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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광석>의 포스터


그리스인들에게 친구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었다. 우정 어린 대화 속에서 이뤄지는 인간적인 것을 필란트로피아(philanthropia)라고 불렀는데, 이는 인간애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곧 친구이고 그렇게 대화를 할 수 있는 마음가짐 자체가 인간애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매우 사적인 비밀과 생활을 나누는 친구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그런 사이를 지칭하는 우정이란 루소가 정립한 것이라고 한다. 루소가 아니라 그리스식으로 생각해보자면 친구는 훨씬 더 갖기 어렵고, 우정은 나누기 어렵다. 왜 행복의 절대적 조건으로 친구와 우정이 필요했는지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를 만들고, 보고, 평가하는 과정은 대화적이다. 그저 사적인 비밀을 나눈다기보다는 대화가 될 만한 소재들을 영화로 만들어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는 점에서 말이다. 좋은 영화라고 하면 충분한 해석의 여지가 많은 영화라고 생각되는데, 이 해석의 여지야말로 대화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대화할 수 있는 부분 어쩌면 많은 의견이 유통될 수 있는 영화일수록 좋은 영화라고 믿기 때문이다.

 

최근 두 편의 영화가 화제이다. 하나는 김광석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쫓아가는 다큐멘터리 영화 <김광석>이고 다른 하나는 위안부 문제를 색다른 방식으로 재현한 <아이 캔 스피크>이다. <김광석>은 영화가 가진 대화적 힘의 또 다른 증례가 될 듯싶다. 이미 공소시효까지 만료된 과거의 ‘사건’은 서술됨으로써 다시 대화의 주제가 되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김광석>은 이미 만료된 그러니까 과거가 된 사건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인데, 이 극복은 다름 아닌 반복되는 서술과 진술을 통해 마련된다. 사실을 영화의 영역에 가져옴으로 인해 독백이 대화를 작동시키게 된 셈이다. 영화 <김광석>의 과거 사용법이 여러 가지 점에서 의미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광석>은 미학적이거나 영화공학적인 면에서 따지기는 좀 어려운 작품인데, 사실이 어떻게 진술과 만나 새로운 교호작용을 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이 캔 스피크>의 대화술은 좀 더 세련됐다. 과거를 미학의 범주 안으로 들여와 이야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는 견고한 과거라는 벽을 유연하고, 현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일 테다. 이야기로, 영화로 구체화됨으로써 오히려 역사는 항구성과 지속성, 현재성과 반복성을 얻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세계 속에 다른 위치를 새겨 주며, 그것은 같지만 다른 이야기로 진척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시대를 넘어선 무엇으로 살아남게 되고, 그 대화는 단지 지금 영화와 관객 사이를 넘어 미래의 관객과의 대화로도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 연민이라면 그런 맥락에서 우정은 훨씬 더 선택적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두 인물, 민재와 옥분의 관계가 우정으로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다가 연민과 동정이 좀 더 시혜적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면 우정은 훨씬 더 동등한 관계를 전제한다. 할리우드 영화 <인턴>에서 나이 많은 할아버지 인턴과 젊은 여성 CEO의 관계처럼, 그렇게 다르지만 동등한 관계에서 우정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취향의 세련이나 의미 있는 여가 선용이라기보다는 유용한 오락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영화와 대화를 나누고 우정을 나누는 건 여간 어렵지 않다. 마치 재미만이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재미있으면 되지라는 식의 논리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신체가 난자되어도 무감각하게 바라보고, 지나치게 잔혹한 폭력들도 영화적 클리쉐로 여겨진다. 사실도 아닌데, 허구인데, 영화인데 정색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효용론이 너무도 강렬해서 의미나 윤리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척이나 고답적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하지만 그렇게 영화의 용도를 한정하는 것이야말로 현실로부터의 후퇴이고 내적인 망명일지도 모르겠다. 한나 아렌트는 공포를 현실에 대한 정신의 후퇴라고 말한 바 있다. 반대로 희망은 현실의 초월이다. 즉, 현실을 너무 무섭게 재현하는 것도 도망가는 것이고 거꾸로 현실을 너무 아름답게 그리는 것 역시도 거짓이다. 현실의 압력이나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영화를 본다는 핑계가 언제나 통할 수 없는 이유이고 영화는 단지 오락일 뿐이라는 폄훼와 다르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놀이에도 치유의 효과가 있듯이 오락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허용될 수는 없다. 결국 영화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치명적 질병이 만연했던 시대엔 병이란 사람과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완치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 치유와 치료가 더 중요시된 맥락에는 이러한 겸손함이 자리 잡고 있다. 완벽히 없앨 수 없으니, 병을 다스리고, 고통을 줄여 주는 것, 치료와 치유는 그런 개념이었던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영화란 세상에 대단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지시의 개념어를 주는 완치의 예술이 아니다. 치유하고 치료하는 것, 그러니까 불완전한 역사를 다시 이야기하고, 하나의 치료법(therapy)을 제안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힐링하는 것, 그게 바로 영화의 존재이유인 셈이다. 연민이 아니라 우정을 나누는 영화가 좋은 영화인 이유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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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1일 개봉하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제공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 또는 필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보다 이야기의 힘이 더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더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과 이입을 선사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그렇다고 해서 역사보다 소설이나 영화가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소재보다는 소재를 다루는 태도에 대한 격언인데, 말하자면 있었던 일을 다룰 때 고증보다는 그 일을 가운데 둔 전체의 얼개, 플롯에 더 유념해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이 지면에서, 울고 고통스러워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웃기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 피해자를 그려낼 수 없는 우리 이야기의 가난함에 대해 토로한 적이 있다. 아직 우리의 피해는 사죄받지 못한 것이기에, 여전히 현재적인 문제이기에 거리나 여유를 둘 수 없다고 말이다. 영화 <귀향>이나 <택시운전사>가 역사의 문제를 다루면서 고발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영화 문법이 그저 촌스러워서가 아니라 아직은 지나치게 현재 진행형의 문제라는 뜻에서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는 매우 놀랍다. <아이 캔 스피크>는 여러 미덕을 가진 영화이다. 그중 최고의 미덕은 바로 상처와 피해를 다루는 태도와 방식이다. 피해라는 말이 주는 핏빛 이미지처럼 피해자는 언제나 숭고하게 그려야만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좋은 독일군도 있고, 나쁜 카포(Kapo: 수용소 중간 관리자)도 있곤 하다. 선량하지만 무능한 피해자도 있고, 잔혹하지만 필연적 악을 행하는 가해자도 그려지기도 한다.

 

참혹한 일들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의외로 자신의 경험이 역사가들의 일거리가 되리라고 여기지 않는다.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마치 사건 외부로 튕겨 나온 듯한, 염결한 죄책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경험했던 것들은 사실이다. 그처럼 생생했던 사실들은 어떤 기록보다 더 사실적일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증언들을 들어보자면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경험적 사실이 진실에 닿기에 여러 번의 자맥질이 이어진다. 쇼샤나 펠만이 말했듯이 이렇듯 진실과 사실이 불일치하는 상황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증언의 안과 밖 모두에 자리 잡는 것일 테다. 사실과 진실을 연결하는 것, 그게 바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이야기의 힘일 테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일제강점기의 역사와 그 역사 뒤편의 상처들은 이런 인간학적 다양성으로 일반화하기엔 너무도 첨예한 잘잘못과 닿아 있다. 아직 법률적 판결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와 그 상처를 다룰 때면 인간학과 심리적 다양성보다는 윤리적 보편성과 도덕적 선과 악, 법률적 판결 문제를 강조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점에선 미학적 쾌감보다는 도덕적 심미안으로, 즉 재미보다는 의미로 보아야 하는 영화들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야기를 다룰 때 재미나 미적 완성도를 따지는 게 어쩐지 무척 불경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 캔 스피크>는 증언할 수 없는 그 어떤 것까지 증언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작품이다. 일단 재미있다. 주인공인 나옥분 할머니(나문희)는 괴팍한 동네의 말썽쟁이로 등장한다. “도깨비”라는 별명처럼, 동네 슈퍼 주인 말고는 그 누구도 상대하지 않는 독불장군으로 처음 나타나는 것이다. 누구나 다 미워할 것 같은 이 할머니를 마지막 순간 모두가 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할머니로 만들어 내는 것, 그게 바로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몫이고 성과이다. 영화는 그럴듯한 사연을 가진 할머니 나옥분을 통해 이 과정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이 과정 가운데서 함부로 다룰 수 없었던 역사적 상처와 사건이 묵직한 무게감과 감동으로 깊어진다. 웃기고 이상했던 할머니를 존경스럽고, 안아주고 싶은 할머니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영화의 힘이다.

 

또 한 가지 <아이 캔 스피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여성을 배우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배우 나문희가 “이 나이에 주연을 하는 기쁨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그건 단순히 여배우 주연 캐스팅 이상의 의의를 지닌다. 시나리오가 여성을 요구했고, 이야기가 할머니를 필요로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조금만 눈길을 돌리고, 관심사를 넓혀본다면 세상엔 꼭 이야기가 되어야 할 ‘역사’가 숱하게 많다. 어쩌면 너무도 익숙한 ‘역사’라서, 다룰 필요도 없는, 보편적이면서도 진부한 이야기라고 여겼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충분히 이야기되지 못한 사실이 너무 많다.

 

<아이 캔 스피크>의 여성 인물은 굳이 나누자면 피해자에 속한다. 영화는 피해자들을 늘어놓고 전시하는 게 아니라 나옥분이라는 이름과 ‘발언권’을 주어,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다. 피해자로 하여금 말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어쩌면 영화가 피해자를 영화에 모시는 방법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말할 수 없는 죽음의 세계와 말할 수 있는 생존의 공간이 있다면 영화는 건널 수 없는 두 공백을 이야기로 메우는 작업이다. 영화는 할 수 있다. 진실을 초월하는 어떤 사실들에 목소리를 주는 것, 그런 일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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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이아이피>의 한 장면.


여성을 혐오하는 남자들은 여자를 좋아한다. 우에노 치즈코의 책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는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여성 혐오자들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건 언뜻 모순으로 보이지만 사실 여성 혐오의 핵심이다. 여기서 ‘여자’는 성적 대상이자 기호로서의 여성이다. 우에노 치즈코의 말처럼 심지어 여장 남자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어도 무조건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처럼. 여자라는 기호에 반응하는 여성 혐오적 호색한이 많은 것이다.

 

최근 한국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여자라는 기호는 있지만 여성이나 여인은 거의 볼 수 없다. 말장난이 아니다. 존엄성과 비중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물리적 숫자로 따진다 해도, 한국 영화 속 여자는 무척 적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등장하는 여성의 역할이다. 여자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건 여자가 아니라 단지 기호일 뿐이다.

 

고백하자면, 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의 일부 에피소드는 끝까지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일명 VIP가 북한에서 저질렀던 만행을 ‘추억’하는 장면 말이다. 코스모스 길을 걷던 여학생이 처참한 사체로 발견된다. 여학생이 사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영화는 친절하게 재현의 무대에 올린다. 눈물이 가득 고인 여학생의 눈에서 빠져나온 카메라는 여학생의 채 영글지 못한 유두를 비추고, 마침내 VIP의 시선에 고정된 채 와이어에 목이 감겨 고통에 신음하는 여학생의 얼굴을 스크린 가득 담아낸다. 이미 소녀는 죽었다. 소녀가 사체로 변하는 과정을 담아낸 건 감독 박훈정의 선택이다. 그러니까 그 장면은 필연적 정보가 아니라 과잉의 수식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굳이 목베인 얼굴 사체를 등장시키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카메라는 여학생의 풀려 가는 동공을 클로즈업한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 장면이 추구하는 감정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분노라는 대답은 이미 지나치게 마초적이다. 많은 여성 관객들은, 적어도 나는 그 장면에서 분노보다 먼저 공포를 느낀다. 남성 관객들 중에 그 장면을 보면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대개의 여성 대상 범죄가 필연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서 즉 내 잘못이 아니라 운이 없어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점 때문에 공포는 더욱 커진다. 영화 <브이아이피> 속의 소녀가 우연히 피해자가 되었듯이 선택과는 무관하게,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여자라는 이유로. 과연 박훈정 감독은 그 장면에서 많은 여성 관객들이 공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계산했는지 묻고 싶다. 그랬다면, 왜 공포를 주고 싶었는지도 말이다. 공포가 본능적 위협이라면 분노는 학습된 감정이다.

 

영화 <브이아이피>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은 사실 500만 관객을 동원한 <청년경찰>에서도 있었다. <브이아이피>에 잔혹하게 난자당한 여성 피해자들이 등장한다면, <청년경찰>에는 난자를 착취당하는 10대 여성들이 등장한다. <청년경찰> 역시도 여성을 도구화했다거나 여성 혐오적 측면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논쟁이 비롯되면 언제나 따르는 비판이 있다. 너무 민감하다, 너무 엄격하다와 같은 시선들 말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도 뒤따른다. 현실의 범죄는 더 끔찍하다. 맞다. 하지만 실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많다는 사실과 그것을 영화적 소재로 쓰는 문제는 다르다.

 

무엇보다 문제적인 것은 이렇듯 학대받거나 고통받는 여성이 영화적으로 남자 주인공들의 자아 정체성 확립이나 남성성 확보를 위해 쓰인다는 사실이다. 과거 10여년간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은 남성영화들은 사실 남자와 남자의 대결인 경우가 많았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나 <신세계>, <내부자들> 같은 경우가 그랬다. 서열 정리와 권력 다툼을 위해 남자들은 서로를 난자하거나 베었고 폭력을 휘두르고 권력으로 짓밟는다. 그런데, <브이아이피>나 <청년경찰>에서는 여성 피해자를 알리바이로 ‘정의’를 구현하고 진짜 ‘남자’가 되고자 한다. <청년경찰>의 어리바리한 청년들은 여성 피해자를 구출함으로써 진짜 경찰로 성장하고, 박훈정 감독의 말마따나 벼랑에 매달려 있는 영화 <브이아이피> 속 남자들은 여성 피해자들을 빌미로 정의로운 남자로 거듭난다. 권력의 먹이사슬에서 눈치만 보던 남자가 마지막 순간 최후의 재판관으로 등장하는 것도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심지어 성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설정된 악의 주체는 어떤가? 그러니까, 진짜 남자가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가짜 남자를 벌하는 것, 철저한 남성성의 환상 속에 영화 <브이아이피>가 놓여 있는 셈이다.

 

한국 영화는 그동안 놀랄 만큼의 외적 성장을 이룩했다. 연간 관객 동원수가 2억명을 넘었고, 천만 관객 이상 보는 대형 흥행 영화가 매년, 꼬박꼬박 등장한다. 이런 한국 영화계의 성장세는 매우 놀라운 성과이긴 하지만 한편 급속한 경제 성장이 남긴 우리 과거처럼 그 성과가 너무 숫자에 치우쳐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영화 <도가니>에 굳이 아동 성폭행 장면을 연출해야 했는지, <브이아이피>에서 살해 사실이 아니라 살해 과정을 고스란히 재현해야 했는지 분명히 물어 마땅하다. 이건 단순히 페미니스트들의 과민반응이 아니다. 옷을 벗고, 체모가 나와야 외설이 아니다. 진짜 외설은 오히려 폭력을 수반한다. 조르주 바타이유의 말처럼 폭력이야말로 최후의 외설이다. 참혹한 여성 피해자에게 의존해서야 겨우 남자가 되는 남자, 그 남자는 가짜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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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범자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SBS TV 월화드라마 ‘조작’ 포스터.

 

보수정권에 의한 언론 장악 10년사를 고발한 영화 <공범자들> 초반부는 2008년 2월25일 KBS 뉴스의 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새 정부 내각 후보자들의 부정부패 의혹을 제기한 이 보도는 곧바로 후보자들의 사퇴를 이끌어냈다. 주목할 부분은 이 뉴스가 방송된 날이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 날이었다는 점이다. 새 정부와의 ‘허니문’ 기간이라는 관례도 개의치 않은 채 언론이 직언직설을 서슴지 않았던 이 시기를 두고, 영화 속 한 기자는 “저널리즘의 황금기”였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 찾아온 것은, 영화 속에서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시피 정권 탄압에 의한 언론의 가파른 몰락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10년간의 언론인 소재 드라마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가령 2008년 MBC에서 방영된 국내 최초의 전문 보도 드라마 <스포트라이트>는 ‘저널리즘 황금기’의 감수성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이다. 특히 ‘신문·방송 포함 언론매체 신뢰도 1위’ 언론사였던 시절 MBC의 자부심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당시 MBC에서는 <PD수첩>을 비롯한 시사 프로그램들의 위상이 굳건했고, 손석희, 엄기영, 김주하 같은 간판 언론인들이 팝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정작 드라마 자체는 실제 언론의 인기를 따라잡지 못했지만, 손예진, 지진희 등 스타배우들이 연기한 세련된 기자들의 모습에는 대중들이 신뢰하고 동경하던 언론인에 대한 판타지가 투영되어 있다. 2009년 방영작 MBC <히어로>에도 이 같은 판타지는 생생했다. 소시민을 대변하는 군소신문사와 족벌언론 간의 대결을 다룬 이 작품은 <스포트라이트>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여전히 시대의 ‘히어로’로서 기자들을 그려낸다. 극 종반부, 거대 언론사의 범죄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거리로 나간 기자들의 1인 시위와 그를 향한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은 아직 언론과 대중의 신뢰관계가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언론 장악이 본격화되면서부터 공교롭게도 언론인 소재 드라마 역시 TV에서 보기 힘들어진다. 그사이 권력에 주눅 든 언론은 빠르게 추락하다가 끝내 ‘히어로’에서 ‘기레기’로 전락했다. 기자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아니지만 2012년 방영된 SBS <추적자>에서는 ‘히어로’와 ‘기레기’ 사이, 그 과도기에 위치한 언론이 비쳐져 있다. 한 소녀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진실을 추적하는 이 드라마는 정치, 자본과 결탁해 권력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언론의 타락을 묘사한다. 소녀의 아버지인 홍석(손현주)이 권력의 감시를 피해 도주하는 곳곳마다 CCTV처럼 접하게 되는 뉴스 속보와 기자들의 카메라는 권력의 언어만을 “받아쓰기”하며 약자의 말을 무력화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드라마는 이 시기 폭로된 국무총리실의 불법사찰이 언론에 미친 영향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홍석의 편에 선 단 한 명의 기자만이 과거의 이상적 시절의 흔적을 드러내지만 그에게는 진실을 밝힐 힘이 없다.

 

두 편의 기자 드라마, KBS <힐러>와 SBS <피노키오>가 등장한 2014년은 이미 ‘기레기’라는 용어가 일상화된 시대였다. 두 작품은 이 같은 언론 후퇴에 관한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극화한다. 송지나 작가의 <힐러>는 언론통폐합을 앞세워 언론을 장악했던 5공 군사정권 시절과 현재를 병치시킨다.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과 정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보수신문사 회장 김문식(박상원)은 ‘기레기’의 표상 그 자체다. 이는 2015년 영화 <내부자들>의 유명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와 함께 언론을 더 이상 권력의 시녀가 아니라 ‘공범’으로 인식하는 대중의 시선을 반영한 대표적인 캐릭터다. 그런가 하면 <피노키오>는 “시청자에게 먹히는 것은 팩트보다 임팩트”라며 선정적 보도를 서슴지 않는 기자, 진실 보도와 저조한 시청률 사이에서 고민하는 기자의 두 얼굴을 통해 권력뿐 아니라 상업주의에 굴복한 ‘기레기’의 현실도 고발한다.

 

현재 방영 중인 SBS 드라마 <조작>은 이전의 작품들과는 또 다른 시사점을 던진다. 이 드라마는 탄핵정국 이후 언론개혁의 열망을 담아낸 영화 <공범자들>과 더불어 ‘기레기’ 시대의 종언을 고하려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공범자들>이 영화 속 부제로 ‘기레기’라는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며 언론의 자기반성을 이야기한 것처럼 <조작>도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여기에 ‘히어로’는 없다. 이것은 스스로를 ‘기레기’ ‘식물기자’라 부르는 언론인들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되돌리려 하는 이야기다. 주인공 한무영(남궁민)은 얼핏 보면 <히어로>의 진도혁(이준기) 계열의 열혈기자 캐릭터에 가깝지만 결코 이상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의 과격한 보도 방식은 보다 이성적인 기자 석민(유준상)이나 검사 소라(엄지원)와 같은 인물들을 통해 자주 수정되고 타협점을 찾아간다.  

 

자기반성과 함께 자부심의 회복도 중요한 주제다. 예컨대 영화 <공범자들>에서 김민식 PD는 언론 탄압 시절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패배감, 무력감을 꼽았다. 생계로서의 직업인인 동시에 시대를 향한 사명의식이 큰 언론인들에게 정권의 부역자들은 하나같이 ‘너 아니어도 돼’라는 말로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조작>의 최종권력자 구태원(문성근) 또한 기자들에게 이 패배감을 주입시킨다. 그를 향해 자신은 ‘투사가 아니라 기자이며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뿐’이라고 답하는 <조작>은 ‘기자 히어로’와 ‘기레기’ 시대 이후의 새로운 기자정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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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 인류를 의미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생각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호모를 꾸미는 말, 사피엔스의 뜻이 바로 슬기, 지혜이기 때문이다. 슬기,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로 생각해 내는 정신의 능력”이다. 그러니까,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달아야 하고, 그것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하는 게 슬기로운 인간이 하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종으로서의 인류의 ‘능력’인 셈이다.

 

 

영화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서 전쟁을 치르고 괴멸에 이르는 종은 바로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 호모 사피엔스이다. 말하고, 사고하고, 상상하는 인류가 사라지는 거지 지금 우리처럼 생긴 인간이 사라지는 게 아닌 것이다. 영화의 출발점이었던 1968년작 <혹성탈출> 오리지널을 돌이켜보자면, 그 작품에서 인류는 호모 에렉투스 정도의 원시 인류들로 묘사되어 있다. 서 있다뿐이지 말하거나 생각하고,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인류의 입장에서는 묵시록이고 생각하는 유인원의 입장에서는 창세기에 해당한다는 이야기이다. 말 그대로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이니 말이다.

 

영화 <혹성탈출: 종의 전쟁>을 보자면 지혜로운 쪽은 군인으로 상징되는 대령이 아니라 유인원 시저에 가깝다. 시저는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조직적이며, 공감 능력도 뛰어나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어쩌면 공감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의 뛰어난 지혜이다. 우리에게 강인한 생존력을 주는 것은 기술이었지만 정보와 교감이라는 매개가 없었더라면 이처럼 정교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에게 있어서는 사회성이야말로 진화의 혜택이다. 공감 능력이 발달할수록 타인과의 소통에 유리하고 더 친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 그려지는 여러 장면들은 성경 속의 창세기와 상당 부분 닮아 있다. 시저는 모세처럼 유인원 무리를 이끌고 약속의 땅을 찾아간다. 유인원들이 감금된 수용소 모습은 거의 명백하게 아우슈비츠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종적소멸을 부르짖는 스킨 헤드의 대령이 극우주의를 정치적 출구로 선택하는 여러 지도자들을 연상케 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인류는 지금껏 수많은 생존의 고비를 넘어왔다. 유발 하라리가 정리했듯이 기아, 역병, 전쟁, 이 세 가지가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진정 슬기로운 사람은 그러한 고비를 넘을 수 있는 진보된 기술의 주인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그런 역사를 통해 배우는 사람, 즉 학습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특히 전쟁이 그렇다. 기아와 역병이 과학과 기술의 영역이라면 전쟁은 거의 전적으로 사람의 선택이며 판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지나간 일을 역사적 허구로 재창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체험을 여러 권의 논픽션, 픽션을 통해 남겼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기록이 절대적인 증거라기보다 매우 개인적인 체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자신은 그때의 감정을 기억할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절절한 감정이야말로 기록이나 서류로 남은 그 어떤 정보보다 더 강력한 공감의 힘을 발휘했다. 전쟁의 잔혹성은 보고된 숫자나 남겨진 기록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지만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반성은 한 개인의 주관적 체험으로 더 절실히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가 실패한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아우슈비츠에도 같은 수용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수용자들을 못살게 굴었던 카포(kapo)들이 있었다. 또 다른 아우슈비츠 생존자 빅터 프랭클은 그런 카포를 일컬어, 태생부터 다른 사람들로 묘사한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선과 악, 자애심이라는 것은 그가 감시병이었느냐, 수감자였느냐에 의해 나눠지는 게 아니었고 그 경계가 너무 애매했다고 토로했다. 생각보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악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이 없었던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선과 악이 혼합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오히려 극한의 상황은 인간성의 바닥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곤 했다. 인간 이하의 삶의 형편에 자살을 다짐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누구도 자살을 생각조차 못했던 상황의 역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관점에서 <혹성탈출: 종의 전쟁>을 보자면 인간적인 존재는 대령이 아니라 유인원 지도자 시저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불쾌하지만 영화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호모 사피엔스로서 생각하고, 교감할 만한 여러 주제들을 제시한다. 인간이니까 지혜로운 게 아니라 지혜로워야 인간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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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서정주 ‘마쓰이 오장 송가(松井 伍長 頌歌)’ 중)

 

류승완 감독의 영화 <군함도>의 한 장면.

잘 썼다. 서정주답게, 20세기 한국의 절창 시인답게 참 잘 썼다. 마쓰이 히데오, 그는 자살특공대원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박근형 연출가의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도 마쓰이 히데오가 등장한다. 서정주가 시 속에서 출정을 독려했던 그 젊은이, 오장 마쓰이 히데오 말이다. 시인이 비행기 관에 태워 보낸 그 젊은이를 박근형 연출가가 지상 위, 무대 위로 데리고 왔다. 그는 “제가 죽으면 저와 우리 가족은 영원히 일본인이 되고 아무도 우리 가족을 손가락질하지 못할 것”이라는 가슴 아픈 희망을 안고 죽어 간다. 조센징이라는 멸칭이 너무나도 듣기 싫었던 재일 한국인 마쓰이 히데오 말이다.

 

서정주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그의 빼어난 작품들과 함께 갑론을박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런데, 참 역설적이게도 박근형 연출가는 지난 정권 내내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으로 금지 아닌 금지, 억압 아닌 억압을 당했다. 70년 전 명백하게 친일 절창을 써내려갔던 서정주는 지금도 작품의 이름으로 옹호받는다. 사실을 별것 아닌 일로, 그러니까 작품과 개인의 행적은 별개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고, 살아 있는 그리고 버젓이 활동하고 있는 박근형 연출가를 블랙리스트로 분류하고 이 사실의 중심에 있었던 장관은 책임도 없이 무죄로 풀려났다.

 

영화 <군함도>가 예상치 못한 논란의 중심에 섰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대결로 흐를 줄 알았던 영화의 주요 서사가 반전의 이름으로 피수탈자 한국인과 그들을 이중으로 수탈했던 친일파 민족 지도자의 대결을 매복해 두었기 때문이다.

 

명령을 내리는 일본인보다 오히려 채찍을 휘두르고, 쥐꼬리보다 못한 임금을 갈취하는 조선인 지도자가 더욱 잔혹하고 지독해 보인다. 영화의 초입부, 주인공이기도 한 강옥(황정민)이 공연을 하고 있는 경성 반도호텔에서 한 여성이 참전을 독려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도 그녀는 당시 경성을 주름잡는 권력이나 명성을 가진 인물로 보인다. 서정주처럼, 최정희처럼, 노천명처럼. 아마 그렇게 그녀도 자신의 실력으로 조선인들을 독려하고 있으리라.

 

지하련의 소설 <도정>에는 “덴노우 헤이까가 고-상을 했어요”라며 우는 소년이 등장한다. 덴노우 헤이까는 천황이다. 그러니까 한국어로 번역하면 “천황폐하가 항복을 했어요” 정도가 된다. 그런데, 소년은 왜 울고 있을까? 그토록 기다리던 일본의 패망인데, 소년은 “징 와가 신민 또 도모니(짐이 우리 신민과 함께)”라는 천황의 목소리가 너무 슬퍼서 “덴노 헤이까가 참 불쌍해요”라며 운다. 기뻐서가 아니라 슬퍼서 우는 것이다. 35년의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소년, 한 번도 일제 강점이 아닌 곳에서 살아보지 못한 열 몇 살의 소년에게는 광복이나 해방보다는 일본의 패망이 더 자기 일처럼 느껴진다. 순간, 소설의 주인공이자 지식인인 석재는 당혹감을 느낀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해방의 기쁨을 실감하지 못하자 혹시 자신이 타락한 것은 아닌가 자책한다.

 

우리에게는 1945년 8월15일이 준비되어 있던 해방으로 느껴지지만 당시를 살았을 사람들에게는 갑작스러운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소설 <도정>에는 대개의 평범한 시민들이 어리둥절해할 동안 재빠르게 몸을 바꾸고 변신한 기회주의자들이 그려져 있다. 친일을 했던 사람들이 재빨리 시류를 읽고 가장 먼저 처세를 바꾼다. 그리고 지도층 인사로 금세 올라선다. 주인공 석재는 당원 가입서에 스스로를 “소부르주아”라고 쓴다. 차마, 자기 스스로를 미화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설을 썼던 지하련, 임화의 아내는 남편과 함께 월북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었다. 정확한 사인이나 사망 시기가 밝혀지지도 않았다. 우리 문학사에서 월북 문학인이라는 이름으로 1988년 해금조치가 되기 전까지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던 이름이다. 지하련이 읽힌 지는 고작 20년 안팎이다. 참으로 복잡하고 가슴 아픈 현대사가 아닐 수 없다.

 

광복 72주년이다. 하지만 우리는 35년의 시기를 그리고 이후 70여년을 충분히 돌아보지 못했다. 엄밀히 말해, <군함도>는 감독 류승완의 작품 중 가장 완성도가 떨어진다. 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낙제점을 줄 만하다. 하지만 그가 던진 논란은 분명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쟁점이다. 작품을 이유로 친일파를 감싸기만 하는 게 잘못이라면 작품을 이유로 논쟁까지 파묻는 것도 잘못일 테다. 어쩌면 우리는 더 많이, 더 자주 이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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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먼저, 초대받아 보고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조금 죄송하지만, 영화 <덩케르크>는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봐야 제격이다. 죄송하다고 말한 이유는, 아이맥스 상영관이란 필름 영화 최고의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상영 시스템이지만 사실, 보편화되어 있거나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 <덩케르크>가 아이맥스와 65㎜ 필름 카메라로 촬영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이미 관객들 사이에서는 아이맥스 영화관 예매 열풍이 불고 있다. 적어도 <덩케르크>만큼은 극장에서 그리고 아이맥스 전용 상영관에서 봐야 한다는 공감이 형성된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는 한국 영화계에 ‘플랫폼’이라는 낯선 용어를 일상어로 전달하는 데 한몫을 했다. 봉준호 감독과 영화 <옥자> 입장에서야 이런 현상이 반가울지 당혹스러울지 모르겠으나, 영화 상영 시스템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이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옥자> 때문에 격렬해졌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말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옥자>는 상영관이 아니라 집에서 보는 콘텐츠이다. 그럼 이런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TV에서 볼 수 있는 드라마나 혹은 VOD와 도대체 영화관 영화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와 같은 질문 말이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사실주의 및 아날로그 영화의 장인으로 불린다. 이 호명엔 몇 가지 맥락과 의미가 숨어 있는데, 여기서 말한 사실주의란 소재만 두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그가 연출한 <인터스텔라>나 <인셉션>은 현실에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아예 현실적 감각으로는 체험하기 어려운 허구적 세계를 다루고 있다. 배트맨과 조커가 등장하는 <다크 나이트>는 또 어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실주의의 장인으로 불리는 까닭은 최대한 눈속임으로써의 영상기술의 사용을 자제하기 때문이다. <인셉션>에서 거리가 폭파하는 장면은 직접 폭발물로 연출했고, <인터스텔라>의 대규모 화재나 먼지 폭풍도 사람의 손으로 재현해냈다. 영상물을 적당히 컴퓨터 그래픽으로 손봐 복사하기, 붙여넣기를 하지 않고, 찍고 싶은 장면을 사실적으로 구성한 뒤 그것을 촬영했던 것이다. 말 그대로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는 재현(representation)과 모방(mimesis)의 가치를 신봉한다.

 

봉준호 감독 역시 필름 카메라와 사실적 재현을 사랑하는 연출자로 잘 알려져 있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이 암시하듯 봉준호 감독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시각적 재현의 사실성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쉽게도 봉준호 감독에게는 <설국열차>가 마지막 필름 영화였다고 한다. 기술의 발전과 편리성의 확장으로 이제는 아날로그 필름으로 작업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 것이다. 마치 필름 카메라가 취향으로 남고 실용성에선 거의 모두 디지털 카메라로 대체되었듯이 말이다.

 

그런데 <덩케르크>를 보자면 역시 영화는 소재, 이야기, 구성, 배우 모든 요소들을 다 차치하고 우선 아름다운 볼거리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아이맥스 스크린에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는 순간 그 어떤 것과도 비교 불가능한 압도적 숭고함을 체험하게 된다. 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필름과 아이맥스 카메라를, 그리고 왜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되었던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고집했는지 저절로 공감하게 된다. 최대한 실재에 가깝게, 그건 우리가 스크린 위에 담겼던 첫 번째 영상물, 첫 번째 영화를 보고 느꼈던 그 감동의 실체이기도 하다.

 

물론 필름 카메라나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다고 해서 아무나 이런 리얼리즘의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닐 테다. <덩케르크>의 가장 의미 있는 지점은 바로 이 뛰어난 영화 촬영술을 전쟁의 스펙터클 즉 화려하고, 사실적인 전투 장면의 노출에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점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후 우리에게 전쟁영화는 사실감 넘치는 전장의 스펙터클화에 치중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옆에서 총격을 받아 눈이나 머리가 관통당하고, 장기가 훼손된 채 울부짖거나 잃어버린 다리를 붙들고 울고 있는, 전장의 초근접 촬영술과 그것의 재현이 바로 전쟁영화의 문법처럼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헥소고지>든 <연평해전>이든 최근의 전쟁영화들은 이렇듯 관객들에게 당시의 처참한 상처들을 스펙터클로 활용해왔다.

 

하지만 <덩케르크>는 그 카메라를 공포로 옮겼다. 스펙터클을 구경하는 관객의 공포가 아니라 전장에 있었을 그들, 그들의 개연적인 공포 말이다. 이 시점 이동을 통해 덩케르크의 생존자들은 대단한 생존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어쩌면 그저 운이 좋아서 생존한 사람들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덩케르크 해안에서 사망한 병사들이 나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운이 나빠서 죽은 것과도 같다. 사람의 생과 사를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막막함. 그 처절한 무력감이야말로 전쟁의 공포이다. 전장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나 지혜만으로 삶을 지속할 수 없다. 생과 사가 우연에 맡겨지는 것, 사실 그게 부조리가 아니고 무엇일까?

 

우리가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 것들은 이런 것일 테다. 단순히 화려한 스펙터클이나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노출적 볼거리가 아니라 너무 똑같아서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일상을 한 번쯤 멈추게 하는 자극, 그래서 그 자극이 삶을 한 번쯤 돌아보게 하는 신선한 정서적 환기. 만약 이런 것들이 여전하다면 사람들은 영화관으로 가는 수고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강유정 |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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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축학개론>의 서연(수지)과 승민(이제훈)은 빈집에서 첫 데이트를 한다. 데이트인 줄 모르고 하는 데이트이다. 자신이 사는 동네를 탐색하라는 과제를 하다가 같은 동네 정릉에 사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났고, 정릉 토박이인 승민이 제주도가 고향인 서연에게 이곳저곳 안내를 해주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서연의 마음을 단번에 끈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빈집, 버려진 집이다. 승민은 주인이 없는 곳이라 들어가기 망설이지만 서연은 “뭐 어때?”라며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두 사람의 성격과 닮아 있다. 서연은 그렇게 빈집의 문을 요란한 소리로 열고 들어가, 죽어 있는 시계태엽을 감아 살려 준다. 승민은 주인 없는 물건에 손을 댔다고 겁내지만, 서연은 또 한 번, 뭐 어때 죽은 거 살려준 건데, 라고 말한다. 그때, 승민의 마음속 첫사랑의 시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흐르기 시작한다. 마치 죽어 있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처럼.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한 장면.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둘이 그렇게 쓸모없는 공간, 말하자면 등기도 되지 않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곳만 골라가며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이다. 다음 만남에서 두 사람은 개포동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서울을 내려다보며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나눠 듣는다. 풍광이 너무나 아름답지만, 옥상은 추억을 쌓되 살 수는 없는 곳이다. 그리고 오래되고 버려진 역사에 가서 철길을 걷고 미래를 이야기하고, 마침내 첫 키스를 나눈다. 그나마도 서연이 잠들었는지, 잠든 척했는지 모를 그런 순간에 벌어진 첫 입맞춤이다. 두 사람의 기억은 불균형하다. 두 사람이 나눈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누군가에겐 너무 소중하지만 누군가에겐 그저 이야깃거리에 불과하다.

 

두 사람이 데이트를 나누는 공간들은 그렇게 쓸모가 없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공간이다. 어쩌면 추억의 아름다움은 쓸모와 반비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는 이처럼 은밀한 기억을 나누는 장소는 대개 무쓸모하다. 경제적으로 봐서도 가치가 없고 등기하거나 서류로 만들 수 없는 빈 곳이 많은 것이다. 가령, 강동원 주연의 <가려진 시간>에 주요 테마로 등장하는 공간도 그렇다. 두 아이들이 서로의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고, 비밀을 공유하던 집 역시 이곳저곳이 부서진, 버려진 집이다. 그렇게, 소중한 것들은 등기되지 않는,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니, 어쩌면 정말 귀중한 기억들은 그렇게 버려진 곳에 가만히 보관되고, 쌓이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기형도의 시 ‘빈집’의 한 구절처럼 가엾은 내 사랑은 빈집에 갇히는 것이다.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보고 난 첫 느낌은 바로, 그렇게 잊혀져 있던 첫사랑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첫사랑은 어쩌면 실패하게 될 운명일지도 모른다. 성큼성큼 발소리를 내며 걸어 들어온 서연의 다가옴이 사랑의 시작인 줄 모르고 하루를 보낸 승민처럼, 어쩌면 노무현 시대를 지났던 우리들도 그렇게 그게 사랑인 줄 모르고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노무현입니다>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하지만 상당히 편파적이고, 주관적이다. 어떤 의미에서 다큐멘터리의 편파성과 주관성은 모순이며 역설이다. 그러나, <노무현입니다>에서만큼은 그 편파성이 꽤나 설득력이 있다. 말했다시피, 이 영화는 사랑인 줄 모르고 지나쳐 버린 누군가가 시간이 흘러 뒤늦게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사후적 고백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고백은 사적이면서, 주관적이다. 그리고 기억은 어떤 의미에서건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마치 버려진 역사에서의 입맞춤에 대한 기억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듯이.

 

말하자면 <노무현입니다>는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정치적 공과나 사법적 진위를 가리는 작품이 아니라 노무현이라는 사람에 대한 기억의 재구성이다. 아니 회고를 넘어서 어쩌면 살아남았기에 매일 조금씩 달라지고, 변할 수밖에 없는 남아 있는 자들의 회상이자 뒤늦은 고백이다. 노무현을 회상하는 이들의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진 장면들에서, 누구 하나 눈빛이 촉촉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걸 두고 과장이나 연출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정면을 마주하는 그 정직한 촬영방식은 직접적으로 그 감정을 전달해 준다. 좌절과 기쁨의 순간을 기록해둔 장면들은 노무현 개인에 대한 고증이라기보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던 기억의 편린을 다시 꺼내준 것에 가깝다. 관객들이 마주하는 것은 과거의 어떤 사실이 아니라 잊고 있던 어떤 감정이다. 노무현을 통해 뜨거웠던 나, 그런 나와 다시 마주하는 것이다.

 

첫사랑부터 완숙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첫사랑엔 서툴고, 또 실수투성이이다. 그렇게 해도 될 줄 알고, 첫사랑엔 쓸데없는 고집도 피우고, 해서는 안될 말도 내뱉곤 한다. 시간이 흘러, 삶을 알고 난 후 그 첫사랑의 회복불가능을 체험하고 나서야 우리는 그것이 첫사랑이었음을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여기 이렇게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7월5일 개봉한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주인공 피터 파커도 목하 첫사랑 중이다. 학교에서 가장 아름답고, 상냥하고 열성적이며 똑똑하기까지 한 그녀는 누가 봐도 첫사랑의 주인공이 될 만하다. 과연 그 첫사랑은 어떻게 될까.

 

돌이킬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은 아마도 새 희망의 정수리에 부어야 마땅할 것이다. 한용운의 시처럼 말이다. 너무 쉽게 믿음을 버리지 않고, 너무 아프게 사람을 흔들지 않고, 한 사람에 대한 열정을 너무 냉정하게 미움으로 바꾸지 않고, 그렇게 조금은 시간을 두고 바라보는 것, 그게 바로 두 번째 사랑의 태도가 아닐까? 문득, <스파이더맨>을 보며, 엉뚱하게도,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의 실패가 생각나고 말았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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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날이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다행히도 대개 분별 있는 관찰자이기 때문에 꽤나 합리적으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판단한다. 보이지 않는 손을 주창한 애덤 스미스는 먼저 분별 있는 관찰자로서의 인간을 믿었다. 법이 아니라도 가해자와 피해자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상식이라는 분별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도덕감정을 기반으로 해서 인류는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을 마련한다. 타인들과 특별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을 때, 그 분별력은 더욱 공정해진다. 그래서 대개 사람들은 피해자들에게 공감을 하고, 위로를 건네고, 격려를 보탠다. 최근에 벌어진 한 사립 초등학교의 폭력 사태만 해도 그렇다. 네 명의 아이가 해를 가했고, 한 명의 아이가 해를 입었다. 그런데,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가 없다. 여론이 들끓었다. 분별 있는 관찰자로서 사람들은 공평한 처사를 요구했다. 그 누구도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나와 관계없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일에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참여하곤 한다. 세상이 조금씩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엘르>의 한 장면.

그런데, 놀랍게도, 누군가는 그 특정한 가해자의 편에 서기도 한다. 이때 활용되는 논리 중 하나는 그 가해자도 ‘어린이’이며, 이런 논란으로 인해 사건과 관계없는, 같은 초등학교의 선량한 다수가 피해를 입고 있다는 식이다. 심지어, 피해자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까지 들린다. 그런데, 이런 논리들은 이미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피해자의 경험을 나와 무관한 ‘일회적 사고’로 만들고 가해자의 폭력을 인간적 실수로 환원하는 것, 우리는 지금껏 수많은 사건들이 이런 식으로 희석되는 순간들을 목격해왔다. 그래서 엉뚱한 생각이 든 것이다. 가해자임이 분명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누가 더 억울한지 서로에게 고변하도록 해보면 어떨까? 가해자들끼리 모여서, 네가 더 나쁘다 넌 좀 억울하겠다와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게 하면 어떨까? 아마 서로 자기만 억울하고, 다른 가해자들은 뻔뻔하다며 더 호되게 비난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 말이다.

 

폴 버호벤 감독의 <엘르>는 그런 점에서 피해자와 그들에게 쏟아지는 다양한 시선의 폭력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 미쉘(이자벨 위페르)은 어느 날 갑자기 복면을 쓴 괴한에게 폭행을 당한다. 그런데, 이 여성의 다음 행동이 놀랍다. 미쉘은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스스로 폭행범과 맞서고자 한다. 무섭지도 않을까 싶지만, 사실 이미 그녀는 세상이 피해자를 어떤 방식으로 한 번 더 가해하는지 경험한 바 있다. 열한 살 소녀였던 시절, 미쉘은 아버지의 엽기적인 살인으로 세상에 무차별적으로 두드려 맞은 경험이 있다. 그녀 역시 피해자였지만 아무도 그녀를 피해자로 보아주지 않았다. 살인자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감독이 미쉘이라는 인물을 그려나가는 방식이다. 미쉘은 여러 면에서 그렇게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이지 않다. 게임 회사 대표인 그녀는 더 잔인하고 선정적인 게임을 만들어내라고 조직원들을 닦달한다. 남자 직원들을 다루는 모습을 보자면 마초적인 남성 상사 그 이상이다. 심지어 미쉘은 오랜 친구를 속이고 그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그거로도 모자라,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이웃집 부부를 초대해놓고는 식탁 아래로 발을 뻗어 그 이웃을 유혹하기도 한다. 심지어, 이웃집을 훔쳐보며 음란한 상상을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미쉘이 그렇다고 해도, 대낮에 복면을 쓰고 침입한 괴한에게 맞고 유린당해도 되는 것인가? 불륜을 저지르니 독실한 가톨릭 신자에게 성폭행을 당해 마땅한가? 다시 말해, 그녀가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삶과 다르게 산다고 해서 미쉘이 폭력의 희생자라는 사실이 바뀌는가 말이다. 당연히 그렇지 않다. 미쉘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그녀는 대낮에 자신의 응접실에 있다가 괴한에게 폭행을 당한 희생자가 맞다. 개인의 도덕과 윤리의 영역에서의 염결성 문제와 피해, 가해의 문제는 엄격히 분리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피해 여부와 관련 없는 문제들을 동원해 사실을 흐리고, 피해자들을 엉뚱한 방식으로 괴롭히곤 한다. 만일, 미쉘이 공공의 권력에 기대, 말하자면 경찰에 신고하고 그래서 다수의 언론에 보도되었더라면, 선정적인 게임을 만드는 사업자이자 불륜을 저지르는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피해 여부와 무관하게 다뤄질 수 있었을까? 혹시나 피해 사실은 어느새 잊혀지고 피해자의 과거사와 도덕성에 대한 여론만 들끓지는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피해자들을 이미 보아왔다. 가령, 어떤 사람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울분에 대해 더 많은 합의금을 원한다는 모욕적 발언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세월호 유족들을 향해 개인적 사고에 불과하며 그 사고를 통해 사적 이익을 얻으려 한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혼을 하고, 어떤 사람은 실직자라는 식의 매우 사적인 삶의 영역을 끌고 와 피해 사실과 섞어 그 경계를 흐리게 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분별력 있는 관찰자로서의 자리를 포기하고 진실과 무관한 편견들을 폭력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평소 행실이 올바르지 않은 피해자가 있듯 평소에 선량했던 가해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피해 사실과 분리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선, 소수의 그리고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만약, 인간에게 다른 사람이 느끼는 불안, 공포, 분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 대해 허락된 공감의 능력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더더욱 사태에 대해 스스로 분별 있는 관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사법적 정의를 실현하는 인간으로서의 최소 요건일 수 있을 테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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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1918, 1928.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1893년은 역사상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해이다. 신대륙이었던 뉴질랜드였다. 1918년은 영국 여성들이 투쟁 끝에 30세 이상 참정권을 얻어낸 해이고, 1928년은 그 나이를 20세로 끌어내린 해이다. 정치 선진국이자 우리보다는 훨씬 더 진보적인 성평등을 경험한 국가로 여겨지는 영국에서, 여성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게 아직 채 100년이 안된 것이다. 영국 여성 참정권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서프러제트>에 감동적인 이야기로 그려져 있다. 만약, 현재 개봉 중인 영화 <원더우먼>을 보기 전에 <서프러제트>를 본다면,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농담에서 그 이상의 맥락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DC가 새롭게 부활시킨 <원더우먼>은 사위어 가던 불길을 살려 줄 불씨로 대접받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원더우먼>은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그럴듯한 성적을 거두고 있는 중이다. <원더우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여성’이다. 주인공이 여성 영웅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아마존 데미스키라 여성 전사의 모습도 무척 강렬하다. 전쟁의 신 아레스와 대적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마하고 훈련하는 전사들에게서 여성은 유연성과 아름다움을 보태는 긍정어가 되어 준다.

 

영화 <원더우먼>의 주인공 다이애나 프린스(가운데)가 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어 활약하는 장면.

 

원더우먼의 여성 전사로서의 가치는 오히려 그녀가 영국에 왔을 때 더욱 두드러진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무렵, 런던이라는 대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영국식 여성’에 순화되기를 요구받는다. 분량으로 따지자면 몇 장면 되지는 않지만, 아마존다운 모습을 지우기 위해 다이애나는 백화점에서 2000벌이 넘는 옷을 입어보고, 그녀에게는 수족과도 같은 칼을 압수당하게 된다. 여성 비서는 칼을 뺏으며, 이렇게 말한다. “여성 참정권 과격운동에 참여하실라고요?”

 

<원더우먼>이 여성 영웅을 다루는 방식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다이애나가 가진 공감과 연민의 힘을 여성 영웅의 동력으로 이해한다는 점 때문이다. 다이애나는 정의를 위해 그리고 전사로서 악을 물리쳐야 한다는 당위성을 마음에 담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주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다. 대개, 여성적 약점으로 여겨지곤 했던 감정을 다이애나는 힘의 원동력으로 쓴다. 그리고 이 순수한 열정과 사랑이 주변 사람들까지 움직이게 한다.

 

사실, 엄밀히 말해, 여성 영웅이 대중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영화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20세기 초, 시리얼 퀸 멜로드라마가 미국 대중 영화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활기차고 독립적인 여성들은 직접 모험에 나서고, 액션을 감행했다. 소위 새로운 시대에 나타난 신여성들이 모험 활극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여성 영웅들은 대개 결혼을 기점으로 모험을 끝내거나 악당들에게 잡혀 거의 사디즘적인 고통을 받곤 했다. 기차에 줄로 묶여 있는 여성이나 입에 재갈이 물린 주인공이 얼른 떠오르는 것도 이런 영화적 관습의 결과일 것이다.

 

많은 영화학자들은 독립적인 여성의 급성장이 환호와 공포를 불러왔고, 그 결과가 바로 시리얼 퀸 멜로드라마였다고 평가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한동안 여성 영웅이 주인공인 영화가 거의 없었던 것은 그만큼 여성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위협적일 만큼 성장하지 않으면 다루지 않는다. 반대로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 여혐(여성혐오) 논란도 어쩌면 여성의 상대적 성장에 대한 왜곡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영화들 중 가장 인상적인 여성 영웅의 모습이라면 바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 등장하는 여성들일 것이다. 퓨리오사가 믿는 것은 권력이나 지배의 힘이 아니라 생명의 힘이다. ‘물’에 압축된 생명의 힘은, 만삭이 된 몸으로도 동료를 지키고자 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할머니가 되어서도 딸들을 지키고자 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주된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영원한 안식이라는 허망한 꿈에 스스로를 희생하라는 아버지의 명령과 달리 퓨리오사를 비롯한 여성이 꿈꾸는 세계는 강인하지만 따뜻하다. 엔진과 배기가스가 작열하는 액션 영화에서 여성이 돋보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원더우먼>을 연출한 페티 젠킨스는 제작비 1억달러가 넘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첫 여성 감독이라고 한다. 사실, 여전히 수많은 영화들에서 여성들은 남자 주인공의 이름만 부르거나 그나마도 그 주인공을 위기에 몰아넣는 민폐 요소인 경우가 많다.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아 새롭게 리부트한 영화 <미이라>의 여주인공 제니가 얼마나 남자 주인공 ‘닉’을 부르는지, 어떤 점에서,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닉’을 부르는 것 외엔 없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차가 전복해도 닉, 좀비가 따라와도 닉, 비행기가 추락해도 닉, 물에 빠져도 닉. 어쩌면 여전히 많은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 주인공의 이름을 각인하는 호명-기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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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롯일까, 스펙터클일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다를 바 없이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도 플롯 우선주의자와 스펙터클 우선주의자가 있다. 볼거리를 의미하는 스펙터클이 없다면 과연 영화가 소설이나 연극과 어떤 차이가 있겠냐고 물을 수 있겠고,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플롯 없는 볼거리만 이어진다면 그것 또한 행위예술이나 시각미술과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에 대답이 궁색하긴 하다.

 

대중과 영화의 만남을 다루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영화는 근대의 산물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발터 베냐민은 보들레르의 글을 빌려, 영화를 근대인의 지각체계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미적 수단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영화의 형식적 원리가 충격과 혼잡함을 바탕으로 하는 도시적 감각과 어울린다고 본 셈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인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의 한 장면.

 

발터 베냐민의 말처럼 영화가 탄생한 이후, 대중은 이 현란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영화사의 굵직한 기록들이 시각적 혁명에 닿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듯싶다. 스펙터클 역사 서사극 <벤허>도 그렇고, 가깝게는 <타이타닉>이나 <아바타>도 그렇다.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각적 자극, 그 앞에서 많은 대중들은 환호했고 그 기술력에 감탄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과연 이런 영화들에 대한 환호가 그저 기술적인 것에 그쳤을까 싶기도 하다. <벤허>의 중심엔 복수가 있고, <타이타닉>과 <아바타>의 가운데에는 불멸의 사랑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런 중심의 이야기를 우리는 서사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그 서사가 새로운 게 참 드물다는 점이다. 불멸의 사랑이나 복수, 그 얼마나 오래된 이야기란 말인가? 그 오래된 이야기를 이렇게도 놓고, 저렇게도 놓아서 낯익지만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것, 어쩌면 그게 바로 이야기꾼들의 오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21세기 들어 가장 성공한 해양 블록버스터 중 하나인 <캐리비안의 해적>의 다섯 번째 이야기가 대중에게 선을 보였다. 영화의 중심축은 여전히 잭 스패로우 선장이다. <캐리비안의 해적>은 2003년 첫선을 보인 이후 거의 실패한 적이 없는 성공적인 프랜차이즈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세월이다. 잭 스패로우야 워낙 강렬한 아이 메이크업과 과도한 복장으로 생물학적 나이를 숨길 수 있겠지만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대개의 배우들이 이제 제법 나이도 먹고, 중견 배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비슷한 문제를 경험한 <배트맨>은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노쇠해진 배트맨을 다룬 바 있지만, 이는 영화적 환상의 외피를 찢고 현실의 개연성에 부딪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주인공이 늙고, 흔들리고, 비루해지는 것, 사실이야 그렇지만 영화란 어느 정도 물리적 세계와 동떨어진 환상의 공간 아니던가?

 

그러다보니 <캐리비안의 해적>은 여러모로 마치 <스타워즈>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세대로의 캐릭터 이주를 계획한 듯싶다. 새로운 개체에 <캐리비안의 해적>이 가진 이야기 DNA를 심어놓겠다는, 말하자면 서사적 번식을 선택한 셈이다. 자, 그렇다면 문제는 다시 이야기다.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14년의 세월만큼 훨씬 세련된 스펙터클을 선사하고 있다. 아쉬운 건 볼거리, 스펙터클의 사실성이나 박진감이 아니라 이야기다.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의 부주제는 “나는 너의 아버지이다(I’m your father)”로 요약된다. 아주 오래전부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써왔던 오래되고 익숙한 주제인 가족주의의 끈을 부여잡은 셈이다.

 

가족을 소재로 한 코미디 애니메이션 <보스 베이비>의 한 장면.

특수한 구심점 없이 다양한 인종으로 결합된 미국에서 가족은 종교이며 이념이며 신념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떤 시기를 막론하고 미국 영화는 늘 경건하게 가족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때로는 만병통치의 치유법처럼 어떤 이야기라도 가족으로 귀결된다면 그럴듯하게 여겨지도록 권유되는 작품들도 있곤 했다. 하지만 때로 그 가족이라는 게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처럼 쓰일 때, 가족은 궁색한 변명거리가 되고 만다.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가족이 먼저야, 혈육이 최고야와 같은 말을 내세우는 건 어쩐지 허약한 자기기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가족 이야기이긴 하지만 <보스 베이비>가 다루는 그 방식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것도 이런 맥락과 닿아 있다. <보스 베이비>는 가족의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심리적 곤란을 영화의 밑바닥에 깔고 있다. 동생을 맞이해야 하는 형의 고통, 그건 모든 가족의 아름다움 아래 놓인 격렬한 감정의 파고이니 말이다.

 

만일 대중 영화가 가족을 추구한다거나 파편화된 이미지를 추구한다거나 그 어떤 징후들을 보인다 해도 그 속엔 나름의 현실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 현실성은 결국 볼거리가 아닌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개별성을 찾아내는 노력의 산물일 것이다. 뻔한 게 문제가 아니라 그런 뻔한 문제를 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기술보다 이야기의 힘을 찾아야 하는 우리 영화도 잊지 말아야 할 문제일 듯싶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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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출장은 드문 기회이다. 일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전혀 모르는 낯선 타인들과 섞여 좁은 공간에 열 시간 이상 머무르는 게, 어디 일상적일 수 있을까? 답답함이 숨통을 조여 오기도 하지만 막상 이륙 후엔 오랜만의 혼자라는, 즐거운 고독감이 찾아온다. 특히 의외의 영화들을 ‘다시’ 발견할 때 그렇다. 영화평론가라는 직업상 대개의 기내 영화들은 이미 본 것들인 경우가 많다. 몇 편 보지 않은 작품들이 있는데, 그건 못 본 영화라기보다는 보고 싶지 않아서 미루거나 배제한 작품들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도 오지 않는 긴 비행 중, 기내의 모든 조명까지 꺼진 이후라면, 그렇게 평소라면 보지 않았을 영화들을 건드려 보게 된다. 이번 비행의 수확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줄리에타>였다.

 

지금이야 가장 대중적인 장거리 운송수단이 비행기가 되었지만 사실 그 자리에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기차와 함선이었다. 특히 기차는 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 작품들에 등장하곤 하는데, 이는 비단 과거에 해당하는 일만은 아닌 듯싶다. 로맨스 영화의 고전이 된 <비포 선 라이즈>에서의 결정적 장소도 기차 안이고,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도 기차가 없다면 서사의 전개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오리엔탈 특급 살인 사건>이나 <낯선 승객>과 같은 1960년대, 1970년대 고전 스릴러에서도 기차는 매우 중요한 밀폐공간이었다.

 

스페인 출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2016년에 만든 영화 <줄리에타> 속 한 장면.

그런데, 기차라는 운송수단 혹은 여행수단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책을 읽기 가장 좋은 탈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기차 안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문학이나 영화 혹은 미술 작품 안에서 보고는 한다. 에드워드 호퍼의 ‘293호 열차 C칸’이라는 그림을 보면 한 여성이 고개를 숙인 채 무엇인가를 골똘히 읽고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도 기차 안에서 책을 읽고자 하고, <생활의 발견>의 여주인공도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 그리고, <줄리에타>의 주인공 줄리에타도 그녀의 전공인 고전문학 책을 꺼내서, 막 마에나디즘(maenadism·광란주의)에 관한 부분을 읽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런 줄리에타의 눈길을 뺏는 게 등장한다. 바로 멋진 뿔을 가진 수사슴이 느린 동작으로, 촬영된 이미지처럼, 기차와 나란히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줄리에타는 책에서 눈을 떼 창밖의 사슴을 바라본다. 그렇게 아름답고도 우아한 장면은 일상의 어느 한 순간에 편입되기 어렵다.

 

우리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보는 것들은 뻔한 의미에 정박하는 기계적 순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우리 머릿속에 어떤 자동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삶을 벗어난 자극과 새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일상에서라면 결코 떠오르지 않을 ‘생각’을 건드린다. 그러니까 기차가 ‘생각’을 낳는 것이다.

 

그렇게 낯선 생각에 빠진 줄리에타에게 한 남자가 말을 건다. 누가 봐도 남루하고, 음울해 보이는 남자는 줄리에타에게 다가와 ‘말동무’가 되어 달라고 말한다. 말동무, 그러니까 남자는 책을 읽고, 창밖에 시선을 둘 정도라면 어떤 ‘생각’을 하는 여자라 여기고 말을 건 것이다. 그러나 줄리에타는 그 생각의 무게가 버거워, 대화를 거절하고 자리를 뜬다. 안타깝게도 그는 젊은 여성과의 대화를 끌어낼 만큼 매력적이지도 섹시하지도 않았던 셈이다.

 

그런데, 잠시 후 기차가 정차하고 만다. 뭔가 물컹한 물체가 기차의 바퀴에 감촉된다. 사람들은 창밖을 지나던 수사슴이 혹시나 기차에 치인 것은 아닐지 염려한다. 하지만 줄리에타의 예감은 좀 다르다. 그리고 그 나쁜 예감은 어긋나지 않는다. 줄리에타는 남자가 제안했던 대화를 거절했다는 사실에 큰 죄책감을 느낀다. 문제는 그 죄책감이 살아 있는 그녀의 감각적 고민을 넘어서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영화 <줄리에타>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앨리스 먼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이 살아 있는 자의 미미한 고민은 원작에 더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녀는 생리혈이 혹시나 치마에 묻지 않았을까 걱정하고, 식당 칸에서 만난 남자의 성적 매력이 주는 불안한 긴장감에 더 집중한다. 죄책감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지만 한편 살아 있기에 죄책감보다는 에로스의 당김과 감각적 불편함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영화 <줄리에타>와 소설집 <떠남(런어웨이)>의 단편들은 작고, 미묘한 삶의 부분 부분들, 일상과 비일상의 아주 작은 틈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이런 작은 틈들은 정치나 경제와 같은 큰 문제들이 제법 안정되었을 때, 비로소 그 발견이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주제들이기도 하다.

 

지난 몇 년간을 돌아보자면, 특히 영화계에서는 이런 작고, 소소한 문제를 다루기 어려웠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기내에서 <줄리에타>를 보며 느꼈던 각성과 감동도 사실 그 희유함과 낯섦에서 기인했다. 그동안 우리는 늘 과감하고 과격한 선과 악의 대결에 더 집중해야 했고 또 그러기를 요구받았던 것이다.

 

세상이 좀 달라졌다. 달라진 세상이란 이렇듯 소소하고 작은 일상에 다시 관심을 갖고, 마치 기차를 탄 여행객처럼 책을 읽고, 영화를 보다가, 마침내 ‘생각’에 빠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그런 세상이 아닐까? 우리가 너무 큰일들에 치이느라 미처 돌보지 못했던 삶의 균열들, 그런 균열들에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시절이 왔으면 좋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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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 하면 정치와 사업이 떠오른다. 아무나 정치를 할 수는 없다. 또 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누구나 사업을 하긴 어렵다. 시작이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실패할 확률이 더 높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말도 간혹 듣는다. 정말 정치를 하면 좋을 사람들은 대개 엄두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를 해서는 안될 사람들이 정치판 근처에 얼씬거린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정치적이라는 말은 칭찬이라기보다는 비판이 되고, 수완이 좋다는 말도 그 사람이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계산을 따지는지에 대한 다른 표현이 된다. 여기 두 명의 성공한 남자가 있다. 한 사람은 정치적으로 성공한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사업으로 성공한 사람이다(아래엔 영화의 내용이 암시되어 있다).

 

영화 <특별시민>은 3선을 노리는 서울시장 변종구(최민식)에 대한 이야기다. 이미 재선인 변종구의 최종 목표는 사실 시장에 거듭 재선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시장실 창문 너머 보이는 청와대를 보며 그 푸른 기와가 오늘따라 더 아름다워 보인다며 욕심을 갖는다.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 공공연한 공식으로 여겨지는 서울시장, 대선 입문이라는 절차를 그 역시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3선 서울시장을 발판으로 대권을 노리기 위해 선거에 뛰어든 정치인 ‘변종구’를 그린 영화 <특별시민>(위)과 사업가 ‘레이 크록’의 햄버거 프랜차이즈 맥도널드 성공신화와 이면을 다룬 영화 <파운더>의 한 장면.

 

그런데, 서울시장 선거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악재가 자꾸 발생한다. 자연재해도 있고, 스스로 자초한 인재도 있고, 또 해서는 안될 심각한 실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이다. 서울시장 변종구는 이러한 악재들을 해결하기 위해 매우 정치적인 선택들을 해 나간다. 그런데, 영화 속에 그려진 그 정치적 선택들은 비인간적 선택, 비윤리적 행동, 비도덕적 판단으로 실행된다. 그는 재선을 위해 가족을 버리고, 친구를 버리고, 동료를 버리고 마침내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도 버린다. 시장에 재선되기 위해서 그에게는 해선 안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변종구가 보여주는 행위들은 지금 우리가 합의하고 있는 정치인에 대한 짐작과 유추 그대로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유권자들에게 정치인은 썩은 입냄새가 나는 거짓말쟁이다. 아니 그보다도 못하다. 정치인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범죄라도 저지를 수 있는 파렴치한이며 몰염치배이다.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인간적으로 스스로 믿는 사람이라면 정치는 해서는 안되는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특별시민>에 그려진 정치판은 흥미롭게도 영화 <파운더>에 그려진 사업의 세계와 닮아 보인다. <파운더>는 누구나 한번쯤 맛봤을 법한,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기업 ‘맥도널드’에 대한 이야기다. 햄버거 맥도널드는 진짜 맥 도널드에 의해 발명되고 개발되었다. 하지만 기업 맥도널드의 사장은 맥 도널드가 아니라 레이 크록(마이클 키튼)이다. 나이 오십줄에 방문판매원으로 살아가던 레이 크록은 어느 시골 궁벽진 곳에 문을 연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를 보고 단박에 그 가치를 알아본다. 그는 거의 사정하다시피 애원해 맥도널드 프랜차이즈화를 시작하고, 이내 미국 내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시키게 된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파운더>는 레이 크록이라는 인물의 아름다운 아메리칸드림 성공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치 않다. 레이 크록은 말하자면 맥 도널드 가족에게서 맥도널드를 뺏은 인물이다. 일례로, 지금 맥 도널드 가문은 맥도널드 프랜차이즈로부터 단 1%의 이익도 받지 못하고 있다. 구두계약으로 지불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짐작하다시피 서류로 남지 않은 계약은 아무 효력이 없다. 믿음, 신의, 고집으로 시작된 맥도널드는 이제 전 세계적 부동산 기업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레이 크록은 성공하자마자 맥 도널드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조강지처와 이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배은망덕이 그의 성공의 지름길이다.

 

<특별시민>의 변종구와 <파운더>의 레이 크록은, 이를테면 성공한 악당이다. 성공이라는 게 정치적 승리, 이익의 창출에 있다면 그들은 분명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성공이라는 게 무척이나 씁쓸하다. 영화 속에 그려진 성공한 사람, 출세한 사람들은 남을 믿지 않고, 남의 선한 구석을 파고들어 그 안에 자기 승리의 씨앗을 심는 자들로 그려진다. 모든 것이 다 연기이고 계산이다. 갱스터 영화나 누아르 영화에서 보았던 조직폭력배의 세계보다 훨씬 정교하고, 세심하며 그래서 더 공포스럽다.

 

모든 정치인이나 사업가가 영화 속 악당처럼 비열하고,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문장의 속내처럼 그것은 바람이지 판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5월 장미 대선을 앞두고 선거전이 한창이다. 각 캠프의 속사정이 정말 영화와 같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적어도 중요한 핵심, 정치를 하는 이유와 명분에는 사람과 유권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순진한 바람이라고 할지언정 그런 게 없다면, 정치와 사업이라는 게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을 터이다. 지난 대선의 문구였지만, 모든 일엔 사람이 먼저다. 그걸 잊지 않는 선거이고, 그래서 사람이 우선이 되는 정치였으면 한다.

 

강유정 |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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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4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2015년 6월 일본, 책 한 권이 전 사회에 논란을 불러왔다. <절가(絶歌)>라는 책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1997년 6월 엽기적인 살인 행각으로 체포된 연쇄살인범이었다. 3명의 초등학생에게 치명적 상해를 입히고 심지어 생명을 앗고 신체를 훼손하기도 했던 살인범이 고작 8년간 복역하고 세상과 만났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범죄자가 14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소년이기 때문에 범죄자는 소년 A로 보호되었다. 범죄 행각을 과시할 정도로 도취되었던 소년은 출소 후,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의 추억을 담은 책을 펴냈다. 그게 바로 <절가>이다. 피해자들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시점에, 소년범이라 짧은 형을 살고 나온 범인이 그 상처를 판매했던 셈이다.

 

영화화되기도 했던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고백>은 그런 점에서 미성년 범죄자를 보호하는 일본의 소년법에 대해 전면적으로 질문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질문은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악하게 태어나 도덕으로 교화되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과도 통한다.

 

살인 사건으로 14년간 복역하고 ‘잭’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청년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지만 감춰졌던 과거가 드러나면서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며 갈등을 겪는 내용의 영화 <보이 A>(왼쪽 사진)와 200만달러가 든 가방을 찾는 살인마와 그를 쫓는 보안관이 등장하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영화로도 제작된 이 소설을 보자면 아이들은 대부분 선하게 태어나지만 몇몇은 절대적 악의에 의해 지배되는 듯싶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를 물에 빠뜨리고 죽어가는 과정을 즐겁게 바라보고 웃는, 소설 속 소년처럼 말이다.

 

인천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살해 사건은 여러모로 일본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지나치게 잔혹한 수법도 그렇지만 거의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후의 행태들을 봐도 그렇다. 인터넷으로 엽기나 살인을 검색해봤다거나 신체 일부를 가지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보자면 놀라움을 넘어서 마음 어딘가가 날카롭게 아파진다. 어쩐지 대화를 나눔으로써 공감과 연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엽기적인 범죄는 언제나 있었다. 비단, 지금, 여기에서만 발생하는 사건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소년범이라는 점에서 즉, 미성년 범죄자라는 점에서는 이 엽기적 범죄의 사회적 충격은 만만치 않다. 많은 영화들에서 살인을 다룰 때, 그 목적은 분명하다. 영화에서 만큼은 범죄의 원인이 꽤나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프로파일링이라 불리는 작업도 유사하다. 이러이러한 성장 배경을 가진 사람, 이러이러한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 이러이러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사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즉 범죄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인과관계의 위안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프로파일링은 인과관계라기보다는 선후관계의 규명에 가깝다. 인과관계라고 여기면 마음이 더 평온해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유사한 성장 환경이나 트라우마를 가졌다고 해서 꼭 범죄자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범죄가 많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단일한 논리로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는 늘 용의자보다 한 발짝 늦게 도착하는 나이든 보안관(토미 리 존스)이 등장한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보안관이던 시절엔, 이해하지 못할 범죄는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쫓는 범죄자들 가령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와 같은 인물은 도무지 왜 살인을 저지르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늙은 보안관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다만 한 발 늦게 현장에 도착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도 가능하다. 역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보이 A>에는 초등학교 시절 미취학 아동을 살해한 혐의로 복역한 후 훌쩍 성인이 되어 세상과 만난 소년 A가 등장한다. 그런 엽기적인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기엔 소년 A는 너무나 맑고,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다.

무균실에서 갑자기 풀려난 소년처럼 세상에 다치는 그를 보고 있자면 끔찍했던 살인이 어쩌면 아이의 실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핵소 고지>, <사일런스>와 같은 영화에서 순결하고도 진중한 눈빛을 보여주었던 앤드루 가필드는 그 눈빛으로 소년의 순진성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10대를 고스란히 감옥에서 보낸 소년에게 세상은 독하고 위험하다.

 

결국, 다시 질문은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 것인가 악하게 태어난 것인가. 아니 어쩌면 질문이 좀 바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내면 속 깊이 남아 있는 선의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러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 말이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점점 더 이해불가능해지고 잔혹해지고 있는 듯싶다.

 

인간의 공감 능력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엽기적 사태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까. 아마도 그건 제도와 행정을 통한 합리적 해결에 기댄 마음의 자세여야 할 것이다. 불안이 더 익숙한 세상, 부모의 자리에서 미안한 일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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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가운데서 아버지가 등장하는 건 무척 드물다. 이솝 우화, 안데르센 동화, 샤를 페로의 동화들을 뒤져본다고 한들 아버지는 새 아내 그러니까 계모를 집 안에 들이는 계기로 활용되거나 혹은 부재중일 때가 대부분이다. 옛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계모든 친모든 엄마이지 아버지는 아닌 셈이다. 프로이트도 이를 간파해서 엄마와의 애착 관계에서 비롯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다룰 때도 아버지는 매개이지 애정의 대상이거나 최종 지점은 아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옛이야기 중에 아버지가 전면에 등장하는 게 있다. 바로 얼마 전 실사 영화로 변신한 <미녀와 야수>이다.

 

영화 <미녀와 야수>(2017)의 주인공 벨과 아버지.

 

<미녀와 야수>는 아버지와 딸이 등장하는 매우 희유한 동화이다. 아버지가 재혼을 하지 않았고 게다가 딸과 아버지 사이가 유독 좋다. 브루노 베텔하임이라는 아동심리학자는 이를 주목했다. 베텔하임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바탕으로 아버지와의 애착 관계가 지나친 여아의 성장드라마로 <미녀와 야수>를 읽어 냈다. 즉, 아버지와의 불필요한 애착을 끊어 내지 않는 이상 그 어떤 남자도 왕자가 될 수 없다. 남자는 털이 북슬북슬하고, 난폭하고 야만적인 야수에 불과하다. 야수가 교만해서 저주가 걸린 게 아니라 모든 소녀에게 남자는 우선 야수에 불과하다. 벨이 야수를 사랑할 때, 야수가 왕자로 되돌아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보았다. 여자가 마음을 바꿔 사랑할 때, 남자는 야수가 아닌 왕자가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유독 아버지와 딸이 등장하는 옛이야기에선 아버지가 종종 딸의 앞길을 가로막곤 한다. 우리 옛이야기인 <심청전>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심청의 아버지 심봉사는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무턱대고, 아무 대책 없이 공양미 삼백석을 약속한다. 그 때문에 심청은 몸을 팔아 인당수에 빠지고 만다. 말이 효녀이지 아버지 때문에 결국 인신매매에 희생된 딸이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심장도, 눈도 바칠 수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어째 심봉사는 자기 눈을 위해 자식을 희생한다.

 

농담처럼 과장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국의 근대 문학을 살펴보다 보면 이렇듯 자식을 키워 송아지 팔 듯 노름빚 대신 혹은 미두로 인한 손해 대신으로 넘기는 경우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 보면 명님이라는 한 소녀가 등장한다. 가난한 부모는 명님이가 얼른 자라 이차성징을 겪고 여자다운 태를 갖기만 기다린다. 소위 명님이가 키워준 값을 해야 그나마 먹고살 돈이 생기기 때문이다. 명님이도 그런 스스로의 운명을 그저 팔자려니 여긴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초봉이의 형편도 다르지 않다. 초봉의 아버지 정주사는 미두로 손해를 보자, 부잣집 외아들로 소문 난 태수가 호색한인 것도 모르는 척 시집을 보낸다. 딸, 초봉의 앞길은 아버지의 이 실수로 인해 영영 얽히고 만다.

 

영화 <사이코>(1998)의 모텔 주인 노먼 베이츠.

딸에 대한 애착을 가진 아버지를 일컬어 딸바보라고들 한다. 물론 요즘에야 딸을 한밑천 재산으로 보고 키우는 아버지는 거의 없을 터이다. 그래서인지 어쩌면 요즘에는 <탁류>나 <심청전> 같은 이야기보다는 <미녀와 야수>가 훨씬 그럴듯하게 들린다. 딸의 앞길을 막는다는 의미가 딸을 물건 취급한다기보다 너무 사랑하다 보니 망치는 쪽이 더 많아졌다는 의미이다. 사랑이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일은 비단 아버지와 딸 사이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숱한 영화와 이야기 가운데서 어머니와의 애착을 끊지 못해 끝내 세상과 불화한 인물들을 여럿 만난 적 있다. 영화 <사이코>의 주인공 노먼 베이츠가 아마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부모와 자식은 어쩌면 애정을 붙이는 것만큼이나 떼는 게 중요한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딸이라고 해도 아버지 대신 감옥에 갇힌다거나 아버지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벨이 아버지 대신 스스로 감옥에 갇히고 죽음을 불사하는 것은 효가 아니라 미성숙한 어린아이의 실수에 가깝다. 그렇게 어리기 때문에 야수를 사랑하면서도 아버지를 구하러 되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동안 사랑하는 야수가 위험에 처하게 한다. 물론 이런 방식의 동화 해석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비판받고 부정되고는 했다. 브루노 베텔하임이 분석한 모든 동화는 이를테면 성적인 성장의 격동을 표현한 메타포가 된다. 프로이트가 성장의 모든 단계를 성적인 것과 연관시켰듯이 말이다. 흥미롭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동화가 성적인 성장을 은유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분명한 건 모든 어른에게는 라이오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부정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지난 5년을 뒤덮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탈을 쓰는 건 <사이코>와 같은 공포영화적 상황과 다르지 않다. 아버지를 따르는 것보다는 부정할 때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다. 사랑과 애착을 구분하는 것, 딸을 둔 모든 바보들이 알아야 할 문제이자 여전히 아버지의 그늘에 머무는 덜 큰 딸도 알아야 할 점이다. 상징적인 아버지들, 과거, 역사, 적폐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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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최근 극장에서 ‘사람의 본질’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들었다. 사람의 본질이라, 그 얼마나 무겁고도 귀한 말이던가? 첫 번째는 할리우드 슈퍼 히어로 블록버스터 <로건>이다. 놀라운 능력을 가진 소녀를 쫓던 악당들은 소녀와 로건(휴 잭맨)의 행적을 알기 위해 로건의 동료 칼리반을 괴롭힌다. 칼리반은 타고날 때부터 멜라닌 색소를 갖지 못한, 그래서 태양을 견딜 수 없는 엑스 맨이다. 영화 <로건>은 2029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사실 칼리반은 과거에 울버린 로건을 괴롭히는 적이었다. 칼리반에게 햇빛을 쪼이며 악당들은 제안한다.

 

“사람의 본질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잖아? 그렇지?”라고 말이다. 악당은 칼리반에게 로건에 대한 적의가 남아 있고, 그를 추적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지금은 선의를 가진 척하지만 결국 칼리반의 깊은 내면 속 본성에는 악당의 기질이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적들은 칼리반의 그 악당 본성을 꺼내기 위해 그를 괴롭힌다.

또 다른 목격은 <사일런스>이다. 17세기 천주교의 불모지 일본에 두 명의 신부가 파견된다. 선교를 위해 먼저 파견되었으나 배교했다는 소문만 남긴 채 사라진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를 찾기 위해서이다. 페레이라 신부는 파견을 자원하는 두 신부에게 신을 소개해 준 은인이기도 하다. 스승이자 동료, 멘토인 페레이라를 구하기 위해 두 사람은 만류와 저지를 넘어 일본으로 향한다.

 

영화 <로건>(왼쪽 사진)과 <사일런스>. 두 영화에는 ‘사람의 본질’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일본행이 위험한 도박인 이유는 너무도 선명하다. 17세기 일본은 천주교의 무덤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아주 오랫동안 다신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번주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색출해 고문과 참형으로 금지를 알린다. 그런데, 그 고문이나 형벌이라는 게 참으로 끈질기고 집요해서 더욱 끔찍하다. 가령, 작은 구멍이 뚫린 바가지에 100도에 육박하는 온천물을 담아 아주 천천히, 여러 번 맨몸에 뿌린다던가,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구멍에 얼굴만 처박는데 그것도 빨리 죽어서는 안되니 피가 통할 수 있는 작은 상처를 만들어 숨통만 트여 주는 방식이다. 이러한 고문은 형벌이 아니라 처벌의 전시에 가깝다.

 

번주들은 신부들에게 이르길, 네가 배교하면 너를 따르던 수많은 일반 백성들을 살려주겠노라고 거래를 제안한다. 사실 페레이라 신부는 이런 제안을 수긍한 후 이미 일본인 이름을 받아 일본인 아내와 일본인처럼 살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젊은 신부들은 쉽게 제안에 응할 수 없다. 그런데, 그를 설득하던 페레이라가 이런 말을 한다. “산과 강은 움직일 수 있지만 사람의 본질은 움직일 수 없다.” 과연 배교를 설득하던 신부가 내뱉은 사람의 본질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에밀>을 쓴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사람의 본질이 선하고 어질다고 믿었다. 심지어 <에밀>의 첫 구절에 “조물주는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했으나, 인간의 손길이 닿으면서 모든 것은 타락하게 된다”고 쓸 정도였다. 그는 올바른 교육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아름답게 가꿔 나가는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 중 하나는 루소가 ‘자연인’이라고 부른 개념이다. ‘자연인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를 높이 샀지만 자연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싶다. 오히려 자연인은 제 멋대로인 이기주의자의 모습에 가까운데,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동료하고만 관계를 맺고 있는 독립적인 실체”를 자연인이라고 지칭한다.

 

최근 청와대에서 삼성동으로 거처를 옮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부르는 호칭 중 하나가 바로 ‘자연인’이다. 나는 처음엔 왜 박근혜를 전 대통령이나 시민으로 부르지 않고 자연인으로 호명할까 의아했다. 하지만 루소의 <에밀> 가운데 하나의 실마리가 있다. 자연인의 반대편에 놓인 말은 사회인이다. 사회인이란 훌륭한 사회제도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최대한 변형시키고, 상대적인 존재가 되어 자아를 사회 속에 융합시킬 수 있는 인간을 뜻한다. 말하자면 자연인은 사회화가 덜 된 그리고 사회제도를 통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아무렇게나 쑥쑥 자란 자연물과 다르지 않다. 제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런 인간 유형,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동료하고만 관계를 맺는 그런 인간 유형, 그런 유형을 이미 루소가 ‘자연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왜 박근혜가 타인의 고통에도 무감하고, 자신의 잘못에도 무관심한지 ‘자연인’이라는 용어는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는 듯싶다. 애초에 자연인에게는 남이 없다. 사회도 없고 더더군다나 법이나 제도도 없다. 훌륭한 자아는 훌륭한 사회제도 안에서 태어난다. 즉 우리가 힘겹게 동의한 제도 가운데서 본성을 최대한 변형시키고, 상대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훌륭한 자아와 만나고 사회인이 될 수 있다. 오늘도 늘 그렇듯이 머리를 다듬던 미용사가 오전 9시면 삼성동으로 출근한다. 그게 본성이든 습관이든 사람은 그렇게 바뀌기 힘든가 보다. 그러나, 바뀌기 힘들다고 바뀌지 않는다면 그게 우리가 말하는 가치 있는 인간이며 삶일 수 있을까? ‘인간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기보다 정말 바꾸기 힘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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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시험에 부치지 않는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앎과 삶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스스로를 시험에 처하게 하는 것이었을 테다. 이는 그 유명한 델포이 신전의 전언, “네 자신을 알라”의 구체적 지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를 시험에 처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루소의 말처럼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그렇게 따르기 쉬운 격언이 아니다. 루소는 <고백>을 쓰면서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러 번 토로한다. 사실 안다고 믿는 자기 자신은 연출되거나 위장된 자기 자신일 확률이 높다. 우리는 우리이길 원하는 나를 나라고 믿는다. 매일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 속에서는 자신을 돌아보기 힘들다. 그러니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어쩌면 스스로 시험을 자초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무릇 사람이란 일상의 반복을 행복이라 여기며 지내지 않던가? 과연 누가 굳이 닥치지 않은 위험을 연상하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불편을 상상해서 자신을 고민하려 할까?

 

영화 속의 많은 주인공들이 삶의 위기에서 출발하는 이유도 아마 여기 있을 것이다. <비긴 어게인>의 남자 주인공 댄(마크 러팔로)도, <러덜리스>의 주인공 샘(빌리 크루덥)도 그렇다. 그들은 삶이라는 항해에서 처참한 난파선이 된 채 관객들과 만난다. 댄은 음악계에서 거의 추방된 상태이고, 샘은 예상치 못했던 아들의 사고로 삶의 중심을 잃어 버렸다. 최근에 개봉한 한국 영화 <싱글라이더>의 주인공 강재훈(이병헌)도 삶의 벼랑 끝에 서 있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남편 그리고 꽤나 성공적인 직장인으로 살았던 그는 그동안 쌓아왔던 삶 전부가 거절되는 시점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영화 <싱글라이더>의 한 장면.

 

세 주인공의 공통점 중 하나는 바로 그들이 성공한 사회인이기 이전에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새인가 아버지가 가족 내 구성원이 아니라 일종의 직업이 된 것은 아닌가 싶다. 결혼도 선택, 출산도 선택이 된 게 특별한 일이라기보다 보편적 상황이 되었음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어느새, 아버지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남성에 대한 일반적 호칭이 아니라 특수한 처지를 가리킬 수 있는 언어가 되었다. 어쩌면, 한 이십년 후쯤이면 길에서 만난 중후한 장년을 무턱대고, “아버님”이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싱글라이더>는 아버지라는 직업을 가졌으나 미처 그것을 감지하지 못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증권 회사 지점장으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돈과 숫자였다. 얼마나 많은 투자자를 모으고, 얼마나 큰 이익을 얻는지, 숫자로 확인되지 않는 것들은 그에게 무의미하거나 쓸모없는 것에 불과했다. 당연히 가족은 숫자로 환산될 수 없다.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내가 얼마나 필요한지의 문제는 결코 증명 가능한 숫자나 교환 가능한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다.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가치이기에 그에게 가족은 점점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고 따라서 그다지 생각나지도, 그렇다고 마음이 쓰이지도 않는 대상이 되고 만다. 그는 아버지이긴 했으나 아버지는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삶의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고 나서야 그는 겨우 가족을 둘러본다. 아니 엄밀히 말해 그제서야 겨우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자신의 가치와 의미, 위치를 가족 가운데서 찾아보게 된다. 자아는 발견되어야 소유될 수 있다. 그리고 참 역설적이게도 자아를 갖게 되면 그 순간부터 자아는 요령부득의 못 믿을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의 안락을 위해 최대한 의심의 순간을 미룬다. 그러니 우리는 대개 너무 늦게 자신을 돌아본다.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이십년이 넘게 매달 월경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 정확한 날짜를 몰라 허둥지둥하기 일쑤다. 예고된 변화이고 반복된 신체적 반응이지만 아직 그조차도 미지수에 가깝다. 이러다 덜컥 폐경이 온다고 해도 아마도 그때도 나 자신에게 속았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신체도 그런데 영혼과 정신이야 어떨까? 반복도, 패턴도 그렇다고 예고나 지표도 없는 영혼으로서의 나란 얼마나 미지수이던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알 수 없는 게 더 많고, 가장 알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과연, 나란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

 

나 자신을 알고 싶지만 그것이야말로 늘 만시지탄일 듯싶다. 사람은 살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야만 하지만 결국 너무 늦게 자신을 알려 하거나 알고 나면 대개 너무 늦다. 아니 너무 늦은 순간에도 여전히 스스로를 모르는 건 아닐까 싶다. 문학과 영화, 철학이 삶에 어떤 힘을 준다면 그건 다름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위험에 처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편안한 이 삶 속에서 닥쳐서야 느끼게 되는 그런 수동적 위험이 아니라 상상으로 미리 닿아 볼 수 있는 개연적인 위험. 닥치지 않은 위험을 상상해 그 가운데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만이 지닌 능력이 아닐까? 너무 편안하다면 오히려 불안해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무엇인가 괄호에 넣은 채 잊고 산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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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말을 외국어처럼 들어라.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타인의 언어를 외국어처럼 듣게 되면 소통의 장애는 줄어들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통의 장애와 만난다. 가령,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 “미워”라고 말한다면 바로 화가 나겠지만 만일 외국인이 같은 말을 했다면 혹시나 단어를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닐까 먼저 헤아려 본다는 것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소통에 어려움을 가져온다. 만약, 비트겐슈타인이 살아 있었다면 영화 <컨택트>를 보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까? 타인의 언어를 외계인의 언어처럼 들어라, 라고 말이다.

 

영화 <컨텍트>의 한 장면.

영화 <컨택트>는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ies of your life)>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간혹 영화가 수입되면서 아쉬운 번역이나 각색이 발생하곤 하는데, 컨택트라는 제목도 그렇다. <컨택트>는 한국에서 개봉하기 위해 만들어 낸 제목이고 사실 원제는 <어라이벌(Arrival)>이다. 아쉬운 이유는 이 ‘어라이벌’이라는 제목이 영화의 의도를 좀 더 풍부하고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원작이긴 하지만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차별성 역시도 이 원제, 어라이벌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도착을 의미하는 어라이벌은 영화 속에서 여러 중의적 표현으로 확장된다. 첫 번째 의미는 ‘낯선 존재의 도착’이다. 그동안 낯선 존재, 외계인들은 그저 조우(encounter)하거나 침공(attack)하는 존재로 그려지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도착이다. 도착이란 출발과 쌍을 이루는 개념어이다. 어딘가 목적지를 두고 떠났을 때 마침내 가서 닿는 곳이 바로 도착지이다. 그런 맥락에서, <컨택트> 속 외계인 ‘헵타포드’의 도착은 우연한 불시착이 아니라 의도를 가진 도착으로 보아야 한다.

 

어라이벌의 두 번째 의미는 번역 과정에서 발생한다. 번역에는 도착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언어로 쓰인 작품이 출발어라면 그것이 번역된 언어는 도착어이다. 가령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데버러 스미스의 <The Vegeterian>으로 도착하는 것이다. 주인공 루이스(에이미 아담스)가 언어학자로 설정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듯싶다.

 

마지막 어라이벌, 도착의 의미는 아마 삶의 마지막 종착점일 테다. 우리 삶의 종착점은 무엇인가? 바로 죽음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 종착점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시간을 선적인(linear)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출발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태어나면 죽는다.

우리는 이렇듯 결국 죽음에 도착하는 선적인 세계 안에서 직선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간다. 인류의 언어와 숫자가 선적으로 구성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인류가 현재 쓰고 있는 언어 체계는 어떤 언어를 막론하고 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한 방향에서 시작해 반대 방향으로 이어져 마침표를 향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거꾸로 읽어서는 의미가 형성되지 않는다. 삶이 일방향적이듯 언어가 일방향적이며 이는 곧 우리의 사고체계 자체가 일방향적이며 직선적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과 닮아 있다. 운명이 운명일 수 있는 것은 되돌리거나 번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운명관에 기초한 예술미학이 바로 고전 서사로서의 비극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나 <안티고네> 같은 비극을 움직이는 동력은 바로 정해진 운명의 방향이나 결을 바꿀 수 없다는 확정적 운명론이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시간의 일방향성에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는 무게를 덧보탠 게 바로 비극의 운명론이다.

 

하지만, 만약, 언어가 달라지면 어떨까? 영화 <컨택트> 속 외계인 ‘헵타포드’의 언어는 순환적이고 원형적이며, 시제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의 형상 안에 완성된 의미를 담는 진화된 표의어이다. 루이스는 다른 언어가 다른 사고의 반영임을 알고 있다.

 

지구인이 헵타포드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다. 만약, 우리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운명을 따를 것인가 배반할 것인가? 그리스 비극은 따라야 한다는 엄중함을 위해 예언이라는 방식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게 남에게 주어진 예언이 아니라 내 안의 직관을 통한 예측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가 나의 직관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미래 가운데서 고통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과연 미래를 가만히 기다릴 것인가? <컨택트>의 감독 드니 빌뇌브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의지가 가진 기적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듯싶다. 불행을 알면서도 걸어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진 의지의 핵심, 선적 세계에 살아가면서도 그 세계의 규칙을 단숨에 넘어갈 수 있는 초월적 힘이다. 가령, 죽을 줄 알면서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사람들, 가난하고 아픈 연인의 곁을 결국 지키는 다른 연인, 불치병에 걸린 자식을 결국 포기하지 않는 부모. 그 모두는 그 선택이 사람들이 말하는 보편적 행복,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른다.

 

키르케고르는 “내 삶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고,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나는 주저 없이 내 삶을 건다”고 말했다. 그런 것이다. 우리는 삶의 고뇌 안에서도 황홀경을 찾고, 그것이 몸의 고통을 가지고 온다고 할지언정 그 가운데서 기쁨을 얻는다. 영화 속 루이스 딸의 이름은 한나(Hannah)이다. 앞으로 읽어도 한나, 뒤로 읽어도 한나. 결국, 의지만이 일회적인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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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몰랐지만, 지금 한국 영화계의 가장 큰 라이벌은 바로 유해진과 정우성이다.

의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좀 미안하지만 유해진과 정우성은 출발부터 다른 배우였다. 유해진이 <블랙잭>에서 시작해 <주유소 습격사건> <공공의 적>의 배달부, 잡범과 같은 단역부터 디디고 일어났다면 정우성은 이러나저러나 <구미호>의 남자 주연으로 영화계에 입성했다. 지금이야 유해진도 주연급 배우라고는 하지만 정우성은 이제야 조연을 해도 괜찮은 배우가 되었으니 출발이 달랐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타고난 외모 탓이 컸을 테다. 악동 뮤지션의 노래 ‘못생긴 척’의 가사처럼, 연극에서 왕자 역할을 하기 위해선 우선 생긴 게 우선이니 말이다.

 

영화 <공조>의 유해진

 

그런데 이런 외양적인 차이 외에도 한국 영화계엔 유해진표 영화와 정우성표 영화가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유해진표 영화는 대개 휴머니즘을 호소한다.

 

반대로 정우성표 영화는 환멸과 풍자와 같은 좀 더 세련된 주제를 미학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다. 2016년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영화 <럭키>와 <아수라>가 예시가 될 법하다. <럭키>가 기억을 잃은 전문킬러의 인간애를 다룬 영화라면 <아수라>는 극단적 시각예술로 무장한 채 현실을 비트는 냉소적 영화였다. 이런 대조는 2017년 명절 성수기에도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공조>와 <더 킹>, 두 영화에서 말이다.


<공조>와 <더 킹>은, 개봉하기 전엔 현빈과 조인성의 대결로 예측되었지만 막상 극장에 걸리고 난 이후엔 유해진표 휴머니즘과 정우성식 리얼리즘의 대조로 귀결되었다.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이 대조군이 될 필요는 없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두 개념이 서로 대조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공조>를 살펴보면 왜 이런 반의어가 성립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조>의 이야기는 북한의 주수입원이라고 할 수 있을 위조지폐 동판에서 시작된다. 위대한 지도자 동지를 위해 개인의 욕망을 억누르고 살아야 하는 북한 체제에서 욕심을 갖는 것은 위반이다. 국가의 것을 ‘자신’이 소유하려는 자, 영화 속 악역 차기성(김주혁)의 악마성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공조>는 이 악마성을 가족과 동료를 서슴지 않고 죽이는 냉혈한의 이미지로 구체화한다. 그는 가족과 동료를 잃은 개인의 적이자 집단의 적이다.

 

이에 반해 북한의 일급 엘리트 군인 림철령(현빈)과 남한의 형사 강진태(유해진)는 정의의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 정의의 핵심이 바로 인간애 즉 휴머니즘이다. 림철령은 북한체제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한다는 점에서 정직한 군인이며, 가족과 동료를 잊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적이다. 강진태의 휴머니즘은 좀 더 소시민적이다. 그는 형사이긴 하지만 칼 맞는 게 세상 그 어떤 일보다 두려워 차라리 감봉과 징계를 선택한다. 조용히, 탈 없이 공무원 생활 마치라는 아내의 엄명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행동강령인 그는 특별히 나쁘고 초라한 인간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이며 평범한 인물에 가깝다.

 

영화 <더 킹>의 정우성

 

반면, <더 킹>에는 정의롭다고 할 만한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겨우 존재한다면, 자신의 삶에 충실한 샐러리맨 검사와 감찰부 여검사 정도일 뿐, 워낙 미미해서 거의 없는 듯이 그려진다. 조연을 무시한다는 게 아니라 영화 속에서 압도적인 것은 바로 악 아니, 악들이다. <공조>가 휴머니즘을 일상의 소소함과 에피소드적 웃음으로 확장한다면, <더 킹>은 악에 육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애쓴다. 확장된 휴머니즘이 나열된다면 육체성을 가진 악은 마침내 나름의 운동성을 갖는다. 그러니까 <공조>의 휴머니즘이 전시장 속에 곱게 전시된 느낌이라면 <더 킹>의 사악함은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곱게 포장될수록 사람은 사라지고 휴머니즘만 박제되는 데 비해 악마성은 드러날수록 살아난다.

 

악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그런데 정의나 휴머니즘과 같은 이념들은 오히려 추상적이고 평범하기 때문에 삶의 진실을 가리기도 한다. 삶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수록 선보다는 악을 그리고 육체적 구체성으로 접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휴머니즘으로 모든 게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하는 유해진이 따뜻하긴 하지만 그 무해한 웃음의 뒤끝은 허탈하다. 인간애, 휴머니즘으로 모든 게 봉합되는 세상이 있기나 할까? 훌륭한 말들은 그 자체로 의미 있지만 때론 공허하기도 하다. 정치인들 사이에서 자유와 민주주의가 허망한 자가당착으로 유용되는 장면을 목격할 때의 당혹스러움도 아마 이와 유사할 것이다. 문제는 휴머니즘이 아니다. 휴머니즘을 가면으로 내세운 상술과 자기기만이 아쉬울 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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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은 흥미로운 동화이다. 왕이 벌거벗은 채 자신의 왕국 한가운데를 행진한다. 나쁜 사람의 눈에는 옷이 보이지 않고, 착한 사람에게는 보인다지만 옷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왕 자신의 눈에도 옷은 비치지 않는다. 다만 한 아이만이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다. “임금님은 벌거숭이.” 그제야 진실은 파열음을 내며 세상에 터져 나온다. 왕이 왕일 수 있었던 행진이 무너지고, 그의 백성이 그를 우러르지 않으며, 벌거벗은 남자가 왕일 수 있었던 그 보이지 않는 권위의 커튼이 열어 젖혀진 것이다.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대해 고고학적 논의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벌거벗음과 가장 멋진 옷 사이에 일종의 관료제가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착한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식의 말을 만들어 낸 재단사는 군주제 안에서 기괴한 논리를 완성할 수 있다. 군주제 왕이 누리는 권위의 핵심은 바로 ‘척’에 있다. 재단사가 잘 알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군주제의 역학이었다. 왕에게는 보이는 ‘척’하는 백성이 필요하고, 이 ‘척’이 제도화될 때쯤 군주제는 클라이맥스를 맞이하며 급격히 쇠퇴했다.

 

영화 <킹메이커>

 

박근혜 정부를 돌이켜보았을 때 가장 많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이 ‘척’하는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형광등을 백 개 켠 듯 눈부신 척, 도무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이지만 알아듣는 척, 외교 순방의 내용은 없지만 세련된 옷만은 그럴 듯하다는 척. 그런 척들이 모이고 쌓여, 벌거벗은 왕의 행진이 묵인된 것이다. 그러니까 박근혜는 대한제국의 왕으로 군림하고자 했던 것이고 박근혜 정부는 적극적으로 재단사 역할을 자임해왔다. “나쁜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공무원을 구분하던 그 잣대의 문제점은 나쁘다 좋다가 추상적이라는 것에 멈추지 않고 애당초 그 실체가 없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유독 우리 문화에 권력의 정점을 ‘왕’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생들이 엠티나 수련회에 가면 의당 하는 놀이인 ‘왕게임’만 해도 그렇다. 누군가 왕이 되면 하고 싶은 대로 권력을 전횡한다. 당하는 사람이 우스꽝스러워질수록 놀이는 탄력을 갖는다. 최근 뉴스에 거의 상투어처럼 등장하는 ‘킹메이커’라는 용어도 그렇다. 대통령이 ‘왕’처럼 군 바람에 발생한 어마어마한 정치공백을 목격하면서도 또 다른 대통령을 ‘왕’이라 연호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이건 그다지 현명한 호명이 아니다.

 

영화 <더 킹>

 

2011년 제작되어 한국에 2012년 개봉한 영화 <킹메이커>만 봐도 그렇다. 영화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과정을 다루고 있다. 대통령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그 대통령 만들기의 음험한 정치적 야망과 협잡, 거래, 전복의 장면들을 담아낸 영화인 셈이다. 그런데 영화의 원제목은 <The Ides of March>이다. 3월15일이라고 해석된다. 정말 재미있는 것은 이 원제의 함의다.

Ides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줄리어스 시저>에 등장하는 어구이다. 고대 로마공화정 말기 예언가가 로마의 절대 권력가인 시저에게 다가와 ‘3월의 가장 높은 날, 3월15일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시저는 이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결국 시저는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였던 브루터스의 칼에 죽는다. 그러니까,


영화 <킹메이커>의 원제 ‘3월15일’은 최고의 권력자가 최측근에 의해 좌절되는 현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자신의 비밀과 비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최측근이야말로 최고 권력가에게는 가장 위험 요소라는 데서 출발한 꽤나 문학적이며 정치적인 제목이었던 셈이다.

 

이 제목이 <킹메이커>로 바뀐 것은 그런데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워낙 직관적으로 이해되기 쉬운 제목으로 바뀌는 게 관례라고는 하지만 <킹메이커>라는 각색은 우리 문화권 내에서 최고 권력자가 왕처럼 군림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설을 앞두고 개봉한 영화의 제목도 <더 킹>이다. 영화 <더 킹>의 주인공들은 우리 시대의 최고 권력자를 가리킬 것이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속 최고 권력자들은 바로 검사들이다. 아니 대개의 평범하고 선량한 검사님들 말고 1%의 권력 지향적 검사들이 주인공이다. 그 1%의 검사들은 애당초 권력을 잡기 위해, 공무원이 아니라 ‘왕’이 되기 위해 검사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최고 권력을 맘대로 휘두르고, 그 맨 꼭대기 위에서 군림하기 위해 검사가 된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자신을 가리켜 ‘왕’이라고 지칭한다.

 

통치하지 않고 군림하는 왕이야말로 이미 군주제와 함께 역사가 쓸어버렸던 악재이자 잔재가 아니던가? 아직도 우리의 눈에 임금이 보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임금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임금이라는 호명을 통한 개입을 용인하고 있는 것일 테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왕의 옷을 찬양하는 척에서 벗어나 벌거벗음을 고발하는 순수하면서도 용기 있는 소년이기를 자처하고 있다. 촛불은 곧 그 소년들의 행진이다. 이제, 왕은 안된다. 이제 문제는 벌거벗은 왕이 아니라 그 어떤 왕이라도 돌아와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왕은 불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현재 정치의 악이다. 그러니 이제 호명의 각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언어는 문화이자 반영이다. 킹메이커도, 킹도 없는 게 마땅한 세상이 와야 할 것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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