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이 좋다. 어린 시절에도 좋아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좋아진다. 이야기를 읽고, 볼 때엔 기대감이라는 게 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읽으면서 파국을 예상하고,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을 땐 만사형통을 기대하는 게 그렇다.


독자들은 전문가의 생각보다 훨씬 예민하고 똑똑해서, 아무 결말이나 다 반기지 않는다. 예상되는 결말이란 개연성과 통한다. 이야기 소비자는 그럴듯한 결말을 기대한다. 독자와 관객은 이미 그럴듯한 결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다만, 그 기다림의 끝을 긴장하며 지켜보는 것일 뿐이다. 


2월1일 종영한 드라마 <SKY캐슬>의 마지막 회에 비난이 쏟아진 이유도 여기 있다. <SKY캐슬>은 주요 인물의 죽음으로 이 드라마의 방향성을 예고했다. ‘만만치 않은 비극이 될 것이다’라고 말이다. 속물주의에 직격탄을 날리며 사실주의의 주먹을 날렸다는 점에서도 기대감이 커졌다. <SKY캐슬>은 현실을 만만히 넘기거나 덮어주지 않고 한 꺼풀 밑의 더러운 욕망과 복잡한 관계를 모두 드러내놓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시시한 화해나 성긴 봉합은 없으리라는 선언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론은 그저 그런 봉합이자 화해였다. 도망간 것이다. <SKY캐슬>의 마지막 회는 실소가 나오리만치 우스꽝스럽다. 마지막 회만 보자면 인간은 한 번의 선택으로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존재이다. 아니 한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그렇다. 한순간 선택으로 잘못된 길에서 옳은 길로, 불행에서 행복으로 단숨에 돌아선다. 자동차 핸들을 꺾어 유턴을 하듯 너무 쉽게 인생의 방향이 전환된다. 어째서인지 기회의 신들은 실제의 인생에선 엄혹하기만 한데 <SKY캐슬> 마지막 회에서는 관대하기만 할까?


영화 <극한직업>의 한 장면.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자. 우리는 고작 저녁 식탁에 올릴 된장찌개를 끓일 때조차도, 잘못 넣은 양념을 회복하지 못한다. 된장 대신 고추장을 넣어버렸다면 그건 다시 된장찌개로 되돌릴 수 없다. 지나친 예이긴 하지만 잘못된 예는 아니다. 인생은 한 곳으로만 흐른다. 선택은 가혹해서 돌이킬 수 없다. 그게 어떤 결말을 가져오든 우리는 짊어질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가리켜 비참한 결말의 극이 아닌 ‘진지한 드라마’라고 규정했다. 선택과 그것의 결과를 다룬 희곡이 비극이라 불린 이유는, 다름 아니라 운명을 다뤘기 때문이다. 진지함은 인생의 불가역성에 대한 다른 호명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모든 이야기는 비극이어야만 할까? 아니다. 이 글의 첫 문단에 썼듯이 이야기에는 어떤 방향성이 있다. 마치, 우리가 <극한직업>을 보며 모두다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극한직업>은 애당초 해피엔딩을 염두에 둔 코미디다. <극한직업>을 볼 때 관객은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을 기대한다. 그건 유치한 기대가 아니라 이야기의 습성에 대한 학습된 기대감이다. 그렇게 끝나는 것이 그럴듯한 것이다. 


<극한직업>은 코미디로서 현실을 희화화하기로 관객에게 이미 제안한 작품이다. 코미디이기 때문에 우연한 선택이 전부 다 행운으로 풀린다. 잠복하기 위해 다 무너져 가는 치킨집을 인수했는데, 자꾸 손님이 든다. 손님이 오길래 직접 닭을 튀기고 요리했는데, 너무들 좋아한다. <극한직업>이 웃음을 끄는 요인은 이 의외성이다. 오라는 범죄자들은 오지 않고 자꾸 손님만 오고 돈까지 벌린다. 일상에서는 좋을 일이지만 마약반이다 보니 웃지만은 못한다. 와중에 급기야 범죄집단이 덩굴째 손아귀에 잡힌다. 거듭된 우연이 행운을 가져오니, 선택은 곧 해피엔딩의 열쇠가 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SKY캐슬>과 <극한직업>이 동시대, 같은 시간대의 흥행작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비극만 원하거나 코미디만 원하는 게 아니다. 두 개의 분리된 감각과 분별력으로 다른 이야기에선 다른 현실의 면모를 보고 찾는다. 돈과 욕망, 모자관계의 집착 속에서는 스릴러와 다를 바 없는, 우리 주변의 욕망을 발견한다. 사실이기 때문에 더욱 열광했고, 들여다보면 과장도 아니라고들 인정했다. 그러므로 결말도 이 삶의 잔혹성에 준하는 것이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극한직업>에서는 삶의 의외성을 보고 싶어 한다. 현실이 뒤틀려도 좋다. 여기서 보여주는 현실은 멀리서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범죄 현장과 다르지 않다. 임도 보고 뽕도 딴다. 조금 거리를 두고, 웃어 보자, 스스로를 격려하는 마음처럼, 웃음은 그렇게 유통된다. <극한직업>에 눈물, 신파, 심각한 뒷배경이 없는 게 매력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극한직업>이 경로를 벗어나지 않고 잘 도착해 성과를 얻었다면 <SKY캐슬>은 예상경로를 한참 벗어나 잘못된 곳에 도착했다. 여객기 탑승자들이 기대한 착륙지와 달리 예고도 없이 엉뚱한 곳에 불시착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유는 하나다. 이야기 스스로 하게 될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 개인이 하고 싶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말했다. 작가가 작품보다 커서는 안된다고. 밀란 쿤데라는 작품을 이용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나 하는 경우를 꾸짖는다. 교훈은 읽는 자가 능동적으로 끌어내는 것이지 작가에게 전달받는 게 아니다. 모든 서사, 이야기가 그렇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작품들은 작품을 설교나 훈계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만다. 훌륭한 이야기의 결말은 이미 출발선에서 예측된다. 이야기가 흘러 갈 길을 만들어 주는 것, 그게 곧 훌륭한 이야기꾼의 일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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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최초의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로 화제를 모은 <킹덤>은 한국형 장르물의 거장 김은희 작가의 신작이다. 김은희 작가는 그동안 SBS <싸인>(2011), <유령>(2012), <쓰리데이즈>(2014), tvN <시그널>(2016) 등 대표작들을 통해 장르물과 한국의 정치사회적 이슈를 결합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킹덤> 역시 조선 땅에 창궐한 괴이한 역병의 실체를 추적하는 역사극에, 탐욕스러운 권력과 그 아래 신음하는 약자들의 고통을 담아낸 김은희표 장르 드라마다.

 

<싸인>에서 <킹덤>까지, 이른바 김은희 월드의 주요한 특징은 ‘죽음을 통해 한국 사회를 해부’하는 데 있다. 예컨대 김은희 월드의 시초가 된 드라마 <싸인>은 ‘메스로 사회를 해부한다’는 모토를 내세우고, 수많은 억울한 죽음의 사인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 병폐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는 이야기였다. 드라마에는 부정한 권력자에서부터 평범한 얼굴의 사이코패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살인자들과 죽음의 양상이 등장하지만, 그 근본적 토대에는 타인의 죽음에 무감각해진 사회가 자리하고 있다. 권력의 편에 서서 부검 조작도 마다하지 않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 이명한(전광렬)의 “죽은 사람들은 잊혀지게 마련이다”라는 말은 이를 관통하는 대사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시즌1의 한 장면.

 

소위 ‘한국형 사회파 스릴러물’은 대부분 부패한 거대 권력과 이에 맞서는 공익적 영웅들의 대결 구도를 취한다. 김은희 월드 역시 외견만 보면 이 흥행 공식을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선악 구도의 이면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이명한의 대사처럼 ‘역사의 방관자’로서 군중이 만들어낸 공감불능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지닌다. 요컨대 김은희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죽음은 부정한 권력과 방관자로서의 군중이 만들어낸 마비된 윤리와 공감력 상실이라는, 한국 사회의 병리적 증후를 반영하고 있다.

 

이듬해 방영된 <유령>에서도 이 같은 문제의식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사이버 범죄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타인의 죽음에 대한 공감과 애도는커녕 죽음을 조롱하는 소위 ‘고인드립’이 유행하는 시대의 그늘을 비판한다. 작품의 핵심 플롯인 톱스타 신효정(이솜) 사망 사건의 배후에는, 인터넷의 익명성 뒤에 숨어 근거 없는 성추문을 유포하고 그가 죽은 후에도 ‘신효정놀이’라는 이름으로 악성 게시물 테러를 서슴지 않는 군중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살인의 진범과 함께 신효정 죽음의 공모자로 소환된다.

 

그런가 하면 <쓰리데이즈>는 대통령이 사라진 삼일간의 이야기 안에 한국 사회가 각자도생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공감 능력을 급속도로 잃어가기 시작한 IMF 외환위기 시절의 그림자를 녹여낸다. 악의 최종 보스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진실을 은폐한 재벌 회장이지만, 드라마는 그와 손잡았던 대통령을 ‘경제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지지한 국민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또 다른 대표작 <시그널>에서는 공감력 상실 시대의 정점을 보여준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환기한다. 이 드라마가 장기 미제사건과 공소시효 문제를 다룬 것도 그 가슴 아픈 죽음의 역사에 대해 너무나 빨리 망각해가는 시대를 향한 반성의 목적이었다. 작품에서 첫 번째 미제사건으로 다뤄진 김윤정 어린이 유괴살인사건은 15년 전 일어난 일이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 잔혹한 살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기억에서 잊혀졌다가 공소시효를 며칠 남기고서야 겨우 회자된다.

 

그동안 유족인 어머니만이 진실을 밝혀달라는 절규의 팻말을 들고 매일같이 경찰서 앞을 외롭게 지켜야 했다.

 

올해 발표한 <킹덤>은 공감력 상실 시대를 넘어 애도 불능 시대의 좀비 아포칼립스 버전이다. 이제 죽음은 죽음으로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한국 사회의 병폐는 조선을 “살아있는 시체”들의 세상으로 만든 기이한 역병으로 은유된다. 부패한 위정자들은 두 번의 전란에서 백성들을 화살받이로 앞세운 것으로도 모자라 그들의 마지막 고혈까지 빨아 권력을 유지한다. 그들의 탐욕이야말로 역병의 근본적 원인이다. 그 아래서 백성들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인육을 먹은 뒤 사람들의 살과 피를 탐하는” 좀비, ‘생사역’이 된다. 역병이 ‘조선의 끝’에서부터 퍼졌다는 설정은 지리상으로 한양과 제일 멀리 떨어진 곳을 의미하면서, 그 이전에 권력층과 가장 동떨어진 최하층의 약자들부터 죽어갔다는 것을 상징한다. ‘비단옷 입은 양반 시신과 누더기옷을 입은 천것들의 시신’을 구분해, 전자는 예법대로 장례를 잘 치른 뒤에 깊이 묻고 천것들은 불태워버리자는 이방의 한 대사는, 죽은 뒤에도 비참하게 버려지는 이들의 비극을 잘 보여준다.

 

이쯤에서 <싸인> 방영 당시 김은희 작가와 세계관을 공유한 공동집필자 장항준 감독이 ‘PD저널’과 진행한 인터뷰를 인용해본다. 장 감독은 “보통은 산 사람을 살리는 데 관심이 많지만 죽은 사람의 죽음을 규명하는 게 얼마나 사회 정의에 도움이 되는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요즘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삶보다 죽음인 듯하다. 위험의 외주화, 죽음의 외주화는 그 단적인 사례다. <싸인>에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진실을 끝까지 밝히고 그들을 추모하려 했던 윤지훈(박신향) 박사는 “인종, 나이, 이런 거 없이 부검대에 올라오면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죽음 이후의 풍경이 더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사회의 그늘을 드러내는 시대에 김은희 월드가 한층 호소력을 지니는 이유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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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한국방문위원회 사업에 참여했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서울의 노포를 탐방해보는 프로그램이었다. 여러 국적이 망라된 참가자들은 상기된 표정이었다. 언어별로 통역이 제공됐다. 여담이지만, 중국어 팀은 중국, 대만, 홍콩 사람들이 묶였다. 참가자들은 서울에 노포가 있다는 사실에 깊은 흥미를 가졌다. 그들이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얻는 음식점 정보라는 건 역사성까지 담은 경우가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루트는 피맛골의 청진옥에서 시작해서 열차집, 을지로 3가의 조선옥으로 이어졌다. 평균 업력 80~90년에 달하는, 서울의 식당 역사를 보여주는 집들이다.

 

 

청진옥에서 서울의 노동 음식과 심야 생활의 역사를 접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한양 도성에 나무와 물건을 배달하던 노동자들의 음식으로 시작되었을 해장국, 24시간 사람들이 움직이던 1990년대의 등장, 그리고 아직도 하루 종일 불을 끄지 않는 가마솥의 전설에 그들은 놀라워했다. 열차집은 전후 서울의 빈약했던 경제사정을 상징하는 음식인 빈대떡 전문이다. 한 장의 빈대떡에 막걸리나 막소주를 마시던 전후의 가난했던 뒷골목 문화, 나아가 1970년대에서 1990년대로 이어지면서 피맛골의 주역이 된 ‘회사 인간’의 등장을 설명하면서 나는 작은 전율을 느꼈다. 서울의 현대사를 빈대떡 한 접시에 투영해서 바라볼 수 있다는 건, 또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하고 말이다. 조선옥이 있는 을지로 3가에 이르러서 서울의 발전을 이끌었던 공구상가 등 작은 산업용품 가게들의 역사를 설명하면서는, 우리가 쉽게 포기해버렸던 도시 역사가 얼마나 귀중한지 참가자들에게 충분히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현재도 진행형이며, 도시민의 삶의 패총이 순간에 허물어지고 빌딩이 솟을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외국인인 그들에게 다 말할 수 있었겠는가. 조선옥의 육개장과 갈비 맛은 좋았다. 참가자들과 나누는 서울의 맛은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렇게 프로그램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내 스스로 의문이 남았다. 도시는 영원히 존속할 수 없다. 재생하고 변화한다. 당연한 일이다. 노포들도 없어질 수 있다. 그러나 왜, 어떻게라는 의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은, 도시는 허가권을 가진 관청이 주인이 아니다. 관청의 담당자는 바뀌지만, 시민은 대를 이어 살아갈 곳이기 때문이다.

 

을지로 3가 권역의 재개발이 논란이 되고 있다. 개발 이익에서 배제된 세입자들은 이미 시위를 시작한 지 오래다. 허름해서 역사성을 더 온전히 가지고 있는 노포의 해체도 많은 시민들의 반발을 샀다. 누군가 말했다던 “새로 지은 깨끗한 빌딩에 들어가서 장사하면 더 좋지 않은가”라는 몰역사적인 발언도 회자됐다. 청진옥이 피맛골을 부수고 들어선 그 멋없는 새 건물에 옹색하게 세들어 있던 장면을 좋다고 한 서울시민은 없다. 우리는 묻는다. 서울은 누구의 것인가. 도시는 낡으면 부수고 새로 지어야만 하는 경직된 존재인가, 아니면 그 콘크리트가 숨을 쉬고 있다고 볼 것인가. 영원한 도시는 없다. 그러나 사라지는 존재들에게 합당한 이유가 부여되어야 한다.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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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스틱 리버>에는 25년의 시간이 흐른다. 두 개의 사건, 세 명의 친구 그리고 25년 후 한 여성의 사건. 세 명의 친구는 25년 전의 한 사건을 기억하지만 아무도 발설하지 않는다. 함께 놀던 아이 셋 중 한 명이 아동 성폭행범에게 유인·납치되어 몹쓸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셋 중 둘은 관찰자가 되었고, 한 명은 사건 당사자, 피해자가 되었다.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었다. 셋 중 그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 마치 전쟁터처럼, 우연히. 하지만 사고로부터 생존한 데이브를 두 친구는 반기지 못한다. 데이브는 결국 껄끄러운 존재가 되어버린다.


사실, 이 글은 <미스틱 리버>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건 성폭력에 대한 글이다. 쓰기 전에 무척 힘들었고, 쓰는 동안도 쉽지는 않았다. 한국 영화로 예를 들자니, 한국에서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룬 작품은 아직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도가니>는 실화를 소재로 했고, 실제 현실적 영향력도 미쳤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엔 영화적으로 소년, 소녀들을 보호하지 못했다. 아동 성폭행 장면을 굳이 영상 장면으로 연출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미스틱 리버>의 한 장면.


이런 맥락에서 이준익 감독의 <소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적어도, 조금이라도 볼거리가 되지 않도록 세심히, 면밀히 살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원>은 오늘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성폭력 문제와는 조금 다른 국면이다.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성폭력은 심석희 선수와 신유용 선수가 겪었던, 그런 성폭력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때 소설가가 되고, 시인이 되고 싶었던 여고생들을 유인하고 유린했던 그런 사람들의 문제처럼. 


대만의 작가 린이한의 작품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다시 읽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소설에는 아직 우리가 영화나 소설로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그루밍 성범죄와 위계에 의한 성폭력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여고생 팡쓰치는 글쓰기 선생에게 강간을 당한다. 팡쓰치는 리궈화 선생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 좋아함은 여고생이 선생님을 향해 갖는 순정어린 존경이었다. 하지만 리궈화는 그 ‘좋아함’을 오십에 가까운 자신의 ‘좋아함’으로 오역해 유린한다. “이건 선생님이 널 사랑하는 방식이야. 알아듣겠니?”라면서 말이다. 


리궈화 선생이 팡쓰치에게 처음 폭력을 가했을 때, 가슴 아프게도 팡쓰치는 ‘죄송하다’고 말한다. 할 줄 모르는 게, 마치 숙제를 잘하지 못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성폭력의 희생자였던 소녀는 자책부터 한다. 그리고 그녀는 선생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으려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린 소녀는 정말이지 스스로 너무 작아지고 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견딜 수 없다. 소설 속 팡쓰치는 결국 정신을 놓고,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녀가 당했던 폭력이 드러났을 때, 팡쓰치의 부모는 이사를 해서 지인들의 시선으로부터 도망간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은 채, 도망가는 게 최고인 것처럼.


소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의 제목은 사실상 반어법이다. 팡쓰치의 첫사랑은 지옥이었다. 아니 거기엔 아예 사랑이 없다. 사랑이라는 거짓말로 꾸며진 폭력만 있었을 뿐. 더욱 문제적인 것은, 이 책을 쓴 린이한 작가가 소설 내용의 진위와 관련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받았다는 점이다. 린이한 작가는 직접 들은 내용이지만 자신의 경험은 아니라고 부인했다. 하지만 출판된 지 3개월 후 린이한 작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린이한의 부모는 소설 속 팡쓰치가 사실 자신의 딸임을 뒤늦게 밝혔다. 그러니까, 리궈화가 소설 속 허구적 인물이 아니라 린이한의 죽음 이후에도 학생들을 가르치며 선생 노릇을 하던, 실존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리궈화 선생은 현실의 법을 통해 단죄를 받았을까? 안타깝게도, 현실의 리궈화 선생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법적으로 그는 무죄였다. 소설 속 팡쓰치는 생존했지만 현실의 린이한은 자살했다. 늘 그렇듯이 현실은 언제나 소설보다 더 가혹하고 지독하다. 


소설을 읽으며 끔찍했던 문장이 있다. “자신을 우상으로 여기는 여학생을 강간하는 것이 그녀를 붙들어둘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다.” 리궈화가 자신이 강간했던 여학생들의 숫자를 헤아리면서 하는 말이다. 이 문장은 “선수 장악은 성관계가 주 방법”이라던 한 체육계 인사의 말과 꼭 닮아 있다. 게다가 이 경악할 발언은 이미 2008년, 10년도 전에 KBS 시사기획 <쌈>에서 들춰졌던 말이기도 하다. 10년 전에 이런 일들이 세상에 터져 나왔지만 그 10년 사이에 또다시 피해자가 발생했다.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미스틱 리버>의 데이브는 25년이 지난 후에야 용기를 낸다. 25년 전 자신이 끌려갔을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어른이 되고 나선 뭔가 행동을 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데이브는 강간 위기의 소녀를 구하기 위해 용기를 낸다. 우연히 피해자가 되었던 데이브는 의지와 필연으로 누군가를 구한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의 작가 린이한은 자신을 곧잘 아우슈비츠 생존자와 비유하곤 했다. 성폭력에서 살아남는 것은 곧 아우슈비츠와 같은 충격으로부터의 생존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 중 하나가 바로 피해를 당하고도 자책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자책과 죄책감은 느껴야 할 사람에게 돌려줘야 한다. 적어도 앞으로 다가올 10년 후에는 더 이상 조재범 같은 사람들이 없도록. 시선을 돌리지 않고 주목을 놓쳐서는 안된다. 운에 맡겨선 안되는 문제,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책임은 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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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없는 나라>. 최근에 나온 한국 화교에 대한 책이다. 한국에서 피차별 민족으로 오랫동안 살아왔던 화교사 연구서이다. 저간의 이야기야 깊고도 슬프다. 화교 당사자들로서는 가슴 쓰린 기억들이 많았을 것이다. 화교는 조선 말기에 이미 우리 이웃이 되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살아왔다. 아마도, 짜장면은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지배하는 강력한 음식의 추억일 것이다. 나는 짜장면보다 만두야말로 더 화교다운 음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짜장면은 한국인이 사먹는 음식이었고, 그들의 주식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만두가 있었다. 40~50여년 전, 동네에 화교가 살았다. 그들의 주식은 만두였다. 한 번 먹어보라고 해서 먹고는 크게 실망했다. 속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소 없는 만두였다. 원래 중국 만두란 소가 없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밀가루 반죽을 하고 발효시켜서 둥글게 빚은 후 쪘다. 그 집에서 밥을 한다고 하면 대개 만두였다. 밥 대신 만두라니. 소가 있든 없든 그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만두를 밥으로 먹는 그들이 부러웠다. 채소 볶은 것, 더러는 고기 볶은 것을 얹어서 먹었다. 소스에 찍어 먹기도 하고, 중국식 절인 채소와 같이 먹기도 했다. 그 화교 집안에 또래 친구가 있어서 친하게 지냈는데, 그가 김치랑 만두를 함께 먹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미 한반도에 오래 살면서 음식문화에도 동화되어 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 친구는 화교학교 대신 한국학교를 다녔다. 단 한 번도 만두를 학교에 도시락으로 싸 간 적이 없다고 했다. 놀림이 두려워서였다. 피차별 민족이 갖는 근원적 공포였다. 그런 차별은 음식이나 복식으로 구분된다. 복식이 이미 다르지 않았으므로 음식을 두고 그들을 차별했다. 짜장면이 입에 올리기도 끔찍한 ‘짱깨’가 된 것은 그런 혐오의 상징이다. 그 친구에게 짱골라라거나 짱깨란 말을 했다간 코피 터지게 싸울 각오를 해야 했다. 차별, 피차별에 대해서 인식하던 나이는 아니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는 건 차별이었다. 그것 하나는 분명했다. 


그들은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만두도 만들었다. 소가 들어 있는 만두, 그들 말로 파오즈였다. 명절에 화교 친구네 집에서 만두, 아니 파오즈를 잔뜩 쪄서 동네에 돌리던 일이 생각난다. 돼지비계가 들어간 그 만두가 신기했다. 두부나 당면이 없는. 


여담이지만, 많은 중국집들이 이른바 군만두를 직접 만드는 것을 포기했다. 타산이 안 맞기도 하지만, 언젠가부터 군만두는 서비스라는 인식이 퍼지면서부터였다. 


대림동에 갔다가 옛 생각이 났다. 동포들이 운영하는 만두집이 많았다. 소 없는 커다란 찐빵 격인 그 만두는 엄청난 크기여서 보기만 해도 군침이 흘렀다. 꽃빵이라고 부르는 빵도 팔고, 꽈배기도 있었다. 밀가루 다루는 데는 이골이 난 화교들의 솜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가게들이었다. 한 보따리 사서 뜨끈뜨끈한 그놈을 천천히 씹으며 시장 구경을 했다. 내게 만두를 주던 그 화교 친구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찐두’라는 이름의 그 덩치 컸던 화교 친구.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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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글로벌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가 공개한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가 온라인상에서 큰 화제였다. ‘디지털시대의 환상특급’이라 불리며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SF 시리즈 <블랙 미러>의 특별판이다. 새 에피소드가 공개될 때마다 주목받는 이 시리즈에서 이번 특별판이 특히 더 이목을 끈 데에는 우선 형식 실험 덕이 컸다. 시청자들이 직접 이야기 전개를 선택하는 인터랙티브 형식을 도입했다. 책이나 게임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활용된 장치로 그리 신선할 것 없다는 비판도 있지만, 호평의 핵심은 그 형식을 어떻게 활용했는가다. 여러 선택지를 주어 실컷 미로를 탐험하게 만들고,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내용과의 유기적 결합으로 그러한 선택이 조작된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리고 이마저 디스토피아 장르의 흔한 스토리 아니냐는 인식에 이를 무렵, 공식 결말 외에 또 다른 해석들을 끊임없이 내놓는 팬들을 보면서 결국 이 같은 탐험의 쾌감 자체가 이 작품의 궁극적 목적임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는 형식 실험을 통해 더 풍부한 이야기를 이끌어냄으로써 단순한 드라마 시청을 능동적 체험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작품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한 장면.

 

최근 한국드라마 중에도 이와 유사한 체험의 즐거움을 안겨준 작품이 있다. tvN 토일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다. 물론 단서를 달아야 한다. 적어도 중반까지는 그랬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한국 판타지 드라마의 개척자 송재정 작가의 신작이다. 송 작가는 tvN <인현왕후의 남자>와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을 통해 타임슬립 판타지의 유행을 선도했고, MBC <W>에서는 가상세계와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야기로 주목받았다. 그리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그동안 주로 가상 및 초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했던 한국 판타지 드라마에 증강현실이라는 영역을 끌어들여 판타지 서사의 지평을 한 차원 확대했다.

 

줄거리는 투자회사 대표 유진우(현빈)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혁신적 증강현실 게임의 판권을 구입하기 위해 스페인 그라나다에 갔다가 신비한 사건에 휘말리는 이야기다. 만나기로 한 게임 개발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현실의 인물이 게임 속 캐릭터가 되는가 하면, 게임 속 상황이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게임에 갇힌 진우는 그 속이 얼마나 깊은지조차 알 수 없는 미로를 탐색하며 스스로 출구를 찾아 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들은 주인공과 함께 적극적으로 게임의 퍼즐을 맞춰나가며 기존 드라마 시청법의 관성을 깨는 체험의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러한 미로 탐색은 중반 즈음부터 같은 자리를 빙빙 맴돈다. 수많은 방향으로 열려 있던 도입부가 어느 순간 진우가 게임 레벨 업을 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야기로 단순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진우와 다양한 관계를 형성했던 주변 인물들은 이야기 전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모조리 배경으로 물러났다. 가장 심각한 건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하리라 여겨진 여주인공 정희주(박신혜)의 활용이다. 게임 개발자 정세주(찬열)의 누나인 정희주는 온 가족과 함께 스페인에 유학을 왔다가 부모가 사망하는 바람에 가장이 된 인물이다. 세주가 게임을 개발한 덕에 진우로부터 100억원대의 계약금을 받지만, 그 정확한 맥락을 전혀 알지 못한다. 주 역할은 진우가 아플 때 간호하고, 진우를 찾아 헤매고, 걱정하고, 연락을 기다리는 일이다. 진우가 최첨단 기술을 사용해 가상과 게임을 넘나드는 모험을 즐기고 있을 때, 희주는 생계형 캔디에서 신데렐라가 되는 구시대적 서사에 머물러 있다.

 

돌이켜보면 이는 송재정 작가의 전작에서도 반복되어온 한계였다. 형식적 실험의 진화는 대개 남주인공의 몫이다. 남주인공들이 시간과 차원을 넘나들며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능동적인 액션 캐릭터로 활약할 때, 여주인공의 역할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이러한 서사의 간극은 가장 실험적인 형식을 선보인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 와서 더 벌어졌다. 정희주를 게임 속으로 끌어들이지 못해서 그녀를 모델로 한 엠마 캐릭터를 등장시켰음에도 이조차 잘 활용하지 않는다. 게임 개발자 최양주(조현철)가 엠마를 ‘최애캐’라 부르며 사무실 한쪽에 관상용 캐릭터처럼 전시하는 장면이 이 캐릭터의 본질을 말해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 작품의 여성 캐릭터 활용의 한계는 정희주만의 문제도 아니다. 유진우는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두 전처 캐릭터의 서사 모두 너무나 구태의연하다. 첫 번째 아내 이수진(이시원)은 진우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차형석(박훈)과의 관계에서 뺏고 뺏기는 전리품처럼 묘사된다. 두 번째 아내 고유라(한보름)는 진우의 재산을 노리고 이혼소송을 통해 계속해서 괴롭히며 희주를 견제한다. 정희주 등 진우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는 세 여성 캐릭터의 활용을 보면, 이 드라마가 최첨단 기술 배경의 작품인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게임처럼 중세 배경의 작품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초반의 형식 실험은 분명 신선했다. 그러나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가 단순한 형식 실험이 아니라 주제, 내용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호평받은 것과 달리,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실험은 결국 남주인공 캐릭터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고 활약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만 귀결됐다. 형식은 21세기를 지향했는데 여성 캐릭터 활용은 ‘쌍팔년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비극이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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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작년의 일이지만, 돼지고기 가격(돈가) 하락이 심각하다. 원래 돈가는 일정한 패턴을 보인다. 구제역 등이 없다면 조금씩 올랐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계절도 탄다. 이상하게 작년 여름, 돈가가 안 올랐다. 휴가철 특수가 있는데도 삼겹살이 남아돌았다. 어느 신문에서는 “황금돼지해, 돼지값 싸져서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기사를 실었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돈가를 안정시킨다고, 여기에다가 주요 무역국과의 교역 문제 때문에 수입돈이 늘어난 게 가장 큰 요인이다. 돼지고기가 많이 수입되면 가격이 내려가서 소비자(국민)도 좋은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위의 신문 기사가 그런 논조다. 그렇다면 축산가는 국민이 아닌가. 그동안 축산 농가는 이런저런 당국의 불편한 처사에도 입을 꾹 막고 살았다. 수입 물량을 늘려도 국산돈의 품질로 돌파하자고 허리띠를 졸라매거나, 손님은 좋은 국산 돼지고기를 알아준다는 심리적 방패가 있었다. 수입돈 품질이 그다지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천만의 말씀이다. 판도라의 상자 같은 이야기지만, 수입돈의 품질이 국산돈을 능가하는 부분도 많다. 스페인산 고급육은 어지간한 고깃집 광고판에서 발견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베리코 돼지 삼겹살, 목살구이 팝니다.”


선호 부위의 차이 때문에 외국의 삼겹살과 목살 등의 국제가격이 워낙 싸서, 수입 물량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유럽산은 거의 냉동이 유통되지만, 미주 지역은 특별 수송체계를 갖추고 냉장육도 대량으로 들여오고 있다. 몇몇 마케팅 업체에서는 테스트를 통해서 수입육이 국산육과 구별하기 어렵다는 공세를 펼치고 있다. 품종이 비슷한 데다, 사료도 거기서 거기이니 맛이 크게 다를 리 없을 수도 있다. 


최근 돼지 동결육이 늘고 있다는 시장의 소식이 들려온다. 미처 팔지 못해서 시급히 냉동하는 것을 애초에 냉동하는 것과 구별하여 동결이라고 한다. 최고가여야 할 괜찮은 국산 목살이 동결되어 돼지 뒷다리만도 못한 처참한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삼겹살도 마트 등에서 파격가로 팔린다. 킬로그램당 소비자가격이 1만원대에 풀리고 있다. 생산농가는 심각한 손해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돼지고기는 1970년대 이후 생산량이 크게 늘면서 국내 육식 수요의 상당수를 충족하고 있다. 순댓국이나 족발 같은 서민 음식의 재료가 되는 부산물도 많이 생산한다. 어떤 재료가 지나치게 싸게 팔린다는 건 곧 그 산업이 위기에 처했다는 강력한 신호다. 듣기로는, 미·중 관계가 악화되면서 판로가 막힌 북미산 돼지고기를 밀어내는 시장으로 한국이 선택됐다고 한다. 삼겹살 불판을 갈자고 했던 분이 노회찬 의원이다. 이제는 다른 의미에서 돼지고기 판을 갈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적정 가격이란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이고, 이는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다. 급격한 폭락은 산업구조의 뿌리를 흔든다. 싸다고 무작정 이익이 아닌 시스템 아래에 우리는 살고 있다. 축산가와 고기유통에 종사하는 국민은 국민이 아닌가. 격변하는 시장이 어떻게 움직일지 불안한 요즘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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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비극과 원했던 바를 결국 갖게 되는 비극 말이다. ‘비극’을 떠올리면 참담한 결말과 파국이 떠오른다. 처참하게 망가진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도 그려진다. 햄릿, 맥베스, 오셀로, 오이디푸스. 대개 비극의 주인공들은 무엇인가를 강렬히 원했던 사람이다. 맥베스는 권력을 원했고, 오셀로는 의심의 종결을 원했으며, 오이디푸스는 정의를 추구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이 원했던 것을 얻었다. 문제는 그토록 원했던 그것이 파국의 주범이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쪽보다는 원했던 것을 갖는 쪽이 더 비극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원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욕망이라고 부른다. 소설, 영화, 드라마와 같은 서사의 주인공들은 욕망하는 이들일 때가 많다. 욕망하는 인물들은 돈, 사랑, 명예, 권력. 거의 이 네 가지 중 하나를 원한다. 그런데 인생은 꽤 공평해서 하나를 좇으며 나머지 셋까지 갖기는 어렵다. 주인공들도 이를 잘 알고 있는데, 그래서 돈을 따르는 자는 사랑, 권력, 명예를 버리기도 하고, 사랑을 선택한 인물들은 나머지를 외면하기도 한다.

 

영화 <로마>의 한 장면.

 

적어도 어린 시절, 우리는 욕망하는 하나를 위해 나머지를 포기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하곤 했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원작인 영화 <갈매기>의 여성 인물 ‘나나(시얼샤 로넌)’도 그렇다. 그녀는 ‘명예’를 위해서는 뭐든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 나나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게 되고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명예와 가장 먼, 불명예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콘스탄틴(빌리 하울)은 ‘사랑’을 추구한다. 그는 마침내 유명작가로의 ‘명예’를 얻지만 그것이 사랑을 가져오지는 못하자 자살하고 만다. <갈매기> 속의 인물들은 서로에게서 결코 받을 수 없는 것들을 갈망한다. 욕망은 결핍 속에서 무너지고 인생은 엇갈림 가운데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뤄진 바람은 단 하나이다. “순진한 시골처녀를 심심풀이로 파멸”하고자 했던 작가 트리고린의 욕망 말이다.

 

원하는 삶이 비극이라면 비극의 반대는 어떤 삶일까? 알폰소 쿠아론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로마>에 해답의 단서가 있다. <로마>가 2018년 최고의 작품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로마>는 클레오와 소피아라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소피아 집안의 가정부이자 육아도우미인 클레오가 주인공에 더 가깝다.

 

영화가 시작되면 차고로 쓰는 대문 앞 공간을 물청소하는 클레오의 모습이 비친다. 클레오는 물청소를 하고, 아침 식사를 챙기고, 설거지를 하며,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와 다시 저녁 식사를 챙기고, 다림질을 마무리 짓고는 잠이 든다. 대문 앞을 아무리 물청소해도 애완견 보라스는 또 똥을 싸놓고, 꺼내 놓았던 접시는 다시 씻어 넣어야 하며 그 접시는 내일 아침 또 꺼내 쓴 후 다시 닦고 정리해야 한다. 영화는 ‘일상’이라는 반복되고 지루한 삶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 일상의 공간은 우리가 ‘서사’를 통해 만나왔던 욕망이나 결핍의 공간과 완전히 다르다. 무엇인가를 강렬히 원하는 그런 시공간이 아니라 오늘이나 내일이나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반복의 세계이다. 말하자면, 클레오나 소피아는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원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얼핏 지루해 보이고, 무료해 보인다.

 

클레오와 소피아가 원하는 게 있다면 단 하나, 지루한 일상의 패턴이 고스란히 지켜지는 것이다. 하지만 삶은 그녀들의 이 작고 소박한 바람도 지켜주지 않는다. 클레오는 원치 않은 아이를 갖는다. 그러다 원하지 않았던 그 아이를 잃고 만다. 소피아는 지금의 삶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바람이 난 남편은 돌아오지 않는다. 클레오는 아이를 잃고, 소피아는 이혼을 한다. 두 사람 다,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결과들을 떠안게 된다.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두 사람은 힘들어하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고통스럽지만 결국 현실을 껴안는다. 두 사람은 원치 않는 일과 마주치고 만다. 그건 욕망의 결과라기보다 삶의 부산물에 가깝다. 욕망을 갖고 선택을 한 것은 두 여인의 남자들이다. 클레오의 애인 페르민은 임신한 여자 친구를 버리고, 학살자의 편에 선다. 소피아의 남편은 다른 여자를 선택하고, 가족을 떠난다. 어쩌면 소피아와 클레오는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당한 사람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피아와 클레오야말로 인생의 고수이다. 우리는 늘 원하는 것을 따르는 강렬한 사람들을 영화에서 보아 왔지만 삶이 그런 역동성으로만 지탱되는 것은 아니다. 지루한 일상의 반복에서 행복을 찾았던 여자들의 바람이야말로 우리가 돈, 명예, 권력, 사랑과 같은 거창한 욕망 뒤로 미뤄 놓았던 삶의 진리일지도 모른다. 삶은 돈과 명예, 권력과 사랑을 탐하는 역동성이 아니라 원하지 않았던 것들을 길들이는 평범함 가운데서 견고해진다. 하루하루의 일상을 살아가는 것, 지루한 반복에서 삶의 박동을 느끼는 것,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진리를 깨달아가는 삶. 이 가운데서 삶은 비극이 아닌 무엇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비극의 반대말이 희극이 아니라 일상인 이유이다.

 

<강유정 |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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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계 최고의 화제작은 단연 JTBC 금토드라마 <SKY캐슬>이다. “대한민국 상위 0.1%”가 모여 사는 최고급 주택가 SKY캐슬 사람들의 계층 대물림 욕망을 사실적으로 그린 드라마는 그 욕망이 치열하게 드러나는 자녀들의 입시 문제를 주요 소재로 한다. 자식이 ‘7살 때부터 아파도 다쳐도 쓰러져도 1년 365일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공부시키는 부모, 학업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14살 아이가 편의점에서 과자를 훔쳐 밟아버리는 기행을 저지르자 돈으로 무마시켜서라도 공부를 계속하게 하는 부모,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할 한 줄 스펙 때문에 비열한 방법으로 경쟁자를 사퇴시켜 자식을 전교회장에 당선시키는 부모 등 자식의 일류대 입학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살벌한 이야기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SKY캐슬>이 입시 스릴러로 불리는 이유다.

 

JTBC 드라마 의 한 장면.

 

그런데 이 드라마의 공포를 촉발하는 진짜 요인은 그 뒤에 숨어 있다. 바로 가부장제다. <SKY캐슬> 초반 입소문의 동력이 된 1회 엔딩을 떠올려보자. 입시제도를 비판하는 작품들이 흔히 청소년들의 자살로 끝을 맺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캐슬 귀부인들 사이에서 여왕보다 더 부러운 워너비맘”이었던 이명주(김정난)의 충격적인 자살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명주는 외아들 영재(송건희)를 서울의대에 합격시켜 “3대째 의사 가문의 위업”을 달성했지만, 입시를 위해 “사육”과 다름없는 환경에서 자란 아들로부터 절연을 통보받았다. 절망한 이명주는 평소 폭력 남편 박수창(유성주)이 그녀와 아들을 위협하는 도구로 사용한 사냥총으로 목숨을 끊는다. 이명주의 죽음은, 아무리 최상류층이어도 기혼 여성의 가치가 철저히 남편의 지위와 그것을 이어받을 자녀의 성패에 의해 결정되는 가부장제가 낳은 비극이다.

 

이 같은 비극은 기혼 여성들이 가족 관리 전문가로서 점점 더 많은 역할과 의무를 요구받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무한경쟁 사회에서 한층 심화된다.

 

특히 그 경쟁 구도가 고도로 압축된 자녀교육은 여성들의 부조리한 현실을 제일 첨예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다. 가부장제의 부조리를 풍자한 이 작품이 입시제도를 주요 소재로 삼은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래서 <SKY캐슬>은 입시 스릴러이자 가부장제 스릴러다. 이명주의 파국으로 시작한 이 드라마는 그녀와 함께 캐슬의 양대 ‘워너비맘’으로 불린 한서진(염정아)의 이야기로 중심을 옮겨간다.

 

한서진은 이명주보다 더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피해자다. 그녀는 “여자가 무슨 공부냐”고 구박하면서 매일같이 폭력을 휘두르는 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성인이 된 뒤에는 신분을 속이고 명문가 자제 강준상(정준호)과 결혼해 SKY캐슬에 입성하는 신분 상승을 이루지만, 시어머니로부터는 ‘아들을 못 낳은 죄’ 때문에 며느리로 인정받지 못한다.

 

한서진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더 완벽한 ‘아내·엄마’의 모습에 충실하고자 애쓴다. 드라마 공식 인물 소개를 보면 한서진은 “삼시세끼 유기농 식단을 손수 차려내는 데다 한식, 양식 조리사 자격증은 기본, 푸드코디네이터 뺨치는 테이블 세팅에 푸드 스타일링까지 소화하며 두 딸의 완벽한 학습 매니저인 프로 주부”로 설명된다. 이러한 한서진의 모습은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강조된 ‘주부 CEO’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가부장제 위에 쌓아올린 모래성에 불과하다. 서진이 딸 예서(김혜윤)의 서울의대 합격을 위해 이명주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지도 모를 위험조차 감수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그 길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서다.

 

여러 면에서 <SKY캐슬>은 2012년 정성주 작가가 발표한 JTBC 드라마 <아내의 자격>의 적통 후계자처럼 보인다. <아내의 자격>은 이 작품보다 한발 앞서서 자녀교육 문제를 통해 ‘아내, 엄마, 며느리’의 자격을 강조하며 기혼 여성들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민낯을 고발한 드라마다. 시댁과 남편의 강요로 인해 대치동으로 이주한 주인공 서나래(김희애)는 아들이 입시학원에서 꼴찌를 하자 엄마의 자격을 의심당한다. 드라마는 결국 집에서 쫓겨난 서나래의 빈자리가 가사도우미와 튜터맘으로 신속하게 대체가 되는 모습을 통해 그림자 같은 기혼 여성의 조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아내의 자격>에서 대치동 사교육의 1인자 홍마녀로 등장했던 이태란이 <SKY캐슬>에서 입시교육에 희생된 아이들을 보호하고 엄마들을 자극하는 이수임으로 출연하는 것도 이 작품에 대한 오마주처럼 다가온다.

 

더 흥미로운 공통점은 가부장제의 억압과 공포를 그리면서도 여성들을 마냥 피해자로만 그리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아내의 자격> 서나래가 결국 외도를 계기로 자아를 찾으며 가부장제를 탈주했듯이, <SKY캐슬>의 한서진 역시 ‘가부장제의 입맛에 맞게’ 완벽한 기혼 여성의 역할을 탁월하게 연기하는 흥미로운 전략가다. 그녀를 무시하는 시어머니 뒤에서 “당신 아들보다 백배 천배 잘난 딸로 키워낼” 것이라며 싸늘한 얼굴을 드러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그런 점에서 극중 이수임이 원래 쓰려던 소설의 첫 제목인 ‘누가 그 여자를 죽였나’가 <SKY캐슬>의 본질을 더 잘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SKY캐슬의 여성들은 누구보다 그 답을 잘 알고 있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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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사인지는 몰라도,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장래희망 직업에 요리사가 모두 10위 안에 들었다. 초등학생은 심지어 4위였다. 응답자들이 직업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결정한 후에 답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요리사가 요즘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지 살펴볼 수 있는 힌트였다. 옛날에 의사의 세계를 다룬 드라마가 있었다. 당시엔 인터넷이 없었고, 아마도 PC통신을 통해 의사들의 감상평이 돌았다. 하나같이 사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었다. 레지던트들이 언제 저렇게 연애하고(드라마에 연애가 빠질 수 없으니까) 얼굴이 반들반들하냐는 것이었다. 두어 시간밖에 못 자서 푸석푸석하고 머리는 까치집이며, 연애는 고사하고 외박도 거의 나가기 힘든 저연차 레지던트들의 악성 근로환경에 대한 고발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청자들은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의사들의 일상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외국의 한국드라마 시청자들이 한국인들은 모두 멋지고 옷 잘 입고 폼나는 사람들만 있다고 깊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처럼.

 

 

요리사들이 TV에 등장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제는 이른바 스타셰프, 셀럽 셰프라는 말도 생겼다. 매니저를 대동하고 다니는 경우도 있어, 일로 통화하려면 매니저를 통해야 한다고도 한다. 하얀 제복, 멋진 칼솜씨, 여기에 입담까지 갖춘 연예인급 요리사가 대중스타가 되었다. 대중과 미디어는 늘 새로운 사람을 원한다. 요리사는 그 수요에 부응하는 멋진 직업인이었다. 이미 외국에서 검증된 일이기도 하다. 외국에서는 요리쇼를 한번 하는데 초청비가 1억원이 넘는다. 1등석 비행기표를 제공해야 하는 요리사도 있다. 우리가 아는 ‘주방장 아저씨’와 그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산다. 한국도 미디어를 통해서 요리사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가치가 올라갔다. 그러나 극소수의 얘기다. 요리사들은 여전히 찬물에 손 담그고 있느라 가벼운 동상에 걸린 것처럼 붉게 부어 있기 일쑤고, 온갖 산업재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결정적으로 박봉이다. 식당업이 영세한 탓에 여전히 많은 요리사들은 최저임금을 받는다. 장시간 노동이 흔하며, 작업장 환경도 좋지 않다. 건강에 안 좋은 기름 연기와 연료에 노출되어 있고 좁은 곳에서 일하다 보니 스트레스도 많다. 더구나 오픈된 주방이거나 까다로운 손님을 맞을 땐 3차 스트레스도 받는다. 1차가 고용주, 2차가 동료, 3차는 손님인 셈이다. 언제든 그들은 식당과 음식평을 개인 미디어에 올린다. 그것이 신선한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해명할 수 없는 일방적인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대다수 요리사는 우리 주변 평범한 직업인이다. 요리사를 꿈꾸던 많은 이들이 초기 단계에서 포기한다. 요리사 지망생은 많은데, 식당은 늘 구인에 어려움을 겪는다. 전국의 수많은 요리학과 졸업생 중 요리사로 직업을 이어가는 비율은 아주 낮다. 요리사의 현실을 보여준다. 요리사가 멋있어 보이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현실 속 요리사는 그다지 행복하지만은 않다.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은 직업이 어디 요리사뿐이겠냐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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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11일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불탔다. 슬로베니아의 정신분석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이를 두고 실재(The Real)의 침투라고 말한 바 있다. 의식에서 가장 먼 곳, 상징계로부터 가장 깊은 곳 너머에 묻어 둔 바로 그것, 실재계의 공포가 도래했노라고 말이다. 어려운 말이다. 쉽게 나름의 곡해를 해보자면, 설마 현실이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환상의 도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로 실컷 즐길 수 있었던 것. 결코 현실이 될 리 없으니 쾌락원칙에 따라 즐길 수 있었던 가상. 스크린에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파괴의 순간들 말이다. 외계인이 침공해 백악관을 무너뜨리고, 테러리스트가 월드트레이드센터를 점령할 수 있었던 건 그게 다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2001년 9월11일 전에는 말이다.

 

영화 <도어락>의 한 장면.

 

그런데 요즘 우리는 실재계의 침범과 정반대의 일들을 영화관에서 경험하고 있다. 설마 현실이 될까 싶은 상상을 만나는 게 아니라 너무나 현실적이라서 함부로 영화로 다룰 수 없었던 일들을 스크린에서 확인하는 중이다. 이는 바로 현실의 침투이다. 너무나도 사실적이기 때문에 마주하기 싫었던 공포, 그런 공포가 최근 영화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1998년 IMF 외환위기 사태를 재현하는 작품 <국가부도의 날>과 독거 여성의 공포를 다룬 영화 <도어락>이 그렇다.

 

고백하자면, <국가부도의 날>을 보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했다. 적어도 1994년에 대학에 들어갔고, 1998년에 졸업한 X세대인 나에게 IMF는 덜 아문 상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1998년을 맞았던 그래서 과소비라는 사회적 질타 앞에 묵묵히 입을 다물어야 했던 순진했던 국민들이 영화에 소환되는 순간을 목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일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그래서 그날의 국가부도 사태를 날벼락처럼 당해야 했던 <국가부도의 날>은 공포영화에 가깝다. 돌이켜보면 그건 분명 재난이었다.

 

2018년에 돌아보는 1997년 12월 ‘국가부도의 날’은 어떤 의미에서 부검 과정과도 닮아 있다. 사체를 해부해 원인을 밝혀가는 과정, 이미 회생불능을 받았던 그날을 해부학적으로 더듬어 다시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이 영화의 줄거리이니 말이다. <국가부도의 날>의 이야기는 어쩌면 시네마 포렌식(cinema forensic)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알고 보니 그건 일종의 범죄였으니 말이다.

 

<도어락>의 공포는 훨씬 더 사실적이다. <국가부도의 날>이 과거였다면 <도어락>은 현재이기 때문이다. 20여년 전 윤대녕의 소설과 트렌디 드라마에서 낭만적으로 제시되었던 원룸, 오피스텔에서의 삶은 2018년 현재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려진다.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사들고 돌아와,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던 20여년 전 세련된 라이프 스타일의 상징이었던 원룸과 현재의 원룸은 상당히 달라져 있다.

 

영화 속에는 도시괴담처럼 떠도는 이야기들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누군가 방의 도어락 터치 패드를 건드리고 심지어 손잡이를 흔들더라, 택배 기사나 배달원을 사칭해 여성 혼자 사는 방을 침범했더라와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촬영된 나의 이미지, 업무용으로 주고받은 이메일과 명함이 결국 나의 노출이 되고 마는 아이러니. 우리의 일상 속에 만연한 폭력과 위협들이 <도어락>에서 개연성 있는 사례로 지나쳐 간다. 문제적인 것은 이런 사례들이 과장이나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의 중심 갈등은 납치, 신체훼손과 같은 사이코패스 범죄이다. 하지만 정말 관객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허구적인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이미지가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법한 일상이다.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자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남자의 모습도 그렇고, 신고는 사후에 하는 거지 사전에 하는 게 아니라고 짜증을 내는 경찰의 모습도 그렇다. 분명, 스토킹 피해자임에도 회사를 어지럽게 한 원흉으로 지목되어 재계약이 거절되는 모습도 낯설지는 않다. 계속해서 위험을 호소할 때 그런 사람들이 일종의 히스테리나 신경쇠약 환자로 치부되는 과정도 새롭지는 않다. 모두 다 낯익은 것, 이미 우리 주변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인 셈이다.

 

<악마를 보았다>나 <V.I.P> 같은 영화 속에서 살인이 무서웠던 것은 그런 인물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런 인물들은 현실에서 만난다기에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며 비사실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도어락>은 가해자에 대한 공분보다 먼저 잠재적 피해자로서의 공감을 건드린다. 그런 사람 만날까봐 무서운 게 아니라 우리도 피해자의 형편과 크게 다르진 않다는 사실에 무력해지는 것이다. 알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고 지내는 것, 확률의 문제라고는 하지만 내가 걸리면 100%인 불운의 세계, 누구나 잠재적 피해자군에 속해 살아가고 있다는, 우리가 가까스로 외면했던 현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상상이 아니라 바로 현실이다. 너무 사실적이라 억누르고 살아가는 공포, 생존하기 위해 외면하는 도처의 위험들 말이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위기의 사인을 모르는 척했던 1998년, 내가 잠재적 피해자일 수 있지만 애써 나만은 아니라고 외면하며 하루하루 생존해가는 많은 여성들. 우리는 어쩌면 이토록 만연한 공포를 모르는 척하고 현실을 속여 가며 지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두려운 것은 바로 현실이다.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영화적 환상은 사실 현실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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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이 5년 전의 추억을 상기시켰다. 머리엔 머플러를 친친 동여매고 입을 수 있는 건 무엇이든 걸치고 시장 바닥에서 떨며 밥을 먹는 여인들의 사진이었다. 나는 아마도 이 사진을 자갈치시장에서 찍었던 것 같다. 나는 짧게 사진의 제목을 달았다. “이런 장면에 ‘삶의 현장’ 따위의 설명을 붙이지 말자.” ‘삶은 이어진다’ 같은 것도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고통스럽지만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고. 그것이 일상이라고. 그것을 운명이라든가 국외자의 시선을 실어서 감상적인 말로 수식해서는 곤란하다고.

 

 

언젠가 한 요리사 친구가 실직했다. 그야말로 쌀독에 쌀이 떨어졌다. 라면도 떨어졌다. 어느 날 밤에 귀가하는데, 집이 컴컴하더란다. 요금 체납으로 전기도 끊긴 것이다. 인터넷이 거의 없던 시절, 어디선가 정보를 듣고 북창동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봤다고 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골목에 불어닥쳤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겨울날이었다. 그는 그날 일을 얻지 못했다. 인력사무소 사장이 “칼판 두 명, 불판 두 명!”을 외쳤다. 중식당 전문 인력시장이었다. 그는 양식 전문이었으니 빈손으로 아침 전철을 타고 귀가했다. 마침 출근시간이었다. 전철 안은 송곳 꽂을 틈도 없이 승객으로 꽉 차 있었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만원 전철 안의 승객조차도 그는 부러웠노라고 했다. 그래도 그들은 밥을 벌러 어디론가 가고 있었으니까. ‘벼룩시장’을 보고 결혼식장 뷔페에 주말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소갈비 상자를 옮기다가 다쳤다. 허리 근육이 쥐어짠 빨래처럼 뒤틀리더라는 것이었다. 주방장의 선처로 일당을 받아들고 조퇴했다. 그는 동네에서 두부며 반찬거리를 사다가 막걸리집에 주저앉았다. 대낮에 한 잔 마시는데 밖에 마침 눈이 펑펑 내렸다고 한다. 술잔에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이 얘기를 그 친구와 막걸리를 마시면서 들었다. 함민복은 <눈물은 왜 짠가>라는 수필을 썼다. 친구의 막걸리잔도 짰을 것이다. 울고났더니 거의 맹목적이라고 할 정도로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더라, 새끼들 입에 밥은 넣어야 하겠다, 뭐라도 하겠다는 투쟁심 같은 것이었다고 말했다.

 

예전에 회사 다닐 때 아주 깐깐하고 팍팍한 선배가 있었다. 말을 직설적으로 해서 좀 불편한 사이였다. 그가 점심시간이 되자 내게 말했다.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먹고 하자. 어디 가서 뜨거운 국물이라도 마시자.”

 

이상하게도 그 선배에 대한 평소의 서운함이 싹 사라지는 말투였다.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이 말. 우리는 언젠가 죽을 것이고, 삶의 대부분은 먹자고 일하다가 보낸다. 그 먹는 일의 일상이 소중한지 잘 모른다. 하루에 두 끼, 세 끼 이어지는 일이니까.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저 칼바람 속에서 머플러 쓴 시장 여인들의 숟가락질, 친구의 짠 막걸리잔, 그리고 선배의 한마디. 눈 오는 날, 마음이 더 추운 사람들이 오늘도 한 끼 밥을 잘 먹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져 밥다운 밥을 먹을 수 있기를. 그렇게 되기를.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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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천진한 목소리가 초등학교를 가득 채운다. 가을 체육대회가 한창인 운동장에서 한 남자아이가 열심히 달리고 있다. 그런데 릴레이 경주를 마친 남자아이 앞에 이상한 환각이 나타난다. 어린 여자아이가 고무줄놀이를 하며 웃고 있는 모습이다. 어딘지 불안해 보이던 남자아이가 건물 계단 위로 올라간다. 제일 높은 계단에 서 있던 아이는 갑자기 아래로 몸을 던진다. 

 

올해 드라마 중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막을 연 MBC 미스터리 스릴러 <붉은 달 푸른 해>는 아이들의 숨겨진 상처에 주목하는 작품이다. 아동상담사인 주인공 차우경(김선아)은 계단 아래로 투신한 10살 남자아이 한시완(김강훈)을 상담하게 된다. 시완의 이상행동은 여동생을 교통사고로 잃은 이후부터 생긴 증세였다. 하지만 시완은 상담 사실이 밖으로 퍼져나갈 것을 우려한 부모의 반대로 곧 상담을 중단한다.

 

MBC <붉은 달 푸른 해>의 한 장면.

 

상담이 계속 필요하다는 우경에게 “내 자식은 내가 더 잘 알아요”라고 응수한 시완 어머니의 말은 현실에서 수많은 부모가 되뇌는 말이다. 부모들은 정말 아이들에 대해 잘 알고, 보호하고 있을까? 드라마는 이 물음에서부터 출발한다.

 

질문은 곧바로 이어진 사건에서 한 단계 더 나간다. 상담센터로 향하던 차 안에서 시완 어머니의 상담 중단 통보 전화를 받은 우경은 근심에 휩싸인 채 집으로 차를 돌린다. 바로 그때 누군가 우경의 차로 뛰어든다. 시완 또래의 남자아이였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충격과 죄책감에 빠진 우경은 자동차 전용도로라서 운전자 과실을 묻기 어렵다는 변호사의 말에도 아이의 가족을 수소문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보호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절망한 우경이 묻는다. “길바닥에서 어린애가 죽었어. 근데 그 앨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부모조차도. 어떻게 아이가 무연고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시완의 사연이 부모의 방임을 지적했다면, 도로에서 사망한 아이의 이야기가 겨냥하는 질문은 우리 사회의 방임 문제로 확대된다. 우경의 의문에 “아이들이라고 모두 보호자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라고 답하는 경찰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부모라고 해서 다 보호자인 것은 아니다. 첫 회에서 등장한 김한솔 어린이 학대 치사 사건처럼 아동학대 가해자의 절대다수가 부모다. 그렇다면 그런 부모 아래 방치된 아이들, 그리고 그런 부모조차 없는 아이들은 누가 보호할 것인가.

 

이는 아동학대를 소재로 한 최근 드라마들의 공통된 질문이다. 이전까지의 드라마들이 대부분 가시적 폭력 위주의 아동학대 문제를 그렸다면, 같은 주제를 다루는 요즘의 드라마들은 더 폭넓은 사회적 방임의 문제를 제기한다. <붉은 달 푸른 해> 이전에 올해 초 방영된 tvN <마더>가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 혜나(허율)는 가난한 싱글맘과 그의 난폭한 동거인 아래서 학대당한다. 아이를 눈여겨본 교사들이 수차례 아동학대를 의심하고 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학대는 점점 심해진다. 보다 못한 담임선생님 수진(이보영)이 혜나를 데려가 보호자를 자처한다. 부모가 버리고 사회가 방임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

 

지난 9월 방영된 KBS 미스터리 호러 <오늘의 탐정>은 첫 번째 사건으로 어린이집 교사에 의한 아동 납치 사건을 다뤘다. 드라마는 이 범죄를 개인적 문제로 몰아가기보다는 어린이집 교사들의 열악한 근무조건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함께 환기한다. 점점 늘어나고 있는 어린이집 학대 사건의 근본적 문제가 거기에 있다.

 

드라마 속 모든 범죄의 배후에 있는 생령 선우혜(이지아)의 사연 또한 같은 맥락 안에 위치한다. 어린 우혜는 신변을 비관해 가족 동반 자살을 시도한 아빠의 손에서 홀로 살아남는다. 어린 자녀들과의 동반 자살은 정확히는 자녀 살해 후 자살이다. 이는 아동을 향한 가장 극단적인 폭력 행위일 뿐이다. 더구나 우혜는 가족들 시체 옆에서 수일간이나 방치된 채로 있었다. <오늘의 탐정>은 그렇게 부모와 사회가 유기하고 방임한 아이가 원귀로 돌아와 세상을 상대로 복수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최근 아동학대 소재 드라마의 새로운 경향은 아동 문제 인식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최근 3년간의 아동학대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빅데이터로 분석한 결과, 제일 두드러진 변화는 아동학대를 가족 간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로 바라보는 인식의 증가다. 신체학대를 넘어 정서학대와 방임 등도 문제로 인식하는 등 아동학대에 대한 인식의 범위가 확대됐다는 것이었다. 아동학대 신고 건수가 늘고 피해 아동의 심리치료도 늘어났다.

 

물론 뒤집어보면 아동학대 범죄가 그만큼 증가하고 그 심각성이 커지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런 상황에서 아동학대를 사회문제로 가시화하고 문제의식을 확대하는 작품들이 꾸준히 나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최근작인 <붉은 달 푸른 해>처럼 기존의 아동학대 소재 드라마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은 아동 우울증, 아동 자해 등의 문제까지 다루는 작품이 등장한 것은 더 주목할 만하다. <마더>와 함께 2018년 드라마의 가장 큰 성취 중 하나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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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자리 어른이 술을 권한다. 외지 사람이 잔을 받는다. 드르륵, 낡아서 삐걱거리는 알루미늄 문이 열리고 노인 손님이 몇 패 들어온다. 찌개를 끓여서 막걸리를 돌린다. 미지근한 막걸리다. 여그는 차게 안 마셔. 

 

최근 광주에 다녀왔다. 부도심 곳곳의 전통시장이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시장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남광주시장, 양동시장, 대인시장. 토요일마다 야시장이 열리는 곳도 많다. 청년과 예술가가 결합해서 시장의 분위기를 바꿔 놓기도 한다. 시장의 힘이 아직은 느껴지는 도시다. 이 시장에는 대폿집이 전설처럼 남아 있다. 한 바퀴 돌면서 대폿집들의 면모를 쓱 살펴본다. 어떤 집은 “시장에서 파는 무엇이든 가지고 오면 요리해 드린다”고 써 놓았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 무렵, 전라도 해안에서 잡은 맛있는 생선과 해물이 광주에 많이 올라온다. 그 귀하다는 노랑가오리도 별거 아니라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누워 있고, 표면이 푸르게 빛나는 제철 삼치며, 굵직한 낙지(대낙지라 부른다)도 억센 힘을 자랑하며 함지에서 용을 쓴다. 가을에 태어난 어린 낙지도 있어, 세발낙지 맛을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세발낙지는 품종이 아니라 어린 놈을 그리 부른다. 어물전에서 낙지를 구경하고 있으면, ‘아짐’(아주머니)이 세발낙지 먹는 법을 알려준다. 이놈을 다리 쫙 훑어서 한입에 넣어야 한다고.

 

 

장을 봐서 대폿집에 들어선다. 안줏거리를 건네면, 솜씨 있게 쓱쓱 만들어낸다. 낙지를 탕탕, 도마에 쳐서 참기름과 통깨(이 양념은 전라도 음식의 주인공 격이다)를 술술 뿌려서 낸다. 가오리를 쓱쓱 저미고, 병어는 탕을 끓인다. 새꼬막이 수줍게 나와 있어서 연하게 삶아 백숙을 한다. 꼬막은 까먹는 맛이제. 안주를 함께 나누는 대폿집 손님들이 한마디씩 한다. 어디서 오셨느냐, 무슨 일을 하셨느냐 서로 인사를 나눈다. ‘하셨느냐’는 은퇴한 어른에게만 묻는 과거형 질문이다. 그들도, 다 한세상을 힘차게 살아온 양반들. 개인사를 들으며, 사라져버린 시장과 광주라는 도시의 기억을 떠올린다. 대포는 원래 커다란 잔을 의미한다. 막걸리 같은 술을 딱 한 잔 마실 수 있게 큰 사발에 따라서 냈다. 얼른 마시고 일하러 가야 하거나, 가진 돈이 적어서 한 잔밖에 마실 수 없는 사람에게 최적의 소용이었다. 이제는, 다들 술을 천천히 마신다. 안주도 시켜야 한다. 이제 대폿집에서 대폿잔을 볼 수 없게 됐지만 인심은 그대로다. 무슨 술이든 한 병 시키면 안주를 한상 깐다. 싸고 흔한 음식이지만 이쪽 말로 ‘개미진’(맛있는) 것들이다. 김치며 번데기, 어묵탕 같은. 술에 딸려 나오는 기본 안주는 무료다. 이 전통은 오랜 것이다. 조선말의 선술집이나 주막에서도 그랬다는 기록이 있다. 전주의 그 유명한 막걸리골목의 인심이나 통영의 ‘다찌집’의 문화도 전통의 소산이다. 이제는 월세 싸고 직원 안 쓰는, 이런 광주의 대폿집에서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저나 다 사라져갈 대폿집을 기억하고 쓰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데, 참 장한 일이 아닌가 싶다. 대포 한 잔 마시러 광주에 가고 싶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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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는 것이다.” 파티에 다녀온 남편이 어떤 아가씨를 데려다주는 길에 함께 자고 왔다고 말한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용서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덧보탠다. 용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하는 것이라고, 진짜 이해했다면 용서라는 말이 필요 없다고 말이다. 아이 넷을 키우고 있는 아내 수전은 가정을 유지하는 일이 ‘지성적’인 판단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남편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용서한다. 눈치챘다시피, 용서로 지탱이 되는 이 가정은 이미 균열되어 있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의 가정 말이다.

 

20대 후반에 결혼한 수전은 꽤나 합리적인 판단으로 결혼을 하고, 전원주택으로 이사해 네 명의 아이를 낳았다. 모두 계획한 대로였다. 단조로운 생활을 하게 될 것도 알았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두렵거나 힘들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전은 자신의 삶이 “자기 꼬리를 문 뱀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유지하는 게 원하던 일이었지만 그것을 유지하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영화 <툴리>의 한 장면.

 

막내가 제법 큰 이후엔 자기만의 방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집 안에 엄마의 방을 만들었지만, 수전은 그 방에서 하루 종일 아이들이 내일 입을 옷, 먹을거리, 일과를 설계하느라 생각이 쉴 틈이 없다. 혼자 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호텔 19호실을 빌린다. 그리고 드디어 그곳에서 혼자가 된다. 누구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친구가 아닌 익명의 존재가 된 것이다.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다보면 나 자신을 잃고 산다고들 말한다. 영화 <툴리>에서 만나게 되는 여자 마를로(샤를리즈 테론)도 그런 인물 중 하나이다. 1남1녀의 어머니인 그녀는 현재 만삭이다. 지금은 막내이지만 곧 둘째가 되어야 할 아들은 좀 특별하다. 지나치게 예민한 아들은 일종의 정서적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와중에 셋째가 태어나고, 마를로는 말 그대로 독박육아에 시달린다. 시도 때도 없이 깨는 아이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고, 그 와중에 두 아이의 식사와 등교, 준비물도 챙겨야 한다. 남편은 집에 돌아오면 이어폰을 낀 채 게임에 열중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나쁜 남편도 아니다. 아니, 그냥 평범한 남편의 모습이라는 게 문제다. 내가 젖이 나온다면 야간 수유라도 대신할 텐데라는 식의, 나름의 위로를 던지는 모습 말이다.

 

그때 밤에만 아이를 돌봐주는 도우미 툴리가 나타난다. 자신의 아이처럼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툴리 덕분에 마를로는 정말이지 너무나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잔다. 쉬는 것처럼 쉬니 기운이 나서 아이들 간식도 챙겨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넬 여유도 생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챙기고 돌아보게 된다. 야간 보모 툴리는 마를로를 찾아 온 첫째 밤, 나는 아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을 돌보기 위해서 왔어요, 라고 말한다. 그렇다. 보모는 사실 아이가 아닌 엄마에게 필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엄마 마를로에게 아이들은 금세 크니 잠시만 견디세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의 소설에 등장하는 수전을 보노라면,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만은 아닌 듯싶다. 미친 듯 체력을 불태우며 수유기를 지나 학교에 갈 정도로 아이를 키우고 나면 과연 ‘나’가 돌아올까? 아이들로 북적이던 시간이 아이가 빠져나가면 고스란히 나의 것이 되어 줄까? 도리스 레싱이나 오정희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 대답은 아니라는 것처럼 다가온다.

 

오정희의 소설 <옛우물>에도 사는 집에서 좀 떨어진 방에서 자기만의 짬을 가지는 한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 45살 생일을 맞게 된 여성은 그 떨어진 예성 아파트에 가서 곧 허물어진 연당집을 내려다본다. 바보 아홉 명, 당상관 다섯 명이 태어났다는 연당집은 바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의 내면, 젊음과 욕망의 결과물일 테다. 젊음과 욕망은 바보 같은 짓 아홉 개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당상관처럼 자랑스러운 결과도 다섯쯤은 만들어 낸다. 그렇게 깊은 자기의 내면은 나만 혼자 있을 수 있는, 예성 아파트에 가서야 보인다. 19호실에 가서야 볼 수 있는 자기 자신이 있는 것이다.

 

영화 <툴리>의 결말에는 반전이 숨어 있다. 그 반전을 보고 있노라면, 결국 출산과 육아, 결혼과 가정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가장 상처 입는 것은 엄마, 아내가 아니라 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 툴리는 힘들어하는 마를로에게 지금 당신의 모습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미래의 모습이 아니냐고 묻는다. 둔감하지만 착한 남편, 귀여운 세 남매. 브루클린의 옥탑방에 세들어 살 땐, 그토록 간절히 꿈꾸었던 미래의 모습이 바로 지금 아니냐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아내에게도 19호실과 예성 아파트는 필요하다. 그 무엇이라는 수식어를 다 뗀, 익명의 존재가 되어 나를 완전히 놓고 그래서 나만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 이 공간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트르슈카 인형처럼 나를 벗기고 벗겨 마침내 드러나는 작은 나, 50대에서 40대, 30대, 20대, 10대의 나.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나와 만나는 과정. 마를로나 수전과 같은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이나 무관심, 용서가 아니라 이해이다. 그녀에게는 다만 이해가 필요할 뿐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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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뜨거운 국물 힘으로 버틴다고 한다. ‘밥심’ 다음으로 많이 쓰는 상징이다. 뜨거운 국에 밥 한 그릇 훌훌 뚝딱 말아먹고, 식의 표현이 흔하다. 노동하는 음식, 간편식의 골자를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 식생활에서는 국과 국밥의 역사가 그랬다. 국밥의 대표격인 설렁탕이나 곰탕은 싸지 않았지만, 속이 든든하고 오래 허기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고깃국이었기 때문이다. 국밥이 노동 음식이었다는 근거는 토렴을 든다. 밥을 말아내어 들이마시듯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토렴은 밥알의 온도를 적당하게 해주는 기술이면서 동시에 식사 속도를 높여주어서 환영받았다는 뜻이다. 전기보온밥솥이 없던 시대에 토렴은 인간이 짜낼 수 있는 지혜였다. 특히 한국처럼 대륙성의 건조하고 추운 기후에서는 더욱 필요한 기술이었을 것이다. 토렴한 국밥을 먹으면서 우리 선조가 버텨온 세월이 얼마나 길었을까.

 

 

고기에 대한 열망은 기록이 존재하는 역사시대부터 수없이 등장한다. 수천년 동안 기근이 이어지다가 불과 30여년 전부터 고기 풍요의 대혁명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간혹 값이 뛰는 채소보다 못한 고기 신세라는 말이 나온 것은 근자의 일이다. 미국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충분한 양의 사료, 사육 기술의 고급화, 수입육의 대량 공급으로 이제는 고기 자체에 대한 기근은 더 이상 없다. 설렁탕과 곰탕의 주재료인 소고기의 대체품인 닭과 돼지고기의 공급량이 넘치는 것도 그 영향이다.

 

고기를 구워 먹지 못하고 탕으로 내어 먹는 것을 자조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었다. 국밥을 서구의 스테이크에 비교해서 생기는 일이다. 소고기 1㎏을 국밥으로 끓이면 10명이 먹고, 스테이크로는 셋이서 먹는다는 수학적 계산을 해보면 선명해진다. 근대 도입기에 이 땅에 들어온 유럽인들이 스테이크 같은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보며 시작된 충격이다.

하지만 유럽도 오랜 기간 우리와 같은 국물 문화를 거쳤다. 유럽도 한때 고기 공급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절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던 까닭이다. 산업혁명과 사육 기술의 발달이 고기를 국물로 먹던 시대에서 ‘덩어리’의 시대로 진전시켰다. 위생과 동물 예방의학이 발전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여기에다 식민지 경영으로 부를 쌓으면서 고기 공급을 늘릴 수 있었다.

 

유럽인들이 먹는 수프라는 음식은 국밥처럼 적은 고기와 재료를 나눠 먹으려는 열망에서 시작된 음식이다.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수프는 고급 음식이라고 생각했던 일본과 한국의 기록은 그런 면에서 살짝 코믹한 구석이 있다. 경양식집에서 팔던 밀가루로 만든 싸구려 수프를 여전히 그리워하는 우리의 추억에는 그런 흥미로운 역사가 숨어 있는 셈이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시내 국밥집이 바글바글해진다. 거칠어진 속을 위로하는 데에는 뜨거운 국물이 최고겠지. 어쩌면 추운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도 같다. 세상 일이 뭐랄까, ‘속 시원히’ 풀리지 않는 게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헛헛한 일이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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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방영된 tvN 드라마 <화유기>는 고대소설 서유기를 모티브로 요괴 손오공(이승기)과 삼장법사의 소명을 타고난 진선미(오연서)의 사랑을 담은 판타지 드라마였다. 현재 방영 중인 tvN 월화드라마 <계룡선녀전>은 선녀와 나무꾼 설화를 재해석, 날개옷을 잃어 천계로 돌아가지 못한 채 남편의 환생을 기다리는 선녀 선옥남(고두심·문채원)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처럼 이계의 존재와 인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가 최근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2010년대 이후 로맨스 드라마 장르의 최고 흥행작들이라 할 수 있는 SBS <별에서 온 그대>와 tvN <도깨비>도 이 계열에 속한다. 전자는 400년 전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김수현)과 한류 스타 천송이(전지현)의, 후자는 도깨비(공유)와 도깨비 신부의 운명을 지닌 지은탁(김고은)의 사랑을 그렸다. 개성적인 캐릭터와 색다른 볼거리를 내세운 장르물의 인기와 컴퓨터그래픽 기술의 진화 등이 이 같은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 유행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선녀와 나무꾼 설화를 재해석한 tvN 드라마 <계룡선녀전>.

 

눈에 띄는 것은 이들 드라마 안에서 남녀 주인공을 묘사하는 대조적 방식이다. 주인공 유형만 봐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남자 주인공이 인간보다 진화한 문명의 외계인(<별에서 온 그대>), 악귀와 맞서 조선을 구하는 뱀파이어(<밤을 걷는 선비>), 불멸의 반신 도깨비(<도깨비>), 악귀를 때려잡는 최강 요괴(<화유기>) 등으로 그려질 때, 여자 주인공은 인간이 되고 싶은 구미호(<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기억을 잃은 원귀(<아랑사또전>), 인간이 된 천사(<하이스쿨 러브온>), 육지에서 만난 첫 남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다를 떠난 인어(<푸른 바다의 전설>), 699년 동안이나 남편을 기다리는 선녀(<계룡선녀전>) 등으로 등장한다.

 

같은 이계의 존재인데도, 남녀의 캐릭터 묘사는 이렇게나 다르다. 남자 주인공은 대부분 악에 맞서 연인과 타인들을 구하는 슈퍼히어로적 능력이 강조되는 반면, 여자 주인공은 특별한 능력보다는 신비로운 외모와 순수함, 그리고 남주인공을 위한 자기희생적 성격이 부각된다. 트렌디한 판타지 장르를 표방하면서도, 강한 구원자로서의 남성과 그의 보호를 받는 수동적인 여성을 내세우는 전통적인 로맨스 관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제일 두드러지는 문제는 남자 주인공이 인간 문명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그것을 초월하기까지 하는 존재일 때, 여자 주인공은 인간 문명조차 따라잡지 못하는 퇴행적 존재로 그려진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2010년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에서 오랜 봉인으로부터 풀려나 남주인공 대웅(이승기)의 집에 살게 된 구미호(신민아)의 행동은 5세 아이 수준에 머문다. 미호는 청소 솔로 머리를 빗고 치약과 비누 거품을 맛있게 먹는 황당한 행동을 잇달아 하고, 대웅은 그녀에게 인간 세상에 적응하는 법을 가르친다. 같은 작가가 쓴 <화유기>에서 요괴 오공이 구미호처럼 오랜 봉인에서 풀려났으나 그녀와 반대로 인간 세상에 천연덕스럽게 적응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5년 뒤에 방영된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은 더욱 심각하다. 어우야담 속 인어 설화를 각색한 이 드라마에서 원래 도도하고 똑똑한 인어였다는 심청(전지현)은 인간 세상에 나오자 스파게티를 손으로 집어 먹고 휴지를 뽑아 날리며 즐거워하는 등 새끼 고양이처럼 행동한다. 남주인공 준재(이민호)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길거리에 쭈그려 앉아 기다리는 모습도 영락없는 유기견이다. 같은 작가의 전작 <별에서 온 그대>에서 외계인 도민준이 400년간 신분을 계속해서 바꿔가며 완벽하게 인간 사회에 섞여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현재 방영 중인 <계룡선녀전>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견된다. 북두칠성 제1성 탐랑성을 관장하는 선녀였던 주인공 선옥남은 날개옷을 잃고 나무꾼의 아내로 살다가 그가 죽은 뒤에는 남편의 환생을 기다리며 선녀다방 바리스타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나마 웹툰 원작에서는 신성한 존재로서 선녀의 의미를 강조하지만, 로맨스 드라마로 옮겨지면서 그러한 의미는 희미해지고 남편을 찾아 계룡산 깊은 산속에서 나와 21세기 서울과 처음 마주한 선옥남의 엉뚱하고 천진한 모습이 더 두드러진다. 남주인공 정이현(윤현민)과의 약속을 앞두고 미용실에 가서 청포물로 머리를 감겨달라는 모습이나, 극장에서 영화 <킹콩>을 보면서 스크린 속 인물들을 향해 진지하게 말 거는 모습 등이 대표적이다.

 

요컨대 서양은 문명, 동양은 비문명으로 타자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작동방식이 남녀 구도에 가장 뚜렷하게 적용되는 장르가 이계 주인공 판타지 멜로드라마다. 똑같이 초월적 존재임에도 남주인공의 능력은 몇 배로 과장되고, 여주인공의 능력은 훨씬 축소되기 때문이다. <별에서 온 그대>의 도민준이 조선시대부터 400년 동안 쌓아온 지식을 활용하고 현재에는 대학교수로서 인간들을 가르치는 것과 달리, 고려시대부터 살아온 <계룡선녀전>의 선옥남은 ‘머리에 꽃 단’ 할머니(이용녀)가 옥남을 보고 되레 정신 나갔다고 여길 만큼 문명과 동떨어진 존재로 묘사되는 걸 보면 문제가 한층 뚜렷하게 드러난다. 다른 세계를 상상하면서도, 여성의 존재만큼은 현실의 중력에 발 묶여 있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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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는 늘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다. 영화계뿐만은 아닐 것이다. 문학도, TV 예능도 심지어 정치계도 새로운 것을 찾는다. 새로운 시도의 출현에 대해 우리는 기꺼이 반길 준비도 되어 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상엔 새로운 출현이라는 게 얼마나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몇 편의 영화들만 해도 그렇다.

 

미국에서 흥행을 한 뒤 아시아권에 뒤늦게 개봉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Crazy rich Asians)>을 보자. 영화의 할리우드 흥행에 아시아가 흥분했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아시아계라는 점에서 말이다. 수선스럽다고만 하기도 어려운 게 주·조연 모두 아시아계 배우로 캐스팅되어 미국 주류 영화로 개봉한 작품이 1995년 <조이 럭 클럽> 이후 무려 23년 만이다. 그동안 아시아계 배우란 미국 영화에서 감초 혹은 인종적 편견을 강화하는 역할 정도에 그쳤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한 장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남자 친구의 고향인 싱가포르에 가게 된 연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평범한 중국인인 줄 알았던 남자 친구는 싱가포르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미치도록 부자인 집안의 아들이었고 그런 집안임을 티라도 내듯이 엄격한 가풍과 유교적 질서를 지키고 살아간다. 겉은 중국인이지만 완전히 미국식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29세 여성 레이첼은 이래저래 싱가포르에서는 부적격 신부로 외면당한다. 특히 장래 시어머니감이 심각하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 변호사였던 그녀는 ‘영’가문의 안주인이 되기 위해 자신의 경력을 단숨에 던지고 집안일에 매진했다고 말하니 말이다.

 

대략의 줄거리를 놓고 보자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줄거리는 우리네 안방에서 몇십 년째 방영 중인 가족드라마의 꼴과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의 흥행과 달리 한국에서는 이런 영화가 왜 그렇게 흥행했지라며 주저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서 멀지 않다. 이런 이야기, 이런 주인공은 우리에겐 물리도록 익숙한 진부한 것이니 말이다.

 

영화적으로 따져보자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할리우드의 스크루볼 코미디의 원형을 복원하고 있다. 상대적 격차가 큰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사회경제적 갈등은 두 사람의 정서적 교감과 인간적 이해력으로 해결된다. 처음엔 둘 사이를 방해자였던 사람이 마지막에 가서 적극적 조력자로 바뀌는 것도 스크루볼 코미디의 전형을 따라간다. 말하자면 미국, 할리우드의 관객들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통해 1934년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에서 보았던 단순하고도 명쾌했던 로맨틱 코미디의 비전을 다시 보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백인 미국인에서 동양인 미국인으로 바뀌었을 뿐, 줄거리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달라진 게 없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2018년 넷플릭스 최고의 오리지널 영화로도 불리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에서도 발견된다. 짝사랑했던 남자들에게 썼던 비밀 편지가 어느 날 갑자기 당사자들에게 발송된다. 이 발송된 편지로 계약 연애가 시작되고, 그렇게 연인인 척하다 보더니 진짜 감정이 생기고 연인이 된다. 오해, 계약, 갈등, 사랑의 재발견으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정말이지 비슷한 이야기를 찾자면 도서관 하나도 모자랄 정도로 흔하다.

 

하지만 이 두 이야기는 모두 오히려 익숙하기 때문에 더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도 바꿔 말할 수 있다. 올해 네 번째 리메이크작이 선보인 <스타 이즈 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재능을 지녔으나 아직 세상이 발견하지 못했던 원석이 사랑을 알고 스타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반세기 넘어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그려진다. 세상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다양한 이야기가 있지만 뜯어보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고 고만고만하다. 고민의 양상도 그렇고 행복의 순간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사는 넓고 다양하다지만 바닥까지 들여다보면 그렇게 다를 것도 없다. 우리가 장르라고 부른 이야기가 틀이 정해져 있고, 공식이 뻔한데도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인류는 어떤 서사적 유전자, DNA를 공유하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16세기에 썼던 <로미오와 줄리엣>은 여전히 사랑 이야기의 고전으로 사랑받고, 재창조된다. 극복하지 못하는 장애물 앞에서 목숨을 잃는 두 연인은 죽음으로 봉인된 영원한 사랑의 신화로 변주된다. 죽음이 지켜낸 사랑의 불멸성은 500년이 지나도 여전히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45세에 세상을 떠난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를 담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여전히 청중을 움직이고, 아바의 음악이 <맘마미아>를 통해 재창조될 수 있는 것도 이 유전자 덕분이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세월을 건너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감정의 근원이 우리에게 있는 셈이다.

 

오래되었다고 나쁜 것은 아니다. 새롭다고 늘 옳은 것도 아니다. 그 익숙함 가운데서 약간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새로움일 테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오래된 것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결실이기도 하다. 오래된 것을 공부하지 않다보면, 아주 오래된 것을 새것이라 내놓는 해프닝도 생긴다. 인류가 공유한 서사적 유전자를 공부하는 것, 그 지도 아래 놓인 인간의 깊은 속내를 탐구하는 길, 그게 바로 오래된 것을 공부하는 보람이 아닐까?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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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외식업을 지탱하는 조미료 중 하나는 공장에서 생산한 산분해 간장이다. 공장에서 만들었다고 달리 큰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더 나은 간장을 찾으려는 이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업소용 재료를 파는 대형 시장에 가보면, 조선간장이나 양조간장은 찬밥이다. 값이 비싸다는 이유에서다. 재료비가 올라 힘들 식당 사정은 모르지 않되, 간장에 대한 이해가 애초부터 부족하거나 전무하다. 오래된 ‘노포’ 식당의 다수도 다르지 않다. 양조간장이 소량 들어간 이른바 ‘산분해 간장’을 거의 100% 쓴다. 오래된 노포의 맛, 고향의 맛이라는 근저가 실은 산분해 간장이라면 얼마나 씁쓸한 일인가. 원가 분석을 해봐도, 양조간장(우리가 전통적으로 만들어 쓰는 조선간장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공장에서 양조한 간장)을 쓴다고 해서 주름이 갈 정도는 아니다. 요는, 상대적으로 좋은 간장을 쓰려는 보편적 접근이 적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는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한식요리사 자격증 시험에는 양념 배합 공식이 있는데, 진간장이 기본이다. 당대의 입맛이 대량생산한 공장 간장에 길들여 있기는 하지만, 이른바 진간장이 볶음이나 조림 등에 표준 간장이다. 학원에서도 그리 가르친다. 조선간장을 요리에 쓰는 자격증 학원은 애초에 없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진간장이란 원래 고급간장인데, 양조간장에 산분해 간장을 섞은 걸 상품화하면서 이름을 가져다 썼다. 악화가 양화를 밀어냈다고나 할까.

 

조선간장을 마치 오래되고 박제된 간장 정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간편하고 싼, 대량생산형 공장 간장이 있는데 굳이 맛이 짜고 용도가 제한된 조선간장을 뭐하러 먹느냐는 것이다. 최근에는 조선간장을 중심으로 해서 볶음이나 무침, 조림 등에도 다채롭게 쓸 수 있는 물건이 많이 나오고 있다. 염도도 낮아지고 있다. 염도를 낮춰서 냉장 발효하는 간장도 나온다. 시장의 편견과 유통 구조의 벽에 부딪혀서 좌절할 뿐이다.

 

현재의 한국 간장 문화는 일제강점기에 큰 변화가 있었다. 일본이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수 물자의 보급이 절실했고, 산분해 간장은 그 대안이 됐다. 일본 문화가 한국에 이식되면서 전통 간장의 입지가 줄어든 것도 한 이유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우리 콩을 온전히 쓸 수 있게 되자 조선간장은 개별 가정에서 부활한다. 물론 이때 시중에서는 적산 기술로 만든 일본식 간장도 여전히 팔렸고, 6·25전쟁 후에 본격적으로 시장을 넓혀 간다. 흥미로운 건 화교들도 간장·된장 시장에서 활약했다는 사실. 지금 우리가 먹는 짜장면은 된장이 기원이고, 이런 장을 만드는 화교 공장이 된장과 간장을 한국식 식당에도 많이 공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전쟁은 장의 부족을 불러왔고, 대량생산되는 공장의 간장이 크게 퍼졌다. 이후에도 개량형 된장과 간장을 정부 차원에서 적극 밀면서 조선간장은 더욱 위축되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조선간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리고 있다. 한식의 ‘진짜 맛’은 어쩌면 핵심 조미료인 간장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조선간장은 아직 안 죽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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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TV 수목드라마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는 MBC <내 뒤에 테리우스>는 은둔 중인 전직 국가정보원 요원 이야기로 시작한다. 코드네임 테리우스(소지섭)는 과거 남북이 비밀리에 합의한 망명 작전을 수행하던 중 정체 모를 저격수에 의해 정보원을 잃고 자신 또한 내부 첩자 혐의로 쫓기게 된다. 3년 뒤, 김본이라는 이름의 평범한 남자로 위장해 홀로 저격 사건을 조사하던 그는 자신이 추적 중인 킬러가 무슨 이유에선지 앞집 여자 고애린(정인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김본은 킬러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베이비시터를 자원해 고애린에게 접근한다.

 

전설의 블랙 요원이 여섯 살 쌍둥이 남매의 베이비시터에 도전한다는 설정은 단순한 코미디를 넘어 국정원의 위상이 바닥으로 추락한 현실에 대한 풍자적 성격을 띠고 있어 꽤 흥미롭다. 과거 드라마 속에서 미화된 국정원 묘사와 비교해보면 더 온도차가 뚜렷하다. 공포의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 시절을 거쳐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개명한 국정원은 정치적 중립화라는 시대적 요구가 거세지면서 이미지 변신을 위해 대중문화를 적극 공략했다.

 

MBC <내 뒤에 테리우스>의 한 장면.

 

2005년 영화 <태풍>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매체에 문호를 개방했고, 2007년에는 드라마 최초로 MBC <에어시티>에 촬영을 지원했다. <에어시티>에서 인천공항 담당 요원으로 등장한 이정재와 같은 해 방영한 MBC 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언더커버 요원으로 출연한 이준기의 멋진 모습은 국정원에 미국드라마 속 CIA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첩보 조직 이미지를 심는 데 한몫했다.

 

국정원 판타지는 2009년 KBS가 방영한 <아이리스>에서 극에 달한다. 국정원을 모델로 한 국가안전국 소속 요원들이 한반도 핵 테러를 막기 위해 활약하는 이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35%를 넘어서며 화제를 일으켰고, 국정원은 이병헌, 김태희 등 주연배우 5인에게 명예요원증을 선사하기까지 했다. 같은 해 국정원 요원들을 주인공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7급 공무원>이 4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했고, 2010년 정우성, 수애가 국정원 특수요원으로 출연한 SBS 드라마 <아테나: 전쟁의 여신>이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이 같은 판타지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드라마 속 국정원에 대한 판타지가 절정을 향해 가던 시기에 정작 현실 속의 국정원은 다시 과거로 퇴행했다는 단서들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10년 프랭크 라뤼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 미행 탄로 사건, 2011년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 숙소 잠입 발각 사건,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댓글 여론조작과 국정원 직원 감금 사건, 2013년 진보 성향 시민단체 간부를 미행하다 발각된 사건 등 허술한 작전 수행력과 불법 정치 개입이 들통난 굵직한 사례가 줄을 이었다.

 

자연스럽게 드라마 속 국정원 판타지도 힘을 잃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전작의 영광을 이어가려던 2013년 KBS <아이리스2>와 리메이크 드라마인 MBC <7급 공무원>은 동시간대에 경쟁을 펼쳤으나 국정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SBS <그 겨울, 바람이 분다>가 시청률 1위를 가져갔다. 이후 한동안 TV 드라마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국정원 캐릭터는 2017년 미국드라마를 리메이크한 tvN <크리미널 마인드>에 다시 등장했으나 그 결과는 더욱 처참했다. 2016년 말 국정농단 사건 이후 대표적인 ‘적폐 집단’으로 꼽힌 국정원을 액션 영웅물의 무대로 소비하려는 시청자는 거의 없었다.

 

<내 뒤에 테리우스>는 이 같은 시대착오적 전철을 밟지 않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오히려 시대적 맥락을 영리하게 이용해 그동안의 국정원 판타지를 코미디로 비튼다. 드라마 속에서 국정원은 대놓고 “온 국민으로부터 매일 욕먹는 게 일인” 집단으로 묘사된다. 주인공 김본은 멋지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전설이고 그의 특수한 능력은 고된 육아에는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여섯 살 쌍둥이 남매의 체력을 따라잡지 못하고, 갑자기 초저녁만 되면 왜 잠이 쏟아지는지 어리둥절해하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국정원의 무능함이 그들보다 뛰어난 정보력을 지닌 킹캐슬 아파트 아줌마 정보국, 일명 KSI의 비교를 통해 두드러질 때다. 3회에서 국정원의 김본 추격전과 KSI의 쌍둥이 남매 유괴 저지 작전을 병행편집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국정원은 화려한 장비와 기술과 대대적 인력을 동원하고도 김본을 잡는 데 실패하지만, KSI는 주부들의 단체 메신저방을 활용해 결국 유괴범을 찾아낸다. 국정원 요원들이 결정적 고비마다 현장에 나타나 활약하는 KSI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국정원이 그들만의 게임을 벌이는 동안 민생과 얼마나 멀어졌는지에 관한 풍자이기도 하다.

 

국정원 소재 작품은 내년에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장르물로는 첩보가 여전히 매력적인 소재인 데다 급변하는 남북관계로 인해 그 중요성도 한층 커졌기 때문이다.

 

현재 이승기, 수지 주연의 <배가본드>, 제작비 250억원대 대작으로 알려진 <프로메테우스> 등이 제작 중이다. <내 뒤에 테리우스>가 국정원 판타지를 역으로 이용해 성공했다면,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는 다른 첩보물들은 어떤 전략을 선택할지 궁금해진다.

 

<김선영 TV평론가>

 

Posted by mx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