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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는 즐겁다. 다만 그것이 해결될 때 말이다. 범인이 누구였느냐를 밝혀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파악하고, 분석하고, 규정할 때 마침내 범죄는 정복된다. 왜가 밝혀진다는 것은 범죄의 인과관계가 해부되었음을 뜻한다. 해부된 범죄는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원인을 알면 범죄는 예방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할까? 여기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해 낸 탐정, 에르큘 포와로 말이다.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에서 에르큘 포와르 역을 맡은 케네스 브래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스틸 이미지.

 

에르큘 포와로는 해결사의 대명사다. 포와로가 있는 곳에 해결되지 못할 범죄는 없고, 잡히지 않는 범인은 없으며, 원인 모를 범죄도 없다. 포와로가 주목하는 순간 우연은 사라진다. 모든 우연은 철저히 계산된 필연이며 그래서 회색 뇌세포를 가진 그가 풀어내지 못할 난제는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즐거운 범죄의 면면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이미 1974년에 영화화된 바 있다. 원작을 읽었다면 잘 알고 있듯이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반전이 독특한 작품이다. 이 반전은 범죄서사에 대해 소비자가 으레 요구하는 관습적 모범답안을 뒤집는 것과 연관된다. 대개의 독자, 관객들이 범인이 누구인가에 집중하는 동안 이야기는 누구가 아닌 왜를 생각하라고 떠민다. 누구냐보다 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너무도 유명한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결론을 모른다면, 더 이상 읽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어떤 점에서 범인을 가려내는 게 불가능한 사건에 가깝다. 범인이 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이며, 게다가 서로가 알리바이가 되어 서로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즉,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은 다수의 사람들이 의기투합해 정의를 실현한 일종의 단죄이다.

 

중요한 것은, 이 기차에 바로 에르큘 포와로가 탑승했다는 사실이다. 기획이 완벽할수록 포와로의 재능은 빛나고 그의 역할은 중요해진다. 역시나 그는 천재이기 때문에 이 완벽한 기획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즐거운 범죄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얽히고설킨 열세 개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포와로는 그 숨겨진 이면과 거짓을 읽어낸다. 좀 과하게 이야기하자면 마치 포와로에게 읽히기 위해 열세 명이 복잡한 암호를 출제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단지 어려운 문제일 뿐 결국 풀릴 수 없는 퍼즐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 문제적인 것은 공동범죄라는 바로 그 부분이다. 열세 명의 사람들이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의 복수를 위해 모의한다. 케네스 브래나 감독 역시 이 부분이 꺼림칙했는지, “영혼의 균열”이라는 말을 거듭 강조한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을 위해 범죄를 모의한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돈”이었다면 훨씬 더 그럴 듯해 보이진 않았을까? 2017년 현재의 관객들에게, 열세 명이나 함께할 수 있는 공공의 신의라는 게 납득이 될 수 있을까?

 

다정한 친구, 은인, 존경했던 이의 복수를 위해 현재의 자신을 걸고 범죄에 가담한다는 것, 그건 너무나도 아름다운 인간적 연대이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며, 이상적이다. 2017년엔 불가능해 보이는 연대, 적어도 1930년대에는 이런 식의 정의와 신뢰, 우애가 가능하리라 여겨졌던 모양이다. 2017년, 완벽한 천재 포와로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남을 위해 스스로를 헌신하는 열세 명의 인물들이다.

 

어쩌면 지금의 시점에서는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 같은 범죄자가 더 그럴 듯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무 이유도, 맥락도, 감정이나 불만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범죄자 말이다. 만약, 그에게 “왜”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냥”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의 범죄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그런 범죄자를 쫓는 보안관에게 그의 행적은 암호나 퍼즐이 아니라 해독 불가능한 난수표에 불과하다. 애당초 인과관계 따위가 없으니 포와로가 살아 돌아온다고 할지언정 안톤 시거의 범죄를 명명백백히 밝혀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즐거운 범죄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1974년의 고전 영화를 2017년 새롭게 단장해 다시 보는 마음도 여기서 멀지 않을 것이다. 어느덧 세상엔 회색 두뇌로도 이해할 수 없는 범죄들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아내를 성매매에 이용할 뿐 아니라 딸 친구까지 유인해 폭행 살해하는 남자도 그렇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초등학생을 유인해 산산이 부순 소녀도 그렇다. 유능한 탐정만 있으면 모든 범죄는 해결 가능하다고 믿었던 그 시절이야말로 어쩌면 인류의 좋은 시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젠 그런 환상조차 설득력을 잃은, 황무지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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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