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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에 해당되는 글 208건

  1. 2018.02.05 베트남 쌀국수
  2. 2018.01.22 진짜 동치미
  3. 2018.01.05 ‘시급 7530원’과 노동구조
  4. 2017.12.22 배달소년
  5. 2017.12.08 우주에서 농사짓기
  6. 2017.11.24 고추에게 감사를
  7. 2017.11.10 김장소묘
  8. 2017.10.27 흑돼지냐 백돼지냐
  9. 2017.10.13 메밀 시대
  10. 2017.09.22 양평부추축제
  11. 2017.09.08 목숨 거는 바다
  12. 2017.08.25 최저 가격의 존재 이유
  13. 2017.08.11 먹을 수는 없어
  14. 2017.07.28 한국인 밥상 떠받치는 외국인 노동자
  15. 2017.07.14 우리에게 냉면이란
  16. 2017.06.30 그 옛날 아이스박스의 추억
  17. 2017.06.16 야장을 깔다
  18. 2017.06.02 노포
  19. 2017.05.19 김밥과 5·18
  20. 2017.05.08 요구르트 한 병


사람이 들어오면 문화도 등에 업고 온다. 가장 큰 게 음식이다. 임오군란을 수습하는 와중에 군대를 파견한 청나라와 불평등한 무역협정을 맺은 게 1882년의 일이다. 당연히 중국음식도 들어왔다. 짜장면 전래설도 여기서 출발한다. 아마도 처음에는 달지 않은 호떡이었을 것이다. 밀가루떡을 굽고 파와 춘장을 넣어서 먹었던. 이윽고 짜장면과 따루면(중국식 우동) 같은 게 들어왔다. 이후 수많은 외국 문화가 한국에 건너오면서 음식문화를 퍼뜨리는데, 흥미롭게도 다수가 국수다. 우리 민족이 국수를 정말 좋아하긴 했던 것 같다. 돈 많은 양반들이 ‘낮것상’이라고 하여 점심에 국수를 차려먹는 일이 동경의 대상이었으니까. 국수는 맛도 좋고 별식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늘 선호도 일등이었다. 메밀로 내린 국수를 기억하는 관서지방 사람들이 남으로 이주하면서 남한 전체에 냉면 유행을 만들어 놓았다. 미군이 퍼뜨린 건 스파게티였다. 커다란 미트볼을 넣는다거나 하는 전형적인 미국화된 스파게티였다. 여기에 일본 경양식집에서 파는 스파게티(나폴레탄)를 모방했다. 나폴레탄은 미국 군대가 일본 열도에 진주하고 군정을 실시하면서 생겨난 형식이다. 케첩을 쓴 새콤달콤한 스파게티다. 그 밖에도 오븐에 구운 치즈 스파게티니 하는 것들에 침을 흘렸다. 1960~1970년대에 경양식집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도대체 이 시큼하고 질긴 이상한 국수를 왜 먹나 싶었다. 지금 국내에서는 급식용의 유사(?) 스파게티 말고는 거의 외국 수입 제품을 쓰는데, 자료를 보면 1960~1970년대에 국내에서 스파게티 생산이 꽤 활발해서 광고도 하고 그랬다. 역시 국수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우리들이었다.

 

짜장면이 배달음식이 되고, 스파게티가 고급화의 길을 달릴 때 등장한 게 월남국수였다. 호주와 미국 서부 지역에서 유행하던 소고기 국물의 쌀국수가 강남을 중심으로 번져나갔다. 초기에 이런 가게를 연 집들은 돈도 많이 벌었다. 마치 짜장면을 처음 판 화교들과 스파게티를 보급한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쌀국수는 가볍게 싼값에 먹는 국수라는 본디 의미와 달리 강남에서 고급음식처럼 팔렸다. 세련된 인테리어에 젊은 서버들이 경쾌하게 서비스하는 집이었다. 쌀국수 문화는 지금 이른바 ‘투 트랙’으로 달리고 있다. 프랜차이즈를 통한 기본 공급 루트에 베트남 본토 사람들이 가세했다. 주로 결혼 이주한 베트남 여성들이 본토의 손맛으로 작은 가게를 곳곳에 열고 있다. 한때 이런 국수를 먹으러(진짜 베트남 국수라고 불렀다) 경기 안산시까지 갔는데, 요즘은 서울 시내에서도 종종 보인다. 동남아 특유의 향에 호오가 엇갈리는데, 점차 ‘호’가 늘고 있다. 원래 이상한 풍취도 익숙해지면 더 강렬한 애착을 받게 마련이다. 박항서 축구의 성공으로 베트남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크게 늘었다. 이 매력적인 쌀국수도 더 퍼져나갈 것 같다. 어쩌면 다른 외래 국수가 그랬듯이, 군대와 학교 급식에도 등장할 것이다. “와, 오늘 점심은 베트남 국수래!” 국수만 맛있다 하지 말고, 한국에 와 있는 베트남 친구들도 좋은 감정으로 잘 사귀었으면 좋겠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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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사람마다 좋아하는 술안주가 있을 텐데, 나는 동치미 한 사발이다. 그 맑은 순수의 짠맛 한 그릇이면 술이 외롭지 않다.

 

문제는 이걸 제대로 얻어먹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밥집이나 고깃집에서 주는 건 대다수가 ‘가짜’다. 동치미=冬沈이라는 문자 그대로 겨울에 푹 잠겨 익은 동치미가 아닌 것이다. 그 제조 비법(?)이야 뻔하게 예상이 가능하다. 간간한 소금물에 잘 삭은 게 아니라 급조한 ‘이미테이션’이다. 동치미라고 부르는 게 무색하다. 익힌 것이 아니니 사카린과 빙초산과 설탕과 사이다에 또 ‘무엇무엇’을 넣어 맛을 낸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동치미를 잘 만들어서 익히자면, 공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보통 식당에서 그런 환경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김치라도 겨우 담가서 파는 집도 희귀해진 판에 동치미는 언감생심이다. 게다가 이 동치미라는 녀석은 변덕이 심하다. 물이 많이 잡히고 고춧가루가 안 들어가니 발효 조절이 힘들다. 동치미는 일종의 물김치이니 익히자면 공간도 건더기 중심의 김치보다 많이 든다. 김치냉장고며, 그것을 놓을 공간이 충분할 리 없다(요즘의 임대료는 공간에 돈을 깔고 앉아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동치미 엑기스’라는 것도 판다. 동치미 맛을 내는 조제품이란다. 여기에 무를 썰어서 대충 소금 친 후 이 엑기스와 물을 섞어 그럴듯하게 동치미를 만들어낸다.

 

동치미의 악전고투는 다 이유가 있다. 만들고 저장하는 데 돈이 드는데, 정작 손님에게 돈을 청구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고기 구워 파는 식당에서 동치미(라고 부르는 어떤 존재)는 공짜로 몇 번이고 ‘리필’되는 싸구려 음식이다. 이 복잡한 속내의 동치미가 식당 주인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알려면 식당 창업 교육을 가보면 된다. 이런 교육 현장에는 관련 상품을 선전하는 상인들이 많이 나온다. 첨단의 포스 시스템부터 사채업자들까지 다양하다. 이 자리에 동치미를 판다는 상인이 나오곤 하는 것이다. 엄두가 안 나는 동치미를 사철 공급해주는 업자다. 이런 제품이라도 사서 쓰면 나쁘지 않을 텐데, 이것도 돈이 들어가니 그다지 인기가 없다. 한 그릇에 50~100원이면 뚝딱 ‘조제’를 해낼 수 있는데 굳이 진짜 동치미를 사서 쓸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오래된 신문을 뒤적이는데, 평안도식 동치미 만드는 법이 실려 있어서 눈길이 갔다. 이름도 특이하다. 와싹 동치미, 쪼개 동치미. 와싹은 아마도 입에서 씹히는 질감을 말하는 것 같고, 쪼개 동치미는 숟갈로 무를 쪼개듯 파내어 담그는 것이라고 한다. 칼로 정연하게 썰지 않은 무의 부정형의 질감이 입맛을 더 돋울 듯하다. 대동강도 얼어버릴 한겨울, 평안도 사람들은 뜨뜻한 아랫목에 앉아 동치미에 메밀국수 말아 먹으며 지냈다지. 고깃국물이 있으면 섞어 넣고 없으면 순전히 동치미 맛으로 먹는 국수.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냉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익은 동치미 한 그릇, 침이 고인다. 어디 동치미 잘하는 집이 없을까. 돈을 받아도 좋다. 그래야 부담 없이 한 그릇 더 청할 수 있을 테니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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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예전에 이른바 패밀리 레스토랑을 취재한 적이 있다. 한 후배의 얘기에서 출발한 취재였다. 그는 한 패밀리 레스토랑의 주방일을 맡고 있었는데, 50여명에 달하는 일꾼 중 정규직이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그 후배가 이런 충격적인 말을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저녁 준비 시간 전까지 모두 가게 밖으로 나가야 해요. PC방이나 공원에 가서 시간을 때우다 오곤 했죠.”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제 돈 주고 시간을 쓰고 들어왔다. 물론 무급으로. 가게 안에 머물면 시급을 줘야 한다. 그러니 밖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지금도 나는 들르는 식당이나 카페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알바생’ 등을 볼 때마다 그 사건이 생각난다.

 

 

시급 1만원 시대를 열겠다는 게 이 정부의 공언이었다. 어찌어찌 일단 7530원이 되었다. 법대로 주휴수당 등을 다 챙긴다고 가정할 때 하루 10~12시간을 일하고(요식업소의 일반적인 근로시간) 월 21일 근무하면 대략 170만~200만원을 손에 쥐게 된다. 많은가. 좋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알바’에게 일을 시키는 요식업소는 드물다. 제일 바쁜 시간에 서너 시간, 아니면 네댓 시간 일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시급 올린다고 했을 때 반대쪽에서 주장한 ‘월급쟁이보다 많이 받는 알바’는 사실상 성립하기 힘들다. 게다가 알바 퇴직금 챙겨주는 경우도 보기 드물다. 법망이 허술하고, 알바가 퇴직금을 받을 만큼 1년 이상 근무하는(근무시키는) 경우도 적기 때문이다.

 

문제는 알바의 시급이 아니다. 정규직이든 계약직이든 풀타임으로 취직하고 싶어도 받아주는 데가 없다. 제발 지방 중소기업 현장에는 자리 많다, 도리어 구인난이다, 하며 혀를 쯧쯧 차는 엉터리 신문 기사는 믿지 말라. 그 일이란 게 실은 외국인 노동자가 하는 직무인 경우가 많다(제주의 이민호군이 했던 일이 바로 허울 좋은 ‘지방 중소기업 일자리’의 상징이다). 또 당신 같으면 자식과 형제더러 알바보다 월급도 별로 많지 않은 지방에 가서 기숙사 생활 하며 일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현장 중소기업에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것이 우리 현실인 걸 어쩌겠는가.

 

대기업은 돈을 쌓아두고 있다고 한다. 사내 유보금이니 뭐니 하는 용어를 쓰는데, 한마디로 돈은 있는데 투자도 채용도 안 한다는 소리다. 문제는 시급 인상이 아니다. 취직할 의향이 있으면 사람을 받아줄 노동구조가 먼저다. 제발 시급 1만원이 되면 웬만한 월급보다 많다는 말은 하지 말자. 알바의 평균 근속기간은 고작 5개월이다. 그러니 다시 일자리를 찾아서 무급으로 헤매야 하며, 그 시간 동안 무얼 먹고 방세는 뭘로 내는가. 앞이 캄캄하다. 최근 재미있고도 가슴 아픈 만화 한 권을 읽었다. <내 방구 같은 만화>(기묘나 지음·호랑이출판사)다. 알바를 구하면서 만화를 그리는 이 시대 청춘의 한 모습이다. 기성세대인 내가 너무도 미안해서 책장을 덮지 못했다. 일하고 싶어도 일이 없는 세상. 호부호형은 못해도 좋으니 일을 시켜달라는 세상이라니.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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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동네의 제법 큰 ‘슈퍼’-옛날엔 구멍가게보다 새롭고 큰 가게를 슈퍼라고 불렀다- 앞에는 짐자전거가 놓여 있었다. 시커멓고 커다란 짐받이가 있으며, 더러 짐받이를 키워서 배추 스무 포기쯤은 너끈히 배달할 수 있는 그런 자전거였다. 육중한 무게감, 그건 소년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저 자전거를 탄다는 건 어른으로 인증받는 방법이었다. 슈퍼집 아들에게 아부해서 몇몇 녀석들은 그 자전거를 몰았다. 안장에 앉으면 발이 닿지 않으니 옆에 붙어 서서 페달을 돌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면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짐자전거는 중국집의 필수품이기도 했다. 대개 소년이 그걸 몰았다. 고등학교 같은 건 가지 않고, 중국집에서 먹고 자며 일찍이 사회에 발을 들인 형들. 그 형들이 담배 한 대를 멋지게 피우고는 배달통을 뒤에 싣고 힘차게 페달을 밟는 모습은 진짜 탄성을 자아냈다. 그들도 아직 키가 여물지 않아 겨우겨우 페달에 발을 얹은 처지라 아슬아슬하기는 했지만. 게다가 ‘핸들’에는 우동이나 짬뽕 국물을 담은 노란 양은주전자를 몇 개나 걸고 가고 있었으니. 그때부터 전화로 중국집에 독촉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동네 중국집 홀에 앉아 짜장면을 먹노라면, 전화를 받는 주인의 대답은 늘 이랬다.

 

“벌써 떠났어요.” 그 화교 아주머니가 전화를 끊고는 중국어로 주방에 소리를 치곤 했다. 얼른 음식 내란 말이었을 테다. 그제서야 배달 짜장면이 출발했고, 나는 중국집 주인의 “벌써 떠났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3대 거짓말이라는 걸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의 배달 문화는 이제 짙은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옛 소년 배달부는 여전하되, 인권의 시각으로 다시 보게 된다. 빙판길, 막히는 길을 달려 고객님의 불만을 사지 않기 위해 가슴이 타들어가는 질주가 이어진다. 신호 걸린 사거리에는 맨 앞에 오토바이 부대가 진을 친다. 퀵서비스와 음식 배달이다. 시간이 돈이고, 고객이 왕이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총알 같이 튀어나간다. 문제는 맞은편 차선에는 같은 ‘동료들’이 신호의 마지막을 붙들고 달려들고 있다는 점이다. 오토바이 사고는 늘 일어나고, 사고가 났다 하면 대형이다. 먹는 시장이 사실상 완전 경쟁을 넘어 출혈 경쟁을 하고 있고, 배달은 그나마 그 틈새에서 먹고사는 외식업의 바닥을 이룬다. 주문하는 이나 음식 만드는 이, 배달하는 이가 저가 외식시장에 발을 넣고 몸부림을 친다. 어쩌면 이 구도는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최악의 생존 구조의 압축된 아수라 같은 것이다. 다 ‘쏠리고 몰려서’ 먹고사느라고 인권이나 목숨 같은 건 돌볼 여지도 없이 하루의 안녕을 빌어볼 뿐이다. 그 와중에 정작 돈 잔치는 거대 프랜차이즈 기업들과 배달을 중개한다는 신종 업종 회사들이 벌인다. 세상에! 우리가 사람이라면, 하루에 몇 명씩 죽어가고 장애인이 된다는 배달 ‘소년’들, 배달 노동자의 인권과 안전에 이토록 무심할 수 없다. 이 또한 진정한 적폐가 아닌가. 정부 당국은, 어른들은 당장 이 문제 해결에 나서라. 우리 소년들을 보호하라.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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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수능이 치러지기 전에는 학력고사란 게 있었다. 아마도 교육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과목일 텐데, 실업도 고사 과목 중 하나였다. 그게 쓸모가 있든 없든 3년을 열심히 배우고 가르쳤다. 필답고사 320점 만점에 무려 15점이 배점되어 있었다. 속칭 암기과목이니 이른바 무조건 고득점을 노리고 봐야 하는 전략과목이기도 했다. 실업이란 게 워낙 다양해서 상업, 공업, 가사에 농업, 수산업, 광업도 있었다. 고등학교가 속한 지역 사정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업, 공업이 많았다. ‘밥’이 되는 과목이라는 뜻이었다. 농업이니 수산업이니(심지어 광업까지) 하는 과목은 사양산업 같았고, 1980년대에 바라보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실업 과목에 속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인문계를 다녔으니 상업을 배웠다. 문제는 이 과목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었다. 대변 차변이 나오는 부기 부분에 가면, 머리가 다 멍해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부채도 자산이다’라는 원리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남의 돈을 빌려 쓰는데 그게 어찌 ‘내 돈 같은 자산’이 되느냐고. 원서 쓸 날은 가까워 오고, 부채와 자산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그때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하는 재수생 형의 제안은 놀라웠다. 농업을 선택하라는 거였다. 쌀 나무나 겨우 아는 수준에 농업을 어찌 배우냐고, 이제 곧 원서 쓰고 시험이라고. 그 형이 지긋이 웃으며 말했다.

 

“농업은 쉽게 나와. 네가 매일 먹는 게 시험에 나온다고.”

 

과연! 기출문제를 보니 소, 돼지에 쌀에 고구마, 사과와 귤이 시험에 나오는 게 아닌가.

 

나는 그렇게 농업을 순전히 책으로 배웠고, 학력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다. 뚱딴지같은 생각에서 시작된 우연이었지만 농업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무엇보다 도시에서 산 내게도 흥분될 정도로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병아리를 까는 법, 알을 많이 낳게 하는 법, 소와 말의 임신 기간이 사람보다 길다는 거(이 녀석들이 임신한다는 사실을 도시 아이들은 아는가 모르겠다), 사과를 많이 열리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지, 돼지에게는 진흙목욕이 최고라든지…. 농(축산)업이 기본적으로 인간 중심의 이기적인 생산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 입에 들어가는 생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투명한 랩으로 곱게 부위별로 포장된 고기를 고르면서도 그 붉은 살코기가 어떤 존재의 누적된 삶의 부분인지 우리는 이제 알지 못한다. 아니,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산다.

 

 볍씨가 어떻게 모종이 되어 무논에 심어지고 나락이 되는지, 그걸 털어서 어떻게 깎아야 맛있게 먹는지 아는 사람이 도리어 별종이 되는 세상이다. 농축림수산업은 인류를 지탱하는 기초 산업이다. 누구 말마따나 스마트폰을 먹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먹는 것을 이해하는 일, 아마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제일 큰 힘이 될지도 모른다. 단위학교에서 농업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것이 앞이 안 보이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줄 것이다. 별에 버려진 우주인이 인분으로 감자농사를 짓는다는 영화 속의 이야기는 그 의미심장함의 비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이테크 시대에도 우리는 뭔가를 먹어야 하고,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암시하는.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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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올해 김장들 준비하시는지 모르겠다. 배추농사는 나쁘지 않았는데 고추가 영 좋지 않다고 한다. 고추는 기르기 어려운 작물이다. 원래 원산지인 아메리카 대륙과 우리 기후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대충 답이 보인다. 고온 건조한 기후에 어울리는 작물이다. 한국은 비도 많고 탄저병 같은 치명적인 감염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올해 탄저가 고추를 놔두지 않았다. 옛날 김치에는 고추를 많이 안 쓰고 시원했다는 추억을 말하는 분들이 있다. 특히 서울과 경기, 충청, 강원도 김치가 그랬나 보다. 지방마다 고유한 맛은 본디 환경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그때는 농사기술도 부족하고 효과 좋은 농약도 없어서 고추 기르기가 어려웠으니 김치도 담박한 편이었을 거다. 유기농 하는 농민들이 과일만큼 어려운 게 고추라고도 하신다. 한국 고추는 세계에서 매운 편에 속하지 않는다. 달고 부드러운 맛이라고나 할까.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량되어 온 셈이다. 그래서 고춧가루 사용량도 많다. 만약 이탈리아나 멕시코, 동남아 고추처럼 매웠다면 지금처럼 많이 쓸 수 없다.

 

고추는 매운맛도 중요하지만, 일종의 살균작용을 노리고 음식에 넣는다. 고춧가루를 안 쓰는 백김치나 동치미에는 고추 삭힌 게 필수다. 고추의 힘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는 셈이다. 고추를 안 넣은 동치미는 발효과정에서 쉬이 물러진다. 짱짱하고 시원한 동치미 맛은 절반쯤은 고추의 힘이다.

 

 

1970년대 후반에 고추 파동이 났다. 아마 그해 비가 많아서 고추에 탄저가 크게 번졌을 것이다. 수확량이 절반도 안 됐다. 요즘이라면 기후조건과 품종이 비슷한 중국에서 수입해서 얼추 맞췄을 텐데, 당시는 중공(中共)이라고 부르는 적국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김장이 가지는 비중이 지금과는 달랐다. 김장을 해야 겨울 준비가 제대로 되는 것이었고, 김장 솜씨로 집안의 색깔을 표현했다. 배추 몇 포기를 했느냐 하는 것이 가계의 빈부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그러니, 시중에 고추가 없다니 폭동이라도 날 판이었다. 박정희 시절이었다. 안 그래도 뒤숭숭한 유신 독재 말기, 고춧가루 때문에 정권이 타격을 입어서야 되었겠는가. 결국 인도, 멕시코 등에서 고추를 수입했다. 그것도 양이 모자라 배급권을 나눠주었을 정도였다. 이게 사달이 났다. 맵고 쓰기만 했다. 김장을 했더니 먹을 수 없었다. 그 맛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김치가 시커멓고 맛도 써서 젓가락을 댈 수 없었다. 집집마다 버린 김장이 쓰레기통 옆에 대량으로 쌓였다. 그 해, 부자 김장이라는 말이 돌았다. 수입 배급 고추를 안 쓰고 국산 고추로만 한 김장을 뜻했다. 김장은 계급이었고 권력이었달까.

 

올해 김장이 슬슬 시작되었다. 고추 파동이 났어도 가격이 엄청나게 뛰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나마 돈 되는 고추를 힘겹게 지어도 농민들의 이익이 없다는 뜻이고, 한편으로 소비자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이상한 현상이다. 하기야 김장 작파했다고 난리가 날 시절도 아니다만은.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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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잠에 헤매고 있을 시간에 매운 냄새에 깰 때가 있었다. 아직 일고여덟 살 때의 기억이다. 찧은 마늘과 생강 향이 코를 찔렀다. 쿵쿵 하고 절구에 찧어내니 향이 집안에 가득 찼다. 아, 김장하는 날이구나. 마당에서는 멸치젓 달이는 냄새가 났다. 그다지 향기롭지 않았던. 우리 집은 경상도와 서울식을 절충한 김장이라 새우젓은 조금만 넣으셨던 것 같다.

 

 

김장철 전에는 늘 새우젓 장수가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새우젓이요, 새우젓” 하고 외쳤다. 지면이라 그 소리를 들려드릴 수 없는 게 유감이다. 마포 새우젓 장수는 특이하게도 콧소리를 심하게 내는 발음으로 호객했다. 멀리서도 콧소리가 들리면 ‘아하, 새우젓 장수구나’ 하고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새우젓 장수는 흥정을 하고, 리어카에 실린 새우젓을 듬뿍 퍼서 줬다. 그때는 김장도 손이 컸다. 겨울에 달리 먹을 게 없었던지라 김장은 한 집 살림의 팔할이었다. 어지간한 집은 팔십포기, 백포기가 흔했고 어떤 집은 이백포기도 했다.

 

올해 아내는 망설이다가 결국 겨우 스무포기를 하기로 결정하면서 “너무 많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 한 집에 식구가 예닐곱씩은 되던 그 당시 김장은 정말 대단했다. 동네마다 김장 시장이 섰다. 산처럼 배추와 무가 쌓였다. 아득하게 높은 배추 ‘산’ 정상에 일꾼이 서 있어서 아래로 던져댔다. 그걸 리어카에 싣고 집집마다 배달을 했던 것이다. 시장의 고춧가루 가게도 마른 고추를 높게 쌓아놓고 팔았다. 고추를 고르면 즉석에서 빻아줬다. 그 근처를 지날 때면 매운 향에 연신 기침을 해야 했다.

 

김장 날은 품앗이가 기본이었다. 동네 아낙들이 우물가나 펌프 수돗가에 모여들었다. 밤새 절인 배추를 찬물에 씻고, 양념을 만들었다. 그 마법 같던 엄마들의 손놀림. 절인 배춧잎 사이사이에 번개처럼 쓱쓱 양념을 비벼 넣으며 무슨 얘기에 그리도 웃음보가 터지시던지. 그날 저녁에는 하얀 쌀밥을 짓고, 절인 배추에 매운 양념을 듬뿍 넣어 먹었다. 뜨거운 밥과 양념이 매워 혀가 얼얼하던 기억. 돼지고기를 삶아서 같이 냈던 건 더 나중의 일이었다. 고기가 흔해지고 난 뒤였으리라. 생굴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굴이 꽤 비쌌을 테니까.

 

요즘은 배추 절이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아파트에 김장처럼 큰일을 벌일 공간이 있겠나. 아예 김장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 우리 집은 식구가 적은데도 김장을 잇고 있다. 절인 배추를 사서 하는 일이다. 매년 좋은 절인 배추 구하기도 쉽지 않다. 배추가 질기거나 간이 맞지 않아서 김장을 망친 경우도 많다. 직접 절일 수 없으니 감수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올해는 멀리 지리산에서 기른 배추를 절여 받기로 했다. 일교차가 커서 배추가 달고 씩씩하다고 했다. 김장이 시시해졌지만, 김치냉장고가 보급되어 한 해 내내 보관해두고 먹는 셈이라 더 없이 중요한 행사일 수도 있겠다. 아직은 사 먹을 때가 아니야 하고 어떻게든 김장을 하고 있는 여러분들 모두 힘내시라. 하는 김에 조금 더 해서 다른 이들과 나누려는 집들은 두 배로 힘내시라. 올해 김장은 모두 최고로 맛있기를.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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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품종이 뭐가 있냐고 주변에 물었다. ‘한돈’(?)이라고 대꾸한다. 한돈은 국내 양돈업자가 만든 브랜드이지 품종은 아니다. 그렇다. 사실 우리는 돼지 품종을 잘 모른다. 오죽하면 백돼지와 흑돼지로 나뉜다고 할까. 연간 8만여 마리 이상 출하되어 대표적인 제주 흑돼지조차 정확한 품종명이 아니다. 외래종 흑돼지의 대표격인 버크셔의 혈통이 섞여 있거나, 더러 재래종 흔적이 남아 있는 정도다. 물론 우리가 아는 ‘백돼지’의 혈통도 포함되어 있다. 흑돼지는 털 빛깔을 말할 뿐, 혈통 안에는 여러 돼지의 유전자가 뒤섞여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재래종을 고집하기도 그렇다. 고유 흑돼지는 사실상 씨가 말랐다. 빨리 자라지 않고 무게도 적게 나간다는 이유로 수입종에 밀려버린 것이다. 그저 무게로 따지는 게 아니라 고유종의 맛을 찾는 이들이 늘어났지만, 혈통을 찾아 보급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유럽의 돼지 축산 강국인 스페인산 흑돼지가 많이 들어오고 있다. 시중에 ‘이베리코 돼지’라고 써 놓은 고깃집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다. 이 돼지는 통째로 들어오지 않고 일부 부위만 수입된다. 품질이 뛰어나고 관리가 잘 된 돼지고기라 맛이 좋다. 스페인과 유럽에서는 인기가 적어서 싸게 팔리는 부위인 삼겹살과 목살이 들어오고 있다. 우리가 혈통 관리나 흑돼지 종에 대한 난맥을 겪고 있을 때 슬금슬금 외래의 명품이 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일반 돼지를 흑돼지와 대별해서 ‘백돼지’라고 부른다. 실은 하얗지 않다. 갈색이 섞인 분홍색 돼지에 가깝다. YLD 돼지가 그것이다. 요크셔(Y), 랜드레이스(L), 듀록(D)을 삼원교배하여 길렀다는 뜻이다. 각 돼지의 장점을 합쳐 놓은 방식이다. 병에 강하고 번식력이 좋으며, 성장이 빠른 데다가 고기 맛도 좋은 품종을 뒤섞어 놓았다. 그러나 이런 장점을 쏙쏙 뽑았을 뿐 최고의 고기 맛은 아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 세 품종 중에서 고기 맛이 제일 좋기로 유명한 듀록 종을 단독 혈통으로 생산하는 경우도 있다. 듀록은 돼지의 본고장인 유럽에서도 고급 종으로 꼽힌다. 갈색을 띤 황금색으로 고기가 찰지고 맛있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삼원교배종의 대세에는 한참 못 미쳐서 시중에서 구하기는 아주 어렵다. 역시 가격과 생산성이 문제인 것이다. 또 외래종이지만 고기 맛이 좋고 까만색의 털빛을 지니고 있어 친숙한 국내 흑돼지로 오해받기도 하는 버크셔도 있다. 이 종은 사실상 국내에서 생산되는 흑돼지 혈통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일반 돼지에 버크셔 피가 섞여 있는 셈이다. 순종 버크셔를 길러내는 곳도 있다. 그러나 대세에 밀리고, 특히 가격이 비싸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우리는 삼겹살만 지나치게 선호하는 것뿐 아니라 돼지 품종이 단순한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다채로운 품종이 시중에 깔려서 골라 먹을 수 있으면 좋을 일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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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처럼 냉면이 화제가 된 적이 드물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오던 ‘노포’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냉면집들이 속속 등장했다. 냉면에 대한 새로운 시장층이 생겼다. 젊은이들이다. ‘밍밍하기만 한’ 평양냉면 육수의 맛을 음미하고 이해하려는 세대가 생겨난 것이다.

 

인터넷이나 방송을 통해서 ‘냉부심’(평양냉면의 맛을 안다는 자부심)이라는 말도 유행했다.

 

냉부심(?)의 기준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앞서 말한 특유의 육수 맛을 감지하는 것이다. 매콤 새콤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알 듯 모를 듯한 풍미를 사랑하는 능력이다. 시쳇말로 ‘행주 빤 물’ 같다는 혹평의 그 육수가 맛있어지는 단계다. 다른 하나는 메밀 함량이 높은 면에 대한 애호다. 그동안 메밀 값이 비싸고 구하기 어려워서인지 평양냉면이라고 이름붙이고 실은 전분과 밀가루로 만든 면에 메밀은 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메밀 함량은 1920년대 한 신문에도 “평양냉면은 오직 메밀로만 만든다”는 탐방 기사가 실릴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배합법이다. 메밀은 실은 전국 어디서나 심어 먹던 작물이었다. 특히 비나 가뭄으로 농사를 망쳤을 때 좋은 대안이었다.

 

여름에 심어서 가을께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농사가 제일 중요했던 당시, 여름에 벼 포기가 픽픽 쓰러지고 메밀이라도 심을 수 없었다면 어떻게 가을과 겨울을 넘겼을까 끔찍한 일이다. 또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에게 메밀은 아주 좋은 작물이었다. 쌀농사는 안되고, 거친 토질에도 ‘가루’나 ‘쌀’(메밀껍질을 벗긴 상태를 녹쌀이라고 하여 쌀의 대용임을 의미했다)을 주는 메밀의 효용은 상상 이상이다. 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메밀은 녹화사업 등의 목적으로 화전이 금지된 후 생산량이 줄어들고, 쌀과 밀가루가 풍부해지면서 더욱 하락세를 보였다. 시내 냉면집에서 전분에 보릿가루 태운 것을 섞어 가짜가 나왔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다. 메밀이 비싸서 생긴 일이다. 요즘은 비교적 싼 수입 메밀이 많아서 함량 자체는 많이 올라갔다. 그래도 메밀은 밀가루나 전분에 비해 고가의 곡물이어서 풍족하게 쓰기 어렵다.

 

올해 메밀 농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 메밀은 이제 구하기 어려운 작물이 아니다. 잡곡으로서 매우 가치 있게 팔린다. 메밀을 많이 넣은 평양식 냉면의 인기 확산도 한몫한 듯하다. 메밀 산지는 세간에 알려진 강원도를 넘어서 전국에 분포하는데, 제주 메밀이 양도 질도 충족시키고 있다. 다만 경관작물이라고 하여 메밀꽃 피는 환상적인 광경을 보기 위해 연작을 장려하다보니 알곡이 작아지는 등 메밀 자체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한겨울에는 꼭 평양 같은 관서지방이 아니어도 메밀로 전병 부치고 수제비를 뜨던 음식문화가 있었다. 메밀이 가장 맛있을 때가 수확 지나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꼭 냉면이 아니어도 시식(時食)으로 메밀을 다채롭게 먹을 수 있다. 우리 민족 음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메밀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면 좋겠다. 아아, 한겨울 메밀묵 장수가 팔던 걸 사서 신김치 얹어 먹고도 싶다. “메밀무욱! 찹싸알떡!”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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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사람들은 내게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법을 묻곤 한다. 그곳에서 살아봤으니 특이한 여행법을 추천해달라는 거다. 내 답은 거의 비슷하다. 로마, 피렌체, 밀라노와 베네치아 말고 작은 도시를 가보라고 권한다. 소박한 이탈리아의 삶을 볼 수 있으니까.      

   

또 하나는 사그라(sagra)에 참여해보라고 한다. 사그라는 작은 축제를 의미하는데, 대개 음식을 주제로 연다. 우리로 치면 면 단위 정도의 작은 마을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행사를 치른다. 이탈리아도 지방의 노령화, 젊은 인구 부족 현상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런 작은 축제를 열면서 여전히 마을의 과거와 미래를 이으려는 노력을 한다.   

 

 

개구리(물론 식용이다) 축제나 통돼지구이처럼 흥미로운 주제도 있지만 남들이 보기에 별거 아닌 것도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양파나 파, 고추, 가지 같은 것이 주제가 된다. 축제라고 해서 큰 기대를 하고 갔다가는 실망할 수도 있다. 그저 밤을 까서 케이크를 굽거나, 콩으로 수프를 만들고, 거친 옥수수로 죽을 끓이고 동네에서 나온 와인이나 두어 잔씩 돌린다. 그래도 행사는 흥겹고, 신난다. 번듯하고 멋진 축제는 아니지만 각자 마을에서 잘하는 것, 많이 생산되는 것, 맛난 것을 내놓고 같이 즐기기 때문이다. 소박한 축제인데도 은근히 관광객이 많이 온다.      

 

치즈 축제가 많은데, 치즈란 우리의 장과 같아서 손맛, 지역의 조건에 의해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굳이 이걸 맛보겠다고 멀리서 사람들이 모인다.     

 

사그라를 하는 건, 사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고된 노동과 평범한 일상을 사는 동네 사람들이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이다. 화려하고 잘사는 동네뿐 아니라 변방의 소읍에서도 떳떳하게 자신의 존재를 말하는 무대다. 그참에 지역을 떠난 사람들도 돌아와 반가운 만남의 장이 되기도 한다.        

 

우연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양동면 양평부추축제’라는 작은 포스터를 봤다. 양동면이라는 지명도 초문이고 축제 주제도 그랬다. 하나 오히려 번듯하고 폼 나는 유명 축제가 아니어서 눈길이 갔다. 큰 예산이 투입되고, 어마어마한 홍보를 하는, 지자체 수장의 선거운동 비슷한 관제 축제가 좀 많은가. 외부 기획사에 큰돈 주고 행사를 맡기고, 정작 주민들은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그런 축제 말이다. 축제의 주체는 관도, 관광객도 아니다. 자발적인 주민이 주인이다. ‘겨우’ 부추 축제라니. 이런 소박함에 절로 흐뭇했다. 양동면은 알고 보니 양평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다. 인구가 고작 4500여명에 그나마 대부분 ‘초’노인들이다. 그런데도 작년에 부추 농가가 똘똘 뭉쳐 첫 번째 축제를 치러냈다. 그 흔한 부추로 말이다.      

 

마치 옛날 추수 뒤 잔치처럼, 깃발 들고 노래 부르면서 흥겨웠다. 농촌은 언젠가부터 대책 없는 ‘미래’로 치부됐다. 노인들만 남아서 그들 이후의 사정은 서로 책임을 미루거나 공허한 슬로건만 떠들고 있다. 노인들이, 부추 심는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다시 축제를 연다. 마음 한구석이 싸해진다. 내일 아침 10시에 양동역 앞에서 개막해서 일요일 저녁까지 축제가 이어진다. 부추전도 부쳐 먹고, 올 때 싱싱한 부추 한 상자 사서 돌아오면 좋을 여정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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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취재하느라 오징어잡이 배를 탄 적이 있다. 하룻밤을 먼바다에서 보냈는데 정작 취재는 하지도 못했다. 뱃멀미에 속이 뒤집혀 자그마한 선실에서 끙끙 앓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파도가 밀어닥쳐서 뱃전을 때릴 때마다 배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했고, 내 내장까지 울림이 전해졌다.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당장이라도 출어를 중단하고 귀항해야 할 것 같은데도 작업 선원들은 오징어가 걸려오는 주낙만 바라봤다. 생과 사 같은 건 그들에게 호사스러운 용어였다. 잡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다는 단순한 현실에서 파도 따위야, 이런 태도였달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선은 어지간하면 출어한다. 해경에서 출어금지령이 내리기 전에는 태풍이 온다고 해도 하늘을 본다. 혹시나 나갈 수 있을까 출어를 가늠한다. 선장은 빚내서 얻은 배 값 상환이 걱정이고, 선원은 출어를 못하면 벌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한때 만선이 흔하던 시절에는 목돈도 만졌다고 한다. 선원들 얘기는 하나같이 “옛날에는 말이야”로 시작한다. 고기가 너무 많아서 실을 곳이 없어 바다에 일부 버리고 갔다고도 한다. 이제 어지간한 연근해에는 고기가 드물고, 잡는 일도 만만치 않다. 잘 잡히면 경락가가 떨어지고, 안 잡히면 그건 그대로 빈손이 된다.

 

선장들은 “배 팔아치우겠다”고 하고, 선원들 다수는 “이번이 마지막 출어”라고 한다.

‘만선의 기쁨’ 같은 말은 언론에서나 쓰는 사어(死語)다. 시장에서 장을 보는 요리사들도 다 안다. 고기가 점점 볼품없다는 것을. 고기 몇 마리쯤은 덤으로 주던 인심도 사라졌다. 수산시장 경매장에 가보라. 냉동 수입 수산물을 쌓아놓고 파는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고 있는지. 아프리카, 인도양의 여러 나라들, 심지어 수산업 같은 건 할 것 같지도 않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의 이름도 보인다.

 

펄떡펄떡 뛰는 생선은 거의 양식이고, 고깃배가 잡은 생선을 넣은 나무상자는 왜 그리도 초라하게 보이는지. 농사는 뼈 빠지게 지어도 자재값 안 나온다고 한 지 오래고, 수산업도 몇몇 양식업이나 모를까 영세한 소형 어선으로 그물이나 낚시를 당겨봐야 출어비도 안 나온다는 푸념이 가득하다. 국민소득 3만달러짜리 나라의 돼지 축사에서 똥 치우다가 질식사하는 어이없는 사고가 벌어지듯, 바다에서도 먹고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일들이 늘 벌어진다. 며칠 전 포항 앞바다에서 붉은 대게잡이 어선이 사고를 당했다. 사고 조사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한 푼이라고 건져야 하는 처지에 어지간한 파도는 뚫고 가는 게 그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다른 배들이 오늘도 삼면의 바다와 저 먼바다로 나간다. 생명보험도 잘 안 받아준다는, 이른바 ‘극한직업’을 가진 이들이.

 

다시 우리 밥상에 올라온 생선과 여러 재료들을 생각하게 된다. 밥상은 목숨 건 노동의 결과물이 분명할 텐데, 그 내력을 외면하는 까닭은 우리의 이기심이 너무 깊은 때문인가. 아니면 무심해진 것일까. 그들의 고통에 호응하고 대면할 수 있는 용기는 없는 것일까. 얼마 전, 붉은 대게잡이로 사고를 당한 배의 이름은 광제호다. 27t짜리 소형 어선이었다. 유명을 달리한 선원의 명복을 빌고, 아직도 마치지 못한 실종자 수색이 성공하기를 빌 뿐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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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언젠가 이 칼럼에서 달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완벽한 한 생명(우리는 이것을 완벽한 영양으로만 표현한다)의 값치고, 우리가 달걀을 너무 싸게 먹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달걀값은 한 판에 4000원대에도 거래됐다. 한 알에 130.40원짜리였다는 말이다. 지나치게 싼 것은 의심해보라는 건 진리다. 우리는 전자제품이나 다른 상품을 살 때 이런 원칙을 잘 적용한다. 반품이나 진열했던 것은 아닌지, 심지어 핵심기능을 빼고 출시한 저가제품은 아닌지도 꼼꼼히 따진다. 전자제품이나 기타 상품은 ‘먹을 수도 없는 것’인데 그토록 치밀한 분석을 한다. 영화 칼럼에도 심지어 ‘적정 관람료’라는 게 나온다. 영화가 돈값을 하는지 분석해주는 내용이다. 적정 달걀값은 우리에게 없었다. 더 싸게 무한정 공급되는 달걀의 속사정을 챙겨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두 번의 폭탄을 맞았다. 이미 우리 기억에도 희미한, 조류인플루엔자(AI)로 인한 살처분으로 산란계가 대폭 줄면서 달걀 공급에 비상이 걸렸다. 달걀값이 오르고 ‘더 이상 달걀은 싼값에 펑펑 쓸 수 없는 재료가 되었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때 우리는 이미 강력한 옐로카드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얼른 어린 산란계가 커서 달걀을 쑥쑥 낳아 가격이 안정되기만을 기다렸다. 환부가 곪고 있는데 수술은커녕 팔다리만 주무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 가혹한 시련은 예비되어 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직면한 식품의 위기다. 달걀의 위기는 어떤 경고의 상징이다. 달걀만의 사정이 절대 아니란 뜻이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서 여전히 논란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돈과 사람의 선순환을 믿고, 최저임금에 인간의 이름을 붙이고자 애썼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다수의 지지가 생겼다. 달걀값도 ‘최저 가격’이 있을 것이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런 환경은 보장해야 닭이 건강한 알을 낳는다”는 기준이다. 그 원칙을 준수하려 하는 곳이 바로 여러 생협이다. 불행하게도 어떤 생협이 미처 대비할 수 없었던 문제로 실수가 있었지만, 그것을 빌미로 생협의 노력을 절대 폄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닭과 달걀의 건강에 대해, 동물복지에 대해 말하지 않을 때 거의 유일하게 고민하고 노력해온 집단이 바로 생협이기 때문이다. 이번 문제를 빌미로 달걀 시장을 노려온 대기업들에 기회를 주고 있건 아닌지 우려된다. 좋은 달걀을 위해 애써온 그들의 노력을 일거에 폄하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의 먹거리 문제를 진실로 접근해온 집단이 여러 생협 말고 어디 있었는가 다시 상기할 시점이다. 생협에 대해서는 각자 한발 더 가까이 가서 공부해야 할 것이겠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하고 싶다. 생협이란 생활협동조합의 준말이고,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으며, 그 조합원이 주인인 조직을 말한다. 달걀 파동의 참담한 현실에서 다시 생협을 생각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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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제도의 변천사까지는 아니어도, 대학 입시가 얼추 어떻게 변해왔는지는 안다. 본고사에서 예비고사,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이름만 바꿨지 그다지 쓸모 있는 학생 고르는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억하건대 가장 웃기는 건 체력장이었다. 고입 연합고사 200점 만점에 20점, 대입 학력고사 340점 중에 20점이 이른바 체력검정 점수였다. 체력으로 점수를 매기고, 그것이 당락에 영향을 준다는 건 상당히 불공정한 게임이다. 그래서 감독 선생님들은 어지간하면 20점 만점을 주기 위해서 ‘적당히’ 채점을 하곤 했다. 문제는 신체장애인 친구들이었다. 장애 때문에 검정을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선심 쓰듯 15점이라는 기본점수를 주는 게 고작이었다. 참말 어른들이 저지르는 개 같은 경우의 제일 윗길에 오를 처사였다. 얼렁뚱땅 뛰어도 대개는 20점을 받는 상대들에게 5점을 까고 들어가는 경쟁이 얼마나 불리했겠는가. 요즘 같으면 당장 인권위원회에 고발당할 사안이 아닐까.

 

그때 학력고사는 실업 과목이 필수였다. 여러 산업 중에서 선택했다. 대개는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상업, 공업을 골랐다. 전국적인 대세였다. 돈 계산하는 상업과 제품 생산하는 공업이 제일 유망한 실업이었으니까. 바닷가 도시나 농업 지역에서 간혹 수산업과 농업을 선택하는 학교가 있는 정도였다. 광업은 사양산업이어서 극소수의 학교에서나 골랐을 뿐이었다.

 

내가 다니던 서울의 학교는 당연히 상업, 공업이었으나 나는 농업을 골랐다.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는 재수생 형이 농업을 공부하는 걸 보고 자유 선택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던 것이었다. 교과서도 없어서 종로서적에서 간신히 참고서를 구했다. 그날 밤, 나는 그 책을 펴들고 밤을 새웠다.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였다. 내가 먹는 닭과 돼지, 쌀과 보리와 감자, 호박과 사과와 포도의 ‘이력’이 빼곡하게 들어 있는 엄청나게 재미있는 책이었다. 닭의 산란을 촉진하기 위해 밤새워 불을 켜두거나, 돼지를 겨우 1년만 길러서 잡는다는 기술을 읽으며 마음이 아팠다. 소나 말이 새끼를 사람보다 더 오래 품는다는 걸 알고 그 어미들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다.

 

달콤한 포도 한 송이를 잘 기르자면 일년 내내 가지 치고 비료 주고 솎아내는 고단한 노동의 연속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내 입에 들어오는 모든 것의 역사를, 말하자면, 농업 교과서가 일러주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시험 당일, 다음과 같은 손쉬운 문제를 틀려버렸지만.

 

문)다음 중 자두나무를 고르시오. 그러고선, 지문으로 비슷비슷한 나무의 실루엣이 그림으로 나와 있었다. 자두나무를 실제로 본 적이 없는 내게는 너무도 어려운 문제였다. 나는 참고서 한 권으로 농업을 배웠지만, 평생 그 여운이 남아 있다. 쌀 한 톨이나 고기 한 점의 이면을 보는 시선을 갖추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 그 시절, 농업 교과서를 쓰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컴퓨터와 인터넷, 인공지능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학교 실업 교육에서 절대 빠뜨릴 수 없는 것일 테다. 그렇지만 도시에 살든, 농촌 학생이든 농·축·수산업을 배우는 일은 무효한 것이 절대 아닐 것이다. 먹어야 사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훌륭한 ‘무엇’이지만 먹을 수는 없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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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20여년 전 유럽에서 겪은 일이다. 가을에 포도 수확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모인 노동자들이 대부분 타국에서 왔다. 포도는 제때 수확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는 일이라 일시적으로 손이 많이 필요하다. 자국의 손이 부족하니, ‘차떼기’로 외국 노동자들을 실어날랐다. 이미 노쇠해가고 있던 서부 유럽 노동시장의 한 단면이었다. 지금 한국도 다르지 않다. 농축수산업 모두 외국인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바닥 일을 맡고 있다.

 

 

최근의 에피소드 한 대목. 봄에 남도의 어느 항구에는 멸치잡이 배가 들어온다. 엄청난 숫자의 미디어가 취재경쟁을 벌인다. 아마추어 사진가들까지 몰려 북새통이다. 멸치를 잡아오면 배를 붙이고 그물에서 털어내는 장면이 인기가 높다. 현장 촬영은 늘 애를 먹지만 더 큰 어려움이 있다. 그물 터는 어부들을 생생하게 잡아야 하는데 이들이 거의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한국 어항을 묘사하는데, 카메라 앵글 속에 한국인이 드물어서 ‘그림이 안된다’는 뜻이다. 그물 터는 노동이 워낙 힘들기 때문에 원래 노동요를 부르면서 고통을 잊곤 했다. 요즘은 이런 노래도 듣기 어렵다.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이 ‘그물 후리는 소리’ 같은 전통 민요를 알 리 없기 때문이다. 이미 수산업도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세상이 됐다.

 

봄에 남도 어느 바다에서 정치망어업을 취재했다. 놀랍게도 고용된 노동자 전원이 외국인이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출신 어부들이 우리 손을 대신하고 있었다. 오직 배를 모는 선장만 한국인이었다. 매일 두세 번 물때 맞춰 고기를 잡아오는 단조로운 노동을 할 한국인이 없다고 했다. 원양어업이든, 연근해어업이든 양식장까지 대개 외국인 노동자가 고기를 잡고 기른다. 농업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충청도의 옥수수 수확 현장에 갔더니 역시 노동자 전원이 몽골과 태국 출신이었다. 땡볕에서 옥수수를 꺾고, 손질해서 자루에 담아내는 과정을 모두 외국인이 치러냈다. 우리가 상상하는 목가적인 전원이나 농장의 풍경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며, 그 현장의 손도 외국인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우리 입에 들어가는 온갖 작물들, 과일이 이미 외국인 노동자의 공력으로 길러진다. 돼지와 닭, 소도 마찬가지다. 특히 축산업은 내국인들에게 기피 일터다. 노동 강도가 엄청 세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 있는 곳에 불법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농축수산업도 마찬가지다. 장시간 노동과 임금 체불, 불법 고용 같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한때 우리의 아픈 상처였던 “사장님 나빠요”는 음식물을 만들어내는 기초 시장에서도 어른거린다. 농업의 경우 최저임금 미만이 허다하다. 아마도 이들이 없다면 농작물 가격은 급격히 오를 것이다. 이런 사정을 핑계 삼아 열악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힘들기로 유명한 어업과 축산 쪽이 임금이 나은 편이지만 그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노동 강도가 존재한다. 

 

우리는 쌀을 제외하면 5% 안팎의 식량 자급률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다. 그나마 그 적은 수치의 ‘국내산’조차 외국인 노동자가 지탱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즐기는 밥상을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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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아마 요즘처럼 냉면이 화제가 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냉면에 대해 따따부따한다고 해서 ‘면스플레인(면+explain)’이라는 부정적 뉘앙스의 신조어도 유행한다. 평양(식)냉면이 진짜 냉면이라는 경도된 생각이 이른바 미식가나 ‘좀 먹어주는’ 애호가들 사이에서 퍼질 정도다. 평양냉면이 냉면의 시대를 연 것은 맞다. 동시에 세계에 퍼져 있는 우리 민족은 제각기 냉면을 먹고 있다. 다른 조리법과 다른 맛을 가진 상태로 말이다.

 

저 멀리 일본 북쪽, 모리오카라는 지방도시에서도 그렇다. 인구가 13만명이라는 이 작은 도시에서는 자그마치 450여군데의 식당에서 냉면을 판다. 한국식(조선식) 또는 평양식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그중에서 우리 동포가 문을 열어 수십년의 역사를 가진 집만도 여럿이다. 삼천리, 명월관, 식도원, 뿅뿅사, 성루각….

 

모리오카에는 3대 명물 면이 있다. 완코소바, 자자멘, 그리고 냉면이다. 단연 냉면이 가장 일상적인 음식으로 유명하다. 한국식 불고기집(야키니쿠)에서는 어디든 냉면을 팔기 때문이다. 1954년, 함흥 출신 재일동포가 우연히 이 도시에 이주하여 먹고살기 위해 ‘식도원’이라는 불고기집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그의 차남 아오키(靑木)에 의해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후발주자인 여러 동포들의 식당에서 냉면을 다루면서 널리 퍼졌다.

 

우리 혈통에 의해 냉면의 씨앗이 움튼 것이다. 이 지역민들은 이 냉면을 ‘헤이조 레이멘’이라고 부른다. 헤이조는 평양(平壤)의 일본식 발음이다. 물론 모리오카 시민의 입맛에 맞게 개량되면서 평양식과는 사뭇 다른 맛으로 현지화되었다. 그러나 냉면 면발과 육수에 깃든 혈연적 유전자는 여전히 살아 있다. 육수라는 한국어를 쓰고 있으며 깍두기 같은 것을 담가서 면에 올려 먹는다. 분틀을 써서 압출하는 식의 제면법도 우리와 똑같다.

 

모리오카 냉면 맛을 처음 본 한국인은 평가가 엇갈리기도 한다. 한국의 평양냉면과 달리 면발이 쫄깃하기 때문이다. 메밀 대신 전분과 밀가루로 면을 뽑는 까닭이다. 기실 서울의 평양냉면도 이미 서울화된 것이니 제각기 뿌리내린 곳에서 다르게 변화해 왔다고 해야 맞다.

 

당대의 북한식 평양냉면은 면발이 상당히 쫄깃하다. 식초와 겨자도 듬뿍 친 육수의 맛은 자극적이다. 서울에서 유행하는 냉면과는 다른 맛이다. 그러니 서울사람들에게 표준화되다시피한 ‘슴슴한 육수와 툭툭 끊기는 메밀면’이라는 공식은 오히려 ‘오리지널’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많은 남한 사람들이 평양과 금강산, 개성에서 냉면을 맛볼 수 있었다. 남북관계가 유연했을 때의 이야기다. 옥류관과 평남면옥, 유경호텔과 고려호텔의 냉면 맛이 회자되었다. 어쩌면 남북관계는 냉면을 통해서 다시 복원될지도 모른다. 냉면세계대회 같은 건 어떨까. 모리오카와 미국과 중국, 남북한의 냉면이 다 모이는 일은 대단히 재미있을 것 같다. 모리오카 냉면을 먹으면서 든 생각이다. 도대체 우리에게 냉면이란 무엇인가 하는 쩌릿한 감동 같은 것이었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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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을 보면 흥미로운 광고가 많다. 계절에 따라 주력 물건도 바뀌었다. 1960년대는 전후의 혼란을 딛고 안락한 가정에 대한 욕망이 극대화되던 시기였다. 겨울에 난로 선전(예전에는 상업적인 광고물도 주로 선전이라고 불렀다), 여름에는 아이스박스였다. 냉장고는 1965년도에 금성사에서 눈표라는 이름으로 첫 제품을 출시했는데, 한동안 아이스박스와 같이 팔렸다. 냉장고는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아이스박스는 1980년대까지도 가난한 집 부엌과 포장마차의 냉장고 노릇을 했다. 동네마다 얼음장수가 까만색 짐자전거에 얼음을 잔뜩 싣고 배달하던 장면도 생각난다. 재미있는 건 그들이 겨울에는 석유, 여름엔 얼음을 팔았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될 일이다. 이런 ‘양수겸장’업은 일본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우리에게 근대를 강제 이식한 일제의 영향력은 그처럼 오래갔다.

 

 

우리 집은 1980년대 초에 냉장고를 샀다. 그 전까지 부엌에는 찬장과 아이스박스가 여름을 지켰다. 얼음 50~100원어치면 하루를 버텼다. 스티로폼으로 형을 짜고, 겉에 시원한 느낌의 푸른색 비닐을 입힌 저가의 아이스박스였다. 고급형은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제품이 있었다. 어쨌든 아이스박스의 냉기를 오래 보존하려고 묘안을 짜내는 게 엄마의 일이었다. 국이나 찌개, 뜨거운 반찬을 만들면 차가운 펌프 물에 식혀서 넣는 건 기본이었다. 여름을 나면, 대개 아이스박스는 집 안 구석으로 밀려났다.

 

우리나라만 아이스박스를 쓴 건 물론 아니었다. 1960년대까지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의 더운 지역에서는 아이스박스가 고정식 부엌 가구로 사용되었다. 부엌에서 길 밖으로 문을 달아 장사꾼이 부엌 안으로 얼음을 쏟아넣고 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나중에 나온 고급형 아이스박스는 냉장고처럼 생긴 모양이었다. 냉기의 특징, 그러니까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효과를 이용하기 위해 나무와 철로 짠 틀 위에 얼음을 넣도록 고안했다.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사가 가정용 전기냉장고를 양산할 때, 그 모양은 사실 얼음 넣는 아이스박스와 암모니아 가스를 이용한 구식 냉장고를 모방했다고 한다.

 

냉장고의 보급은 우리 삶의 그림도 다시 그리게 만들었다. 집집마다 냉장고를 갓 사들이던 1970년대의 여름은 가루주스가 대유행했다. 미제장수가 파는 오렌지맛 가루를 찬물에 타서 얼음을 띄워내는 게 중요한 접대였다. 나중에 국산이 나와서 수요를 크게 늘렸는데, 남대문 도깨비시장이나 미제장수가 취급하는 물건만 못했다. 이미 설탕이 꽤 들어 있는 제품인데도, 백설탕을 듬뿍 넣고 냉동고에서 ‘직접’ 얼린 얼음을 넣어 만든 그 주스는 한 시대를 풍미했다. 아이들 간식으로 ‘아이스바’를 만드는 것도 유행을 탔다. “이제 사지 말고 집에서 직접 만들어 드세요”라는 선전 문구에 다들 아이스바를 만드는 틀과 속을 채울 가루를 샀다. 그 인기는 물론 오래가지 않고 시들해졌다. 아빠가 퇴근길에 사오는 유지방이 듬뿍 든 ‘정통’ 아이스크림 맛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냉장고는 점점 더 커졌고,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이든 무엇이든 그 공간을 꽉꽉 채우는 재미로 여름을 났다. 요즘은 전문 요리사에게 냉장고를 ‘부탁’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엄마가 지성을 들여 관리하던 옛 아이스박스가 새삼 생각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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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이십여년 전 회사 다닐 때 여름이 오기를 늘 기다렸다. 딱 이맘때다. 해지면 호프집 앞에 깔리는 임시 탁자에서 마시는 한 잔의 생맥주 때문이었다. 7월이 무르익으면 해가 져도 무덥다. 그래서 딱 이즈음이다. 날씨는 선선하지도 덥지도 않지, 목은 마르지, 생맥주 마시기에 그만큼 좋은 조건도 없다. 안주야 북어나 치킨 몇 조각이면 그만이었다. 시내 곳곳, 아니 전국이 요즘 야외 생맥주 대목이다. ‘야장’이라고도 부른다. 업계에서는 전문(?) 용어로 ‘야장 깐다’고 한다. 밤에 탁자 깔고 장을 벌인다는 뜻이겠다. 생맥주 가게는 요즘이 대목이다. 한 해 벌이의 상당 부분을 이때 벌어들인다고도 한다. 문제는 불법 논란이다. 도로는 시나 나라 것이니 무단점유가 되고, 식품위생법에도 저촉된다. 영업허가 조건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영업장의 허가된 장소란 합법적인 공간에 지은 물리적 실체만을 뜻한다. 영업하면서도 늘 불안하다. 차라리 적당한 액수의 도로 점유비를 내고 허가를 받아 장사하고 싶어한다. 법적인 해석과 뒷받침이 필요하고 다른 업종 가게와의 이해관계도 조절해야 한다. 생각보다 상당히 복잡하다. 그래서 매년 어정쩡하고 찜찜하게 야장을 까는 업주들의 속은 불안에 떤다. 벌어먹어야 하는 업주 사정에 보면, 안타깝다. 법의 엄정함에 비추면 또 이게 불법인 경우가 많으니 참 답답하다.

 

서양은 어떤가. 본디 광장 문화가 있는 유럽은 카페가 발달했다. 카페란 대개 음식도 같이 판다. 우리 시각에서 보면 그냥 레스토랑이다. 광장 옆이나 골목의 카페와 레스토랑이 도로를 점유하고 영업할 수 있도록 잘 설계되어 있다. 도로 점유비를 받고 합법적으로 영업한다. 카페는 단순히 영업장이 아니라 일종의 공공성을 띤다는 개념이 들어 있다. 목을 축이고, 고픈 배를 채울 수 있는 공간으로 시민에게 기능하기 때문이다. 타이베이에 가면 주랑(柱廊)이 도시 곳곳에서 보인다. 도로와 건물 사이에 기둥을 세우고 비와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구조물이다. 주랑 건축 비용은 건물주가 낸다고 한다. 대신 그 주랑으로 인해서 생긴 공간을 활용한다. 이곳에 탁자를 깔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실 수 있다.

 

도시 설계의 개념이 달랐던 우리는 이 지점에서 차이가 생긴다. 주랑을 깔 공간도 없고, 인도는 좁다. 그래도 생각을 달리하면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다. 나는 서울의 몇몇 ‘야장’은 명물로 밀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을지로의 생맥주 골목이나 종묘 옆 고기골목을 처음 구경한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입을 떡 벌렸다. 현실세계 같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외국인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열광한다. 고급스러운 공간을 외국인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보면 오산이다. 그들은 오히려 이런 서울만의 그림에 미친다. 여행을 마치고 제일 좋았던 경험을 꼽으라면 대개는 그 야장의 기억이다. 원컨대, 이런 공간을 키우겠다고 나설 일도 아니다. 법적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골목 앞에 커다랗게 아치문을 세우고 ‘○○문화의 거리’라고 명명하는 것만 안 하면 된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이런 골목들을 살릴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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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1900년.’

요새 식당가 간판의 한 풍경이다. 오래된 식당이 좋다는 믿음을 이용한 마케팅이다. 보통 노포(老鋪)라는 한자어를 많이 쓴다. 노(老)자는 안정감을 주고 신뢰를 드러낸다. 중국어와 한자어에서도 이 글자는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존경의 의미를 담는다. 오랫동안 살아남은 것 자체가 믿음이 된다. 생각해보라. 우리나라에서 100년 넘은 식당은 한 개 정도가 겨우 명맥을 잇고 있으니까 말이다. 해방 전에 생겨서 지금껏 운영하는 집도 대여섯 개나 될까 모르겠다. 1970년대에 식당이 많이 생겼지만, 지금껏 하고 있는 집이 드물다. 그래서 1970년대생 식당들은 나이로는 장년에 불과하지만 모두 노포 축에 든다. 왜 그럴까. 이 동네에서는 이렇게 추측한다. 첫째, 힘든 일을 자식 대에 넘기고 싶지 않아서 폐업했다. 그렇다. 식당은 험한 직업이다. 자식이 같은 일을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도울라치면 “너, 가서 공부해!” 하고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노포를 이어받아 하는 2세들은 기억한다. 식당 집 자식. 별로 ‘있어 보이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대를 물리지 않았다. 그렇게 스러진 노포가 많다. 1960~70년대에 생긴 노포가 많았던 피맛골에서 장사했고, 나중에 포클레인에 쓸려갈 때 피맛골 지키기 모임에 활동했던 한 식당주와 통화했다. 그는 “이제 그만하련다. 자식에게도 시키지 않겠다”고 하고는 정말 문을 닫아버렸다. 50년이 넘는 피맛골의 터줏대감이었는데.

 

 

한때 식당을 두고 말하던 농담이 있다. 장사가 잘되면 주방장 겸 사장이 요리를 놓고 카운터에 나가서 계산을 맡는다. 그것도 잠시, 잘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자가용 타고 땅 보러 다닌다는 얘기였다. 고되고 거친 식당보다 땅을 사두는 게 이익이었던 시절의 우화다. 실제 그런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 하루 종일 허리를 학대해가며 주방에서 서 있는 걸 원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최근 서울시에서 노포를 보존하고 앙양하는 사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식당뿐 아니라 오래된 모든 가게가 대상이 된다. 비로소 세월을 안고 살아온 노포를 인정해주는 분위기다. 하나 인증제도에 어려움도 있다. 상당수 가게가 입증 자료가 부실하다. 당연하게도 노포가 이렇게 각광받을 줄 몰랐으니 사진 자료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의심스러운 노포’도 있다. 아무 근거 없이 ‘3대를 내려왔다’느니, ‘60년이 되었다’느니 주장한다. 어찌 되었든 변하는 시절을 드러내는 일화다. 오래된 것은 골동이 된다는 사실이 ‘대물림 가게’라는 정신적 의미까지 확장될 줄이야.

 

노포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가게도 많다. 무한경쟁에서 버텨낼 수 없는 다수의 식당들이다. 자료를 보니, 서울 시민은 1000만명이고 식당 숫자는 11만개가 넘는다. 식당 이용 가능 인구를 1000만의 3분의 1로 잡으면, 식당 하나당 서른 몇 명꼴이다. 살아남는 게 버거운 세상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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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5·18이었다. 이걸 그냥 날짜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대통령까지 행사에 참석해서 젖은 눈으로 노래를 불렀다. 지난 두 정권에서 이른바 합창이냐 제창이냐며 말도 안되는 논란이 벌어졌던 그 노래 말이다. 노래는 정서적이며 정치적이며 선언적이다. 그래서 두 정권의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들이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은 건 당연하다. 5·18의 핵심 당사자 전두환과 두 대통령은 사실상 한몸이기 때문일 테다. 민족미술 진영에서는 이 피어린 항쟁과 관련해서 많은 예술품을 남겼다. 이른바 최근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의 직접 피해자 홍성담 화백이 주도했던 민족해방운동사라는 걸개그림도 그중 하나다. 이 거대한 그림 중에 ‘광주항쟁’이라는 부분이 있다. 계엄군과 맞서 싸우는 청년들 뒤로 ‘아짐’들이 불을 때서 밥을 하고 있는 장면이 한복판에 그려져 있다.

 

모든 투쟁은 연료와 동력이 필요하다. 먹어야 싸운다. 누가 그 밥을 만드느냐도 중요하다. 아마도 저 화가들은 민중의 지지를 상징하는 의미로 밥솥과 하얀 이밥을 정중앙에 배치했으리라. 사건 당시 광주 사는 고등학생이었던 친구가 있다. 5·18 자료 사진이나 화면을 보면 교련복을 입은 까까머리 고교생이 꽤 많이 보인다. 내 친구도 그 현장에 가기 위해 시민군의 트럭에 올라탔다. 길가에 ‘아짐’들이 밥을 지어서 즉석 주먹밥이나 김밥을 만들어 올려주었다. 비장하고 눈물겨운 장면이었다. 내 친구는 김밥을 먹으며 금남로로 가는 도중 그만 트럭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팔을 크게 다쳤고, 시민군을 치료해주던 광주기독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았다. 어쩌면 그는 그 추락 때문에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금남로에서는 계엄군의 총탄이 날아올 무렵이었으니까.

 

김밥은 시민군의 식량이었고, 광주 시민들의 마음이었다. ‘내 새끼들 싸우는데 밥이라도 해다 나르자’는 아짐들의 가슴이었다. 김밥은 일제강점기에 소풍과 행사의 휴대음식으로 각광받은 식민의 음식이었다. 그것이 광주에서 하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맞닥뜨린 1997년의 금융위기는 다시 김밥의 시대를 열었다. 직장에서 잘리거나 하루아침에 직장이 없어진 사람들이 몇 푼의 돈으로 김밥집을 열었다. 프랜차이즈점이었다.

 

한 줄 1000원의 김밥은 편의점이 번성하기 전에 가장 싸고 간단한 식사로 세상에 파고들었다. 즐거운 소풍의 상징에서 광주의 아픔으로, 다시 낮은 노동계급과 그 자식들의 간편식으로 변해갔다. 비정규직과 취업준비생이 시켜 먹는 한 줄의 점심이 되었다.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만든 음식 중에서 가장 싼 음식이 바로 김밥인 세상이다. 한 줄 1000원에서 1500원으로 올랐지만, 여전히 놀라운 가격일 뿐이다. 한 줄 달랑 시켜놓으면 손님을 미안하게 만드는 음식이다. 쉼없이 김밥을 마는 ‘아짐’들의 임금은 얼마일까, 저 값에도 남을까, 2000원 넘는 치즈김밥이나 김치김밥을 시킬 것 그랬나, 별 생각이 다 들게 한다. 어제 행사를 보며 김밥의 기구한 운명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참, 그때 다친 내 친구야, 조만간 김밥 한 줄 나눠먹자. 옛 얘기를 다시 듣고 싶구나.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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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5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1987년 대선 즈음이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 후보 등이 나왔다. 군 부재자투표를 했다. 나는 앞길이 캄캄한 일병이었다. 부대에서는 선거 한 달 전부터 연일 정신교육을 했다. 퀴퀴한 냄새 나는 막사에 중대 병력을 때려 넣고 중대장이며 장교들이 훈시를 했다. 겁도 주고 달래기도 했다. “나 죽는 거 보려면 맘대로 찍어!” 읍소에 가까운 협박도 했다. 그들도 불쌍했다. 노태우 안 찍을 사람 손 들라고 했다. 중대원 중에 딱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김영삼 찍을 깁니다.” 부산 출신 상병이었다. 그는 그대로 ‘격리’되었다. 간부들이 돌아가며 회유하며 얼렀다. 너 때문에 다른 애들 다 죽어도 좋다는 거냐? 사단장님 특별 관심사항인 거 몰라? 그도 결국 굴복했다. 투표날이 왔다. 중대장실에 한 명씩 병사들을 불러올렸다. 인사계가 투표용지를 내밀었다. 1번 노태우 후보 찍는 난만 접은 상태였다. 기가 막히게 머리가 돌아갔다. 혹시라도 돌발적으로 2, 3번 후보를 찍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공개투표에 완전 엉터리 투표였다. 그렇게 1번을 꾹 누르고 수치심에 떠는 병사들에게 인사계는 ‘요구르트’ 한 병씩을 돌렸다. 돈 100원 하는 그 싼 음료가 표를 팔아치운 대가였다. 그것도 아마 병사들 후생에 쓰라고 나온 운영비로 산 것이겠지. 나는 그 후로 죄 없는 유산균 발효유가 보기 싫어졌다. 알토란 같은 군대 60만표가 노태우 후보 쪽에 갔다. 빵 한 쪼가리 제 손으로 사주지도 않고 말이다. 소문도 돌았다. 어떤 부대에서는 다른 후보를 찍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자 사전검열로 걸러내어 아예 버렸다고 한다. 사단장의 “100프로 1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수많은 청년들의 표를 더럽고 추악한 결과로 만들어버렸다. 결과는 아시는 바대로 노태우의 당선이었다. 그날 대대장은 개표방송을 보면서 ‘위대한 보통사람’의 당선을 밤새 축하하느라 폭음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투표에 양심을 팔아먹은 적이 한번 더 있었다. 1987년 4·13 호헌 조치 때인가 그랬다. 전두환은 민주세력의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려는 의도로 이 성명을 발표했다. 이 호헌 조치에 잇따라 국민투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호헌이냐 아니냐. 모든 장병의 가슴에 ‘호헌 찬성’ 리본을 달게 했다. 군인인지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의 사병(私兵)인지 모를 시대였다. 역시 엄청난 정신교육을 퍼부었다. 총 쏘고 야전훈련할 병사들을 올스톱시키고 막사에서 치러진 강요였다. 그때 빵이 나왔다. 봉황 두 마리와 ‘대통령 각하 하사품’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봉건시대도 아니고, 제 주머니 털어 사는 것도 아닌데 무슨 하사(下賜)인가 하고 기분 나빠했던 기억도 있다. 하긴 그는 29만원밖에 없는 인간인데, 그때도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세금 헐어서 사줬겠지.

 

대선이 코앞이다. 이제 그런 강요는 군대에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군시절의 선거는 참혹한 양심의 위배였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문신으로 마음에 남아 있다. 누굴 찍든 사람은 한 표의 민주적 권리를 자유의지로 행사할 권리가 있다. 이 단순한 권리가 짓밟혔던 역사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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