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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2.08 우주에서 농사짓기

수능이 치러지기 전에는 학력고사란 게 있었다. 아마도 교육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과목일 텐데, 실업도 고사 과목 중 하나였다. 그게 쓸모가 있든 없든 3년을 열심히 배우고 가르쳤다. 필답고사 320점 만점에 무려 15점이 배점되어 있었다. 속칭 암기과목이니 이른바 무조건 고득점을 노리고 봐야 하는 전략과목이기도 했다. 실업이란 게 워낙 다양해서 상업, 공업, 가사에 농업, 수산업, 광업도 있었다. 고등학교가 속한 지역 사정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업, 공업이 많았다. ‘밥’이 되는 과목이라는 뜻이었다. 농업이니 수산업이니(심지어 광업까지) 하는 과목은 사양산업 같았고, 1980년대에 바라보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실업 과목에 속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인문계를 다녔으니 상업을 배웠다. 문제는 이 과목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었다. 대변 차변이 나오는 부기 부분에 가면, 머리가 다 멍해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부채도 자산이다’라는 원리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남의 돈을 빌려 쓰는데 그게 어찌 ‘내 돈 같은 자산’이 되느냐고. 원서 쓸 날은 가까워 오고, 부채와 자산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그때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하는 재수생 형의 제안은 놀라웠다. 농업을 선택하라는 거였다. 쌀 나무나 겨우 아는 수준에 농업을 어찌 배우냐고, 이제 곧 원서 쓰고 시험이라고. 그 형이 지긋이 웃으며 말했다.

 

“농업은 쉽게 나와. 네가 매일 먹는 게 시험에 나온다고.”

 

과연! 기출문제를 보니 소, 돼지에 쌀에 고구마, 사과와 귤이 시험에 나오는 게 아닌가.

 

나는 그렇게 농업을 순전히 책으로 배웠고, 학력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다. 뚱딴지같은 생각에서 시작된 우연이었지만 농업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무엇보다 도시에서 산 내게도 흥분될 정도로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병아리를 까는 법, 알을 많이 낳게 하는 법, 소와 말의 임신 기간이 사람보다 길다는 거(이 녀석들이 임신한다는 사실을 도시 아이들은 아는가 모르겠다), 사과를 많이 열리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지, 돼지에게는 진흙목욕이 최고라든지…. 농(축산)업이 기본적으로 인간 중심의 이기적인 생산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 입에 들어가는 생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투명한 랩으로 곱게 부위별로 포장된 고기를 고르면서도 그 붉은 살코기가 어떤 존재의 누적된 삶의 부분인지 우리는 이제 알지 못한다. 아니,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산다.

 

 볍씨가 어떻게 모종이 되어 무논에 심어지고 나락이 되는지, 그걸 털어서 어떻게 깎아야 맛있게 먹는지 아는 사람이 도리어 별종이 되는 세상이다. 농축림수산업은 인류를 지탱하는 기초 산업이다. 누구 말마따나 스마트폰을 먹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먹는 것을 이해하는 일, 아마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제일 큰 힘이 될지도 모른다. 단위학교에서 농업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것이 앞이 안 보이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줄 것이다. 별에 버려진 우주인이 인분으로 감자농사를 짓는다는 영화 속의 이야기는 그 의미심장함의 비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이테크 시대에도 우리는 뭔가를 먹어야 하고,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암시하는.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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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