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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삶을 무척 사랑하나 보다. 죽음 이후에도 이곳과 닮은, 어떤 시공간을 상상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49재나 천국, 저승과 같은 단어들 속에는 죽고 난 이후에도 존재하는 어떤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다. 이 믿음들이 영화나 소설, 그림이나 음악과 같은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한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 <신과 함께>가 그렇고, 골든글로브 애니메이션 부문을 수상한 <코코>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작가 위화 역시 <제7일>에서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을 그려내고, 아주 오래된 문학작품인 단테의 <신곡>에도 삶과 죽음 사이의 경유지가 등장한다.

 

영화 <신과 함께>의 한 장면으로 자홍(차태현 분)이 저승차사들과 재판을 받기 위해 강을 건너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거의 첫 번째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 <원더풀 라이프>는 죽은 다음날부터 시작된다. 이곳에는 우리로 치자면 저승차사와 비슷한 관리자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이제 막 죽어서 삶을 떠난 이들을 완전한 죽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주목을 끄는 것은 그 완전한 죽음의 세계에 대한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제안이다. 관리자들은 살아생전 경험했던 일 중 가장 소중한 기억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망자들이 소중한 기억을 선택하면, 관리자들은 그 일들을 재현해 영상으로 상영해준다. 그러면 망자들은 그 추억만 남기고 모든 기억들은 잊게 된다. 행복한 장면만 편집된 영화의 클립처럼, 그렇게 기억을 즐기고 나면 그들은 진정 ‘저세상’으로 가게 된다.

 

영화 <신과 함께>에서 그리고 있는 시간 역시, 죽음 이후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기 전,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 있는 세계이다. 49일의 시간 동안 삶과 죽음 사이에 망자가 걸려 있는 것이다. 죽은 자는 이 시간 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평생을 돌아보고, 저승의 법으로 재판을 받는다. 그 재판 결과에 따라 형벌을 받기도 하고 환생하기도 한다.

 

단테의 <신곡>은 한 남자가 연옥과 지옥을 다녀오는 이야기다. 특히 연옥이 흥미로운데, 연옥에 빠진 자들은 살아생전 저질렀던 일들을 순례함으로써 고통받는다. 부활제가 있는 금요일부터 부활절인 일요일을 넘는 시간까지 남자는 사후 세계를 접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렇듯 죽음 이후의 시공간이 삶의 시공간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학기말이 되어 성적표를 받듯 죽음 이후 며칠 동안 삶을 평가받는 것이다.

 

영화 <코코>는 뮤지션을 꿈꾸는 소년 미구엘(사진 중앙)이 전설적인 가수 에르네스토의 기타에 손을 댔다가 ‘죽은 자들의 세상’에 들어가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위화의 <제7일>에 등장하는 사후 공간은 더 심하다. 그곳은 삶의 이면이 아니라 이승의 복사판이다. 살았던 동안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여력이 저승에서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수의도 못 입고, 화장 순서도 귀빈에게 밀린다. 7일이 지나 완전히 죽고 나서야 진정한 평등이 온다. 죽음은 위화에게 평등이다.

 

이 작품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후 세계는 삶의 공간만큼이나 역동적이다. 그런데, 그 역동성의 핵심에는 삶의 연장선상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상상력이 자리 잡고 있다. 육체적인 활동이 모두 끝나고 정지한 일차적 죽음을 영혼이 떠나는 이차적 죽음과 분리해둔 것이다. 엄밀히 말해, 떼어내지 못하는 쪽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이다. 사람들은 영혼을 쉽게 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우리가 죽음 이후를 모르기에 그 두려움을 상상으로 옮긴다. 이는 죽음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거울단계에 대해 우리가 여전히 모르는 것도, 두려운 것도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죽음의 경유지를 상상하는 걸까? 왜 삶과 죽음을 단절하지 않고, 중간지대에 이야기와 그림, 영화를 남기며 들여다보는 걸까? 삶과 죽음 사이에 머물던 이들도 결국 떠날 수밖에 없다. 떠나지 못하고 중간에 영원히 걸리는 건 오히려 저주로 그려진다. 그러니 우리는 삶을 정리하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삶과 죽음 사이의 경유지에 머무는 것이다.

 

부표를 맴도는 꽃잎들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살았던 삶을 여행하며, 정리하고, 기억하고, 반성한다. 회개가 삶을 순례한 대가라면 환생은 삶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윤회가 업보라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은 축복임에 분명하다. 결국, 완전한 죽음 전에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검토이며 그를 위한 영혼의 여행이다.

 

발로 떠나는 여행과 달리 영혼의 여행은 쉽지 않다. 내가 살고 있는 익숙한 이 땅과 언어를 떠나는 여행을 통해 진정한 ‘나’를 돌아보듯이 어쩌면 사후 세계를 나들이함으로써 우리는 이번 생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 이후의 시공간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육체를 이탈한 영혼의 망명을 꿈꾸는 작업과 닮아 있다. ‘나’를 돌아보는 꽤나 성숙한 영혼의 순례라는 점에서 말이다.

 

공교롭게도 대개의 작품 속에서 삶을 돌아보는 데 허락된 시간은 7일이다. 그 7일, 죽기 전에 살아생전에, 한 번쯤 마음먹고 시간을 내서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어떨까? <원더풀 라이프>의 그들처럼 가장 소중한 추억을 꼽아보고, <코코>처럼 기억하고, 그러면서 말이다. 딱 일주일이면 되는데, 영혼의 순례는 쉽지 않다. 죽고 나서야 가능한 영혼의 여행, 그 여행을 미리 한 번쯤 해보라는 권고, 그런 속 깊은 충고가 사후 세계의 상상력 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