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단 두 세 마디로 규정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삶은 크고 작은 모순들로 가득차 있다.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는 사람부터, 끝내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 찍힌 사람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타인의 모순을 잘 참아내지 못한다. 왜 일관되지 않으냐고 타박한다. 상대의 굴곡으로부터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삶은 자연스레 단 두 세 마디 인상비평의 소재가 되기를 거듭한다. 나쁜 놈이거나, 착한 놈이거나.

 

누군가의 삶을 소재로 하는 영화는 그래서 일정 수준의 완성도를 담보하기 어렵다. 필요 이상의 주관이 개입되어 실제 역사의 사실관계와는 별 관련이 없는 픽션이 되기 쉽다. 사실 어려운 일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제대로 조명한다면 이야기는 뒤죽박죽이 되고 캐릭터는 일관되지 않으며 흐름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전기영화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태도란 다음의 질문에 스스로 명확한 비전을 갖추는 것일 테다. 그의 눈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를 관찰할 것인가. 요컨대 주인공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를 얼마나 가깝게, 혹은 멀리 둘 것이냐의 문제 말이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성격의 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을 감안할 때 올리버 스톤의 <닉슨>은 보기 드물게 공정하고 사려 깊은 전기영화라 할 만하다. 올리버 스톤의 가장 근사한 영화를 꼽으라고 한다면 몇 가지가 거론될 수 있다. 그것은 <플래툰>일 수도 있고 <7월4일생>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JFK>라고 대답할 테다. 그러나 내게는 <닉슨>이야말로 올리버 스톤의 독보적인 걸작이다.

 

사실 <닉슨>은 <JFK>에 비해 평가절하되기 쉬운 영화다. <JFK>는 케네디라는 대중의 오래된 결핍을 보상하는 영화였다. 반면 <닉슨>은 리처드 닉슨 이야기다. 리처드 닉슨. 미국 역사상 가장 실패한 대통령. 부패와 거짓말의 상징. 수많은 텍스트에서 인용되는 악의 화신. 영화가 공개되었던 1995년 당시 대중은 이 작품에 그리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닉슨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켜 미화하고 있다는 비판여론도 많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인간 닉슨을 미화하지 않는다. 한 인간의 영혼이 왜, 어떻게 망가져갔는지, 그의 모순을 가능케 한 끊임없는 자기 합리화가 어떤 맥락에서 작동했던 것인지에 대해 멋대로 판단하거나 비평하지 않고 묵묵히, 끈기있게 관찰하고 드러낼 뿐이다.

 


영화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민주당 전국위원회 도청 사건. 처음에는 별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이미 닉슨의 재선은 거의 확실한 상태였다. 민주당의 맥거번 후보에 비해 무려 19퍼센트나 앞서고 있었다. 백악관의 어느 누구도 이 사건에 자신들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닉슨은 워터게이트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무난히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미 모두 알고 있듯,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영화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침몰해가는 닉슨의 모습을 조명한다. 동시에 그의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 시절과 정치입문, 반미활동위원회에서의 반공운동, 아이젠하워 정권에서의 부통령 시절,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에게 불과 10만~40만표 차이로 패배한 후 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케네디의 지원을 받는 민주당 후보에게 참패하면서 정계은퇴를 선언하게 되는 등의 에피소드들이 반복적으로 오고 간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고스란히 드러나는 건 리처드 닉슨이라는 인간의 불안한 영혼이다. 그는 어느 누구도 믿지 못했다. 그에게 진정한 의미의 친구는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닉슨은 하버드 입학 허가를 받아놓고도 돈이 없어 가지 못했다. 훗날 하필 케네디라는 최대의 정적을 만난다. 명문가 출신의 케네디는 성적이 좋지 않았음에도 하버드를 나왔다. 바로 그 케네디에게 간발의 차이로 졌다. TV토론 때문이었다. 케네디의 수려한 외모와 비교되는, 끊임없이 흘려대는 땀과 웅얼거리는 말투로 인해 그는 언론과 민주당으로부터 조롱과 모욕을 당한다. 이로써 그는 평생 ‘아이비리그 출신 부잣집 도련님들’, 그리고 언론에 대한 혐오와 망상에 가까운 피해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이 피해의식은 그를 말 그대로 황폐하게 망가뜨린다.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리고 정적을 감시하고 도청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이 영화의 압권은 마지막 대목이다. 한밤중이다. 닉슨은 국회의 대통령 탄핵을 목전에 두고 결국 사임을 결심한다. 그는 술에 취해 무릎 꿇고 기도하며 흐느낀다. 왜 여기까지 와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돌이키고 싶지만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그 자신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을 추스른 닉슨은 백악관의 어둡고 드넓은 홀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케네디의 초상화 앞에 당도한다. 닉슨이 나지막이 내뱉는다. “사람들은 당신에게서 이상향을 보는데, 내게서는 그들 자신을 보는군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다. 반면 실패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의 이야기는 보기 드물다. 타인의 불행과 실패를 그저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뿐, 정작 전염될까봐 사유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성공담이 제공해줄 수 있는 건 잠시 동안의 쾌감과 환상뿐이다.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고 혹시 모를 성장의 기회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경청해야 하는 것은 성공담이 아니라 굴복하고 실패한 이들의 이야기다.

 

 

허지웅 | 영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

ㆍ‘노인을 위한…’처럼 무력감을 이야기하는 ‘카운슬러’

 

“당신이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헤매고 있는 그 세상은, 애초 그 실수가 행해진 세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카운슬러>는 냉엄한 영화다. 리들리 스콧은 코맥 매카시의 각본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국내에 이미 출간되어 있는 코맥 매카시의 카운슬러 시나리오와 이 영화가 주는 감흥의 잔재는 놀랍도록 유사하다.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될 본인의 영화를 이토록 완전한 ‘타자’처럼 다룰 수 있는 감독도 드물 것이다.

 

이 영화는 마지막 페이지에 가까워질수록 씨줄과 날줄이 드러나듯 사연과 정체가 선명해지는 종류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이 영화는 언뜻 서로 별다른 관련이 없는 길고 지루한 대화 시퀀스들이 성기게 모여 있는 결과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말에 이르는 정확한 사연도 동기도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여지가 협소하다.

 

그렇다. <카운슬러>는 친절하지 않은 영화다. 이유가 있다. 이 이야기를 고안해낸 사람들이 단 한 가지 사유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에만 주력하기 때문이다. <카운슬러>는 본연의 질문에만 충실한 일종의 우화다. 그 외의 디테일은 완전히 배제된다. 중요하지 않거나 알 필요가 없다는 식이다. 전통적인 전개 방식에 익숙한 관객들은 어색하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카운슬러>라는 제목의 이 우화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단 한 가지 사유란, 바로 무력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완전무결한 의미로써의 무력감이다. 분하다거나 아깝다거나 다음번에는 잘해봐야겠다는 여지를 느낄 수 있는 종류의 무력감이 아니다. 그것의 크기도 질감도 성격도, 도무지 어떤 식으로도 가늠하거나 파악할 수 없는 말 그대로의 무력감이다. <카운슬러>가 보여주는 무력감은 그 앞에서 열패감을 드러낼 소박한 사치마저 앗아가버린다.

 

<카운슬러>는 여러 방면에서 작가의 대표작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유사한 지점을 드러낸다. 잠시 그 영화를 떠올려보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사실 명쾌한 영화다. 이 영화는 감당할 수 없는 폭력을 마주한 노인의 뿌리 깊은 한숨을 위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거꾸로 그런 폭력을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인의 비관을 비난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단지 노인의 지혜로움이라는 것이 결코 세상을 다스릴 수 없음을 조용히 관조해내는 영화다.

 

모든 노인이 지혜로운 건 아니지만, 시간의 녹을 먹은 노인들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울 수 있는 자들임이 틀림없다. 마침내 세계의 원리에 가깝게 가 닿았지만, 결코 그것을 감당해낼 수 없는 노인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늘 은퇴뿐이다. 이 세계에 시간의 개념이 생기고 역사가 기록된 이래 꾸준히 되풀이돼온 노인의 비극이다.

 

시공간을 통틀어 그 어디에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보안관의 마지막 꿈 이야기가 바로 그 반복의 메커니즘을 친절하게 은유한다. 이 원칙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극 종반, 절대악 안톤 시거의 무력한 표정은, 그 역시 언젠가 모든 걸 알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하고 말 것이라는 울림을 가져온다. 그렇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세상이 늘 어리석고 파괴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혜로운 노인이 늘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원리를, 그 모든 아비규환과 폭력과 살인과 슬픔이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까닭을, 끝내 설명해내고야 만다.

 

 

영화 <카운슬러>의 한 장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앞선 자들의 무력감’에 대해 관조하고 있다면, <카운슬러>는 ‘다가올 파국을 앞둔 우리들의 무력감’에 대해 다루는 영화다. <카운슬러>는 누군가 자신이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상에 발을 들이밀고 잘못된 선택을 감행했을 때, 그 결과가 어찌 되었든 원래 자신이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찾기 어렵다는 게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매 순간 선택과 동시에 내가 사는 ‘세상’이 탄생되고 있으며, 그러므로 지금의 이 지옥은 빠져나갈 길이 따로 존재하는 이계가 아닌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이다.

 

<카운슬러>의 우화적인 감각은 주인공에게 이름을 주지 않고 ‘카운슬러’라는 직업으로 호명함으로써 그의 실수와 실패를 개인적인 사건 안에 가둬두지 않는다는 데서 빛을 발한다.

 

대개 우화의 목적이 그렇듯, <카운슬러>의 이야기 또한 ‘우리’가 대입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주인공이 범하고 있는 실수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우리들도 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 물욕이든 자만이든 욕정이든 어떤 단어를 가져다 붙여도 무방하다. 작가는 바로 그런 개인들의 선택과 거기서 파생된 ‘세상들’이 겹치고 쌓여 결코 대비하거나 예상할 수 없는 공공의 파국, 요컨대 이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대학살’이 코앞에 닥쳤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앞에 우리는 철저하게 무력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 두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가장 마지막 장면이다. 보안관의 꿈 이야기는 앞서 살아간 아버지들의 무력감이 자신에게 반복되고 있으며 그것이 세상의 어쩔 수 없는 원리임을 설명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와 닮은꼴이되, 그보다 더 순수한 악 그 자체로써의 익명성이 강화된 <카운슬러>의 말키나가 “다가올 대학살은 우리 상상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곧바로 급작스레 이야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암전이 이어졌을 때 우리는 전율할 수밖에 없다. 대학살이 가까워 왔다.

 

 허지웅 | 영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

인간은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조금씩 죽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로잡힐 과거는 늘어간다. 후회를 남기지 않는 죽음 따위는 근사한 문장 안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지막 순간, 인간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멀찌감치 초과해버린 과거의 무게에 눌려 버둥거리며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스꽝스럽지도 비장하지도 않은 그냥 인류, 라고 부를 만한 광경이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주변을 책임질 일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책임을 진다는 건 말처럼 그리 고상한 일이 아니다. 더럽고 치사한 일이다. 내 소신이 아니라 남의 소신을 지켜주어야 하는 일이다. 나이 오십에 누군가는 백가지를 책임져야 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열가지를 책임지고 있을 테다. 그러나 그것은 각자 짊어질 깜냥이 되는 과거의 무게 차이일 뿐 절대량으로 우위를 따질 일은 아니다. 아름답게 나이 먹을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다. 결국 매순간 과거를 떠올리며 조금씩 죽어가는 길을 피해가기란 요원한 노릇이다. 피할 길을 찾을 수 없다면 짊어지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책임지지도 짊어지지도 않겠다며 뭐랄까 인류, 라는 단어를 내팽개쳐버리는 사람들이다. 현대사회라는 것이 운명공동체이다보니 평범한 어른이 된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나잇값만이라도 해주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지” 같은 말을 떠벌이는 걸 지켜보는 일은 곤욕스럽다.

 

후루야 미노루의 작품세계는 늘 이와 같은 화두를 관통해왔다. 그의 초기작이자 출세작인 <이나중 탁구부>는 막무가내의 화장실 개그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조차 정수는 어른들의 세계를 향한 막연한 동경과 현실과의 괴리, 그리고 소년들의 왁자지껄한 난장 이후에 찾아오는 덧없음에 있었다.

 

초창기 후루야 미노루 작품의 주인공들은 대개 무책임한 어른들의 영향 아래 놓여있으되 자기 힘으로 삶을 일구어내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곤 했다. 나아가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하고, 그렇다면 좋은 어른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되었다. <크레이지 군단>은 <이나중 탁구부>에서 <그린힐>에 이르는 초기 3부작 가운데 그러한 메시지를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낸 역작이었다. 주인공 형제가 아저씨에게 두들겨 맞고 실컷 눈물을 쏟은 다음 얼른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음 발걸음을 재촉하는 <크레이지 군단>의 마지막 한 컷은 영화 <그래비티>에서 지구 위를 두 다리로 버티고 일어선 샌드라 불럭의 마지막 장면과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어두워졌다’고 평가되는 중기 이후의 작품들에서 이와 같은 화두는 더욱 본격화된다. <두더지>에서 <시가테라> <심해어> <낮비>에 이르기까지, 후루야 미노루의 주인공들은 더 나은 인간, 공동체에 필요한 사람, 최소한 평범한 어른, 아니 평범한 어른이라는 이상향을 향해 골몰한다. 혹자들은 후루야 미노루의 근작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한 남자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진 여자에게 구제되는 이야기의 동어반복이라고 비판한다. 확실히 그런 혐의가 있다. 다만 후루야 미노루가 방점을 찍는 건 그녀에게 구제되는 그, 가 아니다. 이것은 주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책임을 지는 행동의 필요성을 깨달으면서 스스로를 구제하는 나, 의 이야기다.

 

소노 시온의 <두더지>는 후루야 미노루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원작의 주인공은 평범한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소년이다. 그러나 이미 그럴 수 없을 것이라, 실패한 인생이라 생각하고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인간을 찾아 함께 죽고자 여정을 떠난다. 여정은 실패로 돌아가고 소년은 돌아온다.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 “어른이 된다는 건 주변을 책임질 일이 늘어간다는 것”

 

소노 시온이 <두더지>를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도대체 얼마나 어두운 영화가 나올지 지레 겁부터 먹었다. 소노 시온은 후루야 미노루와 닮은 구석이 많은 당대의 작가다. 후루야 미노루에게서 웃음기를 아예 제거해버리고 피와 배설물을 한 바가지 끼얹으면 소노 시온이 될 것이다. 소노 시온은 <자살 클럽>부터 <기묘한 서커스> <노리코의 식탁>에 이르는 초기작에서 “당신은 당신과 얼마나 관계 맺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반복하며 가정의 붕괴와 책임의식의 부재에 관해 지속적으로 다루어왔다. 그에게 <두더지>는 너무 어울려서 어쩌면 서로 어울리지 말았어야 할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2011년 3월11일, 대지진이 일어났다. 소노 시온은 이미 써두었던 <두더지>의 영화 시나리오를 폐기했다. 그리고 대지진 이후의 폐허를 배경으로 원작 <두더지>의 비전을 새롭게 펼쳐냈다. 원작과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는 결말에서 드러난다. 소노 시온은 주인공에게 절룩대고 비틀거리더라도 살아남아 버틸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대지진의 여파로 상처받은 자국민을 향한 메시지였다.


놀랍게도 원작 <두더지>의 컨텍스트는 영화 <두더지>의 방향전환에 의해 더욱 강력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두더지>의 주인공은 평범한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평범한 어른으로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일원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자신이 너무 치명적인 과오를 저질렀다고 생각해 괴로워한다.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나 그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평범한 어른이란, 바로 그런 과오들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책임이다. 그것을 짊어지지 않고 도망가려는 자들 때문에 상처받았던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다른 선택을 했어야 했다. 그 선택이 영화 <두더지>에서 평행우주처럼 갈라져 재생된다. 서두를 반복하자면, 인간은 그러니까 어차피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조금씩 죽는 것이다. 그 과거의 크기에 두려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좌절하지도 말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짊어질 수 있는 꼭 그 만큼씩을 가지고 살아나가면, 그것이 평범한 어른이다.

 

후루야 미노루의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인생을 리셋할 수 있는 버튼 이야기다. 그런 게 있다면 누를 거냐는 질문이다. 그는 우리 삶에 인생을 리셋하는 버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역설한다. 아무튼 산다는 건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는 일과 비슷한 것이다. 떼어내어 다시 붙이려다가는 못쓰게 된다. 먼지가 들어갔으면 들어간 대로, 기포가 남았으면 남은 대로 결과물을 인내하고 상기할 수밖에 없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일까. 아니 요즘 유행하는 혁신이라는 단어를 가져와보자. 모방은 혁신의 어쩔 수 없는 그림자일까.

 

최근 삼성은 다시 한번 특허 침해 소송에 휘말렸다. 이번에는 애플이 아니었다. 다이슨이었다. 다이슨은 삼성의 신제품 ‘모션싱크’가 자사의 기술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청소기가 방향을 전환할 때 재빨리 회전할 수 있게 해주는 다이슨의 기술을 삼성이 가져다 썼다는 것이다. 이에 삼성은 적극 대응할 것이라 밝혔다.


사실 후발 주자가 이미 그 영역에 있어서 일종의 생태계를 창조해낸 선두 주자를 모방하는 건 거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경쟁은 고사하고 시장에 진입조차 할 수 없다. 물론 스스로 이미 글로벌 일류 기업이라고 주장하고 또 그에 어울리는 지위를 누리면서 정작 실무에 있어 여전히 과거의 행태를 답습하고 있는 쪽이라면 법으로 어찌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허세’나 ‘양아치’라는 욕을 먹는 걸 억울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노조도 산재도 인정하지 않는 또 하나의 가족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무튼 이 방면에 있어서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는 이미 유명한 대화록을 남긴 바 있다. 목격자와 당사자의 증언에 따라 그것이 전화 통화였는지, 혹은 주차장에서 벌어진 것인지 말이 나뉘지만 내용에는 별반 큰 차이가 없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널 망가뜨려버리겠어, 너는 매킨토시를 베꼈어!” “애초에 너도 제록스에서 베낀 거잖아!”

 

최근 애시턴 커처가 스티브 잡스를 연기한 영화 <잡스>가 개봉한 바 있다. 잡스를 흡사 기인처럼 살다 떠난 신세기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처럼 다룬 이 영화에 대해선 사실 별 할 말이 없다. 짧게 언급한다면, <잡스>는 영화라는 매체가 누군가의 인생 혹은 그 일부분을 소재 삼을 때 하지 말아야 할 모든 종류의 실책을 꼼꼼하게 하나하나 남김없이 범하고 있는 망작이라 할 만하다. 이 영화는 스티브 잡스를 신화가 아닌 모범적인 실수의 교과서로서, 그래서 더욱 기억하고 사색할 수 있는 사건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람을 한데 모아 있는 힘껏 구겨놓고선 마침내 먼지가 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을 때까지 맨발로 짓밟아대는 작품이다. 거리를 떨어뜨려 객관화시켜야 할 대상을 콘서트 무대에 올리고 싶어 하는 카메라의 시선에선 어떤 종류의 성찰도 발견할 수 없다. 스티브 잡스의 인생 중 가장 굴곡진 십수년을 소재로 삼은 영화 가운데 (아직 에런 소킨의 스티브 잡스 영화가 등장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을 꼽는다면 역시 마틴 버크의 TV영화 <실리콘밸리의 해적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이 영화는 실리콘밸리의 총을 들지 않은 날강도들-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이 어떻게 기회를 잡고 모방으로 혁신을 이루어냈는가에 대한 흥미롭고 유쾌한 리포트다. 이 영화는 사실상 스티브 잡스에 의해 인증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실리콘밸리의 해적들>은 1999년 맥월드 엑스포에서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됐다. 이날 프레젠테이션은 스티브 잡스가 하기로 되어 있었다. 스티브 잡스와 그의 신제품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무대 위에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명이 꺼지더니 어떤 영화의 프리미어 영상이 상영되었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의 악연을 다룬, 바로 <실리콘밸리의 해적들>이었다. 사람들은 손뼉을 치고 좋아했다.

 

 

영화 <잡스>의 한 장면.

 

▲ 모방 통한 혁신은, 같이 먹고 살 수 있는 생태계 만들어야

 

영상이 끝나고 장내 불이 들어오자 익숙한 차림의 남자가 무대에 나타났다. 검은 터틀넥 상의에 청바지를 입은 그는, 그러나 잡스가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 잡스를 연기한 배우 노아 와일이었다. 그가 잡스의 흉내를 내기 시작하자 웃음과 환호 소리로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그때 무대 오른쪽에서 진짜 스티브 잡스가 나타나 외쳤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 내가 언제 그렇게 했어!” 와일은 “당신 아직도 총각은 아니죠?”라는 말을 남기고 박수를 받으며 퇴장했다.

 

나는 에런 소킨이 <소셜 네트워크>를 쓰는 데 있어서 <실리콘밸리의 해적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수혈받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다. 대표적인 IT영웅들이 등장한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여기에는 탄생 비화와 인간관계, 이를테면 배신, 그리고 특히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이야기가 주요하게 다루어진다. 영화의 만듦새는 꽤 인상적이다. 스티브 잡스가 역사적인 1984년의 매킨토시 광고를 소개하는 대목으로부터 시작해, 1997년 바로 그 자리에서 마이크로소프트에 항복하는, 아니 동맹을 선언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 이 영화는 근사한 캐스팅과 경쾌한 편집, 모나지 않은 흐름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역시 잡스와 게이츠가 서로 퍼붓는 장면이다. 잡스는 게이츠가 매킨토시의 운영체계를 그대로 베껴 윈도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한다.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그 대화록이 여기서도 등장한다. “넌 매킨토시를 베꼈어!” “너도 베낀 거잖아!” 잡스는 할 말을 잃는다. 게이츠는 자리를 떠난다. 맞다. 잡스는 마우스로 작동하는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의 아이디어를 제록스에서 훔쳐왔었다. 그리고 그것을 빌 게이츠가 다시 훔쳤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혁신은 오리지널리티가 아닌 일종의 미감과 순발력으로부터 발휘되는 것인지 모른다. 요는 서드 파티 혹은 개발자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같이 어울려 먹고살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광고 문구마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유행가 후렴구처럼 ‘혁신’을 가져다 붙이는 한국의 대기업들이 그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

지난 6월 이 지면에 <천안함 프로젝트>에 대한 국방부의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다.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 첫번째, “표현의 자유를 인정한다”고 할 때 그것은 ‘표현’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닌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두번째, 표현의 자유 문제에 있어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는 가처분 신청은 그것이 한국의 정치사회환경 안에서 각 진영의 편의에 따라 매번 검열수단으로 악용되어왔기 때문에 위험하다. 세번째, 불편하고 부당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표현의 자유 자체를 억압할 수는 없다.


 

다행히 법원은 <천안함 프로젝트>에 대한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정식 개봉일 하루 전이었다. 재판부는 “영화의 제작과 상영은 원칙적으로 헌법상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장된다”면서 “영화는 천안함 사고 원인을 놓고 국민이 제기하는 의혹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제작된 점에 비춰 볼 때 허위의 사실을 적시했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법체계라는 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흐릿한 인상과는 달리 공백과 부조리 위에 세워진 누각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결정이다. 사법당국을 향한 시민들의 막연한 불신과 혐오는 이런 식의 판결들이 누적되고 알려짐으로써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사달은 법정이 아닌 시장에서 벌어졌다.


메가박스가 <천안함 프로젝트>의 상영을 돌연 중단시켰다. 관객이 극장을 가장 많이 찾는 주말을 앞두고 개봉 이틀 만에 상영 중단이 통보된 것이다.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와 같은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 가운데 <천안함 프로젝트>를 상영 중인 곳은 메가박스뿐이었다. 메가박스는 공지를 통해 “일부 단체의 강한 항의 및 시위에 대한 예고로 인해 관람객 간 현장 충돌이 예상돼 일반관객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배급사와의 협의하에 상영을 취소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영화인들은 아무래도 윗선이 개입된 결정이 아닌가, 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개봉 이틀 동안 다양성 부문 박스오피스 1위를 할 만큼 반응이 좋은 영화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상영중단 결정을 내린 것이 이해되지 않으며, 일부 단체의 항의 및 시위를 운운한 것은 핑계가 아니겠냐는 분위기다. <천안함 프로젝트>의 제작자인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의 정지영 감독은 일제강점기 영화검열에 사용됐던 임검석을 언급하며 “현대판 임검석의 부활”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 포스터



▲ 영화가 불편한지 아닌지는 극장 아닌 관객이 판단할 문제


몇 가지 쟁점이 있다. 메가박스는 배급사와 협의를 통했다고 했고, 배급사는 통보받았다고 했다. 메가박스는 일부 단체의 강한 항의 및 시위에 대한 예고를 이유로 들었는데, 그 일부 단체들의 구체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더불어 그 ‘강한 항의 및 시위에 대한 예고’가 어디서 어떻게, 무슨 내용으로 이루어졌는지 또한 공개하지 않았다.


대개 하나의 거래가 파투날 때 갑은 ‘협의’에 따른 것으로, 을은 ‘통보’ 받은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쟁점은 넘어가도록 하자. 진짜 문제는 메가박스가 상영중단을 결정한 경위의 사실관계에 있다. 요즘 시국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어느 보수단체들이 극장을 습격해 관객과 몸싸움을 벌이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극장 측의 근심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동네 극장도 아닌 대형 멀티플렉스 체인이 이미 상영이 시작된 영화의 상영중단을 고려하고 실행할 정도로 ‘강한 항의 및 시위에 대한 예고’가 있었다면, 그것은 이미 항의와 예고가 아닌 사실상의 테러 협박이다. 그렇다면 메가박스는 배급사에 상영중단을 통보할 것이 아니라 우선 당국에 수사를 의뢰한 후 해당 단체가 어디인지 밝혔어야 한다. 단지 극장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한 무더기의 글타래들을 가지고 메가박스가 상영중단을 결정했다고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다.


메가박스의 불성실한 설명이 더욱 문제가 되는 건, 그와 같은 태도가 영화인들의 과잉 대응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정지영 감독이 무려 “현대판 임검석의 부활”이라고 언급했듯이 많은 수의 영화인들이 이번 일을 정치적 의사가 개입된 사실상의 검열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번주부터 본격적인 이슈 파이팅에 돌입할 기세다.


메가박스의 결정에 실제 정치적 의사가 개입된 것인지, 혹은 지레 겁을 먹고 바보 같은 일을 벌인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정확한 근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모두 정황에 불과하다. 여기서 온전한 사실관계는 메가박스가 사안에 걸맞은 무게감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상영중단을 결정했다는 점뿐이다. 메가박스의 결정이 아무리 실체를 가진 사실에 근거하고 있더라도, 이런 식의 태도로는 과잉대응이나 음모론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건 지독한 소모전이 될 것이다. 잠시 <천안함 프로젝트>의 소재를 떠올려보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언론시사회 <연합뉴스>


애초 CGV와 롯데시네마는 ‘영화가 불편해서’ <천안함 프로젝트>를 상영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다. 만약 이 영화가 당시의 음모론을 그저 복기하고 MB정부를 규탄하는 것에 머무는 수준이라면 나는 정치적 소재를 다루는 한국영화의 안일한 경향과 그 퇴행에 대해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그 영화가 불편한지 아닌지는 극장이 아니라 관객이 판단할 문제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불편하고 부당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표현의 자유 자체를 억압할 수는 없다. 하물며 가처분신청이라는 전가의 보도마저 비켜나간 마당에, 시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참담한 심정이다.



허지웅 | 영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

여기 세 가지 장면이 있다. <설국열차>가 우리 세계에 관한 어떤 가능성, 나아가 명백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비전은 이 세 가지 장면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설국열차>가 단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혁명 서사를 지루하고 게으르게 답습한다고 투덜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해석은 언제나 개별의 몫이다. 그러나 적어도 <설국열차>라는 본연의 이야기가 닿고자 하는 종착역은 그보다 훨씬 멀리 서 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장면을 짚어보는 작업을 통해 우리는 <설국열차>라는 모험이 과연 제시될 만한 비전인지 혹은 그저 서투른 선문답에 불과한지 다시 한 번 가늠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첫 번째 장면은 예카테리나 다리 시퀀스다. 정확히는 해피 뉴 이어 대목이다. 커티스의 꼬리칸 무리와 윌포드의 복면 부대가 혈투를 벌이던 도중 열차가 예카테리나 다리에 당도한다. 열차가 예카테리나 다리에 도착했다는 선언이 들려오자 모두가 자동적으로 싸움을 멈춘다. 복면 부대는 경쾌하게 새해를 카운트한다. 꼬리칸 무리는 새해가 왔음을 실감하며 주춤거린다.

 


세계대전 와중에도 크리스마스나 새해만큼은 암묵적으로 휴전했던 인류의 전사를 떠오르게 만드는 유머다. 그러나 <설국열차>의 세계관 안에서 이 장면은 색다른 의미를 갖는다. 지구가 공전하듯 윌포드의 열차는 지구 위의 궤도를 회전한다. 지구가 태양을 두고 한 바퀴 돌 때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듯 윌포드의 열차가 예카테리나 다리 위에 닿으면 새해가 선언된다.



즉, 윌포드의 열차는 ‘인류’인 동시에 그 자체로 ‘지구’이며 ‘시간’이고 ‘세계’다. 예카테리나 해피 뉴 이어 장면에서 우리는 두 집단 사이에 최소한의 규칙과 관습이 느슨하게나마 공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쪽은 지배하는 자들이다. 다른 한 쪽은 지배당하는 자들이다. 한 쪽은 현상을 유지하려는 자들이고, 다른 한 쪽은 못살겠으니 바꿔보자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쪽이나 저쪽이나 이 세계의 질서와 체계를 존속시키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 대목은 꼬리칸과 머리칸이 미시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 같지만 거시적으로 어떻게 공모하고 있었는지 드러나는 후반부 서술에 관한 복선이다.



두 번째 장면은 커티스가 윌포드에게 설득당하고 있던 중 열차 바닥 밑의 좁고 작은 공간에서 어린 아이를 발견하는 대목이다. 윌포드는 커티스를 설득하는데 성공하고 있던 중이다. 커티스는 꼬리칸의 지도자였던 길리엄이 사실 밤마다 핫라인으로 윌포드와 통화하며 열차, 즉 이 ‘세계’를 존속시키기 위해 공모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더불어 윌포드로부터 자신의 뒤를 이어 열차의 엔진을 관리하는 후계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받는다. 커티스는 그의 요청에 흐느낌으로 응답한다. 그러나 요나가 뛰어 들어와 바닥을 들어내고 그 안에서 티미를 발견하는 순간, 커티스는 더 이상 두고 볼 것 없다는 듯 결심을 내린다.



영화 <설국열차> 포스터. _ CJ엔터테인먼트 제공


▲ 열차는 폭력적 세계의 축소판이나, 탈출의 가능성을 말한다



<설국열차>의 세계관이 조지 오웰의 <1984>로부터 많은 부분을 수혜받았음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해석이다. 사실 <1984> 이후의 어느 디스토피아 텍스트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겠는가.



<1984>에서 주인공의 조국인 오세아니아는 유라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선전한다. 실제로 날마다 폭탄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그러나 사실 거기 진짜 전쟁은 없다.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결속이 필요하다. 결속을 위해서는 공포가 요구된다. 오세아니아는 유라시아와 공모해 실제 존재하지 않는 위기를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그 자신의 세계를 존속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열차라는 세계의 존속을 위해 윌포드와 공모하고 있던 길리엄을 연기하는 배우가 존 허트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존 허트는 <1984>의 영화 버전에서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를 연기한 바 있다. 그는 또한 역설적이지만 길리엄 캐릭터의 연장선상에서 당연하게도(사실 지금 <설국열차>를 느슨하고 나이브한 혁명 서사라고 폄훼하는 시선들이 정작 향해야 마땅한) <브이 포 벤데타>에서 유사 빅브러더 캐릭터인 챈슬러 셔틀러를 연기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길리엄이라는 이름은 <1984>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 <브라질>의 감독 테리 길리엄을 즉각적으로 연상시킨다.



사실 이 공모의 혐의는 인류 역사이기도 하다. 지키려는 집단과 바꾸려는 집단.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귀족과 부르주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정규직과 비정규직.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투쟁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투쟁과 역전의 대목마다 인류의 세계는 다시 한 번 존속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왔다. 커티스가 윌포드의 말에 솔깃했던 건 당연한 일이다. 그가 윌포드의 뒤를 잇는 것으로 이 혁명은 완수될 수 있다. 커티스가 운영할 미래의 열차는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커티스는 이 세계의 주도권을 누가 손에 쥐든, 누가 나름의 정의를 주장하고 어떤 종류의 공평함이 실현되든, 실은 은밀하게도 그리고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완전무결하게 착취하지 않고서는 기능하거나 존속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게 바로 이 장면이다. 커티스는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선택을 한다. 그는 열차를, 이 세계를 파괴하기로 결정한다. 기존 체제의 유지 혹은 역전이 아닌, 체제 자체를 포기하는 순간이란 어떻게 찾아오는가. <설국열차>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장면은 폭발이 일어나고 열차가 탈선하는 순간, 커티스와 남궁민수가 상호 어떠한 합의도 없이 요나와 티미를 사이에 껴안아 지키는 대목이다. 우리도, 우리의 전 세대도, 그 전 세대의 이전 세대도 같은 것을 고민했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다름 아닌 가능성이다. 우리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커티스와 남궁민수는 지금의 체계와 규칙을 물려주고 그 안에서 아프니까 청춘이고 밖은 추우니까 열차는 달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가능성을 물려준다. 그것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설국열차>는 이 대목에 이르러 기존 체제를 파괴하는 쾌감에서 방점을 찍었던 영화 <파이트 클럽>의 이후를 모색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세계는 폭력적이지만 그 체제는 분명한 안온함을 제공한다. 그것을 벗어난 인간에게 희망이란 가능한 것일까. 요나는 ‘큰 물고기’라는 신의 형벌 안에서 탈출하고 생존했던 인간의 이름이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나는 <설국열차>가 언젠가 위대한 영화의 리스트 어느 구석에서 반드시 발견될 것이라 생각한다.





허지웅 | 영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

사람들은 낯설고 알 수 없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들춰보자.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천진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와 타도의 대상으로 일찌감치 낙인찍혔던 건, 사람들이 보기에 그가 ‘나와 다른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것을 향한 공포와 혐오는 곧잘 너무나 쉬운 이유나 해법을 만들어내는 태도로 연결된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이를 두고 서둘러 자극적인 동기와 인과관계를 ‘창조해내는’ 태도 말이다.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의 모습에서 이와 같은 양상은 매우 흔하게 노출된다. 특히 속칭 ‘10대 오원춘 살인사건’ 혹은 ‘용인 엽기 살인사건’으로 불리고 있는 최근의 사건과 같이, 동기 자체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현장검증 모텔로 들어가는 엽기살인 피의자



사건이 알려진 직후 별안간 수 년 전의 영화 한 편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일라이 로스가 연출한 영화 <호스텔>이었다. <호스텔>은 동유럽에 배낭여행을 떠났던 젊은이들이 납치를 당해 공장에 감금되고, 재력가들이 이곳을 찾아 대금을 지불한 뒤 납치된 여행객들을 고문하는 내용을 그린 영화다. 



‘용인 엽기 살인사건’의 피의자가 취재진과 대화하던 도중 이 영화를 언급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용인 살인사건, 시신 뼈만 남아… 영화 호스텔 보고 충동 느꼈다” “용인 살인사건 피의자, ‘영화 호스텔 봤다’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관심 집중” “10대 엽기 살해범은 공포영화광” “용인 살인사건 ‘상영금지 호스텔’ 모방? 무슨 내용이길래”와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상황을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다. 피의자는 먼저 <호스텔>이나 잔인한 영화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기자가 먼저 굳이 콕 집어 “<호스텔>과 같은 잔인한 영화를 즐겨 보느냐”고 질문했다. 그 질문에 대해 피의자가 “봤다. 공포영화를 자주 본다”고 대답했다. 이어 “나도 해보고 싶단 생각 안 해봤어요?”라는 질문에 “한 번쯤은 해봤어요”라고 말했다. 유도 질문들과 유도된 답변이다. 평소 공포영화광인 피의자가 영화를 모방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듯한 지금의 보도 내용은 사실관계를 크게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 보도내용들과는 달리 영화 <호스텔>의 내용은 지금의 사건과 닮은점이 없다. 사체 훼손을 다룬 공포영화라면 얼마든지 다른 사례를 들 수 있다. 차라리 <기니어피그> 시리즈를 언급하는 게 상황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호스텔>은 그런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호스텔>은 단지 고문과 살인을 전시하는 영화가 아니라, 젊은이들이 공장에 납치되고 돈을 지불한 재력가들에게 유린 당하는 내용을 들어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사람들을 착취하는가 보여주는 우화에 가깝다.



영화 <호스텔>의 한 장면.




사실은 이랬을 것이다. 별 동기가 없다는 피의자의 말에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내고 싶은 기자들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 중 한 기자가 자신이 제목을 알고 있는 영화 가운데 가장 잔인하다고 생각하는 <호스텔>을 언급했다. 피의자는 봤다고 대답했다. 심지어 공포영화를 자주 본다고 말했다. 멀쩡하게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서 애초 그런 질문을 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저 문답만 두고 보았을 때도 이 사건이 공포영화광의 <호스텔> 모방범죄라는 추측 또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자극적인 것이 필요한 기자들이 들었을 때, 이는 완전하고 명쾌한 인과관계로 변모한다. 마술 같은 일이다.



공포영화를 많이 봐서 살인마가 된다면 나는 지금쯤 하루 세 끼 인육만 먹고 있을 거다. 언론은 늘 쉽고 빠른 인과관계를 지어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이라도 세상이 그리 명쾌했던 적이 있는가. 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 때는 게임과 마릴린 맨슨의 음악이 도마에 올랐다. 레이디 가가는 그 자신과 그녀의 음악이 게이를 양산한다는 공격에 시달린다. MBC는 게임이 폭력을 조장한다며 애꿎은 PC방의 전원을 내려버렸다. 조선일보는 학교폭력이 웹툰 때문이라는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총기난사가 마릴린 맨슨 때문이고 게이가 레이디 가가 때문이고 학교폭력이 웹툰 때문이고 연쇄살인이 영화 때문이면 내가 오늘 배탈이 난 건 무엇 때문이냐. 마스터셰프 코리아?



어떤 행동에 단 한 가지 명백한 원인만이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다 못해 날씨부터 사소한 대화, 어느 생각없는 기자가 써내려간 기사 한 줄이 안겨준 짜증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행동을 가능케하는 원인에는 수없이 많은 요소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하나로 유력한 이유를 만들고 매우 명확한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처럼 포장하면 정작 문제의 본질은 휘발될 수밖에 없다.



끔찍한 사건의 범인을 격리하고 처벌하는 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사회 정의다. 그러나 명백한 이유를 만든답시고 자극적인 수사와 무리한 추정에 바탕해 엉뚱한 데에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범인을 그냥 ‘괴물’로 만들어버리면, 우리는 동일한 범죄가 반복되는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 그렇게 되는 순간 사건은 더 이상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우리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다른 철창 속 괴물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서커스가 철창 안의 괴물을 전시하듯 담론은 사라지고 프릭 쇼(freak show)만 남는다. 이때 진짜 괴물은 살인범인가, 언론인가.




허지웅 | 영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

다음의 세 가지 사례를 보자. 지난 200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씨가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해사건을 다룬 영화다. 법원은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 가운데 일부만을 받아들여 영화 속에 삽입된 다큐멘터리 장면을 삭제하고 상영하라 판결했다. 영화는 3분30초가량이 암전된 상태로 관객에게 공개됐다. 당시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영화가 작품의 소재가 된 개인이나 집단의 반발에 부딪힐 때마다 소송에 부쳐지고, 법률적 판단을 따라야 한다면 창작과 표현의 자유는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1979년 '궁정동사건'을 다룬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



다음은 최근의 일이다. 지난달 8일 국방부는 다큐멘터리 <천안함 프로젝트>에 대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기로 결정했다. <천안함 프로젝트>는 북한 어뢰에 의해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합동조사단의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원래는 국방부 단독으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는 방안이 검토됐다. 그러나 국방부나 해군은 명예훼손 등 본안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어, 국방부가 천안함 유족들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유족들은 이달 말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할 예정이다. 국방부는 “이 영화는 천안함 폭침의 원인을 좌초 또는 충돌이라는 식으로 호도해 국민에게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며 “영화관뿐만 아니라 DVD나 인터넷 등 어떤 식으로라도 상영이 되어선 안된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천안함 프로젝트>는 구체적인 상영 배급 시기가 결정되지 않았으며, 지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바 있다.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의 정지영 감독이 기획하고 제작한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의 일이다. 지난달 22일 민주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등 선정적인 게시물을 올린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를 상대로 운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기로 결정했다. 민주당 미디어홍보특별위원인 신경민 의원은 “도를 넘었다. 엄중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일베에 해당 글을 작성한 분들은 표현의 자유를 수백 배 뛰어넘어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미국은 ‘표현의 자유’가 대단히 넓다, 성조기를 태울 권리도 인정한다. 목사가 방송에 나가서 쌍욕을 해도 인정한다. 그런데 미국도 인정하지 못하는 표현의 자유가 있다. 최소한의 악이다. 군사 기밀, 인종차별적, 반인륜적, 반역사적 언사나 범죄 옹호는 표현의 자유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5월24일 일간베스트에 민주당의 일베 운영 금지 가처분 소송 검토에 관한 기사가 올라와 있다. 일간베스트 캡처



이 세 가지 가처분 신청 사례에 있어 여러분은 저마다 가치판단을 할 수 있다. 본인의 취향과 정치적 지향에 따라 해당 가처분 신청의 내용을 옹호하거나 반대할 수 있다. 혹은 자신이 경험한 바에 근거해 더욱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타인의 의견을 법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 또한 다양한 의견의 교환이라는 가치 자체를 인정할 때 존립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가처분 신청 사례는 결국 공히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제다. 표현의 자유는 해당 표현에 대한 긍정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를 인정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표현’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각 사안의 정치적 성격에 따라 의견이 나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화두가 진영논리에 의해 규정되고 침해당해 왔다는 것을 방증한다.



신경민 의원은 일베에 대한 운영금지 가처분 신청에 있어 미국을 예로 들며, 그 나라에서 표현의 자유에 해당되는 것과 해당되지 않는 것이 매우 명쾌하게 정리되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신 의원이 주장하는 것은 이른바 혐오언론(여기서 ‘언론’은 media가 아니라 speech다. hate speech)에 대한 규제인 듯 보이는데, 이는 미국 내에서도 평등이나 다원주의 이슈와 더불어 가장 골치 아픈 사안으로 받아들여진다. 표현의 자유를 전제하면서 혐오언론을 법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1992년 연방 대법원의 R A V 판례 이후 수정헌법 1조가 보호하는 범위를 혐오언론에까지 확장시켰다. 여기서 대법원은 “(그 내용이)선호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러한 언사에 대해 예외로 규제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수정헌법 1조가 금지하는 것”이라 선언했다.



특히 온라인 게시판 등 인터넷에서의 혐오언론은 그것이 과연 타인에게 즉각적인 폭력과 공포를 유발했는지 규명하기 어렵고, 사용자가 그것을 회피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규제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신 의원이 지나치게 단순화, 일반화시킨 것과 달리 미국에서 인터넷상에서의 혐오범죄로 처벌받은 사례는 대개 인종주의자가 특정인에게 위협적인 협박이나 살인 메시지가 담긴 메일을 보낸 것들이었다.



표현의 자유 문제에 있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는 가처분 신청은 위험하다. 그것이 ‘보호’보다 ‘억압’의 의지를 우선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정치사회 환경 안에서 각 진영의 편의에 따라 매번 검열수단으로 악용돼왔다. 일베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사회의 화장실이다. 명예를 훼손당한 당사자는 이를 법에 호소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내용에 대해 누구나 어디서든 비판할 수 있다. 뜻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연대하여 광고주에게 압박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편하고 부당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표현의 자유 자체를 억압할 수는 없다. 밀로스 포먼의 <래리 플린트>에는 “나 같은 쓰레기의 자유가 보장될 때 여러분의 자유 또한 보장될 수 있다”는 대사가 나온다. 표현의 자유란 그 사회의 가장 역겹고 더럽고 끔찍한 곳에서 증명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민주사회가 아니다. 최근 북한의 대남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일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논평을 내놓았다. “ ‘일간베스트’와 같은 추악하고 더러운 홈페이지에 붉은 신호등을 올려야 할 것이다.” 전체주의자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법이다.



밀로스 포먼 감독,우디 해럴슨 주연의 영화 '래리 플린트' (경향DB)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


항상 가장 잘 팔리는 건 공포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MSG를 먹으면 건강이 나빠진다. 마릴린 맨슨을 들으면 총기난사범이 된다. 게임을 하면 폭력적이 된다. 학교폭력의 원인은 웹툰이다” 등. 공포 마케터들은 특정 결론에 이르기까지 작용하는 수많은 원인과 맥락을 배제한 채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너의 불행이 초래되었거나, 혹은 곧 초래될 것이라고 겁 주는 방식으로 공포를 판매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분노를 파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 이렇게 큰 부조리가 있는데 지금 잠이 옵니까. 당신이 부끄럽지 않은 부모이자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당장 분노하고 주머니를 여세요.” 이와 같은 딜러들의 마케팅 포인트는 실제 사회의 부조리를 규명하기 위해 골몰하고 행동하는 이들과는 달리, 그 실체와 연쇄작용에 관해 정확하게 설명하고 상대의 판단을 기다리기보다는 사실 관계를 뭉뚱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죄의식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깨어있는’ 자들의 연합에 동참하기를 유도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한 무협지적 정서는 사실 관계에 근거한 타인의 선의와 의지를 도매금으로 망가뜨리고 나아가 세상을 혼돈으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그 와중에 건사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위안뿐이다.



최승호 감독의 <노리개>는 한국영화 장르 목록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었음을 알리는 영화다. 그 장르의 이름은 ‘분노’다. <노리개>라는 기획이 성립할 수 있었던 건 그에 이르는 몇 가지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징후였다. 이 징후들은 <노리개>라는 영화가 정확히 그 영화들의 연장선 위에 있음을, 혹은 그러기를 바란다는 홍보 문구들로부터 정확히 호출된다(“<26년> <도가니>에 이어 또 하나의 감춰진 진실을 고발하는 영화!”). 우선 필자의 과거 글에서 발췌한 몇가지 문장을 통해 점층적으로 그 위험이 강화되고 있는 징후들을 살펴보자.



<도가니>: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근사한 것이다. 아주 가끔이지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 영화로부터 분노를 얻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의 규탄을 요구하고, 영화의 제목을 가져온 이름의 법을 만드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의 분위기는 분노와 연민의 유행에 가깝다(한겨레).”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남영동 1985>는 서로 다른 믿음과 당위를 가지고 있는 자들 사이에서 드러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성찰과 고민이 배제되고 가해와 피해의 갈등만이 남아있는 영화다. 감독의 전작인 <부러진 화살>이 진실이란 얼마나 어렵고 복잡하며 함부로 주장될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해 외면하면서 사실관계를 단순화시켜 일방적인 선과 악의 문제로 탈바꿈시켜버렸던 것처럼 말이다(주간경향).”



<26년>: “<26년>의 상황은 최소한의 완성도를 담보하기 위해 필요한 절대적인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데 따른 결과물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화가 그 ‘절대적인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것인지, 혹은 안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셜펀딩 단계에서부터 이 기획은 괴상했다. 감독도 없었다. 배우도 없었다. 원작의 명성과 2008년에 쓰여진 시나리오만 있었다. 그나마 이 2008년의 시나리오라는 것도 당시 물가로 62억원 예산에 맞추어 쓰여진 것이었다. 우선 연출자를 정하고, 새로운 추정 예산과 4년이라는 시간 차를 메꿀 비전에 기반을 둬 시나리오를 다시 썼어야 했다. 그런데 모든 게 이상하리만치 성급했다(주간경향).” “영화 외부의 성립된 조건으로부터 공분, 즉 추진력을 얻어 부족한 영화의 함량을 무마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실의 정치에 영향을 끼치고자 만들어진, 정치영화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좋은 정치영화의 조건은 다름 아니라 좋은 영화의 조건과 같다. 선과 악을 단순화시킴으로써 이야기의 고민을 축소시켜선 안된다. 현실정치에 영향을 끼치겠다는 목적의식에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침해당해선 안된다(GEEK).”



영화 노리개



<노리개>는, 이를테면 이 방면의 ‘끝판왕’이다. <노리개>는 매우 명확하게, 고 장자연 사건으로부터 거의 모든 서사를 가져온 영화다. 주요 인물들의 이름마저 실제 사건 관련자들을 연상시킬 수 있게 처리되어있다. 이를테면 고 장자연은 정지희로, 이상호 기자는 이장호 기자로, 고 장자연의 매니저 유장호는 이장호로 처리하는 식이다. 언론사 사주와 기획사 대표, 드라마 PD가 주요하게 언급되는 것도 고 장자연 사건으로부터 수혈된 것이다. 극 중 이장호 기자는 방송사에서 퇴출되고 인터넷 언론 ‘맨땅뉴스’를 운영 중이다. 이는 이상호 기자의 ‘고발뉴스’와 정확히 겹쳐진다.



그럼에도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은 이 영화가 실제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애써 강조한다. 아마도 명예훼손 피소를 우려하는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노리개>는 관객의 분노를 추동할 수 있는 대목은 실제 고 장자연 사건으로부터 가져오면서 특정 장면들은 필요 이상의 상상을 동원해 매우 자극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실제 사건의 피해자를 되레 능욕한다.



이를테면 도구를 사용해 여배우와 성행위를 하는 언론사 사주의 모습을 보자. 이 장면에 대해 감독은 인터뷰에서 “어떤 사실 관계를 가지고 그렇게 시나리오를 쓴 것이 아니라 최대한 세게 뽑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는 장면을 썼을 뿐”이라 답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단한 당위를 갖고 있는 듯 보인다. 그는 해당 인터뷰에서 “지금은 내가 <노리개>를 만들면서 가진 마음을 관객들이 오독만 해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라 말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진심은 결국 그의 주관일 뿐 사실관계에 근거한 객관일 수 없다. 그에 대한 관객의 의견이 ‘오독’일 거라 생각하는 판단으로부터 연출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자살한 탤런트 장자연의 문건 (경향DB)


그저 자극적일 뿐 영화적 미감도, 작가적 비전도, 극적 완결성도 없는 작품을 뜬금없는 지사 코스프레로 옹호하거나 공감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초반에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 장소, 단체, 사건 등은 실제와 관계가 없다. 이 영화는 가공의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그래 놓고 말미에는 “이 영화 속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다”라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서술의 괴리 사이에서 실제 고통받는 건 명확하게 호출된 실존인물의 명예와, 이와 유사한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을 알리는 데에는 게으르고 그것을 장르적 묘사라는 미명 아래 최대한 자극적으로 풀어내는 장사꾼들의 들끓는 ‘진심’ 안에는, 그 어떤 종류의 정직하고 의로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

한국 사회에는 나와 생각이 다른 타자가 정의롭지 않을 것이라 여기는 습속이 있다. 그래서 종종 법상식을 상회하는 언어 폭력이나 명예 훼손, 신상 공개와 같은 일들이 정의롭지 않은 자들에 대한 단죄의 방식으로 집행된다. 정의롭지 않은 자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이러한 폭력은 늘 떳떳하다. 가해자들은 되레 무협지에 등장하는 영웅이나 근대의 지사, 혹은 저널리즘의 보루로 스스로를 과장되게 치장한다.



이는 분단국가라는 사실관계로부터 87년 체제의 한계에 이르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 안에서 만들어진 태도다. 이러한 경향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이 상반된 정의로움에 대해 이쪽에선 적반하장이라 생각한다. 저쪽에선 이중잣대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서로 끊임없이 상대가 악마임을 주장해야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그림을 그려보자면 정의롭지 않은 상상의 적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두들겨 패는 것으로부터 진영의 존재 이유와 생명력 자체를 수혈받는 형편이다. ‘깨어 있는 시민’들과 ‘수꼴’은 그렇게 공생한다. 양쪽으로부터의 폭력을 ‘정의롭지 않다’는 이유로 견디며 세상에서 제일 비열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회의론자들에게 한국은 그다지 살 만한 공간이 아니다.




여기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사진)이 최근 8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이 영화는 개봉하기 전부터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사이트에서 평점 테러를 당했다. 영화를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몰려와 <지슬>에 대해 박한 평점을 쏟아부은 것이다. 영화 <지슬>이 제주 4·3 사건을 다뤘기 때문이다. 제주 4·3 사건에 대한 영화니까 응당 특정 진영에 치우친 선동 영화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평점 테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 줄씩 달아놓은 감상의 변을 보면 하나같이 영화를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주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단지 어떤 소재를 다루었다는 이유 만으로 만듦새에 관한 평가는 유보되고, 관객이든 언론이든 평단이든 그 영화에 대해 발언하는 것으로 시대와 사회에 동참하고 있다고 자족하는 판타지가 존재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영화의 함량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매체가 상찬해주고 “가슴이 먹먹합니다” “잊지 맙시다” “기억합시다”와 같은 피드백이 뒤따른다.



가까이는 영화 <26년>과 같은 사례가 있다. <26년>은 이야기의 파쇼적인 측면은 미뤄두더라도, 대선 전에 개봉하려는 무리한 스케줄에서 기인한 제작 과정의 문제가 상식 밖의 만듦새에 그대로 반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관객의 ‘뜨거움’에만 매달린 영화였다. <26년>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글을 쓰면 “영화를 머리로만 보고 가슴으로 보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지슬>에 대한 평점 테러를 그저 병적으로만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들은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 여길 것이다. <26년>을 상찬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영화 <지슬>의 한 장면.


▲ 4·3 사건 이유로 ‘지슬’에 평점테러…

진실을 가리고 증오 경쟁 부추겨



이러한 증오의 경쟁 안에서 정작 사안 자체의 진실은 괴리되기 마련이다. 여기서는 영화가 그렇다. 평점 테러를 한 사람들의 짐작과는 달리, <지슬>은 제주 4·3 사건의 개요와 전말을 특정하게 편향된 의도에 맞추어 뜨겁게 벼르고 호소하는 영화가 아니다. 무분별하게 편을 나누어 분노를 추동하는 영화도 아니다. 선과 악을 단순화시킴으로써 이야기의 고민을 축소시키는 영화도 아니다. <지슬>은 죽일 이유가 없는 이들과 죽을 이유가 없는 이들의 초상을 흑백의 이미지 안에서 위령제의 형식을 빌려 담담하게 그려내는 영화다. 미학적인 차원의 매력이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의 미감, 연기의 균질함을 통제하는 지도의 문제에 있어서 도전적이고 독창적이며 완전히 제어된 작품이다.



제주 4·3 사건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남로당 제주도지부와 중앙당 사이에 협의가 있었는지, 시대배경을 감안할 때 좌익을 학살하기 위해 다수의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킨 것이 정당한 것인지 등의 문제는 진영의 입장에 따라 그 의견과 평가를 달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서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관계를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다. 토벌대에 쫓겨 산속에 숨은 제주도민들이 감자를 나누어 먹으며 버틴 며칠, 학살 속에서 괴물이 되거나 관찰자가 되어가는 군인들의 며칠이 이 영화가 그려내는 이야기의 전부다. 도민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그들이 죽어 사라지고 없는 공간을 조용히 비추며 부적을 태우고 영혼을 달래는 것이 이 영화가 수행하고자 하는 역할의 전부다.



<지슬>의 사례는 진영의 테두리 안에서 ‘정의로운 폭력’을 서로에게 행사하는 일이 결국 사안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계 없이 이루어지는 증오의 강강수월래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지슬>이 흑백인 것에는 미학적인 목적과는 무관하게 사유 가능한 혐의가 있다. 흑백의 이미지는 칼라 이미지와는 달리 그 안에서 다루어지는 사물들을 서로 완전히 다른 개별의 무엇으로 담아내지 않는다. 흑백의 이미지 안에서 그들은 명암의 정도에 따라 조금 더 검거나 밝을 뿐, 결국 동류의 무엇이다. <지슬>은 동류의 무리들이 상대를 나와는 전혀 다른 무엇으로 대상화해가며 극단적으로 갈등했던 사건을, 바로 그 흑백의 이미지 안에 담아내는 역설을 통해 오직 영화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성취에 이른다. 한 편의 영화를 두고 정의로운 이유로 상찬하는 이들과 정의로운 이유로 비토하는 이들을 흑백의 이미지 안에 담아내 그들에게 보여주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하다.



허지웅 | 영화평론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