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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9.29 연민이 아니라 우정을 나누는 영화

영화 <김광석>의 포스터


그리스인들에게 친구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었다. 우정 어린 대화 속에서 이뤄지는 인간적인 것을 필란트로피아(philanthropia)라고 불렀는데, 이는 인간애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곧 친구이고 그렇게 대화를 할 수 있는 마음가짐 자체가 인간애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매우 사적인 비밀과 생활을 나누는 친구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그런 사이를 지칭하는 우정이란 루소가 정립한 것이라고 한다. 루소가 아니라 그리스식으로 생각해보자면 친구는 훨씬 더 갖기 어렵고, 우정은 나누기 어렵다. 왜 행복의 절대적 조건으로 친구와 우정이 필요했는지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를 만들고, 보고, 평가하는 과정은 대화적이다. 그저 사적인 비밀을 나눈다기보다는 대화가 될 만한 소재들을 영화로 만들어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는 점에서 말이다. 좋은 영화라고 하면 충분한 해석의 여지가 많은 영화라고 생각되는데, 이 해석의 여지야말로 대화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대화할 수 있는 부분 어쩌면 많은 의견이 유통될 수 있는 영화일수록 좋은 영화라고 믿기 때문이다.

 

최근 두 편의 영화가 화제이다. 하나는 김광석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쫓아가는 다큐멘터리 영화 <김광석>이고 다른 하나는 위안부 문제를 색다른 방식으로 재현한 <아이 캔 스피크>이다. <김광석>은 영화가 가진 대화적 힘의 또 다른 증례가 될 듯싶다. 이미 공소시효까지 만료된 과거의 ‘사건’은 서술됨으로써 다시 대화의 주제가 되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김광석>은 이미 만료된 그러니까 과거가 된 사건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인데, 이 극복은 다름 아닌 반복되는 서술과 진술을 통해 마련된다. 사실을 영화의 영역에 가져옴으로 인해 독백이 대화를 작동시키게 된 셈이다. 영화 <김광석>의 과거 사용법이 여러 가지 점에서 의미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광석>은 미학적이거나 영화공학적인 면에서 따지기는 좀 어려운 작품인데, 사실이 어떻게 진술과 만나 새로운 교호작용을 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이 캔 스피크>의 대화술은 좀 더 세련됐다. 과거를 미학의 범주 안으로 들여와 이야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는 견고한 과거라는 벽을 유연하고, 현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일 테다. 이야기로, 영화로 구체화됨으로써 오히려 역사는 항구성과 지속성, 현재성과 반복성을 얻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는 세계 속에 다른 위치를 새겨 주며, 그것은 같지만 다른 이야기로 진척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시대를 넘어선 무엇으로 살아남게 되고, 그 대화는 단지 지금 영화와 관객 사이를 넘어 미래의 관객과의 대화로도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 연민이라면 그런 맥락에서 우정은 훨씬 더 선택적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두 인물, 민재와 옥분의 관계가 우정으로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다가 연민과 동정이 좀 더 시혜적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면 우정은 훨씬 더 동등한 관계를 전제한다. 할리우드 영화 <인턴>에서 나이 많은 할아버지 인턴과 젊은 여성 CEO의 관계처럼, 그렇게 다르지만 동등한 관계에서 우정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취향의 세련이나 의미 있는 여가 선용이라기보다는 유용한 오락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영화와 대화를 나누고 우정을 나누는 건 여간 어렵지 않다. 마치 재미만이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재미있으면 되지라는 식의 논리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신체가 난자되어도 무감각하게 바라보고, 지나치게 잔혹한 폭력들도 영화적 클리쉐로 여겨진다. 사실도 아닌데, 허구인데, 영화인데 정색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효용론이 너무도 강렬해서 의미나 윤리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척이나 고답적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하지만 그렇게 영화의 용도를 한정하는 것이야말로 현실로부터의 후퇴이고 내적인 망명일지도 모르겠다. 한나 아렌트는 공포를 현실에 대한 정신의 후퇴라고 말한 바 있다. 반대로 희망은 현실의 초월이다. 즉, 현실을 너무 무섭게 재현하는 것도 도망가는 것이고 거꾸로 현실을 너무 아름답게 그리는 것 역시도 거짓이다. 현실의 압력이나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영화를 본다는 핑계가 언제나 통할 수 없는 이유이고 영화는 단지 오락일 뿐이라는 폄훼와 다르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놀이에도 치유의 효과가 있듯이 오락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허용될 수는 없다. 결국 영화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치명적 질병이 만연했던 시대엔 병이란 사람과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완치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 치유와 치료가 더 중요시된 맥락에는 이러한 겸손함이 자리 잡고 있다. 완벽히 없앨 수 없으니, 병을 다스리고, 고통을 줄여 주는 것, 치료와 치유는 그런 개념이었던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영화란 세상에 대단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지시의 개념어를 주는 완치의 예술이 아니다. 치유하고 치료하는 것, 그러니까 불완전한 역사를 다시 이야기하고, 하나의 치료법(therapy)을 제안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힐링하는 것, 그게 바로 영화의 존재이유인 셈이다. 연민이 아니라 우정을 나누는 영화가 좋은 영화인 이유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