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보백보’라는 말이 있다. 오십 보나 백 보나 별반 차이 없다는 의미다. 도토리 키재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큰 차이가 없으니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더 보란 뜻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비아냥으로 쓰인다. 뭐 대단한 차이가 있다고 호들갑이냐, 오십보백보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문화에 있어서 오십 보 차이는 엄청나다. 오십 보가 뭐냐, 단 열 걸음 차도 크다. 그 약간의 차이를 위해 다들 노력하고, 그렇게 한 오십 보쯤 먼저 나가는 사람을 천재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렇게 오십 보 내딛은 사람들이 문화의 코드를 만들어 낸다. 뒤샹이 처음으로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았을 때, 앤디 워홀이 수프 깡통을 그려내기 시작했을 때, 그게 바로 오십 걸음의 차이가 패러다임 전환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오십 보와 백 보의 차이에 민감해야 한다. 차이를 발견하면 그 점을 주목해 주는 게 소비자의 의무인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너의 결혼식>과 <암수살인>은 약간 다른 발걸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영화 <암수살인>의 한 장면.

 

 

<너의 결혼식>은 멜로드라마이다. 두 남녀가 만나 호감을 느끼며 우여곡절을 겪다가 사랑하고 헤어진다. 만약 우여곡절을 겪다가 사랑을 이루는 데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아주 평범한 로맨스 영화로 남을 뻔했다. 하지만, <너의 결혼식>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헤어짐의 과정까지 보여준다. 이 헤어짐의 과정 속에서 영화는 로맨스에서는 멀어지지만 좀 더 현실적인 세계와 만난다. 성사가 아니라 이별이니 굳이 장르적으로 따지자면 로맨스가 아니라 멜로드라마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너의 결혼식>이 장애물을 두고 본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헤어질 수밖에 없는 뻔한 멜로드라마도 아니란 사실이다. <너의 결혼식>은 로맨스의 관습에서도 오십 보 더 나아가고 멜로드라마의 공식에서도 오십 보 나아간다. 그러므로 새로운 로맨스, 다른 멜로드라마로 차별화되는 것이다.

 

그 차별화는 바로 현실성에 있다. <너의 결혼식>은 전형적인 첫사랑 서사라고 말할 수 있다. <클래식> <건축학개론>과 같은 첫사랑 서사 말이다. 고등학생 황우연(김영광)은 전학 온 여학생 환승희(박보영)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우정과 사랑 사이 어디에서 감정을 쌓아가던 두 사람은 승희의 갑작스러운 이사와 그 과정에서 발견하게 된 복잡한 가정환경으로 멀어진다. 대학을 가고, 재회하게 되는 과정들은 코믹한 톤으로 시종일관 가볍게 흘러간다. 무거워지는 것은 대학 졸업 이후이다.

 

대개의 첫사랑 영화는 첫사랑의 순간과 현실을 점프 컷하듯 비약해서 그 차이와 변화를 강조한다. 순결했던 아이의 타락, 순진했던 아이의 환멸 과정에서 아이는 어른이 된다. 여기서 타락은 여자의 몫이고 성장은 대개 남자의 몫이다. <말죽거리잔혹사>에서 권상우가 어른이 되는 순간, 한가인은 어느새 삶에 찌들어 빛을 잃었고, <건축학개론>의 서연 역시 말똥말똥한 눈의 수지가 만취에 욕을 내뱉는 한가인으로 바뀐다.

 

하지만 <너의 결혼식>에서 바뀐 것은 오히려 남자 쪽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였지만, 그녀만 있으면 다 해결될 것 같은 세상에 다치고 패배하자 비겁하게 첫사랑과 결별하는 것이다. 그건 그녀, 환승희와의 결별이라기보다는 그녀를 사랑했던 자기 자신과의 이별에 더 가깝다.

 

여자가 변해서 남자가 성장한다는 식이 아니라 남자가 변해서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이 약간의 변화는 첫사랑의 오래된 관습을 무너뜨린다. 세상이 아니라 내가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오십 보의 차이에서 영화 <너의 결혼식>은 꽤나 어른스러운 멜로드라마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변화는 <암수살인>에서도 발견된다. <암수살인>은 드러나지 않다보니 집계되지 않는 범죄에 대한 이야기다.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는 범죄, 말하자면 영화 <버닝>의 해미(전종서)가 사라졌지만 종수(유아인) 외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상황과 비슷하다. <암수살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오십 보 차이는 바로 형사의 변화다. 대개 한국형 범죄영화에서 형사는 생활고에 찌들어 있거나 비리에 무감해져 있기 일쑤였다. 아니면 정반대로 통제 불능의 정의감으로 사고뭉치 취급을 받는 인물들이 많았다. <공공의 적>의 설경구나 <끝까지 간다>의 이선균, <VIP>의 김명민 캐릭터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암수살인>의 주인공 형사는 일단 가난하지 않다. 운 좋게 부자 아버지와 형을 둔 덕에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편이다. 고급 세단을 소유하고, 취미로 골프를 친다.

 

무엇보다 다 자비로 충당한다. 어딘가에서 돈을 뜯는다거나 횡령하는 게 아니라 당당히 자기 돈으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이 윤택함이 사건 수사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온다. 고과나 승진이 아니라 순전히 범죄에 대한 알 권리와 형사로서의 도덕적 의무, 인간으로서의 윤리적 책임에 의해 움직이는 유형의 인물이 태어난 것이다. 지금껏,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희한한 인물이 탄생한 것이다.

 

이 오십 보 차이로 인해 <암수살인>의 수사극은 완전히 달라진다.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형 주인공이나 그것을 추적해 가는 과정은 사실 기존의 수사극과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주인공의 약간의 차이로 인해 영화는 달라진다. 이 오십 보 차이가 변화하기 어려운 범죄영화의 관습에 또 어떤 차별성을 유발할지 기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십 보 백 보는 차이가 없는 게 아니라 오십 보만큼 차이난다. 오십 보가 아니라 십 보의 차이도 중요하다. 그 약간의 차이가 삶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이건 비단 영화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오십 보 나은 사람의 그 오십 보를 인정해줘야 한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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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추석이면 추석영화들이 마련된다. 극장에는 한국의 전통적 성수기를 노린 작품들이 걸리고, 집에서도 각 방송사가 준비한 추석특집 영화들이 방영된다. 일순간 너무 많은 영화들이 쏟아져 어떤 것을 보아야 하나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다양한 선택이 기쁘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다양한 선택이 다양한 음식으로 채워진 뷔페처럼 만족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는 어마어마하게 식욕을 자극하지만 막상 한 바퀴 돌고 나면 헛배가 부른 듯한 기분. 차라리, 정성껏 마련된 단품 요리를 먹을 걸 그랬나, 하고 후회가 드는 그런 기분 말이다.

 

영화 <체실 비치에서>의 한 장면.

 

영화 보기는 먹기와 같은 본능적 행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수기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여러모로 욕구와 충동을 자극한다. 대형 광고판에 선명한 해상도를 가진 사진들이 걸려있고, 소위 대형 배우들의 얼굴이 나란히 포진해 있다. 예고편이나 기사, 평론들도 있지만 일단 그렇게 걸려 있는 얼굴들을 보며, 어떤 영화가 재미있을까 고민하기 마련이다. 최종 선택은 대부분 직관적이다. 어떤 게 더 재미있을까, 어떤 게 볼만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직관대로 결정하는 것이다.

올해 추석영화관이 특히 그러했을 것이다.

 

올 추석에는 세 편의 사극과 두 편의 장르물이 개봉됐다. <물괴>는 추석 한 주전, <협상> <안시성> <명당>은 추석연휴 직전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더풀 고스트>가 연휴 마지막에 개봉됐다. 김명민, 손예진, 현빈, 조인성, 조승우, 마동석, 김영광에 이르는 화려한 라인업은 말 그대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배우들은 나름의 홍보전에 뛰어들었고, 연일 보도자료로 각 영화들의 흥행성과가 전달되었다. 시장의 규모만 보자면 추석 극장가 관객은 1300만명으로 추정되었다. 영화 모두가 손익분기점을 넘기려면 적어도 1700만 관객 정도가 필요하니, 이는 이미 레드오션이고 과열경쟁이 예고된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영화들이 개봉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기억에 남는 단 하나의 작품은 없다. 제작비나 제작사 및 배급사의 규모, 배우들의 면모를 봐서 평균작 이상이 분명 나올 만한데, 다섯 작품 모두 도토리 키 재기 하듯 고만고만하니 주목을 끄는 작품이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의 캐릭터가 거의 비슷하다. 인간이 가진 복잡성이나 예민함을 모두 깎아내버린, 밋밋한 사람들이 전부인 셈이다. 주인공들은 모두 정의롭고 정직하며, 그 반대에 있는 사람들은 세속적 야망을 불태운다. 이런 이분법 안에서 인간은 순수하고 정의로운 인간 아니면 악하고 이기적인 인간, 둘로 나뉜다.

 

어떤 관객이라도 스스로를 이기적인 악당 편에 두고 몰입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선하고 올바른 쪽이 나의 그림자일 것이라 여기며 그것에 동일시한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정의롭고 선하게만 살아가는 것일까? 인간의 내면이라는 게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평면적인 것일까?

 

영화 <체실 비치에서>를 보며 오랜만에 신선한 당혹감을 느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신혼여행 첫날 밤 급격하게 서로에게 환멸을 느끼고 멀어지는 두 연인을 보여준다. 카메라의 앵글로 치장되거나 꾸며진 정사 장면들과 달리 이 신혼부부의 첫날밤, 첫 정사는 보는 이들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외설적이거나 선정적이어서가 아니다. 마치 무방비 상태의 맨 얼굴처럼 카메라는 우리가 그다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순간을 침범해 들어간다. 거기엔 우리가 돌이키고 싶어하지 않는, 상처와 부끄러움과 미숙함이 있다. 매끈하게 세련되고, 다듬어진 가상의 인간이 아니라 투박하게 벼려진 날것 그대로의 인간이 있는 것이다.

 

이언 매큐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속 두 사람은 우리가 여느 영화에서 보아왔던 연애와 결혼의 주인공들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당혹스럽지만 그렇기 때문에 반갑다. 오히려 너무나 완벽하게 정의로 꾸며진,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부끄럽거나 민망한 순간이 없는 듯한 추석영화 속 주인공들보다 더 위안이 되기도 한다. 추석영화 속 주인공들이 우리가 되어야 할 가상의 인간형을 추구한다면, <체실 비치에서>의 두 연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견지해야만 하는 우리와 닮아 있다. 인간은 위대하지만 대체로 엉망진창이며, 때로는 너무 부조리하다. 그들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그렇고, 나도 그렇다.

 

<체실 비치에서> 남자 주인공 에드워드 역을 맡은 빌리 하울은 “내가 가장 관심 있는 것은 빛, 심지어 경박함을 때로는 인간의 가장 어두운 면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나는 불합리에 매료되었고, 부적절한 반응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종에 속해 있음을 알고 그 인간의 속성에 대해 어지간히 고민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완벽한 외모와 보편적 정의로 조형된 주인공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런 인물들은 정작 온기와 위로를 주지 못한다.

 

물론 모든 영화들이 이렇게 예민하게 인간의 복잡성을 파고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다섯 편, 여섯 편 아무리 많은 작품들이 개봉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복잡함과 모순을 보여주는 작품이 단 하나도 없다면, 그건 다양한 영화관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진다고 해도 그건 다양하지 않다. 올해 추석 개봉 대작들이 고만고만하니, 기억에 남지 않는 이유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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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전시회 첫 번째 순서에는 그가 지금껏 만들었던 영화 음악과 영화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 재해석을 담아 놓은 영상물이 자리잡고 있다. 익숙한 선율에 어우러진 영상들은 대개 외국의 영화들이다. 그중 낯익은 한국 영화가 한 편 있는데, 바로 <남한산성>이다. 2017년, 작년 이맘때쯤 선보였던 영화 <남한산성>은 드물게 패배의 이야기이다. 그것도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전시를 위해 편집된 짧은 화면 속에서도 인물들은 모두 좌절과 패배감에 젖어 있다. 그 표정은 가히 굴욕에서 빚어져 나오는 슬픔과 회한이라 할 만하다. 여기엔 허구적 과장이나 영화적 복수 같은 게 있을 틈이 없다.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흥행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패배한 치욕의 순간을 재연해 확인하고, 다시 한번 굴욕감을 경험하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니 진짜 어른이라야 그런 패배감을 감당할 수 있다.

 

영화 <협상>의 한 장면.

 

2018년 추석 영화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승리의 결말을 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중 영화는 우리가 실제 경험하기 어려운 통쾌한 성공을 자주 보여준다. <암살>에서 김구 선생의 지령을 수행할 수 있는 것도, <내부자들>에서 내부 고발자가 안전할 수 있는 것도 사실보다는 허구적 정의에 더 가깝다. 옳다고 현실에서 이뤄지리라는 법은 없다. 음모나 술수, 협잡의 달인들이 오히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 권력을 잡곤 한다. 힘에 혈안이 된 낭인들이기에 뭔가 손에 잡히면 휘두르기 마련이다.

 

덕으로 보나, 의로 보나 그 몫에 값하지 못하는 자들이 가당치 않은 권력과 재력을 갖고 남용하고, 탕진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만큼은 그들은 혼쭐이 난다. 벌을 받고, 망신을 당하고, 법의 심판을 받는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더욱 영화적 정의라도 갈급하는지 모르겠다. 홍길동이 조선에서 찾을 수 없었던 정의와 법을 율도국에 세우는 것처럼 우리는 영화 속에서 나름의 율도국을 찾고자 한다.

 

<협상> <물괴> <명당>과 같은 추석 영화들은 모두 하나같이 정통 장르 영화임을 강조한다. <물괴>는 사극과 크리처물의 결합이 처음임을 강조하고 <명당>은 역사와 액션, 스릴러, 민속학의 결합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협상> 역시 한국 영화 사상 거의 볼 수 없었던, 협상가를 등장시켜, 새로운 범죄 스릴러의 지평을 열겠노라고 선언했다.

 

세 작품 모두 겉모습을 보자면 스스로 천명한 장르에 부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괴>에는 정성껏 컴퓨터 그래픽으로 손본 괴물이 등장하니 크리처물이 맞고, <명당>은 실존했던 흥선군과 풍수지리를 연결시켰으니 새로운 역사극이라 볼 수 있다. <협상> 역시 지금껏 협상가를 내세워 그 과정을 전면화한 작품이 없었으니 새로운 게 맞긴 하다.

 

문제는 그 겉모습, 장르적 관습이나 에피소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들 즉 메시지에 있다. 이를테면, 장르로 즐기는 대중 영화라면 사필귀정, 일벌백계의 결말로 꼭 가야 하는 것일까? 눈에 보이는 범죄 뒤에 권력의 구조적 부패가 있다는 식의 전개나 그러므로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와 같은 결말로 수렴되어야 하느냐란 말이다.

 

<물괴>에는 왕을 흔들려는 대신들이 등장하고, <명당>에는 자신들의 권세로 왕권을 더욱 짓밟는 장동 김씨 집안이 등장한다. <협상>에도 온갖 협잡을 일삼는 정부 고위 관료들이 잔뜩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물괴>는 괴물과 싸우고, <명당>은 집안의 원수와 싸우며 <협상>은 인질범과 대립하지만 이 작품 모두 마지막에 가서는 구조적으로 깊이 뿌리박혀 있는 적폐와 싸운다. 하나같이 적폐청산을 시원한 카타르시스적 결말로 제시하고자 한다.

 

영웅이 우주를 구하는 게 할리우드 대중 영화의 문법이라면 소시민이 적폐를 청산하는 게 바로 한국 영화의 판타지이다. 좋다. 하지만 언제까지 영화적 판타지로만 적폐는 청산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직 적폐를 청산하기는커녕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있는데, 영화는 그런 것은 영화가 해 줄 테니 우선 우리 시원하게 허구적 청산을 즐기자고 권유한다. 아예 불가능할 때엔 그러니까 정권 교체가 있어야만 가능할 때엔 그런 허구적 판타지가 갈증을 달래주는 서사적 정의가 되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때 판타지는 대중의 갈망이었고, 다가올 정의의 촉진제였다. 역사 속에서 찾아낸 작고도 놀라운 승리의 기록들이 대중에게 주었던 감동도 그런 것이었고, <베테랑>의 마지막 장면이 허황되지만 통쾌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젠, 영화적 승리로 만족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는 안되는 시점에 왔다. 사회적 정의 구현을 현실이 아닌 만화적 판타지로 활용해 싸구려 카타르시스로 제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니 이미, 관객들은 만드는 사람보다 훨씬 더 똑똑해서, 청산을 가장한 저속한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 <상류사회>의 변태적 계몽주의가 관객에게 외면받았던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영화적 허구는 대중이 느끼고는 있지만 아직 인식하지 않은 문제를 풀어낼 때 판타지로서 효력을 가질 수 있다. 이젠 허구가 아닌 현실에서 정의를 구현해야 할 시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구적 해결에 만족하자는 제안은 안일한 상업주의에 불과하다. 가짜 승리의 거짓 환희보다는 진짜 패배의 모욕감을 돌아보는 게 훨씬 더 성숙한 일이다. 패배의 오욕을 견딜 수 있어야 승리도 지킬 수 있다. 가짜 성취를 판매하는, 한국형 대중 영화의 판타지가 어느 새 한국 영화의 적폐가 되어가고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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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사회: 사회적 지위나 생활수준이 높은 사람들의 사회. 상류사회는 매우 모호한 말이다. 크다, 예쁘다와 같은 말들이 대표적인데, 도대체 얼마만큼 커야 큰 것이고 어떻게 생겨야 예쁜 것인지 명확한 기준이 없다. 대체로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합의로 통용되는데, 상류사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류는 무엇을, 어디까지를 가리키는 것일까?

 

상류라는 말에는 이미 위계가 자리 잡고 있다. 상류가 있으면 하류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상류사회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표준적 위계이기에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가령, 최근 방영되고 있는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여주인공인 고애신은 명망 높은 사대부 가문의 딸로 저잣거리의 누구든 알아보는 상류계층 ‘애기씨’로 살아간다. 반면 그녀의 약혼자인 김희성은 한성 최고의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명망 높은 가문의 반열엔 끼지 못한다. 심지어 포수인 승구는 고애신의 스승이지만 하대하는 것은 당시로선 강상죄에 준하는 불법이다. 2018년 영화 <상류사회>에서 ‘상류사회’는 철저하게 ‘돈’으로 나뉜다. <상류사회> 속 상류사회는 재벌기업과 국회의원의 세계로 압축된다. 돈과 권력, 이 두 가지가 바로 변혁 감독이 생각하는 현재적 위계질서의 근간으로 보인다.

 

영화 <상류사회> 메인 포스터

 

사대부 가문, 공작, 백작처럼 타고난 사회적 지위들은 이름 앞에 붙여둠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데 쓰이곤 했다. 작위가 있으면 상류, 없으면 하류, 이런 식으로 나누기 간편했던 것이다. 문제는 소위 상류계층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적 표준이나 관습이 지속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격차를 각인시키고자 한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노비됨이나 백정됨을 강조하는 양반들이 그렇고 <상류사회>에서 “우리는 너희와 달라”라면서 갑질을 하는 재벌가 내외가 그렇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란, 아니 적어도 이야기는 이런 상류사회를 전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전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전복은 돈과 권력으로 결코 가질 수 없는 덕과 선을 제시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 세상을 관찰할 줄 아는 균형 잡힌 시선과 태도가 바로 예술가의 이야기인 셈이다. 예술가가 성자나 도덕군자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남다른 관찰력으로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면모들을 밝히고, 삐딱한 거리감으로 통념을 흔드는 것에 더 가깝다.

 

영화 <상류사회>의 실패는 바로 여기서 빚어진다. 영화는 상류사회의 민낯을 보여준다고 말했지만 그들의 기괴함을 전시하는 데만 열중한다. 여기엔 감독의 관점이 없다. 영화는 급조한 설교로 관객들을 도덕적으로 계몽하고자 한다. 심지어 상류를 꿈꾸는 사람이든 상류에 머무는 최고 권력층이든 모두 성욕의 노예라는 식의 일반화도 감행한다. 상류든 중류든 하류든 성욕에 시달리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식의 위험한 동일시를 시도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도덕과 선을 가르칠 수는 없다. 가르쳐서도 안된다. 하지만 우리가 세속적 기준으로 무시하는 인물들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덕을 보여줄 필요는 있다. 세상이 부와 권력, 명성의 렌즈만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한다면 예술가는 다른 렌즈로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영화에 요구하는 것은 훔쳐보기가 아니라 그 다른 관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그 어느 시기보다 계층이나 계급, 사회적 지위에 민감한 시대를 살고 있다. 고애신이 살던 조선말기 무려 500여년 지켜져 왔던 위계질서가 고통의 근대사 속에서 한꺼번에 무너졌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는 유례없던 능력주의의 시대를 경험했다. 지성과 체력, 용기와 운을 갖춘 창의적 인물들이 새로운 상류계층을 형성할 수 있었던 시기를 누렸던 것이다. 적어도 그때엔 공부만 잘해서 판사, 검사, 의사가 되고 그러면 집안도 나아지고, 살림살이도 나아질 것이라 믿었다. 대학만 졸업하면 살아갈 만한 직장을 구할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자기계발과 능력이 통하기도 했던 시절인 셈이다.

 

물론, 능력주의 시대는 만만치 않은 멀미와 현기증을 선사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이나,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같은 훌륭한 대작들은 이러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다. 더 나은 계층에 오르고자 하는 역류의 고통과 세속적 세상의 갈등을 그려냄으로써 이 작품들은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해 주었다. 서정인, 최인훈, 김승옥이 그려냈던 세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제 능력주의의 시대는 끝났다. 한때 우린 계층의 역류를 꿈꾸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노라며 다짐하기도 했지만, 어느새 역류는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상류사회>에서처럼 이젠 변호사도 대기업 사모님의 발을 주물러야 하며, 의사도 <라이프>처럼 대기업 상속자의 구미를 맞춘다. 적어도 더 나은 삶이라고 믿었던 약간의 성장이 달라진 돈과 권력의 위계질서 안에서 별것 아닌 게 된 셈이다. 지위, 재산, 권리, 상속받을 수 있는 재산에 따라 상류사회가 나뉜다면 이건 아예 접근이 불가능한 것이다. 3대를 넘어 세습되고 축적된 부는 견고한 울타리 너머에 있다.

 

그러므로 예술가라면 더욱 이 조악한 세상의 위계를 의심해야 하고 다른 제안들을 해야만 한다. 제인 오스틴이 당시의 갑들을 감싸는 듯하지만 결국 그들의 위선이나 불안을 뛰어넘는 비천하지만 도덕적 인물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듯이, 우리는 이 시대의 새로운 기준을 발견해야만 한다. 탐욕이나 욕망보다 더 소중한 가치. 정말이지 그런 가치를 질문하는 문제적 인물이 필요한 시대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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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고 다니냐?” 유력한 용의자를 앞에 두고서도 놓아주어야만 하는 시골 경찰이 그에게 묻는다. 살인도 일이랍시고, 그렇게 열심히 하고 다니는데, 그래 밥은 먹고 다니냐, 라고 말이다. “라면 먹고 갈래요?” 좀 더 시간을 나누고 싶은 여자가 데이트 상대인 남자에게 들어오라는 말 대신, 라면 먹고 가라고 제안한다. 여기서 밥과 라면은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그 의미가 아닐 것이다. 여기엔 사전에 없는 다양한 맥락과 행간의 함의가 담겨 있다.

 

영화 <공작>의 한 장면.

 

유독 한국 영화와 소설에는 밥을 먹자고 제안하거나 식사를 함께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때로는 꽤나 진지하게 다뤄지는데, 하재영 소설 <같이 밥 먹을래요>, 윤고은 소설 <일인용 식탁>은 혼자 밥먹기의 곤란함과 어려움을 주제로 삼고 있다.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 역시 그런 측면에서 밥먹기를 주제로 한 이야기다. 먹방 예능, 인터넷 1인 방송까지 따지자면 정말이지 먹는 것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최근 한국 영화에서 밥 먹는 장면은 삶과 정치 사이 애매한 경계의 긴장을 보여줄 때가 많다. 영화 <독전> <공작>만 해도 그렇다. <독전>의 그 유명한 장면, 마약상으로 위장한 경찰이 아시아 마약시장의 거물 진하림(김주혁)을 만나는 장면을 보자. 거래 성사를 위해 원호(조진웅)는 상대방이 먹는 것들을 따라 먹으며 호감과 신뢰를 얻고자 한다. 상대방은 독주에 곁들여 사람 눈알까지 씹어 먹으며 위세를 부린다. 여기서 신뢰는 상대가 먹는 것을 나도 먹는 식의 원시적 방법으로 확보된다. 이들의 식탁은 음식이 놓여 있을 뿐 목숨을 건 전장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우리가 “같이 식사 할래요?”라고 묻는 것은 단순히 밥을 나눠 먹는 게 아니다. ‘밥’은 사회생활의 일부다. 회사 점심시간도 업무의 일부이며 회식 자리는 말할 것도 없다. 누군가와 관계를 새롭게 맺거나 거래를 트고 싶을 때, 밥을 먹자는 제안으로 뻔히 보이는 속내를 포장하곤 한다. 제안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게 단순히 밥먹자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영화 <공작>에서 공작원 흑금성이 첫 거래를 성사시키는 곳 역시 중국의 어느 호텔의 조용한 식당이다. 술을 주고받으며 한끼 식사를 나누는 것 같지만 그 식사는 핵, 돈, 목숨이 복잡하게 뒤얽힌 정치적 거래이다. 흑금성은 혹시라도 정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유언까지 대동해 술을 거절하고, 작전용 녹음기를 발목에 숨긴 채 목숨을 건 연기를 한다. 말이 식사 자리이지 뭐 하나라도 먹었다가는 곧바로 체하고 말 듯한 위기 상황과 다르지 않다.

 

눈길을 끄는 것은, 북한 고위 간부와 남한 사업가로 위장한 첫 만남이 브로맨스로 녹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도 똑같이 ‘밥’을 먹는데, 이번엔 북한 간부 이차장의 집에서, 이차장의 아내가 만든 밥을 나눠 먹는다. 녹음도, 계산도, 작전도 없는 이 자리에서 그들은 드디어 밥다운 밥을 먹는다. 이러한 장면은 영화 <강철비>에서도 연출되는데, 청와대 비서관과 북한 군인이 잔치국수를 나눠 먹는 장면이 그렇다. 적과의 동침보다 어려운 게 적과의 한끼라도 되는 듯, 그렇게 한끼를 나눠 먹고 난 이후 그들은 적이 아닌 동지로 서로를 믿게 된다. 거래를 트는 게 아니라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러한 식사의 행간은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어느 가족>에 명백히 그려져 있다. <어느 가족>의 원제목은 <만비키 가족>인데, 만비키는 일종의 좀도둑질 내지는 좀도둑을 의미한다. 이 가족은 애초에 범죄로 형성되었다. 할머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가족으로 삼고, 부모 역할의 두 남녀는 길거리에 유기된 아이들을 데려온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부분, 아이들과 할머니를 유괴하고 납치한 혐의로 수사를 받는 젊은 여성은 “남이 버린 것을 주워 온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 가족 자체도 남의 것을 주워서 이뤄진 셈이다. 법의 관점에서 보자면 범죄지만 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법이 놓치는 사람의 할 일을 그녀가 해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줍지 않았다면 노인은 고독사했을 테고, 아이들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게 뻔하다.

 

이 다른 관점이 설득되는 지점이 바로 영화 내내 반복되는 밥 먹는 장면들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가족들은 추운 길거리를 헤매던 다섯 살 소녀와 뜨거운 고로케를 나눠 먹는다. 가족들이 모여 있는 장면 내내 그들은 무엇인가를 먹고 있다. 특별히 ‘우리 밥 먹자’라고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먹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걸 자연스럽게 나눠 먹는다. 여름엔 소면을, 겨울엔 고로케를 먹는 게 다를 뿐, 그렇게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밥을 나눠 먹는 것이다.

 

문제는 정을 나누는 식사 장면이 한국 사회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매우 드물어졌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밥 먹는 장면은 정보다는 이익을 도모하고, 거래와 협잡을 공유하는 기회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내부자들>의 그 유명한, 나체 식사 장면도 그럴 것이다. 서로를 믿지 못해 발가벗어야만 술과 음식을 나눌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인간’의 식사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과거 향수 속에서, 이방의 식탁에서 따뜻한 밥 한끼를 목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만큼 각박한 현실을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정말이지, 따뜻한 밥 한끼만을 위한, 목적 없이 안부를 전하기 위한 그런 식사의 온도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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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운 감독은 영화 <인랑>에 대한 인터뷰 중 이런 말을 했다. “어쩌면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대접을 못 받는 시대”라고 말이다. 김지운 감독은 SNS와 같은 개인 미디어에 ‘개인’의 말보다는 당위의 말들, 해야 할 말들이 더 많은 사태를 두고 이런 말을 했다. “그런 말을 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다”라며 조금 얼버무렸지만 여기에 함축된 “그런”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영화<인랑>의 한 장면.

 

지난 몇 년의 영화계를 보면 김지운 감독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택시 운전사> <1987> <강철비> <밀정> 등등의 작품을 보자면, 대개 이념과 역사 같은 큰 주제를 다룬 작품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여기엔 ‘자유주의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조국의 해방을 논하고, 민주주의를 갈급하는 상황에서 개인, 자유라니. 이건 너무 소아적이며 이기적인 단어로 간추려지고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지난 몇 년이 그랬다. 개인을 내세우기엔 지나치게 세상이 엄혹했고, 자유라는 말은 엉터리 보수에 의해 더럽게 오염되었다. 그래서, ‘나’보다는 ‘우리’에 주장을 실었고, 일탈보다는 노선을 택했다. 1990년대 이후 문학과 영화에 르네상스를 가져왔던 수많은 개인들이 모습을 바꾸고 목소리를 달리했다. 모더니스트, 염세주의자, 탐미주의자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자신을 감추거나 스스로 달라졌다. 어쨌거나 수많은 개인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이 숨거나 사라졌던 것이다.

 

김지운 감독이 자유주의자들의 대접을 논했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들, 이를테면 <컴잉아웃>이나 <달콤한 인생>과 같은 영화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라면 탄생하지 못했을 이야기들이니까. 여고생의 성적 정체성 찾기를 에로틱하게 녹여 낸 <컴잉아웃>의 정념도, <달콤한 인생>의 모욕감이나 마음이라는 모호한 감성도, 집단이나 단체의 이념으로는 결코 설명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개인의 비밀 지대다. 공개적으로 드러내긴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인간의 모순, 그런 게 문제를 일으키는 공간이 바로 개인이니 말이다.

 

2018년 여름 성수기를 두고 개봉하는 영화들을 보면, 어쩌면 이 이념의 시대가 이제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어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김지운 감독의 <인랑>과 윤종빈 감독의 <공작>은 모두 남북관계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다.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인랑>이 가까운 미래, 남북관계가 호전된 통일 직전을 다루고 있다면 <공작>은 역사상 처음으로 야당 출신 대통령을 갖게 된 그래서 실제로 남북관계가 호전되기 직전인 1997년 무렵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영화들의 공통점이라면 말했다시피 남북관계가 좋아지는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관계 호전이 영화적 갈등의 씨앗으로 제시된다. 남북관계 호전, 통일과 같은 역사적 변화를 대개의 사람들은 반기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누군가는 남과 북의 갈등과 분단 상태가 영원하기를 바란다. <인랑>에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이 그렇고, <강철비>에서는 북한의 강경파들이 그러하며 <공작>에서는 이권에 눈이 먼 정치 모리배들이 갈등의 지속을 원한다. 통일과 화해 분위기를 거절하는 이러한 자들은 영화적 악의 축이 되어 그것을 갈망하는 주인공과 대결한다. 영화적 허구로나 가능한 화해무드, 이 가설 아래서 영화적 이야기가 설계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이미 지난 4월 남과 북의 정상이 손을 맞잡고 군사 분계선을 넘나드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사실이다. <인랑>을 보면서, 남북 화해 무드가 우리, 남한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다는 설정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판문점에서의 정상회담과 선언이 있은 후, 심지어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이 만난 이후 마주치는 영화적 설정이라는 게 어쩐지 영 실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들, 간절히 바라는 일들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재현된 이미지들이 우리의 판타지를 실현하고, 욕망을 해소해주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점을 영화로 엿보는 것이다. 적어도 영화는 완전한 시각적 착각을 불러일으켜 주니 말이다.

 

물론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는 사이, 급속도로 전개된 회담이었고, 화해무드였기는 했지만, 우리는 TV를 통해 상상과 허구를 앞지르는 현실을 이미 목격했다. 설마 싶어 영화로 상상했던 일이 사실이 되고, 배우가 연기했던 장면을 실제 남북 정상이 TV 카메라 앞에서 실연했다. 성큼 역사가 큰 걸음을 내디디고, 환상보다 먼저 현실이 다가왔다. 늘 외계인이 공격했던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실제 비행기가 공격하는 것을 본 체험과 정반대의 의미로 놀랍고,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상상만 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 말이다. 

 

한동안 긴장된 남북관계나 악의 축 김정은, 북한 핵 등은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로 환영받았다. 이 갈등을 소재로 한 수많은 시나리오가 영화계에 흡수된 것도 이러한 긴장의 여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허구보다 세다.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이념과 정치, 올바름과 정의와 같은 큰 단어들에 집중하고 있다. 세상엔 여전히 실현되어야 할 정의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김지운 감독의 말처럼 이제 다시 자유주의자들의 꿈을 들여다볼 때가 아닌가 싶다. 큰 단어들이 놓칠 수밖에 없는 미묘하고도 섬세한 개인의 감정, 이야기, 분노, 고통, 행복, 기쁨, 그런 것들 말이다. 작은 감정의 그물망으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작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들, 자유주의자들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런 이야기들을 다시 돌려줘야 할 것이다. 대열에서 낙오된 혹은 이탈한 영혼에 대한 이야기들 말이다. 다시, 자유주의자들의 섬세한 감성이 조심히 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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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간 2018년 7월16일 월요일, 전 세계 최초로 개봉하는 <미션 임파서블> 여섯 번째 이야기의 시사회가 있었다. 재미있었다. 톰 크루즈는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탄력성으로 스크린을 종횡무진했고, 불가능한 액션을 보란 듯이 펼쳤다. 다 거짓말이지만 잠시 현실을 잊게 해주었다. 하지만, 환상적 볼거리가 현실을 지워주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그렇다면 그건 마취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두 시간 정도면 완전히 각성되는, 그런 마취 말이다.

 

그런데 간혹 어떤 영화들은 사람을 완전히 흔들어 놓는 경우가 있다. <킬링 디어>가 딱 그런 작품이다. <랍스터>를 연출했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인데,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상영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킬링 디어>에도 <미션 임파서블>처럼 말도 안되는 일이 나온다. 소년이 저주를 내리자 그 저주가 실제로 일어나니 말이다. 마틴이라는 소년의 아버지는 심장 수술을 받다가 죽었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16세 마틴은 수술을 집도했던 심장외과 전문의 주변을 맴돈다. 의사 스티븐은 선량한 미국 시민으로서, 다정한 아버지로서, 친절한 이웃으로서 소년을 환대한다. 밥도 사주고, 고가의 시계도 선물하며 언제든 연락하라고 이야기한다.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문제는 이 소년이 정말 언제든 전화를 하고, 가족 모임에 들어와 아들과 딸에게까지 너무 가까이 접근했을 때 시작된다. 스티븐은 이제 아무 때나 전화하지 말라며, 형편없는 음식이나 주는 마틴네 저녁식사를 거절한다. 그 날 이후부터, 마틴의 불편함은 불길함으로 바뀐다. 마틴이 지독한 저주를 뿜어내고 거짓말처럼 딸과 아들의 사지가 마비되며 음식도 거부한다. 이대로라면, 마틴의 저주처럼 아이들이 눈에서 피를 쏟으며 죽을 것만 같다.

 

영화의 이야기는 마틴이 스티븐을 계속 찾아온 지 6개월 이후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렇다. 자신의 수술대 위에서 죽은 남자의 어린 아들을 친절히 대한 지 6개월 만에, 집도의 스티븐은 죄책감을 덜고 자신이 마치 뭔가 대단한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라도 된 양 착각한다. 자신의 명백한 실수가 마틴 아버지의 죽음을 가져왔을지도 모르는데, 어느새 자신이 베푸는 사람 역할을 하고 마틴은 그 동정을 구걸하는 사람처럼 바뀌어 있다. 위치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마틴은 당신은 내게 속죄를 하고 사죄를 해야 할 사람이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아님을 가르쳐주려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이며 마술적인 일들은,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 깊은 두려움과 공포를 일깨운다. <미션 임파서블>처럼 신나는 게 아니라 너무 불편하고 두려운 공포 말이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도 스티븐처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의 ‘심장’을 건드리는 의사라는 뜻이 아니다. 영화 속 대사처럼 ‘심장’은 메타포, 비유다. 우리는 남의 마음을 의도치 않게 건드리곤 한다. 삶의 중심에 함부로 침범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린 조금씩 누군가의 삶에 대한 가해자로 살아간다.

 

스티븐은 속죄하기 위해 6개월간 죽은 환자의 아들 마틴에게 거의 최선을 다했다. 6개월, 마틴이 스티븐이 가진 것, 그러니까 직장, 가정, 집에 더 깊숙이 들어오려 하자 그는 6개월이면 충분했다는 식으로 마틴을 밀어내려 한다. 스티븐에게 죄책감의 유통기한은 6개월이었고, 그것마저도 자신의 삶을 침범하지 않는 조건이 가능할 때였다. 그는 아버지를 잃었는데, 6개월간의 친절로 균형이 맞춰질까? 게다가 하고 싶은 대로, 주고 싶은 만큼 동정을 베푸는 게 그게 속죄이며 환대일까? 아니다. 그건 마틴이 원했던 ‘정의’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큰일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는 가해자의 일부로서 참회하고, 부끄러워한다. 세월호 참사 순간 무력하게 그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때도 그랬고, 19살 청년이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목숨을 잃었을 때도 그랬고, 2년 전 네살배기 아이가 뜨거운 어린이집 통학버스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도 그랬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다들 가해자나 다를 바 없다며 미안해했다. 처음처럼 그렇게 미안해하고 모두가 다 가해자로서 진짜 반성했다면, 세상은 달라졌어야 옳다. 하지만 과연 세상이 달라지고 있는가?

 

6개월, 뜨끔하지만, 정말 우린 사건 발생 6개월이 지나서도 사회적 책임감과 죄책감을 공유하며 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스티븐처럼, 내 가족이 먼저고, 내 일이 먼저라면서 어느새 가해자의 위치에서 슬쩍 내려오지는 않았을까? 죄책감의 유통기한은 얼마가 적당할 것인가? 아니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죄책감에 유효기간이라는 게 있어도 될까?

 

<미션 임파서블>은 보고나자마자 영화의 주요 장면들이 뇌리에서 사라졌는데, <킬링 디어>의 이야기들은 머릿속에 심어둔 씨앗처럼 자꾸만 자라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더운 여름 밤, 서늘한 공포로 잠 못 들게 하는 영화, 그게 바로 작은 영화, 아니 훌륭한 영화의 힘이다. 좋은 영화는 마취로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는 게 아니라 깊이 잠들어 있는 본질적 감정을 흔들어 깨운다. 잊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환기하는 영화, 그런 영화들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

 

<김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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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이면 할리우드에서 출발한 프랜차이즈 영화들이 한두 편씩 연착륙을 시작한다.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시작된 성공은 <데드풀 2>로 연속되고 흥행은 <앤트맨 앤 와스프>로도 이어질 기세다. ‘손가락 하나 튕기는’ 서사행위의 의미는 <어벤져스>를 봐야만 알 수 있는데, 이 행위소는 <데드풀>이나 <앤트맨>에서도 유효하다. 얼핏 보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어벤져스’ 시리즈 세 번째 이야기, <데드풀 2>는 ‘데드풀’ 두 번째 이야기, <앤트맨 앤 와스프>는 ‘앤트맨’ 두 번째 이야기로 서로 독립되어 있는 듯하지만 교묘하고도 섬세한 짜임새로 이 세 작품은 모두 연결된 것이다. 좋게 말하자면 하나를 보고 다른 하나를 보면 재미가 배가되고 나쁘게 말하자면 죄다 파생상품이라 하나를 보고 나면 둘 셋, 더 보도록 유인된다. 마치, 같은 회사 제품으로 골라 담아야 할인이 되는 행사처럼 이야기들이 닮아 있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영화 <앤트맨 앤 와스프>의 한 장면.

 

어느새, 시리즈 영화, 프랜차이즈 영화는 우리 영화 문법과는 무관한, 할리우드에서나 가능한 영화 제작 관습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반지의 제왕> <헝거 게임>과 같은 판타지도 그렇고, <매트릭스>나 <스타워즈> 같은 SF물 등 성공한 시리즈물은 전부 할리우드산이었다. 할리우드 시리즈물은 단순히 이어지는 연속성만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프리퀄이 되기도 하고, 아예 이야기를 뽑아 스핀 오프를 만들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최근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중 단일 작품으로 독립성을 가진 작품이 거의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특히 상업적인 대중영화 안에서는 프랜차이즈와 시리즈가 매우 잘 어울리는 서사기법처럼 여겨질 정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2018년 한국 영화계에 중요한 변화가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다. 6월에 개봉해서 300만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영화 <탐정: 리턴즈>는 2015년 개봉했던 영화 <탐정: 더 비기닝>의 후속작이다. 주인공의 캐릭터나 그가 맺고 있는 관계도가 고스란히 유지되는 가운데 사건과 몇몇의 인물들이 첨가되는 방식이다. 영화는 공공연하게 시리즈물로 거듭날 것임을 표방하고 있다.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뒀으니 ‘탐정’ 3편도 만들어질 듯싶다. 굳이 안 만들 이유가 없어 보인다.

 

‘탐정’의 프랜차이즈화는 어떤 점에서 한국의 시리즈 영화 제작의 오래된 관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시리즈가 될 만한 영화 한 편을 초계기처럼 일단 띄워 보고, 잘된 경우엔 그 캐릭터와 특성을 살려 2편, 3편으로 이어가는 방식 말이다. <조선명탐정>이 그랬고, 이에 앞서 <가문의 영광> <두사부일체>류의 조폭 코미디 영화들이 그랬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프랜차이즈 제작 방식은 안정과 위험을 둘 다 가지고 있는데, 안정이 성공을 기반으로 그러한 면을 부각시키는 것이라면 위험은 그것이 오히려 관객들의 피로와 싫증을 가져오기 십상이라는 사실과 연관된다. 시작이 훌륭했지만 결말이 시시했던 것은 대표적 공포 시리즈였던 <여고괴담>의 성장과 실패 과정에서도 여전히 반복되는 현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마녀>와 <신과 함께>가 시도하고 있는 시리즈 제작 방식은 사뭇 독특하다. 두 영화는 기획 단계부터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마녀>의 영어 제목은 <Part 1: The subversion>으로, 시리즈물의 첫 번째라는 사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이번에 개봉한 1편이 3편 중 첫 번째에 해당한다는 것을 아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금껏 성공한 영화의 플롯 공식을 재활용해 2편과 3편을 만드는 방식과는 시작부터 다르다. 이를 입증하듯 올해 개봉한 <마녀>는 주인공 소녀의 등장과 그녀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에만 집중한다. 아직 본론은 시작도 하지 않았음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이다.

 

지난해 겨울 <죄와 벌>을 개봉한 이후 올해 여름 <인과 연>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신과 함께> 역시 애초에 2부작으로 나누어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가만 보면, 올여름에 개봉하는 한국 영화 중 세 편이 프랜차이즈 및 시리즈 영화다. 2000년대 초 조폭 코미디 시리즈물들이 급속히 사라져간 이후 매우 오랜만에 선보이는 시리즈 영화의 선전이라고 볼 수 있다.

 

시리즈, 프랜차이즈 영화의 제작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영화 소비 시장이 안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영화를 소비하는 관객들에 대한 신뢰도가 그만큼 높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매년 100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가 등장하고, 1년에 영화를 보는 관객 인구가 2억명을 넘는 시장이 바로 우리나라다. 세계 어느 곳을 살펴본다고 해도, 이렇게 영화를 많이 보는 나라가 드물고, 자국 영화를 이처럼 많이 보는 관객도 드물다. 대개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한 해 텐트폴 영화의 자리를 노리던 한국 상업영화의 스펙트럼이 이제 할리우드 영화 제작 흐름을 벤치마킹해 한국형 프랜차이즈 영화로 거듭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미리 기획된 시리즈 영화들이 과연 어떤 성과를 거둘지 그 결과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짐작하다시피, 점차 한국 영화의 관객 동원율이 떨어지고, 마블을 비롯한 웰메이드 할리우드 시리즈 영화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지고 있다. 마블의 영화들이 인기를 끌긴 했지만 마블의 모든 영화가 올해처럼 사랑을 받은 적도 없다. 한국의 상업영화들이 고전적 방식으로는 기술과 자본의 우위를 앞세운 할리우드 영화의 공세를 버티기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형 프랜차이즈 영화는 한국 대중영화의 패러다임에 대한 새로운 시도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할리우드를 닮아 가되 좀 다른 방식으로 가는 것, 이론적으로 그럴 듯해 보이는 이러한 시도가 과연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 관심 있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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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의 말석’이라는 오래된 관용어구가 있다. 문단이 품계석처럼 지위 고하에 따라 자리를 나누는 마당은 아니지만 말석이란 갓 등단한 신인이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말로 통용되었다. 그런데, 그러고 보면 겸양일 수밖에 없는 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문단에 한 ‘자리’를 얻었다는 말이니, 어쨌든 한자리를 차지하기는 했다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겸손하게 작은 자리 하나 얻었다는 의미로 말석으로 스스로를 낮춘 것이다. 등단은 시작에 불과하니 말이다.

 

흥미롭게도 서양에서도 사람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두고 지위(status)라고 부른다. 이 지위도 어떤 표지판 앞에 서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다(stare)’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 어딘가에 서는 것, 그게 바로 지위이고, 지위란 자신의 자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갖는 게 또 전부는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은 높은 지위, 낮은 지위라며 지위의 고하를 나누기 좋아한다. 사회의 세세한 면에 따라 그 조건은 달라질 수 있지만 지위에 높고 낮은 게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속된 말로, 다 같은 ‘자리’에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의 한 장면.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그런 의미에서, 자리로 인해 존엄성에 위협을 받고, 자괴감에 빠지거나 질투로 고통받는 상황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혹시나 우리가 사다리의 너무 낮은 단을 차지하고 있거나 현재보다 더 낮은 단으로 떨어질까봐 두려워한단다. 알랭 드 보통의 말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그는 이런 걱정이 매우 독성이 강하다고 말했는데, 내 생각도 다르지 않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건 무척 상대적인 것이라서 스스로의 지위에 불안해하기 십상이다. 타인과의 비교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작게 느끼고 불편해한다. 그게 바로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불안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은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한 그래서 어딘가에 소속감을 느끼기도, 그렇다고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기도 애매한 청춘을 보여준다. 청춘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학수’(박정민)는 래퍼 오디션에 6번째 참가 중인 래퍼 지망생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미 홍대 언더그라운드에서 자신의 팬까지 거느린 래퍼이지만 그 정도 자리는 아직 부족하다고 여긴다. 더 어렸을 땐, 홍대 무대에 서기만 해도 자신의 불안이 해소될 것 같았겠지만 어느 순간 이후로는 홍대 무대가 오히려 현실의 거울 이미지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무대에선 강력한 래퍼이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변산만 떠나면 훨씬 덜 불안하고 나아질 것 같았지만, 서울에 사니 이번엔 또 강남에 사냐 강북에 사냐 고향 친구들이 따져 묻는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 같다.

 

<변산>을 보면서 무척 흥미로웠던 것은 랩을 대하는 청춘의 자세이다. 최근 강의실에서는 노트를 펼쳐 뭔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가는 학생들이 종종 발견되는데, 그런 학생들 중 많은 수가 직접 랩 가사를 쓰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이 왜 시를 안 쓰고, 랩 가사를 쓰지라며 조금은 의아해했는데,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영화 <변산>이 보여준 셈이다. 요즘 20대에게는 랩이 시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들에게 랩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심장 박동에 맞춰 훨씬 더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의사수단이라는 것을 말이다.

 

시골 출신 학수는 금의환향에 대한 꿈을 고백한다. 금의환향이란 우리가 앞서 말했던 불안의 증상 중 하나이다. 적어도 고향에 돌아갈 땐, 떠날 때보다는 더 성공해서, 출세해서, 부자가 되어서, 멋지게 돌아가고 싶은 것, 그게 바로 금의환향이니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금의환향의 세부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은 소위 세속적인 성공이 전부이다. 돈, 명예, 권력이 성공의 열쇠이며 그것이 곧 존재의 불안을 다스려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에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의 명함이 곧 평가 기준이 되는 속물의 세상에서,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자리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결국 훨씬 더 많이 가진 상태에서 누군가의 삶을 지배하려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람, 소중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은 유아적 바람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외할머니집에 오랜만에 놀러갔을 때, 우리 외손주 왔냐면서 가장 편한 자리를 내주고, 가장 귀한 음식을 먹여주며, 뭐든 해도 된다고 허락받을 때 느끼는 그런 존재감처럼, 세상에서 나의 존재감을 느끼고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세상이 이런 허약하고, 연약한 사람의 내면을 이용해, VIP, VVIP의 스티커를 붙여 가치 있는 사람의 속성을 더욱 속물화하고 있다는 것일 테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존중받을 만하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인식의 수위를 얕게 함으로써 그럴듯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중요한 사람이 되는 역설을 만들어낸다. 말 그대로 뭣이 중헌지를 모르는 채로,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구분된다.

 

세상이 주는 세속적 지위에 연연하던 학수는 결국 고향 땅에서 다른 성공을 거둔다. 알고 보니 금의환향은 꼭 돈을 벌고, 시험에 합격하고, 일등을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 사람 사는 가치라는 게 결코 자리만으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고향의 품에 안긴다. 사람의 한 가지 면모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으로 평가하려는 사람, 알랭 드 보통은 그런 사람을 가리켜 속물이라고 부른다. 적어도 스스로 지위를 높이고자 애를 써도, 남을 지위로 평가하는 속물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남을 무턱대고 동경하거나 경멸한다고 해서, 불안이 해소될 리는 없다. 불안은 결국 다양한 나의 모습을 스스로 사랑할 때, 서서히 사라질 불편이 아닐까 싶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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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 드라마 전성시대다. TV를 틀면 일주일 내내 법조인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만날 수 있다. 법조인은 늘 한국 드라마의 인기 직종 중 하나였지만 국정농단 사태 이후 최고로 사랑받는 주인공이 됐다. 국정농단 주역 대다수가 ‘법꾸라지’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부패 법조인 출신이었던 만큼, 이상적 법조인을 통해 속시원한 정의 실현 드라마를 기대하는 심리가 반영된 현상이다. 최근 국정농단에 버금가는 국기문란 사태라 일컬어지는 사법농단 의혹이 정점에 달한 것도 정의로운 법조인 주인공 드라마 열풍을 부채질하고 있다. 실제로 요즘의 법조인 드라마에서는 새로운 경향이 눈에 띈다.

 

기존에는 부패한 정치권력이나 자본가 등 외부의 거악과 싸우는 법조인 드라마가 다수였다면, 최근에는 법조계의 오랜 적폐를 비판하고 법조개혁의 열망을 담아낸 작품들이 많다. 특히 법조계 최후의 성역처럼 남아있던 사법부 배경 드라마가 부쩍 증가했다. 이러한 새 경향을 본격적으로 보여준 작품이 지난해 방영된 SBS 드라마 <귓속말>이다. 전작 &lt;펀치&gt;를 통해 검찰조직 내의 부패 세력과 고발 세력의 갈등을 그렸던 박경수 작가는 &lt;귓속말&gt;에서는 법을 악용해 도적질하는 무리인 ‘법비’와의 전쟁을 내세우며 법조계의 총체적 적폐를 극화했다.

 

SBS 드라마 <귓속말>의 한 장면.

 

그 가운데서도 부패한 대법원장 장현국(전국환)의 악행은 사법농단 사태를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현실감이 넘친다. 사법적폐의 상징 그 자체인 장현국은 스스로를 “대한민국 재판의 상식을 만드는 사람”이라 칭할 정도로 제왕적 권력을 휘두른다. 신념 있는 소장판사 이동준(이상윤)이 청탁 재판을 거절하자 자신의 뜻에 맞는 법관인사위원회를 구성해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시키는 등 재판 거래와 인사 개입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드라마는 장현국을 비롯해 전직 검찰총장, 전 법무부 장관, 최대 로펌 대표 등이 모두 교도소에 모이는 결말을 통해 대중의 적폐청산 판타지를 시원하게 실현했다.

 

‘본격 판사 장려 드라마’를 표방한 SBS <이판사판> 역시 사법혁신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 작품이다. 드라마에서 제일 시선을 끄는 것은 ‘오판 연구회’라는 조직이다. 로스쿨의 아웃사이더들이 모여 잘못된 판결을 연구하며 은폐된 진실을 파헤치는 이 조직은 존재만으로 사법부의 낡은 관행에 대한 도전을 보여준다. 이들과 합력해 정의를 구현하는 신세대 판사 주인공들은 사법부의 개혁적 미래를 상징한다. 비록 허술한 구성과 로맨스에 치우친 이야기로 비판받기는 했으나 드라마의 문제의식만큼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올해 초 방영된 SBS <리턴>에서도 비슷한 주제의식이 발견된다. 주인공 최자혜는 판사 출신 변호사다. 그는 판사로 임용된 뒤 담당한 첫 재판에서 법의 사각지대를 악용해 처벌을 피하는 권력자들을 목격하고 회의를 느낀 끝에 스스로 법복을 벗었다.

 

훗날 그는 TV 법정쇼 ‘리턴’을 통해 잘못된 재판 사례를 분석하고 법제도의 허점을 고발한다. 드라마는 지나친 선정성, 폭력성 등의 문제를 드러내기는 했으나, “못 배우고 가진 게 없는 자들에게는 장벽이 한없이 높고, 법을 알고 돈 있는 자들에게만 관대한 법”의 모순을 비판하는 메시지는 분명 요즘 시대의 국민 정서를 건드리는 지점이 있다.

 

현재 방영 중인 tvN <무법 변호사>도 사법부에 대한 불신과 개혁의 요구를 담아낸다. 드라마의 최대 악역인 차문숙(이혜영)은 대법관 후보 1순위로 거론될 정도로 존경받는 판사지만 그의 진짜 정체는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법비’다. 드라마는, 마찬가지로 위엄 있는 판사의 가면을 썼던 아버지에 이어 부패의 계보를 만들어가는 차문숙의 모습과 이에 맞서 싸우는 법조계 이단아 봉상필(이준기)의 활약 안에 적폐청산의 시대적 화두를 녹여내고 있다.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

 

JTBC 월화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또한 신세대 판사들의 시선을 통해 사법부 내부의 문제점을 들춰낸다. 조직 내 성차별, 학연과 지연으로 이뤄진 파벌 구도, 권위의식 등과 같은, 어찌 보면 대형비리보다 더 뿌리 깊은 적폐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상주의자 신임 판사 박차오름(고아라)과 원칙주의 판사 임바른(김명수)의 논쟁을 통해 진정한 판사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처럼 최근 법조인 드라마는 사법적폐에 대한 청산과 혁신의 열망이라는 시대정신을 투영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드라마는 아니지만 같은 정서를 재현하는 프로그램 하나도 주목할 만하다. MBC에서 다음주부터 방영 예정인 시사 프로그램 <판결의 온도>다. 그동안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던 사법부의 문제적 판결을 테이블 위로 불러와 논쟁하는 토크쇼다. 지난 3월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방영될 당시 국민 감정과 동떨어진 사법부의 권위주의, 법제도의 모순 등을 비판하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지난해에는 언론개혁이 사회적 화두였다. 언론 검열 시대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언론인 소재 드라마와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며, 공정방송을 위한 언론노조 파업의 현실과 조응하며 개혁에의 바람을 담아냈다. 그리고 사법농단 시대의 법조인 프로그램 열풍 현상은 이제 ‘정의 실현 최후의 보루’인 사법개혁에 대해 이야기한다. ‘법비’들을 응징하고 공정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드라마만의 이야기로 끝나서는 안될 일이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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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는 창밖을 보며 읊조린다. “아름답고, 예쁜 바보로 컸으면 좋겠어. 딸아이 말이야.”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여자, 개츠비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팜므 파탈의 말치고는 어딘가 처연하고 게다가 정곡을 찌르는 데가 있다. 여자는, 딸아이는 성찰적이며 똑똑한 여성으로 크는 것보다 아름답고 예쁜 바보로 크는 게 낫다고 말하는 건, 직설법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데이지의 남편 톰 뷰캐넌은 결혼한 첫날 밤부터 다른 여성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고 있다. 지금, 데이지가 독백을 한 그 순간은 경박한 여자 머틀로부터 걸려온 전화로 저녁 식사를 망치고 난 이후이다.

 

이 비슷한 말을 영화 <밤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젊은 여성도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다. 가만히 서서 바보처럼 보이기만 하면 된다”라는. ‘밤쉘’은 폭탄 같은 성적 매력을 지닌 여성을 지칭한다. 이 말을 한 여배우 헤디 라마는 1940년대 미국의 밤쉘로 통했다. 첫 작품 <엑스터시>는 여성의 오르가슴을 처음으로 영화적으로 재현한 작품이었다. 나체로 오르가슴을 연기하는 배우, 그녀는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으로 나뉘어진 할리우드 영화 시장에서 너무나 쉽게 창녀의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그리고, 그 이후 그 분류함에서 거의 빠져나오지 못했다.

 

영화 <아이 필 프리티>의 한 장면.

 

영화 <밤쉘>은 예쁘고 멍청하고 섹시하기만 한 줄 알았던 여배우가 현재 와이파이와 블루투스의 근간이 되는 주파수 도약을 발명했음을 알려준다. 세상은 그녀의 진짜 재능은 숨기고, 그녀의 일부였던 아름다움만을 착취했다. 영화는 그녀가 얼마나 똑똑했는지가 아니라 아름답고 똑똑한 여성이 왜 지워져야 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유는 단 하나이다. 세상은 아름다운 여자가 똑똑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으니까. 아니, 여성에게 요구했던 건 그저 아름다움이지 지성이나 내면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헤디 라마의 일생은 여러 면에서 곱씹을 만하다. 따뜻했지만 지나치게 엄격했던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출 연기를 감행했고, 각성제와 수면제에 취해 3류 영화를 찍어야 했던 불공정 계약에 항의하며 자신이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U보트의 만행에 주파수 도약을 발명했지만, 전시이므로 특허에 관한 모든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매우 독립적이며 주도적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그녀를 통제 불가능하고, 제멋대로인 여자로 규정한다. 이건, 70여년이 지난 요즘, 지금의 형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이 여자에게 아름다움만 요구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아이 필 프리티>는 2018년의 여성이 어떤 판옵티콘, 시선의 감옥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주인공 르네 베넷은 꽤 통통한 여성이다.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을 갖지 못해 온라인 담당 부서에서만 일을 할 정도이다. 스피닝, 요가, 다이어트 등 날씬하고 예뻐지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피닝을 하던 르네는 자전거에서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친 후, 자신이 너무 예뻐 보이는 착시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실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녀 눈에만 자신이 예뻐 보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당당하게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원래의 자신을 당당하게 보여주자 세상이 그녀를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한다. 다정하고 섬세하게 사람들을 챙기고, 솔직하고 사려 깊은 성격은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얻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르네가 그 모든 관심과 배려를 달라진 외모 때문이라고 착각한다는 데에 있다.

 

맨스플레인으로 유명한 레베카 솔닛은 자신의 책 <걷기의 인문학>에서 하이힐로 인해 여성의 보행권이 얼마나 침범받고 있는지 고발한 바 있다. 까짓것 하이힐을 벗어버리면 그만이지 보행권 침범이라고 왜 엄살이냐고 여길 사람들도 있을 테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하이힐을 신고 싶어서가 아니라 신어야만 해서 착용한다. 화장도 마찬가지이다.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아니라 출근할 때, 회의할 때, 출장 갈 때, 해야만 해서 바쁜 시간을 쪼개 힘겹게 해내는 경우가 더 많다. 예뻐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뻐 보여야만 하기 때문에 하이힐과 화장에 속박된다. 세상이 그게 여자의 준비된 모습이라고 가르치고, 강요하고,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어느새 여성들은 좋아서 시작했던 자기 관리를 억지로, 세상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쩔쩔매며 해내고 있는 셈이다.

 

영화 <아이 필 프리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누가 봐도 100명 중의 한 명꼴에 속할 미녀조차도 자괴감에 시달린다는 고백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도 거울을 보며 자신의 단점을 발견하고, 또 세상이 자신을 한심하게 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작아진다. 르네 베넷이 경험한 마법의 실체는 옛날 동화처럼 진짜 예뻐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완전히 만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뻐야 좋다는 강박을 어린 시절부터 주입받고 자란, 이 시대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필요한 교육일지도 모르겠다. 예쁜 여자란 세상이 강요했던 속박과 상품의 하나라는 것, 그래서 그 요구는 맞출수록 자신이 더 작아만 지는 폭력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버려둘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남을 위해 굳이 예뻐질 필요는 없다.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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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는 아버지가 두렵다. 싫다. 답답하다. 밉다. 부끄럽다. 창피하다. 곤란하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집에서만 대장이다. 사티를 때리고, 어머니를 밀어붙이고, 함부로 대한다. 그런데 집을 벗어나면 가난한 소작농에 상습 방화범이다. 아버지는 수가 틀리면 불을 지른다. 우리가 없는 아버지의 돼지는 걸핏하면 남의 집 농장을 침범한다. 이웃은 그렇게 침범한 돼지를 잡아두곤, 돈을 내야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장작이랑 건초는 불에 타는 물건이다’라는 전갈을 보낸다. 그리고 그 집 헛간이 불탄다. 치안판사는 아버지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마을을 당장 떠나라고 말한다. 그렇게 떠나온 아버지는 사티에게 거짓말을 요구한다. 사티는 정말 싫다. 정직하게 살고 싶고, 좀 더 우아하게 살고 싶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아버지가 남의 집 헛간에 불을 지르려 할 때, 이번엔 정직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의 한 장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불을 지른다. 억울한 일은 이웃의 집에 들어간 내 돼지를 찾는 데 돈을 내거나, 밟으라고 깔아놓은 양탄자를 밟았다고 지나친 소작료를 걷어가는 일이다. 그렇게 징벌적 소작료를 내고 나면 식구들이 먹을 것도 남지 않는다. 법에 기대도 소용없다. 치안판사는 언제나 있는 사람들 편이다. 아버지는 헛간을 태우는 것으로 화를 삭이고자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영원히 그렇게 분을 삭이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분명히 크레디트에 그렇게 써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일어나고 있는 서사적 사건이나 대사들은 하루키의 것이 맞지만 그 정서나 주제는 오히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헛간 타오르다(Barn Burning)>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손가락 골절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는, 아들 종수(유아인)가 일컫기를 일종의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그 아버지의 모습과 <헛간 타오르다>의 아버지 모습이 훨씬 더 닮아 있기 때문이다. 종수는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 등장하는 ‘나’보다, 가난한 방화꾼 아버지의 아들 ‘사티’에 가깝다. 그렇다. 이 글의 맨 앞부분에 서술된 이야기는 바로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헛간 타오르다>의 일부분이다.

 

하루키의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크게 달라진 부분은 단 하나이다. 바로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 차이로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 원작 <헛간을 태우다>의 ‘나’는 30대 중반의, 카망베르 치즈를 좋아하고, 마일즈 데이비스의 ‘에어진’과 사티르 명인 라비 상카의 음악을 즐겨듣는, 세련된 여피족이다. ‘나’는 재즈와 와인, 가볍지만 섹시한 관계, 추상적이지만 본질적인 의문을 사랑하는, 그래서 타인의 삶에 무심하고 적당히 거리를 둔다. 그게 사는 데 더 유리하다고 믿는 인물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창동 <버닝>의 주인공 종수는 20대 중반이며, 가진 게 없고, 가지려면 건강한 육체밖에 쓸 게 없는 인물이다. 종수는 망해버린 축사 곁에서 대남방송과 뉴스를 들으며 잠이 든다. 소설에서는 아내가 자리를 비운 주인공의 집에 두 남녀가 찾아온다. 아내가 없는 집에 여자 친구 커플이 찾아오는 건 의외의 사건이었지만 소 한 마리 겨우 남은, 무너져 가는 축사 옆 종수의 집에 두 남녀가 찾아오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다. 같은 사건이지만 그 정서는 너무 다르다.

 

무엇보다 종수와 ‘나’는 계층과 연령이 다르다. 원작의 ‘나’는, 번쩍이는 은색 외제차를 가진 남자만큼 잘살지는 않지만, 그런 부에 무관심하다. 아니, 작가인 ‘나’는 그 사람과 사교모임에서 우연히 만날 만큼 비슷한 처지다. 노는 물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종수는 벤(스티븐 연)과 우연히 만날 일이 거의 없다. 벤을 만나려면 종수는 잠복하고, 추격해야 한다. 사는 곳, 노는 물이 다르니까. 그들의 세계에 교집합이 없으니 말이다.

 

이는 마치, 보르헤스가 똑같은 <돈키호테>를 몇 백 년이 지나 고스란히 필사한다고 할지라도 전혀 다른 소설이라고 말한 상황과 닮아 있다. 세르반테스가 소설을 썼던 당시엔 동시대적인 문체였을지 모르지만 2018년에 그대로 써내면 그건 의고체가 된다. 인물의 연령, 계층, 경제적 수준이 달라지면서 헛간을 태우는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헛간이 비닐하우스로 바뀌었다는 그런 사소한 변화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건 비닐하우스건 헛간이건 별 상관이 없다. 다만, 벤에게는 무의미하고, 쓸모없고, 태워지기 기다리는 것이 비닐하우스일 뿐이다. 문제는 이렇듯 허무를 태우는 존재론적 체위와 메타포가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벤에게는 없어도 되고, 십오분 만에 예쁘게 타서 없어져도 될 것이 종수에게는 단 하나의 것, 유일한 것일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아버지가 당신네 헛간에 불을 지르러 간다고, 정의롭게 주인에게 알려주러 간 윌리엄 포크너의 소년 사티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티는 성공한다. 방화 직전에 집 주인에게 ‘헛간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화가 난 헛간 주인은 잘생긴 말을 타고 나와 총성을 두 발 울린다.

 

그 총성은 아버지와 함께 기름통을 들고 가던 형 근처쯤에서 울린다. 소년 사티는 총성이 울린 곳으로도, 집으로도 돌아가지 못한다. 소설은 그렇게 끝을 맺는다. 그 총성은 누구의 가슴을 관통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아버지가 헛간을 태워 벌을 받았듯이 그 땅주인도 벌을 받게 될까? 살인은 훨씬 더 큰 죄이니 말이다. 벌거벗은 채 공포에 떠는 종수를 보며 세련된 소설가 ‘나’가 아니라 포크너의 소년 사티가 떠오르는 이유이다.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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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주 제물로 삼던 스릴러 장르에 최근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 눈길을 끈다. 역대 JTBC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김희선, 김선아 주연의 <품위 있는 그녀>를 비롯해, 올해 김남주에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안겨준 JTBC 드라마 <미스티>, 한가인의 6년 만의 드라마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OCN <미스트리스>, 송윤아와 김소연의 ‘워맨스’를 내세운 SBS <시크릿 마더> 등 여성 중심 스릴러가 연이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작품은 특히 기혼 여성들의 억압과 불안을 극의 중심 재료로 삼는다. 하나같이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서사인 미국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을 연상시킨다는 평을 듣는다는 점에서도 그 공통된 정서를 알 수 있다. 미국 중산층 주부들의 비밀스러운 일상을 그린 <위기의 주부들>은 기혼 여성의 솔직한 욕망을 통해 가족제도의 모순을 신랄하게 파헤쳐 방영 당시 미국가족협회로부터 ‘주부들의 일탈’을 부추기는 문제작으로 비난받기도 한 작품이다.

 

OCN 드라마 <미스트리스>의 한 장면.

 

 

최근 국내에서 유행하는 ‘한국판 <위기의 주부들>’은 여성의 불안한 내면과 가족제도의 균열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먼저 지난해 방영된 <품위 있는 그녀>는 준재벌가의 ‘우아한 사모님’으로 살아가던 우아진(김희선)이, 그녀와 같은 삶을 욕망하는 여성 박복자(김선아)와 만나면서 혼란을 겪는 이야기다. ‘완벽한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삶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우아진은 신분상승을 위해 모든 것을 거짓으로 꾸몄던 박복자와의 만남을 통해 결국 자신의 삶 또한 허상임을 깨닫고 가족제도 바깥으로 탈주한다.

 

그런가 하면 올해 초 방영된 <미스티>는 대한민국 최고의 앵커 고혜란(김남주)이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미스터리 스릴러 안에 기혼 여성의 사회적 성공을 향한 욕망과 주부로서의 억압이 충돌하는 이야기를 담아냈다. 혜란을 둘러싼 가장 큰 위협은 커리어 경쟁자나 살인 혐의보다 그녀의 사생활에 대한 끝없는 의심에서 비롯된다. 혜란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언론인으로서 능력 외에도 주부로서의 완벽한 모습을 요구받고 이 불가능한 양립은 비극적 결말로 돌아온다.

 

지난주 방영을 시작한 <시크릿 마더>는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바치는 강남 엄마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네 명의 중심인물은 모두 어두운 비밀을 감추고 있다. 딸을 잃어버린 아픔을 숨기고 있는 윤진(송윤아), 외도한 남편과 쇼윈도 부부로 살아가며 자신도 불륜을 저지르는 혜경(서영희), 자식을 영재고등학교에 보내기 위해 위장이혼을 감행하는 화숙(김재화), 우아한 가면 뒤에 전직 호스티스라는 과거를 감춘 지애(오연아)가 그들이다.

 

이들의 비밀은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는 기혼 여성들의 분열된 내면을 상징한다. 특히 정신과의사에서 아들 교육을 위해 전업주부로 변신한 주인공 김윤진은 ‘슈퍼맘’이기를 요구받는 기혼 여성의 스트레스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녀의 불안은 아들의 뒤처진 성적뿐 아니라 딸을 지키지 못한 ‘실패한 엄마’라는 죄책감에서 비롯된다. 살인사건의 진범이 누구인가 하는 미스터리보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윤진의 위태로운 내면이 <시크릿 마더>의 가장 큰 스릴을 담당한다.

 

OCN 드라마 <미스트리스>도 마찬가지다. 네 명의 주인공 가운데 기혼 여성인 세연(한가인)과 정원(최희서)의 이야기가 가장 공포스럽게 묘사된다. 2년 전 남편의 실종으로 어린 딸을 홀로 키우는 세연의 이야기에는 한부모 가정 워킹맘의 불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딸을 맡기기 위해 고용한 보모가 등장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거의 아동 실종 스릴러인 <미씽: 사라진 여자>의 공포를 연상시킨다. 또 다른 기혼 여성 정원(최희서)의 불안 역시 소위 ‘정상가족’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완벽한 가정을 꿈꾸는 남편은 아이에 집착하고, 계속해서 임신에 실패하는 정원의 스트레스는 감정조절장애로까지 나타난다.

 

최근 이 같은 여성 중심 스릴러의 부상은 기혼 여성들의 부담이 갈수록 가중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초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정부 차원에서 가족 예능 프로그램의 제작 지원 등을 통해 이상적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했고, 이로 인해 기혼 여성들에 대한 억압은 더욱 심화됐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 이후 핵심 정책 과제로 삼았던 일·가정 양립정책 또한 기혼 여성들의 과로와 부담을 가중시킨 주요인이었다. 이 시기 맘충, 앵그리맘, 맘고리즘 등 기혼 여성 관련 신조어들이 계속해서 증가한 것도 이러한 억압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에도 기혼 여성들의 일탈을 다룬 드라마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가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아내들의 반격과 복수’를 다룬 소위 막장드라마들이 유행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 드라마 속 여성들이 결말에 이르러 새로운 결혼과 임신을 통해 기존 가족제도로 다시 편입되는 것과 달리, 가족제도의 균열을 좀 더 진지하게 다루는 요즘의 여성 스릴러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시효가 이제 만료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선영 |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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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가정의 달이라더니, 영화관에도 가족이 많다. 관객도 많지만, 가족에 대한 영화들이 많다는 뜻이다. 미국으로 입양된 후 팔씨름 챔피언이 된 마크의 이야기인 <챔피언>, 아내와 사별한 후 아들 하나 보고 살아온 아버지 귀보의 이야기 <레슬러>를 비롯해 때마침 소개된 인도 영화 <당갈>도 넓은 의미에서는 가족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가족 이야기가 대부분 부모와 자식 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레슬러>와 <당갈>은 공교롭게도 모두 레슬링을 소재로 삼고 있다.

 

<레슬러>는 레슬러로서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아버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레슬러 아버지 귀보는 유해진이 맡아 특유의 너털웃음과 사람 좋은 말투로 그려진다. 어쩌면, <레슬러>라는 영화가 유해진의 개성과 이미지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레슬러>는 한국형 가족 영화의 문법을 거의 고스란히 따라간다. 아버지와 아들이 티격태격하면서 살아가고,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루기에 벅찬 아들은 결국 아버지에게 반항한다. 사랑하고, 아끼고, 싸우지만 결국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포옹으로 서로를 이해한다. 가족이니까 말이다.

 

영화 <레슬러>의 한 장면.

 

 

반면, <당갈>은 코미디처럼 시작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진지해지는 작품이다.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레슬링의 길을 열어 주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그 아이들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점이다. 퇴역 레슬러가 자식에게 레슬링 기술을 전파하고, 의지를 북돋운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지만 아들과 딸의 차이로 영화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전개된다. <레슬러>가 결국 아버지와 화해하는 아들의 성장담으로 끝난다면 <당갈>은 세계적 수준으로 우뚝 선 여성 레슬러 이야기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의미 있는 것은 여자에게 레슬링이란 그다지 권유되지 않는 스포츠라는 사실이다. 마치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가 보수적인 영국 탄광촌에서 발레를 시작했을 때, 가족뿐만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의 반대와 마주쳤던 것과 유사하다. 아니, 사실 더 심각하다. <당갈>의 배경은 인도이고, 인도는 최근에도 몇몇 끔찍한 여성 학대 사건사고로 뉴스에 등장하는 나라이니 말이다. 분명, 여성 레슬링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슬링은 남자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서로 비비는 전형적 남성 스포츠로 여겨진다. 하지만, <당갈>의 소녀들은 결국 그 남성 스포츠의 세계에 당당히 진출해 나름의 성과를 얻는다.

 

성차의 편견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영화의 문법에도 존재한다. 가령,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그리고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로 짝지어지는 서사의 관행도 그렇다. 엄밀히 말해 <레슬러>에 묘사된 아버지는 아버지라기보다는 어머니 역할에 더 가깝다. 아들에게 밥을 해 먹이고, 창가에 둔 식은 밥을 처리하고, 홀로 청소하는 모습의 묘사를 보노라면 귀보씨는 아들에게 엄마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약간의 묘사에 멈추고 결국 영화 <레슬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어야 할 진부하고 관습적인 갈등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리틀 포레스트>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눈길을 끈다. <리틀 포레스트>에는 아버지의 고향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로도 15년 넘게 살아온 어머니와 딸이 등장한다. 이 어머니는 딸 아이가 수능을 보고 온 다음 날, 편지 한 장만 남기고 훌쩍 집을 떠난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언제 온다는 말도 없이. 딸 역시 그런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하지만 그렇다고 분노하거나 엄마의 부재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마음을 담아내는 것은 바로 음식이다. <리틀 포레스트>에서 엄마와 딸은 음식을 통해 대화한다. 엄마에게 배운 음식을 딸이 하면서 엄마의 마음을 추측하고, 딸이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며 언젠가 어머니에게 전달할 것을 바란다.

 

사실, 가족은 언제나 직설법으로 말하는 사이다. 친구나 직장 동료, 상사, 스승에게 절대로 하지 않는 날것의 말을 내뱉고, 돌려받는 관계가 바로 가족인 것이다. 그래서, 후련하고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가족만큼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도 드물다. 어쩌면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야말로 제2의 언어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리틀 포레스트>의 어머니와 딸이 레시피로 서로 대화하듯이 조금은 은유적이며 간접적인 언어의 창고가 필요한 것이다. 어떤 말에도 상처받지 않는 강철 심장을 가진 가족은 아니 인간은 없으니 말이다.

 

<당갈>의 레슬링 역시 가족의 제2 언어 구실을 한다. 아버지는 딸이 대회에 우승하고 나서 마침내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직설법으로 말한다. 하지만 사실, 이 자랑스러운 마음은 레슬링을 가르치고 도와주고 코치하는 과정 내내 육성이 아닌 레슬링의 몸의 언어로 전달되었던 바이기도 하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가족의 언어야말로 온도와 열기를 식힐 중간의 번역 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가족이니까 다 이해해야 하고, 완전히 솔직할 필요는 없다. 가족 사이에도 거리와 짐작이 있어야 한다. 가족의 마음이 경유할 수 있는 언어의 섬, 그런 중간지대를 마련해 볼 필요도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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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개봉했다. 한국이 첫 개봉이다. 원산지인 미국보다 하루 더 빨리 한국 시장에 풀린 것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한국을 첫 개봉지로 선택한 지는 꽤 되었다. <트랜스포머> 두 번째 편이 아시아 정킷을 서울에서 하면서 시작된 변화는 어느덧 한국 최초 개봉의 기시감으로 자리 잡았다. 그만큼 한국 시장이 중요시되는 셈이다. 수적으로 보면 고작 1000만 안팎이지만 한국 시장이 중요시되는 이유에는 여러 맥락이 있다. 아마도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 관객들의 적극성이 아닐까 싶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개봉한 25일(수요일) 하루 내내 검색어 상위에 이 영화 제목이 머물렀다. 민감했던 정치적 뉴스나 얼마 남지 않은 남북대화 이슈도 제치고 상위에 랭크된 것이다. 말하자면, 뉴스에서는 종일 선거나 북한 이야기를 하지만 SNS에서는 <어벤져스> 이야기를 한다. 말 그대로 4월25일의 가장 뜨거운 뉴스였던 것이다.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메인포스터.

 

한국 관객들의 이러한 적극성과 애정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한국 시장을 매우 중요한 홍보의 플랫폼으로 대접해 왔다. 한동안 속을 썩였던 불법 복제나 스크린 촬영 및 유출 문제도 어느덧 선진화된 관객들의 태도 덕분에 사라졌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듯싶다. 똑똑하고 호감을 가지며 적극 영화를 홍보하는, 말 그대로 미국의 거대 영화 시장이 바라는 이상적 관객이 바로 한국 관객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건 미국 시장의 입장이고, 한국에서도 <어벤져스>는 일종의 문화 현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벤져스>를 좀 더 빨리 보고, 좀 더 상세하게 그 세계의 디테일을 알고, 암시적인 쿠키 영상의 단서를 찾아내는 게 말하자면 힙한 관객이다. 비슷해 보이지만 그 반응이 전혀 다른 DC 코믹스 원작 영화들에 대한 한국 관객의 태도를 비교해 봐도 그렇다. <어벤져스>에 대한 한국 관객의 충성도가 훨씬 높고, 흥행도 더 잘된다. 영화 관람 후에도 마블에 비해 DC 작품들에 대해선 실망스럽다는 평가가 빠지지 않는다.

 

그 실망감의 한가운데에는 무거움이 있다. 반대로, <어벤져스>에 대한 한국의 호감에는 가벼움과 농담의 세계에 대한 호감이 있다. 어떤 점에서 마블의 가장 대표적인 히어로라고 한다면 스파이더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말하자면 블루칼라, 노동자 계급 출신의 히어로이다. 물론 마블, <어벤져스> 하면 아이언맨이 가장 먼저 떠오르겠지만, 아이언맨 역시 특유의 유머 감각과 섹시함으로 먼저 환기된다.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이 무겁고, 고독하고, 어두운 영웅으로 떠오르는 데 비해 같은 갑부이지만 아이언맨은 쿨하고 가볍다. 그리고 이런 아이언맨의 세계는 바로 마블의 코드와 상통한다.

 

중요한 것은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없는 것 중 하나가 ‘유머’라는 사실이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 김지운 감독이나 봉준호 감독의 초기작들 <조용한 가족>이나 <플란다스의 개>와 같은 작품을 보면, 독특한 유머 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 슬랩스틱이나 뻔한 휴머니즘으로 웃기고 울리지 않더라도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 영화에서 꽤나 지적이고, 세련된 유머를 찾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만 영화들이 일 년에 한두 편씩 꼬박꼬박 나오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그 웃음기가 영화계에서 사라졌다. 간혹 코믹 영화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의외의 수확으로 정리되곤 한다. 유해진이 주연을 맡았던 <럭키>나 마동석의 러블리한 연기가 화제가 되었던 <범죄도시> 정도가 그럴 것이다. 두 영화 모두 대단히 진지하고 무거운 영화들 사이에서 오래된 조연 배우 출신의 주연이 그들이 가진 특유의 서민적 분위기와 따뜻한 유머로 관객을 웃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여기서의 웃음도 꽤나 무거운 주제를 변주하는 과정에서의 윤활유에 가깝다. 그나마도 유머는 가족애나 인류애와 같은 휴머니즘 코드에 기생하곤 한다. 맘 놓고 웃을 만한 코미디 영화나 맥락과 상황 가운데서 한두 번씩 피식거리면서 웃고 즐기는 유머 코드가 한국 영화에서 거의 사라진 것이다.

 

<어벤져스>의 아이언맨은 심각한 순간일수록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녹인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캐릭터들은 이번 편에서 대단한 활약을 보이는데, 그들은 전작에서처럼 엉뚱한 B급 정서와 대중문화적 취향으로 등장하는 내내 줄곧 웃긴다. 썰렁하고, 어색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어벤져스>멤버들의 웃음은 긴장감을 풀어주고, 관객에게 공감을 높이는 데 성공한다. 이번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블록버스터답지 않게 파국의 결말을 향해 감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영화를 즐겁게 소비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말은 몰라도 과정만큼은 즐겁고, 유쾌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벤져스>는 미국 영화 시장의 자본력과 기술력, 인력이 총동원된 대단한 고부가가치 상품이다. 자본력, 기술력, 인력 면에서 한국이 <어벤져스>를 따라갈 수도 없고 또 굳이 따라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큰 나무에 가려 한국의 작은 유머, 코미디, 장르 영화들이 거의 고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로 세계를 정복하자는 유치한 제국주의적 발상이나 역시 미국 영화가 최고라는 식의 사대주의적 발상에 멈춰서는 안된다. 그런 기술력이나 자본력보다 왜 우리 영화에서 웃음과 유머가 사라졌는지 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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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영한 텔레비전 드라마 <마더>는 ‘엄마’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대개 ‘엄마’를 낳아 준 여자로 여긴다. 하지만 드라마 <마더>에는 낳아 준 엄마도 등장하지만 방점이 찍힌 건 키워 준 엄마들이다. 낳지 않은, 생물학적으로 무관한 엄마들이 오히려 더욱 엄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육원에서 주인공 수진을 입양한 여배우 엄마, 학대당하는 아이를 품은 엄마. 두 엄마는 모두 친엄마는 아니지만 ‘딸’을 만나, 그 ‘딸’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전폭적으로 헌신한다.

 

드라마 <마더>의 한 장면.

 

드라마 <마더>는 어떤 점에서는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멜로드라마에는 아름다운 결말을 훼방놓는 장애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로맨스에서 양가 집안의 반대나 불치병 같은 게 그 장애물이라면 <마더>에서 장애물은 법이다. 학대당하는 아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수진은 아이를 구출한다. 하지만 법의 관점에서 그것은 유괴이다. 죽을 뻔한 아이를 구한 것이지만 범법이기에 아이와 엄마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그래서인지, 각색된 한국 드라마에서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원작에서는 결국 그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헤어진다.

 

학대받는 아이에게 필요한 건 엄마라는 물리적 실체라기보다는 든든한 어른일 테다. <마더>가 말하는 것도 여기서 멀지 않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보호자이다. 진짜 엄마가 아니라도 혹은 여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엄마가 될 수 있다. 임수정 주연의 <당신의 부탁> 역시 어떤 엄마의 이야기인데, 여기 등장하는 엄마도 생물학적 엄마가 아니라 사회적 보호자이다. 재혼한 남편이 전처 사이에서 낳은 아이,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후, 여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아들로 받아들인다. 훌륭한 엄마라는 평가는 생모, 여자라는 기호를 넘어 든든한 양육자를 향한다. 남자도, 할머니도 혹은 형제라 해도 훌륭한 엄마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이의 양육자, 보호자 하면 무조건 친모를 먼저 떠올린다. 아이를 낳고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는, 일차적인 존재라서 그럴 것이다. 아내가 죽자 젖동냥을 다니는 심청의 아버지만 봐도 그렇다. 생모가 없으면 큰일 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가 달라지고 난 후, 그러니까 분유가 있고, 보모도 구할 수 있는 시대의 엄마 노릇은 좀 쉬워졌을까? 쉽다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세상은 달라졌지만 엄마의 몫이 많아졌으면 많아졌지 줄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도 엄마 멜로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불가피한 이별이라는 점에서 눈물이 나지만 무엇보다 울컥하는 건, 그 이별의 주인공이 ‘엄마’라는 사실이다. 이야기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만큼 엄마와 아들의 이별에 주목한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영화는 엉망진창이 된 집안 풍경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설거지는 쌓여 있고, 청소도 엉망이며, 입을 옷도 제때 세탁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계란 프라이도 제대로 하지 못해 손을 데고, 셔츠 단추도 어긋나게 채운다.

 

엄마가 잠시 이승에 돌아와 하는 첫 번째 일도 살림살이를 바로잡는 일이다. 어질러진 집을 청소하고, 그릇들을 정리하며, 엄마는 아이에게 머리 감는 법과 옷 챙기는 법을 가르친다. 어떤 점에서, 사고사가 아니라 병사했던 ‘엄마’가 그런 준비를 해두지 않았다는 게 좀 의아하기는 하지만, 영화는 엄마의 빈자리를 이러한 클리셰로 재연한다. 즉, ‘엄마’가 없는 집은 살림살이가 엉망이 되고, 아이가 단정치 못하다는 편견을 장면화하는 것이다. 잠시 돌아온 엄마가 학부모 참관 행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상투적 재연은 정점을 찍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엄마의 빈자리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두고 제도적 모성과 편견을 이야기하는 게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영화적 클리셰는 학부모 행사에 아버지 참여는 선택이지만 어머니 참여는 필수라는 편견 아래에서야 등장할 수 있다. 아들이라도 일차적 양육은 엄마의 몫이며, 엄마가 있어야 아이들은 빈자리 없이 잘 자랄 수 있다는 선입견이 강화되는 것이다. 부재중인 엄마와 돌아온 엄마에 대한 대중 영화의 상투적 재현은 은연중에 성역할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

 

세상이 살기 좋아지면서 아이를 돌보고, 살림살이에 투자해야 하는 절대적 시간이 줄었다고 한다. 세탁기가 ‘열일하고’, 청소기가 일을 덜어주었다고 말이다. 수치상으로는 지난 오십 년간 출산율도 감소했다. 그렇다면 과연 여성들이 육아에 투자하는 시간이 줄었을까?

 

프로이트 이후 심리학과 사회학은 아이의 성장에 ‘엄마’가 절대적이라고 가르친다. 분명 부모-아이의 관계인데, 어쩐지 엄마의 역할만이 강조된다. 1960년 영화 히치콕의 <사이코>에서 범죄자는 강압적인 ‘엄마’의 결과물로 그려진다. 많은 관객들이 2012년 <케빈에 대하여>도 엄마 때문에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된 아들 이야기로 읽고 싶어 한다. 세상의 지탄을 받는 아들 곁을 지키는 어머니를 보는 게 아니라 왜 아들을 사이코패스로 키웠냐고 원망하는 것이다. <케빈에 대하여>는 이해할 수 없는 악의 기원에 대한 탐구이지, 엄마에 대한 책임전가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 일차적으로 엄마에게 육아 불이행의 책임을 묻는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건 사회적 엄마, 보호자이다. 채무가 있다면, ‘엄마’라는 사회적 약호에 있는 것이지 그게 꼭 여성-친모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이지 이 세상에,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난 ‘엄마’를 부탁해 볼 일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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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인격화된 보고서이다. 김지영이 갑자기 빙의 증세를 나타냈고, 정신과 의사와 상담한 내용이 연대별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82년생 김지영>은 문학적 가치보다는 사회학적 가치가 더 높은 책이다. 문학적으로 따지자면, 김지영의 삶은 문제적이며 전형적이라기보다는 기획적이다. 작위적인 부분도 있고, 인물의 일관성 측면에서는 어긋나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82년생 김지영>은 39년생 윤덕수의 삶을 그린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김덕수에게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일들이 개인사로 스쳤듯이 82년생 김지영에게 또래 여성들이 겪었을 만한 일들이 모두 다 일어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한 장면.

 

문제적인 것은 그런 김지영에게 많은 독자들이 공감했다는 사실이다. 이 공감은 김지영이 경험했던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대개의 여성들이 겪은 데서 비롯된 게 아니라 그중 하나 이상을 비슷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문학의 공감에 있어서 가장 수준 높은 기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특이한 인간의 돌출적 행동을 이해하게끔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문학의 주인공들은 이상하고, 괴상한 사람들이 참 많다. 안나 카레니나처럼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도 있고, 개츠비처럼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여자를 뺏으려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뫼르소처럼 햇빛이 따가워서 사람을 죽이는 인물도 있다. 그러나 훌륭한 문학은 이렇듯 이해하기 힘든 사람조차 인간학적 관점에서 공감하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우리 모두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관념조차 인간 이후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인간학적으로 대단한 결점이나 매력을 가지지 못한 김지영에게 이토록 많은 공감이 쏟아지는 것은 ‘82년생 김지영’이 이미 문학적 사건을 넘어서 사회적 사태라는 의미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런 사태들 말이다. 레드벨벳의 멤버 아이린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말하자, 몇몇 남성 팬들이 격렬한 혐오감을 표현하며 더 이상 팬이길 거부한다고 말한, 그런 사태 말이다. 어느새 <82년생 김지영>은 단순한 소설 한 권이 아니라 어떤 상징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82년생 김지영>과 정반대로 인물을 다루고 있다. 김지영이 시대성에 눌려 자아나 내면이 거의 탈색된 동시대적 인물이라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와 올리버는 거의 완벽하게 시대를 벗어나 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 몇 년도인지, 어디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은 강렬한 주관성의 세계 안에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에 동의를 구한다. 어느 여름, 집으로 초대되어 온 젊은 학자에게, 17살 소년 엘리오는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엘리오는 올리버를 혐오하면서 궁금해하고, 다가가고 싶어하면서 미워한다.

 

1인칭으로 서술되었던 원작 소설과 달리 제임스 아이보리가 각색한 영화는 철저히 카메라의 시선에 이야기를 맡긴다. 관객들은 카메라와 같이 엘리오의 말과 행동을 봄으로써 분석해야 하며, 올리버의 행동과 말을 같은 방식으로 예측한다. 그들이 서로의 마음을 드디어 고백하기까지, 모두에게 그 감정은 미스터리이다. 엘리오에게 올리버가 미스터리이고, 올리버에게 엘리오 역시 물음표이다. 그 둘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도 두 사람의 감정은 미스터리이다. 추측의 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두 사람의 감정적 혼란에 동참하고 비밀을 공유한다. 다른 성적 취향의 관객이라고 해도 그들의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서로를 발견하고, 관찰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까지 머물 수밖에 없는 감정의 경유지이기 마련이므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세련되고, 우아하며 무엇보다 직관적이다. 그런데 성적 소수자의 이야기가 이처럼 세련된 간접화법을 구사하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다. 그들의 사랑은 뜨겁게 외쳐서 쟁취해야만 했던 자유였고, 그 과정에서 무차별적인 폭력과 소외마저 감내해야 했다. <82년생 김지영>이 세련된 간접화법을 갖지 못했으나 반향을 얻었던 이유도 여기서 멀지 않다. 세련된 문법으로 동시대를 벗어나기에는, 지금, 이곳에, 아직 여성이기에 견뎌야 하는 공포와 차별이 너무나 많다.

 

‘맨스플레인’으로 유명한 레베카 솔닛은 여성이 길거리를 마음대로 걷는 것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모험인지를 책 한권 분량으로 써냈다. 영어에서 거리의 여자는 창녀이지만 거리의 남자는 건달을 의미한다. 이게 무슨 우연인가, 이럴 땐 영어와 한국어의 간극이 무색해진다. 밤늦게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은 성폭력의 잠재적 대상이 된다. 민감한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물론 남자든 여자든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솔닛의 말처럼 성폭력의 일차적 표적은 여자이며 사실 그런 폭력은 이미 일상 속에 자리 잡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생기는 공감은 레베카 솔닛을 읽으면서도 똑같이 발생한다. 밤늦게 센트럴파크를 조깅하다 강간 피해자가 된 여자 이야기를 보며, 학원에서부터 쫓아온 남학생 때문에 버스 정류장에 주저앉고 마는 김지영의 공포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직 세련된 개인의 문제가 되기에는 여성의 문제는 훨씬 더 많이, 깊이 가야만 한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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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대가를 내 생에 지불해야 이처럼 모든 남루한 디테일을 제거해 버린 고급하고 단순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정미경의 소설 <호텔 유로, 1203>의 주인공 여자는 지금 “물빛을 연상시키는 푸른 스트라이프 셔츠의 가슴께를 손등으로 가만히 쓸어보”고 있다. 그녀는 진열장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옷들을 구경한다. 그녀가 갖고 싶은 것은 과도한 장식을 배제한, 우아한 옷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는 731벌의 고급 부티크 옷을 남긴 채 죽은 여자가 등장한다. 가격표도 뜯지 않은, 아름다운 옷들을 남긴 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희한한 이름을 가진 토니 타키타니는 키 165, 발 사이즈 230, 옷 2사이즈를 입는 여성을 구해 아내의 옷을 입고 지내주길 요청한다. 그렇게 옷을 입어보던 여성은 갑자기 주저앉아 펑펑 울기 시작한다. 토니가 이유를 묻자 여자는 대답한다. “옷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 <팬텀 스레드>의 한 장면.

 

비슷한 장면은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도 등장한다. 아름다운 색을 가진 영국산 셔츠에 파묻혀 있던 데이지가 불현듯 눈물을 쏟는다. 당황한 개츠비가 이유를 묻자,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데이지가 대답한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셔츠들이야. … 너무 슬퍼!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을 본 적이 없어.” 아름다운 촉감을 가진 옷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데이지, 아름답고, 우아하며 고급스러운 옷들은 왜 눈물을 흐르게 할까?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팬텀 스레드>는 그 눈물의 원인을 조금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 <팬텀 스레드>는 자신이 만드는 옷에 강박에 가까운 집중을 보이는 고급 의상 디자이너 레이놀즈 우드콕의 이야기이다. 함부로 따라할 수 없는 집념으로 옷을 만드는 그는 장인이다. 팬텀 스레드는 보이지 않는 실로 만든 옷, 이음새나 재봉질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옷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실로 지은 옷은 우드콕에게는 옷이지만 예술가라면 누구나 그런 작품을 소망한다. 소설가, 조각가, 영화감독, 작곡가 등 모든 예술가들은 재봉선이 보이지 않는 완벽한 작품을 꿈꾸는 것이다.

 

하필, 옷이다. 옷은 아무리 아름답고 우아해도 상품이다. 쓸모가 정해진 것이다. 건축물처럼 옷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용처가 있고 거래되며 그래서 가격이 있다. 어쩌면, 우드콕의 맞춤옷은 20세기에도 현존하는, 발터 베냐민이 말하는 아우라를 가진 거의 유일한 원작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드콕은 단 한 사람을 위한 드레스를 만드니 말이다.

 

마치 벨라스케스에게 ‘시녀들’을 요청했던 필리페 4세처럼, 우드콕에게 옷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귀족이나 왕족들이다.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원본성을 가진 옷, <팬텀 스레드>의 옷은 그래서 누구나 다 같은 돈을 지불하면 가질 수 있는 대중예술과는 정반대의 상품성을 가지고 있다. 그건, 사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중이 사용하고, 용처가 분명한 것들은 결코 우아할 수 없는 것일까?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 우아함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는 무려 1만8000t에 달하는 지붕의 무게를 이고 있는 강철 기둥을 보며 거기서 우아함을 발견한다. 강철 기둥은 겸손하게도 자신이 극복한 어려움을 내세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이 기둥들은 목 위에 400m 길이의 지붕을 이고 있는데, 마치 아마포 차일처럼 가볍게 느껴지도록 서 있다.

 

그러니까, 우아함이란 어마어마한 고통과 수고를 다했음에도 타인에게 그 수고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안정감이다. <팬텀 스레드>에서 거의 완전한 우아함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우아함이다. 옷을 입은 자와 옷 사이에 이물감이 전혀 없는, 원래부터 존재했었던 것 같은, 입은 자에게 용기를 주는 드레스. 사실 이 문장에서 옷은 영화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다. 우아함은 우리의 일상에 의해 감춰지는 경우가 많다. 우아한 일상은 완벽한 도덕적 삶만큼이나 실현하기 어렵다.

 

<팬텀 스레드>는 배경이 되는 1950년대 영국의 현실이나 사회상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사랑의 아이러니와 우아함에 대해 130분의 구체적 장면들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팬텀 스레드>가 사치스럽고, 무의미한 작품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일상의 힘에 침윤되어 마모되어 가는 지극히 예민하고, 세련된 어떤 미적 감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때로 어떤 영화는 사회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한마디 말을 하지 않고 무심해도 된다. 히드로 공항의 기둥처럼 그렇게 우리 삶의 무게를 받치고 있는 순간을 보여줌으로써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떤 영화는 그래야만 한다. 모든 작품들이 눈에 보이고, 피부에 감촉되는 그런 삶만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우드콕의 옷처럼 아주 예민한 감성과 오래된 역설, 심오한 고뇌를 다루는 예술도 필요하다. 어머니, 고향, 결함, 사랑, 아이러니와 같은 추상적이지만 완강히 존재하는 단어들, 일상이 지우는 완벽한 추상어를 만나는 것. 영화는 그렇게 가끔 일상을 정제해준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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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아카데미상 후보작인 <쓰리 빌보드>와 <셰이프 오브 워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우선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여성 주인공 영화가 처음이겠냐마는, 말 그대로 여성 캐릭터가 이야기를 이끄는 여성 인물 영화는 오랜만이다. 두 작품 모두 그렇다. 더 의미 있는 것은 그들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힘을 가진 쪽이 아니라는 점이다. 딸아이를 강간살인사건으로 잃은 어머니 밀드레드 헤이스(프랜시스 맥도먼드)나 냉전시대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말 못하는 여성 엘리사(샐리 호킨스), 그들 모두 약자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두 여성은 위험을 무릅쓰고 낯선 생명체를 구출한다.

 

물리적으로 보나, 사회적 위치로 보나 두 여성 인물은 모두 ‘을’에 가깝다. 딸아이의 죽음 이후 범인을 찾고 싶지만 사건은 일 년이 지나도록 흐지부지 해결될 기미가 없다. 옆집에 사는 이웃의 숟가락 개수도 헤아릴 만큼 작은 동네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인데도,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불행에 동정을 표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안됐다고 이야기할 뿐,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일을 벌인다. 마을 외곽에 버려진 광고판 세 개에 일 년치 광고비를 선납하고 메시지를 게재한 것이다. “죽어 가는 동안 강간당했다” “아무도 못 잡았다고?” “어떻게 된 거지, 윌러비 경찰서장?”라고 말이다. 동떨어져 있는 세 개의 입간판은 불연속적인 세 개의 낱말 카드와 같다. 상징적인 세 문장, 하지만 조용했던 마을은 이 문장들이 입간판에 쓰이는 순간부터 시끄러워진다.

 

역설적이게도 19살 소녀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강간당하고, 불태워졌을 때보다 세 개의 상징적 문장이 광고되자 마을이 더 시끄러워진다. 작고, 보수적인 마을의 남자들은 밀드레드를 설득하고, 회유하고, 협박한다.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어라, 그렇다고 죽은 딸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가만히 있어라, 경찰들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가만히 있어라, 지금 경찰서장은 말기암에 걸려 죽어가는 중이다.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어라.

 

하지만 밀드레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딸이, 소녀가 희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죽은 딸을 되살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딸들을 구하기 위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될까? 문제가 천천히 해결되는 게 아니라 잊혀질 뿐이다. 가만히, 조용히, 잊혀질 뿐이다. 영화 속 엄마의 말처럼, 가만히 있지 않은 그 며칠 동안 경찰은 일 년 동안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조사를 하고, 지역 언론은 몇 번이나 취재를 해간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엘리사가 듣는 말 역시 비슷하다. 소변을 보기 전에 손을 씻고 소변을 본 후엔 씻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기 신체 일부를 만지기 전에는 손을 씻지만 타인의 손을 잡기 전엔 손을 씻지 않는다. 그 신체 일부가 타인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 마초가 남미 어느 늪에서 잡아온 피조물을 고문하고 괴롭힌다. 그 피조물은 비록 우리와 생김새는 다르지만 의사소통도 되고 감정의 교류도 가능하다. 하지만 마초 관리자에게 그 피조물은 열등하고 이상한 물체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 관리자에게는 자신과 생김새가 다른 모든 게 다 열등하다는 사실이다. 흑인은 피부색이 다르니 열등하다. 여성은 피부색과 무관하게 우선 생물학적으로 다른 몸을 가졌으니 열등하다. 말을 하지 못하는 주인공 엘리사가 열등한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신이 자신의 모습과 똑같은 형상으로 인류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같은 형상’은 백인 남성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백인 남자가 가장 신에 가까운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금씩 결격 사유를 지닌 열등한 존재이다. 결함을 가진 이상 여자나 괴물이나 흑인이나 괴물이나 모두 다 똑같이 열등하다.

 

영화의 놀라운 힘은 무시받고, 협박받고, 천대받는 그들이 힘을 모을 때 발휘된다. 물속 피조물이나 말 못하는 여성이나 다 똑같이 열등하다면 적어도 그들 간에는 아무런 차이도, 차별도 없다. 엘리사가 연구소에서 피조물을 구출하려 할 때, 모든 사람들이 “가만히 있어라”라며 만류한다. 하지만 적어도 엘리사에게 그 피조물은 우리보다 열등한 생명체가 아니라 똑같은 생명체이다. 즉 그 피조물은 괴물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인 것이다.  똑같은 존재이니 사랑에 빠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함과 차별로 이뤄진 게 아니라 생명을 가졌다면 모두가 다 사랑할 수 있는 똑같은 존재인 셈이다.

 

힘을 가진 자들, 해결할 권력을 가진 자들은 말하곤 한다. 가만히 있어라. 그들은 을이, 피해자가, 힘없는 자가 가만히 있기를 바란다. 가만히 있으면 거슬리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생명을 가진 존재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은 죽은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더욱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 최근 점점 더 커져 가는 ‘미투’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가해자들은 지금 이 순간도 피해자들이 가만히 있기를 원한다. 아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있지 않는 것, 그건 힘없는 자들의 존재증명이자 권리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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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한잔 더 하실래요?” “조개를 참 좋아하나 봐요. 난 다른 조개 먹고 싶은데.” “저기 가서 키스만 하고 갈래요?” 만약, 처음 만난 남자가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그건 어떤 상황일까? 게다가, 그 남자와 여자가 직무상 상하관계에 놓인 입장이라면 말이다. 남자는 교사이고, 여자는 그에게서 평가를 받아야 하는 교생이다. 영화 &lt;연애의 목적&gt;(2005)의 유명한 장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연애의 목적>에서 영어교사 이유림(박해일 분·왼쪽)이 술자리에서 미술교생 최홍(강혜정 분)에게 치근덕거리고 있다.

 

한재림 감독의 &lt;연애의 목적&gt;의 앞부분을 보자면, 모든 게 교과서적이고 또 뻔하다. 다른 여자 교생들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교생이 있다. 게다가 예쁘다. 그녀를 담당하게 된 교사는 우선 술 한잔하자고 권한다. 거절당한다. 하지만 어떤 조직이든 우리나라엔 ‘회식’이라는 문화가 있다. 드디어 첫 번째 회식이다. 회식자리에서 일찍 그 교생이 뜨자, 늦더라도 다시 돌아와 달라고 부탁한다. 교생이 돌아왔을 때, 마침 사람들은 없었고, 그래서 남자 선생님이 다시 권한다. “저랑 한잔 더 하실래요?”

 

남자 선생님의 집요하고도 이상한 부탁에, 최홍(강혜정 분) 교생은 “여자 친구 사랑하세요?”, “이 선생님, 앞으로 제 얼굴 어떻게 보려고 이러세요?”라며 얼굴을 찌푸린다. 그래도, 최홍은 대개의 여교생들보다 한두 살 많은 언니답게 당당하게 거절한다. 여성의 사회생활 중 중요한 항목 중 하나가 회식자리에서 방어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유림(박해일 분) 선생은 집요하다. 끊임없이 요구하고, 따라붙고, 집을 찾아가고, 심지어 방으로 들어간다.

 

2005년 &lt;연애의 목적&gt;이 개봉했을 때, 이 영화는 꽤나 당혹스러운 작품이었다. 제목이 &lt;연애의 목적&gt;이지만 마치 성추행의 추억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2018년, 13년이 지나 다시 이 영화를 보니 정말이지 성추행의 알고리즘을 거의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첫 번째 회식자리, 게다가 거절할 의사는 있지만 거절할 권리가 없는 사회 초년병 여성을 겨냥한 무례하고도 폭력적인 언어들까지 말이다.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을 두고 또 한 번 이 사회가 요동쳤다. 2016년 이미 한 차례 ‘#문단 내 성폭력’이 지나갔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당시 사건들이 구체적인 성폭행 사태를 동반한 형사적인 문제에 국한되었다면 이번엔 추행과 희롱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 비단 문단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이건 문단이라는 그래도 가장 독립적이고, 용기 있는 집단에서 터져 나온 하나의 실증사례일 뿐이다.

 

적어도 최영미 시인은 스스로 문단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있고, 또 문단 밖에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여성이었기에 고백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 그러니까, 여전히 말하지도, 고백하지도 못하는 여성들이 수없이 많다. 이건 어떤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초년병 여성과 권력을 가진 기득권의 문제이다. 법조계, 의료계, 학계 심지어 교육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저랑 한잔 더 하실래요”로 시작되는, 첫 번째 회식의 공포가 우리 사회 곳곳에 가득 차 있다. 아니라고 부인할 수가 없다. 그게 더 심각한 문제이다.

 

‘천조국’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꽤나 자유롭고, 여성 인권이 높다고 여겨지는 미국에서도 이제 겨우 미투(Me Too)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 대한 여성 연기자들의 고백은 고통스러운 항거였다.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2005년 &lt;연애의 목적&gt;을 두고, 당혹스럽다는 반응은 있었지만 이를 두고 사회적 권력 관계와 성적 폭력성의 상관관계로 읽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건, 둔감했기 때문이다. 고통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 자체가 더 문제이다. 리베카 솔닛이 &lt;멀고도 가까운&gt;에서 말했듯이 무감각은 자아를 수축하고, 우리가 그런 사회의 일부라는 것을 잊게 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신체 부위는 죽은 신체밖에 없다.

 

최영미 시인이 성추행을 고발하면서, 거듭 ‘부드러운 거절’을 강조한 것이 너무도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영미가 김소월의 시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의 한 부분을 암송하며,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모르고 살았으면!”이라고 할 때, 이 목소리에는 후회와 절규, 고통과 회한이 뒤섞여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무례한 요구와 폭력적 언어의 부당함이 아니라 그것을 거절하는 또 다른 에티켓을 여성에게 요구해온 셈이다. 거절의 예의라니 그것도 폭력적 언어를 예의를 갖춰 거절해야 하다니.

 

홍상수의 초기작 &lt;오! 수정&gt;이나 &lt;강원도의 힘&gt;을 보면, 여성과 하룻밤을 갈구하는 철부지 지식인들이 잔뜩 등장한다. 임신중절 후 채 아물지 않은 여제자의 몸을 파고드는 &lt;강원도의 힘&gt; 속 대학 강사나 ‘그만 뚝’ 호통을 듣고 나서야 멀찍이 떨어지는 &lt;극장전&gt;의 남자 주인공을 보면, 왜 그렇게 많은 지식인 남성들이 홍상수 영화를 보며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을 했는지 새삼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아마도 많은 남성 권력자, 지식인들이 &lt;연애의 목적&gt; 속 이유림처럼 억울하고, 답답할 것이다. 여성의 피해에는 전혀 공감되지 않고, 남성의 입장에 전폭적으로 이입이 될 테니 말이다.

 

타인의 고통을 같이 앓는 것은 재능이다. 호의였고, 격려였는데, 오해가 생겼고 운이 나빴다고들 말한다. 구차한 변명이다. 그들은 상습범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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