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홍제천은 북한산과 한강을 잇는 서울의 주요 하천 중 하나이지만 본래 모습은 거의 없다. 물길 위로 고가도로까지 놓이니 하천의 한유함은 도회적 번잡함으로, 둔치의 해찰은 바퀴의 질주로, 풀숲과 돌 틈엔 밤낮없이 차량소음이 고인다. 그것은 도시의 밀도와 교통량의 증가가 불러온 변화로 과거에 없던 도시모습 중 하나다.

 

많은 이들이 거북해하는 거대한 교각에 르누아르(Auguste Renoir)의 그림이 걸려 있다. “잘했다” “멋있다”는 이도 있지만 “아니 홍제천에 뜬금없는 인상파 그림?” 하며 비웃기도 한다. 저마다 제 맘의 그림만을 원하는 감상평과 훈수가 넘치지만 으뜸 방책은 교각구조물 자체를 깨끗하게 관리하여 구조미를 드러내는 일이다. 혹 꾸밈이 필요하다면 구조물과 조화되는 새로운 미술형식을 탐구할 일이다.

열린 장소에 액자그림은 참으로 생뚱하다. 유명한 그림을 붙인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다. 명화를 복사해서 아무 곳에나 걸겠다는 생각이 바로 액자 속의 낡은 생각이다. 특정한 프레임에 갇히면 장소·환경·상황 등의 변화를 읽지 못하니, 작품도 빛을 잃고 보는 이의 안목도 낮아진다. 제일의 피해자는 이유도 모르고 액자에 갇히는 세상일 것이고….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액자에 갇힌 ‘생각’  (0) 2013.10.05
바보야, 문제는 직선이야  (0) 2013.09.21
양과 질에 대한 오해  (0) 2013.08.26
행복에 반대하다  (0) 2013.08.12
발광시대의 이웃  (0) 2013.07.29
장소는 기억이다  (0) 2013.07.15
Posted by mx2.0

 


직선은 두 점을 잇는 가장 짧은 선, 가장 빠른 교통수단은 비행기. 그럼 비행기를 타고 직선으로 가면 어디든 제일 빨리 갈까. 출발과 도착 지점의 도로망, 공항의 접근성과 주변의 교통연계 상황 등을 종합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서울에서 인천을 가는데 비행기를 타면 가장 빠를까. 우선 복잡한 서울 시내를 지나 김포공항까지 가서 기다렸다가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내려서 다른 교통수단으로 인천시내로 들어가야 하니 차량을 이용한 것보다도 시간이 몇 배는 더 걸린다. 그래서 김포공항과 인천공항 사이에는 항공노선이 없다.

 

그럼에도 어떤 경우나 직선이 빠르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하나.


간단하다. 경인운하를 가보면 된다. 트럭으로 30분 걸리는 거리(18㎞)를 배로 가면 2~3시간 걸리니 화물터미널은 늘 파리를 날린다. 주변엔 볼거리도 없어 억지로 띄우는 유람선(여객선이라 우기지 않는 게 다행)은 텅텅 비고, 수질오염 문제도 제기된다. 경제성은 아예 없고 환경에도 도움 안되는, 한마디로 쓸모없는 직선 물길, 왜 팠는지 모르겠다.

 

불량식품이 화려하게 보이듯 이름만 멋진 아라뱃길, 전기료도 못 건지는 형편에 한심한 분수는 무지개를 뽐내더라. 에두르는 곡선보다 쓸데없는 직선을 만들다니 참 우매하고 경직된 사고방식이다. 아니라면 그 이유 더 불순하고.


 

이일훈 | 건축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액자에 갇힌 ‘생각’  (0) 2013.10.05
바보야, 문제는 직선이야  (0) 2013.09.21
양과 질에 대한 오해  (0) 2013.08.26
행복에 반대하다  (0) 2013.08.12
발광시대의 이웃  (0) 2013.07.29
장소는 기억이다  (0) 2013.07.15
Posted by mx2.0



 

여름만 되면 해수욕장마다 피서객이 많은 것을 자랑한다. 수십만명은 보통, 100만명이 모였다고 떠들기도 한다. 10만명이 모였다는 어느 해수욕장을 항공사진으로 분석했더니 반에 반도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마구잡이 셈이라도 과장이 너무 심해 믿지 말라는 말로 들린다. 아니 믿는 사람이 바보다. 지나치게 인파가 많으면 행락의 질이 엉망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숫자만 불린다.


반대의 경우를 촛불집회에서 본다. 한편에서 3만명이라면 다른 쪽에선 7500명, 5만명이라면 1만6000명.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광장의 밤이 너무 어두워 잘못 세는가 보다). 그렇게 사람 수를 늘리고 줄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 아닌 숫자에만 관심을 두는 ‘질보다 양’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그러면 ‘양보다 질’의 사고는 괜찮은 것일까. 아니다. 사람을 두고 질과 양으로 재려는 것 자체가 불행이다. 그 둘이 같음을 알지 못하니 같은 말을 달리 외친다. 한쪽에선 촛불을 ‘민심’이라 말하는데 다른 쪽에선 촛불을 끄고 ‘민생’으로 돌아오란다. 민심과 민생은 백성 민(民)을 앞세운 같은 말. 민심이 민생이고, 민생이 민심인 것을 어찌 그리 다르게 다투나. 숫자만 세니 사람이 안 보이는 모양이다.



(경향DB)




이일훈 | 건축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액자에 갇힌 ‘생각’  (0) 2013.10.05
바보야, 문제는 직선이야  (0) 2013.09.21
양과 질에 대한 오해  (0) 2013.08.26
행복에 반대하다  (0) 2013.08.12
발광시대의 이웃  (0) 2013.07.29
장소는 기억이다  (0) 2013.07.15
Posted by mx2.0




‘헐!’ 황당하고 놀라고 당황스러운 감정을 표하는 비속어. 어이없거나 야유와 조롱을 뜻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헉이 변했다 하고, 허(虛)얼에서 왔다고도 하지만 둘 다 근거가 없는 소리. 내 맘에 안 들고 못마땅하다는 속어일 뿐이다. 그 헐이 대문짝만하게 큰길가에 나붙었다. 


‘행복’주택의 건립을 반대한다는 헐! 남의 행복이 내가 반대할 일인가.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인가. 그럼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가.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나의 행복이 남의 불행이어서는 더욱 아니 될 일. 저 ‘헐!’을 외치는 이들에게 행복주택은 불행주택이다.


행복주택은 ‘토지사용료가 낮은 국공유지에 복합 주거시설을 조성’하여 시세보다 싼 임대료를 받겠다는 국토교통부의 임대주택정책. 집 없는 이들의 행복을 위한 정책이 불행을 겪고 있다. 주변환경 악화를 내세워 반대하지만 실상은 가난한 이들이 사는 임대주택이 들어서면 기존의 아파트값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최고급 복합시설이 들어서서 기존의 아파트값이 더 올라도 반대할까. 집값 때문에 행·불행이 갈리는 싸구려 세상에서 ‘헐!’을 외치는 사람들. 자신들의 행복에도 반대하는지 물을 일이다.




이일훈 | 건축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야, 문제는 직선이야  (0) 2013.09.21
양과 질에 대한 오해  (0) 2013.08.26
행복에 반대하다  (0) 2013.08.12
발광시대의 이웃  (0) 2013.07.29
장소는 기억이다  (0) 2013.07.15
풍경 속의 태도  (0) 2013.07.01
Posted by mx2.0




산과 들에서 취사를 금하지 않던 시절은 불판의 시대였다. 여기저기 돗자리를 깔고 생전에 처음 본 듯, 못 먹고 죽은 귀신 씐 듯이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그 시절 어느 날, 어떤 절집 계곡에 행락객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대웅전 마당까지 넘어오더라. 소란은 그나마 참을 만한데 담장을 넘어오는 고기 탄내는 부처님께 참으로 민망하더라. 아무리 제 맘대로 먹고 놀아도 육식을 금하는 절집 옆에서 고기를 굽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 하더라. 아무리 믿음이 다르고 없다 해도 이웃종교에 대한 존중이 없더라. 배려도, 염치도 다 없더라.


무엇을 먹고 안 먹고는 그저 고유한 먹거리문화 중의 하나일 뿐 옳고 그름을 가릴 일이 아니건만 88서울올림픽 때는 외국인들에게 혐오감을 준다고 개장국을 금했다. 그러자 보양탕·영양탕으로 개명하여 일년 내내 변함없는 사철탕으로 살아있으니 아 보신탕은 영원하리라. 


큰길가에 붙어있는 간판, 누구 불빛이 센지 다투고 있더라. 개를 가족으로 여기는 이들은 ‘애견샵’으로, 가축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보신탕’집으로 오라한다. 한 집에선 꼬리 치는 개를 쓰다듬고, 옆집에선 삶은 고기를 맛나게 먹는다. 둘 다 마땅한 일이건만 보는 마음은 안쓰럽다. 


이웃한 두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 개를 사랑(?)하는 방식이 서로 많이 다르다.




이일훈 | 건축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과 질에 대한 오해  (0) 2013.08.26
행복에 반대하다  (0) 2013.08.12
발광시대의 이웃  (0) 2013.07.29
장소는 기억이다  (0) 2013.07.15
풍경 속의 태도  (0) 2013.07.01
‘참을 수 없는’ 건축의 ‘가벼움’  (0) 2013.06.17
Posted by mx2.0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 좋은 곳’이라는 단양엘 갔더니 산천물색 좋은 사이 ‘피화기마을’이라는 표지판이 보여 지인에게 물으니, ‘난리가 나도 화를 입지 않을 터’라고 한다. 6·25 때 난리가 난 줄도 모르고 살았더란다. 얼마를 더 가다 ‘통한의 곡계굴 위령비’를 보았다.


“1951년 1월20일(음 12월12일) 오전 10시경 미군이 곡계굴과 노티마을 일대를 폭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마을 가옥 50여 호가 전소되고, 곡계굴 내부에 피란차 은신 중인 주민과 피란민 약 360여 명이 사망 또는 부상당했다. 이들 대부분은 곡계굴 안에서 불타거나 질식해 사망하였고, 일부 굴 밖으로 뛰어나온 사람들은 기총 사격에 의해 사망 또는 부상했다. 이 가운데 생존한 사람은 10여 명에 불과하였다.” 


가까운 거리에 어느 곳은 피화기(避禍基)인데 곡계굴은 화기(禍基)였던가. 억울한 죽음을 위무하듯 흐르는 구름이 비석을 쓰다듬고 가더라. 삶이 죽음을 품고 있듯이 삶터 또한 서러움을 안고 있다. 낯선 곳에 가시거든 유원지와 맛집의 웃음만 챙기지 말고 산하의 상처와 아픔도 살펴보고 잊지 마라. 장소란 바로 기억이 아닌가. 사람은 기억하는 존재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에 반대하다  (0) 2013.08.12
발광시대의 이웃  (0) 2013.07.29
장소는 기억이다  (0) 2013.07.15
풍경 속의 태도  (0) 2013.07.01
‘참을 수 없는’ 건축의 ‘가벼움’  (0) 2013.06.17
마음속의 삼원색  (0) 2013.06.03
Posted by mx2.0


 


‘물의 깊이는 알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水深可知人心難知)’는 말은 항상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뒤에 나온다. 속을 살피지 않고 입맛대로 판단하는 이들이 주로 겪는다. 왜 그럴까. 속이란 잘 안 보이기 때문이다. 오판의 위험성이 있음에도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의 힘은 열 중 하나라도 보이는 데서 온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지만 대놓고 보이려는 것은 함정이기 쉽다. 흑심이란 요물은 평소에 잘 안 보이는 곳에 숨어 산다.


공사현장의 화장실은 대부분 후미진 곳에 옹색하게 형식적으로 만든다. 할 수 없이 일은 보지만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런데도 개선이 잘 안되는 이유는 공사만 끝나면 철거한다는 생각으로 소홀하게 만드는 탓이다. 그런 곳은 쓸수록 지저분해지니 매일 볼일을 봐야 하는 인부들의 고충이 심하다.


어느 건축공사현장(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삼수리 379-12)에서 보았다. 화장지도 갖추고 물을 쓸 수 있는 수세식이더라. 사소하지만 그런 모습은 흔치 않다. 임시화장실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마음이 바로 일꾼들에 대한 배려다. 그런 현장은 안 보이는 부분도 공사를 잘할 것이라는 믿음이 간다. 현장을 관리하는 태도가 바로 공사의 품질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광시대의 이웃  (0) 2013.07.29
장소는 기억이다  (0) 2013.07.15
풍경 속의 태도  (0) 2013.07.01
‘참을 수 없는’ 건축의 ‘가벼움’  (0) 2013.06.17
마음속의 삼원색  (0) 2013.06.03
다시 5·18  (0) 2013.05.20
Posted by mx2.0



땅거미 진 어느 골목에서 보았다. 짐작컨대 저 건물의 내부는 층을 쌓는 바닥도, 칸의 가름도 없는 하나의 높고 넓은 공간이리라. 살펴보니 그곳은 비바람만 피하려는 철재가공공장이더라. 이름 짜한 갤러리의 비싼 조명보다 더 근사하게 비치는 외벽은 실은 대낮에 작업공간에 햇빛을 들이려고 반투명한 재료를 쓴 것이니 밤 풍경은 그저 덤이더라. 필요한 넓이에 기둥을 박고 경사지붕을 덮으니 형태는 단순하고 재료는 소박하여 무엇 하나 꾸민 게 없이 담백하더라.


건축이란 대지를 존중함이 마땅하지만 그런 경우는 가뭄에 콩 나고, 공공건축 또한 세상을 향해 문 닫기 일쑤다. 공동주택에서조차 공동성의 실천을 보기 어려우며, 문화와 예술을 앞세우고도 쓰임새 없이 놀고 있는 반문화적 건물은 얼마나 많은가. 주변의 여러 맥락, 사회·환경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이 저급한 시장논리만 있는 상업건물들이 행진하고, 또 그 꼴을 좇아가는 의료·교육·종교시설이 줄을 잇는다.


시답잖은 개념, 가치 없는 실험, 의미 없는 디자인을 앞세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건축의 양태가 갈수록 경박해진다. ‘자본의 시녀’인 건축이여, 이제 좀 겉모습이라도 덤덤해지자. 자본이 있을수록!



이일훈 | 건축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소는 기억이다  (0) 2013.07.15
풍경 속의 태도  (0) 2013.07.01
‘참을 수 없는’ 건축의 ‘가벼움’  (0) 2013.06.17
마음속의 삼원색  (0) 2013.06.03
다시 5·18  (0) 2013.05.20
바다 위를 걷고 싶다  (0) 2013.05.06
Posted by mx2.0






비 내리는 봄날, 기운찬 새순과 흐드러진 춘색을 누르며 강렬한 삼원색 꽃이 걸어가더라.


모든 색이란 본디 좋고 나쁨, 귀하고 천함의 구분이 없다. 눈에 보이는 색깔은 각각이 다 고유하다. 특정한 색에서 특정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색의 보편적 성질이 아닌 개인적 경험이거나 편견 또는 감성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본디 말이 없는 색에 감정을 실어 수선을 떤다. 진실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명백함을 뜻하는 빨간색은 위선에 동원되면 ‘새빨간 거짓말’이 되어 더 붉어지고, 권위와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노란색은 주의·조심에 쓰이는 경고색이 되기도 한다. 파란색은 신성하고 희망적인 뜻과 함께 우울함을 나타낸다. 빨강 노랑 파랑, 그 원색이 비율을 같게 또는 다르게 이루어내는 오만색의 찬란한 행렬은 얼마나 신비한가. 


하지만 무조건 멋들어진 색을 만들려고 삼원색을 모두 섞으면 뜻밖에도 껌정이 된다. 이중, 복선, 복합적인 삼원색의 다의성처럼 사람의 마음속에도 이기와 이타, 무심과 탐욕, 사랑과 무관심이라는 전혀 다른 두 줄기가 자라고 있다. 그중 한 가지만 행하면 빛나든지, 탈이 나든지 알 수 있는데 보이지 않는 욕심과 꼼수는 탈이 나야 보인다. 그런 속이 흑심이다. 마음에도 삼원색이 있어 다 섞으면 껌정이 되는 모양이더라.



이일훈 | 건축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




1980년 5월18일 전후, 광주에선 어이없고 황망한 일이 벌어졌건만 많은 이들은 알지 못했다.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잉크도 마르지 않은 어제의 일이건만 먹고살기 바쁜 세상은 참으로 무심하다. 잘 먹고 잘 살려는 핑계로 그 일을 모른 체한다면 역사 또한 우리를 기망하리라. 역사공부의 비법은 눈으로 읽은 책을 마음으로 다시 한번 더 읽는 것이다. 동시대를 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송구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날의 기록을 다시 펼친다.


6월항쟁 사진집 <80년 5월에서 87년 6월로>(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에서 ‘어린 중·고등학생들’이 참여한 ‘평화로운 시위’ 장면부터 ‘처참하게 학살당한 시민들의 유해’와 시신들을 본다. 사진집 <오월, 민주주의의 승리>(5·18기념재단, 2006)에서 ‘쓰러진 시민들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홧발로 짓밟아대는 공수부대원’의 만행을 보고 ‘미처 관에 넣어지지 못한 시신의 모습은 차마 두 눈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는 증언을 읽는다. 그날의 회한은 2011년 5월, ‘인류 모두가 보호해야 할 기록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5·18기념재단(www.518.org)에 가면 다 볼 수 있다. 5월 햇살이 풍성할수록 가슴은 답답하고 먹먹하다. 아…, 봄날은 가나 그날은 결코 이사하지 않으리.



이일훈 | 건축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




‘빛이 있었다’는 태초에 길은 없었다. 빛과 어둠 사이의 시간과 명멸하는 뭇 생명을 관할하는 조물주도 길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길은 오로지 인간만의 영역이다. 어디 인간 아닌 존재가 만든 길을 본 적이 있는가, 들은 적이 있는가. 인간만이 길을 만든다. 인간이 걷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길의 변천사는 곧 인간의 역사다. 길은 인간의 삶과 삶터를 잇고 있게 한다. 작은 집단에서부터 너른 문화권의 교류·왕래·소통을 위해 만드는 길이 거꾸로 삶을 잊게 하는 수도 있다. 지구상의 수많은 길 중에 곧고 너른 길들은 대부분 지구환경에 해악을 끼치는 장벽이 된다. 느린 움직임의 모든 존재를 무시하는 고속도로, 강과 연결된 생태 고리를 끊는 강변도로, 바다와 뭍의 유기적 관계성을 차단하는 해안도로, 지리·지형·지물의 특성과 무관하게 직선으로 건설되는 자동차전용도로는 빠름만을 예찬하며 느린 인간을 내친다.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무시되는 역설의 물증이다. 자동차만 달리는 광안대교에 사람이 대접받는 길을 덧붙인다면 어떤 영화보다도 멋진 길이 되리라. 기계적 빠름과 인간의 느림이 길항하는 다리! 국제영화제를 성공시킨 부산은 그런 길(도로·다리)을 잘 만들 수 있으리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속의 삼원색  (0) 2013.06.03
다시 5·18  (0) 2013.05.20
바다 위를 걷고 싶다  (0) 2013.05.06
공갈빵이 아니라 공간빵이다  (0) 2013.04.07
흔들리며 웃는 꽃  (0) 2013.03.11
집보다 더 중요한 것  (0) 2013.03.04
Posted by mx2.0




빵이나 떡은 만드는 재료가 이름이 되는 경우가 많다. 보리빵·옥수수빵은 주재료가 이름이 되고 쑥떡·콩떡·팥빵은 부재료가 이름이 된다. 술빵이나 꿀떡은 특징적인 맛이 이름이 된 경우다. 생긴 꼴로 불리기도 하는데 붕어빵·곰보빵이나 꽈배기과자가 그런 경우다.


부산에 사는 제자가 날 보러 오면서 오래되고 소문난 중국집 빵을 사왔다. 둥근 모양에 속이 텅 비었다. 겉만 보고는 밀가루 구워진 맛을 짐작했는데 속에 발린 설탕 맛이 달고 씹히는 참깨 맛이 고소했다. 빵보다는 과자에 가까운데 이름은 엉뚱하게 공갈빵이더라. 


공갈은 거짓말을 속되게 이르는 말, 빵에 무슨 거짓이 있을까. 둥근 빵이나 바람 빵 아니면 속 빈 빵으로 부르지 않고 공갈빵이라 하는 것을 보면 속이 꽉 찼을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지는 재미가 공갈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빵(음식)과 집(건축)이 닮았다. 초가집·기와집·너와집·흙집·벽돌집·돌집은 재료를 칭하는 것인데 집이란 집은 모두 속이 비었으니 공갈집이 아닌가. 건축(집)이란 빈속(공간)이 본질이니 번드레한 겉만 보고 만지는 이는 하수요, 속을 잘 비운 유용함에 주목하는 이는 상수다. 겉치장보다 속을 잘 비운 그 빵이야말로 공갈빵이 아니라 공간빵으로 불려야 마땅한 일이더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5·18  (0) 2013.05.20
바다 위를 걷고 싶다  (0) 2013.05.06
공갈빵이 아니라 공간빵이다  (0) 2013.04.07
흔들리며 웃는 꽃  (0) 2013.03.11
집보다 더 중요한 것  (0) 2013.03.04
빽 없이 오는 봄  (0) 2013.02.25
Posted by mx2.0

이일훈 | 건축가




 

갈등이란 ‘견해·주장·이해 등이 뒤엉킨 반목·불신·대립·충돌’이다. 그로 인해 생기는 불화·번민·혼란·혼돈·다툼과 불통은 칡(葛)과 등나무(藤)의 습성을 빼닮았다. 칡은 시계바늘과 반대로 도는 왼쪽감기로 자라고 등나무는 오른쪽감기를 하니 둘이 엉키면 풀기가 어렵다. 하지만 감는 방향이 다르다고 갈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습성은 다르되 조화를 이루는 식물이 얼마나 많은가. 풀리지 않는 갈등의 결정적 이유는 서로의 방향 다름보다 각각의 줄기가 자랄수록 자신만을 키우며 굵어지고, 자신만을 지키려 점점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부드러워 보이는 곡선의 넝쿨도 경직되면 돌과 같다. 반대로 휘청거리는 갈대나 억새의 줄기는 곧아 보이지만 유연하다. 변하기 쉬운 여자의 마음을 갈대에 비유하는데 실은 여자만이 아니라 인간 모두가 ‘생각하는 갈대’이니 흔들리는 생각이야말로 사람의 특권이며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질문일 것이리라. 새로운 생각을 원할수록 부지런히 흔들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더 먼저 일어’나고, ‘늦게 울’면 ‘바람보다 먼저 웃’는 세상에 닿으리라.


삭풍과 뒹굴던 억새꽃에 햇살이 비추니 금꽃이 되더라. 봄과 같이 스러지면서도 갈등이 없고 흔들릴수록 중심은 깊어지고 빛은 고와지더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 위를 걷고 싶다  (0) 2013.05.06
공갈빵이 아니라 공간빵이다  (0) 2013.04.07
흔들리며 웃는 꽃  (0) 2013.03.11
집보다 더 중요한 것  (0) 2013.03.04
빽 없이 오는 봄  (0) 2013.02.25
마음 없이 절하는 기계  (0) 2013.02.11
Posted by mx2.0

이일훈 | 건축가







딱따구리는 나무에 구멍을 파고 제비는 진흙을 물어다 제집을 만든다. 까치는 잔가지를 얹어 둥지를 튼다. 딱따구리는 조각적, 제비는 소조(塑造)적, 까치는 결구하는 방법을 쓴다. 쪼고 붙이고 엮는 것은 다르지만 목적이 같은 새들의 집짓기에서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집 자리(장소·위치)를 정하는 감각이다. 새는 번식이 끝나면 미련 없이 둥지를 버리거나 떠난다. 새들에게 둥지란 소유 아닌 사용이 목적이라서 남을 의식해 꾸미거나 필요 없이 두세 채를 갖지 않는다. 인간의 건축적 관점과 매우 다르다.


누군가 매단 새집, 팔 뻗으면 닿는 높이에 바람이 불 때마다 불안하게 흔들리니 새들이 깃들일 턱이 없어라. 공원 숲에 새집 아닌 새집만 늘었더라. 조류보호 한다고 새집만을 다는 것은 새의 생리와 별 관계 없는 인간중심적인 사고다. 조류의 멸종이나 감소 원인은 둥지의 부족보다 서식환경 파괴와 먹이사슬의 붕괴가 더 크다. 새집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가 사는 방식을 살피는 것이거늘 인공둥지엔 ‘새집을 떼어가지 마세요’라고 쓰여 있더라. 사람의 집을 닮은 새집을 만들어 달면서 새의 습성보다 사람이 떼어가는 걱정을 먼저 하니, 오호라, 새만도 못한 인간이 참 많은 시절이더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갈빵이 아니라 공간빵이다  (0) 2013.04.07
흔들리며 웃는 꽃  (0) 2013.03.11
집보다 더 중요한 것  (0) 2013.03.04
빽 없이 오는 봄  (0) 2013.02.25
마음 없이 절하는 기계  (0) 2013.02.11
구름을 찍다  (0) 2013.01.14
Posted by mx2.0

이일훈 | 건축가






비속어 ‘빽’은 필시 배경을 뜻하는 단어(background)에서 왔을 것이다. 출신 배경을 팔아 입지하고, 권력과 가깝게 지내며 행세하고, 의사결정권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주변의 힘을 이용해 검은 이득을 취하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벌을 면하고…, 좌우지간 부당하고 불순한 의도를 깔고 있는 빽만큼 이 사회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말이 어디 있으랴. 예전엔 없는 사람들이 찾았는데 요즘엔 있는 사람들이 대놓고 끼리끼리 지키려 안달이니 빽의 얼굴도 점점 뻔뻔해지는 모양이더라. 빽과 빽이 공생·기생하는 빽의 전성시대, 가히 철면피를 넘어 ‘빽면피’의 세상이더라. 이러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유빽무죄 무빽유죄’로 바뀔 날이 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더라. 


불상에도 빽을 두른 것이 있으니 바로 광배(光背)다. 신비함을 상징하지만 광배가 없다고 그 위대한 깨달음의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는다. 광배 없이도 종교·예술적 감흥을 전하는 불상이 얼마나 많은가.


박근혜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빽이 많은 대통령이다. 주변의 빽을 물리치며 멀리해서 진정 스스로 빛나는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무빽무죄 유빽유죄’의 시대를 열어주길, 석불입상의 후광보다 더 빛나는 봄기운이 세상을 녹이듯이.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지난 칼럼===== > 이일훈의 사물과 사람 사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흔들리며 웃는 꽃  (0) 2013.03.11
집보다 더 중요한 것  (0) 2013.03.04
빽 없이 오는 봄  (0) 2013.02.25
마음 없이 절하는 기계  (0) 2013.02.11
구름을 찍다  (0) 2013.01.14
[사물과 사람 사이]사다리의 이중성  (0) 2012.12.17
Posted by mx2.0

이일훈 | 건축가



 




인사란 드러나는 예의다. 매일 만나도 정중한 예의를 표해야 할 경우가 있고 드물게 만나도 가벼운 경우가 있다. 진심으로 하는 인사가 있고 억지로 하는 경우도 있다. ‘절하고 뺨 맞는 일 없다’는 속담을 보면 예의를 표해서 손해 볼 것 없다는 것이 인간사지만 내용 없는 형식적 인사는 어딘가 공허하다. 인사가 건성이라면 관계도 건성일 것이리라.


설날 세배는 예의를 갖춘 큰절, 만수무강 축원과 소원성취 덕담까진 좋은데 이어지는 대화가 불편한 경우가 많다. 뜸하고 드물게 만나는 친척일수록 덕담 아닌 질문을 하고, 평소에 교류 없고 무관심한 관계일수록 답하기 곤란한 말을 꺼낸다. 이력서 쓰느라 지친 백수에게 결혼은 언제 하나, 연봉은 얼마냐, 입시에 떨어진 아이에게 어느 대학 갔냐고 물으면 옆에서 듣기도 불편하다. 그런 말은 대부분 딱히 할 말이 없어 꺼내는 경우가 많다. 별 관심도 없으면서 결혼·연봉·성적 등을 묻는 것은 의례적(형식적)인 수준을 넘어 기계적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어느 식당 앞에 절하는 기계인형이 시간의 간격과 방향이 일정하게 꾸벅이더라. 볼 때마다 마음 없는 말을 듣는 것 같아 찜찜하더라. 지난 설날에 혹시 나도 누군가에게 기계는 아니었을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

이일훈 | 건축가






시내 어디를 지나는데 담장에 ‘촬영금지’ 표식이 붙어 있더라. 담 높이는 한 길도 넘어 안은 안 보이고 사진을 찍어봤자 시멘트 블록만 찍히겠더라. 조금 더 가니 낮은 정문 너머 안이 훤히 보이는데 군용차와 승용차가 몇 대 서 있더라. 아하, 군부대라서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것이었구나. 그런데 부대 인근에 들어선 아파트와 고층건물은 부대 연병장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더라.


김포공항에도 같은 표식이 붙어 있더라. 비행기 타고 여행 가는 이들이 활주로나 항공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는 것도 안된다는 말인데 민간항공기가 무슨 군사기밀인지 잘 모르겠더라. 만약 불순한 목적으로 공항을 촬영한다면 누가 대놓고 찍겠는가. 기밀로 할 것이라면 보이지 않게 가리는 것이 이치에 맞다. 눈으로 보는 것은 괜찮고 찍는 것은 안된다니 참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더라. 인공위성에서 지표면을 이 잡듯 찍는 시대에 ‘촬영금지’는 너무 뒤진 풍경이다. 세상이 첨단이면 뭐하나 의식이 뒤졌는데. 이런 구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에 답답해서 하늘을 보니 구름만 무심히 흘러가더라. 그래, 구름이나 찍어야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

이일훈 | 건축가




사다리는 높이와 깊이의 차이를 극복하려는 욕망의 기구로 공간의 면적과 비용을 절약하려는 관점의 산물이기도 하다. 불통의 공간에 이르는 과정에 꼭 필요한 사다리는 근본적으로 계단보다 위험하다. 필요와 위험의 이중성을 지닌 사다리는 희망과 절망을 같이 품고 있다. 오르려는 곳에 잘 놓인 사다리는 희망이지만 먼저 오른 사람이 뒷사람은 오르지 못하도록 걷어찬 사다리는 절망 그 자체다. 꿈에 사다리를 타고 오르면 길몽, 반대로 내려오거나 쩔쩔매면 흉몽이다. 하지만 해몽을 아무리 잘한다 해도 썩은 사다리라면 의미가 없다. 사다리의 얼개와 구조를 보려면 파몽(破夢) 아니면 길이 없고, 측면만 보면 실상을 알 수 없다. 앞뒤 좌우 위아래를 다 훑고 속을 비추어 그림자까지 봐야 전체가 보인다.


대선판에 설치는 말들이 흡사 사다리 같다. 필시 어떤 공약은 공약(空約)이 될 것인데 그걸 알고도 말하는 후보와 믿는 사람이 있으니 가히 세상을 속이는 공약(恐藥)일 것이리라. 후보들이 보여주는 사다리가 천사의 진솔한 권유인지, 악마의 가증스러운 유혹인지 구별하는 제일 쉬운 감별법은 그림자를 보는 것이다. 말의 그림자에 더하여 사람의 그림자, 다시 현실의 그림자에 더하여 지난 과거의 그림자. 모든 형상은 그림자를 지울 수 없으니.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

이일훈 | 건축가


 

연필에 지우개를 붙여 하나로 만든 아이디어는 두 가지를 따로 챙기는 성가심을 해결한 그야말로 대박상품이었다. 새로운 제품이란 이전에 없던 것보다 전에 있던 것들을 변용·변화·개선시킨 것들이 더 많다. 비슷한 쓰임새를 합칠 수도 있고, 전혀 상관없는 기능을 더할 수도 있다. 잡다한 기능 중에서 소용없는 것을 과감히 버려 개선하는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 욕심으로 합쳤으나 큰 소용이 닿지 않는 경우도 있다.


 




파란색 합성수지의자 위의 붉은 원통은 통행을 차단하는 목적으로 설치할 때는 ‘차단봉’, 안내를 목적으로 할 때는 ‘유도봉’으로 불린다. 그것이 의자와 한 몸이 되었을 때 어떻게 불러야 할까. ‘의자차단봉’ ‘의자유도봉’ ‘유도봉의자’ ‘차단봉의자’ ‘봉의자’ 또는 ‘의자봉’. 어떻게 부르든 무엇이 우선인가는 여전히 숙제다. 요즘의 대선 판 풍경도 이와 비슷하다. ‘문철수’와 ‘안재인’이 되지 못한 문재인과 안철수는 장고 끝에 악수하고, 누군가는 두 이름을 합쳐 ‘이명박근혜’로 불린다. 암울했던 시대의 다카키 마사오와 박정희도 등장한다. 사물도 사람도 둘이 하나가 될 때는 이름 짓기의 어려움을, 하나가 둘이 될 때는 불리는 것의 무서움을 알 일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



이일훈 | 건축가






멀리서 보니 위장무늬 군복을 입은 버즘나무가 크고 하얀 명찰을 달고 있더라. 가까이 가보니 A4 용지에 정성들여 또박또박 쓴 글이 가득, 비가 와도 젖지 않게 비닐로 투명 씌움까지 해서 누름 못으로 박았더라. 못이 박히는 그 순간 버즘나무는 얼마나 놀라고 따끔했을까. 아마 누름 못자리가 급소였다면 나무는 놀라 소리 지르고 눈물을 찔끔 흘렸을 것이다.


“어린이집 화분을 가져가신 분은 다시 제자리에 놓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화분은 저희 원아들이 자연체험학습활동을 위해 자유롭게 관찰하고 있는 교구입니다. 꽃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모두 함께 볼 수 있는 곳에 있으면 합니다.” 아, 그렇구나. 누군가 화분을 훔쳐갔구나. 화분을 가져간 사람이 버즘나무에 붙어있는 글을 읽는다면 속이 뜨끔할 거다. 사라진 화분 때문에 어린이집에서는 긴 글을 써 붙이고, 동네사람들은 즐겁지 않은 글을 읽는 것이다.  


화분을 가져간 그 사람, 꽃은 탐하지만 심보는 꽃이 아닌 모양이다. 꽃을 보고 싶다면 씨앗부터 뿌릴 일이거늘 몇날 며칠이 지났어도 사라진 화분은 돌아오지 않고 있더라. 


제일 애꿎은 것은 영문도 모르고 침 맞은 버즘나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