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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쟁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쓴 노벨 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말이다. 나 역시 전쟁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영화평론을 하다보면 너무 많은 전쟁 그리고 전쟁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마블과 디시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만 해도 그렇다. <원더우먼>은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최근 개봉했던 <저스티스 리그>의 배경도 인류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된 권력 쟁탈전이다. <스타워즈>는 말 그대로 ‘별들의 전쟁’이고, <어벤져스>에서도 비록 가상의 전쟁이라 하더라도 매번 전쟁을 치른다. 세계 어느 영화관에서든 전쟁이 현재 진행 중인 것이다.

 

영화 <강철비>의 한 장면으로 엄철우(정우성 분·왼쪽)와 곽철우(곽도원 분)가 식사하며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양우석 감독의 <강철비>는 전쟁에 대한 영화이지만 결코 전쟁영화는 아니다. 그런데 <강철비>는 그 어떤 전쟁영화보다 무섭고 두렵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머리를 비우고, 팝콘을 먹으며 그렇게 의자에 기대 볼 수 없는 전쟁을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바로 여기 한반도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이기에 영화적 허구를 넘어 우리의 무의식 너머 뇌관을 건드린다. 한반도와 전쟁, 아닌 척해도 올 한 해 내내 우리를 시달리게 했던 문제 아니었던가?

 

제목인 <강철비>는 스틸레인이라 불리는 클러스터형 탄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영화의 두 주인공의 이름을 은유하기도 한다. 남한의 안보수석(곽도원)과 북한의 정예요원(정우성) 두 사람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모두 철우이다. 음차 해서 풀어보자면 그들이 바로 철로 된 비, 철비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말장난 같은 이름의 동일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 우연이 한국전쟁이나 민족 분단과 같은 여러 가지 한반도 상황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두 사람은 정치의 논리를 벗어나 전쟁의 두려움을 직시하고, 체감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전쟁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니라 두려워한다. <강철비>를 보는 내내 무릎을 덜덜 떨었던 이유도, 그것이 잔혹하거나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다. 꾸며진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강철비>에 그려진 상황은 너무나 그럴듯하고 사실적이다. 양우석 감독이 그려낸 한반도의 정세가 과장이나 오판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적확하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한국인들이 꽁꽁 숨겨 두었던 공포의 개연성을 풀어낸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는 실제 있었던 전쟁의 한 장면을 IMAX 스크린 위에 담아냈지만, 그건 이미 과거이고 역사의 한 장면이다. 이미 가능성이 유산된 지나간 전쟁의 흔적인 셈이다. <강철비>는 지금 여기, 한반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 위에 허구를 직조한다. 한국에서 전쟁이란 어쩌면 가능한 미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 속 남한 철우의 입을 통해 말해지듯이 분단의 진정한 고통은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에 의해 증폭된다. 미래의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혹시나 하는 위협에 대비를 하는 것 자체가 평화의 약속을 위태롭게 하고 혼란의 위험을 높인다. 스티븐 밀러의 말처럼, 전쟁은 전쟁에 대한 준비과정 때문에 일어나곤 했기 때문이다. 준비된 상태 자체가 상대에게 위협을 불러온다. 칸트도 했던 이 말은 지금 한반도 정세에 많은 암시를 준다.

 

철우와 철우는 이념, 민족, 이윤과 같은 큰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그늘 아래 살아가고 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막고자 한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그런 일일 것이다. 전쟁은 정치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실패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미래의 전쟁에 대한 가능성 자체를 아예 없애는 방향으로서의 평화를 일궈 내야 할 것이다. 전쟁의 위협이 아예 사라질 때, 바로 진정한 평화가 오기 때문이다.

 

영화의 두 인물은 남한과 북한이 핵전쟁을 치를지도 모를 상황에서도 각자 나름의 ‘전쟁’을 치른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지키는 것, 그 자체도 전쟁과 다를 바 없다. 자기 전부를 걸고 그 순간만큼은 진지하게 싸움에 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적 예술사에서 전쟁은 곧 고단한 삶에 대한 은유가 되어 주곤 했다. 지금껏 우리의 영화들에서 전쟁이란 이렇듯 낭만적인 과거이거나 개인의 고투였던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라고는 했지만 진짜 전쟁은 아니었던 셈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어느새 완전히 허구로 유희할 수만은 없는 ‘전쟁영화’의 시대에 돌입해 버린 듯싶다. 먼 곳에서 보기엔 그저 영화적 문법에 충실한 장르 영화일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에게 ‘북’의 문제는 구체적 실감을 가진 문제이다. 그러니 전쟁을 정치적 수사학으로 남용하는 이들에게 혐오와 불신이 생길 수밖에. 이럼에 눈감아 생각해 볼 때, 결국 강철로 된 무지개처럼 단단히 벼린 평화를 기대하고 또 기대할 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