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에 해당되는 글 221건

  1. 2018.08.10 속풀이 해장 파스타
  2. 2018.07.27 불판을 바꿉시다
  3. 2018.07.13 이 청년들을 어찌할 것인가
  4. 2018.06.29 서귀포 시장의 동태 할머니
  5. 2018.06.15 함흥냉면도 있다
  6. 2018.06.01 음식과 노동
  7. 2018.05.18 기스면과 울면
  8. 2018.05.04 ‘진짜 평양냉면’은 없다!
  9. 2018.04.20 치킨제국
  10. 2018.04.06 냉면에는 남북이 없다
  11. 2018.03.23 진짜 노포도 아니면서
  12. 2018.03.09 혼밥
  13. 2018.02.23 동태찌개나 한 냄비
  14. 2018.02.05 베트남 쌀국수
  15. 2018.01.22 진짜 동치미
  16. 2018.01.05 ‘시급 7530원’과 노동구조
  17. 2017.12.22 배달소년
  18. 2017.12.08 우주에서 농사짓기
  19. 2017.11.24 고추에게 감사를
  20. 2017.11.10 김장소묘

한국에 언제 파스타가 들어왔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조선말과 대한제국 시기 열강의 공사들이 궁에 들어오고, 그들을 접대하느라 파스타가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서양 음식물을 수입한 해관(세관) 자료가 있다. 와인과 샴페인, 과자류와 국수의 수입이 있었다. 서양음식을 먹을 수 있는 근대식 호텔이 서울에 세워진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에서 구할 수 없는 물자는 주로 일본과 중국을 통해서 수입했다. 파스타는 서양인에게 중요한 음식이었다. 장기 보존이 가능하고 요리도 간편했다. 당시 어떤 조리법을 썼을지 궁금하다. 100년 넘게 흐른 지금, ‘모든 재료’가 파스타가 되기 때문이다. 당시 된장이나 간장 파스타가 있었을까. 아마도, 서양인에게 대접하는 음식이니 서양 재료여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을 것이다. 토마토소스와 고기볶음, 치즈 같은 것이 올라가지 않았을까.

 

 

지금은 우리 식재료와 파스타의 융합이 흔하다. 묵은지 파스타도 있다. 곱창을 볶아 올리기도 하고, 국물 넉넉한 떡볶이 스파게티도 팔린다. 서양재료여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파스타집이 ‘이태리면집’이니 ‘이태리백반집’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은, 이런 인식의 반영이다. 외래 것을 우리 문화에 동화시켜 독자적으로 즐기는 건 이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한때 시중의 말로 유명했던 “남이사!(남이 뭘 하건 말건!)”다.

 

파스타는 우리 음식문화에 생각보다 더 깊게 들어와 있다. 굳이 그걸 이탈리아 음식이라고 전제하는 것조차 혼란스러울 정도다. 파스타집에 가면, 국수를 먹듯 후룩 후룩 하는 ‘흡입 소음’이 자연스럽다. 이탈리아에선 없는 소리다. 여기는 한국이니까, 뭐 이런 거다. 이 소음을 일본에서는 ‘누하라’라고 해서 약간의 공론이 있다. 누들 + 허래스먼트, 즉 스파게티 먹는 소리가 남에게 괴롭힘을 준다는 뜻이다. 원래 일본 국수는 소리 내서 먹는 것이 결례가 아닌데, 파스타를 먹을 때 소리를 내는 건 교양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나온 논의다. 아직 한국에서는 이런 거 없다.

 

학교 급식에 파스타가 나온 지 오래다. 아이들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더러는 밥에 딸려나오는 반찬처럼 제공된다. 무엇이든 밥반찬으로 만들어버리는 건 일본인이 원조다. 포크커틀릿도, 햄버그스테이크도 쌀밥의 반찬으로 팔린다. 다만 “빵으로 할까요, 밥으로 할까요”는 남아 있다. 서양식인 빵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요리의 뿌리는 지켜주고 싶었던 것일까. 단체급식이 학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의 급식에도 파스타가 등장한다. 가장 흔한 건 마요네즈에 버무린 마카로니다. 마카로니 샐러드라고도 한다. 왕년에 이른바 ‘한정식’에도 나왔던 음식이다. 파스타는 밥까지 만나서 완벽하게 동양화 내지는 한국화되었다. 남은 소스에 밥을 볶아주면 좋겠다. 김가루도 넣고, 김치 다진 것도 섞어서 말이다. 한 문화는 다른 문화권으로 옮겨가면서 변형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직장인들에게 동네 파스타집의 인기 메뉴를 알려드린다. 얼큰한 속풀이 해장 파스타다. 부장님도, 이사님도 젊은 직원들 따라가서 입에 안 맞는 크림파스타 안 드셔도 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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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유럽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후배가 귀국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재미있는 대목. “그쪽 사람들이 농 반 진 반으로 한국을 안 좋아한다고 하더라. 유럽 베이컨(삼겹살이 재료다) 값을 올렸다는 거다.”

 

한국은 세계 삼겹살의 20% 정도를 소비한다. 인구 대비 엄청난 양이다. 세계 17개국 내외에서 수입한다는 것도 이제 비밀이 아니다. 돼지를 대량으로 기르는 나라는 웬만하면 한국에 수출한다. 삼겹살뿐만 아니라 비교우위에 있는 모든 부위가 해당한다. 족발, 목살, 갈비, 등뼈 등이다. 한국에선 비싼데 외국에선 헐값인 부위다. 한때 수입 삼겹살 구분법으로 ‘오돌뼈가 붙어 있느냐’를 보라고 했다. 이젠 의미없다. 한국 기호에 맞춰 뼈를 함께 잘라 정형해서 수입한다. 수입은 냉동이라고? 아니다. 냉장도 꽤 된다. 이베리코 돼지는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스페인 명품이다. 물론 여러 등급이 있기는 하다.

 

 

어쨌든 한국의 수수한 길거리 고깃집에서 이베리코를 파는 걸 보고 유럽인 관광객이 놀란다고 한다. 대개 돼지를 세세하게 잘라 정형하지 않는 유럽에서는 한국의 특정한 기호에 맞춰 이익을 낸다. 이른바 항정살, 가브리살 등이다. 일본만 해도 흔한 등심 돈가스가 약간 다르다. 한국은 등심만 튀기는 반면, 일본은 붉은 살이 섞여 있다. 바로 가브리살, 즉 등심 덧살이라는 부위다. 그래서 일본과 돈가스 맛이 다르다고들 한다.

 

황학동이라고도 하고, 청계천이기도 한 중앙시장은 원래 양곡시장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그릇과 주방설비 가게가 많다. 이곳에는 ‘불판’만 전문적으로 파는 집이 있다. 우리가 얼마나 고기 굽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주인도 총 몇 종이나 있는지 모른다. 대략 세어보면 100종이 넘는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솥뚜껑형, 사각철판형 등 모양으로 구분할 수 있고 돌, 합금, 무쇠, 스테인리스, 강철 등 소재로도 나눌 수 있다. 석쇠처럼 불꽃이 직접 닿는 형은 적은 편이다. 삼겹살은 불에 잘 타고 기름이 일어 석쇠 같은 형태는 굽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속은 안 익었는데 겉만 탄다. 야외에서 숯불 피워 삼겹살을 굽다가 낭패를 보는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석쇠는 대개 소고기용이다. 삼겹살은 사실 그리 오래된 구이 형태의 외식이 아니었다. 먹더라도 주로 찌개나 보쌈용으로 쓰였다. 한식요리를 다룬 오래된 책 어디에도 삼겹살 구이는 나오지 않는다. 1970년대 전까지만 해도 돼지고기는 잘 상해서 유통이 어렵고, 잘 익혀 먹어야 하기 때문에 구이용으로 각광받지 못했다. 가격도 싸지 않았다. 1950~60년대 신문에는 ‘공설시장 가격’이라는 일종의 물가 안내 기사가 나오는데, 부위 불문하고 소와 돼지 고기 가격이 비슷했다. 미국에서 다량의 사료가 수입되고 식용유 산업이 발달하면서 콩깻묵 같은 부산물이 흔해졌다. 돼지고기 양산시대가 열렸다. 1970년대의 일이다. 이때부터 삼겹살집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불판을 가는 문화가 없었다. 점차 위생과 건강을 따지는 손님의 요구에 맞춰 불판이 가벼워지고, 갈아주는 문화가 생겼다. 삼겹살 불판 교체를 비유로 들면서 정치개혁을 온몸으로 실천하던 분이 비통한 죽음을 맞았다. 그가 꿈꾸던 새 불판 교체는 아직도 요원하다. 시민들과 함께 삼가 명복을 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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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서울시 인구 1000만명에 식당 숫자는 12만 개가 넘는다. 식당 한 개에 80여명의 인구가 물려 있다. 서울시에 그토록 식당이 많은 건 대부분 생계형 영세업의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떡볶이집, 김밥집, 분식집, 삼겹살집, 호프집, 치킨집이 다수를 차지한다. 알다시피 이런 집들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 레드오션의 절정이고, 이른바 ‘인테리어가게 돈 벌어주는’ 조기 폐업이 다수다. 흔히 도시 노동자들의 이동 순서가 회사-삼겹살집이나 치킨집-말단 노동이라고 한다.

 

 

회사의 고용에서 밀려나면 더 가혹한 개인 경쟁상태로 내몰리고, 그마저 폐업하면 일당 노동자로 떨어진다는 얘기다. 월급생활자가 아닌 자영업자들이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던 전통적 업종들이 폐업하는 것도 이런 계층 하락의 주요 요인이다. 지물포, 페인트가게, 전기상, 세탁소, 슈퍼마켓, 문방구, 이발소 등은 이제 동네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어엿한 세탁소 사장님들은 대형 세탁체인의 말단으로 떨어지고, 슈퍼마켓 주인도 본사의 ‘현장 영업대행자’에 불과한 편의점 주인이 된다. 이마저도 이익이 안 나면 최저임금 수준의 경비원, 청소용역업의 파견직 노동자로 살아나간다. 버스나 지하철의 새벽 첫차가 얼마나 만원인지 안 본 사람은 모른다. 시내로 출근하는 말단 노동자들이 지하철을 가득 메운다. 이런 와중에 청년들 문제는 더 심각하다.

 

고용이 안되니 자영업으로 진출해야 하는데, 그 목표가 대개 카페와 술집, 식당이다(벤처는 아무나 하나). 망원동이니 연남동이니 하는 신흥 유흥지구의 가게를 가보라. 상당수가 생애의 첫 본격 직업으로 요식업을 택한 친구들이다. 소비 인구는 줄고, 시장에 진출하는 청년들까지 넘치면서 요식업 시장은 일대 격전지가 되었다. 어딘가 뜬다 싶으면 빚을 내서라도 가게를 얻고, 그렇게 영업을 열심히 하다보면 가겟세가 오른다. 가겟세, 즉 임대료는 곧 부동산(건물) 가치의 바로비터다. 그렇게 건물 가치를 올려주는 건 집안 돈 끌어대어 영업한 어린 친구들인데, 이익은 건물주가 획득하게 된다. 영업 실패로 종잣돈을 까먹고 물러나도 이미 올라간 임대료는 절대 내려가지 않는다. 건물 가치 하락을 바라지 않는 건물주가 임대료를 내려줄 리 만무하고, 법망을 피해 무리한 임대료 상승이나 요구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청년 창업에 애를 쓸 수밖에 없다. 고용이 늘지 않으니, 창업해서라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그 시장이 불행히도 가장 망하기 쉽다는 요식업이라는 건 그야말로 나라의 불행이 되고 만다. 아버지는 회사 다니다가 쫓겨나서 고깃집 하다가 폐업하면 경비원이 된다치고, 그 아버지의 종잣돈을 얻어서 호프집과 카페 열어서 문 닫은 청년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허망한 말 말고, 그들이 시민으로서 존엄성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장사가 안되는 건 그저 “너희들이 운이 나빴어”라고 하고 끝날 일인가.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청년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 아이들을 정말 어찌할 것인가(칼럼 제목은 이오덕 선생의 산문집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에서 차용).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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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제주 서귀포에 잠시 다녀왔다. 제주의 변화는 국토 중에서 아마도 가장 극적일 것이다. 고립, 격리 같은 낱말이 떠올랐던 세기를 지나 일종의 거대한 카오스 상태다. 십 몇 년 전만 해도 다수의 제주 사람들이 도시 이주를 고려했다고 한다. 감귤 값이 폭락하면서 희망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젠 도 전체의 땅값이 폭등했다. 중국인 관광객이 안 와도 경기는 여전히 좋다. 저비용항공사들을 포함해서 엄청난 비행편이 국내 여행객을 열심히 실어나르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 버스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공항이 포화상태여서 공항 건물에 브리지를 대기 힘들다는 뜻이다. 제주도 남쪽 서귀포를 들렀다. 전국에서 가장 깨끗한 시장으로 유명한 매일올레시장이 있다. 올레 걷기 운동의 영향으로 시장 이름까지 바꾼 곳이다. 활력이 넘친다. 시장 구경이 흥미롭다. 후지와라 신야는 1970년대 한국의 시장을 보고 “시장이 있으면 국가가 필요없다”고 했다. 그런 에너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곳은 제주의 시장 정도가 아닐까.

 

 

이 시장의 명물은 많지만 내 눈에는 이 시장 사람들, 넓게는 서귀포 사람들의 매무시를 꼽게 된다. 먼저 소개할 것은 시장 ‘원보마트’ 앞 세 분의 할머니다. 딱 일정한 거리로 세 분의 자리가 정해져 있다. 처음 봐서는 무얼 파는지 도통 알 수 없다. 종이로 잘 갈무리하고 포장한 ‘무엇’을 놓고 좌판을 벌여놓았다. 대단히 비싸고 귀한 물건처럼 보인다. 누군가 주문하면 그때서야 그 무엇이 드러난다. 바로 동태다. 과거 제주에는 동태가 귀했다고 한다. 동해에서 여기까지 오자면 돈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루는 것도 아주 조심스럽다. 동태포를 주문하자, 지느러미를 자르고 내장의 검은 막을 벗겨내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섬세한 손길로 손질에 들어간다. 막칼로 대가리며 몸통을 서너 번 툭툭 잘라서 주는 게 고작인 ‘뭍’에 비하면 보물을 다루듯 한다. 경탄이 나온다. 그렇게 동태포를 떠서 팔고는 이내 다시 좌판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다음 손님을 기다린다. 지켜보는 동안 단 한 번도 소리내어 손님을 부르지 않았다. 하기야, 동네 손님들이 빤한데 불러 외친들 무슨 소용일까만.

 

다른 좌판에 내놓은 채소와 미역, 다시마도 어찌나 예쁘게 진열해 놓았는지 감탄을 자아낸다. 민속공예(?)를 보는 것 같다. 그 좌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장 손님이 미감의 충족을 받을 듯한. 마침 자리돔 철이라 손질해서 파는 할머니들이 많다. 역시 채반에 가지런히 놓은 모양이 예술 수준이다. 건어물 가게 앞 말린 참돔은 또 얼마나 참하고 예쁘던지. 내장을 발라내고 하나하나 이쑤시개를 꽂아 내장 안이 잘 마르도록 해서 진열해놓았다. 시장 구경을 하다가 배가 고파 한 식당에 들어갔다. 두 할머니가 낮에만 장사하는 금복식당이라는 비빔밥집이다. 단돈 3000원. 입에 착착 붙는 비빔밥을 그득하게 먹었다. 행복한 시간이 흘렀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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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평양냉면 애호가들 사이에 몇 가지 불문율이 있다. 우선은 가위로 자르지 않는다. 냉면은 냉면일 뿐 ‘물냉면’이란 없다. 냉면은 당연히 육수가 시원하게 들어가는 것이므로 굳이 ‘물’이란 접두어는 사족이라는 뜻이다. 함흥냉면은 냉면 아니냐고 하면 슬쩍 이런 말을 흘린다.

 

“원래 함경도에서 비빔국수로 먹던 것을 전후 평안도 실향민의 평양냉면에 맞서 함흥냉면이라고 작명했다.”

 

 

아마도 이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냉면이 아닌 것도 아니다. 얼음처럼 이가 시린 냉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더운 면도 아니기 때문이다. 남한의 함흥냉면과 비슷한 것이 북한에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명태회국수다. 함경도에서 많이 먹는 음식이다.

 

이것과 유사한 음식이 강원도 속초에서 명태 고명을 얹은 함흥냉면으로 남아 있어서 그 연관성을 짚어볼 수 있다. 알다시피 속초는 함경도 실향민이 대거 월남하여 성장한 도시다. 북한의 요리책에는 명태회국수가 실려 있다. 실제로 북한에서 많이 먹는다. 흥미로운 건, 서울의 함흥냉면도 명태회국수와 아주 닮아 있다는 점이다. 함경도에서는 명태나 조개 등 해산물을 국수에 얹어 먹는 것을 즐겼다. 그런데 이런 해산물 국수에도 육수를 쓴다. 면 1인분이 200g이면 육수 반 컵을 곁들인다. 국수에 부어서도 먹지만 따로 육수만 그릇에 내기도 한다. 남한의 함흥냉면 먹는 법과 아주 비슷하다. 보통 함흥냉면집에 가면 뜨거운 육수를 컵에 부어서 내어주지 않는가.

 

북한에 함흥농마(전분)국수도 있다. 이것이 서울에서 파는 함흥냉면을 영락없이 닮았다. 고구마 전분을 주로 쓰는 남한과 달리 감자 전분이 주재료다. 면을 뽑고 여기에 참깨와 고춧가루를 뿌리고,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삶아 얹는다. 뜨겁게 먹는 음식이 아니어서 여름에 먹기 좋다. 남한의 함흥냉면이 차갑고 달고 맵게 만들어지지만, 북한에서는 구수한 비빔국수처럼 즐긴다. 사족이지만, 함경도에도 아예 얼음 같은 육수를 쓰는 함경도 냉면이 따로 있다. 평양냉면과 비슷한데, 면이 전분이라는 점이 다르다.

 

함흥냉면은 비교적 조리법이 쉽게 전파되어 일찍이 서울 곳곳은 물론 전국적으로 잘하는 집이 꽤 널리 퍼졌다. 그래도 역시 서울 중구 오장동 일대와 종로구 예지동 시계골목 쪽을 원조로 꼽는다. 오장동의 한 유명 가게는 한여름이면 평양냉면집 못지않게 줄을 선다. 워낙 올여름 평양냉면의 위세(?)에 눌려 여론의 눈길을 못 받고 있을 뿐이다.

 

예지동에 있는 가게들은 양이 많기로 유명했다. 친구들과 그걸 먹으러 가서 얘기를 나누다가 면이 불면 많은 양의 퍽퍽한 국수를 넘기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이때 육수를 조금 부어서 굳은 면을 풀어 먹기도 했다. 그러고보면, 약간의 육수를 면에 넣어 먹기도 하는 함경도식의 명태회국수나 함흥농마국수와 먹는 법이 비슷하다. 평양의 냉면을 먹고 온 사람들은 많은데, 함경도의 이런 국수들을 먹어봤다는 인사들은 못 봤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먹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곳에서도 평양냉면이 인기였다고 하니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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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음식 관련 책의 출간이 아주 많아졌다. 관련 책만 내는 전문 출판사가 있을 정도다. 새로운 개념의 판매술과 별난 디스플레이로 유명한 일본의 한 서점에는 제일 좋은 자리에 음식 책을 배치한다. 음식 책도 카테고리가 세분되고 있다. 주로 조리법을 담은 책이 많았던 과거와 달리, 인문과 사회과학으로 음식을 다룬 책의 비중이 커졌다. 역사에서도 음식사, 음식사회사와 문화사 책도 많다. 음식을 통해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관련 학과에서 이 분야의 전공자가 거의 없었다. 최근에 몇몇 박사급들이 배출되고, 외국 유학 가서 전공하는 이가 생겨날 만큼 음식은 이제 전방위적으로 사회적 화두가 되었다.

 

 

먹는 일은 즐겁지만, 그 이면의 불편한 진상(眞相)을 다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를테면, 도축장을 취재하거나 에너지 과소비 산업인 축산업과 우리가 늘 불안해하는 GMO 산업의 진실 같은 것 말이다. 이제 그런 책을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대개는 번역서다. 그동안은 출판시장이 어마어마한 영어권의 일이었다. 가까운 일본도 “이게 책으로 나와서 팔릴까” 싶은 책도 내는 나라다. 몇 년 전인가, <이베리코를 사러>라는 일본 책을 본 적이 있다. 이베리코 돼지는 정말 도토리만 먹여 키우는지 궁금해서 스페인 현지를 들락날락한 ‘오타쿠’ 필자의 작품이다. 한국에선 소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한 이런 집요한 음식 책은 언감생심이었다. 이제는 시장이 달라지는 것 같다. 치킨 시장만을 깊게 판 책이 국내 저자에 의해 출간되어 상당한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축산업의 바탕을 떠받치는 노동 체험을 기록한 역작도 나왔다. <고기로 태어나서>라는 책이다.

 

처음 장부터 충격으로 시작한다. 산란계들-그러니까 우리가 먹는 달걀의 생산자들-을 돌보는(?) 농장에 취직한 필자의 묘사는 상상을 넘어선다. 케이지에 갇힌 닭들은 심하게 말하면 도화지만 한 크기에 네 마리가 ‘때려넣어진’ 상태다. 너무 좁아서 닭이 닭을 깔고 앉아 있는 형국이다. 일년에 300개씩 알을 낳느라 닭의 뼈가 너무도 약해서 닭 날개를 잡아들기만 해도 뼈가 부러진다. 악취와 닭의 비명으로 가득 찬 현장음이 활자의 갈피로 생생하게 들려온다. 닭에 생기는 이, 그것을 죽이려는 살충제 살포 같은 최근의 이슈들도 이 책에서는 생생한 현장으로 묘사된다. 결국 그는 2주 만에 농장을 탈출한다. 그의 표현을 요약하면 ‘미칠 것 같아서’였다고 한다. 동물복지는 선언이 아니라 실천이 필요하다는 또렷한 증거다. ‘식품=가격’의 프레임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 다시금 상기시킨다. 모름지기 지금 우리 식품과 요식 산업의 저변은 저런 설명하기 불편한 세상을 ‘깔고 앉아’서 유지되는 듯하다. 너무 힘들고 고단한 이런 노동을 한국인이 환영할 리 만무하다. 그러니 외국 노동력에 기댄다. 양계장은 물론이고 축산, 어업, 농업 전반의 일이다. 한국인은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돼지 분뇨를 치우다가 질식사한 것도 결국 외국인 노동자였다. 먹거리의 비명이다.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의 침묵하는 아우성이다. 이제 우리가 먹는 일을 다시 들여다볼 시기다. 이미 늦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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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집도 변화를 탄다. 임오군란 이후에 화교들이 들어오고, 호떡집으로 시작한 중국집 역사는 이제 100년을 훌쩍 넘는다. 부침도 심했다. 한때 최고급 요릿집, 정치인들이 밀담을 나누는 요정 같은 중국집도 있었다. 이제 그런 고급 중국식당은 호텔에서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화교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늘 여러 가지 제한으로 영업에 부담을 줬다. 중국집에서만 쌀밥을 팔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취한 적도 1960년대에 있었다. 한국인에겐 어떤 식으로든 중국집에 대한 추억이 있다. 요즘 세대는 배달로 상징되는 패스트푸드 같은 식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짙지만. 우선 사라진 메뉴가 많다. 먼저 우동. 달걀을 살짝 풀고 파와 양파, 갑오징어를 넣은 맑은 국물의 우동은 이제 전설이 되었다. 우동이라는 메뉴 자체를 안 파는 중국집이 많고 팔더라도 옛날과 달라졌다. 갑오징어값이 너무 비싸 5000, 6000원 하는 우동값에는 불가능한 재료가 되어버렸다.

 

 

기스면도 보기 힘들다. 맑은 닭 국물에 가늘게 찢은 닭고기와 고운 면이 들어간 국수였다. 짜장면과 짬뽕처럼 볶아서 만드는 요리와 달리 뭐랄까 얌전하고 기품 있는 요리로 기억한다. 언제부터인가 이 면을 중국집에서 사먹을 수 없다. 더러 파는 집이 있어서 시켜보았는데 옛날 맛이 아니고 성의도 없다. ‘기스’란 계사(鷄絲)를 화교들이 부르는 말로 가느다랗게 닭고기를 찢어서 만든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중국요리가 한국에선 거의 튀기고 볶는 자극적인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실제로는 찌고 삶는 요리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요리이기도 하다.

 

울면도 이젠 전설이다. 걸쭉한 전분을 풀어 뜨겁게 먹는 이 면은 겨울의 특미였다. 특히 이것을 먹는다는 건 뭔가 좀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해서 만만하지 않았다. 간이 되어 있을 뿐, 특별히 자극적인 맛이 없는, 그래서 어른의 맛이라고 생각했던 국수. 맵고 달고 시고 짠 면과 싸우면서 장렬히 사라지다시피 한 역사적인 음식이다. ‘뎀푸라’라고 부르는 요리도 이젠 거의 없어졌다. 탕수육과 같은 음식이되, 소스를 붓거나 곁들여 내지 않는 고기 튀김을 이르는 말이다. 이것도 어른들이 좋아했다. 달고 신 소스가 없으므로. 게다가 소스가 안 나오니까 값이 조금 싸고 양도 더 많았다. 그 고기 튀김을 간장과 식초, 고춧가루 푼 작은 소스접시에 찍어먹으며 고량주를 마시는 것이 중국집 멋을 아는 어른들의 풍류였다. 불과 기름에 탄 맛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고소함의 극치였던 고기 튀김, 아니 뎀푸라. 그리고 또 사라진 것은 홀에다 대고 외치는 중국어 주문이었다. 한국인이 하는 중국집에서도 주문만큼은 중국어(대개 좀 제멋대로이긴 했다)로 하곤 했다. 그것이 ‘정통’이라는 느낌을 주었으니까. 이제 우리는 어디에서 만드는지도 모르는 배달 짜장면과 짬뽕, 맛없는 서비스 군만두로 중국집을 기억하게 된다. 심지어 배달원도 외주회사의 마크를 달고 있으니. 시절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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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냉면이다. 작년 여름, 냉면에 관한 여러 논쟁이 있었다. 진짜 평양냉면이 무엇이냐, 평양냉면에 식초와 겨자 치면 ‘맛치(痴)’인가 하는 자문과 엉성한 자답이 있었다. 엉성하다고 표현한 것은, 냉면은 결국 대한민국(남한)의 것이 아니라는 전제를 뜻한다. 속칭 면스플레인(면+익스플레인[explain])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냉면 먹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행위에 대한 힐난이었다. 그러던 중에 올봄 남북 예단 교류를 통해 이른바 붉은 다대기(양념장)까지 넣어서 나오는 북한 냉면을 보고 많은 이들이 경악(?)했다. 겨자와 식초조차 치지 말아야 한다는 냉면 순수파(!)의 코가 납작해져버릴 일이었다.

 

나는 왕년에 1960년대에 나온 북한 요리책을 좀 보았다. 중국에서 입수한 책을 공항으로 가져오다가 이적표현물이라고 압수당한 일도 있다. 요리책이 이적표현물이 된 건 무리도 아니었다. 이렇게 떡하니 적힌 말이 요리책에 수없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대강 이런 식이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평양랭면은 민족의 자랑입니다. 인민이 랭면을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우리 모두 랭면을 애호하여 민족의 기개를 드높입시다.”

 

어쨌거나 당시 북한의 냉면 조리법도 다 달랐다. 책마다, 시기마다 다른 조리법이 실렸다. 고기로 닭과 꿩을 쓰거나, 돼지와 소를 쓰거나, 아니면 고기란 고기는 다 들어가는 조리법도 있었다. 면의 배합도 달랐는데, 요즘처럼 메밀이 적지는 않았다. 색깔도 지금보다 희었다. 왜 그런 변화가 생겼는지 모를 일이다. 평양의 냉면도 현지에서 들려오는 말을 옮기자면 옥류관은 대외용이고, 인민은 다른 집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그런 판국에 평양냉면에 식초와 겨자는 치지 말라는 둥, 붉은 양념을 넣는 건 바보짓이라는 둥 하는 남한 인사들의 말이 얼마나 허망한가.

 

 

나는 냉면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전국을 도는 것도 모자라 일본, 중국의 냉면집을 섭렵했다. 그러면서 얻은 결론은 하나였다. 다 각기 사정에 따라 냉면을 말아먹을 뿐, 우열은 없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오사카와 모리오카 일대에는 평양식 냉면집이 꽤 많다. 그러나 이들의 면은 거의 밀가루와 전분의 배합이고, 메밀은 아예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소바라는 전통의 메밀집이 있는 일본에서는 어설프게 메밀국수를 내는 게 현지 손님의 기호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각기 알아서 면을 뽑고 육수를 내고 만들어내지만 어느 것도 ‘평양냉면이 아니야’ 하는 비난을 할 이유가 없다. 시대와 장소, 사람의 변화에 따라 음식은 변한다. 유럽의 한식당에서 맛이 묘한 김치찌개를 먹고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현지의 배추와 양념 사정에 따라 달라지는 맛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맛의 소인배요, 옹졸한 국수주의다.

 

참, 북한에서 출판한 요리책에서 여러 가지 냉면 조리법은 다 달랐지만 공통점은 하나 있었다. ‘맛내기 조금’이 꼭 들어간다는 사실. 맛내기는 MSG, 즉 우리의 미원에 해당하는 북한 말이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이 부분만큼은 일찌감치 통일이 되었던 것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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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공화국이라는데, 나는 치킨제국 같다. 군림하는 황제와 복종하는 신하들이 있을 뿐이다. 먹는 이들도, 치킨을 튀기는 일선의 장사꾼들도 제국의 신하들 같다. 복종은 길고, 말은 짧다. 치킨값과 재료값은 제국이 정하는 대로다. 경기가 나빠서 치킨이 더 팔린다는 분석이 있었다.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다. 외식비가 없어 배달 치킨으로 만족하는 소비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치킨 튀기는 이들도 쏟아졌다. 내가 겪어봐서 안다. 월급 반 토막에 직원 수 반 토막이었다. 나가라, 나가라, 다 나가라였다. 그때 우리는 치킨 맛을 깊게 혀에 들였다. 뭐든 물건 잘 팔아서 부자 되고 떵떵거리는 거야 뭐라 할 게 못 된다. 그러나 강남 요지에 불쑥불쑥 솟은 치킨 회사 사옥을 보면, 늘 신문을 장식하는 갑질 기사가 떠오른다. 왜 유독 치킨 회사 오너들은 갑질로 문제를 일으킬까.

 

 

실은 그게 아닐 수도 있다. 갑자기 부자가 되었지만, 위기관리를 못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갑질이야 어떤 회사든 늘 있는 일 아닌가 말이다. 최근에는 하루에 ○○마리만 튀긴다는 치킨회사 광고가 눈에 자주 띈다. 그 정도만 튀기고, 기름 싹 갈아버리는 깨끗한 치킨이라는 뜻이다. 더도 말고 그 정도만 팔아주면 가맹자도 회사도 먹고살 것이라는 소박한 계산도 있으리라. 그 광고를 본 치킨 장수가 말했다. “하루에 그렇게 ○○마리 파는 것도 쉽지 않은데.” 더 팔지 않겠다는 광고인데, 실은 그것조차 팔 수 없는 치킨 장수가 더 많다는 뜻이다. 치킨은 우리 사회의 어떤 상징이다. 거대해지고 있지만 실속 없이 몰락하는 자영업, 청년실업과 치킨집 창업, 막장 같은 배달업의 위험, 거기에 재료가 되는 닭 생산의 미궁 같은 이야기도 있다. 언젠가 닭 생산 회사를 취재했다. 동물복지 닭을 생산하는 회사였다. 딱 한마디가 지금도 귀에 맴돈다.

 

“저희 회사는 도계장까지 수송해올 때 케이스에 담아 이동합니다. 도계 라인으로 넘길 때도 케이스로 안전하게 처리하지요.”

동물복지 닭이 아닌 경우는?

 

“빨리 작업을 해야 하므로 차량의 닭장에서 도계장 쪽으로 닭을 손으로 잡아 던집니다.”

 

나른하고 더운 오후, 끔찍한 상태로 닭장에 갇혀 이동한 후 잡혀 던져지는 닭의 ‘활공’이 눈에 그려졌다. 그 닭들이 마지막으로 누릴 자유였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치킨에 미쳐 있다. 거기서 거기인, 바삭한 맛과 매운 양념맛을 고르고 어쩌면 파와 마늘이 들어간 별미(?), 두 마리 제공의 마릿수 유혹에 빠져 브랜드를 고르기도 한다. 앞서 닭 전문가에게 우문 하나를 던졌다. 왜 세 마리 치킨은 히트치지 못할까요.

 

“그럼 치킨집 사장님들이 죽습니다. 한 마리도 힘든데 세 마리를 튀겨야 하잖아요.”

그래도, 이 난리통 같은 경쟁에 주문만 있다면야 기름 연기를 뒤집어쓰면서 까짓 세 마리, 아니 네 마리인들 튀기지 못할쏘냐, 싶었다.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치킨집 사장님들 굶을까 봐 닭을 한 마리라도 더 시키고 앉아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힘들어 닭 한 마리로 위안받고 있는 것인가.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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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 예술단이 귀환했다. 남북관계에서 ‘잃어버린 9년’은 참으로 길었다. 그 시간을 뛰어넘어 걸그룹 멤버들이 냉면 먹는 장면의 사진이 언론에 실렸다. 그것은 달라진 세상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유통되었다. 한때 남북관계 호시절에는 평양에서 ‘진짜’ 평양냉면을 먹어본 인사들이 많았다. 맛에 대한 평들도 다양했다. 그 도시의 냉면이 더 이상 화제도 아니었다. 정치나 사업 하는 이들 중에서 옥류관 냉면 한번 못 먹어본 사람은 끝발 없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평양 왕래객이 많았다. 평양에 가지 않더라도 대안이 많았다. 금강산 관광 가서도 평양냉면을 사먹을 수 있었다. 북한의 설명대로라면 ‘평양과 똑같은 냉면’을 팔았으니까.

 

 

방북 예술단은 많은 화제와 후일담을 생산하는 중이다. 단연 대중의 관심은 냉면 시식기다. 면 색깔이 검은 걸 보니 감자전분을 많이 섞거나 메밀 겉껍질을 넣은 막국수 스타일이 아니냐는 관전평(?)도 나왔다. 평양냉면을 두고 다시 논쟁이 벌어졌다. 남한 냉면보다 평양냉면이 진짜라는 걸 주장한다고 하여 냉면 종북주의자니 하는 말도 나왔다. 예전 남북 왕래 시기에는 없던 말들이다. 남북이 냉랭하게 지내는 동안 오히려 남쪽에서는 평양식 냉면을 둘러싼 흥미로운 그림이 많이 생겨났다. ‘냉부심’(냉면에 대한 고집스러운 자부심)이며, ‘식초, 겨자 논쟁’도 있었다. 고춧가루를 뿌리느냐 마느냐를 놓고 토론도 벌어졌다. 각자 다른 해석이 난무했다. 예전에 고기에는 누린내가 났으니 식초를 뿌렸을 뿐, 요즘 고기는 질이 좋아서 그럴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나왔다. 어디까지나 추정인 이야기다. 옛 민간의 냉면 취식에 관한 권위 있는 조사가 있을 리도 만무하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남한의 냉면광들은 신주처럼 모시는 굵직한 강령을 어느 정도 정리한 듯하다. 식초, 겨자는 안 치는 게 세련된 자세이고, 메밀 함량이 높아서 향기로운 면을 취할 것이며, 가위는 대지 않는 것이 정통이라는 것 따위다. 정작 북한에서는 옥류관 냉면의 메밀 배합이나 육수의 비밀 같은 건 입밖에도 내지 않고 있으니, 이 또한 허무한 반쪽짜리 냉부심이 아닌가 모르겠다. 사실, 원래 냉면이라는 것도 김치처럼 가게며 집안마다 다른 조리법이 있었을 텐데 하나의 정통을 찾으려는 태도가 무리일 뿐이다. 냉면 조리법을 적어 놓은 북한의 책을 보면 하나같이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수령님은 랭면은 평양의 자랑이라고 교시하시였습니다.”

그래 놓고는 책마다 조리법이 다 다르다. 육수만 해도 소고기만 쓰거나 소고기와 돼지고기, 소와 돼지에 닭고기까지 넣는가 하면, 꿩고기를 더하는 설명도 나온다. 동치미나 김칫국도 넣는가 하면 빠져 있기도 하다. 냉면은 다 자기 색깔이 있다. 하다못해 고깃집에서 내는 냉면은 냉면이 아니랴. 그러니 냉면 종북주의도, 오히려 남한 냉면이 더 맛있다는 냉면 남한독자노선(?)도 다 부질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기야 중국의 유명한 북한식당에서 팔아온 냉면이 실은 남한 사람의 입맛을 겨냥해서 개량한 것이라는 설이 파다했던 때도 있었으니.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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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먹는 동네의 유행은 ‘노포’다. 오래된 가게를 뜻하는 이 한자어는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명색이 없다. 가게가 오래 버틸 역사적 조건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무렵 생긴 가게들이 살아남아 있어야 노포 소리를 들을 텐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남아 있는 것이 손꼽을 정도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일본은 한반도의 물자수탈을 가속화했고, 팔 음식이 없으니 식당이 배겨내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문자 그대로 고사(枯死)였다. 해방 후 물자부족시대에도 식당이 생겨났지만, 역시 6·25전쟁으로 초토화됐다. 중국도 노포가 적은 나라다. 정치적 격변기를 거쳤고, 문화대혁명이 오래된 가게들을 무너뜨렸다.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일본은 노포를 많이 가지고 있다. 일찌감치 식당 문화가 발달한 구대륙인 유럽 못지않다. 일본도 미군의 대공습으로 주요 도시가 파괴되었고, 노포 역시 폭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복구하여 역사를 이어가는 집이 많다. 물론 일본 노포의 대세는 패전 이후에 생긴 것들이다.

 

 

한국에 노포가 적은 건 역사적 이유보다도 사회적 시선 때문인 듯하다. 노포 주인들을 인터뷰하면 먹는장사, 술장사를 깔보는 문화가 있어서 몇 번이고 집어치우려 했다고 술회한다. 피맛골에 그 많던 가게들이 전형적인 ‘노포급’인데, 피맛골이 헐리고 난 후 다른 곳에서라도 업력을 이어가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분들을 만나서 말씀을 들었다. “할 만큼 했고, 가게를 옮겨도 언제 또 헐고 부술지 몰라 불안해서 할 수 없다”고 한다. 먹는장사에 대한 곤란한 체험도 컸다고 말한다. 술주정이나 관의 횡포 같은 것들이다.

 

진짜 노포는 거의 사라져버렸지만, 최근에는 다시 노포 마케팅이 뜬다. 근거도 없이 몇 대(代)니 하는 홍보를 하는 식당도 생겼다. 갑자기 생긴 식당이 아예 70년, 80년 역사라고 주장하는 집도 봤다. 진짜 노포들도 역사 기록이 별로 없어서 구전 기록에 의존하는 상황을 이용하는 것 같다. 어차피 입증 책임을 묻는 문화도 없으니, 지어낸 오래된 집이라 한들 누가 비난하겠는가 하는 심보다. “우리 할아버지대에 저쪽 지방에서 60년 전부터 밥집을 했었소” 하면 그게 그런 줄 알고 마는 일이 된 셈이다. 남북 분단을 이용하여 몇 대 노포를 대충 만들어내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집도 있다.

 

이북에서 식당을 했다고 하니, 확인이 애매하고 전쟁과 피란통에 증거 사진 한 장 없는 걸 따져 묻기도 어렵지 않겠는가. 이런 일이 생기는 것도 어떻게 보면, 좋은 징조이기는 하다. 누가 뭐라 하든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역사를 쌓아서 노포가 된 식당이 인기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 노포라고 다 존중받을 수준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노포라는 것 말고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집도 많고, 당대에 와서 게으른 후손에 의해 망가지고 있는 집도 있다. 얼마 전에 들른 한 노포 식당에서 별꼴을 보았다. 내 일행이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은 젊은 주인이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자리가 없으니 돌아가라는 뜻이었다. 눈은 스마트폰에 열중하면서. 쓸쓸한 일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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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은 사회적 자폐라는 이야기가 돈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자폐자다. 어려서부터 혼밥을 좋아했다. 밥집에 혼자 앉아 기다리고 먹는 일은 효율적인 즐거움을 준다. 배도 채우고, 맛을 음미하는 기쁨을 제대로 즐겨볼 수 있다. 동행이 없으니 온전히 밥에 집중할 수 있다. 나물에 들기름을 쳤는지 참기름을 발랐는지 쉬이 안다. 혼자서 밥집 탁자에 앉아 기다리는 마음은 온전히 내 것이다. 내가 요리사가 된 건, 아마도 이런 경험이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밥과 사람의 교통을 단순하게 들여다보는 훈련 같은 것 말이다. 주문을 넣고 주방에서 호응하고 일관된 동작으로 내 앞에 밥이 놓이는 과정에 내 마음을 섞는다. 엇, 밥 푸는 저 아줌마의 손 좀 봐. 번개 같군. 국밥 토렴은 정말 예술이야. 생활의 달인에 나오실 만하겠는걸. 점심시간이 끝나서 한가할 무렵, 텔레비전에서는 드라마 재방송을 틀어주고, 아줌마는 내게 추가 반찬을 가져다주면서도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하기도 한다.    

 

 

실은, 혼밥의 조건이 있다. 일종의 심리적 불문율 같은 걸 지키게 된다. 아마도 개념 있는(?) 혼밥족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감정일 텐데, 오후 서너 시에는 밥집에 가지 않는다는 거다. 간혹 이런 시간에 밥집에 들어서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여서 당황하게 될 때가 있다. 적막한 식당에 흐릿한 형광등만 켜져 있는데, 인기척을 듣고 낮은 탁자 뒤에 몸을 눕혔던 아줌마가 고단하게 일어나는 걸 보게 되는 일. 불편해진다. 그들의 휴식을 내가 빼앗은 것은 아닐까. 고단한 낮잠을 깨웠으니 밥이 모래알같이 서걱거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마도 혼밥 하는 이들이 그 시간이면, 편의점에 가고 마는 것은 아닐지. 장사가 잘 되어서 쉬는 시간도 없이 늘 바삐 돌아가는 밥집은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이런 집에서는 식당 구석구석을 관찰하게 된다. 일하는 이들의 차림새며, 주방에서 요리하는 모습, 심지어 프라이팬에 생선을 지지는 동작까지 보곤 한다. 한 끼 6000원 하는 밥집에서 돈 드는 주방복이며 유니폼을 지급하는 건 언감생심일 것이고, 그 틈을 주류회사가 메워주고 있구나. 평생을 식당에서 일하며 위생복이라고는 ‘참이슬’과 ‘카스’표 앞치마밖에 안 입었을 아줌마들의 곱슬 파마머리가 마음을 흔든다.  

    

그네들은 부엌에서 지지고 볶지 않을 때도 무엇인가 끊임없이 일한다. 대체로 빈 손님상을 작업대 삼아 멸치 똥을 떼어내고, 쪽파를 손질한다. 부추를 다듬고 열무의 흙을 닦아낸다. 6000원, 7000원 하는 낮은 밥값을 지탱하는 건 순전히 그들의 쉼 없는 노동이다. 언젠가 유명한 밥집의 사장 아줌마를 인터뷰했다. 그는 질문에 답하면서도 손으로는 연신 삼겹살에 오르는 마늘을 저미고 있었다. 그 아줌마의 눈을 잊을 수 없다. 반쯤 감긴 눈은 그이가 쉬어야 한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잠과 각성의 중간 정도 되는, 일종의 반수면 상태 같은 눈. 그 아줌마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일이 사는 거고, 사는 기 일이지 뭐. 언제 쉬냐고요? 명절엔 쉬지요.”

그이가 억지로 웃었지만, 눈은 여전히 반쯤 감긴 상태였다. 밥집에서 나는 늘 슬프고 분하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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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이 거듭되면 더운 음식이 그리워진다. 역시 엄마의 손이 생각난다. 벙거지를 쓴 생선장수 아저씨가 언 길을 뚫고 동네를 다녔다. 그의 리어카는 너무 추운 날씨에 모두 얼어버려서 생물인지 냉동인지 알 수 없는 생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볼을 베어버릴 것 같은 칼바람이 불었지만 아저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먹고산다는 것이 엄중하다는 사실을, 아마도 어린 나도 느꼈으리라. 아저씨가 동태를 무지막지한 식칼로 토막을 냈다. 그때 동태는 왜 그리 컸던지. 동네 구멍가게에서 나무상자에 담아 파는 모두부도 한 모 사고, 시원한 무와 겨울 파도 한 다발 샀으리라. 숟가락은 많고 동태는 모자라니, 두부를 많이 넣고 연탄아궁이에서 동태찌개를 끓였다. 요즘은 뒷골목 백반집에서나 볼 수 있는 양은냄비가 우리 집 부엌에서 보글거렸다. 2월 말이면 이미 상태가 나빠지던 신김치도 넣었다. 그 맛이 아직도 혀에 삼삼하다. 목젖이 데이도록 뜨거운 두부와 구수한 살점을 삼켰다. 아버지는 왜 그리도 동태 대가리를 좋아하셨는지. 가시 많고 맛이 씁쓸해서 숟가락이 가지 않던 뱃살도 왜 그리 챙기셨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내 나이가 이미 아버지의 그 시절 나이를 훌쩍 넘어섰으니.

 

겨울 먼바다에서 잡아들이는 명태잡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배가 작아서 파도에 휩쓸리고 장비도 좋지 않았을 것이다. 통계를 보니 그래도 내 어린 시절에 해당하는 1970년대는 어획량이 최고에 달했다. 힘들어도 만선의 기쁨이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겨울에는 명태잡이 최대 기지인 거진항에 밤새 무당의 제사가 끊이질 않았다. 제를 지내는 텐트 한 구석에서 어부들이 모여 두런두런 음식을 나누던 장면이 생각난다. 국내산 명태가 씨가 말랐단 소리가 들렸지만 우리 밥상에 명태, 동태가 끊이지는 않았다. 북한과 사이가 좋을 때는 수입 물량도 많았고, 러시아 어장에도 우리 배가 들어갔다. 겨울, 참혹한 추위와 파도를 이겨내며 명태를 잡아들였다. 배가 침몰했다는 끔찍한 소식도 들려왔다. 우리가 뜨거운 동태국물을 삼킬 때 누군가는 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터였다. 생태 맛을 보는 것도 여전했다. 명태가 그다지 인기 생선이 아닌 일본에서 들여왔다. 수산시장에서 새벽 장을 보던 7~8년 전에는 어판장 한쪽에 생태를 넣은 스티로폼 박스가 산처럼 쌓여 있기도 했다. 직장인들이 많은 동네의 식당에서는 속을 풀어주는 생태탕이 인기였다. 동일본 대지진이 터진 2011년 이후에는 생태도 잘 보기 힘들다. 방사능 탓에 인기가 떨어졌다기보다 일본도 어획량이 크게 줄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동태는 여전히 꾸준하다. ‘황금알’이라고 불리는 명란 값이 좋아서 한국, 일본, 러시아 배들이 파도가 센 북양어장에 출어를 많이 하고 있다. 동태는 이제 명란의 부속물처럼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노동의 최후 산물로 남은 것이 동태의 살점이라니, 입에 넣는 달콤한 동태찌개 맛이 그리 편안치만도 않다. 그저 더운밥과 찬 소주를 곁들여 묵묵히 숟갈질을 한다. 동태 맛이 이 세상에 오래 남아있을 것인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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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사람이 들어오면 문화도 등에 업고 온다. 가장 큰 게 음식이다. 임오군란을 수습하는 와중에 군대를 파견한 청나라와 불평등한 무역협정을 맺은 게 1882년의 일이다. 당연히 중국음식도 들어왔다. 짜장면 전래설도 여기서 출발한다. 아마도 처음에는 달지 않은 호떡이었을 것이다. 밀가루떡을 굽고 파와 춘장을 넣어서 먹었던. 이윽고 짜장면과 따루면(중국식 우동) 같은 게 들어왔다. 이후 수많은 외국 문화가 한국에 건너오면서 음식문화를 퍼뜨리는데, 흥미롭게도 다수가 국수다. 우리 민족이 국수를 정말 좋아하긴 했던 것 같다. 돈 많은 양반들이 ‘낮것상’이라고 하여 점심에 국수를 차려먹는 일이 동경의 대상이었으니까. 국수는 맛도 좋고 별식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늘 선호도 일등이었다. 메밀로 내린 국수를 기억하는 관서지방 사람들이 남으로 이주하면서 남한 전체에 냉면 유행을 만들어 놓았다. 미군이 퍼뜨린 건 스파게티였다. 커다란 미트볼을 넣는다거나 하는 전형적인 미국화된 스파게티였다. 여기에 일본 경양식집에서 파는 스파게티(나폴레탄)를 모방했다. 나폴레탄은 미국 군대가 일본 열도에 진주하고 군정을 실시하면서 생겨난 형식이다. 케첩을 쓴 새콤달콤한 스파게티다. 그 밖에도 오븐에 구운 치즈 스파게티니 하는 것들에 침을 흘렸다. 1960~1970년대에 경양식집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도대체 이 시큼하고 질긴 이상한 국수를 왜 먹나 싶었다. 지금 국내에서는 급식용의 유사(?) 스파게티 말고는 거의 외국 수입 제품을 쓰는데, 자료를 보면 1960~1970년대에 국내에서 스파게티 생산이 꽤 활발해서 광고도 하고 그랬다. 역시 국수라면 사족을 못 쓰는 우리들이었다.

 

짜장면이 배달음식이 되고, 스파게티가 고급화의 길을 달릴 때 등장한 게 월남국수였다. 호주와 미국 서부 지역에서 유행하던 소고기 국물의 쌀국수가 강남을 중심으로 번져나갔다. 초기에 이런 가게를 연 집들은 돈도 많이 벌었다. 마치 짜장면을 처음 판 화교들과 스파게티를 보급한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쌀국수는 가볍게 싼값에 먹는 국수라는 본디 의미와 달리 강남에서 고급음식처럼 팔렸다. 세련된 인테리어에 젊은 서버들이 경쾌하게 서비스하는 집이었다. 쌀국수 문화는 지금 이른바 ‘투 트랙’으로 달리고 있다. 프랜차이즈를 통한 기본 공급 루트에 베트남 본토 사람들이 가세했다. 주로 결혼 이주한 베트남 여성들이 본토의 손맛으로 작은 가게를 곳곳에 열고 있다. 한때 이런 국수를 먹으러(진짜 베트남 국수라고 불렀다) 경기 안산시까지 갔는데, 요즘은 서울 시내에서도 종종 보인다. 동남아 특유의 향에 호오가 엇갈리는데, 점차 ‘호’가 늘고 있다. 원래 이상한 풍취도 익숙해지면 더 강렬한 애착을 받게 마련이다. 박항서 축구의 성공으로 베트남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크게 늘었다. 이 매력적인 쌀국수도 더 퍼져나갈 것 같다. 어쩌면 다른 외래 국수가 그랬듯이, 군대와 학교 급식에도 등장할 것이다. “와, 오늘 점심은 베트남 국수래!” 국수만 맛있다 하지 말고, 한국에 와 있는 베트남 친구들도 좋은 감정으로 잘 사귀었으면 좋겠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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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좋아하는 술안주가 있을 텐데, 나는 동치미 한 사발이다. 그 맑은 순수의 짠맛 한 그릇이면 술이 외롭지 않다.

 

문제는 이걸 제대로 얻어먹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밥집이나 고깃집에서 주는 건 대다수가 ‘가짜’다. 동치미=冬沈이라는 문자 그대로 겨울에 푹 잠겨 익은 동치미가 아닌 것이다. 그 제조 비법(?)이야 뻔하게 예상이 가능하다. 간간한 소금물에 잘 삭은 게 아니라 급조한 ‘이미테이션’이다. 동치미라고 부르는 게 무색하다. 익힌 것이 아니니 사카린과 빙초산과 설탕과 사이다에 또 ‘무엇무엇’을 넣어 맛을 낸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동치미를 잘 만들어서 익히자면, 공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보통 식당에서 그런 환경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김치라도 겨우 담가서 파는 집도 희귀해진 판에 동치미는 언감생심이다. 게다가 이 동치미라는 녀석은 변덕이 심하다. 물이 많이 잡히고 고춧가루가 안 들어가니 발효 조절이 힘들다. 동치미는 일종의 물김치이니 익히자면 공간도 건더기 중심의 김치보다 많이 든다. 김치냉장고며, 그것을 놓을 공간이 충분할 리 없다(요즘의 임대료는 공간에 돈을 깔고 앉아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동치미 엑기스’라는 것도 판다. 동치미 맛을 내는 조제품이란다. 여기에 무를 썰어서 대충 소금 친 후 이 엑기스와 물을 섞어 그럴듯하게 동치미를 만들어낸다.

 

동치미의 악전고투는 다 이유가 있다. 만들고 저장하는 데 돈이 드는데, 정작 손님에게 돈을 청구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고기 구워 파는 식당에서 동치미(라고 부르는 어떤 존재)는 공짜로 몇 번이고 ‘리필’되는 싸구려 음식이다. 이 복잡한 속내의 동치미가 식당 주인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알려면 식당 창업 교육을 가보면 된다. 이런 교육 현장에는 관련 상품을 선전하는 상인들이 많이 나온다. 첨단의 포스 시스템부터 사채업자들까지 다양하다. 이 자리에 동치미를 판다는 상인이 나오곤 하는 것이다. 엄두가 안 나는 동치미를 사철 공급해주는 업자다. 이런 제품이라도 사서 쓰면 나쁘지 않을 텐데, 이것도 돈이 들어가니 그다지 인기가 없다. 한 그릇에 50~100원이면 뚝딱 ‘조제’를 해낼 수 있는데 굳이 진짜 동치미를 사서 쓸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오래된 신문을 뒤적이는데, 평안도식 동치미 만드는 법이 실려 있어서 눈길이 갔다. 이름도 특이하다. 와싹 동치미, 쪼개 동치미. 와싹은 아마도 입에서 씹히는 질감을 말하는 것 같고, 쪼개 동치미는 숟갈로 무를 쪼개듯 파내어 담그는 것이라고 한다. 칼로 정연하게 썰지 않은 무의 부정형의 질감이 입맛을 더 돋울 듯하다. 대동강도 얼어버릴 한겨울, 평안도 사람들은 뜨뜻한 아랫목에 앉아 동치미에 메밀국수 말아 먹으며 지냈다지. 고깃국물이 있으면 섞어 넣고 없으면 순전히 동치미 맛으로 먹는 국수.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냉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익은 동치미 한 그릇, 침이 고인다. 어디 동치미 잘하는 집이 없을까. 돈을 받아도 좋다. 그래야 부담 없이 한 그릇 더 청할 수 있을 테니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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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른바 패밀리 레스토랑을 취재한 적이 있다. 한 후배의 얘기에서 출발한 취재였다. 그는 한 패밀리 레스토랑의 주방일을 맡고 있었는데, 50여명에 달하는 일꾼 중 정규직이 한 명도 없었다고 했다. 그 후배가 이런 충격적인 말을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저녁 준비 시간 전까지 모두 가게 밖으로 나가야 해요. PC방이나 공원에 가서 시간을 때우다 오곤 했죠.”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제 돈 주고 시간을 쓰고 들어왔다. 물론 무급으로. 가게 안에 머물면 시급을 줘야 한다. 그러니 밖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지금도 나는 들르는 식당이나 카페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알바생’ 등을 볼 때마다 그 사건이 생각난다.

 

 

시급 1만원 시대를 열겠다는 게 이 정부의 공언이었다. 어찌어찌 일단 7530원이 되었다. 법대로 주휴수당 등을 다 챙긴다고 가정할 때 하루 10~12시간을 일하고(요식업소의 일반적인 근로시간) 월 21일 근무하면 대략 170만~200만원을 손에 쥐게 된다. 많은가. 좋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알바’에게 일을 시키는 요식업소는 드물다. 제일 바쁜 시간에 서너 시간, 아니면 네댓 시간 일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시급 올린다고 했을 때 반대쪽에서 주장한 ‘월급쟁이보다 많이 받는 알바’는 사실상 성립하기 힘들다. 게다가 알바 퇴직금 챙겨주는 경우도 보기 드물다. 법망이 허술하고, 알바가 퇴직금을 받을 만큼 1년 이상 근무하는(근무시키는) 경우도 적기 때문이다.

 

문제는 알바의 시급이 아니다. 정규직이든 계약직이든 풀타임으로 취직하고 싶어도 받아주는 데가 없다. 제발 지방 중소기업 현장에는 자리 많다, 도리어 구인난이다, 하며 혀를 쯧쯧 차는 엉터리 신문 기사는 믿지 말라. 그 일이란 게 실은 외국인 노동자가 하는 직무인 경우가 많다(제주의 이민호군이 했던 일이 바로 허울 좋은 ‘지방 중소기업 일자리’의 상징이다). 또 당신 같으면 자식과 형제더러 알바보다 월급도 별로 많지 않은 지방에 가서 기숙사 생활 하며 일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현장 중소기업에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것이 우리 현실인 걸 어쩌겠는가.

 

대기업은 돈을 쌓아두고 있다고 한다. 사내 유보금이니 뭐니 하는 용어를 쓰는데, 한마디로 돈은 있는데 투자도 채용도 안 한다는 소리다. 문제는 시급 인상이 아니다. 취직할 의향이 있으면 사람을 받아줄 노동구조가 먼저다. 제발 시급 1만원이 되면 웬만한 월급보다 많다는 말은 하지 말자. 알바의 평균 근속기간은 고작 5개월이다. 그러니 다시 일자리를 찾아서 무급으로 헤매야 하며, 그 시간 동안 무얼 먹고 방세는 뭘로 내는가. 앞이 캄캄하다. 최근 재미있고도 가슴 아픈 만화 한 권을 읽었다. <내 방구 같은 만화>(기묘나 지음·호랑이출판사)다. 알바를 구하면서 만화를 그리는 이 시대 청춘의 한 모습이다. 기성세대인 내가 너무도 미안해서 책장을 덮지 못했다. 일하고 싶어도 일이 없는 세상. 호부호형은 못해도 좋으니 일을 시켜달라는 세상이라니.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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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의 제법 큰 ‘슈퍼’-옛날엔 구멍가게보다 새롭고 큰 가게를 슈퍼라고 불렀다- 앞에는 짐자전거가 놓여 있었다. 시커멓고 커다란 짐받이가 있으며, 더러 짐받이를 키워서 배추 스무 포기쯤은 너끈히 배달할 수 있는 그런 자전거였다. 육중한 무게감, 그건 소년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저 자전거를 탄다는 건 어른으로 인증받는 방법이었다. 슈퍼집 아들에게 아부해서 몇몇 녀석들은 그 자전거를 몰았다. 안장에 앉으면 발이 닿지 않으니 옆에 붙어 서서 페달을 돌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면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짐자전거는 중국집의 필수품이기도 했다. 대개 소년이 그걸 몰았다. 고등학교 같은 건 가지 않고, 중국집에서 먹고 자며 일찍이 사회에 발을 들인 형들. 그 형들이 담배 한 대를 멋지게 피우고는 배달통을 뒤에 싣고 힘차게 페달을 밟는 모습은 진짜 탄성을 자아냈다. 그들도 아직 키가 여물지 않아 겨우겨우 페달에 발을 얹은 처지라 아슬아슬하기는 했지만. 게다가 ‘핸들’에는 우동이나 짬뽕 국물을 담은 노란 양은주전자를 몇 개나 걸고 가고 있었으니. 그때부터 전화로 중국집에 독촉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동네 중국집 홀에 앉아 짜장면을 먹노라면, 전화를 받는 주인의 대답은 늘 이랬다.

 

“벌써 떠났어요.” 그 화교 아주머니가 전화를 끊고는 중국어로 주방에 소리를 치곤 했다. 얼른 음식 내란 말이었을 테다. 그제서야 배달 짜장면이 출발했고, 나는 중국집 주인의 “벌써 떠났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3대 거짓말이라는 걸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의 배달 문화는 이제 짙은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옛 소년 배달부는 여전하되, 인권의 시각으로 다시 보게 된다. 빙판길, 막히는 길을 달려 고객님의 불만을 사지 않기 위해 가슴이 타들어가는 질주가 이어진다. 신호 걸린 사거리에는 맨 앞에 오토바이 부대가 진을 친다. 퀵서비스와 음식 배달이다. 시간이 돈이고, 고객이 왕이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총알 같이 튀어나간다. 문제는 맞은편 차선에는 같은 ‘동료들’이 신호의 마지막을 붙들고 달려들고 있다는 점이다. 오토바이 사고는 늘 일어나고, 사고가 났다 하면 대형이다. 먹는 시장이 사실상 완전 경쟁을 넘어 출혈 경쟁을 하고 있고, 배달은 그나마 그 틈새에서 먹고사는 외식업의 바닥을 이룬다. 주문하는 이나 음식 만드는 이, 배달하는 이가 저가 외식시장에 발을 넣고 몸부림을 친다. 어쩌면 이 구도는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최악의 생존 구조의 압축된 아수라 같은 것이다. 다 ‘쏠리고 몰려서’ 먹고사느라고 인권이나 목숨 같은 건 돌볼 여지도 없이 하루의 안녕을 빌어볼 뿐이다. 그 와중에 정작 돈 잔치는 거대 프랜차이즈 기업들과 배달을 중개한다는 신종 업종 회사들이 벌인다. 세상에! 우리가 사람이라면, 하루에 몇 명씩 죽어가고 장애인이 된다는 배달 ‘소년’들, 배달 노동자의 인권과 안전에 이토록 무심할 수 없다. 이 또한 진정한 적폐가 아닌가. 정부 당국은, 어른들은 당장 이 문제 해결에 나서라. 우리 소년들을 보호하라.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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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치러지기 전에는 학력고사란 게 있었다. 아마도 교육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과목일 텐데, 실업도 고사 과목 중 하나였다. 그게 쓸모가 있든 없든 3년을 열심히 배우고 가르쳤다. 필답고사 320점 만점에 무려 15점이 배점되어 있었다. 속칭 암기과목이니 이른바 무조건 고득점을 노리고 봐야 하는 전략과목이기도 했다. 실업이란 게 워낙 다양해서 상업, 공업, 가사에 농업, 수산업, 광업도 있었다. 고등학교가 속한 지역 사정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업, 공업이 많았다. ‘밥’이 되는 과목이라는 뜻이었다. 농업이니 수산업이니(심지어 광업까지) 하는 과목은 사양산업 같았고, 1980년대에 바라보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실업 과목에 속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인문계를 다녔으니 상업을 배웠다. 문제는 이 과목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었다. 대변 차변이 나오는 부기 부분에 가면, 머리가 다 멍해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부채도 자산이다’라는 원리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남의 돈을 빌려 쓰는데 그게 어찌 ‘내 돈 같은 자산’이 되느냐고. 원서 쓸 날은 가까워 오고, 부채와 자산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그때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하는 재수생 형의 제안은 놀라웠다. 농업을 선택하라는 거였다. 쌀 나무나 겨우 아는 수준에 농업을 어찌 배우냐고, 이제 곧 원서 쓰고 시험이라고. 그 형이 지긋이 웃으며 말했다.

 

“농업은 쉽게 나와. 네가 매일 먹는 게 시험에 나온다고.”

 

과연! 기출문제를 보니 소, 돼지에 쌀에 고구마, 사과와 귤이 시험에 나오는 게 아닌가.

 

나는 그렇게 농업을 순전히 책으로 배웠고, 학력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다. 뚱딴지같은 생각에서 시작된 우연이었지만 농업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무엇보다 도시에서 산 내게도 흥분될 정도로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병아리를 까는 법, 알을 많이 낳게 하는 법, 소와 말의 임신 기간이 사람보다 길다는 거(이 녀석들이 임신한다는 사실을 도시 아이들은 아는가 모르겠다), 사과를 많이 열리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지, 돼지에게는 진흙목욕이 최고라든지…. 농(축산)업이 기본적으로 인간 중심의 이기적인 생산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 입에 들어가는 생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투명한 랩으로 곱게 부위별로 포장된 고기를 고르면서도 그 붉은 살코기가 어떤 존재의 누적된 삶의 부분인지 우리는 이제 알지 못한다. 아니,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산다.

 

 볍씨가 어떻게 모종이 되어 무논에 심어지고 나락이 되는지, 그걸 털어서 어떻게 깎아야 맛있게 먹는지 아는 사람이 도리어 별종이 되는 세상이다. 농축림수산업은 인류를 지탱하는 기초 산업이다. 누구 말마따나 스마트폰을 먹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먹는 것을 이해하는 일, 아마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제일 큰 힘이 될지도 모른다. 단위학교에서 농업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것이 앞이 안 보이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줄 것이다. 별에 버려진 우주인이 인분으로 감자농사를 짓는다는 영화 속의 이야기는 그 의미심장함의 비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이테크 시대에도 우리는 뭔가를 먹어야 하고,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암시하는.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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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김장들 준비하시는지 모르겠다. 배추농사는 나쁘지 않았는데 고추가 영 좋지 않다고 한다. 고추는 기르기 어려운 작물이다. 원래 원산지인 아메리카 대륙과 우리 기후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대충 답이 보인다. 고온 건조한 기후에 어울리는 작물이다. 한국은 비도 많고 탄저병 같은 치명적인 감염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올해 탄저가 고추를 놔두지 않았다. 옛날 김치에는 고추를 많이 안 쓰고 시원했다는 추억을 말하는 분들이 있다. 특히 서울과 경기, 충청, 강원도 김치가 그랬나 보다. 지방마다 고유한 맛은 본디 환경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그때는 농사기술도 부족하고 효과 좋은 농약도 없어서 고추 기르기가 어려웠으니 김치도 담박한 편이었을 거다. 유기농 하는 농민들이 과일만큼 어려운 게 고추라고도 하신다. 한국 고추는 세계에서 매운 편에 속하지 않는다. 달고 부드러운 맛이라고나 할까.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량되어 온 셈이다. 그래서 고춧가루 사용량도 많다. 만약 이탈리아나 멕시코, 동남아 고추처럼 매웠다면 지금처럼 많이 쓸 수 없다.

 

고추는 매운맛도 중요하지만, 일종의 살균작용을 노리고 음식에 넣는다. 고춧가루를 안 쓰는 백김치나 동치미에는 고추 삭힌 게 필수다. 고추의 힘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는 셈이다. 고추를 안 넣은 동치미는 발효과정에서 쉬이 물러진다. 짱짱하고 시원한 동치미 맛은 절반쯤은 고추의 힘이다.

 

 

1970년대 후반에 고추 파동이 났다. 아마 그해 비가 많아서 고추에 탄저가 크게 번졌을 것이다. 수확량이 절반도 안 됐다. 요즘이라면 기후조건과 품종이 비슷한 중국에서 수입해서 얼추 맞췄을 텐데, 당시는 중공(中共)이라고 부르는 적국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김장이 가지는 비중이 지금과는 달랐다. 김장을 해야 겨울 준비가 제대로 되는 것이었고, 김장 솜씨로 집안의 색깔을 표현했다. 배추 몇 포기를 했느냐 하는 것이 가계의 빈부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그러니, 시중에 고추가 없다니 폭동이라도 날 판이었다. 박정희 시절이었다. 안 그래도 뒤숭숭한 유신 독재 말기, 고춧가루 때문에 정권이 타격을 입어서야 되었겠는가. 결국 인도, 멕시코 등에서 고추를 수입했다. 그것도 양이 모자라 배급권을 나눠주었을 정도였다. 이게 사달이 났다. 맵고 쓰기만 했다. 김장을 했더니 먹을 수 없었다. 그 맛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김치가 시커멓고 맛도 써서 젓가락을 댈 수 없었다. 집집마다 버린 김장이 쓰레기통 옆에 대량으로 쌓였다. 그 해, 부자 김장이라는 말이 돌았다. 수입 배급 고추를 안 쓰고 국산 고추로만 한 김장을 뜻했다. 김장은 계급이었고 권력이었달까.

 

올해 김장이 슬슬 시작되었다. 고추 파동이 났어도 가격이 엄청나게 뛰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나마 돈 되는 고추를 힘겹게 지어도 농민들의 이익이 없다는 뜻이고, 한편으로 소비자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이상한 현상이다. 하기야 김장 작파했다고 난리가 날 시절도 아니다만은.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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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잠에 헤매고 있을 시간에 매운 냄새에 깰 때가 있었다. 아직 일고여덟 살 때의 기억이다. 찧은 마늘과 생강 향이 코를 찔렀다. 쿵쿵 하고 절구에 찧어내니 향이 집안에 가득 찼다. 아, 김장하는 날이구나. 마당에서는 멸치젓 달이는 냄새가 났다. 그다지 향기롭지 않았던. 우리 집은 경상도와 서울식을 절충한 김장이라 새우젓은 조금만 넣으셨던 것 같다.

 

 

김장철 전에는 늘 새우젓 장수가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새우젓이요, 새우젓” 하고 외쳤다. 지면이라 그 소리를 들려드릴 수 없는 게 유감이다. 마포 새우젓 장수는 특이하게도 콧소리를 심하게 내는 발음으로 호객했다. 멀리서도 콧소리가 들리면 ‘아하, 새우젓 장수구나’ 하고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새우젓 장수는 흥정을 하고, 리어카에 실린 새우젓을 듬뿍 퍼서 줬다. 그때는 김장도 손이 컸다. 겨울에 달리 먹을 게 없었던지라 김장은 한 집 살림의 팔할이었다. 어지간한 집은 팔십포기, 백포기가 흔했고 어떤 집은 이백포기도 했다.

 

올해 아내는 망설이다가 결국 겨우 스무포기를 하기로 결정하면서 “너무 많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 한 집에 식구가 예닐곱씩은 되던 그 당시 김장은 정말 대단했다. 동네마다 김장 시장이 섰다. 산처럼 배추와 무가 쌓였다. 아득하게 높은 배추 ‘산’ 정상에 일꾼이 서 있어서 아래로 던져댔다. 그걸 리어카에 싣고 집집마다 배달을 했던 것이다. 시장의 고춧가루 가게도 마른 고추를 높게 쌓아놓고 팔았다. 고추를 고르면 즉석에서 빻아줬다. 그 근처를 지날 때면 매운 향에 연신 기침을 해야 했다.

 

김장 날은 품앗이가 기본이었다. 동네 아낙들이 우물가나 펌프 수돗가에 모여들었다. 밤새 절인 배추를 찬물에 씻고, 양념을 만들었다. 그 마법 같던 엄마들의 손놀림. 절인 배춧잎 사이사이에 번개처럼 쓱쓱 양념을 비벼 넣으며 무슨 얘기에 그리도 웃음보가 터지시던지. 그날 저녁에는 하얀 쌀밥을 짓고, 절인 배추에 매운 양념을 듬뿍 넣어 먹었다. 뜨거운 밥과 양념이 매워 혀가 얼얼하던 기억. 돼지고기를 삶아서 같이 냈던 건 더 나중의 일이었다. 고기가 흔해지고 난 뒤였으리라. 생굴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굴이 꽤 비쌌을 테니까.

 

요즘은 배추 절이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아파트에 김장처럼 큰일을 벌일 공간이 있겠나. 아예 김장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 우리 집은 식구가 적은데도 김장을 잇고 있다. 절인 배추를 사서 하는 일이다. 매년 좋은 절인 배추 구하기도 쉽지 않다. 배추가 질기거나 간이 맞지 않아서 김장을 망친 경우도 많다. 직접 절일 수 없으니 감수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올해는 멀리 지리산에서 기른 배추를 절여 받기로 했다. 일교차가 커서 배추가 달고 씩씩하다고 했다. 김장이 시시해졌지만, 김치냉장고가 보급되어 한 해 내내 보관해두고 먹는 셈이라 더 없이 중요한 행사일 수도 있겠다. 아직은 사 먹을 때가 아니야 하고 어떻게든 김장을 하고 있는 여러분들 모두 힘내시라. 하는 김에 조금 더 해서 다른 이들과 나누려는 집들은 두 배로 힘내시라. 올해 김장은 모두 최고로 맛있기를.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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