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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에 해당되는 글 196건

  1. 2017.08.11 먹을 수는 없어
  2. 2017.07.28 한국인 밥상 떠받치는 외국인 노동자
  3. 2017.07.14 우리에게 냉면이란
  4. 2017.06.30 그 옛날 아이스박스의 추억
  5. 2017.06.16 야장을 깔다
  6. 2017.06.02 노포
  7. 2017.05.19 김밥과 5·18
  8. 2017.05.08 요구르트 한 병
  9. 2017.04.21 고객 갑질 이제 그만
  10. 2017.03.24 ‘공동체 음식’ 국밥
  11. 2017.03.10 국밥과 토렴
  12. 2017.02.24 기술자가 사라진 빵집
  13. 2017.02.10 그릇도 맛을 낸다
  14. 2017.01.13 소주 5000원 시대
  15. 2016.12.30 겨울요리
  16. 2016.12.23 계란의 경고
  17. 2016.12.16 대통령의 혼밥
  18. 2016.12.12 김밥아짐들
  19. 2016.12.02 어묵의 일상
  20. 2016.11.25 선술집


입시제도의 변천사까지는 아니어도, 대학 입시가 얼추 어떻게 변해왔는지는 안다. 본고사에서 예비고사,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이름만 바꿨지 그다지 쓸모 있는 학생 고르는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억하건대 가장 웃기는 건 체력장이었다. 고입 연합고사 200점 만점에 20점, 대입 학력고사 340점 중에 20점이 이른바 체력검정 점수였다. 체력으로 점수를 매기고, 그것이 당락에 영향을 준다는 건 상당히 불공정한 게임이다. 그래서 감독 선생님들은 어지간하면 20점 만점을 주기 위해서 ‘적당히’ 채점을 하곤 했다. 문제는 신체장애인 친구들이었다. 장애 때문에 검정을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선심 쓰듯 15점이라는 기본점수를 주는 게 고작이었다. 참말 어른들이 저지르는 개 같은 경우의 제일 윗길에 오를 처사였다. 얼렁뚱땅 뛰어도 대개는 20점을 받는 상대들에게 5점을 까고 들어가는 경쟁이 얼마나 불리했겠는가. 요즘 같으면 당장 인권위원회에 고발당할 사안이 아닐까.

 

그때 학력고사는 실업 과목이 필수였다. 여러 산업 중에서 선택했다. 대개는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상업, 공업을 골랐다. 전국적인 대세였다. 돈 계산하는 상업과 제품 생산하는 공업이 제일 유망한 실업이었으니까. 바닷가 도시나 농업 지역에서 간혹 수산업과 농업을 선택하는 학교가 있는 정도였다. 광업은 사양산업이어서 극소수의 학교에서나 골랐을 뿐이었다.

 

내가 다니던 서울의 학교는 당연히 상업, 공업이었으나 나는 농업을 골랐다.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는 재수생 형이 농업을 공부하는 걸 보고 자유 선택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던 것이었다. 교과서도 없어서 종로서적에서 간신히 참고서를 구했다. 그날 밤, 나는 그 책을 펴들고 밤을 새웠다.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였다. 내가 먹는 닭과 돼지, 쌀과 보리와 감자, 호박과 사과와 포도의 ‘이력’이 빼곡하게 들어 있는 엄청나게 재미있는 책이었다. 닭의 산란을 촉진하기 위해 밤새워 불을 켜두거나, 돼지를 겨우 1년만 길러서 잡는다는 기술을 읽으며 마음이 아팠다. 소나 말이 새끼를 사람보다 더 오래 품는다는 걸 알고 그 어미들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다.

 

달콤한 포도 한 송이를 잘 기르자면 일년 내내 가지 치고 비료 주고 솎아내는 고단한 노동의 연속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내 입에 들어오는 모든 것의 역사를, 말하자면, 농업 교과서가 일러주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시험 당일, 다음과 같은 손쉬운 문제를 틀려버렸지만.

 

문)다음 중 자두나무를 고르시오. 그러고선, 지문으로 비슷비슷한 나무의 실루엣이 그림으로 나와 있었다. 자두나무를 실제로 본 적이 없는 내게는 너무도 어려운 문제였다. 나는 참고서 한 권으로 농업을 배웠지만, 평생 그 여운이 남아 있다. 쌀 한 톨이나 고기 한 점의 이면을 보는 시선을 갖추게 된 것이라고나 할까. 그 시절, 농업 교과서를 쓰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컴퓨터와 인터넷, 인공지능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학교 실업 교육에서 절대 빠뜨릴 수 없는 것일 테다. 그렇지만 도시에 살든, 농촌 학생이든 농·축·수산업을 배우는 일은 무효한 것이 절대 아닐 것이다. 먹어야 사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훌륭한 ‘무엇’이지만 먹을 수는 없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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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20여년 전 유럽에서 겪은 일이다. 가을에 포도 수확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모인 노동자들이 대부분 타국에서 왔다. 포도는 제때 수확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는 일이라 일시적으로 손이 많이 필요하다. 자국의 손이 부족하니, ‘차떼기’로 외국 노동자들을 실어날랐다. 이미 노쇠해가고 있던 서부 유럽 노동시장의 한 단면이었다. 지금 한국도 다르지 않다. 농축수산업 모두 외국인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바닥 일을 맡고 있다.

 

 

최근의 에피소드 한 대목. 봄에 남도의 어느 항구에는 멸치잡이 배가 들어온다. 엄청난 숫자의 미디어가 취재경쟁을 벌인다. 아마추어 사진가들까지 몰려 북새통이다. 멸치를 잡아오면 배를 붙이고 그물에서 털어내는 장면이 인기가 높다. 현장 촬영은 늘 애를 먹지만 더 큰 어려움이 있다. 그물 터는 어부들을 생생하게 잡아야 하는데 이들이 거의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한국 어항을 묘사하는데, 카메라 앵글 속에 한국인이 드물어서 ‘그림이 안된다’는 뜻이다. 그물 터는 노동이 워낙 힘들기 때문에 원래 노동요를 부르면서 고통을 잊곤 했다. 요즘은 이런 노래도 듣기 어렵다.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이 ‘그물 후리는 소리’ 같은 전통 민요를 알 리 없기 때문이다. 이미 수산업도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세상이 됐다.

 

봄에 남도 어느 바다에서 정치망어업을 취재했다. 놀랍게도 고용된 노동자 전원이 외국인이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출신 어부들이 우리 손을 대신하고 있었다. 오직 배를 모는 선장만 한국인이었다. 매일 두세 번 물때 맞춰 고기를 잡아오는 단조로운 노동을 할 한국인이 없다고 했다. 원양어업이든, 연근해어업이든 양식장까지 대개 외국인 노동자가 고기를 잡고 기른다. 농업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충청도의 옥수수 수확 현장에 갔더니 역시 노동자 전원이 몽골과 태국 출신이었다. 땡볕에서 옥수수를 꺾고, 손질해서 자루에 담아내는 과정을 모두 외국인이 치러냈다. 우리가 상상하는 목가적인 전원이나 농장의 풍경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며, 그 현장의 손도 외국인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우리 입에 들어가는 온갖 작물들, 과일이 이미 외국인 노동자의 공력으로 길러진다. 돼지와 닭, 소도 마찬가지다. 특히 축산업은 내국인들에게 기피 일터다. 노동 강도가 엄청 세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 있는 곳에 불법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농축수산업도 마찬가지다. 장시간 노동과 임금 체불, 불법 고용 같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한때 우리의 아픈 상처였던 “사장님 나빠요”는 음식물을 만들어내는 기초 시장에서도 어른거린다. 농업의 경우 최저임금 미만이 허다하다. 아마도 이들이 없다면 농작물 가격은 급격히 오를 것이다. 이런 사정을 핑계 삼아 열악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힘들기로 유명한 어업과 축산 쪽이 임금이 나은 편이지만 그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노동 강도가 존재한다. 

 

우리는 쌀을 제외하면 5% 안팎의 식량 자급률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다. 그나마 그 적은 수치의 ‘국내산’조차 외국인 노동자가 지탱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즐기는 밥상을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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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아마 요즘처럼 냉면이 화제가 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냉면에 대해 따따부따한다고 해서 ‘면스플레인(면+explain)’이라는 부정적 뉘앙스의 신조어도 유행한다. 평양(식)냉면이 진짜 냉면이라는 경도된 생각이 이른바 미식가나 ‘좀 먹어주는’ 애호가들 사이에서 퍼질 정도다. 평양냉면이 냉면의 시대를 연 것은 맞다. 동시에 세계에 퍼져 있는 우리 민족은 제각기 냉면을 먹고 있다. 다른 조리법과 다른 맛을 가진 상태로 말이다.

 

저 멀리 일본 북쪽, 모리오카라는 지방도시에서도 그렇다. 인구가 13만명이라는 이 작은 도시에서는 자그마치 450여군데의 식당에서 냉면을 판다. 한국식(조선식) 또는 평양식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그중에서 우리 동포가 문을 열어 수십년의 역사를 가진 집만도 여럿이다. 삼천리, 명월관, 식도원, 뿅뿅사, 성루각….

 

모리오카에는 3대 명물 면이 있다. 완코소바, 자자멘, 그리고 냉면이다. 단연 냉면이 가장 일상적인 음식으로 유명하다. 한국식 불고기집(야키니쿠)에서는 어디든 냉면을 팔기 때문이다. 1954년, 함흥 출신 재일동포가 우연히 이 도시에 이주하여 먹고살기 위해 ‘식도원’이라는 불고기집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그의 차남 아오키(靑木)에 의해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후발주자인 여러 동포들의 식당에서 냉면을 다루면서 널리 퍼졌다.

 

우리 혈통에 의해 냉면의 씨앗이 움튼 것이다. 이 지역민들은 이 냉면을 ‘헤이조 레이멘’이라고 부른다. 헤이조는 평양(平壤)의 일본식 발음이다. 물론 모리오카 시민의 입맛에 맞게 개량되면서 평양식과는 사뭇 다른 맛으로 현지화되었다. 그러나 냉면 면발과 육수에 깃든 혈연적 유전자는 여전히 살아 있다. 육수라는 한국어를 쓰고 있으며 깍두기 같은 것을 담가서 면에 올려 먹는다. 분틀을 써서 압출하는 식의 제면법도 우리와 똑같다.

 

모리오카 냉면 맛을 처음 본 한국인은 평가가 엇갈리기도 한다. 한국의 평양냉면과 달리 면발이 쫄깃하기 때문이다. 메밀 대신 전분과 밀가루로 면을 뽑는 까닭이다. 기실 서울의 평양냉면도 이미 서울화된 것이니 제각기 뿌리내린 곳에서 다르게 변화해 왔다고 해야 맞다.

 

당대의 북한식 평양냉면은 면발이 상당히 쫄깃하다. 식초와 겨자도 듬뿍 친 육수의 맛은 자극적이다. 서울에서 유행하는 냉면과는 다른 맛이다. 그러니 서울사람들에게 표준화되다시피한 ‘슴슴한 육수와 툭툭 끊기는 메밀면’이라는 공식은 오히려 ‘오리지널’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많은 남한 사람들이 평양과 금강산, 개성에서 냉면을 맛볼 수 있었다. 남북관계가 유연했을 때의 이야기다. 옥류관과 평남면옥, 유경호텔과 고려호텔의 냉면 맛이 회자되었다. 어쩌면 남북관계는 냉면을 통해서 다시 복원될지도 모른다. 냉면세계대회 같은 건 어떨까. 모리오카와 미국과 중국, 남북한의 냉면이 다 모이는 일은 대단히 재미있을 것 같다. 모리오카 냉면을 먹으면서 든 생각이다. 도대체 우리에게 냉면이란 무엇인가 하는 쩌릿한 감동 같은 것이었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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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옛날 신문을 보면 흥미로운 광고가 많다. 계절에 따라 주력 물건도 바뀌었다. 1960년대는 전후의 혼란을 딛고 안락한 가정에 대한 욕망이 극대화되던 시기였다. 겨울에 난로 선전(예전에는 상업적인 광고물도 주로 선전이라고 불렀다), 여름에는 아이스박스였다. 냉장고는 1965년도에 금성사에서 눈표라는 이름으로 첫 제품을 출시했는데, 한동안 아이스박스와 같이 팔렸다. 냉장고는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아이스박스는 1980년대까지도 가난한 집 부엌과 포장마차의 냉장고 노릇을 했다. 동네마다 얼음장수가 까만색 짐자전거에 얼음을 잔뜩 싣고 배달하던 장면도 생각난다. 재미있는 건 그들이 겨울에는 석유, 여름엔 얼음을 팔았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될 일이다. 이런 ‘양수겸장’업은 일본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우리에게 근대를 강제 이식한 일제의 영향력은 그처럼 오래갔다.

 

 

우리 집은 1980년대 초에 냉장고를 샀다. 그 전까지 부엌에는 찬장과 아이스박스가 여름을 지켰다. 얼음 50~100원어치면 하루를 버텼다. 스티로폼으로 형을 짜고, 겉에 시원한 느낌의 푸른색 비닐을 입힌 저가의 아이스박스였다. 고급형은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제품이 있었다. 어쨌든 아이스박스의 냉기를 오래 보존하려고 묘안을 짜내는 게 엄마의 일이었다. 국이나 찌개, 뜨거운 반찬을 만들면 차가운 펌프 물에 식혀서 넣는 건 기본이었다. 여름을 나면, 대개 아이스박스는 집 안 구석으로 밀려났다.

 

우리나라만 아이스박스를 쓴 건 물론 아니었다. 1960년대까지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의 더운 지역에서는 아이스박스가 고정식 부엌 가구로 사용되었다. 부엌에서 길 밖으로 문을 달아 장사꾼이 부엌 안으로 얼음을 쏟아넣고 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나중에 나온 고급형 아이스박스는 냉장고처럼 생긴 모양이었다. 냉기의 특징, 그러니까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효과를 이용하기 위해 나무와 철로 짠 틀 위에 얼음을 넣도록 고안했다.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사가 가정용 전기냉장고를 양산할 때, 그 모양은 사실 얼음 넣는 아이스박스와 암모니아 가스를 이용한 구식 냉장고를 모방했다고 한다.

 

냉장고의 보급은 우리 삶의 그림도 다시 그리게 만들었다. 집집마다 냉장고를 갓 사들이던 1970년대의 여름은 가루주스가 대유행했다. 미제장수가 파는 오렌지맛 가루를 찬물에 타서 얼음을 띄워내는 게 중요한 접대였다. 나중에 국산이 나와서 수요를 크게 늘렸는데, 남대문 도깨비시장이나 미제장수가 취급하는 물건만 못했다. 이미 설탕이 꽤 들어 있는 제품인데도, 백설탕을 듬뿍 넣고 냉동고에서 ‘직접’ 얼린 얼음을 넣어 만든 그 주스는 한 시대를 풍미했다. 아이들 간식으로 ‘아이스바’를 만드는 것도 유행을 탔다. “이제 사지 말고 집에서 직접 만들어 드세요”라는 선전 문구에 다들 아이스바를 만드는 틀과 속을 채울 가루를 샀다. 그 인기는 물론 오래가지 않고 시들해졌다. 아빠가 퇴근길에 사오는 유지방이 듬뿍 든 ‘정통’ 아이스크림 맛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냉장고는 점점 더 커졌고,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이든 무엇이든 그 공간을 꽉꽉 채우는 재미로 여름을 났다. 요즘은 전문 요리사에게 냉장고를 ‘부탁’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엄마가 지성을 들여 관리하던 옛 아이스박스가 새삼 생각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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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이십여년 전 회사 다닐 때 여름이 오기를 늘 기다렸다. 딱 이맘때다. 해지면 호프집 앞에 깔리는 임시 탁자에서 마시는 한 잔의 생맥주 때문이었다. 7월이 무르익으면 해가 져도 무덥다. 그래서 딱 이즈음이다. 날씨는 선선하지도 덥지도 않지, 목은 마르지, 생맥주 마시기에 그만큼 좋은 조건도 없다. 안주야 북어나 치킨 몇 조각이면 그만이었다. 시내 곳곳, 아니 전국이 요즘 야외 생맥주 대목이다. ‘야장’이라고도 부른다. 업계에서는 전문(?) 용어로 ‘야장 깐다’고 한다. 밤에 탁자 깔고 장을 벌인다는 뜻이겠다. 생맥주 가게는 요즘이 대목이다. 한 해 벌이의 상당 부분을 이때 벌어들인다고도 한다. 문제는 불법 논란이다. 도로는 시나 나라 것이니 무단점유가 되고, 식품위생법에도 저촉된다. 영업허가 조건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영업장의 허가된 장소란 합법적인 공간에 지은 물리적 실체만을 뜻한다. 영업하면서도 늘 불안하다. 차라리 적당한 액수의 도로 점유비를 내고 허가를 받아 장사하고 싶어한다. 법적인 해석과 뒷받침이 필요하고 다른 업종 가게와의 이해관계도 조절해야 한다. 생각보다 상당히 복잡하다. 그래서 매년 어정쩡하고 찜찜하게 야장을 까는 업주들의 속은 불안에 떤다. 벌어먹어야 하는 업주 사정에 보면, 안타깝다. 법의 엄정함에 비추면 또 이게 불법인 경우가 많으니 참 답답하다.

 

서양은 어떤가. 본디 광장 문화가 있는 유럽은 카페가 발달했다. 카페란 대개 음식도 같이 판다. 우리 시각에서 보면 그냥 레스토랑이다. 광장 옆이나 골목의 카페와 레스토랑이 도로를 점유하고 영업할 수 있도록 잘 설계되어 있다. 도로 점유비를 받고 합법적으로 영업한다. 카페는 단순히 영업장이 아니라 일종의 공공성을 띤다는 개념이 들어 있다. 목을 축이고, 고픈 배를 채울 수 있는 공간으로 시민에게 기능하기 때문이다. 타이베이에 가면 주랑(柱廊)이 도시 곳곳에서 보인다. 도로와 건물 사이에 기둥을 세우고 비와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구조물이다. 주랑 건축 비용은 건물주가 낸다고 한다. 대신 그 주랑으로 인해서 생긴 공간을 활용한다. 이곳에 탁자를 깔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실 수 있다.

 

도시 설계의 개념이 달랐던 우리는 이 지점에서 차이가 생긴다. 주랑을 깔 공간도 없고, 인도는 좁다. 그래도 생각을 달리하면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다. 나는 서울의 몇몇 ‘야장’은 명물로 밀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을지로의 생맥주 골목이나 종묘 옆 고기골목을 처음 구경한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입을 떡 벌렸다. 현실세계 같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외국인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열광한다. 고급스러운 공간을 외국인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보면 오산이다. 그들은 오히려 이런 서울만의 그림에 미친다. 여행을 마치고 제일 좋았던 경험을 꼽으라면 대개는 그 야장의 기억이다. 원컨대, 이런 공간을 키우겠다고 나설 일도 아니다. 법적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골목 앞에 커다랗게 아치문을 세우고 ‘○○문화의 거리’라고 명명하는 것만 안 하면 된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이런 골목들을 살릴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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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since 1900년.’

요새 식당가 간판의 한 풍경이다. 오래된 식당이 좋다는 믿음을 이용한 마케팅이다. 보통 노포(老鋪)라는 한자어를 많이 쓴다. 노(老)자는 안정감을 주고 신뢰를 드러낸다. 중국어와 한자어에서도 이 글자는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존경의 의미를 담는다. 오랫동안 살아남은 것 자체가 믿음이 된다. 생각해보라. 우리나라에서 100년 넘은 식당은 한 개 정도가 겨우 명맥을 잇고 있으니까 말이다. 해방 전에 생겨서 지금껏 운영하는 집도 대여섯 개나 될까 모르겠다. 1970년대에 식당이 많이 생겼지만, 지금껏 하고 있는 집이 드물다. 그래서 1970년대생 식당들은 나이로는 장년에 불과하지만 모두 노포 축에 든다. 왜 그럴까. 이 동네에서는 이렇게 추측한다. 첫째, 힘든 일을 자식 대에 넘기고 싶지 않아서 폐업했다. 그렇다. 식당은 험한 직업이다. 자식이 같은 일을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도울라치면 “너, 가서 공부해!” 하고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노포를 이어받아 하는 2세들은 기억한다. 식당 집 자식. 별로 ‘있어 보이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대를 물리지 않았다. 그렇게 스러진 노포가 많다. 1960~70년대에 생긴 노포가 많았던 피맛골에서 장사했고, 나중에 포클레인에 쓸려갈 때 피맛골 지키기 모임에 활동했던 한 식당주와 통화했다. 그는 “이제 그만하련다. 자식에게도 시키지 않겠다”고 하고는 정말 문을 닫아버렸다. 50년이 넘는 피맛골의 터줏대감이었는데.

 

 

한때 식당을 두고 말하던 농담이 있다. 장사가 잘되면 주방장 겸 사장이 요리를 놓고 카운터에 나가서 계산을 맡는다. 그것도 잠시, 잘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자가용 타고 땅 보러 다닌다는 얘기였다. 고되고 거친 식당보다 땅을 사두는 게 이익이었던 시절의 우화다. 실제 그런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 하루 종일 허리를 학대해가며 주방에서 서 있는 걸 원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최근 서울시에서 노포를 보존하고 앙양하는 사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식당뿐 아니라 오래된 모든 가게가 대상이 된다. 비로소 세월을 안고 살아온 노포를 인정해주는 분위기다. 하나 인증제도에 어려움도 있다. 상당수 가게가 입증 자료가 부실하다. 당연하게도 노포가 이렇게 각광받을 줄 몰랐으니 사진 자료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이런 분위기를 틈타 ‘의심스러운 노포’도 있다. 아무 근거 없이 ‘3대를 내려왔다’느니, ‘60년이 되었다’느니 주장한다. 어찌 되었든 변하는 시절을 드러내는 일화다. 오래된 것은 골동이 된다는 사실이 ‘대물림 가게’라는 정신적 의미까지 확장될 줄이야.

 

노포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가게도 많다. 무한경쟁에서 버텨낼 수 없는 다수의 식당들이다. 자료를 보니, 서울 시민은 1000만명이고 식당 숫자는 11만개가 넘는다. 식당 이용 가능 인구를 1000만의 3분의 1로 잡으면, 식당 하나당 서른 몇 명꼴이다. 살아남는 게 버거운 세상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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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5·18이었다. 이걸 그냥 날짜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대통령까지 행사에 참석해서 젖은 눈으로 노래를 불렀다. 지난 두 정권에서 이른바 합창이냐 제창이냐며 말도 안되는 논란이 벌어졌던 그 노래 말이다. 노래는 정서적이며 정치적이며 선언적이다. 그래서 두 정권의 대통령을 비롯한 관료들이 이 노래를 부르지 않은 건 당연하다. 5·18의 핵심 당사자 전두환과 두 대통령은 사실상 한몸이기 때문일 테다. 민족미술 진영에서는 이 피어린 항쟁과 관련해서 많은 예술품을 남겼다. 이른바 최근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의 직접 피해자 홍성담 화백이 주도했던 민족해방운동사라는 걸개그림도 그중 하나다. 이 거대한 그림 중에 ‘광주항쟁’이라는 부분이 있다. 계엄군과 맞서 싸우는 청년들 뒤로 ‘아짐’들이 불을 때서 밥을 하고 있는 장면이 한복판에 그려져 있다.

 

모든 투쟁은 연료와 동력이 필요하다. 먹어야 싸운다. 누가 그 밥을 만드느냐도 중요하다. 아마도 저 화가들은 민중의 지지를 상징하는 의미로 밥솥과 하얀 이밥을 정중앙에 배치했으리라. 사건 당시 광주 사는 고등학생이었던 친구가 있다. 5·18 자료 사진이나 화면을 보면 교련복을 입은 까까머리 고교생이 꽤 많이 보인다. 내 친구도 그 현장에 가기 위해 시민군의 트럭에 올라탔다. 길가에 ‘아짐’들이 밥을 지어서 즉석 주먹밥이나 김밥을 만들어 올려주었다. 비장하고 눈물겨운 장면이었다. 내 친구는 김밥을 먹으며 금남로로 가는 도중 그만 트럭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팔을 크게 다쳤고, 시민군을 치료해주던 광주기독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았다. 어쩌면 그는 그 추락 때문에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금남로에서는 계엄군의 총탄이 날아올 무렵이었으니까.

 

김밥은 시민군의 식량이었고, 광주 시민들의 마음이었다. ‘내 새끼들 싸우는데 밥이라도 해다 나르자’는 아짐들의 가슴이었다. 김밥은 일제강점기에 소풍과 행사의 휴대음식으로 각광받은 식민의 음식이었다. 그것이 광주에서 하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맞닥뜨린 1997년의 금융위기는 다시 김밥의 시대를 열었다. 직장에서 잘리거나 하루아침에 직장이 없어진 사람들이 몇 푼의 돈으로 김밥집을 열었다. 프랜차이즈점이었다.

 

한 줄 1000원의 김밥은 편의점이 번성하기 전에 가장 싸고 간단한 식사로 세상에 파고들었다. 즐거운 소풍의 상징에서 광주의 아픔으로, 다시 낮은 노동계급과 그 자식들의 간편식으로 변해갔다. 비정규직과 취업준비생이 시켜 먹는 한 줄의 점심이 되었다.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만든 음식 중에서 가장 싼 음식이 바로 김밥인 세상이다. 한 줄 1000원에서 1500원으로 올랐지만, 여전히 놀라운 가격일 뿐이다. 한 줄 달랑 시켜놓으면 손님을 미안하게 만드는 음식이다. 쉼없이 김밥을 마는 ‘아짐’들의 임금은 얼마일까, 저 값에도 남을까, 2000원 넘는 치즈김밥이나 김치김밥을 시킬 것 그랬나, 별 생각이 다 들게 한다. 어제 행사를 보며 김밥의 기구한 운명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참, 그때 다친 내 친구야, 조만간 김밥 한 줄 나눠먹자. 옛 얘기를 다시 듣고 싶구나.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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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5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1987년 대선 즈음이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 후보 등이 나왔다. 군 부재자투표를 했다. 나는 앞길이 캄캄한 일병이었다. 부대에서는 선거 한 달 전부터 연일 정신교육을 했다. 퀴퀴한 냄새 나는 막사에 중대 병력을 때려 넣고 중대장이며 장교들이 훈시를 했다. 겁도 주고 달래기도 했다. “나 죽는 거 보려면 맘대로 찍어!” 읍소에 가까운 협박도 했다. 그들도 불쌍했다. 노태우 안 찍을 사람 손 들라고 했다. 중대원 중에 딱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김영삼 찍을 깁니다.” 부산 출신 상병이었다. 그는 그대로 ‘격리’되었다. 간부들이 돌아가며 회유하며 얼렀다. 너 때문에 다른 애들 다 죽어도 좋다는 거냐? 사단장님 특별 관심사항인 거 몰라? 그도 결국 굴복했다. 투표날이 왔다. 중대장실에 한 명씩 병사들을 불러올렸다. 인사계가 투표용지를 내밀었다. 1번 노태우 후보 찍는 난만 접은 상태였다. 기가 막히게 머리가 돌아갔다. 혹시라도 돌발적으로 2, 3번 후보를 찍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공개투표에 완전 엉터리 투표였다. 그렇게 1번을 꾹 누르고 수치심에 떠는 병사들에게 인사계는 ‘요구르트’ 한 병씩을 돌렸다. 돈 100원 하는 그 싼 음료가 표를 팔아치운 대가였다. 그것도 아마 병사들 후생에 쓰라고 나온 운영비로 산 것이겠지. 나는 그 후로 죄 없는 유산균 발효유가 보기 싫어졌다. 알토란 같은 군대 60만표가 노태우 후보 쪽에 갔다. 빵 한 쪼가리 제 손으로 사주지도 않고 말이다. 소문도 돌았다. 어떤 부대에서는 다른 후보를 찍은 경우도 있었다. 그러자 사전검열로 걸러내어 아예 버렸다고 한다. 사단장의 “100프로 1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수많은 청년들의 표를 더럽고 추악한 결과로 만들어버렸다. 결과는 아시는 바대로 노태우의 당선이었다. 그날 대대장은 개표방송을 보면서 ‘위대한 보통사람’의 당선을 밤새 축하하느라 폭음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투표에 양심을 팔아먹은 적이 한번 더 있었다. 1987년 4·13 호헌 조치 때인가 그랬다. 전두환은 민주세력의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하려는 의도로 이 성명을 발표했다. 이 호헌 조치에 잇따라 국민투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호헌이냐 아니냐. 모든 장병의 가슴에 ‘호헌 찬성’ 리본을 달게 했다. 군인인지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의 사병(私兵)인지 모를 시대였다. 역시 엄청난 정신교육을 퍼부었다. 총 쏘고 야전훈련할 병사들을 올스톱시키고 막사에서 치러진 강요였다. 그때 빵이 나왔다. 봉황 두 마리와 ‘대통령 각하 하사품’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봉건시대도 아니고, 제 주머니 털어 사는 것도 아닌데 무슨 하사(下賜)인가 하고 기분 나빠했던 기억도 있다. 하긴 그는 29만원밖에 없는 인간인데, 그때도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세금 헐어서 사줬겠지.

 

대선이 코앞이다. 이제 그런 강요는 군대에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군시절의 선거는 참혹한 양심의 위배였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문신으로 마음에 남아 있다. 누굴 찍든 사람은 한 표의 민주적 권리를 자유의지로 행사할 권리가 있다. 이 단순한 권리가 짓밟혔던 역사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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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이 힘든 건 육체보다 감정이 상할 때다. 특히 주로 감정을 ‘팔아서’ 일하는 이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식당 업주도 감정노동을 한다. 늘 웃어야 하고, ‘고객님’의 요청을 최대한 받들어 모셔야 한다. 이 무한경쟁의 식당 세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물건과 서비스를 팔고 돈을 받는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적당한 ‘교환’인지 헷갈린다. 고객님이 ‘갑질’을 심하게 해도 당하고 산다. 입길에 오르기 두려워서다. 한 후배는 강남에서 양식당을 한다. 처음 온 손님이 “나를 몰라보느냐”며 집기를 던지고 옮겨 적을 수도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지금도 부들부들 떨린다고 한다. 밤에 잠을 잘 못 자는 증세도 생겼다. 손님의 폭언은 이 동네에서 그다지 듣기 어려운 말이 아니다. 식당 노동자들은 그렇게 조금씩 무너진다. 사소한(?) 일들도 참 많다. 식당마다 찻숟가락이나 작은 포크 같은 기물이 없어지는 건 다반사다. 손님이 자리를 뜨면 없어진다. 그렇다고 가방을 뒤질 수가 있겠는가. 뷔페식당에 ‘락앤락’ 통을 가지고 와서 음식을 넣어가는 사람도 있다. 보온병에 커피도 담아간다고 한다. 뷔페는 ‘배’ 말고 어떤 용기도 지참할 수 없는 게 불문율 아닌가. 물론 극히 일부의 일이다. 그래도 한 건이라도 벌어지면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카페가 많아졌다. 이 동네도 스트레스가 심하다. 커피를 한 잔만 주문한 후 리필해서 친구와 나눠 먹는 손님도 있다. 카페도 먹고살아야 한다. 1인 1주문은 기본이다. 하루종일 자리 차지하는 이들도 있다. 물건 놔두고 점심 먹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밖에서 음식 가져오면 안된다고 해도, 케이크며 김밥과 순대까지 꺼낸다. 케이크는 그 카페에서도 파는데 말이다. 홀 서버로 몇 년을 일한 후배는 아예 이 직업을 접었다. 하도 성희롱을 당해서다. 국립대학 학장이라는 자가 스무 살짜리 여자 서버의 엉덩이를 만지는 일도 있었다. 한번은 아주 유명한 가수의 아비란 자가 한 와인바에서 서버를 더듬었다. 나도 현장에서 그것을 목격했다. 아무 말도 못한 내가 부끄러워서, 나는 지금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왕년의 포스코 왕 상무 사건이나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태 같은 갑질은 유명한 항공사니까 그나마 널리 알려졌다. 작고 힘없는 식당과 카페에서는 더 한 일이 벌어져도 공론화되기 힘들다. 사고가 난 후, 손님의 일방적 주장을 담은 인터넷 게시판이나 트위터, 페이스북 글에 대해 방어권도 거의 없다. 섣불리 변명했다가는 익명의 누리꾼들의 십자포화를 맞기 십상이다. “그럴 만했으니까 그런 거 아니요?” 이런 시각이 있다. 게다가 이쪽에서 일하는 이들은 각종 인권 문제와 관련해서 교육받지 못하고 있다.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라 끙끙 앓는다. 노조도 없고, 업종 단체는 유명무실하다. 국내 업종별 노동자 숫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게 요리사와 서버다. 숫자에 걸맞은 어떤 연대도 교육도 없다. 이번 대선에서 어느 후보도 관련 공약을 내지 않았다. 암담하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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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국밥은 세계에 전례가 드문 이 땅의 음식이다. 한국 음식의 이미지에도 늘 등장한다. 시장과 국밥은 일종의 정서적 공동체다. 지방 5일장의 히트작은 여전히 국밥이다. 그 내용은 대개 동물의 뼈와 고기를 푹 고아서 쌀밥과 김치를 곁들여 내는 방식이다. 수많은 다른 요리법이 있지만 이 ‘원형’의 변주일 뿐이다. 국밥은 설렁탕과 해장국과 순댓국과 장국밥과 육개장을 모두 아우른다. 역사적으로 국에 밥을 말아 내는 방식이라 하여 국밥이었다. 이제는 ‘따로국밥’도 많아졌다. 토렴도 어렵고, 전자기기로 갓 지은 쌀밥을 낼 수 있으니 굳이 말지 않는 것도 한 이유다. 옛 해장국 골목의 증언을 종합하면 토렴의 이유가 명확해진다. 당시 전기밥솥이 없었기 때문이다. 쌀이 귀해서 밥 자체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다. 각자 먹을 밥을 집에서 들고 와서 국만 사서 밥을 넣어 먹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공장 된장 대신 집집마다 남는 된장을 사들여 해장국을 끓여 팔았다고 한다.

 

 

국밥은 공동체의 음식이다. 모든 노동과 두레의 현장에는 흔히 솥이 걸렸고, 그것은 국밥을 의미했다. 옛날 다니던 학교 겨울 운동장에서는 야구부 훈련이 있었다. 이때도 국밥솥이 걸려서 선수 자모들이 교대로 나와 국밥을 끓였다. 고기, 우거지, 고춧가루, 두부 등속을 넣고 푹 끓였다. 나도 그것을 늘 얻어먹었는데, 한겨울 삭풍 부는 운동장에서 텅 빈 속을 데우는 놀라운 음식이었다. 심지어 군대에서도 국밥을 먹었다. 야전훈련을 나가서 기름때 전 야전취사복을 입은 병사들이 국밥솥을 걸었다. ‘똥국’이라고 부르던 맛없는 된장에 김치를 섞어 밥을 말아 냈다. 반합에 받은 그 ‘유사 국밥’을 먹으며 대책 없는 추위를 견뎠던 것이다. 대학생 때 농촌활동에서도 얻어먹은 것이 국밥이었다. 짧은 준비와 설비로도 많은 이들이 함께 만족할 수 있는 음식, 그것은 국밥 말고 달리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음식사에서 이처럼 오래되고 질긴 생명력을 지닌 외식은 없다. 국수도 1950년대 미국의 공여로부터 대중화되었고, 냉면도 100년 이상의 역사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오롯이 국밥만이 100년 이상의 역사를 품고 있다.

 

조선후기 화가 김홍도의 그림에조차 주막 장국밥을 먹는 사내가 등장하니까 말이다. 상공업이 그나마 발달해가던 조선 후기에 주막이 성업하기 시작했고, 그 밥상의 총아가 국밥이었을 것이다. 유럽의 레스토랑 역사를 다룬 여러 책들을 보면서 나는 우리 음식사가 허전함을 늘 아쉬워하고 있다. 사농공상이라, 돈 버는 일을 경시했던 조선의 정책적 숙명이 외식업의 얇은 역사를 예고한 셈이었다. 식당의 발달은 오롯이 돈 버는 일의 당당함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돈이 돌고 사람이 돌아야 외식업이 흥하기 마련인 것이다.

 

드디어 저 거친 바다에서 배가 떠올랐다. 그 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다시 국밥솥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한 맺힌 국밥이 되리라. 아아, 밥은 다시 생명이고 사라진 이들의 상에 올리는 마지막 제물이 되리라. 그대, 돌아오라.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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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흥부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자식들이 돌아가며 먹고 싶은 걸 말하는데, 한 녀석이 이런다. “고깃국에 이밥이나 실컷 말아먹었으면.” 피자나 치킨, 짜장면이 없던 시절이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없는 이에게 고깃국은 대단한 음식이었을 테다.

 

돈 받고 파는 요식(料食) 중에 고깃국, 즉 국밥처럼 실감나는 음식은 드물었다. 김치나 된장은 사먹는다는 느낌이 적다. 밖에서 돈 내고 먹는다고 하면 짜장면 말고는 국밥이 오랫동안 주인공이었다.

 

국밥은 누구나 한 술 뜰 수 있는 음식이기도 했다. 국밥에는 찬이 적다. 국에 밥을 말아내고 찬 없이 빨리 싸게 먹는 형식으로 발전했다. 조선후기에 김홍도가 그린 주막 풍경에도 뚝배기를 기울여가며 국밥을 퍼넣는 장정의 모습이 나온다. 상업이 발달하지 않아 유럽에 비해 레스토랑의 역사가 짧은 조선에서 주막은 그나마 ‘돈 주고 사먹는 외식’의 한 역사를 이루어 왔던 것이다.

 

 

그 주막의 메인 메뉴는 역시 국밥이었다. 국밥은 어지간한 장시가 있는 곳에서는 다 성행했다. 사람이 모이면 허기가 지고, 싸게 한 그릇 먹기에 국밥만 한 게 없었다. 나중에 미국 밀가루가 값싸게 풀리기 전에는 역시 국밥이 즉석 음식의 왕이었다. 장꾼들이 먹는 음식이 국밥이요, 한번에 많이 끓여서 빨리 낼 수 있는 음식도 국밥이었다.

 

토렴도 그렇게 발달했다. 미리 썰어둔 밥과 고기를 따뜻하게 데우는 기술, 건더기가 든 뚝배기에 펄펄 끓는 국물을 부었다 내렸다 하면서 딱 먹기 좋은 온도에 맞추어내는 기술이다. 토렴은 전기보온밥솥이 없던 때, 밥을 데우는 데 최적의 방법이었다.

 

밥풀에서 전분이 풀려서 국물이 탁해지는 걸 막아주는 것도 토렴이었다. 그렇게 상에 내면 차갑던 밥이 입에서 부드럽게 풀리면서 적당한 온도에서 씹혔다. 질이 좋지 않은 밥도 먹어낼 수 있는 마술이기도 했다.

 

국밥은 이렇게 본디 토렴과 한 뚝배기를 이루면서 ‘패스트푸드’로 민중에 자리 잡았다. 토렴한 밥과 국은 딱 먹기 좋은 온도였고, 일에 바쁘고 허기진 민중들이 빨리 먹어낼 수 있었다. 이제 토렴하는 집을 찾는 건, 어지간히 헤아리지 않으면 어렵다. 펄펄 끓는 뚝배기가 주력이다. 언제나 따끈한 밥이 있는데, 굳이 밥을 식혀 토렴할 일이 없기도 하지만, 토렴이 결국 그놈의 ‘인건비’가 되기 때문이다. 식당 기술자들이 없어서 토렴을 하라고도 못한다. 국만 뜨고, 퍼 둔 밥 꺼내주면 될 일을 누가 펄펄 끓는 국솥에 뚝배기 기울여 손에 화상 입어가며 토렴하겠는가.

 

토렴 잘하기로 유명했던 여러 오래된 국밥집들이 점차 토렴을 버리고 있다. 손님들도 뜨거운 밥을 따로 내주는 걸 좋아하는 이가 많다고 한다.

 

토렴에는 본디 기대하지 않았던 효과도 있다. 음식의 온도가 적당(섭씨 80도 미만)해서 입이나 식도의 화상을 예방할 수 있다. 암 예방수칙에 뜨거운 음식을 조심하라는 건 의사들의 공식적인 의견이기도 하다. 토렴하는 국밥집을 응원하고 싶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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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대학을 다닐 때 이른바 건설일용노동자를 잠시 했다. 새참으로 빵이 나오면 선배들-김씨니 박씨니 하는 오직 ‘씨’로만 불리던 늙수그레한 막노동자들-이 투덜거렸다. 나는 어렸고, 빵이 좋았다. 왜 빵을 싫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빵은 지긋지긋한 집 음식과 다른 세계였다. 우선 달았다. 단팥이나 크림이 들어 있어서 좋았다.

 

초등학교 때는 나중에 빵 공장에 다니고 싶었다. 빵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학교 앞에서는 빵을 팔았다. 제일 좋아하는 건 찐빵집 빵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화교를 통해서 전파되었을, 팥이 들어간 그 찐빵은 구수하고 비릿한 효모 냄새로 이미 반쯤 넋을 빼앗는 존재였다. 구멍가게에서는 보름달이니 삼립크림빵이니 하는 공장 빵을 팔았다. 노을이라는 이름의 기다란 빵은 양이 많아서 인기였다. 제과점에서 탁자를 차지하고 식빵을 시켜도 되던 때였다. 설탕을 달라고 해서 찍어 먹었다. 음료수 한 잔 없이도 그 빵이 꿀떡 넘어갔다.

 

 

빵은 호화로운 간식이었다. 그 빵값을 아끼려고 집집마다 어머니들이 ‘제빵기’를 월부로 사들였다. 반죽 레시피대로 만들면, 질척하고 달콤한 이상한 ‘케이크’가 탄생했다. 그걸 얻어먹으러 친구네 가기도 했다. 우리 엄마에게 그런 기계를 사달라고 하는 건 턱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 가정용 제빵기계도 알고 보니 일본에서 들여온 기술이었다. 정식 라이선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똑같은 기계가 지금도 일본에서 팔리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우리는 일본 빵의 세례 속에서 살았다. 유명한 빵집의 대다수는 일본인들이 패전과 함께 철수하면서 넘기고 간 일종의 적산자원이었다. 기술자로 일하던 조선인들이 그곳에서 다시 빵을 구웠다. 아직도 일본풍의 빵이 우리 제과점에 많은 것도 그런 이유다. 일본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빵을 배웠다. 군국주의 국가가 되면서 해군 중심의 군사문화가 널리 퍼졌다. 해군은 영국을 모델로 하는 서양식 식생활을 퍼뜨리는 매개체였다. 빵과 고기를 일본인의 식탁에 올리는 숙주였다. 화혼양재(和魂洋才)랄까, 유럽의 빵이 일본화되기 시작했다. 딱딱한 하드롤을 일본인들이 좋아하도록 부드럽게 만들었다. 이스트 냄새 대신 누룩으로 발효시켰다. 술빵이었다. 여기에다 결정적으로 단맛이 없는 ‘식사용 빵’ 대신 단팥을 넣어 맛을 바꿨다. 달지 않다는 뜻의 ‘식빵’이라는 말도 바로 일본이 만들어낸 용어다.

 

그 빵 문화가 조선에 그대로 이식되었다. 부족한 장비와 시설로 기술자들이 빵을 구워냈다. 그렇게 우리 빵의 역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어려운 환경에서 과자를 굽고 제빵하던 기술자들의 맥이 아슬아슬하다. 프랜차이즈 빵이 대세가 되면서 우리가 거리에서 만나는 빵의 다수는 공장에서 납품받아 진열된다. 어린 제빵 기술자 지망생이 그 프랜차이즈빵집의 좁은 부엌에서 몇 가지 빵을 굽기는 하지만, 마이스터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주요 도시의 터줏대감 빵집들도 거개 사라지면서 우리 빵 역사도 묻혀간다. 아쉽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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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릇을 보고 사서 쓰는 게 취미다. 福(복)자가 새겨진 밥주발이나 국그릇, 막걸리 잔이다. 내 손에 들어온 낡은 그릇에는 이력서가 없다. 누가 이걸로 밥을 먹었을까, 쌀은 제대로 넣어서 지은 밥일까, 이 작은 종지에 넣은 건 무슨 반찬이었을까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동시에 처연해지기도 한다. 주인 잃은 그릇, 대개는 버림받아서 결국 내 수중에 온 셈일 테니까. 거기에 옛사람들의 궁핍했을 삶까지 겹쳐서 마음이 짠해진다. 이런 그릇 구하기는 몇 해 전까지는 상당히 쉬웠다. 한번은 전주 한옥마을 근처의 골동가게에서 그릇을 골랐더니, “그냥 한 박스 가져가. 막걸리값이나 주고” 이러신 적도 있다. 요즘은 제법 멋을 낸 그릇들(더러 금박을 두른 대접도 있다)은 몇 만원도 나간다. 울퉁불퉁하고 색깔도 고르지 않은, 그저 실용적인 용도에 최소한의 치장을 한 그런 그릇에 국을 담고 밥을 푸면 마음도 편해진다. 일본의 도자기를 이르는 야키(燒)들은 아름답고 예술적인 경우가 많은데, 놓고 감상하기는 몰라도 시금치와 김치를 담자면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하다.

 

 

옛 그릇이라고 해서 사기나 도자기만 있는 것도 아니다. 스테인리스강, 그냥 일제강점기식 언어로 치면 ‘스뎅’인 금속 그릇도 옛 물건에 든다. 우리 옛 그릇 문화를 몰아낸 주범(?)이며 멋대가리 없는 소재라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나는 이것조차도 옛 멋이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쉽고 따뜻한 영혼이 깃드는 것 같다. 스테인리스 그릇도 잘 보면 오래된 흔적을 가질수록 멋이 깊다. 소재 특성상 고급할 수 없어 더 애착이 간다. 정릉동의 숭덕분식은 40년이 넘은 초등학교 앞 떡볶이집이다. 이 집의 명물은 즉석떡볶이를 담아주는 스테인리스 그릇이다. 오래되어 반질반질하고 편안한 그릇에 어린 학생들이 떡볶이를 담아 먹는다.

 

스테인리스는 원래 크롬과 철의 결합이다. 단단하고 녹이 안 스는 데다가 가벼워서 총신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전쟁물자가 사람의 생활을 이롭게 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금속은 전방위로 우리 생활에 들어왔다. 제기(祭器)가 바뀌었고 앉은뱅이 식탁이 되었으며, 수저도 모두 바뀌었다. 요즘 스테인리스는 가벼워서 경박하다. 예전 것은 상당히 무거운데, 이는 얇게 철판을 제조하는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날부터 스테인리스 그릇을 제조했던 장인들을 만났더니 이것도 현장의 역사가 있었다. 양은과 놋쇠를 밀어냈는데, 멜라민에 치여서 찬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용으로 쓰이는 속칭 ‘뱅뱅들이’(둥근 스테인리스 그릇 제조방법) 주발과 국그릇, 냉면 그릇 등을 만들면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중국산 수입품이 들어오면서 이 산업도 큰 타격을 받은 상태다.

 

봄이 되면 마산 진동면의 삼거리식당을 가야지, 하고 벼른다. 이 집에서 제철에 맞춰 해주는 미더덕요리도 좋은데, 특히나 낡은 스테인리스 그릇이 좋기 때문이다. 던져도 깨지지 않고, 위생적으로 잘 닦이고, 그래서 고단한 시장거리 아주머니들의 선택을 받았던 스테인리스 그릇들이야말로 얼마나 장한 존재인가 싶어진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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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값도 오른다고 기사가 나오고 있다. ‘서민 경제’라는 말에 꼭 붙는다. 한 병에 5000원 시대가 열렸다. 강남 일부이지만 4000원도 그렇게 시작해서 서울의 대세가 됐다. 알코올 함량은 떨어지는데 소주 값은 오른다. 원가 상승에 빈병 보증금 인상 때문이라고 한다. 시민들은 담배처럼 소주 값에까지 세금을 올리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우리가 많이 마시는 희석식 소주는 세율이 낮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이미 고급 위스키나 맥주와 같은 72%다. 교육세도 추가로 30% 붙는다. ‘서민의 술’이라고 하는 희석식 소주의 세율도 이미 최고점 수준이다. 병당 500원이 넘는 세금이 붙는다. 물론 담배보다는 한참 낮다.

 

예전에 농촌활동을 갔는데 대접한다고 나온 술이 소주였다. 막걸리보다 소주는 고급이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우리에게 있었다. 마포의 돼지고기 문화를 이끌었던 ‘최대포’의 창업주 기록에 의하면, 소주를 마시면 고기 안주가 무료인 시대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소주는 ‘다루 소주’라고 하여 속칭 ‘막소주’였는데도 그랬다. 말통으로 받아온 소주를 병에 따라서 내는 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주는 고아서 내리는 증류주라는 인식이 있었다. 제조원가가 비싸다고 생각했다. 맑은 술이니 독하게 취하고 싶은 이들에게 어필했다. 당시 여러 통제로 막걸리의 품질이 급락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카바이트 막걸리’라고 하여 마시면 머리가 아프다고 천대받았다. 이 틈에 소주는 시장을 넓혔다.

 

 

희석식 소주는 참 많은 변화를 거쳤다. 지역별 쿼터제가 있어서 다른 지방의 술이 도 경계를 넘지 못했다. 호남선을 타고 귀경하면 열차 판매원이 매번 다른 상표의 소주를 팔았다. 전라도-충청도-경기도-서울권역으로 들어오면서 소주 브랜드가 바뀌었다(그때는 기차 여행이 시간이 길어서 흔히 객차에서 소주를 마셨다).

 

이런 지역쿼터제는 영업권을 법으로 보장해주는 대신 정치자금줄 노릇을 했다고 한다. 목포의 유명한 삼학소주는 당시 정권 눈 밖에 난 김대중 선생에게 정치자금을 줬다는 이유로 공중분해되었다는 건 거의 정설이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소주 회사도 부침을 거듭했다. 법 개정으로 소주의 판매권역도 자유화되었다. 전통의 지역 소주 회사가 무너지고 흡수 합병되었다. 거대기업이 소주 시장에 진출, 영업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유명한 전통의 소주 회사들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외국회사에 넘어갔다. 소주는 순전히 우리 국민의 애호 술인데, 경영권은 외국계 회사가 갖고 있는 경우도 많다. 소주 도수가 이제 향을 혼합한 것들은 12도짜리까지 나온다. 소주 맛은 싱거워지는데 값이 오른다. 알코올 중독을 걱정하는 의료인들이나 정책당국은 소주 덜 마시는 사회를 바란다. 그러나 이 미친 시대, 소주라도 마시지 않으면 어쩔 것이냐고 아우성이다. 소주 5000원 시대는 이제 대세가 되는 것일까. 새해부터 주머니가 더 가벼워질 불안에 빠진 많은 이들에게는 참으로 괴로운 소식이다. 소주라도 마음 놓고 마실 수 없는 시절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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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칼바람이 불면 늘 사십 년 전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는 얼마나 추웠던지 손발과 볼에 동상이 걸리는 아이들이 숱했다. 싸구려 화섬이나 거친 모직으로 만든 외투가 고작이었고, 오리털 제품은 나오기 전이었다. 나왔더라도 서울 변두리 소년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그 추위에도 노점상이 있었다. 풀빵이나 군고구마 장수였다. 호떡은 대개 화교가 운영하는 어엿한 가게였다. ‘도라무깡’을 개조하거나 벽돌로 화덕을 만들고 빈 사과 궤짝을 부수어 불을 지폈다. 화덕구이 호떡이었다. 어쩌다 이걸 하나 사먹으려면 길게 줄을 서야 했다. 가게에선 연탄아궁이를 내놓고 호빵과 국빵을 쪘다. 국빵이란 일종의 중국식 만두로 속이 들어 있지 않았다. 대신 같이 주는 걸쭉한 수프에 만두를 찍어 먹었다. 인기가 없어서 금세 출시가 중단되었다.

 

 

요즘은 푸성귀며 고기며 겨울에도 언제든 먹을거리를 풍성하게 볼 수 있지만, 그때는 시장도 썰렁했다. 배추나 무, 겨울 시금치나 있었을라나. 기억이 없다. 일찍 삭은 김장김치로 김치죽(갱시기)을 끓여서 먹는 게 채소의 전부였다. 봄동이 나오기 전까지는. 없는 재료를 가지고 어머니는 늘 솜씨를 발휘했다. 볼이 꽝꽝 얼어서 하교하면 어머니가 부엌에서 동태와 물오징어를 손질하고 계시곤 했다. 무를 썰어 넣은 두 가지 요리가 준비되는 것이었다. 동태찌개는 머리째 넣고, 무를 넉넉히 깔았다. 동태살에서 진한 국물이 나와서 맛있는 냄새가 퍼질 즈음 고춧가루를 풀면 화사하고 매운 향이 집 안에 가득했다. 동태 알과 내장이 들어 있으면 금상첨화. 식구가 많아서 건더기보다 국물이 많았다. 별달리 맛을 낼 재료가 있었겠는가. 아마도 미원이나 조금 넣고 끓이시지 않았을까. 나는 아버지가 뜨거운 국을 ‘시원하다’고 하는 이유를 이미 어렸을 때 알았다. 동태 머리를 쪽쪽 빨았고, 내장을 감싸고 있던 거무스름한 뱃가죽이 더 달다는 것도 알았다. 궁하면 아이들이 일찍 어른이 된다.

 

우리집은 회를 먹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요리한 것이 물오징어회였다. 겨울이니까 오징어의 선도가 좋았고, 어머니는 마음놓고 살점을 발랐다. 오징어를 툭툭 썰고 시원한 겨울 무를 저민다. 고춧가루 식초에다 설탕 넣고 버무리는 무침회였다.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오징어의 속살. 산 오징어도 먹을 수 있는 요즘이지만, 어머니의 겨울 물오징어 맛만큼은 못한 것 같다. 살집 두툼하고 씹는 맛이 좋던 그때 오징어는 아주 위풍당당한 어물이었다. 우리 식탁에 동태가 없는 것도 아니고 오징어도 올라온다. 듣자니 두 어물을 잡는 우리 어민의 노고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베링해 차가운 바다에서 목숨 걸고 명태를 낚으며, 오징어를 걸기 위해 거친 파도가 이는 먼바다까지 나가고 있다. 게다가 중국 배들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면서 겨우 어창을 채워 들어온다고 한다. 삭풍이 불면 생각나는 저 어물들의 뒷사정이 이제 가슴을 저미고,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음식이 간절해진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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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공상과학영화 제목으로 오인하기 좋다. 아닌 게 아니라 AI, 즉 조류인플루엔자 관련 보도는 현실세계를 다루는 것 같지 않다. 2000만마리 살처분, 긴급 공수, 백신 확보 비상. 덕분에 국민은 국정농단 정치공부를 하는 와중에 산란계와 육계의 차이, 철새의 이동경로 분석학도 배우고 있다. 몇 해 전에도 AI와 관련한 칼럼을 이 지면에 썼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예상대로 방역선은 뚫리고 살처분이 거의 유일한 대안이 됐다. 그리고는 저절로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게 사실상 정부 대책의 전부다. 국민들은 AI 발생 뉴스를 들으면 체념한다. 끝까지 가겠군, 그렇게 생각한다. 엄청난 숫자의 닭을 살처분하고, 그 부족분을 수입하고 그러겠지 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반복되는 일에 감각이 무뎌진 것이다. 계란 값은 계속 오르고 있다. 계란 값을 또 올릴 거냐는 물음에 도매업자들은 시니컬하게 대꾸한다. “계란이 있어야 올리든지 말든지. 우리도 팔 계란이 없다”고.

 

닭도 생명이다. 자연상태에서 몇 년을 산다. 육계는 한 달이 넘으면 이내 도축되어 우리 입으로 들어온다. 산란계는 더 오래 살지만 본디 천수에 턱도 없이 적은 나이에 죽는다. 알 낳는 능력이 떨어지면 도태된다. 이런 얘기를 양계전문가에게 했더니 그의 대답이 이랬다.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지요. 닭장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좁고 불편한 사육장에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고, 죽을 때도 살처분이라고 부른다. 생명 존중 같은 것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들에게 우리가 존엄을 보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먹기 위해 죽이는 것은 ‘도살’이니, 구분을 위해 살처분이라는 말을 쓰는 게 고작이다.

 

 

처분이라는 말을 우리가 가장 많이 쓴 시대는 바로 일제강점기였다. 제국주의 권력의 용어였다. 식민지를 다루는 필살기였다. 독재정권의 전유물이기도 했다. 그들이 저지른 온갖 ‘처분’이 지금 ‘박근혜·최순실 시대’의 토양이 됐다. 그 용어를 가져다가 그대로 쓴다. 아무리 닭이, 소·돼지가 미물이라도 말이다.

 

계란은 어미 몸에서 천천히 만들어진다. 알로 태어나서 다시 병아리로 태어난다. 두 번 태어나는 신기한 동물이다. 그렇게 병아리가 되자마자 암수 구분을 통해서 수놈은 가혹한 최후(이것도 살처분이다)를 맞는다. 암놈이어서 운 좋게 살아남은 닭은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이익에 최적화된 양분을 공급받으며 적정한 알을 생산하다가 생을 마친다. 이런 시스템이 현대 양계다. 현대, 과학 이런 말 뒤에 숨은 의미는 미친 듯이 돌아가는 시장이다. 계란 값이 오르기 전, 가게에 들어오는 계란 한 판의 도매가가 4000원대였다. 생명의 정수가 모여 있는(그리하여 완벽한 영양이라고 칭송하는) 계란 한 개에 100원 조금 넘는다. 10년 동안 온갖 물가가 오르는 동안 계란 값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계란은 가치에 비해 워낙 싸다.

 

올라가는 계란 값은 영원히 싼 값에 계란을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경고다. 어쩌면 계란이라는 고마운 존재에 대한 인간의 무신경을 다그치는 일일 수도 있겠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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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가서 우리가 놀라는 장면 중의 하나는 이른바 ‘혼밥족’이다. 거리의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이들이 흔하다. 아예 독서실 칸막이처럼 혼자 먹어도 부담 없게 준비를 해놓는 경우가 많다. 술집도 혼자서 마시는 게 유행(?)이다. 이런 이들이 서로 말을 트고 가볍게 친구를 맺는 ‘서서 마시는 집’도 있다. 개인용은 없고, 공동 탁자에서 마시면서 안주와 술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점심은 몰라도 저녁에는 혼자 식당에 가면 환영받기 힘들다. 혼자 오는 손님은 음식도 조금 시키겠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 경우가 많아 매출이 안되기 때문이다. 고깃집은 이런 현상이 심하다. 숯불을 피우자면 고기를 어지간히 먹어줘야 이른바 ‘불값’이 나오는데, 혼밥, 혼술족을 좋아할 리 없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홍대 앞에 혼자서도 고기를 구울 수 있는 집이 있다. 아예 ‘혼술 환영’이라고 써 있다. 그저 영업 전략이거니 하기에는 구석에 몰린 젊은이들의 슬픈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입이 쓰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혼밥이 흔했다. 임금부터 혼자 밥을 먹었다. 왕비조차 겸상을 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하는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할아버지가 손자와 겸상해도 아들과는 하지 않는다”, “아무개와 겸상을 해서 특별하게 느꼈다”는 말 같은 것이다. 겸상은 봉건시대 가부장의 권위를 상징했다. 성장한 아들과는 겸상하지 않는다는 거, 또 어떤 이와 친히 겸상을 해서 다정한 마음이나 특별한 관계를 표현했다는 거다.

 

유럽의 봉건시대에도 그랬다. 왕은 밥 먹는 것으로 통치행위를 연장했다. 혼자 몇 시간에 걸친 만찬을 하면서 신하들과 불러올린 영주들이 그 장면을 구경하게 했다. 귀한 음식을 혼자 먹음으로써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표현했던 것이다. ‘혼밥’은 아니지만, 군대에 가면 높은 지휘관은 따로 밥을 먹는다. 문제는 그 식탁이 두어 뼘쯤 높게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똑같은 메뉴를 먹는데도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을 확인하는 데 청문회의 역량이 총동원되고 있다. 그 와중에 전직 전담요리사의 증언이 회자되고 있다. 세월호 침몰 당일 대통령 관저에 점심과 저녁을 각 ‘1인분’씩 넣었다는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이라고 해서 밥을 혼자 먹지 말란 법은 없다. 더구나 배우자도 없으니 혼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주어진 5년의 시간은 철저하게 국민과 국가에서 받은 것이다. 밥 먹는 시간도 ‘헌법에 의한 권력 위임’의 연장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이라면, 그 시간을 아껴 소임에 보태는 게 당연한 일이다. 미국 얘기를 해서 안됐지만, 9·11 같은 국가 비상사태에 그들의 대통령은 상황실에서 서서 햄버거와 피자로 끼니를 때우면서 지휘를 했다고 한다. 배가 침몰하고 아이들의 운명이 결정되던 그 긴 시간 동안 대통령의 두 끼의 식사가 ‘1인분’이었다. 대통령이 상황실에 나와서 수많은 참모들을 지휘하면서 컵라면을 먹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아, 왜 우리는 그런 대통령을 갖는 행운이 없었을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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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지구촌이 비슷하게 겪고 있는 고통의 근원은 이른바 세계화의 광풍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곳곳에서 모순이 터져 나오고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가 그 예다. 세계 자본의 질서에 대한 분노가 응집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세계화의 진행과정에서 몸으로 맞서 싸운 이들이 있었다. 매일 거리에 나와 시위했다. 그때 흥미로운 인물이 있었다. 밤 카트(Wam Kat)라는 네덜란드 사람이다. 그는 박사학위를 두 개나 가진 학자인데, 책상에서 논문을 쓰는 대신 거리의 데모대로 나섰다. 단순히 싸움을 치른 것이 아니라 밥을 했다.

 

맞다. 밥이다. 트럭에 재료를 싣고 시위 현장에 갔다. 자원봉사자들의 힘을 빌려 채소를 손질하고 고기를 삶았다. 날씨가 추울 때는 주로 수프를 끓였다. 나눠 먹기 좋고 영양가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문 요리사가 아니다. 게다가 요리를 준비할 시간도, 인력도 늘 부족했다. 재료를 사기 위해 모금을 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스스로 요리 솜씨가 엉망이라고 자인한다. “그래도 가장 힘든 건 검문을 뚫고 재료를 현장까지 가져가는 것이었죠”라고 말한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시위대는 한 그릇의 음식으로 위로받았다. 그 뜨거운 음식은 결코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의 확인이었다. 밤 카트의 요리법은 아주 단순하다. 구할 수 있는 여러 재료를 한 데 섞어 푹 끓이는 것이었다. 맛은? 인공조미료가 들어간 시판용 고체 ‘육수’를 써서 냈다. 그저 먹고 힘을 낼 수 있으면 됐다. 어머니의 손맛은 절대 낼 수 없었지만, 그의 음식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는 늘 말한다. “재료비는 충분하게 모금됩니다. 세계화에 반대하는 시위대는 가난하지만 도덕심이 있거든요.”

 

 

광주 출신인 친구가 하나 있다. 그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5·18 광주항쟁에 참여했다. 하숙집에 있다가 시내에서 계엄군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듣고 뛰쳐나갔다. 이동하는 트럭에서 떨어져 팔을 크게 다쳤다. 그는 그 시위를 김밥으로 기억한다. “아짐(아주머니)들이 김밥을 싸가지고 와서 나눠줬지. 우리 새끼들 어쩌느냐고, 불쌍해서 어쩌느냐고 하면서 말이지. 군인들이 총을 쏘고 몽둥이질을 하니까 아짐들이 나섰지. 김밥을 싸들고서.”

 

그때 얻어먹은 김밥의 맛은 그의 혀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고 한다. 촛불집회가 거세지고 있다. 한 친구는 이렇게 페이스북에 올렸다. “내 집은 청와대 앞입니다. 화장실이 필요하거나 용무가 있으신 분, 배가 고프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엄청난 ‘좋아요’가 쏟아졌다. 거리에서 핫팩을 공짜로 나눠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주는 자원봉사자도 있었다. 광화문에 있는 세월호 유가족 텐트에서는 차와 커피를 서비스했다. 눈물겨웠다. 사람들이 거리에 나서는 건 다시 밤 카트의 말을 빌리면 ‘도덕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주에 다시 거리에서 다시 수많은 밤 카트와 ‘아짐’들을 만나야겠다. 추운 날씨에 누군가 따뜻한 한 잔의 커피와 컵라면을 건넬 것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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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속 헛헛한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 게 포장마차다. 정식으로 밥상을 받기는 그렇고, 간단히 속을 달래기 위해 들르는 곳이다. 이런 것의 통계는 없겠지만 눈여겨보면 제일 인기 있는 건 떡볶이와 오뎅이다. 값이 싸고, 간단히 먹을 수 있어서다. 요즘 같은 겨울이면 단연 오뎅이다. 오뎅은 ‘어묵꼬치’라고 고쳐 부른다. 오뎅은 어묵뿐만 아니라 달걀, 힘줄, 무, 곤약 같은 온갖 재료를 넣어 끓이는 일본 요리다. 반면 우리나라는 오뎅이라고 해도 99%는 어묵을 꿴 꼬치이므로 어묵꼬치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후루룩, 종이컵에 국물을 퍼서 마시고 어묵을 씹는다. 단돈 1000~2000원이면 허룩해진 속이 든든해진다.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들어가며 아직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낀다고나 할까.

 

옛날보다 어묵 맛이 덜하다고들 한다. 기분이 아니라 사실이다. 재료가 달라졌다. 원양에서 잡은 이름도 희한한 생선을 주로 쓴다. 연근해에서 잡은 것들은 비싼 데다 엄청나게 커진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서다. 예전에는 제법 괜찮은 어물이 어묵의 원료가 되었다. 조기, 갈치, 전갱이, 정어리, 명태에 온갖 잡어가 쓰였다. 좀 못나서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것들은 어묵 반죽 속으로 곱게 갈려서 들어갔다. 그래서 간혹 씹다보면 생선뼈가 오도독거리기도 했다. 위생은 좀 못했지만 재료만큼은 제법 좋았던 시절이다. 남해안에서는 심지어 아귀까지 넣었다는 증언도 있다. 작은 아귀는 상품성이 없어서 어묵이나 만들었다는 얘기다. 맛이 없을 리 없었다. 기름도 맛을 돋웠다. 고래기름을 썼다는 증언이 있고 소기름과 돼지기름이 주종이었다. 고소함이 일반 식용유에 댈 게 아니었다. 미국산 식용유가 물밀 듯이 들어오면서 기름도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대기업 상표를 보고 마트에서 어묵을 고른다. 시장마다 각기 다른 상인이 직접 만들던 어묵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어묵은 일본에서 시작된 음식이다. 생선을 곱게 짓이겨서 모양을 빚은 후 주로 불에 구워서 만들었다. 본디 고급 요리에 속한다. 조선통신사의 방문 일기에 어묵이 종종 등장한다. 귀빈 대접을 받은 통신사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이었다. 그때 문헌에 한글의 ‘가마보곶’이라는 명칭이 발견되었다. 가마보코(かまぼこ)란 말인데, 이는 어묵을 이르는 일본어다. 어묵이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된 건 역시 동력이었다. 전기믹서로 재료를 한꺼번에 갈고 더 큰 동력으로 더 많은 생선을 잡으니 어묵으로 쓸 잉여가 생겨났다. 미국이 아시아의 패권을 쥐면서 그들의 튀김용 기름도 함께 싸게 풀렸다. 어묵이 접대용 고급음식에서 거리의 음식으로 바뀐 결정적 계기였다.

 

또 다가오는 예사롭지 않은 주말이다. 사람들은 분노를 안고 또 광장으로, 거리로 나간다. 어묵 행상이 거기에 있다. 이래저래 쓰린 속, 뜨거운 싸구려 국물을 붓고 싸운다. 언제까지 우리가 거리에서 어묵을 씹어야 할지 모르겠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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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동네 막걸리 파는 가게에 술심부름 가면 어른 서넛이 서 있었다. 무얼 하는가 보면, 턱밑 수염을 허옇게 물들이는 일이었다. 막걸리 술추렴이란 뜻이다. 따로 술청이 있는 집이 아니어서 그냥 서서들 마셨다. 안주를 제대로 먹는 것도 못 봤다. 주인네가 내주는 김치 쪼가리나 두부 같은 거였다고 기억한다. 이런 집을 흔히 실비집이니 선술집이라고 불렀다. 실비는 설이 여럿이나 실비(實費), 즉 싸게 낸다는 뜻이고 선술집 역시 ‘선’ 채로 마신다는 의미다. 유리창에 빨간 페인트로 실비집이라로 쓴 걸 보곤 했다. 임대료가 올라가고, ‘인건비’와 재료비가 올라가서인지 이제 이런 술집은 명맥을 잇기도 어렵다. 심지어 전국에 남아 있는 선술집을 찾는 탐방단이 있을 정도니까(나도 그중의 일원이다).

 

선술집은 원래 우리 술 문화 중의 하나였다. 주로 거친 일에 종사하는 막노동자들의 주점으로 선술집이 있었다. 일하다가 탁주 한 잔 마실 수 있었다. 왕대포라는 말이 원래 커다란 바가지라는 뜻이다. 장터나 도시 뒷골목에서 서서 먹는 집이 많았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더 퍼져나갔다. 일본에서 다치노미야, 즉 ‘서서 마시는 술집’ 문화도 함께 상륙했기 때문이다. 선술집은 유럽에도 아주 흔하다. 동네 ‘바’에서는 대낮부터 서서 와인이나 독한 술 한 잔을 마시는 사람들이 많다. 스탠드바라는 술집의 원형이 바로 이것이다. 문자 그대로 스탠드, 서서 마시는 것이다.

 

 

일본 기타큐슈는 규슈의 최북동단에 있는 도시다. 부산에서 아주 가깝다. 전형적인 공업도시다. 주머니 가벼운 노동자들이 많이 산다. 이들이 고된 노동을 씻어내고 한잔 가볍게 할 수 있는 술집이 번성했다. 정식 술집도 있지만, 주류판매상 한쪽에서 가볍게 서서 마시는 문화로 발전했다. 이를 ‘가쿠우치’라고 부른다. 현재 인구 100만명의 이 도시에서 가쿠우치라고 부르는 집이 150곳이 넘는다고 한다. 술이 아주 싸고 안주도 대개 낱개로 포장된 싸구려 건어물이나 땅콩, 여러 가지 통조림을 그대로 따서 먹는다. 일본은 이런 문화를 잘 포장하고 열심히 홍보한다. 선술집 문화를 그리워하는 한국인 관광객에게도 크게 어필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도 선술집 문화가 아직은 남아 있다. 얼마 전에 광주 양동시장에 들렀더니 함평왕대포라는 막걸리집에서 서서 마시는 노인들이 보였다. 여수에도 교동시장 한쪽에 남면집이라는 선술집이 있었다. 안주를 안 시켜도 그만, 시키면 손맛 살아 있는 수수한 요리가 나온다. 구례에는 동아식당이라고 전설적인 선술집이 있다. 외지인들이 많이 오지만, 여전히 현지 노동자들이 선 채로 막걸리 한 잔에 공짜로 주는 김치와 두부를 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의 보금자리 같은 선술집 문화, 올라가는 가겟세로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서울 같은 대도시가 서글퍼질 뿐이다. 주말에 또 대형 촛불집회가 열린다. 잠시 짬을 내어 종묘 순라길 쪽으로 가보시라. 노인들이 주 손님을 이루는 선술집이 서넛 있다. 아마도 서울의 마지막 선술집 타운이 아닐까 싶다. 거기서 저와 조우하시길.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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