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티는 아버지가 두렵다. 싫다. 답답하다. 밉다. 부끄럽다. 창피하다. 곤란하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집에서만 대장이다. 사티를 때리고, 어머니를 밀어붙이고, 함부로 대한다. 그런데 집을 벗어나면 가난한 소작농에 상습 방화범이다. 아버지는 수가 틀리면 불을 지른다. 우리가 없는 아버지의 돼지는 걸핏하면 남의 집 농장을 침범한다. 이웃은 그렇게 침범한 돼지를 잡아두곤, 돈을 내야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장작이랑 건초는 불에 타는 물건이다’라는 전갈을 보낸다. 그리고 그 집 헛간이 불탄다. 치안판사는 아버지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마을을 당장 떠나라고 말한다. 그렇게 떠나온 아버지는 사티에게 거짓말을 요구한다. 사티는 정말 싫다. 정직하게 살고 싶고, 좀 더 우아하게 살고 싶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아버지가 남의 집 헛간에 불을 지르려 할 때, 이번엔 정직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의 한 장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불을 지른다. 억울한 일은 이웃의 집에 들어간 내 돼지를 찾는 데 돈을 내거나, 밟으라고 깔아놓은 양탄자를 밟았다고 지나친 소작료를 걷어가는 일이다. 그렇게 징벌적 소작료를 내고 나면 식구들이 먹을 것도 남지 않는다. 법에 기대도 소용없다. 치안판사는 언제나 있는 사람들 편이다. 아버지는 헛간을 태우는 것으로 화를 삭이고자 한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영원히 그렇게 분을 삭이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분명히 크레디트에 그렇게 써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일어나고 있는 서사적 사건이나 대사들은 하루키의 것이 맞지만 그 정서나 주제는 오히려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헛간 타오르다(Barn Burning)>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손가락 골절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는, 아들 종수(유아인)가 일컫기를 일종의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그 아버지의 모습과 <헛간 타오르다>의 아버지 모습이 훨씬 더 닮아 있기 때문이다. 종수는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 등장하는 ‘나’보다, 가난한 방화꾼 아버지의 아들 ‘사티’에 가깝다. 그렇다. 이 글의 맨 앞부분에 서술된 이야기는 바로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헛간 타오르다>의 일부분이다.

 

하루키의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크게 달라진 부분은 단 하나이다. 바로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 차이로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 원작 <헛간을 태우다>의 ‘나’는 30대 중반의, 카망베르 치즈를 좋아하고, 마일즈 데이비스의 ‘에어진’과 사티르 명인 라비 상카의 음악을 즐겨듣는, 세련된 여피족이다. ‘나’는 재즈와 와인, 가볍지만 섹시한 관계, 추상적이지만 본질적인 의문을 사랑하는, 그래서 타인의 삶에 무심하고 적당히 거리를 둔다. 그게 사는 데 더 유리하다고 믿는 인물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창동 <버닝>의 주인공 종수는 20대 중반이며, 가진 게 없고, 가지려면 건강한 육체밖에 쓸 게 없는 인물이다. 종수는 망해버린 축사 곁에서 대남방송과 뉴스를 들으며 잠이 든다. 소설에서는 아내가 자리를 비운 주인공의 집에 두 남녀가 찾아온다. 아내가 없는 집에 여자 친구 커플이 찾아오는 건 의외의 사건이었지만 소 한 마리 겨우 남은, 무너져 가는 축사 옆 종수의 집에 두 남녀가 찾아오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다. 같은 사건이지만 그 정서는 너무 다르다.

 

무엇보다 종수와 ‘나’는 계층과 연령이 다르다. 원작의 ‘나’는, 번쩍이는 은색 외제차를 가진 남자만큼 잘살지는 않지만, 그런 부에 무관심하다. 아니, 작가인 ‘나’는 그 사람과 사교모임에서 우연히 만날 만큼 비슷한 처지다. 노는 물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종수는 벤(스티븐 연)과 우연히 만날 일이 거의 없다. 벤을 만나려면 종수는 잠복하고, 추격해야 한다. 사는 곳, 노는 물이 다르니까. 그들의 세계에 교집합이 없으니 말이다.

 

이는 마치, 보르헤스가 똑같은 <돈키호테>를 몇 백 년이 지나 고스란히 필사한다고 할지라도 전혀 다른 소설이라고 말한 상황과 닮아 있다. 세르반테스가 소설을 썼던 당시엔 동시대적인 문체였을지 모르지만 2018년에 그대로 써내면 그건 의고체가 된다. 인물의 연령, 계층, 경제적 수준이 달라지면서 헛간을 태우는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헛간이 비닐하우스로 바뀌었다는 그런 사소한 변화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그건 비닐하우스건 헛간이건 별 상관이 없다. 다만, 벤에게는 무의미하고, 쓸모없고, 태워지기 기다리는 것이 비닐하우스일 뿐이다. 문제는 이렇듯 허무를 태우는 존재론적 체위와 메타포가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벤에게는 없어도 되고, 십오분 만에 예쁘게 타서 없어져도 될 것이 종수에게는 단 하나의 것, 유일한 것일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아버지가 당신네 헛간에 불을 지르러 간다고, 정의롭게 주인에게 알려주러 간 윌리엄 포크너의 소년 사티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티는 성공한다. 방화 직전에 집 주인에게 ‘헛간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화가 난 헛간 주인은 잘생긴 말을 타고 나와 총성을 두 발 울린다.

 

그 총성은 아버지와 함께 기름통을 들고 가던 형 근처쯤에서 울린다. 소년 사티는 총성이 울린 곳으로도, 집으로도 돌아가지 못한다. 소설은 그렇게 끝을 맺는다. 그 총성은 누구의 가슴을 관통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아버지가 헛간을 태워 벌을 받았듯이 그 땅주인도 벌을 받게 될까? 살인은 훨씬 더 큰 죄이니 말이다. 벌거벗은 채 공포에 떠는 종수를 보며 세련된 소설가 ‘나’가 아니라 포크너의 소년 사티가 떠오르는 이유이다.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