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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 영화평론가·감독



 

“당신은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려고 애써 노력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부탁이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요.” 그러자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러나 나는 장소로서의 할리우드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내 관심은 스튜디오에 들어가 일하는 것뿐이었으니까요.” 이 말은 박찬욱이 아니라 앨프리드 히치콕이 1939년 캘리포니아에 도착해서 <레베카>를 찍은 다음 트뤼포의 질문에 한 대답이다. 아마도 이 말을 박찬욱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심정으로 몇 번이고 이 말을 새겨가면서 박찬욱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문제를 생각했을 것이다. <스토커>는 박찬욱이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찍은 첫 번째 영화이다.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가 18살이 되던 날,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받는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있던 날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삼촌 찰리(매튜 구드)가 방문한다. 엄마 이블린(니콜 키드먼)은 알듯 말듯 한 표정으로 삼촌 찰리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이 집에 머물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찰리는 인디아에게 과도하게 친밀감을 과시하고, 그때부터 무언가를 알 것만 같은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간다. 인디아는 점점 더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당신이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하나씩 벌어진다.


물론 이 영화는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를 직접적으로 대놓고 끌고 들어왔으며(심지어 찾아오는 삼촌 이름도 동일하다) 삼촌 찰리로 캐스팅된 매튜 구드의 표정과 헤어스타일은 마치 <사이코>의 앤터니 퍼킨스를 데려다놓은 것만 같다. 특히 언덕에 서 있는 삼촌 찰리. 인디아는 자꾸만 지하실로 내려가고 그럴 때마다 매달린 전등을 건드려서 불빛을 흔들거리게 만든다. 물론 작정을 하면 더 많은 예를 들이밀 수도 있다. 아마 박찬욱 자신의 목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도 <스토커>는 박찬욱 자신의 <박쥐>를 느슨하게 리메이크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다소 유머를 허락한다면 나는 자꾸만 이 영화 제목 <스토커>가 <드라큘라>의 원작자 브램 스토커에서 가져온 둘 혹은 (<박쥐>를 포함해서) 셋 사이의 혈연관계처럼 느껴진다.




▲ “히치콕과 ‘드라큘라’와 ‘박쥐’의 그림자

나비와 거미가 얽힌 복수와 변태의 이야기

소녀 인디아의 의식과 무의식을 닮은 이상한 집

‘스토커’는 몹시 공들여 찍은, 매우 긴 예고편과 같다.”


말하자면 피에 관한 이야기. 찰리는 인디아에게 무언가를 일깨워주러 온 것이다. 피로 맺어진 동반자. 인디아는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는다. 그런 다음 결심을 해야 한다. 그 둘은 같은 종류의 인간이다. 나비가 되고 싶은 나방. 그 둘은 동일한 몸짓으로 날갯짓을 한다. 그때 인디아를 동여매는 것은 다리를 타고 올라 허벅지로 파고드는 거미이다. 나비와 거미. 거미줄을 끊고 나비는 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나방은 나비가 될 수 있을까. 소녀들이 신는 운동화를 버리고 하이힐을 신으면 될지도 모른다. 18살 생일날. 아버지가 죽고 삼촌이 찾아온다. 그때 소녀 인디아는 총을 들고 사냥을 함께한 아버지의 유언을 깨닫는다. 같은 피가 흐르는 아버지가 똑같은 환자가 아니라는 어떤 보장이 있는가. 스토커라는 집안의 무서운 이야기. 총이라는 남근. 잡아먹는 자와 잡아먹히는 자. 만일 이 모든 이야기가 인디아를 내세워서 막내를 묻어버린 둘째에게 가하는 아버지의 복수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박찬욱이 복수에 얼마나 심취했는지를 잊으면 안된다. 이 영화는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곤충들 사이의 복수와 변태에 관한 이야기이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다소 우스꽝스럽다. <스토커>의 시나리오는 약간의 주의를 기울이면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을 만큼 믿을 수 없게 허술하다. 아니, 차라리 말이 안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어떤 대목은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반대로 어떤 사건은 앞뒤로 맞추면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커>는 흥미로운 실패작이라는 아이러니한 표현이 허락된다면 나는 이 영화를 그 예로 들고 싶어진다. 박찬욱은 이야기를 비틀지 않았고, 과도하게 상징이나 은유를 인물에게 부여하지도 않았다. <스토커>를 보고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범상치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서 과도하리만큼 장식이 많아진다. 종종 뻔한 이야기도 마치 비밀이 숨겨진 듯한 미스터리한 구조처럼 뒤죽박죽으로 뒤섞은 교차편집이나 짧은 플래시백, 섬광 같은 인서트, 힌트를 주려는 클로즈업들, 강제적인 카메라 이동, 방마다 꽉꽉 눌러 담은 미장센들로 우글거린다. 사방팔방으로 조각조각난 시퀀스들. 하지만 박찬욱은 이 말도 안되는 시나리오를 영화로 성립시키기 위해서 거의 가련할 정도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스토커>의 사실상의 주인공은 정확하게 이 세 명의 인물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집 그 자체이다. 이상한 집. 이 집에서 아버지가 치워지자 인디아는 어떤 방어선이 사라진 것처럼 활동하기 시작한다. 마치 인디아의 의식 상태와도 같아 보이는 집. 먼지 하나 없어 보이는 일층에 비하면 이상하리만큼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폐가처럼 먼지가 잔뜩 쌓인 채 거미줄이 드리워진 어두컴컴한 지하실, 왠지 일층에 비해서 턱없이 작아 보이는 이층, 이 세 개의 공간은 인디아의 무의식과 자아, 그리고 초자아의 서로 다른 칸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인디아는 이 세 개의 칸을 계단을 따라 오르내리며 자기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엄마가 잠들었을 때 이 집을 떠나는 인디아가 무엇을 버리는지는 애매하다.


<스토커>는 첫 장면이 마지막 장면인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신기한 것은 첫 장면을 본 다음 내내 영화를 보고 나서 마지막 장면을 본다고 해서 마지막 장면이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이다. 첫 장면을 보았을 때는 안 봐도 다 알 것만 같았던 이야기가 내내 예기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간 다음 마지막 장면에서 어리둥절하게 끝나버린다. 하지만 그게 무얼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혹은 무언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별게 없다. 이상하게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몹시 공들여 만든 매우 긴 예고편을 한 편 본 기분이 든다. 그런 다음 진짜 영화는 어딘가 숨겨놓은 것처럼 그냥 거기서 문득 끝난다. 뭐랄까, <스토커>는 본격적인 영화라기보다는 박찬욱이 할리우드에 보내는 파일럿 필름처럼 보인다. 나는 본편이 보고 싶어서 박찬욱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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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 영화평론가·감독



나는 스파이라는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고 스파이 친구도 없다. 그러므로 스파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스파이에 관한 소설과 영화들에서 얻은 작은 지식들뿐이다. 종종 나는 스파이들의 세계가 그저 음모론의 일부로 꾸며낸 환상의 산물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기도 하였다. 나이가 든 다음 좀 더 많은 스파이 소설을 읽었다. 그런 다음 한 가지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스파이는 운명이나 재능이 아니라 이것도 하나의 직업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운명처럼 생각하거나 액션영화들은 종종 이걸 재능처럼 다룬다. 가끔 어떤 주인공들은 자신을 그렇게 믿는다. 이때 딜레마가 생겨난다. 왜 어느 쪽을 선택해도 자기에게 결정권이 없느냐는 것이다.


 


(출처 : 경향DB)




류승완의 <베를린>(사진)의 무대 베를린. ‘북한대사관의 무기 밀거래를 담당하던 감찰요원 표종성(하정우)은 러시아와 중동의 거래상들과 접선하던 중 자기가 함정에 빠졌음을 알게 되고 탈출한다. 이들을 감시하던 남한의 국가정보원 요원 정진수(한석규)는 비밀이 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평양에서 새로운 감찰요원 동명수(류승범)가 파견되자 주독 북한대사 리학수(이경영)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미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하고, 이 과정에 표종성의 아내이자 북한대사관 통역사인 련정희(전지현)는 내부 이중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기 시작한다. 여기에 미국 CIA와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개입한다’라고 줄거리를 소개하지만 실제로는 CIA와 모사드는 잠시 나온 다음 영화에서 연기처럼 사라지고 이야기는 순식간에 단순해진다.


스파이 소설의 대가 존 르 카레는 푸념하듯이 말했다. 아, 첩보전.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하면서도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스파이들의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건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건드린다. 그물망처럼 얽혀있는 이해관계들. 기만적인 수많은 거래들. 정보와 미끼 사이에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야만 한다. 정작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현장에 없고 (영화 속의 대사에 따르면) “우리는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지시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왜 베를린에 모여든 것일까. 자, 알겠다. 베를린은 남한과 북한이 마주칠 만한 장소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베를린은 이미 통일된 독일의 한복판이며 이 도시는 더 이상 냉전의 상징이 아니다. 물론 그들은 서울과 평양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베를린에서 각자의 작전을 수행하는 중이다. 


그러나 서울과 평양의 끈은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제작비와 상관없이) <베를린>은 그 무대의 설정만으로는 작은 소품 정도의 규모로 진행되는 영화이다. <베를린>은 마치 냉전의 상황에 빠져든 것처럼 위장하고 한편으로는 중동의 분쟁에 휘말려든 것처럼 과장하면서 김정일로부터 김정은에로의 권력 이양에 걸쳐 선 북한 내부의 암투가 베를린까지 번져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베를린에 자리한 북한대사관을 둘러싼 암투에 지나지 않는다.




(출처 : 경향DB)




▲ “‘베를린’은 신파 멜로드라마이다

하지만 나는 ‘베를린’의 진정한 스파이 버전을

지금 상상해보고 있는 중이다

국가 무의식을 보여주는 미끼로서 스파이를”


물론 나는 표종성과 련정희가 그들의 집을 포위한 북한 감찰요원들과 치고받으면서 마침내는 13층에서 떨어져내리며 유리로 된 지붕을 산산조각내는 긴 시퀀스의 액션 안무가 두 번 볼 만하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그런 시퀀스는 그 이후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액션은 둔하거나 무언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마치 중간에 끝나버리거나 무언가 빠져버린 듯한 인상을 남긴다. 게다가 일단 총을 쏘기 시작하면 이상할 정도로 액션은 따분해진다. 류승완은 여전히 몸으로 치고받을 때 보는 사람이 정말 맞는 것 같은 어떤 육체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킬 줄 안다. 이건 그만이 할 줄 아는 영화적 재능이다. 그러나 일단 총을 들면 그게 이상하게 장난감처럼 보인다.


난처해지는 순간은 이 영화가 시작과 끝이 서로 다르다는 걸 깨달을 때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등장인물들은 그들 자신이 스파이라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이 더러운 첩보전의 세계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일까. 


영화가 끝날 때 이 영화에는 남북한의 대립으로 비롯된 그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어떤 탄식도 없고, 그렇다고 북한의 새로운 지도자 김정은과 새로운 권력의 배신에 대한 어떤 차가운 시선도 없으며, 남한의 ‘반동적인’ 자본주의에 대해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잃어버린 희망의 전망도 없다. 정진수는 표종성에게 갑작스러운 우정의 기분을 느끼면서 그를 풀어주고, 표종성은 북한에 있는 동명수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복수를 위해 돌아가겠다고 경고를 한 다음 블라디보스토크행 비행기를 탄다. 순진하고 감상적인 결말. 이 어이없는 파토스로 넘쳐나는 엔딩 앞에서 어리둥절해졌다.


나는 정말 스파이 영화를 본 것일까. 이 영화는 어딘가에서 순환구조가 뒤집혔다. 나는 오히려 스파이들의 일상적인 현실로 돌아온 다음 그 안에서 원인과 결과를 찾아내고 싶다. 자, 결과는 무언지 알겠다. 그때 왜 이 영화는 마치 이중간첩이라도 존재하는 것 같은 호들갑을 떤 것일까. 차라리 련정희의 이중생활이 사실상 바꿔친 이중간첩의 실체라고 설명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베를린>에서 스파이들의 따분하고 단조로운 추적전 대신 차라리 부부의 위기에 관한 의심과 희생의 목소리에 경청하고 싶어진다. 만일 이 영화의 사실상의 내면적인 이야기는 표종성이 (상부의 지시를 따르기는 했지만 외교상의 접대를 이유로 다른 남자들과 불륜을 저지르고 다니는) 아내 련정희에 대한 의심을 거대한 스파이 조직의 전쟁인 것처럼 바꿔친 다음 서로가 서로에게 시련과 희생의 장부를 교환하며 용서를 빌 기회를 주는 이야기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베를린>은 표종성의 아내에 대한 의심과 그 위기가 고작해야 전부인 신파 멜로드라마이다. 어쩌면 그것이 진짜 스파이 영화의 도덕적 진공상태보다 견딜 만하기 때문에 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베를린>의 진정한 스파이 버전을 지금 상상해보고 있는 중이다스파이는 국가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미끼이다. 존 르 카레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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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같은 시대를 품은 두 영화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온 다음 서로 다른 자리에서 마지막 순간에 같은 말을 꺼내든다. 용서. 당신의 귀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무자비하게 고문했던 남자는 세상이 바뀌고 감옥에 간 다음 자신이 고문했던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다음 말한다. “용서해주십시오.” 하지만 그 사람은 차마 그의 머리에 손을 올리지 못하고 돌아서서 나간다.(<남영동 1985)> 광주에서 무자비하게 살해당한 이들의 자식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진압군으로 그들의 아비 어미를 살해했던 그 사람은 죄의식과 분노에 사로잡혀 오랜 세월 계획을 세운 다음 전두환 전 대통령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앞에서 총을 들고 요구한다. “사과하세요, 진심으로 사과하세요, 그러면 용서할 수 있어요.”(<26년>) 두 말을 하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며,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지만,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신기하게도, 그 대사를 이경영이 두 영화 모두에서 하면서 이상한 공명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정지영의 <남영동 1985>는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박원상)이 1985년 9월4일 불법 연행된 다음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2일 동안 고문을 받은 실화를 다루고 있다. 이 고문의 중심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이경영)이 자신의 ‘도구’를 들고 ‘수술’을 한다. 우리는 내내 그 수술 현장을 보아야 한다. 강풀의 웹툰 <26년>을 영화로 각색한 조근현의 <26년>(오른쪽)은 몇몇 인물을 빼고 몇몇 상황을 바꾸었지만 원작 만화를 따르고 있다. 광주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김갑세(이경영)는 1980년 5월 그날 광주에서 희생당한 유족들의 자식들인 전직 국가대표 사격선수 심미진, 금남로 깡패 곽진배, 서대문경찰서 교통경찰 권장혁, 그리고 입양한 아들이자 비서 김주안과 함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찾아가 진심을 담은 사과를 요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일 계획을 세운다. 


나는 두 영화 사이의 우열을 가릴 생각이 없다. 그건 여기서 무의미한 논쟁이다. 반대로 두 영화가 서로 공유하는 운명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운명? 그렇다. <남영동 1985>를 본 다음 고문이 얼마나 생생한지를 느껴보고 싶다는 댓글이 올라오는 것은 이 영화를 가장 나쁜 방법으로 감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근태를 연기하는) 영화배우 박원상이 그걸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은 폭력에 전염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마찬가지로 <26년>을 본 다음 그날 광주에서 희생당한 유가족의 고통을 얼마나 알고 있냐고 물어보는 것은 이 영화를 가장 냉소적으로 반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 앞에서 그런 영화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과 대답을 모두 바꾸고 싶다. 질문. 당신들은 왜 영화를 통해서 1980년대를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대답. 아니요, 우리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뽑은 다음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은 우리들의 선택의 역사. 


이때 두 영화가 필사적으로 공유하는 것은 폭력의 비대칭성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한 폭력에 대해서 그들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맞서지 않으려고 안타까우리만큼 애쓴다. 두 영화의 불만족스러운 점은 종종 연극적이거나(<남영동 1985>) 과도하게 장르적으로 이끌리면서(<26년>) 역사의 네트워크들을 희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며, 두 영화의 훌륭한 점은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남영동 1985>




<26년>




<남영동 1985>는 섣부른 화해의 제스처나 정의의 실현 대신 죽은 김근태가 산 우리를 두 눈을 부릅뜨고 맹렬하게 지켜보는 시선으로 끝난다. <26년>의 원작 웹툰은 방아쇠를 당긴 다음 그냥 거기서 끝난다. 영화는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난 다음 ‘오늘 아침’ 그분께서 광화문네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지켜본다. 


금남로에서 시작해서 청와대가 바라다보이는 광화문에서 끝날 때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여기에는 권선징악이 없으며, 정의의 승리 따위도 없다. 그때 용서의 자리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나는 두 영화 앞에서 당신의 분노가 어디서 오는지 물어보고 싶어진다. 그런 다음 여기서 용서와 분노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요구하는 거리에 두 영화가 끼어들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고 한다. 그 둘은 하나가 아니다. 이때 분노는 불만스러울 것이며, 용서는 망설여진다. 불만족과 망설임 사이에서 죽은 자들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이때 살아남은 자들은 셈을 치러야 한다. 어떤 셈? 


우리는 1980년대를 부정하면 안된다. <남영동 1985>와 <26년>은 부채의 계산서이지 그 효과가 아니다. 우리는 무엇과 싸워야 하는가. 그 효과를 가로막는 그 모든 것과 싸워야 한다. 당신은 그럴 충분한 용기가 있는가? 고작해야 계산서가 잘못되었다고 지금처럼 긴급한 순간에 시간을 낭비할 것인가? 


간단하지만 단호한 대답. 12월19일 우리들은 그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행위를 통해서 현실에서만 그 효과의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비판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 행위의 결과를 향해서여야만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두 영화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운명을 잠시 동안만 시적으로 음미하시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그러자 갑자기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가 1944년에 쓴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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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지난 주말(10월20일)까지 <광해, 왕이 된 남자>(사진)를 본 관객은 1천 79만 6095명이다(영화진흥위원회 통계). <도둑들>에 이어서 올해 두 번째 천만 관객영화이며, 역대 한국영화 중 일곱 번째 천만 영화이다. 이 숫자의 느낌이 잘 오지 않는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월23일 오후 6시36분 남한 인구가 막 5천만명이 넘었다. 말하자면 남한 전체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이 보았다는 뜻이다. 나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 숫자를 설명해보고 싶다. 현재 대통령인 이명박씨는 1천 149만 2389표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씨는 1천 201만 4277표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투표는 입장료를 내고 하지 않는다. 영화는 입장료를 내고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힘든 일은 당신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일이다.


나는 좀 더 재치를 부려보고 싶다. 지난 여름 <도둑들>이 천만명이 넘었을 때 아무도 천만이라는 숫자와 올겨울 12월19일 수요일 대통령 선거의 결과와 연결 짓지 않았다. 그러나 <광해>를 본 다음 기괴할 정도로 이 영화를 차기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예언처럼 받아들인다. 혹은 증후라고 생각한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10월12일 <광해>를 본 다음 “목례를 올리며 예를 취하는 허균에게 떠나는 배에서 손을 흔들며 웃던 하선을 보며 노무현 대통령이 저절로 떠올랐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무소속 안철수 ‘대통령’ 후보는 10월9일 이 영화를 본 다음 “문화 콘텐츠는 고생한 분들이 인정받는 것을 통해 보람을 느끼는 것이며, 한 나라가 이로 인해 평가받는 것은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두 사람이 같은 영화를 본 다음 논평하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방식이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과도하게 정감에 넘치는 주관적인 눈물과 과도할 정도로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거리의 유지.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이 영화를 보았다는 기사는 아직 읽지 못했다. 물론 <광해>를 보지 않은 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천만명이 본 영화에 대한 과도할 정도로 냉담한 무관심.


지금 모두들 신기할 정도로 <광해>를 빌려서 정치소설을 쓰고 있다. 혹은 거의 주술에 가까운 예언을 늘어놓고 있다. 그리고 이 담론들은 전술적으로 읽힌다. 물론 여기서 괄호 쳐진 것은 <광해>라는 영화 자체이다. 아마도 관객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광해>를 보았을 것이다. 종종 <광해>의 천만명은 CJ엔터테인먼트가 CGV라는 배급구조를 동원해서 만들어낸 허구의 숫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론은 간단하다. 작년 겨울 <마이 웨이>의 끔찍한 실패를 어떻게 설명하겠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해>는 훌륭한 영화인가.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어쩔 수 없이 2012년 가을 천만명이라는 남한 인구의 숫자를 움직인 ‘마술의 손’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출처: 경향DB)

▲ “영화를 보기 위해 ‘자기 의지에 따라’

지갑을 기꺼이 연 천만명.

다시 5년을 맡길 대통령을 결정하기 위해 투표함에 ‘자기 의지에 따라’

도장을 찍고 넣게 될 천만명.

그러나 그 둘은 하나가 아니다.”


(따분한 말이긴 하지만)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는 이 마술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사회라는 이성의 간계에 의해서 개인들 간의 관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 전체를 움직여서 하나로 묶어내는 신비한 균형점을 이루는 순간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종종 이 침점의 순간이 나타나면 (거의 자동적으로) 이것이 앞으로 있게 될 사회적 사건에 대한 예비적 증후라고 읽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착시. 이때 여기에는 사기가 있다. 종종 이런 해석들은 영원히 자기 의지적인 행동을 미루면서 수동적으로 자기 의무를 환상에게 떠넘기고 난 다음 어떤 신비한 도약에 의해서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지리라는 은밀한 (거짓) 희망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그런 일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실 속의 가능성을 누가 열어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해야 할 때라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논점을 바꾸어야 한다. <광해>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걸 이 영화의 줄거리 안에서 찾으면 길을 잃을 것이다. 인물들에서 찾으면 각자의 정치적 입장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종종 <광해>를 읽어나가는 소설들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기보다는 거의 왜상효과에 사로잡힌 미학적 입장처럼 보일 정도이다. <광해> 안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광해>가 나타난 것이다. 혹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광해>는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이 영화를 천만명이 보았다는 것이다. 천만이라는 존재. 천만이라는 사건적 숫자. 우리는 강제로 <광해> 영화 안에 벌어진 내용과 현실 정치를 매듭지으면 안된다. 오히려 이 매듭 자체가 일종의 증후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둘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태는 훨씬 까다롭다. (영화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읽어내는’) <광해>는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거짓’ 사건이다. 핵심은 이 ‘거짓’ 속에 숨어 있는 다른 가능성이다. 오히려 <광해>에서 광해군을 대신하여 가짜로 내세운 하선이라는 인물 자체가 이 헛소동의 알레고리처럼 보일 정도이다. 허구로서의 역사. 가짜의 멜랑콜리. 하지만 난 그걸 믿고 싶어요. 소설들의 정치적 간절함. 과거에 담보를 맡긴 미래. <광해>라는 ‘정치적’ 실패. (브레히트의 말을 빌려) 우리는 현실 속에서 ‘더 잘’ 실패할 수 있을까. 당신이 영화를 읽는 대신 어느 순간부터 영화가 당신을 읽기 시작한다.


이때 <광해>가 대중문화와 정치 현상의 간극 사이에 놓인 일시적인 오해의 정치학이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들의 사회 시스템이 작동시키는 ‘예외적인’ 진실의 순간이라는 행간을 사후적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핵심은 천만명이 본 <광해>에서 새로운 정치의 출현이 가능하냐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보기 위해 ‘자기 의지에 따라’ 지갑을 기꺼이 연 천만명. 다시 5년을 맡길 대통령을 결정하기 위해 투표함에 ‘자기 의지에 따라’ 도장을 찍고 넣게 될 천만명. 그러나 그 둘은 하나가 아니다. 관객으로부터 시민에로, 스크린으로부터 현실로, 감상주의에 찬 환상으로부터 피와 살을 가진 새로운 세계로 어떻게 도약할 것인가. 간극의 수사학으로부터 이행의 의지에로 점핑. 이때 우리는 그 둘 사이의 간극의 행간을 뛰어넘을 (헤겔의 말을 빌리면) ‘목숨을 건’ 도약을 맞이할 것이다. 신념의 도약. 정의의 도약. 정말 그것을 원하십니까? 그날 원하는 자만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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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김기덕의 열여덟 번째 영화 <피에타>를 보았다. 고리대금업자를 대신해서 청계천 골목에 가까스로 살고 있는 채무자들에게 신체포기각서를 내세워 보험금을 타내는 강도(이정진)는 ‘무자비’하게 자기 일을 해나간다. 그런 강도 앞에 갑자기 자기를 ‘엄마’(조민수)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나타난다. 처음에는 미쳤다고 생각하고 때리고 내쫓고 학대하지만 그녀는 자기를 용서하고 받아들여 달라고 호소한다. 강도가 ‘엄마’를 받아들일 때 갑자기 ‘엄마’가 사라져버린다. 자기가 괴롭힌 채무자들 중의 누군가가 ‘엄마’를 납치했을 것이라고 믿은 강도는 자신의 채무자들을 찾아다니며 ‘자비’를 호소하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무자비’와 ‘자비’의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사실상 영화는 여기서 다시 시작된다.


 만일 이전까지 김기덕이라면 ‘엄마’가 사라지면서 중단되었을 것이다. 혹은 꿈에서 깨어났을 것이다. 내가 만들어낸 환상의 공백과 어떻게 함께 머물 것인가. 행위로 이행하기 전에 멈춘 다음 맛보는 소외와 무언가를 교환하려는 간절한 거래. <피에타>는 여기서 갑자기 그 거래를 중단하였다. 그런 다음 그가 중단시켰을 자리에서 절반을 접은 다음 반대의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다시’ 시작한다. <피에타>는 이 절반의 자리에서 구원의 시간을 선택한다. 갑작스러운 메시아의 시간의 도래. 김기덕은 처음으로 그 시간을 기다리는 대신 그 순간을 목도하고 싶어 한다. 이때 강도는 이제까지 김기덕 영화의 주인공들이 미처 하지 않았(거나 회피했)던 고통을 마주해야만 한다. 그는 자기가 저지른 폭력의 결과를 차례로 만나야만 한다. 갑자기 김기덕은 이제까지 덮어온 환상을 추월하여 먼저 결과에 도착하고 싶어 한다. 원인은 아무리 서둘러도 결과를 잡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아무리 서둘러도 원인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는 무효라는 것이 없다. 김기덕은 처음으로 ‘이후’의 시간을 다루고 싶어 한다. 책임이라는 참을 수 없는 결과. 그것을 짊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가짜’ 엄마가 나타난다. 그런 다음 ‘가짜’는 강도의 ‘엄마’라는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한다. 그것이 모두 채워졌을 때 존재하지 않았던 ‘엄마’의 자리가 다시 원래의 빈자리가 되자 강도는 비로소 이 공백의 실존을 긍정한다. 물론 그 긍정은 자기의 ‘존재한 적이 없는’ 일부를 잘라내는 고통이다. <피에타>가 거래하는 것은 ‘엄마’라는 자리를 놓고 자본과 벌이는 기괴하고 슬픈 부등가 교환이다. 누군가는 이게 상징적으로 유치하다고 비판했다. 미안하지만 이 영화에는 상징이 없다. 그 대신 초자아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법이 음모를 꾸민 다음 비합리적으로 내리 누르면서 이 모든 죄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선의의 표정을 찡그리게 만든다. 강도와 세상 사이를 다시 연결시켜놓은 다음 사라지는 매개자로서의 ‘가짜’ 엄마는 처음에는 그저 장치였지만 그 존재가 ‘엄마’라는 사실 때문에 문득 <피에타>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김기덕의 주인공들은 제발 자기를 이 자리에서 삭제시켜 달라고 호소하는 뺄셈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반대로 덧셈의 영화를 만들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피에타>가 김기덕의 가장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이제까지 그가 만든 영화 중에서 가장 성숙한 영화인 것만은 사실이다. 





(출처: 경향DB)


▲ “다시 한번 세상에 대한

김기덕의 애절할 정도로 간절한 하소연.

이때 말은 현실 속에 구멍을 낸 다음

그것을 열어 보이고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자비를 호소한다.”


무엇보다도 <피에타>가 이전 영화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의 주인공들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나쁜 남자>에서부터 사라지기 시작한 말은 <비몽>에 이르면서 무의미한 것이 되어갔다. 김기덕의 오랜 침묵.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거리. 하지만 <피에타>는 갑자기 되돌아와 우리 모두에게 말을 한다. 세상 속으로의 혀의 활동. 말이 아니라면 어떻게 상대방에게 호소할 수 있을까? 난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누가 누구에게? 다시 한번 세상에 대한 김기덕의 애절할 정도로 간절한 하소연. 이때 말은 현실 속에 구멍을 낸 다음 그것을 열어 보이고 그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자비를 호소한다. 말 그대로 ‘피에타’. 그러나 이 모든 행동이 자비를 구하는 것이지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종종 <피에타>는 감정의 폭탄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장면들은 스스로 주체를 못할 만큼 넘쳐나기도 하고, 자기 스스로 그 감정을 말하지 못하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결국 말하고 만다. 심지어 그 감정들의 개념을 차례로 호명하기까지 한다. 김기덕은 어디에선가 멈출 생각이 없다. 무엇보다도 <피에타>에서 정말 살아 숨 쉬는 대상들은 청계천의 고문도구처럼 매달려 있는 기계들이다. 기계들이 활동하기 시작할 때, 그 기계들이 사람들의 손을 잡아먹을 때, 그 장면들이 갖는 힘은 전적으로 거기서 기름밥을 먹으면서 살아본 사람만이 가져올 수 있는 괴물 같은 실재의 감각이다.


마지막 장면. 자동차는 강도를 매달고 하염없이 새벽길을 달린다. 강도의 몸에서 흐르는 피가 길거리에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 양’을 듣게 된다.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주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주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강도가 죽음으로 회개할 때, 그가 목에 쇠로 만든 목걸이를 매달고 자동차 아래로 기어들어갈 때, 그 모습이 이 영화의 첫 장면의 변주이자 반복이며, 첫 장면에서 죽은 남자의 ‘엄마’의 아들이 되고자 하는 몸짓이며(강도는 ‘진짜’ 아들의 생일을 위해서 준비했던 ‘엄마’의 스웨터를 입는다), 그 몸짓이 마치 이제 막 태어나려는 아이와도 같은 모습이지만, 그 헛된 시도가 죽음으로 끝날 때 강도는 새로운 탄생에서 실패하는 것이며, 그래서 어머니의 품에 예수처럼 죽어서라도 안겨서 다시 한번 살고자 부활을 시도하는 이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그 기나긴 핏자국의 행진을 우리는 고통스럽게 지켜보아야 한다. 자비도 평화도 없는 세상.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나은 세상. 우리는 찬송가만으로 살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이 실패라는 걸 뻔히 알지라도, 어떻게 그걸 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실패라는 긍정. <피에타>는 그걸 알면서도 그걸 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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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한참을 망설인 다음 이 영화를 이야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왜 망설였을까. 무언가 이 영화는 병들었기 때문이다. 병든 영혼과 가짜 육신 사이의 거래. 그 안에서 어떤 일관성도 보증받지 못한 채 정의의 이름으로 신체적 우울증을 치료하려는 폭력적인 힘의 예찬. 아무리 그래봐야 결국 실패할 것이다. 정의는 무능하고, 도덕주의적 분노는 무력하며, 그 사이에서 스펙터클한 투쟁들은 소란스럽긴 하지만 어둠 속에서 냉소적인 대상이 된다. 나는 니체에 관한 수사학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대안도 없이 21세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파괴된 영웅 서사를 음울하게 노래한다.


 영웅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과 괴물이란 누구인가, 는 사실상 같은 질문이다. 이때 둘 사이의 경계가 애매해지기 시작하면 갑자기 세상은 화음을 잃고 우울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말하자면 정의라는 문제와 윤리라는 질문. 크리스토퍼 놀런은 이미 <다크 나이트>에서 우리들과 게임을 벌였다. 배트맨이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해도 비극일 때 우리들은 잔인하지만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할 세 번째 방법을 알고 있다. 이 매트릭스에서 배트맨을 제거하는 것이다. <다크 나이트>는 그 과정이 흥미로운 만큼 엔딩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곤경에 빠진 영화이다. 한참을 망설이고 <인셉션>을 경유해서 ‘놀런 버전’ 배트맨 3부작의 마지막 편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만들었다. 자, 그런 다음 당신들이 원하는 주사위를 던졌다. 물론 이 대답은 누구에게도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핵심은 영웅 신화라는 세상의 방점이 사라졌을 때 당신이 느끼게 되는 공허한 실재를 견딜 수 있느냐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가장 놀라운 재능은 종종 우리들이 개념으로만 다루는 논쟁을 영화 속에서 ‘그것’을 물리적인 대상으로 만든 다음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는 유럽 예술영화들이 종종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이미지와 사운드에 매달려 모호하게 ‘시네마틱’한 센스를 다루면서 오로지 느껴보라고 강요할 때 그것을 창자처럼 꺼내들어 질겁을 하게 만든 다음 우리들의 입에 가시처럼 쳐 넣어서 결국 말을 토해내게 만든다. 워쇼스키 형제가 ‘어찌되었건’ <매트릭스> 3부작을 설명하기 위해서 보드리야르를 끌어들인 다음 하여튼 지젝에게 이 영화에 대해서 말하도록 유혹했던 것처럼 놀런의 배트맨 3부작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전개한 수많은 까다로운 사례집을 끌어들여 시나리오를 썼다는 인상을 받게 만든다. 두 개의 정의. 공리주의적 정의와 자유주의적 정의 사이의 대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느니 모두가 죽어버리는 편이 행복한 것이 아닐까. 놀런은 거기에 또 한 가지 가능성을 덧붙인다. 아냐, 그렇지 않아, 그걸 선택해야 할 사람만 죽으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야. 기괴한 논법의 요설.






▲ “배트맨은 서사적이며 세상을 시적인 감흥으로

이끌어낼 줄 알지만 그의 행위는

세상에 대한 예술적 퍼포먼스에서 멈춘다”


이때 놀런은 이 개념적 논쟁을 눈앞에 어마어마한 스펙터클로 마치 직접적인 ‘생생한 경험’을 부여하듯이 마주치게 만든다. 종종 벽화를 연상시키는 프레임의 구도들. 만일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시각적 흥분에 한정지어서만 말한다면 우리는 왜 놀런이 이 영화를 3D로 찍지 않았는지 끝내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는 기술적으로 놀랍거나 시각적으로 훌륭하지 않다. 만일 그가 IMAX 화면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개념적 경험의 직접적 ‘상연’이라면 어쩌겠는가. 무엇을? 뉴욕에서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의 점령과 그리고 파리 코뮌을! 악당 베인이 주식거래장을 습격할 때 매니저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물어본다. “당신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요, 여기에는 돈이 없어요.” (물론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장면에서 누구라도 2011년 9월17일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월스트리트 주코티 광장에 모인 날을 떠올릴 것이다. 그들은 돈을 구걸하기 위해 여기 모인 것이 아니다. 점령하라! 자본주의를 중단시키자! 우리에게 정의를!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어찌되었건’ 매우 과격하고 때로 혁명적인 첫 번째 포스트 9·17 영화이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혁명을 모욕하지 마세요. 세상을 멈추어야 해요. 브루스 웨인과 섹스를 나눈 다음 (말 그대로) 등에 칼을 찌르는 백만장자 미란다는 ‘좋은 세상’을 믿는다. 그게 오지 않는다면 차라리 모두 죽는 편을 선택하겠어요. 혁명과 전멸의 ‘유치하지만’ 무자비한 변증법. 


좋은 소식. 이 영화의 ‘전 지구적’ 성공은 우리 시대의 대중이 여전히 철학적 논점이나 정치적 쟁점에 대해서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희망적인’ 사실이다. 나쁜 소식. 하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논쟁은 ‘고작해야’ 여기까지이다. 샌델이 자기의 논법을 그리스 소피스트들에게서 빌려온다면 크리스토퍼 놀런은 그리스 비극의 대가들에게서 가져온다. 여기서 함께 끌려들어오는 것은 감상적 영웅주의이다. 이때 물론 작동을 멈추는 것은 정의에 대한 올바른 토론이다. 놀런은 자신의 영화가 철학이 되기 직전에 멈춘다. 배트맨은 매우 서사적이며 종종 세상을 시적인 감흥으로 이끌어낼 줄 알지만 그의 행위는 세상에 대한 예술적 퍼포먼스에서 멈춘다. 영웅의 삶의 양식에 대한 엄숙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자기의 배려. 좋은 세상과 정의 사이에서 도시공동체를 이야기할 때 영웅에게는 자기의 자리가 없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이때 그는 추방되는 대신 스스로 희생이라는 사이비 비극의 흉내를 낸다.


이제 비극이 시작되자 참고문헌은 뒤죽박죽이 된다. 디킨스의 소설, 자코뱅주의 재판. 그런 다음 코뮌과 게토의 이미지를 뒤섞는다. 맙소사. 혁명은 테러가 되고, 배트카를 뒤쫓는 미사일은 9·11을 떠오르게 만든다. 지하 감옥은 신화적이지만 죄수들의 복장은 중동의 테러리스트를 연상시킨다. 그런 다음 온갖 우여곡절의 결과가 고작해야 시민사회를 국가로 되돌려 보낼 때 배트맨은 해피엔딩인 척하는 거의 물신주의적이자 반동적 ‘코스프레’에 지나지 않게 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정말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2011년 뉴욕이 1789년 파리에 느끼는 창백한 두려움을 담고 있다. 결과는 푸념이다. 나쁘거나, 더 나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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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스포일러가 잔뜩 있습니다. 저는 이미 경고했습니다.) 지금 막 도둑질에 성공한 ‘뽀빠이’(이정재)는 경찰에 꼬리를 밟히면서 네 명의 동료 ‘씹던 껌’(김해숙), ‘예니 콜’(전지현), ‘잠파노’(김수현), 그리고 지금 막 출감한 ‘팹시’(김혜수)와 함께 마카오에 간다. 거기서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마카오 박’(김윤석)을 만나 홍콩의 ‘도둑떼’ 첸(임달화), 앤드류(오달수), (위장 잠입한 경찰) 줄리, 조니와 합류한다. 그들은 카지노에서 300억달러의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을 훔쳐서 ‘손등의 나비문신만 보아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홍콩의 위험한 장물아비 웨이 홍에게 팔 생각이다. 물론 잘될 리가 없다.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절반이다.

 

최동훈은 자기가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각자 특별한 기술을 가진 도둑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모여들지만 목적은 서로 다르다. 잘 알려진 공식. 목표와 목적의 불일치. 먼저 힘을 합치고 그런 다음 서로 각자의 이유로 배신을 한다. 질문. 이 간단한 이야기가 왜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일까. 대답. 우선 등장인물이 너무 많다. 무려 10명이나 되는 ‘도둑떼’를 처리해야 한다. 아쉽게도 최동훈은 제일 쉬운 방법을 선택한다. 그는 패를 뒤섞는 대신 쓰고 나면 망설이지 않고 버린다. 일단 홍콩에서 두 명을 죽이고, 두 명은 경찰에 넘긴다. (그런 다음 영화는 그들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하지만 이야기가 홍콩에서 부산으로 넘어오면서 전반부에 없던 웨이 홍이 등장하자 갑자기 영화는 이제까지 자기가 하던 이야기를 잊어버린 것처럼 다른 액션영화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전반부와 후반부 어느 쪽을 더 좋아할지는 각자의 취향이지만 문제는 이 두 개의 이야기를 가까스로 연결하기 위해서 영화가 둘 사이의 공백을 사건에서 찾는 대신 인물들 사이의 과거의 심연 속에서 찾으려고 스스로 플래시백의 재구성으로 빠져들 때 생겨난다.

 

물론 이건 최동훈이 가장 잘하는 방법이다. 그는 사실상 같은 구성을 계속해서 변주하고 있다. 사건 속의 사연의 재구성.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을 찍었을 때 그는 이미 자기의 영화적인 방법을 모두 보여주었다. 그는 사건을 전개하는 쪽보다는 이미 벌어진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 관심이 많다. <도둑들>은 그걸 좀 더 단순하게 만드는 대신 관객과의 두뇌게임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액션의 스펙터클을 가져다놓았다. 뭐랄까, <타짜>를 마카오와 홍콩, 부산을 무대로 <전우치> 버전으로 다시 찍은 느낌이랄까. 이때 <도둑들>은 최동훈의 영화들의 장점과 실패를 고스란히 모두 끌어안은 종합선물처럼 보인다.

 

 

영화 '도둑들'의 스틸컷 ㅣ 출처:경향DB


▲ “<도둑들>에는 두 개의 구조가 있다.
하나는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게임이고,
다른 하나는 인물들 사이의 감정의 연쇄 망이다.”

 

이미 <도둑들>을 본 많은 동료들은 이 영화가 지나치게 자질구레한 에피소드에 사로잡혀서 ‘도둑질’의 플롯이 엉성하고 앙상블이 무너졌으며 게다가 ‘큰 한 방’이 부족하다고 충고한다. 나는 그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태는 정반대이다. 신기하게도 등장인물들 중에서 300억달러나 하는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도둑은 한 명도 없다. 자, 이걸 플롯의 미끼라고 말하는 건 간단하다. 핵심은 이것이 미끼라면 덫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그들은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태양의 눈물’이라는 틀린 선택으로부터 교훈을 배워야 한다. 이때 사랑이 덫이라는 생각을 놓치면 안된다. 만일 도둑들이 실용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오로지 ‘태양의 눈물’을 훔치는 데만 최선을 다했다면 그들 모두는 해피엔딩을 거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게임에 불확실함이 도입된다. 그리고 그 불확실성이 제멋대로 운동하기 시작한다. 예상치 않은 변수의 개입. 물론 그건 그들 사이의 과거이며, 그들 사이의 감정이다.

 

나는 최동훈의 관심이 좀 애매하게 느껴진다. 그때 여기에서 기다리는 해답은 무엇인가. 사실상 이들의 감정은 변수라기보다는 도둑질 속에서 문득 발견한 일종의 ‘인간적인’ 단절이다. <도둑들>에는 두 개의 구조가 있다. 하나는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게임이고, 다른 하나는 인물들 사이의 감정의 연쇄 망이다. 이 둘을 하나로 겹치는 순간 갑자기 두 개의 구조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이때 우리는 실패가 사실상의 성공이라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다이아몬드를 훔치는 데는 실패(할 뻔)했지만 마음을 훔치는 데는 성공한다는 역설. 그러나 최동훈은 이상할 정도로 이들 사이의 심리적 게임을 잘 처리하지 못(하거나 혹은 알지 못)한다. 혹은 외면하려 애쓴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도둑들>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은 첸과 ‘씹던 껌’이 일본인 부부로 위장했다가 진정한 부부애를 느끼면서 첸이 기꺼이 그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씹던 껌’은 그와 함께 죽음의 길에 동반할 때다. 그들 사이의 사랑의 교환이 왜 갑자기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기에는 그들의 죽음이 너무 진지하기 때문에 영화 안에서 이 장면은 몹시 거북해진다. 반대로 이 장면이 ‘예니 콜’을 위해서 스스로 경찰에 체포되는 ‘잠파노’의 행위와 거의 동시에 일어날 때는 너무 순진해서 어리둥절해진다.

 

<도둑들>이 무늬는 케이퍼 장르이고 그 안에서 하이스트 무비의 규칙과 홍콩 느와르를 따르지만 아무리 말을 바꾸어도 등장인물들의 심연의 공백 속에 흐르는 건 감상에 가득 찬 멜로드라마이다. 이게 알려지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은 최동훈이다. 그래서 이들이 부산에서 웨이 홍을 만날 때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해진 심리적 과정을 무턱대고 장대하긴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액션장면과 맞바꿔 친다. 하지만 웨이 홍의 진정한 임무는 결국 무엇인가. 다소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그건 마카오 박과 팹시가 서로 진정한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역설적으로 말하면) ‘죽음의 운명’을 무릅쓰고 부산에 온 것이 아니던가. 자, 여기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요부가 기다리는 하드보일드의 냉소적 낭만주의의 밤이고, 다른 하나는 아내가 기다리는 멜로드라마의 집이다. 최동훈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시간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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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수많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연대기 중의 하나. 1962년 8월 ‘마블 코믹스’에서 편집장 스탠 리의 주도로 연재를 시작한 <스파이더맨>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는 벌써 20년도 넘게 떠돌던 할리우드 뉴스였다. 처음에 거명된 사람은 제임스 캐머런이었다. <터미네이터 2>를 만든 다음 특수효과를 동원해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에 <스파이더맨>은 멋진 아이디어처럼 보였다. 그때는 아직 영화사에서 디지털 특수효과가 막 시작되던 시기였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놀라운 것은 그때 <스파이더맨>은 제임스 캐머런이 3D로 준비했던 프로젝트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제임스 캐머런은 곧 기획을 포기하고 <트루 라이즈>를 만든 다음 <스파이더맨>을 완전히 버렸다. 그 다음은 리들리 스캇과 폴 베호벤이 거명됐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 되지 않았다. 스튜디오 사이에서 시나리오 판권을 둘러싼 긴 법정소송이 이어졌다. 오랫동안 이 기획은 할리우드에서 일종의 저주 받은 통과의례처럼 떠돌았다. 20세기는 거기서 끝났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자 갑자기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할리우드는 코믹스의 주인공들을 차례로 스크린에 초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다시 등장하고(배트맨, 슈퍼맨), 누군가는 두 번이나 실패하고(헐크), 누군가는 마침내 도착했다. 2002년 마침내, 그리고 갑자기 샘 레이미가 첫 번째 <스파이더맨>을 만들었다. 물론 처음 <스파이더맨>이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가장 보고 싶어한 것은 카메라가 약간의 중력을 매달고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면서 상하좌우로 이동하는 공간적 상승과 하강의 새로운 영화적 시청각의 체험이었다. 영화에서 테크놀로지와 시청각적 데이터베이스의 새로운 관계 설정은 21세기 영화의 스펙터클이 됐다. 고전적 아이디어와 새로운 효과의 시청각적 리믹스. <스파이더맨>은 20세기적 영화의 시각적 컨벤션의 관성과 21세기 영화의 특수효과 정보로 과잉하는 스크린 사이에서 그 둘을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정도의 긴장으로 묶어놓은 다음 기묘하게 매달려 있는 영화가 됐다.

 

물론 샘 레이미는 단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스파이더맨>은 영화사상 가장 비싼 틴에이저 무비이다. 그는 이 영화를 ‘아메리칸 틴에이저 판타스틱 로망’의 세계로 안내하는 기묘하고 불안하며 소란스럽고 우울한 데다가 다소 황당할 정도로 과장된 성장과정에서의 어른들에 대한 실망과 실패로 뒤범벅을 만들어놓았다. 물론 그럴 수 있다. 문제는 샘 레이미가 <스파이더맨>의 주인공들과 관객 사이의 유대감을 틴에이저 수준으로 끌어내린 다음 거기서 철학적 토론을 전개한다는 점이다. 주인공 피터 ‘스파이더맨’ 파커가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물을 때 이 존재론적 질문을 영화 안에서 철학적으로 대면하는 대신 샘 레이미는 어떻게 이 질문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지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낸다. 어디서 질문을 중단할 것인가. 왜 이런 알리바이가 중요해진 것일까.

 

 

▲ 자아와 주체를 떼어놓는 ‘스파이더맨’
‘나는 누구인가’ 질문에 빠진 ‘어메이징’
당신은 두 명의 피터 파커 중 누구와 만나고 싶은가

 

나는 ‘마블 코믹스’ 원작 <스파이더맨>이 쿠바 위기사태로 최고조에 이른 냉전시대의 영웅으로 태어난 다음 베트남전을 통과해야만 했던 틴에이저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샘 레이미는 영화 <스파이더맨>을 만들었을 때 다소 창백한 표정으로 9·11 테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새로운 냉전? 아마도 종교적 냉전. 스파이더맨이 뉴욕의 고층건물 사이를 거미줄에 의지해서 날아다닐 때 거기에는 그 빌딩들의 환상적 스크린이 외부의 실재에 의해 언제든지 찢겨져서 침입당한 실재에 의해 추락당할 수 있다는 음울한 불안이 감돌고 있다. 이라크전 시대를 살아가는 틴에이저들의 무작정 허공에 매달리기와 문득 어느 순간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서 피터 ‘스파이더맨’ 파커는 새로운 힘을 얻었다기보다는 일종의 복장도착증 환자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는 불편해보이기 짝이 없는 거미 복장의 ‘쫄쫄이’ 레깅스 코스프레를 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사실상 변신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하여튼 미루어서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가련한 노력처럼 보인다. 세상의 질문으로부터 물러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자유를 얻는 대신 포기해야 하는 그만큼의 나 안의 세상.

 

샘 레이미는 자기 질문과의 불장난에 빠져들었다. 세 편의 <스파이더맨>은 유치하고 우스꽝스럽지만 동시에 다소 무시무시할 정도로 신체를 둘러싸고 자아와 주체 사이를 찢어놓기 시작했다. 변신과 카피는 불안정하게 증식하기 시작했고, 이야기는 거의 질문의 수렁에 빠진 것처럼 불안한 스펙터클이 됐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은 2007년에 자기 자신이 쳐놓은 거미줄에 묶인 채 자기 질문에 잡혀 먹혔다. 컬럼비아 영화사는 이 사태를 멍청하게 구경하고 있지 않았다. 이건 세 편으로 25억달러를 번 시리즈이며, 여긴 할리우드이다.

 

각오하고 밝히는 스포일러.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마치 이제까지 세 편의 <스파이더맨>이 만들어진 적이 없다는 듯이 시침 뚝 떼고 만들어진 영화이다. 마크 웹은 게임 보드를 재설정하듯이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을 원점으로 돌렸다. 따분하게도 시리즈의 팬들께서는 이미 본 이야기를 다시 처음부터 복습해야 한다. 새로워졌다면 3D로 덧칠을 한 수준이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버전 업’되었다기보다는 차라리 ‘재부팅’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간단한 비교.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 맨>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다크 나이트>와 서로 히스테리를 느낄 만큼 가까이 있다면 지금 다시 시작하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은 <트와일라잇>과 같은 고등학교 같은 반 동급생처럼 보인다. 그 차이는 피터 파커를 연기하는 ‘찌질이’ 토비 맥과이어와 ‘미소년’ 앤드루 가필드의 거리만큼 서로 멀리 있다. 우스꽝스럽지만 두 영화 사이의 결정적 차이. 아마도 그래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는 필사적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기 위해 거미 가면을 뒤집어쓰고, 새로운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면을 벗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나르시시즘이 된다. 이번 주말의 선택. 당신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피터 파커와 ‘자뻑’에 찬 피터 파커 중 누구와 데이트를 하고 싶습니까? 물론 그건 당신의 취향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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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작년 새해가 막 시작되었을 때 임상수를 만났다. 다음 영화가 무엇이냐고 묻자 “<하녀(下女)>를 찍었으니 이제 <하남(下男)>을 찍어야지요. 아, 물론 그대로 제목을 할 생각은 없고”라고 대답했다. 일 년 반이 지나서 ‘다음’ 영화 <돈의 맛>을 보게 됐다. <돈의 맛>이 정확하게 <하녀>의 속편은 아니지만 두 편의 영화는 느슨하게 이어져 있다. 영화 속에 동일한 이름을 가진 (<하녀>의) 어린 딸 나미가 어른이 되어서(<돈의 맛>) “집안에서 불에 타 죽은 하녀”를 기억해낸다. 혹은 ‘下男’ 주영작이 머리에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채 폭행을 당할 때 홈 시사실의 커다란 스크린에는 김기영의 <하녀>가 상영되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임상수가 김기영의 <하녀>에 존경을 바치거나 혹은 조롱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는 김기영의 1960년 ‘이후’ 부르주아들의 아들딸들이, 그들의 손자손녀들이 괴물로 자라나서 지금 날뛰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죽어나가는 아들딸들이, 손자손녀들이 그들 발 아래서 다시 한 번 비굴하게 모욕당한다. 끔찍하게,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끔찍하게, 아마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렇게.


 


<돈의 맛>의 주인공은 비서실장 주영작(김강우)이 아니다. 그는 단지 이 집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구경꾼일 뿐이다. <돈의 맛>의 진짜 ‘下男’은 이 집의 실제적인 주인 백금옥 여사(윤여정)의 남편인 윤회장(백윤식)이다. ‘가업을 이어받을’ 두 남매의 아버지이자, 사업상 해야 하는 ‘더러운 비즈니스’의 해결사이며, 빛나는 청춘을 모두 ‘돈의 맛’에 낭비한 다음 인생의 황혼에 온 남자. 그 다음 여기에 ‘필리핀’ 하녀 에바가 있다. 고국에는 남편이 있고, 두 아이가 있으며, 그 아이들을 위해서 또 다른 하녀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세트장처럼 세워진 이 거대한 부르주아 저택에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자 균열이 시작된다. 그러자 갑자기 사랑의 집단적인 도미노가 이어진다. <돈의 맛>은 <하녀>의 ‘남자’ 버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대가족’ 버전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우글거리는 괴물과 벌레들. 그래서 더 커지고 더 웅장해진 이 호화찬란한 저택은 사실상 화장실의 우아한 미장센처럼 반짝거린다. 하지만 그래봐야 여기는 똥을 누는 곳이다. ‘돈의 맛’을 보았으면 똥을 싸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돈과 똥. 임상수도 동의할 것이다. 배설의 세계. 넘쳐나는 포만감. <돈의 맛>은 그 맛을 본 다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똥을 싸는 영화이다. 돈은 이들 모두의 가장 수치스럽고 은밀하고 혐오스러운 것을 드러내고 싸게 만든다. <돈의 맛>이 지나치게 직설적인 설교와 비유 없는 장면들로만 가득 차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임상수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변기에 앉아 있는 지루한 시간. 그런 다음 몸 바깥으로 나온 배설물을 구태여 쳐다볼 때의 낯선 불쾌감. 이 구체적인 행위 앞에서 무슨 은유와 상징이 필요할까. 그래서 <돈의 맛>은 똥을 싸는 대신 그것을 관찰하는 자리에 머물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쓴다.


배설의 ‘갱뱅’이라고 부르고 싶은 <돈의 맛>은 두 가지 다른 판본으로 중단된다. 하나는 희극의 판본이다. 윤회장은 아내 백금옥 여사에게 이별을 선언하고 떠나지만 공항에서 출국 금지를 당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에바의 시체와 마주한다. 유일하게 정말 사랑했던 여자. 윤회장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 그는 자살한다. 그런 다음 관에 누워서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이 집의 파국을 즐긴다. 어쩌면 이 영화 전체에서 유일하게 성공적인 행위로서의 자살. 더 이상 ‘돈의 맛’을 볼 수 없는 절대적 자유의 권리를 얻을 수 있는 ‘돈의 바깥’의 자리.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공포의 판본이 이어진다. 에바는 죽어서 시체가 돼 고향으로 돌아간다. 돈다발 아래 죽어서 누워 있던 에바는 갑자기 눈을 뜬 다음 잡아먹을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무서운 얼굴로 우리를 바라본다. 매장할 수 없는 시체. 남아 있는 부채.



▲ “우글거리는 괴물과 벌레들. 그래서 더 커지고 더 웅장해진 이 호화찬란한 저택은 사실상 화장실의 우아한 미장센처럼 반짝거린다. 하지만 그래봐야 여기는 똥을 누는 곳이다.”


희극과 공포를 번갈아 보여준 다음 영화는 갑자기 망설인다. 웃음과 불안. <돈의 맛>은 멜로드라마가 아니다. 두 구의 시체 사이에 놓인 불균형. <돈의 맛>에는 비극이 없다. 만일 <하녀>가 동화라면 <돈의 맛>은 우화라고 부를 만한 우스꽝스러운 교훈을 주고 싶어 한다. 교훈? 그렇다. 누구에게? 미안하지만 그건 당신이 아니다. 임상수는 이걸 부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여기에는 기묘한 하소연이 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정치경제학적 투쟁의 자리에서 존재론적인 도덕의 반격에로의 환원? 임상수는 대한민국 1%의 부자들을 공격할 마음이 없다. 여기에는 연민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우파의 도덕을 말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거짓 윤리학이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애매하게 끝난다. 주영작과 윤나미는 에바의 관을 들고 필리핀에 있는 그녀의 집까지 찾아간다. 이들은 우리에게 ‘최소한의’ 희망을 주는 것일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주영작은 왜 혼자 ‘행동하지’ 않는가. 이 행동에 왜 반려자가 필요한가. 그 반려자가 왜 ‘주인’의 딸 윤나미인가. 그들은 결국 다시 한 번 백금옥과 윤회장의 결혼을 반복할 것이다. 몸서리쳐지도록 불안한 예감. 부르주아의 휴가에 가까운 여행길. 주영작의 인도주의적 행동을 윤나미는 ‘존중’하고 ‘후원’한 다음 그 둘은 사랑하게 될 것이다. 주인과 ‘下男’ 사이의 계급투쟁이 ‘없는’ 존중. 혁명이 ‘없는’ 후원. 왜 미래의 약속으로서의 ‘최후의 지평’을 현상 유지를 위한 ‘이해의 지평’으로 맞바꿔 쳐야만 하는가? 아마 백금옥과 윤회장도 처음에는 그렇게 만난 다음 사랑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돈의 맛’을 보았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우리를 기다리는 현실의 후일담.


이상한 말이지만 <하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질 것이다. 새로운 ‘하녀’들. 우울한 예언. 나는 <하녀>가 매번 실패작이 되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 아니, <하녀>가 만들어질 수 없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하지만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나라.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알랭 바디우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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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1895년 12월28일 영화가 발명된 다음 언제나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는 영화가 있었다. 아마도 이전의 어떤 다른 예술도 하지 않았던 역할을 영화가 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전쟁을 방문했고, 전쟁은 영화를 전시했다. 그 둘은 다소 비스듬하게 서로에게 기대어서 닮아갔다. 미디어 학자인 폴 비릴리오는 총과 카메라의 유사함에 대해서 지적했다. 둘 모두 목표물을 정한 다음 그 목표물을 자기의 초점 거리 안으로 끌어당겨서 그것을 ‘붙잡는’다. 쟁은 목표물을 공격하는 것이며, 영화는 목표물을 보여주는 것이다. 차이는 전쟁이 실용적이라면 영화는 미학적이다.


 그러나 비유적인 표현이 끝난 다음 전쟁과 영화가 실제의 장소에서 겹치게 되면서 이미지의 공급이 군수품의 공급과 등가물이 되어 군사적 지각의 병참술이라는 현대 전쟁의 새로운 무기 시스템을 만들어내게 됐다. 전략의 이미지. 전쟁의 일부로서의 영화. 그리고 이미지로서의 전략. 영화의 일부로서의 전쟁. (총을) 쏜다와 (영화를) 찍는다는 동사가 영어에서 동일한 단어 ‘shoot’라는 의미심장한 사실이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나라의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에 갔을까? 얼마나 많은 영화가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에 갔을까? 전쟁과 영화, 그리고 국가. 아르마딜로는 아프가니스탄에 자리한 탈레반 진영으로부터 채 1㎞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평화유지군(이라는 이름 아래 파병된) 덴마크 부대의 최전방 기지 중 하나의 이름이다. 그리고 <아르마딜로>는 이 기지에 파병된 덴마크 부대의 병사들을 6개월간 담은 야누스 메츠 페더슨의 다큐멘터리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관한 분석적 성찰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보고 난 다음 이미 알고 있는 이상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관한 그 어떤 새로운 정보를 얻거나 또는 정치적 판단을 수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병사들의 내면의 기록을 담으려고 하지 않는다. 인터뷰가 있지만 이들에게 어떤 고백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목표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은 현대의 전쟁이라는 이미지를 어떻게 지각하는가? <아르마딜로>는 전쟁과 영화 사이에서 우리가 느껴보는 지각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의 어디까지 가까이 다가가 볼 수 있는지를 본다. 오늘날 전쟁의 이미지는 매일처럼 뉴스에 만연되어 있다. 점점 더 우리들은 전쟁의 이미지에 대해서 둔해지고 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전쟁의 이미지는 스펙터클해지고 있다. 아름답게 날아가는 미사일. 압도적인 시각적 이미지의 무기들.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들. 이때 그 스펙터클은 시체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시체의 두 가지 동시적인 고백. 누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 군사적인 힘들 사이의 결과. 메츠 페더슨은 점점 더 희미해지는 지각의 현장에 우리를 데리고 가서 함께 참전의 경험을 더하고 싶어 한다.





▲ “현대의 전쟁 이미지를 지각하는 우리들의 윤리에 대한 질문, 우리는 현대전의 무기가 아니다”





스크린을 보는 당신은 평화유지군과 함께 지금 여기에 있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여러 종류의 다른 카메라가 덴마크 평화유지군과 함께 탈레반의 ‘표적’이 되어서 황량한 벌판에 선다. 이 영화의 촬영을 위해서 메츠 페더슨 감독은 촬영을 한 라스 스크리와 함께 “모든 경험을 함께 나누며 모든 현장에 함께 있을 것이며 모든 위험을 함께한다”는 기사의 맹세를 했다. 대부분의 디지털 극영화들이 채택하고 있는 레드 원 카메라와, 사진 카메라에 가까운 캐논 5D 마크 2, 그리고 병사들의 철모에 장착한 초소형 카메라가 출동 명령을 받으면 함께 전선으로 향한다. 전선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탈레반은 어디 숨어 있으며,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아프가니스탄의 전선은 사방이 열려 있는 황폐한 고원이기 때문이다. <아르마딜로>가 주는 가장 생생한 경험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화면을 찍고 있는 사람이 언제 총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그냥 간단하게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이 이번 전투에서 총에 맞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이 좋은 탓이다. 혹은 누군가 당신을 대신해서 총에 맞았기 때문이다. 지구 맞은편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 신기하고도 기이하리만큼 비윤리적인 방법. 전쟁과 영화 사이의 스크린이라는 안전한 방어선. 


영화의 마지막 순간 논쟁적인 순간과 마주친다. 탈레반과 교전 중인 덴마크군은 개울가에 숨어 있던 탈레반을 사살한다. 정확하게는 수류탄을 던진 다음 달려가서 “4명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총격을 가한다. 그런 다음 상부 보고에 따르면 “가능한 인도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제거”한다. 영화는 덴마크 평화유지군이 탈레반을 사살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메츠 페더슨은 자기와 촬영 스태프들이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병사들의 철모에 달려 있는 소형 마이크로 카메라에는 ‘그 장면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장면은 ‘편집’됐다. 그 대신 개울가의 시체들을 카메라 앞에 전시한 다음 전쟁이 서류에 따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여준다. 병사들은 지금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누군가는 ‘고통스럽게’ 자책하지만 누군가는 ‘즐겁게’ 자랑한다. 영화는 그 지점에서 끝난다. 병사들은 고향으로 귀환한다. 이상한 에필로그. 그들은 다시 전쟁에 돌아가고 싶다고 덧붙인다. 무엇이 그들을 다시 전쟁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일까? 


그 질문은 고스란히 영화를 보는 우리들에게 돌아온다. 우리들은 왜 전쟁의 이미지를 다시, 그리고 또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왜 전쟁은 우리들을 끌어들이는 것일까? 그것은 전쟁을 보는 우리가 전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전략으로서의 관객. 이때 전쟁의 지각을 조직하고, 관리하고, 배분하고, 확산하는 것은 현대전의 일부이다. 우리들은 전염병과도 같은 전쟁의 지각에 저항해야만 한다. <아르마딜로>는 현대의 영화가 동시대의 전쟁을 어떻게 지각하느냐를 보고 싶어 한다. 이때 핵심은 전쟁이라는 이미지를 지각하는 우리들의 윤리에 대한 질문이다. <아르마딜로>는 지각의 윤리학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우리는 현대전의 무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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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나는 남자가 눈물 흘리는 걸 보는 게 좋아요, 진짜예요. 제대로 울 줄 아는 남자가 사내답다고나 할까.” (나는 ‘조금’ 영화 속의 대사를 내 기분에 맞추어 바꾸어 보았다) 지금 막 밥 라펠슨의 <파이브 이지 피시즈>를 보고 나온 다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잭 니컬슨이 우는 모습을 보고 여고생 구라다 마코는 정치적인 주간지 기자 사와다에게 그렇게 말한다. 제대로 울 줄 아는 남자. 사와다는 아직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는 그와 비슷한 말을 한 번 더 듣는다. 사와다가 취재 중인 ‘사이비’ 직업혁명가 우메야마는 <미드나잇 카우보이>에서 맨 마지막 장면 더스틴 호프먼이 존 보이트에게 안겨 우는 장면을 이야기하면서 “그 장면은 너무나 강렬했어요. 무언가를 행동으로 옮길 때 나는 무섭고, 정말 무서워서, 울고 싶었어요”라고 무심코 말한다.


 


1968년 3월11일, 도쿄대는 의과대학의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 12명과 연수생 5명을 퇴학시켰다. 이 처분의 철회를 요구하는 의대생들이 6월15일 도쿄대 야스다 강당을 점거했다. 이틀 후 학교는 기동대를 투입하여 전원을 끌어냈다. 갑자기 이것이 화약고가 됐다. 안보투쟁 중이던 일본 전국학생연맹은 7월2일 다시 야스다 강당을 점거했고, 전공투(全學共鬪會議)의 ‘학원투쟁’이 시작됐다. 총장이 사임했고, 의대 학장이 처분 철회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전공투는 점점 더 강도 높은 요구를 했다. 마침내 이듬해 1월18일 8500명의 기동대가 투입됐고 72시간 동안 헬리콥터와 최루가스를 동원한 진압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원 체포됐다. 이 투쟁을 ‘도쿄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때 야스다 강당의 벽에 남겨진 수많은 낙서 중에는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싸움이 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마이 백 페이지>는 그 ‘이후’부터 시작한다. 폐허와도 같은 야스다 강당. 도쿄대를 졸업하고 정치시사지 기자가 된 사와다는 우연히 선배를 통해서 (전공투에서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이행 중인) 연합적군의 한 계파(라고 믿은) 리더 우메야마를 비밀리에 만난다. 그는 돈을 받고 정보를 팔면서 무장봉기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쟁이는 점점 더 자기 말에 심취해서 결국 자위대에 잠입해서 살인사건을 저지르는 지경에 이른다. 사와다는 취재원 보호라는 명분으로 경찰서에서 진술을 거절하고 신문사를 떠난다. 시간이 흘러 사와다는 영화잡지에 기고하며 조용히 살고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선술집에서 그 옛날 잠입취재차 (거짓으로) 함께 지냈던 옛 친구를 다시 만난다. (그가 여전히 누군지 모르는) 친구는 사와다에게 물어본다. “기자를 하고 싶어 하더니 잘되었어?” 사와다는 잘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갑자기 사와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기 시작한다.


사와다의 눈물은 슬픈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이다. 이것은 후회가 아니라 수치이다. 무엇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가? 자기의 삶에 대해서 부끄러워한다. 그렇다면 사와다의 선택은 잘못된 것인가? 대답은 정반대이다. 그는 자신만을 위한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다. 




▲ “전쟁 방관자의 만회 위한 몸부림

죄책감의 환상을 투영한 실재는 환멸일 뿐

패배를 긍정하는 눈물, 한 시대와 작별인사”


사와다는 역사 앞에서 자기의 자리를 벌기 위해서 자기의 필요를 만족시킨다. 다만 그가 잘못한 것은 그 선택을 너무 늦게 잘못된 삶의 구조 안에서 연기한 것뿐이었다. 그때 희망의 역사는 서 있을 자리가 없었다. 이야기는 다소 장황하다. 사와다는 자신이 ‘도쿄전쟁’을 구경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늘 부끄럽게 생각한다. 전쟁을 구경했다는 죄책감. 어쩌면 그는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구경을 행동으로 만회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이 행동은 결과를 이미 보고 난 다음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아이러니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사와다가 우메야마를 취재하고, 거짓말을 알면서도 그를 보호하고, 그런 다음 희생당했을 때, 그는 자신만의 ‘도쿄전쟁’을 수행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끝난 전쟁. 끝나지 않은 세계의 밤. 그는 자신이 전쟁의 패배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와다가 죄책감의 환상으로부터 행동으로 이행했을 때 마주하는 것은 실재의 환멸이다.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 라고 결심을 하는 순간 그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놓쳤다. 사와다는 역사로부터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환상으로부터 스스로 희생양이 된 것이다. 아아, 자발적인 희생양이라니!


어쩌면 올해 가장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 바로 사와다가 눈물을 흘리는 롱 테이크. 그는 구경꾼의 자리에서 쫓겨나서 거리로 내려왔을 때 비로소 자기가 자신의 환상 속에 지나치게 가까이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야마시타 노부히로가 종종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다소 감상적이긴 하지만 이 눈물은 분명히 명장면이다. 사와다의 눈물은 역사를 마주보지 않기 위해 찡그려서 젖은 채로 희미하게 쳐다보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에 가까운 증상이다. 나는 사와다의 눈물이 ‘제대로 울면서’ 사내다운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건 아쉽게도 이미 죽은 구라다 마코가 판단할 일이다. 다만 그 우는 장면을 카메라가 멈춰 서서 하염없이 길고 길게 보여줄 때 눈물이 한 시대를 향해서 그것이 무엇이건 패배를 예스라고 긍정하면서 마무리하는 작별인사라는 것만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눈물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마이 백 페이지>는 밥 딜런의 네 번째 앨범 <또 다른 밥 딜런>(1964)의 맨 마지막에 실려 있는 노래 제목이다. 4분의 3박자의 이 노래를 포크 그룹 버즈가 4분의 4박자로 편곡해서 다시 불렀다. 영화 <마이 백 페이지>에서는 버즈의 커버 버전을 오쿠다 다미오와 ‘진심’브러더스가 패러디 하듯이 우스꽝스럽게 부른다. 


우스꽝스러운 시대. 바보 같은 희망. 가짜들의 혁명. 그래도 좋은 세상을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들이 살았던 시간. 그러므로 후렴구처럼 반복되면서 “난 지금보다 앞으로 훨씬, 훨씬 더 많이 젊어질 거야”라고 몇 번이고 부를 때는 아무래도 심금을 울린다. 모두가 이 영화를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사람은 ‘사내답게 제대로’ 엉엉 울면서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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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들이 너무 나쁘다. 종종 영화관에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나쁘다. 때로 환호에 이끌려 가보면 거기서 재앙과 마주친다. 그 소란의 와중에서 내가 해야 하는 임무 중의 하나는 당신이 허접한 제목들을 들춰보느라 놓친 영화를 다시 일깨워주는 일이다. 나는 올해 당신이 알렉산더 페인의 <디센던트>(사진)를 놓친다면 후회할 것이라고 충고하고 싶다.

먼저 줄거리. 맷 킹(조지 쿨리니)은 하와이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이다. 그런데 아내가 갑작스러운 보트 사고로 코마상태의 식물인간이 되었다. 의사 말로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단다. ‘이제까지 아내에게 잘 대하지 못한 것이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라고 반성하면서 어린 둘째 딸을 데리고 기숙사의 말 안 듣는 첫째 딸을 만나러 갔다가 어머니와 그동안 불화를 겪고 있던 것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맙소사! 게다가 주변에서는 자기를 빼놓고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맷 킹은 두 딸과 첫째 딸의 남자친구를 동반하고 아내의 남자를 찾아 나선다. 참으로 한심한 여행. 이상한 동반자들.


21세기 미국영화의 새로운 질문. (한마디로) 포스트 아메리칸이란 무엇인가 혹은 ‘포스트 911’ 아메리칸이란 무엇인가라고 자문하기 시작했다. 코엔 형제, 폴 토머스 앤더슨, 데이비스 핀처는 노이로제, 강박증, 히스테리의 삼각형이라고 불릴 만한 매트릭스를 만들어냈다. 알렉산더 페인은 정확하게 그들과 같은 의미에서 미국을 탐구하지만 동시에 정반대의 자리에서 그것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는 영화를 만들면서 마치 미국의 ‘피난처’를 찾아 헤매듯이 여행한다. 네브래스카(<시티즌 루스>), 워싱턴(<일렉션>), 로키산맥(<어바웃 슈미트>), 캘리포니아(<사이드웨이>), 디트로이트와 미시건(TV 시리즈 <헝>), 그리고 이번에는 하와이로 무대를 옮겼다. 마치 로드 무비처럼 매번 떠돌지만 신기하게도 자기 동네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그는 동네를 기웃거리면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하와이는 천국인가? 영화의 첫 대사. “사람들은 여기가 사람 사는 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엿 같은 소리이다.” 왜 아니겠는가. 여기서 알렉산더 페인은 하와이의 독특한 문화를 내세우는 대신 여기도 미국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문제를 앓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일깨운다. 말하자면 미국의 모든 도시는 그 자체로 미국의 환유이자 각자의 증후인 것이다.

영화 '디센던트'의 한 장면 I 출처 : 경향 DB



알렉산더 페인이 여기서 새로운 영화를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 대신 <디센던트>는 현대영화 안에서 고전적인 방법의 우아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를테면 위대한 멜로드라마의 대가 레오 맛캐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1930년대적인 순간들. 부분적으로 오즈의 영화와 같은 텅 빈 쇼트의 명상. 인물들에 관한 정확한 표현, 시작하자마자 마지막 장면까지 거의 멈추지 않는 이야기의 흐름, 행동과 상황 사이를 연결하는 사건, 말하자면 형식의 위상학이 만들어낸 균형, 익살과 유머, 하지만 이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비극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디센던트>를 본 다음 모두들 웃음에 대해 말하면서 코미디를 끌어낸다. 좋은 날씨의 연속된 장면들. 화창한 햇빛. 여긴 하와이다. 아마도 하와이가 이 영화의 슬픔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웃기긴 하지만 그러나 매우 비참하고 가혹한 상황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는 어떻게 비극을 견뎌내는가에 관한 말 그대로의 ‘인간 희극’이 감정선을 타고 흐른다.

알렉산더 페인은 아내의 숨겨진 퍼즐을 풀면서 옛 이웃과 새 이웃의 랑데부의 영화를 만든다. 먼저 안정된 가족의 균형을 깨트린 다음 그것이 어떻게 자리를 되찾는지를 따라간다. <디센던트>의 놀라움은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균형의 기적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것이다. 그때 이 균형은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이 과정을 지나면서 각자의 삶의 깨달음을 한마디씩 꺼내들면서 만들어진다. 그게 굉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 울림은 이상할 정도로 오래 간다. 알렉산더 페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하나씩 점을 찍은 다음 우리들에게 삶의 선을 긋게 이끈다. <디센던트>는 계속해서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영화이다. 물론 그것이 당신을 놀라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이 반전들은 드라마가 아니라 삶의 선택과 관련된 것들이라 당신을 생각하게 만든다.

말 그대로 이 이야기는 살아있는 시체와 함께 하는 여행이다. 코마 상태의 아내는 어떤 변명도 내세울 수 없으며 어떤 알리바이도 없다. 맷 킹에게 남은 것은 아직 어린 두 딸과 이제 곧 결정해야 할 선조들의 유산이다. 이 유산은 하와이에 대한 그의 유일한 끈이다. 미국인이 될 것인가, 하와이안으로 남을 것인가. 거의 희미하게 이어진 두 개의 플롯이 하나로 연결될 때쯤 <디센던트>는 미처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선물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아간다. 말하자면 서로 교환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부등가교환을 성립시키는 고전적 기적. <디센던트>는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교환의 그 무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선물을 주는 사람은 의도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받을 사람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 매개의 네트워크를 알렌산더 페인은 비상할 정도로 여유롭고 한가한 태도로 여행하면서 하나씩 연결해나간다. 포기의 흔적들. 체념의 수용. 하지만 그 선물을 받기 위한 조건. 현대영화가 잃어버린 내기.

하와이가 이따금 이 영화의 줄거리에 개입하는 것은 문득 끼어드는 하늘과 꽃과 바다와 바람과 구름의 인서트들뿐이다. 그런데 이 인서트들은 신기하게도 이 이야기의 균형을 잡아주면서 등장인물들을 인도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당신은 영화가 끝나면 자막에 올라오는 하와이 밴드들의 이름을 적느라 금방 객석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특히 가비 파히누이. 이 영화의 노래들은 훌라춤 배경음악만을 알고 있는 당신의 귀를 번쩍 열게 할 만하다. <디센던트>는 잠시 동안 일을 멈추고 태평양을 바라보면서 당신의 마음을 열고 하와이로 여행하게 이끄는 거절하기 힘든 삶의 위로를 담고 있다. 부디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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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의 오랜 질문 중의 하나. 만일 사운드가 1927년 10월6일 <재즈 싱어>보다 10년만 늦게 도착했다면 세계영화사에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인가? 미학자들은 영화의 시각적 테크닉이 100년은 더 멀리 갔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루돌프 아른하임. 미디어 정치학자들은 영화를 나치가 선전으로 활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탄식했다. 폴 비릴리오. 경제학자들은 영화가 대중으로부터 그만큼 멀리 있었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더글러스 고메리. 많은 영화감독들은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토키영화에 저항했(지만 결국 굴복했)다. 채플린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이었다. 루돌프 발렌티노나 그레타 가르보와 같은 신화적인 스타들은 순식간에 은퇴하거나 잊혀지거나 추락했다.

미셀 아자나비시우스의 <아티스트>는 반동적인 영화이다. 모두들 영화의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홀려서 3D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매달리고 있을 때 이 영화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1.33 스탠더드 사이즈의 흑백 무성영화를 만들었다.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이 영화에는 대사는 있지만 소리가 없고 거의 마지못하다는 듯이 자막이 이따금씩만 나온다. 그 대신 영화에는 우아한 무성영화풍의 오케스트라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흐른다.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눈을 감고 음악만을 감상해도 즐거울 정도이다.


1927년 무성영화의 마지막 해, 혹은 첫 번째 토키영화 <재즈 싱어>가 발표된 해. 무성영화시대의 스타 조지 발렌틴은 어느 날 우연히 팬들에 둘러싸인 자리에서 배우 지망생인 페피 밀러와 부딪친다. 페피는 엑스트라로 조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 때마침 토키영화의 시대가 시작되고 무성영화를 고집하는 조지는 몰락하고 페피는 토키와 함께 승승장구한다. 바닥까지 이르러 자살을 하려는 조지를 구한 페피는 둘이 함께 출연하는 뮤지컬을 준비한다. 물론 해피엔딩.

이 영화가 훌륭한 건 아니지만 보는 사람을 오래간만에 아늑하게 만들어준다. 말하자면 <아티스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진무구한 줄거리와 이미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해피엔딩을 준비하고 그 마지막 장면을 향해 종종 춤을 추듯이,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예정조화의 매트릭스 안에서, 이미 주어진 설정을 메워나가듯이 진행된다. 프랑스 영화감독 미셀 아자나시비우스는 할리우드 영화의 역사에 오마주를 바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제임스 ‘프랑스’ 본드 시리즈를 만든 두 편의 「OSS 117」은 1960년대 영화에 대한 가벼운 농담이다. <아티스트>는 무성영화에 대한 시각적 재치와 따뜻한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다.

주인공 조지 발레틴은 존 길버트와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의 중간쯤 되는 모습으로 등장한 다음 우여곡절을 거쳐 마지막 장면에서는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콤비의 <톱 햇> 한 장면을 촬영하는 것만 같은 현장에서 끝난다. 에른스트 루빗치풍의 로맨스. 프랭크 보저지와 킹 비더에서 가져온 장면들은 종종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특히 <제7의 천국>에서 재닛 게이너가 남자의 옷을 껴안는 장면을 페피(베레니스 베조)가 ‘카피’하는 신은 <아티스트>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아티스트>는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가 워너를 거쳐 MGM영화사가 되는 이야기이다. 물론 줄거리는 <스타 탄생>의 해피엔딩 ‘반전’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 것. <아티스트>를 보기 위해서 당신에게 무성영화시대의 교양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구태여 미학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면 <아티스트>는 일종의 ‘카피’ 영화이다. 이 영화가 줄거리, 미장센, 연기, 세트, 촬영, 심지어 자막에 이르기까지 새롭게 창조해낸 것은 거의 없다. 그냥 이미 만들어진 영화의 클리셰들의 장치에 복종하듯이, 혹은 마치 홀린 듯이 그저 따라갈 뿐이다. 마치 영화의 경험에 대한 자동장치라고나 할까. 단 한순간도 우리를 놀라게 만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럴 의도도 없다. 반전도 없고 부정도 없다. 그저 <아티스트>가 주는 감흥은 그 순진함이 주는 단순함과 함께 영화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우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두께를 갖게 되었다는 신기한 상황이다.

하지만 내게 의문은 남는다. 이 영화의 제목은 <아티스트>이다. 조지 발렌틴은 ‘아티스트’인가? 영화에서 ‘예술가’의 문제는 과거의 전통을 지키려는 자들에게 부여하는 영예인가? <아티스트>는 좋았던 옛것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있다. 그건 알겠다. 그러나 그것과 어떻게 오늘날 함께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올바른 답을 주고 있지 않다. <아티스트>는 영화의 테크놀로지와 대중 사이의 연애를 외면한 ‘아티스트’의 점진적 하강에 대해서 갑자기 천상의 행복을 제시하고 있지만 거기에는 동화와도 같은 조화의 영역을 통과해서만 가능해지는 기적이 끼어든다.

여기서 조화를 부리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또다시 사랑이다. 아뿔싸! 이때 조지의 복귀는 대중의 사랑을 획득한 페피를 경유한 로맨틱한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두 개의 사랑. 덧셈과 뺄셈. 우린 대중의 사랑 없인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예요. 여기에는 어떤 굴복이 숨어 있다. 말하자면 <아티스트>를 보는 내 마음은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기분이다. “이건 ‘아티스트’가 아닙니다”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영화 <아티스트>. 사랑이 채워질 때 예술이 달아나고 있다. <아티스트>가 예술영화인 척 굴고 있지만 이 영화가 결국은 통속극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된다.

미셀 아자나비시우스는 오늘날의 영화가 무성영화의 위대한 예술적 성취 중에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차마 마주볼 용기가 없다. 오히려 대중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더 영화가 충실하게 통속적이 되어야 하는지를 ‘침묵’을 통해서 ‘웅변’적으로 호소하는 영화이다. 무성영화의 위대한 시대는 끝났다. 나는 <아티스트>가 그저 잠시 동안 회고취미에 빠진 도굴꾼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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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 영화감독·평론가

 
다소 따분하지만 사건의 개요, 혹은 ‘영화 속의’ 사실관계. 김명호 전 성균관대학교 수학과 교수는 1995년 1월 본고사에 출제된 수학문제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고, 그에 따른 반사적 불이익으로 승진에서 탈락한 이후 중징계를 받은 데 이어 이듬해 2월 재임용에서 제외됐다. 

이민을 떠났다가 2005년 1월 “재임용이 거부된 교원은 교원소청 심사위원회에 재심청구나 법원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개정된 ‘사립학교법 및 교육공무원법’에 따라 귀국해서 3월 교수 지위 확인 소송을 냈다. 그러나 9월 이 소송은 기각됐고, 2007년 1월에는 항소도 기각됐다. 김명호 전 교수는 1월15일 석궁을 들고 이 항소를 기각한 서울고법 민사 2부 박홍우 부장판사를 직접 찾아갔다. (그리고 아파트 앞에서 석궁의 의도적 발사 여부가 영화의 쟁점이다) <부러진 화살>은 2007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의 다섯 차례 공판을 다루고 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질문과 마주하게 됐다. 두 개의 길. 여기서 더 나갈 것인가, 아니면 멈출 것인가. 이건 그저 영화일 뿐이야, 그러니 영화 이야기에서 멈추자. 아니 그렇지 않아, 이건 사실을 다룬 이야기야. 이 영화에서 다룬 이야기가 정말 전부인 거야?

나는 영화를 위해서 알리바이를 제공할 생각이 없지만 동시에 <부러진 화살>이 영화라는 사실을 부정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영화 <부러진화살>



▲ “땅에 떨어지고 부끄러운 그 무엇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회복’… 영화의 방점은 여기에 찍혀 있다”

영화 <부러진 화살>에 대해서 반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김명호의 주장은 알겠어. 그런데 검찰 측의 주장은 어디로 간 거야? 영화는 검찰이 재판정 맞은편에 서 있기는 하지만 변변한 설명의 기회를 단 한 번도 주지 않는다. 혹은 화살을 쏘지 않았다는 김명호의 말에는 그렇게 귀를 기울이면서 화살을 맞은 박홍우 판사를 만나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화살을 맞은 다음 영화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단지 피 묻은 와이셔츠로만 존재한다. 

말 ‘못하는’ 와이셔츠. <부러진 화살>은 공정하지 않다. 거기 존재한다고 가정된 음모론. 의도적으로 전술적이고 선동적이며 이분법적이고 이미 편을 든 다음 투쟁적이다. 그리고 슬며시 거기에 달콤한 유토피아적인 계기가 있음을 내비친다. 맞다. 이건 정치적인 영화이다. 그걸 왜 부정하겠는가. 그게 뭐 어때서? 이건 영화이다. 야, 이 멍청아, 이건 현실 속의 사건인 걸 잊으면 안돼! 정치라는 셈.

하지만 영화는 점점 김명호를 닮아간다. 아니, 차라리 영화 자체가 김명호를 의인화시킨 것이 아닌 것일까, 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영화의 눈과 귀와 혀를 생각해보라. 의심에 가득 찬 시선. 자동인형처럼 보이는 판사의 지루하리만큼 반복적인 반응. 듣고 싶은 말, 듣기 싫은 이야기 사이의 불균형. 검찰의 대사는 믿을 수 없게 단순하다. 그는 아니요, 와 모르겠습니다, 라는 대사 이외에는 어떤 말도 외울 필요가 없다. 말하자면 바보. 이 영화의 혀는 누구를 위해서만 말하는가. 우리는 매번 변호 대신 추리소설에 가까운 웅변을 듣는다.

이 판결의 공정 여부를 다루는 것은 내 능력 바깥의 일이다. 나는 반대로 <부러진 화살>의 객관적 공정을 다루고 있는 담론들이 이때 이 영화의 주관적 착각의 논점을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부러진 화살>의 방점은 김명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김명호를 변호하는 박준 변호사를 따라가는 데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된다.

박준은 실제로 변론을 맡았던 박훈 변호사가 모델이다. 그는 민주노총 금속연맹 법률센터에서 9년간 상근변호사로 일했다. 2001년 대우차 부평공장 집회 때 인천지법의 판결문을 들고 300명의 해고자 앞에 서서 핸드마이크를 들고 법에 항의하다가 경찰의 물리력 행사 앞에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는 (이 영화와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재현하는 데 영화는 공을 들인다. 정지영은 박홍우 부장판사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지만 박준 변호사에게는 아주 관심이 많다. 영화의 ‘시작’. 박준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정신적 트라우마를 얻게 된 다음 알코올 중독이 될 만큼 고통 받고 있다. 영화의 ‘이야기’. 패배자로 살고 있는 박준은 의뢰인 김명호를 만나고 그와 함께 법정에서 항의를 하고 법과 싸운다. 영화의 ‘끝’. 그 싸움을 통해 자신의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고 마침내 정치적 신념을 되찾게 된다. 영웅의 시련과 극복에 관한 ‘전형적인’ 이야기.

나는 이 얼룩이 이 영화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부러진 화살>은 김명호의 재판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 여기서 겨냥하는 것은 김명호에 대한 구명운동(이미 판결은 났고 2011월 1월24일 만기 출소하였다)이나 명예회복이 아니다. (영화는 감옥에서 끝난다) 그렇다면 정지영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인가? 물론 ‘정치적인 것’의 회복이다. 

경향신문 DB

 

여기서 방점은 회복에 있다. 박준 변호사를 우리와 동일화시킨 다음 정지영은 상처를 끌어안는다. 지금 땅에 떨어진 그 무엇.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것. 우리들의 상실. 그걸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믿는 것. 괄호 속의 그 무엇. 정지영은 패배주의를 극복하자고 하소연한다. 미안하지만 김명호는 박준과 괄호 안의 그 무엇 사이의 매개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우리의 질문은 이 매개의 오류를 지적하는 대신 그 무엇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것이야 한다. 지금 텅 빈 그 무엇의 정치학. 왜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김명호를 그냥 감옥에 내버려두고 끝날까. 

다시 정치의 계절이다. 정지영이 정말 필사적으로 구출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시급한 전투를 하자고 부추기는 영화.

제논의 화살을 잊지 마라. 왜 그 화살은 결국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까. 같은 질문의 다른 판본. 왜 목표는 화살을 피할 수 없을까. 우리는 두 질문의 블랙홀 사이의 간극을 생각해야 한다. 대답이라는 매듭. 왜 영화는 항상 세계와 부조화라는 방식으로 자기의 환상을 실현시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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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얼거렸다. 이 남자들은 미친 게 아닐까? 나는 이 말을 나쁜 의도로 쓴 것이다. <퍼펙트게임>(첫번째 사진)을 본 다음 일주일이 지나 <마이 웨이>(두번째 사진)를 보았다. 나는 의도적으로 영화 제목 앞에 감독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내 관심은 이 남자들이다. 두 편의 영화 속의 세 명, 혹은 네 명의 ‘남자’ 주인공들. 정말 이상하게도 이 두 편의 영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도 같은 주인공(들)을 불러냈다. 아니, 차라리 서로의 주인공을 바꿔 쳐도 서로 다른 시대에서도 이 ‘남자’들은 동일한 믿음을 갖고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동시에 도착한 반복. 누가 이들을 불러낸 것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두 편의 영화. 우선 <퍼펙트게임>. 1987년 5월16일 잠실운동장에서 롯데 최동원(조승우)과 해태 선동열(양동근) 두 투수가 15회까지 가는 4시간54분 내내 승부를 향해서 필사적으로 공을 던진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그 다음 <마이 웨이>. 1938년 경성 마라톤에서 마주친 조선인 준식(장동건)과 일본인 다쓰오(오다기리 조)가 전쟁 한복판에서 만난 다음 노몬한 전쟁터에서 러시아 포로수용소 벌목장을 거쳐 함께 독일군복을 입고 노르망디 해안에서 연합군 상륙을 맞이하게 된다.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노르망디 해안에서 독일군복을 입은 한국인이 연합군에게 포로가 된 사진은 실제이다.

출처 ㅣ 경향신문

 

이 두 편의 영화는 스포츠 영화이다. <퍼펙트게임>은 단도직입적으로 스포츠영화이고, <마이 웨이>는 전쟁의 탈을 뒤집어 쓴 스포츠영화이다. 야구와 마라톤. 하지만 내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두 영화의 기괴한 공통점은 자신의 몸의 가능성에 대해서 황홀하리만큼 스스로 매혹된 남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자기의 육체를 전시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른다. 이때 두 영화 모두 남자들은 사실상 몸의 훈련에 홀린 듯이 빠져든다. 최동원과 선동열은 야구 시합에서 9회를 모두 던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15회를 투수교체 없이 던진)다.

영화는 사실상 이들의 몸을 망쳐버리는 자살에 가까운 행위를 위한 알리바이를 대기 위해서 정신을 내세우기 시작한다. 이때 이 정신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이다(<퍼펙트게임>). 준석은 징집을 당한 몽골의 전쟁터 한복판에서도, 눈 내리는 영하의 러시아 벌목장에서 하루 종일 지옥처럼 일하고 난 다음 어둠 속에서도, 그리고 청각을 잃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노르망디 해안가 벙커 앞에서도 달리기 연습을 멈추지 않는다(<마이 웨이>). 이들에게 스포츠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목적과 목표 사이의 무시무시하리만큼 도착적인 자기최면.

만일 이 과정이 이들의 삶을 숭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설명하면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질문은 이때 이들의 목표는 무엇과 교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그들이 더 많이 희생할수록 얻는 무언가는 무엇인가? 육신의 나르시시즘. 거기서 얻은 남성(들만)의 (배타적인) 우정. 이상할 정도로 두 영화에서 여자들은 거의 끼어들 틈을 발견하지 못한다. 단지 남자들의 몸을 바라보면서 황홀한 눈물을 흘리거나(<퍼펙트게임>) 혹은 여자들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만을 골라서 이동해간다. 혹은 잠깐 동안 주인공을 도와주기 위해서 등장한 다음(중국 저격수 판빙빙) 죽음을 맞이하고 사라진다(<마이 웨이>). 이때 사실상 이들은 자기 자신을 더욱 단련시키고 그들의 육신을 통해서 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맺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그들의 영웅적 역할을 요구받는 명령의 포로들이다.

출처 ㅣ 경향신문

포로들? 그렇다. 이들은 자기 역할에 대한 어처구니없게도 과잉된 요구에 대해서 오로지 예, 라고 긍정할 줄만 알지 아니오, 라고 저항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육체에 대한 자발적인 고문이 아니고 다른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재빨리 돌아오고 있는 이미지는 지치지 않는 불굴의 투쟁을 하는 근육을 지닌 남성의 육체에 대한 압도적 우위이다. 이 육체가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어떤 우회로도 거치지 않고 망설임도 없이 일직선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내 질문은 간단하다.

첫 번째 질문. 자기를 자포자기해버린 주인공의 행위에서 당신은 무엇을 즐기고 계십니까? 내가 끔찍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두 편의 영화가 코미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도 이 우스꽝스러운 행위에 대해서 웃지 못할 것이다. 이 과정에 관한 어떤 반성적 유머도 없이 주인공들이 그들의 행위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때 우리들은 그들의 주변과 함께 이 황당무계한 행위를 둘러싼 정념의 세계에 알리바이를 제공하기 위하여 그들과 동일한 선택을 공유해야 한다. 무슨 선택? 내 육신이 부서져도 상관없어요, 그저 그걸 할 수만 있게 해주세요.

두 번째 질문. 이 남자들은 영웅인가, 광대인가? 이 말의 방점, 남자들. 역사 속의 남자들. 우리들은 그들을 왜 다시 불러냈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미처 치르지 못한 셈의 채무는 무엇인가? 후렴구의 반복. 돌아온 남자들은 영웅인가, 광대인가?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우리들은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영화가 대중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손쉬운 대답이다. 대신 이렇게 반문하고 싶어진다. 왜 이런 이성을 잃은 ‘남자들’이 나와서 스크린 위에서 날뛰도록 내버려 둘 만큼 대중의 방어선이 무너져버렸는가? 생각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이때 전자의 활동이 멈추자 후자가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만일 우리 시대가 생각할 수 있는 것에서 멈추자 반대로 대중영화들은 후자를 내세워 그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시인 예이츠의 충고. 가장 좋은 것은 신념을 결여했고 가장 나쁜 것은 열정으로 충만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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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영화감독·평론가

두 사람의 스필버그가 있다. 한 사람은 B급영화의 감수성으로 어떤 망설임도 없이 거의 자유자재로 오락영화를 만드는 ‘소년’ 스필버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백인 유태계 미국인의 고뇌를 부여안고 쩔쩔매는 ‘환자’ 스필버그이다. 우리는 둘 사이를 지속적으로 오고갔다. <인디아나 존스>를 본 다음 <칼라 퍼플>을 보고, <쥐라기 공원>을 본 다음 <쉰들러 리스트>를 보았다. 둘 사이가 처음 화해를 한 영화는 였고, <우주전쟁>은 존 포드가 웨스턴에서 해낸 것을 스필버그는 SF영화에서 해냈다. 두 편의 의심할 바 없는 걸작. 하지만 그는 재빨리 두 사람의 스필버그로 돌아왔다. <뮌헨>을 만든 다음 다시 <인디아나 존스4,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을 만드는 사이클로 되돌아왔다. 나는 스필버그라는 이름 앞에 서면 다소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이하 <틴틴>·사진)은 물론 B급영화광 스필버그의 영화이다. 1929년 벨기에 신문 ‘소년 20세기’에 연재를 시작한 조르주 ‘에르제’ 레미의 만화 (한국 번역 제목) <땡땡의 모험> 중에서 세 편, <황금집게발 달린 게>(1941), <유니콘호의 비밀>(1943), <라캄의 보물>(1943)을 각색한 이 영화는 또한 스필버그의 첫 번째 3D영화이기도 하다. 

 

소년기자 틴틴은 화이트푸들 강아지 스노위와 함께 우연히 손에 넣은 모형 배 유니콘호에 숨겨놓은 비밀문서를 둘러싼 쫓고 쫓기는 모험에 말려들고 마침내 하독 선장과 사카린의 3대에 걸친 대결에까지 이른다, 라고 쓰긴 했지만 그냥 간단하게 말해서 ‘정신없는’ 엎치락뒤치락 슬랩스틱 모험활극이다. 

이 영화에 관한 세 가지 인상. 첫째, 배우 이름을 외워봐야 별 도움이 안된다. (배우들을 찍어놓고 그걸 다시 컴퓨터 작업한) 퍼포먼스 캡처 기법을 동원한 촬영은 대부분의 인물들을 영화라기보다는 만화의 화질에 더 가깝게 보여준다(나는 애니메이션이라고 쓰지 않았다). 하지만 카메라가 인물에 다가가면 그 섬세함은 영화에 가까워진다. 가장 영화적인 사실감이 느껴지는 순간은 강아지 스노위의 ‘개 털’이 바람에 휘날릴 때이다. 반대로 틴틴은 어떤 표정에서도 제이미 벨의 ‘퍼포먼스’를 ‘캡처’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그냥 만화가 책에서 걸어나와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을 줄 뿐이다. 틴틴과 하독 선장은 몹시 무더운 날씨에 아무리 힘겨운 모험을 해도 땀을 흘리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기묘한 방식으로 만화와 영화가 공존하고 있다. 차라리 스필버그는 여기서 만화와 영화 사이를 오가기 시작하면서 그 어느 쪽에도 멈추지 않는다. 

두 번째, 구태여 비싼 입장료를 내고 3D로 볼 이유가 없다. 스필버그는 여기서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에 어떤 경쟁심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틴틴>의 3D 시차적 포커스는 인물과 소도구들이 화면에서 뛰쳐나온다기보다는 차라리 공간적 깊이감을 갖는 쪽에 더 맞추어져 있다. 

셋째, <틴틴>은 영화라기보다는 여러 매체를 모아놓은 일종의 잡동사니에 가까워 보인다. 어쩌면 이것이 스필버그가 <틴틴>의 원작만화에 충실해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에르제가 자신의 만화로 20세기에 해낸 것을 스필버그는 자신의 영화로 21세기에 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거의 영화 콘티에 가까운 에르제의 만화. 이제까지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게임에 가까운 스필버그의 영화. 이미지의 진화? <틴틴>에서 가장 신나는 장면은 물론 이국적인 도시 바가라에서 틴틴과 하독 선장, 그리고 스노위가 내리막길을 따라 사카린 일당과 자동차 추적을 벌이면서 세 장의 비밀문서를 뺏고 뺏기는 추적 장면이다. 거의 10분 이상을 단 하나의 테이크로 따라가는 이 장면은 기술적으로 놀랍다기보다는 그 화면효과 때문에 어딘가 게임 화면을 보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피할 수 없다. 말하자면 이건 실험적인 시도라기보다는 젊은 세대들에게 익숙한 게임 스크린으로 인도하기 위한 가벼운 제스처처럼 보인다. 

그런 다음 의문. <틴틴>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이 영화에 단 한 명의 중요한 여자 주인공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머니도 없고, 애인도 없고, 딸도 없고, 소녀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남자와 소년들로만 이루어진 거의 완전하리만큼 남자들만의 세계로 이루어진 이 이상한 이야기는 아버지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왜 <틴틴>에는 여자들이 들어올 만한 어떤 틈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 마치 사막 위의 신기루를 본 것처럼 당신의 기억속에서 먼지처럼 사라진다면 그건 여기에 감정의 눈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틴틴>에는 액션이 넘쳐나지만 정감이 삭막하며, 테크놀로지는 놀랍지만 이미지는 어떤 홈도 없는 평면처럼 매끄러워서 나의 시선을 비틀거리게 만든다. 

<틴틴>은 스필버그가 21세기 테크놀로지의 지각을 통해서 새로운 미디어의 감각을 익히는 영화이다. 말 그대로 신세계의 감각. 사실적인 영상과 만화적인 이미지 사이의 불연속성을 어떻게 하나의 화면 안에서 유기적인 매칭 방식으로 묶어낼 것인가. 묘사의 새로운 힘과 스타일의 기계적 운동. 하지만 이 훈련은 무미건조한 사막을 건너는 여행이다. 새로운 학습. 그런데 영화가 영화인 것은 영화가 기계인 것을 그만두었을 때 시작되지 않았던가. 우리는 영화의 죽음을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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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별 이야기도 없으면서 예술영화인 척 허풍을 떠는 영화와 상투적인 이야기에 불과한데도 자기가 예술영화인 줄 아는 영화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어느 쪽에 침을 뱉어야 할까. 나는 올해 칸영화제 황금 종려를 받은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를 본 다음 정확히 한 달이 지난 어제 같은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니컬러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사진)를 보면서 심사위원들의 난처함에 동의할 수 있었다.

 

물론 <트리 오브 라이프>의 이미지들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라면 영화관 대신 차라리 미술관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수없는 제스처들. 손짓의 단편들의 무더기. 그러나 단지 제스처들. 나뭇잎으로 시작해서 뿌리로 내려간 다음 지구의 기원에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 거의 정신분열에 가까운 여행. 그러나 그 여행은 그저 단조로운 풍경의 삽화들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장 보들리야르라면 열광했을지 모른다. 문화의 디그리 제로(零度). 하이퍼 모던의 더빙 판본. 시뮬라크라의 순환. 스펙터클의 황홀경. 그러나 제철이 지나버린 유행. <트리 오브 라이프>는 하루를 미술관에서 한가로이 거닐며 보내기를 주저하는 현대의 피곤한 여피들을 위해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서 고작 2시간18분으로 만족감을 대신하는 안도감이다.

<트리 오브 라이프>가 유럽 아트하우스 영화들처럼 장식을 늘어놓는 동안 <드라이브>는 미국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흉내 낸다. 덴마크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자란 니컬러스 윈딩 레픈은 2004년 첫 번째 영화 <푸셔>를 찍은 다음 먼 길을 돌아서 LA에 막 도착했다. <드라이브>는 그의 8번째 극장용 영화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이름이 분명치 않은 ‘드라이버’는 밤에는 범죄자들을 원하는 장소까지 ‘운반하고’ 돈을 받는다. 범죄에는 가담하지 않으며 대신 5분은 어떤 경우에도 책임진다. 

그리고 낮에는 할리우드영화의 카 체이스 대역 스턴트맨으로 살아간다. 그 다음은 당신이 예상한 대로 뻔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조용하게 살고 있는 그의 아파트 옆방에 한눈에 반할 만큼 예쁜 여자가 어린아이와 살고 있다. 그리고 감옥에서 그의 남편이 출옥한다. 남편은 감옥에서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고, ‘드라이버’는 이 남편의 범죄에 오로지 그 여자 때문에 가담한다. 일은 가장 나쁜 경우의 수에 따라 풀리고, 남편은 현장에서 살해당하고, 돈 가방은 ‘드라이버’의 손에 있으며, 악당들은 끈질기게 가방을 추적한다.

<드라이브>는 <트리 오브 라이프>와 정반대의 아메리카를 보여준다. 세트장처럼 보이는 거리의 풍경. 그리고 페인트 칠 한 피자 가게와 무미건조한 모텔. 감상주의로 가득 찬 일상생활.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과거가 없는 주인공. 뿌리의 상실. 반대로 온갖 사연뿐인 젊은 미모의 여자. 선악을 구별할 수 없는 피비린내 나는 폭력. 그런 다음 사막으로의 정처 없는 여행. 결국 사라짐. 소실점으로의 수렴. 말하자면 1970년대 아메리칸 뉴 시네마 스타일의 올드 패션. 시간은 멈춰 선 것처럼 보이고, 모든 것은 차례로 증발되어 버린다. 종종 이 영화의 고요한 침묵은 비밀스럽다기보다는 할 말이 없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혹은 자기가 유럽영화라는 사실을 들킬까봐 미국영화인 척 시침을 떼는 것은 아닐까. 

“영화가 아메리카를 볼 수 있는 성공적인 방법은
그저 멀리서 보는 것뿐이다
종종 신화적이지만 끝없는 여행으로 이어지는 사막
이 나라에는 그러므로 희망이 없다.”

유럽의 가장 이상한 취향 중의 하나는 아메리카에 대한 끝없는 동경이다. 그들은 유럽에서 미국영화가 되고자 했다. 이를테면 누벨바그. 그리고 셀지오 레오네(와 스파게티 웨스턴). 만일 <드라이브>가 서부극을 흉내 내고 있다면 그건 마치 <세인>을 <황야의 무법자>처럼 각색했기 때문이다. ‘드라이버’가 선악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은 그가 <황야의 무법자>의 ‘이름 없는 남자’의 계보에 속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라이언 고슬링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흉내 내고 있다. 

나는 좀 더 계보를 늘어놓을 수 있다. <드라이브>는 <포인트 블랭크>를 끌어들였고, 여기에 <택시 드라이버>를 더했다. 트래비스와 ‘드라이버’는 단지 그들이 뉴욕과 LA에서 서로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사건을 만났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일한 선택을 한다. 자기를 파멸시키는 자발적인 행동. 그런 다음 <드라이브>는 장 피에르 멜빌의 ‘고독한’ <사무라이>를 따라간다. 두 영화의 차이는 파리와 LA라는 것뿐이다. 하드보일드 웨스턴 누아르. 한마디로 아메리카.

니컬러스 윈딩 레픈은 내게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아니에요, 이 영화는 동화예요. 나는 중세의 기사와 같은 주인공을 원했어요. 위기에 빠진 공주를 구하러 오는 그런 이야기. 종종 ‘드라이버’가 입고 다니는 전갈무늬의 흰색 잠바는 갑옷처럼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이 젊은 여자가 공주가 아니라 ‘드라이버’를 완전히 파국으로 쳐넣는 ‘팜므 파탈’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게다가 이 여자는 자기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도 못한다. 순정으로 넘쳐나는 멜로드라마.

나는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 아메리카는 예술의 중력을 견딜 만한 영토인가, 라는 질문을 무심코 던졌다. 테렌스 맬릭과 니컬러스 윈딩 레픈은 정반대의 자리에서 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런 질문을 하지 말아주세요, 이건 그저 신기루일 뿐이에요. 영화가 그 표면을 찍을 때에는 성공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아메리카를 볼 수 있는 성공적인 방법은 그저 멀리서 보는 것뿐이다. 꿈결 같은 통속성. 종종 신화적이지만 끝없는 여행으로 이어지는 사막. 이 나라에는 그러므로 희망이 없다. 장 보들리야르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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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6일 목요일 송일곤 감독의 <오직 그대만>을 개막작으로 부산국제영화가 시작된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그 전날 비가 온 다음 부산은 맑은 후 흐림이라고 한다. 물론 해안가 날씨란 변덕스러워서 지금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올해에는 ‘영화의 전당’ 야외무대가 처음 선을 보이는 해라서 날씨를 걱정할 이유가 별로 없다. 먼발치에서 본 ‘야외의 전당’은 물 위로 올라온 커다란 고래처럼 보였다. 

프랑스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영화제에 간다는 것은 시네필들에겐 마치 수도원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유했다. 이를테면 칸영화제에서 첫 회는 아침 8시반에 시작한다(부산영화제는 대부분 10시 혹은 11시에 시작한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모두들 일제히 새벽에 일어난다. 그런 다음 세수를 하고 극장 앞으로 달려간다. 간다고 해서 모두 보는 것은 아니다. 좌석 수만큼 순서대로 입장한다. 프레스카드가 있다 할지라도 종종 내 눈앞에서 매정하게 ‘매진’이라는 팻말을 내건 다음 문이 닫히기도 한다. 이 상황은 하루 종일 반복된다. 그렇게 새벽 1시에 마지막 영화가 상영을 시작한다. 그날 하루가 끝나면 모두들 숙소로 돌아가 다시 내일 볼 영화의 목록을 짠 다음 서둘러 잠자리에 든다. 내일 아침부터 다시 줄서기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정해진 시간표. 매일 매회 새로운 영화의 목록. 지구상에서 처음 상영하는 영화들. 가끔 의견을 나누지만 대부분 지금 막 보고 나온 영화에 대해서 각자 자기가 본 것만을 믿으며 평가를 내려야만 한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그날 상영된 영화만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온 사람들은 마치 이것이 생활규칙이라도 되는 것처럼 따른다. 칸이라는 도시가 휴양지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은 기분이 좋다. 눈앞에는 지중해 바닷가가 펼쳐져 있고 계절은 오월이다.러나 사람들은 마치 수련이라도 하듯이 그런 날씨와 풍경을 외면하고 어두컴컴한 영화관에 들어가서 불편한 의자에 앉아 꽉 들어찬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본다. 이 스케줄은 누구라도 일주일이 지나면 체력적으로 힘들어진다는 걸 느낀다. 그러나 거의 극기 훈련을 하듯이 극장으로 향한다. 마치 속세를 벗어나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자발적으로 하는 수행의 시간.

당신이 부산에 살지 않는다면 기차나 고속버스 혹은 비행기를 타고 부산까지 갈 것이다. 가능하다면 나는 기차를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영화는 기차와 함께 태어났기 때문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역으로 들어오는 열차>. 이때 이 여행은 어딘지 비장한 구석이 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지내면서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일 년에 한 번 영화를 보기 위해 한 장소로 모여든다. 이들 사이에는 아무 공통점도 없다. 단지 한 가지 영화라는 공통의 기쁨만이 유일하다. 여기서 일시적으로 시장의 규칙이 중단되고 영화를 함께 방어하는 우정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섰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치 전선으로 향하는 듯한 여행. 

그러나 당신뿐만 아니라 영화도 여행을 한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한 장소로 몰려들듯이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서 영화들이 한 장소로 찾아온다. 당신보다 훨씬 먼 곳에서(월드 시네마, 아시아 영화의 창), 때로는 다른 시간으로부터(회고전 프로그램들) 오로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방문. 이때 모든 영화는 각자의 세계를 담고 있는 하나의 생명이자 정보의 미학이며 기억의 방법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한 마디로 모든 영화는 각자가 하나의 세계 그 자체다. 그러므로 영화제는 세계(들)를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이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 이 극장에서 저 극장으로 옮겨갈 때 우리들은 세상의 가능성 사이를 여행하는 것이다. 이곳과 저곳. 이 영화와 저 영화, 그리고 영화를 보는 여기. 

상승하는 힘. 하강하는 운동.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영화제는 장사꾼들(제작자, 투자자, 배급업자)의 복마전이며, 정부 관료들과 지역 정치인들이 얼굴 도장을 찍는 위선적인 제스처의 경연장이며, 영화제 직업 전문가들 사이의 정보교환의 흥정 테이블이며, 영화저널의 손쉬운 아이템이며 등등. 그러나 동시에 여기가 시네필들이 우정을 나누는 곳이며, 짧지만 공동체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이며, 거의 고립된 채 자기 작업을 해 온 예술가들에게 그들의 고독을 위로하고 용기를 일깨우고 손뼉을 치면서 새로운 미학을 경험하고 새로운 이름(과 제목)을 만나면서 어쩌면 가장 먼저 영화의 미래를 만나는 약속의 땅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한낮 정오 영화제의 광장에 서서 그림자도 잃어버린 채 같은 시간에 상영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때, 당신만의 시간표를 짜고 있을 때, 영화와 영화들 사이를 연결시키기 위한 선을 그으려 들 때 사실상 그건 당신만의 영화제를 제작하는 행동이며, 새로운 세상을 긍정하는 결단이다. 나는 당신이 어떤 별자리를 짤지 알 수 없다. 혹은 관여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길을 잃으면 안 된다. 넘쳐나는 정보들. 종종 잘못된 추천. 헷갈리게 만드는 소문들. 극장 앞에서의 망설임. 마치 셰익스피어적인 질문.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영화제에 온 나의 존재론적인 질문. 그때 결단만이 나를 증명할 것이다. 

그냥 한마디로 영화제에는 왜 가는가라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발견. 그리고 발견. 거기서의 쇼크와 배움. 오로지 그것만이 나를 흥분시키고 긴장시킨다. 그러니 부디 내게 올해 부산 국제영화제에 가서 무슨 영화를 볼 것인지 묻지 말라. 그것은 당신의 권리이며, 당신의 운명이며, 당신의 취향이며, 당신의 세계관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졌다고 해서 더 좋은 영화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보석을 보고 난 다음에도 욕을 하면서 나올지 모른다. 당신의 안목에 대해서 감탄을 할지, 아니면 당신의 우매함을 자책해야 할지 그것도 당신의 몫이다.

나는 나의 명단을 들고 나만의 여행을 위한 가이드를 세울 것이다. 만일 영화제에서 우리가 같은 극장에서 같은 영화를 보고 있다면 우리들은 단지 같은 취향을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같은 세상을 꿈꾸면서 같은 우주의 리듬 안으로 들어와서 같은 운명을 나누는 중인 것이다. 흘러가는 세상 속의 시간의 한 순간. 같은 장소. 같은 선택. 이보다 더한 운명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그날 거기서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우리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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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열두 번째 영화 <북촌방향>을 보았다. 그냥 한마디로 이 영화는 괴상한 영화이다. <북촌방향>은 그의 네 번째 디지털 영화이자, 두 번째 흑백영화이다. 많은 사람은 홍상수의 영화가 매우 단순하고 단지 배우들의 역할이 바뀔 뿐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나는 그걸 증명할 수 있다.
첫째, 열한 번째 영화 <옥희의 영화>와 <북촌방향>은 단지 서울을 무대로 겨울에 촬영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두 영화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다. 둘째, <북촌방향>이 얼마나 이상한 이야기인지는 이 영화를 본 다음 줄거리를 써보면 안다. 그건 당신이 요령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홍상수는 촬영이 시작된 다음 매일 아침 그날의 날씨를 느끼면서 시나리오를 쓴다. 즉흥연주로 이어지는 라이브 녹음을 악보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먼저 (무리하게 요약한) 이 영화의 줄거리. 네 번째 영화를 찍은 다음 거의 영화를 만들지 못하면서 대구에 있는 대학교 영화과에서 강의를 하며 살고 있는 영화감독 성준(유준상)은 며칠 동안 서울을 방문한다(세상 속에 던져진 내기). 그는 선배(김상중)를 만난 다음 내려갈 생각이다. 이혼을 하고 혼자 사는 선배는 아끼는 후배(송선미)를 데리고 나온다(말하자면 함정). 세 사람은 어울려서 한밤중에 북촌 골목 구석에 자리 잡은 술집 ‘소설’에 가서 술을 마신다(뻔하다고? 천만의 말씀!). 이 술집의 젊은 여주인(김보경)은 매번 가게를 비워두고 손님보다 늦게 출근한다(여기서부터 이야기는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성준은 마침 안주가 떨어져서 사러 나가는 여주인을 따라 나선 다음 돌아오는 한적한 길에서 키스를 한다(새로운 계열의 시작). 물론 그 사이에 계속해서 이야기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사람들이 끼어든다(무한정한 분산, 사라진 중심). 성준은 전에 알던 여배우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세 번이나 마주친다(접선들). 예전에 성준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김의성)도 술자리에 슬그머니 끼어든다(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교집합). 이야기는 점점 불어나고 인물들은 각자의 선율로 자기의 삶의 박자에 따라 자신의 말과 육신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불규칙한 리듬. 카오스 안의 구조. 그 속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카탈로그.


그 다음. 홍상수 자신의 <북촌방향>에 대한 이상한 설명. “처음 생각한 것은 ‘어떤 남자가 어떤 장소를 세 번 찾아간다’였습니다. 북촌 근처를 가끔 가면 매번 가는 곳에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했던 게 맘에 걸리게 된 것이고 그게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뜨문뜨문 찾아지는 반복점들을 연결지으며 생활을 다시 그려보는 작업을 했지만 아예 통으로 반복되는 일상의 상황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보아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따로 발견될 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하루들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서로 상관없는 ‘첫날’ 같은 그런 하루들이 만들어졌고 그 하루들 사이를 과거의 여인과 그 여인을 닮은 여인의 충돌이란 평이한 축이 어떤 안정대를 만들면서 관통하는 그런 물건이 되었습니다….”(CinDi 영화제 프로그램 북에 홍상수 자신이 쓴 소개의 글)

부디 줄거리와 설명을 다시 한번만 반복해서 읽어주시길. 이 둘은 서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아니, 그 둘을 하나로 묶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그런데도 홍상수는 둘 사이를 겹쳐놓는다. 이때 줄거리와 설명 사이에서 마술을 창조하는 것은 두 개의 활동이 만들어내는 능력들 사이의 힘이다. 장소와 계절. ‘북촌과 겨울.’ 이때 방점은 ‘과’에 있다. 방향을 잃은 거리는 스산하고 북촌 골목은 거미줄처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칭칭 동여매기 시작한다.
거미들의 활동. 낮은 짧고 금방 두꺼운 겨울밤이 시작될 것이다. 박쥐들의 이야기. 한밤중에 활동하는 박쥐들이 보내는 사랑의 초음파들. 날씨는 춥고 바람은 몸을 웅크리게 만들며 눈은 종종 기적처럼 제 시간에 도착한 편지처럼 한밤중에 혹은 대낮에 아니면 새벽에 시도때도 없이 내린다. 하지만 아무도 그 편지에 적혀 있는 사연을 읽지는 못할 것이다. 도대체 거기에 무엇을 쓴 것일까.
홍상수 영화의 가장 이상한 효과는 당신이 영화를 읽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당신을 읽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 장면에서 당신은 자신만의 잃어버린 시간의 사랑의 얼룩을 발견하고 몸서리칠 것이다. 당신이라는 목적지. (아무도) 볼 수 없는 것만이 (누군가) 볼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두 개의 내기. 두 개의 괄호 중 당신의 자리는 어디인가.

자리를 알 수 없다는 말. 착시, 환영, 꿈, 기억의 또 다른 내기. 유령들의 시간. <북촌방향>을 본 다음 당신은 웃지 못할 것이다. ‘귀신들린 집’에 관한 이야기인 이 영화는 계속해서 다시 시작하고 또 시작한다. 영화는 홀린 듯이 밤이 찾아오면 그 술집에 가고 또 간다. 하필이면 그 술집의 이름은 ‘소설’이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되풀이. 다시 반복하기. 아무리 읽어도 같은 페이지를 다시 읽는 것만 같은 기분.
잠깐만. 기분? 그렇다. 이 정확하지 않은 상태가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매번 돌연한 각성을 일깨운다. 한 번 더, 다시 한 번 더. 성준은 자꾸만 제자리에서 맴돈다. 출구라고 착각한 입구. 아니, 입구만 존재하는 장소. 우리는 매번 영화의 첫 장면을 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차이. 보충하기. 무엇을? 매번의 의미를.
하지만 우리가 맨 마지막 장면을 맨 처음 본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홍상수의 웃음소리. 어디 한번 의미를 찾아보세요. 우리는 술래잡기의 명수와 함께 북촌의 골목을 그림자로 얼룩진 한밤중에, 혹은 그림자 없는 정오의 대낮에 의미를 찾아 헐레벌떡 돌아다닐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당신의 그림자이다. 이미 오래전에 현자들은 의미란 자신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문득 돌아본 북촌 골목어귀 저기에 누군가 막 들어서고 있다. <북촌방향>의 영어 제목은 <그가 도착하던 날(The day he arrives)>이다. 성준은 영원히 북촌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어제 도착했고, 오늘 도착했으며, 내일도 도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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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우리는 지금 세계와 나 사이의 ‘잃어버린’ 연결 고리를찾고 싶다는 상실감의 회복을 간절하게 시도하고 있다.나는 ‘아리랑’이 우리 시대에 진정성의 반격을 알리는 희생양이라고 한숨 쉬듯이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당신을 당황시킬 생각이 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진정성이라는 말을 꺼내들 생각이다. 진정성이라고?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설마! 아마도 당신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이 말이 유행이 지나갔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게다가 이 말은 정의하기가 매우 까다롭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진정성이라는 말은 오늘날 예술에서 조롱거리이거나 이따금 상대방을 비웃을 때만 사용될 뿐이다. 진정성에 대한 냉소주의는 지식인들 카페에서 종종 마주치는 잘난 체하는 에스프레소만큼이나 만연되어 있다. ‘진짜’ 세계라는 따위는 없어요. 그저 잉여가치의 신기루가 있을 뿐이지요. 이때 우리들이 열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이긴 하지만 우리 시대보다 더 진정성의 체험을 열망했던 때가 있었을까?


김기덕의 <아리랑>을 뒤늦게 보았다. 만일 당신에게 이 영화를 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영화에 대해 쏟아진 모든 쓸데없는 소문을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다. 칸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본 다음 쓴 대부분의 기사는 소설이거나 혹은 두세 개의 장면만을 인용한 다음 할 수 있는 대로 과장해서 만들어낸 스캔들이다.
물론 몇몇 장면에서 김기덕은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구체적으로 자기가 공격하려는 상대에게 비난을 한다. 그 상대가 영화배급사인 쇼 박스이며, <고지전>을 연출한 장훈 감독(과 프로듀서 송명철)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장면은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저 잠깐 지나쳐가는 대목에 불과하다.

오히려 <아리랑>을 보면서 당황하는 것은 과도할 정도로 솔직해서 처음에는 우스꽝스럽다가 그게 점점 무시무시해져가는 지경에 이르는 이 영화의 태도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까지 이웃의 비밀을 알아도 괜찮은 것일까? <아리랑>은 김기덕 자신이 연출하고, (오로지 그 자신만) 출연하고, 직접 촬영하고, 그런 다음 (아마도 노트북으로) 편집했다.
말하자면 완전한 원 맨 밴드영화. 그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장소로 자기의 거취를 옮겼고, 그곳에 집을 지은 다음, 지난 겨울을 보냈다. 그 집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집이 아니다. 내가 방문한 그 집에는 그저 지붕과 벽이 있을 뿐이었다. 가까스로 세워진 집. 몹시도 추웠던 지난 겨울을 떠올려보라. 김기덕은 집 안에 텐트를 친 다음 거기서 마치 수도를 하듯이 겨울을 견뎌냈다. 물은 얼어붙었고 난로에는 쉴 사이 없이 땔감을 넣어야 했다. 그는 이따금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동네에 내려갔으며, 그런 다음 재빨리 차를 끌고 다시 자기 집으로 되돌아왔다. 사방에 보이는 것은 세상에 대해 방어선처럼 쌓인 눈밖에 없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기 스스로를 벌주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김기덕은 카메라를 세워 놓은 다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영화의 상상선을 이용해서 마치 두 명의 김기덕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찍었다. 나는 이것을 편의상 김기덕 1과 김기덕 2라고 부르겠다. 김기덕 1이 김기덕 2를 꾸짖는 동안 김기덕 2는 김기덕 1에게 변명을 하고 하소연을 한다. 어둠이 내려앉고 방안의 불빛은 마치 등불처럼 희미해 보였다. 차라리 불빛은 종종 일렁이면서 김기덕의 얼굴을 갉아먹는 것처럼 보이기조차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밤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진다. 탄식. 호소. 한숨. 슬픔. 자책. 침침한 불빛 아래 김기덕이 눈물을 흘릴 때 나는 마치 그의 얼굴에 두 개의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쇼크를 받았다. 그런 다음 다시 이 장면을 모니터 화면에 올려놓고 김기덕 3이 물끄러미 쳐다본다. 김기덕은 계속해서 그 위에 겹쳐놓고 또 겹쳐진다. 그림자들의 술래잡기.

<아리랑>은 장식이 없는 영화이다. 구조도 거의 허물어져 가고 있으며, 별달리 형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어떤 은유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이 영화가 그 무엇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김기덕은 그저 고통스럽게 지금 여기 내가 있다, 라고 말하고 싶어 할 뿐이다. 여기 내가 있다는 말. 절실한 말. 존재하고 싶어요. 종종 이 장면들은 고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자백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이다.

이때 김기덕의 태도는 우리들의 난처한 두 가지 입장, 난 그걸 잘 알고 있지만 그러므로 (그걸 하지는 않을 거야) 라는 근대적 주인공과 난 그걸 잘 알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걸 할 거야), 라는 전통적인 영웅 모두와 전혀 다른 태도이다. <아리랑>은 난 그걸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 그걸 하는 거야, 라고 우리들에게 맞받아치는 중이다. 그걸 정의내리면서 슬라보예 지젝은 엄연한 윤리적 명령을 따르는 비극적 의식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나는 서투르게 이 제스처를 규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 대신 <아리랑>을 본 다음 나는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감정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그건 말 그대로 어떤 느낌이었다. 그걸 분석하려 들면 금방 깨져버릴 것처럼 약하고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 담겨 있는 감정은 더 없이 정직하고, 투명하며, 솔직하고,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아리랑>이 분석을 거절하는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 진정성은 개념이 아니라 느낌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세계와 나 사이의 ‘잃어버린’ 연결 고리를 찾고 싶다는 상실감의 회복을 간절하게 시도하고 있다. 물론 그건 하면 할수록 공허해지는 불가능한 몸짓이다. 정말 우리는 그걸 가져본 적이 있기는 한 것일까?
김기덕의 <아리랑>은 물론, 이라고 대답하는 영화이다.
시종일관 그는 그저 외상적 마주침에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자신의 육체를 우리 앞에 전시할 뿐이다. 악어 같은 당신들에게 내 몸을 맡길게요. 이때 외부의 적과 싸우는 척하면서 김기덕은 사실상 수없는 자기 자신들(의 실체들)과 맹렬하게 싸우는 중이다. 영화는 자살로 끝난다. 나는 <아리랑>이 우리 시대에 진정성의 반격을 알리는 희생양이라고 한숨 쉬듯이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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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