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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2.14 현실이 스크린을 침투할 때
  2. 2018.03.02 가만히 있지 않는 것

2001년 9월11일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불탔다. 슬로베니아의 정신분석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이를 두고 실재(The Real)의 침투라고 말한 바 있다. 의식에서 가장 먼 곳, 상징계로부터 가장 깊은 곳 너머에 묻어 둔 바로 그것, 실재계의 공포가 도래했노라고 말이다. 어려운 말이다. 쉽게 나름의 곡해를 해보자면, 설마 현실이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환상의 도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로 실컷 즐길 수 있었던 것. 결코 현실이 될 리 없으니 쾌락원칙에 따라 즐길 수 있었던 가상. 스크린에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파괴의 순간들 말이다. 외계인이 침공해 백악관을 무너뜨리고, 테러리스트가 월드트레이드센터를 점령할 수 있었던 건 그게 다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2001년 9월11일 전에는 말이다.

 

영화 <도어락>의 한 장면.

 

그런데 요즘 우리는 실재계의 침범과 정반대의 일들을 영화관에서 경험하고 있다. 설마 현실이 될까 싶은 상상을 만나는 게 아니라 너무나 현실적이라서 함부로 영화로 다룰 수 없었던 일들을 스크린에서 확인하는 중이다. 이는 바로 현실의 침투이다. 너무나도 사실적이기 때문에 마주하기 싫었던 공포, 그런 공포가 최근 영화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1998년 IMF 외환위기 사태를 재현하는 작품 <국가부도의 날>과 독거 여성의 공포를 다룬 영화 <도어락>이 그렇다.

 

고백하자면, <국가부도의 날>을 보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했다. 적어도 1994년에 대학에 들어갔고, 1998년에 졸업한 X세대인 나에게 IMF는 덜 아문 상처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1998년을 맞았던 그래서 과소비라는 사회적 질타 앞에 묵묵히 입을 다물어야 했던 순진했던 국민들이 영화에 소환되는 순간을 목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일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그래서 그날의 국가부도 사태를 날벼락처럼 당해야 했던 <국가부도의 날>은 공포영화에 가깝다. 돌이켜보면 그건 분명 재난이었다.

 

2018년에 돌아보는 1997년 12월 ‘국가부도의 날’은 어떤 의미에서 부검 과정과도 닮아 있다. 사체를 해부해 원인을 밝혀가는 과정, 이미 회생불능을 받았던 그날을 해부학적으로 더듬어 다시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이 영화의 줄거리이니 말이다. <국가부도의 날>의 이야기는 어쩌면 시네마 포렌식(cinema forensic)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알고 보니 그건 일종의 범죄였으니 말이다.

 

<도어락>의 공포는 훨씬 더 사실적이다. <국가부도의 날>이 과거였다면 <도어락>은 현재이기 때문이다. 20여년 전 윤대녕의 소설과 트렌디 드라마에서 낭만적으로 제시되었던 원룸, 오피스텔에서의 삶은 2018년 현재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려진다.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사들고 돌아와, 빌리 홀리데이의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던 20여년 전 세련된 라이프 스타일의 상징이었던 원룸과 현재의 원룸은 상당히 달라져 있다.

 

영화 속에는 도시괴담처럼 떠도는 이야기들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누군가 방의 도어락 터치 패드를 건드리고 심지어 손잡이를 흔들더라, 택배 기사나 배달원을 사칭해 여성 혼자 사는 방을 침범했더라와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촬영된 나의 이미지, 업무용으로 주고받은 이메일과 명함이 결국 나의 노출이 되고 마는 아이러니. 우리의 일상 속에 만연한 폭력과 위협들이 <도어락>에서 개연성 있는 사례로 지나쳐 간다. 문제적인 것은 이런 사례들이 과장이나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의 중심 갈등은 납치, 신체훼손과 같은 사이코패스 범죄이다. 하지만 정말 관객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허구적인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이미지가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법한 일상이다.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자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남자의 모습도 그렇고, 신고는 사후에 하는 거지 사전에 하는 게 아니라고 짜증을 내는 경찰의 모습도 그렇다. 분명, 스토킹 피해자임에도 회사를 어지럽게 한 원흉으로 지목되어 재계약이 거절되는 모습도 낯설지는 않다. 계속해서 위험을 호소할 때 그런 사람들이 일종의 히스테리나 신경쇠약 환자로 치부되는 과정도 새롭지는 않다. 모두 다 낯익은 것, 이미 우리 주변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인 셈이다.

 

<악마를 보았다>나 <V.I.P> 같은 영화 속에서 살인이 무서웠던 것은 그런 인물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런 인물들은 현실에서 만난다기에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며 비사실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도어락>은 가해자에 대한 공분보다 먼저 잠재적 피해자로서의 공감을 건드린다. 그런 사람 만날까봐 무서운 게 아니라 우리도 피해자의 형편과 크게 다르진 않다는 사실에 무력해지는 것이다. 알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고 지내는 것, 확률의 문제라고는 하지만 내가 걸리면 100%인 불운의 세계, 누구나 잠재적 피해자군에 속해 살아가고 있다는, 우리가 가까스로 외면했던 현실이 담겨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상상이 아니라 바로 현실이다. 너무 사실적이라 억누르고 살아가는 공포, 생존하기 위해 외면하는 도처의 위험들 말이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위기의 사인을 모르는 척했던 1998년, 내가 잠재적 피해자일 수 있지만 애써 나만은 아니라고 외면하며 하루하루 생존해가는 많은 여성들. 우리는 어쩌면 이토록 만연한 공포를 모르는 척하고 현실을 속여 가며 지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말 두려운 것은 바로 현실이다.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영화적 환상은 사실 현실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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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x2.0

올해 아카데미상 후보작인 <쓰리 빌보드>와 <셰이프 오브 워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우선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여성 주인공 영화가 처음이겠냐마는, 말 그대로 여성 캐릭터가 이야기를 이끄는 여성 인물 영화는 오랜만이다. 두 작품 모두 그렇다. 더 의미 있는 것은 그들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힘을 가진 쪽이 아니라는 점이다. 딸아이를 강간살인사건으로 잃은 어머니 밀드레드 헤이스(프랜시스 맥도먼드)나 냉전시대 연구소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말 못하는 여성 엘리사(샐리 호킨스), 그들 모두 약자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두 여성은 위험을 무릅쓰고 낯선 생명체를 구출한다.

 

물리적으로 보나, 사회적 위치로 보나 두 여성 인물은 모두 ‘을’에 가깝다. 딸아이의 죽음 이후 범인을 찾고 싶지만 사건은 일 년이 지나도록 흐지부지 해결될 기미가 없다. 옆집에 사는 이웃의 숟가락 개수도 헤아릴 만큼 작은 동네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인데도,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불행에 동정을 표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안됐다고 이야기할 뿐,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일을 벌인다. 마을 외곽에 버려진 광고판 세 개에 일 년치 광고비를 선납하고 메시지를 게재한 것이다. “죽어 가는 동안 강간당했다” “아무도 못 잡았다고?” “어떻게 된 거지, 윌러비 경찰서장?”라고 말이다. 동떨어져 있는 세 개의 입간판은 불연속적인 세 개의 낱말 카드와 같다. 상징적인 세 문장, 하지만 조용했던 마을은 이 문장들이 입간판에 쓰이는 순간부터 시끄러워진다.

 

역설적이게도 19살 소녀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강간당하고, 불태워졌을 때보다 세 개의 상징적 문장이 광고되자 마을이 더 시끄러워진다. 작고, 보수적인 마을의 남자들은 밀드레드를 설득하고, 회유하고, 협박한다.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어라, 그렇다고 죽은 딸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가만히 있어라, 경찰들도 열심히 일하고 있다. 가만히 있어라, 지금 경찰서장은 말기암에 걸려 죽어가는 중이다.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어라.

 

하지만 밀드레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또 다른 딸이, 소녀가 희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죽은 딸을 되살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딸들을 구하기 위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될까? 문제가 천천히 해결되는 게 아니라 잊혀질 뿐이다. 가만히, 조용히, 잊혀질 뿐이다. 영화 속 엄마의 말처럼, 가만히 있지 않은 그 며칠 동안 경찰은 일 년 동안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조사를 하고, 지역 언론은 몇 번이나 취재를 해간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엘리사가 듣는 말 역시 비슷하다. 소변을 보기 전에 손을 씻고 소변을 본 후엔 씻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기 신체 일부를 만지기 전에는 손을 씻지만 타인의 손을 잡기 전엔 손을 씻지 않는다. 그 신체 일부가 타인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 마초가 남미 어느 늪에서 잡아온 피조물을 고문하고 괴롭힌다. 그 피조물은 비록 우리와 생김새는 다르지만 의사소통도 되고 감정의 교류도 가능하다. 하지만 마초 관리자에게 그 피조물은 열등하고 이상한 물체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 관리자에게는 자신과 생김새가 다른 모든 게 다 열등하다는 사실이다. 흑인은 피부색이 다르니 열등하다. 여성은 피부색과 무관하게 우선 생물학적으로 다른 몸을 가졌으니 열등하다. 말을 하지 못하는 주인공 엘리사가 열등한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신이 자신의 모습과 똑같은 형상으로 인류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같은 형상’은 백인 남성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백인 남자가 가장 신에 가까운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금씩 결격 사유를 지닌 열등한 존재이다. 결함을 가진 이상 여자나 괴물이나 흑인이나 괴물이나 모두 다 똑같이 열등하다.

 

영화의 놀라운 힘은 무시받고, 협박받고, 천대받는 그들이 힘을 모을 때 발휘된다. 물속 피조물이나 말 못하는 여성이나 다 똑같이 열등하다면 적어도 그들 간에는 아무런 차이도, 차별도 없다. 엘리사가 연구소에서 피조물을 구출하려 할 때, 모든 사람들이 “가만히 있어라”라며 만류한다. 하지만 적어도 엘리사에게 그 피조물은 우리보다 열등한 생명체가 아니라 똑같은 생명체이다. 즉 그 피조물은 괴물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인 것이다.  똑같은 존재이니 사랑에 빠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함과 차별로 이뤄진 게 아니라 생명을 가졌다면 모두가 다 사랑할 수 있는 똑같은 존재인 셈이다.

 

힘을 가진 자들, 해결할 권력을 가진 자들은 말하곤 한다. 가만히 있어라. 그들은 을이, 피해자가, 힘없는 자가 가만히 있기를 바란다. 가만히 있으면 거슬리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생명을 가진 존재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은 죽은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더욱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 최근 점점 더 커져 가는 ‘미투’ 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가해자들은 지금 이 순간도 피해자들이 가만히 있기를 원한다. 아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있지 않는 것, 그건 힘없는 자들의 존재증명이자 권리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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