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간 2018년 7월16일 월요일, 전 세계 최초로 개봉하는 <미션 임파서블> 여섯 번째 이야기의 시사회가 있었다. 재미있었다. 톰 크루즈는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탄력성으로 스크린을 종횡무진했고, 불가능한 액션을 보란 듯이 펼쳤다. 다 거짓말이지만 잠시 현실을 잊게 해주었다. 하지만, 환상적 볼거리가 현실을 지워주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그렇다면 그건 마취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두 시간 정도면 완전히 각성되는, 그런 마취 말이다.

 

그런데 간혹 어떤 영화들은 사람을 완전히 흔들어 놓는 경우가 있다. <킬링 디어>가 딱 그런 작품이다. <랍스터>를 연출했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인데,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상영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킬링 디어>에도 <미션 임파서블>처럼 말도 안되는 일이 나온다. 소년이 저주를 내리자 그 저주가 실제로 일어나니 말이다. 마틴이라는 소년의 아버지는 심장 수술을 받다가 죽었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16세 마틴은 수술을 집도했던 심장외과 전문의 주변을 맴돈다. 의사 스티븐은 선량한 미국 시민으로서, 다정한 아버지로서, 친절한 이웃으로서 소년을 환대한다. 밥도 사주고, 고가의 시계도 선물하며 언제든 연락하라고 이야기한다.

 

영화 <킬링 디어>의 한 장면.

 

문제는 이 소년이 정말 언제든 전화를 하고, 가족 모임에 들어와 아들과 딸에게까지 너무 가까이 접근했을 때 시작된다. 스티븐은 이제 아무 때나 전화하지 말라며, 형편없는 음식이나 주는 마틴네 저녁식사를 거절한다. 그 날 이후부터, 마틴의 불편함은 불길함으로 바뀐다. 마틴이 지독한 저주를 뿜어내고 거짓말처럼 딸과 아들의 사지가 마비되며 음식도 거부한다. 이대로라면, 마틴의 저주처럼 아이들이 눈에서 피를 쏟으며 죽을 것만 같다.

 

영화의 이야기는 마틴이 스티븐을 계속 찾아온 지 6개월 이후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렇다. 자신의 수술대 위에서 죽은 남자의 어린 아들을 친절히 대한 지 6개월 만에, 집도의 스티븐은 죄책감을 덜고 자신이 마치 뭔가 대단한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라도 된 양 착각한다. 자신의 명백한 실수가 마틴 아버지의 죽음을 가져왔을지도 모르는데, 어느새 자신이 베푸는 사람 역할을 하고 마틴은 그 동정을 구걸하는 사람처럼 바뀌어 있다. 위치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마틴은 당신은 내게 속죄를 하고 사죄를 해야 할 사람이지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아님을 가르쳐주려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이며 마술적인 일들은,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 깊은 두려움과 공포를 일깨운다. <미션 임파서블>처럼 신나는 게 아니라 너무 불편하고 두려운 공포 말이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도 스티븐처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의 ‘심장’을 건드리는 의사라는 뜻이 아니다. 영화 속 대사처럼 ‘심장’은 메타포, 비유다. 우리는 남의 마음을 의도치 않게 건드리곤 한다. 삶의 중심에 함부로 침범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린 조금씩 누군가의 삶에 대한 가해자로 살아간다.

 

스티븐은 속죄하기 위해 6개월간 죽은 환자의 아들 마틴에게 거의 최선을 다했다. 6개월, 마틴이 스티븐이 가진 것, 그러니까 직장, 가정, 집에 더 깊숙이 들어오려 하자 그는 6개월이면 충분했다는 식으로 마틴을 밀어내려 한다. 스티븐에게 죄책감의 유통기한은 6개월이었고, 그것마저도 자신의 삶을 침범하지 않는 조건이 가능할 때였다. 그는 아버지를 잃었는데, 6개월간의 친절로 균형이 맞춰질까? 게다가 하고 싶은 대로, 주고 싶은 만큼 동정을 베푸는 게 그게 속죄이며 환대일까? 아니다. 그건 마틴이 원했던 ‘정의’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큰일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는 가해자의 일부로서 참회하고, 부끄러워한다. 세월호 참사 순간 무력하게 그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때도 그랬고, 19살 청년이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목숨을 잃었을 때도 그랬고, 2년 전 네살배기 아이가 뜨거운 어린이집 통학버스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도 그랬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다들 가해자나 다를 바 없다며 미안해했다. 처음처럼 그렇게 미안해하고 모두가 다 가해자로서 진짜 반성했다면, 세상은 달라졌어야 옳다. 하지만 과연 세상이 달라지고 있는가?

 

6개월, 뜨끔하지만, 정말 우린 사건 발생 6개월이 지나서도 사회적 책임감과 죄책감을 공유하며 살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스티븐처럼, 내 가족이 먼저고, 내 일이 먼저라면서 어느새 가해자의 위치에서 슬쩍 내려오지는 않았을까? 죄책감의 유통기한은 얼마가 적당할 것인가? 아니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죄책감에 유효기간이라는 게 있어도 될까?

 

<미션 임파서블>은 보고나자마자 영화의 주요 장면들이 뇌리에서 사라졌는데, <킬링 디어>의 이야기들은 머릿속에 심어둔 씨앗처럼 자꾸만 자라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더운 여름 밤, 서늘한 공포로 잠 못 들게 하는 영화, 그게 바로 작은 영화, 아니 훌륭한 영화의 힘이다. 좋은 영화는 마취로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는 게 아니라 깊이 잠들어 있는 본질적 감정을 흔들어 깨운다. 잊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환기하는 영화, 그런 영화들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

 

<김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