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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라는 단어에 어떤 이미지, 또는 느낌이 떠오르는가? 우리가 늘 접하고 사는 그, 물리적인 벽을 바로 생각하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부정적인 것들이 먼저 떠오른다. 사전을 찾아보자.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나 장애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넘사벽’이라는 유행어가 생각난다. 아니면 ‘관계가 교류의 단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도 한다. 냉전시대의 벽, 그러니까 베를린 장벽과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벽은 갈라놓는다. 그래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언제나 붙어 다닌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한탄하는 노래 가사도 있듯, 벽이 지니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재질보다는 존재감 그 자체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벽이 갈라놓지 않으면 공간도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 학부시절 읽었던 건축 이론책이 생각난다. 오래전 일이라 제목도 저자도, 또한 어떤 내용을 다루었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일본책을 번역한 것이었는데, ‘벽도 벽이지만, 그로 인해 생기는 공간에 진짜 의미가 있다’와 비슷한 구절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언제나 공간에 쪼들리는 우리에게 사실 벽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 쪼들리는 공간 안에서 쥐꼬리만한 사생활을 보장해주는 건 벽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 시대는 그 정도의 벽으로 사생활을 지키기에 너무 복잡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벽은 얄팍해서 시각적인 차단으로 체면치레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재질은 물론 존재 면에서도 그렇다. 잘 지어 놓았다는 아파트에서도 새벽, 윗집 변기 물 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옆집에서 붙박이장의 문을 세게 닫으면, 그 맞은 편 벽에 책상을 놓고 일하는 내가 다 깜짝 놀라게 된다. 남의 사생활을 듣게 되는 것도 불편하지만, 그만큼의 나의 사생활도 드러날 것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더 불편해진다. 이렇게 벽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단지 제 역할을 못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벽을 학대한다. 면벽수도(面壁修道)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얼굴을 벽에 대고 도를 닦는다는 불교 용어다. 물론 불자들의 수행방법이니 속인과는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정말 면벽수도를 원하는 불자들이라면 절에 좋은 벽들이 많이 있을 테니 속세의 벽까지 딱히 신경 쓸 필요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벽이 지니고 있는 단절감, 또는 침묵이 면벽수도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 정도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요즘 우리의 벽은 도저히 침묵을 지킬 수가 없다. 사람들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여지만 있어도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또는 말을 집어넣으려고 안달한다. 



내가 사는 오산의 벽은 모 문인협회가 장악하고 있다. 역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부터, 대합실의 공간을 이들의 시화 액자가 가득 메우고 있다. 물론 이 자리를 빌려 작품성을 논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그건 내 소관 밖이다. 다만, 눈을 돌리는 곳마다 있기 때문에 정말 눈을 감아버리지 않는 이상 누군가의 생각을 끊임없이 봐야만 하는 상황은 괴롭다. 이들이 장악하고 있는 건 단지 이렇게 넓은 벽만이 아니다. 화장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소변기에 섰을 때 바로 눈앞에 있는 벽에도 “작품”을 붙여 놓았다. 생물학적으로 시선이 거의 고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변을 보는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순간에도 뭔가 생각하기가, 아니면 아예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가 너무 힘들다. 주입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오산의 공공기관 화장실은 대부분 이렇게 접수되어 있다.

물론 모 문인협회를 비난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말들, 그러니까 온갖 ‘훈장질’을 비롯한 경구들은 산지사방에 널려 있다. 특히 지하철역은 그런 말들의 전시장이다. 일단 종교적인 가르침에 기댄 일화나 우화 등등을 담은 액자들이 널려 있다. 참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물론 찬찬히 읽어보면 좋은 말들도 많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러한 말, 또는 이야기들이 주는 가르침이 없어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돌아가는 건 아니다. 너무 많다 보니 정말 뭔가 주고 싶어서 그런 말들을 내 건 것인지,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싶어서 그런 것인지 이제는 그것도 분간할 수 없어졌다. 


안전을 위해 플랫폼에 벽을 설치하자, 지하철역에는 이제 더 많은 말들이 들어섰다. 일단 벽=광고이므로 온갖 반짝거리는 광고들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광고=돈이므로 오히려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보기 좋다는 건 아니다. 너무 반짝거리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돈이라는 명분이 있으니 불편함을 감수해주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광고가 들어서고 남은 유리벽까지 시로 채우고 나니 또한 어디로도 눈을 돌릴 수가 없어진다. 대부분의 시들을 보면 각박한 생활에 지친 도시인들을 달래주고 싶다는 아량으로 가득하나, 오히려 그 시의 존재 때문에 더 피곤해진다. 

물론 도시에 살면서 면벽수도 같은 걸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나도 다른 도시인들처럼 바쁘게 산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오감을 언제나 열어놓고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이든 무차별적으로 흡수하면서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때로 닫아둘 필요도 있고, 침묵을 지켜야 할 필요도 있으며,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벽이 필요하다. 자발적인 고립을 보장해줄 벽도 필요하고, 면벽수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어 있기 때문에 편안한, 그런 벽도 필요하다. 한마디로 벽다운 벽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벽을 벽답게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존재 또는 말에 대한 강박관념이 벽을 가득 메워 버렸다. 채우기는 쉽지만 비우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제는 채울만한 여지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침묵을 지킬 수 없는 벽을 자꾸 세워봐야 우리는 유사고립상태에 더 빠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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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어느 식당에서 아주 맛있는 오이 소박이를 먹은 적이 있다. 언젠가부터 맛있는 김치-평범하게 무나 배추로 담근-을 먹는 것도 어려워졌지만, 오이소박이를 먹는 건 정말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오이들이 금방 물러버리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손맛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담근지 며칠 만에 물러버리는 오이까지 살릴 수는 없다. 


이때 먹은 오이김치는 구운 조개 관자와 함께 나온 것이었다. 잘 익은 김치의 상큼함이 역시 잘 구운 조개 관자의 “느끼함(사실 그다지 느끼하지 않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대부분 느끼하다고 생각한다)”을 상쇄시켜주고 있었다. 그래서 둘의 궁합은 훌륭했으나, 김치 자체가 너무 매워 균형이 살짝 깨지는 것이 옥의 티였다. 식사를 마치고 셰프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 물어보았더니, 그 정도로 매운 김치를 원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워낙 매운 맛을 좋아하는지라 고춧가루도 그런 품종들 밖에는 구할 수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생각해보니 내 집의 식탁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머니의 김치는 이북과 충청도의 영향을 골고루 받아서, 딱히 맵거나 짜지 않았다. 내가 가끔 흉내 내서 담그는 김치 또한 비교적 표준화 되었다고 믿는 레시피를 참고로 하는 것이라 기본적으로 썩 맵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어느 해인가부터 예년의 것들보다 더 매운 고춧가루 밖에 살 수 없게 되면서, 김치맛도 변하게 된 것이다. 여전히 썩 짜지는 않지만, 매워서 많이 먹기는 어려워졌다. 고춧가루를 바꾸고 싶지만 외가 쪽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 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적게 넣는 것 외에는 매운 맛을 조절할 길이 없어졌다. 

매운맛이 유행이라고들 한다. 근데 이러한 이야기조차 너무 오래된 터라, 딱히 매운맛이 예전, 그러니까 10년쯤 전보다 더 유행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균형을 깨는 매운맛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처음 ‘찜닭’이라는 것이 나왔을 때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음식이 대단한 취급을 받고 유행이 되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호기심에 먹었을 때의 그 매운맛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간장을 바탕으로 한 양념이라 매워 보이지 않는데 그렇게 맵다니! 같이 나오는 반찬들 또한 딱히 매운맛을 가셔줄만한 것들이 아니어서 식사는 고통스러웠고, 그 뒤로는 아마 거의 찜닭을 다시 먹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온통 재개발중이라 기억도 잘 안 나는 무교동의 낙지집 또한, 왜 얼마 안 되는 낙지를 그렇게 뻘건 양념에 파묻어서 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먹고 난 뒤의 개운함? 음식 먹은 만큼 물을 마셔야 되는데 속이 개운할 리가 없지 않나? 

사실 요즘 유행하는 매운맛 음식들을 보면 찜닭이나 낚지볶음 정도는 애교처럼 느껴진다. 그러한 매운맛의 영역은 거의 차력에 가깝다. 그래서 ‘완식(이 말조차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을 하면 빈 그릇을 들고 'V‘자를 그린 ‘인증샷’을 찍어 가게 벽의 명예의 전당이나 블로그에 자랑스럽게 올리게 되는 것인가? 해병대 캠프라도 다녀온 듯한, 극기의 흔적을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많이들 하는 이야기라 되풀이하기도 지겹지만, 사실 매운맛은 맛도 아니다. 미각이 아니라 통각(痛覺)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바늘로 혀를 찔러서 아픈 것이나, 매운 고추를 먹어서 혀가 아픈 건 원인이 다를지언정 그 결과는 같다. 그러나 스스로 혀를 찌르는 사람은 없어도, 쓸데없는 도전정신을 발휘해서 말도 안 되게 매운 음식의 ‘완식’ 도전을 하는 사람들은 오늘도 꽤 많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매운 짬뽕 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유행이 되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매운맛은 맛이 아니므로 이런 종류의 쓸데없이 매운 음식을 내놓는 가게에 ‘맛집’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건 아예 난센스라고 생각한다. 

사실 문제는 매운맛 자체보다, 그 맛의 원천이다. 이 또한 이미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렇게 폭력적으로 매운 맛의 원천은 수입산 싸구려 캡사이신 액이다. 궁금한 사람이라면 인터넷에서 ‘캡사이신액’으로 검색을 하면 된다. 가격도 아주 저렴하다. 아마 그렇지 않으면 그 모든, 천편일률적으로 폭력적인 매운맛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싸구려 수입산 캡사이신 액에 의지하는 매운맛이 우리 고유의 맛인 것 마냥 착각하는 현실이다. 검색으로 찾아 들어간 모 국회의원의 홈페이지 게시판에서도 “매운맛으로 외국인의 입맛을 사로 잡아야”라는 요지의 글을 보았다. 직접 쓴 것인지 아니면 어디에서 긁어온 것인지. 거기까지 확인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지만, 외국에 우리의 맛을 알려야 한다며 뉴욕에조차 여기에서 재료를 공수해서 음식을 만든다고 난리 법석을 떨지만 정작 우리맛이라는 이 매운맛은 수입산 캡사이신 액이 책임진다. 

사실 혀가 떨어져나갈 것처럼 아픈 것 말고, 매운맛 자체가 딱히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위나 장에 궤양을 일으킬 염려도 사실은 없으며, 적당히 매운맛은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과유불급,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매운맛은 그렇게 건강에 도움이 되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렇게 매운맛을 내세우는 가게들의 음식은 간이 거의 맞지 않는다. 매운맛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간을 맞추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짠 음식이 건강에 나쁘다는 손님의 성화에 간을 약하게 하거나 거의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 그럼 짠 건 나쁘고, 이렇게 매운 건 괜찮은가?

어쨌든 우리는 이런 음식을 먹고 산다. 우리는 미각이라는 것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다들 비싼 돈을 내고 맛도 성의도 없이 만든 음식을 먹고 살면서, 그게 맛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터부시한다. 우리 음식의 맛을 완전히 뒤덮어버린 매운맛과 단맛도 우리의 미각을 마비시키는 주범들이다. 어차피 이런 맛이 우리 고유의 맛도 아니고, 또 고유의 맛이라고 해도 수입산 싸구려 캡사이신 액이 책임지는 것이 현실인데 이런 맛으로 외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자는 이야기는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낯부끄럽다. 나는 이빨로 버스를 끄는, 뭐 그런 것들만 차력인줄 알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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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사진은 @cjreally님에게 제공받았다)

원래 다른 글을 쓰려던 참에, 누군가의 트윗을 보게 되었다. “세운상가 뒤가 가장 서울 같아서.” 밤의 세운상가 사진이었다. ‘폰카’로 찍은 다소 조악한 느낌의 사진이 오히려 어슴푸레한 청계천의 분위기를 더 그럴싸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강남은 강남 나름의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서울하면 강북이고 또 을지로나 청계천 쪽이 가장 서울답다고 생각한다. 아름답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면 기와집들이 아직도 남아있는 북촌이며 가회동을 꼽아야만 할 것이다(물론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삼청동은 아예 언급도 하지 말자. 혈압이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지역은 서울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 아니다. 서울토박이도 아닌 나에겐 을지로와 청계천 일대가 바로 그런 곳이다. 

청계고가차로가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으로 기억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을지로나 청계천 주변에서 벌이는 술판의 하이라이트며 클라이막스는 바로 청계고차차로를 타고 달리는 총알택시였다. 마장동 축산물 시장의 어귀에서 살던 시절이었다. 토요일 새벽 두 시께,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집으로 향하는 잡아탔던 택시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청계고가차로 위를 정말 총알처럼 달렸다. 술기운과 택시의 속도, 그리고 고가도로의 높이까지 한데 더하면 정말 도시를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주 추운 한 겨울이 아니면 늘, 그 도로 위를 달릴 때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도로 아래로, 또는 눈높이로 빠르게 지나가는 도시의 불빛을 음미했다. 

종로에서 청계고가도로를 쭉 따라 마장동까지 걸어간 적도 많았다. 이제는 십 년도 더 된 일이라 희미하지만, 아직도 황학동의 풍경이나 유리 뚜껑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달팽이의 기억은 남아 있다. 남의 나라에서 근 십년 가까이 사는 동안 청계고가도로는 사라졌고, 청계천은 복원 아닌 복원이 되었다. 그 이후로 그 일대를 걸어서 지나본 적은 아직 없다. 다만 작년 봄 참가했던 하프 마라톤 코스가 그쪽으로 지나쳤는데, 달리기의 고통 및 기록을 향한 욕심 때문에 거리의 면면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넓어지고, 새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뜬금없이 서울다움과 세운상가를 연결하려는 시도를 보이는 것은, 진정한 도시의 매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싶어서다. 세운상가는 아름답지 않다. 잘 빠지고 세련된 고층건물도, 처마의 선이 아름다운 문화유산인 한옥도 아니다. 그저 지저분하게 낡은 콘크리트 건물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지저분하게 낡은 것도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도시 전체가 세운상가의 건물 같은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도 곤란하다. 또한 고층건물이나 한옥으로만 이루어져 있어도 매력은 반감될 것이다. 한옥이며 세운상가며 고층건물과 같이 각자 다른 시간의 흔적을 지닌 것들이 한데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려서 만들어내는 전체의 모습, 그것이 도시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단순히 좋아하다 못해 동경하는 서양의 도시들은 대부분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과거의 모습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어우러지면서 존재한다. 공존일 수도 있고, 혼재여도 상관은 없다. 파리를 예로 들더라도, 굳이 샹젤리제 거리며 에펠탑, 그리고 라데팡스를 한 꼬치에 꿰려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현대 이전의 건축물에 요즘의 간판이 어떻게 자리를 잡고 있는지만 봐도 된다. 

대부분의 유럽 도시들이 이러한 시간의 흔적을 매력으로 내세우고 있는 반면, 베를린은 예외다. 세계 제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시가지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그 위에 다시 세운 베를린은 넓은 길이며 시가지가 유럽의 도시보다는 오히려 서울과 느낌이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다만, 상품화된 전쟁의 역사가 도시를 장악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나름대로 세련된 도시였지만, 어째 인간미를 느끼기가 어려웠다. 굳이 규모가 크거나 커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모든 것들이 너무 같은 시기에 자리 잡은 느낌이 까닭 없이 불편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선하다.

서울이라는 도시에도 사실 오랜 시간의 흔적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전쟁을 겪기도 했으니), 대신 우리는 아주 빠른 변화를 계속해서 겪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유럽의 도시처럼 아름답지는 않아도 그 나름 극적인 변화가 켜켜이 쌓여있고 그 점이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시간의 흔적도 아름답지 않다는 이유로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큰길에 면한 세운상가의 얼굴은 공원이라는 가면으로 덧씌워졌다. 동대문 운동장 자리에는 유명한 해외 여류 건축가의 전매특허인, 초현대적 디자인의 거대한 건축물이 들어선다. 한창 공사중인데, 그 옆을 지나가면 생각보다 큰 규모에 깜짝 놀란다.

건물뿐만이 아니다. 트레일러까지 단 오토바이들이 가뜩이나 좁은 인도로 달리는 통에 걷기가 썩 편하지는 않지만 오밀조밀하게 쌓여 있는 물건들의 표정이 다채로운 청계천이며 을지로 상가의 간판들도 거의 전부 새롭게 물갈이 되었다. 비단 이것이 정책 입안자의 시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용산구 문배동-삼각지역 부근-에는 오래된 육개장, 칼국수 집이 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면 창밖으로 보이는 가게다. 이 가게의 간판은 최근까지도, 오래 전에 사라진 화학조미료의 상표를 달고 있는 다 낡은 것이었다. 건물이며 간판, 그리고 파는 음식마저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 분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기차를 타고 지나가다 세련된 간판으로 교체된 것을 보았다.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겠지만, 어째 예전과 같은 느낌이 나지 않았다. 내가 주인도 아니니 간판이 어떻게 되든지 사실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째 섭섭했다. 

어떠한 건축적인 유산이 너무나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보존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낡고 지저분한 세운상가가 어떠한 건축적인 의미며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그건 더 시간을 들여서 따져보아야 할 별개의 문제다. 다만, 낡은 것들을 계속해서 지우고 새 것을 더하는데 그만큼 우리가 얻고 있는지, 그게 궁금할 뿐이다. 그런 것들이 도시에서 사라진다고 내 삶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계속해서 섭섭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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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우리나라의 현실을 감안할때 채식 베이킹이 아니거나, 그렇더라도 썩 건강한 건 아닐 확률도 만만치 않은 식빵)

채식 베이킹이 유행이라고 한다. 서점에서도 만만치 않은 종류의 관련 요리책을 찾아볼 수 있다. 건강이 화두다 보니 이제는 베이킹에도 ‘채식’을 붙이는 현실이다. 일종의 의무적인 관심-직업정신에 기댄-으로 채식 또는 자연식 베이킹을 표방하는 카페 또는 제과점의 빵을 먹어보았다. 또 비슷한 컨셉트를 가지고 두부로 만든다는 대기업의 도너츠 또한 먹어보았다. 또한 몇몇 인기를 얻고 있다는 관련 책들 또한 들여다보았다. 그를 바탕으로 채식 베이킹과 제과제빵에 얽힌 몇 가지 오해, 또는 잘못된 생각을 몇 가지 짚어보고자 한다.

1. 채식 베이킹에서 ‘베이킹’은 어떤 빵류를 대상으로 삼는가?
개인적으로는 베이킹에 ‘채식’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조차 그다지 이치에 맞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베이킹은 기본적으로 채식이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식사빵’이라는 사실 얼토당토 않은 명칭으로 불리는 빵 종류는 사실 기본적으로 채식 베이킹의 산물이다. 제빵의 가장 기본재료 즉, 밀가루, 소금, 이스트, 그리고 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원래 베이킹의 정수는 이러한 발효빵을 만드는 것이고, 이 재료만으로도 놀랄만큼 맛있는 빵을 구울 수 있다. 프랑스의 대표빵인 바게트나, 이탈리아의 대표빵인 치아바타 모두 저 4대 재료만으로 구운 것이다. 그 나머지를 책임지는 것은 빵 장인의 손길과 감각이다. 베이킹은 과학이라서 엄격한 계량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이스트라는 생명체를 다뤄야만 하기 때문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레시피로 빵을 구워도 온도나 습도 등등에 따라 아주 미세한 조절이 필요하다. 이를 책임져 늘 같은 맛과 식감의 빵을 굽는 것이 빵 장인의 능력이다. 

이렇게 최소한의 재료와 장인의 감각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기본빵은 만들기가 다른 빵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렇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본의 ‘간식빵’ 문화가 넘어와 발달해서 그런지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빵을 찾기가 너무 어렵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채식 베이킹의 대상 또한 이러한 종류의 빵이 아니다. 흔히 퀵브레드(quick bread)'라고 부르는, 이스트로 시간을 들여 부풀리는 대신 베이킹 파우더나 소다로 바로 부풀리는 머핀이나 비스킷류, 아니면 쿠키나 파이 등등의 과자류다. 어떤 것은 베이킹이고 또 다른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편파적일지 몰라도, 이러한 종류의 베이킹에서 들어가는 몇몇 동물성 재료를 식물성으로 대체하고 채식 베이킹이라고 부르는 것이 베이킹 자체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지는 그야말로 이해하기 어렵다. 애초에 그런 종류의 베이킹이 아니라면 구태여 베이킹에까지 ‘채식’의 딱지를 붙일 필요는 없다. 

2. 무엇을 위해 대체하는가?
당연하게도 건강 문제이다. 우유와 계란, 그리고 동물성 지방을 대체하는 것이 채식 베이킹의 목표인 듯 보인다. 이러한 재료의 인체 유해성에 대해 논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보다 큰 그림을 보면서 건강과의 관계에 대해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채식 베이킹의 대상은 대부분 설탕, 그도 아니면 어떤 식의 당과 버터가 아니더라도 식물성 지방이 들어가는, 단맛 나는 빵과자류이다. 설사 식물성 재료를 썼다고 해도 칼로리는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다. 대다수 우리나라 사람의 식습관을 고려해볼 때 식사 대체품은 될 수 없으니, 당연히 간식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종류의, 탄수화물과 지방 위주의 고열량 단과자류는 동물성 재료를 쓰나 식물성을 쓰나 건강을 위한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물론 나도 채식이든 육식이든 이러한 종류의 단과자류 먹는 걸 어느 정도 즐기는 편이지만, 맛을 즐기기 위해서 먹지 건강을 위해서 먹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음식은 태생 또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먹으면서 건강까지 챙기는 식으로 두 마리 새는 잡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진짜 건강을 생각한다면 채식이든 육식이든 이런 종류의 단과자류 섭취를 줄이거나 끊어야 한다. 또한 이런 종류의 식습관은 현대인이 먹는 거의 모든 종류의 음식에 해당된다. 과유불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나쳐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또한 원론적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식사빵‘은 단과자빵보다 열량도 낮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적어야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현실이 그렇지 못함을 염두에 둘 필요도 있다. 담백한 맛을 표방하는 식빵조차도 원재료 목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만만치 않은 합성지방(버터 대체품)이나 설탕을 넣었다. 식감이 좋아지거나 단맛이 두드러져 입에 “붙게”만들기 위해서이다. 프랜차이즈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거의 대부분의, 그리고 드문 개인 빵집에서도 물과 밀가루, 소금과 이스트만으로 만든 빵을 내놓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책임은 빵보다 첨가 재료 맛으로 빵을 먹는 소비자에게도 일정 부분 있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제대로 된 빵을 못 먹어봤으니 그런 것도 당연하기도 하다. 진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다. 

3. 제과제빵 이론의 부족으로 인한 잘못된 지식 전달
책을 낸다는 것은 권위를 상징한다. 인쇄물로 남는 기록의 특성이다. 돈을 주고 책을 사서 자신의 레시피를 보고 음식을 만들어 먹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최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채식 베이킹 책들을 들춰보면 그러한 부분에서 굉장히 부족하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베이킹은 과학인데도, 아마추어의 방법론을 과학적인 검증 없이 제시한다. 

그 가장 좋은 예가 채식 베이킹 책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식물성 기름의 사용법이다. 파이나 타르트 껍데기(크러스트)를 예로 들어보자. “육식” 베이킹에서 이러한 크러스트를 만들 때 “상온에 있두었지만 차가운” 버터를 쓰는 건 다 이유가 있다. 고체 상태의 지방을 밀가루 사이사이에 채워 넣으면, 오븐에 넣었을 때 열에 의해 버터에 있던 수분이 증발되고 그 자리가 비게 된다. 이러한 공간이 파이 껍데기의 바삭바삭함을 불어넣는 것이다. 크로아상을 생각해보라. 이러한 바삭바삭함은 액체상태의 지방만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다. 이러한 과학적인 지식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든 채식 베이킹 레시피의 파이 껍데기는 식물성 기름으로 밀가루를 반죽해서 만든다. 그저 흉내 내는 의미는 있을지 몰라도, 파이 껍데기의 본질은 이룰 수 없다. 이를테면 열악한 대체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채식 베이킹을 통해서도 이러한 파이 껍데기를 만들 수 있기는 하다. 원래 액체여야만 하지만 현대과학의 도움으로 상온에서도 고체상태를 유지하는 식물성 경화유를 쓰면 된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마가린이 바로 식물성 경화유다. 물론 쇼트닝도 있다. 건강을 생각하는 채식 베이킹이니만큼 이런 재료라면 손사래를 칠 것이다. 쿠키나 머핀 등을 구울 때도 마찬가지다. 이루고자 하는 식감에 따라 같은 버터라도 완전히 녹여 액체로 만들거나 아니면 마요네즈와 같은 상태의 ‘크림화’를 이뤄 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베이킹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책들에서 그러한 흔적을 엿볼 수 없다. 무작정 설탕의 양을 줄인다거나, 아가베 시럽과 같은 검증되지 않은 대체품을 쓰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4. 맛 또는 식감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많은 채식 베이킹 레시피에서 두부 사용을 권장한다. 바른 용어는 아니지만 일종의 ‘볼륨감’을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기름에 노릇노릇 지져 파 송송 썰어 넣은 양념간장을 찍으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맥주 또는 막걸리 안주인 두부는, 베이킹에 쓰면 이 뒷면에 달라붙는 찐득찐득한 식감을 선사한다. 

5. 채식에 얽힌 엘리트주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 아니고도 많은 사람들이 ‘키배’를 벌이고 있기 때문에 귀찮아서라도 자세한 언급은 피하겠다. 그래도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원형보다 한참 열등한 대체품이 우등한 것처럼 인식되는 현실은 슬프다. 아직도 죽지 않은 채식과 엘리트주의의 관계가 베이킹에도 스며들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예외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신체 조건 또는 특수 유전 질환 등으로 특정 재료 또는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셀리악 병(Celiac Disease)' 환자는 밀가루의 글루텐을 소화흡수하지 못해 설사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모르겠지만 빵이 주식인 서양의 경우에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질환이라서 글루텐이 들어가지 않는 베이킹의 레시피가 보다 더 체계적으로, 조리과학에 바탕을 두고 개발된다. 검증받은 빵 장인이 개발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미국에서 살 때 호기심에 이런 제품들도 종종 먹어보았으나 절대 원형보다 나은 대체품은 될 수 없었다. 원형이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므로 그 부분을 거세한 대체품이기 때문이다. 나는 채식 베이킹 또한 그러한 특성의 대체품으로 인식한다. 특정 질환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일반적인 ’웰빙‘ 또는 건강 상태를 걱정한다면 이러한 음식을 아예 먹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열등한 대체품을 먹으면 맛도 없으면서 칼로리는 칼로리대로 섭취한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채식 베이킹의 일부분이 민간요법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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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 대란의 한 가운데 서 있다. 4월에 계약이 만료되는데, 집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 그러므로 다른 집을 구해 나가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는데, 집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해봐야 그저 구차할 뿐이다. 뉴스를 보니 전셋집을 구하지 못해 결혼마저 미루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슬퍼질 수준이다. 물론, 나에게 미뤄야 할 결혼 같은 건 없으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전세라는 건 우리나라에만 있는 제도라고 알고 있다. 보통 월세를 낸다. 미국의 경우 집을 산다는 건 집값으로 장기 대출을 받는 돈의 일부를 초기 착수금 형식으로 자가 부담한 뒤, 나머지의 대출금과 이자를 기간 동안 갚는 형식이다. 원금을 갚는 경우는 자기 돈이 되지만, 이자만 갚는 경우라면 이 또한 월세나 다름이 없다. 간단히 말해 대출금의 일부+월세로 집의 소유권을 가지는 셈이다.



집, 즉 아파트를 구할 생각에 골치가 아프다 보니, 아파트에 관한 책 두 권이 생각났다. 첫 번째 책은 제목부터 많은 것을 말해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아파트에 미치다>이다(전상인 지음). 저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주거 형식인 아파트를 통해 우리나라를 들여다본다. 말하자면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아파트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채 200 페이지도 되지 않는 분량으로 <아파트에 미치다>와 같이 거창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인지 그것조차도 잘 모르겠다. 제목은 야심차고 선정적으로 붙였지만 그만큼의 충실도는 떨어진다고나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모순 인건, 사실 아파트를 둘러싼 현실은 그야말로 시궁창이지만 그 개개의 아파트 대부분들의 충실도는 치열한 브랜드 경쟁 때문에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파트도 나름의 충실도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려면 이보다 조금 더 밀도 있는 결과물을 내놓았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결론을 말하자면, 딱히 매력적인 읽을거리는 아니었고 기억도 희미하다. 특히 아파트가 당연히 주거의 형식이니만큼 건축적인 시각이나 지식이 보다 더 강화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러 연구결과들을 나열하고 있지만 단순히 인용하고 있다는 인상 밖에는 주지 못한다.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는 <아파트에 미치다>와 반대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쓴 책이다(장림종, 박진희 지음).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의 시각으로 아파트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건축적인 시각 또한 편입시키려 시도한 책이 <아파트에 미치다>라면,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는 건축을 공부한 사람들이 아파트에 관한 이야기는 과정에서 사회나 문화에 관한 시각 또한 편입시켰다는 의미이다. 

부제 <종암에서 힐탑까지, 1세대 아파트 탐사의 기록>이 말해주는 것처럼, 책은 요즘처럼 최첨단으로 진화한 아파트에 비하자면 같은 범주에 넣는 것조차 민망하고 초라해 보이는 옛 아파트들을 직접 찾아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집을 만난다는 건 결국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므로 결국 책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담고 있다. 

우리는,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최첨단으로 진화한 아파트조차도 열악한 주거 형식으로, 마치 습관처럼 낙인을 찍는 현실-대안도 별로 없으면서-에 살고 있다. 그러한 시각을 견지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오래된, 그래서 벌써 오래 전에 재개발이나 철거의 대상이 되었어야할 아파트들은 진정 사람이 살만한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지난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의미만 놓고 따져보더라도, 이러한 아파트들의 가치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근대의 시간성을 부정하는 경우라면(예를 들자면 청계천과 을지로 주변 상가 간판의 집단 정비와 같은 것들), 이러한 아파트들이 가지는 가치가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여담이지만 아파트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르 코르뷔지에의 ‘Unite D'habitation'조차도 실제로 가서 보면 그 시간의 흔적은 물론 ’닭장‘과 같은 규모에 놀라게 된다. 땅값이 비싼 우리 현실에 낡은 건물이라면 의무감에서라도 헐고 더 높이 올려야한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가 견지하고 있는 시각은, 그렇게 잃어가고 있는, 아니면 멸종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 아파트 원형의 재조명이다. 그를 통해 그렇게 먼 옛날도 아닌 과거에 지어졌던 아파트들이 지금과는 달리 공동체 공간과 같은 개념들도 도입하고 있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 있는 정보를 전달한다(물론 요즘의 아파트들 또한 이런저런 건축, 비 건축적인 장치를 통해 공동체의 개념을 도입하지만, 이는 사실 아파트의 브랜드 정체성 확립을 통한 상품 가치 상승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현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아파트의 사회나 문화, 역사적인 의미 또한 한데 엮는데 그 ‘충실도’가 오히려 그런 시각으로 아파트에 접근한 <아파트에 미치다>보다 훨씬 높다. 

30년쯤 전, 응암동에 고모댁이 있어서 자주 가곤 했는데, 그 근처에 이 책에서 소개된 것들과 비슷한 종류의 아파트가 있었다.  너무 오래 되어 가물가물하면서도 긴 중복도의 끝에 있던 공중화장실덕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아파트는 우리에게 가장 현실적인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현실을 외면하고, 그렇게 현실을 외면하다보니 과거는 아예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는 “찬란한 것들,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내기에 급급한 지금 다시 한 번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미래를 위한 일일 것이다”라고 밝히며 책을 마무리한다. 우리에게는 과거 청산이 본의 아니게 언제나 화두인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과거는 과거이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청산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현재의 과거를 대처한 그 높고 번쩍거리는 것들도 언젠가는 그 광채를, 그것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잃고 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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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파인 다이닝 계의 유행은 <유학파 오너 셰프>이다. 그말 그대로, 해외 조리학교에서 조리 공부를 받고 와서 자기 레스토랑을 열어 꾸려가는 셰프들을 일컫는다. 왜 이러한 부류의 셰프들이 주목을 받고 있을까? 오너 셰프(owner/chef)란 말 그대로 주방을 꾸려 나가는 셰프가 레스토랑 자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고 보면 그렇게 어려운 개념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오너 셰프의 출현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부동산 가격만 해도 실로 엄청난 수준인데다가, 서양 요리를 위한 주방기기를 갖추는 건 규모가 아무리 작고 또 기본적인 것만 갖춘다고 해도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게다가 이러한 투자를 다 했다고 쳐도, 단지 우리 음식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적은 파인 다이닝의 수요가 자금 회전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도 있다. 한 끼를 위한 예산으로 십만 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당신은 그 돈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숯불로 한우를 구워먹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솔직히 더 큰 문제는 ‘그 돈으로 나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식사하겠어’라고 결심해도 그 결심을 알차게 채워줄만한 내실을 가진 레스토랑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더 빠지기 전에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오너 셰프는 레스토랑의 가장 이상적인 운영방식이다. 무엇보다 음식을 잘 모르는 투자자, 또는 사장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셰프가 자신의 요리 철학을 마음껏 펼쳐 음식을 만들어 손님에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미국의 경우 오너 셰프가 자신의 레스토랑에 100%의 지분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레스토랑 사업을 하는 투자자와 지분 투자에 따른 일종의 파트너 관계를 유지한다. 셰프를 보고 일종의 투자를 하는 셈이다. 이 또한 별도의 글이 필요하지만, 간략하게 말하자면 셰프는 조리사가 아니라 일종의 사업가이고 조직의 우두머리다. 또한 일종의 브랜드 파워를 가지고 있는 아이콘이기 때문에, 셰프의 조리가 아닌 존재 자체만으로 손님을 불러들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을 보고 자본가들이 투자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투자를 하는 경우에도 셰프는 일종의 월급 사장이라기보다(물론 'Executive Chef‘의 개념으로 월급 사장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기는 하다) 사업 파트너의 개념을 통한 오너 셰프로 인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쨌든,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개념의 오너 셰프들이 늘어가고 있다. 매체를 통해 위에서 언급한 ‘유학파 오너 셰프’로 인식되는 셰프들은 대부분 30대 중후반이다. 때로는 이러한 나이에 어떠한 경로로 서울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레스토랑의 소유주가 될 수 있는지, 인생 사는데 별 도움이 안 되는 호기심이 발동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음식만 맛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므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 모든 문제는 바로 음식이 별로 신통치 않기에 생겨나기 마련이다. 고백하건데, 이렇게 매체를 통래 잘 알려진 젊은 오너 셰프의 레스토랑들에서 먹은 식사가 만족스러웠던 적이 거의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파인 다이닝은 정해진 가격을 내고 전채부터 후식까지의 음식을 코스로 먹는 ‘prix fixe(영어로는 fixed price, 즉 고정 가격의 코스)'인데, 코스 전체의 구성이나 전체 음식의 어울림과 같이 큰 그림은 물론, 스테이크나 생선의 조리와 같은 작은 요소들까지도 흡족하다고 생각되는 수준을 보여주는 레스토랑이 별로 없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셰프가 조리를 직접 할 필요는 없지만, 결국 셰프가 제대로 챙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음식이 나온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할 수밖에 없어진다. 요즘 각광받는 오너 셰프들은 충분한 경험을 쌓은 뒤 레스토랑을 열고 셰프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교육기관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다뤄보기로 하고 일단 조리교육의 길이 그 자체만 살펴보기로 하자. 요즘 엄청난 교육기관인 것처럼 매체에서 다뤄지고 있는 미국의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의 경우, 21개월에서 38개월짜리의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평범한 남자의 예를 한 번 들어보자. 4년제 대학을 나오고 군대도 24개월 정도 갔다 온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남자가 대학을 졸업할 때의 나이는 얼추 스물여섯 정도가 된다. 이렇게 대학을 졸업한 경우라면 21개월짜리 Associate 프로그램을 권할 테니, 거기에 약 2년을 더하자. 그럼 스물여덟이 된다. 어떠한 지원을 받아서 여는지는 관심이 없지만, 그냥 서른다섯쯤에 자기의 레스토랑을 연다고 가정하자. 그럼 주방에서 경험을 쌓는 기간은 대략 7~8년이 된다. 자, 과연 이 기간 동안 셰프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경험을 쌓는 것이 가능할까? 

당신이 회사원인데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서 나이 서른다섯쯤에 이사로 승진한다고 가정해보자.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인생의 경험 또한 지식의 수준과 궤를 같이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매체에서 젊은 사람들의 초고속 승진에 관한 훈훈한 미담을 더 많이, 자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십 년도 더 전의 일인데, 남대문 일대 어딘가의 순두부집에 관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있다. 주인의 젊은 아들이 일종의 후계자 수업을 받는데, 계속해서 순두부를 국자로 떠 뚝배기에 집어넣는 연습을 하는 장면이었다. 큰 국자로 부서지기 쉬운 순두부를 뜨는 일은 쉽지 않은데, 기대했던 것보다 순두부를 많이 부서뜨리자 주인의 질책이 뒤따랐다. 

겉으로는 무형문화재며 장인 정신을 부르짖지만 사실은 그 모든 끈기며 기술의 결정체를 대우해주는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가 저런데, 일본은 어떨까? 또한 오래전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장면인데, 라멘 집에서 가장 막내 견습생이 3년 동안인가 국자로 간장을 뜨는 것만을 보여주었다. 3년 동안 간장이라니, 웬만큼 끈기가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발도 들여놓기 싫은 삶의 현장이다. 

비단 우리나라나, 아니면 일본에서만 이러한 종류의 도제 시스템을 거쳐 요리사를 양성하지 않는다. 서양 요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서양 요리의 경우 하나의 음식, 또는 그 음식의 조합인 코스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선형적이기 때문에, 조리사 양성 또한 자연스레 이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를테면 접시 닦이-감자나 양파와 같은 야채 손질-고기와 생선 손질-불을 대치 않는 전채-야채 요리-소스-파스타-그릴-부주방장(sous chef)-주방장(chef)의 순이다(중간의 순서는 레스토랑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실패할 확률이 높은, 고난이도의 기술 및 감각을 필요로 하는 조리를 맡고, 사람을 함께 다루게 된다. 대강 9~10 단계의 이러한 셰프 양성 과정을 7~8년에 나눠서 이수한다는 가정을 해 보자. 각각의 단계에서 채 1년을 보내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위에서 가정한, 가장 평범한 한국 남자가 조리학교 유학까지 마치고 이러한 단계를 다 거쳐 셰프의 역할까지 배울 수 있을까(물론 여기에서, 외국의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 겪을 수 있는 언어 문제 language barrier는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 또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쉽게 헤아릴 수 있다. 조리학교를 통해 감자볶음 잘 만드는 법을 배우고 또한 한두 번 실습도 할 수는 있지만, 그것과 레스토랑에서 매일 100인분의 감자볶음을 주문과 즉시 늘 같은 수준으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또한 그렇게 조리학교에서 감자 볶음 만드는 법을 배운다고 해서 감자 껍질을 빨리 벗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요는, 다른 많은 직업들과 마찬가지로 조리 또한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은 그저 시발점일 뿐이고 시간을 낀 경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켜야 하는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학교 졸업 자체가 셰프의 능력을 인정하는 잣대처럼 매체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물론, 외국의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나이 서른에도 셰프가 되어 자신의 레스토랑을 꾸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경력을 들여다보면 빠르게는 중학교, 아니면 아무리 늦어도 고등학교때부터 동네 레스토랑에서 접시를 닦거나 감자를 깎는다. 그 가운데 일부는 조리학교의 교육으로 지식을 습득하지만, 아직도 철저하게 도제 시스템을 통해 배우는 조리사들도 많다. 대학? 선택이지 필수는 아니다. 이러한 시스템을 거치기 때문에 서른살 정도면 13~15년의 경력을 쌓게 되고, 지식은 물론 경험의 측면에서도 셰프로서 충분히 기능을 할 수 있게 된다. 

단순한 숫자놀음만을 통해서도 그 정도의 교육과 경험을 쌓는 것으로는 제대로 된 셰프가 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최근 각광받는 오너 셰프들은 대부분 이 정도의 경력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천재 요리사인 것일까? 생각을 천재처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손발은 장인처럼 움직여야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장인의 손발은 굳이 천재의 뇌와 함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요즘 각광받는 오너 셰프들에게 부족한 것은 과연 천재의 뇌일까, 아니면 장인의 손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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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주변에 갈 때마다 고민하게 된다. ‘미디어 폴’이라고 이름 붙은 저 기둥들의 존재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세운 사람의 입장에서야 그 나름대로 거창한 명분이 있겠지만, 잠재적 사용자 또는 수혜자의 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아니 그것은 이해라기보다 감지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였다. 그 존재 자체에 아예 신경이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인지, 미디어 폴에 연동이 되는 홈페이지에는 친절한 소개 페이지가 있다. 궁금한 사람이라면 링크를 따라가서 직접 읽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체를 인용할 의도는 없다. 하지만 요약하자면 우리가 익히 다 아는 ‘디자인 서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쾌적한 거리 조성을 위한 거리 정비와 함께 가로등, 인포부스, 시설 안내 표지판 등 각종 시설물을 통합한 최첨단 공공 시설물”이 바로 미디어 폴이다. 또한 미디어 폴이 “시민들의 예술적 감성을 자극하는 디지털 갤러리”로서 “다양한 테마의 기획 전시와 높은 수줄의 예술 콘텐츠로 보행자와 시민들에게 즐거움과 편의성을 주어 강남대로를 누구나 찾고 싶어 하는 특화거리로 조성”하며 “활발한 시민 참여와 상권 활성화를 통해 지역 경제를 발전시킴과 동시에 강남대로는 고품격 복합 문화거리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친절한 안내 문구를 읽고 지난 몇 년 동안의 강남대로를 반추해보기로 했다. 맨 먼저, ‘쾌적한 거리 조성을 위한 거리 정비’ 항목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는 미디어 폴의 존재가 어떻게 쾌적한 거리를 조성하는데 일조하는지 솔직히 이해를 잘 못하겠다. ‘쾌적함’은 과연 어떠한 상태인가. 사전을 찾아보니 ‘기분이 상쾌하고 즐거운 상태’를 뜻한다는데, 그렇게 따지면 물리적인 쾌적함과 정신적인 쾌적함으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미디어 폴은 물리적인 쾌적함에는 아무런 일조를 하지 못한다. 그러한 기능이 있었나? 워낙 높은 설치물이므로 혹시라도 강남대로가 일정 수준의 이상으로 지저분해졌을 때 자동적으로 튀어나와 거리를 청소하는 로봇이라도 격납되어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보았지만 가까이 가서 자세히 관찰해도 그러한 시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쾌적함일텐데... 컨텐츠에 대한 고려는 차치하더라도 그저 번쩍거리는 대형 스크린일 뿐인 미디어폴이 어떤 수단으로 정신적인 쾌적함을 시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지, 그 또한 딱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화이트 노이즈라도 틀어주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았지만 그런 장치도 되어 있는지 확실하지 않았고, 설사 있다고 해도 각종 소음 때문에 들리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아 보였다. 이러한 종류의 설치물들이 항상 공감각적인 콘텐츠를 제공한다고는 말하지만, 도시라는 환경을 고려해보았을 때 청각에 대한 고려는 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기술적인 제약을 생각해보았을 때 후각 또한 반영될 수 없다. 그렇게 따지면 결국 시각적인 요소 밖에 남지 않는다. 아무리 시각이 현대의 우세한 감각이라도 해도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전부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는 하다. 

그 다음으로는 공공 시설물로서의 역할인데, 이 부분은 사실 기능보다는 현실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더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인터넷 네트워크와 화면만 있다면 사실 안내 시설 따위를 넣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 기능을 실현하기 위해 디지털의 개념에 역행하는 규모를 가진 물리적인 개체가 반드시 동원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문장이 좀 꼬인 것 같은데, 달리 말하자면 그렇다. 디지털의 핵심은 결국 작고 편하게 가는 것일 텐데, 저렇게 거대한 물리적 개체에 디지털의 기술을 덧씌우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냐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요즘 유행하는 스마트폰이라면 그 정도의 길 찾기 기능 정도는 얼마든지 제공한다. 더 웃기는 건, 미디어 폴이든 스마트 폰이든 그 기능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딱히 길 찾기를 위한 도움이 필요 없을 세대일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그런 도움이 필요한 세대는 분명 디지털 미디어에 익숙하지 않은 중장년층 이상일 텐데, 그런 분들에게 과연 이러한 시설이 어떤 종류의 편의성을 제공할까? 이제는 대부분 자동 발권기로 교체되어 매표소도 직원도 없는 지하철역에서 헤매는 중장년층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의미인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디지털의 핵심이라는 것이 결국 이동성(mobility) 아닌가? 날씨가 따뜻할 때는 길가다가 심심한 사람들이 스크린도 한 번씩 눌러보고 지도도 들여다보고 ‘셀카’도 찍어 전송하지만, 요즘처럼 한낮에도 절대 영상으로 올라가지 않는 기온에는 정말 아무도 이 미디어폴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라. 사진이 딱 한 장 올라와 있는데, 마지막으로 올라온 사진이 1월 16일의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찍은 사진을 여기에 올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이 추운 날씨에 거기 멈춰서서 ‘김치~’를 외칠까? 그렇다면 이 미디어폴은 여름용인가? 이러한 기능을 가진 공공 시설물은 그 형태를 달리해서 서울 시내에 굉장히 많이 분포되어 있다. 최근 지하철역에 그 수를 불려가고 있는 ‘디지털 뷰’와 같은 시설물 또한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결국 절반은 광고이고 절반은 딱히 필요도 없는 정보를 전달하는 대형 스크린일 뿐이다. 이러한 시설물들이 다음 지하철을 타기 위해 채 10분도 역에 머무르지 않을 이동인구를 위해서 과연 어떠한 기능을 제공하는 것일까? 홍대 정문을 올라가는 오르막길에도 비슷한 시설물이 가로에 설치되어 있는데, 주말 밤 이 일대의 유동인구를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시설물의 물리적인 존재는 가뜩이나 쾌적하지 않은 보행환경에 장애물로 작용할 뿐이다. 

전시의 측면 또한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디어 폴의 스크린에서 나오는 전시물에 얼마나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일까? 강남대로는 그야말로 거닐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절대 좁지 않은 보도지만 기본적인 유동인구가 엄청나고, 거기에 노점상이며 전단지를 돌리는 홍보 인력과 같은 요소들까지 합친다면 평균 보행 속도로 걷기조차 버거운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면에 나오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감상할 수 있을까? 지난주에도 몇 번이고 그곳을 지나쳤고, 때로 신호에 걸린 버스 안에서 보다 더 오랫동안 미디어 폴을 감상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지만 기억을 더듬어 봐도 남는 건 그저 광고일 뿐이었다. 



집이 경기도인 탓에 강남역에서 버스를 타게 되는데, 그 어느 버스 정류장도 정류장처럼 생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감에 의존해 버스 정류장이라고 생각되는 가상의 장소에서 서서 버스를 기다린다. 가뭄에 콩나듯 표지판으로 그 존재를 알리는 정류장도 있기는 하지만 표지판이 비바람을 막아주지는 않는다. 어차피 버스를 타고 강남, 또는 서울을 떠날 사람들이니 좀 박한 대접을 받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 시내만 돌아다니는 버스 정류장의 상황이 좀 낫느냐면, 또 그런 것도 아니다. 도로 한 가운데에 소떼처럼 좁은 보도블럭 위를 아슬아슬하게 몰려다니도록 하는 정류장의 형편은 그래도 낫다. 전용 도로를 달리지 않는 버스들의 정류장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사진의 정류장은 미디어 폴 바로 옆에 있는 것이다. 미디어 폴은 그저 랜드마크나 기념비에 대한 집착을 바탕으로 세워진, 보기 좋은 광고판일 뿐이다.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고, 홈페이지의 거창한 포부라도 밝혀놓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반짝거리는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묘해지는 건 정말 어떻게 막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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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얼마 전 <현미 선생의 도시락>이라는 만화책을 읽었다. 음식을 주제로 한 일본 만화책이야 사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심야 식당>이후로는 딱히 관심을 가져본 것이 없었다(심야식당 또한 4권 이후로는 읽을 필요를 못 느꼈다. 만화책 자체가 딱히 더 재미없어졌다기보다, 그런 주제를 그런 방식으로 엮는다면 곧 힘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4,5 권까지 그럭저럭 이어나가는 것도 다행이라고 할 정도?). <현미 선생...>을 읽게 된 건 엉뚱하게도, 어디에선가 주인공인 현미선생이 나와 닮았다는 ‘제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만화책 자체에 대한 그것보다 주인공에 대한 호기심이 지갑을 열도록 만들었다고나 할까. 

주인공인 현미(유키 겐마이, 結成玄米) 선생은 동경 한 대학의 농학부 시간 강사로 부임한다. 결강이 잦은 스승의 식문화사 수업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다. 학기 시작부터 잊혀 가는 일본의 전통음식(채소절임)이나 농사의 중요성 등을 강조한다. 현대화된 삶을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진 이러한 사고방식이 잘 먹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지나면서 음식과 건강을 중요시하는 현미 선생의 가치관은 학생들의 공감을 얻기 시작한다. 



솔직히 말하면 만화의 스토리 자체는 그렇게 재미있는 편이 아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의 일본 만화랄까? 기본적으로 비뚤어진 성격의 인간이라서 그런지 저 먼 옛날 <우동 한 그릇>과 같은 일화에서부터 대대손손 내려온 듯한 일본 특유의 감동 “돋는” 일화 또한 ‘뭐 일본 만화가 다 그렇지’라는 정도의 기분으로 받아들이고 말 뿐이다. 조금 박한 평가를 내리자면, 이 만화 또한 우리가 쉽게 구해서 읽을 수 있는 일본 음식 만화의 한 종류일 뿐이다. 

문제는, 이렇게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음식 소재 만화책 또한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에게도 물론 음식을 소재로 한 만화가 있다. 거의 유일에 가까운 음식 만화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안다. 그 제목은 <식객>이다. 최근 27권으로 완간했으니 우리나라 만화 치고는 드문 행보를 지속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화를 바탕으로 영화도 세 편이나 만들었다. 

그렇다면, <식객>은 정말 음식 만화인가? 물어보나 마나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제목도 <식객>에 작가, 그것도 만화계의 원로 작가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취재한 음식 이야기를 그림으로 옮긴 것 아닌가? 그러나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식객>은 사실 딱히 재미도 없고 음식 만화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현미 선생의 도시락>과 같은 만화책보다도 음식 만화로서 자격 미달인 부분이 있다. 



만화라는 매체의 장점은 무엇인가? 이미지 위주의 정보 전달 방식이다. 그를 위해서 글이나 기타 매체로 된 정보는 만화에 맞는 형식으로 재가공되어야 한다. 식객에서 제공되는 정보는 재가공을 완전히 거치지 않은 표가 너무 많이 난다. 대부분의 정보가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하거나, 아니면 만화의 각 컷 사이에 분주하게 들어간 글로 전달된다. 등장인물은 만화라는 매체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다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느낌이다. 설명이 장황한데, 대사들만 전부 따로 떼어서 문서 편집기에 집어넣거나, 글로만 된 책으로 낸다고 생각해보자.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건 즉, <식객>이 만화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말이 너무 많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그보다 그의 문하생의 솜씨로 밖에 보이지 않는, 성의 없는 그림들은 이러한 만화적 빈약함을 한층 더 두드러지게 만든다. 내 눈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페이지의 여자 등장인물은 정황상 울어야 되는데, 정말 웃는 것처럼 보여서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다음으로 빈곤한 만화적 상상력을 꼽고 싶다. 작가가 전국 각지를 취재했다는 건 아는데, 정말 무엇을 위해 취재한 것일까? 그에 대한 물음의 답도 위에서 언급한 ‘정보의 재가공’의 측면에서 구할 수 있다. 각 일화에 딸려 오는 취재 노트를 보면, 그 일화에 등장한 음식을 잘 한다는 소위 ‘맛집’이나 그 음식의 사진이 실려 있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대부분 일화에서 그대로 그림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작가의 시선이나 상상력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찍은 사진을 그림으로 그대로 옮긴 뒤 사람을 몇 명 등장 시키고, 그들의 장황한 대사를 통해 음식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식객>의 전개 방식이다. 작가는 단지 기능적으로 그림을 그릴 줄 알기 때문에 작가인 것일까? 

그러한 취재의 속성을 생각해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전문성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별 재미도 없고 딱히 다른 음식 만화책들보다 두드러질 구석도 없는 <현미 선생의 도시락>보다도 식객은 그 전문성이 떨어진다. 이 부분은 전문적인 이야기 작가의 부재를 탓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식객>은 평일 오후 여섯 시쯤 각 방송국에서 방정맞은 성우의 절규를 내세워 내보내는 맛집 소개 프로그램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허영만 정도의 원로 만화가라면 특정 맛집을 소개하는 수준 너머에 있는 무엇인가를 전달할 수 없었을까? 공교롭게도, <식객>의 내용을 재구성해서 진짜 맛집 가이드북 또한 나오기 시작했다. 웃기는 건 그림보다 말에 기대 음식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이 책이 차라리 <식객>보다 보기가 덜 거북스럽다는 점이다. <식객>은 맛집 아닌 맛집에 미친 우리의 현실을 참으로 적나라하게 반영해준다는 차원에서 의미 있는 저작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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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춥다고 말하는 것조차 지겹거나, 그도 아니면 정말 추워서 입도 움직이기 귀찮아 춥다고 말하기가 싫은, 그런 날씨다.  섭씨 영하 15도나 17도나, 어느 이하로 내려가면 다 똑같은 느낌인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강남역과 같은 고층빌딩 밀집 지역-어디 강남역 뿐이겠냐만 가장 간단한 예를 들었다-에 가면 더 추운 느낌이 든다. 왜 그럴까? 바람 때문이다. 강풍이 고층 빌딩의 꼭대기에 부딪히면 탈출구를 찾아 하강하게 되는데, 이때 가속이 붙게 된다. 그래서 일종의 제트 기류(jet stream)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기온이라고 해도 바람 때문에 체감 온도가 내려가게 되고, 따라서 더 춥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블로그를 갓 열었을 무렵 소개했던 만화책 <스위트 하우스>에도 그러한 내용이 가장 첫 번째의 이야기로 소개되어 있다. 글에도 소개 되어 있지만, 이 만화책은 남편이 갑자기 죽자 경력도 없는 상태로 설계사무소를 꾸려 나가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미망인의 이야기이다. 의지는 있지만 자격은 없는 여자의 앞에 나타난 경력사원은 여자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부가 건축가가 지은 건물의 완공 파티에 참석해 제트 기류의 비밀(?)을 밝혀 건축가에게 공개 망신을 축하 선물 대신 증정한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우리나라처럼 땅값이 비싸 밀도 높은 개발을 해야만 하는 곳에서는 이제 고층 건물이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 고층빌딩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는 건물이 아니다(사실은 건물이라는 것 자체가 “자연스럽게” 존재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모순어법 oxymoron이다.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건축의 기원이자 존재 의미가 아니었던가?). 사실 요즘의 건물은 거대한 기계 덩어리에 가깝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건축의 존재 의미는 인간의 보호이다. 그러한 개념으로 따져 본다면 요즘의 고층 빌딩은 기계가 가득 찬 요새나 마찬가지이다. 출입구 개폐나 냉난방, 심지어는 블라인드 조절을 통한 일조량 통제와 같은 것들이 기계 부품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고, 구역이나 중앙 통제 시설에서 일괄 제어되기 때문이다. 케케묵은 농담 가운데 어떤 빌딩은 전시에 흔히 말하는 ‘마징가 Z'와 같은 로봇으로 변신해서 전투를 벌인다...와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변신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요즘의 건물에 들어가는 기계나 전자 부품들만을 따져 본다면 정말 국가 안보에 중차대한 비상사태에 변신쯤은 너끈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건물이 이렇게 복잡한 기계 덩어리화 되었기 때문에 그 관리 또한 전문적인 인력이 맡아야만 한다. 옛날처럼 관리실에 경비 아저씨들 몇 분 모셔 놓는 정도만으로는 그 복잡함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로봇에 관한 비유를 드는데, 로봇의 파일럿처럼 전문 교육-가만, 쇠돌이(?!)가 전문 파일럿 양성 교육 같은 걸 이수했다고 설정되어 있던가?-을 받은 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IT를 통한 시스템 제어에서부터 ‘관리 아저씨’와 같은 분들의 인력 관리까지 실로 다양한 분야(interdisciplinary)를 아우르고 ‘시설관리(Facility Management)'라고 일컫는다. 

위에서 제트 기류와 그로 인해 떨어지는 체감온도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고층 빌딩의 존재가 온도의 저하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인 상승 또한 고층 건물의 책임이다. 이는 고층 건물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의 거대한 기계 덩어리로 열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건물에 붙이는 유리(투명 유리는 물론 63빌딩에 붙어 있는, 유행이 이제 좀 지난 반사유리까지)또한 높은 빛 반사율로 온도 상승에 한몫 단단히 한다. 그 높은 빌딩에 잔뜩 들어 있는 우리 사람들은 또 어떤가?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모여 온도를 상승시키는 ‘도시 열섬 현상(Urban Heat Island)'를 유발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영향을 미치는 지역의 기후를 ’미세기후(microclimate)'이라고 일컫는다. 

물론 건축가들이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자본의 힘을 빌려 자신의 이름표를 붙인 바벨탑을 세우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물론 그러한 분들도 있기는 있을 것이다. 남의 돈으로 자기 이름표 붙은, 엄청나게 크고 높으며 자신이 죽은 뒤에도 웬만하면 얼마 동안 그대로 우뚝 서 있는 건물을 세울 수 있다는 점이 건축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유혹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안 들어가는 건물은 하고 싶지도 않다’라는 포부를 드러내는 분들도 심심치 않게 보았다. ‘라면은 큰사발! 건물은 큰건물!’ 의 수준이랄까? 물론 그것도 능력이 되어야 가능하겠지만?). 건축을 통한 자연의 파괴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이를 최소화해서 환경 또는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를 건축판 지속가능한 디자인(sustainable design) 또는 그것보다 더 많이 쓰는 말로 “저탄소 녹색 성장”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에 관련되어 나는 미국의 환경 디자인 인증인 'LEED(Leadership in Energy and Environmental Design)'를 소지하고 있다. 요즘 이 ‘리드’에 우리나라 건축 인력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고 등급은 낮지만 인증 건물 또한 나오는 현실인데, 또 한 편으로 이를 과대포장해서 들여오려는 것 같은 움직임 또한 보이고 있어 우려 아닌 우려를 느끼고 있다. 그 이야기는 조금 더 조사를 한 다음 풀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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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집 앞 사거리에 나갔다 왔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새로 열었다는 밥집의 광고 현수막이었는데, 왼쪽 귀퉁이에 떡 벌어지게 차려놓은 한 상 사진이 있고 “한정식 만원!”과 같은 문구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현수막은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히 일주일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사진은 찍지 못했다. 

물론 이런 현수막을 처음 본 것도 아니었다. 길거리에 널려 있는 것이 이러한 종류의 음식점 광고 아닌가? 그런 광고 현수막들은 대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 ‘엄마의 손맛’ 과 같은 정성/감성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2. 싸고 양 많은, 흔히 말하자면 ‘가격대 성능비’를 강조한다. ‘무한 리필(이 말 자체가 정말 천박하다고 생각한다. 왜 꼭 ’리필‘이라는 표현을 써야 하는가?)’을 가게 앞에 써 붙여 놓은 밥집들도 엄청나게 많다. 

사람들은 싸고 양 많은 음식을 좋아한다. 거의 예외가 없는 듯하다. 한 편으로는 본능적인 욕구라는 생각도 든다. 블로그에 올라오는 음식점 관련 글을 보면, 먹은 사람이 확인해주지 않을 경우 꼭 덧글로 질문이 달린다. “이 집, 양 많이 주나요?” 대체 얼마나 많이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물론 양이 많은 음식 그 자체에도 나름의 미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음식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양으로 치환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자면 ‘질=양’인 것이다. 화폐가치로 환산하다면 최근에 벌어진 통큰치킨 ‘사건’의 맥락도 결국 같은 것이다.

양식의 코스처럼 한식을 내는 음식점의 셰프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들었던 농담이 있다. 정말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 나오는 한정식의 단가 대부분이 결국, 음식을 접시에 담아 상에 올리는데 들어가는 인건비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 음식점의 경우 한 번에 한 접시씩 나오는 음식으로도 배가 부른데, 꼭 마지막에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이 나온다. 우리 음식에 뿌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코스로 나오는 음식과 마지막에 나오는 밥은 딱히 어울린다고 하기 어려웠다. 이 점을 지적하자 셰프는 어떤 음식이 얼마나 나오는가에 상관없이 손님들이 밥은 꼭 먹기를 원한다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이렇게 우리의 식생활은 밥과 반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밥과 반찬 사이의 위계질서이다. 탄수화물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밥이 우위를 점하고 있고, 언제나 단백질은 아니지만 그래도 단백질 섭취의 원천이 되는 반찬이 밥을 보좌한다. 웃기는 건 우리 밥상이 이러한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밥의 질이나 양으로 자기가 먹은 식단의 우수함을 평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블로그에 올라오는 수많은 글들도 먹은 반찬의 양을 먼저 평가하고, 그 다음에 질을 평가한다. 하지만 밥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영화 감상으로 치면 주연배우의 외모나 연기보다 조연, 또는 엑스트라의 인원수나 아니면 가뭄에 콩 나듯 연기로 그 영화를 판단하는 꼴이다. 

이러한 특성을 적극 활용해서 우리 음식(또는 한정식)을 파는 많은 집들이 반찬의 가짓수로 손님을 압도한다. 집이 오산인데, 안성으로 향하는 국도를 타면 길거리에 꽤 많은 한정식집들이 있다. 어디를 들어가도 나오는 음식은 대부분 비슷하다. 만원 안팎의 상을 시키면 반찬이 최소한 열 가지는 깔리는데, 대부분이 간장을 바탕으로 만든 밑반찬이다. 밥을 세 공기는 먹어야 반찬을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짜다. 조금 더 비싼 음식을 시키면 단백질 반찬이 나오는데, 거의 대부분이 인스턴트 떡갈비와 같은 대량 생산 제품을 데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반찬을 밥과 한 그릇에 담은 것과 마찬가지인 비빔밥을 시켜도 거의 비슷한 반찬이 상에 깔린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음식을 먹는 사람의 건강에 대해 우려하기 이전에, 음식물 쓰레기 문제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음식은 한편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 절대로 다 먹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남긴 음식은 어디로 가는가? 음식물 재활용에 관한 문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많은 식기들을 씻기 위해 드는 물이나 세제는 자질구레해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문제인 것일까? 

질보다 양을 추구하는 경향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편 본능적인 것이기 때문에 굳이 우리의 국민성 등을 빌미로 탓할 필요까지는 없다.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다. 미국의 경우는 아예 알아서 미친 듯이 많은 양을 내와서 사람을 압도한다. 그렇게 풍성한 양의 음식이 사람에게 주는 심리적인 안도감도 마케팅에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맥도날드와 같은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에서 햄버거에 곁들이는 프렌치프라이나 탄산음료의 양을 늘인 ‘수퍼사이즈’를 내놓는 것도 소비자 심리를 철저하게 연구해서 얻은 결론의 산물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양적 팽창 선호의 음식 문화가 가져온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점이다. <패스트푸드 제국(Fastfood Nation)>과 같은 영화를 통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끔찍한 식품 대량 생산의 현실은 질보다 양을 추구하는 현실을 적극 반영한 것이다. 음식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데, 수요자가 애초에 원했거나 아니면 공급자가 그런 여건을 만들었거나에 상관없이 팽창한 수요에 맞추기 위해 정상적으로 음식을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이나 절차를 무시하려는 시도가 대량생산의 부작용을 초래하는 것이다. 분명히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예산은 한정되어 있는데 보다 많은 양을 내려고 한다면, 질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결과 아닌가? 

세상에 공짜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당신이 회사를 다니는데, 수당도 택시비도 받지 못한 채 야근을 계속한다. 보너스도 따로 주지 않는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일할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착취당한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그런 당신이 식당에서 음식을 시킨다. 음식값을 내지만, 그 화폐가치보다는 더 많은 음식을 먹고 싶다는 요구를 노골적으로 한다. 물론, 당신은 이 두 상황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당신이 손해를 보는 상황은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손해를 안 보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모르고 있을 뿐이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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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 역을 더 이상 ‘동대문 운동장’이라고 부를 수 없다. 운동장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고교 야구의 추억을 안고 있는 운동장은 역사와 문화를 듬뿍 안은 공원의 제물로 바쳐졌다. 공원으로 조성한다고 하니 당연히 공원이 되겠지만, 그 이름처럼 ‘역사’와 ‘문화’를 담을 수 있을지 솔직히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무엇으로 그 역사와 문화를 자아낼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홈페이지를 찾아보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서울의 살아있는 역사를 만나는 역사공원”이라고 한다. 동대문 운동장은 살아있는 역사를 만들 자격이나 역량이 없기 때문에 헐어야만 했을까?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알려진 것처럼, 동대문운동장 터에 새 ‘디자인 플라자 & 파크’를 시공하는 와중에서 조선시대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유적 때문에 플라자의 준공 시기 또한 늦춰졌다. 오래된 유적은 지켜야할 가치가 있지만 비교적 근현대(1926년)에 세상의 빛을 본 동대문운동장은 그럴 가치가 없었을까? 전쟁이다 뭐다 해서 아주 오래된 건물들도 남아있지 않지만, 625전쟁 이후에 지어진 근현대의 건물들 또한 사실 살아남기가 힘든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현재와의 거리에 비례에 역사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정말 잘 모르겠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주요시설 목록을 보면, 기념관과 같은 전시시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전시품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본래의 기능이나 가치를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전시되는 의자와 실제로 앉는 의자는 다르다. 전시되는 의자는 살아있는 의자가 아니다. 의자로서의 기능을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더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살아있는 역사”라는 말이 정말 말이 되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역사라는 개념 자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역사를 만나”는 역사공원이라고 하니 일단 믿어보자. 어차피 이 글은 공원 그 자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쓰는 글도 아니다. 공원에 대한 글은 공원이 담고 있는 역사가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있는지 확인한 다음에 자세하게 쓰도록 하겠다. 


다시 지하철역으로 돌아오자. 방산시장에 제과 재료를 사러 갔다가 오랜만에 동대문문화역사공원역-아홉 글자로 가장 긴 역 이름이라고 한다-에서 5호선을 타게 되었다. 끝도 없이 더 깊은 땅 속으로 내려가면서 역이 새단장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부분의 천장에는 우주왕복선이나 로케트의 분사구를 닮은 거대한 조명-이라기 보다는 그저 전등갓?-이 달려 있었는데 단순한 장식이나 조형 외의 의미를 읽기가 어려웠다. 



노란색이 두드러지는 간접조명과 인터넷을 뒤져 ‘고궁갈색’ 이라고 추정되는 자주색과 갈색 사이의 주색 또한 인상적이었지만, 새로 단장한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의자였다. 일단 너무 드문드문, 그것도 인색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놀랐고, 그렇게 자리 잡고 있는 것들마저 엉덩이를 정말 간신히 걸치고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야박한 폭이어서 다시 한 번 놀랐다. 물론, 무려 세 노선이 만나는 곳이니만큼 환승 인구를 고려했을 때 의자를 많이 두기 어렵다는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가능한 변명조차 궁색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키오스크(kiosk: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노선 정보며 출구 안내 등의 정보를 담고 있는 설치물)’며 쓰레기통 등이 만만치 않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종류의 정보며 설치물 또한 공공장소에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의자와 비교했을 때 치수나 그 설치 빈도의 비례는 과연 어떠한 기준에서 맞추었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의 자리가 다른 것들의 존재에 밀려 좁아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디자인 서울’의 철학은 무엇일까. 디자인이라는 말은 참 하기도 쉽고, 써 먹기도 쉽다는 생각이 든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 서울 디자인 재단의 홈페이지를 보면,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셀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지만, 정작 그 디자인이라는 행위 자체가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아, “살기 좋고, 오고 싶고, 머물고 싶은 서울을 만들자”는 목표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살기 좋게, 오고 싶게, 머물고 싶게’ 만드는 행위가 디자인 서울이라는 프로젝트에서 생각하고 있는 디자인의 정의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디자인 프로젝트의 주체, 또는 혜택을 받는 대상은 당연히 사람이어야 할 텐데, 내가 찍은 사진의 사람들은 의자에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앉아서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애초에 저 의자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세 개가 붙어 있는 것 가운데 가운데의 의자는 양 옆의 것보다 높거나 낮다. 세 사람이 겨울옷을 입으면 다닥다닥, 불편하게 붙어 앉아야 할 만큼 좁은데다가 높이차까지 있으니 앉기가 더더욱 불편해 보인다. 의자는 이렇게 불편한 싸구려처럼 생겼는데, 거대한 전등갓이 있고 친절하게 출구 정보를 알려주는 키오스크가 있으며, 재활용 쓰레기마저 깔끔하게 분리수거할 수 있도록 만든 쓰레기통도 있다. 아, 그리고 다음 지하철을 기다리는 데 지루하지 말라고 각 출입구마다 커다란 텔레비전을 달아 요즘 한참 유행이라는 드라마를 보여주기도 한다. 얼핏 보면 그림 좋아보이게 모든 걸 다 갖춘 것 같지만, 정작 사람들은 드문드문 자리 잡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반만 걸치고 불편하게 앉아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런 건 잘 보이지도 않는다. 다른 것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이 워낙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진을 찍어서 보고 있노라면 정말, 살기 좋아 보이고 오고 싶고 또 머물고 싶어 보인다. ‘디자인 서울’이라는 것이 이렇다. 거리를 두고 보면 참 좋아 보인다. 우리는 피사체일 때 가장 의미 있는 존재가, 디자인의 주체가 된다. 디자인 서울의 지향점은 바로 그런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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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쥐 식빵’ 사건이 경쟁업체 주인의 자작극으로 판명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지나치게 극단적인 전략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남의 빵에서 쥐가 나올 수 있다면, 내 빵에서도 쥐가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소비자들은 생각하기 쉽다. 빵을 절대 잘 만든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사먹지도 않지만 그 정도 규모의 프랜차이즈라면 쥐가 나올 정도로 위생관리가 안 되는 것이 정말 가능한지, 그게 궁금하다. 유탕처리한 과자 같은데서 벌레가 나오는 것과 빵에서 쥐가 나오는 건 전혀 다른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생각해보지도 않고 행동에 옮겼다면 그 일을 꾸민 사람 또한 빵을 만들 줄은 알아도 빵에 대한 이해는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성탄절 전후의 케이크 판매는 저조했다고 들었다. 상표를 막론하고 제빵류, 또는 대량 생산 프랜차이즈 빵집에 대한 믿음이 급락한 것이다. 짜장면을 먹고 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 짜장면을 먹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빵에서 쥐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에게 어쩌면 무슨 상표의 빵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파는 빵’이 그렇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람에게는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기억하기 쉬운 형식으로 머릿속에서 재가공하는 과정에서 특정 상표의 딱지는 떨어질 확률도 높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제빵 산업에 아주 큰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 불만을 한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하자면, ‘팔고 싶은 것이 빵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팔리는 빵들은 대부분 밀가루 그 자체에 대한 고려가 없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밀가루는 다른 재료, 특히 단맛 나는 것들을 위한 매개체, 즉 조연에 지나지 않는다. 팥빵의 예를 들자면, 빵이지만 밀가루 그 자체보다는 팥고물이 얼마나 맛있는지에 대해 더 신경을 쓴다. 빵 부분이 맛있어서 빵을 먹는 게 아니라, 고물이 맛이 있어 빵을 먹는다. 

사실 밀가루에 대한 고려가 없는 건 비단 빵에서만 벌어지는 문제는 아니다. 안 먹는 것도 아닌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밀가루를 천대하는 경향이 있다. 발효를 시켜야 하는 빵도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면류도 대강 만드는 집이 많다. 많은 중국집의 면은 탄성을 더해 잘 끊어지지 않게 만들기 위해 소다를 넣어 염기성을 보강해준다. 덕분에 면이 질기다 못해 고무줄 같이 느껴지는 곳이 많다. 그래서 밀가루의 소화가 잘 안 된다는 말이 나온다(물론 한방에서는 밀의 성질이 차기 때문에 먹지 말라는 경우도 있다. 서양 의학에서는 이러한 한의학의 주장에 어떤 견해를 보일지 궁금하다). 소화가 안 되는 것이 과연 밀가루의 문제인지, 아니면 못 만든 밀가루 음식의 문제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다시 빵으로 돌아가 보자. 발효가 잘 된 빵을 먹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김치나 장류 때문에 스스로를 ‘발효에 대해 잘 아는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나라에는 있다. 그렇다면 같은 발효식품인 빵도 잘 만들어야 될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하다.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의 이치에 맞서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빨리 만들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잘 발효된 빵 한 덩어리를 만들려면 아무리 적어도 세 시간은 필요하다. 이것도 27도 정도의, 비교적 상온에 가까운 온도에서 두 번의 발효과정을 거쳤을 때의 이야기이다. 만약 맛을 더 발달시키고자 냉장고와 같은 곳에서 저온 발효를 시킨다면, 빵 한 덩어리를 만드는 데 사나흘이 걸릴 수도 있다. 공장에서 속성으로 생산하는 장류를 먹으면서도 마음만은 ‘우리는 발효식품 아는 민족, 장류는 항아리에서 오래 묵은 게 제 맛...’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빵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빵들이 세를 경쟁적으로 불리다 못해 빵에 쥐까지 넣어서 자작극을 꾸며야 할 이유까지 있었을까? 

올해는 빵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선을 보였다. 드라마 덕분에 빵 매출에 좋은 영향이 있었고, 빵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많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런 경쟁관계에 있는 프랜차이즈 빵집들 사이에서 냉동반죽이 아닌 자신만의 빵을 굽는 가게를 꾸려나가는 분에게서 들은 것이다. 물론 이런 분들도 좋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대형 빵 업체가 마케팅에 그보다 더 많은 탄력을 받았을 것이라는 건, 눈으로도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마트 진열대를 확인해 보시라. 그리고 그렇게 마트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실이 바로 빵을 둘러싼 우리의 현실이다. 겉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는 한없이 유럽을 ‘벤치마킹’하고 있지만, 사실 그 내용물들은 그 유럽의 이미지를 따온 일본을 흉내 낸 것이다. 물론 그 흉내 내기의 과정에서 장인 정신 따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놓아두었다. 빵집들이 그런 이미지를 차용하다보니 “아줌마들이 유럽 여행가서 오래된 빵집들 보고 ‘멋지다’를 연발하면서 돌아와서는 프랜차이즈 빵만 산다.”라고, 누군가 트위터를 통해 꼬집기도 했다(인용하는 과정에서 140자를 넘기지 않았는지 걱정이 된다).

어디 그 뿐인가? 제과 명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빵집에서조차 빵과 케이크의 구분이 없음은 물론, 찹쌀떡이며 아이스크림까지 팔고 있는 것이 아직도 우리가 빵에게 떠안기고 있는 폭력적인 현실이다. 밀가루, 소금, 물, 효모 이 네 가지 재료만으로도 평생 연구하면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 빵이다. 효모는 생명체다. 온도나 습도에 따라 같은 레시피의 빵이라도 그 결과가 다르다. 빵은 그만큼 예민하고, 그 예민함을 감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명장이라는 칭호는 한 우물을 파는 사람에게 붙여줘야 한다. 우리가 우습게 아는 것이 어디 빵 뿐이겠느냐만, 밀가루를 옹호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음에도 우리의 현실을 보면 빵이 한없이 측은하게 느껴진다. 빵에는 죄가 없다. 빵을 못 만드는 사람에게 죄가 있을 뿐. 팥, 크림, 견과류, 밤 따위로는 모자라 경쟁업체의 침몰이라는 막중한 사명까지 지고 폭탄이라도 짊어지듯 죽은 쥐까지 품어야 했던 불쌍한 빵이며 밀가루를 2011년에는 좀 아끼고 더 이해해 줄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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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아파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러니까 건축을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이 아파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이야기다. 너무 좋아서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을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까? 아니면 싫은데 별 선택이 없어서 그냥 살까? 어떤 생각을 할 여지는 있는 사실 그걸 잘 모르겠다. 별 다른 선택이 없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싫어도 별 다른 선택이 없으면 왜 싫은지에 대해 잘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한 맥락에서 때로는 열과 성을 다해 아파트를 미워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하게 된다. 몸에 배인 생활습관을 비난하는 듯한 기분이 자꾸 들기 때문이다. 내가 건축계의 분위기를 두루 꿰뚫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냥 상식의 수준에서 생각해봐도 아파트를 좋아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몇 해 전 한국 건축사 협회의 연구과제는 ‘아파트 말고 다른 주거 형태는 없나’였다. 책 몇 권만 들춰봐도 아파트의 해악에 대해 불을 뿜는 글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아파트 설계만 20년 넘게 한 전문가도 정작 자기 집은 “호젓한 시골의 전망 좋은 집”이라고 밝히는 기사도 있다. 오죽하겠나. 

학교에서도 아파트에 대한 설계수업을 한 기억이 없는데, 요즘은 어떤가 모르겠다. 다세대 주거를 의미하는 ‘집합주택’ 프로젝트는 해도 아마 드러내놓고 우리가 사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아파트를 디자인하는 스튜디오는 없을 것이다(물론 각종 건설 또는 자재 회사 같은 곳에서 후원하는 학생 대상 설계 공모전이라면 있다). 가르치는 분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물론 그런 분들도 아파트에 사실 확률이 높다. 그리고 당연히, 아파트를 짓는 건설회사의 설계팀에는 건축과 출신들이 일하고 있을 것이다. 야근도 할 것이다. 철야가 아니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현실이 이런데 아파트에 관한 수업이나 스튜디오는 왜 하지 않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렇게 천대받는 분위기지만, 사실 아파트만큼 디자인하기에 어려운 주거형태는 없다고 생각한다. 몇 센티미터에 민감한 분위기가 기본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정해진 면적의 틀 안에서 최대한의 가용 면적을 끄집어내야 한다. 워낙 아파트가 많으니 경쟁도 심하고, 또 그만큼 비교도 쉽다. 옆 단지만큼의 편리함과 넉넉함을 반드시 제공해야만 하고, 거기에 차별화할 수 있는 요소를 더해야만 한다. 그래서 아파트를 설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 짜놓은 틀 안에서 아파트는 나름 완벽하다. 거기에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는 문화적인 특성까지 고려한다면 우리나라의 아파트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집=아파트’라는 공식을 적용하는 데도 큰 무리가 없으니 물리적인 것은 물론 감히 정신적인 문화유산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너무 극단적인 비유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 나름의 것으로 변화, 또는 진화한 그 모습을 보면 아파트가 자장면 같기도 하다. 

이렇게 좋든 싫든 우리나라의 독특한 문화를 반영하기 때문에, 외국의 설계 사무소에서 아파트 디자인에 참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외국 유수의 사무실을 끌어들이고 그 이름값을 빌려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는 전략 또는 경향에서 아파트는 비교적 열외에 속해 있다. 자잘한 외관 디자인이야 어떻게든 손 댈 수 있겠지만, 핵심이 되는 평면, 즉 각 공간의 면적이나 공간들 사이의 관계 등은 손댈 수 없기 때문이다. 문화, 또는 생활 습관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사실 일천하지만 경험에서 바탕한 이야기이다. 

미국에서 우리나라의 아파트 관련 프로젝트를 위해 일할 기회가 두 번 있었다. ‘디자인 컨설턴트’라는 명목 아래 아파트의 디자인을 담당하는 우리나라의 설계사무소와 일하는 방식이었다. 처음 했던 프로젝트는 말도, 탈도 엄청나게 많았던 서울 모 지구의 재개발 주상복합 건물이었다. 저층부는 기단형의 상업, 고층부는 탑형의 주거 및 사무 공간으로 팀에서 평소에 두바이에 하던 프로젝트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으므로 비교적 무리 없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프로젝트는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이번에는 경기도 모처의 재개발지구였다. 일단 단지 계획부터 시작을 했는데, 팀의 우두머리인 소장이 채워 넣은 도로, 보도 가운데 대다수가 쭉쭉 뻗어 있었다. 그러니까 직선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오래된 아파트단지라면 모를까, 요즘의 아파트들은 단지 자체를 공원처럼 꾸미는 데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도로거나 보도를 막론하고 모든 길들이 꾸불꾸불한 곡선으로 계획된다. 그리고 거기에 시골의 오솔길 등에서 모티브를 얻어왔다고 마케팅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해도, 안전을 위해 차량이 시속 20킬로미터 내외의 아주 느린 속도로 달려야 하므로 직선 도로는 가능한 피하는 편이 좋다. 사실 이 상황을 완전히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기는 좀 어려운데, 비록 단층이기는 해도 미국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또한 곡선 도로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 

단지 계획이 끝내고 아파트 건물 디자인을 하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목표는 아파트의 평면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외관의 디자인을 다듬는 것이었다. 왜 그 정도 범위 밖에 안 되는 일만 해야하는지는 나를 포함한 팀의 한국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었지만, 미국인들이 그걸 이해하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팀의 전담 “디자이너”는 사실 건축물보다 밥통과 같이 곡선이 살아있거나 심지어는 유선형인, 제품 디자인에 잘 어울릴 법한 형태를 습관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으로 회사 내에 잘 알려져 있는 인력이었다. 나를 포함한 팀의 한국 사람들이 자잘한 디자인을 덧붙이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을 때, 그는 또 한 번 우주선을 닮은, 둥글거나 매끈한 형태로 새롭게 다듬은 아파트 디자인을 선보였다. 프로젝트 매니저는 그 디자인을 극찬하면서 형태에 맞게 평면을 고치자고, 아니 손수 고치겠노라고 선언했고, 그걸 말리느라 회의는 거의 일촉즉발의 대립상태로까지 치닫게 되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떤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나 그를 위한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는다. 일종의 자국 우월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걸 감지했기 때문에 기분이 굉장히 나빠졌다. 이 아파트라는 것이 그의 눈에는 심지어 웃겨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웃긴 것이 대체 어떤 문화적 배경 또는 그 문화적 배경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인지,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를 변호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아파트가 진화해서 오늘날 존재하는 형태에 이르기까지 어찌 되었든 굉장히 치열한 과정을 거쳐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는 적어도 평면을 그렇게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것만은 이해하고 한 발 뒤로 물러났고, 밥통을 닮은 “디자이너”의 디자인도 적절히 타협하는 선에서 반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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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치킨 때문에 장안이 떠들썩하다. 나라를 다스리시는 분까지 한마디 하실 정도니, 이만하면 상황이 심각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치킨의 원가에서부터 유통, 기타 온갖 잡다한 문제들은 벌써 많은 매체에서 다뤘으므로 딱히 더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나라를 다스리시는 분까지 들먹이는 화제가 아닌가. 그러나 의외로, 그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음식으로서의 치킨에 대한 가치나 그에 얽힌 사항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은 본말이 전도된 것처럼 보인다.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맛’이 중심요소인데, 이 끝도 없는 치킨 논쟁에서 맛에 대한 부분은 쏙 빠져있다. 치킨을 사서는 껍데기만 뜯어 먹고 살은 버리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래서 우리가 먹는 치킨에 대해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들을 정리해보았다.

1. 왜 ‘치킨’인가?
사람들은 닭을 좋아한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고기’이기 때문이다. 크기가 주는, ‘한 마리의 온전함’이라는 느낌도 작용을 한다고 생각한다. 왠지 ‘통’이라는 접두사를 붙이면 풍요로운 느낌이 들지 않나? 그러나 통닭을 제외하면 다른 고기는 쉽게 통으로 접하기 어렵다. ‘통돼지’만 해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통소? 감히 ‘통’자를 붙이기조차 두렵다. 붙여봐야 어색한 느낌만 가득하다. 그러나 ‘통닭’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사실 먹을 게 얼마 되지도 않는데 풍요로운 느낌이 든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인기가 있는 닭이지만 튀긴 닭, 즉 ‘프라이드치킨’이 특히 더 많은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바로 그 조리 방법 때문이다. 튀겼기 때문이다. 닭 고유의 생물학적 ‘구조’ 때문에 토막을 내서 조리하기도 쉽다. 튀김 옷 덕분에 양도 살짝 많아진다는 느낌이 든다. 돼지나 쇠고기를 튀기려면 그에 맞는 부위를 골라야 하는데, 닭은 그럴 필요도 없다. 게다가 그 두 고기는 닭고기만큼의 크기로 튀기기도 어렵다. 그렇게 튀긴 닭은 젓가락이 아닌, 손으로 쥐고 먹기 딱 좋은 크기가 된다. 어째 음식을 좀 먹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2. 왜 ‘튀김’인가? 
사실 튀김이라는 조리 방법은 재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옷을 입혀 뜨거운 튀김에 살짝 익히면 겉은 바삭바삭하지만 속은 촉촉하게 남아 있다. 기름기가 많지 않은 닭고기는 튀기기게 제격이다. 튀김 재료는 무조건 지방이 적은 것을 써야만 한다. 탕수육도 기름기가 많은 재료를 튀기면 기름이 녹아 버리기 때문에 일부러 안심과 같이 기름기 적은 재료를 쓰는 것이다. ‘피시 앤 칩스’도 마찬가지다. 기름기가 적은 대구와 같은 생선으로 튀겨야 된다. 연어와 같은 생선은 맛있지만 튀김 재료로는 불합격이다.

문제는 이렇게 재료를 보호하기 위한 조리방법인 튀김이 재료를 아예 망쳐버리는 경우가 너무 잦다는 것이다. 예전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비슷한 크기로 토막을 쳤다고 해도 가슴살과 다릿살은 익는 정도가 다르다. 모두가 퍽퍽하다고 싫어하는 가슴살은 사실 잘만 익히면 그렇게 퍽퍽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주의를 기울여서 튀기는 곳은 경험상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3. 닭은 멀쩡한가?
이렇게 닭이 퍽퍽해지는 건 사실 닭의 문제이기도 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닭을 찾는 소비자의 인식이 문제이다. 우리가 먹는 닭은 정말 너무 작다. 1kg을 넘기면 너무 오래 산 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준다. 사실 닭의 자연 수명은 10년이다. 닭도 강산이 변하는 걸 적어도 한 번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닭이 이렇게 오래 살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다. 길어야 6주 정도를 살기 때문이다. 그보다 오래 된 닭은 살이 질겨질까봐 노심초사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드러운 살을 먹기 위해 닭을 그렇게 일찍 잡으면서도 결국 조리를 잘못해서 퍽퍽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닭이라면 정말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채 맛도 들기 전에 잡아버리는 것도 모자라서, 완전히 뻣뻣해질 때까지 튀겨 그 없는 맛까지 빼앗아버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닭의 사육 환경이 어떤가까지 논하면 골치가 아파지므로 일단은 넘어가겠다. 사람들이 딱히 모르는 현실이 아니기도 하다. 

4. 품질관리와 그 밖의 문제
강원도 삼척에 줄을 서서 사다가 먹는다는 닭강정집이 있다. 매장에 가보니 내가 생각한 닭강정-옷을 입히지 않고 닭을 튀긴 다음 간장 바탕의 양념에 조리는-과는 조금 달랐다. 그저 양념치킨처럼 보였다. 어쨌든, 몇 번이나 근처를 지나가면서 사먹을까 말까 망설였는데, 마지막에 가게 앞에 쌓인 ‘치킨 파우더’ 상자를 보고서는 남아 있던 미련을 깨끗하게 접었다. 수퍼마켓에서도 살 수 있는 치킨 파우더는 일종의 튀김가루이다. 물을 타면 튀김옷이 된다. 치킨 파우더 자체도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택배로 전국구 장사까지 한다는 집이 스스로 원하는 맛에 대한 고민도 없이 기성품을 써서 튀김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난센스로 다가왔다(게다가 뭐 자랑할 일이라고 그걸 가게 앞에 수북하게 쌓아놓나? 센스도 빵점이다). 튀김 또는 부침가루는 사실 밀가루와 기타 양념을 섞어서도 쉽게 만들 수 있다. 물론 기성품은 거기에 첨가물이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비싼 음식은 비싼 값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기본은 재료나 음식을 잘 만드는데 들어가는 노력이다. 그런 부분에 신경을 쓰지 않는 음식에 돈을 쓸 필요는 없다. 이제는 교회나 약국만큼 많은 치킨집들이 과연 어떠한 노하우로 품질관리며 차별화를 하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이런저런 말들은 많이 하는데, 길거리를 다니다가 맡는 냄새는 브랜드에 상관없이 똑같다. 기름 냄새를 타고 흘러나오는 ‘씨즈닝’의 냄새이다. 공장에서 만들어 팩에 담겨 나오는 무에는 사카린과 같은 첨가물이 들어있다. 뭔가 특별한 기름에 튀긴다고 광고하는 업체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늘 하는 얘기라 하면서도 입이 아픈데, 가격, 가격, 그리고 가격이 문제다. 사람들이 ‘통큰치킨’을 줄서서 기다리며 샀던 이유도 바로 가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음식에 관한 논의를 보면, 대체 맛이라는 것이 어때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언제나 그 부분만 쏙 빠져있다. 통큰치킨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이유가 가격이라는 이유는 굳이 할 필요조차도 없다. 문제는 그 가격이 전부라는 것이다. 5,000원짜리라도 맛이 없으면 사먹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오천 원짜리 치킨에 목을 매는 상황이 벌어질까, 생각도 하지만 정말 치킨이 그렇게 일상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은 현실 자체가 이해 안 되는 구석도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도 쉴 새 없이 배달 오토바이들이 오가는데, 대부분이 치킨집의 것이다. 식생활에서 가장 무섭고 또 빠지기 쉬운 늪이 바로 ‘질 보다 양’인데, 우리는 벌써 목까지 그 늪에 빠져 간신히 숨을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도 있었다고 전해 내려오는데 차라리 비지떡이 낫지 않을까 싶다. 싼 거 좋아하면 스스로도 싸질 수밖에 없다. 물론 그걸 몰라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해를 밥 먹듯 하는 사람들이 많아 사족을 달아 놓자면 비싼 치킨이 싼 치킨보다 좋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치킨 사랑에는 비뚤어진 구석이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밝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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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아무 생각 없이 서울 시내에 나갔더니 온 시내가 반짝반짝했다. 원래도 휘황찬란한 도시지만, 연말연시 분위기를 내느라 그 반짝거림이 한층 더 했다. 

축제 분위기 같은 것에 찬물을 끼얹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해가 갈수록 이런 조명 장식들에 회의를 더 많이 느끼게 된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누군가는 “아 그래, 뭐 전기는 결국 화석 연료를 태워 만드는 거니까 에너지 위기와 지구 온난화 따위를 숭고하게도 걱정하시느라...”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도 고려해야할 사항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사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조금 다른 문제이다.



환경디자인 인증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Green Bulding Council에서 주관하는 것으로, ‘LEED'라고 일컫는다. 'Leadership in Energy and Environmental Design'의 약자이다. 건축은 그 태생이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시각에서 볼 때는 당연히 환경에 친화적일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에서 환경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건축 또는 디자인의 차원에서 개발한 인증 시스템이 바로 ’리드‘ 이다. 협회에서 인증한 가이드북이 있고, 이를 토대로 공부해서 시험을 본다. 일정 점수 이상을 받으면 합격이고, 인증서를 받게 된다. 이 인증서를 가진 디자인 인력은 건축 회사에서 리드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환경 친화적인 디자인 프로젝트를 할 때 선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항목별로 체크리스트 같은 것이 있어서, 얼마나 많은 항목을 충족시키는가에 따라 점수를 매기고 그에 따라 등급을 나눠 인증을 한다. 신용카드처럼 ’플래티넘‘ 등급이 최상급이다. 이러한 건물은 실제로도 환경 친화적일 수 있지만, 요즘 같이 ’그린마케팅‘이 대세인 상황에서 홍보거리 노릇을 톡톡히 할 수도 있다. 

건물에 대중교통 이용 장려를 위한 자전거 주차장이나 샤워실, 재활용쓰레기 분리 수거장을 유치하는 것처럼 아주 일상적인 차원의 것부터 보다 전문적인 측면까지 고려하도록 되어 있는 이 인증 시스템을 공부할 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바로 ‘빛 공해(Light Pollution)' 항목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두워야 될 상황에 밝은 것이 문제라는 의미이다. 물론 거기에 위에서 언급한 에너지 위기나 공해와 같은 측면도 얽혀 있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개인의 안녕이나 건강의 측면에 더 신경이 많이 쓰인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들어가면 내보내야 하므로 배설을 하는 것처럼, 해가 진 이후의 시간이면 어두워야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마도 그것이 인간의 생리에 가장 도움이 되는 여건 또는 생활양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의 도시는 잠에 들기를 두려워하는 나머지 거의 언제나 밝다. 치안을 위한 가로등과 같이 반드시 필요한 사회 간접 자본들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우뚝 솟은 고층 빌딩에 넘쳐나는 조명들은 가끔 정말 필요한 것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오늘날의 도시는 어쩌면 의미 없는 불야성이다.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인 것이다. 


어둡고 밝은 정도를 조정하는 것이 단지 조명의 임무는 아니다. 그렇게 어둡고 밝은 정도를 어떻게 조절해서 인간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가를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 위키피디아에서 ‘빛 공해’ 항목을 찾아보면 필요 이상 또는 부적절한 조명이 인간에게 미치는 나쁜 영향을 몇 가지 나열하고 있다. 두통이나 피로, 스트레스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고 형광등이 혈압을 올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밤에 빛에 노출되면 멜라토닌 생성이 억제되어 여성들의 유방암 발병률 증가와 상관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이런 연구 결과를 차치하고서라도, 어두워야 밤에 잘 수 있는 건 너무나도 본능에 충실한 욕구가 아닌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나친 조명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백화점 1층의 화장품 매장이 그렇다. 평소라면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잡티까지 보여야 화장품을 더 잘 팔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화장품 매장의 조명은 가뜩이나 밝은 여느 백화점 매장들보다도 훨씬 더 밝다.  

얼마 전 벌어진 연평도 도발이나 기타 사회의 분위기까지 들먹이면서 굳이 이런 장식들을 요란하게 할 필요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로 한 숟가락의 찬물을 끼얹고 싶은 생각은 없다. 즐거워할 일이 있으면 즐거워해야 되는 건 맞고 나도 어느 정도는 즐겁지만, 저 정도까지 즐거워해야할 이유는 무엇인지 솔직히 궁금하다. 잠들지 않는 도시가 영화 속에서는 멋져 보일지 몰라도, 실생활에서는 그저 그렇다. 당신이 환하게 불을 밝힌 고층건물에서 매일 밤늦게까지 야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보라. 그래도 이 도시가 잠들지 않아서 행복한가? 밤에는 자야하고, 또 잘 때는 어두워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도시도 잠을 좀 자 주어야 다음 날 아침에 더 활기차게 돌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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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닭가슴살이 인기를 누린지도 꽤 오래 되었다. 따지고 보면 맛보다는 그 효능 때문이다. 사실 효능이라고 말하기도 뭐하다. 그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단백질이기 때문에 다이어트를 하거나 보다 좋은 몸매를 가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이다. 나도 냉장고에 거의 언제나 닭가슴살을 모셔두고 가끔 먹는다. 그러나 딱히 맛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건 닭가슴살 자체가 원래 딱히 맛있는 단백질이 아닌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닭은 흔히 ‘빈 캔바스(Blank Canvass)'라고 불리는데, 이는 돼지고기, 아니면 쇠고기와 비교해 보았을 때 닭고기 자체의 두드러지는 맛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념의 맛을 잘 받아들인다. 게다가 닭가슴살은 운동을 하지 않는 근육이라 운동을 하는 다리살에 비해서 더더욱 맛이 없다. 운동의 성질에 따라 근육의 산소 사용 여부가 결정되는데, 가슴살은 운동을 거의 하지 않으므로 산소를 쓸 필요가 없고 따라서 혈액을 많이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가슴살이 다리살보다 하얗고, 맛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별 맛이 없는 닭가슴살을 한술 더 떠 제조업체는 껍질과 뼈를 완전히 제거해서 내놓는다. 간편하게 조리하라는, 소비자를 위한 배려다. 배려는 고맙지만 그 덕분에 별 맛 없는 닭가슴살은 한층 더 맛이 없어진다. 고기의 맛이라는 것이 결국은 뼈나 지방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삼겹살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이 지방, 즉 비계 맛 때문이고 갈비 같이 뼈에 붙은 고기는 뼈를 잡고 먹는 맛도 있지만 그 뼈에서 나오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닭가슴살에는 아무 것도 없다. 게다가 지방도 뭐도 없으니 프라이팬에 구우면 정말 금방 익어버린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익은 고기를 두려워하니 바짝 익힌다. 결국 원래 맛없는 닭가슴살은 프라이팬에서 너무 익어버려 고무처럼 질겨진다. 건강에 좋은 맛이 되는 것이다. 그냥 먹으라면 먹기 어려운 음식이 되어 버린다. 몸에 좋다니까 먹게 되는 것이다. 바람직한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몸을 다듬었다는 사람들의 수기를 읽어보면 ‘토할 때까지 닭가슴살을 먹었다’라는 이야기를 종종 읽을 수 있다. 촉촉하게 잘 구워도 계속해서 먹기 힘든 게 닭가슴살인데 뻣뻣하게 구워 비린내도 물씬 풍기는 가슴살을 세 끼 내내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그 의지만으로도 살을 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닭가슴살이 이렇게 맛이 없는 고기는 아니다. 뼈와 껍질이 붙은 통닭가슴살은 또 다른 이야기다. 이런 닭가슴살을 뜨겁게 달군 팬에, 껍질면이 불에 먼저 닿게 구우면 껍데기가 바삭바삭해져 닭가슴살과 좋은 식감의 대조를 이룬다. 게다가 껍질과 고기 사이에서 지방이 나와 그 맛이 한결 더 깊다. 그래도 닭껍질이 걱정된다는 사람은 구운 다음 벗겨내고 먹으면 된다. 그러나 껍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맛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뼈도 마찬가지다. 조리하는데 불편하다면 따로 발라내어 국물을 내면 흔히 말하는 ‘치킨 스톡’이 된다. 서양음식에서는 조리의 기본재료이고, 하다못해 라면이나 칼국수를 끓여먹는데 국물로 쓰면 그 맛이 한결 더 깊어진다. 조금 번거롭지만 맛이 훨씬 더 좋고, 가공비가 적게 들어가므로 가격도 뼈나 껍질이 없는 닭가슴살보다 저렴해질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뼈가 붙은 닭가슴살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양계업체에서 가공하는 닭가슴살은 예외 없이 뼈와 껍질을 제거해 하얗고 깨끗한 채로 판매한다. 정 이런 종류의 가슴살이 필요하다면 통닭을 사서 가슴살을 발라내는 유난을 떨 수도 있지만,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다. 통으로 살 수 있는 닭과 부위별로 파는 닭은 그 크기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통으로 파는 닭은 대개 1kg을 많이 웃돌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그 정도 크기라면 가뜩이나 두드러지지 않은 닭고기의 맛이 채 여물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영계’며 부드러운 살을 좋아한다는 명목으로 그보다 더 큰 통닭은 적어도 마트 같은 곳에서는 구하기 쉽지 않다(시장의 닭집이라면 사정이 다를 것이다). 그 정도 크기의 닭이라면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내 봤자 먹을 게 사실 별로 없다. 백숙이야 사정이 좀 다를 수 있지만, 사실 통구이라면 1.5kg이상은 되어야 제대로 구워 먹을 수 있다. 가게나, 아니면 트럭에서 돌려가면서 굽는 닭들을 자세히 보면 크지도 않은 것들을 너무 오래 구워 기름기가 완전히 빠져있다. 십중팔구 뻣뻣해서 별 맛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기름이 쪽 빠져서 맛있다’라고 팔거나 사먹는다. 닭이 삼겹살도 아니고, 기름이 얼마나 있기에 그것마저 빼야 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느 주말에 닭다리살을 구워먹었다. 원래 목표로 삼았던 건 닭허벅지살 구이였다. 그러나 따로 가공된 다리살은 찾을 수 있어도, 같은 방식으로 가공된, 즉 뼈와 껍질이 모두 남아 있는 허벅지살은 구할 수 없었다. 찾아보니 그 부위는 다리에서 분리해서 살만 발라 팔고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통다리를 사다가 뼈를 발라냈다. 원래 허벅지살의 경우는 생김새나 뼈가 붙어 있는 상태가 살만 발라내기 좋게 되어 있지만, 다리 즉 북채는 상황이 좀 다르다. 어쨌든 필요하지 않은 부분까지 사다가 손질을 해서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었지만, 정말 구할 수 있는 게 이 정도뿐인지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강남의 백화점 식품 매장에 가게 되었다. 다른 백화점에서는 본 기억이 없었는데, 거기에서는 특이하게도 닭을 꽤 세분화해서 가공 및 판매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허벅지살도 다리에서 분리해서 따로 파는 아량을 보여주고 있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껍질은 말끔하게 벗겨낸 상태였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껍질은 고기를 보호해주고 맛을 불어넣는 역할을 동시에 한다. 껍질이 바삭바삭해지도록 조리해서 먹어도 맛있고, 께름칙하다면 조리한 뒤 떼어내 버려도 된다. 그러나 가공하는 과정에서 벌써 떼어버렸기 때문에 아예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저렇게 파는 고기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해 먹었을지 궁금했다. 

아마도 그러한 식으로 가공, 판매하는 것이 대중화가 되지 않는 이유는 한편 그 조리방법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서양음식의 경우, 어떤 식으로 조리하든 일단 아주 센 불에 냄비나 팬을 달궈 고기를 지져 거기에서 나오는 기름을 음식의 기본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러한 조리 방법은 기름을 많이 내는 것은 물론, 지지는 것을 태운 것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다. 이를테면 스테이크의 경우 덩어리진 고기의 겉면을 바삭바삭해질 때까지 지져서 얻는 식감의 대비가 맛의 대표적인 성격인데, 그렇게 해서 내놓으면 손님들이 탄 건 아니냐고 항의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닭고기 하나만 놓고 보아도 크기나 가공 방법 등등으로 인한 다양성이 너무 떨어지는 것은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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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워야할 여행이 고행으로 바뀌는 건 정말 순식간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 원인은 ‘다시는 못 올지도 몰라’라는 일종의 강박관념, 또는 서글픔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같은 곳을 복수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한정된 시간 내에 가능한 많은 것들을 기억, 또는 그 보조수단인 카메라에 담고자 걷기 위해 발을 디딘 길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도시며 거리, 건축물은 어디로 떠나지 않는다. 단지 내가 떠날 뿐이지만 그 모든 서글픔이 거기에서 비롯된다.



지난 10년 동안 이런저런 여행을 다녔다. 일단 그 목록을 대강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미국: 동/서부 종단, 주요 대도시(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댈러스, 시애틀, 샌디에고 등)
유럽: 영국(런던), 프랑스(파리, 릴 등), 이탈리아(로마, 베니스, 밀라노 등), 스위스(취리히, 바젤 등), 독일(베를린, 포츠담), 체코(프라하), 네덜란드(암스테르담, 유트레흐트, 로테르담), 벨기에(브뤼셀), 북유럽 4개국(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동양: 일본(도쿄, 홋카이도, 간사이), 홍콩




언제나 건축물을 보기 위한 여행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공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여행이 결국에는 건축물을 보기 위한 것을 귀결되었는데, 한 번 여행의 성격이 바뀌면 그 다음부터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순례’가 시작된다. 
일단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도시 환경이 특정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따라서 늘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한다. 어떻게 보면 삼지사방을 적이 둘러싸고 있으니 늘 경계를 해야 되는 것과 같은 느낌과도 흡사하다.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미리 준비를 해서 지도상으로나마 그 위치를 파악하고 가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여행길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묘령의 처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듯, 계획에 없었는데 마음이 가는 건축물도 있기 마련이다. 이름이 알려진 건물만이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볼품없는 것들이더라도 도시를 채워 아름답게 만드는 데는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다. 

이렇게 계획에 없던 건물과 맞닥뜨리는 것도 쏠쏠한 재미기는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건축 여행이라면 보려고 계획을 잡아놓은 건물만 다 보는 것도 굉장히 벅차다. 
여기에서 말하는 계획은 굉장히 넓은 범위의 고통스러운 사전 준비를 의미한다. 보고 싶은 건물이 있다면 일단 그 위치부터 파악해야만 한다. 요즘은 인터넷도 발달되어 있고, 전문 출판사들도 돈독(!)이 올라 주소가 표기된 안내책자들을 내놓기도 하니 건축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눈과 입에 오르내리는 건물이라면 문자로 된 주소를 찾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불행의 싹이 튼다. 이 단계에서 주소는 정말 그저 문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문자를 바탕으로 3차원 물질 세상의 단서를 잡기가 때로 절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에 가깝게 느껴지는 상황이 반드시 찾아온다. 




일단 근방에 갈 때까지는 그 동네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절대 알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교통시스템을 이용해서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 말로 설명을 들은 것만으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대도시라면 조금 안심이 되지만, 그것도 시내나 번화가일 경우에나 좀 덜하지, 조금이라도 근교라서 교통수단을 여러 번 바꿔 타야 되는 상황이라면 또 다르다. 대도시의 경우도 그 나름의 가로 및 주소 체계가 있어서, 가자마자 바로 몸으로 그 체계를 익혀 건축물만을 보러 다니기는 의외로 쉽지 않다. 
뉴욕의 경우도 그 간단한 한 줄의 주소에 담겨 있는 의미를 파악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나 또한 미국에 살았지만 시골이어서 그런지 뉴욕을 갈 때마다 주소와 지도만으로 익숙하게 건물을 찾는 것 자체에 적어도 한두 시간은 잡아먹곤 했다. 

교통편까지 미리 철저하게 파악해놓았지만 그래도 헤매거나 낯선 곳에 버려진 듯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간사이 지방을 여행할 때 욕심이 생겨 근처 기후 현에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을 보려 당일치기로 여행 속의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일본말을 몰라 영어가 가능한 호텔 직원을 붙들고 철저하게 준비를 해 갔지만, 그 직원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마지막 기차가 한 시간에 한 대 올 뿐인, 한 칸짜리 관광 열차라는 사실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아파트는 일본말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절대 찾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고즈넉한 평야 한 가운데에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여건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굳이 거기까지 가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여행에서는 10분만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면 되는 것을, 제대로 물어보지 않고 다른 버스를 타서 한 시간 동안 다른 지방으로 가기도 했다. 물론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찾아간 건물이 미술관이나 박물관과 같은 문화시설인데 가는 날이 임시 휴일이라거나, 아니면 아주 짧은 개장시간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만큼 좌절스러운 일도 또 없다. 아주 제한된 날짜와 시간에만 개장하기 때문에 미리 전화 예약을 해야 되는 경우도 물론 왕왕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경우는 사진이라도 찍어서 남겨두어야 하는데 예상보다 너무나도 빨리 해가 져버릴 때이다. 어느 겨울 미국 서해안 종단을 했는데, 캘리포니아는 한겨울에도 햇살이 비교적 따스했지만 채 다섯 시가 되기도 전에 해가 져 버리고, 어둠은 정말 칠흑같이 찾아왔다. 물론 밤에 더 매력적인 건물도 없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보려고 하던 건물이 개인주택이라면 예외의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 정도로 나열한 과정만 거친다고 해도 표적으로 삼은 건물에 다다랐을 때 그 존재가 주는 느낌이 실망스러운 경우가 생긴다. ‘아, 이걸 보려고 여기까지 왔나?’하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빠져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공공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속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그 허탈함은 한층 더하다. 사진으로만 건물을 보는 것은 안 보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직접 보는 것보다는 못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 규모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각적 사고나 공간감에 능한 사람이라면 축척과 함께 찍힌 도면만 보고서라도 머릿 속으로 그 규모나 공간의 느낌을 가늠할 수 있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게 직접 느끼는 공간과 정확하게 궤를 같이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발달된 감각이 그 차이를 최소화해줄 수는 있지만 공간 앞에서 ‘백문이 불여일견’을 깰 장사는 없다. 

더구나 건축물은 단지 ‘보는’ 것만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물은 꼭 직접 보아야 한다. 그 보는 기쁨에 그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이 싹 가신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절대 아니다. 

여행은 즐거운 일이지만 이러한 과정들 가운데에서 지적허세가 차지하는 비율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좀 시시콜콜하게 따져보고 싶은 충동이 종종 든다. 건축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연예인을 직접 본 것처럼 사진 속의 ‘작품’을 직접 본 것에 대한 무용담을 앞 다투어 늘어놓곤 한다. 

그렇다, ‘본’ 건축물이라고 이야기했다. 건축물이 '보는' 것인가, 아니면 전체적인 공감각적 경험을 그저 '보았다'고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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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경기도 남부의 작은 도시에 살다 보니 전국 각지에서 오는 고속버스를 많이 보게 된다. 버스가 버스인지라, 옆구리에 붙은 광고판들은 상당수 지방 또는 그 특산물의 홍보를 위한 것들이다. 이런 광고를 유심히 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 유심히 볼 수도 없이 독창성이 딸리거나 디자인에 대한 특별한 고려가 없는 듯 영세한 느낌을 준다. 듣기로 지자체가 홍보를 통한 차별화, 또는 차별화된 홍보를 위해 고심한다던데 광고판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정말 고심하는지 헤아리기가 어렵다. 썩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마케팅이 거의 전부나 다름없는 게 현실이데, 우리나라 농수산물 마케팅을 보면 판매를 통한 이득은 물론이거니와 상품의 존재 자체를 알리는 것조차 효율적으로 하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사진의 상자는 막 가을이 시작될 무렵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산 무화과의 포장이다. 아주 전형적인 우리나라 제품, 특히 농수산물의 포장으로 이것 하나만 놓고 보아도 마케팅의 현실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일단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조금 거칠게 말해 난잡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포장 디자인이다. 일단 ‘컨셉트’라는 걸 들먹이는 건 사치나 허세 같다고 쳐도(그러나 왜?), 뭐 하나도 빼지 못해 강박적으로 이것저것 다 집어넣었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가 없다. 여러 글씨체를 이용한 제품 이름이나 낙관을 흉내 내 박아놓은 ‘명품’ 인증(대체 우리나라는 그놈의 명품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걸까?)이나, 특히 상자 날개에 붙은 ‘삼호의 자랑’과 같은 문구는 귀엽다고 생각될 지경이다. 제품 그 자체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차라리 투명 포장을 써서 진짜 과일을 보여주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무화과라는 과일이 굉장히 약하기 때문에 배를 포장하는데 쓰는 스티로폼 망-무화과에 맞는 크기인-에 과일을 싸서 상자에 허술하게 넣은 모양새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그런 방식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공교롭게도 정면밖에 찍지 않았지만, 상자의 측면에는 무화과라는 과일의 효능에 대해 비교적 구구절절이 언급하고 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옛 문헌에 따르면 무화과는...’과 같은 식이다. 우리나라 식품의 대부분이 홍보를 위해서 그 효능을 부각시키는 방법을 많이 쓰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너무 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대부분의 식재료라는 것이 잘 먹으면 몸에 좋은데다가, 그 효능이라는 것을 얻기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양을 먹어야 될지도 모른다. 8월말, 9월초에 아주 잠깐 나왔다가 들어가는 무화과의 효능을 얻으려면 아마 산지에서 올라온 분들의 트럭이 눈에 띄는 족족 들러 사 먹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식재료의 효능을 부각시키는 마케팅은 이제 도를 지나친 느낌까지도 준다. 동네 어딘가에 있는 반찬가게에서는 상황버섯을 넣은 김치나 갈비를 팔면서 ‘면역력 증가’를 얻을 수 있다고 가게 문짝에 크게 써 붙여 놓았다. 상황버섯이 정말 면역력을 증가시키는지도 검증을 거쳐야 할 문제이지만, 대체 얼마나 많은 상황버섯을 먹어야 되는지도 모르고, 그걸 김치에 넣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 집 앞을 지나칠 때마다 궁금한데, 김치는 웬만하면 자급자족하는 편이라 사먹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영세한 느낌을 주는 포장 디자인은 지방 자치체의 농수산물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처럼 보인다. 사진의 술은 녹차로 유명한 보성에서 살 수 있는 녹차주이다. 원래 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제품은 보다 더 세련된 느낌의 포장이었기 때문에 실제 판매용 제품을 받고는 그 촌스러움에 깜짝 놀랐다. 이러한 촌스러움에 놀라는 이유는, 이 결과물이 아예 전통적인 느낌을 살리자는 의도로 오래된 디자인을 고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집에서 흔하게 시킬 수 있는 고량주 종류들의 제품 포장을 보면 촌스러운 느낌은 마찬가지지만 오래된 것을 고수하기 때문에 느껴지는 촌스러움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이러한 제품 포장이 가지고 있는 촌스러움은 그보다는 정확하게 원하는 방향이나 정체성을 정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새롭거나 오래된 디자인의 요소들을 편한 대로 뽑아 짜깁기한 산물이다. 우리는 우리 것을 외국에 알리고 싶어 하는데, 정확하게 어떤 형식으로 알리고 싶어 하는지를 모른다는 느낌을 준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모전도 하고 있고, 좋은 포장 디자인을 가지고 있는 제품 디자인도 간혹 보이기는 하지만 아쉬움이 가질 정도는 아직 아니다. 


이건 서울역 버스 정류장의 광고판. 어떤 포도주일지 먹어 보고 싶다는 궁금증은 있는데, 그와는 별개로 그냥 어느 프랑스 양조장의 이미지를 따온 듯한 포장 디자인은 역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은 정체성의 확립에서 시작되는 것인데, 거기까지 따지고 들어가면 우리는 결국 우리가 누구나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거나 생각하고 싶지 않아한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어진다. 이것이 우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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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건축학 전공의 교육목표는 건축사 양성에 있다. 건축사는 건축설계를 전문으로 할 수 있는 법률적 자격을 지닌 사람이나 그 자격 자체를 의미한다. 건축사가 되기 위하여 학생들은 건축설계에 필요한 풍부한 지식(건축역사, 설계이론, 건축계획, 기술공학, 문화예술, 법률제도 등)과 다양한 경험(실무, 관리 등)을 습득해야 한다. 학생들은 최소 5년간의 교육을 받아야 하며, 이는 국제적 수준에 부합하는 건축사의 기본적 자격 요건이다. 본 전공 프로그램을 이수한 학생은 건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지난 글에서 건축공부에 대한 현실적인 측면을 화제로 삼았는데, 이번엔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의 단계를 뛰어넘어 직업의 울타리 안에서 하게 되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오랜만에 모교 홈페이지를 뒤져 과 소개 안내문을 읽어보았다. 바로 위에 있는 것이다. 진로 선택의 기로에 선 고등학생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저 정도의 설명이라면 건축과에서 대체 뭘 배우는지 이해하기가 부족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설명 자체가 자세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그렇기는 해도, 자아도취로 넘쳐흐르는 장밋빛 미사여구는 아니라는 점에서 생각만큼 감정이 격해지지는 않는다. 직업의 설명을 법률적 자격에 한정지었다는 측면에서 좀 건조한 느낌이 나기는 하지만, 전 인류의 바른 주생활을 책임질 공간 철학을 지닌 만능 직업인으로 묘사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닌다는 것에 대해 그저 감이라도 좀 잡을 즈음에 아는 학부생들과 밥을 같이 먹었던 적이 있다. 그들은 방학 때 실습을 했던 친구가, 회사에 들어가면 마음껏 디자인을 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았노라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만났던 학생들도 아니고 그 친구들이라니 대체 어느 만큼의 기대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그 기대가 크든 작든 건물 한 채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디자인 하는 것이었다면 학생의 수준에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건 학생들의 능력에 상관없이, 건축의 속성 자체가 그렇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처음 건축 공부를 시작했을 때 학생들이 가장 자주 하던 말이 ‘회사에 들어가면 연필 깎는 것부터 다시 배운다더라’라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컴퓨터로 도면 그리는 것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았던 터라 연필을 둘러싸고 일종의 자조적인 농담이 통하던 시기였다. 아주 거칠게 해석하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쓸데없다는 의미일테고, 보다 완곡하게 받아들이자면 실무를 하면서 배워야 할 것이 엄청 많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른 전공 또는 직종의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건축의 경우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실무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의 분위기를 익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교육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물론 털어서 먼지가 안 날 수는 없겠지만), 직종의 특성이 부여하는 태생적인 한계라고 생각한다. 

업계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건축의 핵심을 ‘문제해결’로 본다. 건축물 하나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문제’라고 규정했지만 ‘제약’이라고 해도 별 상관은 없다. 이러한 제약을 모두 만족하는 해법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그 제한의 성격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돈이나 법부터 디자이너 또는 클라이언트의 미적인 취향까지, 가장 현실적인 것부터 이상적인 것까지 그 제약의 ‘스펙트럼’은 참으로 넓다. 거기에다가 다른 제품 디자인과 달리  이 건축 디자인의 목표 또는 결과물이 사람보다 훨씬 큰 규모라는 기본 조건까지 감안한다면 이 제약들의 강도는 몇 배 더 증폭된다. 게다가 이상적인 경우 이러한 제약을 고려해 내놓는 최종 결과물은 일반해가 아닌 특수해여야만 한다. 이러한 제약을 한꺼번에 만족할 수 있는 해법 내놓은 요령을 학교에서 4~6년 안에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무에서 각각의 특수해를 다루면서 'case by case'로 배울 수밖에 없다. 

내가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맡았던 일은 초고층건물군의 지하 주차장이었다. 건물 모양에 맞춰 땅을 파니 주차장의 형태는 이미 결정이 난 상태였고, 거기에 맞춰 최대한 많이 주차가 가능하도록 주차‘셀’을 넣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건물 기둥의 배치가 바뀔 때마다 주차장의 배치도 그에 맞춰 다시 해야만 했고, 한 번 그런 변화가 생기면 지하 1층부터 8층까지의 배치를 전부 바꿔야만 했다. 때로는 처음에 눈에 뜨이지 않았던 결함이 나중에서야 발견되어 부랴부랴 수정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테면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부터 4층까지는 멀쩡하게 내려가다가, 그 아래층부터 뜬금없이 기둥을 박아놓은 자리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 하나의 위치를 바꾸더라도 같은 작업을 되풀이해야만 했고, 그러한 작업을 하나라도 마친 다음에는 또 처음부터 다시 주차가능한 차의 대수를 세서 법 또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기준 안에 맞는지 확인해봐야만 했다. 그래서 가끔은, 실제는 한 층에 1,250대가 가능하도록 주차공간 배치를 해 놓고서도 10대쯤 모자란 것처럼 보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혹시라도 변경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대처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주차장은 회사 생활을 만 3년 이상 한 다음에야 할 수 있는 난이도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끝없이 계단을 그리거나, 화장실에 변기를 박아 넣거나 문 손잡이나 난간 같은 것만을 그리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단계들이 일을 배우는 데 꼭 필요한 단계라고 생각해서 지루하지만 거부감은 없이 받아들였는데, 위에서 언급했던 학생들의 경우처럼 학교에서 자기 프로젝트를 디자인하듯 회사에서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실망할 확률도 꽤 크다. 

물론, 계속해서 경험을 쌓아 나간다면 그러한 학생들이 생각하는 디자인이라는 것을 할 기회도 분명히 찾아오기는 한다. 그러나 분업화가 많이 된 큰 회사의 경우에는 그러한 관점에서 ‘디자이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열 명짜리 팀 하나에 한두 명 정도 밖에 안 될 확률이 더 높다. 흔히 ‘소장’이라고 부르는 팀의 우두머리가 된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철저하게 경영의 측면에서 프로젝트를 관리하기도 하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수가 더 많다. 

이러한 식의 커리어 계발이 조직에서 개인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생각하는 것보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디자인’이라는 것의 범위나 입지가 현실 세계에서는 훨씬 더 좁다는 것의 반증일지도 모른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세상에서 적어도 5년 이후의 일을 예측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싫었다가 좋아질수도, 혹은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생각한 것과 너무 다를 수 있다는 걸 미리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의사를 생각했을 때 ‘병을 고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떠올리는 이미지가 진짜 직업인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얼추 들어맞을 확률이 높지만, 건축가의 경우는 조금 또는 그보다 더 많이 다를 확률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쁘게 말하면 이 직업에는 다른 그것보다 환상이 더 많이 깃들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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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텔레비전에 얼마나 많은 요리프로그램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일부러 관심을 가지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가끔 우연히 EBS의 프로그램을 보게 되는데, 요리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나와서 아마추어 같은 모습을 보여주므로 그걸 보는 재미에 채널을 고정시킬 때가 있다. 

그런 요리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전문가’라는 것이 어떻게 정의 내려지고 있는지, 그걸 헤아릴 수 없어 난감할 때가 있다. 네이버 사전은 전문가를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여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많이 알아서, 그 또는 그녀의 의견이 권위있게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인 것이다. 문제는 지식과 경험인데, 이 요리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전문가들을 보면 지식보다는 경험만으로 다가선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전문가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내놓는 음식이나 그 레시피도 솔직히 어이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지식이나 이해 그 자체 또는 전달 의지의 부재가 두드러진다. 맨 위에 올린 사진은 요리프로그램에서 튀김을 만들기 위해 냄비를 불에 올려놓은 장면을 찍은 것이다. 저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요리 관련 프로그램에서 튀김을 만드는 걸 보여줄 때, 정말 튀김하기에 적합한 냄비를 쓰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가장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튀김을 하려면 기름을 아주 뜨겁게 데워야 한다. 그러자면 단열이 가장 중요한데, 음식을 만들 때 단열 효율을 높이려면 가능한 벽과 바닥이 두툼한 솥이나 냄비를 써야만 한다.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논스틱’ 코팅이 된 것으로 보이는 냄비는 얼핏 보아도 굉장히 조악해 보여서, 그래도 공중파 방송의 요리프로그램인데 저렇게 조잡해 보이는 수준의 주방기구를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내가 보았던 대부분의 방송에서는 저런 수준의 냄비에 기름을 데워 튀김을 만들었다. 

사실 튀김이라는 것은 집에서 만들기 번거로운 음식이다. 기름의 처리며 안전 문제도 만만치 않지만, 그보다는 기름을 적정한 온도로 맞추는 것이 더 힘들다. 튀김의 원리 또는 의미는 사실 재료의 보호이다. 옷을 입혀 튀김으로써 재료의 수분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튀김의 재료로써 기름기나 수분이 적은 것이 더 적합하다. 탕수육의 재료로 쓰는 돼지고기로 기름이 거의 없는 안심과 같은 부위를 쓰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직도 가지고 있는 20여년 전의 요리책을 보면, 튀김을 위한 기름의 적정 온도를 설명하면서 집에서 그 온도를 가늠하기 위한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바로 소금이나 튀김옷을 넣어보는 것이다. 중간까지 가라앉았다 뜨면 150도라는 식이다. 요리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언제나 소개하는 방식도 바로 이런 것이다. 방법 자체가 검증된 것인가의 문제와는 별개로, 튀김기름 온도 측정을 위한 온도계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요즘의 현실에서도 과연 몇 십 년 전부터 쓰던 주먹구구식 방법만을 고수해야할 필요가 있기는 한 건지, 그게 궁금하다. 

전문가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라면 2~3만원이면 살 수 있는 온도계를 냄비에 꽂아놓고, “성공적인 튀김을 위한 온도는 XXX에서 OOO도 사이입니다”라며 보여주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어렵지 않게 대중에게 다가서기 위해 일부러 온도계를 쓰지 않는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럴수록 더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는 편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튀김을 집에서 하는 사람도 별로 없거니와, 주먹구구식으로 온도를 맞춰 튀김을 만들었다가 실패한다면 다시 만들고 싶어지지 않을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차라리 한 번을 하더라도 정확하게, 실패 없이 만드는 법을 알려줘서 음식 만들기에 재미를 붙이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전문가의 역할일 것이다. 음식만큼 재미가 안 붙으면 만들기 싫은 것도 없다. 


프로그램에서 소개되는 음식이나 조리법은 어차피 각 “전문가”의 연구 또는 상상력의 산물이므로 굳이 트집을 잡고 싶지는 않은데, 때로 아예 음식이나 재료 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사진의 음식은 어린이들의 간식을 위한 감자튀김이라고 하는데, 감자에 계란 흰자를 묻히고, 거기에 다시 녹말을 묻혀 기름에 튀겨낸다. 굳이 번거롭게 그런 과정을 거치는 이유가 검정깨 몇 알을 붙이기 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차피 그 자체가 전분인 감자에 또 전분을 묻혀서 튀길 필요가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감자를 그냥 얇게 저며 튀기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간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저런 접근은 어떤 면에서 보면 재료의 특성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굳이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텔레비전의 음식 소개 프로그램은 한마디로 무개념인 경우가 많다. 최근 우연히 보았던 프로그램에서는 셰프라는 사람이 나와서 홍합을 깨수제비에 싸서 무청으로 묶은 뒤, 어묵과 함께 끓이는 음식을 선보였다. 바로 그 셰프라는 사람의 정체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보았더니 이탈리아 음식을 공부했다던데, 요즘 이탈리아 요리학교에서는 저런 정체불명의 음식 만드는 법도 가르치는 모양이다. 자칭 ‘요리 연구가’라는 사람들의 연구 결과가 그런, 요리라고 할 수도 없는 음식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산지에서 나는 가장 신선한 재료로 좋은 음식을 만들겠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이 저런 음식을 만들고 있으면, 매체에 노출되어 광고효과는 노릴 수 있어도 음식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본인의 정체성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참, 그 프로그램에서는 홍합을 재료로 한 음식이 소개되었는데, 연예인 일색인 출연진들은 다 같이 홍합이 ‘쫄깃쫄깃하고 맛있다’라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너무 오래 익혀서 질긴 홍합만이 쫄깃쫄깃한지 연예인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매체에서 음식을 다루는 방식이라는 게 대부분 저런 식이다. 우리는 음식을 너무 우습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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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