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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에 해당되는 글 200건

  1. 2017.10.13 메밀 시대
  2. 2017.09.22 양평부추축제
  3. 2017.09.08 목숨 거는 바다
  4. 2017.08.25 최저 가격의 존재 이유
  5. 2017.08.11 먹을 수는 없어
  6. 2017.07.28 한국인 밥상 떠받치는 외국인 노동자
  7. 2017.07.14 우리에게 냉면이란
  8. 2017.06.30 그 옛날 아이스박스의 추억
  9. 2017.06.16 야장을 깔다
  10. 2017.06.02 노포
  11. 2017.05.19 김밥과 5·18
  12. 2017.05.08 요구르트 한 병
  13. 2017.04.21 고객 갑질 이제 그만
  14. 2017.03.24 ‘공동체 음식’ 국밥
  15. 2017.03.10 국밥과 토렴
  16. 2017.02.24 기술자가 사라진 빵집
  17. 2017.02.10 그릇도 맛을 낸다
  18. 2017.01.13 소주 5000원 시대
  19. 2016.12.30 겨울요리
  20. 2016.12.23 계란의 경고


올해처럼 냉면이 화제가 된 적이 드물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오던 ‘노포’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냉면집들이 속속 등장했다. 냉면에 대한 새로운 시장층이 생겼다. 젊은이들이다. ‘밍밍하기만 한’ 평양냉면 육수의 맛을 음미하고 이해하려는 세대가 생겨난 것이다.

 

인터넷이나 방송을 통해서 ‘냉부심’(평양냉면의 맛을 안다는 자부심)이라는 말도 유행했다.

 

냉부심(?)의 기준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앞서 말한 특유의 육수 맛을 감지하는 것이다. 매콤 새콤하지 않고 부드러우며 알 듯 모를 듯한 풍미를 사랑하는 능력이다. 시쳇말로 ‘행주 빤 물’ 같다는 혹평의 그 육수가 맛있어지는 단계다. 다른 하나는 메밀 함량이 높은 면에 대한 애호다. 그동안 메밀 값이 비싸고 구하기 어려워서인지 평양냉면이라고 이름붙이고 실은 전분과 밀가루로 만든 면에 메밀은 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메밀 함량은 1920년대 한 신문에도 “평양냉면은 오직 메밀로만 만든다”는 탐방 기사가 실릴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배합법이다. 메밀은 실은 전국 어디서나 심어 먹던 작물이었다. 특히 비나 가뭄으로 농사를 망쳤을 때 좋은 대안이었다.

 

여름에 심어서 가을께 수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농사가 제일 중요했던 당시, 여름에 벼 포기가 픽픽 쓰러지고 메밀이라도 심을 수 없었다면 어떻게 가을과 겨울을 넘겼을까 끔찍한 일이다. 또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에게 메밀은 아주 좋은 작물이었다. 쌀농사는 안되고, 거친 토질에도 ‘가루’나 ‘쌀’(메밀껍질을 벗긴 상태를 녹쌀이라고 하여 쌀의 대용임을 의미했다)을 주는 메밀의 효용은 상상 이상이다. 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메밀은 녹화사업 등의 목적으로 화전이 금지된 후 생산량이 줄어들고, 쌀과 밀가루가 풍부해지면서 더욱 하락세를 보였다. 시내 냉면집에서 전분에 보릿가루 태운 것을 섞어 가짜가 나왔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있었다. 메밀이 비싸서 생긴 일이다. 요즘은 비교적 싼 수입 메밀이 많아서 함량 자체는 많이 올라갔다. 그래도 메밀은 밀가루나 전분에 비해 고가의 곡물이어서 풍족하게 쓰기 어렵다.

 

올해 메밀 농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 메밀은 이제 구하기 어려운 작물이 아니다. 잡곡으로서 매우 가치 있게 팔린다. 메밀을 많이 넣은 평양식 냉면의 인기 확산도 한몫한 듯하다. 메밀 산지는 세간에 알려진 강원도를 넘어서 전국에 분포하는데, 제주 메밀이 양도 질도 충족시키고 있다. 다만 경관작물이라고 하여 메밀꽃 피는 환상적인 광경을 보기 위해 연작을 장려하다보니 알곡이 작아지는 등 메밀 자체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한겨울에는 꼭 평양 같은 관서지방이 아니어도 메밀로 전병 부치고 수제비를 뜨던 음식문화가 있었다. 메밀이 가장 맛있을 때가 수확 지나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꼭 냉면이 아니어도 시식(時食)으로 메밀을 다채롭게 먹을 수 있다. 우리 민족 음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메밀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면 좋겠다. 아아, 한겨울 메밀묵 장수가 팔던 걸 사서 신김치 얹어 먹고도 싶다. “메밀무욱! 찹싸알떡!”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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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사람들은 내게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법을 묻곤 한다. 그곳에서 살아봤으니 특이한 여행법을 추천해달라는 거다. 내 답은 거의 비슷하다. 로마, 피렌체, 밀라노와 베네치아 말고 작은 도시를 가보라고 권한다. 소박한 이탈리아의 삶을 볼 수 있으니까.      

   

또 하나는 사그라(sagra)에 참여해보라고 한다. 사그라는 작은 축제를 의미하는데, 대개 음식을 주제로 연다. 우리로 치면 면 단위 정도의 작은 마을에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행사를 치른다. 이탈리아도 지방의 노령화, 젊은 인구 부족 현상은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런 작은 축제를 열면서 여전히 마을의 과거와 미래를 이으려는 노력을 한다.   

 

 

개구리(물론 식용이다) 축제나 통돼지구이처럼 흥미로운 주제도 있지만 남들이 보기에 별거 아닌 것도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양파나 파, 고추, 가지 같은 것이 주제가 된다. 축제라고 해서 큰 기대를 하고 갔다가는 실망할 수도 있다. 그저 밤을 까서 케이크를 굽거나, 콩으로 수프를 만들고, 거친 옥수수로 죽을 끓이고 동네에서 나온 와인이나 두어 잔씩 돌린다. 그래도 행사는 흥겹고, 신난다. 번듯하고 멋진 축제는 아니지만 각자 마을에서 잘하는 것, 많이 생산되는 것, 맛난 것을 내놓고 같이 즐기기 때문이다. 소박한 축제인데도 은근히 관광객이 많이 온다.      

 

치즈 축제가 많은데, 치즈란 우리의 장과 같아서 손맛, 지역의 조건에 의해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굳이 이걸 맛보겠다고 멀리서 사람들이 모인다.     

 

사그라를 하는 건, 사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고된 노동과 평범한 일상을 사는 동네 사람들이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이다. 화려하고 잘사는 동네뿐 아니라 변방의 소읍에서도 떳떳하게 자신의 존재를 말하는 무대다. 그참에 지역을 떠난 사람들도 돌아와 반가운 만남의 장이 되기도 한다.        

 

우연히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양동면 양평부추축제’라는 작은 포스터를 봤다. 양동면이라는 지명도 초문이고 축제 주제도 그랬다. 하나 오히려 번듯하고 폼 나는 유명 축제가 아니어서 눈길이 갔다. 큰 예산이 투입되고, 어마어마한 홍보를 하는, 지자체 수장의 선거운동 비슷한 관제 축제가 좀 많은가. 외부 기획사에 큰돈 주고 행사를 맡기고, 정작 주민들은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그런 축제 말이다. 축제의 주체는 관도, 관광객도 아니다. 자발적인 주민이 주인이다. ‘겨우’ 부추 축제라니. 이런 소박함에 절로 흐뭇했다. 양동면은 알고 보니 양평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다. 인구가 고작 4500여명에 그나마 대부분 ‘초’노인들이다. 그런데도 작년에 부추 농가가 똘똘 뭉쳐 첫 번째 축제를 치러냈다. 그 흔한 부추로 말이다.      

 

마치 옛날 추수 뒤 잔치처럼, 깃발 들고 노래 부르면서 흥겨웠다. 농촌은 언젠가부터 대책 없는 ‘미래’로 치부됐다. 노인들만 남아서 그들 이후의 사정은 서로 책임을 미루거나 공허한 슬로건만 떠들고 있다. 노인들이, 부추 심는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다시 축제를 연다. 마음 한구석이 싸해진다. 내일 아침 10시에 양동역 앞에서 개막해서 일요일 저녁까지 축제가 이어진다. 부추전도 부쳐 먹고, 올 때 싱싱한 부추 한 상자 사서 돌아오면 좋을 여정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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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예전에 취재하느라 오징어잡이 배를 탄 적이 있다. 하룻밤을 먼바다에서 보냈는데 정작 취재는 하지도 못했다. 뱃멀미에 속이 뒤집혀 자그마한 선실에서 끙끙 앓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파도가 밀어닥쳐서 뱃전을 때릴 때마다 배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했고, 내 내장까지 울림이 전해졌다. 저승사자가 따로 없었다. 당장이라도 출어를 중단하고 귀항해야 할 것 같은데도 작업 선원들은 오징어가 걸려오는 주낙만 바라봤다. 생과 사 같은 건 그들에게 호사스러운 용어였다. 잡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다는 단순한 현실에서 파도 따위야, 이런 태도였달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선은 어지간하면 출어한다. 해경에서 출어금지령이 내리기 전에는 태풍이 온다고 해도 하늘을 본다. 혹시나 나갈 수 있을까 출어를 가늠한다. 선장은 빚내서 얻은 배 값 상환이 걱정이고, 선원은 출어를 못하면 벌이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한때 만선이 흔하던 시절에는 목돈도 만졌다고 한다. 선원들 얘기는 하나같이 “옛날에는 말이야”로 시작한다. 고기가 너무 많아서 실을 곳이 없어 바다에 일부 버리고 갔다고도 한다. 이제 어지간한 연근해에는 고기가 드물고, 잡는 일도 만만치 않다. 잘 잡히면 경락가가 떨어지고, 안 잡히면 그건 그대로 빈손이 된다.

 

선장들은 “배 팔아치우겠다”고 하고, 선원들 다수는 “이번이 마지막 출어”라고 한다.

‘만선의 기쁨’ 같은 말은 언론에서나 쓰는 사어(死語)다. 시장에서 장을 보는 요리사들도 다 안다. 고기가 점점 볼품없다는 것을. 고기 몇 마리쯤은 덤으로 주던 인심도 사라졌다. 수산시장 경매장에 가보라. 냉동 수입 수산물을 쌓아놓고 파는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고 있는지. 아프리카, 인도양의 여러 나라들, 심지어 수산업 같은 건 할 것 같지도 않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의 이름도 보인다.

 

펄떡펄떡 뛰는 생선은 거의 양식이고, 고깃배가 잡은 생선을 넣은 나무상자는 왜 그리도 초라하게 보이는지. 농사는 뼈 빠지게 지어도 자재값 안 나온다고 한 지 오래고, 수산업도 몇몇 양식업이나 모를까 영세한 소형 어선으로 그물이나 낚시를 당겨봐야 출어비도 안 나온다는 푸념이 가득하다. 국민소득 3만달러짜리 나라의 돼지 축사에서 똥 치우다가 질식사하는 어이없는 사고가 벌어지듯, 바다에서도 먹고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일들이 늘 벌어진다. 며칠 전 포항 앞바다에서 붉은 대게잡이 어선이 사고를 당했다. 사고 조사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한 푼이라고 건져야 하는 처지에 어지간한 파도는 뚫고 가는 게 그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 다른 배들이 오늘도 삼면의 바다와 저 먼바다로 나간다. 생명보험도 잘 안 받아준다는, 이른바 ‘극한직업’을 가진 이들이.

 

다시 우리 밥상에 올라온 생선과 여러 재료들을 생각하게 된다. 밥상은 목숨 건 노동의 결과물이 분명할 텐데, 그 내력을 외면하는 까닭은 우리의 이기심이 너무 깊은 때문인가. 아니면 무심해진 것일까. 그들의 고통에 호응하고 대면할 수 있는 용기는 없는 것일까. 얼마 전, 붉은 대게잡이로 사고를 당한 배의 이름은 광제호다. 27t짜리 소형 어선이었다. 유명을 달리한 선원의 명복을 빌고, 아직도 마치지 못한 실종자 수색이 성공하기를 빌 뿐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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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언젠가 이 칼럼에서 달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완벽한 한 생명(우리는 이것을 완벽한 영양으로만 표현한다)의 값치고, 우리가 달걀을 너무 싸게 먹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달걀값은 한 판에 4000원대에도 거래됐다. 한 알에 130.40원짜리였다는 말이다. 지나치게 싼 것은 의심해보라는 건 진리다. 우리는 전자제품이나 다른 상품을 살 때 이런 원칙을 잘 적용한다. 반품이나 진열했던 것은 아닌지, 심지어 핵심기능을 빼고 출시한 저가제품은 아닌지도 꼼꼼히 따진다. 전자제품이나 기타 상품은 ‘먹을 수도 없는 것’인데 그토록 치밀한 분석을 한다. 영화 칼럼에도 심지어 ‘적정 관람료’라는 게 나온다. 영화가 돈값을 하는지 분석해주는 내용이다. 적정 달걀값은 우리에게 없었다. 더 싸게 무한정 공급되는 달걀의 속사정을 챙겨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두 번의 폭탄을 맞았다. 이미 우리 기억에도 희미한, 조류인플루엔자(AI)로 인한 살처분으로 산란계가 대폭 줄면서 달걀 공급에 비상이 걸렸다. 달걀값이 오르고 ‘더 이상 달걀은 싼값에 펑펑 쓸 수 없는 재료가 되었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때 우리는 이미 강력한 옐로카드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얼른 어린 산란계가 커서 달걀을 쑥쑥 낳아 가격이 안정되기만을 기다렸다. 환부가 곪고 있는데 수술은커녕 팔다리만 주무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 가혹한 시련은 예비되어 있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직면한 식품의 위기다. 달걀의 위기는 어떤 경고의 상징이다. 달걀만의 사정이 절대 아니란 뜻이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서 여전히 논란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돈과 사람의 선순환을 믿고, 최저임금에 인간의 이름을 붙이고자 애썼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다수의 지지가 생겼다. 달걀값도 ‘최저 가격’이 있을 것이다. 숫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런 환경은 보장해야 닭이 건강한 알을 낳는다”는 기준이다. 그 원칙을 준수하려 하는 곳이 바로 여러 생협이다. 불행하게도 어떤 생협이 미처 대비할 수 없었던 문제로 실수가 있었지만, 그것을 빌미로 생협의 노력을 절대 폄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닭과 달걀의 건강에 대해, 동물복지에 대해 말하지 않을 때 거의 유일하게 고민하고 노력해온 집단이 바로 생협이기 때문이다. 이번 문제를 빌미로 달걀 시장을 노려온 대기업들에 기회를 주고 있건 아닌지 우려된다. 좋은 달걀을 위해 애써온 그들의 노력을 일거에 폄하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의 먹거리 문제를 진실로 접근해온 집단이 여러 생협 말고 어디 있었는가 다시 상기할 시점이다. 생협에 대해서는 각자 한발 더 가까이 가서 공부해야 할 것이겠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하고 싶다. 생협이란 생활협동조합의 준말이고,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으며, 그 조합원이 주인인 조직을 말한다. 달걀 파동의 참담한 현실에서 다시 생협을 생각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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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TAG 달걀


입시제도의 변천사까지는 아니어도, 대학 입시가 얼추 어떻게 변해왔는지는 안다. 본고사에서 예비고사,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이름만 바꿨지 그다지 쓸모 있는 학생 고르는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억하건대 가장 웃기는 건 체력장이었다. 고입 연합고사 200점 만점에 20점, 대입 학력고사 340점 중에 20점이 이른바 체력검정 점수였다. 체력으로 점수를 매기고, 그것이 당락에 영향을 준다는 건 상당히 불공정한 게임이다. 그래서 감독 선생님들은 어지간하면 20점 만점을 주기 위해서 ‘적당히’ 채점을 하곤 했다. 문제는 신체장애인 친구들이었다. 장애 때문에 검정을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선심 쓰듯 15점이라는 기본점수를 주는 게 고작이었다. 참말 어른들이 저지르는 개 같은 경우의 제일 윗길에 오를 처사였다. 얼렁뚱땅 뛰어도 대개는 20점을 받는 상대들에게 5점을 까고 들어가는 경쟁이 얼마나 불리했겠는가. 요즘 같으면 당장 인권위원회에 고발당할 사안이 아닐까.

 

그때 학력고사는 실업 과목이 필수였다. 여러 산업 중에서 선택했다. 대개는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상업, 공업을 골랐다. 전국적인 대세였다. 돈 계산하는 상업과 제품 생산하는 공업이 제일 유망한 실업이었으니까. 바닷가 도시나 농업 지역에서 간혹 수산업과 농업을 선택하는 학교가 있는 정도였다. 광업은 사양산업이어서 극소수의 학교에서나 골랐을 뿐이었다.

 

내가 다니던 서울의 학교는 당연히 상업, 공업이었으나 나는 농업을 골랐다.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는 재수생 형이 농업을 공부하는 걸 보고 자유 선택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던 것이었다. 교과서도 없어서 종로서적에서 간신히 참고서를 구했다. 그날 밤, 나는 그 책을 펴들고 밤을 새웠다.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였다. 내가 먹는 닭과 돼지, 쌀과 보리와 감자, 호박과 사과와 포도의 ‘이력’이 빼곡하게 들어 있는 엄청나게 재미있는 책이었다. 닭의 산란을 촉진하기 위해 밤새워 불을 켜두거나, 돼지를 겨우 1년만 길러서 잡는다는 기술을 읽으며 마음이 아팠다. 소나 말이 새끼를 사람보다 더 오래 품는다는 걸 알고 그 어미들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다.

 

달콤한 포도 한 송이를 잘 기르자면 일년 내내 가지 치고 비료 주고 솎아내는 고단한 노동의 연속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내 입에 들어오는 모든 것의 역사를, 말하자면, 농업 교과서가 일러주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시험 당일, 다음과 같은 손쉬운 문제를 틀려버렸지만.

 

문)다음 중 자두나무를 고르시오. 그러고선, 지문으로 비슷비슷한 나무의 실루엣이 그림으로 나와 있었다. 자두나무를 실제로 본 적이 없는 내게는 너무도 어려운 문제였다. 나는 참고서 한 권으로 농업을 배웠지만, 평생 그 여운이 남아 있다. 쌀 한 톨이나 고기 한 점의 이면을 보는 시선을 갖추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 그 시절, 농업 교과서를 쓰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컴퓨터와 인터넷, 인공지능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학교 실업 교육에서 절대 빠뜨릴 수 없는 것일 테다. 그렇지만 도시에 살든, 농촌 학생이든 농·축·수산업을 배우는 일은 무효한 것이 절대 아닐 것이다. 먹어야 사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훌륭한 ‘무엇’이지만 먹을 수는 없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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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20여년 전 유럽에서 겪은 일이다. 가을에 포도 수확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모인 노동자들이 대부분 타국에서 왔다. 포도는 제때 수확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는 일이라 일시적으로 손이 많이 필요하다. 자국의 손이 부족하니, ‘차떼기’로 외국 노동자들을 실어날랐다. 이미 노쇠해가고 있던 서부 유럽 노동시장의 한 단면이었다. 지금 한국도 다르지 않다. 농축수산업 모두 외국인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바닥 일을 맡고 있다.

 

 

최근의 에피소드 한 대목. 봄에 남도의 어느 항구에는 멸치잡이 배가 들어온다. 엄청난 숫자의 미디어가 취재경쟁을 벌인다. 아마추어 사진가들까지 몰려 북새통이다. 멸치를 잡아오면 배를 붙이고 그물에서 털어내는 장면이 인기가 높다. 현장 촬영은 늘 애를 먹지만 더 큰 어려움이 있다. 그물 터는 어부들을 생생하게 잡아야 하는데 이들이 거의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한국 어항을 묘사하는데, 카메라 앵글 속에 한국인이 드물어서 ‘그림이 안된다’는 뜻이다. 그물 터는 노동이 워낙 힘들기 때문에 원래 노동요를 부르면서 고통을 잊곤 했다. 요즘은 이런 노래도 듣기 어렵다.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이 ‘그물 후리는 소리’ 같은 전통 민요를 알 리 없기 때문이다. 이미 수산업도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세상이 됐다.

 

봄에 남도 어느 바다에서 정치망어업을 취재했다. 놀랍게도 고용된 노동자 전원이 외국인이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출신 어부들이 우리 손을 대신하고 있었다. 오직 배를 모는 선장만 한국인이었다. 매일 두세 번 물때 맞춰 고기를 잡아오는 단조로운 노동을 할 한국인이 없다고 했다. 원양어업이든, 연근해어업이든 양식장까지 대개 외국인 노동자가 고기를 잡고 기른다. 농업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충청도의 옥수수 수확 현장에 갔더니 역시 노동자 전원이 몽골과 태국 출신이었다. 땡볕에서 옥수수를 꺾고, 손질해서 자루에 담아내는 과정을 모두 외국인이 치러냈다. 우리가 상상하는 목가적인 전원이나 농장의 풍경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며, 그 현장의 손도 외국인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우리 입에 들어가는 온갖 작물들, 과일이 이미 외국인 노동자의 공력으로 길러진다. 돼지와 닭, 소도 마찬가지다. 특히 축산업은 내국인들에게 기피 일터다. 노동 강도가 엄청 세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 있는 곳에 불법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농축수산업도 마찬가지다. 장시간 노동과 임금 체불, 불법 고용 같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한때 우리의 아픈 상처였던 “사장님 나빠요”는 음식물을 만들어내는 기초 시장에서도 어른거린다. 농업의 경우 최저임금 미만이 허다하다. 아마도 이들이 없다면 농작물 가격은 급격히 오를 것이다. 이런 사정을 핑계 삼아 열악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힘들기로 유명한 어업과 축산 쪽이 임금이 나은 편이지만 그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노동 강도가 존재한다. 

 

우리는 쌀을 제외하면 5% 안팎의 식량 자급률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다. 그나마 그 적은 수치의 ‘국내산’조차 외국인 노동자가 지탱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즐기는 밥상을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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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요즘처럼 냉면이 화제가 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냉면에 대해 따따부따한다고 해서 ‘면스플레인(면+explain)’이라는 부정적 뉘앙스의 신조어도 유행한다. 평양(식)냉면이 진짜 냉면이라는 경도된 생각이 이른바 미식가나 ‘좀 먹어주는’ 애호가들 사이에서 퍼질 정도다. 평양냉면이 냉면의 시대를 연 것은 맞다. 동시에 세계에 퍼져 있는 우리 민족은 제각기 냉면을 먹고 있다. 다른 조리법과 다른 맛을 가진 상태로 말이다.

 

저 멀리 일본 북쪽, 모리오카라는 지방도시에서도 그렇다. 인구가 13만명이라는 이 작은 도시에서는 자그마치 450여군데의 식당에서 냉면을 판다. 한국식(조선식) 또는 평양식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그중에서 우리 동포가 문을 열어 수십년의 역사를 가진 집만도 여럿이다. 삼천리, 명월관, 식도원, 뿅뿅사, 성루각….

 

모리오카에는 3대 명물 면이 있다. 완코소바, 자자멘, 그리고 냉면이다. 단연 냉면이 가장 일상적인 음식으로 유명하다. 한국식 불고기집(야키니쿠)에서는 어디든 냉면을 팔기 때문이다. 1954년, 함흥 출신 재일동포가 우연히 이 도시에 이주하여 먹고살기 위해 ‘식도원’이라는 불고기집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그의 차남 아오키(靑木)에 의해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후발주자인 여러 동포들의 식당에서 냉면을 다루면서 널리 퍼졌다.

 

우리 혈통에 의해 냉면의 씨앗이 움튼 것이다. 이 지역민들은 이 냉면을 ‘헤이조 레이멘’이라고 부른다. 헤이조는 평양(平壤)의 일본식 발음이다. 물론 모리오카 시민의 입맛에 맞게 개량되면서 평양식과는 사뭇 다른 맛으로 현지화되었다. 그러나 냉면 면발과 육수에 깃든 혈연적 유전자는 여전히 살아 있다. 육수라는 한국어를 쓰고 있으며 깍두기 같은 것을 담가서 면에 올려 먹는다. 분틀을 써서 압출하는 식의 제면법도 우리와 똑같다.

 

모리오카 냉면 맛을 처음 본 한국인은 평가가 엇갈리기도 한다. 한국의 평양냉면과 달리 면발이 쫄깃하기 때문이다. 메밀 대신 전분과 밀가루로 면을 뽑는 까닭이다. 기실 서울의 평양냉면도 이미 서울화된 것이니 제각기 뿌리내린 곳에서 다르게 변화해 왔다고 해야 맞다.

 

당대의 북한식 평양냉면은 면발이 상당히 쫄깃하다. 식초와 겨자도 듬뿍 친 육수의 맛은 자극적이다. 서울에서 유행하는 냉면과는 다른 맛이다. 그러니 서울사람들에게 표준화되다시피한 ‘슴슴한 육수와 툭툭 끊기는 메밀면’이라는 공식은 오히려 ‘오리지널’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많은 남한 사람들이 평양과 금강산, 개성에서 냉면을 맛볼 수 있었다. 남북관계가 유연했을 때의 이야기다. 옥류관과 평남면옥, 유경호텔과 고려호텔의 냉면 맛이 회자되었다. 어쩌면 남북관계는 냉면을 통해서 다시 복원될지도 모른다. 냉면세계대회 같은 건 어떨까. 모리오카와 미국과 중국, 남북한의 냉면이 다 모이는 일은 대단히 재미있을 것 같다. 모리오카 냉면을 먹으면서 든 생각이다. 도대체 우리에게 냉면이란 무엇인가 하는 쩌릿한 감동 같은 것이었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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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을 보면 흥미로운 광고가 많다. 계절에 따라 주력 물건도 바뀌었다. 1960년대는 전후의 혼란을 딛고 안락한 가정에 대한 욕망이 극대화되던 시기였다. 겨울에 난로 선전(예전에는 상업적인 광고물도 주로 선전이라고 불렀다), 여름에는 아이스박스였다. 냉장고는 1965년도에 금성사에서 눈표라는 이름으로 첫 제품을 출시했는데, 한동안 아이스박스와 같이 팔렸다. 냉장고는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아이스박스는 1980년대까지도 가난한 집 부엌과 포장마차의 냉장고 노릇을 했다. 동네마다 얼음장수가 까만색 짐자전거에 얼음을 잔뜩 싣고 배달하던 장면도 생각난다. 재미있는 건 그들이 겨울에는 석유, 여름엔 얼음을 팔았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될 일이다. 이런 ‘양수겸장’업은 일본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우리에게 근대를 강제 이식한 일제의 영향력은 그처럼 오래갔다.

 

 

우리 집은 1980년대 초에 냉장고를 샀다. 그 전까지 부엌에는 찬장과 아이스박스가 여름을 지켰다. 얼음 50~100원어치면 하루를 버텼다. 스티로폼으로 형을 짜고, 겉에 시원한 느낌의 푸른색 비닐을 입힌 저가의 아이스박스였다. 고급형은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제품이 있었다. 어쨌든 아이스박스의 냉기를 오래 보존하려고 묘안을 짜내는 게 엄마의 일이었다. 국이나 찌개, 뜨거운 반찬을 만들면 차가운 펌프 물에 식혀서 넣는 건 기본이었다. 여름을 나면, 대개 아이스박스는 집 안 구석으로 밀려났다.

 

우리나라만 아이스박스를 쓴 건 물론 아니었다. 1960년대까지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의 더운 지역에서는 아이스박스가 고정식 부엌 가구로 사용되었다. 부엌에서 길 밖으로 문을 달아 장사꾼이 부엌 안으로 얼음을 쏟아넣고 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나중에 나온 고급형 아이스박스는 냉장고처럼 생긴 모양이었다. 냉기의 특징, 그러니까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효과를 이용하기 위해 나무와 철로 짠 틀 위에 얼음을 넣도록 고안했다.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사가 가정용 전기냉장고를 양산할 때, 그 모양은 사실 얼음 넣는 아이스박스와 암모니아 가스를 이용한 구식 냉장고를 모방했다고 한다.

 

냉장고의 보급은 우리 삶의 그림도 다시 그리게 만들었다. 집집마다 냉장고를 갓 사들이던 1970년대의 여름은 가루주스가 대유행했다. 미제장수가 파는 오렌지맛 가루를 찬물에 타서 얼음을 띄워내는 게 중요한 접대였다. 나중에 국산이 나와서 수요를 크게 늘렸는데, 남대문 도깨비시장이나 미제장수가 취급하는 물건만 못했다. 이미 설탕이 꽤 들어 있는 제품인데도, 백설탕을 듬뿍 넣고 냉동고에서 ‘직접’ 얼린 얼음을 넣어 만든 그 주스는 한 시대를 풍미했다. 아이들 간식으로 ‘아이스바’를 만드는 것도 유행을 탔다. “이제 사지 말고 집에서 직접 만들어 드세요”라는 선전 문구에 다들 아이스바를 만드는 틀과 속을 채울 가루를 샀다. 그 인기는 물론 오래가지 않고 시들해졌다. 아빠가 퇴근길에 사오는 유지방이 듬뿍 든 ‘정통’ 아이스크림 맛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냉장고는 점점 더 커졌고,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이든 무엇이든 그 공간을 꽉꽉 채우는 재미로 여름을 났다. 요즘은 전문 요리사에게 냉장고를 ‘부탁’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엄마가 지성을 들여 관리하던 옛 아이스박스가 새삼 생각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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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여년 전 회사 다닐 때 여름이 오기를 늘 기다렸다. 딱 이맘때다. 해지면 호프집 앞에 깔리는 임시 탁자에서 마시는 한 잔의 생맥주 때문이었다. 7월이 무르익으면 해가 져도 무덥다. 그래서 딱 이즈음이다. 날씨는 선선하지도 덥지도 않지, 목은 마르지, 생맥주 마시기에 그만큼 좋은 조건도 없다. 안주야 북어나 치킨 몇 조각이면 그만이었다. 시내 곳곳, 아니 전국이 요즘 야외 생맥주 대목이다. ‘야장’이라고도 부른다. 업계에서는 전문(?) 용어로 ‘야장 깐다’고 한다. 밤에 탁자 깔고 장을 벌인다는 뜻이겠다. 생맥주 가게는 요즘이 대목이다. 한 해 벌이의 상당 부분을 이때 벌어들인다고도 한다. 문제는 불법 논란이다. 도로는 시나 나라 것이니 무단점유가 되고, 식품위생법에도 저촉된다. 영업허가 조건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영업장의 허가된 장소란 합법적인 공간에 지은 물리적 실체만을 뜻한다. 영업하면서도 늘 불안하다. 차라리 적당한 액수의 도로 점유비를 내고 허가를 받아 장사하고 싶어한다. 법적인 해석과 뒷받침이 필요하고 다른 업종 가게와의 이해관계도 조절해야 한다. 생각보다 상당히 복잡하다. 그래서 매년 어정쩡하고 찜찜하게 야장을 까는 업주들의 속은 불안에 떤다. 벌어먹어야 하는 업주 사정에 보면, 안타깝다. 법의 엄정함에 비추면 또 이게 불법인 경우가 많으니 참 답답하다.

 

서양은 어떤가. 본디 광장 문화가 있는 유럽은 카페가 발달했다. 카페란 대개 음식도 같이 판다. 우리 시각에서 보면 그냥 레스토랑이다. 광장 옆이나 골목의 카페와 레스토랑이 도로를 점유하고 영업할 수 있도록 잘 설계되어 있다. 도로 점유비를 받고 합법적으로 영업한다. 카페는 단순히 영업장이 아니라 일종의 공공성을 띤다는 개념이 들어 있다. 목을 축이고, 고픈 배를 채울 수 있는 공간으로 시민에게 기능하기 때문이다. 타이베이에 가면 주랑(柱廊)이 도시 곳곳에서 보인다. 도로와 건물 사이에 기둥을 세우고 비와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구조물이다. 주랑 건축 비용은 건물주가 낸다고 한다. 대신 그 주랑으로 인해서 생긴 공간을 활용한다. 이곳에 탁자를 깔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실 수 있다.

 

도시 설계의 개념이 달랐던 우리는 이 지점에서 차이가 생긴다. 주랑을 깔 공간도 없고, 인도는 좁다. 그래도 생각을 달리하면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다. 나는 서울의 몇몇 ‘야장’은 명물로 밀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을지로의 생맥주 골목이나 종묘 옆 고기골목을 처음 구경한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입을 떡 벌렸다. 현실세계 같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외국인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열광한다. 고급스러운 공간을 외국인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보면 오산이다. 그들은 오히려 이런 서울만의 그림에 미친다. 여행을 마치고 제일 좋았던 경험을 꼽으라면 대개는 그 야장의 기억이다. 원컨대, 이런 공간을 키우겠다고 나설 일도 아니다. 법적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골목 앞에 커다랗게 아치문을 세우고 ‘○○문화의 거리’라고 명명하는 것만 안 하면 된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이런 골목들을 살릴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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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1900년.’

요새 식당가 간판의 한 풍경이다. 오래된 식당이 좋다는 믿음을 이용한 마케팅이다. 보통 노포(老鋪)라는 한자어를 많이 쓴다. 노(老)자는 안정감을 주고 신뢰를 드러낸다. 중국어와 한자어에서도 이 글자는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존경의 의미를 담는다. 오랫동안 살아남은 것 자체가 믿음이 된다. 생각해보라. 우리나라에서 100년 넘은 식당은 한 개 정도가 겨우 명맥을 잇고 있으니까 말이다. 해방 전에 생겨서 지금껏 운영하는 집도 대여섯 개나 될까 모르겠다. 1970년대에 식당이 많이 생겼지만, 지금껏 하고 있는 집이 드물다. 그래서 1970년대생 식당들은 나이로는 장년에 불과하지만 모두 노포 축에 든다. 왜 그럴까. 이 동네에서는 이렇게 추측한다. 첫째, 힘든 일을 자식 대에 넘기고 싶지 않아서 폐업했다. 그렇다. 식당은 험한 직업이다. 자식이 같은 일을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도울라치면 “너, 가서 공부해!” 하고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노포를 이어받아 하는 2세들은 기억한다. 식당 집 자식. 별로 ‘있어 보이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대를 물리지 않았다. 그렇게 스러진 노포가 많다. 1960~70년대에 생긴 노포가 많았던 피맛골에서 장사했고, 나중에 포클레인에 쓸려갈 때 피맛골 지키기 모임에 활동했던 한 식당주와 통화했다. 그는 “이제 그만하련다. 자식에게도 시키지 않겠다”고 하고는 정말 문을 닫아버렸다. 50년이 넘는 피맛골의 터줏대감이었는데.

 

 

한때 식당을 두고 말하던 농담이 있다. 장사가 잘되면 주방장 겸 사장이 요리를 놓고 카운터에 나가서 계산을 맡는다. 그것도 잠시, 잘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자가용 타고 땅 보러 다닌다는 얘기였다. 고되고 거친 식당보다 땅을 사두는 게 이익이었던 시절의 우화다. 실제 그런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 하루 종일 허리를 학대해가며 주방에서 서 있는 걸 원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최근 서울시에서 노포를 보존하고 앙양하는 사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식당뿐 아니라 오래된 모든 가게가 대상이 된다. 비로소 세월을 안고 살아온 노포를 인정해주는 분위기다. 하나 인증제도에 어려움도 있다. 상당수 가게가 입증 자료가 부실하다. 당연하게도 노포가 이렇게 각광받을 줄 몰랐으니 사진 자료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의심스러운 노포’도 있다. 아무 근거 없이 ‘3대를 내려왔다’느니, ‘60년이 되었다’느니 주장한다. 어찌 되었든 변하는 시절을 드러내는 일화다. 오래된 것은 골동이 된다는 사실이 ‘대물림 가게’라는 정신적 의미까지 확장될 줄이야.

 

노포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가게도 많다. 무한경쟁에서 버텨낼 수 없는 다수의 식당들이다. 자료를 보니, 서울 시민은 1000만명이고 식당 숫자는 11만개가 넘는다. 식당 이용 가능 인구를 1000만의 3분의 1로 잡으면, 식당 하나당 서른 몇 명꼴이다. 살아남는 게 버거운 세상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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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5·18이었다. 이걸 그냥 날짜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대통령까지 행사에 참석해서 젖은 눈으로 노래를 불렀다. 지난 두 정권에서 이른바 합창이냐 제창이냐며 말도 안되는 논란이 벌어졌던 그 노래 말이다. 노래는 정서적이며 정치적이며 선언적이다. 그래서 두 정권의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들이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은 건 당연하다. 5·18의 핵심 당사자 전두환과 두 대통령은 사실상 한몸이기 때문일 테다. 민족미술 진영에서는 이 피어린 항쟁과 관련해서 많은 예술품을 남겼다. 이른바 최근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의 직접 피해자 홍성담 화백이 주도했던 민족해방운동사라는 걸개그림도 그중 하나다. 이 거대한 그림 중에 ‘광주항쟁’이라는 부분이 있다. 계엄군과 맞서 싸우는 청년들 뒤로 ‘아짐’들이 불을 때서 밥을 하고 있는 장면이 한복판에 그려져 있다.

 

모든 투쟁은 연료와 동력이 필요하다. 먹어야 싸운다. 누가 그 밥을 만드느냐도 중요하다. 아마도 저 화가들은 민중의 지지를 상징하는 의미로 밥솥과 하얀 이밥을 정중앙에 배치했으리라. 사건 당시 광주 사는 고등학생이었던 친구가 있다. 5·18 자료 사진이나 화면을 보면 교련복을 입은 까까머리 고교생이 꽤 많이 보인다. 내 친구도 그 현장에 가기 위해 시민군의 트럭에 올라탔다. 길가에 ‘아짐’들이 밥을 지어서 즉석 주먹밥이나 김밥을 만들어 올려주었다. 비장하고 눈물겨운 장면이었다. 내 친구는 김밥을 먹으며 금남로로 가는 도중 그만 트럭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팔을 크게 다쳤고, 시민군을 치료해주던 광주기독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았다. 어쩌면 그는 그 추락 때문에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금남로에서는 계엄군의 총탄이 날아올 무렵이었으니까.

 

김밥은 시민군의 식량이었고, 광주 시민들의 마음이었다. ‘내 새끼들 싸우는데 밥이라도 해다 나르자’는 아짐들의 가슴이었다. 김밥은 일제강점기에 소풍과 행사의 휴대음식으로 각광받은 식민의 음식이었다. 그것이 광주에서 하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맞닥뜨린 1997년의 금융위기는 다시 김밥의 시대를 열었다. 직장에서 잘리거나 하루아침에 직장이 없어진 사람들이 몇 푼의 돈으로 김밥집을 열었다. 프랜차이즈점이었다.

 

한 줄 1000원의 김밥은 편의점이 번성하기 전에 가장 싸고 간단한 식사로 세상에 파고들었다. 즐거운 소풍의 상징에서 광주의 아픔으로, 다시 낮은 노동계급과 그 자식들의 간편식으로 변해갔다. 비정규직과 취업준비생이 시켜 먹는 한 줄의 점심이 되었다.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만든 음식 중에서 가장 싼 음식이 바로 김밥인 세상이다. 한 줄 1000원에서 1500원으로 올랐지만, 여전히 놀라운 가격일 뿐이다. 한 줄 달랑 시켜놓으면 손님을 미안하게 만드는 음식이다. 쉼없이 김밥을 마는 ‘아짐’들의 임금은 얼마일까, 저 값에도 남을까, 2000원 넘는 치즈김밥이나 김치김밥을 시킬 것 그랬나, 별 생각이 다 들게 한다. 어제 행사를 보며 김밥의 기구한 운명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참, 그때 다친 내 친구야, 조만간 김밥 한 줄 나눠먹자. 옛 얘기를 다시 듣고 싶구나.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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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5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1987년 대선 즈음이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 후보 등이 나왔다. 군 부재자투표를 했다. 나는 앞길이 캄캄한 일병이었다. 부대에서는 선거 한 달 전부터 연일 정신교육을 했다. 퀴퀴한 냄새 나는 막사에 중대 병력을 때려 넣고 중대장이며 장교들이 훈시를 했다. 겁도 주고 달래기도 했다. “나 죽는 거 보려면 맘대로 찍어!” 읍소에 가까운 협박도 했다. 그들도 불쌍했다. 노태우 안 찍을 사람 손 들라고 했다. 중대원 중에 딱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김영삼 찍을 깁니다.” 부산 출신 상병이었다. 그는 그대로 ‘격리’되었다. 간부들이 돌아가며 회유하며 얼렀다. 너 때문에 다른 애들 다 죽어도 좋다는 거냐? 사단장님 특별 관심사항인 거 몰라? 그도 결국 굴복했다. 투표날이 왔다. 중대장실에 한 명씩 병사들을 불러올렸다. 인사계가 투표용지를 내밀었다. 1번 노태우 후보 찍는 난만 접은 상태였다. 기가 막히게 머리가 돌아갔다. 혹시라도 돌발적으로 2, 3번 후보를 찍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공개투표에 완전 엉터리 투표였다. 그렇게 1번을 꾹 누르고 수치심에 떠는 병사들에게 인사계는 ‘요구르트’ 한 병씩을 돌렸다. 돈 100원 하는 그 싼 음료가 표를 팔아치운 대가였다. 그것도 아마 병사들 후생에 쓰라고 나온 운영비로 산 것이겠지. 나는 그 후로 죄 없는 유산균 발효유가 보기 싫어졌다. 알토란 같은 군대 60만표가 노태우 후보 쪽에 갔다. 빵 한 쪼가리 제 손으로 사주지도 않고 말이다. 소문도 돌았다. 어떤 부대에서는 다른 후보를 찍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자 사전검열로 걸러내어 아예 버렸다고 한다. 사단장의 “100프로 1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수많은 청년들의 표를 더럽고 추악한 결과로 만들어버렸다. 결과는 아시는 바대로 노태우의 당선이었다. 그날 대대장은 개표방송을 보면서 ‘위대한 보통사람’의 당선을 밤새 축하하느라 폭음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투표에 양심을 팔아먹은 적이 한번 더 있었다. 1987년 4·13 호헌 조치 때인가 그랬다. 전두환은 민주세력의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려는 의도로 이 성명을 발표했다. 이 호헌 조치에 잇따라 국민투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호헌이냐 아니냐. 모든 장병의 가슴에 ‘호헌 찬성’ 리본을 달게 했다. 군인인지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의 사병(私兵)인지 모를 시대였다. 역시 엄청난 정신교육을 퍼부었다. 총 쏘고 야전훈련할 병사들을 올스톱시키고 막사에서 치러진 강요였다. 그때 빵이 나왔다. 봉황 두 마리와 ‘대통령 각하 하사품’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봉건시대도 아니고, 제 주머니 털어 사는 것도 아닌데 무슨 하사(下賜)인가 하고 기분 나빠했던 기억도 있다. 하긴 그는 29만원밖에 없는 인간인데, 그때도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세금 헐어서 사줬겠지.

 

대선이 코앞이다. 이제 그런 강요는 군대에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군시절의 선거는 참혹한 양심의 위배였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문신으로 마음에 남아 있다. 누굴 찍든 사람은 한 표의 민주적 권리를 자유의지로 행사할 권리가 있다. 이 단순한 권리가 짓밟혔던 역사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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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이 힘든 건 육체보다 감정이 상할 때다. 특히 주로 감정을 ‘팔아서’ 일하는 이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식당 업주도 감정노동을 한다. 늘 웃어야 하고, ‘고객님’의 요청을 최대한 받들어 모셔야 한다. 이 무한경쟁의 식당 세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물건과 서비스를 팔고 돈을 받는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적당한 ‘교환’인지 헷갈린다. 고객님이 ‘갑질’을 심하게 해도 당하고 산다. 입길에 오르기 두려워서다. 한 후배는 강남에서 양식당을 한다. 처음 온 손님이 “나를 몰라보느냐”며 집기를 던지고 옮겨 적을 수도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지금도 부들부들 떨린다고 한다. 밤에 잠을 잘 못 자는 증세도 생겼다. 손님의 폭언은 이 동네에서 그다지 듣기 어려운 말이 아니다. 식당 노동자들은 그렇게 조금씩 무너진다. 사소한(?) 일들도 참 많다. 식당마다 찻숟가락이나 작은 포크 같은 기물이 없어지는 건 다반사다. 손님이 자리를 뜨면 없어진다. 그렇다고 가방을 뒤질 수가 있겠는가. 뷔페식당에 ‘락앤락’ 통을 가지고 와서 음식을 넣어가는 사람도 있다. 보온병에 커피도 담아간다고 한다. 뷔페는 ‘배’ 말고 어떤 용기도 지참할 수 없는 게 불문율 아닌가. 물론 극히 일부의 일이다. 그래도 한 건이라도 벌어지면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카페가 많아졌다. 이 동네도 스트레스가 심하다. 커피를 한 잔만 주문한 후 리필해서 친구와 나눠 먹는 손님도 있다. 카페도 먹고살아야 한다. 1인 1주문은 기본이다. 하루종일 자리 차지하는 이들도 있다. 물건 놔두고 점심 먹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밖에서 음식 가져오면 안된다고 해도, 케이크며 김밥과 순대까지 꺼낸다. 케이크는 그 카페에서도 파는데 말이다. 홀 서버로 몇 년을 일한 후배는 아예 이 직업을 접었다. 하도 성희롱을 당해서다. 국립대학 학장이라는 자가 스무 살짜리 여자 서버의 엉덩이를 만지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아주 유명한 가수의 아비란 자가 한 와인바에서 서버를 더듬었다. 나도 현장에서 그것을 목격했다. 아무 말도 못한 내가 부끄러워서, 나는 지금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왕년의 포스코 왕 상무 사건이나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태 같은 갑질은 유명한 항공사니까 그나마 널리 알려졌다. 작고 힘없는 식당과 카페에서는 더 한 일이 벌어져도 공론화되기 힘들다. 사고가 난 후, 손님의 일방적 주장을 담은 인터넷 게시판이나 트위터, 페이스북 글에 대해 방어권도 거의 없다. 섣불리 변명했다가는 익명의 누리꾼들의 십자포화를 맞기 십상이다. “그럴 만했으니까 그런 거 아니요?” 이런 시각이 있다. 게다가 이쪽에서 일하는 이들은 각종 인권 문제와 관련해서 교육받지 못하고 있다.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라 끙끙 앓는다. 노조도 없고, 업종 단체는 유명무실하다. 국내 업종별 노동자 숫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게 요리사와 서버다. 숫자에 걸맞은 어떤 연대도 교육도 없다. 이번 대선에서 어느 후보도 관련 공약을 내지 않았다. 암담하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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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은 세계에 전례가 드문 이 땅의 음식이다. 한국 음식의 이미지에도 늘 등장한다. 시장과 국밥은 일종의 정서적 공동체다. 지방 5일장의 히트작은 여전히 국밥이다. 그 내용은 대개 동물의 뼈와 고기를 푹 고아서 쌀밥과 김치를 곁들여 내는 방식이다. 수많은 다른 요리법이 있지만 이 ‘원형’의 변주일 뿐이다. 국밥은 설렁탕과 해장국과 순댓국과 장국밥과 육개장을 모두 아우른다. 역사적으로 국에 밥을 말아 내는 방식이라 하여 국밥이었다. 이제는 ‘따로국밥’도 많아졌다. 토렴도 어렵고, 전자기기로 갓 지은 쌀밥을 낼 수 있으니 굳이 말지 않는 것도 한 이유다. 옛 해장국 골목의 증언을 종합하면 토렴의 이유가 명확해진다. 당시 전기밥솥이 없었기 때문이다. 쌀이 귀해서 밥 자체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다. 각자 먹을 밥을 집에서 들고 와서 국만 사서 밥을 넣어 먹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공장 된장 대신 집집마다 남는 된장을 사들여 해장국을 끓여 팔았다고 한다.

 

 

국밥은 공동체의 음식이다. 모든 노동과 두레의 현장에는 흔히 솥이 걸렸고, 그것은 국밥을 의미했다. 옛날 다니던 학교 겨울 운동장에서는 야구부 훈련이 있었다. 이때도 국밥솥이 걸려서 선수 자모들이 교대로 나와 국밥을 끓였다. 고기, 우거지, 고춧가루, 두부 등속을 넣고 푹 끓였다. 나도 그것을 늘 얻어먹었는데, 한겨울 삭풍 부는 운동장에서 텅 빈 속을 데우는 놀라운 음식이었다. 심지어 군대에서도 국밥을 먹었다. 야전훈련을 나가서 기름때 전 야전취사복을 입은 병사들이 국밥솥을 걸었다. ‘똥국’이라고 부르던 맛없는 된장에 김치를 섞어 밥을 말아 냈다. 반합에 받은 그 ‘유사 국밥’을 먹으며 대책 없는 추위를 견뎠던 것이다. 대학생 때 농촌활동에서도 얻어먹은 것이 국밥이었다. 짧은 준비와 설비로도 많은 이들이 함께 만족할 수 있는 음식, 그것은 국밥 말고 달리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음식사에서 이처럼 오래되고 질긴 생명력을 지닌 외식은 없다. 국수도 1950년대 미국의 공여로부터 대중화되었고, 냉면도 100년 이상의 역사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오롯이 국밥만이 100년 이상의 역사를 품고 있다.

 

조선후기 화가 김홍도의 그림에조차 주막 장국밥을 먹는 사내가 등장하니까 말이다. 상공업이 그나마 발달해가던 조선 후기에 주막이 성업하기 시작했고, 그 밥상의 총아가 국밥이었을 것이다. 유럽의 레스토랑 역사를 다룬 여러 책들을 보면서 나는 우리 음식사가 허전함을 늘 아쉬워하고 있다. 사농공상이라, 돈 버는 일을 경시했던 조선의 정책적 숙명이 외식업의 얇은 역사를 예고한 셈이었다. 식당의 발달은 오롯이 돈 버는 일의 당당함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돈이 돌고 사람이 돌아야 외식업이 흥하기 마련인 것이다.

 

드디어 저 거친 바다에서 배가 떠올랐다. 그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다시 국밥솥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한 맺힌 국밥이 되리라. 아아, 밥은 다시 생명이고 사라진 이들의 상에 올리는 마지막 제물이 되리라. 그대, 돌아오라.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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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식들이 돌아가며 먹고 싶은 걸 말하는데, 한 녀석이 이런다. “고깃국에 이밥이나 실컷 말아먹었으면.” 피자나 치킨, 짜장면이 없던 시절이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없는 이에게 고깃국은 대단한 음식이었을 테다.

 

돈 받고 파는 요식(料食) 중에 고깃국, 즉 국밥처럼 실감나는 음식은 드물었다. 김치나 된장은 사먹는다는 느낌이 적다. 밖에서 돈 내고 먹는다고 하면 짜장면 말고는 국밥이 오랫동안 주인공이었다.

 

국밥은 누구나 한 술 뜰 수 있는 음식이기도 했다. 국밥에는 찬이 적다. 국에 밥을 말아내고 찬 없이 빨리 싸게 먹는 형식으로 발전했다. 조선후기에 김홍도가 그린 주막 풍경에도 뚝배기를 기울여가며 국밥을 퍼넣는 장정의 모습이 나온다. 상업이 발달하지 않아 유럽에 비해 레스토랑의 역사가 짧은 조선에서 주막은 그나마 ‘돈 주고 사먹는 외식’의 한 역사를 이루어 왔던 것이다.

 

 

그 주막의 메인 메뉴는 역시 국밥이었다. 국밥은 어지간한 장시가 있는 곳에서는 다 성행했다. 사람이 모이면 허기가 지고, 싸게 한 그릇 먹기에 국밥만 한 게 없었다. 나중에 미국 밀가루가 값싸게 풀리기 전에는 역시 국밥이 즉석 음식의 왕이었다. 장꾼들이 먹는 음식이 국밥이요, 한번에 많이 끓여서 빨리 낼 수 있는 음식도 국밥이었다.

 

토렴도 그렇게 발달했다. 미리 썰어둔 밥과 고기를 따뜻하게 데우는 기술, 건더기가 든 뚝배기에 펄펄 끓는 국물을 부었다 내렸다 하면서 딱 먹기 좋은 온도에 맞추어내는 기술이다. 토렴은 전기보온밥솥이 없던 때, 밥을 데우는 데 최적의 방법이었다.

 

밥풀에서 전분이 풀려서 국물이 탁해지는 걸 막아주는 것도 토렴이었다. 그렇게 상에 내면 차갑던 밥이 입에서 부드럽게 풀리면서 적당한 온도에서 씹혔다. 질이 좋지 않은 밥도 먹어낼 수 있는 마술이기도 했다.

 

국밥은 이렇게 본디 토렴과 한 뚝배기를 이루면서 ‘패스트푸드’로 민중에 자리 잡았다. 토렴한 밥과 국은 딱 먹기 좋은 온도였고, 일에 바쁘고 허기진 민중들이 빨리 먹어낼 수 있었다. 이제 토렴하는 집을 찾는 건, 어지간히 헤아리지 않으면 어렵다. 펄펄 끓는 뚝배기가 주력이다. 언제나 따끈한 밥이 있는데, 굳이 밥을 식혀 토렴할 일이 없기도 하지만, 토렴이 결국 그놈의 ‘인건비’가 되기 때문이다. 식당 기술자들이 없어서 토렴을 하라고도 못한다. 국만 뜨고, 퍼 둔 밥 꺼내주면 될 일을 누가 펄펄 끓는 국솥에 뚝배기 기울여 손에 화상 입어가며 토렴하겠는가.

 

토렴 잘하기로 유명했던 여러 오래된 국밥집들이 점차 토렴을 버리고 있다. 손님들도 뜨거운 밥을 따로 내주는 걸 좋아하는 이가 많다고 한다.

 

토렴에는 본디 기대하지 않았던 효과도 있다. 음식의 온도가 적당(섭씨 80도 미만)해서 입이나 식도의 화상을 예방할 수 있다. 암 예방수칙에 뜨거운 음식을 조심하라는 건 의사들의 공식적인 의견이기도 하다. 토렴하는 국밥집을 응원하고 싶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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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다닐 때 이른바 건설일용노동자를 잠시 했다. 새참으로 빵이 나오면 선배들-김씨니 박씨니 하는 오직 ‘씨’로만 불리던 늙수그레한 막노동자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어렸고, 빵이 좋았다. 왜 빵을 싫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빵은 지긋지긋한 집 음식과 다른 세계였다. 우선 달았다. 단팥이나 크림이 들어 있어서 좋았다.

 

초등학교 때는 나중에 빵 공장에 다니고 싶었다. 빵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학교 앞에서는 빵을 팔았다. 제일 좋아하는 건 찐빵집 빵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화교를 통해서 전파되었을, 팥이 들어간 그 찐빵은 구수하고 비릿한 효모 냄새로 이미 반쯤 넋을 빼앗는 존재였다. 구멍가게에서는 보름달이니 삼립크림빵이니 하는 공장 빵을 팔았다. 노을이라는 이름의 기다란 빵은 양이 많아서 인기였다. 제과점에서 탁자를 차지하고 식빵을 시켜도 되던 때였다. 설탕을 달라고 해서 찍어 먹었다. 음료수 한 잔 없이도 그 빵이 꿀떡 넘어갔다.

 

 

빵은 호화로운 간식이었다. 그 빵값을 아끼려고 집집마다 어머니들이 ‘제빵기’를 월부로 사들였다. 반죽 레시피대로 만들면, 질척하고 달콤한 이상한 ‘케이크’가 탄생했다. 그걸 얻어먹으러 친구네 가기도 했다. 우리 엄마에게 그런 기계를 사달라고 하는 건 턱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 가정용 제빵기계도 알고 보니 일본에서 들여온 기술이었다. 정식 라이선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똑같은 기계가 지금도 일본에서 팔리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우리는 일본 빵의 세례 속에서 살았다. 유명한 빵집의 대다수는 일본인들이 패전과 함께 철수하면서 넘기고 간 일종의 적산자원이었다. 기술자로 일하던 조선인들이 그곳에서 다시 빵을 구웠다. 아직도 일본풍의 빵이 우리 제과점에 많은 것도 그런 이유다. 일본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빵을 배웠다. 군국주의 국가가 되면서 해군 중심의 군사문화가 널리 퍼졌다. 해군은 영국을 모델로 하는 서양식 식생활을 퍼뜨리는 매개체였다. 빵과 고기를 일본인의 식탁에 올리는 숙주였다. 화혼양재(和魂洋才)랄까, 유럽의 빵이 일본화되기 시작했다. 딱딱한 하드롤을 일본인들이 좋아하도록 부드럽게 만들었다. 이스트 냄새 대신 누룩으로 발효시켰다. 술빵이었다. 여기에다 결정적으로 단맛이 없는 ‘식사용 빵’ 대신 단팥을 넣어 맛을 바꿨다. 달지 않다는 뜻의 ‘식빵’이라는 말도 바로 일본이 만들어낸 용어다.

 

그 빵 문화가 조선에 그대로 이식되었다. 부족한 장비와 시설로 기술자들이 빵을 구워냈다. 그렇게 우리 빵의 역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어려운 환경에서 과자를 굽고 제빵하던 기술자들의 맥이 아슬아슬하다. 프랜차이즈 빵이 대세가 되면서 우리가 거리에서 만나는 빵의 다수는 공장에서 납품받아 진열된다. 어린 제빵 기술자 지망생이 그 프랜차이즈빵집의 좁은 부엌에서 몇 가지 빵을 굽기는 하지만, 마이스터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주요 도시의 터줏대감 빵집들도 거개 사라지면서 우리 빵 역사도 묻혀간다. 아쉽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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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릇을 보고 사서 쓰는 게 취미다. 福(복)자가 새겨진 밥주발이나 국그릇, 막걸리 잔이다. 내 손에 들어온 낡은 그릇에는 이력서가 없다. 누가 이걸로 밥을 먹었을까, 쌀은 제대로 넣어서 지은 밥일까, 이 작은 종지에 넣은 건 무슨 반찬이었을까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동시에 처연해지기도 한다. 주인 잃은 그릇, 대개는 버림받아서 결국 내 수중에 온 셈일 테니까. 거기에 옛사람들의 궁핍했을 삶까지 겹쳐서 마음이 짠해진다. 이런 그릇 구하기는 몇 해 전까지는 상당히 쉬웠다. 한번은 전주 한옥마을 근처의 골동가게에서 그릇을 골랐더니, “그냥 한 박스 가져가. 막걸리값이나 주고” 이러신 적도 있다. 요즘은 제법 멋을 낸 그릇들(더러 금박을 두른 대접도 있다)은 몇 만원도 나간다. 울퉁불퉁하고 색깔도 고르지 않은, 그저 실용적인 용도에 최소한의 치장을 한 그런 그릇에 국을 담고 밥을 푸면 마음도 편해진다. 일본의 도자기를 이르는 야키(燒)들은 아름답고 예술적인 경우가 많은데, 놓고 감상하기는 몰라도 시금치와 김치를 담자면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하다.

 

 

옛 그릇이라고 해서 사기나 도자기만 있는 것도 아니다. 스테인리스강, 그냥 일제강점기식 언어로 치면 ‘스뎅’인 금속 그릇도 옛 물건에 든다. 우리 옛 그릇 문화를 몰아낸 주범(?)이며 멋대가리 없는 소재라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나는 이것조차도 옛 멋이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쉽고 따뜻한 영혼이 깃드는 것 같다. 스테인리스 그릇도 잘 보면 오래된 흔적을 가질수록 멋이 깊다. 소재 특성상 고급할 수 없어 더 애착이 간다. 정릉동의 숭덕분식은 40년이 넘은 초등학교 앞 떡볶이집이다. 이 집의 명물은 즉석떡볶이를 담아주는 스테인리스 그릇이다. 오래되어 반질반질하고 편안한 그릇에 어린 학생들이 떡볶이를 담아 먹는다.

 

스테인리스는 원래 크롬과 철의 결합이다. 단단하고 녹이 안 스는 데다가 가벼워서 총신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전쟁물자가 사람의 생활을 이롭게 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금속은 전방위로 우리 생활에 들어왔다. 제기(祭器)가 바뀌었고 앉은뱅이 식탁이 되었으며, 수저도 모두 바뀌었다. 요즘 스테인리스는 가벼워서 경박하다. 예전 것은 상당히 무거운데, 이는 얇게 철판을 제조하는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날부터 스테인리스 그릇을 제조했던 장인들을 만났더니 이것도 현장의 역사가 있었다. 양은과 놋쇠를 밀어냈는데, 멜라민에 치여서 찬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용으로 쓰이는 속칭 ‘뱅뱅들이’(둥근 스테인리스 그릇 제조방법) 주발과 국그릇, 냉면 그릇 등을 만들면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중국산 수입품이 들어오면서 이 산업도 큰 타격을 받은 상태다.

 

봄이 되면 마산 진동면의 삼거리식당을 가야지, 하고 벼른다. 이 집에서 제철에 맞춰 해주는 미더덕요리도 좋은데, 특히나 낡은 스테인리스 그릇이 좋기 때문이다. 던져도 깨지지 않고, 위생적으로 잘 닦이고, 그래서 고단한 시장거리 아주머니들의 선택을 받았던 스테인리스 그릇들이야말로 얼마나 장한 존재인가 싶어진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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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값도 오른다고 기사가 나오고 있다. ‘서민 경제’라는 말에 꼭 붙는다. 한 병에 5000원 시대가 열렸다. 강남 일부이지만 4000원도 그렇게 시작해서 서울의 대세가 됐다. 알코올 함량은 떨어지는데 소주 값은 오른다. 원가 상승에 빈병 보증금 인상 때문이라고 한다. 시민들은 담배처럼 소주 값에까지 세금을 올리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우리가 많이 마시는 희석식 소주는 세율이 낮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이미 고급 위스키나 맥주와 같은 72%다. 교육세도 추가로 30% 붙는다. ‘서민의 술’이라고 하는 희석식 소주의 세율도 이미 최고점 수준이다. 병당 500원이 넘는 세금이 붙는다. 물론 담배보다는 한참 낮다.

 

예전에 농촌활동을 갔는데 대접한다고 나온 술이 소주였다. 막걸리보다 소주는 고급이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우리에게 있었다. 마포의 돼지고기 문화를 이끌었던 ‘최대포’의 창업주 기록에 의하면, 소주를 마시면 고기 안주가 무료인 시대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소주는 ‘다루 소주’라고 하여 속칭 ‘막소주’였는데도 그랬다. 말통으로 받아온 소주를 병에 따라서 내는 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주는 고아서 내리는 증류주라는 인식이 있었다. 제조원가가 비싸다고 생각했다. 맑은 술이니 독하게 취하고 싶은 이들에게 어필했다. 당시 여러 통제로 막걸리의 품질이 급락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카바이트 막걸리’라고 하여 마시면 머리가 아프다고 천대받았다. 이 틈에 소주는 시장을 넓혔다.

 

 

희석식 소주는 참 많은 변화를 거쳤다. 지역별 쿼터제가 있어서 다른 지방의 술이 도 경계를 넘지 못했다. 호남선을 타고 귀경하면 열차 판매원이 매번 다른 상표의 소주를 팔았다. 전라도-충청도-경기도-서울권역으로 들어오면서 소주 브랜드가 바뀌었다(그때는 기차 여행이 시간이 길어서 흔히 객차에서 소주를 마셨다).

 

이런 지역쿼터제는 영업권을 법으로 보장해주는 대신 정치자금줄 노릇을 했다고 한다. 목포의 유명한 삼학소주는 당시 정권 눈 밖에 난 김대중 선생에게 정치자금을 줬다는 이유로 공중분해되었다는 건 거의 정설이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소주 회사도 부침을 거듭했다. 법 개정으로 소주의 판매권역도 자유화되었다. 전통의 지역 소주 회사가 무너지고 흡수 합병되었다. 거대기업이 소주 시장에 진출, 영업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유명한 전통의 소주 회사들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외국회사에 넘어갔다. 소주는 순전히 우리 국민의 애호 술인데, 경영권은 외국계 회사가 갖고 있는 경우도 많다. 소주 도수가 이제 향을 혼합한 것들은 12도짜리까지 나온다. 소주 맛은 싱거워지는데 값이 오른다. 알코올 중독을 걱정하는 의료인들이나 정책당국은 소주 덜 마시는 사회를 바란다. 그러나 이 미친 시대, 소주라도 마시지 않으면 어쩔 것이냐고 아우성이다. 소주 5000원 시대는 이제 대세가 되는 것일까. 새해부터 주머니가 더 가벼워질 불안에 빠진 많은 이들에게는 참으로 괴로운 소식이다. 소주라도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는 시절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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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칼바람이 불면 늘 사십 년 전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는 얼마나 추웠던지 손발과 볼에 동상이 걸리는 아이들이 숱했다. 싸구려 화섬이나 거친 모직으로 만든 외투가 고작이었고, 오리털 제품은 나오기 전이었다. 나왔더라도 서울 변두리 소년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그 추위에도 노점상이 있었다. 풀빵이나 군고구마 장수였다. 호떡은 대개 화교가 운영하는 어엿한 가게였다. ‘도라무깡’을 개조하거나 벽돌로 화덕을 만들고 빈 사과 궤짝을 부수어 불을 지폈다. 화덕구이 호떡이었다. 어쩌다 이걸 하나 사먹으려면 길게 줄을 서야 했다. 가게에선 연탄아궁이를 내놓고 호빵과 국빵을 쪘다. 국빵이란 일종의 중국식 만두로 속이 들어 있지 않았다. 대신 같이 주는 걸쭉한 수프에 만두를 찍어 먹었다. 인기가 없어서 금세 출시가 중단되었다.

 

 

요즘은 푸성귀며 고기며 겨울에도 언제든 먹을거리를 풍성하게 볼 수 있지만, 그때는 시장도 썰렁했다. 배추나 무, 겨울 시금치나 있었을라나. 기억이 없다. 일찍 삭은 김장김치로 김치죽(갱시기)을 끓여서 먹는 게 채소의 전부였다. 봄동이 나오기 전까지는. 없는 재료를 가지고 어머니는 늘 솜씨를 발휘했다. 볼이 꽝꽝 얼어서 하교하면 어머니가 부엌에서 동태와 물오징어를 손질하고 계시곤 했다. 무를 썰어 넣은 두 가지 요리가 준비되는 것이었다. 동태찌개는 머리째 넣고, 무를 넉넉히 깔았다. 동태살에서 진한 국물이 나와서 맛있는 냄새가 퍼질 즈음 고춧가루를 풀면 화사하고 매운 향이 집 안에 가득했다. 동태 알과 내장이 들어 있으면 금상첨화. 식구가 많아서 건더기보다 국물이 많았다. 별달리 맛을 낼 재료가 있었겠는가. 아마도 미원이나 조금 넣고 끓이시지 않았을까. 나는 아버지가 뜨거운 국을 ‘시원하다’고 하는 이유를 이미 어렸을 때 알았다. 동태 머리를 쪽쪽 빨았고, 내장을 감싸고 있던 거무스름한 뱃가죽이 더 달다는 것도 알았다. 궁하면 아이들이 일찍 어른이 된다.

 

우리집은 회를 먹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요리한 것이 물오징어회였다. 겨울이니까 오징어의 선도가 좋았고, 어머니는 마음놓고 살점을 발랐다. 오징어를 툭툭 썰고 시원한 겨울 무를 저민다. 고춧가루 식초에다 설탕 넣고 버무리는 무침회였다.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오징어의 속살. 산 오징어도 먹을 수 있는 요즘이지만, 어머니의 겨울 물오징어 맛만큼은 못한 것 같다. 살집 두툼하고 씹는 맛이 좋던 그때 오징어는 아주 위풍당당한 어물이었다. 우리 식탁에 동태가 없는 것도 아니고 오징어도 올라온다. 듣자니 두 어물을 잡는 우리 어민의 노고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베링해 차가운 바다에서 목숨 걸고 명태를 낚으며, 오징어를 걸기 위해 거친 파도가 이는 먼바다까지 나가고 있다. 게다가 중국 배들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면서 겨우 어창을 채워 들어온다고 한다. 삭풍이 불면 생각나는 저 어물들의 뒷사정이 이제 가슴을 저미고,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음식이 간절해진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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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공상과학영화 제목으로 오인하기 좋다. 아닌 게 아니라 AI, 즉 조류인플루엔자 관련 보도는 현실세계를 다루는 것 같지 않다. 2000만마리 살처분, 긴급 공수, 백신 확보 비상. 덕분에 국민은 국정농단 정치공부를 하는 와중에 산란계와 육계의 차이, 철새의 이동경로 분석학도 배우고 있다. 몇 해 전에도 AI와 관련한 칼럼을 이 지면에 썼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예상대로 방역선은 뚫리고 살처분이 거의 유일한 대안이 됐다. 그리고는 저절로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게 사실상 정부 대책의 전부다. 국민들은 AI 발생 뉴스를 들으면 체념한다. 끝까지 가겠군, 그렇게 생각한다. 엄청난 숫자의 닭을 살처분하고, 그 부족분을 수입하고 그러겠지 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반복되는 일에 감각이 무뎌진 것이다. 계란 값은 계속 오르고 있다. 계란 값을 또 올릴 거냐는 물음에 도매업자들은 시니컬하게 대꾸한다. “계란이 있어야 올리든지 말든지. 우리도 팔 계란이 없다”고.

 

닭도 생명이다. 자연상태에서 몇 년을 산다. 육계는 한 달이 넘으면 이내 도축되어 우리 입으로 들어온다. 산란계는 더 오래 살지만 본디 천수에 턱도 없이 적은 나이에 죽는다. 알 낳는 능력이 떨어지면 도태된다. 이런 얘기를 양계전문가에게 했더니 그의 대답이 이랬다.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지요. 닭장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좁고 불편한 사육장에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죽을 때도 살처분이라고 부른다. 생명 존중 같은 것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우리가 존엄을 보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먹기 위해 죽이는 것은 ‘도살’이니, 구분을 위해 살처분이라는 말을 쓰는 게 고작이다.

 

 

처분이라는 말을 우리가 가장 많이 쓴 시대는 바로 일제강점기였다. 제국주의 권력의 용어였다. 식민지를 다루는 필살기였다. 독재정권의 전유물이기도 했다. 그들이 저지른 온갖 ‘처분’이 지금 ‘박근혜·최순실 시대’의 토양이 됐다. 그 용어를 가져다가 그대로 쓴다. 아무리 닭이, 소·돼지가 미물이라도 말이다.

 

계란은 어미 몸에서 천천히 만들어진다. 알로 태어나서 다시 병아리로 태어난다. 두 번 태어나는 신기한 동물이다. 그렇게 병아리가 되자마자 암수 구분을 통해서 수놈은 가혹한 최후(이것도 살처분이다)를 맞는다. 암놈이어서 운 좋게 살아남은 닭은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이익에 최적화된 양분을 공급받으며 적정한 알을 생산하다가 생을 마친다. 이런 시스템이 현대 양계다. 현대, 과학 이런 말 뒤에 숨은 의미는 미친 듯이 돌아가는 시장이다. 계란 값이 오르기 전, 가게에 들어오는 계란 한 판의 도매가가 4000원대였다. 생명의 정수가 모여 있는(그리하여 완벽한 영양이라고 칭송하는) 계란 한 개에 100원 조금 넘는다. 10년 동안 온갖 물가가 오르는 동안 계란 값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계란은 가치에 비해 워낙 싸다.

 

올라가는 계란 값은 영원히 싼 값에 계란을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경고다. 어쩌면 계란이라는 고마운 존재에 대한 인간의 무신경을 다그치는 일일 수도 있겠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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