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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카페 문을 연다.  
    
여자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무관심한 척 하고는 있지만 유리에 비친 그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남자는 안다. 그 역시 여자가 앉아있는 곳을 알고 있지만 카페 안을 여러 번 둘러보다가, 어느 순간 우연히 그녀를 발견했다는 듯 가서 천천히 그녀 앞에 앉는다.


“오래 기다렸어?”


여자는 반갑지만 웃지 않는다. 대신,



“지금 몇 시야?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라고 쏘아붙인다.

남자는,


“미안.”



이라고 짧게만 대답한다. 그리고는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흐른다.



“안되겠다.”


침묵을 깬 것은 여자다. 그녀의 표정에는 어떤 결연함이 깃들어 있다.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뭐?”



“그만 두자고. 사람 말 못 알아들어? 헤어지잔 말야.”



남자는 여자를 쳐다본다. 전체적으로 무심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희미한 분노가 엿보이는 눈빛. 그는 들릴락 말락 하게 한숨을 한번 쉬고, 옆으로 메고 있던 가방 속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놓는다.



“니 소원대로 해준다. 진짜 끝이야, 이번엔.”



남자는 자신의 자리에 마지막 한 마디를 대신 앉혀놓고, 일어나 카페를 빠져나간다. 여자는 남자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창밖을, 아니 유리에 비친 남자의 마지막 뒷모습을 쫓는다. 눈에 뭐가 들어갔는지 자꾸만 눈을 깜박거린다.


한참 후에 여자는 상자를 연다. 상자 안에는 이제껏 그녀가 그에게 선물했던 물건들이 담겨있다. 편지와 사진, 엽서, 면도기, 아이팟, 전자사전, 속옷, 지갑, 만년필, 키홀더…… 그중엔 선물한 기억조차 희미한 물건도 있다. 그녀는 그중 면도기를 꺼내 면도날 하나를 분리한다. 오중면도날을 모두 분리하니 면도날 다섯 개가 모인다. 그 다섯 개를 왼손에 가지런히 쥐고, 여자는 다시 창밖을 바라본다. 진짜 끝이야, 이번엔. 남자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오른 손목 위에서 힘차게 내리긋는다.
 

핏자국을 본다.



탁자 위로 쓰러진 그녀는 실려 가고 놀란 종업원은 서둘러 탁자를 닦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끝내 저 조그만 핏자국만큼은 지워지지 않고 살아남는다. 그녀는 살았을까, 혹 죽었을까. 남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들은 왜 헤어졌을까. 아니, 아니, 그런 그들이 있기는 있었을까. 나는 지금 앉은 테이블 끝에 묻어있는 핏자국이 혹 그래서 생긴 것은 아닐까 상상해본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알 수 없는 핏자국을 바로 그 핏자국으로 만드는 일. 노트북을 덮으며 나는 스타벅스 로고가 선명한 티슈로 핏자국을 닦아낸다. 누군가 유리창에 비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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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

잘 타지 않는 Q라인을 탄 것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난 이주일간 연락이 없던 그녀에게 어젯밤 텍스트가 온 것이다.

 
See you tomorrow

6pm@Union Square

 

이모티콘 없는 짧은 문자는 갑작스러웠던 2주간의 공백만큼이나 낯설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그녀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었다. 그 시간이 그녀에게는 2주였던 것일까.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승낙이든 거절이든, 나는 빨리 아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오후 5시, 유니온 스퀘어로 가는 노란색 Q라인을 기다린다.

 

ON

지하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린다. 들고 있던 아이팟의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모드는 랜덤 플레이.

  

PLAY 0:01

지하철에 들어서자 정면에 앉아있던 흑인 사내가 내리며 자리가 생긴다.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나는 그 자리에 앉는다. 자리에 앉자 어디선가 희미하게 기분 나쁜 냄새가 난다. 사내는 홈리스였던 걸까? 주위를 둘러보지만 별다른 점은 없다. 나는 인간의 후각이 금세 둔감해지는 감각기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조금만 더 참고 있기로 한다. 이어폰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PLAY 0:17

액정에 나타난 곡명을 확인한다. <추억과 함께 영원히 둘로 남는다>. 아티스트는 이루마. 나는 길고 어딘지 슬픈 제목을 가만히 중얼거려본다. 추억과 함께, 영원히, 둘로 남는다……

 

PLAY 1:21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그건 그녀의 마음이 어느 한 쪽으로 정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그녀가 예스, 라고 말할 경우와 노, 라고 말할 경우 모두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노, 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를 궁리한다. 그녀의 잘못은 없다. 이별이 그렇듯, 사랑 역시 이기적인 두 욕구 사이의 충돌이니까.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녀도 나를 좋아해야할 이유는 없다. 내가 싫어졌다고 해서 그녀도 내가 싫어져야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은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타이밍이 결정한다.

  

PLAY 2:11

열차가 덜컹거린다. 반대편에 앉은 각양각색의 얼굴들 사이로 어둠 속에 비친 내 얼굴이 건너다보인다. 피곤하고 지친 듯한 얼굴. 나는 미국시 시간에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에즈라 파운드의 짧은 시(詩)를 떠올린다: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인파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얼굴들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미국 태생인 그가 파리의 어느 지하철역에서 썼다는 그 시의 의미를, 나는 한국을 떠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뉴욕의 노란색 Q라인 안에서 깨닫는다. 검고 조용한 창에 비친 얼굴은 정말로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을 닮았다. 말하자면, 모든 것의 의미는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고 난 후에야 밝혀지는 것이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과거의 비밀처럼.

 

PLAY 2:50

앉아 있는 줄의 맨 끝 쪽 히스패닉 사내가 일어선다. 50대쯤 되었을까? 걸음을 비틀거리는 것이 취한 듯하다.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아직 술을 마실 시간은 아닌데, 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린다. 이글거리듯 붉게 충혈된 사내의 두 눈이 마음에 남는다.

  

PLAY 3:01

갑자기 무릎 위로 물 같은 것이 뿌려진다. 액체가 튄 방향을 바라보니 아까 일어났던 그 사내다. 그는 어딘가에서 가져온 커다란 물통을 들고 무언가를 뿌려대고 있다. 이게 뭐지?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어린 시절의 몇몇 장면들이 오래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열려진 조립식 상자, 에나멜, 붓, 그리고 미제 땅콩 케이스 안에 담아두었던 냄새나는 물…… 그래, 이건 그 물이다. 그 물의 진짜 이름. 시너.

 

PLAY 3:17

어떻게 해볼 사이도 없이 안경 위로 다시 한 번 액체가 뿌려진다. 이번엔 흠뻑 젖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은 양이다. 생각을 해보려 하지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뭘 해야 하지? 아니, 뭘 할 수 있지? 그러는 사이 사내 쪽으로부터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샛노란 불이 독사처럼 달려든다. 푸르스름하기도 하고 붉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고 뜨겁기도 한 무언가가 뱀에 물린 것처럼 순식간에 내 몸을 휘덮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들의 일그러진 표정과 시끄러운 비명뿐이다. 지하철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나는 들고 있던 아이팟을 바라본다. 이 아수라장에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 작고 연약한 기계뿐이다. 3분 24초. 3분25초. 3분 26초. 나는 유니온 스퀘어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생각한다. 그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할까? 아니, 알릴 수 있을까? 이런 경우, 대체 몇 분이나 늦는다고 해야 하는 걸까? 그녀는 내 말을 믿어줄까? 결국 난 그녀의 대답을 들을 수 없는 걸까……?

빠져나갈 생각도, 사랑한다는 문자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지금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바랄 수밖에 없다.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의 멜로디를 들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아니 소리 내어 이렇게 외친다. 7초만 더. 7초만 더. 제발, 7초만 더.
*

 

*이루마, <추억과 함께 영원히 둘로 남는다>의 플레잉 타임은 3:3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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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네이버 '오늘의 문학' 에 소개된 단편 <스페이스맨>.

뉴욕을 배경으로 한 에스프레소처럼 진한 단편을 싣고 싶었는데,

너무 세다는 이유로 커피믹스처럼 달달한 이 단편을 싣게 되었다.

올해 출간될 개인 단편집에 실릴 예정인 소설로,

우주인이 되고 싶었던 소년의 이야기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591&path=|185|199|249|&leafId=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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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웹진 K-Arts 9호에 실린

문지혁의 뉴욕 오디세이 3: Museums in New York.



메트로폴리탄에서, 구겐하임을 거쳐 뉴욕현대미술관(MoMA)으로 이어지는

한 남녀의 만남과 우연에 관한 짧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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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맨해튼에 약속에 있어 나갔다가, 나간 김에 록펠러 센터에 들렀다. 42가 버스터미널에서 브라이언트 파크를 지나 다시 5번가를 따라 올라가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던지. 꼭 앞에까지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밀려 밀려 트리 앞 아이스 링크까지 가고 말았다.

 



이것도 기념이다 싶어 북적이는 사람들 머리 위로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으며 다가갔는데, 막상 맨 끝에 이르러 아이스링크를 내려다 본 순간 허무해지고 말았다. 텅 빈 아이스링크를 따라 말없이 돌고 있는 청소용 차량. 모두가 고개를 내밀고 내려다보고 있던 건 그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사는 게 그렇다. 한참을 기대하고 기다리다가도 뚜껑을 열어보면 허무해지는 것. 뭔가 있겠지 하고 다가가지만 결국 마주하고 나면 별것 아닌 것. 삶이 전부 다 시시하고 재미없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우리의 짐작과는 늘 다르다는 얘기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여기도 새해가 된다. 한국 나이로 서른 셋, 만으로는 아직 서른하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 삶을 규정하는 것은 숫자이므로. 좋든 싫든 우리는 숫자에 매여 있다. 그걸 모른다면 순진한 거고, 모른 척 한다면 기만하는 것.




도무지 수치화할 수 없는 불가해한 삶을 견뎌내기 위해 우리는 애써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다음 어떻게든 그것을 해독하기 위해 애쓴다. 숫자로 인해 좌절하고, 상처 받으며, 때론 기뻐하고 아주 가끔 위로받으면서. 우리는 삶의 목표를 숫자로 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숫자의 의미를 폄하하며 이 비루한 삶 어딘가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는 척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야, 라고 페이스북에 적어 넣는 행위 이면에는, 그 글자들을 이진법으로 바꾸어 타인의 스크린에 표시하는 0과 1이라는 숫자가 있다.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 모두는 이 끝없는 숫자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기수인 것이다.

 



이제 나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어간 윤동주의 나이를 넘어, 뉴욕삼부작을 쓰던 폴 오스터를 넘어, 그리고 나를 낳았을 때의 아버지를 넘어 새로운 숫자에 도착했다. 공생애를 마친 예수의 서른셋은 어땠을까? 서른셋이라는 숫자 말고는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은 지금,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여기-오늘을 살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소원해 본다. 레이먼드 카버 식으로, 모두에게 복된 새해가 되기를. Happy, new, year.




2010.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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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가 오늘의 마지막 곡입니다. 굿 나잇, 앤 해피 뉴 이어.”

 

무대에서 연주를 하던 재즈밴드의 리더가 말했다. 소란스럽게 떠들던 사람들은 마지막 곡이란 말에 시선을 돌려 박수로 곡을 청했다. 나는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장실에 갔던 그녀가 돌아오고 있었다.

 

*

 

그날 밤, 맨해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빌딩 꼭대기의 재즈 바는 손님으로 가득했다. 밴드의 경쾌한 음악과 사람들의 요란한 웃음, 그리고 마주 앉은 남녀 사이마다 흐르는 묘한 분위기가 유리로 둘러싸인 바에 앉은 이들의 체온을 얼마쯤씩 상승시키고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나는 자꾸만 목이 탔다. 폐점시간은 이제 5분도 남지 않았다. 그 말은 2010년 역시 5분도 남지 않았다는 거였고, 말하자면 고백의 제한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마치 1:0으로 지고 있는데 후반 인저리 타임으로 넘어간 축구팀의 공격수 같은 심정이었다. 준비해온 무언가를 말해야 했다. 아니, 준비하지 않은 말이라도 뭔가 해야만 했다.

 

“나중에 사귈 사람은 어떤 남자였으면 좋겠어?”

 

맙소사, 실축. 나중에 사귈 남자가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냐고? 골문은 그쪽이 아니다. 마침 들려오는 드럼의 화려한 필인(fill-in)이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거센 야유처럼 느껴졌다.

 

“오빠 같은 사람이면… 좋겠어요.”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잘못 찬 볼을 멋지게 다시 내게 패스해주었다. 그래, 그녀는 나를 좋아한다. 나도 그걸 알고 있다. 문제는 나도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짝사랑이 온전한 하나의 사랑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고백이라는 잔인한 통과의례를 필요로 한다.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나는 다리에 쥐가 나기 직전이었다.

 

“그건 안 돼.”

 

설상가상이라더니. 나는 스스로의 입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날갯짓을 하며 스쳐가는 어두운 그림자.

 

“왜요?”

 

“왜? 왜냐하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후우. 심호흡이 필요하다.

 

“내가 널 좋아하거든.”

 

흔들리던 눈빛이 요동쳤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골대를 향해 힘껏 볼을 찼다.

 

“그러니까 나중에 사귈 사람은 나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어. 난 이제부터, 지금 니가 사귈 사람이 될 테니까.”

 

말이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도 모른 채 나는 계속 주절주절 괴변을 늘어놓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도 내 말을 별로 주의 깊게 듣는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그저 못 믿겠다는 표정을 한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을 뿐.

 

그녀가 울먹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말을 멈추고 그녀 옆자리로 옮겨 앉아 가만히 손을 잡았다. 그녀의 작고 하얀 손이 내 손 안에서 길 잃은 아기 새처럼 바르르 떨었다. 나는 그녀의 손 위아래로 내 두 손을 포개고는 귀에 대고 말했다.

 

“지금 잡은 이 손, 놓지 않을게.”

 

순간 다시 드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곡의 마지막을 알렸고, 그 위로 테너 색소폰의 엔딩이 겹쳐졌다. 테이블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와 함께, 브라보!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나는 마치 온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말처럼 들려 괜스레 뿌듯했다.

 

*

 

5분 후, 우리는 빌딩을 빠져나와 손을 마주 잡은 채 어둠에 잠긴 미드타운을 걸었다. 그새 날짜가 바뀌었고, 두 명의 솔로가 사라진 대신 한 쌍의 커플이 탄생했으며,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하나의 경기가 끝났지만, 동시에 또 다른 경기가 시작되었다. 인생이란 경기에서 한 경기가 끝났다고 샤워할 시간 따위를 기대하는 것은 금물.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새로운 경기장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이번엔 좀 더 나은 플레이를 펼치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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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날 밤 우리는 소호 뒷골목의 어느 좁은 찻집에 앉아 있었다. 어두워질수록 탁해진 공기가 실내를 맴돌았다. 그녀는 조금 취한 듯 했고 나는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군데군데 밝혀놓은 촛불에서는 향냄새가 났다.

 

“괜찮아?”

 

“…어.”

 

그녀의 목소리는 속으로 대답하는 것처럼 작고 희미했다. 나는 속이 탔다. 정확히 삼십칠 분 전에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탓이었다. 널 사랑해. 믿기 힘들겠지만 정말이야. 수십 번도 넘게 연습한 말은 오래 씹은 껌처럼 입에 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잠깐 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술을 주문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삼십 칠 분 동안 네 개의 술병을 비웠다.

 

“볼펜 있어?”

 

“응?”

 

“펜 있냐구.”

 

뜬금없이 그녀는 펜을 찾았다. 가방을 뒤져 펜을 건네자 그 다음엔 냅킨을 한 장 뽑아 들더니 무언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여자는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조금도 의식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듯 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볼펜을 달라는 말처럼 쉽게 꺼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무안해졌고 그 무안은 내면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분노로 변해갔다. 고백에도 유효기간이라는 게 있다면 이제 내가 한 고백은 막 상해가려는 참이었다. 어느새 삼십구 분 째였다.

 

“그럼 난 갈게. 천천히 와.”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분노와 무안, 좌절과 혼란이 엉킨 얼굴로 하얗고 희미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굴은 냅킨을 내밀며 속삭이듯 말했다.

 

“읽어봐.”

 

그녀가 건넨 것은 한 편의 시였다. 얇은 냅킨 위에 이어진 꾸불꾸불한 글자들은 내 마음처럼 어지러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아 그것을 읽었다.

 

 

After Long Silence

 

Speech after long silence; it is right,

All other lovers being estranged or dead,

Unfriendly lamplight hid under its shade,

The curtains drawn upon unfriendly night,

That we descant and yet again descant

Upon the supreme theme of Art and Song:

Bodily decrepitude is wisdom: young

We loved each other and were ignorant.

 

 

“뭐야?”

 

“좋아하는 시.”

 

“누가 쓴 건데?”

 

“예이츠.”

 

그녀는 웃었지만, 나는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한 사람의 진심이 이런 식으로 우스워지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백을 했고, 그렇다면 결과는 받아들여지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했다. 내가 원한 것은 확실한 대답이지 의미 없는 선문답이 아니었다.

 

“시 좋네. 갈게.”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돌아섰다. 둔기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쓰러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발을 옮기려는데 등 뒤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삶의 아이러니가 뭔지 알아?”

 

달려 나온 그녀는 비틀거리는 내 얼굴을 붙잡고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그녀가 냅킨에 글을 쓰고 있을 때보다 더한 당혹감을 느꼈다. 그녀를 밀쳐내지도 끌어안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그만 계산서를 들고 나온 웨이터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2

 

 

“말하자면 스포츠카의 아이러니 같은 거구나.”

 

“스포츠카?”

 

“젊을 때는 누구나 스포츠카를 타고 싶어 하지. 하지만 스포츠카들은 대부분 비싸잖아. 그래서 그걸 살만한 돈을 모으려면 어느새 젊은이는 중년의 남자가 되어 있어. 젊음이 있을 땐 돈이 없고, 돈이 있을 땐 더 이상 젊음이 없고.”

 

그녀가 웃었다. 내 이야기에 웃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어두운 찻집엔 손님이 없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두 행이 마음에 들어. 젊을 때 우리는 사랑하였으나, 무지하였다—”

 

그녀는 술잔을 들이키며 말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랑도 그런 거겠지. 사랑을 할 수 있을 땐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땐 더 이상 사랑할만한 젊음도 아름다움도 없다는 것…… 스포츠카처럼.”

 

“어쩌면 그럴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왜 이런 시를 보여주는 걸까. 이것이 내 고백에 대한 완곡한 거절의 뜻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자 두려웠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말했다.

 

“왜 나한테 이걸 보여준 거야?”

 

그녀는 머뭇거렸다. 잠깐인가, 당황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술을 더 시켰다.

 

“날 사랑한다고 말한 거,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한참 후에야 그녀가 말했다.

 

“무슨 뜻이지?”

 

“궁금해. 왜 날 사랑하는지.”

 

“그냥, 좋으니까.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딨겠어.”

 

“그 좋다는 느낌을 어떻게 믿지?”

 

“자꾸 왜 그래? 내가 그렇게 싫어?”

 

“아니, 싫어서가 아냐. 확인하고 싶은 거지. 이상하지 않아? 왜 사람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자꾸만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건지. 난 그게 이상해.”

 

“그래서?”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자주, 빨리 일어나는 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이래. 요구가 해결책을 발명한 거지. 사랑할 만한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가 사랑에 빠진다고 생각해? 아니, 절대 아냐. 오히려 그 반대지.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거야. 사랑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현실 속의 특정한 인물을 통해 구체화되는 거라구.”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다시 말하면 난 그저 사랑을 하고 싶은 네 욕망이 투사된 대상에 불과하다는 거지. 꼭 내가 아니라도 넌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을 거란 말이야.”

 

그건 동의할 수 없었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여자 외에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으니까. 난 그녀의 말에 화가 났고, 그래서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 챙겨둬. 이 시는 일종의 암호 같은 거니까.”

 

두 병을 더 마신 그녀의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언젠가 우리가 더 나이가 들면 이 시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때까진 이걸 가지고 있어.”

 

그녀는 고개를 파묻은 채 일어나지 못했다. 가게의 영업시간이 끝나자 나는 정신을 잃은 그녀를 데리고 나와 택시를 탔다. 그녀와 나는 허드슨 강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다. 조지 워싱턴 브리지를 향해 달려가는 옐로우 캡 안에서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3

 

 

뉴저지 포트리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하늘에는 별인지 인공위성인지 모를 불빛들이 가득 빛나고 있었다. 거대한 다리를 향해 걸으며 나는 긴 꿈을 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꿈이 아닌 것을 확인하듯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냅킨을 꺼내 그녀가 적어준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 긴 침묵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화자는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스페니쉬 버스를 탈까, 아니면 그냥 걸을까 고민하다 나는 조지 워싱턴 브리지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트럭과 트레일러들이 달리는 어퍼 레벨은 시끄러운데다 심하게 흔들려서 마치 물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다리 아래로 유유히 흐르고 있는 허드슨 강을 내려다보며 걷던 나는 중간쯤에 멈추어 섰다. 왼쪽에는 내가 살고 있는 맨해튼이, 오른쪽에는 그녀가 살고 있는 뉴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지금쯤 잠이 들었을까. 고백에 대한 대답은 언제쯤 들을 수 있는 걸까.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 어디쯤에 켜진 등을 바라보다, 나는 주머니에서 냅킨을 꺼내 조심스레 강 아래로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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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웹진 연재 두 번째.

 이번 기사 주제는

 

"Korean Writers in New York City"

 

뉴욕 속 한국 작가들이 궁금하신 분들은:

http://webzine.karts.ac.kr/201011m/webz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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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엌 뒤쪽에서 지하실로 통하는 문을 발견한 것은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젠장, 못 찾은 것보다도 못하게 됐군.”

    중얼거리며 문을 열려는 순간 프랭크가 몸을 낮추며 나를 막았다.

    “이것 봐, 손잡이에만 먼지가 적게 쌓여 있어.”

    “그래서?”

    “최근까지 놈이 이곳을 드나들었단 얘기지. 곧 다시 말하자면……”

    “알겠어, 알겠으니까 쉽게 가자고.”

    나는 문을 홱 열고 권총을 겨눈 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갈수록 지하실 아래로부터 심한 나프탈렌 냄새가 올라왔다.

    “이봐, 그렇게 서두를 건 없잖아.”

    코를 쥐었는지 맹한 목소리로 뒤쪽에서 프랭크가 말했다.

    “신중 또 신중 몰라? 상대는 연쇄 살인범이라고. 사우스 솔트레이크(South Saltlake) 시티가 생긴 이래 가장 흉악한……”

    잔뜩 움츠린 그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속삭이는 듯 했다.

    “닥치고 불 좀 찾아봐.”

    곧 계단이 끝났다. 프랭크의 손전등이 이곳저곳을 비추더니, 오른쪽 구석에서 전등 스위치를 찾아냈다. 총을 겨눈 채로 스위치를 올리자 지하실 전체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저기……!”

    프랭크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텅 빈 지하실의 왼쪽 모서리였다.

    “엄호.”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왼쪽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네 개의 검은색 직사각형 상자가 놓여있었다.

    “이게 뭐 같냐?”

    “관이라는 데 내 연금과 니 목숨을 걸지.”

    어느새 다가온 프랭크가 말했다.

    “열자.”

    프랭크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씨발, 이라고 중얼거리더니 곧 관의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관 뚜껑은 제법 무거워서 남자 두 명이 겨우 들어 올릴 수 있는 정도였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썅!”

    관이 열리자 프랭크가 코를 쥐며 돌아섰다. 관 속에는 대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누워있었다. 조금 붓고 변색되긴 했지만 살아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 그제서야 나는 지하실 가득한 나프탈렌 냄새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거.”

    프랭크에게 시체의 머리맡에 놓여있는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대문자로 <KID>라고 적혀있는 종이였다.

    “키드?”

    “다음.”

    두 번째 관을 열자 거기엔 젊은 여자가 누워있었다. 머리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악한 황금 왕관이 씌워져 있고, 옆에는 <KING>이라는 단어가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이 새끼?”

    “다음.”

    세 번째 관에 누운 것은 초로의 남자였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 위에 놓인 것은 얇은 종이로 만든 연이었다. 그리고 적혀 있는 단어, <KITE>.

    “제기랄, 도저히 못 참겠네. 나가자.”

    “하나만 더.”

    마지막 관은 이제까지의 관과 조금 달랐다. 폭이 두 배 정도나 더 넓고, 뚜껑의 무게도 무거워서 프랭크와 나는 한참을 낑낑거려야 했다.

    “이건 또 뭐야, 썅.”

    관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대신 프랭크는 그 속에서 단어가 적힌 종이를 꺼내 읽었다.

    “케이, 아이, 에스, 에스?”

    “뭐야 그게?”

    “몰라서 물어? 이 새끼, 이번엔 누굴 죽이려고…… 변태새끼.”

    그가 건넨 종이를 손에 쥐자, 내가 가진 단어는 모두 네 개였다.

 

    KID. KING. KITE. KISS.

    아이, 왕, 연, 그리고……

 

    “이봐, 최근에 들어온 아동 살인 사건 기억나?”

    “디트로이트꺼?”

    “그래…… 20대 여자 강간 살인은?”

    “그야 수도 없이 많지.”

    “제일 최근꺼 말야.”

    “노스 조지아.”

    프랭크과 나는 눈을 맞춘 채 한동안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었다. 나는 확인하듯 한 번 더 물었다.

    “50대 남자 살인은……?”

    “……테네시 내쉬빌.”

    비로소 나는 시체들과 함께 관 속에 들어있던 단어들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들이 다만 단어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도.

 

 

    KID.
    Killed In Detroit.

 

 

    KING.
    Killed In North Georgia.

 

 

    KITE.
    Killed In TEnnessee.

 

 

    그렇다면,

 

 

    KISS.
    Killed In……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프랭크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계단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저 위에서 철컥, 하고 문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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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로 발간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웹진 K-arts에

이번 호부터 필진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해외통신원 문지혁의 뉴욕오디세이>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이번 호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대한 (소설 형식의) 기사다.

 

학교 측에서 명함까지 파주시는 바람에

기자 정신으로 사진까지 여러 장 찍어 보냈는데,

막상 나온 웹진을 보니 내가 찍은 사진을 멋진 배경으로 만드셨다는.

디자이너들의 창의력은 늘 존경스러운 면이 있다.

 

어쨌든,

그 외에도 흥미로운 기사와 사진, 동영상들이 여럿 담겨 있다.

뉴욕과 뮤지컬, 혹은 예술과 사회에 관심 있는 분이시라면 

아래 링크를 따라가 보시길:

 

http://webzine.karts.ac.kr/201009m/webz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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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퍼붓다 그친 차이나타운 거리로 다시 나왔을 때, 우리 중 반 정도는 엉망으로 취해있었다. 중국집에서 고량주를 제법 마시기도 했거니와, 모인 시간에 비해 너무 빨리 마신 것도 그 이유였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지금 와서 기억나는 것은 오직 목을 알싸하게 그으며 내려가는 술기운뿐이니까.
  

어쨌든 빗물인지 구정물인지 모를 검은 물들이 찰랑거리는 그 거리에서, 누군가 2차는 코리안 타운으로! 라고 외쳤고 몇몇 목소리들이 동조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32가에 있는 일명 K타운은 이 시간쯤이면 맨해튼 각지에서 1차를 마치고 2차를 하기 위해 몰려온 한인들로 북적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나둘 택시를 잡아 거기서 봐! 라며 헤어지기 시작했고 나 또한 마지막까지 남은 무리들 틈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현듯 라리사를 떠올린 것은, 마지막 옐로우 캡이 도착한 순간이었다.
 

라리사. 덴마크에서 온 금발의 아가씨. 어학원 종강파티랍시고 클래스의 반 이상을 차지했던 한인끼리 모여 이렇게 술을 퍼마시고 있으면서도, 사실 마음은 계속 딴 곳에 가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처럼 전형적인 금발 미녀는 아니었지만, 환한 미소와 친절한 말씨로 내게 말을 걸어주던 그녀. 몸을 조금씩 움직이거나 자리를 고쳐 앉을 때마다 그녀에게선 맨해튼의 악취도 어쩔 수 없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를 만나는 것이 수업에 나가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마침내 오늘, 마지막 수업을 마치며 한 마디씩 감회를 이야기하는 시간, 나는 틀이 박힌 소감 대신 이 한 마디를 말하고 싶었다. I think I love you, Larissa.

  
그러나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 나는 선생님이 잘 가르쳐주시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 행복했다는,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한 소리를 늘어놓고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교실을 빠져나가는 라리사의 뒷모습만 황망히 바라보다 친구들 손에 이끌려 여기까지 오고 만 것이다. 평소와 달리 술을 과하게 마신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터번을 둘러쓴 택시 기사가 마지막으로 남은 네 명 앞에 멈추어 섰을 때, 나는 잽싸게 앞자리로 올라타면서 친구들을 향해 미안해! 라고 외쳤다.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얼른 출발하라고 재촉하자 기사는 인상을 한 번 찌푸리더니 거칠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멀어져가는 백미러로 소리 지르는 녀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웨스트엔드, 원 오 세컨 스트릿.”

 
가방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내 주소를 읽어주자 기사는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학기 초에 나눠가진 연락처 리스트를 아직까지 갖고 있는 사람은 아마 나 뿐일 것이었다. 침묵을 지키던 기사는 다운타운을 빠져나갈 무렵 걸려온 한 통의 전화와 함께 입을 열더니, 그때부터는 알 수 없는 언어로 쉴 새 없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본업은 택시 기사가 아니라 통신 판매원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첼시마켓을 지나 미드타운에 들어서자 차가 속력을 냈다. 한쪽에 전화기를 붙들고 운전하는 폼이 영 못미더웠지만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혼미한 정신 속에서 나는 라리사에게 할 말을 생각해내야 했다. 뜬금없이 이 밤중에 왜 찾아왔다고 해야 하지? 첫 인사는? 좋아했다는, 아니 좋아한다는 말도 해야 할까? 사랑한다고 해야 하나? 그 다음엔 어떻게 하지? 두서없는 생각들이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불빛들처럼 머릿속에서 흩날렸다. 더군다나 이 모든 것을 영어로 말해야 하다니. 그간 학원에서 배운 게 뭔가 싶어 허탈했다.

  
스트릿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내 마음은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로켓처럼 타들어갔다. 몽롱했던 정신은 긴장감 때문인지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나는 수업시간보다 더 열심히 머릿속으로 문장을 만들어 냈다. 떨어지면 불구덩이에 빠지는 시험을 보기 직전인 사람처럼 필사적이었다. 그러는 사이 택시는 70가, 80가, 90가를 차례로 지나 어느 순간 멈추고 말았다. 나는 채 다 만들어지지 않은 영어 문장들을 중얼거리며 주머니에 있던 마지막 20불짜리를 통화 중인 기사에게 건넸다.

  
마침내 택시에서 내려 찬 기운을 확 들이마시는 순간, 나는 술이 완전히 깨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멍하니 서서 그녀가 살고 있다는 건물을 올려다보니 대부분의 창엔 불이 꺼져 있었다. 저 중 그녀의 창은 뭘까. 밖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까, 아니면 자고 있는 걸까. 그러는 사이 아까 애써 만들어낸 영어 문장과 단어들이 길 잃은 새끼 고양이들처럼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돌아다녔다. 나는 건물 입구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가, 두 걸음 물러서기를 서너 번쯤 반복했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애꿎은 시간만 확인하다, 끝내 나는 전화기를 열어 그녀에게 전화 대신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고픈 말은 많았지만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다 결국 그녀에게 보낸 문자는 단 두 단어였다. Good Night. 핸드폰을 닫고 지갑을 뒤져보니 들어있는 것은 1불짜리 지폐 두 장. 지하철도 버스도 탈 수 없는 지폐 두 장을 다시 지갑에 구겨 넣고 나는 뒤돌아 저 멀리 코리안 타운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거기 오래오래 머물러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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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돌고 도는,


시작도 끝도 없는,


어느 누구의 것도 될 수 있는


이야기.

 

 

인종과 국적만큼이나 다양한 


서로 다른 취향과 사연과 비밀들이 모여 사는 이 곳에서-


그러므로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바로 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Somewhere  near  West 4th St.

mint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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