 않는 아내에게 물었다. “종로에 출마를 하라는데 할까?” 아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어 번 더 묻자 아내가 한참 만에 살포시 눈을 떴다가 감았다. 아내는 두어 달 넘게 눈을 떠 본 적이 없었던지라 기적과도 같았다. 나는 출마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해 버렸다. 제15대 민주당 대변인으로 비례대표 4번을 받아 국회의원이 될 때, 아내가 분명 반대를 했었음에도 나는 아내의 찰나의 눈빛을 찬성으로 단정해버렸다.

 

신경과 근육마비 상태라도 의식이 있어 소리는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아내가 말을 할 수 있었으면 도대체 뭐라고 했을까. 죽어가는 사람 놔두고 무슨 놈의 출마냐고 했으면 포기를 했을까. 선거 40일을 남겨두고 공천을 받아 종로에 갔지만 며칠을 허송세월했다. 정동영 의장이 출마하지 않는 한 민주적 절차를 통해 공천을 결정하자는 출마예정자들의 반발은 거세었다. 그들은 결국 가장 열성적으로 내 선거를 도왔다.

 

아내 없는 선거운동은 힘겨웠다. 아내의 자리를 대신한 건 휴학한 딸이었고 복무 중인 아들은 먼 걸음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선거기간 중에 아내는 단 한마디의 말도 못한 채 마흔 아홉 해밖에 살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딸아이가 싸늘한 엄마 품에 엎드려 “엄마, 이 다음에는 절대 아프지 마”라며 짙게 울었다. 나는 딸아이의 이 한마디만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솟는다.

 

삼우제를 지낼 때까지 나는 종로에 단 한발자국도 딛지 않았다. 출마를 포기할 작정이었다. 아이들이 말리고 주변에서 말리자 나는 마지못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결국 나는 500여표 차이로 낙선했다. 각종 여론조사와 출구조사에서도 당선 가능성이 높았지만 하늘은 나를 쓸 데가 따로 있는 듯 했다. 가장 안타까운 후보, 꼭 당선되어야 할 후보로 선정되는 영광도 동시에 누렸다. 낙선이 확정되었을 때 수고한 모든 사람들에게 “잘 놀다 간다”는 인사를 하고 애써 웃으며 집으로 왔다.

 

마당에는 이름 모를 가녀린 풀꽃들이 피어있었다. 아내는 풀꽃은 물론 잡초마저 뽑지 못하게 했다. 실낱같은 자신의 생명줄을 알기에 그러했으리라.

 

아프리카 스와힐리족은 사람이 죽어도 누군가 기억하는 한 ‘사사(sasa)’라 하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으면 비로소 진짜 죽었다는 뜻에서 ‘자마니(zamani)’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변해버리는 거라고 했다.

 

너무 오래 병상에서 낙엽처럼 살다가 낙엽처럼 떠난 그녀에게 가슴속 오래 삭힌 말을 해야겠다.

 

“내가 살아있는 한 그대는 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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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임 | 정동극장 극장장

 


무용가에서 경영자로 이름을 바꿔 달려온 시간이 벌써 3년째로 접어들었다. 낯선 영역에 발을 들이고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극장의 중장기 발전 3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영지표를 달성하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다.

 

올해 들어 쉰 날을 꼽아보니, 열 손가락도 못 채웠다. 살인적인 스케줄을 견뎌 준 체력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누적된 피로가 나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재검을 종용하는 건강센터의 전화, 떨어지는 집중력, 위험수위를 알리는 건강상태 등. 주말의 숙면 뒤에 막연한 불안감과 죄책감마저 밀려드는 일중독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직업병인 듯하다. 지난 시절을 가만히 되짚어보면 국립무용단에서 활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1977년부터 시작된 나의 춤 여정은 치열하고 화려했다. 우리가 해외공연을 나가던 1970년대에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더군다나 문화예술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였다. 그래서 국립무용단은 세계에 한국과 한국문화를 알리는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사절단이었다. 한번 해외공연을 나가면 3개월씩 순회공연을 했고, 관용여권이 발급되었고, 방송사의 9시 뉴스에 우리의 출입국이 소개될 정도였다. 또 외국 공항엔 늘 대사관 직원들이 마중을 나왔고 공연이 끝나면 대사관에서 공식 만찬이 이루어졌다. 3년 주기로 미주, 유럽, 중남미 등을 순회공연하며 각국의 대통령과 수상 등을 만났다. 현지 교포와 파견 근로자들을 위문하는 문화외교관으로서 기립박수와 수많은 찬사를 받으면서 화려한 무용가로서 삶의 여정을 보냈다.

 

최정임 정동극장 극장장

 

이런 화려한 생활 이면에는 추억이 없는 사생활, 여유와 쉬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생활습관, 비가 내릴지 기온변화가 있을지 일기예보가 가능한 근육통과 관절염, 가족 간의 대소사를 함께하지 못한 내가 있었다.

 

일, 일, 일… 일중독이라는 것도 모른 채 보낸 시간이었다. 난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일하며 놓치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후회는 없다고 늘 말해왔었다. 그러나 나의 깊은 내면의 저편에는 어머니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이 자리하고 있다.

 

어머니, 나의 엄마, 그분은 나의 정신적 지주셨다. 어머니의 병수발을 맡았다는 미명 아래, 또 집안의 가장이라는 역할을 들어 나는 나의 고통만을 끌어안고서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의 외롭고, 두렵고, 고통스러웠을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었다. 의식불명 상태의 어머니를 두고, 도망치듯 3개월의 해외공연을 떠났다. 귀국 전날 꿈속에서 뇌출혈로 인해 마비되었던 다리를 절지 않고 찾아온 어머니는 나에게 하직을 고했다. 죽을 것 같은 공포에 휩싸여 귀국을 했다. 어머니는 중환자실에서 딸에게 한을 남기게 될까봐 마지막 힘을 다해 기다리고 계셨다. 두 달 이상 감겨있던 눈을 뜬 어머니는 서럽게 우는 막내딸을 슬며시 바라보신 후 이내 눈을 감으셨다.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떠나셨다. 날씨가 궂은 날 근육통이 엄습해 오면 누워계신 어머니의 다리 한번 주물러드리지 못했던 기억에 늦은 용서를 빈다.

 

시간과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절감하고 있다. 지금은 용기를 내어 가족, 친구, 후배, 제자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어떠한 좋은 감정도 가슴에 쌓아두기만 한다면 소용없다는 걸 어머니가 가르쳐주셨기에 어색하지만 용기를 낸다. 나는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다짐해본다. “앞으로는 후회하는 일을 만들지 않고, 추억이 많은 사람이 되기 위해, 또 행복하게 일하는 딸이 되기 위해 나의 목표를 수정해 나가고 있습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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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1980년 여름 나는 빈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도피였다. 그해 5월의 광주를 보는 일이 너무 힘든 나는 더 이상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미국 땅은 가기도 싫었지만, 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떠나야 했으므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출신의 요셉프라처 신부의 도움을 받아 빈 공과대학의 입학허가서를 받아 쥐고 8월 말 비행기를 타게 된다.

 

나는 71학번이니 유신체제가 본격 가동될 때 대학을 다녔다. 휴교령으로 으레 학교수업은 비정상이었지만 간혹 듣는 강의도 신통치 못해 나는 대학을 겉돌았다. 시위대에 가담하는 것도 잘 허락되지 않았다. 그 당시 데모의 주동이던 고등학교 선배가 내게는 건축 공부에 전념하라고 말했던 것이다. 아마 미친 듯이 팔팔거리던 내 꼴을 보다 못해 한 말이었지만 그의 말은 명령이었다. 그 이후로 건축만이 내가 살 수 있는 길이었다.

 

1974년 말 이미 한국 건축계의 거목이었던 김수근 선생이 이끄는 ‘공간’에 들어갔다. 선생은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졌는데 그 권위가 나는 싫었다. 어쩌면 그의 카리스마를 깨기 위함이었을까? 나는 공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죽기 살기로 건축을 붙들고 싸웠다. 집에 가는 날이 거의 없었다. 입사 첫해에 가장 밤을 많이 새운 직원으로 뽑혔을 정도였다. 세상과 절연했다. 그렇지 않으면 길거리에 나가 돌을 던지고 있어야 했으니, 건축은 내게 사투였다.

 

승효상 이로재 대표 ㅣ 출처:경향 DB

일이 끝나 시간이 비면 술에 탐닉했다. 소주 일곱 병, 여덟 병… 술의 양은 늘 늘었고 미친 듯이 마셨다. 그 비어 있는 시간을 맨 정신으로 견딜 수 없었다. 그런 꼴을 좋아할 이가 있었을까?

 

빈행이 확정된 것은 6월 말이었다. 9월 개학을 두 달 남긴 시점이었다. 돌아올 기약이 없는 이별이라 사무실과 가족 모두를 내 일상에서 떼내어야 했다. 김수근 선생의 비서가 있었다. 사무실 동료들 모두 노리는 재원이었지만 나는 언감생심이었다. 늘 꾀죄죄한 몰골과 핏빛 어린 눈으로 사무실을 휘젓는 나는 기피대상이었고, 월급날만 되면 외상 술값을 받으려고 나를 찾는 술집 웨이터와 마담들이 사무실 입구에 줄줄이 섰으니 망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이 여인을 길거리에서 마주쳤다. 콧대 높은 그녀도 내가 곧 떠나는 것을 알아서인지 차 한잔 하자는 내 말에 순순히 따라와서 맥줏집에서 마주 앉았다. 그런데 정말 갑작스레 그 자리에서 내가 청혼하는 일이 벌어졌다. 코웃음 받을 일이 순간 두려웠는데, 놀라지 마시라, 그녀는 내 돌발적 발언에 일주일의 시간을 달라고 하였고 불과 닷새 후에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허락을 받았다. 모두가 놀랐지만, 우리는 내가 떠나기 일주일 전에 약혼식을 치렀다. 전광석화였다. 6개월 후 돌아와서 결혼식을 거행한 후 같이 떠나기로 했다.

 

나는 프라처 신부의 도움으로 빈 시내에 있는 한 수도원에서 살게 되어 있었다. 그 수도원은 은퇴한 신부들이 죽을 때까지 기거하는 곳인데, 문제는 식사였다. 맨날 매끼마다 검은 소시지 두 개와 마른 빵이 식사의 전부였다. 숙식이 무료여서 돈 없는 내겐 감지덕지의 장소였지만 이 시커먼 소시지를 평생 먹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약혼녀를 설득해 빈에서 결혼식을 치르기로 하고, 나는 4개월 만에 수도원을 떠났다.

 

결혼식은 빈 남쪽 시골마을의 오래된 성채 교회에서 모두 열세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첫눈이 왔다. 그 아름다운 풍경 속의 결혼식은 꿈결 같은 시간이었다. 온갖 회한이 몰려왔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다. 4개월을 금주하며 지냈던 내가 분에 넘치는 행복을 견디지 못하고 피로연에서 폭음한 것이다. 비틀거리며 집에 오던 중 정신을 잃고 길거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지나가던 행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집에 와서 누웠겠지만 이역만리를 건너온 신부에게 그 밤은 악몽이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나는 사태의 심각성에 후회막급이었으나 돌이킬 수 없었다.

 

그 후 우리 부부의 관계가 어떠했을 것인가는 상상에 맡긴다. 힘의 균형에서 이미 밀린 나는 부부싸움을 할 수 있는 남자들의 대등한 위상을 여태 부러워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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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진 | 에이콤인터내셔널 대표

 

 

“도대체 난 왜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서!”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이렇게 원망이 가득 담긴 후회를 해본 적이 있다.

 

사실 연극을 만들며 연출가로서의 미래를 찾던 나에게 1980년대의 한국은 그리 호의적인 곳은 아니었다. 항상 배가 고팠고, 집에 갈 차비도 없어서 먼 길을 걸어 다녔다. 그 와중에도 극단 사람들의 열의만으로 부족한 다른 부분을 채워가며 공연을 올렸다. 한마디로 전망은커녕 고달픈 삶이 보장되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 1982년 처음으로 해외연수차 바다를 건너 다다른 영국은 딴 세상이었다. 연수생으로선 운 좋게도 내셔널시어터에서 하는 프로덕션의 제작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옵서버의 기회를 얻었는데, 연출가의 상상이나 아이디어가 제시된 다음날이면 그것이 그대로 무대에 형상화되는 놀라운 과정들을 지켜보았다. 이전까지 매번 연극을 올릴 때마다 이런저런 한계에 봉착해 처음에 품은 큰 그림은 사라지고 앙상한 뼈대만 남게 되는 게 당연했던 나에겐 이렇게 맘먹은 대로 연출이 되는 체계적인 제작 시스템들이 생소하고 신기하고 몹시 부러웠다. 이후 런던에서 처음 본 뮤지컬 <캣츠>에 큰 자극을 받아 뉴욕으로 건너가 뮤지컬 공부를 시작했다. 충격적일 만큼 큰 감흥을 줬던 뮤지컬들이 하루에도 수십편씩 공연되는 브로드웨이에 언젠가 내 손으로 만든 우리나라 뮤지컬을 올리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때가 1987년이었다.

 

윤호진 에이콤 인터내셔널 대표 l 출처:경향DB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세계시장에 내놓을 우리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명성황후>라는 뮤지컬이 탄생했고, 국내 성공을 발판 삼아 기필코 뉴욕 무대에 올리겠다는 일념으로 1997년 미국으로 떠났다.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우리의 이야기를, 한국 뮤지컬로는 처음으로 뉴욕 브로드웨이에 올린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10년 만에 내 스스로 다짐했던 약속을 지킨 것 같아 다소 들떴고, 역사적인 공연이니만큼 큰 반향이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문화산업의 잠재성이나 홍보효과에 대해 주목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변변한 후원을 받지 못해 공연비 모금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뉴욕 링컨센터 대관도 수월치 않았다. 온갖 멸시를 감내하면서 간신히 대관을 하고 나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껏 배고파도 후회한 적 없었고 돈이 없어도 후회한 적 없었다. 런던과 뉴욕에서 그네들의 제작시스템과 현저한 격차를 느꼈으면서도 신기하고 부러웠을 뿐, 항상 한국만의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고 나는 그것을 기필코 해냈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한껏 구애하고 온 마음을 바쳤던 상대로부터 냉대를 받고 돌아선 기분이었다. 차라리 다른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이렇게 냉대받으면서 작품하진 않았을 터인데, 그간 쌓이고 쌓인 서운함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이 나라에 태어난 게 후회된다는 원망이 절로 터져나왔다. 그러나 뉴욕에서의 공연 성적은 누구도 예상 못할 만큼 성공을 거두었고, 그 뒤로 한국에서 17년 동안 뮤지컬 <명성황후>가 공연되고 있다. 그리고 2009년부터 <명성황후>의 옥동자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안중근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영웅>까지 두 번째로 브로드웨이 무대를 밟았다. 이 작품 또한 뜨거운 반응을 얻었으며 지금도 앙코르공연 때마다 국내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만의 이야기였기에 뉴욕 무대에 내세울 희소성이 있었고 역시 우리들의 이야기였기에 오랫동안 한국에서 공연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다 보면 환경의 제약 때문에 뜻대로 일이 안 풀리는 경우가 많은데 부질없이 원망하고 후회할 때가 있다. 하지만 후회보다 오기를 품고 상황을 뚫어내고 나면 그렇게 야속해보였던 것들이 오히려 나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준 고마움으로 돌아오곤 한다. 나의 15년 전의 후회가 정반대로 뒤집혔듯이 말이다. 나는 한국에서 뮤지컬을 해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한국에서 뮤지컬을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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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 소설가

 

 


새벽 두 시. 나는 어느 집 담장에 붙어 섰다. 스물두 살 청년이었던 내 손에는 M16 소총이 들려 있었다. 숨을 죽이고 집안의 동태를 살폈다. 내 곁의 동료도 긴장한 눈을 번뜩이며 철모를 깊숙이 눌러 썼다. 종이를 태운 검은 재를 얼굴에 바르고 있어서 달이 없던 밤이었으나 대원들의 눈은 희끗거렸다. 소대장과 파견 경사가 대문을 두드리며 물은 직후였다.

 

“○○○씨 계십니까?”

 

집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나는 ‘유사시’란 말을 한번 더 되새겼다. 병영의 국기 게양대에 검은 리본이 걸렸을 때도 누가 죽었는지 몰랐다. 10월의 하늘에 무심하게 펄럭이는 조기를 보며 아침을 먹고, 오줌을 누고, 오전 훈련을 위해 장비를 점검할 때 내무반 스피커가 대통령의 서거를 짧게 알렸다. 조기가 먼저고 뉴스는 나중이었다. 사병에게는 늘 그랬다. 이유도 모르고 7일 동안 양말과 전투화를 신은 채 잤다. 전투복을 벗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광주 때문이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그때부터 장병들의 입에서 ‘유사시’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튀어나왔다. 어째서 새벽 두 시에 민가를 포위하고 사람을 잡아들이는지도 사병들은 며칠 혹은 몇 주가 지나야 알게 될 터였다. 피살에 의한 서거였다는 것도, 광주의 참상도 훨씬 나중에 알게 되었듯이.

 

소설가 구효서ㅣ 출처:경향DB

 

한번 더 소대장과 파견 경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이 없자 그들은 조심스레 집안으로 들어섰다. ‘유사시’를 대비해 나는 담 밖에서 총을 움켜쥐었다. 소대장이 전투화를 신은 채 툇마루로 막 올라서려는 순간, 희끗한 것이 담장을 넘었다.

 

“잡아!”

 

소대장이 외쳤고, 잠옷 바람으로 담장을 넘던 남자는 나를 비롯한 십 수 명의 무장 대원에게 무참히 제압당했다. 그런 일은 아침이 되도록 계속되었다. 삼청교육대 입소 대상자들이었다. 삼청5호계획이라는 말도 나중에 들었다. 사병이었던 나는, 이처럼 이유도 모른 채 동원됐고 일의 전말도 나중에야 알았다.

 

그래서 후회도 이처럼 늦은 걸까. 이처럼 늦은 게 정당한 걸까. 후회라니. 어째서 사과가 아닌 후회일까. 사과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누구도 그때 그곳에 함께 있었던 장병들을 대표할 수 없다. 그러니까 후회란, 사과의 개인적 전단계라 할 수 있다. 사과를 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그것은 나 개인의 반성과 후회를 거쳐 도달해야 할 곳이다.

 

그해 가을 새벽 비상 출동도 잊히지 않는다. 같은 방식으로 사찰을 포위하고 스님들을 색출했다. 검거선풍이 일던 때라 대부분의 색출 대상 스님들은 미리 잠적해 버리고 없었다. 높은 산을 오르내렸으나 번번이 허탕을 쳤고 아침을 맞았다. 피로한 병사의 눈에도 가을 단풍은 눈부셨다. 법당을 수색하고 나서는 우리에게 공양주 보살이 모시잎떡을 내밀었다. “배고플 텐데 이거라도 좀.” 밥솥에 쪘는지 갈매빛 떡에 밥알이 듬성듬성 묻어 있었다. 스님 잡으러 온 군인한테 떡이라니! 외면하고 돌아서면 그만일 것을, 나는 보살에게 면박을 주고 말았다.

 

후회한다. 사과는커녕 이제껏 후회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사실은 작고 귀여운 후회 하나를 여기에 쓰려 했다. 원고지 열 장 정도의 분량이라면 그런 내용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무시로 나를 찌르는 후회가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인정했다. 이제껏 후회하지 않은 게 아니라, 후회를 억눌러 왔다는 것을. 그때는 군인의 신분이었고 나 개인에게 허용된 자유가 없었으며 따라서 책임은 나에게 있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면 나치스 친위대 장교 아이히만과 태평양전쟁 전범들의 변명까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인류와 평화에 대해 사유하지 않은 게 그들의 죄라면, 나의 죄는 후회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비로소 이 작은 지면에 후회의 글을 적는다. 후회하지 않았거나, 후회했더라도 그것을 애써 누르거나 모른 체한 것, 그리고 너무 때늦었다는 것 모두, 후회한다. 그러나 더 늦기 전에 이 후회가 적절한 사과의 방식을 찾아내길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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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훈숙 | 유니버설발레단 단장

 


누군가 내게 수많았던 공연 중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워싱턴의 작은 발레 스튜디오에서의 첫 공연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때 맡은 역할은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도, <지젤>의 여주인공도 아닌 탐스러운 긴 꼬리를 가진(두툼한 털옷 때문에 땀을 흠뻑 적셔야 했던) 다람쥐 역할이었다. 발레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맡은 첫 배역이라 토슈즈를 처음 신을 때처럼 굉장히 흥분되고 설렜던 기억이 난다.

 

미국에서 살다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연고도 없는 한국 땅으로 온 열 살 무렵, 리틀엔젤스 예술단에 입단한 나는 비록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순회공연의 경험을 통해 무대의 경건함에 대해 남들보다 좀 더 일찍 눈을 뜨긴 했다.

 

하지만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마냥 신나게 즐기기만 했었다. 그러던 내가 선화예술학교에 입학해 발레를 운명처럼 다시 만났고, 1984년 유니버설발레단 창단 멤버가 되면서 발레를 ‘업’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장 l 출처:경향DB

 

갓 스무 살이 넘은 나에게 주어진 주인공 역할, 무대를 장악하며 작품을 이끌어가야 하는 부담감, 그리고 세간의 주목과 관심은 나로 하여금 늘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했다. 이른바 ‘공연증후군’이라고 해야 될까? 공연 당일 이른 아침부터 이마에 ‘접근금지’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싶을 정도로 말도 없어지고 예민해져만 갔다. 그러다 보니 나는 어떤 작품에서든 한 번도 내 공연을 만족해 본 적이 없다. 늘 아쉽고 부족한 것 같아 내 자신을 엄하게 다스렸다.

 

<백조의 호수> 공연 때의 일이다. 1막이 끝난 후 2막 흑조 분장으로 고쳐야 하는데, 그날 나는 분장을 완전히 지운 채 쉬는 시간 내내 울었다. 또 어느 날은 내 공연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공연장이 있는 서초동에서 한남동 집까지 울면서 걸어간 적도 있었다. 나의 이 ‘공연증후군’은 2001년 마지막 무대까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나의 이 ‘공연증후군’을 세계적인 거장인 고 루치아노 파바로티도 앓았다고 하여 내가 겪었던 그간의 마음고생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며 큰 위로를 받았다. 파바로티가 누군가. 세계적인 명지휘자 카라얀이 엔리코 카루소 이후 최고의 테너라고 칭송해 마지않던 테너 중의 테너 아니던가. 그런 그도 평생 ‘공연증후군’을 떨쳐내지 못했으며, 심지어 생전에 “내가 겪은 무대공포증을 내 자신의 가장 큰 적에게조차도 경험케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겼다고 하니 ‘공연증후군’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어느새 올해로 은퇴한 지 11년째가 되었고 이제는 후배인 발레단 단원들의 공연을 지도하며 지켜보고 있는 입장에 있다. 특히, 막이 올라가기 전 토슈즈 끈을 매만지며 송진을 슈즈에 묻히는 단원들을 보노라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무대공포증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하며 객석으로 내려간다. 물론 이들도 어느 정도의 ‘공연증후군’을 겪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단원들은 우리 세대보다는 그 긴장감을 즐길 줄 아는 것 같다.

 

요즘 춤추는 무용수들을 보고 있으면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것은 완벽함을 추구하되 무대에 오르는 내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럽게 대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공연 전의 긴장은 꼭 필요한 에너지이다. 그 긴장감 없이는 공연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맨 뒷자리에 앉아서 공연마다 후배들을 지켜보는 나는 지금도 긴장은 하지만 그들의 춤을 즐기면서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그들을 바라보며 가끔 다시 무대에서 저들과 함께 즐기며 춤추고 싶노라고 나지막이 되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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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 소설가

 


중학교 때 나는 학교를 다니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가끔 결석도 하고, 또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학교에 가지 않은 날도 많았다. 우선 집에서 학교가 너무 멀었다. 매일 사오리가 넘는 길을 아침저녁으로 걸어다녀야 했다. 몸도 지치고, 학교에 가도 공부하는 재미가 없었다.

 

마음이 그러니 하루씩 결석을 하게 되었다. 처음엔 산에 가서 놀다가 점점 더 늘어 아예 집에서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날도 나는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다. 어린 아들이 그러니 어머니로서도 한숨이 나왔을 것이다.

 

“그래도 얼른 교복을 갈아입어라. 어미가 신작로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그래서 마지못해 교복을 갈아입었다. 그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어머니가 먼저 마당에 나와 나를 기다리기 때문이었다. 나는 잠시 전 어머니가 싸 주신 도시락까지 넣어 책가방을 쌌다.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가자 어머니가 지게 작대기를 잡고 계셨다.

 

소설가 이순원 ㅣ 출처:경향DB

 

“그건 뭘 하게?”

 

그 시절 나는 어머니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글쎄, 너 학교 가는데 필요할 것 같아서 그러지. 가방 이리 줘라.”

 

하루 일곱 시간씩 공부하던 시절이었고, 무게가 만만찮은 가방이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한 손엔 내 가방을 들고 또 한 손엔 지게 작대기를 들고 나보다 앞서 마당을 나섰다. 나는 말없이 뒤를 따랐다. 그러다 신작로로 가는 산길에 이르러 어머니가 내게 가방을 내주었다.

 

“자, 여기서부터는 네가 이 가방을 들고.”

 

나는 어머니가 내가 학교에 가기 싫어하니 중간에 학교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샐까봐 신작로까지 데려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으로 함께 신작로로 가자고 한 것이 아니었다.

 

“너는 뒤따라오너라.”

 

거기에서 내게 가방을 넘겨준 다음 어머니는 두 발과 지게작대기를 이용해 내가 가야 할 산길의 이슬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몸뻬 자락이 이내 아침 이슬에 흥건히 젖었다. 어머니는 발로 이슬을 털고, 작대기로 이슬을 털었다. 그렇다고 뒤따라가는 내 교복 바지가 안 젖는 것도 아니었다. 신작로까지 15분이면 넘을 산길을 30분도 더 걸려 넘었다. 어머니의 옷도 그 뒤를 따라간 내 옷도 흠뻑 젖었다.

 

“앞으로는 매일 털어주마. 그러니 이 길로 학교를 가. 다른 데로 가지 말고.”

 

그 자리에서 울지는 않았지만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어머니가 늘 이슬을 털어주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날 가끔 그렇게 내 학교길의 이슬을 털어주셨다. 또 새벽처럼 일어나 먼저 이슬을 털어놓고 오실 때도 있었다.

 

이렇게 어머니가 등굣길의 이슬까지 털어주면 그 뜻을 알고 열심히 학교에 다녀야 하는데, 그런 약발이 오래 가지 못해 보름쯤 후면 다시 학교를 가지 않고 산에서 놀거나 집에서부터 결석을 하곤 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키워보니 그때 어머니 마음을 그대로 알 것 같다.

 

이 세상에 태어나 내가 저지른 잘못이 어디 한두 가지일까만은, 또 후회스러운 일 역시 어디 그것뿐일까만은 어린 날 학교를 가지 않아 어머니가 자식의 장래에 대해 기도하듯 산길의 이슬을 털게 한 것만큼 마음 아픈 일이 없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때 어머니가 이슬을 털어주신 길을 걸어 지금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올해 어머니는 여든넷이시다. 돌아보면 꼭 그때가 아니더라도 어머니는 내 살아온 길 고비고미마다 이슬털이를 해주셨다. 아마 그렇게 털어내주신 이슬만 모아도 작은 강 하나를 이루지 않을까 싶다.

 

아들은 어른이 된 뒤에야 그때 어머니가 털어주시던 그 이슬털이의 의미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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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 소설가

 

 

그것은 나의 첫 외국여행 경험이었고, 그곳은 체코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이었다. 함께 여행하던 일행은 일곱 명이었는데 우리는 독일, 오스트리아를 거쳐 체코로 오는 동안 안내인의 도움을 받으며 줄곧 한몸처럼 움직였다. 프라하 성을 관람하고 카를 다리를 건너오는 동안에도 함께 걸었다.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 이르렀을 때, 시간이 남았는지 안내인은 처음으로 자유시간 30분을 주었다.

 

도시는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얀 후스 기념상 앞에 서서 한바퀴 둘러보니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간 골목이 대여섯 개쯤 되었고, 골목마다 특색있는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모든 골목들을 들어갔다 나오기에 30분은 짧은 시간이었다. 레코드와 서점들이 있는 골목에 들어가 집시 뮤직 테이프를 들어보고, 크리스털 제품과 인형들을 주로 파는 골목에서 작은 크리스털 공예품 하나를 샀다. 그리고 후회했다.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단체여행을 선택한 것을. 또한 다짐했다. 언젠가는 이 도시로 돌아와 못 가본 저 골목들을 둘러보리라고.

 

오래도록 나는 후회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후회란 시간, 감정, 열정을 과거의 텅 빈 구멍으로 흘려보내는 소모적인 행위라 여겼다. 살면서 실수나 실패가 있었다면 그것을 교훈으로 삼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 가지’라는 주제의 청탁을 받고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는 후회되는 일이 한 가지만이 아니었다. 매순간, 모든 일에서 무수히 후회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설가 김형경 ㅣ 출처:경향DB

 

20여년 전 어느 날, 추운 겨울 거리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여m 앞쪽에서 할머니 한 분도 무거워 보이는 보따리를 든 채 나처럼 택시를 기다리시는 것 같았다. 마침 저쪽에서 택시가 다가와 내 앞에 멈추어 섰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할머니께 양보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약속시간에 늦었는데. 두 마음은 찰나의 섬광처럼 충돌했고 다음 순간 나는 이미 택시를 타고 있었다.

 

그날 남은 시간 내내 겨울 거리에 서 계시던 할머니 모습을 머리에서 지워낼 수 없었다. 그 분이 혹시 몸이 불편하셨던 건 아닐까, 그 보따리가 너무 무거운 것은 아니었으면…, 이토록 마음이 쓰이는 것은 위선 아닐까. 나중에는 차라리 약속시간에 조금 늦는 편이 한결 나았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토록 복잡하고 불편한 마음이 곧 내 행위에 대한 후회였을 것이다.

 

나는 늘 후회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길을 묻는 노인에게 손짓만으로 길을 알려드린 점, 먼 길 가는 후배에게 차비를 더 넉넉히 주지 않은 일, 낯선 이에게 친절보다 경계의 눈길을 보낸 일, 바가지 씌운 사람에게 혼자 화낸 일 등. 그런 일들에 대해 뒤늦게 마음이 불편해지면 그것은 후회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 후회의 순간들이 있었기에 동일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었다. 불편한 마음을 안은 채 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같은 상황이 오면 다른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나는 후회했다, 고로 나는 변화했다.

 

오래전에 꿈꾸었던 프라하 단독 여행은 아직도 꿈꾸는 중이다. 대신 그 후 한동안 여행은 무조건 혼자 가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가보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둘러보고, 머물고 싶은 시간만큼 충분히 머무는 것을 즐겼다. 그것이 여행이라는 행위의 본질에 더 깊이 닿을 수 있는 방법 같았고, 내면과도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단독 여행의 미덕들을 충분히 누렸다고 느꼈을 무렵 다시 단체여행의 일원으로 끼어 유람하는 안락함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즈음은 내게 생이 몇 년쯤 남았을까 생각해본다. 이대로 살다가 죽을 때 후회하게 될 일은 무엇일까 꼽아보기도 한다. 이를테면 더 많은 햇볕을 쬐지 못한 일, 더 오래 숲길을 걷지 못한 일, 더 많은 꿈을 꾸지 못한 일 등.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본다. 나는 후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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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읍 | 뮤지컬배우

 


배우를 ‘딴따라’라고 하던 1970년대 후반, 난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세종문화회관 소속 ‘서울시립가무단’(현 서울시립뮤지컬단)에 입단했다.

 

고등학교 때는 성악과 진학을 꿈꾸었지만 가정 형편상 레슨을 제대로 받지 못해 결국 포기했다. 책 외판원과 신문팔이, 채소와 과일 리어카 행상을 하면서 겨우 학비를 마련해 재수를 했다. 앞날에 대한 고민을 하던 차에 산에서 우연히 만난 영화 연출가의 제안으로 연극을 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대학 연극학과에 진학했다. 연극과 선배들 중에서도 연기보다 피아노 앞에서 매일 노래 연습만 하는 분들과 자연스럽게 친하게 되면서 ‘뮤지컬’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다.

 

그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대학 자체적으로 무대에 올린 뮤지컬 <가스펠> 공연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의 문화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당시 대한민국에 하나뿐이던 뮤지컬 단체 ‘서울시립가무단’에 입단하기로 결심했다. 학교 수업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입단 시험에 필요한 시창(악보 보고 바로 노래 부르기), 가창, 연기, 무용 등을 공부하는데 쏟아부었다.

 

뮤지컬배우 남경읍

학교 도착시간은 매일 새벽 5시30분이었다. 그때부터 나만의 개인 연습 스케줄에 맞춰서 발성, 체력 연습, 탈춤, 기계체조, 피아노 연습, 발레, 모던발레, 재즈, 한국무용, 연기과제, 리포트 쓰기 등을 소화해냈다.

 

날이 밝아오면 6층 건물인 극장 옥상에 올라갔다. 눈이나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난간에 올라서서 걷기나 조깅을 날마다 반복했다. 떨어지면 사망 아니면 중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했다.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다. 하지만 담력과 집중력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그런 미친 짓을 한 것 같다. 덕분에 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시립가무단’에 입단할 수 있었다.

 

세계적인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가무단에 입단했지만 나의 상품가치는 너무나도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열정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새로운 마음으로 배우수업을 임했다. 5시30분 연습실 도착, 밤 11시에 퇴실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20대 초중반의 ‘나 홀로 연습실에서!’는 꽃놀이, 당구치기, 연애하기, 술 마시며 친구들하고 놀기 등 항상 무언가의 유혹을 받았다. 나는 그 유혹을 뿌리치고 연습에만 매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머리를 빡빡 깎고 쓰디쓴 ‘마이신’ 가루를 샘플병에 담아서 의지가 약해질 때마다 한 병씩 마셨다. 저녁 9시30분 자동으로 연습실 전기가 끊어지면 창밖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으로 대본과 악보를 보며 연습을 거듭했다. ‘형설지공’을 떠올리며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던 시간이었다.

 

연습량에 항상 자신감이 있던 터라 어느 순간 나는 자만에 빠졌다. 그러나 그 결과는 뼈아팠다. 내 인생에서 평생 후회로 남은 큰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다. 작품에 출연할 때는 노래 연습을 열심히 했으나 작품이 없는 기간 개인 연습 시간에는 노래 연습 시간의 비중을 많이 두지 않았다. “노래는 이 정도면 충분해”라는 자만의 결과였다.

 

얼마 후 서울시립가무단의 뮤지컬 <판타스틱스>의 주역을 운 좋게 맡았지만 4개월간의 연습 기간 내내 연출자로부터 혹독한 꾸중을 들어야 했다. “노래소리가 곡하는 것 같다”라거나 “배우할 생각 접고 차라리 어머니의 뒤를 이어 생선이나 팔아라” 등의 모욕적인 말을 쉼 없이 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때는 억울한 마음만 들었다. 당시 연출자의 말이 진심임을 깨닫고 내가 좀 더 겸손한 마음으로 노래 연습에 더 매진했다면 오늘날 노래 잘하는 뮤지컬계 젊은 후배들과 견줘도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됐을 텐데….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씨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의 예술 인생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다짐을 한다. “남경읍, 정신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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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명 | 명필름 대표

 


2006년 4월5일, 조금은 쌀쌀한 날씨였지만 하늘은 더없이 맑은 날이었다. 한 달여의 병원생활을 마친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시는 날이기도 했다. ‘근위축성측상경화증’. 흔히 ‘루게릭병’으로 불리는 불치의 병을 얻어 3년 넘게 투병하던 엄마가 급기야 호흡근까지 마비되는 지경까지 이르러 혼수상태로 응급실로 실려 가신 지 한 달. 가족의 허락 하에 목에 구멍을 뚫어 인공호흡기를 달아 생명을 연장하는 시술을 마치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시는 날이었다.

 

매일 중환자실에 들러 엄마의 상태를 보고 가족이 돌아가며 입원실을 지켰던 터라 엄마가 돌아오시는 그 날은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 아버지와 올케 언니가 퇴원수속을 밟고 모셔오기로 해서 나는 그냥 회사로 출근했다.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점심으로 쌀국수를 먹으며 몇 시간 후 퇴근해서 만날 엄마 얼굴을 떠올렸다.

 

3년 전부터 엄마는 손가락의 힘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그 증상이 서서히 손에서 발과 다리로 이어지고 결국엔 온 몸이 마비되고야 말았다. 즉 운동신경 세포가 모조리 죽어버린 것이다. 6개월 전부터는 아예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음식물을 삼킬 수 없어 배에 구멍을 뚫어 호스를 달아 주사기로 식사 대용의 음료 등을 넣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신은 여전히 형형히 빛나고 있어서 우리들을 바라보고 웃고 슬퍼하고 걱정하고 있음을 눈빛과 입 표정으로 전하셨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정신이 딱딱한 돌처럼 굳어가는 육체의 감옥에 갇혀버린 형국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몸이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하는 형벌. 인공호흡기 덕으로 몇 년은 더 사실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들은 게 며칠 전이었다.

 

영화제작사 ‘명필름’ 심재명 대표 ㅣ 출처:경향DB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와 진행하고 있는 시나리오 회의를 한 다음, 막 제작을 시작한 영화의 촬영 본을 확인하며 직원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 3시쯤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니 엄마가 죽었다.” 그건 마치 시커먼 동굴 저편에서 울려 퍼져 나오는 기분 나쁜 쇳소리 같았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사무실에서 겨우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집으로 한달음에 달려갔으나, 이미 엄마는 숨을 거두고 정물처럼 침대에 누워계셨다. 귀여운 손녀가 할머니의 퇴원기념으로 서툴게 짠 분홍색 목도리를 보고는 미소를 지어 보이신 게 불과 한 시간 전이었다는데….

 

엄마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지 못한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짐승처럼 울었다. 함께 살면서 소변과 대변을 받아내고 주사기로 음식물을 넣고 아기처럼 가벼워진 몸을 안아 목욕을 시켜드렸던 그 긴 시간들이 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미친 듯이 억울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남매를 마지막으로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엄마가 얼마나 쓸쓸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왜 하필이면 오늘따라 퇴원 수속을 가족에게 미루고 회사에 갔을까. 한 나절쯤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데…. 손아귀가 부서질 것처럼 오래 힘주어 쥐고 있었던 소중한 것을 한순간에 놓쳐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엄마는 마치 내가 피곤한 눈을 비비며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날아가버린 새처럼, 그렇게 떠나버리셨다.

 

내 인생에 후회되는 것이 너무나 많다. 지난 일에 연연해하고 속을 끓이는 못난 내 성격은 매일 후회하고 매년 후회한다. 삶을 10년 단위로 끊어 후회하는 것들을 쌓아 창고에 넣어버리고 문을 잠그듯 애써 마음을 다잡고 살고 있지만 ‘엄마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것은 여전히 후회된다. 언제쯤 이 후회의 기억이 흐려질지, 아직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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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성 | 성우

 


내 또래 세대들은 사내녀석은 절대 눈물을 흘리지 말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중학생 때부터 가장 노릇을 했던 나는 어려운 일이 참 많았지만, 울었던 기억은 좀체 없다. 그랬던 내가 그 날은 마구 울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6~7년 전 일이다.

 

서울예술대학교 겸임교수 임용에 최종학력 증명서가 필요했다. 내가 다녔던 서라벌예술대학교가 중앙대학교로 편입되어서, 서울 흑석동에 있는 중앙대 총무과를 찾아가 서류 신청을 했다. 잠시 후 여직원이 서류를 내주면서 팬인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다며 환영해 주었다. 그러면서 “선생님 졸업을 못하셨나요? 방송학과 1학년 수료라고 되어 있네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아, 네네~”만 했다.

 

그런데 다정도 병이라고 왜 졸업을 안 했느냐, 재수강을 신청하고 등록금을 내면 졸업할 수 있다는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그 직원은 내가 졸업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해서 한 좋은 뜻이었다. 그 순간 긴 시간 참아왔던 내 서러움 보따리의 실오라기가 풀린 것처럼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난 얼른 밖으로 뛰쳐나왔다. 햇살은 마냥 눈부시고 캠퍼스는 싱그러웠다.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나무로 가려진 벤치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에 안도가 돼서인지, 엉엉 꺼이꺼이 울음이 마구 터져나왔다.

 

성우 배한성 l 출처:경향DB

 

1960년대는 가장이 직업이 있어도 살기 고달픈 시절이었다. 경기중과 서울대 광산학과를 졸업한 아버지는 좌익사상을 가져 6·25 때 월북했다. 어머니와 남동생, 나, 이렇게 남은 가족은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렸다. 부잣집에서 고생 모르고 귀하게 자란 탓인지, 어머니는 생활능력이 없었다. 내가 살던 집에는 10여가구가 세 들어 살았는데 인심이 좋아 쌀도 밀가루도 연탄도 빌려주곤 했다. 더 이상 빌릴 형편이 못 되었을 때 중1인 내가 돈벌이에 나섰다. 같은 집에 세들어 살던 기영이 아저씨가 부지런한 분이어서 납품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학교도 빠지면서 그 아저씨의 심부름을 했다. 아침을 굶어 힘들었지만 일당을 받아야 쌀과 연탄을 살 수 있었기에 열심히 해야 했다.

 

그러나 가족들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든 판이라 학비까지 대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다니던 고명중학교를 그만뒀다. 그러다가 훗날 나의 대학등록금까지 해결해주는 동창 이석태가 다니던 동대문중학교로 편입할 수 있었다. 이석태의 작은아버지가 당시 동대문중학교 관계자였다.

 

이후 신문배달, 가정교사 등을 하면서 내가 덕수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 합격한 걸 보면, 나름 공부도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해 낮엔 일하고 밤엔 야간대학을 다니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계획대로만 살아지지 않는다더니, 큰 꿈을 품고 들어간 덕수상고를 나는 또 중퇴해야 했다. 그러다가 어려운 환경의 고학생들을 위한 지방의 대안학교를 겨우 졸업한 후 대학을 가야겠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욕심으론 당시 신설된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가고 싶었다. 캠퍼스에서 지식과 지성도 쌓고 싶고, 다양한 동아리 활동도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영화 속의 사랑이야기처럼 매력적인 여학생과 아름다운 사랑도 하고 싶었다.

 

입시 준비는 고사하고 등록금을 구할 형편도 아니었던 내게 그 꿈은 헛된 망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죽으라는 법은 없다더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중학교 동창 이석태가 등록금을 빌려주어 서라벌예술대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당시 2년제 초급대학이던 서라벌예술대학은 신입생 선발에서 시험성적보다는 예술적 재능을 우선시했다. 그리고 1년 후, 내가 그토록 열망했던 성우 시험에 합격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이어졌다.

 

하지만 성우가 됐다고 금방 부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2학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등록금을 내고 중간고사, 기말고사만 보면 졸업장을 주겠다고 했지만 난 포기했다. 어려운 환경이 눈물나도록 서러웠지만 참았다.

 

그런데 수십년이 지난 그 날, 참았던 눈물이 터져버린 것이다. 그 눈물의 의미는 남루한 환경에 대한 슬픔이 아니었다. 그때 어떻게 해서든 등록금을 마련해 학교를 다녔어야 했다는 아쉬움과 회한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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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환 | 배우


내 나이 서른셋이던 1991년 초겨울의 일이다. 데뷔한 지 5년이 지났지만 난 여전히 무명이었다. 당시 나는 이장호 감독과의 인연으로 영화 <명자 아끼꼬 소냐>에 캐스팅돼 러시아 사할린을 거쳐 일본 삿포로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그 영화에서 나는 식민지시대 일본순사 역을 맡았기 때문에 머리를 완전 배코로 밀었다. 지금이야 배코로 미는 것이 개성 있는 패션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에 배코를 본다는 것은 절간의 스님들이나 감옥에서 막 출소한 사람 정도였을 것이다.

 

자정이 훌쩍 넘어 2차까지 이어진 술자리로 인해 나는 거나하게 취한 채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새벽 2시까지 운행하는 광화문~원당 좌석버스였다. 막차여서인지 버스 안은 초만원이었다.

 

나는 고양시 행신동에 살았기 때문에 서울시청에서 타면 한참을 가야 한다. 버스 뒷좌석 쪽으로 사람들을 뚫고 비비며 들어갔다. 부딪치는 사람들마다 불쾌하게 쳐다보다가도 이내 시선을 피해 몸을 돌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나의 모습은 불량스럽기 짝이 없었다. 빡빡 깎은 머리통에, 인생 막장 같은 더러운 인상, 어디서 얻어입은 것 같은 허름한 쥐색 트렌치코트…. 아마도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괜히 시비 붙었다간 더럽게 걸려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배우 안석환 l 출처:경향DB

 

버스 후미는 조금 덜 복잡했다. 복도쪽 좌석의 팔걸이가 시야에 들어오기에 해당 좌석에 사람이 앉아있음에도 무턱대고 좌석 팔걸이에 엉덩이를 디밀고 걸터앉았다. 많이 불편하고 불쾌했을 텐데도 좌석에 앉아있던 사람은 두려움 때문인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있으니 그 사람이 일어났다. 당연히 좌석은 내 차지가 됐다. 이번에는 옆사람을 꼬나봤다. 그 사람은 나의 시선을 피해 차창 밖을 응시했다. 난 취한 척하며 스르르 그의 어깨에 기대어 조는 척했다. 그 사람 역시 한 정류장도 못가서 좌석에서 일어났다. 난 두 좌석을 차지하며 아예 옆으로 누워 버렸다. 불쾌해해는 뭇 시선들을 의식하면서 말이다. 사실 미안한 감은 별로 없었으나 떳떳하지 못함에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러면서 염치없게도 ‘아~ 양아치, 조폭, 비리의 온상들의 마음이 바로 이런 거겠구나…’하고 생각했다.

 

버스는 어느덧 화전(항공대)을 지나 가라뫼(강매)에 도착했다. 일어나 보니 아직도 버스 안은 만원이었다. 그 정도 왔으면 승객들이 빠질 줄 알았는데 그날 따라 능곡이나 원당 승객이 많았나 보다. 제길! 나는 들어올 때와 똑같이 사람들을 밀쳐내며 버스 앞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못본 척하면서도 불쾌해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의식되면서 약간의 죄책감으로 나 또한 시선을 내리깔았다.

 

버스에서 내려 집앞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자책 때문인지 고함이 터져나왔다. 고래 고래 악을 쓰며 걷노라니 아파트 주민 중 한 사람이 5층 베란다의 문을 열고 “시끄러! 빨리 들어가서 자빠져 자!” 하고 소리쳤다. 이에 질세라 나는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야! 내려와, ××야. 밟아줄 테니까!”라고 내질렀다. 아파트촌은 조용해졌다. 빡빡머리 때문일 것이다.

 

난 또 노래를 부르며 내 집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눈물이 났다. 그날 난 누구든 덤비면 실컷 패주고 싶었다. 아니, 내가 진짜 바란 것은 누군가로부터 흠씬 두들겨맞는 것이었을 테다. 무명의 설움, 잘 풀리지 않는 나의 삶에 화를 낸 것이지만 결국 그날 내가 확인한 것은 왜소하고 부끄러운 나의 모습뿐이었다.

 

난 그날 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요즘도 ‘나는 얼마나 비겁한가’라는 화두를 꺼내면 그날 밤이 떠오른다.

 

그 당시 그 버스에 타셨던 고양시민 여러분! 행신동 주민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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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 연세대 교수

 


60여년이나 되는 삶을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일이 어찌 한 가지만 있을까마는, 딱 한 가지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내가 결혼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또 거기에 부수되는 문제로서, ‘결혼식’을 올려 많은 하객들에게 불편을 끼친 점을 또한 몹시 후회하고 있다.

내가 결혼한 것은 1985년 12월, 그러니까 내가 서른다섯 살 때였다. 그때만 해도 결혼이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으로 여겨질 때라서, 나는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결혼이라는 대사(大事)를 겁도 없이 치르게 된 것이다.

 

지금은 ‘싱글맘’이 생겨날 정도로 독신주의 문화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결혼을 ‘필수과목’이 아닌 ‘선택과목’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다. 내가 인생을 꽤 오래 살아오면서 느끼게 된 것도 역시, 결혼을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짝을 못 구해 독신자가 되는 게 아니라, 결혼 역시 그 사람의 성품이 ‘결혼 체질’이라야만 행복한 삶을 위한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확실한 결론으로 이끌어내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남녀는 ‘결혼 체질’과 ‘독신 체질’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얘기다.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 마광수 ㅣ 출처:경향DB

 

나는 3년 같이 살고서 1년 별거하고 나서 합의이혼을 했는데, 이혼 전후로 받은 스트레스는 정말 상당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 나의 전처 역시 나와 같았을 거라고 본다.

 

우리가 이혼을 결행하게 된 것은 성격 차이나 성적(性的) 차이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전처는 확실히 결혼 체질이었던 것 같은데(나와 이혼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곧 재혼했으므로), 내가 결혼 체질이 아니라 독신 체질인 것이 이혼의 근본 원인으로 작용했다. 나의 그런 체질은 이혼 이후 그대로 삶에 적용되어, 아직껏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

 

요즘은 마흔 살 먹은 총각이 흔하지만, 내가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남자는 서른 살 전후까지는 결혼해야 하는 걸 사회적 철칙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서른 살이 넘은 이후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직장(대학교수)도 안정돼 있는데 왜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느냐”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래서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여름부터 드디어 결혼하기로 작심하고,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전처와 겨울에 결혼식을 올린 것이었다.

 

신혼 6개월 동안은 그런대로 행복했다. 그런데 그 뒤부터 여러 가지로 불편한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둘이 같이 자는 것도 불편했고, 저녁 시간이 자유롭지 못한 것도 불편했다. 그 밖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돌출하며 나나 전처나 심신이 몹시 고단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전처에게 내가 참 미안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전처는 꽤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는데, 내가 잦은 병(이를테면 종기나 심한 감기 등)에 시달리는 등 정신신체증 비슷한 게 자주 찾아와 괴로워하는 것으로 그녀에게 부담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거를 했다가 다시 합쳐보기도 하며 어려움을 타개해 보려고 하다가, 결국엔 합의이혼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혼을 하고 보니 결혼식을 해서 바쁜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며 하객 노릇을 시킨 게 영 마음이 걸리는 것이었다. 호텔에서 하지도 않고 작은 규모로 적은 인원을 초대하여 식을 거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못내 마음이 찝찝하였다. 그래서 결혼식을 올린 게 또 한없이 후회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나는 많은 결혼식에 초대를 받고서 하객으로 참석하는 일이 잦은데, 세 쌍이 결혼하면 한 쌍이 이혼하는, 이혼율이 35%에 육박하는 현실에서 왜 그토록 비싼 결혼식을 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을 느낄 때가 많다. 요즘에 웬만한 집안에서는 으레 호사스러운 호텔 결혼식을 하는 게 보통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싼 꽃으로 식장을 도배하고 비싼 식사를 제공하고 또 때에 따라서는 축하객을 늘리기 위해 아르바이트생까지 써가며 호화결혼식을 올리는 요즘의 결혼 풍토는 정말 시정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로맨틱한 서구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단 둘이 결혼 절차를 밟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내가 결혼한 것 자체와,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이 몹시도 후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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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 극작가·연출가

 


현실적인 것들에 관한 한 나는 후회 같은 것은 하지 않고 살아왔다. 세상에 몸 섞고 살다 보면 이해되는 것들이 있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성공이 있고 실패가 뒤따른다. 실패했다고 후회를? 천만의 말씀이다. 실패 또한 삶의 소중한 반쪽이다. 현실적인 것들은 결국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진다. 사상이나 느낌 또한 변하고 퇴색한다. 그래서 후회해 본들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기억뿐이다. 시간의 흔적 속에 잊혀지지 않고 내 늑골 깊숙이 비밀스럽게 남아 있는 기억, 나는 그것을 영혼의 주머니 속에 담겨있는 연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 일이다. 나는 생래적으로 운명론자이다. 그래서 인연을 상당히 중요시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문득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아, 저 여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요? 묻고 싶은데 확신이 서지 않는 경우가 많다. 타인과 서슴없이 말을 트는 주접도 없어서 그냥 마음만 울렁일 뿐 스쳐 지나가 버리는 경우도 많다. 한참 지나서야 에이, 그냥 말이라도 걸어 보는 건데 하고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 이럴 경우 후회하는 게 마땅하다. 나는 조금 전에 내 반쪽과 만날 기회를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이런 경우 ‘해후(邂逅)’란 개념을 사용한다. 전혀 만난 적이 없는 타인과 마주쳤을 때 낯설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면 그게 바로 내 사랑이다.

 

연출가 이윤택 ㅣ 출처:경향DB

 

내 의식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마주쳤던 여인들은 많다. 나의 탄생을 지켜본 병원 간호사의 눈길, 젖꼭지를 물었던 최초의 감촉, 함께 뛰놀았던 예닐곱 살 시절의 여자친구, 빨래를 널고 있던 이웃집 젊은 새댁의 육감적인 몸의 라인까지 겹쳐져서 어느새 내 무의식 속에 한 여인이 자라고 있었던 것이고, 바로 그 여인과 현실적으로 딱 마주친 것이다. 그녀야말로 내 영혼의 주머니 속에 담겨있던 순도 백프로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나는 열일곱 살 적에 그런 여성을 길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 순간 머리끝부터 발바닥까지 알 수 없는 화염에 휩싸였고, 나는 부들부들 떨다가 그만 담벼락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주저앉아서 이게 무어야? 이게 무슨 감정이지? 그렇게 넋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나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성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은 무의식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증명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영역이며 절대 순수의 사랑이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因緣)이란 게 이런 것인가.

 

그러나 그런 절대 순수의 대상은 또 왜 그렇게 현실적으로 소통하기 어려운지 모를 일이었다. 그 여학생이 사는 집 대문 앞을 수백번 왔다 갔다 하면서도 차마 대문을 두드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3년이 다 지나갈 즈음 내게 기적 같은 기회가 주어졌다. 대학입시를 한 달 앞두고 아예 학교 근처 독서실에서 죽치고 있었다. 그때 꿈인 듯 생시인 듯 그 여학생이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무슨 조화지? 나는 무심결에 그녀를 보는 순간 또 한번 알 수 없는 화염에 휩싸였다. 그만 머리를 책상에 처박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저 여자가 여기 왜 왔지? 왜 지금 내 옆에 그림처럼 앉아 있는 거지? 나는 지금 어떡해야 하나? 분명히 내가 자기가 좋아서 죽고 못 산다는 소문을 들었을 거다. 그래서 지금 제 발로 나타난 거다. 아니 어떤 미친 녀석이 일러바친 거지? 젠장 친구에게 털어놓은 내 방정맞은 주둥이가 문제였다. 나는 계속 혼자 주절거리면서 끝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말을 걸기는커녕 제대로 눈길 한번 마주치지도 못한 채 그녀는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4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지금 환갑의 나이에 이르러서도 그때 그 순간을 되새기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후회가 된다. 그래도 내 첫사랑인데 어떻게 말 한번 걸어보지도 못한 채 그냥 흐르는 시간 속에 떠나보내야 했단 말인가. 그러나 또 왜 그날의 짧은 순간이 평생 잊혀지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바로 옆자리에서 느껴지던 그녀의 광채, 온기 같은 것이 지금까지 내 삶의 신비스러운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보면 내 삶은 그 어이없는 후회를 만회하기 위한 질주였는지 모른다. 언젠가 그녀를 찾아가리라. 그러나 내가 나인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찾아갈 것이다. 그렇게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면서 살아왔는데 삶은 갈수록 내 꿈과는 무관하게 흘렀다. 그래서 지금도 그 후회를 만회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그 후회는 내 무덤 속에 같이 묻힐 것이다. 그 후회야말로 내가 살아 갈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힘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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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 통일문제연구소장

 

 

내 한살매라는 게 몽땅 뉘우침의 누더기다. 거기서 바늘자국 하나를 집어낸들 무엇에 쓸까, 그러면서 학림다방에 앉아 멀리 지는 꽃잎을 보노라니 문득 ‘그때 그 녀석은 내가 죽였지’ 그런 죄의식에 오싹한다.

 

1956년 바로 이 자리다. 6·25 우당(전쟁) 때 부산부두에서 막노동을 같이하던 부두 녀석이 오랜만에 ‘쐬주’ 한잔 하잖다. 더듬한 데서 딱 김 몇 조박으로 ‘막쐬주’ 서너 사발을 꿀꺽꿀꺽, 그런데 누우런 가래를 덤터기로 쏟질 않는가.

 

“야, 너 어디서 무엇을 하는데 그래.”

 

“응, 사람 사는 데서 살지 뭐.”

 

그러고선 또 게울 때다.

 

바로 옆에 있는 서울대병원 문을 왕창 부수고서라도 입원을 시켰으면 살릴 수도 있었는데, 그런 성깔을 갖고서도 왜 못했을까. 어리석은 한이 하늘을 가르는 것 같다.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소장 l 출처:경향DB

 

그가 부두 노동을 할 적엔 중학교 5학년, 매우 말쑥한 얼굴에 빛나는 두 눈, 아무리 일이 고돼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가 없었다.

 

공부가 으뜸인데도 늘 책을 놓질 않는 건 대학에 들면 고등고시를 보아 법관이 될 거라는 다짐 때문이었다.

 

그런데 목도꾼이던 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매를 맞고 허리를 못 쓰는데도 피란살이라, 다시 목도일을 하시다가 짐에 치여 돌아가셨다.

 

하지만 회사에선 그 죽음을 숨기느라 가마니에 넣어 바다에 버렸다는 말을 듣고 바닷가를 헤매며 “아버지, 아버지” 눈물 젖은 채 어느 헛청에서 <흘러간 옛노래>라는 연극을 담배 한 꼬치를 주고 보다가 잡혀가 매를 맞게 되었다.

 

“어린놈이 어떻게 이런 빨갱이 연극을 보게 되었더냐. 네 애비가 목도꾼이라면 네 피도 더러워 불온한 사상을 가졌지.”

 

모진 매도 아팠지만 목도꾼의 피는 더럽다는 말에 부두는 생각이 홰까닥 돌고 말았다.

 

고등고시 따위론 안되겠다, 차라리 연극 무대에서 내 꿈과 사람의 꿈을 살리리라, 그러다가 서울로 와서는 홀어머니 때문에 뻔데기 장사, 메밀묵 장사, 닥치는 대로 막노동, 그 뒤 강원도 탄광에서 일을 하다가 진폐증으로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그에겐 사랑하는 댓님(연인)이 있었다. 1951년 여름, 부산 광복동 처마 밑에서 소나기를 비끼다가 눈을 마주친 중학교 3학년 여학생, 마치 천년 앞서 만났던 것처럼 홀로 댓님을 삼은 것이다. 그러나 실지로는 만날 수가 없었다.

 

서울로 와서 눈 오는 밤 “메밀묵 사려~” 그러다가 뜻밖에도 통인동에서 만나 밤새 걸은 것이 모두인 그네들, 사랑의 애달픈 여울목.

 

그 뒤 부두는 강원도 탄광의 광부가 되고 대학생이 된 그 가시나는 서울 둘레에서 노동을 하면 안되냐고 발을 구르고.

 

부두의 말이었다. 나는 지금 노동자의 피는 캄캄한 석탄더미 그 어두움을 뚫는 맑은 샘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오. 사랑의 힘으로 이리로 오시오.

 

그 여학생은 꽃은 산에만 피는 게 아닙니다 그러고.

 

갑자기 부두의 새뜸(소식)이 끊기고 나서다. 그 여학생이 나를 찾아와 부두씨를 서울 쪽으로 오게 해달란다. 그가 올 때까지 미국 유학도 뿌리치고 한없이 글월을 띄우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띄운 글월이 자꾸 돌아오자, 기완씨, 나는 그이가 올 때까지 내 젊음이 다하는 20년을 기다리겠다고 하더니 아, 달구름(세월)은 흘러 거의 예순 해.

 

1984년 겨울, 내가 찾아야겠다고 강원도 폐광지대를 헤매었으나 부두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어 그를 기리는 시 ‘북을 때려라’를 긁적였다. 그것을 전노협(민주노총 전신) 출범식에 띄우기도 했지만 그가 너무나 안타까워 얼마 앞서부터는 두 젊은이의 사랑 이야기, 아니 한 노동자의 삶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200자 원고지로 300장, 500장은 더 써야겠다고 했는데 거리에서 부르는 소리에 얼짬(잠시) 붓을 놓고 있지만 늘 붓을 달리는 마음이다.

 

아, 나에게 부두는 무엇일까. 아니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부두는 누구일까. 그야말로 오늘 이 썩어문드러진 반역의 역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샘이라고 들이댄다. 노동자의 피는 캄캄한 석탄더미 그 어두움을 뚫는 맑은 샘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는 그의 말이 그것이요, 따라서 그는 역사 진보와 함께 지금도 살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네들의 사랑을 오늘의 한 전형으로 살려내고 싶다. 비록 같이 살지는 못했지만서도 자그마치 20년을 기다리다 마침내 찾아 나섰다는 그 지칠 줄 모르는 그네들의 두 줄기 맑은 샘, 떠올릴수록 눈시울을 들쑤신다

 

그래서 마저 쓰려 하고 있다. 참된 뉘우침이란 무엇인가 말이다. 어설픈 넋두리인가, 아니다. 끊임없이 새롭게 깨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늘 쫓기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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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재 | 연극배우

 

1970년대 중반쯤이었나 보다. 그때만 해도 해외 자유여행이 시작되기 전이어서 외국 여행을 하기가 어려운 시기였다. 수속이 복잡했고 신원조회며 재산 정도까지 신고해야 할 판이니 나같은 연극인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속해 있던 극단(동랑 레퍼토리)이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로 공연을 가게 됐다.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동랑 유치진 선생님과 현 서울예술대학의 유덕형 총장의 절대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에선 댈러스, 미네아폴리스, 뉴욕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댈러스극장의 후원회원인 어느 미국인 가정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내 후배와 둘이서 공연기간 묵게 되었다. 단독주택 한채였지만 두 집 살림을 할 수 있게 출입문도 완전히 나눠져 있어서 우리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도착한 다음날 아침, 집주인 가족들은 출근을 해야 한다면서 우리에게 냉장고며 세탁기 등 부엌 가구 사용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마음 놓고 쓰라고 했다. 물론 그들이 하는 영어는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지만 친절한 음성과 몸짓으로도 의미는 충분히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이때 벌써 ‘아! 영어를 좀 알았다면’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나 이때는 학교에서 배웠던 ABC조차 거의 잊어버린 때였다.

 

연극배우 이호재 ㅣ 출처:경향DB

 

아침 식사시간에 내가 봐서 알 수 있는 음식은 빵과 콜라, 커피였다. 우리를 대접한다고 평소보다 많이 차렸는지 큰 식탁에 음식이 가득했다. 우선 빵을 먹으며 손에 닿는 음료수를 무심코 집었는데 하필 그게 콜라였다. 그걸 마시고 오렌지와 비슷한 모양의 노란색 과일을 집었다. 주인이 칼로 반을 쓱 잘라 먹길래 나도 따라 칼로 썰었더니 모양이 이상했다. 가로로 잘라야 했는데 세로로 자른 것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과일인데 맛은 좋았다. 주인이 조심스럽게 “너희 나라에도 이런 과일이 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내 후배는 “예스. 예스. 예스는 예슨데, 노”라고 말했다. “그것과 비슷한 오렌지는 있는데, 정확히 그건 아니야”라는 대답을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럴듯하긴 한데 주인은 영 불편한 눈치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때 그 과일은 자몽이었다. 여하튼 그럭저럭 아침식사를 끝낸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서 아까 못 웃었던 웃음을 시원하게 웃어댔다.

 

다음날 아침 우리 방 앞에는 콜라 두 상자와 자몽 두 상자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집주인이 우리가 그것을 특별히 좋아한 줄로 알았던 것 같다. 후배와 나는 “이거 안 되겠다. 이러다가 우리 둘만의 망신이 아니라 우리 극단 전체가 우스워지겠다”며 차라리 직접 마트에 가서 맛있는 걸 사먹자고 의기투합했다.

 

댈러스라는 곳은 자가용이 없으면 돌아다니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택시를 타기에는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걷자니 너무 황량한 도시였다. 그래도 손짓발짓해가며 물어물어 가까스로 마트라는 곳에 걸어서 도착했다.

 

꽤 넓은 공간이었는데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마침내 내 눈에 단박에 꽂힌 식품을 발견했다. 기대하지도 않은 보신탕을 발견한 것이다. 후배와 나는 쾌심의 미소를 지으며 어린이 분유통만한 보신탕 한 깡통을 사서, 기분 낸다고 남들 산책하고 조깅하는 개울가 벤치에 앉아 맛있게 먹었다. 으쓱해진 나는 후배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봐라. 우리보고 식생활 문화가 어쩌고저쩌고 그러면서 자기네들도 은근히 개고기를 먹는 거야. 다만 끓이는 게 아니고 통조림 형태인 게 다를 뿐이지. 너 그 옆에 고양이 그림 있는 거 봤지? 이 사람들은 고양이도 먹는 거야. 우리나라도 탕으로 끓여서 먹는 사람도 있다잖니? 요리하는 방식만 다른 거야.”

 

의기양양하며 먹고 있는 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낏흘낏 쳐다보는 게 이상하긴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먼 나라 미국까지 와서 보신탕을 먹었다는 그 뿌듯함에 상쾌하게 극장으로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먹은 게 애완용 개 사료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귀국하면 영어를 꼭 배워야지’ 결심했다. 그런데 여전히 그 다짐을 실행에 옮기지 못해 30년도 훨씬 지난 지금까지 그 후회는 계속 진행 중이다.

 

환갑을 훌쩍 넘긴 후배가 중국어를 열심히 배우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늦지 않았어’ 하는 희망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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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진 | 피아니스트

 

음악인으로서 나의 위치는 비교적 다양하다. 1994년 귀국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개교와 함께, 연주자이면서 교육자라는 역할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그동안 나는 한 학교의 교수라는 직분 외에도 2007년 금호 챔버 소사이어티 음악감독과 2008년 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취임해 맡은 책임이 더욱 커졌고 많은 사람의 관심도 받게 되었다.

 

그동안 이러한 나의 변화에 대해 적지 않은 인터뷰를 했다.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는 가지고 있지만, 음악감독·연주자·지휘자·교육자라는 각각의 역할은 모두 전문성이 요구되는데 왜 이렇게 욕심을 내면서 다양한 시도를 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여러 역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피아니스트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ㅣ 출처:경향DB

 

맞는 말이다. 나는 ‘음악’에 욕심이 많다. 수원시향의 상임지휘자 제의가 들어왔을 때도, 내 마음을 움직인 건 지방의 음악계를 활성화시킬 수 있겠다는 희망이었다. 수도권 근교의 교향악단은 서울과 거리가 가까워 오히려 활성화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시작은 작은 수도권의 교향악단이었지만, 지금의 수원시향은 2008년 교향악 축제에서의 공연 매진으로 최다 유료 관객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09년에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성공적인 미국 데뷔 무대를 가졌으며, 최근에는 소니코리아 레이블로 음반을 출시할 정도로 인지도 있는 교향악단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8월 예술감독을 맡았던 ‘피스 앤드 피아노 페스티벌(Peace & Piano Festival)’에서는 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이 아닌 경기도 수원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아우르는 피아니스트 12명을 한자리에 모아 그 어느 국제무대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축제를 펼쳤다.

 

이처럼 내 작은 힘이 보태져 우리나라 음악계가 발전할 수 있다면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싶은 게 내 욕망이다. 허황된 욕심이 아닌 이상, 음악으로 소통하는 일은 뼛속까지 음악인인 나를 항상 자극한다.

 

이러한 욕심의 근본에는 나의 정신적 지주인 고 오정주 교수로부터 배운 교육자로서의 자세가 있다. 누군가가 “하고 있는 다양한 역할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고 질문하면 나는 주저없이 “가르치는 일”이라 답한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가르침이란, 학생이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눈부신 인터넷과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지금의 학생들은 아주 손쉽게 유명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찾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들에게 연주에 대한 직접적인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그다지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보다 궁극적인 선생의 역할은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한 학생의 인생을 가장 중요한 시기에 책임지는 것이 교육자의 역할이기에, 그 무엇보다도 책임이 무겁고 소중하다. 그리고 그 소중한 책임의 시작은 바로 내가 먼저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살다 보니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져 사람들과 여유롭게 밥 한번 먹기가 어렵다. 특히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밥 한번 같이 먹는 것’이 여러 가지를 의미하는데 나는 끼니를 김밥으로 때우기 일쑤다. 요즘같이 기분 좋은 봄에 꽃구경을 할 여유조차 없고 소중한 가족들을 챙기는 시간도 터무니없이 모자란다.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문득 ‘내가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누구보다 사람과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학생들에게 강조해놓고 막상 내 자신은 전혀 소통을 못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부터 밀폐된 공간에서 피아노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불어나는 일에 파묻혀 지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또한 학생, 교향악단 단원, 청중 등 많은 사람과의 소통 없이는 음악이 존재할 수 없고 음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좋은 사람들과 진짜 ‘밥 한번 먹을 수 있는’ 여유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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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탁 | 제일기획 마스터

 

르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프랑스의 롱샹(Ronchamp) 성당을 두 눈으로 본 것은 내 나이 마흔셋이었을 때다. 마치 동화책에 나올 법한 동그란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동안 로마의 바티칸, 바르셀로나의 파밀리에 성당을 비롯, 한국의 명망 높은 사찰 등 명품이라 칭송받는 웬만한 건축물을 거의 돌아봤지만, 그 건축물들이 웅장하다거나 아름답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건축물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는 롱샹 성당이 처음이었다. 이런 세상에…, 건축물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다니…. 그것은 마치 음악도 아닌 미술작품을 보면서 흥에 겨워 춤을 추는 것과 같은 꼴이었다.

 

그 후로 ‘만약 내가 스무 살 청년일 때 롱샹 성당을 마주했으면 어땠을까’라는 가정을 떠올리는 횟수가 잦아졌다. 마흔을 넘긴 나이에 그런 감동을 받았는데, 훨씬 감수성이 촉촉한 청년기에 그 성당 앞에 섰더라면 나는 아마도 전공을 바꿔서라도 건축가가 되겠다는 새로운 꿈을 꿨으리란 생각이 든다. 종교를 제대로 갖지 못했지만, 롱샹 성당의 제단 아래서 ‘오, 하느님! 이제 제가 가야 할 길을 찾았습니다’라고 방언하듯 깨달음의 기도를 했을 것이다.

 

김홍탁 마스터 l 출처:경향DB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십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말은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스펀지 같은 시기에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결국 한 사람의 인생관을 결정짓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지금의 나 역시 이십대를 관통한 나의 생각과 경험들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이십대는 중요하다.

 

그런데 그 중요한 시기 이십대에 나는 롱샹 성당을 볼 수 없었다. 가장 후회되는 점이다. 아니 꼭 롱샹 성당이 아니더라도 이 지구상에 다른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할 수 없었다. 로르카의 민중시를 잉태했던 안달루시아의 끝없이 펼쳐진 올리브 숲에 가볼 수 없었고, 속세를 떠났던 초월주의자 소로의 월든 호수를 거닐어볼 수 없었으며, 아홉 살 이후로 평생토록 단테의 영혼을 잠식했던 베아트리체가 오가던 베키오 다리를 건너볼 수 없었다. 나의 이십대는 지구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해외로 나가 견문을 넓히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해외여행을 법으로 금지하는 정말 이상한 나라에 나는 살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도 이십대 청년들을 보면 가장 부러운 것이 젊음의 열정과 모험심을 배낭에 꾸려 넣고 지구라는 혹성의 구석구석을 누비는 여행경험이다. 혹자는 지금이라도 배낭여행을 떠나면 되지 않느냐고 묻겠지만, 중요한 것은 배낭여행이 아니라 이십대의 여행이다. 내가 이십대에 해외여행을 맘대로 할 수 있었다면 분명 내 기질상 방학 때마다 아니 휴학을 하고서라도 어쩌면 대학을 때려치우고 이 나라 저 나라를 집삼아 떠돌았을 것이고, 그런 유목민의 생활에서 받은 낯선 충격들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되새김하면서 나의 용적을 넓히고 상상력의 한계를 늘려 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 길이 더 아름다웠을지도 모른다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피끓는 청춘의 시기에 낯선 곳에 나 자신을 던져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안타까움인 것이다.

 

직업이 광고인이다 보니 이십대 청년들을 만나면 크리에이티브의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어김없이 받는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도 어김없이 똑같다. 여행을 떠나라. 낯선 곳에 자신을 던져라. 그래서 끊임없이 자극을 즐기고 생의 용적을 넓혀라. 그 뜨거운 체험을 그대로 옮기기만 해도 그대들은 작가가 될 수 있고, 아티스트가 될 수 있고, 광고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극받지 못하는 삶은 얼마나 따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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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 | 방송인

 

나는 열한 살 때부터 아령을 잡고 운동을 했다. 7년 뒤 대전고 재학시절에 미스터 충남에 선발됐다. 그 후 고려대에 입학해서는 역도부에 들어가 미스터 고대에 뽑혔다. 졸업 후 7년간 외판원으로 전전하다가 점쟁이의 말을 믿고 TV에 출연해 건강의 상징인 뽀빠이가 되었다. 다 말할 수 없지만 여기까지만 해도 난 눈물이 나고 뼈마디가 다 쑤신다. 정말 신물나게 고생하면서 산 기간이었다.

 

1970년대 중반 KBS TV <모이자 노래하자>로 나는 어린이들의 우상이 됐다. 시절 심장병에 걸린 한 어린이가 부모와 함께 찾아왔다. 수술비가 없다기에 함께 서울대병원에 갔다. 수술비가 1800만원이라는 말에 기절할 뻔했다. 당시 열 평짜리 아파트 값이 1110만원이었고 나는 사당동 독채 전세 650만원에 살고 있었다. 내 나이 30대 초반 때다. 나는 “기술이 없어 못한다면 할 수 없으나 돈이 없어 죽는다면 안된다. 수술하쇼!”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그 길로 명동에 있는 야간업소 사장을 찾아가 사정했다. 결국 세 업소의 진행자로 출연하기로 하고 석 달치 봉급을 선불로 받아 수술비를 댔다. 나는 차 없이 야간에 이 술집 저 술집을 동분서주해야 했다. “집도 없는 주제에 남의 자식 수술해준다고 집세의 세 배나 되는 돈을? 미쳤어!” 무릎에 이상이 생겨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놨다가 많이 혼났다.

 

 

MC 이상용 l 출처:경향DB

그런데 얼마 후 심장병 수술을 한 어린이의 아버지가 방송에서 뽀빠이가 무료로 수술을 해줬다고 밝히면서 우리 집에 전국의 심장병 어린이가 수술을 해달라며 모여들었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 그들을 설득해 한국어린이보호회를 만들어 한 명씩 수술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지켜 1987년 국민훈장 동백상, 가톨릭봉사대상 등을 탔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국회의원에 나올 거라고 했다. 난 하느님과 약속했다. 정치 근처에도 안 가겠다고. 그러나 MBC TV <우정의 무대>가 전국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내가 국회의원에 출마하면 무투표로 당선된다며 여기저기에서 꼬셨다. 그럴수록 정치가 싫어졌다.

 

1996년 11월3일은 나에게 6·25전쟁과 같은 날이다. <우정의 무대> 화천 녹화가 끝나고 돌아오니 언론에 내가 아주 죽일 놈으로 보도되어 있었다. 심장병 어린이 수술 기금 횡령 혐의를 받고 있으며, 벤츠600을 타고 다니고, 40억원짜리 집에 살고, 심장병 어린이를 한 명도 수술하지 않았다는 기사였다. 너무나 억울했지만 나를 모함한 자가 언론을 쥐락펴락하고 있으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죽고 싶었다. 난 20년간 지프차를 타고 다니고 지금 살고 있는 40평짜리 빌라의 융자금은 작년에야 상환이 끝났다. 그리고 1996년까지 25년간 수술받은 심장병 어린이는 567명이었고 그중 13명이 생명을 잃었다.

 

하루아침에 방송에서 퇴출된 나는 집 밖을 못 나갔다. 3개월 만에 무죄판결이 났지만 판결 결과는 어느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처음 오보를 낼 때는 단 한 명의 기자도 내게 확인조차 하지 않고 썼으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내가 감옥에 간 줄로 알 것 아닌가. 환장할 것 같았다. 좋은 일 한다고 수술해주고 욕 먹고 나쁜 놈 되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추기경님이 오셔서 “눈이 덮였으니 쓸지 말고 떠나라. 봄이 오면 눈이 녹고 너는 나타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수중에 남은 돈 20만원을 가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관광버스 안내원을 하는 등 갖은 고생을 하면서 1년 만에 귀국하여 딸을 시집보내면서 한참을 울었다. 남 돕는 일은 다시는 안 하겠다고 다짐했다.

 

15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각난다. 담당 형사가 “왜 이렇게 바보같이 살았어요? 한 푼이 없네요”라고 했다. 담당 검사는 “다시 훈장을 하나 더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제는 남이 아닌 우리 가족을 위해서만 뛰겠다고 마음먹어놓고 나는 또다시 전국의 어르신들을 위해 연예생활을 하려고 한다. 욕심이 없으니 편하다. 노후보장도 안돼 있지만 초초하지 않다. 건강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금도 원수를 용서하라는 성경 구절을 이해할 수 없지만 나중에 알아보니 나 아프게 하고 자신은 호의호식하던 사람은 끝이 안 좋았다. 아프고 망한 뒤 세상을 떠났다. 대나무가 마디를 형성하려면 아픔이 겹쳐 바람소리에 운단다. 요즘 나는 보너스로 인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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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송 | 연극배우

 

사춘기 무렵, 역사 속 위대한 영웅들의 행적을 전설 혹은 책을 통해 만나며 내 미래를 짧고 굵직하게 가리라 정하고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그렸다. 그러나 차츰 삶이라는 현실 앞에 그 영웅적 꿈은 눈 녹듯 사라졌다.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연극학교에 입학했다. 그것이 적성에 맞았던지 생(生)을 걸게 되고 차츰 그 세계에 빠져버렸다.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어 안갯속 같은 미래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다. 집에서 독립을 하겠다며 나왔지만 방 얻을 돈이 없었다. 학교 계단 밑 쪽방 같은 빈 사무실에서 책상, 걸상을 침대삼아 지냈다. 끼니는 건너뛰거나 하루에 한 번 중부시장의 막국수 한 그릇으로 때우는 일이 많았다.

 

친구들이 술 한잔 살 땐 “밥 사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자존심 때문에 소주 한잔에 그 말까지 꿀꺽 삼켜버리곤 했다. 안주라도 많이 먹으면 될 텐데 배고픔을 들킬까봐 “마! 안주 많이 먹으면 소주 맛 떨어져!” 하며 일부러 소리치곤 했다. 지금도 그 버릇이 남아 나는 안주 없이 술을 마신다.

 

연극인 전무송 I 출처:경향DB

 

어느 날, 다른 극단에서 연극 출연 제의가 들어 왔다. 날아갈 듯 들떠 있는데 해당 연극의 연출가가 “대표님이 거절하셨다. 다음 기회에 보자”고 했다. 몹시 실망한 나는 술을 잔뜩 먹고 소란을 피웠다.

 

다음날 내가 속한 극단의 대표한테 불려갔다. 꾸중 들을 각오로 갔는데 대표님, 아니 나의 스승님은 인자한 모습으로 말했다. “배우가 무대에 바로 서려면 10년이 가고, 제대로 걸으려면 10년이 가고, 제대로 말하려면 10년이 간다. 내가 너를 막은 것은 지금은 때가 아직 아니었기 때문이야.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인내심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참 고마운 말씀이지만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건 결국 내가 인간이 덜됐다는 뜻 아닌가. 슬프고 비참한 심정으로 남산 팔각정에 올랐다. 사흘하고도 두 끼를 더 굶은 뒤라 몸이 휘청거렸다. 서울시내가 내려다보였다. 저 많은 집들 중에 내가 쉴 곳은 단 한 군데도 없구나. ‘포기하자…’ 하고 험한 생각이 드는데 송충이에 갉아 먹히고 있는 작은 소나무가 눈에 띄었다. “참, 너도 괴롭겠다. 그렇게 갉아 먹히면 어떻게 살아남겠느냐. 내 꼴과 마찬가지구나.”

 

문득 보은의 정2품 소나무가 떠올랐다. 살아남아야 그렇게 품(品)을 받고 우러름을 받을 수 있는 소나무(茂松)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자고 다짐했다. 그 이후 괴롭고 힘들 때마다 내 이름에 ‘너는 정2품 소나무다’라며 최면을 걸었다.

 

바로 그 시절이었다. 명동 쪽에서 연출하던 친구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끔 심금을 털어놓고 “좋은 연극 만들자”며 서로 위로해주고 다짐하던 친구였다. 소식을 전한 친구와 이태원동 아픈 친구의 집으로 병문안을 갔다.

 

어두컴컴한 방에 누워 있던 그 친구는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밝게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고 차도 내놓고 연극 얘기도 했다. 병문안이랍시고 찾아간 우리는 빈손이었지만 친구는 개의치 않았다. 워낙 긍정적이고 소탈한 그 친구의 기색은 밝기만 했고, “공연자금 없이 하고 싶은 연극을 할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 “그때는 우리 모두 훌륭한 배우, 연출가로 커 있겠지” 등 희망적인 환담을 나눴다.

 

그 말끝에 친구가 웃으며 농담조로 “야, 지금 보신탕 한 그릇 먹으면 힘이 좀 나겠는데 말이야”라고 했으나 우리는 겸연쩍게 웃기만 했다.

“그래, 빨리 건강을 되찾도록 해라. 그때 보신탕 놓고 소주 한잔하자”고만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놈도 우리 이해해 줄 거야. 빈털터리라는 걸”이라며 스스로 변명했다.

 

며칠 후,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그 날 이후 한동안 밖에 나오지 못하고 ‘보신탕 한 그릇 사주지도 못한 못난 놈이 무슨 친구라 할 수 있는가!’라며 자책했다. “보신탕 한 그릇 먹으면 힘이 좀 나겠는데 말이야” 하며 허허 웃던 그 친구와 나의 부끄러웠던 모습이 지금도 마음 아프게 떠오른다. 나의 스승님은 그러셨는데. 먼저 인간이 되어야 훌륭한 배우가 된다고. 인간의 희로애락의 갈등이 무엇인가 깨달으라고. “친구야, 정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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