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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 인류를 의미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생각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호모를 꾸미는 말, 사피엔스의 뜻이 바로 슬기, 지혜이기 때문이다. 슬기,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로 생각해 내는 정신의 능력”이다. 그러니까,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달아야 하고, 그것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하는 게 슬기로운 인간이 하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종으로서의 인류의 ‘능력’인 셈이다.

 

 

영화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서 전쟁을 치르고 괴멸에 이르는 종은 바로 ‘생각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 호모 사피엔스이다. 말하고, 사고하고, 상상하는 인류가 사라지는 거지 지금 우리처럼 생긴 인간이 사라지는 게 아닌 것이다. 영화의 출발점이었던 1968년작 <혹성탈출> 오리지널을 돌이켜보자면, 그 작품에서 인류는 호모 에렉투스 정도의 원시 인류들로 묘사되어 있다. 서 있다뿐이지 말하거나 생각하고,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인류의 입장에서는 묵시록이고 생각하는 유인원의 입장에서는 창세기에 해당한다는 이야기이다. 말 그대로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이니 말이다.

 

영화 <혹성탈출: 종의 전쟁>을 보자면 지혜로운 쪽은 군인으로 상징되는 대령이 아니라 유인원 시저에 가깝다. 시저는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조직적이며, 공감 능력도 뛰어나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어쩌면 공감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의 뛰어난 지혜이다. 우리에게 강인한 생존력을 주는 것은 기술이었지만 정보와 교감이라는 매개가 없었더라면 이처럼 정교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에게 있어서는 사회성이야말로 진화의 혜택이다. 공감 능력이 발달할수록 타인과의 소통에 유리하고 더 친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 그려지는 여러 장면들은 성경 속의 창세기와 상당 부분 닮아 있다. 시저는 모세처럼 유인원 무리를 이끌고 약속의 땅을 찾아간다. 유인원들이 감금된 수용소 모습은 거의 명백하게 아우슈비츠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종적소멸을 부르짖는 스킨 헤드의 대령이 극우주의를 정치적 출구로 선택하는 여러 지도자들을 연상케 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인류는 지금껏 수많은 생존의 고비를 넘어왔다. 유발 하라리가 정리했듯이 기아, 역병, 전쟁, 이 세 가지가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진정 슬기로운 사람은 그러한 고비를 넘을 수 있는 진보된 기술의 주인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그런 역사를 통해 배우는 사람, 즉 학습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특히 전쟁이 그렇다. 기아와 역병이 과학과 기술의 영역이라면 전쟁은 거의 전적으로 사람의 선택이며 판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지나간 일을 역사적 허구로 재창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체험을 여러 권의 논픽션, 픽션을 통해 남겼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기록이 절대적인 증거라기보다 매우 개인적인 체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자신은 그때의 감정을 기억할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절절한 감정이야말로 기록이나 서류로 남은 그 어떤 정보보다 더 강력한 공감의 힘을 발휘했다. 전쟁의 잔혹성은 보고된 숫자나 남겨진 기록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지만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반성은 한 개인의 주관적 체험으로 더 절실히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가 실패한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아우슈비츠에도 같은 수용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수용자들을 못살게 굴었던 카포(kapo)들이 있었다. 또 다른 아우슈비츠 생존자 빅터 프랭클은 그런 카포를 일컬어, 태생부터 다른 사람들로 묘사한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선과 악, 자애심이라는 것은 그가 감시병이었느냐, 수감자였느냐에 의해 나눠지는 게 아니었고 그 경계가 너무 애매했다고 토로했다. 생각보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악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이 없었던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선과 악이 혼합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오히려 극한의 상황은 인간성의 바닥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곤 했다. 인간 이하의 삶의 형편에 자살을 다짐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누구도 자살을 생각조차 못했던 상황의 역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관점에서 <혹성탈출: 종의 전쟁>을 보자면 인간적인 존재는 대령이 아니라 유인원 지도자 시저이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불쾌하지만 영화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호모 사피엔스로서 생각하고, 교감할 만한 여러 주제들을 제시한다. 인간이니까 지혜로운 게 아니라 지혜로워야 인간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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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