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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3.01 먹방과 서사적 발효의 시간

▲ “문화에 따라 다른 음식과 그 소비양식
결국은 사람 사이의 ‘관계’로 마무리
삶의 반영 아닌 ‘식욕 자극’인 우리 영화
요리가 철학으로 ‘발효’된 작품 나와야”


TV를 켜면 여기저기 먹는 사람들이다. 먹는 방송, 이른바 ‘먹방’이 대세인 것이다. 물론 먹방이 방송의 주요 구성물이 된 것은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퇴근 무렵 방송되는 저녁 방송에는 맛집 소개가 꼭 끼어 있다. 매일 소개되는 맛집이 각 채널당 두세 개를 넘다보니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맛집이 있구나 새삼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의 먹방은 이렇듯 조금 단순한 식당 소개를 넘어섰다. VJ가 카메라를 들고 식당에 가 맛있게 먹는 일반 시민을 찍던 방식에서 벗어나 유명인이 음식을 만들고 맛보고 그 맛을 표현하는 시스템으로 바뀐 것이다. <삼시세끼> <냉장고를 부탁해> <내일 뭐먹지> 등의 방송들이 아마 여기에 속할 듯싶다.

의식주라는 말이 암시하듯, 먹는 것은 인류의 삶에서 무척 중요한 행위이다. 그것은 본능이기도 하지만 특정한 공간과 시간을 입고 나면 문화가 된다. 동물이라면 누구나 다 먹어야 하지만 각 문화권에 따라 먹는 음식과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먹는 것, 음식은 삶의 일부이자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음식 영화와 먹는 방송이 구분되는 기준점이 바로 이 삶과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음식 영화라면 이안 감독의 <음식남녀>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할리우드의 대표 감독 중 한 명이 된 이안이 아직 대만에서 활동하던 시절 만든 이 영화는 중국 하면 떠오르는 ‘중식’의 세계에서 출발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화려한 대만 음식들이 화면을 채운다. 동파육이 될 돼지고기 삼겹살이 찜통에서 모락모락 익어가고, 큰 오리의 주둥이에 바람을 불어 배를 빵빵하게 채우는 조리 과정도 등장한다. 여러 가지 소를 넣어 만드는 딤섬, 뜨거운 불에 단숨에 볶아내는 야채 등이 빠른 손놀림의 요리사를 거쳐 맛깔나는 영상으로 거듭난다.

<음식남녀>에서 ‘음식’은 ‘남녀’보다 먼저 등장하지만 이야기는 결국 ‘남녀’, 즉 사람의 서사로 마무리된다. 영화는 대만의 유명 호텔 주방장인 아버지와 세 딸의 이야기다. 아버지와 딸이라는 설정에서 짐작하다시피 <음식남녀>는 전통 음식을 통해 세대 간의 갈등과 충돌, 달라진 문화를 보여준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 만찬을 베풀어 자녀들과 함께하고 싶지만 그마저도 점점 힘들어진다. 패스트푸드로 한 끼 때우면 되는 딸들에게, 이런 음식은 거북하다. 일주일 한 번의 만찬을 통해 서로 얼굴을 보고자 하는 아버지의 뜻도 버겁다. 각자 자신의 고민들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안 감독은 붕괴되는 대만의 전통을 영화화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결혼피로연> <쿵후선생>과 같은 작품에서처럼 <음식남녀>에서 ‘음식’은 단순히 식욕을 자극하는 자재가 아니라 가족, 문화, 변화를 드러내는 예민한 소재로 쓰인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다룰 때 비로소 음식은 요리된다. 요리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다른 영화 <아이 엠 러브>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줄리 앤 줄리아> 등의 영화에서도 음식은 단순히 식욕을 자극하는 데 멈추지 않는다. 요리는 인간관계 속에서 매듭을 맺고 요리 서사로 완성된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의 한 장면


최근 개봉했던 영화 <아메리칸 셰프>에서도 그렇다. 유명 레스토랑의 셰프였던 칼 캐스퍼는 유명 음식평론가의 혹평에 맞서다 직장을 잃게 된다. 문제는 그 평론가의 말이 크게 잘못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유명 셰프로 이름을 얻게 된 이후 캐스퍼의 음식은 대중적 입맛을 맞추는 데 멈춰버린다. 사람들에게 잘 팔리는 음식만 만들 뿐 새로운 도전이나 연구는 전혀 하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요리사로서의 태만을 평론가가 건드렸기에 캐스퍼는 더욱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숨기고 싶었던 속내를 들킨 것처럼 말이다.

요리를 돈벌이로만 생각하는 캐스퍼의 삶도 요리와 다르지 않다. 아들과의 약속은 잊기 마련이고 대단한 자극도 없으면서 불륜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그가 아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푸드트럭에서 시작한다. 돈만 버는 뻔한 음식이 아니라 열정이 담긴 소박한 음식으로 새 출발을 시도하는 것이다. <아메리칸 셰프>의 감독이자 주연은 영화 <아이언맨>의 감독 존 파브로이다. 어떤 점에서 그의 요리 이야기는 그의 영화 이야기와 닮아 있다.

그런데 우리 영화 가운데서는 딱 떠오르는 음식 영화가 없다. 물론 음식을 소재로 한 영화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음식과 삶이 긴밀하게 연결된 작품은 거의 없다는 의미다. 음식을 소재로 경쟁하고, 음식을 소재로 승리하는 주인공, 음식으로 복수하는 인물들은 있지만 음식을 거쳐 속 깊은 삶의 이치를 서사화한 작품은 드물다. 음식을 보여주며 식욕을 자극하는 이미지는 있지만 요리를 통해 삶을 반영하는 드라마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훌륭한 요리 영화는 결국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시각에서 마련된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쓰기도 한, 이자크 디네센의 <바베트의 만찬>은 삶을 꿰뚫는 존재론적 성찰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영화화되기도 한 이 작품에서 ‘만찬’은 화려하고 풍요롭고 사치스럽지만 한편 무척 신성하고 소박하기도 하다. 평생을 절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화려한 프랑스식 만찬은 삶의 그늘에 온기를 준다.

발효는 학습이 필요한 후천적 음식이다. 중국인에게 맛있는 취두부가 우리에게는 역하고, 우리에겐 기가 차도록 맛있는 신 김치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겐 상한 음식으로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음식이 요리가 되고 요리가 철학이 되기까지는 발효의 시간이 필요하다. 잘 발효된 한국의 요리 영화가 나오길 기대해 본다.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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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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