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종영한 텔레비전 드라마 <마더>는 ‘엄마’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대개 ‘엄마’를 낳아 준 여자로 여긴다. 하지만 드라마 <마더>에는 낳아 준 엄마도 등장하지만 방점이 찍힌 건 키워 준 엄마들이다. 낳지 않은, 생물학적으로 무관한 엄마들이 오히려 더욱 엄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보육원에서 주인공 수진을 입양한 여배우 엄마, 학대당하는 아이를 품은 엄마. 두 엄마는 모두 친엄마는 아니지만 ‘딸’을 만나, 그 ‘딸’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전폭적으로 헌신한다.

 

드라마 <마더>의 한 장면.

 

드라마 <마더>는 어떤 점에서는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멜로드라마에는 아름다운 결말을 훼방놓는 장애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로맨스에서 양가 집안의 반대나 불치병 같은 게 그 장애물이라면 <마더>에서 장애물은 법이다. 학대당하는 아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수진은 아이를 구출한다. 하지만 법의 관점에서 그것은 유괴이다. 죽을 뻔한 아이를 구한 것이지만 범법이기에 아이와 엄마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그래서인지, 각색된 한국 드라마에서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원작에서는 결국 그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헤어진다.

 

학대받는 아이에게 필요한 건 엄마라는 물리적 실체라기보다는 든든한 어른일 테다. <마더>가 말하는 것도 여기서 멀지 않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보호자이다. 진짜 엄마가 아니라도 혹은 여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엄마가 될 수 있다. 임수정 주연의 <당신의 부탁> 역시 어떤 엄마의 이야기인데, 여기 등장하는 엄마도 생물학적 엄마가 아니라 사회적 보호자이다. 재혼한 남편이 전처 사이에서 낳은 아이,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후, 여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아들로 받아들인다. 훌륭한 엄마라는 평가는 생모, 여자라는 기호를 넘어 든든한 양육자를 향한다. 남자도, 할머니도 혹은 형제라 해도 훌륭한 엄마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이의 양육자, 보호자 하면 무조건 친모를 먼저 떠올린다. 아이를 낳고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는, 일차적인 존재라서 그럴 것이다. 아내가 죽자 젖동냥을 다니는 심청의 아버지만 봐도 그렇다. 생모가 없으면 큰일 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가 달라지고 난 후, 그러니까 분유가 있고, 보모도 구할 수 있는 시대의 엄마 노릇은 좀 쉬워졌을까? 쉽다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세상은 달라졌지만 엄마의 몫이 많아졌으면 많아졌지 줄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도 엄마 멜로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불가피한 이별이라는 점에서 눈물이 나지만 무엇보다 울컥하는 건, 그 이별의 주인공이 ‘엄마’라는 사실이다. 이야기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만큼 엄마와 아들의 이별에 주목한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영화는 엉망진창이 된 집안 풍경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설거지는 쌓여 있고, 청소도 엉망이며, 입을 옷도 제때 세탁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계란 프라이도 제대로 하지 못해 손을 데고, 셔츠 단추도 어긋나게 채운다.

 

엄마가 잠시 이승에 돌아와 하는 첫 번째 일도 살림살이를 바로잡는 일이다. 어질러진 집을 청소하고, 그릇들을 정리하며, 엄마는 아이에게 머리 감는 법과 옷 챙기는 법을 가르친다. 어떤 점에서, 사고사가 아니라 병사했던 ‘엄마’가 그런 준비를 해두지 않았다는 게 좀 의아하기는 하지만, 영화는 엄마의 빈자리를 이러한 클리셰로 재연한다. 즉, ‘엄마’가 없는 집은 살림살이가 엉망이 되고, 아이가 단정치 못하다는 편견을 장면화하는 것이다. 잠시 돌아온 엄마가 학부모 참관 행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상투적 재연은 정점을 찍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엄마의 빈자리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두고 제도적 모성과 편견을 이야기하는 게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영화적 클리셰는 학부모 행사에 아버지 참여는 선택이지만 어머니 참여는 필수라는 편견 아래에서야 등장할 수 있다. 아들이라도 일차적 양육은 엄마의 몫이며, 엄마가 있어야 아이들은 빈자리 없이 잘 자랄 수 있다는 선입견이 강화되는 것이다. 부재중인 엄마와 돌아온 엄마에 대한 대중 영화의 상투적 재현은 은연중에 성역할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

 

세상이 살기 좋아지면서 아이를 돌보고, 살림살이에 투자해야 하는 절대적 시간이 줄었다고 한다. 세탁기가 ‘열일하고’, 청소기가 일을 덜어주었다고 말이다. 수치상으로는 지난 오십 년간 출산율도 감소했다. 그렇다면 과연 여성들이 육아에 투자하는 시간이 줄었을까?

 

프로이트 이후 심리학과 사회학은 아이의 성장에 ‘엄마’가 절대적이라고 가르친다. 분명 부모-아이의 관계인데, 어쩐지 엄마의 역할만이 강조된다. 1960년 영화 히치콕의 <사이코>에서 범죄자는 강압적인 ‘엄마’의 결과물로 그려진다. 많은 관객들이 2012년 <케빈에 대하여>도 엄마 때문에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된 아들 이야기로 읽고 싶어 한다. 세상의 지탄을 받는 아들 곁을 지키는 어머니를 보는 게 아니라 왜 아들을 사이코패스로 키웠냐고 원망하는 것이다. <케빈에 대하여>는 이해할 수 없는 악의 기원에 대한 탐구이지, 엄마에 대한 책임전가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 일차적으로 엄마에게 육아 불이행의 책임을 묻는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건 사회적 엄마, 보호자이다. 채무가 있다면, ‘엄마’라는 사회적 약호에 있는 것이지 그게 꼭 여성-친모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이지 이 세상에,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난 ‘엄마’를 부탁해 볼 일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