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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말석’이라는 오래된 관용어구가 있다. 문단이 품계석처럼 지위 고하에 따라 자리를 나누는 마당은 아니지만 말석이란 갓 등단한 신인이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말로 통용되었다. 그런데, 그러고 보면 겸양일 수밖에 없는 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문단에 한 ‘자리’를 얻었다는 말이니, 어쨌든 한자리를 차지하기는 했다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겸손하게 작은 자리 하나 얻었다는 의미로 말석으로 스스로를 낮춘 것이다. 등단은 시작에 불과하니 말이다.

 

흥미롭게도 서양에서도 사람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두고 지위(status)라고 부른다. 이 지위도 어떤 표지판 앞에 서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다(stare)’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 어딘가에 서는 것, 그게 바로 지위이고, 지위란 자신의 자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갖는 게 또 전부는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은 높은 지위, 낮은 지위라며 지위의 고하를 나누기 좋아한다. 사회의 세세한 면에 따라 그 조건은 달라질 수 있지만 지위에 높고 낮은 게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속된 말로, 다 같은 ‘자리’에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의 한 장면.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그런 의미에서, 자리로 인해 존엄성에 위협을 받고, 자괴감에 빠지거나 질투로 고통받는 상황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혹시나 우리가 사다리의 너무 낮은 단을 차지하고 있거나 현재보다 더 낮은 단으로 떨어질까봐 두려워한단다.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그는 이런 걱정이 매우 독성이 강하다고 말했는데, 내 생각도 다르지 않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건 무척 상대적인 것이라서 스스로의 지위에 불안해하기 십상이다. 타인과의 비교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작게 느끼고 불편해한다. 그게 바로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불안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은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한 그래서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기도, 그렇다고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기도 애매한 청춘을 보여준다. 청춘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학수’(박정민)는 래퍼 오디션에 6번째 참가 중인 래퍼 지망생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미 홍대 언더그라운드에서 자신의 팬까지 거느린 래퍼이지만 그 정도 자리는 아직 부족하다고 여긴다. 더 어렸을 땐, 홍대 무대에 서기만 해도 자신의 불안이 해소될 것 같았겠지만 어느 순간 이후로는 홍대 무대가 오히려 현실의 거울 이미지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무대에선 강력한 래퍼이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변산만 떠나면 훨씬 덜 불안하고 나아질 것 같았지만, 서울에 사니 이번엔 또 강남에 사냐 강북에 사냐 고향 친구들이 따져 묻는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 같다.

 

<변산>을 보면서 무척 흥미로웠던 것은 랩을 대하는 청춘의 자세이다. 최근 강의실에서는 노트를 펼쳐 뭔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는 학생들이 종종 발견되는데, 그런 학생들 중 많은 수가 직접 랩 가사를 쓰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이 왜 시를 안 쓰고, 랩 가사를 쓰지라며 조금은 의아해했는데,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영화 <변산>이 보여준 셈이다. 요즘 20대에게는 랩이 시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들에게 랩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심장 박동에 맞춰 훨씬 더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의사수단이라는 것을 말이다.

 

시골 출신 학수는 금의환향에 대한 꿈을 고백한다. 금의환향이란 우리가 앞서 말했던 불안의 증상 중 하나이다. 적어도 고향에 돌아갈 땐, 떠날 때보다는 더 성공해서, 출세해서, 부자가 되어서, 멋지게 돌아가고 싶은 것, 그게 바로 금의환향이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금의환향의 세부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은 소위 세속적인 성공이 전부이다. 돈, 명예, 권력이 성공의 열쇠이며 그것이 곧 존재의 불안을 다스려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에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의 명함이 곧 평가 기준이 되는 속물의 세상에서,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자리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결국 훨씬 더 많이 가진 상태에서 누군가의 삶을 지배하려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은 유아적 바람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외할머니집에 오랜만에 놀러갔을 때, 우리 외손주 왔냐면서 가장 편한 자리를 내주고, 가장 귀한 음식을 먹여주며, 뭐든 해도 된다고 허락받을 때 느끼는 그런 존재감처럼, 세상에서 나의 존재감을 느끼고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세상이 이런 허약하고, 연약한 사람의 내면을 이용해, VIP, VVIP의 스티커를 붙여 가치 있는 사람의 속성을 더욱 속물화하고 있다는 것일 테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존중받을 만하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의 수위를 얕게 함으로써 그럴듯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중요한 사람이 되는 역설을 만들어낸다. 말 그대로 뭣이 중헌지를 모르는 채로,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구분된다.

 

세상이 주는 세속적 지위에 연연하던 학수는 결국 고향 땅에서 다른 성공을 거둔다. 알고 보니 금의환향은 꼭 돈을 벌고, 시험에 합격하고, 일등을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 사람 사는 가치라는 게 결코 자리만으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고향의 품에 안긴다. 사람의 한 가지 면모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으로 평가하려는 사람, 알랭 드 보통은 그런 사람을 가리켜 속물이라고 부른다. 적어도 스스로 지위를 높이고자 애를 써도, 남을 지위로 평가하는 속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남을 무턱대고 동경하거나 경멸한다고 해서, 불안이 해소될 리는 없다. 불안은 결국 다양한 나의 모습을 스스로 사랑할 때, 서서히 사라질 불편이 아닐까 싶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Posted by mx2.0

법조인 드라마 전성시대다. TV를 틀면 일주일 내내 법조인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만날 수 있다. 법조인은 늘 한국 드라마의 인기 직종 중 하나였지만 국정농단 사태 이후 최고로 사랑받는 주인공이 됐다. 국정농단 주역 대다수가 ‘법꾸라지’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부패 법조인 출신이었던 만큼, 이상적 법조인을 통해 속시원한 정의 실현 드라마를 기대하는 심리가 반영된 현상이다. 최근 국정농단에 버금가는 국기문란 사태라 일컬어지는 사법농단 의혹이 정점에 달한 것도 정의로운 법조인 주인공 드라마 열풍을 부채질하고 있다. 실제로 요즘의 법조인 드라마에서는 새로운 경향이 눈에 띈다.

 

기존에는 부패한 정치권력이나 자본가 등 외부의 거악과 싸우는 법조인 드라마가 다수였다면, 최근에는 법조계의 오랜 적폐를 비판하고 법조개혁의 열망을 담아낸 작품들이 많다. 특히 법조계 최후의 성역처럼 남아있던 사법부 배경 드라마가 부쩍 증가했다. 이러한 새 경향을 본격적으로 보여준 작품이 지난해 방영된 SBS 드라마 <귓속말>이다. 전작 &lt;펀치&gt;를 통해 검찰조직 내의 부패 세력과 고발 세력의 갈등을 그렸던 박경수 작가는 &lt;귓속말&gt;에서는 법을 악용해 도적질하는 무리인 ‘법비’와의 전쟁을 내세우며 법조계의 총체적 적폐를 극화했다.

 

SBS 드라마 <귓속말>의 한 장면.

 

그 가운데서도 부패한 대법원장 장현국(전국환)의 악행은 사법농단 사태를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현실감이 넘친다. 사법적폐의 상징 그 자체인 장현국은 스스로를 “대한민국 재판의 상식을 만드는 사람”이라 칭할 정도로 제왕적 권력을 휘두른다. 신념 있는 소장판사 이동준(이상윤)이 청탁 재판을 거절하자 자신의 뜻에 맞는 법관인사위원회를 구성해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시키는 등 재판 거래와 인사 개입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드라마는 장현국을 비롯해 전직 검찰총장, 전 법무부 장관, 최대 로펌 대표 등이 모두 교도소에 모이는 결말을 통해 대중의 적폐청산 판타지를 시원하게 실현했다.

 

‘본격 판사 장려 드라마’를 표방한 SBS <이판사판> 역시 사법혁신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 작품이다. 드라마에서 제일 시선을 끄는 것은 ‘오판 연구회’라는 조직이다. 로스쿨의 아웃사이더들이 모여 잘못된 판결을 연구하며 은폐된 진실을 파헤치는 이 조직은 존재만으로 사법부의 낡은 관행에 대한 도전을 보여준다. 이들과 합력해 정의를 구현하는 신세대 판사 주인공들은 사법부의 개혁적 미래를 상징한다. 비록 허술한 구성과 로맨스에 치우친 이야기로 비판받기는 했으나 드라마의 문제의식만큼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올해 초 방영된 SBS <리턴>에서도 비슷한 주제의식이 발견된다. 주인공 최자혜는 판사 출신 변호사다. 그는 판사로 임용된 뒤 담당한 첫 재판에서 법의 사각지대를 악용해 처벌을 피하는 권력자들을 목격하고 회의를 느낀 끝에 스스로 법복을 벗었다.

 

훗날 그는 TV 법정쇼 ‘리턴’을 통해 잘못된 재판 사례를 분석하고 법제도의 허점을 고발한다. 드라마는 지나친 선정성, 폭력성 등의 문제를 드러내기는 했으나, “못 배우고 가진 게 없는 자들에게는 장벽이 한없이 높고, 법을 알고 돈 있는 자들에게만 관대한 법”의 모순을 비판하는 메시지는 분명 요즘 시대의 국민 정서를 건드리는 지점이 있다.

 

현재 방영 중인 tvN <무법 변호사>도 사법부에 대한 불신과 개혁의 요구를 담아낸다. 드라마의 최대 악역인 차문숙(이혜영)은 대법관 후보 1순위로 거론될 정도로 존경받는 판사지만 그의 진짜 정체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법비’다. 드라마는, 마찬가지로 위엄 있는 판사의 가면을 썼던 아버지에 이어 부패의 계보를 만들어가는 차문숙의 모습과 이에 맞서 싸우는 법조계 이단아 봉상필(이준기)의 활약 안에 적폐청산의 시대적 화두를 녹여내고 있다.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

 

JTBC 월화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또한 신세대 판사들의 시선을 통해 사법부 내부의 문제점을 들춰낸다. 조직 내 성차별, 학연과 지연으로 이뤄진 파벌 구도, 권위의식 등과 같은, 어찌 보면 대형비리보다 더 뿌리 깊은 적폐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상주의자 신임 판사 박차오름(고아라)과 원칙주의 판사 임바른(김명수)의 논쟁을 통해 진정한 판사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처럼 최근 법조인 드라마는 사법적폐에 대한 청산과 혁신의 열망이라는 시대정신을 투영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드라마는 아니지만 같은 정서를 재현하는 프로그램 하나도 주목할 만하다. MBC에서 다음주부터 방영 예정인 시사 프로그램 <판결의 온도>다. 그동안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던 사법부의 문제적 판결을 테이블 위로 불러와 논쟁하는 토크쇼다. 지난 3월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방영될 당시 국민 감정과 동떨어진 사법부의 권위주의, 법제도의 모순 등을 비판하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지난해에는 언론개혁이 사회적 화두였다. 언론 검열 시대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언론인 소재 드라마와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며, 공정방송을 위한 언론노조 파업의 현실과 조응하며 개혁에의 바람을 담아냈다. 그리고 사법농단 시대의 법조인 프로그램 열풍 현상은 이제 ‘정의 실현 최후의 보루’인 사법개혁에 대해 이야기한다. ‘법비’들을 응징하고 공정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드라마만의 이야기로 끝나서는 안될 일이다.

 

<김선영 TV평론가>

Posted by mx2.0

데이지는 창밖을 보며 읊조린다. “아름답고, 예쁜 바보로 컸으면 좋겠어. 딸아이 말이야.”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여자, 개츠비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팜므 파탈의 말치고는 어딘가 처연하고 게다가 정곡을 찌르는 데가 있다. 여자는, 딸아이는 성찰적이며 똑똑한 여성으로 크는 것보다 아름답고 예쁜 바보로 크는 게 낫다고 말하는 건, 직설법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데이지의 남편 톰 뷰캐넌은 결혼한 첫날 밤부터 다른 여성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고 있다. 지금, 데이지가 독백을 한 그 순간은 경박한 여자 머틀로부터 걸려온 전화로 저녁 식사를 망치고 난 이후이다.

 

이 비슷한 말을 영화 <밤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젊은 여성도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다. 가만히 서서 바보처럼 보이기만 하면 된다”라는. ‘밤쉘’은 폭탄 같은 성적 매력을 지닌 여성을 지칭한다. 이 말을 한 여배우 헤디 라마는 1940년대 미국의 밤쉘로 통했다. 첫 작품 <엑스터시>는 여성의 오르가슴을 처음으로 영화적으로 재현한 작품이었다. 나체로 오르가슴을 연기하는 배우, 그녀는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으로 나뉘어진 할리우드 영화 시장에서 너무나 쉽게 창녀의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그리고, 그 이후 그 분류함에서 거의 빠져나오지 못했다.

 

영화 <아이 필 프리티>의 한 장면.

 

영화 <밤쉘>은 예쁘고 멍청하고 섹시하기만 한 줄 알았던 여배우가 현재 와이파이와 블루투스의 근간이 되는 주파수 도약을 발명했음을 알려준다. 세상은 그녀의 진짜 재능은 숨기고, 그녀의 일부였던 아름다움만을 착취했다. 영화는 그녀가 얼마나 똑똑했는지가 아니라 아름답고 똑똑한 여성이 왜 지워져야 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유는 단 하나이다. 세상은 아름다운 여자가 똑똑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니까. 아니, 여성에게 요구했던 건 그저 아름다움이지 지성이나 내면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헤디 라마의 일생은 여러 면에서 곱씹을 만하다. 따뜻했지만 지나치게 엄격했던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출 연기를 감행했고, 각성제와 수면제에 취해 3류 영화를 찍어야 했던 불공정 계약에 항의하며 자신이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U보트의 만행에 주파수 도약을 발명했지만, 전시이므로 특허에 관한 모든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매우 독립적이며 주도적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그녀를 통제 불가능하고, 제멋대로인 여자로 규정한다. 이건, 70여년이 지난 요즘, 지금의 형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이 여자에게 아름다움만 요구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아이 필 프리티>는 2018년의 여성이 어떤 판옵티콘, 시선의 감옥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주인공 르네 베넷은 꽤 통통한 여성이다.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을 갖지 못해 온라인 담당 부서에서만 일을 할 정도이다. 스피닝, 요가, 다이어트 등 날씬하고 예뻐지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피닝을 하던 르네는 자전거에서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친 후, 자신이 너무 예뻐 보이는 착시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실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녀 눈에만 자신이 예뻐 보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당당하게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원래의 자신을 당당하게 보여주자 세상이 그녀를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다정하고 섬세하게 사람들을 챙기고, 솔직하고 사려 깊은 성격은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얻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르네가 그 모든 관심과 배려를 달라진 외모 때문이라고 착각한다는 데에 있다.

 

맨스플레인으로 유명한 레베카 솔닛은 자신의 책 <걷기의 인문학>에서 하이힐로 인해 여성의 보행권이 얼마나 침범받고 있는지 고발한 바 있다. 까짓것 하이힐을 벗어버리면 그만이지 보행권 침범이라고 왜 엄살이냐고 여길 사람들도 있을 테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하이힐을 신고 싶어서가 아니라 신어야만 해서 착용한다. 화장도 마찬가지이다.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아니라 출근할 때, 회의할 때, 출장 갈 때, 해야만 해서 바쁜 시간을 쪼개 힘겹게 해내는 경우가 더 많다. 예뻐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뻐 보여야만 하기 때문에 하이힐과 화장에 속박된다. 세상이 그게 여자의 준비된 모습이라고 가르치고, 강요하고,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어느새 여성들은 좋아서 시작했던 자기 관리를 억지로, 세상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쩔쩔매며 해내고 있는 셈이다.

 

영화 <아이 필 프리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누가 봐도 100명 중의 한 명꼴에 속할 미녀조차도 자괴감에 시달린다는 고백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도 거울을 보며 자신의 단점을 발견하고, 또 세상이 자신을 한심하게 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작아진다. 르네 베넷이 경험한 마법의 실체는 옛날 동화처럼 진짜 예뻐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완전히 만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뻐야 좋다는 강박을 어린 시절부터 주입받고 자란, 이 시대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필요한 교육일지도 모르겠다. 예쁜 여자란 세상이 강요했던 속박과 상품의 하나라는 것, 그래서 그 요구는 맞출수록 자신이 더 작아만 지는 폭력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버려둘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남을 위해 굳이 예뻐질 필요는 없다.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Posted by mx2.0

사티는 아버지가 두렵다. 싫다. 답답하다. 밉다. 부끄럽다. 창피하다. 곤란하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집에서만 대장이다. 사티를 때리고, 어머니를 밀어붙이고, 함부로 대한다. 그런데 집을 벗어나면 가난한 소작농에 상습 방화범이다. 아버지는 수가 틀리면 불을 지른다. 우리가 없는 아버지의 돼지는 걸핏하면 남의 집 농장을 침범한다. 이웃은 그렇게 침범한 돼지를 잡아두곤, 돈을 내야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장작이랑 건초는 불에 타는 물건이다’라는 전갈을 보낸다. 그리고 그 집 헛간이 불탄다. 치안판사는 아버지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마을을 당장 떠나라고 말한다. 그렇게 떠나온 아버지는 사티에게 거짓말을 요구한다. 사티는 정말 싫다. 정직하게 살고 싶고, 좀 더 우아하게 살고 싶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아버지가 남의 집 헛간에 불을 지르려 할 때, 이번엔 정직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의 한 장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불을 지른다. 억울한 일은 이웃의 집에 들어간 내 돼지를 찾는 데 돈을 내거나, 밟으라고 깔아놓은 양탄자를 밟았다고 지나친 소작료를 걷어가는 일이다. 그렇게 징벌적 소작료를 내고 나면 식구들이 먹을 것도 남지 않는다. 법에 기대도 소용없다. 치안판사는 언제나 있는 사람들 편이다. 아버지는 헛간을 태우는 것으로 화를 삭이고자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영원히 그렇게 분을 삭이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분명히 크레디트에 그렇게 써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일어나고 있는 서사적 사건이나 대사들은 하루키의 것이 맞지만 그 정서나 주제는 오히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헛간 타오르다(Barn Burning)>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손가락 골절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는, 아들 종수(유아인)가 일컫기를 일종의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그 아버지의 모습과 <헛간 타오르다>의 아버지 모습이 훨씬 더 닮아 있기 때문이다. 종수는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 등장하는 ‘나’보다, 가난한 방화꾼 아버지의 아들 ‘사티’에 가깝다. 그렇다. 이 글의 맨 앞부분에 서술된 이야기는 바로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헛간 타오르다>의 일부분이다.

 

하루키의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크게 달라진 부분은 단 하나이다. 바로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 차이로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 원작 <헛간을 태우다>의 ‘나’는 30대 중반의, 카망베르 치즈를 좋아하고, 마일즈 데이비스의 ‘에어진’과 사티르 명인 라비 상카의 음악을 즐겨듣는, 세련된 여피족이다. ‘나’는 재즈와 와인, 가볍지만 섹시한 관계, 추상적이지만 본질적인 의문을 사랑하는, 그래서 타인의 삶에 무심하고 적당히 거리를 둔다. 그게 사는 데 더 유리하다고 믿는 인물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창동 <버닝>의 주인공 종수는 20대 중반이며, 가진 게 없고, 가지려면 건강한 육체밖에 쓸 게 없는 인물이다. 종수는 망해버린 축사 곁에서 대남방송과 뉴스를 들으며 잠이 든다. 소설에서는 아내가 자리를 비운 주인공의 집에 두 남녀가 찾아온다. 아내가 없는 집에 여자 친구 커플이 찾아오는 건 의외의 사건이었지만 소 한 마리 겨우 남은, 무너져 가는 축사 옆 종수의 집에 두 남녀가 찾아오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다. 같은 사건이지만 그 정서는 너무 다르다.

 

무엇보다 종수와 ‘나’는 계층과 연령이 다르다. 원작의 ‘나’는, 번쩍이는 은색 외제차를 가진 남자만큼 잘살지는 않지만, 그런 부에 무관심하다. 아니, 작가인 ‘나’는 그 사람과 사교모임에서 우연히 만날 만큼 비슷한 처지다. 노는 물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종수는 벤(스티븐 연)과 우연히 만날 일이 거의 없다. 벤을 만나려면 종수는 잠복하고, 추격해야 한다. 사는 곳, 노는 물이 다르니까. 그들의 세계에 교집합이 없으니 말이다.

 

이는 마치, 보르헤스가 똑같은 <돈키호테>를 몇 백 년이 지나 고스란히 필사한다고 할지라도 전혀 다른 소설이라고 말한 상황과 닮아 있다. 세르반테스가 소설을 썼던 당시엔 동시대적인 문체였을지 모르지만 2018년에 그대로 써내면 그건 의고체가 된다. 인물의 연령, 계층, 경제적 수준이 달라지면서 헛간을 태우는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헛간이 비닐하우스로 바뀌었다는 그런 사소한 변화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건 비닐하우스건 헛간이건 별 상관이 없다. 다만, 벤에게는 무의미하고, 쓸모없고, 태워지기 기다리는 것이 비닐하우스일 뿐이다. 문제는 이렇듯 허무를 태우는 존재론적 체위와 메타포가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벤에게는 없어도 되고, 십오분 만에 예쁘게 타서 없어져도 될 것이 종수에게는 단 하나의 것, 유일한 것일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아버지가 당신네 헛간에 불을 지르러 간다고, 정의롭게 주인에게 알려주러 간 윌리엄 포크너의 소년 사티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티는 성공한다. 방화 직전에 집 주인에게 ‘헛간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화가 난 헛간 주인은 잘생긴 말을 타고 나와 총성을 두 발 울린다.

 

그 총성은 아버지와 함께 기름통을 들고 가던 형 근처쯤에서 울린다. 소년 사티는 총성이 울린 곳으로도, 집으로도 돌아가지 못한다. 소설은 그렇게 끝을 맺는다. 그 총성은 누구의 가슴을 관통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아버지가 헛간을 태워 벌을 받았듯이 그 땅주인도 벌을 받게 될까? 살인은 훨씬 더 큰 죄이니 말이다. 벌거벗은 채 공포에 떠는 종수를 보며 세련된 소설가 ‘나’가 아니라 포크너의 소년 사티가 떠오르는 이유이다.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Posted by mx2.0

여성을 주 제물로 삼던 스릴러 장르에 최근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 눈길을 끈다. 역대 JTBC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김희선, 김선아 주연의 <품위 있는 그녀>를 비롯해, 올해 김남주에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안겨준 JTBC 드라마 <미스티>, 한가인의 6년 만의 드라마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OCN <미스트리스>, 송윤아와 김소연의 ‘워맨스’를 내세운 SBS <시크릿 마더> 등 여성 중심 스릴러가 연이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작품은 특히 기혼 여성들의 억압과 불안을 극의 중심 재료로 삼는다. 하나같이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서사인 미국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을 연상시킨다는 평을 듣는다는 점에서도 그 공통된 정서를 알 수 있다. 미국 중산층 주부들의 비밀스러운 일상을 그린 <위기의 주부들>은 기혼 여성의 솔직한 욕망을 통해 가족제도의 모순을 신랄하게 파헤쳐 방영 당시 미국가족협회로부터 ‘주부들의 일탈’을 부추기는 문제작으로 비난받기도 한 작품이다.

 

OCN 드라마 <미스트리스>의 한 장면.

 

 

최근 국내에서 유행하는 ‘한국판 <위기의 주부들>’은 여성의 불안한 내면과 가족제도의 균열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먼저 지난해 방영된 <품위 있는 그녀>는 준재벌가의 ‘우아한 사모님’으로 살아가던 우아진(김희선)이, 그녀와 같은 삶을 욕망하는 여성 박복자(김선아)와 만나면서 혼란을 겪는 이야기다. ‘완벽한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삶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우아진은 신분상승을 위해 모든 것을 거짓으로 꾸몄던 박복자와의 만남을 통해 결국 자신의 삶 또한 허상임을 깨닫고 가족제도 바깥으로 탈주한다.

 

그런가 하면 올해 초 방영된 <미스티>는 대한민국 최고의 앵커 고혜란(김남주)이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미스터리 스릴러 안에 기혼 여성의 사회적 성공을 향한 욕망과 주부로서의 억압이 충돌하는 이야기를 담아냈다. 혜란을 둘러싼 가장 큰 위협은 커리어 경쟁자나 살인 혐의보다 그녀의 사생활에 대한 끝없는 의심에서 비롯된다. 혜란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언론인으로서 능력 외에도 주부로서의 완벽한 모습을 요구받고 이 불가능한 양립은 비극적 결말로 돌아온다.

 

지난주 방영을 시작한 <시크릿 마더>는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바치는 강남 엄마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네 명의 중심인물은 모두 어두운 비밀을 감추고 있다. 딸을 잃어버린 아픔을 숨기고 있는 윤진(송윤아), 외도한 남편과 쇼윈도 부부로 살아가며 자신도 불륜을 저지르는 혜경(서영희), 자식을 영재고등학교에 보내기 위해 위장이혼을 감행하는 화숙(김재화), 우아한 가면 뒤에 전직 호스티스라는 과거를 감춘 지애(오연아)가 그들이다.

 

이들의 비밀은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는 기혼 여성들의 분열된 내면을 상징한다. 특히 정신과의사에서 아들 교육을 위해 전업주부로 변신한 주인공 김윤진은 ‘슈퍼맘’이기를 요구받는 기혼 여성의 스트레스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녀의 불안은 아들의 뒤처진 성적뿐 아니라 딸을 지키지 못한 ‘실패한 엄마’라는 죄책감에서 비롯된다. 살인사건의 진범이 누구인가 하는 미스터리보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윤진의 위태로운 내면이 <시크릿 마더>의 가장 큰 스릴을 담당한다.

 

OCN 드라마 <미스트리스>도 마찬가지다. 네 명의 주인공 가운데 기혼 여성인 세연(한가인)과 정원(최희서)의 이야기가 가장 공포스럽게 묘사된다. 2년 전 남편의 실종으로 어린 딸을 홀로 키우는 세연의 이야기에는 한부모 가정 워킹맘의 불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딸을 맡기기 위해 고용한 보모가 등장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거의 아동 실종 스릴러인 <미씽: 사라진 여자>의 공포를 연상시킨다. 또 다른 기혼 여성 정원(최희서)의 불안 역시 소위 ‘정상가족’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완벽한 가정을 꿈꾸는 남편은 아이에 집착하고, 계속해서 임신에 실패하는 정원의 스트레스는 감정조절장애로까지 나타난다.

 

최근 이 같은 여성 중심 스릴러의 부상은 기혼 여성들의 부담이 갈수록 가중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초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정부 차원에서 가족 예능 프로그램의 제작 지원 등을 통해 이상적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했고, 이로 인해 기혼 여성들에 대한 억압은 더욱 심화됐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 이후 핵심 정책 과제로 삼았던 일·가정 양립정책 또한 기혼 여성들의 과로와 부담을 가중시킨 주요인이었다. 이 시기 맘충, 앵그리맘, 맘고리즘 등 기혼 여성 관련 신조어들이 계속해서 증가한 것도 이러한 억압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에도 기혼 여성들의 일탈을 다룬 드라마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가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아내들의 반격과 복수’를 다룬 소위 막장드라마들이 유행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 드라마 속 여성들이 결말에 이르러 새로운 결혼과 임신을 통해 기존 가족제도로 다시 편입되는 것과 달리, 가족제도의 균열을 좀 더 진지하게 다루는 요즘의 여성 스릴러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시효가 이제 만료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선영 |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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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가정의 달이라더니, 영화관에도 가족이 많다. 관객도 많지만, 가족에 대한 영화들이 많다는 뜻이다. 미국으로 입양된 후 팔씨름 챔피언이 된 마크의 이야기인 <챔피언>, 아내와 사별한 후 아들 하나 보고 살아온 아버지 귀보의 이야기 <레슬러>를 비롯해 때마침 소개된 인도 영화 <당갈>도 넓은 의미에서는 가족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가족 이야기가 대부분 부모와 자식 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레슬러>와 <당갈>은 공교롭게도 모두 레슬링을 소재로 삼고 있다.

 

<레슬러>는 레슬러로서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아버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레슬러 아버지 귀보는 유해진이 맡아 특유의 너털웃음과 사람 좋은 말투로 그려진다. 어쩌면, <레슬러>라는 영화가 유해진의 개성과 이미지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레슬러>는 한국형 가족 영화의 문법을 거의 고스란히 따라간다. 아버지와 아들이 티격태격하면서 살아가고,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루기에 벅찬 아들은 결국 아버지에게 반항한다. 사랑하고, 아끼고, 싸우지만 결국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포옹으로 서로를 이해한다. 가족이니까 말이다.

 

영화 <레슬러>의 한 장면.

 

 

반면, <당갈>은 코미디처럼 시작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진지해지는 작품이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레슬링의 길을 열어 주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아이들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점이다. 퇴역 레슬러가 자식에게 레슬링 기술을 전파하고, 의지를 북돋운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지만 아들과 딸의 차이로 영화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전개된다. <레슬러>가 결국 아버지와 화해하는 아들의 성장담으로 끝난다면 <당갈>은 세계적 수준으로 우뚝 선 여성 레슬러 이야기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의미 있는 것은 여자에게 레슬링이란 그다지 권유되지 않는 스포츠라는 사실이다. 마치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가 보수적인 영국 탄광촌에서 발레를 시작했을 때, 가족뿐만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의 반대와 마주쳤던 것과 유사하다. 아니, 사실 더 심각하다. <당갈>의 배경은 인도이고, 인도는 최근에도 몇몇 끔찍한 여성 학대 사건사고로 뉴스에 등장하는 나라이니 말이다. 분명, 여성 레슬링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슬링은 남자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서로 비비는 전형적 남성 스포츠로 여겨진다. 하지만, <당갈>의 소녀들은 결국 그 남성 스포츠의 세계에 당당히 진출해 나름의 성과를 얻는다.

 

성차의 편견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영화의 문법에도 존재한다. 가령,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그리고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로 짝지어지는 서사의 관행도 그렇다. 엄밀히 말해 <레슬러>에 묘사된 아버지는 아버지라기보다는 어머니 역할에 더 가깝다. 아들에게 밥을 해 먹이고, 창가에 둔 식은 밥을 처리하고, 홀로 청소하는 모습의 묘사를 보노라면 귀보씨는 아들에게 엄마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약간의 묘사에 멈추고 결국 영화 <레슬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어야 할 진부하고 관습적인 갈등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리틀 포레스트>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눈길을 끈다. <리틀 포레스트>에는 아버지의 고향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로도 15년 넘게 살아온 어머니와 딸이 등장한다. 이 어머니는 딸 아이가 수능을 보고 온 다음 날, 편지 한 장만 남기고 훌쩍 집을 떠난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언제 온다는 말도 없이. 딸 역시 그런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하지만 그렇다고 분노하거나 엄마의 부재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마음을 담아내는 것은 바로 음식이다. <리틀 포레스트>에서 엄마와 딸은 음식을 통해 대화한다. 엄마에게 배운 음식을 딸이 하면서 엄마의 마음을 추측하고, 딸이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며 언젠가 어머니에게 전달할 것을 바란다.

 

사실, 가족은 언제나 직설법으로 말하는 사이다. 친구나 직장 동료, 상사, 스승에게 절대로 하지 않는 날것의 말을 내뱉고, 돌려받는 관계가 바로 가족인 것이다. 그래서, 후련하고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가족만큼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도 드물다. 어쩌면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야말로 제2의 언어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리틀 포레스트>의 어머니와 딸이 레시피로 서로 대화하듯이 조금은 은유적이며 간접적인 언어의 창고가 필요한 것이다. 어떤 말에도 상처받지 않는 강철 심장을 가진 가족은 아니 인간은 없으니 말이다.

 

<당갈>의 레슬링 역시 가족의 제2 언어 구실을 한다. 아버지는 딸이 대회에 우승하고 나서 마침내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직설법으로 말한다. 하지만 사실, 이 자랑스러운 마음은 레슬링을 가르치고 도와주고 코치하는 과정 내내 육성이 아닌 레슬링의 몸의 언어로 전달되었던 바이기도 하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가족의 언어야말로 온도와 열기를 식힐 중간의 번역 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가족이니까 다 이해해야 하고, 완전히 솔직할 필요는 없다. 가족 사이에도 거리와 짐작이 있어야 한다. 가족의 마음이 경유할 수 있는 언어의 섬, 그런 중간지대를 마련해 볼 필요도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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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개봉했다. 한국이 첫 개봉이다. 원산지인 미국보다 하루 더 빨리 한국 시장에 풀린 것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한국을 첫 개봉지로 선택한 지는 꽤 되었다. <트랜스포머> 두 번째 편이 아시아 정킷을 서울에서 하면서 시작된 변화는 어느덧 한국 최초 개봉의 기시감으로 자리 잡았다. 그만큼 한국 시장이 중요시되는 셈이다. 수적으로 보면 고작 1000만 안팎이지만 한국 시장이 중요시되는 이유에는 여러 맥락이 있다. 아마도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 관객들의 적극성이 아닐까 싶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개봉한 25일(수요일) 하루 내내 검색어 상위에 이 영화 제목이 머물렀다. 민감했던 정치적 뉴스나 얼마 남지 않은 남북대화 이슈도 제치고 상위에 랭크된 것이다. 말하자면, 뉴스에서는 종일 선거나 북한 이야기를 하지만 SNS에서는 <어벤져스> 이야기를 한다. 말 그대로 4월25일의 가장 뜨거운 뉴스였던 것이다.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메인포스터.

 

한국 관객들의 이러한 적극성과 애정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한국 시장을 매우 중요한 홍보의 플랫폼으로 대접해 왔다. 한동안 속을 썩였던 불법 복제나 스크린 촬영 및 유출 문제도 어느덧 선진화된 관객들의 태도 덕분에 사라졌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듯싶다. 똑똑하고 호감을 가지며 적극 영화를 홍보하는, 말 그대로 미국의 거대 영화 시장이 바라는 이상적 관객이 바로 한국 관객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건 미국 시장의 입장이고, 한국에서도 <어벤져스>는 일종의 문화 현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벤져스>를 좀 더 빨리 보고, 좀 더 상세하게 그 세계의 디테일을 알고, 암시적인 쿠키 영상의 단서를 찾아내는 게 말하자면 힙한 관객이다. 비슷해 보이지만 그 반응이 전혀 다른 DC 코믹스 원작 영화들에 대한 한국 관객의 태도를 비교해 봐도 그렇다. <어벤져스>에 대한 한국 관객의 충성도가 훨씬 높고, 흥행도 더 잘된다. 영화 관람 후에도 마블에 비해 DC 작품들에 대해선 실망스럽다는 평가가 빠지지 않는다.

 

그 실망감의 한가운데에는 무거움이 있다. 반대로, <어벤져스>에 대한 한국의 호감에는 가벼움과 농담의 세계에 대한 호감이 있다. 어떤 점에서 마블의 가장 대표적인 히어로라고 한다면 스파이더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말하자면 블루칼라, 노동자 계급 출신의 히어로이다. 물론 마블, <어벤져스> 하면 아이언맨이 가장 먼저 떠오르겠지만, 아이언맨 역시 특유의 유머 감각과 섹시함으로 먼저 환기된다.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이 무겁고, 고독하고, 어두운 영웅으로 떠오르는 데 비해 같은 갑부이지만 아이언맨은 쿨하고 가볍다. 그리고 이런 아이언맨의 세계는 바로 마블의 코드와 상통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없는 것 중 하나가 ‘유머’라는 사실이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 김지운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의 초기작들 <조용한 가족>이나 <플란다스의 개>와 같은 작품을 보면, 독특한 유머 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 슬랩스틱이나 뻔한 휴머니즘으로 웃기고 울리지 않더라도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 영화에서 꽤나 지적이고, 세련된 유머를 찾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만 영화들이 일 년에 한두 편씩 꼬박꼬박 나오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그 웃음기가 영화계에서 사라졌다. 간혹 코믹 영화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의외의 수확으로 정리되곤 한다. 유해진이 주연을 맡았던 <럭키>나 마동석의 러블리한 연기가 화제가 되었던 <범죄도시> 정도가 그럴 것이다. 두 영화 모두 대단히 진지하고 무거운 영화들 사이에서 오래된 조연 배우 출신의 주연이 그들이 가진 특유의 서민적 분위기와 따뜻한 유머로 관객을 웃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여기서의 웃음도 꽤나 무거운 주제를 변주하는 과정에서의 윤활유에 가깝다. 그나마도 유머는 가족애나 인류애와 같은 휴머니즘 코드에 기생하곤 한다. 맘 놓고 웃을 만한 코미디 영화나 맥락과 상황 가운데서 한두 번씩 피식거리면서 웃고 즐기는 유머 코드가 한국 영화에서 거의 사라진 것이다.

 

<어벤져스>의 아이언맨은 심각한 순간일수록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녹인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캐릭터들은 이번 편에서 대단한 활약을 보이는데, 그들은 전작에서처럼 엉뚱한 B급 정서와 대중문화적 취향으로 등장하는 내내 줄곧 웃긴다. 썰렁하고, 어색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어벤져스>멤버들의 웃음은 긴장감을 풀어주고, 관객에게 공감을 높이는 데 성공한다. 이번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블록버스터답지 않게 파국의 결말을 향해 감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영화를 즐겁게 소비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말은 몰라도 과정만큼은 즐겁고, 유쾌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벤져스>는 미국 영화 시장의 자본력과 기술력, 인력이 총동원된 대단한 고부가가치 상품이다. 자본력, 기술력, 인력 면에서 한국이 <어벤져스>를 따라갈 수도 없고 또 굳이 따라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큰 나무에 가려 한국의 작은 유머, 코미디, 장르 영화들이 거의 고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로 세계를 정복하자는 유치한 제국주의적 발상이나 역시 미국 영화가 최고라는 식의 사대주의적 발상에 멈춰서는 안된다. 그런 기술력이나 자본력보다 왜 우리 영화에서 웃음과 유머가 사라졌는지 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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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영한 텔레비전 드라마 <마더>는 ‘엄마’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대개 ‘엄마’를 낳아 준 여자로 여긴다. 하지만 드라마 <마더>에는 낳아 준 엄마도 등장하지만 방점이 찍힌 건 키워 준 엄마들이다. 낳지 않은, 생물학적으로 무관한 엄마들이 오히려 더욱 엄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육원에서 주인공 수진을 입양한 여배우 엄마, 학대당하는 아이를 품은 엄마. 두 엄마는 모두 친엄마는 아니지만 ‘딸’을 만나, 그 ‘딸’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전폭적으로 헌신한다.

 

드라마 <마더>의 한 장면.

 

드라마 <마더>는 어떤 점에서는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멜로드라마에는 아름다운 결말을 훼방놓는 장애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로맨스에서 양가 집안의 반대나 불치병 같은 게 그 장애물이라면 <마더>에서 장애물은 법이다. 학대당하는 아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수진은 아이를 구출한다. 하지만 법의 관점에서 그것은 유괴이다. 죽을 뻔한 아이를 구한 것이지만 범법이기에 아이와 엄마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그래서인지, 각색된 한국 드라마에서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원작에서는 결국 그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헤어진다.

 

학대받는 아이에게 필요한 건 엄마라는 물리적 실체라기보다는 든든한 어른일 테다. <마더>가 말하는 것도 여기서 멀지 않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보호자이다. 진짜 엄마가 아니라도 혹은 여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엄마가 될 수 있다. 임수정 주연의 <당신의 부탁> 역시 어떤 엄마의 이야기인데, 여기 등장하는 엄마도 생물학적 엄마가 아니라 사회적 보호자이다. 재혼한 남편이 전처 사이에서 낳은 아이,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후, 여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아들로 받아들인다. 훌륭한 엄마라는 평가는 생모, 여자라는 기호를 넘어 든든한 양육자를 향한다. 남자도, 할머니도 혹은 형제라 해도 훌륭한 엄마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이의 양육자, 보호자 하면 무조건 친모를 먼저 떠올린다. 아이를 낳고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는, 일차적인 존재라서 그럴 것이다. 아내가 죽자 젖동냥을 다니는 심청의 아버지만 봐도 그렇다. 생모가 없으면 큰일 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가 달라지고 난 후, 그러니까 분유가 있고, 보모도 구할 수 있는 시대의 엄마 노릇은 좀 쉬워졌을까? 쉽다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세상은 달라졌지만 엄마의 몫이 많아졌으면 많아졌지 줄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도 엄마 멜로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불가피한 이별이라는 점에서 눈물이 나지만 무엇보다 울컥하는 건, 그 이별의 주인공이 ‘엄마’라는 사실이다. 이야기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만큼 엄마와 아들의 이별에 주목한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영화는 엉망진창이 된 집안 풍경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설거지는 쌓여 있고, 청소도 엉망이며, 입을 옷도 제때 세탁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계란 프라이도 제대로 하지 못해 손을 데고, 셔츠 단추도 어긋나게 채운다.

 

엄마가 잠시 이승에 돌아와 하는 첫 번째 일도 살림살이를 바로잡는 일이다. 어질러진 집을 청소하고, 그릇들을 정리하며, 엄마는 아이에게 머리 감는 법과 옷 챙기는 법을 가르친다. 어떤 점에서, 사고사가 아니라 병사했던 ‘엄마’가 그런 준비를 해두지 않았다는 게 좀 의아하기는 하지만, 영화는 엄마의 빈자리를 이러한 클리셰로 재연한다. 즉, ‘엄마’가 없는 집은 살림살이가 엉망이 되고, 아이가 단정치 못하다는 편견을 장면화하는 것이다. 잠시 돌아온 엄마가 학부모 참관 행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상투적 재연은 정점을 찍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엄마의 빈자리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두고 제도적 모성과 편견을 이야기하는 게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영화적 클리셰는 학부모 행사에 아버지 참여는 선택이지만 어머니 참여는 필수라는 편견 아래에서야 등장할 수 있다. 아들이라도 일차적 양육은 엄마의 몫이며, 엄마가 있어야 아이들은 빈자리 없이 잘 자랄 수 있다는 선입견이 강화되는 것이다. 부재중인 엄마와 돌아온 엄마에 대한 대중 영화의 상투적 재현은 은연중에 성역할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

 

세상이 살기 좋아지면서 아이를 돌보고, 살림살이에 투자해야 하는 절대적 시간이 줄었다고 한다. 세탁기가 ‘열일하고’, 청소기가 일을 덜어주었다고 말이다. 수치상으로는 지난 오십 년간 출산율도 감소했다. 그렇다면 과연 여성들이 육아에 투자하는 시간이 줄었을까?

 

프로이트 이후 심리학과 사회학은 아이의 성장에 ‘엄마’가 절대적이라고 가르친다. 분명 부모-아이의 관계인데, 어쩐지 엄마의 역할만이 강조된다. 1960년 영화 히치콕의 <사이코>에서 범죄자는 강압적인 ‘엄마’의 결과물로 그려진다. 많은 관객들이 2012년 <케빈에 대하여>도 엄마 때문에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된 아들 이야기로 읽고 싶어 한다. 세상의 지탄을 받는 아들 곁을 지키는 어머니를 보는 게 아니라 왜 아들을 사이코패스로 키웠냐고 원망하는 것이다. <케빈에 대하여>는 이해할 수 없는 악의 기원에 대한 탐구이지, 엄마에 대한 책임전가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 일차적으로 엄마에게 육아 불이행의 책임을 묻는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건 사회적 엄마, 보호자이다. 채무가 있다면, ‘엄마’라는 사회적 약호에 있는 것이지 그게 꼭 여성-친모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이지 이 세상에,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난 ‘엄마’를 부탁해 볼 일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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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인격화된 보고서이다. 김지영이 갑자기 빙의 증세를 나타냈고, 정신과 의사와 상담한 내용이 연대별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82년생 김지영>은 문학적 가치보다는 사회학적 가치가 더 높은 책이다. 문학적으로 따지자면, 김지영의 삶은 문제적이며 전형적이라기보다는 기획적이다. 작위적인 부분도 있고, 인물의 일관성 측면에서는 어긋나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82년생 김지영>은 39년생 윤덕수의 삶을 그린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김덕수에게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일들이 개인사로 스쳤듯이 82년생 김지영에게 또래 여성들이 겪었을 만한 일들이 모두 다 일어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한 장면.

 

문제적인 것은 그런 김지영에게 많은 독자들이 공감했다는 사실이다. 이 공감은 김지영이 경험했던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대개의 여성들이 겪은 데서 비롯된 게 아니라 그중 하나 이상을 비슷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문학의 공감에 있어서 가장 수준 높은 기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특이한 인간의 돌출적 행동을 이해하게끔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문학의 주인공들은 이상하고, 괴상한 사람들이 참 많다. 안나 카레니나처럼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도 있고, 개츠비처럼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여자를 뺏으려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뫼르소처럼 햇빛이 따가워서 사람을 죽이는 인물도 있다. 그러나 훌륭한 문학은 이렇듯 이해하기 힘든 사람조차 인간학적 관점에서 공감하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우리 모두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관념조차 인간 이후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인간학적으로 대단한 결점이나 매력을 가지지 못한 김지영에게 이토록 많은 공감이 쏟아지는 것은 ‘82년생 김지영’이 이미 문학적 사건을 넘어서 사회적 사태라는 의미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런 사태들 말이다. 레드벨벳의 멤버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말하자, 몇몇 남성 팬들이 격렬한 혐오감을 표현하며 더 이상 팬이길 거부한다고 말한, 그런 사태 말이다. 어느새 <82년생 김지영>은 단순한 소설 한 권이 아니라 어떤 상징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82년생 김지영>과 정반대로 인물을 다루고 있다. 김지영이 시대성에 눌려 자아나 내면이 거의 탈색된 동시대적 인물이라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와 올리버는 거의 완벽하게 시대를 벗어나 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 몇 년도인지, 어디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은 강렬한 주관성의 세계 안에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에 동의를 구한다. 어느 여름, 집으로 초대되어 온 젊은 학자에게, 17살 소년 엘리오는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엘리오는 올리버를 혐오하면서 궁금해하고, 다가가고 싶어하면서 미워한다.

 

1인칭으로 서술되었던 원작 소설과 달리 제임스 아이보리가 각색한 영화는 철저히 카메라의 시선에 이야기를 맡긴다. 관객들은 카메라와 같이 엘리오의 말과 행동을 봄으로써 분석해야 하며, 올리버의 행동과 말을 같은 방식으로 예측한다. 그들이 서로의 마음을 드디어 고백하기까지, 모두에게 그 감정은 미스터리이다. 엘리오에게 올리버가 미스터리이고, 올리버에게 엘리오 역시 물음표이다. 그 둘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도 두 사람의 감정은 미스터리이다. 추측의 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두 사람의 감정적 혼란에 동참하고 비밀을 공유한다. 다른 성적 취향의 관객이라고 해도 그들의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서로를 발견하고, 관찰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 머물 수밖에 없는 감정의 경유지이기 마련이므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세련되고, 우아하며 무엇보다 직관적이다. 그런데 성적 소수자의 이야기가 이처럼 세련된 간접화법을 구사하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다. 그들의 사랑은 뜨겁게 외쳐서 쟁취해야만 했던 자유였고, 그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폭력과 소외마저 감내해야 했다. <82년생 김지영>이 세련된 간접화법을 갖지 못했으나 반향을 얻었던 이유도 여기서 멀지 않다. 세련된 문법으로 동시대를 벗어나기에는, 지금, 이곳에, 아직 여성이기에 견뎌야 하는 공포와 차별이 너무나 많다.

 

‘맨스플레인’으로 유명한 레베카 솔닛은 여성이 길거리를 마음대로 걷는 것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모험인지를 책 한권 분량으로 써냈다. 영어에서 거리의 여자는 창녀이지만 거리의 남자는 건달을 의미한다. 이게 무슨 우연인가, 이럴 땐 영어와 한국어의 간극이 무색해진다. 밤늦게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은 성폭력의 잠재적 대상이 된다. 민감한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물론 남자든 여자든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솔닛의 말처럼 성폭력의 일차적 표적은 여자이며 사실 그런 폭력은 이미 일상 속에 자리 잡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생기는 공감은 레베카 솔닛을 읽으면서도 똑같이 발생한다. 밤늦게 센트럴파크를 조깅하다 강간 피해자가 된 여자 이야기를 보며, 학원에서부터 쫓아온 남학생 때문에 버스 정류장에 주저앉고 마는 김지영의 공포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직 세련된 개인의 문제가 되기에는 여성의 문제는 훨씬 더 많이, 깊이 가야만 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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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대가를 내 생에 지불해야 이처럼 모든 남루한 디테일을 제거해 버린 고급하고 단순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정미경의 소설 <호텔 유로, 1203>의 주인공 여자는 지금 “물빛을 연상시키는 푸른 스트라이프 셔츠의 가슴께를 손등으로 가만히 쓸어보”고 있다. 그녀는 진열장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옷들을 구경한다. 그녀가 갖고 싶은 것은 과도한 장식을 배제한, 우아한 옷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는 731벌의 고급 부티크 옷을 남긴 채 죽은 여자가 등장한다. 가격표도 뜯지 않은, 아름다운 옷들을 남긴 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희한한 이름을 가진 토니 타키타니는 키 165, 발 사이즈 230, 옷 2사이즈를 입는 여성을 구해 아내의 옷을 입고 지내주길 요청한다. 그렇게 옷을 입어보던 여성은 갑자기 주저앉아 펑펑 울기 시작한다. 토니가 이유를 묻자 여자는 대답한다. “옷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 <팬텀 스레드>의 한 장면.

 

비슷한 장면은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도 등장한다. 아름다운 색을 가진 영국산 셔츠에 파묻혀 있던 데이지가 불현듯 눈물을 쏟는다. 당황한 개츠비가 이유를 묻자,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데이지가 대답한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셔츠들이야. … 너무 슬퍼!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을 본 적이 없어.” 아름다운 촉감을 가진 옷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데이지, 아름답고, 우아하며 고급스러운 옷들은 왜 눈물을 흐르게 할까?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팬텀 스레드>는 그 눈물의 원인을 조금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 <팬텀 스레드>는 자신이 만드는 옷에 강박에 가까운 집중을 보이는 고급 의상 디자이너 레이놀즈 우드콕의 이야기이다. 함부로 따라할 수 없는 집념으로 옷을 만드는 그는 장인이다. 팬텀 스레드는 보이지 않는 실로 만든 옷, 이음새나 재봉질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옷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실로 지은 옷은 우드콕에게는 옷이지만 예술가라면 누구나 그런 작품을 소망한다. 소설가, 조각가, 영화감독, 작곡가 등 모든 예술가들은 재봉선이 보이지 않는 완벽한 작품을 꿈꾸는 것이다.

 

하필, 옷이다. 옷은 아무리 아름답고 우아해도 상품이다. 쓸모가 정해진 것이다. 건축물처럼 옷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용처가 있고 거래되며 그래서 가격이 있다. 어쩌면, 우드콕의 맞춤옷은 20세기에도 현존하는, 발터 베냐민이 말하는 아우라를 가진 거의 유일한 원작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드콕은 단 한 사람을 위한 드레스를 만드니 말이다.

 

마치 벨라스케스에게 ‘시녀들’을 요청했던 필리페 4세처럼, 우드콕에게 옷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귀족이나 왕족들이다.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원본성을 가진 옷, <팬텀 스레드>의 옷은 그래서 누구나 다 같은 돈을 지불하면 가질 수 있는 대중예술과는 정반대의 상품성을 가지고 있다. 그건, 사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중이 사용하고, 용처가 분명한 것들은 결코 우아할 수 없는 것일까?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 우아함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는 무려 1만8000t에 달하는 지붕의 무게를 이고 있는 강철 기둥을 보며 거기서 우아함을 발견한다. 강철 기둥은 겸손하게도 자신이 극복한 어려움을 내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이 기둥들은 목 위에 400m 길이의 지붕을 이고 있는데, 마치 아마포 차일처럼 가볍게 느껴지도록 서 있다.

 

그러니까, 우아함이란 어마어마한 고통과 수고를 다했음에도 타인에게 그 수고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안정감이다. <팬텀 스레드>에서 거의 완전한 우아함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우아함이다. 옷을 입은 자와 옷 사이에 이물감이 전혀 없는, 원래부터 존재했었던 것 같은, 입은 자에게 용기를 주는 드레스. 사실 이 문장에서 옷은 영화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다. 우아함은 우리의 일상에 의해 감춰지는 경우가 많다. 우아한 일상은 완벽한 도덕적 삶만큼이나 실현하기 어렵다.

 

<팬텀 스레드>는 배경이 되는 1950년대 영국의 현실이나 사회상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사랑의 아이러니와 우아함에 대해 130분의 구체적 장면들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팬텀 스레드>가 사치스럽고, 무의미한 작품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일상의 힘에 침윤되어 마모되어 가는 지극히 예민하고, 세련된 어떤 미적 감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때로 어떤 영화는 사회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한마디 말을 하지 않고 무심해도 된다. 히드로 공항의 기둥처럼 그렇게 우리 삶의 무게를 받치고 있는 순간을 보여줌으로써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떤 영화는 그래야만 한다. 모든 작품들이 눈에 보이고, 피부에 감촉되는 그런 삶만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우드콕의 옷처럼 아주 예민한 감성과 오래된 역설, 심오한 고뇌를 다루는 예술도 필요하다. 어머니, 고향, 결함, 사랑, 아이러니와 같은 추상적이지만 완강히 존재하는 단어들, 일상이 지우는 완벽한 추상어를 만나는 것. 영화는 그렇게 가끔 일상을 정제해준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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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카데미상 후보작인 <쓰리 빌보드>와 <셰이프 오브 워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우선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여성 주인공 영화가 처음이겠냐마는, 말 그대로 여성 캐릭터가 이야기를 이끄는 여성 인물 영화는 오랜만이다. 두 작품 모두 그렇다. 더 의미 있는 것은 그들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힘을 가진 쪽이 아니라는 점이다. 딸아이를 강간살인사건으로 잃은 어머니 밀드레드 헤이스(프랜시스 맥도먼드)나 냉전시대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말 못하는 여성 엘리사(샐리 호킨스), 그들 모두 약자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두 여성은 위험을 무릅쓰고 낯선 생명체를 구출한다.

 

물리적으로 보나, 사회적 위치로 보나 두 여성 인물은 모두 ‘을’에 가깝다. 딸아이의 죽음 이후 범인을 찾고 싶지만 사건은 일 년이 지나도록 흐지부지 해결될 기미가 없다. 옆집에 사는 이웃의 숟가락 개수도 헤아릴 만큼 작은 동네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인데도,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불행에 동정을 표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안됐다고 이야기할 뿐,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일을 벌인다. 마을 외곽에 버려진 광고판 세 개에 일 년치 광고비를 선납하고 메시지를 게재한 것이다. “죽어 가는 동안 강간당했다” “아무도 못 잡았다고?” “어떻게 된 거지, 윌러비 경찰서장?”라고 말이다. 동떨어져 있는 세 개의 입간판은 불연속적인 세 개의 낱말 카드와 같다. 상징적인 세 문장, 하지만 조용했던 마을은 이 문장들이 입간판에 쓰이는 순간부터 시끄러워진다.

 

역설적이게도 19살 소녀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강간당하고, 불태워졌을 때보다 세 개의 상징적 문장이 광고되자 마을이 더 시끄러워진다. 작고, 보수적인 마을의 남자들은 밀드레드를 설득하고, 회유하고, 협박한다.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어라, 그렇다고 죽은 딸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가만히 있어라, 경찰들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가만히 있어라, 지금 경찰서장은 말기암에 걸려 죽어가는 중이다.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어라.

 

하지만 밀드레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딸이, 소녀가 희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죽은 딸을 되살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딸들을 구하기 위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될까? 문제가 천천히 해결되는 게 아니라 잊혀질 뿐이다. 가만히, 조용히, 잊혀질 뿐이다. 영화 속 엄마의 말처럼, 가만히 있지 않은 그 며칠 동안 경찰은 일 년 동안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조사를 하고, 지역 언론은 몇 번이나 취재를 해간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엘리사가 듣는 말 역시 비슷하다. 소변을 보기 전에 손을 씻고 소변을 본 후엔 씻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기 신체 일부를 만지기 전에는 손을 씻지만 타인의 손을 잡기 전엔 손을 씻지 않는다. 그 신체 일부가 타인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 마초가 남미 어느 늪에서 잡아온 피조물을 고문하고 괴롭힌다. 그 피조물은 비록 우리와 생김새는 다르지만 의사소통도 되고 감정의 교류도 가능하다. 하지만 마초 관리자에게 그 피조물은 열등하고 이상한 물체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 관리자에게는 자신과 생김새가 다른 모든 게 다 열등하다는 사실이다. 흑인은 피부색이 다르니 열등하다. 여성은 피부색과 무관하게 우선 생물학적으로 다른 몸을 가졌으니 열등하다. 말을 하지 못하는 주인공 엘리사가 열등한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신이 자신의 모습과 똑같은 형상으로 인류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같은 형상’은 백인 남성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백인 남자가 가장 신에 가까운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금씩 결격 사유를 지닌 열등한 존재이다. 결함을 가진 이상 여자나 괴물이나 흑인이나 괴물이나 모두 다 똑같이 열등하다.

 

영화의 놀라운 힘은 무시받고, 협박받고, 천대받는 그들이 힘을 모을 때 발휘된다. 물속 피조물이나 말 못하는 여성이나 다 똑같이 열등하다면 적어도 그들 간에는 아무런 차이도, 차별도 없다. 엘리사가 연구소에서 피조물을 구출하려 할 때, 모든 사람들이 “가만히 있어라”라며 만류한다. 하지만 적어도 엘리사에게 그 피조물은 우리보다 열등한 생명체가 아니라 똑같은 생명체이다. 즉 그 피조물은 괴물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인 것이다.  똑같은 존재이니 사랑에 빠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함과 차별로 이뤄진 게 아니라 생명을 가졌다면 모두가 다 사랑할 수 있는 똑같은 존재인 셈이다.

 

힘을 가진 자들, 해결할 권력을 가진 자들은 말하곤 한다. 가만히 있어라. 그들은 을이, 피해자가, 힘없는 자가 가만히 있기를 바란다. 가만히 있으면 거슬리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생명을 가진 존재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은 죽은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더욱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 최근 점점 더 커져 가는 ‘미투’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가해자들은 지금 이 순간도 피해자들이 가만히 있기를 원한다. 아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있지 않는 것, 그건 힘없는 자들의 존재증명이자 권리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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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한잔 더 하실래요?” “조개를 참 좋아하나 봐요. 난 다른 조개 먹고 싶은데.” “저기 가서 키스만 하고 갈래요?” 만약, 처음 만난 남자가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그건 어떤 상황일까? 게다가, 그 남자와 여자가 직무상 상하관계에 놓인 입장이라면 말이다. 남자는 교사이고, 여자는 그에게서 평가를 받아야 하는 교생이다. 영화 &lt;연애의 목적&gt;(2005)의 유명한 장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연애의 목적>에서 영어교사 이유림(박해일 분·왼쪽)이 술자리에서 미술교생 최홍(강혜정 분)에게 치근덕거리고 있다.

 

한재림 감독의 &lt;연애의 목적&gt;의 앞부분을 보자면, 모든 게 교과서적이고 또 뻔하다. 다른 여자 교생들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교생이 있다. 게다가 예쁘다. 그녀를 담당하게 된 교사는 우선 술 한잔하자고 권한다. 거절당한다. 하지만 어떤 조직이든 우리나라엔 ‘회식’이라는 문화가 있다. 드디어 첫 번째 회식이다. 회식자리에서 일찍 그 교생이 뜨자, 늦더라도 다시 돌아와 달라고 부탁한다. 교생이 돌아왔을 때, 마침 사람들은 없었고, 그래서 남자 선생님이 다시 권한다. “저랑 한잔 더 하실래요?”

 

남자 선생님의 집요하고도 이상한 부탁에, 최홍(강혜정 분) 교생은 “여자 친구 사랑하세요?”, “이 선생님, 앞으로 제 얼굴 어떻게 보려고 이러세요?”라며 얼굴을 찌푸린다. 그래도, 최홍은 대개의 여교생들보다 한두 살 많은 언니답게 당당하게 거절한다. 여성의 사회생활 중 중요한 항목 중 하나가 회식자리에서 방어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유림(박해일 분) 선생은 집요하다. 끊임없이 요구하고, 따라붙고, 집을 찾아가고, 심지어 방으로 들어간다.

 

2005년 &lt;연애의 목적&gt;이 개봉했을 때, 이 영화는 꽤나 당혹스러운 작품이었다. 제목이 &lt;연애의 목적&gt;이지만 마치 성추행의 추억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2018년, 13년이 지나 다시 이 영화를 보니 정말이지 성추행의 알고리즘을 거의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첫 번째 회식자리, 게다가 거절할 의사는 있지만 거절할 권리가 없는 사회 초년병 여성을 겨냥한 무례하고도 폭력적인 언어들까지 말이다.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을 두고 또 한 번 이 사회가 요동쳤다. 2016년 이미 한 차례 ‘#문단 내 성폭력’이 지나갔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당시 사건들이 구체적인 성폭행 사태를 동반한 형사적인 문제에 국한되었다면 이번엔 추행과 희롱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 비단 문단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이건 문단이라는 그래도 가장 독립적이고, 용기 있는 집단에서 터져 나온 하나의 실증사례일 뿐이다.

 

적어도 최영미 시인은 스스로 문단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있고, 또 문단 밖에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여성이었기에 고백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 그러니까, 여전히 말하지도, 고백하지도 못하는 여성들이 수없이 많다. 이건 어떤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초년병 여성과 권력을 가진 기득권의 문제이다. 법조계, 의료계, 학계 심지어 교육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저랑 한잔 더 하실래요”로 시작되는, 첫 번째 회식의 공포가 우리 사회 곳곳에 가득 차 있다. 아니라고 부인할 수가 없다. 그게 더 심각한 문제이다.

 

‘천조국’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꽤나 자유롭고, 여성 인권이 높다고 여겨지는 미국에서도 이제 겨우 미투(Me Too)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 대한 여성 연기자들의 고백은 고통스러운 항거였다.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2005년 &lt;연애의 목적&gt;을 두고, 당혹스럽다는 반응은 있었지만 이를 두고 사회적 권력 관계와 성적 폭력성의 상관관계로 읽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건, 둔감했기 때문이다. 고통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 자체가 더 문제이다. 리베카 솔닛이 &lt;멀고도 가까운&gt;에서 말했듯이 무감각은 자아를 수축하고, 우리가 그런 사회의 일부라는 것을 잊게 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신체 부위는 죽은 신체밖에 없다.

 

최영미 시인이 성추행을 고발하면서, 거듭 ‘부드러운 거절’을 강조한 것이 너무도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영미가 김소월의 시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의 한 부분을 암송하며,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모르고 살았으면!”이라고 할 때, 이 목소리에는 후회와 절규, 고통과 회한이 뒤섞여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무례한 요구와 폭력적 언어의 부당함이 아니라 그것을 거절하는 또 다른 에티켓을 여성에게 요구해온 셈이다. 거절의 예의라니 그것도 폭력적 언어를 예의를 갖춰 거절해야 하다니.

 

홍상수의 초기작 &lt;오! 수정&gt;이나 &lt;강원도의 힘&gt;을 보면, 여성과 하룻밤을 갈구하는 철부지 지식인들이 잔뜩 등장한다. 임신중절 후 채 아물지 않은 여제자의 몸을 파고드는 &lt;강원도의 힘&gt; 속 대학 강사나 ‘그만 뚝’ 호통을 듣고 나서야 멀찍이 떨어지는 &lt;극장전&gt;의 남자 주인공을 보면, 왜 그렇게 많은 지식인 남성들이 홍상수 영화를 보며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을 했는지 새삼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아마도 많은 남성 권력자, 지식인들이 &lt;연애의 목적&gt; 속 이유림처럼 억울하고, 답답할 것이다. 여성의 피해에는 전혀 공감되지 않고, 남성의 입장에 전폭적으로 이입이 될 테니 말이다.

 

타인의 고통을 같이 앓는 것은 재능이다. 호의였고, 격려였는데, 오해가 생겼고 운이 나빴다고들 말한다. 구차한 변명이다. 그들은 상습범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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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의 영화 <올 더 머니>는 유괴사건을 다루고 있다. 유괴하면, 왠지 어린아이와 연루된 사건만 떠오르지만 한자의 뜻답게, 유괴(誘拐)는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잡아 억류하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올 더 머니>가 미국 최고의 부자였던 폴 게티의 손자 유괴사건을 다루는데, 그 손자가 18살의 남자아이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개 유괴사건은 돈 때문에 발생한다. 게티 3세가 유괴당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고 부호의 손자이니, 몸값 1700만달러 정도는 얻을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돈을 요구한 이탈리아 시골의 갱단보다 그 돈을 주지 않기 위해 버티는 게티 할아버지가 더 잔혹하게 여겨진다. 손주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돈보다는 덜 사랑하는 게 계속 입증되니 말이다.

 

1991년 이형호군 유괴 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 <그놈 목소리>(2007)의 한 장면으로 아이 엄마 오지선(김남주 분·오른쪽)이 형사들과 함께 유괴범의 전화를 받고 있다.

 

영화사에는 유괴사건을 다룬 많은 영화들이 있다.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전도연의 <밀양>은 아이의 유괴에서 시작하는 이야기고, 한국의 작가주의 감독의 맨 앞에 놓을 수 있을 박찬욱은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에서 두 번이나 아동 유괴사건을 다뤘다. 이창동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모두 허구이지만, 공교롭게도 많은 아동 유괴 영화들은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박진표 감독의 <그놈 목소리>는 1991년 이형호군 유괴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고, 곽경택 감독의 <극비수사> 역시 1978년 발생했던 정효주 유괴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실종 사건까지 범주를 넓히면, <아이들>이나 <체인질링>처럼 많은 작품들이 잃어버린 아이들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유괴’나 ‘실종’은 어린 시절 앵커의 다급한 목소리로 환기되는 단어이다. 아직 세상을 채 이해하지 못했던 유년기에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들었던 소년·소녀들의 이름, 텔레비전 화면 한쪽에 자리 잡았던 그 아이들의 얼굴 사진은 어쩌면 나에게도 닥칠 위험과도 같은 두려움을 전달해 주었다. 유괴, 실종, 어쩌면 세상의 전부일 수도 있는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눈물, 그런 이미지들이 파편처럼 흩어진 채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유괴와 관련된 뉴스를 거의 볼 수 없다. 공개 수배로 전환하면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래서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냈던 유괴사건 뉴스가 거의 사라진 것이다. 다행이다. 하지만 다행으로 여겨도 될 만큼, 과연 세상이 정말 더 안전해진 것일까? 유괴라는 말은 어쩐지 고색창연한 단어가 되어 버렸지만 사실 요즘 뉴스에는 아동과 관련되어 더 끔찍한 단어들이 등장했다. 학대, 폭력, 폭행과 같은 그런 단어들 말이다.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뉴스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사건들, 이웃집 고교생 언니가 아이를 데려가 목숨을 앗는다거나 의붓어머니가 아이들을 굶기고, 때로는 친부모가 아이를 폭행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사건들이 사회면 뉴스로 등장한 것이다.

 

돈 때문에 다른 가족의 소중한 보물인 아이를 훔치는 유괴범은 공분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제 그 공분은 이웃집 소녀를 아무 이유 없이 살해하고, 자기 자식을 학대하고 폭력을 가한 사람들에게로 옮겨 왔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사라진 게 아니라 그 모습이 달라졌을 뿐인 셈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훨씬 더 나빠진 것일까? 세상이 훨씬 안전해져서 아동 납치 및 유괴 뉴스가 사라진 게 아니듯이 어쩌면 부모들이 훨씬 더 이기적이며 폭력적으로 변해서 아동 학대 뉴스가 많아진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 산재해 있는 성폭력 문제가 이제야 조금씩 뉴스가 되고, 사회적 담론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없어서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았던 상처임에 분명하다.

 

많은 민담과 동화에는 많은 계모와 그들이 저지른 학대가 등장한다. 할머니댁에 가는 소녀를 잡아먹기 위해 기다리는 늑대는 지금, 여기에도 있다. <장화, 홍련>에서 두 자매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계모 역시 지금, 여기에 있다. 많은 동화 속 늑대는 진짜 늑대가 아니라 아이를 노리는 범죄자이며 의붓딸을 괴롭히는 어머니는 일종의 기호이자 상징이다. 그 이야기들 속 어머니는 힘없고, 연약할 뿐 아니라 어딘가 호소하거나 의지할 방법도 힘도 없었던 어린아이들을 괴롭혔던, 그런 폭력의 대명사인 셈이다.
 
인천 여아 유괴 살해 사건이나 고준희양 학대 치사 사건을 보면, 아동 유괴사건은 오히려 고전적인 범죄 사건처럼 보인다. 적어도, 영화에서 다루는 아동 유괴사건의 범죄자들은 ‘돈’이라는 매우 정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작 돈 때문에 아이들이 희생되기도 했지만, 겨우 돈을 노렸기에 아이들은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1920년대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이 처음 등장했을 때, 돈을 노리고 남편이나 애인을 배신하는 여자는 경악의 대상이었다. 팜므 파탈이라고 불렸던 그녀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패륜아의 상징이었다. 돈만 숭배하는 인간은 그렇게 타락한 세상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더러운 돈으로도 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세상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차라리 돈 때문이었다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유괴와 몸값이라는 뉴스 대신에 그 자리를 차지한 학대와 폭력 때문에, 유괴도 추억이 된 지금, 아이로 살아가기에 세상은 언제나 지독하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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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삶을 무척 사랑하나 보다. 죽음 이후에도 이곳과 닮은, 어떤 시공간을 상상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49재나 천국, 저승과 같은 단어들 속에는 죽고 난 이후에도 존재하는 어떤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다. 이 믿음들이 영화나 소설, 그림이나 음악과 같은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한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 <신과 함께>가 그렇고, 골든글로브 애니메이션 부문을 수상한 <코코>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작가 위화 역시 <제7일>에서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을 그려내고, 아주 오래된 문학작품인 단테의 <신곡>에도 삶과 죽음 사이의 경유지가 등장한다.

 

영화 <신과 함께>의 한 장면으로 자홍(차태현 분)이 저승차사들과 재판을 받기 위해 강을 건너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거의 첫 번째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 <원더풀 라이프>는 죽은 다음날부터 시작된다. 이곳에는 우리로 치자면 저승차사와 비슷한 관리자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이제 막 죽어서 삶을 떠난 이들을 완전한 죽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주목을 끄는 것은 그 완전한 죽음의 세계에 대한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제안이다. 관리자들은 살아생전 경험했던 일 중 가장 소중한 기억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망자들이 소중한 기억을 선택하면, 관리자들은 그 일들을 재현해 영상으로 상영해준다. 그러면 망자들은 그 추억만 남기고 모든 기억들은 잊게 된다. 행복한 장면만 편집된 영화의 클립처럼, 그렇게 기억을 즐기고 나면 그들은 진정 ‘저세상’으로 가게 된다.

 

영화 <신과 함께>에서 그리고 있는 시간 역시, 죽음 이후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기 전,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 있는 세계이다. 49일의 시간 동안 삶과 죽음 사이에 망자가 걸려 있는 것이다. 죽은 자는 이 시간 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평생을 돌아보고, 저승의 법으로 재판을 받는다. 그 재판 결과에 따라 형벌을 받기도 하고 환생하기도 한다.

 

단테의 <신곡>은 한 남자가 연옥과 지옥을 다녀오는 이야기다. 특히 연옥이 흥미로운데, 연옥에 빠진 자들은 살아생전 저질렀던 일들을 순례함으로써 고통받는다. 부활제가 있는 금요일부터 부활절인 일요일을 넘는 시간까지 남자는 사후 세계를 접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렇듯 죽음 이후의 시공간이 삶의 시공간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학기말이 되어 성적표를 받듯 죽음 이후 며칠 동안 삶을 평가받는 것이다.

 

영화 <코코>는 뮤지션을 꿈꾸는 소년 미구엘(사진 중앙)이 전설적인 가수 에르네스토의 기타에 손을 댔다가 ‘죽은 자들의 세상’에 들어가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위화의 <제7일>에 등장하는 사후 공간은 더 심하다. 그곳은 삶의 이면이 아니라 이승의 복사판이다. 살았던 동안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여력이 저승에서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수의도 못 입고, 화장 순서도 귀빈에게 밀린다. 7일이 지나 완전히 죽고 나서야 진정한 평등이 온다. 죽음은 위화에게 평등이다.

 

이 작품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후 세계는 삶의 공간만큼이나 역동적이다. 그런데, 그 역동성의 핵심에는 삶의 연장선상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상상력이 자리 잡고 있다. 육체적인 활동이 모두 끝나고 정지한 일차적 죽음을 영혼이 떠나는 이차적 죽음과 분리해둔 것이다. 엄밀히 말해, 떼어내지 못하는 쪽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이다. 사람들은 영혼을 쉽게 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우리가 죽음 이후를 모르기에 그 두려움을 상상으로 옮긴다. 이는 죽음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거울단계에 대해 우리가 여전히 모르는 것도, 두려운 것도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죽음의 경유지를 상상하는 걸까? 왜 삶과 죽음을 단절하지 않고, 중간지대에 이야기와 그림, 영화를 남기며 들여다보는 걸까? 삶과 죽음 사이에 머물던 이들도 결국 떠날 수밖에 없다. 떠나지 못하고 중간에 영원히 걸리는 건 오히려 저주로 그려진다. 그러니 우리는 삶을 정리하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삶과 죽음 사이의 경유지에 머무는 것이다.

 

부표를 맴도는 꽃잎들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살았던 삶을 여행하며, 정리하고, 기억하고, 반성한다. 회개가 삶을 순례한 대가라면 환생은 삶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윤회가 업보라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은 축복임에 분명하다. 결국, 완전한 죽음 전에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검토이며 그를 위한 영혼의 여행이다.

 

발로 떠나는 여행과 달리 영혼의 여행은 쉽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익숙한 이 땅과 언어를 떠나는 여행을 통해 진정한 ‘나’를 돌아보듯이 어쩌면 사후 세계를 나들이함으로써 우리는 이번 생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 이후의 시공간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육체를 이탈한 영혼의 망명을 꿈꾸는 작업과 닮아 있다. ‘나’를 돌아보는 꽤나 성숙한 영혼의 순례라는 점에서 말이다.

 

공교롭게도 대개의 작품 속에서 삶을 돌아보는 데 허락된 시간은 7일이다. 그 7일, 죽기 전에 살아생전에, 한 번쯤 마음먹고 시간을 내서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어떨까? <원더풀 라이프>의 그들처럼 가장 소중한 추억을 꼽아보고, <코코>처럼 기억하고, 그러면서 말이다. 딱 일주일이면 되는데, 영혼의 순례는 쉽지 않다. 죽고 나서야 가능한 영혼의 여행, 그 여행을 미리 한 번쯤 해보라는 권고, 그런 속 깊은 충고가 사후 세계의 상상력 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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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과 함께>에서 진급에 눈이 먼 박 중위(이준혁 분)는 원작보다 평면적인 악역으로 각색됐다. <신과 함께>의 한 장면.

여름에 잠잠했던 영화관이 겨울에 들썩인다. <강철비>로 시작해 <신과 함께>를 거쳐 <1987>까지 매주 새롭게 개봉하는 한국 영화마다 화제다. 설과 추석으로 양분되었던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개봉 시기가 이제는 여름, 겨울이라는 일종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졌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는 일종의 서사적 관습이 있다. 장르적으로 따지자면 거의 다 판타지인데, 대개 극명한 선과 악의 대립을 그린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에도 서사적 관습이 있다. 선과 악의 뚜렷한 구분과 신파가 그것이다.

 

영화 <신과 함께>에서 진급에 눈이 먼 박 중위(이준혁 분)는 원작보다 평면적인 악역으로 각색됐다. <신과 함께>의 한 장면.

 

그런데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선과 악은 할리우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가상의 판타지 공간이 아니라 현실과 역사 위에 세운 사실적 허구이기 때문이다.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 장준환 감독의 <1987> 등이 그렇다. 실화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대개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매우 민감했던 사안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매우 가까운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할 경우엔 더욱 그렇다. 심지어 아직까지 명확한 인과관계나 진상조차 파악되지 못한 일들이기에 그것을 다루는 것 자체가 일종의 사회적 메시지가 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규명되지 못한 사건일수록 인과응보를 추구한다는 사실이다. 인과응보를 위해 선과 악은 더욱 단단하게 분리되고 견고하게 대립한다. <택시운전사>의 사복조장(최귀화)은 악이고 광주 택시운전사 황태술(유해진)은 선이다. 주인공 김사복(송강호)은 두말할 것 없이 선이다. <택시운전사>는 이렇듯 선한 집단과 악한 집단으로 양분되어 있다. 선하면서 악하거나, 악하면서도 선한 구석을 가진 그런 인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선과 악이 완강히 나뉘고 이면을 가진 인물이나 복합적인 인물은 들어설 여지가 없다.

 

<1987>의 세계도 유사하다. 박처장(김윤석) 무리는 악이고 당직 검사, 신문사 기자 등은 선의 집단에 속해있다. 그래도 어떤 점에서 <1987>은 <택시운전사>의 세계보다는 훨씬 더 성숙한데, 왜냐면 특정한 영웅 하나의 활약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택시운전사>는 김사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기적을 다루지만 <1987>은 여러 사람들의 선의가 모여 드디어 만들어진 변화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이런 식의 선악의 이분법은 사실 매우 유아적인 소망 충족에 가깝다. 말하자면 콩쥐가 상을 받고, 팥쥐가 벌을 받듯이 한국적 신파의 중심에 인과응보로 고착된 선악의 이분법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기대와 달리 악은 평범하다. 좀 더 인간학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쉽게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악한 면과 선한 면이 있다. 악하기만 한 악당이나 선하기만 한 영웅은 안타깝게도 현실엔 없다. 다만 이야기, 영화에서만 등장할 뿐이다. 인간이 가진 입체성을 보는 데에는 여러 면에서 거리가 필요하다. 심리적 거리와 판단의 거리, 두 개 모두가 필요한데, 가령 영화 <밀정>에서 반간(이중스파이) 주인공을 다룰 수 있었던 것도 이 거리 덕분이다. 그래도 적어도 일제강점기 친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거리로 판단을 유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한편 1980년대의 일들이 여전히 현재 진행 중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직 차갑고, 냉정하게 말하기에는 너무 가깝고 객관적으로 말하기엔 객관이 될 명징한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규명조차 되지 않은 일이기에 영화는 허구를 통해서라도 정의를 요구한다. 지금 우리는 그 30년 전의 역사를 일종의 한국적 판타지의 방식으로 풀어 나가고 있다. 광주, 6월항쟁 등을 통해 인간의 다양성과 모순을 말하기엔 그래서 세상살이의 복잡함을 담아내기엔 아직 제대로 역사적 호명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부정한 권력은 악이고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힘들은 선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식의 단순한 선악 이분법이 한국 대중 영화 전반에 퍼져있는 일종의 흥행코드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범죄도시>에서 장첸(윤계상)·위성락(진선규)은 악, 마석도(마동석)는 선이고, <청년경찰>에서 두 경찰대생은 선이고 대림동의 조선족들은 모두 악이다. 범죄자는 모두 악이다. 물론 범죄는 그르다. 하지만 범죄와 선악의 개념은 구분되어야 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오래된 격언은 이 구분 위에서 성립된다.

 

문제적인 것은 지금 거의 모든 한국 영화들이 선명한 선악 대립 구도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처럼 강력한 선악의 이분법 위에서 신파가 만개한다. <신과 함께> 원작은 선과 악의 대립이 좀 희미한데, 그래서 군 생활 중 억울하게 죽게 된 병사이야기를 자홍의 동생 수홍(김동욱) 이야기로 삽입했다. 이 과정에서 박중위(이준혁)는 진급에 눈이 먼 평면적인 악의 자리에 선다.

 

이 선악의 대립은 마침내 바다와 같이 넓고 깊은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용서의 이름으로 용해된다.

 

세상은 모순덩어리다. 그래서 영화는 복잡다단하게 얽힌 모순을 단순명쾌한 선과 악의 구도로 잘라 낸다. 우리는 모순투성이 세상을 너무 잘 알기에 선명한 권선징악의 세계를 구매한다. 하지만 모순이 생각의 힘을 기른다. 영화처럼 보기엔, 세상은 너무나도 불완전하다. 신파가 사소한 해결감은 주지만 진정한 감동을 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복잡다단한 세상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것, 블록버스터 외에 다양한 영화들이 꼭 해내야 하는 일들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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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쟁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쓴 노벨 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말이다. 나 역시 전쟁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영화평론을 하다보면 너무 많은 전쟁 그리고 전쟁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마블과 디시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만 해도 그렇다. <원더우먼>은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최근 개봉했던 <저스티스 리그>의 배경도 인류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된 권력 쟁탈전이다. <스타워즈>는 말 그대로 ‘별들의 전쟁’이고, <어벤져스>에서도 비록 가상의 전쟁이라 하더라도 매번 전쟁을 치른다. 세계 어느 영화관에서든 전쟁이 현재 진행 중인 것이다.

 

영화 <강철비>의 한 장면으로 엄철우(정우성 분·왼쪽)와 곽철우(곽도원 분)가 식사하며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양우석 감독의 <강철비>는 전쟁에 대한 영화이지만 결코 전쟁영화는 아니다. 그런데 <강철비>는 그 어떤 전쟁영화보다 무섭고 두렵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머리를 비우고, 팝콘을 먹으며 그렇게 의자에 기대 볼 수 없는 전쟁을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바로 여기 한반도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이기에 영화적 허구를 넘어 우리의 무의식 너머 뇌관을 건드린다. 한반도와 전쟁, 아닌 척해도 올 한 해 내내 우리를 시달리게 했던 문제 아니었던가?

 

제목인 <강철비>는 스틸레인이라 불리는 클러스터형 탄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영화의 두 주인공의 이름을 은유하기도 한다. 남한의 안보수석(곽도원)과 북한의 정예요원(정우성) 두 사람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모두 철우이다. 음차 해서 풀어보자면 그들이 바로 철로 된 비, 철비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말장난 같은 이름의 동일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 우연이 한국전쟁이나 민족 분단과 같은 여러 가지 한반도 상황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두 사람은 정치의 논리를 벗어나 전쟁의 두려움을 직시하고, 체감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전쟁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두려워한다. <강철비>를 보는 내내 무릎을 덜덜 떨었던 이유도, 그것이 잔혹하거나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다. 꾸며진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강철비>에 그려진 상황은 너무나 그럴듯하고 사실적이다. 양우석 감독이 그려낸 한반도의 정세가 과장이나 오판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적확하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한국인들이 꽁꽁 숨겨 두었던 공포의 개연성을 풀어낸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는 실제 있었던 전쟁의 한 장면을 IMAX 스크린 위에 담아냈지만, 그건 이미 과거이고 역사의 한 장면이다. 이미 가능성이 유산된 지나간 전쟁의 흔적인 셈이다. <강철비>는 지금 여기, 한반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 위에 허구를 직조한다. 한국에서 전쟁이란 어쩌면 가능한 미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 속 남한 철우의 입을 통해 말해지듯이 분단의 진정한 고통은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에 의해 증폭된다. 미래의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혹시나 하는 위협에 대비를 하는 것 자체가 평화의 약속을 위태롭게 하고 혼란의 위험을 높인다. 스티븐 밀러의 말처럼, 전쟁은 전쟁에 대한 준비과정 때문에 일어나곤 했기 때문이다. 준비된 상태 자체가 상대에게 위협을 불러온다. 칸트도 했던 이 말은 지금 한반도 정세에 많은 암시를 준다.

 

철우와 철우는 이념, 민족, 이윤과 같은 큰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그늘 아래 살아가고 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막고자 한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그런 일일 것이다. 전쟁은 정치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실패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미래의 전쟁에 대한 가능성 자체를 아예 없애는 방향으로서의 평화를 일궈 내야 할 것이다. 전쟁의 위협이 아예 사라질 때, 바로 진정한 평화가 오기 때문이다.

 

영화의 두 인물은 남한과 북한이 핵전쟁을 치를지도 모를 상황에서도 각자 나름의 ‘전쟁’을 치른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지키는 것, 그 자체도 전쟁과 다를 바 없다. 자기 전부를 걸고 그 순간만큼은 진지하게 싸움에 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적 예술사에서 전쟁은 곧 고단한 삶에 대한 은유가 되어 주곤 했다. 지금껏 우리의 영화들에서 전쟁이란 이렇듯 낭만적인 과거이거나 개인의 고투였던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라고는 했지만 진짜 전쟁은 아니었던 셈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어느새 완전히 허구로 유희할 수만은 없는 ‘전쟁영화’의 시대에 돌입해 버린 듯싶다. 먼 곳에서 보기엔 그저 영화적 문법에 충실한 장르 영화일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에게 ‘북’의 문제는 구체적 실감을 가진 문제이다. 그러니 전쟁을 정치적 수사학으로 남용하는 이들에게 혐오와 불신이 생길 수밖에. 이럼에 눈감아 생각해 볼 때, 결국 강철로 된 무지개처럼 단단히 벼린 평화를 기대하고 또 기대할 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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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는 즐겁다. 다만 그것이 해결될 때 말이다. 범인이 누구였느냐를 밝혀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파악하고, 분석하고, 규정할 때 마침내 범죄는 정복된다. 왜가 밝혀진다는 것은 범죄의 인과관계가 해부되었음을 뜻한다. 해부된 범죄는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원인을 알면 범죄는 예방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할까? 여기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해 낸 탐정, 에르큘 포와로 말이다.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에서 에르큘 포와르 역을 맡은 케네스 브래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스틸 이미지.

 

에르큘 포와로는 해결사의 대명사다. 포와로가 있는 곳에 해결되지 못할 범죄는 없고, 잡히지 않는 범인은 없으며, 원인 모를 범죄도 없다. 포와로가 주목하는 순간 우연은 사라진다. 모든 우연은 철저히 계산된 필연이며 그래서 회색 뇌세포를 가진 그가 풀어내지 못할 난제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즐거운 범죄의 면면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이미 1974년에 영화화된 바 있다. 원작을 읽었다면 잘 알고 있듯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반전이 독특한 작품이다. 이 반전은 범죄서사에 대해 소비자가 으레 요구하는 관습적 모범답안을 뒤집는 것과 연관된다. 대개의 독자, 관객들이 범인이 누구인가에 집중하는 동안 이야기는 누구가 아닌 왜를 생각하라고 떠민다. 누구냐보다 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너무도 유명한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결론을 모른다면, 더 이상 읽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어떤 점에서 범인을 가려내는 게 불가능한 사건에 가깝다. 범인이 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이며, 게다가 서로가 알리바이가 되어 서로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즉,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은 다수의 사람들이 의기투합해 정의를 실현한 일종의 단죄이다.

 

중요한 것은, 이 기차에 바로 에르큘 포와로가 탑승했다는 사실이다. 기획이 완벽할수록 포와로의 재능은 빛나고 그의 역할은 중요해진다. 역시나 그는 천재이기 때문에 이 완벽한 기획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즐거운 범죄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얽히고설킨 열세 개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포와로는 그 숨겨진 이면과 거짓을 읽어낸다. 좀 과하게 이야기하자면 마치 포와로에게 읽히기 위해 열세 명이 복잡한 암호를 출제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단지 어려운 문제일 뿐 결국 풀릴 수 없는 퍼즐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 문제적인 것은 공동범죄라는 바로 그 부분이다. 열세 명의 사람들이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의 복수를 위해 모의한다. 케네스 브래나 감독 역시 이 부분이 꺼림칙했는지, “영혼의 균열”이라는 말을 거듭 강조한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을 위해 범죄를 모의한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돈”이었다면 훨씬 더 그럴 듯해 보이진 않았을까? 2017년 현재의 관객들에게, 열세 명이나 함께할 수 있는 공공의 신의라는 게 납득이 될 수 있을까?

 

다정한 친구, 은인, 존경했던 이의 복수를 위해 현재의 자신을 걸고 범죄에 가담한다는 것, 그건 너무나도 아름다운 인간적 연대이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며, 이상적이다. 2017년엔 불가능해 보이는 연대, 적어도 1930년대에는 이런 식의 정의와 신뢰, 우애가 가능하리라 여겨졌던 모양이다. 2017년, 완벽한 천재 포와로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남을 위해 스스로를 헌신하는 열세 명의 인물들이다.

 

어쩌면 지금의 시점에서는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 같은 범죄자가 더 그럴 듯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무 이유도, 맥락도, 감정이나 불만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범죄자 말이다. 만약, 그에게 “왜”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냥”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의 범죄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그런 범죄자를 쫓는 보안관에게 그의 행적은 암호나 퍼즐이 아니라 해독 불가능한 난수표에 불과하다. 애당초 인과관계 따위가 없으니 포와로가 살아 돌아온다고 할지언정 안톤 시거의 범죄를 명명백백히 밝혀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즐거운 범죄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1974년의 고전 영화를 2017년 새롭게 단장해 다시 보는 마음도 여기서 멀지 않을 것이다. 어느덧 세상엔 회색 두뇌로도 이해할 수 없는 범죄들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아내를 성매매에 이용할 뿐 아니라 딸 친구까지 유인해 폭행 살해하는 남자도 그렇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초등학생을 유인해 산산이 부순 소녀도 그렇다. 유능한 탐정만 있으면 모든 범죄는 해결 가능하다고 믿었던 그 시절이야말로 어쩌면 인류의 좋은 시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젠 그런 환상조차 설득력을 잃은, 황무지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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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영화 <범죄도시>에서 경찰들이 조선족 범죄자들을 제압하는 장면. <범죄도시> 스틸 이미지


영화 <범죄도시>의 누적 관객이 650만명을 넘었다. 이런 기세라면 700만명도 훌쩍 넘지 않을까 싶다. 2017년 가을 추석, 성수기 영화로 개봉할 때만 해도 <범죄도시>의 흥행을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유는 몇 가지로 추려지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바로 기시감이다. 어떤 형사가 범죄조직을 소탕하는 이야기 자체가 한국 영화에서 너무 많이 다뤄지고, 너무 흔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의 이유를 더 보탠다면, 영화가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사실이다. <범죄도시>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조선족 조직폭력배를 악의 축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의 폭력행위가 심상치 않다. 도끼, 망치 등 가리지 않고 휘둘러댈 뿐만 아니라 신체 훼손의 정도도 무척 심하다.

 

한국 영화계에서 ‘청불 영화’, 그러니까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청불 영화’ 하면 언뜻 선정적인 장면들, 즉 야한 영화가 떠오르지만 실상 한국 개봉 영화 중 청불 영화는 성적 표현 수위 보다는 폭력성으로 규정되는 바가 크다. 그러니까 대개의 한국 청불 영화는 미성년자가 보면 위험할 정도로 매우 폭력적이라는 의미다. 짐작은 사실과 다르지 않다. <신세계> 이후 한국 청불 영화사상 가장 흥행이 잘 된 영화라는 <범죄도시>에는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여자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비중 있는 여성 캐릭터는 없다. 술과 도박처럼 범죄의 배경으로 러시아 여성, 한국 여성들이 등장한다. <범죄도시>에서는 그나마 마동석의 캐릭터를 부각하는 도우미로서 등장하는, 일종의 소도구에 가깝다.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극도로 잔인해진 한국 대중 영화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영화에서 범죄 세계의 잔혹한 묘사는 어느새 특별한 게 아닌 평범한 클리셰이자 주류 영화의 상식적 문법이 되어 버렸다. 회칼이 난무하고, 신체 주요 부위를 훼손하거나 아예 없애는 장면이 등장하기 일쑤며, 심지어 개를 살상용으로 사육하고 사람을 개 먹이로 주는 장면도 등장한다. 특정한 작품 하나가 아니라 여러 영화에서 일종의 관습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더 킹>의 맹견 살상 장면은 <미옥>에도 등장하고, <신세계>의 시신 유기 방식은 <내부자들>에서 조금 변주된 방식으로 활용된다. 가만 보자면, 범죄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죽을 사람과 곧 죽을 사람으로 구분될 수 있을 정도이다.

 

사실 범죄 영화는 그 사회의 엄혹함과 폭력성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경제의 성장과 함께 미국의 조직범죄 영화가 성장했듯이 어쩌면 만연한 범죄 영화는 우리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그 이면이 조직폭력배의 구조와 다르지 않게 그려진다는 점에서 말이다.   

   

검사나 정치인이 등장하는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조직범죄 영화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특별시민> <더 킹> <검사외전>에 묘사된 공인들의 모습은 <부당거래>나 <짝패>에 그려진 조직폭력배 출신 사업가들 모습과 구별하기 힘들다.

 

결국 한국에서 ‘되는 영화’는 모두 범죄 영화의 꼴을 하고 있다. 공무원을 그리든, 지하경제를 그리든, 인생의 허무와 모성애를 그리든 이 모든 주제들이 다 되는 영화, 범죄라는 스펙트럼을 거쳐 재조명되고, 해석되고, 그려진다. 하지만 이러한 쏠림 현상과 함께 관객들의 피로도가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최근 정치판을 조직범죄로 그리거나 조직범죄 잔혹성을 폭력적으로 재현하는 영화들의 흥행 성적이 낮아지기도 했다. 잔인한 조직범죄 영화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은 아닐까 기대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마동석이라는 배우, 캐릭터의 매력에 기댄 <범죄도시>의 성공은 결국 잔인하고, 폭력적인 영화는 여전히 잘된다는 확신으로 증폭되지 않을까 싶다.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의 의도는 다를 수 있겠지만 결국 투자자들은 일종의 선후관계를 인과관계로 해석해, 폭력성을 되는 영화의 주요 성분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잘된 영화가 폭력적이었다가 아니라 폭력적인 영화여야 잘된다고 오해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의미다.

 

자르고, 찌르고, 부수고, 훼손하는 이 폭력적 장면들이 범죄의 박진감을 높이는 필연적 장치일까? 역설적이게도 한국 영화의 등급 기준을 보자면 노출에는 무척이나 엄격하다. 하지만 폭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한 부분이 없지 않다. 무릇 선정성이란 비단 성적 욕망의 자극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이야말로 사람의 감정을 흔들지 않던가? 폭력에 대한 감도를 낮추고, 폭력에 익숙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외설은 아닐지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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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온라인 취업포털에서 5포 세대들이 성별에 따라 어떤 순위로 포기하는가를 조사한 적 있다. 남자들은 결혼을 가장 많이 포기했고, 여자들은 출산을 가장 많이 포기했다. 남자 2위는 연애, 여자 2위는 결혼. 이후 내 집 마련, 연애, 인간관계 등이 이어졌는데, 가만 보면 다섯 가지 중 무려 네 가지가 ‘사랑’과 관련이 있다. 연애가 가장 기본적이라면 사실 그 연애의 사회적 결실 중 하나가 결혼이고, 출산 역시 필수는 아니지만 결혼의 결실 중 하나이니 말이다. 내 집 마련이 결혼의 조건 중 하나라는 것을 돌이켜 보자면, 결국 5포 세대가 포기한 것은 바로 로맨스라는 생각이 든다. 하물며, N포 세대라니, 이제 연애는 무리이고 결혼은 사치인 시대가 되어 버린 셈이다.

 

영화 <소공녀>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이솜(오른쪽)과 안재홍, 영화 <소공녀> 포스터.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비전 부문에는 모두 열 한 개의 한국 영화가 상영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중 많은 작품들이 20대 젊은이들의 거주 문제, ‘집’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중 <소공녀>라는 작품에는 웃기고도 슬픈 장면 하나가 등장하는데, 그래도 방 한 칸이라도 가지고 살던 여자 주인공이 애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사랑을 나눈 지 너무 오래되었음을 깨닫는다. 허겁지겁 입고 있던 옷을 벗는 연인들, 그런데, 방 안인 것 치고 너무 많은 옷을 껴입고 있다. 대략 열 겹에 가까운 옷을 하나 둘씩 벗다 보니 둘의 몸에는 오소소 닭살이 돋고, 덜덜 떠는 지경이 되고 만다. 그들은 다시 한 두 겹씩 옷을 껴입으며, “우리 그냥 봄 되면 하자”라고 사랑을 미룬다. 방이 있다 해도, 난방할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셈이다. 결국, 주인공은 그나마의 방도 포기하고 만다. 그녀는 가방 하나에 삶을 정리하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기로 결심한다. 그래도 젊으니까 말이다. <소공녀>의 영어 제목은 <Microhabitat>이다. 아주 작은, 최소한의 방, 그 방도 허락되지 않은 젊음의 형편을 좀 더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같은 부문의 영화 <이월(February)>의 형편은 좀 더 가혹하다. 밀린 월세에 보증금까지 모두 써 버린 민경은 공사장 주변의 컨테이너 박스에서 겨우 삶을 연명해 간다. 이월, 남은 추위가 뼛속까지 시려 오는 그 겨울에 민경은 다만 먹고, 잘 곳을 찾기 위해 매춘도 마다하지 않는다. 매춘과 로맨스 사이 그 얼마나 먼 것이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경은 그 간극에서라도 잠깐의 여유와 쉼을 얻는다. 그나마라는 부사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최근 한국에서 가장 보기 힘든 장르가 바로 로맨스이다. 로맨스 영화의 황금기가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초기였음을 생각해보자면 경제적 호황과 로맨스의 부흥이 전혀 무관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프리티 우먼>과 같은 조금은 비현실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부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같은 일상적 로맨스까지, <결혼이야기>에서 시작된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 열풍이 <광식이 동생 광태>와 같은 다층적 로맨스로 이어지기까지 만남과 연애, 사랑과 결혼은 영화의 매우 중요한 소재 중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최근 영화의 제작 환경으로 따져보자면 <광식이 동생 광태>와 같은 영화들이 과연 제작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관객들은 이런 소소한 마음의 풍경이나 연애의 뒷모습보다는 <신세계>나 <범죄도시>처럼 잔혹한 세상에서 더 동질감을 느끼는 듯하다. 연애가 사치인 세상, 영화 속 연애나 결혼을 보고 대리만족할 수준을 넘어서 삶이 더 팍팍해졌기 때문이다. 잔혹한 칼부림 영화에 싫증을 내면서도 사지가 썰리고, 칼이 난자하는 폭력적인 영화에 꾸준히 관객이 드는 것은, 차라리 비체험적 공간을 구매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실제 삶보다 훨씬 더 잔혹한 그러나 결국 해결의 카타르시스가 달콤하게 보상되는, 그런 세계를 사고 싶은 것은 아닐까?

 

로맨스 영화의 품귀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로맨틱 코미디나 로맨스 영화를 강의할 때면 최근 영화들의 예시가 빈곤해짐을 느낀다. 워킹 타이틀사가 시도했던 조금 다른 로맨스 영화의 계보들도 2010년 이후엔 주춤하다. 어쩌면 <라라랜드>처럼 결국엔 새드 앤딩이 되는 사랑이야기나 <건축학개론>처럼 마침내 마음에 묻어 둬야 하는 첫사랑 이야기가 지금, 2010년대의 청춘에게는 훨씬 더 사실적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한 상황에 로맨스라니.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이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고 썼다. 바람이 새는 풍선처럼 그렇게 허약한 우리에게 사랑은 격려이고, 무시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연애와 사랑만큼 ‘나’라는 사람의 가치 있음과 필요함을 주관적으로 확신으로 굳게 하는 체험이 또 있을까? 나를 사랑하고 믿어주는 단 한 사람만으로, 얼마나 우리는 큰 격려와 힘을 얻게 되던가? 결국 우리가 포기하고 사는 것은 이런 사랑과 그로 인한 따스한 체온들이다. 혐오와 분노라는 단어가 더 익숙해진 데에는 사랑의 부재와 결핍의 영향이 크다. 사랑 없이 스스로의 가치를 확신하기엔 우린 너무 허약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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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도 만들어진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에는 이름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나온다. 주인공 소년의 이름은 피신인데, 영어권인 인도에서 그 이름은 오줌싸개(피싱)와 거의 똑같이 발음된다. 프랑스에서 가장 맑은 수영장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이 이름으로 살다가 피신은 평생 놀림거리가 될 듯싶다. 그래서 소년은 마음먹는다. ‘내 이름을 파이(π)로 바꾸자’라고 말이다. 1교시 수업이 시작되자, 소년은 “내 이름은 파이야”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잘했어, 오줌싸개”라며 비아냥거린다. 2교시가 시작될 때도 소년은 “내 이름은 파이야”라고 다시 소개한다. 다만, 무한대 숫자인 파이를 한 열 자리 정도 외워서 소개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의 마지막 수업 시간에는 칠판 가득 파이의 무한대 숫자를 외워 쓰고는, 자신의 이름을 파이라고 소개한다. 그날 이후 아무도 소년을 피싱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렇게 오줌싸개는 무한대로 이름을 바꾸는 데 성공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K’ 역을 맡은 라이언 고슬링(왼쪽)과 ‘릭 데커드’ 역을 맡은 해리슨 포드.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 스틸 이미지.

 

이름을 바꾼다는 건 무엇일까?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정하는 사람은 없다. 개명이나 예명, 필명을 말하는 게 아니라 태어나서 세상에 처음 새겨지는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은 곧 운명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원해서, 자기 이름을 선택할 수 없다. 그건 부모도, 국적도, 성별도 마찬가지이다. 태어나자마자 자의와 무관하게 갖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이름이다. 그러니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운명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이름, 운명을 바꾸려면 적어도 파이의 무한대 숫자 정도는 외워 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정도는 해야, 운명과 맞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5년 만에 다시 만들어진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이름과 운명의 이야기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세대 리플리컨트(복제인간) 넥서스8을 쫓는 블레이드 러너의 이름은 ‘K’이다. 말이 이름이지 이니셜도 아니고 물품에 붙어 있는 바코드의 일련번호와 다르지 않다. 폭동과 반란을 거듭하던 구세대 리플리컨트들과 달리 새로운 복제인간들은 제조자의 말에 순종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그러니까, K는 K라고 불리는 데 별 저항감이 없다.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껍데기라고 불러도 별 반응이 없다. 그에겐 애당초 자존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한 번 반대로 생각해 보고 싶다. 우리는 왜 제대로 이름이 불리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할까? 즉 누군가 나를 낮잡아 부르거나 아예 나라는 존재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면 왜 기분이 상하고, 마음이 아픈 걸까?

 

가만 보면, 자존감과 인격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바로 이름이다. 우리에게 이름을 붙여 준 부모들은 벌거벗고 태어난 우리를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해준 거의 유일한 사람들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만큼은 바라지도 않지만 결국 우리는 이름의 값을 정당히 대접받기 위해 세상에서 투쟁을 벌이며 살아간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세상의 요구에 순응하면서 말이다.

 

사랑이라면 그것도 사랑일 것이다. 내 이름에 걸맞은 대접을 받는 것 말이다. 반대로, 이름이 없어서 즉 무명의 존재라서 세상으로부터 괄시받는 느낌 역시 무척이나 아프다. 그 아픔은 결국 차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에 더 따갑고 아플 것이다. 토마스 하디의 문제작인 <무명의 주드>의 제목이 무명의 주드 곧 이름 없는 존재, 주드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소설 속에서 주드는 끊임없이 세상이 알아봐 주는, 유명의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드는 익명의 존재로 세상을 떠난다. 아내도, 아들도, 사랑했던 연인도 외면한 상태에서, 그러니까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서 죽는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죽음의 순간, 가장 비참한 신의 자식 욥의 이야기를 외우며 눈을 감는다는 사실이다. 주드는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겨진 그 순간, 비참의 형태로 사랑을 확인했던 신의 이야기를 읊조린다.

 

과연 K는 마지막 순간 하늘을 쳐다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주인공 K는 창조주의 그림자에 기대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른 채 스스로 너무나 인간적인 선택을 한다. 누군가의 ‘사랑’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K의 자아 정체감을 느끼게 했다면, 사랑받는다는 그 불확실한 착각도 무명의 존재를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사랑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만으로 복제인간의 마음이 움직이고 자존감이 만들어진다. 결국, 사랑이 인간다움의 열쇠라는 것일까?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허약하지만 분명한 증표가 아닐까? 마음이라는 수수께끼, 인간의 존엄과 마음의 실체를 돌이켜 보게 하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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