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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이 거듭되면 더운 음식이 그리워진다. 역시 엄마의 손이 생각난다. 벙거지를 쓴 생선장수 아저씨가 언 길을 뚫고 동네를 다녔다. 그의 리어카는 너무 추운 날씨에 모두 얼어버려서 생물인지 냉동인지 알 수 없는 생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볼을 베어버릴 것 같은 칼바람이 불었지만 아저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먹고산다는 것이 엄중하다는 사실을, 아마도 어린 나도 느꼈으리라. 아저씨가 동태를 무지막지한 식칼로 토막을 냈다. 그때 동태는 왜 그리 컸던지. 동네 구멍가게에서 나무상자에 담아 파는 모두부도 한 모 사고, 시원한 무와 겨울 파도 한 다발 샀으리라. 숟가락은 많고 동태는 모자라니, 두부를 많이 넣고 연탄아궁이에서 동태찌개를 끓였다. 요즘은 뒷골목 백반집에서나 볼 수 있는 양은냄비가 우리 집 부엌에서 보글거렸다. 2월 말이면 이미 상태가 나빠지던 신김치도 넣었다. 그 맛이 아직도 혀에 삼삼하다. 목젖이 데이도록 뜨거운 두부와 구수한 살점을 삼켰다. 아버지는 왜 그리도 동태 대가리를 좋아하셨는지. 가시 많고 맛이 씁쓸해서 숟가락이 가지 않던 뱃살도 왜 그리 챙기셨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내 나이가 이미 아버지의 그 시절 나이를 훌쩍 넘어섰으니.

 

겨울 먼바다에서 잡아들이는 명태잡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배가 작아서 파도에 휩쓸리고 장비도 좋지 않았을 것이다. 통계를 보니 그래도 내 어린 시절에 해당하는 1970년대는 어획량이 최고에 달했다. 힘들어도 만선의 기쁨이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겨울에는 명태잡이 최대 기지인 거진항에 밤새 무당의 제사가 끊이질 않았다. 제를 지내는 텐트 한 구석에서 어부들이 모여 두런두런 음식을 나누던 장면이 생각난다. 국내산 명태가 씨가 말랐단 소리가 들렸지만 우리 밥상에 명태, 동태가 끊이지는 않았다. 북한과 사이가 좋을 때는 수입 물량도 많았고, 러시아 어장에도 우리 배가 들어갔다. 겨울, 참혹한 추위와 파도를 이겨내며 명태를 잡아들였다. 배가 침몰했다는 끔찍한 소식도 들려왔다. 우리가 뜨거운 동태국물을 삼킬 때 누군가는 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터였다. 생태 맛을 보는 것도 여전했다. 명태가 그다지 인기 생선이 아닌 일본에서 들여왔다. 수산시장에서 새벽 장을 보던 7~8년 전에는 어판장 한쪽에 생태를 넣은 스티로폼 박스가 산처럼 쌓여 있기도 했다. 직장인들이 많은 동네의 식당에서는 속을 풀어주는 생태탕이 인기였다. 동일본 대지진이 터진 2011년 이후에는 생태도 잘 보기 힘들다. 방사능 탓에 인기가 떨어졌다기보다 일본도 어획량이 크게 줄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동태는 여전히 꾸준하다. ‘황금알’이라고 불리는 명란 값이 좋아서 한국, 일본, 러시아 배들이 파도가 센 북양어장에 출어를 많이 하고 있다. 동태는 이제 명란의 부속물처럼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노동의 최후 산물로 남은 것이 동태의 살점이라니, 입에 넣는 달콤한 동태찌개 맛이 그리 편안치만도 않다. 그저 더운밥과 찬 소주를 곁들여 묵묵히 숟갈질을 한다. 동태 맛이 이 세상에 오래 남아있을 것인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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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