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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2.09 그는 상습범이다

“저랑 한잔 더 하실래요?” “조개를 참 좋아하나 봐요. 난 다른 조개 먹고 싶은데.” “저기 가서 키스만 하고 갈래요?” 만약, 처음 만난 남자가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그건 어떤 상황일까? 게다가, 그 남자와 여자가 직무상 상하관계에 놓인 입장이라면 말이다. 남자는 교사이고, 여자는 그에게서 평가를 받아야 하는 교생이다. 영화 <연애의 목적>(2005)의 유명한 장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연애의 목적>에서 영어교사 이유림(박해일 분·왼쪽)이 술자리에서 미술교생 최홍(강혜정 분)에게 치근덕거리고 있다.

 

한재림 감독의 &lt;연애의 목적&gt;의 앞부분을 보자면, 모든 게 교과서적이고 또 뻔하다. 다른 여자 교생들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교생이 있다. 게다가 예쁘다. 그녀를 담당하게 된 교사는 우선 술 한잔하자고 권한다. 거절당한다. 하지만 어떤 조직이든 우리나라엔 ‘회식’이라는 문화가 있다. 드디어 첫 번째 회식이다. 회식자리에서 일찍 그 교생이 뜨자, 늦더라도 다시 돌아와 달라고 부탁한다. 교생이 돌아왔을 때, 마침 사람들은 없었고, 그래서 남자 선생님이 다시 권한다. “저랑 한잔 더 하실래요?”

 

남자 선생님의 집요하고도 이상한 부탁에, 최홍(강혜정 분) 교생은 “여자 친구 사랑하세요?”, “이 선생님, 앞으로 제 얼굴 어떻게 보려고 이러세요?”라며 얼굴을 찌푸린다. 그래도, 최홍은 대개의 여교생들보다 한두 살 많은 언니답게 당당하게 거절한다. 여성의 사회생활 중 중요한 항목 중 하나가 회식자리에서 방어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유림(박해일 분) 선생은 집요하다. 끊임없이 요구하고, 따라붙고, 집을 찾아가고, 심지어 방으로 들어간다.

 

2005년 &lt;연애의 목적&gt;이 개봉했을 때, 이 영화는 꽤나 당혹스러운 작품이었다. 제목이 &lt;연애의 목적&gt;이지만 마치 성추행의 추억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2018년, 13년이 지나 다시 이 영화를 보니 정말이지 성추행의 알고리즘을 거의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첫 번째 회식자리, 게다가 거절할 의사는 있지만 거절할 권리가 없는 사회 초년병 여성을 겨냥한 무례하고도 폭력적인 언어들까지 말이다.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을 두고 또 한 번 이 사회가 요동쳤다. 2016년 이미 한 차례 ‘#문단 내 성폭력’이 지나갔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당시 사건들이 구체적인 성폭행 사태를 동반한 형사적인 문제에 국한되었다면 이번엔 추행과 희롱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 비단 문단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이건 문단이라는 그래도 가장 독립적이고, 용기 있는 집단에서 터져 나온 하나의 실증사례일 뿐이다.

 

적어도 최영미 시인은 스스로 문단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있고, 또 문단 밖에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여성이었기에 고백할 수 있었으리라 본다. 그러니까, 여전히 말하지도, 고백하지도 못하는 여성들이 수없이 많다. 이건 어떤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초년병 여성과 권력을 가진 기득권의 문제이다. 법조계, 의료계, 학계 심지어 교육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저랑 한잔 더 하실래요”로 시작되는, 첫 번째 회식의 공포가 우리 사회 곳곳에 가득 차 있다. 아니라고 부인할 수가 없다. 그게 더 심각한 문제이다.

 

‘천조국’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꽤나 자유롭고, 여성 인권이 높다고 여겨지는 미국에서도 이제 겨우 미투(Me Too)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 대한 여성 연기자들의 고백은 고통스러운 항거였다.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2005년 &lt;연애의 목적&gt;을 두고, 당혹스럽다는 반응은 있었지만 이를 두고 사회적 권력 관계와 성적 폭력성의 상관관계로 읽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건, 둔감했기 때문이다. 고통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 자체가 더 문제이다. 리베카 솔닛이 &lt;멀고도 가까운&gt;에서 말했듯이 무감각은 자아를 수축하고, 우리가 그런 사회의 일부라는 것을 잊게 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신체 부위는 죽은 신체밖에 없다.

 

최영미 시인이 성추행을 고발하면서, 거듭 ‘부드러운 거절’을 강조한 것이 너무도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영미가 김소월의 시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의 한 부분을 암송하며,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고락에 겨운 입술로는/ 같은 말도 조금 더 영리하게/ 말하게도 지금은 되었건만/ 오히려 세상모르고 살았으면!”이라고 할 때, 이 목소리에는 후회와 절규, 고통과 회한이 뒤섞여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무례한 요구와 폭력적 언어의 부당함이 아니라 그것을 거절하는 또 다른 에티켓을 여성에게 요구해온 셈이다. 거절의 예의라니 그것도 폭력적 언어를 예의를 갖춰 거절해야 하다니.

 

홍상수의 초기작 &lt;오! 수정&gt;이나 &lt;강원도의 힘&gt;을 보면, 여성과 하룻밤을 갈구하는 철부지 지식인들이 잔뜩 등장한다. 임신중절 후 채 아물지 않은 여제자의 몸을 파고드는 &lt;강원도의 힘&gt; 속 대학 강사나 ‘그만 뚝’ 호통을 듣고 나서야 멀찍이 떨어지는 &lt;극장전&gt;의 남자 주인공을 보면, 왜 그렇게 많은 지식인 남성들이 홍상수 영화를 보며 감정이입을 하고, 공감을 했는지 새삼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아마도 많은 남성 권력자, 지식인들이 &lt;연애의 목적&gt; 속 이유림처럼 억울하고, 답답할 것이다. 여성의 피해에는 전혀 공감되지 않고, 남성의 입장에 전폭적으로 이입이 될 테니 말이다.

 

타인의 고통을 같이 앓는 것은 재능이다. 호의였고, 격려였는데, 오해가 생겼고 운이 나빴다고들 말한다. 구차한 변명이다. 그들은 상습범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